행궁 편전의 주차 3 行官便殿奏箚 三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 10월 4일 행궁평전에서 영종에게 올린 「행궁편전주차」 가운데 세 번째 글이다. 자신이 담주지사 겸 형호남로안무사로 재직하던 중에 파악했던 지방 행정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개선을 건의하고 있다.
저의 지난 번 직책은 담주지사[知潭州]였는데, 겸해서 형호남로안무사(荊湖南路安撫司)의 일을 맡았습니다. 살펴보면 본 노(路)의 토지는 척박하고 백성들은 가난해서 다른 살아갈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현의 회계는 수입은 적고 지출은 많은데다, 가끔씩 정상적인 부세 이외에 감가상각용의 부세를 관례적으로 많이 거두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돈으로 비싸게 환산을 하고, 거두워들이기만 하고 내어 쓰지는 않기 때문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과거에 여러 관청에서 그 폐단을 살펴보고 여러차례 면제하거나 경감해서 백성들의 형편을 펴게하려고 힘썼지만, 해마다 방면하는 것이 많지 않고, 주현에서 징발해서 조정으로 올려 보내고, 봉급으로 지출하는 갖가지 명목의 비용은 여전히 과거의 액수 그대로 인지라 줄어든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이로 인해서 관사들이 이미 낭패를 보고서 버텨내기가 힘든 실정입니다. 간혹 예외적인 포상으로 지급되거나 조정에서 마련해서 주현으로 내려보내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다시 여러 반열의 돌아온 귀정인[換授歸正]과 잡다하게 관에 보충된 사람들[雜流補官]들이 파견되어와 숫자가 증가하게 되면 더욱 (재정적인) 핍박을 받게 되어 계획을 세울 수 조차 없게 됩니다. 제가 요즘에 조신 하이(何異)와 함께 전주(全州)의 수신인 한막(韓邈)이 정원 외에 파견되는 관원의 수를 줄여달라고 보고한 내용을 가지고 주장을 썼으니 거기에서 한 가지 단서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주현의 경우에는 대략적으로 종종 이런 종류여서 관리들은 구차하게 목전의 일을 피하려고 여러 가지로 힘쓸 뿐이어서 나라와 후손들을 위한 계획에 눈 돌릴 겨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안찰하는 관리도 그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이런 지경에 이르러도 법대로 탄핵하고 다스리려 하지 않으니 적발할 방법이 없습니다.
臣前任備員潭州, 兼管荊湖南路安撫司事, 竊見本路土瘠民貧, 無他生理, 而州縣歲計入少出多, 往往例於常賦之外多收加耗, 重折價錢, 尙且入不支出, 公私俱困. 昨來諸司察見其弊, 累嘗蠲減, 務寬民力, 連年所放, 蓋已不貲, 而州縣起發上供․支遣俸給諸色費用尙仍舊額, 略無所損. 沿此官司已是狼狽, 不可支吾. 或有非泛賞給, 調發支賜, 若更差到諸班換授歸正․雜流補官之人復有增加, 則愈見逼迫, 無以爲計. 臣近者嘗與漕臣何異備奏全州守臣韓邈所申乞減添羞員數, 可見一端. 至於其他州縣, 大略往往類此, 不唯官吏苟逭目前, 多方趣辦, 不暇爲(2-550)國家赤子計, 而按察之官知其甚不得已, 以至於此亦不忍盡法按治, 無由發覺.
생각해보면 본 로는 동으로 조정을 바라보고서 멀리 2000리나 바깥에 있습니다. 북으로는 거듭된 호수를 근거지로 삼고 있고, 남으로는 여러 산을 끼고 있어서 형세상 다른 도와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만일 백성들이 가난해서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무리를 이루어 스스로 소요와 난리를 일으키게 되고, 도적들인 오랑캐 요족과 서로 연합해서 봉기하게 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의신들은 어떻게 대처하려는 것입니까? 제가 임지에 도착해서 떠날 때까지 겨우 석 달이라 비록 그 곡적을 깊숙하고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 큰 형세는 이와 같으니, 지혜로운 사람이 있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찍이 속으로 깊이 걱정하면서 나름대로 처리코자 했으나 갚자기 소환을 당하게 되어 자세하게 묻고 따져 항목별로 주장을 갖추어 아뢸 겨를이 없습니다.
竊念本路東望朝廷, 遠在二千餘里之外, 而北據重湖, 南撫諸峒, 形勢所關, 亦非他道之比. 萬一民貧, 不堪誅剝, 一旦屯結, 自爲擾亂, 而盜賊蠻猺相挺而起, 則不知議者何以處之? 臣自到任以至去官, 僅及三月, 雖未及詳密究其曲折, 然其大勢如此, 亦不待智考而後知矣. 故嘗深以爲憂, 欲爲料理, 但以召還之遮, 未暇子細詢考, 晝一奏聞.
그런데 지금 폐하를 뵙게 되었으니 또 감히 폐하를 위해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살피시고, 어진 마음으로 공평하게 굽어보시고 특별히 본로의 수신과 감사에게 조칙을 내려 다시 지난날 전주에서 올려보낸 일을 여러 군에 알리게 하고, 아울러 조정을 시행토록 하며, 크게 부족한 지역에 대해서는 특별히 크게 경감을 허락하십시오, 또 지정해서 주장으로 보고하고, 성지를 얻어 아래에 행하면 거의 주에서는 그 현을 구휼할 수 있고, 현에서는 백성들을 넉넉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간혹 조칙을 받들지 않는 자들은 또 변명을 하면서 그 죄를 회피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원근의 백성들이 고르게 실질적인 은혜를 입게 되어 넉넉하고 큰 은혜가 장벽에 걸린 문자에만 그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관직을 받들고서도 선한 행적도 없고 속히 아뢰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죽더라도 남은 죄가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용서해 주시고 속히 도모하신다면 한 로의 백성들에게 큰 다행일 것입니다. 가려서 선택하십시오.
今者旣蒙賜對, 又不敢不爲陛下一言. 欲望聖慈深察, 一視同仁, 特詔本路帥臣監司更以前日全州所申事理通之諸郡, 幷行均節, 將大段闕乏去處特與痛加退減, 指定奏聞, 取旨行下, 庶幾州得以恤其縣, 縣得以寬其民. 而其間或有不奉詔者, 亦且無詞以逃其罪. 則遐遠之民均被實惠, 而寬大之恩不但爲掛牆壁之具而已. 臣奉使亡狀, 不早上聞, 以至今日, 死有餘罪. 伏惟矜赦而亟圖之, 則一路幸甚. 取進止.
행궁 편전의 주차 4 (2-551)行宮便殿奏箚 四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 10월 4일 행궁평전에서 영종에게 올린 「행궁편전주차」 가운데 네 번째 글이다.
저는 작년 겨울에 성은을 입어 담주지사에 제수되었습니다. 사면장을 써서 채 붙이지 못했는데 호복의 요족들이 소주의 경계를 침범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금년 봄이 되어 천자의 어지를 받게 되었는데, 사면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기에 저는 드디어 그날로 길에 올랐습니다. 최근 임지에 도착해보니 호북지방에서는 이미 병력을 내보내 토벌 공격을 해서 적들의 기세가 점점 쇠약해졌고, 마침내 나아가서 항복하라고 불러내 점차 편안해졌습니다. 오히려 소주의 수신 반도(潘燾)가 보고한 것에 의하면 종전에는 변방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없어서 소수의 오랑캐들이 멋대로 침범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성채를 옮겨 설치하고, 수비경을 증가해서 추가하는 이해 관계에 대한 몇몇 조항을 계획해서 올렸습니다. 저는 조신 하이와 함께 반도가 보고한 내용이 자못 조리가 있다는 것을 상세하게 사피고, 드디어 물어 구하라고 하달하고 확실하고 마땅한 조치를 찾아서 드디어 주장에 써서 시행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생각건대 이미 천자께서도 들으셨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천자께서 분명하게 대신에게 조칙을 내리셔서 속히 처분해 주셔서 하이 반도가 임직에 있는 동안에 원래 아뢰었던 내용에 의거해서 그날로 조치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제형 조불우는 앞서서 주장을 올렸는데 또한 저희들이 빌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함께 차자로 내려보내셔서 서로 함께 의논해서 장점을 좇아 처리하게 하시면 관리와 간사한 적들이 두려워하게 되고, 변방의 백성들은 생업이 편안케 되어 진실로 한 지역의 영원한 이익일 것입니다. 가려서 선택하십시오.
臣昨於去冬伏蒙聖恩, 除知潭州, 方具辭免, 末及起發, 卽聞湖北猺人侵犯邵州界分. 及今年春伏奉聖旨, 不許辭免, 臣遂卽日就道. 比及到官, 湖北已行進兵攻討, 賊氣漸衰, 遂就招降, 一向寧帖. 却據邵州守臣潘燾申到, 見得從前邊防全無措置. 以致小醜敢肆侵犯. 因條畫到移置寨柵․增撥戍兵利害數條, 臣與漕臣何異詳燾所申頗有條理, 遂行詢究, 見得委的合行措置, 遂已具奏, 乞賜施行, 竊計已徹天聽. 欲望聖慈明詔大臣, 早賜處分, 及何異․潘燾在任之日, 依元所申日下措置. 其提刑趙不迂先次申奏, 亦與臣等所乞無大異同, 欲乞幷行箚下, 公共相度, 從長區處, 庶使姦賊畏威, 邊民安業, 實一方永遠之利. 取進止.
[첩황] 제가 지난 번에 불러낸 요적 포래시(蒲來矢) 등은 이미 안무사에게 알려 공참(公參)하게 했습니다. 그 사람은 쇠약해서 애초부터 이해하지도 못하고 다만 지세의 험준함만을 믿고 감히 날뛰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미 항복했으니 사리에 비추어 목숨을 보존해주고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천자께서는 본사에게 명을 내려 항상 간절하게 살피면서 큰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신다면 훗날에도 다시 이런 무리들이 있더라도 쉽사리 불러서 항복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지를 기다립니다.
(貼黃)臣昨招到猺賊蒲來矢等, 已赴安撫司公參. 其人衰弱, 初無能解, 但恃險阻, 敢爾跳梁. 今已伏降, 則於事理不得不加存卹. 欲乞聖慈行下本司常切照管, 毋失大信, 庶幾異日復有此輩, 易以招納. 伏候聖旨.
행궁 편전의 주차 5 (2-552)行宮便殿奏箚 五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 10월 4일 행궁평전에서 영종에게 올린 「행궁편전주차」 가운데 다섯 번째 글이다. 금나라의 기병에 의해 파괴된 담주의 성벽을 개축하는 일을 논하고 있다.
제가 살펴보니 담주(潭州)의 성벽은 지난 번 오랑캐의 기병이 파괴한 이후로 벗겨지고 무너진지 50여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년에 수신인 주필대(周必大: 1128~1204)가 석축의 보수를 논의하여 이미 조정에서 도첩(度牒) 100도를 하사했고, 이를 판 값이 8만관에 이른다고는 하지만, 채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주필대는 사록관을 명받고 집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제가 부임한 초기에 곧장 점검해 보았더니 그 돈 가운데 이미 6만여관을 지출해서 벽돌과 회를 사버렸고, 지금 남아있는 돈은 얼마되지 않아 기술자를 고용하고 군졸들을 먹이는 비용으로도 부족합니다. 또 애초에 예상했던 것은 단지 본 주의 여러 군병을 모아다 쓰려는 것이었지만 (군병이래야) 다 합쳐도 3000여명에 불과하니 오래도록 힘든 노역에 시달리면 견디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그리고 성은 넓고 군데군데 텅 비어 백성들이 살지 않는 곳이 많으니 이 모두를 고친다고 하더라도 또한 쓸데 없이 힘과 노력만 낭비하는 꼴입니다. 처음에는 계획을 잘세워 7월 하순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우연히 작은 가뭄을 만났고, 이어서 장마가 들었고, 또 나라에 슬픈 일이 생겨 인정이 흉흉해져 (공사를 계속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일을 일으키는 데에는 단서가 있고, 이미 벽돌과 회를 사면서 들어간 돈이 많으니 만일 타성에 젖은 채로 그만두고 버려둔다면 또한 아까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위로 오르시고서 사면을 시행한 다음에 형편이 조금 안정되면 따로 관리에게 맡겨 다시 계산해서 성의 북쪽 일대에 황폐한 지역은 잘 헤아려 덜어내엇 안쪽에다 따로 쌓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현재 들어갈 힘과 노력도 쉽게 조달할 수 있을 것이요, 장래에 만일 예측하지 못한 일이 있더라도 쉽사리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자세히 계획하지도 못했는데 제가 갑자기 성은을 받들게 되었고 소명으로 시사를 아뢰라고 했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새로 임명된 수신은 일의 전모를 아지 못할 것이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명을 내려 자세히 헤아리도록 하십시오. 만일 제가 망령되게 의논한 것이 시행할만 하시거든 바라건대 어지로 다시 도첩을 내리고 군민을 불러모아 북쪽을 덜어내는 일을 재촉해서 가까운 안쪽을 고치고, 이런 좋은 시절을 틈 타 날을 골라 공사를 시작한다면 또한 한 지역이 영구적인 근심을 더는 대비가 될 것입니다. 가려서 선택하십시오.
臣伏見潭州城壁昨因虜騎殘破之後, 剝落摧圮, 五十餘年, 不曾修築. 近者守臣周必大方議補砌, 已蒙朝廷支降度牒一百道, 賣到錢八萬貫, 未及興工, 而必大奉祠就第. 臣到任之初, 卽行點檢, 其錢已支六萬餘貫買到磚灰, 見在餘錢不多, 不足爲雇工犒設之費. 又元料只擬用本州諸色軍兵, 共不過三千餘人, 竊蘆不堪久役勞苦. 而其城廣闊, 中間多有空閑無民居處, 若盡修築, 亦無所用, 枉費工力. 初已剋定, 七月下旬起工, 而偶値小旱, 繼以霖雨, 旋遭國哀, 人情흉흉, 未敢容易. 然念興作有緖, 所買磚灰費錢已多, 若遂因循, 便成廢棄, 亦又可惜. 故自登極赦後, 事勢稍定, 卽別委官再行計度, 擬將其城北面一帶荒逈去處量加裁減, 向(2-553)裏別築. 蓋如此則不唯目今工力易辦, 將來萬一不測有警, 亦易防守. 但未及子細條晝, 而臣忽奉聖恩, 召令奏事. 竊恐新任守臣未知始末, 欲望聖慈行下, 詳審訃度. 如臣妄議有可施行, 卽乞睿旨再給度牒, 雜募軍民, 促減北邊, 近裏修築, 乘此樂歲, 擇日興工, 亦爲一方永久不虞之備. 取進止.
덕을 닦으라고 청하는 차자 乞進德箚子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 윤10월 4일 조청랑(朝請郞)․환장각대제 겸시강 ․겸실록원동수찬의 신분으로 영종에게 올린 차자이다.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주나라 무왕은 “오직 천지는 만물의 부모요,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니, 진실로 총명한 자가 원후(元后)가 되고, 원후는 백성의 부모가 된다”고 했고, 맹자는 또 “요순은 본성대로 하셨고, 탕무는 본성으로 돌이키셨다”고 했습니다. 이 두 마디 말로 인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위대한 천지는 모든 것을 낳고 길러주니 진실로 만물의 부모입니다. 사람은 그 사이에서 유독 기의 올바른 것을 얻어서 능히 그 성의 전체를 보존하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됩니다. 원후와 같은 사람은 인류 중에서 또 홀로 그 올바른 기의 성대함을 얻어 능히 그 전체적인 성의 뛰어난 것을 보전한 사람입니다. 이 때문에 능히 천하의 총명을 극하고, 인류의 위로 솟아 모자처럼 덮어주며 자식처럼 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백성의 부모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성현으로부터 보자면 제요․대순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헤로운 분들로서, 편안하게 실천하고서도 능히 이 위치를 딛고 이 책임을 담당하면서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성탕․무왕은 총명한 자질이 이미 요순의 완전함만 못했습니다. 오직 능히 배워서 지혜로와 졌고, 이로움을 능히 하여 실천했고, 선을 택하여 굳게 붙잡을 수 있었으며, 자기를 이기고 예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까닭으로 덕성과 총명의 전체를 회복할 수 있었고, 결국에는 또 요순의 영역을 창조할 수 있어서 억조 백성들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타고난 자질이 비록 미치지 못했지만 그 돌이킴이 지극해져서는 결국 같아졌습니다. 공자가 말한 ‘그 공을 이룸에 미쳐서는 한 가지였다’는 말은 바로 이를 일컫는 것입니다.
臣竊聞周武王之言曰: ‘惟天地萬物父母, 惟人萬物之靈, 亶聰明, 作元后. 元后作民父母.’ 而孟子又曰: ‘堯舜性之, 湯武反之.’ 蓋嘗因此二說而深思之. 天地之大, 無不生育, 固爲萬物之父母矣. 人於其間又獨得其氣之正而能保其性之全, 故爲萬物之靈. 若元后者, 則於人類之中又獨得其正氣之盛而能保其全性之尤者, 是以能極天下之聰明而出乎人類之上, 以覆冒而子蓄之. 是則所謂作民父母者也. 然以自古聖賢觀之, 惟帝堯․大舜生而知之, 安而行之, 爲能履此位․當此責而無愧. 若成湯․武王, 則其聰明之質固已不能如堯舜之全矣, 惟其能學而知, 能利而行, 能擇善而固執, 能克己而復禮, 是以有以復其德性聰明之全體, 而卒亦造(2-554)夫堯舜之域, 以爲億兆之父母. 蓋其生質雖若不及, 而其反之之至則未嘗不同. 孔子所謂及其成功一也, 正此之謂也.
황제폐하의 총명한 자질은 하늘에서 본성으로 타고난 것으로 진실로 보통 사람이 능히 엿보고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깊은 궁궐에서 나고 자랐고, 春秋方富 저는 농사일의 어려움에 대해 다 아지 못하고, 사람들의 실정과 거짓에 대해 다 아지 못하며, 국가의 헌장제도에 대해서도 다 배우지 못하셨을까 걱정됩니다. 도를 배우고 몸을 닦으며, 뜻을 세우고 일을 헤아리는 근본과, 세속을 제어하며, 호령을 시달하는 요체에 대해서도 또한 강론한 다음에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폐하께서 정말로 여기에 대해 깊이 유의하신다면 일상 생활의 크고 작은 활동에서 반드시 놓친 바음을 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경전과 역사서를 보고 의미를 되새기며, 유학자를 가까이 두시고 친하게 지내면서 이미 힘썼던 곳에 더욱 힘을 쓰시고, 자주 대신들에게 소명을 내려 간절히 치도에 힘쓰게 하고, 그들에게 오늘날의 중요한 급선무를 진달하게 하기를, 인조(仁祖)께서 천장각(天章閣)을 열었던 고사처럼 하십시오. 또 여러 신하들이 나아와 일을 아뢸 때는 또 온화한 얼굴로 대하시면서 반복해서 물으시면서 정사의 득실과 백성들의 실상의 휴척을 구하십시오. 또 이로 인하여 인재의 사정과 장단을 살피시면, 천하의 일에 대해 거의 각각 그 이치를 얻을 것입니다. 경력이 자세하고 극진해지고, 물이 스미듯이 관통하며, 총명함이 날로 열리고, 지기가 날로 강해지며, 덕성이 날로 전파되고, 다스림의 효과가 날로 드러나면 온 세상에서 우러러보며 외경하고 사랑하기를 마치 친부모처럼 할 것이니, 이것이 돌이킴의 지극함이요, 요․순․탕․무의 융성함 역시 이러한 데 불과했습니다. 망령되이 스스로를 비박하다고 여기고 타성에 젖어 구차하기만 하면서 다시 옛 성현들로 스스로를 기약하지 않는 것은 마땅치 않을 것입니다.
恭唯皇帝陛下聰明之質性之於天, 固非常情所能窺度. 然而生長深宮, 春秋方富, 臣恐稼穡艱難, 容有未盡知 : 人之情僞, 容有未盡察 : 國家憲度, 容有未盡習. 至於學道脩身․立志揆事之本, 制世御俗․發號施令之要, 亦容有未能無待於講而後明者. 故竊以爲陛下誠能於此深留聖意, 日用之間, 語黙動靜必求放心, 以爲之本, 而於玩經觀史․親近儒學已用力處益用力焉, 數召大臣切劘治道, 俾陳今日要急之務, 略如仁祖開天章閣故事, 至於羣臣進對, 亦賜溫顔, 反復詢訪, 以求政事之得失, 民情之休戚, 而又因以察其人材之邪正短長, 庶於天下之事各得其理. 經歷詳盡, 浹洽貫通, 聰明日開, 志氣日彊, 德馨日聞, 治效日著, 四海之內瞻仰畏愛, 如親父母, 則是反之之至, 而堯․舜․湯武之盛不過如此. 不宜妄自菲薄, 因循苟且, 而不復以古之賢聖自期也.
저는 본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이고, 게다가 노환으로 인해 쓸모없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어서 궁핍한 생활을 타고난 분수처럼 달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부르는 소명이 엄준하다는 것만을 이유로 모매함을 무릎쓰고 조정에 나온다면 눈과 귀, 뼈와 근육이 모두 정사에 힘쓰기에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감히 돌아가겠다고 청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도타웁게 돌아봐 주신 것에 감동해서, 오히려 잠깐이라도 참아가면서 폐하의 성지가 확립되고, 성학이 이루어져 다른 날에 간언과 사설이 침범하고 어지럽히지 못하게 되는 것이 정말로 이전에 기약했던 대로 이루어진 다음에 물러가기를 청하면 위로는 천자를 아래로는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게 되어 임금과 신하도 모두 영화롭게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이 일은 저로서는 말할 수 있을 뿐 힘쓰시는 것은 폐하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만일 노년이 사람을 다구치느라 머무를 수 없게 된다면, 이런 뜻을 품에 안고 耿耿 사적으로는 한없이 한스러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천자께서는 저의 이런 뜻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의 말을 살피셔서 몸과 마음을 독려하시고, 진덕수업에 힘쓰셔서 제가 속히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해주신다면 비록 오늘 당장 죽더라도 유감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를 모독하게 되어 저는 가슴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가려서 선택하십시오.
臣本迂儒, 加以老病, 自知無用, 分甘窮寂. 今者徒以趣召之峻, 冒昧而來, 耳目筯骸, 皆難勉彊. 然而未敢遽以告歸爲請者, 誠感眷遇之厚, 猶欲少忍須臾, 以俟陛下聖志之立, 聖學之成, 決知異日姦言邪說不能侵亂, 果如前所期者, 然後(2-555)乞身以去, 則爲上不負天子, 下不負所學, 而臣主俱榮矣. 顧以此事在臣但能言之, 而其用力則在陛下. 萬一暮景迫人, 不容宿留, 則抱此耿耿, 私恨無窮. 伏望聖慈憐臣此志, 察臣此言, 策厲身心, 勉進德業, 使臣蚤得遂其所願, 則雖夕死, 暝目無憾矣. 冒瀆宸聽, 臣無任悃款激切之至. 取進止.
[첩황] 저는 중용에서 “다른 사람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해야 한다. 만일 이 도에 능해지면 비록 어리석지만 반드시 밝아지고 비록 유약하지만 반드시 강해진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원우 년간의 관직이었던 여대림은 “군자가 배우는 이유는 기질을 변화시키려는 것일 뿐이다. 덕이 기질을 능가하면 어리석은 자도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유약한 자도 강한 데로 나아갈 수 있다. 덕이 기질을 이기지 못하면 비록 배움에 뜻을 두더라도 어리석은 자가 밝아 질 수 없고, 유약한 자도 강해질 수 없게 될 뿐이다. 고르게 선하고 악이 없는 것은 본성이요 사람마다 똑 같은 것이다. 혼명과 강약의 품수가 고르지 못한 것은 재능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정성스러워 지려는 것[誠之]은 그 같음으로 돌이켜 그 다름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좋지 못한 자질을 변화시켜 좋게 만들려면 백 배나 되는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오늘날 지리멸렬한 학문으로 혹은 짓고, 혹은 철하면서 좋지 못한 자질을 변화시키려 하면서, 능히 변화시키지 못하면 ‘타고난 자질이 좋지 않은 것은 학문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신을 포기하는데 과감한 것이니, 너무나 어질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젊었을 적에 글을 읽다가 우연히 이 말을 보고서 깊이 반성을 하고, 분발 강개해서 스스로 그만두지 않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학문을 하는 데 조그마한 진보가 있었습니다. 농부가 미나리를 맛난 음식이라고 올렸던 것처럼 (좋은 말이라 여겨) 감히 올립니다. 바라건대 천자께서 살펴주십시오.
(貼黃) 臣聞中庸有言: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果能此道, 雖愚必明, 雖柔必彊.’ 而元祐館職呂大臨爲之說曰: ‘君子所以學者, 爲能變化氣質而已. 德勝氣質, 則愚者可進於明, 柔者可進於彊. 不能勝之, 則雖有志於學, 亦愚不能明, 柔不能彊而已矣. 蓋均善而無惡者, 性也, 人所同也. 昏明彊弱之禀不齊者, 才也, 人所異也. 誠之者, 所以反其同而變其異也. 夫以不美之質求變而美, 非百倍其功, 不足以致之. 今以鹵莽滅裂之學, 或作或輟, 以求變其不美之質, 及不能變, 則曰天質不美, 非學所能變, 是果於自棄, 其爲不仁甚矣.’ 臣少時讀書, 偶於此語深有省焉, 奮厲感慨, 不能自已. 自此爲學, 方有寸進. 食芹而美, 敢以爲獻, 伏乞聖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