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인년 행궁 편전의 주차 1 申寅行官便殿奏箚 一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 10월 4일 행궁편전에 입대해서 영종을 만나 올린 「행궁편전주차」 가운데 첫 번째 글이다. 이 해 7월 5일 영종은 광종에게 제위를 물려받아 즉위하는데, 11일에 조여우는 당시 비각수찬․담주지사였던 주희와 진부량 두 사람을 영종에게 천거해서 임안으로 와서 시사를 아뢰도록 했다. 이어서 주자는 8월 5일 환장각대제 겸시강을 제수받았다. 10월에 영종을 만날 당시에 주자는 몇 차례에 걸쳐 새로운 관직을 사양을 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영종의 재위는 조여우와 한탁주 등이 효종의 부인이었던 태황후 오씨를 설득해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선양이라고 보기는 곤란했다. 이 때문에 영종은 광종과의 사이가 불편했고, 조정 안팎에서도 의심하는 분위기가 상당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영종에게 정치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주자는 이 글에서 ‘상도’와 ‘권도’를 대비시키면서 권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권도를 행하면서도 상도의 올바름을 잃지 않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역설하고 있다. 첫째는 광종과의 소원한 관계를 회복할 것, 둘째는 공평무사한 마음가짐을 기반으로 공정한 정치를 시행할 것을 말하고 있다.
저는 세상의 일에는 변하지 않는 것[常]과 변하는 것[變]이 있어서 일에 대처하는 방법에도 원칙[經]과 변칙[權]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이 지위가 정해져서 바뀌지 않은 것은 세상의 일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임금은 명령하고 신하는 실행하며, 아비는 물려주고 자식은 이어받는 것은 도의 원칙입니다. 일이 잘못되어 변하지 않는 그 상태 그대로일 수 없게 되면 변했다[變]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 역시 늘 원칙대로만 할 수 없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변칙[權]이라고 합니다. 변치 않는 일을 만나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은 성현조차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보통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변화하는 일을 만나 변칙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오직 위대한 성현들만이 그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함께 설 수는 있어서 함께 권도[權]를 행할 수는 없다”고 했으니, 이처럼 어려움을 말한 것입니다. 백이와 숙제, 계찰(季札) 등이 천승(千乘)의 나라를 가벼이 여기고 내 마음에 편한 것을 추구하며, 그 몸을 해치고, 그 나라를 잃으면서도 감히 자신의 절개를 잃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이것을 위해서였습니다.
臣竊聞之, 天下之事有常有變, 而其所以處事之術有經有權. 君臣父子, 定位不易, 事之常也 : 君令臣行, 父傳子繼, 道之經也. 事有不幸而至於不得盡如其常, 則謂之變, 而所以處之之術不得全出於經矣, 是則所謂權也. 當事之常而守其經, 雖聖賢不外乎此, 而衆人亦可能焉. 至於遭事之變而處之以權, 則唯大聖大賢爲能不失其正, 而非衆人之所及也. 故孔子曰: ‘可與立, 未可與權.’ 蓋言其難如此. 而夷․齊․季札之徒所以輕千乘之國以求卽乎吾心之所安寧, 隕其身․亡其國而不敢失其區區之節者, 亦爲此也.
지금은 하늘의 운행이 꾸짖고 질책하며 나라에는 큰 근심꺼리가 있습니다. 하늘의 변화는 위에서 나타나고 땅의 변화는 아래에서 일어나서 사람들은 슬퍼하고 답답해하며 모두들 흩어지고 배반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종묘사직이 면류관 끝에 매달린 술[綴旒]에서 위태로우니, 이것은 천하의 커다란 변화[大變]로서 불변의 이치[常理]로 처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태황태후(太皇太后)께서 몸소 큰 계획을 정하시고, 황제폐하께서는 공손히 그 계획을 이어받으셨습니다. 미처 호령을 내리기 전, 잠깐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향리에서 위태로운 자는 편안해졌고, 흩어진 자들은 합쳤으며, 천하의 형세는 화합하듯이 크게 안정되었습니다. 이것은 변칙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시면서도 그 올바름을 잃지 않았다고 말 할만 합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또 석 달여인데 하늘의 이변은 모두 사라지지 않았고, 땅의 이변도 멈추지 않았으며, 어버이의 마음에도 채 기뻐하지 않는 것이 있고, 학사와 대부, 모든 백성들 가운데는 도리어 일의 순서나 명분과 실상이 어긋나지 않았는지 의심하는 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재앙과 난리의 뿌리도 이미 어둡고 깊은 곳에 숨어있다가, 때를 만나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乃者天運艱難, 國有大咎, 天變爲之見於上, 地變爲之作於下, 人情爲之哀恫怫鬱而皆有離叛散亂之心. 方此之時, 宗廟社稷危於綴旒, 是則所謂天下之大(2-544)變而不可以常理處焉者也. 是以太皇太后躬定大策, 皇帝陛下寅紹丕圖, 未及號令之間, 不越須臾之頃, 而鄕之危者安, 離者合, 天下之勢翕然而大定. 此亦可謂處之以權而庶幾乎有以不失其正者矣. 然自頃至今, 亦旣三月, 而天變未盡消, 地變未盡弭, 君親之心未盡懽, 學士大夫․羣黎百姓或反不能無疑於逆順名實之際. 至於禍亂之本, 又已伏於冥冥之中, 特待時而發耳.
저는 너무 어리석어 폐하를 위해 근심하기는 하지만, 어떤 계책을 내놓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생각하면서 배운 것을 참조해 보았더니, 오히려 이런 변명꺼리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폐하의 마음은 지난날에는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계획이 없었고, 오늘날에는 어버이를 섬기려는 마음가짐을 잊어본 적이 없을 뿐입니다.’ 아! 이것이 바로 도심의 미묘한 전체이고, 천리가 발용하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니, 이 때문에 권도를 행하고도 그 올바름의 근본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 마음에 즉하여 채워나간다면, 이것이 바로 공자가 ‘인을 추구해서 인을 얻었으니 원망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요, 맹자가 ‘종신토록 흔쾌히 기뻐하며 천하를 잊는다’고 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이 폐하께 어렵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천명과 천하[神器]는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종묘와 사직은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변명하시더라도, 또한 화를 복으로 바꾸고,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려 한다면 어떻게 이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내게 제위를 탐내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마음가짐을 채워나가면 스스로 죄와 허물을 담당하겠다는 정성을 극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버이를 잊은 적이 없었던 마음을 채워간다면 잠자리를 살핀다거나,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여쭙는 예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큰 윤리는 바로잡을 수 있고 큰 근본은 확립할 수 있게 됩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아가면서, 깊이 스스로를 억누르시며 스스로의 처신을 항상 예전 제위에 계시지 않았을 때처럼 하십시오. 안으로는 스스로 궁궐 안에서서의 개인적인 봉양과 음식과 의복, 그릇과 일용품 등의 필수품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옛날 잠저에 있을 때보다 더하지 마십시오. 밖으로는 모든 관료들이 조회하고 바치는 물건과 의례를 누리는 것에서부터 황제로써 은혜를 베풀고 물건을 나누어 주는 예식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라도 만승의 존엄함을 다 누리지 마십시오. 오로지 자신의 정성스런 뜻을 쌓는데에만 힘쓰고 어버이의 마음을 바로잡기를 기약하시고, 그 다음에 덕음(德音)을 내셔서 통렬하게 스스로를 책망하고, 익위를 엄하게 신칙하사, 더욱 문안과 시선의 행실을 공경히 하시면서, 열흘에 한 번 들어 뵙지 못하거든 5일에 한 번 들르시고, 5일에 한 번 들러 뵙지 못하거든 3일에 한 번 들르시며, 3일에도 뵙지 못하거든 이틀에 한 번 들르시고, 심지어는 하루라도 가지 않는 날이 없도록 하십시오. 침문에 엎드려 원망하듯 사모하듯 부르짓고 우시고, 비록 수고롭고 욕되어 거리끼지 않으시는데 어버이의 마음이 오히려 아직 기뻐하지 않고, 자애로움이 아직 처음처럼 회복되지 않으며, 순역과 명실의 의심이 얼음 녹듯이 풀리지 않는 것을 저로서는 믿을 수 없습니다.
臣雖至愚, 亦知竊爲陛下憂之, 而未知其計之所出, 故嘗反覆以思而參以所聞, 則尙猶有可諉者, 亦曰陛下之心前日未嘗有求位之計, 今日未嘗忘思觀之懷而已爾. 鳴呼! 此則所謂道心微妙之全體, 天理發用之本然, 而所以行權而不失其正之根本也. 誠卽是心以充之, 則孔子所謂求仁得仁而無怨, 孟子所謂終身訢然, 樂而忘天下者, 臣有以知陛下之不難矣. 借曰天命神器不可以無傳, 宗廟社稷不可以無奉, 則轉禍爲福, 易危爲安, 亦豈可以舍此而他求哉? 充吾未嘗求位之心, 則可以盡吾負罪引慝之誠 : 充吾未嘗忘親之心, 則可以致吾溫淸定省之禮, 始終不越乎此, 而大倫可正, 大本可立矣. 陛下誠能動心忍性, 深自抑損, 所以自處常如前日未嘗有位之時, 內自宮掖燕私之奉, 服食器用之須, 不敢一毫有所加於潛邸之舊, 外至百辟多儀之享, 恩澤匪頒之式, 不敢一旦而全享乎萬乘之尊, 專務積其誠意, 期以(2-545)格乎親心, 然後濬發德音, 痛自克責, 嚴筋羽衛, 益勤問安視膳之行, 十日一至而不得見則繼以五日, 五日一至而不得見則繼以三日, 三日而不得見則二日而一至, 以至于無一日而不一至焉, 俯伏寢門, 怨慕號泣, 雜勞且辱, 有所不憚, 然而親心猶未底豫, 慈愛猶未復初, 逆順名實之疑不渙然而冰釋, 則臣不信也.
저 재이의 이변과 화란의 기미 같은 것이 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또 폐하께서 마음을 한데 모으고 행실을 삼가는데 달려있습니다. 더욱 앞선 시대를 살피시고, 날마다 대신들과 정사의 이치를 강구하시며, 가부간에 모두 고르게 하시고 오직 올바름만을 좇으십시오. 반드시 호령의 하달이 어느 것 하나 조정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게 하시고, 인재를 나아가고 물러나게 하면서 공론에 합치하지 않음이 없게 하시며, 치우치게 들으시고 사문을 열지 않으신다면 성덕은 날로 새로워질 것이요, 융성한 정치는 날마다 일어날 것이며, 하늘과 사람의 호응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의 씨앗도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若夫災異之變․禍亂之幾有未盡去, 則又在乎陛下凝神恭黙, 深監古先, 日與大臣講求政理, 可否相濟, 惟是之從, 必使發號施令無一不出乎朝廷, 進退人材無一不合乎公論, 不爲偏聽以啓私門, 則聖德日新, 聖治日起, 而天人之應不得違, 釁孽之萌不得作矣.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깊이 뜻을 기울이고 빨리 도모하십시오. 다시 예전처럼 타성에 빠져 하루하루 날만 보내면서 권도를 행하는 것 조차 올바름을 잃게 되면, 다가올 재앙과 이변은 예악이 흥기하지 않는다거나 형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인심은 잃기 쉽고 천명은 보전하기 어렵습니다. 그 교훈이 멀지 않으니 깊이 두려운 일입니다. 산간의 어리석은 제가 꺼리거나 기피할 줄도 몰라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오직 폐하께서 관대하게 보아 주십시오. 가려서 선택하십시오.
今日之計, 莫大於此, 惟陛下深留聖意而亟圖之. 若復因循, 日復一日, 所以行權者遂失其正, 則臣恐禍變之來, 不但禮樂不興, 刑罰不中而已也. 人心易離, 天命難保, 厥監不遠, 深可畏懼. 臣山野戇愚, 不識忌諱, 罪當萬死, 惟陛下寬之. 取進止.
행궁 편전의 주차 2 (2-546)行宮便殿奏箚 二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 10월 4일 행궁평전에서 영종에게 올린 「행궁편전주차」 가운데 두 번째 글이다. 이 글에서 주자는 첫째, 영종에게 사장 위주의 관리 선발이 아닌 경학 위주의 관리 선발을 권하고 있다. 둘째, 학문의 보편적 의의를 긍정한 다음 공경함을 유지한채로[居敬] 의지를 다잡는[持志] 마음 가짐에서 출발해서, 정치한 독서를 통해 이치를 탐구하는[窮理] 구체적인 순서로 학문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는 황제폐하께서 공손히 위대한 천명[駿命]에 호응해서, 공경하며 제위[寶圖]에 오르셨으니 즉위하신 초기에 다른 일은 돌 볼 겨를이 없더라도 널리 유신(儒臣)들은 모아 경전과 육예[經藝]를 토론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상서에서 말하는) ‘견문이 넓은 사람을 구해서 일을 세우고 옛 가르침을 배워서 얻는 것’이 경문이나 외우고 따지는 어리석은 유자들의 글줄이나 짓는 재주만 못하다고 여기는 것은 많이 안다고 자랑하는 것을 박식하다고 여기고, 화려하게 글이나 꾸미는 것을 기교가 뛰어나다고 여기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선발되어야 할 권면하고 강론하는 관리들은 도리어 선택받지 못하고 쓸모없는 자들이 발탁되는데, 저는 이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타고난 자질이 어리석고 모자라서 일찍부터 책을 끼고 글을 읽으면서 망령되게도 성현들이 남기신 뜻을 추구했지만, 실천한 힘도 없었고 늙도록 제대로 배운 것도 없습니다. 제왕의 학문에 대해서 본시 강론할 것도 없는데 어떻게 발탁해주신 총애를 감당할 것이며, 어떻게 폐하께서 돌아보고 물으시는 근심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명을 듣자 마자 놀랍고 두려워 감히 조칙을 받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전에 이렇게 들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이 인의예지의 성을 부여하고 군신 부자의 윤리를 펴고, 사물의 당연한 법칙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질에 치우침이 있고, 물욕에 가리움이 있기 때문에 그 성에 어두어 윤리를 어지럽히고, 그 법칙에 어긋나면서도 돌이킬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반드시 배움으로써 열어젓힌 다음에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닦아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배우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고, 배우려는 이유는 처음부터 암송이나 사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성현과 바보,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제가 일찍이 힘썼던 것 속에는 진실로 폐하를 위해 말씀드릴 만한 것들이 있으니, 청컨대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臣竊惟皇帝陛下祗膺駿命, 恭御寶圖, 正位之初, 末遑它事, 而首以博延儒臣, 討論經藝爲急先之務, 蓋將求多聞以建事, 學古訓而有獲, 非若記問愚儒詞章小技, 誇多以爲博, 鬪靡以爲工而已也. 如是則勸講之官所宜遴選, 顧乃不擇, 誤及妄庸, 則臣竊以爲過矣. 蓋臣天資至愚極陋, 雖嘗挾策讀書, 妄以求聖賢之遺旨, 而行之不力, 老矣無聞, 况於帝王之學, 則固未之講也, 其何以當擢任之寵而辱顧問之勤乎? 是以聞命驚惶, 不敢奉詔. 然嘗聞之, 人之有是生也, 天固與之以仁義禮智之性, 而敍其君臣父子之倫, 制其事物當然之則矣, 以其氣質之有偏, 物欲之有蔽也, 是以或昧其性以亂其倫․敗其則而不知反, 必其學以開之, 然後有以正心脩身而爲齊家治國之本. 此人之所以不可不學, 而其所以學者初非記問詞章之謂, 而亦非有聖愚貴賤之殊也. 以是而言, 則臣之所嘗用力, 固有可爲陛下言者, 請遂陳之.
학문하는 도리는 이치를 탐구하는 것[窮理]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이치를 탐구하는 요체는 독서에 달려 있으며, 독서하는 방법은 순서에 따라 자세하게 읽는 것이 가장 귀중합니다. 그리고 자세하게 읽는 근본은 공경함을 유지한채로[居敬] 의지를 다잡는 것[持志]에 달려 있으니, 이것은 바뀔 수 없는 이치입니다.
蓋爲學之道, 莫先於窮理, 窮理之要, 必在於讀書, 讀書之法, 莫貴於循序而(2-547)致精, 而致精之本, 則又在於居敬而持志, 此不易之理也.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이치가 있습니다. 인군과 신하 사이에는 군신 간의 이치가 있고, 아비와 자식 간에는 부자 간의 이치가 있으며, 부부, 형제, 벗에서 부터 드나들고 기거하며, 일에 호응하고 외물을 대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이치가 있습니다. 이것을 탐구하면 크게는 인군과 신하로부터 미세한 사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을 알게 되어 조그마한 의심도 없게 됩니다. 선하면 따르고 악하면 물리쳐 조금의 잘못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배우는 데 이치의 탐구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夫天下之事莫不有理, 爲君臣者有君臣之理, 爲父子者有父子之理, 爲夫婦, 爲兄弟, 爲朋友, 以至於出人起居․應事接物之際, 亦莫不各有理焉. 有以窮之, 則自君臣之大以至事物之微, 莫不知其所以然與其所當然, 而亡纖芥之疑, 善則從之, 惡則去之, 而無毫髮之累. 此爲學所以莫先於窮埋也.
세상의 이치를 논하자면 중요하거나, 오묘하거나, 정치하거나 은미하거나 제각각 마땅한 것이 있어 영원토록 바꿀 수 없습니다. 오직 옛 성인만이 이를 철저하게 탐구해서 말과 행실이 모두 후대 사람들이 바꿀 수 없는 위대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서 이를 따르는 사람은 군자가 되어 길하고, 거스르는 사람은 소인이 오히려 흉하게 되었습니다. 크게 길한 사람은 세상을 보전하여 모범이 될 수 있었고, 지나치게 흉한 사람은 자기 몸도 보전하지 못하여 후대의 경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취는 찬연하게 빛나고 있고 이러한 효과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으로서 경전의 가르침과 역사서 속에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온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려 하면서 이런 경전과 역사서를 대하고서 탐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바로 담장을 마주하고 서있는 격입니다. 이것이 이치의 탐구가 반드시 독서에 달려있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至論天下之理, 則要妙精微, 各有攸當, 亘古亘今, 不可移易. 唯古之聖人爲能盡之, 而其所行所言, 無不可爲天下後世不易之大法. 其餘則順之者爲君子而吉, 背之者爲小人而凶. 吉之大者, 則能保四海而可以爲法 : 凶之甚者, 則不能保其身而可以爲戒. 是其粲然之跡, 必然之效, 蓋莫不具於經訓史冊之中. 欲窮天下之理而不卽是而求之, 則是正牆面而立爾. 此窮理所以必在乎讀書也.
독서의 경우,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읽는 것을 소홀히 여겨 뜨문뜨문 읽기 때문에 성취가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또 넓게 읽고, 많이만 읽으려고 욕심을 부려서 종종 그 단서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갑자기 결론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을 탐구하지도 못한채 느닷없이 저기에 뜻을 두기도 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비록 종일토록 열심히 읽으면서 쉬지도 않지만 뜻과 단서가 지나치게 급해 늘상언제나 쫓기는 사람처럼 바쁠 뿐 조용하게 (책 속에) 푹 젖어드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또 어떻게 자신이 깨달은 것을 굳게 믿고 오래도록 물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또 어떻게 저처럼 소흘히 여겨 뜨문뜨문 읽느라 성취를 이루지 못한 자들과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신 ‘빨리 이루려고 하면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나, 맹자가 말한 ‘빨리 나아가려는 자는 그만큼 빨리 물러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진실로 이것을 거울삼아 반성할 수 있다면 마음을 하나에 집중시켜 깊이 안정시킨 다음 오래도록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게 되고, 읽은 책 속에 있는 문장의 의미가 연결되고, 혈맥이 관통되어 저절로 물에 젖어들 듯이 마음 속에 스며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와 이치가 일치되어 선을 권장하는 것도 깊어지고, 악을 경계하는 것도 절실하게 됩니다. 이것이 순서를 따라 정치함에 이르는 것이 독서의 방법이 되는 이유입니다.
若夫讀書, 則其不好之者固怠忽間斷而無所成矣 : 其好之者又不免乎貪多而務廣, 往往未啓其端而遽已欲探其終, 未究乎此而忽已志在乎彼, 是以雖復終日勤勞, 不得休息, 而意緖匆匆, 常若有所奔趨迫逐, 而無從容涵泳之樂, 是又安能深信自得, 常久不厭, 以異於彼之怠忽間斷而無所成者哉? 孔子所謂欲速則不達, 孟子所謂進銳者退速, 正謂此也. 誠能鑒此而有以反之, 則心潛於一, 久而不移, 而(2-548)所讀之書文意接連, 血脈通貫, 自然漸漬浹洽, 心與理會, 而善之爲勤者深, 惡之爲戒者切矣. 此循序致精所以爲讀書之法也.
정치함에 이르는 근본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이란 지극히 텅 비고 신령한 것으로, 헤아릴 수 없이 신묘하면서 언제나 한 몸의 주재가 되어 만사의 강령을 쥐고 있으며,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한 번 마음이 내달리고 날아 올라 이 몸뚱이의 바깥에서 외물에 대한 욕망[物欲]좇아간다면 이 한 몸에는 주재가 없게 되고, 모든 일에는 강령이 사라지게 됩니다. 비록 위아래를 쳐다보고 주위를 돌아보는 사이에도 이미 그 몸이 어디에 있는 지조차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성인의 말을 되풀이해서 곱씹어보고 여러 사물을 비교 고찰해서 의리가 지당한 결론을 탐구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한 “군자가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다”라고 말한 것과, 맹자가 말한 “학문하는 방법이란 다른 것이 없다.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진실로 엄숙하고 공손하며 삼가고 두려워하면서[嚴恭寅畏]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해서 종일토록 위엄있는 태도로 외물에 대한 욕망에 의해 침범당하지도 혼란을 겪지도 않게 된다면, 이 마음으로 독서하고 이 마음으로 이치를 관찰하면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일에 응하고, 이 마음으로 외물을 대하면 처리하는 일마다 부당한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공경함을 유지한 채로 의지를 다잡는 것이 독서의 근본이 되는 이유입니다.
若夫致精之本, 則在於心. 而心之爲物, 至虛至靂, 神妙不測, 常爲一身之主, 以提萬事之綱, 而不可有頃刻之不存者也. 一不自覺而馳騖飛揚, 以徇物欲於軀穀之外, 則一身無主, 萬事無綱. 雖其俯仰顧盼之間, 蓋已不自覺其身之所在, 而况能反覆聖言, 參考事物, 以求義理至當之歸乎? 孔子所謂‘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孟子所謂‘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者, 正謂此也. 誠能嚴恭寅畏, 常存此心, 使其終日儼然, 不爲物欲之所侵亂, 則以之讀書, 以之觀理, 將無所往而不通 : 以之應事, 以之接物, 將無所處而不當矣. 此居敬持志所以爲讀書之本也.
이 몇 마디 말은 모두 어리석은 제가 평생 학문을 하면서 갖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이미 효과를 본 것들입니다. 저는 성현이 다시 살아나신다고 한들 이렇게 사람을 가르치는데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홑 갖옷을 입은 선비만이 종사해야 할 일이 아니라, 비록 제왕의 학문이라 할지라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근년에 들어 풍속이 천하고 비루해져서 사대부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으례히 모두들 도학(道學)이라고 지목하고 반드시 배척하고 물리친 다음에야 그만둡니다. 이런 까닭에 시골 농부의 미나리처럼 보잘것 없는 제 지식조차[食芹之美] 폐하께 알려드릴 방법이 없어서 늘 (성현들이) 남긴 경전을 끌어 안고서 헛되이 한숨만 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제폐하께서 (제위에 오르신) 초기에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다른 것은 좋아하지 않으시고 유독 묻고 배우는 것에만 부지런히 애쓰면서 게으르지 않는 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때를 만나 특별히 궁궐에서 천자를 뵙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감히 저의 고루함을 잊고 말씀 올립니다. 폐하께서는 깊이 살펴보시고 시험삼아 제가 말한 것을 자신의 몸에서 징험하여 일찍 잠에서 깨어 새벽에 일어나거든 오늘의 뜻을 잊지 말고 스스로 힘쓰면서 쉬지 말으셔셔, 덕화(德化)의 광명이 환히 빛나게 하시되, 옛날에 상나라[商] 고종(高宗)이 나라[邦國]를 잘 다스리어 편안케 했던 것처럼,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쇠약한 나라를 부흥시켜 난리를 평정했던 것처럼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인주(人主)가 학문을 강론하는 효과를 밝히시고 우뚝하니 모든 시대 제왕(帝王)의 표준이 되신다면, 저는 비록 시골에 물러나 숨어서 세상과 영원히 담을 쌓더라도 (폐하와) 더불어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어째서 꼭 눈멀고 귀먼 사람을 억지로 힘쓰게 하고, 절름발이와 앚은뱅이를 붙잡고 끌어당겨 가까운 시종들의 반열을 더럽히고, 융성한 시대의 수치가 되게 하려고 하십니까? 황제의 위엄을 넘보게 되어 떨리는 두려움을 어찌할 수 업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유념해서 재단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가려서 선택하십시오.
此數語者, 皆愚臣平生爲學艱難辛苦已試之效. 竊意聖賢復生, 所以敎人不過如此. 不獨布衣韋帶之士所當從事, 蓋雖帝王之學, 殆亦無以易之. 特以近年以來, 風俗薄陋, 士大夫間聞此等語, 例皆指爲道學, 必排去之而後已. 是以食芹之美, 無路自通, 每抱遺經, 徒竊慨歎. 今者乃遇皇帝陛下始初淸明, 無他嗜好, 獨於問學孜孜不倦, 而臣當此之時, 特蒙引對, 故敢忘其固陋而輒以爲獻. 伏惟聖明(2-549)深賜省覽, 試以其說驗之於身, 蚤寤晨興, 無忘今日之志而自彊不息, 以緝熙于光明, 使異時嘉靖邦國如商高宗, 輿衰撥亂如周宣王, 以著明人主講學之效, 卓然爲萬世帝王之標準, 則臣雖退伏田野, 與世長辭, 與有榮矣, 何必使之勉彊盲聾․扶曳跛躄, 以汙近侍之列而爲盛世之羞哉! 干冒宸嚴, 不勝戰慄, 惟陛下留神財幸. 取進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