謝安高潔(19)
晉書 謝安字安石 陳國陽夏人. 年四歲桓彛見而嘆曰 此兒風神秀徹. 後當不減王東海. 王導亦深器之. 由是少有重名. 初辟除 並以疾辭. 有司奏 安被召歷年不至 禁錮終身. 遂棲遲東土. 常往臨安山中 放情丘壑. 然每遊賞必以妓女從. 時弟萬爲西中郞將 總藩任之重. 安雖處衡門 名出其右 有公輔望. 年四十餘始有仕志. 征西大將軍桓溫請爲司馬. 朝士咸送. 中丞高崧戱之曰 卿屢違朝旨 高臥東山. 諸人每相與言 安石不肯出 將如蒼生何. 今蒼生亦將如卿何. 安有愧色. 後拜吏部尙書. 時孝武立 政不自己. 桓溫威振內外. 安盡忠匡翼 終能輯穆. 進中書監錄尙書事. 苻堅率衆 次淮肥. 加安征討大都督. 旣破堅 以總統功進太保. 薨贈太傅 諡文靖.
??진서(晉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안(謝安)의 자는 안석(安石)이니, 진국(陳國) 양하(陽夏) 사람이다. 나이 4세에 환이(桓彛)가 보고서 탄식하여 말하길, “이 아이는 풍신(風神)이 수철(秀徹)하니, 뒤에 마땅히 동해에서 왕이 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도(王導)도 매우 큰 그릇으로 여겼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젊어서 무거운 명성이 있었다.
초에 징벽되어 제수 하였지만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담당관리가 아뢰기를, “사안은 부름을 받았는데 몇 년이 지나도 이르지 않으니 종신토록 옥에 가두어야 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동쪽 땅에서 서지(棲遲)1)하였다. 항상 임안산(臨安山) 가운데 가서 구릉에 그의 정을 맡겼다. 그러나 매번 노닐며 감상함에 반드시 기녀를 따르게 하였다. 당시에 아우 만(萬)이 서중랑장(西中郞將)이 되어 번임(藩任)의 중임을 총괄하였다. 사안이 비록 형문(衡門)에 거처하였지만 명성이 그보다 훌륭하여 공보(公輔)의 바램이 있었다. 나이 40여에 비로소 벼슬하려는 뜻이 이었다.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이 조정에 청하여 사마(司馬)로 삼으니, 조정의 선비들이 모두 전송하였다. 중승(中丞) 고숭(高崧)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경은 여러 번 조정의 뜻을 어기고 동산에 고결하게 거처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매번 함께 말하기를 사안이 출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장차 창생(蒼生)을 어떻게 하리오. 지금 창생도 장차 경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니, 사안이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뒤에 이부상서(吏部尙書)에 배수되었다.
당시 효무(孝武) 황제가 즉위하였지만 정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환온의 위엄이 안팎에 떨쳤다. 사안이 충성스러운 마음을 다하여 바로잡아 보필하여 마침내 화목할 수 있었다. 중서감록상서사(中書監錄尙書事)로 승진하였다. 부견(苻堅)이 무리를 통솔하여 회비(淮肥) 주둔하였는데, 사안에게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을 더해주었다. 이미 부견을 격파시키니 통솔한 공로로 태보(太保)로 승진하였다. 죽음에 태부(太傅)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 서지(棲遲) : 하는 일 없이 느긋하게 놀며 지냄. 유식(遊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