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논어혹문

1장

황성 2008. 11. 5. 14:32

1. 或問學之為效 何也 曰所謂學者 有所效於彼而求其成於我之謂也 以已之未知而效夫知者 以求其知 以已之未能而效夫能者 以求其能 皆學之事也

 혹이 묻기를, 학(學)이 본받음이 됨이 무엇입니까?

 왈, 이른 바 학(學)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본받는 것이 있어서 나에게 이룸을 구함을 이른다. 자기가 아직 알지 못한 것으로 아는 사람에게 본받아서 그 앎을 구하고 자기가 능하지 못한 것으로 능한 사람에게 본받아 그 능함을 구하는 것이 모두 학문의 일이다.


曰習之為鳥數飛 何也 曰說文文也 習之字 從羽從白 月令所謂鷹乃學習是也

 묻기를, 습(習)이 새가 자주 나는 것이 됨은 무엇입니까?

 왈, 설문의 글이다. 습자는 우(羽)를 따르고 백(白)을 따르니 ������예기������ 「월령(月令)」에 이른 바 “매가 곧 날기를 배운다.”는 것이 이것이다.


學而時習 何以說也 曰言人既學而知且能矣 而於其所知之理 所能之事 又以時反復而温繹之 如鳥之習飛然 則其所學者熟而中心悅懌也 蓋人而不學 則無以知其所當知之理 無以能其所當能之事 固若冥行而已矣 然學矣而不習 則表裏扞格 而無以致其學之之道 習矣而不時 則工夫間斷 而無以成其習之之功 是其胷中雖欲勉焉以自進 亦且枯燥生澁 而無可嗜之味 危殆杌얼而無可即之安矣 故既學矣 又必時習之 則其心與理相涵 而所知者益精 身與事相安 而所能者益固 從容於朝夕俯仰之中 凡其所學而知且能者 必皆有以自得於心而不能以語諸人者 是其中心油然悅懌之味 雖芻豢之甘於口 亦不足以喻其美矣 此學之始也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면 어떻게 기뻐합니까?

 왈, 말하자면, 사람이 이미 배워서  알고 또 능숙하게 되면 그 아는 바의 이치와 능숙한 바의 일에 있어서 또 때때로 반복하여 익혀 찾기를 새가 날기를 익히는 것과 같이 한다면 그 배운 것이 익숙하여 마음이 기쁠 것이다. 대개 사람이고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아야할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마땅히 능해야할 일에 능하지 못하여 진실로 어두운 길을 가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 그러나 배우고서 익히지 않는다면 표리가 어긋나 그 배우는 도리를 이룰 수 없고, 익히되 때때로 하지 않는다면 공부가 이어지지 못하여 그 익히는 공력을 이룰 수 없으니, 이것은 그 마음에 비록 힘써서 나아가고자 하나 또한 짐짓 건조하고 생삽하여 즐거워할 만한 맛이 없고 위태하고 위태하여 나아갈 만한 편안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배우고 또 반드시 때때로 익힌다면 그 마음이 이치와 서로 젖어들어 아는 것이 더욱 정밀해지고 몸이 일과 서로 편안하여 능한 것이 더욱 견고해져서 여유롭게 아침저녁으로 부앙하는 순간에 그 배워서 알고 능한 바의 것이 반드시 모두 마음으로 자득하여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그 마음이 유연히 기뻐하는 맛이 비록 추환이 입에 맛있는 것이라도 또한 그 아름다움을 비유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학문의 시작이다.


曰以善及人而信從者衆 若何而樂耶 曰理義 人心之所同然 非有我之得私也 向也吾獨得之 雖足以為說矣 然以之告人而人莫之信 以之率人而人莫之從 則是獨擅乎此理而舉世倀倀不得於其心之所同也 是猶十人同食 一人既飽而九人不下咽 則吾之所說 雖深 亦曷為而能達於外耶 今吾之學 所以得於已者 既足以及人 人之信而從者 又如此其衆也則将皆有以得其心之所同然者 而吾之所得 不獨為一已之私矣 夫我之善 有以及於彼 彼之善 有以得乎我 吾之所知者 彼亦從而知之也 吾之所能者 彼亦從而能之也 則其歡忻交通 宣揚發暢 雖宫商相宣 律吕諧和 亦不足以方其樂矣 是學之中也


 묻기를, 선으로 남에게 미쳐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으면 어떻게 즐기는가?

 왈, 의리(義理)는 인심이 다 같이 그러한 것이고 내가 홀로 얻는 것이 아니다. 앞서 내가 홀로 얻은 것이 비록 기쁘지만 그것으로 남에게 말해 줌에 사람이 믿지 않고 그것으로 남을 거느리나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홀로 이 이치를 천단하여 온 세상이 갈팡질팡하여 그 마음의 같은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10인이 함께 먹음에 1인은 이미 배부르고 9인은 아직 목으로 넘기지 않음과 같으니, 내가 기뻐하는 것이 비록 깊지만 또한 어찌 밖으로 이를 수 있겠는가?  지금 나의 학문이 자기에게서 얻은 바의 것이 이미 남에게 미칠 수 있고, 남이 믿고서 따르는 사람이 또 이와 같이 많다면 장차 모두 그 마음에 같은 것을 얻을 수 있고, 내가 얻은 바가 유독 내 한 사람의 사사로움이 될 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저 나의 선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고 다른 사람의 선이 나에게 얻을 수 있어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이 또한 쫓아서 알고, 내가 능한 것을 저가 쫓아서 안다면 그 기쁘게 교통하여 선양(宣揚)하고 발창(發暢)하여 비록 궁상이 서로 베풀고 율려가 모두 조화롭더라도 또한 족히 그 즐거움을 비교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학문의 중(中)이다.


曰人不知而不愠何以為君子也 曰常人之情 人不知而不能不愠者 有待於外也 若聖門之學 則以為已而已 本非為是以求人之知也 人知之 人不知之 亦何加損於我哉 然人雖或聞此矣 而信之有不篤 養之有不厚 守之有不固 則居之不安 而臨事未必果能真不動也 今也 人不見知而處之泰然 且略無纎芥含怒不平之意 非成德之君子 其孰能之 自是日進而不已焉 則不怨不尤 下學上達 雖至於聖人 可也 此學之終也

 묻기를, 남이 알아주지 않는데도 성내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가 됩니까?

 왈, 일반 사람의 정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데 능히 성내지 않음이 없는 것은 밖으로 기다림이 있는 것이다. 성인 문하의 학문은 자기를 위할(심성을 닦는 학문)을 따름이요, 본디 옳다고 여겨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남이 알아주고, 남이 알아주지 않음은 또한 무엇이 나에게 더하며 손해나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비록 혹 이것을 들었으나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고 기름이 두텁지 못하고 지킴이 견고하지 못함이 있다면 거처함이 불안하고 일에 임하여 반드시 과연 능히 진실로 움직이지 않음이 없거늘 지금에 사람이 알아줌을 당하지 않는데 거처함이 태연하여 짐짓 조금도 마음에 걸리고 노여워함을 머금고 불평한 뜻이 없음은 덕을 이룬 군자가 아니라면 누가 능하겠는가? 이로부터 날마다 나아가서 그치지 않는다면 원망하지 않고 허물하지 않아 아래를 배워서 위의 일에 통달하여 비록 성인에 이르더라도 가능하니 이것은 학문의 종이다.


曰學有大小 此所謂學者 其大學耶 曰不然也 學而習 習而說 凡學皆然 不以大小而有間也 且灑埽應對之事 正門人小子所宜先也 聖人豈略之哉

 묻기를, 학문에는 소학과 대학이 있는데, 여기에서 이른 바 학이라는 것은 대학이 아니겠는가?

 왈, 그렇지 않다. 배우고 익히며 익히고 말함은 무릇 학문이 모두 그러하니 대소로 간여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짐짓 쇄소응대의 일은 정히 문인 소자가 마땅히 우선해야 할 것이니 성인이 어찌 소략하게 하겠는가?


曰程子之於習 有兩義焉 何也 曰重復思繹者 以知者言也 所學在我者 以能者言也 學之為道 不越乎兩端矣 然諸說或槩舉其凡而不指其目 或各指其一而不能相兼 惟程子則先後兩言 皆指其目而有相發之功焉 然諸說如范謝楊尹 就其所指 亦各有所發明 但范氏所引性習近逺及伊尹之言 則與此章文意 為不類耳

 묻기를 정자가 습에 대해서 양의를 둔 것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거듭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지자로 말함이요, 배운 것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능자로 말함이다. 학의 도됨은 양단을 넘지 않으나, 그러나 여러 설은 혹 그 평범한 것을 대략 들어 그 조목을 가리키지 않고, 혹은 각각 그 하나를 가리키고 능히 서로 겸하지 못하였다. 오직 정자는 선후의 두 말이 모두 그 조목을 가리키 서로 발명하는 공이 있다. 그러나 여러 설 가운데 범씨, 사씨, 양씨, 윤씨는 그 가리키는 바에 나아가 또한 각각 발명하는 바가 있지만, 다만 범씨는 인용한 바 성과 습은 가깝고 멀다는 것과 이윤의 말은 이 장의 문의와 같지 않을 따름이다.


曰時習之所以說諸說 孰近 曰夫習而熟 熟而說 脉絡貫通 最為精切 程子所謂浹洽者 是已 而祖其說者 皆莫知以為言 其次則惟范氏之所謂串 尹氏之所謂自得者 近之 然范氏本 為知所以修身治人而說 則不待習之串而已說矣 其後復引兌卦之象 乃有比於說而未正夫說之說 則是所謂習而串者 又未足以盡夫說也 其自為矛盾益 甚矣 或以為德聚而說者 語意亦疎 或借理義悦心之云 以為說則理義之可悅 乃人心之同 然不待習而後得也 或借習矣不察之云以為說則察之於習 已為二事而其於說 又不相關也 且凡竝緣假借 最釋經之大病 蓋或文句偶同而㫖意實異 或志意略似 而向背實殊 或反以彼之難 而釋此之易 或強以彼之有 而形此之無 使意已親者 引之而反疎 義已明者 引之而反暗 甚則彼此俱昧而欲互以相明 如獐邉之鹿 鹿邉之獐 循環無端而卒無所决 其偶值文意之適同而無前數者之患 亦不免為倚重於人而取信於外 終不若出於吾之所親見而自言者之的確而真實也 至於周氏 獨以習熟為言 則似矣 顧亦以為熟而察 察而說 則首尾衡决 氣脉不通 而不復有所發明也 豈其以習熟為常言而習察有經據 故必借而雜之其間 然後為慊耶

 묻기를, 때때로 익힘이 기쁘다는 여러 사람의 설명 가운데 누가 이치에 가깝습니까?

 왈, 익히면서 익숙하고 익숙하면서 기뻐함은 맥락이 관통함이 가장 정밀하고 긴요함이 되니, 정자가 이른 바 ‘협흡’이라는 것이 옳을 따름이나 그 설명을 조술하는 사람은 모두 그 말됨을 알지 못한다. 그 다음은 오직 범씨가 이른 바 ‘천(串)’이라는 것과 윤씨의 이른 바 ‘자득(自得)’이라는 것이 이치에 가깝다. 그러나 범씨는 본디 수기치인하는 바를 알기 때문에 기쁘다고 하니, 익힘이 관통함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기쁠 것이다. 그 뒤에 다시 태괘의 상(象)1)을 인용하여 곧 기쁨에 견줌이 있으나 기쁨의 설명이 바르지 못하니, 여기에서 이른 바 ‘익혀서 관통한다.’는 것은 또 기쁨을 다할 수 없으니, 그 스스로 모순이 됨이 더욱 심하다. 혹자는 덕이 모여서 기뻐한다고 생각하니, 그 말과 뜻이 또한 성글다. 혹자는 의리가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말을 빌려서 설명을 하니, 의리가 기뻐할 만함은 곧 인심이 함께 그러한 것이니, 익힘을 기다린 이후에 얻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익히되 살피지 않는다.’2)는  말을 빌려서 설명을 하니, 관찰함이 익힘에 있어서 이미 두 가지 일이 되어 그 기뻐함에 있어서 또 서로 관련이 없다. 또 무릇 병연(竝緣)하고 가차(假借)함은 가장 경전을 해석하는 큰 병통이니, 대개 혹 문구가 우연일 일치하나 뜻은 실로 다르고, 혹 뜻이 대략 비슷하지만 향배는 실로 다르다. 혹 도리어 저것의 어려움으로 이것의 쉬움을 풀이하고 혹 억지로 저것의 있는 것으로 이것의 없는 것을 형상하니, 가령 뜻이 이미 친밀한 것을 인용하여 도리어 소원하게 하고 뜻이 이미 분명한 것을 인용하여 도리어 어둡게 하니, 심하다면 피차가 모두 어두워 교대로 서로 밝히고자 함이 마치 노루 옆의 사슴(獐邉之鹿)과 사슴 옆의 노루(鹿邉之獐)이 순환함에 실마리가 없어져 마침내 결정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으니, 그 우연히 문의가 적합함을 만나서 앞 몇 사람의 근심이 없으나 또한 남에게 무거운 것을 기대어 밖에서 믿음을 취함을 면하지 못하니, 끝내 내가 직접 보는 바에서 나와 스스로 말한 것이 적확하고 진실함만 못하다. 주씨에 이르러서는 홀로 익혀 익숙함으로 말을 함은 근사하지만, 도리어 또 익숙히 하면서 살피고 살피면서 기뻐함으로 여긴다면 수미가 이긋나게 터져 기맥이 관통하지 않아 다시 발명함이 있지 않으니, 어쩌면 그 습숙(習熟)으로 떳떳한 말로 여기되// 익히고 살핌이 경전에 의거함이 있으므로 반드시 빌려서 그 사이에 섞은 이후에 만족으로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曰謝氏朋来之意 如何 曰不止其所 而放乎言外以為髙 此最謝氏之大弊也

 묻기를, 사씨의 붕우가 온다는 뜻은 어떻습니까?

 왈, 그곳에 그치지 않고 말 밖에서 방일하여 고원함으로 삼는 것은 사씨의 큰 폐단이다. 


曰朋来之樂 奈何 曰以為樂其可以取益 以為樂其相與講學 則我方資彼 以為益 又能安自逺而来哉 以為樂其義理之不二 則是未能自信而藉外以為樂也 以為樂於才大而友逺 以為樂於充實輝光 而聞譽有以致之 則是以 此自幸而有驕吝之私也 至於知不講之為憂 則知講學以為樂 則正前所謂以彼之有 形此之無者 夫樂與不樂 决於吾心 可矣 豈待此而後判耶 惟以程子之言求之 然後見夫可樂之實耳 且其以善及人而信從者衆之云 纔九字爾而無一字之虚設也 非見之明而驗之實 其孰能與於此 其次則游氏所謂成物者 為近之 但必引三樂以為言 則又墮於假借之病耳

 묻기를, 벗이 이르면 즐겁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왈, 그 유익함을 취할 수 있음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그 서로 더불어 강학함을 즐거움으로 여긴다면 내가 바야흐로 저 사람에게 의뢰하여 유익함을 삼으니, 저 사람이 능하지 못하면 어찌 능히 먼 곳으로부터 오겠는가? 그 인과 의가 두 가지가 아님을 즐거워한다면 이것은 능히 스스로 자만하지 않고 밖에 빙자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이다. 재주의 커서 먼 지방 사람과 사귐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충실하고 빛나서 명성과 명예가 이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면, 이것이 이것으로 스스로 요행으로 여겨 교만하고 인색한 사사로움이 있을 것이다. 강학하지 못함이 근심이 됨을 앎에 이르러서 강학으로 즐거움으로 여김을 안다면, 정히 앞에서 이른 바 저의 있는 것으로 이것의 없는 것을 형상하는 것이니, 대저 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은 내 마음에서 결정함이 옳을 것이니, 어찌 이것을 기다린 이후에 판가름 되겠는가? 오직 정자의 말을 가지고 구한 이후에 즐거워할 만한 실재를 볼 따름이다. 또 선으로 남에게 미쳐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다.[以善及人而信從者衆]고 말한 것은 겨우 9자일 따름이다. 한 자라도 헛된 말이 없다. 식견이 밝고 징험함이 진실하지 않으면 누가 능히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은 유씨가 이른 바 ‘성물(成物)’이라는 것이 이치에 가깝지만 다만 반드시 삼락(三樂)을 인용하여 말을 하니 또 가차의 병통에서 빠졌을 따름이다.


曰然則程子所謂不見是而無悶者 非耶 且古人之言 必引詩書以為證 何哉 曰程子所謂易語 非其立意之所恃 而古人之引經 亦吾說已立 而資彼以為助耳 非初無所主 而藉彼以立也 且又有一說焉 嘗讀胡氏春秋獲麟之卒章 幾無一語之出於己 而讀者不覺其為他人之辭也 若此者 又安得以假借而病之耶

 묻기를, 그렇다면 정자가 이른 바 옳게 여김을 당하지 않더라도 근심함이 없다는 것은 그릇되었는가? 또 고인의 말은 반드시 시경과 서경을 인용하여 증명함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정자가 이른 바 주역의 말은 뜻을 세움의 믿는 바가 아니요. 고인이 경전을 인용함은 또한 나의 말이 이미 수립됨에 경전에 의뢰하여 도움으로 삼을 따름이요, 애초에 주장하는 것이 없는데, 경전에 의뢰하여 수립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일설이 있으니, 일찍이 호씨 춘추 획린의 마지막 장을 읽었는데 거의 한 마디 말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없는데 읽는 사람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말이 됨을 알지 못하니, 이와 같은 것이 또 어찌 가차로 병통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曰說樂 皆出於心 而程子有内外之辨 何也 曰程子非以樂為在外也 以為積滿於中 而發越乎外耳 說則方得於内而未能達乎外也 或不及此而反其言 則失之 甚矣

 기뻐하고 즐거워함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데 정자가 안과 밖의 구분을 둔 것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정자는 즐거움으로 밖에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마음에 가득 쌓여서 밖으로 발현된다고 생각하였을 따름이다. 기뻐함은 막 마음에 얻었으나 아직 밖으로 이르지 않은 것이다. 혹 이것에 미치지 않았는데 그 말을 뒤집는다면 잃음이 심할 것이다.


曰不愠之說 孰為得之 曰君子之學 固不求人之知 亦非有意於求人之不知也 然有實者 人自知之 豈必有求知之心然後 人得以知之耶 此所謂人不知者 正以冝見知而或有不然者耳 而或者乃以聖人之事當之 則已過髙而失之矣 至其為說 又謂上焉者 存其德 修其身 故人莫得而知之 下焉者 為善以求知而後 人得以知焉 則亦疎且戾矣 且其以潛龍無悶 為聖人之德 有諸内而形諸外 乃下焉者之事 則是乾之六爻 獨初九為盛德 至於九二之德 博而化 則既少貶而九五之萬物咸覩 反為下焉者之為矣 世豈有此理哉 有引老聃 知我者 希則我貴以為說者 則又過髙而有自私之病 夫君子固不求人之知 然豈有幸人之不知而自喜其身之貴者哉 異端之言 大率如此 引者豈偶未之思與 又引孔顔之樂以明 此句之義 亦猶聖者能之之云耳 又有謂不愠則其自待厚者 又有謂安於命 故不愠者 皆非 夫君子之不愠 自見其無可愠耳 豈以自待之厚與廹於不得已而後然哉 又有引不念舊惡以明之者 則非 其類又有以遺佚不怨 阨窮不憫 當之 則亦已太髙矣 又有以為既說且樂 便能不愠者 則其說似 亦太快 不若程子楊氏為得之也 至論其所以然者 則尹氏為尤切 使人之始學 即知是說 以立其心 則庶乎其無慕於外矣

 묻기를 성내지 않는다면 설명은 누가 이치를 얻었습니까?

 왈, 군자의 학문은 진실로 남이 알아줌을 구하지 않고, 또한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구함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재가 있다면 남이 절로 아니, 어찌 반드시 알아줌을 구하는 마음이 있은 이후에 남이 알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이른 바 인불지(人不知)라는 것은 정히 마땅히 알려져야 하지만 혹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따름이다. 혹자는 성인의 일로 해당시켰다면 이미 지나치게 고원하고 잘못 되었을 것이다. 그 설명함에 이르러서 상(上)이라고 이르는 것은 그 덕을 보존하여 그 몸을 닦기 때문에 사람이 알지 못하고 하(下)라고 말하는 것은 선을 행하여 앎을 구한 이후에 사람이 알 수 있다면 또한 성글고 어긋날 것이다. 또 그 잠겨 있는 용은 근심이 없다는 것으로 성인의 덕으로 삼아 마음에 소유하여 외면으로 드러남은 곧 하자의 일이니, 이것은 주역 건괘 육효(六爻)에 유독 초구(初九)3)가 성덕이 되고 구이(九二)의 덕에 이르러 넓고 변화된다면 이미 조금 부족하고 구오(九五)의 만물이 모두 봄에 도리어 하자의 행위로 삼으니 세상에 어찌 이 이치가 있겠는가? 노담(老聃)의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면 내가 귀하다.[知我者希則我貴]’4)는 것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사람이 있으니, 또 지나치게 고원하여 스스로 사사로운 병통이 있다. 대저 군자는 진실로 남이 알아줌을 구하지 않으나, 그러나 어찌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겨 스스로 그 몸이 귀해짐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단이 말이 대체로 이와 같으니, 인용한 사람이 어쩌면 우연히 아직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 공자와 안자의 즐거움을 인용하여 밝히니, 이 구절의 뜻은 또한 오히려 성인이 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 또 성내지 않는다면 그 스스로 지킴이 두텁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또 명에 편안하기 때문에 성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 모두 잘못되었다. 군자가 성내지 않음은 절로 성낼만 한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을 따름이니, 어찌 스스로 지킴이 두텁움과 부득이함에 절박한 이후에 그러하겠는가? 또 지난 악행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인용하여 증명하는 사람이 있으니 잘못되었다. 그와 비슷한 것 가운데 또 ‘남겨지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며, 곤궁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해당시키는 사람이 있으니, 또한 이미 너무 고원하다. 또 이미 기뻐하고 또 즐거워하여 문득 능히 성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설명이 비슷하지만 또한 너무 빠르니, 정자와 양씨가 이치를 얻음이 됨만 못하다. 그 소이연을 논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윤씨가 더욱 긴절하다. 사람이 처음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곧 그 말을 알아서 그 마음을 세운다면 거의 밖으로 사모함이 없을 것이다.


曰有信於始中終 為此章之說 何如 曰是其言之也約 未有以見其得失 然亦無所當於文義矣

 묻기를, 시중종에 믿음이 있음이 이 장의 설명이 됨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이것은 그 말이 요약됨이니, 그 득실을 볼 수 있지 않지만 그러나 또한 문의에 합당한 바는 없을 것이다.


曰是諸先生君子之說 子程子則不容議矣 故問餘說之大體得失 何如 曰是亦豈區區之所 敢議 然嘗竊揣之 則其寛平正大者 或失於未精 整峻嚴恪者 或苦於未暢 通達竒偉者 或有過髙之病 醖藉敷腴者 或有柔緩之失 而清和靡密者 又未免牽合支離之患也 惟周氏敦厚易直 雖言不皆中 而頗有醲郁之風 尹氏平淡簡約 雖意有不周而其精實之味 為不可及耳 若張子之學 雖原於程氏 然其博學詳說 精思力行而自得之功多矣 故凡其說 皆深約嚴重 意味淵永 自成一家之言 雖或有賢知之過 如程子之所譏者 然其大體 非人所能及也

 묻기를, 여기서 여러 선생 군자의 설에 있어서 정자는 의논함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여러 설의 대체와 득실은 어떠합니까?

 왈, 이것을 또한 어찌 내가 감히 의논하겠는가? 그러나 일찍이 가만히 헤아려 보니, 관평하고 정대한 것은 혹 정밀하지 못함에서 잘못되고, 정준하고 엄각한 것은 혹 통하지 못한 것에서 괴로우며, 통달하고 기위한 것은 혹 지나치게 높은 병폐가 있고, 온자(醖藉) 부유(敷腴)한 것은 혹 유순하고 느린 실추가 있으며, 청화(清和)하며 비밀(靡密)한 것은 또 견합(牽合)하고 지리(支離)한 근심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고, 오직 주씨(周氏)만이 돈후하고 평이하고 곧으니 비록 말이 모두 알맞지 못하나 자못 농욱(醲郁)한 풍모가 있다. 윤씨는 평담하고 간약(簡約)하여 비록 뜻이 두루하지 못하는 것이 있지만 그 정실(精實)한 맛은 미칠 수 없을 따름이다. 장자의 학문은 비록 정씨에게서 근원하지만, 그러나 박학하고 자세히 설명하고 정밀하고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스스로 얻은 공로가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그 설명이 모두 깊이 요약되고 엄중하며 의미가 깊고 길어서 스스로 일가의 말을 이루니, 비록 혹 현지(賢知)의 지나침이  정자가 기롱한 바와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대체는 사람이 능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


曰謝楊之書 傳者 不同 何也 曰謝氏之書 今本出於胡氏 蓋其所裁定者 比舊為差約 然語脉 亦有不貫處 顧無大害 不復追正爾 楊氏書 乃其所自筆削 前後三本 今此乃其中本 亦有改之 而反不如舊者 如此章 初本未有承蜩貫蝨兩句 文意自完 中本增之 則語渉空幻 而上下文意 亦齟齬而不屬矣 後本改 為持弓矢審固正已而後發 雖則稍就平實 又覺其辭意燥澁 而未免齟齬之病 殊不可曉也

 묻기를, 사씨와 양씨의 책이 전하는 것이 같지 않음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사씨의 책은 지금 본은 호씨에게서 나왔으니, 대개 재정한 구본과 비교하면 자못 요약되었다. 그러나 말의 맥락은 또한 관통하지 못한 곳이 있지만 도리어 크게 나쁜 것은 없으니, 다시 미루어 바로잡지 않을 따름이다. 양씨의 책은 곧 그가 스스로 쓰고 고친 바 전후 3본이니, 지금 이것은 곧 그 중간본이나, 또한 고쳐서 도리어 고치기 전보다 못한 것이 있다. 이 장과 같은 것은 초본에는 승주(承蜩) 관슬(貫蝨) 두 구는 있지 않지만 문의는 절로 완전하더니, 중간본에 첨가하니 말이 공허하며 허황하고 상하의 문의는 또한 어긋나서 이어지지 않는다. 후본에 고쳐 ‘궁시를 가지고 자세하고 견고하게 하여 자기를 바르게 한 이후에 발사한다.[持弓矢審固正已而後發]고 하니, 비록 조금 평실(平實)함에 나아갔으나, 또 그 말과 뜻이 조삽(燥澁)하여 어긋나는 병통을 면하지 못함을 깨달으니, 자못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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