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논어혹문

4장

황성 2008. 11. 17. 09:21

4. 或問程子所謂盡已之謂忠 以實之謂信 何也 曰盡已之心而無隱 所謂忠也 以其出乎内者而言也 以事之實而無違 所謂信也 以其驗乎外者而言也 然未有忠而不信 未有信而不出乎忠者也 故又曰發已自盡謂忠 循物無違謂信 此表裏之謂也 亦此之謂而加密焉爾

혹이 묻기를, 정자가 이른 바 자신의 본분을 다함을 충이라고 하고 실상을 신이라고 말함은 무엇입니까?

왈,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숨김이 없음이 이른 바 충이니, 내면에서 나오는 입장으로 말함이요, 일의 성실함으로 숨김이 없음이 이른 바 신이니, 외면에 징험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충성스로우면서 미덥지 못한 사람은 있지 않고, 미덥고 충성에서 벗어나는 사람 있지 않다. 그러므로 또 말하기를, 자신을 발현하여 스스로 다함을 충이라고 말하고, 일을 따라 어김이 없음을 신이라고 말하니, 이것은 표리를 이르며, 또한 이것을 말함에 더욱 조밀할 따름이다.

 

曰程子又謂忠信者 以人言之 要之則實理者 何也 曰前章五常之目 已具此意矣 請復詳之 夫信之為信 實有之理也 凡性之所謂仁義禮智 皆實有而无妄者信也 所謂實理者 是也 其見於用 則出於心 而自盡者 謂之忠 以循物而無違者 謂之信 而凡四端之發 皆必以是為主焉 所謂以人言之 是也 蓋五行之氣 各居乎一方 而王一時 唯土無不在 故居中央而分王於四季 是乃天理之本然 而人之所禀以生者 莫不象之 此人之所以克肖天地 而為萬物之靈也

묻기를, 정자가 또 말하기를, 충신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말하니, 요약하면 실재 이치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왈, 앞 장 5상의 절목에 이미 이 뜻이 갖추어져 있다.

청컨대, 다시 상세함을 말하리라.

대저 신(信)이 신이 됨은 실재로 소유한 이치이다. 무릇 본성의 이른 바 인의예지는 모두 실재로 소유하여 망녕됨이 없는 것이 신이다. 이른 바 ‘실리’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 작용에 드러나면 마음에서 나와 스스로 다함을 충이라고 하고, 사물을 따라 어김이 없는 것을 신이라고 말하니, 무릇 사단의 발현이 모두 반드시 이것으로 주안으로 삼으니, 이른 바 사람으로 말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대개 5행의 기운은 각각 한 방향에 거하여 한 때에 왕성하고, 오직 토가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중앙에 거하여 왕성함을 4계절에 나누어주니, 이것은 천리의 본연이요 사람이 품부 받아 태어나는 것이 닮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사람이 능히 천지를 닮아 만물의 영장이 되는 까닭이다.

 

曰傳不習乎之說 不從程子范尹 而從謝楊周氏 何也 曰以文義考之 則然 且先忠信而後傳習 亦後章餘力學文之意

묻기를, 전함에 익히지 않았는가의 설명은 정자와 범씨의 설을 따르지 않고 사씨와 주씨의 설을 따름은 무엇입니까?

왈, 문의로 상고하면 그러하다. 또 충신을 먼저하고 전하여 익힘을 뒤로함은 또한 뒷 장 남은 힘이 있거든 문학을 배운다는 뜻이다.

 

或曰諸說 何如 曰謝說九流 皆出於聖 此蓋襲史遷之誤 又謂謀而忠 交而信 傳而習 為直知道無二致 人已為一而膠於無我者 則過之 又謂謀非臨事而謀 信非踐言而信 亦皆失於太髙而非事實 少有餘味也 游說雖非曾子之事 然深有警於學者 但以處已接人 正心應物 分而為二 則失之耳 蓋閒居獨處 固有所謂不動而敬 不言而信者 今曰立行無不信 則固以其循物無違者言之 而無不言不動之謂也 豈有接人之際 猶有不忠不信之累 而遽可謂之立行無不信 處已無可憾者乎 就使其立行之云 或出於一時立言之差而失其本章之所謂 則誠内形外 初無二致 未有正心處巳 無不忠信 至於内省一無可憾 接人之際 反入於不忠不信 而自不悟者也 至於正心誠意 則又初無專於内 而不通乎外之限 且既曰無須臾忘矣 則宜其動静語默 無一息之或違也 若應物之際 又遽失念如違仁則其所省正心誠意無須臾忘者 又安在耶 細考其說 似未免於老釋之弊 惜乎 其篤於為巳 而擇之 不精以至此也 楊氏傳習之說 得之 至於違仁違道之别 則吾有不知其說者矣 周氏 内則見道於忠信 外則見道於傳習 亦不可曉 豈其謂道别為一物而於此見之 亦如二章之失耶 且此章正為力行體道之實 亦不當以見道為說也

묻기를, 여러 사람의 설명은 어떻습니까?

왈, 사씨가 구류(九流)는 모두 성인에게서 나왔다고 말함은 이것은 대개 사마천을 답습한 오류이다. 또 도모하여 충성하고 사귀어 믿고 전하여 익혀 곧바로 도가 두 가지 이치가 없고 타인과 자신이 하나가 됨을 알아 무아(無我)에 교착한다고 말하면 지나치다. 또 도모함은 일에 임하여 도모함이 아니고 믿음은 말을 실천하여 믿음이 아니라고 말함은 또한 모두 너무 고원한 곳에서 본의를 상실하여 사실이 아니나 조금 남은 맛이 있다.

유씨의 설명은 비록 정자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깊이 학자를 경계함이 있지만, 다만 자신을 처신하며 사람을 접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사물에 응대함으로 나누어 두 가지로 삼은 것은 잘못일 따름이다. 대개 한가하게 거처하고 홀로 거처함은 진실로 이른 바 ‘움직이지 않아도 공경하고 말하지 않아도 믿는다.’는 것이 있지만 지금 행함을 세움에 믿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다면 진실로 그 사물을 따라 어김이 없는 것으로 말하고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없으니, 어찌 타인을 접하는 즈음에 오히려 충성스럽지 않고 미덥게 하지 못하는 누가 있는데 갑자기 행실을 세움에 믿지 않음이 없고 자신을 처신함에 의혹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령 그 행실을 세운다는 말은 혹 한 때 입언의 어긋남에서 나와 그 본장에서 말하는 것을 잃었다면 내면을 성실히 하고 외면에 드러남은 애초에 두 가지 이치가 없으니,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처신하여 충신하지 않음이 없고 내면을 살펴 한 가지라도 의혹할 만한 것이 없음에 이르러 타인을 접하는 즈음에 도리어 충성스럽지 않고 미덥게 하지 않음으로 들어가는데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있지 않다. 정심과 성의에 이르면 또 애초에 내면에 전심하여 외면에 통달하지 않는 한계는 없다. 또 이미 잠깐이라도 망실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 마땅히 그 동정어묵에 한 순간에 혹시라도 어김이 없어야 한다. 만약 사물에 응하는 즈음에 또 갑자기 생각을 잃음을 인을 어기는 것과 같다면 그 살피는 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성실하게 하여 잠깐이라도 망실함이 없다는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의 설명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아마 노씨와 석씨의 폐단에서 면하지 못한다. 애석하도다. 자신을 위한 공부에 독실하여 가림이 정밀하지 못하여 여기에 이름이여.

양씨 전습의 설명은 옳고, 인을 어기고 도를 어긴다는 구분에 이르러는 내 그 설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주씨는 안으로는 도를 충신에서 보고 밖으로는 도를 전습에서 본다는 것은 또한 이해할 수 없으니, 어쩌면 그가 도가 별도로 한 사물이 됨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함이 또한 2장의 실수와 같지 않으랴? 또 이 장은 정히 힘써 실천하여 도를 체득하는 실상이 되니, 또한 마땅히 도를 나타냄으로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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