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논어혹문

권1

황성 2009. 2. 2. 09:26

學而第一

 

凡十六章

 

1. 或問學之為效 何也 曰所謂學者 有所效於彼而求其成於我之謂也 以已之未知而效夫知者 以求其知 以已之未能而效夫能者 以求其能 皆學之事也

혹이 묻기를, 학(學)이 본받음이 됨이 무엇입니까?

왈, 이른 바 학(學)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본받는 것이 있어서 나에게 이룸을 구하는 것을 이른다. 자기가 아직 알지 못한 것으로 아는 사람에게 본받아서 그 앎을 구하고 자기가 능하지 못한 것으로 능한 사람에게 본받아 그 능함을 구하는 것이 모두 학문의 일이다.

 

曰習之為鳥數飛 何也 曰說文文也 習之字 從羽從白 月令所謂鷹乃學習是也

묻기를, 습(習)이 새가 자주 나는 것이 됨은 무엇입니까?

왈, 설문의 글이다. 습자는 우(羽)를 따르고 백(白)을 따르니 ??예기?? 「월령(月令)」에 이른 바 “매가 곧 날기를 배운다.”는 것이 이것이다.

 

學而時習 何以說也 曰言人既學而知且能矣 而於其所知之理 所能之事 又以時反復而温繹之 如鳥之習飛然 則其所學者熟而中心悅懌也 蓋人而不學 則無以知其所當知之理 無以能其所當能之事 固若冥行而已矣 然學矣而不習 則表裏扞格 而無以致其學之之道 習矣而不時 則工夫間斷 而無以成其習之之功 是其胷中雖欲勉焉以自進 亦且枯燥生澁 而無可嗜之味 危殆杌얼而無可即之安矣 故既學矣 又必時習之 則其心與理相涵 而所知者益精 身與事相安 而所能者益固 從容於朝夕俯仰之中 凡其所學而知且能者 必皆有以自得於心而不能以語諸人者 是其中心油然悅懌之味 雖芻豢之甘於口 亦不足以喻其美矣 此學之始也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면 어떻게 기뻐합니까?

왈, 말하자면, 사람이 이미 배워서 알고 또 능숙하게 되면 그 아는 바의 이치와 능숙한 바의 일에 있어서 또 때때로 반복하여 익혀 찾기를 새가 날기를 익히는 것과 같이 한다면 그 배운 것이 익숙하여 마음이 기쁠 것이다. 대개 사람이고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아야할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마땅히 능해야할 일에 능하지 못하여 진실로 어두운 길을 가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 그러나 배우고서 익히지 않는다면 표리가 어긋나 그 배우는 도리를 이룰 수 없고, 익히되 때때로 하지 않는다면 공부가 이어지지 못하여 그 익히는 공력을 이룰 수 없으니, 이것은 그 마음에 비록 힘써서 나아가고자 하나 또한 짐짓 건조하고 생삽하여 즐거워할 만한 맛이 없고 위태하고 위태하여 나아갈 만한 편안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배우고 또 반드시 때때로 익힌다면 그 마음이 이치와 서로 젖어들어 아는 것이 더욱 정밀해지고 몸이 일과 서로 편안하여 능한 것이 더욱 견고해져서 여유롭게 아침저녁으로 부앙하는 순간에 그 배워서 알고 능한 바의 것이 반드시 모두 마음으로 자득하여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그 마음이 유연히 기뻐하는 맛이 비록 추환이 입에 맛있는 것이라도 또한 그 아름다움을 비유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학문의 시작이다.

 

曰以善及人而信從者衆 若何而樂耶 曰理義 人心之所同然 非有我之得私也 向也吾獨得之 雖足以為說矣 然以之告人而人莫之信 以之率人而人莫之從 則是獨擅乎此理而舉世倀倀不得於其心之所同也 是猶十人同食 一人既飽而九人不下咽 則吾之所說 雖深 亦曷為而能達於外耶 今吾之學 所以得於已者 既足以及人 人之信而從者 又如此其衆也則将皆有以得其心之所同然者 而吾之所得 不獨為一已之私矣 夫我之善 有以及於彼 彼之善 有以得乎我 吾之所知者 彼亦從而知之也 吾之所能者 彼亦從而能之也 則其歡忻交通 宣揚發暢 雖宫商相宣 律吕諧和 亦不足以方其樂矣 是學之中也

묻기를, 선으로 남에게 미쳐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으면 어떻게 즐기는가?

왈, 의리(義理)는 인심이 다 같이 그러한 것이고 내가 홀로 얻는 것이 아니다. 앞서 내가 홀로 얻은 것이 비록 기쁘지만 그것으로 남에게 말해 줌에 사람이 믿지 않고 그것으로 남을 거느리나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홀로 이 이치를 천단하여 온 세상이 갈팡질팡하여 그 마음의 같은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10인이 함께 먹음에 1인은 이미 배부르고 9인은 아직 목으로 넘기지 않음과 같으니, 내가 기뻐하는 것이 비록 깊지만 또한 어찌 밖으로 이를 수 있겠는가? 지금 나의 학문이 자기에게서 얻은 바의 것이 이미 남에게 미칠 수 있고, 남이 믿고서 따르는 사람이 또 이와 같이 많다면 장차 모두 그 마음에 같은 것을 얻을 수 있고, 내가 얻은 바가 유독 내 한 사람의 사사로움이 될 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저 나의 선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고 다른 사람의 선이 나에게 얻을 수 있어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이 또한 쫓아서 알고, 내가 능한 것을 저가 쫓아서 안다면 그 기쁘게 교통하여 선양(宣揚)하고 발창(發暢)하여 비록 궁상이 서로 베풀고 율려가 모두 조화롭더라도 또한 족히 그 즐거움을 비교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학문의 중(中)이다.

 

曰人不知而不愠何以為君子也 曰常人之情 人不知而不能不愠者 有待於外也 若聖門之學 則以為已而已 本非為是以求人之知也 人知之 人不知之 亦何加損於我哉 然人雖或聞此矣 而信之有不篤 養之有不厚 守之有不固 則居之不安 而臨事未必果能真不動也 今也 人不見知而處之泰然 且略無纎芥含怒不平之意 非成德之君子 其孰能之 自是日進而不已焉 則不怨不尤 下學上達 雖至於聖人 可也 此學之終也

묻기를, 남이 알아주지 않는데도 성내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가 됩니까?

왈, 일반 사람의 정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데 능히 성내지 않음이 없는 것은 밖으로 기다림이 있는 것이다. 성인 문하의 학문은 자기를 위할(심성을 닦는 학문)을 따름이요, 본디 옳다고 여겨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남이 알아주고, 남이 알아주지 않음은 또한 무엇이 나에게 더하며 손해나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비록 혹 이것을 들었으나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고 기름이 두텁지 못하고 지킴이 견고하지 못함이 있다면 거처함이 불안하고 일에 임하여 반드시 과연 능히 진실로 움직이지 않음이 없거늘 지금에 사람이 알아줌을 당하지 않는데 거처함이 태연하여 짐짓 조금도 마음에 걸리고 노여워함을 머금고 불평한 뜻이 없음은 덕을 이룬 군자가 아니라면 누가 능하겠는가? 이로부터 날마다 나아가서 그치지 않는다면 원망하지 않고 허물하지 않아 아래를 배워서 위의 일에 통달하여 비록 성인에 이르더라도 가능하니 이것은 학문의 종이다.

 

曰學有大小 此所謂學者 其大學耶 曰不然也 學而習 習而說 凡學皆然 不以大小而有間也 且灑埽應對之事 正門人小子所宜先也 聖人豈略之哉

묻기를, 학문에는 소학과 대학이 있는데, 여기에서 이른 바 학이라는 것은 대학이 아니겠는가?

왈, 그렇지 않다. 배우고 익히며 익히고 말함은 무릇 학문이 모두 그러하니 대소로 간여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짐짓 쇄소응대의 일은 정히 문인 소자가 마땅히 우선해야 할 것이니 성인이 어찌 소략하게 하겠는가?

 

曰程子之於習 有兩義焉 何也 曰重復思繹者 以知者言也 所學在我者 以能者言也 學之為道 不越乎兩端矣 然諸說或槩舉其凡而不指其目 或各指其一而不能相兼 惟程子則先後兩言 皆指其目而有相發之功焉 然諸說如范謝楊尹 就其所指 亦各有所發明 但范氏所引性習近逺及伊尹之言 則與此章文意 為不類耳

묻기를 정자가 습에 대해서 양의를 둔 것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거듭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지자로 말함이요, 배운 것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능자로 말함이다. 학의 도됨은 양단을 넘지 않으나, 그러나 여러 설은 혹 그 평범한 것을 대략 들어 그 조목을 가리키지 않고, 혹은 각각 그 하나를 가리키고 능히 서로 겸하지 못하였다. 오직 정자는 선후의 두 말이 모두 그 조목을 가리키 서로 발명하는 공이 있다. 그러나 여러 설 가운데 범씨, 사씨, 양씨, 윤씨는 그 가리키는 바에 나아가 또한 각각 발명하는 바가 있지만, 다만 범씨는 인용한 바 성과 습은 가깝고 멀다는 것과 이윤의 말은 이 장의 문의와 같지 않을 따름이다.

 

曰時習之所以說諸說 孰近 曰夫習而熟 熟而說 脉絡貫通 最為精切 程子所謂浹洽者 是已 而祖其說者 皆莫知以為言 其次則惟范氏之所謂串 尹氏之所謂自得者 近之 然范氏本 為知所以修身治人而說 則不待習之串而已說矣 其後復引兌卦之象 乃有比於說而未正夫說之說 則是所謂習而串者 又未足以盡夫說也 其自為矛盾益 甚矣 或以為德聚而說者 語意亦疎 或借理義悦心之云 以為說則理義之可悅 乃人心之同 然不待習而後得也 或借習矣不察之云以為說則察之於習 已為二事而其於說 又不相關也 且凡竝緣假借 最釋經之大病 蓋或文句偶同而㫖意實異 或志意略似 而向背實殊 或反以彼之難 而釋此之易 或強以彼之有 而形此之無 使意已親者 引之而反疎 義已明者 引之而反暗 甚則彼此俱昧而欲互以相明 如獐邉之鹿 鹿邉之獐 循環無端而卒無所决 其偶值文意之適同而無前數者之患 亦不免為倚重於人而取信於外 終不若出於吾之所親見而自言者之的確而真實也 至於周氏 獨以習熟為言 則似矣 顧亦以為熟而察 察而說 則首尾衡决 氣脉不通 而不復有所發明也 豈其以習熟為常言而習察有經據 故必借而雜之其間 然後為慊耶

묻기를, 때때로 익힘이 기쁘다는 여러 사람의 설명 가운데 누가 이치에 가깝습니까?

왈, 익히면서 익숙하고 익숙하면서 기뻐함은 맥락이 관통함이 가장 정밀하고 긴요함이 되니, 정자가 이른 바 ‘협흡’이라는 것이 옳을 따름이나 그 설명을 조술하는 사람은 모두 그 말됨을 알지 못한다. 그 다음은 오직 범씨가 이른 바 ‘천(串)’이라는 것과 윤씨의 이른 바 ‘자득(自得)’이라는 것이 이치에 가깝다. 그러나 범씨는 본디 수기치인하는 바를 알기 때문에 기쁘다고 하니, 익힘이 관통함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기쁠 것이다. 그 뒤에 다시 태괘의 상(象)을 인용하여 곧 기쁨에 견줌이 있으나 기쁨의 설명이 바르지 못하니, 여기에서 이른 바 ‘익혀서 관통한다.’는 것은 또 기쁨을 다할 수 없으니, 그 스스로 모순이 됨이 더욱 심하다. 혹자는 덕이 모여서 기뻐한다고 생각하니, 그 말과 뜻이 또한 성글다. 혹자는 의리가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말을 빌려서 설명을 하니, 의리가 기뻐할 만함은 곧 인심이 함께 그러한 것이니, 익힘을 기다린 이후에 얻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익히되 살피지 않는다.’는 말을 빌려서 설명을 하니, 관찰함이 익힘에 있어서 이미 두 가지 일이 되어 그 기뻐함에 있어서 또 서로 관련이 없다. 또 무릇 병연(竝緣)하고 가차(假借)함은 가장 경전을 해석하는 큰 병통이니, 대개 혹 문구가 우연일 일치하나 뜻은 실로 다르고, 혹 뜻이 대략 비슷하지만 향배는 실로 다르다. 혹 도리어 저것의 어려움으로 이것의 쉬움을 풀이하고 혹 억지로 저것의 있는 것으로 이것의 없는 것을 형상하니, 가령 뜻이 이미 친밀한 것을 인용하여 도리어 소원하게 하고 뜻이 이미 분명한 것을 인용하여 도리어 어둡게 하니, 심하다면 피차가 모두 어두워 교대로 서로 밝히고자 함이 마치 노루 옆의 사슴(獐邉之鹿)과 사슴 옆의 노루(鹿邉之獐)이 순환함에 실마리가 없어져 마침내 결정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으니, 그 우연히 문의가 적합함을 만나서 앞 몇 사람의 근심이 없으나 또한 남에게 무거운 것을 기대어 밖에서 믿음을 취함을 면하지 못하니, 끝내 내가 직접 보는 바에서 나와 스스로 말한 것이 적확하고 진실함만 못하다. 주씨에 이르러서는 홀로 익혀 익숙함으로 말을 함은 근사하지만, 도리어 또 익숙히 하면서 살피고 살피면서 기뻐함으로 여긴다면 수미가 이긋나게 터져 기맥이 관통하지 않아 다시 발명함이 있지 않으니, 어쩌면 그 습숙(習熟)으로 떳떳한 말로 여기되// 익히고 살핌이 경전에 의거함이 있으므로 반드시 빌려서 그 사이에 섞은 이후에 만족으로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曰謝氏朋来之意 如何 曰不止其所 而放乎言外以為髙 此最謝氏之大弊也

묻기를, 사씨의 붕우가 온다는 뜻은 어떻습니까?

왈, 그곳에 그치지 않고 말 밖에서 방일하여 고원함으로 삼는 것은 사씨의 큰 폐단이다.

 

曰朋来之樂 奈何 曰以為樂其可以取益 以為樂其相與講學 則我方資彼 以為益 又能安自逺而来哉 以為樂其義理之不二 則是未能自信而藉外以為樂也 以為樂於才大而友逺 以為樂於充實輝光 而聞譽有以致之 則是以 此自幸而有驕吝之私也 至於知不講之為憂 則知講學以為樂 則正前所謂以彼之有 形此之無者 夫樂與不樂 决於吾心 可矣 豈待此而後判耶 惟以程子之言求之 然後見夫可樂之實耳 且其以善及人而信從者衆之云 纔九字爾而無一字之虚設也 非見之明而驗之實 其孰能與於此 其次則游氏所謂成物者 為近之 但必引三樂以為言 則又墮於假借之病耳

묻기를, 벗이 이르면 즐겁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왈, 그 유익함을 취할 수 있음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그 서로 더불어 강학함을 즐거움으로 여긴다면 내가 바야흐로 저 사람에게 의뢰하여 유익함을 삼으니, 저 사람이 능하지 못하면 어찌 능히 먼 곳으로부터 오겠는가? 그 인과 의가 두 가지가 아님을 즐거워한다면 이것은 능히 스스로 자만하지 않고 밖에 빙자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이다. 재주의 커서 먼 지방 사람과 사귐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충실하고 빛나서 명성과 명예가 이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면, 이것이 이것으로 스스로 요행으로 여겨 교만하고 인색한 사사로움이 있을 것이다. 강학하지 못함이 근심이 됨을 앎에 이르러서 강학으로 즐거움으로 여김을 안다면, 정히 앞에서 이른 바 저의 있는 것으로 이것의 없는 것을 형상하는 것이니, 대저 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은 내 마음에서 결정함이 옳을 것이니, 어찌 이것을 기다린 이후에 판가름 되겠는가? 오직 정자의 말을 가지고 구한 이후에 즐거워할 만한 실재를 볼 따름이다. 또 선으로 남에게 미쳐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다.[以善及人而信從者衆]고 말한 것은 겨우 9자일 따름이다. 한 자라도 헛된 말이 없다. 식견이 밝고 징험함이 진실하지 않으면 누가 능히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은 유씨가 이른 바 ‘성물(成物)’이라는 것이 이치에 가깝지만 다만 반드시 삼락(三樂)을 인용하여 말을 하니 또 가차의 병통에서 빠졌을 따름이다.

 

曰然則程子所謂不見是而無悶者 非耶 且古人之言 必引詩書以為證 何哉 曰程子所謂易語 非其立意之所恃 而古人之引經 亦吾說已立 而資彼以為助耳 非初無所主 而藉彼以立也 且又有一說焉 嘗讀胡氏春秋獲麟之卒章 幾無一語之出於己 而讀者不覺其為他人之辭也 若此者 又安得以假借而病之耶

묻기를, 그렇다면 정자가 이른 바 옳게 여김을 당하지 않더라도 근심함이 없다는 것은 그릇되었는가? 또 고인의 말은 반드시 시경과 서경을 인용하여 증명함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정자가 이른 바 주역의 말은 뜻을 세움의 믿는 바가 아니요. 고인이 경전을 인용함은 또한 나의 말이 이미 수립됨에 경전에 의뢰하여 도움으로 삼을 따름이요, 애초에 주장하는 것이 없는데, 경전에 의뢰하여 수립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일설이 있으니, 일찍이 호씨 춘추 획린의 마지막 장을 읽었는데 거의 한 마디 말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없는데 읽는 사람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말이 됨을 알지 못하니, 이와 같은 것이 또 어찌 가차로 병통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曰說樂 皆出於心 而程子有内外之辨 何也 曰程子非以樂為在外也 以為積滿於中 而發越乎外耳 說則方得於内而未能達乎外也 或不及此而反其言 則失之 甚矣

기뻐하고 즐거워함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데 정자가 안과 밖의 구분을 둔 것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정자는 즐거움으로 밖에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마음에 가득 쌓여서 밖으로 발현된다고 생각하였을 따름이다. 기뻐함은 막 마음에 얻었으나 아직 밖으로 이르지 않은 것이다. 혹 이것에 미치지 않았는데 그 말을 뒤집는다면 잃음이 심할 것이다.

 

曰不愠之說 孰為得之 曰君子之學 固不求人之知 亦非有意於求人之不知也 然有實者 人自知之 豈必有求知之心然後 人得以知之耶 此所謂人不知者 正以冝見知而或有不然者耳 而或者乃以聖人之事當之 則已過髙而失之矣 至其為說 又謂上焉者 存其德 修其身 故人莫得而知之 下焉者 為善以求知而後 人得以知焉 則亦疎且戾矣 且其以潛龍無悶 為聖人之德 有諸内而形諸外 乃下焉者之事 則是乾之六爻 獨初九為盛德 至於九二之德 博而化 則既少貶而九五之萬物咸覩 反為下焉者之為矣 世豈有此理哉 有引老聃 知我者 希則我貴以為說者 則又過髙而有自私之病 夫君子固不求人之知 然豈有幸人之不知而自喜其身之貴者哉 異端之言 大率如此 引者豈偶未之思與 又引孔顔之樂以明 此句之義 亦猶聖者能之之云耳 又有謂不愠則其自待厚者 又有謂安於命 故不愠者 皆非 夫君子之不愠 自見其無可愠耳 豈以自待之厚與廹於不得已而後然哉 又有引不念舊惡以明之者 則非 其類又有以遺佚不怨 阨窮不憫 當之 則亦已太髙矣 又有以為既說且樂 便能不愠者 則其說似 亦太快 不若程子楊氏為得之也 至論其所以然者 則尹氏為尤切 使人之始學 即知是說 以立其心 則庶乎其無慕於外矣

묻기를 성내지 않는다면 설명은 누가 이치를 얻었습니까?

왈, 군자의 학문은 진실로 남이 알아줌을 구하지 않고, 또한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구함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재가 있다면 남이 절로 아니, 어찌 반드시 알아줌을 구하는 마음이 있은 이후에 남이 알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이른 바 인불지(人不知)라는 것은 정히 마땅히 알려져야 하지만 혹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따름이다. 혹자는 성인의 일로 해당시켰다면 이미 지나치게 고원하고 잘못 되었을 것이다. 그 설명함에 이르러서 상(上)이라고 이르는 것은 그 덕을 보존하여 그 몸을 닦기 때문에 사람이 알지 못하고 하(下)라고 말하는 것은 선을 행하여 앎을 구한 이후에 사람이 알 수 있다면 또한 성글고 어긋날 것이다. 또 그 잠겨 있는 용은 근심이 없다는 것으로 성인의 덕으로 삼아 마음에 소유하여 외면으로 드러남은 곧 하자의 일이니, 이것은 주역 건괘 육효(六爻)에 유독 초구(初九)가 성덕이 되고 구이(九二)의 덕에 이르러 넓고 변화된다면 이미 조금 부족하고 구오(九五)의 만물이 모두 봄에 도리어 하자의 행위로 삼으니 세상에 어찌 이 이치가 있겠는가? 노담(老聃)의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면 내가 귀하다.[知我者希則我貴]’는 것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사람이 있으니, 또 지나치게 고원하여 스스로 사사로운 병통이 있다. 대저 군자는 진실로 남이 알아줌을 구하지 않으나, 그러나 어찌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겨 스스로 그 몸이 귀해짐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단이 말이 대체로 이와 같으니, 인용한 사람이 어쩌면 우연히 아직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 공자와 안자의 즐거움을 인용하여 밝히니, 이 구절의 뜻은 또한 오히려 성인이 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 또 성내지 않는다면 그 스스로 지킴이 두텁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또 명에 편안하기 때문에 성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 모두 잘못되었다. 군자가 성내지 않음은 절로 성낼만 한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을 따름이니, 어찌 스스로 지킴이 두텁움과 부득이함에 절박한 이후에 그러하겠는가? 또 지난 악행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인용하여 증명하는 사람이 있으니 잘못되었다. 그와 비슷한 것 가운데 또 ‘남겨지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며, 곤궁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해당시키는 사람이 있으니, 또한 이미 너무 고원하다. 또 이미 기뻐하고 또 즐거워하여 문득 능히 성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설명이 비슷하지만 또한 너무 빠르니, 정자와 양씨가 이치를 얻음이 됨만 못하다. 그 소이연을 논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윤씨가 더욱 긴절하다. 사람이 처음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곧 그 말을 알아서 그 마음을 세운다면 거의 밖으로 사모함이 없을 것이다.

 

曰有信於始中終 為此章之說 何如 曰是其言之也約 未有以見其得失 然亦無所當於文義矣

묻기를, 시중종에 믿음이 있음이 이 장의 설명이 됨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이것은 그 말이 요약됨이니, 그 득실을 볼 수 있지 않지만 그러나 또한 문의에 합당한 바는 없을 것이다.

 

曰是諸先生君子之說 子程子則不容議矣 故問餘說之大體得失 何如 曰是亦豈區區之所 敢議 然嘗竊揣之 則其寛平正大者 或失於未精 整峻嚴恪者 或苦於未暢 通達竒偉者 或有過髙之病 醖藉敷腴者 或有柔緩之失 而清和靡密者 又未免牽合支離之患也 惟周氏敦厚易直 雖言不皆中 而頗有醲郁之風 尹氏平淡簡約 雖意有不周而其精實之味 為不可及耳 若張子之學 雖原於程氏 然其博學詳說 精思力行而自得之功多矣 故凡其說 皆深約嚴重 意味淵永 自成一家之言 雖或有賢知之過 如程子之所譏者 然其大體 非人所能及也

묻기를, 여기서 여러 선생 군자의 설에 있어서 정자는 의논함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여러 설의 대체와 득실은 어떠합니까?

왈, 이것을 또한 어찌 내가 감히 의논하겠는가? 그러나 일찍이 가만히 헤아려 보니, 관평하고 정대한 것은 혹 정밀하지 못함에서 잘못되고, 정준하고 엄각한 것은 혹 통하지 못한 것에서 괴로우며, 통달하고 기위한 것은 혹 지나치게 높은 병폐가 있고, 온자(醖藉) 부유(敷腴)한 것은 혹 유순하고 느린 실추가 있으며, 청화(清和)하며 비밀(靡密)한 것은 또 견합(牽合)하고 지리(支離)한 근심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고, 오직 주씨(周氏)만이 돈후하고 평이하고 곧으니 비록 말이 모두 알맞지 못하나 자못 농욱(醲郁)한 풍모가 있다. 윤씨는 평담하고 간약(簡約)하여 비록 뜻이 두루하지 못하는 것이 있지만 그 정실(精實)한 맛은 미칠 수 없을 따름이다. 장자의 학문은 비록 정씨에게서 근원하지만, 그러나 박학하고 자세히 설명하고 정밀하고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스스로 얻은 공로가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그 설명이 모두 깊이 요약되고 엄중하며 의미가 깊고 길어서 스스로 일가의 말을 이루니, 비록 혹 현지(賢知)의 지나침이 정자가 기롱한 바와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대체는 사람이 능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

 

曰謝楊之書 傳者 不同 何也 曰謝氏之書 今本出於胡氏 蓋其所裁定者 比舊為差約 然語脉 亦有不貫處 顧無大害 不復追正爾 楊氏書 乃其所自筆削 前後三本 今此乃其中本 亦有改之 而反不如舊者 如此章 初本未有承蜩貫蝨兩句 文意自完 中本增之 則語渉空幻 而上下文意 亦齟齬而不屬矣 後本改 為持弓矢審固正已而後發 雖則稍就平實 又覺其辭意燥澁 而未免齟齬之病 殊不可曉也

묻기를, 사씨와 양씨의 책이 전하는 것이 같지 않음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사씨의 책은 지금 본은 호씨에게서 나왔으니, 대개 재정한 구본과 비교하면 자못 요약되었다. 그러나 말의 맥락은 또한 관통하지 못한 곳이 있지만 도리어 크게 나쁜 것은 없으니, 다시 미루어 바로잡지 않을 따름이다. 양씨의 책은 곧 그가 스스로 쓰고 고친 바 전후 3본이니, 지금 이것은 곧 그 중간본이나, 또한 고쳐서 도리어 고치기 전보다 못한 것이 있다. 이 장과 같은 것은 초본에는 승주(承蜩) 관슬(貫蝨) 두 구는 있지 않지만 문의는 절로 완전하더니, 중간본에 첨가하니 말이 공허하며 허황하고 상하의 문의는 또한 어긋나서 이어지지 않는다. 후본에 고쳐 ‘궁시를 가지고 자세하고 견고하게 하여 자기를 바르게 한 이후에 발사한다.[持弓矢審固正已而後發]고 하니, 비록 조금 평실(平實)함에 나아갔으나, 또 그 말과 뜻이 조삽(燥澁)하여 어긋나는 병통을 면하지 못함을 깨달으니, 자못 이해할 수 없다.

 

2. 或問仁何以為愛之理也 曰人禀五行之秀 以生 故其為心也 未發則具仁義禮智信之性 以為之體 已發則有惻隱羞惡恭敬是非誠實之情 以為之用 蓋木神曰仁 則愛之理也 而其發為惻隱 火神曰禮 則敬之理也 而其發為恭敬 金神曰義 則冝之理也 而其發為羞惡 水神曰智 則别之理也 而其發為是非 土神曰信 則實有之理也 而其發為忠信 是皆天理之固然 人心之所以為妙也 仁之所以為愛之理 於此 其可推矣

혹이 묻기를, 인이 어떻게 사랑의 이치가 됩니까?

왈, 사람이 5행의 빼어난 것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그 마음이 아직 드러나지 않으면 인의예지신의 성품을 갖추어 체(體)로 삼고, 이미 드러나면 측은 수오 공경 시비 성실의 정이 있어 용(用)으로 삼으니, 대개 목신을 인이라고 하니 사랑의 이치요, 측은지심을 드러낸다. 화신을 예라고 하니 경의 이치요,

그 공경을 드러내고, 금신을 의라고 하니 마땅함의 이치요, 그 수오지심을 발하고, 수신을 지라고 하니 분별의 이치요, 그 시비지심을 발하고, 토신을 신이라고 하니 진실로 소유한 이치요, 그 충신을 발하니, 이것은 모두 천리가 진실로 그러하니 인심이 오묘함이 되는 바이요, 인이 사랑의 이치가 되는 바를 여기에서 미룰 수 있다.

 

或曰然則程子以孝弟為行仁之本 而又曰論性則以仁為孝弟之本 何也 曰仁之為性 愛之理也 其見於用 則事親從兄 仁民愛物 皆其為之之事也 此論性而以仁為孝弟之本者 然也 但親者我之所自出 兄者同出而先我 故事親而孝 從兄而弟 乃愛之先見而尤切 人苟能之 則必有不好犯上作亂之效 若君子以此為務 而力行之 至於行成而德立 則自親親而仁民 自仁民而愛物 其愛有差等 其施有漸次 而為仁之道 生生而不窮矣 又豈特不好犯上作亂而已哉 此孝弟所以為行仁之本也

혹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정자가 효제를 인을 행하는 근본으로 삼고, 또 성품을 논함에 인으로 효제의 근본으로 여긴 것은 어째서입니까?

왈, 인은 성이 되니 사랑의 이치이다. 그 용(用)에 나타는 것은 사친(事親) 종형(從兄)과 인민(仁民) 애물(愛物)이 모두 일삼는 일이다. 여기에서 성을 논함에 인으로 효제의 근본이라고 한 것이 그러하다. 다만 어버이는 나가 태어난 바이고, 형은 한 가지에서 태어나 내보다 먼저 태어났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섬김이 효이고, 형을 따름이 제(悌)이니, 곧 사랑이 먼저 나타나고 더욱 간절하니, 사람이 진실로 능하다면 반드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고 난을 일으킴을 좋아하지 않는 효험이 있다. 만약 군자가 이것으로 일로 삼아 힘써 실천하여 행실이 이루어지고 덕이 섬에 이를 것 같으면 어버이를 친하게 여김으로부터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함으로부터 만물을 사랑하니, 그 사랑에는 차등이 있고 그 베풂에는 점점의 차례가 있어 인을 실천하는 도가 나고 나서 다하지 않을 것이다. 또 어찌 다만 윗사람을 범하고 난을 일으킴을 좋아하지 않을 따름이겠는가? 이것은 효제가 인을 행하는 바의 근본이 되는 바이다.

 

曰然則所謂性中只有仁義禮智而無孝弟者又何耶 曰此亦以為自性而言 則始有四者之名 而未有孝弟之目耳 非謂孝弟之理 不本於性而生於外也

묻기를, 그렇다면 이른 바 “성 가운데에는 다만 인의예지만 있고 효제는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왈, 이것은 또한 생각건대, 성으로부쿠 말한다면 처음 4가지의 이름이 있고 효제의 조목이 있지 않을 따름이니, 효제의 이치가 성에 근본하지 않고 밖에서 나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曰然則君子之務孝弟 特以為為仁之地也耶 曰不然 仁者 天之所以與我而不可不為之理也 孝弟者 天之所以命我而不能不然之事也 但人為物誘而忘其所受乎天者 故於其不能不然者 或忽焉 而不之務於此 不務則於其所不可不為者 亦無所本而不能以自行矣 故有子以孝弟為為仁之本 蓋以為是皆吾心之所固有 吾事之所必然 但其理有本末之殊 而為之 有先後之序 必此本先立而後其末 乃有自而生耳 非謂本欲為彼而姑先借此以為之地也 大率聖賢之言 若此類者甚衆 皆以是說求之則不失其立言之㫖矣

묻기를, 그렇다면 군자가 효제가 효제를 힘씀에 다면 인을 행하는 근본으로 삼는가?

왈, 그렇지 않다. 인이라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하여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이다. 효제라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사람이 물욕에 유혹되어 그 하늘에서 받은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능히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에 대해서 혹 소홀하여 여기에서 힘쓰지 않으니, 힘쓰지 않는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의 것에 대해서 또한 근본하는 바가 없어 능히 스스로 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자가 효제로 인을 행하는 근본으로 삼았으니, 대개

이것은 내 마음의 고유한 바이고 내 일의 필연이니, 다만 그 이치는 본말의 다름이 있어 실행함에 앞뒤의 순서가 있으니, 반드시 이 근본이 먼저 수립된 이후에 그 말이 곧 절로 생겨나는 것이 있을 따름이요, 본디 저것을 하고자 함에 우선 이것을 빌려 지경으로 여긴다고 이르는 것은 아니니, 대저 성현의 말이 이러한 종류같은 것이 심히 많으니, 모두 이 논설로 구한다면 그 입언의 뜻을 잃지 않을 것이다.

 

曰然則義禮智信 為之 亦有本耶 曰有 請問之曰亦孝弟而已矣 但以愛親而言 則為仁之本也 其順乎親 則為義之本也 其敬乎親 則為禮之本也 其知此者 則為知之本也 其誠此者 則為信之本也 蓋人之所為 五常百行之本 無不在於此 孟子之論仁義禮智禮樂之實者 正為是爾 此其所以為至德要道也歟

 

묻기를, 그렇다면 인의예지신을 실천함에 또한 근본이 있는가?

왈, 있다. 청하여 물으니, 또한 효제일 따름일 것이다. 다만 애친으로 말한다면 인을 행하는 근본이 된다. 그 어버이에게 순종함은 의를 행하는 근본이 된다. 어버이에게 공경한다면 예의 근본이 된다. 이것을 안는 것은 지를 행하는 근본이다. 이것을 성실히 함은 신을 행하는 근본이다. 대개 사람이 하는 바 오상과 백행의 근본이 여기에 있지 않음을 없으니, 맹자가 인의 예지 예악의 실재를 논하는 것은 정히 이것을 할 따름이니, 이것은 그 지덕(至德)과 요도(要道)가 되는 바일 것이다.

 

曰諸家之說 如何 曰范說大槩得之 但所引修身正心誠意者 為衍說耳 孝弟 自為人道之大端 非以其可以誠意而先之也 且所謂誠意者 欲其造次顛沛之間 思慮隱微之際 必以誠實而無一毫自欺之心 又豈獨於孝弟一事為然哉 為是說者 既不察乎論語之文 又不考乎大學之意 其亦甚矣 謝氏則正與程子說中 或人所問 由孝弟 可以至仁者 相似 而反乎程子之說者也 但其意不主乎為仁 而主乎知仁 比之 或說其失益逺耳 蓋其平日論仁 嘗以活者為仁 死者為不仁 但能識此活物 乃為知仁而後 可以加操存踐履之功 不能識此則雖能躬行力踐 極於純熟 而終未足以為仁也 夫謂活者為仁 死者為不仁 可矣 必識此然後 可以為仁則其為說之誤也 其誤如此 故其於旁引四條者 皆有若不知仁 則但為某事而已之說而又以孝弟特為近仁而非仁也 夫四條者 皆所以求仁之術 謂之非仁 猶可也 若孝弟 則固仁之發 而最親者 如木之根水之源 豈可謂根近木而非木 源近水而非水哉 其曰以事親從兄充之 則何往而非仁 又以不好犯上作亂 特為閭巷之人 由而不知之事 必其深念自省而有以察夫事親從兄之時之心然後 為知仁皆此意也 夫曰由孝弟充之而後 為仁 則是孝弟 非仁 必其識此活物而充之然後為仁也 故又以為閭巷之人 徒能謹於事親從兄 而不識其為活物 則終不可以入道 必其潛聴黙伺 於事親從兄之時 幸而得其所謂活物者然後 可以為知仁也 然直曰知仁 而不曰為仁 則又并與其擴充之云者 而忘矣 必如其說則是方其事親從兄之際 又以一心 察此一心 而求識夫活物 其所重者 乃在乎活物 而不在乎父兄 其所以事而從之 特以求夫活物而 初非以為吾事之當然也 此蓋源於佛學之餘習 而非聖門之本意 觀其論此 而吕進伯以為猶釋氏之所謂禪彼 乃欣然受之 而不辭 則可見矣 又所謂人心之不偽 莫如事親從兄者 亦非是有子之意 乃論其當然之要 非論其偽不偽也 且若専以孝弟為不偽 則五常百行 豈皆出於人為之偽耶

묻기를, 여러 사람의 설은 어떻습니까?

왈, 범씨의 설이 대개 옳다. 다만 인용한 바 수신, 정심, 성의라는 것은 불필요한 말일 따름이다. 효제는 절로 인도의 큰 단서이니, 그 성의로서 우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른 바 ‘성의’라는 것은 순간 혹은 넘어지는 사이와 생각의 은미한 즈음에 반드시 성실하여 털끝만큼 이라도 스스로 속이는 마음이 없고자 하니, 또 어찌 유독 효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그러하겠는가? 이 말을 한 것은 이미 논어의 본문에서 살피지 않았고, 또 대학의 의사를 상고하지 않음이 그 또한 심할 것이다.

사씨는 정히 정자의 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물은 바 ‘효제로 말미암아야지만 인에 이를 수 있다.[由孝弟 可以至仁]’는 것과 더불어 서로 같지만 정자의 설명과는 반대가 된다. 다만 그 사씨의 뜻은 인을 행함을 주장하지 않고 인을 아는 것을 주장하니, 혹자의 설명에 견주면 그 잘못됨이 더욱 아득할 따름이다. 대개 그 평소 인을 논함에 일찍이 활자(活者)로 인을 삼고 사자(死者)로 불인을 삼았으니, 다만 능히 이 활물을 알아서 곧 인을 안 이후에 조존(操存)하고 실천하는 공을 더할 수 있고, 능히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능히 몸소 실천함이 순수하고 익숙함에 지극하더라도 끝내 인이 될 수가 없다. 대저 사는 활자가 인이 되고 사자가 불인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반드시 이것을 안 이후에 인이 될 수 있다면 그 설의 잘못이다. 그 오류가 이와 같기 때문에 그 두루 4가지 조목을 인용한 것에 모두 만약 인을 알지 못한다면 다만 남의 일이 될 따름이라는 설이 있고, 또 효제로 다만 인에 가깝지만 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대저 4조목 이라는 것은 모두 인을 구하는 방법이요, 인이 아니라고 말하면 오히려 옳거니와, 효제는 진실로 인이 발동한 가운데 가장 친절한 것이 나무의 뿌리, 물의 근원과 같으니, 어찌 뿌리가 나무에 가까우면 나무가 아니겠으며 근원이 물에 가까우면 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사친과 종형으로 확충한다면 어디를 간들 인이 아니겠는가? 또 윗사람을 범하고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않음으로 다만 여항의 사람이 말미암아 알지 못하는 일로 삼았으니, 반드시 그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반성하여 사친 종형하는 때의 마음을 살핀 이후에 인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뜻이다.

대저 효제로 확충한 이후에 인이 된다면 이 효제는 인이 아니니, 반드시 이 활물을 알아 확충한 이후에 인이 된다. 그러므로 또 여항의 사람이 한갓 능히 사친 종형에서 부지런히 행하면서 그 활물이 됨을 알지 못한다면 끝내 도에 들어갈 수 없으니, 반드시 그 사친 종형하는 때에 가만히 듣고 묵묵히 기다려 다행히 이른 바 활물을 얻은 이후에 인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인을 안다고 하고 인을 함을 말하지 않았으니, 또 아울러 그 확충이라고 말하는 것과 망각을 하고 만 것이니, 반드시 그 말과 같다면 이것은 바야흐로 그 사친 종형하는 즈음에 또 한 마음으로 이 한 마음을 살펴 활물을 앎을 구하니, 그 중점은 곧 활물에 있고 부형에게 있지 않으니 섬겨 따르는 것은 다만 활물을 구함이요, 애초에 내 일의 당연함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개 불학의 남은 습속에 근원하고 생문의 본래 뜻은 아니다.

그 이것을 논하되 여진백(吕進伯)이 생각하기를 오히려 석씨가 이른 바 ‘선’이라고 여긴 것을 저가 곧 기쁘게 받아서 사양하지 않음을 관찰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른 바 인심이 거짓되지 아니함은 사친과 종형 같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은 또한 유가의 뜻이 아니니, 곧 그 당연한 요체를 논한 것이요, 그 거짓과 거짓되지 않음을 논한 것은 아니다. 또 만약 오로지 효제로 거짓되지 않음으로 여긴다면 오상과 백행이 어찌 모두 인위적인 거짓에서 나오겠는가?//

 

曰然則程子之論手足頑痺為不仁者 奈何 曰是固所謂愛之理者 與謝氏活者之說 相似 而其所以用力者 不同 學者不可不察也 蓋人能事親而孝 從兄而弟 則是吾之所謂愛之理者 常存不息而為仁之本 於此乎在也 事親而不知所謂孝 從兄而不知所謂弟 則是吾之本心 頑然不仁而應乎事者 皆不得其當 如手足之痺頑矣 仁與不仁 皆必責之踐履之實 非若謝氏反因孝弟以求活物 幸其瞥然見之 而遂以為得仁也

묻기를, 그렇다면 정자가 의논에 수족이 마비됨이 불인이라고 한 것은 어떻습니까?

왈, 이것은 진실로 이른 바 사랑의 이치라는 것이니, 사씨의 활자의 의논과 같지만 그 힘을 씀은 같지 않으니, 학자들은 살펴야 한다.

대개 사람이 능히 어버이를 섬겨 효가 되고 형에게 순종하여 공경이 된다면 이것은 내가 이른 바 사랑의 이치라는 것이 항상 보존되어 종식되지 않아 인을 행하는 근본이 여기에서 존재한다. 어버이를 섬기지만 이른 바 효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형에게 순종하되 이른 바 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나의 본심이 완전히 불인하여 일에 호응하는 것이 모두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함이 마치 수족이 마비됨과 같을 것이다. 인과 불인은 모두 실천하는 실재를 요구하니, 사씨가 도리어 효제로 인하여 활물을 구하고, 그 언듯 봄을 다행으로 여겨 마침내 인을 얻는다고 여기는 것과는 같지 않다.

 

曰游氏以下諸說得失 願卒聞之 曰游氏說不好犯上作亂者得之 其論為仁之本則失程子之意矣 楊氏舉彼加此之說得之 其引有犯無隱則非本文之㫖矣 其曰務本之一事 蓋以務本為汎言 而孝弟為指其事耳 然曰一事 則似有大務本 而小孝弟之意 亦其言之小疵也 周氏進於道者 不可曉 豈非猶有惑志於老氏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之說耶

묻기를, 사씨 이하 여러 사람의 의논의 옳고 잘못됨을 원컨대 마침내 묻습니다. 왈, 유씨의 의논 가운데 ‘不好犯上作亂’은 옳고, 그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말한 것은 정자의 뜻을 잃었다.

양씨는 저것을 들어 여기에 더한다는 말은 옳고, 그 범함이 있을지언정 숨김은 없어야 한다[有犯無隱]는 것을 인용함은 본문의 뜻이 아닐 것이다. 그 근본에 힘쓰는 한 가지 일이라고 말한 것은 대개 근본에 힘쓰는 것으로 널리 말함으로 삼고 효제로 그 일을 가르킨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근본에 힘씀을 크게 여기고 효제를 작게 여긴 뜻이 있는 듯하니, 또한 그 말의 작은 병폐이다.

주씨는 도에 나아간 것은 이해할 수 없으니, 어쩌면 오히려 노자의 도를 잃은 이후에 덕이 되고 덕을 잃은 이후에 인이 된다는 의논에 뜻을 의혹시킴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3. 或問子於前章 既以仁為愛之理矣 於此 又以為心之徳 何哉 曰仁之道大 不可以一言而盡也 程子論乾四德而曰四德之元 猶五常之仁 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 推此而言 則可見矣 蓋仁也者 五常之首也 而包四者 惻隱之體也 而貫四端 故仁之為義 偏言之則曰愛之理 前章所言之類 是也 專言之則曰心之德 此章 所言之類 是也 其實愛之理 所以為心之德 是以 聖門之學 必以求仁為要 而語其所以行之者 則必以孝弟為先 論其所以賊之者 則必以巧言令色為甚 記語者 所以列此二章於首章之次 而其序又如此 欲學者知仁之為急 而識其所當務與其所可戒也

혹자가 묻기를, 그대가 앞 장에서 이기 인을 사랑의 이치라고 하였고, 여기에서는 또 마음의 덕이라고 한 것이 무엇 때문인가?

왈, 인의 도는 커서 한 마디 말로 다 말할 수 없다. 정자가 건의 4덕을 논함에 4덕의 원(元)은 5상의 인과 같으니, 치우쳐 말하면 한 일이요, 전적으로 말하면 4가지를 포함한다고 하니, 이것으로 미룬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인이라는 것은 5상의 으뜸이요, 4가지를 포함하고, 측은지심의 체(體)요 4단을 관통하기 때문에 인의 뜻 됨은 치우쳐 말한다면 사랑의 이치이라고 하니, 앞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이 이것이요, 전적으로 말한다면 마음의 덕이라고 하니, 이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 그 실재 사랑의 이치는 마음의 덕이 되니, 이 때문에 성인 문하의 학문은 반드시 인을 구함을 요체로 삼으니 그 실행함을 말한다면 반드시 효제로 우선하고, 해침을 논한다면 반드시 ‘巧言令色’으로 심함으로 삼으니, 논어를 기록한 사람이 이 2장을 1장의 다음에 나열하고 그 순서가 또 이와 같으니, 학자로 하여금 인이 급함이 됨을 알고 그 마땅히 힘써야 할 바와 그 경계할 것을 알게 함이다.

 

曰夫子所謂鮮仁 程子乃以非仁釋之 何也 曰夫子之言 所謂辭不廹切 而意已獨至者也 程子則懼夫讀者之不察 而於巧言令色之中 求少許之仁焉 是以推本聖人之意 直斷其不仁 以解害辭之惑也 說經如此 其可謂有功矣 而後之說者 猶紛紛然 置曲說於其間 其亦不察也夫

묻기를, 부자가 이른 바 선인(鮮仁)을 정자는 곧 인이 아니다고 해석한 것은 무엇입니까?

왈, 부자의 말은 이른 바 “말은 박절하지 않지만 뜻은 이미 지극 하다.[辭不廹切而意已獨至]”라는 것이다. 정자는 독자들이 성찰하지 않아 교언영색 가운데에 조금의 인을 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성인의 뜻을 미루어 근본하여 곧바로 그것이 불인이라고 단정하여 말을 해치는 의혹을 해명한 것이다. 경전을 설명함이 이와 같으니 공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후학들이 설명함이 오히려 어지럽게 잘못된 설명을 그 가운데에 두었으니 살피지 않은 것이로다.

 

曰范氏之說 如何 曰聖人之意 所謂鮮矣仁者 蓋曰如是之人 少有仁者之云耳 非謂如是之人 其仁少也 今曰有時而仁 又曰其心未必不仁 則失之矣 夫人心本 皆仁 雖或賊之 而豈可以多少論哉 且曰有時 則又不在乎心 而在乎時矣 又曰為利而其心未必不仁 則豈有其心為利而猶得為仁者耶 是皆牽於鮮之為少 而不察乎聖言婉微之體 是以 曲為之說 而失之 觀夫程子之言 則可以見其得失矣

범씨의 논설은 어떻습니까?

왈, 성인의 뜻은 이른 바 선의인(鮮矣仁)라는 것은 대개 이와 같은 사람은 인이 있는 사람이 적다고 말했을 따름이요, 이와 같은 사람은 그 인이 적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거늘 지금 때때로 인함이 있다고 말하고, 또 그 마음이 반드시 불인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잘못 되었다. 대저 마음의 본심은 모두 인하니, 비록 혹 해쳤더라도 어찌 많고 적음으로 논의할 수 있겠는가? 또 때에 있다고 말한다면 또 마음에 있지 않고 때에 있을 것이다.// 또 이익을 위하면 그 마음이 반드시 불인하지 않다고 말하니, 어찌 그 마음이 이익을 위하면서 오히려 인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 선(鮮)이 적음이 됨에 견인되어 성인 말씀의 완미한 본체를 살피지 않으니, 이 때문에 잘못 설명하여 망실하였다. 정자의 말을 관찰한다면 그 득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曰吕氏之說 不亦善乎 曰言固欲巧而不可巧其言 色固欲令而不可令其色 今曰欲巧欲令而不明此意 則已疎矣 且徒以修之内外為别而不知為已為人之有異 亦未足以定取舎之極也 蓋誠為已也 則修於外者 乃所以養其内而不患本之不立 誠為人也則其飾乎外者 安得謂之修 其為害 又豈但本之不立而已哉

묻기를, 여씨의 설명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왈, 말은 진실로 공교롭고자 하지만 그 말을 공교롭게 할 수 없고 안색은 진실로 아름답게 하고자 하지만 그 안색을 아름답게 할 수 없거늘 지금 공교롭게 하고자 하고 아름답게 하고자 하면서 이 뜻을 밝히지 않다고 말하면 이미 성글다. 또 한갓 내외를 닦는 것으로 분별을 삼고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의 다름을 알지 못하니, 또한 취사의 지극함을 정할 것이 못된다. 대개 진실로 자신을 위함에 외면을 수양하는 것은 곧 그 내면을 함양함이요 근본이 서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고, 진실로 남을 위함에 그 외면을 꾸미는 것이 어찌 닦음을 이르겠는가? 그 해됨이 또 어찌 다만 근본이 서지 않을 따름이겠는가?

 

曰謝氏之說 所引多端而不為判决 子以其意為如何也 曰彼其所引 若多端者 然一言以蔽之 亦曰為已為人之不同而已 蓋意誠在於為已 則容貌辭氣之間 無非持養用力之地 一有意於為人 而求其說巳 則心失其正而鮮仁矣 故夫子告顔淵以克己復禮之目 不過視聴言動之間 而曾子所言 君子所貴乎道者 亦在於容色辭氣四者而巳 所謂遜以出之情信辭巧者 但不欲其直情徑行 以招悖入之患而已 至於詩人所謂令儀令色者 則大賢成德 能逺暴慢之效 郷黨之所記 恂恂怡怡者 則聖人盛徳之至 動容周旋中禮之妙也 若夫小人訐以為直 色厲内荏 則雖若與為巧令者不同 然覈其矯情飾偽之心 則實巧令之尤者耳 學者 於謝氏之說 以是辯之 庶乎其得之也 但所謂出詞氣者 則非曾子之意 請及其本章而論之

묻기를, 사씨의 설명은 인용한 것이 단서가 많고 판결하지 않으니 그대는 그 뜻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왈, 저 사람이 인용한 것이 단서가 많은 것 같지만 그러나 한 마디 말로 가린다면 또한 위기와 위인이 같지 않을 따름이다. 대개 뜻이 성실함이 자신을 위함에 있다면 용모와 말씨의 사이에 가지고 기르며 힘을 쓰는 곳이 아님이 없는데, 한결 같이 타인을 위함에 뜻이 있으면서 그 자신을 기쁘게 함만을 구한다면 마음이 그 바름을 잃어서 인함이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안연에게 극기복례의 조목을 알려줌에 시청언동의 사이에 지나지 않고, 증자가 말한 군자가 도를 귀중하게 여김은 또한 용모와 용색사기(容色辭氣) 4가지에 있을 따름이다. 이른 바 공손히 내어서 정신사교함은[遜以出之 情信辭巧]는 것은 다만 그 정을 곧게 하고 행실을 빨리하여 잘못되어 들어오는 근심을 부르지 않고자 할 따름이다. 시인이 이른 바 위의를 아름답게 하고 안색을 아름답게 한다[令儀令色]는 것은 대현과 성덕이 능히 포악하고 태만함을 멀리하는 징험이요, 향당에 기록한 신실하며 화평하다[恂恂怡怡]는 것은 성인의 성덕의 지극함이요, 용모를 움직이고 주선함이 예에 알맞은 묘체이다. 소인이 들추어내어 곧음으로 삼고 안색은 사나우면서 내면은 유약함과 같다면 비록 공교롭게 아름답게 하는 사람과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감정을 억누르고 꾸미고 거짓된 마음을 밝힌다면 진실로 교언영색이 뛰어난 것일 따름이다.

학자는 사씨의 논설에 대해서 이것으로 분별한다면 그의 얻을 것이다. 다만 이른 바 사기를 낸다는 것은 증자의 뜻이 아니니 청컨대 그 본문의 문장에 미쳐서 의논하리라.

 

曰游楊周氏之說 如何 曰游氏大抵不切而其所謂誠敬偽謟者 名義 皆若未當 其曰不絶其為仁者 則又若范氏之失 而小不同也 楊氏所謂便儇皎厲者 其初本也 意本甚正而其次本 乃引表記以為說 則本末倒置而非聖人之意矣 彼雖託於夫子之言 其流傳之有誤乎喜援據而不擇是非 其累有如此者 且不察乎巧令之所以為巧令者 亦若吕氏之失 其曰非盡不仁者 又若范游之失而復小不同也 蓋范氏乃以一人而言 游氏以二人惡有淺深而言 楊氏則直以善惡相對而言耳 若周氏者 其庶幾乎 然其曰違仁多矣 似亦失程子本意而狂者蕩愚者詐以下不可曉 豈其辭之未達者與 蓋范氏乃以一人而言 游氏以二人惡有淺深而言 楊氏則直以善惡相對而言耳 若周氏者 其庶幾乎然 其曰違仁多矣 似亦失程子本意而狂者蕩愚者詐以下不可曉 豈其辭之未達者與

묻기를, 유씨 양씨 주씨의 설은 어떻습니까?

왈, 유씨는 대저 간절하지 아니하니 그 이른 바 성경위첨이라는 것은 의를 이름한 것이 모두 합당하지 않은 듯하다. 그 인이 됨을 끊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또 범씨의 실수와 같아서 조금 같지 않다.

양씨가 이른 바 편현교려[便儇皎厲]라는 것은 그 초본에는 뜻이 본디 매우 옳지만 그 다음 본에 곧 『예기』의 표기(表記)를 인용하여 설명하니 본말이 도치되어 성인의 뜻이 아니다. 저가 비록 공자의 말에 의탁하였지만 그 전함에 끌어당겨 인용함을 좋아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음에서 그릇됨이 있어 그 여러 번 이와 같은 것이 있으니, 짐짓 교언영색이 교언영색이 되는 까닭을 살피지 않아 또한 여씨의 실수와 같다. 그 모두 불인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또 범씨와 유씨의 실수와 같아서 다시 조금 같지 않다. 대개 범씨는 곧 한 사람으로 말하였고, 유씨는 두 사람의 악이 깊고 앝음이 있는 것으로 말하였고, 양씨는 곧 선악을 상대하여 말했을 따름이다. 주씨와 같은 사람은 그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 인과 어긋남이 많다고 말한 것은 또한 정자의 본의를 잃은 듯하다. 광자는 방탕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속인다라고 말한 이하의 설명은 깨닫지 못하겠으니, 어쩌면 그가 말에 통달하지 못해서 인가?

 

4. 或問程子所謂盡已之謂忠 以實之謂信 何也 曰盡已之心而無隱 所謂忠也 以其出乎内者而言也 以事之實而無違 所謂信也 以其驗乎外者而言也 然未有忠而不信 未有信而不出乎忠者也 故又曰發已自盡謂忠 循物無違謂信 此表裏之謂也 亦此之謂而加密焉爾

혹이 묻기를, 정자가 이른 바 자신의 본분을 다함을 충이라고 하고 실상을 신이라고 말함은 무엇입니까?

왈,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숨김이 없음이 이른 바 충이니, 내면에서 나오는 입장으로 말함이요, 일의 성실함으로 숨김이 없음이 이른 바 신이니, 외면에 징험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충성스로우면서 미덥지 못한 사람은 있지 않고, 미덥고 충성에서 벗어나는 사람 있지 않다. 그러므로 또 말하기를, 자신을 발현하여 스스로 다함을 충이라고 말하고, 일을 따라 어김이 없음을 신이라고 말하니, 이것은 표리를 이르며, 또한 이것을 말함에 더욱 조밀할 따름이다.

 

曰程子又謂忠信者 以人言之 要之則實理者 何也 曰前章五常之目 已具此意矣 請復詳之 夫信之為信 實有之理也 凡性之所謂仁義禮智 皆實有而无妄者信也 所謂實理者 是也 其見於用 則出於心 而自盡者 謂之忠 以循物而無違者 謂之信 而凡四端之發 皆必以是為主焉 所謂以人言之 是也 蓋五行之氣 各居乎一方 而王一時 唯土無不在 故居中央而分王於四季 是乃天理之本然 而人之所禀以生者 莫不象之 此人之所以克肖天地 而為萬物之靈也

묻기를, 정자가 또 말하기를, 충신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말하니, 요약하면 실재 이치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왈, 앞 장 5상의 절목에 이미 이 뜻이 갖추어져 있다.

청컨대, 다시 상세함을 말하리라.

대저 신(信)이 신이 됨은 실재로 소유한 이치이다. 무릇 본성의 이른 바 인의예지는 모두 실재로 소유하여 망녕됨이 없는 것이 신이다. 이른 바 ‘실리’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 작용에 드러나면 마음에서 나와 스스로 다함을 충이라고 하고, 사물을 따라 어김이 없는 것을 신이라고 말하니, 무릇 사단의 발현이 모두 반드시 이것으로 주안으로 삼으니, 이른 바 사람으로 말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대개 5행의 기운은 각각 한 방향에 거하여 한 때에 왕성하고, 오직 토가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중앙에 거하여 왕성함을 4계절에 나누어주니, 이것은 천리의 본연이요 사람이 품부 받아 태어나는 것이 닮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사람이 능히 천지를 닮아 만물의 영장이 되는 까닭이다.

 

曰傳不習乎之說 不從程子范尹 而從謝楊周氏 何也 曰以文義考之 則然 且先忠信而後傳習 亦後章餘力學文之意

묻기를, 전함에 익히지 않았는가의 설명은 정자와 범씨의 설을 따르지 않고 사씨와 주씨의 설을 따름은 무엇입니까?

왈, 문의로 상고하면 그러하다. 또 충신을 먼저하고 전하여 익힘을 뒤로함은 또한 뒷 장 남은 힘이 있거든 문학을 배운다는 뜻이다.

 

或曰諸說 何如 曰謝說九流 皆出於聖 此蓋襲史遷之誤 又謂謀而忠 交而信 傳而習 為直知道無二致 人已為一而膠於無我者 則過之 又謂謀非臨事而謀 信非踐言而信 亦皆失於太髙而非事實 少有餘味也 游說雖非曾子之事 然深有警於學者 但以處已接人 正心應物 分而為二 則失之耳 蓋閒居獨處 固有所謂不動而敬 不言而信者 今曰立行無不信 則固以其循物無違者言之 而無不言不動之謂也 豈有接人之際 猶有不忠不信之累 而遽可謂之立行無不信 處已無可憾者乎 就使其立行之云 或出於一時立言之差而失其本章之所謂 則誠内形外 初無二致 未有正心處巳 無不忠信 至於内省一無可憾 接人之際 反入於不忠不信 而自不悟者也 至於正心誠意 則又初無專於内 而不通乎外之限 且既曰無須臾忘矣 則宜其動静語默 無一息之或違也 若應物之際 又遽失念如違仁則其所省正心誠意無須臾忘者 又安在耶 細考其說 似未免於老釋之弊 惜乎 其篤於為巳 而擇之 不精以至此也 楊氏傳習之說 得之 至於違仁違道之别 則吾有不知其說者矣 周氏 内則見道於忠信 外則見道於傳習 亦不可曉 豈其謂道别為一物而於此見之 亦如二章之失耶 且此章正為力行體道之實 亦不當以見道為說也

묻기를, 여러 사람의 설명은 어떻습니까?

왈, 사씨가 구류(九流)는 모두 성인에게서 나왔다고 말함은 이것은 대개 사마천을 답습한 오류이다. 또 도모하여 충성하고 사귀어 믿고 전하여 익혀 곧바로 도가 두 가지 이치가 없고 타인과 자신이 하나가 됨을 알아 무아(無我)에 교착한다고 말하면 지나치다. 또 도모함은 일에 임하여 도모함이 아니고 믿음은 말을 실천하여 믿음이 아니라고 말함은 또한 모두 너무 고원한 곳에서 본의를 상실하여 사실이 아니나 조금 남은 맛이 있다.

유씨의 설명은 비록 정자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깊이 학자를 경계함이 있지만, 다만 자신을 처신하며 사람을 접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사물에 응대함으로 나누어 두 가지로 삼은 것은 잘못일 따름이다. 대개 한가하게 거처하고 홀로 거처함은 진실로 이른 바 ‘움직이지 않아도 공경하고 말하지 않아도 믿는다.’는 것이 있지만 지금 행함을 세움에 믿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다면 진실로 그 사물을 따라 어김이 없는 것으로 말하고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없으니, 어찌 타인을 접하는 즈음에 오히려 충성스럽지 않고 미덥게 하지 못하는 누가 있는데 갑자기 행실을 세움에 믿지 않음이 없고 자신을 처신함에 의혹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령 그 행실을 세운다는 말은 혹 한 때 입언의 어긋남에서 나와 그 본장에서 말하는 것을 잃었다면 내면을 성실히 하고 외면에 드러남은 애초에 두 가지 이치가 없으니,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처신하여 충신하지 않음이 없고 내면을 살펴 한 가지라도 의혹할 만한 것이 없음에 이르러 타인을 접하는 즈음에 도리어 충성스럽지 않고 미덥게 하지 않음으로 들어가는데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있지 않다. 정심과 성의에 이르면 또 애초에 내면에 전심하여 외면에 통달하지 않는 한계는 없다. 또 이미 잠깐이라도 망실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 마땅히 그 동정어묵에 한 순간에 혹시라도 어김이 없어야 한다. 만약 사물에 응하는 즈음에 또 갑자기 생각을 잃음을 인을 어기는 것과 같다면 그 살피는 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성실하게 하여 잠깐이라도 망실함이 없다는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의 설명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아마 노씨와 석씨의 폐단에서 면하지 못한다. 애석하도다. 자신을 위한 공부에 독실하여 가림이 정밀하지 못하여 여기에 이름이여.

양씨 전습의 설명은 옳고, 인을 어기고 도를 어긴다는 구분에 이르러는 내 그 설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주씨는 안으로는 도를 충신에서 보고 밖으로는 도를 전습에서 본다는 것은 또한 이해할 수 없으니, 어쩌면 그가 도가 별도로 한 사물이 됨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함이 또한 2장의 실수와 같지 않으랴? 또 이 장은 정히 힘써 실천하여 도를 체득하는 실상이 되니, 또한 마땅히 도를 나타냄으로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

 

5. 或問道之為治 何也 曰道者 治之理也 以為政者之心而言也

혹이 묻기를, 도가 다스림이 됨은 어떻습니까?

왈, 도는 다스림의 이치이니, 위정자의 마음으로 말한다.

 

曰然則曷為不言治 曰治者 政教號令之為治之事也 夫子之所言者 心也 非事也 若范氏以魯變至道為言 則其失既逺 至其卒章 又以富之而未及夫教為言 則其自相矛盾 又甚矣 游氏引養引恬之說 似以道為引導之義 然與孔氏書傳不合 豈新義之云耶 然下文五者 亦非引導之事 其說不得通矣

묻기를, 그렇다면 어찌 다스림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왈, 치(治)라는 것은 정교와 호령이 다스림을 하는 일이다. 부자가 말한 것은 마음이요. 일로써가 아니다.

범씨의 노나라가 변하여 도에 이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실수가 이미 아득하다. 그 마지막 장에 이르러 또 부유하게 하고 아직 가르침에 미치지 않는 것으로 말한다면 그 절로 모순이 됨이 또 심하다.

유씨의 인양(引養) 인념(引恬)의 설명은 도로 인도하는 뜻으로 보는 것 같지만 그러나 공씨 ??서전??//과 합치하지 않으니, 어쩌면 새로운 뜻을 말하였는가? 그러나 아래 문장 다섯 가지는 또한 인도하는 일이 아니니, 그 설명이 통하지 못한다.

 

曰千乗之說 包氏馬氏 孰為得耶 曰此義 蓋嘗考之 疑馬氏為可據 蓋如馬氏之說 則八百家而出車一乘 如包氏之說則八十家而出車一乗 凡車一乗 甲士歩卒合七十五人 而馬牛兵甲糧糗芻茭具焉 恐非八十家之力所能給也 然與孟子王制之說不同 疑孟子未嘗盡見班爵分土之籍 特以傳聞言之 故不能無小誤 若王制 則固非三代古書 其亦無足據矣

묻기를, 천승의 설명은 포씨와 마씨 가운데 누가 옳습니까?

왈, 이 뜻은 대개 일찍이 헤아려 보건대, 의심컨대, 마씨가 의거할 만하다. 대개 마씨의 설명과 같다면 8백가에서 전차 한 대가 나오고, 포씨의 설명과 같다면 8십가에서 천차 한 대가 나온다. 무릇 전차 한 대에는 갑병과 보병이 도합 75인이고 말 소 병갑 양식 건초가 갖추어지니, 아마 8십가의 힘으로 능히 공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맹자』와 「왕제(王制)」의 설명과 같지 않다. 의심컨대, 맹자가 일찍이 작위를 반열함과 토지를 나누어 준 문서를 다 보지 못하고, 다만 전해들은 것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조금의 오류가 없을 수 없다. 「왕제」와 같은 것은 진실로 3대 고서가 아니니, 그 또한 족히 의거할 만한 것이 못된다.

 

曰五者之目 諸說孰為得之 曰程子張子至矣 楊氏之說 曲折詳備 周氏以愛人為主 而四者為之先後 雖非本文之意 然其說亦善 尹氏後世不能先此以下 蓋本二夫子之意 而其卒章尤切也 若范氏則疎而不切 謝氏以子路何必讀書之言為是 當於本章辯之 其曰古人得百里之地 而君之 皆能以朝諸侯有天下 則千乗之國 亦足以用心者 則又若以為小國寡民本不足治 特以其治之之道 與天下同 而治之之效 有如此者 然後勉而治之耳 蓋其素論 嘗有不屑卑近之意 是以其言多類此 若如其說則其所以敬事而愛民者 亦豈出於誠心哉

묻기를, 다섯 가지의 조목은 여러 사람의 설명 가운데 누가 옳습니까?

왈, 정자와 장자가 지극하다. 양씨의 설명은 곡절이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다. 주씨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주장으로 삼아 4가지가 선후가 된다고 함은 비록 본문의 뜻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설명은 또한 좋다. 윤씨의 ‘후세에 능히 이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한 이하는 대개 두 부자(정자와 장자)의 뜻에 근본 하였고 주씨의 마지막 장은 더욱 절실하다. 범씨는 성글면서 절실하지 못하고, 사씨는 자로의 말 가운데 ‘하필 독서하리오.’라는 말을 옳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본장에서 변론하리라. 그가 말하기를, 고인이 백리의 땅을 얻어서 왕노릇하면 모두 제후에게 조회를 받고 천하를 소유할 수 있으니 천승의 나라도 또한 마음을 쓸 수 있다. 또 만약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은 본디 다스리지 못하니, 다만 그 다스리는 방도는 천하와 함께하고 다스림의 효과가 이와 같은 것이 있은 이후에 힘써서 다스린다고 생각하였을 따름이다. 대개 그의 평소 논의는 일찍이 비근함을 좋아하지 않는 뜻이 있다. 이 때문에 그의 말이 대체로 이와 같다. 만약 그의 설명과 같다면 일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어찌 성심에게 나오겠는가?

 

曰節用愛人 游楊之說不同孰為得耶 曰互相發明而義各有當也蓋楊氏之說胡氏發明之為尤詳而游氏所譏則申子韓侯敝袴之說耳

묻기를, 節用愛人은 유씨와 양씨의 설명이 같지 않으니 누가 옳습니까?

왈, 서로 밝혔으니 뜻은 각각 합당함이 있다. 대개 양씨의 설명은 호씨가 발명한 것이 더욱 상세하고 유씨가 기롱한 것은 신자와 한후의 폐고(敝袴)//의 설명을 따름이다.

○胡氏曰節用者愛人之本也 然愛人者 其名覆衆 故慕之而易道 節用者 其事切已 故憚之而難行 徒以愛人之名 揚于衆 而不能以節用之實本諸已 則雖曰愛人而人終不蒙其愛矣 호씨가 말하기를, 쓰임을 절제하여 남을 사랑함은 남을 사랑하는 근본이다. 그러나 남을 사랑함은 그 이름이 무리에 덮히기 때문에 사모하여 말하기가 쉽고 절용은 그 일이 자신에게 간절하게 때문에 꺼려서 행하기 어렵다. 한갓 남을 사랑하는 이름이 무리에 드날려서 쓰임의 절제하는 실상으로 자신에게 근본할 수 없다면 비록 남을 사랑하지만 사람이 끝내 그 사랑을 입지 못할 것이다.

 

6. 或問六章之說 曰程子范游尹氏得之 但程子本立而文自至者 失之太快耳 所謂盡得孝弟 然後讀書 亦曰盡夫為子為弟者平日所當為之事耳 非謂盡孝弟之道如所謂孝弟之至者 然後可以讀書也 若謝氏所謂盡孝弟之 則正謂孝弟之至 而其言過矣 必若是而後 學文則豈復有學文之日乎 范氏以汎愛衆為以所愛及所不愛 謝氏以為充其無害人之心 皆非是 此但為汎愛衆人而無忿疾忮害之心 若游氏所謂處衆而汎愛衆人者也 未嘗遽及此也 此所謂行有餘力 但謂行此數事而有餘暇之力耳 而游氏去其力字 則亦若謝氏盡孝弟之云矣 夫是數者 終身由之而常患於不足 又何如而為有餘乎

혹이 6장의 설명을 물으니, 왈, 정자 범씨 유씨 윤씨가 옳다. 다만 정자의 근본이 세워지면 문이 절로 이른다는 것은 너무 빠른 것에 잘못되었을 따름이다. 이른 바 “효제를 다한 이후에 독서한다.”는 것은 또한 자식이 되고 아우가 되어 평소에 마땅히 할 일을 다함을 말했을 따름이요, 효제의 도리를 다함을 마치 이른 바 “효제가 지극하다.”는 것과 같은 이후에 독서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씨가 이른 바 “모두 효제의 법칙”과 같은 것은 정히 효제의 지극함을 이르니 그의 말이 지나치다. 반드시 이와 같이 한 이후에 글을 배운다면 어찌 글을 배우는 날이 있겠는가?

범씨는 널리 백성을 사랑함으로 사랑하는 바로 사랑하지 않는 바에 미친다고 하고, 사씨는 남을 해침이 없는 마음을 확충한다고 함은 모두 옳지 않다. 이것은 다만 널리 백성을 사랑하면 성내고 미워하고 해치는 마음이 없게 된다.

유씨가 이른 바 “무리들 가운데 처하여 널리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찍이 갑자기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여기에서 이른 바 “실천하고 남은 힘이 있다.”는 것은 다만 이 몇 가지 일을 실천하고 남은 힘이 있음을 말했을 따름인데, 유씨는 그 가운데 ‘力’자를 생략하였으니, 또한 사씨가 모두 효제의 법칙의 말과 같을 것이다.

대저 이 몇 가지 것은 종신토록 실천하여 항상 부족함을 근심하거늘 또 어떻게 남음이 있겠는가?

 

曰他說如何 曰謝氏以學文為游於藝 似亦太輕 程子以為讀書 則凡所以講乎先王之道 以為修已治人之方者 皆在其中矣 豈特游於藝而已哉 楊氏以文學為餘事 意亦類此 至於專以推其所為說 蓋亦便於假借而不悟其所包之有不盡也 周氏語意 亦若繁冗然 自多識前言往行以下 則佳 若游氏之敷陳詳盡 有以深䆒後世棄本逐末之弊 而蘇氏之說 又有以正近世好髙躐等之失 則尤讀者所宜詳味也

다른 사람의 설명은 어떻습니까?

왈, 사씨는 글을 배우는 것을 육예에 노닌다고 함은 또한 너무 경솔한 듯하다. 정자는 독서하면 무릇 선왕의 도에서 강론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 되는 바의 것이 모두 그 가운데에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다만 육예에서 노닐 따름이겠는가?

양씨의 문학으로 남은 일이라고 함은 뜻이 또한 이와 같다. 오로지 하여 그가 말한 것을 미룸에 이르러서는 대개 가차함을 편하게 여겨 그 포함한 것이 다하지 않음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주씨의 말과 뜻은 또한 번거로운 듯하나, 그러나 ‘많이 지나간 말과 행실을 않다.[多識前言往行]’고 한 이하는 좋다.

유씨의 펼쳐 진설하고 상세하고 다함[敷陳詳盡]과 같은 것은 후세 근본을 버리고 지엽을 따르는 폐단을 깊이 연구할 수 있다.

소씨의 설명은 또 근세 고아한 것을 좋아하고 등급을 뛰어 넘는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蘇氏曰孝弟仁信本也 行有餘力則以學文 此孔子所以教人也 蓋曰不賢者 自是以寡過 而賢者自是以無所不至也 故曰下學而上達 雖孔子亦然 今之教人者 不亦異乎 引之極髙 示之極深 未嘗養之於學 游之於藝也 而遽告之矣 教者未必能 而學者未必信 則亦妄相從而已 少而習之 長而行之 務以誕相勝也 風俗之壊 必自此始矣 소씨가 말하기를, 효제인신은 근본이다. 실행하고 남은 힘이 있다면 글을 배움은 이것은 공자가 사람을 가르치는 바이다. 대개 불현자는 이로부터 허물이 적고 현자는 이로부터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아래를 배워서 위로 통달함은 비록 공자라도 또한 그러하다. 지금 남을 가르치는 것이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극히 높은 것을 인용하고 지극히 깊은 것을 보아 일찍이 학문에서 함양하고 예에서 노닐지 않고 갑자기 알려주니 가르치는 사람 반드시 능하지 않고 배우는 사람이 반드시 믿지 못하면 또한 망녕되게 서로 따를 뿐이다. 젊어서 배우고 자라서 실행하고 힘써 허탄함으로 서로 이기니 미풍양속이 실추됨은 반드시 여기에서 시작된다.

 

7. 或問七章之說 曰此章諸說大㫖略同 而程子游尹氏為優 惟賢賢易色 當從舊說 蓋孔子兩言未見好德如好色 而中庸亦以逺色為勸賢之事 則古人之言其以德色相為消長也 舊矣 范謝之說 於此為得 但范氏論 賢賢易色之優劣 失之 而謝氏便以如好色為易色 亦非是 所謂如好色者 特孔子責人之緩辭 非以為既好色而且好德也 吕氏謂此所未學者文耳 質具而文不足 非所患也 此意亦疎 子夏所謂未學豈特文而已乎 質具而文不足 特比之以文滅質者 為愈耳 以為非所患而止於是焉 則亦非聖門之所許矣 子夏蓋疾時人之不務本實而徒事空言 且以為是非學者不能耳 然其言抑揚之間 若有過中之弊 故胡氏病之而周氏亦以為有激而言 蓋得之矣 范氏以本立質美言之 輕重之間 似得其適 但語少倒耳 吕氏之說 乃因子夏之言而又過之者 讀者於此 亦不可以不察也 謝氏所謂長幼必能有序 夫婦必能有别者 既横溢而旁出 其曰大舜為法 聖人生知 則又失於過髙矣 楊氏尊賢親親之說巧矣 然子夏之言 未必有此意也 必若其言 則上章所言之序 又何說以通之乎

혹이 7장의 설명을 물었다.

왈, 이 장의 여러 사람은 설명은 큰 뜻이 대략 같지만 정자와 유씨의 설명이 넉넉하다. 오직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같이 한다는 것은 마땅히 구설을 따라야 한다. 대개 공자가 두 번 덕을 좋아하는 사람 여색을 좋아함과 같음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였고, ??중용??에서 또한 여색을 멀리함으로 어진이를 권면하는 일로 삼았으니 고인의 말이 그 덕과 여색은 서로 사라지고 자란다고 함이 오래되었다.

범씨와 사씨의 설명은 여기에서 옳다. 다만 범씨가 호색과 현현의 우열을 논한 것은 잘못되었다. 사씨는 곧 여색을 좋아하는 것 같이 하여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꾼다고 한 것은 또한 옳지 않다. 이른 바 “여색을 좋아하는 것 같이 한다.”는 것은 다만 공자가 사람을 질책하는 완곡한 말을 따름이요, 이미 여색을 좋아하고 또 덕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여씨는 이것은 아직 배우지 않은 것은 문일 따름이요, 바탕이 갖추어짐에 문이 부족함은 근심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니, 이 뜻은 또한 성글다. 자하가 이른 바 “未學”이 어찌 문을 따름이겠는가? 질이 갖추어지고 문이 부족하다는 것은 다만 문이 질을 사라지게 함을 비유한 것이 나을 따름이요. 근심할 것이 아니라고 하여 여기에서 그친다면 또한 성인 문하에서 허여한 것이 아닐 것이다.

자하는 대개 당시 사람들이 근본에 힘쓰지 않고 한갓 헛된 말을 일삼는 것을 미워하여 짐짓 이것은 학자가 아니면 능하지 못하다고 여겼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가 말함에 억양의 사이에 중도를 지나친 폐단이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오씨는 잘못 되었다고 하고 주씨도 또한 격양하여 말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대개 판단이 옳다.

범씨는 본근이 서고 바탕이 아름다운 것으로 말하니, 경중의 사이에 그 알맞음을 얻은 듯하다. 다만 말이 조금 전도 되었을 따름이다.

여씨의 설명은 곧 자하의 말로 인하였지만 또 잘못된 것을 독자들이 이점에 대해서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사씨가 이른 바 “어른과 아이는 반드시 능히 질서가 있고, 부부는 반드시 능히 분별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옆으로 넘치고 곁으로 나온다. 그 말 가운데 “대순은 법이 되고 성인은 생이지지이다.”라고 말한 것은 또 지나치고 너무 고원함에서 잘못되었다.

양씨의 존현친친의 설명은 공교롭다. 그러나 자하의 말은 반드시 이 뜻이 있지 않다. 반드시 그의 말과 같다면 윗장에서 말한 순서를 또 무슨 말로 이해하겠는가?

 

8. 或問八章張子學則不固之說如何 曰此蓋古註舊說而張子從之 但文勢若有反戾而不安者 蓋曰不重則不威 則當曰不學則固 若曰學則不固 則當曰重則有威 且學之為功 又豈止於不固而已哉 吕楊之說 蓋亦如此 而楊氏所謂可與權者 則又過之 且以夫子之言推之 則學而後可與適道 適道然後可與立權 豈易遽言也哉

혹이 묻기를, 8장 장자의 ‘학즉불고(學則不固)’의 설명은 어떻습니까?

왈, 이것은 대개 옛 주의 구설인데 장자가 추종하였다. 다만 문세가 도리어 어긋나 편안하지 못한 것이 있다. 대개 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다고 말하면 배우지 않으면 고루하다고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배운다면 고루하지 않다고 말하면 후중하면 위엄이 있다고 말함이 마땅하다. 또 학문의 공은 또 어찌 고루하지 않음에 그칠 따름이겠는가? 여씨와 양씨의 설명이 대개 또한 이와 같은데 양씨의 이른 바 “더불어 헤아릴 만하다.”는 것은 또 지나치다. 또 부자의 말로 추측하면 배운 이후에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있고, 도에 나아간 이후에 더불어 서서 헤아릴 수 있으니 어찌 선급하게 갑자기 말하겠는가?

 

曰范氏忠信之說如何 曰是亦以内外為言 若程子之意者 但其以誠訓忠 則為未精耳 程子誠忠之辨 見於第七篇之二十四章 考之則可見其得失矣

묻기를, 범씨의 충신의 설명은 어떻습니까?

왈, 이것 또한 내외로 구분하여 말한 것이 정자의 뜻과 같다. 다만 그가 성으로 충을 새긴 것은 아직 설명이 정밀하지 못할 따름이다. 정자의 성과 충의 변론은 제 7편 24장에 보이니 상고한다면 그 득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曰吕氏以主為託者如何 曰觀上下文意 皆在已之事 恐其未應及此 且夫子所以對樊遲崇德之問者 亦云而以徙義繼之 則又如何而可通也

묻기를, 여씨의 주장으로 의탁함은 어떻습니까?

왈, 상하 문장의 뜻을 관찰하면 모두 자신에게 있는 일이다. 그 응당 여기에 미치지 못함을 두려워하였다. 또 부자가 번지가 덕을 숭상함을 묻음에 대답한 것이 또한 그러하다. 의에 옮기는 것으로 잇는다면 또 어떻게 관통하겠는가?

 

曰謝氏以主忠信為不言而信 如何 曰是亦過髙而失之矣 然不獨此而已 凡其所謂忠信者皆然 蓋得於程子實理之云 而於其所謂以人言之者 則有所略而不察也

묻기를, 사씨가 충신을 주장함을 말하지 않아도 믿는다고 함은 어떻습니까?

왈, 이것은 또한 높은 것에 지나쳐 잘못하였다. 그러나 유독 이것만이 아니다. 무릇 이른 바 “충신”이라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대개 정자의 실리를 말한 것에서 옳지만 그가 이른바 ‘사람으로 말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소략하여 살피지 않은 것이 있다.

 

曰謝氏所謂改過之說如何 曰仁義者心之正也 不仁不義者 行之失也 既不幸而陷於不仁不義矣 不知則已 既知之 則其可以憚改而不復於仁義之正乎 蓋其理有所不得則其心有所不安 故不容憚改以自棄於小人之域耳 非曰知其無常而後改之也 且如謝氏之言 則善之與惡 勢均體敵而無賓主輕重之分 既可以忽然而為善 則亦可以暫時而為惡矣 蓋其意急於勸勉而誘人之改過 而不知其言之失於輕也

묻기를, 사씨가 이른 바 허물을 고친다는 설명은 어떻습니까?

왈, 인의라는 것은 마음의 바름이요, 인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함은 행실의 잘못이다. 이미 불행하여 불인 불의에 빠짐에 알지 못하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안다면 고침을 꺼려서 인의의 바름에서 회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개 그 이치를 얻지 못한 바가 있다면 그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고치기를 꺼려서 소인의 지경에서 스스로를 버림을 용납하지 않을 따름이요. 항상함이 없음을 안 이후에 고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사씨의 말과 같다면 선이 악과 더불어 세력이 균등하고 본체가 대등하여 빈주와 경중의 분별이 없으니, 이미 갑자기 선이 될 수 있다면 또한 잠깐 만에 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그 뜻이 권면함에 다급하여 사람들이 허물을 고침을 유인함에 그의 말이 경솔함에서 잘못함을 알지 못하였다.

 

曰謝氏所謂此章非論生知安行 如何 曰聖人之言 皆為學者而言也 若生知安行 則固無所待於聖人之言矣 豈獨此章而已哉 謝氏獨以此章為非論生知安行者 則其於他章 宜其每每過髙而失之也 且人之為過 亦有深淺 不必專以過而改 為困而學之事 以其所引顔淵季路之事觀之 亦自可見 蓋此章之說 惟游氏為無病而楊氏取友改過之說 亦善 詳味之可見

묻기를, 사씨가 이른 바 이 장은 생이지지와 안이행지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어떻습니까?

왈, 성인의 말은 모두 배우는 사람을 위하여 말하였으니, 생이지지와 안이행지는 진실로 성인의 말에서 기대함이 없을 것이니, 어찌 유독 이 장만일 따름이겠는가? 사씨가 유독 이 장을 生而知之와 安而行之를 논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의 다른 장에 있어서 마땅히 그 매번 지나치게 고원한 것에서 잘못하였다. 또 사람이 잘못을 함에는 또한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반드시 오로지 잘못하여서 고치는 것으로 困而學之의 일로 삼을 필요는 없으니, 그가 인용한 안연계로의 일로 관찰한다면 또한 스스로 알 수 있다. 대개 이장의 설명은 오직 유씨만 잘못이 없고 양씨의 벗을 만나서 허물을 고친다는 말은 또한 좋으니 자세히 음미한다면 볼 수 있다.

 

曰不如已之說 程子周尹氏以為不忠信者 楊氏亦以為合志同方者 如何 曰此蓋不欲自謂人不如已而生自滿之心 且慮夫必勝已者而後友之 則勝已者 又将視我為不勝已而不吾友耳 其意已善矣 然考之不詳而慮之 或過則亦不得而不論也 蓋人之賢否優劣 隱之於心 則有凖則 非彼我好惡之私所能蔽也 故學者之心 雖不敢輕謂人不如已 然至於接人待物之際 或親或疎 或髙或下 亦有不容以分别為嫌者 故於齒德之殊絶者 則尊而師之 於賢 於已者 則尚而友之 其不若已者 雖不當就而求之以為吾友 然亦必有矜而容之 勉而進之 是皆理勢之自然 非我之敢為自滿 而亦未嘗輕以絶人也 彼賢於我者 其視我者 亦若是耳 又何自棄我為哉 且世之陋者之所以樂以不若已者為友者 其故亦可知己 蓋樂於縱恣 故憚直諒者之正已 而不敢親 安於淺陋 故忌多聞者之少已而不肻問 至於凡庸嵬瑣之流 則喜其可臨 而足以為髙 便僻佞柔之徒 則說其下已 而足以自肆也 夫其所以定取舎者如是 是以賢智日逺 而所與居者 無非厮役徒隸之人 雖有美才良質 亦且忽不自知而墮於小人之歸矣 是則聖人安得不一言以警之 然亦曷嘗使之輕為自滿而謂人莫已若也 蘇氏之說蓋得其略 而謝氏所引申顔事亦甚善

묻기를, 불여기(不如已)의 설명은 정자 주씨 윤씨는 충신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였고, 양씨는 또한 뜻을 합하고 방법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어떻습니까?

왈, 이것은 대개 스스로 사람이 자기만 못하다고 말하여 자만심을 생기게 하고자 하지 않고, 또 반드시 자신보다 훌륭한 이후에 벗이 된다면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장차 나를 보기를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나를 벗하지 않음을 염려했을 따름이니, 그 뜻이 이미 훌륭하다. 그러나 살펴보면 상세하지 못하고 염려함이 혹 지나치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개 사람의 어질고 어리섞음과 우열은 마음에 숨겨져 있다면 법칙이 저와 나 좋고 싫음의 사사로운 정이 능히 가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학자의 마음이 비록 감히 경솔하게 사람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타인을 만나고 사물을 대면하는 즈음에 혹 친밀하고 혹 소원하며, 혹은 높고 혹은 낮음이 또한 분별로 혐의함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나이와 덕이 현격히 차이나면 높여서 스승으로 받들고 자신보다 어진 사람에 대해서는 숭상하여 벗을 삼고, 그 자신보다 못한 사람은 비록 나아가서 구하여 벗이 되지 않지만, 그러나 또한 반드시 불쌍히 여겨 용납하고 권면하여 진보하게 함이 있음은 이것은 이치의 자연함이요. 내가 감히 자만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일찍이 경솔하게 타인을 단절하지 않는다. 저 사람이 나보다 어진 사람이 그 나를 봄이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니, 또 어찌 스스로 나를 버리겠는가? 또 세상의 비루한 사람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친구로 삼는 것을 즐기는 것은 그 까닭이 또한 알 수 있으니, 대개 방종함에서 즐거워하여 곧고 선량한 사람이 자신을 바로잡아 줌을 꺼려서 친하지 않고, 천루함을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에 견문이 많은 사람이 나를 과소 평가함을 꺼려서 묻지 않고, 자질구레한 소인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임할 만하여 고원해 질 수 있음을 기뻐하고, 아첨하고 유순한 무리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자신보다 낮아 스스로 방자함을 할 수 있음을 기뻐한다. 대저 그 취사를 정하는 것이 이와 같다. 이 때문에 현명하고 지혜 있는 사람이 날마다 멀어지고 함께 사는 사람은 내시와 시종의 사람이 아님이 없으니, 비록 훌륭한 재주와 아름다운 바탕이 있지만 또한 짐짓 소홀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소인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성인이 어찌 한 마디 말로 경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찌 일찍이 경솔하게 자만하여 타인이 자신과 같지 못하다고 말하게 하였겠나? 소씨의 설명이 대개 그 대략을 얻었고 사씨는 인용한 신씨//와 안연의 일은 또한 매우 훌륭하다.

 

○蘇氏曰 世之陋者 樂以不已若者為友 則自足而日損 故以此 戒之 是謂不以文害辭 不以辭害意 如必勝已而後友 則勝已者 亦不吾友矣 소씨가 말하기를, 세상의 비루한 사람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벗삼음을 즐거워하니 스스로 만족하여 날마다 손해가 된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경계하니, 이것을 일러 문장으로 말을 해치지 않음이요, 말로써 뜻을 해치지 않음이다. 만일 반드시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인 이후에 벗한다면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은 또한 나와 벗하지 않을 것이다.

 

9. 或問九章之說 曰程子游氏善矣 范氏慎字之說 非是 其曰使民勿倍勿忘 亦非也 君子之慎終追逺 乃吾事所當然 吾心之不可已者 豈為教民而後為之哉 若謂曾子之行一於孝而及此 則為得之 謝氏之說於歸厚之義 無所當 且歸字之義 正謂民歸於厚耳 今曰已德歸厚 似亦羡於文也 楊氏因歸厚之文 而引惟民生厚 因物有遷 以就夫反其生之說 則亦巧矣 然詳曾子意 恐不如是之支也 尹氏蓋總程子之說而改 大為事則失之矣 此外又有蘇氏洪氏之說 亦可觀焉

혹이 9장의 설명을 물으니,

왈, 정자와 유씨의 설명이 훌륭하다. 범씨 신(愼)자의 설명은 옳지 않다. 그 문장에 말하기를 백성으로 하여금 배반하지 말고 잊지 말게 한다는 것은 또한 그릇되었다. 군자가 죽음을 삼가고 먼 조상을 추모함은 곧 내 일의 당연함이요, 내 마음이 그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백성을 가르친 이후에 함이겠는가? 만약 증자의 행실이 효성에 한결 같이하여 여기에 미쳤다고 말한다면 옳다. 사씨의 두터움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설명함은 합당한 것이 없다. 또 귀(歸)자의 뜻은 정히 백성이 두터움으로 돌아감을 말할 따름이다. 지금 이미 덕이 두터움에 돌아갔다고 하니, 또한 문장에 남음이 있는 듯하다. 양씨 두터움으로 돌아간다는 글로 인하여 오직 백성의 삶이 두텁고 사물로 인하여 옮김이 있다는 것을 끌어당겨 도리어 가 삶의 설명에 나아간것은 또한 공교롭다. 그러나 증자의 뜻을 자세하게 살피면 아마 이와 같이 나누지는 않을 것이다. 윤씨는 대개 정자의 설명을 총괄하여 큼을 고쳐서 일을 삼는다면 잘못될 것이다. 이 밖에 또 소씨와 홍씨의 설명이 있으니 또한 볼 만 하다.

○蘇氏曰略於喪祭 則背死忘生者衆 而俗薄矣 洪氏曰曾子之學 以忠信孝弟為本 故其言如此 소씨가 말하기를 상례와 제사를 소략하게 한다면 죽은 사람을 배반하고 산 사람을 잊음이 많아서 풍속이 야박할 것이다. 홍씨가 말하기를, 증자의 학문은 충신효제를 근본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말이 이와 같다.

 

10. 或問夫子未嘗求聞諸侯之政 而子貢有夫子求之之說 何也 曰此就子禽之言 借其求字 而反言之 以明夫子之未嘗求 如孟子之言伊尹 以堯舜之道要湯也 若謂夫子欲聞其政 而為是卑巽以求之 則失之矣 楊氏以為聖人求之 在我正 謂此病 又謂暴慢侈泰人所忌嫉 則雖欲求之 而不可得者 雖足以警夫如是之人 然其說之流 亦将有求容患失之恥 學者尤不可以不知也 吕氏真以為求而人與之 則又甚矣

혹이 묻기를, 부자가 일찍이 제후의 정사를 들음을 구하지 않았는데, 자공이 부자가 구함이 있다는 설명은 어떻습니까?

왈, 이것은 자금의 말에 나아가 求자를 빌려 돌이켜 말하여 부자가 일찍이 구하지 않음이 마치 맹자가 말한 이윤이 요순의 법도로 탕임금에게 요구하였다는 것과 같음을 밝혔다. 만약 부자가 그 정사를 듣고자 하여 낮추고 공손히 하여 구하였다고 말할 것 같으면 잘못되었다. 양씨는 성인의 구함은 자신에게 있다라고 하니, 정히 이 잘못을 말한다. 또 포악하고 태만하고 사치하고 거만함은 사람이 꺼리고 미워하는 바라고 말한다면 비록 구하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비록 이와 같은 사람을 경계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말이 유전되었을 때 또한 장차 용납을 구하고 실수를 근심하는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니, 학자는 알지 않을 수 없다. 여씨는 진실로 구하니 사람이 주었다고 판단하였으니 또 심하다.

 

曰他說之得失 奈何 曰范氏之說 皆非所以言聖人 謝氏以為此一節論學成而光輝著見 亦非本旨 以為因是足以見之可也 其論聖人之容 夸張廹急 而於文義之間 多不暇擇 如以温為清和之發之類 皆非是 細考之可見矣 又與周氏 皆引吾其與聞之 為說 恐亦未然 此言至於是邦 則非其居魯時矣 大抵此章說之善者 莫踰於程子 而胡氏亦有所發明也

묻기를, 다른 학자의 득실은 어떻습니까?

왈, 범씨의 설명은 모두 성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씨는 이 한 절목은 학문이 이루어져 광휘가 드러났음을 설명하였다고 판단하였으니, 또한 본문의 뜻이 아니요, 이것으로 인하여 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옳다. 그는 성인의 용모를 말함에 과장되고 급박하여 문장의 뜻에 잘못 판단한 것이 많으니, 마치 온(溫)을 맑고 온화함이 드러났다는 종류가 모두 잘못되었으니, 세밀하게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주씨와 더불어 모두 내 그 참여하여 정사를 들었다는 것을 인용하여 설명하였으니, 아마 또한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이 나라에 이른다고 말했다면 노나라에 거처하는 시절이 아닐 것이다. 대저 이 장의 설명으로 훌륭한 것으로는 정자의 견해를 뛰어넘는 사람이 없다. 호씨도 또한 발명한 바가 있다.

○胡氏曰几人未見聖 若不克見 既見聖 亦不克由聖 彼既語夫子以政矣 未聞一君舉國 以聴其所為 然是亦可以為之兆也 而聖人一言不契則委而去之 未嘗屑就 在濟時行道之心 雖篤而未嘗屈道以信身也 호씨가 말하기를, 일반사람들은 아직 성인을 보지 못함에 마치 능히 보지 못한 듯 하다가, 이미 성인을 보면 또한 능히 성인을 말미암지 않는다. 저가 이미 부자가 정치하였다고 말하였지만 한 군주라도 국가를 맡겨서 정사에 대해서 들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정치할 수 있는 조짐이다. 그러나 성인은 한 마디 말이라도 부합하지 않으면 버려두고 떠나니 일찍이 나아감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시절을 구제하고 도를 행하려는 마음이 비록 돈독하지만 일찍이 도를 굽혀서 자신을 펴지 않았다.

 

曰程子之訓五德 二說不同 如何 曰前說 訓其體之言也 後說 推其用與效之言也 尹氏雜而用之 已失其旨 又於不侮無欲之下 各以也字係焉 其失愈甚矣

묻기를, 정자가 5덕(溫良恭儉讓)을 풀이함에 두 가지 설명이 다른 것은 어떻습니까?

왈, 앞 설명은 그 본체를 풀이한 말이요, 뒤 설명은 작용과 효용을 추리한 말이다. 윤씨는 섞어서 사용하니 이미 그 뜻을 잃었다. 또 ‘없신여기지 않고 하고자함이 없다.[不侮無欲]의 아래에 각각 也자를 붙였으니, 그 잘못함이 더욱 심하다.

 

11. 或問十一章之說 曰觀志觀行 范氏以為子觀父之志行者 善矣 然以文勢觀之 恐不得如其說也 蓋觀志而能承之 觀行而能述之 乃可為孝 此特曰觀而已 恐未應遽以孝許之也 且以下文三年無改者推之 則父之志行 亦容或有未盡善者 正使實能承述 亦豈遽得以孝稱也哉 謝楊周氏 蓋用舊說而晁氏洪氏之說 亦當三年無改於父之道 程子之說不明 范楊周氏為一說 謝游尹氏為一說 而小不同 蓋尹氏得其用心之本 而游氏得其制事之宜 二說相須 為不可易 意者程子亦若尹氏之云也 謝氏則過之矣 夫孝子居喪 思慕哀痛則誠有不可堪者 然視不明 聽不聰 行不正 不知哀 君子病之 豈有三年之乆 視其父之所為 有不可不改者 顧乃恍然惘然如醉眠夢魘 而恬不知省 而可以為孝乎 范楊周氏之說 則所不改者 乃子道也 非父道也 若以於字為言則於之為字未見施之如此其重者

혹이 11장의 설명을 물으니,

왈, 뜻을 관찰하고 행실을 관찰하니, 범씨는 자식이 아버지의 뜻과 행실을 관찰한다고 판단한 것은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그 문세를 관찰하면 아마 이 설명과 같을 수 없다. 대개 뜻을 관찰하여 능히 계승하고, 행실을 관찰하여 능히 조술하여야 곧 효가 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다만 관찰한다고 말했을 따름이니, 아마 응당 갑자기 효로써 허락할 수 없다. 또 아래 문장의 3년을 고침이 없다는 것으로 추측하면 아버지의 뜻과 행실이 또한 혹 모두 선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정히 하여금 실재로 능히 계승하고 조술하게 하더라도, 또한 어찌 갑자기 효로 말할 수 있겠는가? 사씨 양씨 주씨는 대개 구설을 따랐고, 조씨 홍씨의 설명은 또한 합당하다. 3년 동안 아버지의 도에서 고침이 없다는 것은 정자의 설명은 분명하지 않고, 범씨 양씨 주씨가 일설이 되고 사씨 유씨 윤씨가 일설이 되어 조금 같지 않으니, 대개 윤씨는 용심의 본체를 얻었고 유씨는 일을 제제하는 마땅함을 얻었으니 두 설명은 서로 기다리니 바꿀 수 없다. 뜻하건대, 정자도 또한 윤씨의 말과 같고, 사씨는 지나치다. 대저 효자가 상중에 있음에 상중에 있음에 사모하고 애통함은 진실로 견딜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나 봄이 밝지 않고 들음이 총명하지 않고 행실이 바르지 않고 슬픔을 알지 못함을 군자가 병통으로 생각하니, 어찌 3년 동안 오래되어 그 아버지가 한 것이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보고서 도리어 황연히 망연히 취하여 잠들어 잠꼬대 하며 우두커니 살핌을 알지 못하는데 효가 될 수 있겠는가? 범씨 양씨 주씨의 설명은 고치지 않는 것은 곧 자식의 도리요, 아버지의 도가 아니다. 만약 어(於)자로 말을 할 것 같으면 於의 글자는 베풂이 이와 같이 그 무거운 것을 보지 못했다.

○晁氏曰三年無改於父之道此觀行之一節也 조씨가 말하길, 삼년무개어부지도(三年無改於父之道)는 이것은 행실을 관찰하는 한 절목이다.

○洪氏曰 父没雖可以行其志 然改父之道於三年之中 則無愛親之心 而其行亦不足觀矣 홍씨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비록 그 뜻을 실천할 수 있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도리를 3년 안에 고친다면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 행실을 또한 족히 볼 것이 못된다.

 

曰必若尹游之說 則夫子之言 得無有所不盡者乎 曰為人子者 本以守父之道不忍有改 為之心 至有所遇之不同 則隨其輕重 而以義制之耳 三年而改者 意其有為而言也 其不可改則終身不改 固不待言 其不可以待三年者 則又非常之變 亦不可以預言矣 善讀者推類而求之 或終身不改 或三年而改 或甚不得已則不待三年而改 顧其所遇如何 但不忍之心 則不可無耳

묻기를, 윤씨와 유씨의 설명과 같다면 부자의 말씀이 미진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

왈, 자식된 사람은 본디 아버지의 도를 지켜 차마 고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쓰고 만나는 바가 같지 않음이 있는 것에 이르러서는 그 경중을 따라 의로 제제할 따름이다. 3년 만에 고치는 사람은 까닭이 있어서 말했다. 그 고칠 수 없다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으니 진실로 말을 기다리지 않는다. 3년을 기다릴 수 없다면 또 비상의 변고이니, 또한 미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읽기를 잘하는 사람은 유를 미루어 구한다면 혹 종신토록 고치지 않고 혹 3년 만에 고치고, 혹 심히 부득이 하면 3년을 기다리지 않고 고침이 도리어 그 만나는 바가 어떠하겠는가? 다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은 없을 수가 없을 따름이다.

或曰昔謝方明承代前人 不易其政 其必宜改則以漸變之 使無迹可尋 為人子者不幸而父之過 有當必改者 以是為法而隱忍遷就於義理之中 不亦可乎 曰吾嘗聞之師矣 以為此其意則固善矣 然用心每毎如此 即駸駸然所失却多 必不得已 但當至誠哀痛以改之而已 何必隱忍遷就之云乎 至哉此言 足以警學者用心之微矣

혹자가 말하기를, 옛적 사방명(謝方明)이 선인을 계승하여 그 정사를 바꾸지 않고, 그 반드시 마땅히 고쳐야 한다면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하여금 찾을 만한 자취가 없게 하였으니 자식이 되어 불행히 아버지의 허물을 마땅히 반드시 고칠 것이 있는 것은 이것으로 모범을 삼고 가만히 참아 의리의 가운데로 나아감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왈,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이것은 그 뜻은 진실로 좋다. 그러나 마음 쓰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즉 침침연히 실수하는 바가 도리어 많으니, 반드시 부득이 하다면 다만 마땅히 지극한 정성 애통함으로 고칠 따름이니, 어찌 반드시 은인(隱忍)과 천취(遷就)를 말하겠는가?’ 하였으니, 지극하다 말씀이여. 학자 용심의 은미함을 경계할 수 있도다.

 

12. 或問小大由之諸說不同而皆屬之下文 今獨從程子而屬之上文 何也 曰以上文考之 既曰禮之用和為貴 則所謂斯為美者 皆指禮與和而言也 今若以為由禮 則上固云和 是豈得越和而指禮 且小大之事 正欲其一由於禮 豈有一由於禮而反至於不可行耶 若以為由和 則上之所謂和者 又未始離於禮也 亦不得遺禮而主和矣 且既曰由和而有不可行 則其曰不以禮節之 亦不可行者 不亦重復之甚乎 若楊氏之意 則以小大由和 為不知和而和者 與下文雖能知和而和 而不以禮節者 為兩說 如其說 雖足以巧免重復之弊 然小大由之一句 亦未見其必為由和也 故此章之說 惟程子為得之 而范周尹氏 皆祖其說 蓋亦不可易也

 

혹이 묻기를, 작고 큼이 말미암음의 여러 사람의 설명이 같지 않는데, 모두 아랫 문장에 붙였거늘 지금 유독 정자의 설명을 따라 윗 문장에 붙임은 어찌해서 입니까?

왈, 윗 문장으로 상고하면 이미 예의 작용이 화함이 귀함이 되니 이른 바 ‘이것이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은 모두 예와 화를 가리켜서 말함이다. 지금 만약 예로 말미암는다고 할 것 같으면 위에서 진실로 화를 말했으니, 이것이 어찌 화를 넘어서 예를 가리킬 수 있겠는가? 또 작고 큰 일은 정히 한결같이 예로 말미암고자 하니, 어찌 한결 같이 예로 말미암아 도리어 행할 수 없음에 이르는 것이 있겠는가? 만약 화로 말미암는다고 할 것 같으면 위에서 이른 바 ‘화’라는 것은 또 처음부터 예에서 떨어지지 않는 화이니, 또한 예를 빠트리고 화를 주장할 수 없다. 또 이미 화로 말미암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면 그 예로써 절제하지 않고 또한 실행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또한 중복됨이 심함이 아니겠는가?

양씨의 뜻과 같다면 소대가 화를 말미암는 것으로 화를 알지 못하고 화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아래 문장에서 비록 능히 화를 알고서 화하지만 예로 절제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두 설이 되니, 그 설명이 비록 중복의 폐단을 교묘하게 피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소대유지(小大由之) 한 구절은 또한 그 반드시 화로 말미암음이 됨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장의 설명은 오직 정자만이 옳고, 범씨와 주씨는 모두 그의 설명을 계승하였으니, 또한 바꿀 수 없다.

 

曰若如范氏之說 則遂以樂為禮之用 可乎 曰樂記有之 天髙地下 萬物散殊 而禮制行矣 流而不息 合同而化 而樂興焉 則其相為體用也 古有是言矣

묻기를, 범씨의 설명과 같다면 마침내 악으로 예의 작용을 삼는 것이 옳습니까?

왈, ??악기??에 있다. 하늘이 높고 땅이 낮아 만물이 흩어지고 다르지만 예제가 행해짐에 흘러 그치지 않고 하나로 합쳐 변화하여 즐거움이 일어난다면 그 서로 본체와 작용이 되니, 예전에 이 말이 있을 것이다.

 

曰謝氏之說 如何 曰其論禮之有和者善矣 蓋曰禮之所以有是品節之詳者 皆出於人心自然之節 聖人制禮 特使人由是 以中其節而非以人之所不欲者 強之也 故行之 雖或甚苦 而自有不失其和 若不本於此 而徒勉強於儀貌之間 則是徒禮而無和矣 此說蓋得之 但其曰為禮至於難從 則不若夷俟踞肆之愈 則其抗激之弊 又有甚焉者耳 其論季氏之祭 為有禮而無和者 亦恐未然 詳禮家之說 正謂季氏之祭 舒肆不肅 故遲緩至此 及子路為宰而室事交乎戸 堂事交乎堦 則宗祝有司 各供其事 而無前日之失 然則豈和不足之謂哉

묻기를, 사씨의 설명은 어떻습니까?

왈, 예는 화함이 있다고 말한 것은 좋다. 대개 예가 이 품절의 자세함이 있는 까닭은 모두 인심의 자연한 절도에서 나오니, 성인이 예를 제정함은 특별히 사람으로 하여금 품절로 말미암아 그 절도에 알맞게 함이요, 사람이 하고자 하지 않는 바의 것으로 억지로 하게 함은 아니다. 그러므로 실행함에 비록 혹 매우 고달프지만 절로 그 화를 잃지 않으니, 만약 이것에 근본하지 않는다면 다만 의식과 외모의 사이에서 힘쓴다면 이것은 한갓 예일뿐이요 화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설명은 대개 옳다. 다만 그 예가 됨이 따르기 어려움에 이르게 된다면 이사(夷俟)하고 거만함이 나음이 됨만 못하니 그 항격(抗激)의 폐단이 또 심한 것이 있을 따름이다.

그 계씨의 제사를 논함에 예는 있지만 화함은 없다고 말한 것은 또한 그렇지 않은 듯하다. 예설가의 설명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정히 계씨의 제사는 방자하고 엄숙하지 않다. 그러므로 더디게 하여 여기에 이르렀더니, 자로가 가신이 됨에 미쳐서 실사는 호에서 관계를 하고, 당사는 섬돌에서 관계를 하게 되니 종축관과 관리가 각각 그 일을 맡아 전일의 실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어찌 화가 부족함을 말하겠는가?

 

請問楊氏之說 曰本文之意 蓋曰禮之用 以和為貴耳 今曰用和 則既失其句讀矣 又引履和而至以明以和為貴之義 恐亦非易意也 詳易之文 盖曰履之為卦 君臣上下 各履其位 而得其和者也 和則疑扵夷易 而非極至之義 然各得其所而不亂焉 則是乃所以為至也 其下八卦之說 其例皆然 不應獨以和而至為和而後不可以有加也 其下云云則前已辨之矣

청컨대, 양씨의 설명을 묻습니다.

왈, 본문의 뜻은 대개 예의 용이 화로 귀함을 삼을 따름이라고 말하였거늘 지금 화를 쓴다고 말하면 이미 그 구두를 잃었다. 또 이(履)괘의 “화하여 지극함[和而至]”을 인용하여 화로 귀함을 삼는 뜻을 밝힘은 아마 또한 주역의 본의가 아니다. 주역의 문장을 상세하게 살펴보면 대개 履의 괘됨은 군신 상하가 각각 그 지위에 나아가 그 和를 얻는 것이다. 화하다면 평이함에 가깝지 않겠는가? 지극한 뜻이 아니다. 그러나 각각 그 곳을 얻어서 어지럽지 않다면 이것은 곧 지극함이 된다. 그 아래 8괘의 설명은 그 예가 모두 그러하니, 응당 유독 화하여 지극함으로 화됨을 삼은 이후에 더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하문에 말한다면 앞서 이미 변론하였다. 室事者祭時 堂事者儐尸 실사는 제시오, 당사는 빈시이다.

 

13. 或問所謂約信而合宜 則言必可踐 何也 曰人之約信 固欲其言之必踐也 然其始也 或不度其宜焉 則所言将有不可踐者矣 以為義有不可 而遂不踐 則失其信 以為信之所在而必踐焉 則害扵義 二者無一可也 若約信之始 而又求其近扵義焉 則其言無不可踐 而無二者之失矣

혹이 묻기를, 이른 바 약속하여서 마땅함에 합한다면 말은 반드시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왈, 사람이 약속함은 진실로 그 말을 반드시 실천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그 처음에 혹 그 마땅함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말한 바가 장차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의가 불가함이 있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을 잃고, 믿음이 있는 바라고 판단하여 반드시 실천한다면 의에서 해가되니, 두 가지는 하나라도 옳을 수 없다. 만약 약속한 처음에 또 그 의에 가까움을 찾는다면 그 말은 실천할 수 없는 것이 없어서 두 가지의 실수가 없을 것이다.

 

或曰然則葉公所云復言非信者 何耶 曰此特為人之不顧義理 輕言而必復者發 以開其自新之路耳 若信之名 則正以復其言而得之也 今不警其言不近義之差扵前而責其必復其言之失扵後 顧與信之所以得名者 而亂之 則亦矯枉過其直矣 諸家乃引之以釋此句 以為信不近義 則言有不必復者 是乃使人不度扵義 而輕發其言 以開誕謾欺偽之習 其弊且将無所不至 非聖賢所以垂世立教之旨也

혹이 묻기를, 그렇다면 섭공이 말한 바 말을 실천함은 신이 아니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왈, 이것은 다만 사람들이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경솔하게 하여 실천을 기필하는 사람을 위하여 발명하여 그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었을 따름이다. 신의 명칭은 정히 그 말을 실천함으로 얻어지거늘, 지금 그 말이 의에 가깝지 않는 차이를 앞에서 경계하지 않고 그 반드시 그 말을 실천하는 실수를 뒤에서 요구하여, 도리어 신이 명칭을 얻는 바와 혼란을 일으키게 되면 또한 굽음을 바로잡으려다 그 바로잡음을 지나칠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곧 인용하여 이 구절을 풀이하여 신이 의에 가깝지 않다면 말이 실천을 기필하지 않음이 있는 것은, 이것은 곧 사람으로 하여금 의에서 헤아리지 않고 경솔하게 그 말을 드러내어 그 허탄하고 속이는 습속을 열 개하니, 그 폐단이 장차 이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성현이 세상에 드리워 가르침을 세운 뜻이 아니다.

 

曰為恭而中節 則能逺恥辱 何也 曰致敬於人 固欲其逺於恥辱 然不合於節文 則或過或不及 皆所以自取恥辱 惟致恭而必求其近於禮焉 則其可逺恥辱也 必矣

묻기를, 공손을 하여 절도에 알맞다면 능히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왈, 사람에게 공경을 다함은 진실로 그 치욕에서 멀고자 함이다. 그러나 절도와 문체에(禮) 합하지 않는다면 혹 지나치고 혹 미치지 못하여 모두 스스로 치욕을 부르는 바이니, 오직 공손을 다하여 반드시 그 예에서 가까움을 구한다면 그 치욕을 멀리할 수 있을 것이다.

 

或曰先儒又有以為恭而近禮然後 君子行之 以逺恥辱 若非禮之恭 則寧身被困辱 而不為也 其說何如 曰此其意善矣 然亦非有子之意也 有子之意 本為謹其言行 以防後患於未然之前 所謂//言必慮其所終 行必稽其所弊者也 豈使人不戒於初而徐計之於己然之後 崎嶇反側 如或者之言哉

혹이 묻기를, 선유들이 ‘또 공손을 하여 예에 가까운 이후에 군자가 실천하여 치욕을 멀리하니, 만약 예가 아닌 공손은 차라리 자신이 곤란함을 받을지언정 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하니, 그 설명은 어떻습니까?

왈, 이것은 그 뜻이 좋다. 그러나 또한 有子의 뜻이 아니다. 유자의 뜻은 본디 그 언행을 삼가 미연에 뒤의 근심을 막게 함이니, 이른 바 “말은 반드시 그 마칠 바를 잘 고려하고, 행실은 반드시 가리는 바를 상고한다.”는 것이니,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그 처음을 경계하지 않고 천천히 이미 그러한 뒤에서 계획하여 우뚝하고 반측하기를 혹자의 말과 같이 하겠는가?

 

曰因是二者 因不失所親 則為可宗 何也 曰信近義矣 恭近禮矣 而或失其所親焉 則亦不足尚也 故必因此 而又得其所親然後 為可宗耳 楊氏之說 蓋如此 且此章 前有孝弟謹信而親仁之說 厚重忠信而友勝已之說 後又有不求安飽 敏行慎言而就正有道之說 其與此章之意 亦相表裏也

묻기를, 두 가지의 것으로 인하여 의지하여 친한 바를 잃지 않는다면 숭상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왈, 믿음이 의에 가깝고 공손이 예에 가까우면서 혹 그 친한 바를 잃지 않는다면 또한 족히 숭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것으로 인하고 또 그 친한 바를 얻은 이후에 숭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양씨의 설명이 대개 이와 같다. 또 이 장은 앞에는 효제하고 신을 삼가여 어진 사람과 친하다는 설과 후중하고 충신하여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을 벗한다는 설명이 있고, 뒤에는 또 편안하고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행동을 민첩하게 하고 말을 삼가여 도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 질정한다는 설명이 있으니, 이 장의 뜻과 또한 서로 표리가 된다.

 

或曰因猶依也 宗主也 言人欲有所依 必度其人之賢而後 依之則在我不失其所親 而彼亦可以為宗主矣 此說小異而亦可通 更思之 可也

혹이 묻기를, 인(因)은 의(依)와 같고 종(宗)은 주(主)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의지하는 바가 있고자 함은 반드시 그 사람의 어짊을 헤아린 이후에 의지 한다면 나에게 있어서는 그 친함을 잃지 않고 저 또한 종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이 설명과 조금 다르지만 또한 통할 수 있으니, 다시 생각함이 옳다.

 

曰諸說不同者 非一 其得失 奈何 曰程子四說大率相似 其意蓋曰為信而言終可復 則其信為近於義矣 為恭而能逺恥辱 則其恭為近於禮矣 因恭信而不失其近於禮義 則亦可宗矣 此文義 固亦可通 但語意曲折似稍費力而逺恥辱之意 尤不分明 蓋其本意固以為不合禮而自恥辱者 然於文 未有所見 則安知不有苟為卑巽以求免乎恥辱者而冀其得近於禮者耶 此由不先求近乎禮義 而俟其言之終可復 且既逺乎恥辱而後卜之 是以 其說至於若是迂逺而難通也 張子信恭之說 已辨於前 可宗之說 蓋亦類此 至引此章以蒙上章之義 則是將以復言逺恥可宗 為和 而不復言不逺恥不失所親 為禮也 夫逺恥可宗之為和可也 若以復言為和而不復為禮 則無乃反其類之甚乎 吕氏上二句 本張子說 而下一句 自為一義 則尤迂晦而不通矣 謝氏復字之說 與上文信字 殊不相干 恭近禮而逺恥辱之說 則得之矣 因不失其親一句 與吕氏 略相似 特可宗之云 為少異耳 范楊周氏大意皆得之 而皆不免於小失 蓋徒憂復言之害義而不察乎有子之言意之所重 乃在乎不復之害信也 是以其大意 雖若得之 而終未免近乎張子之說 至恭近於禮之說 則皆得之 但范周所引恭而無禮 則勞者 為不切耳 楊氏推說兩句 以及聖人理固如此 然聖賢之言 本為學者而發 自與聖人不同 若必毎事如此推說 則亦不勝其費於辭矣 末句之說 惟楊氏為得 范氏既不可曉 而周氏又因程子之言 前固已論之矣

묻기를, 여러 사람의 설명이 같지 않은 것은 하나가 아니니, 그 득실은 어떻습니까?

왈, 정자의 네 가지 설명은 대체로 비슷하니, 그 뜻은 대개 ‘약속하여 말을 끝내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신이 의에 가깝게 될 것이요, 공손하여 능히 치욕을 멀리 할 수 있다면 그 공손이 예에 가까울 것이요, 공손과 믿음으로 인하여 그 의와 예에 가까움을 잃지 않는다면 또한 숭상할 수 있다.’고 하니, 이 문장의 뜻은 진실로 또한 통할 수 있다. 다만 말과 뜻의 곡절함이 조금 힘을 쓰는 듯하고, 치욕을 멀리 하는 뜻은 더욱 분명하지 않으니, 대개 그 본래의 뜻은 진실로 예에 합하지 않아 스스로 치욕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문장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면 어찌 구차히 낮추어 치욕을 면하기를 구하여 예에서 가까움을 얻기를 바람이 있지 않음을 알겠는가? 이것은 먼저 예와 의에 가깝기를 구하지 않고 그 말을 끝내 실천할 수 있고, 또 이미 치욕을 멀리한 이후에 결정함을 기다림으로 말미암는다. 이 때문에 그 설명이 이와 같이 오활하고 알기 어려움에 이르렀다.

장자 신(信)과 공(恭)의 설명은 이미 앞에서 분변하였고, 종주를 삼을 수 있다는 설명은 대개 또한 이와 같다. 이 장을 인용하여 윗장의 뜻에 붙임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장차 말을 실천하고 치욕을 멀리하고 종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으로 화로 삼았고, 말을 실천하지 않고 치욕을 멀리하지 못하고 친한 바를 잃지 않는 것으로 예로 삼았다.

대저 치욕을 멀리하여 숭상할 수 있음이 화가 됨은 가능하나, 만약 말을 실천함으로 화를 삼고 다시 예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류를 돌이킴이 심함이 아니겠는가?

여씨의 윗 두 구절은 장자의 설명에 근본하였고, 아래 한 구절은 절로 한 뜻이 되니, 더욱 오원하고 통하지 않을 것이다.

사씨 復자의 설명은 윗 문장 信자와 자못 서로 연관되지 않고, 공손이 예에 가깝고 치욕을 멀리하는 설명은 옳다. ‘의지하여 그 친함을 잃지 않는다.’는 한 구절은 여씨와 더불어 대략 비슷하지만 다만 숭상할 수 있다는 말은 조금 다르다.

범씨 양씨 주씨의 큰 뜻은 모두 옳지만 모두 조금 실수가 있는 데에서 면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다만 말을 실천함이 의를 헤침을 근심하고 유자의 말과 뜻의 중한 바는 곧 실천하지 않음이 신을 헤침에 있음을 살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큰 뜻이 비록 옳은 듯 하지만 끝내 장자의 설명에 가까움을 면하지 못하였다. 공손이 예에 가깝다는 설명에 이르러서는 모두 옳다. 다만 범씨와 주씨가 인용한 공손하면서 무례하면 수고롭다는 것은 긴절하지 않을 따름이다.

양씨 두 구절을 미루어 설명하여 성인에 미침은 이치는 진실로 이와 같지만, 그러나 성현의 말은 본디 학자를 위하여 발명하여 절로 성인과 더불어 같지 않으니, 만약 반드시 매사를 이와 같이 미루어 말한다면 또한 말에서 허비함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말구의 설명은 오직 양씨가 옳고, 범씨는 이미 이해할 수 없고 주씨는 또 정자의 말로 인하였으니, 앞서 진실로 이미 논변하였다.

 

14. 或問十四章之說 曰尹氏最善 范吕侯周氏說 次之 但謹言之說 范吕皆以為恥躬不逮之意 侯氏又但戒於多言 則未盡聖人之意 夫所以謹於言者 豈徒為是二者而已哉 范氏就有道之說 似亦太輕 若論主善為師 固當如此 但非此章之旨耳 又引孔文子之好學 以配孔顔而歎知學者之鮮 則其輕重 亦不倫矣 若文子之所謂學 則亦豈難知哉 且好學下問 自兩事 亦非以下問而得為好學也 侯氏以無字為非禁止之辭 是矣 其曰與不字不同 則不字亦非禁止之辭也 疑或有誤字 不然則不可曉矣 周氏貪之本也一句 未有所當 其他則皆善也 此外則胡氏及張敬夫之說 亦善 若謝氏之說 則過髙甚矣 不求安飽 本文亦謂志其大者 而不留情於此耳 未遽及乎孔顔曾孟之事也 孟子五鼎 乃謂其喪祭之禮 非若主父偃所謂五鼎食也 其論敏愼 大意既不的當而務為誇張隠秘 使人不可曉 然以其後改之說考之 則所謂敏者可見 又以其平日之言推之 則所謂謹者 又不過曰出辭氣而已耳 若但如此則胡為其不直言之 而必為是枝蔓之辭乎 然夫子敏謹之云 恐亦未遽及此也 就有道而正焉 亦方語夫學者求師取友之時耳 顔孟之云 乃其終身事業之所就 豈遽責之於此時哉 楊氏引終日(食)不違 求其放心等語 以明不求安飽之說 亦大過矣 夫未得有道而正焉 則未知其何以為仁而志之如此其切 已能從事於仁如此其切 則又何為方且就正於人而考其是非哉 大凡此章本意且為學者 大槩立志修身求師取友而言 而諸公推之 大過以至於此 其亦誤矣 孟子所謂不敢不飽者 乃晉平公食於亥唐之家 不敢以其尊貴而略賢者之禮耳 非亥唐之食而飽也 楊氏所引 似亦誤矣

혹이 14장의 설명을 물으니,

왈, 윤씨의 설명이 가장 좋고, 범씨, 여씨, 후씨, 주씨의 설명이 다음이다. 다만 말을 삼간다는 설명은 범씨와 여씨는 모두 ‘몸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恥躬不逮]’는 뜻으로 판단하였고, 후씨는 또 다만 말이 많음에서 경계하였으니, 성인의 뜻을 다 풀이하지 못했다.

대저 말에서 삼가는 까닭이 어찌 다만 이 두 가지를 위할 따름이겠는가? 범씨 도있는 사람에게 나아간다는 설명은 아마 또한 너무 경솔한 듯 하다. 만약 선을 주장함을 스승으로 삼음을 말할 것 같으면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지만, 다만 이 장의 뜻이 아니다. 또 공문자(孔文子)가 학문을 좋아함을 인용하여 공자와 안연에 배합하여 학문을 아는 사람이 적음을 탄식함은 그 경중이 또한 고르지 않다. 공문자가 이른 바 ‘학’과 같은 것이 또한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또 호학(好學)과 하문(下問)은 절로 두 가지 일이니, 또한 下問으로 好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후씨의 無자는 금지하는 말이 아니라고 한 것은 옳다. 그 말하기를, “不자와 더불어 같지 않으니, 不자도 또한 금지하는 말이 아니다. 의혹건대, 혹 오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주씨의 貪之本 한 구절은 합당하지 않고, 다른 것은 모두 좋다. 이 밖에 호씨와 장경부의 설명이 또한 좋다.

사씨의 설명과 같다면 지나치게 고원함이 심하다. 편안하고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음은 본문에서 또한 그 큰 것에 뜻을 두고 여기에 정을 머무르지 않음을 말할 따름이요, 갑자기 공자 안연 증자 맹자의 일에 미치지 않는다. 맹자의 五鼎은 곧 그 상례와 제례를 이르니, 주보언(主父偃)이 이른 바 ‘五鼎食’과 같지 않다. 그 敏과 愼을 논한 것은 대의가 이미 적당하지 않고 과장하거나 숨김을 힘써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 뒤에 고친 설명으로 고찰한다면 이른 바 ‘민’이라는 것은 알 수 있고, 또 그 평상시의 말로 추측한다면 이른 바 ‘근’이라는 것은 또 사기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만약 다만 이와 같다면 어찌 곧바로 말하지 않고 반드시 이 곁가지로 두러는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부자의 민근(敏謹)의 말은 아마 또한 갑자기 여기에 미치지 않는다. 도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 질정함은 또한 바야흐로 학자가 스승을 구하고 벗을 취하는 때를 말했을 따름이요, 안자 맹자가 말한 것이 곧 그 평생 사업으로 성취할 것이니, 어찌 갑자기 이 때에 꾸짖겠는가?

양씨는 ‘종일토록(밥 먹는 순간에도) 어기지 않는다.’와 ‘그 달아난 마음을 구한다.’ 등의 말을 인용하여 편안하고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밝힌 것은 또한 크게 잘못되었다. 도 있는 사람을 얻어서 질정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이 인이 되어 뜻을 둠이 이와 같이 그 절박한지를 알지 못하고, 이미 능히 인에 종사하여 이와 같이 그 절박하다면 또 무엇으로 하여 바야흐로 짐짓 남에게 나아가 질정하여 그 시비를 고찰하겠는가?

대저 이 장의 본래 의도는 짐짓 학자의 대체적인 立志 修身 求師 取友를 위하여 말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미루어 크게 잘못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그 또한 잘못되었다. 맹자가 이른 바 “감히 배부르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곧 진나라 평공이 해당(亥唐)의 집에서 먹음에 감히 그 존귀함으로 현자의 예를 소략하게 하지 않았을 따름이요, 해당이 먹여주어 배부른 것은 아니다.

양씨가 인용한 것은 또한 잘못된 것 같다.

 

○胡氏曰食期飽 居期安 人之情也 而聖人之言如此 豈反人之情而強其所難 亦曰有志於學 則不當以此為念耳 食必求飽 居必求安 役役焉 惟口體之奉 而無所不至焉 其去於道也 不亦逺乎 호씨가 말하기를, 먹음에 배부름을 기대하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기대함은 사람의 정이다. 성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은 어찌 사람의 정을 돌이켜 그 어려운 것은 억지로 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또 말하기를, 학문에 뜻이 있다면 마땅히 이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다. 먹음에 반드시 배부름을 요구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편안함을 요구하면 역역히 오직 신체를 봉양하여 이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그 도와의 거리가 또한 멀지 않으랴?

O張敬夫曰世固有不徇物欲而勉於言行者 然其所學毫釐之差 則其所謂敏者 有非所當敏 而所謂慎者 有非所當慎 其弊有不可勝言者矣 장경부가 말하기를, 세상이 진실로 욕물을 따르면서 언행에 힘쓰는 사람은 있지 않다. 그러나 배운 바가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그 이른 바 ‘敏’이라는 것은 마땅히 민첩해야 할 바가 아닌 것이 있고, 이른 바 ‘愼’이라는 것이 마땅히 삼가야 할 바가 아닌 것이 있으니, 그 폐단은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15. 或問何以知無諂無驕之為子貢質其學也 曰常人貧則必諂 富則必驕 今能若此 則可為有志而能自強矣 子貢雖未免於貨殖 然以其志之所存 與其學之所至 庶乎其不諂不驕者 故以質之夫子而審其淺深也

혹이 묻기를, 어찌 아첨하지 않고 배부르지 않음이 자공이 그 학문을 질문함이 됨을 알 수 있습니까?

왈, 일반 사람은 가난하면 반드시 아첨하고 부유하면 반드시 교만하거늘 지금 능히 이와 같다면 뜻을 두어 능히 스스로 힘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공이 비록 재화를 증식함에서 면하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그 뜻이 보존한 바와 그 학문이 이른 바는 거의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공자에게 질문하여 그 깊고 얕음을 살핀 것이다.

 

曰然則切磋琢磨之别 其詳可得聞乎 曰古之工事 不可考也 以今言之 則治骨角者 切以刀 磋以鑢 治玉石者 琢以錐鑿而磨以沙石也 大抵切琢成形 磋磨入細 以理推之 古今當亦不相逺耳

묻기를, 그렇다면 절차탁마의 구분은 상세한 것을 들을 수 있습니까?

왈, 옛날 장인의 일은 상고할 수 없다. 지금 장인의 일로 말한다면 골각을 가공하는 사람은 칼로 자르고 줄로 갈며, 옥석을 가공하는 사람은 망치와 끌로 쪼고 모래로 간다. 대저 자르고 쪼아 모양을 만들고 갈아서 세세한 것을 완성하니, 이치로 추측하면 고금이 마땅히 또한 서로 멀지 않을 따름이다.

 

曰大學之傳 亦引此詩 而以道學自修 釋之 今諸家引為此章之說 而子不然何也 曰古人引詩 斷章取義 姑以發已之志而已 或疎或密 或同或異 不能齊也 彼傳所釋 蓋亦以精粗為言 然於詩文 則磋琢二字 有不協者 今必引以釋此 不亦拘之甚哉

묻기를, 대학의 전문에 또한 이 시를 인용하여 학문을 말하여 스스로 수양함으로 해석하였거늘, 지금 여러 사람들이 이 장의 설명을 인용하였는데, 그대는 그렇지 않음은 무엇입니까?

왈, 옛 사람이 시경의 구절을 인용함에 斷章取義하여 우선 자신의 뜻을 드러낼 따름이니, 혹 성글고 혹은 치밀하며 혹은 같고 혹은 다른 것이 능히 가지런하지 않다. 대학의 전문에서 인용한 것은 대개 또한 정밀하고 거친 것으로 말을 하였다. 그러나 시경의 내용에 있어서는 磋琢 두 자가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거늘, 지금 인용하여 이것을 풀이 하니, 또한 구속됨이 심한 것이 아니랴?

 

曰然則蘇氏之釋 亦若此矣 子剽其說 而没其名 何耶 曰蘇氏之說 於文意 最為得之 吾之說 誠不異乎彼矣 然其大旨 則有不同焉者 故不得據以為說也 蓋彼謂樂而好禮 未足為至 自是而不已 則是將有至焉者矣 而吾謂以貧富而為言 則至於樂與好禮而無以加矣 夫蘇氏之意 豈以為將有忘乎貧富者然後為至耶 此老佛之餘 而非孔子之意矣 故胡氏非之 曰貧而樂 非顔子不能 富而好禮 非周公不能 夫子所以誘掖子貢者髙矣 猶以為未至 則孰可以為至者耶 其說當矣

묻기를, 그렇다면 소씨의 풀이가 또한 이와 같은데 그대가 그의 설명을 도려내어 인용하면서 그의 이름을 빠트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왈, 소씨의 설명은 문장의 뜻에 있어서 가장 좋으니, 나의 설명은 진실로 저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큰 뜻은 같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의거하여 설명할 수 없다. 대개 소씨가 말하기를, ‘즐거워하고 예를 좋아함은 지극함이 되지 않으니, 이것으로부터 그치지 않는다면 장차 지극함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내 생각건대 가난과 부유함으로 말을 한다면 즐거움과 예를 좋아함에 이르러서는 더할 수 없을 것이다. 대저 소씨의 뜻이 어쩌면 장차 빈부에서 잊는 것이 있은 이후에 지극함이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이것은 불교 도교의 남은 습속이요, 공자의 뜻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호씨가 비난하기를, “가난하여 즐거워함은 안연이 아니면 능하지 못하고, 부유하여 예를 좋아함은 주공이 아니면 능하지 못하다. 부자가 자공을 인도하여 도운 것이 높은데, 오히려 지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지극하게 될 수 있겠는가?”하니, 그의 설명이 합당하다.

○蘇氏曰磋者切之至者也 磨者琢之詳者也 切之可矣而復磋之 琢之可矣而復磨之 君子之學也 欲其見可而不止也 往者其己言者也 來者其未言者也 子貢言貧而無諂富而無驕 此之所謂可者 蓋貧則防其諂也 富而防其驕也 紛紛乎自防之不給 孔子曰貧而樂 富而好禮 夫貧而樂 雖欲諂不可得也 富而好禮 雖欲驕 亦不可得也 豈不賢於彼二言哉 然亦未可以為至也 自是而上 見可而不止 則必有至焉者矣 子貢得是二言 而識其所未言者 故孔子予之 소씨가 말하기를 차는 끊음의 지극한 것이요, 마라는 것은 탁의 자세한 것이다. 끊어서 할만한 것이거든 다시 갈고, 쪼고 할만 한 것이거든 다시 가니, 군자의 학문은 그 할만한 것을 보고 그치지 않고자 함이다. 往은 이미 말한 것이요, 來는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다. 자공이 말하기를 가난하고 아첨하지 않으며 부유하되 교만함이 없다는 것, 이것이 이른 바 可라는 것이다. 대개 가난하면 그 아첨함을 막고 부유하면 그 교만함을 막으니, 성대하게/ 스스로 넉넉하지 않은 것을 막는다. 공자가 말하기를 가난하며 즐거워하고 부유하며 예를 좋아한다. 고 하였으니, 대저 가난하여 즐거워하면 비록 아첨하고자 하지만 할 수 없고, 부유하며 예를 좋아하면 비록 교만하고자 하지만 또한 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저 두 마디 말에서 어질게 여기지 않으리오, 그러나 또한 지극함이 될 수 없으니, 이것으로부터 올라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지극한 것이 있을 것이다. 자공이 이 두 마디 말씀을 얻어 그 아직 말하지 않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공자가 허여하였다.

 

曰諸說大㫖 則皆異乎子之云矣 其亦有可論者耶 曰無諂無驕 程叔子以為能處其分 與伯子所論樂與好禮 互相發明者 皆善矣 然以樂與好禮 為隨貧富所治 叔子亦以為能自修 則似皆未安也 夫好禮以為修治可也 樂則豈修治之謂耶 周尹氏以為非自修不能者 其說若可通矣 然於其斯之謂與者 又有所不協 范楊氏與周尹同 而以道學自修 分屬樂與好禮 而言 則又加密矣 然其所不協者 終亦不能以強協也 謝氏以問學成德為言 亦倣大學 程子之意 乃必以成徳 易夫自修 則固知夫貧樂之非自修所及而避之也 其論問學成德之不同 則亦有未盡者 夫子之意 本但以無諂無驕 僅為能處其分 而未有以進於道 若樂而好禮 則其造道入德之深 有非前人之所及耳 非必以接於人而後見者 為不足 求於已 而自得者 為有餘也 况不諂之士 豈必皆出於人而不驕之士 亦豈必皆出於吝哉 周氏之說 蓋必類夫謝氏物我之云 然因人不為之說 則又益疎矣 至於告往知來 其說亦多不通 如程子說 則子貢第能咏歎夫子之言 未有以見其知來者 如范楊尹氏說 則反若告往而知來者 如謝氏說 則子貢第能形容夫子所言之階級 亦未有以見其知來也 大抵此章諸說 皆不得其文義 故說雖精而終有不合也 若范氏以為外有餘而内不足 故以無諂無驕為善 亦非是 使子貢而果不免於如此 則亦不足以知無諂無驕之為美者矣 吕氏之說不見於語解而見於文集 豈其少時未定之論也與 此外則曾氏張敬夫之說 亦有可觀者

묻기를, 여러 설명의 큰 뜻은 모두 그대의 말과 다르되 또한 논할 만한 것이 있는가?

왈, 무첨 무교는 정숙자(程叔子)가 능히 그 분수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함이 정백자가 논한 바 즐거움과 예를 좋아함과 더불어 서로 발명이 되는 것이 모두 좋다. 그러나 즐거움과 예를 좋아함으로 빈부에 따라 다스리는 바로 삼고, 숙자가 또한 능히 스스로 수양함이라고 생각한 것은 모두 편안하지 못한 듯하다. 대저 예를 좋아함은 수양하고 다스림이라고 함은 가능하거니와, 즐거움은 어찌 수양과 다스림을 말하겠는가?

주씨와 윤씨는 스스로 수양하지 않으면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 설명이 통용될 수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기사지위여(其斯之謂與)에 있어서는 또 드러맞지 않는 것이 있다.

범씨 양씨는 주씨 윤씨와 같지만 도학과 자수를 나누어 樂과 好禮에 소속시켜 말하니 또 더욱 치밀하다. 그러나 그 드러맞지 않는 것은 끝내 또한 억지로 조화롭게 할 수 없다.

사씨는 문학 성덕으로 말함은 또한 대학을 모방하였다.

정자의 뜻은 곧 반드시 성덕으로 자수를 바꾼다면 진실로 가난과 즐거움이 스스로 수양함이 미치는 바가 아님을 알아서 피함이다. 그 학문과 성덕이 같지 않음을 논한 것은 또한 미진한 것이 있다. 부자의 뜻은 본래 다만 무첨 무교로 조금 능히 그 분수에 처할 수 있고 도에 나아갈 수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만약 즐거워하고 예를 좋아함과 같은 것은 도에 나아가고 덕으로 들어가는 깊음이 앞 사람이 미치는 바가 아닌 것이 있을 따름이니, 반드시 사람에게 접한 이후에 보는 것으로 부족함으로 여기고, 자신에게서 구하여 스스로 얻는 것으로 남음이 있게 되는 것은 아닌데, 하물며 아첨하지 않는 선비가 어찌 반드시 모두 남에게 나오며 교만하지 않는 선비가 또한 어찌 반드시 모두 비린함에서 나오겠는가?

주씨의 설명은 대개 반드시 사씨 물아의 말과 비슷하지만 그러나 사람으로 인하여 하지 않는다는 설명은 또 더욱 성글 것이다.

지나간 것을 말해주면 올 것을 안다고 함에 이르러서는 그 설명이 또한 통하지 않는 것이 많다. 만일 정자의 설명과 같다면 자공은 다만 부자의 말을 외워 탄식한 것일 뿐이고, 오는 것을 앎을 볼 수 있는 것은 있지 않다. 범씨 양씨 윤씨의 설명과 같다면 도리어 간 것을 말해 줄 것 같으면 오는 것을 알고, 사씨의 설명과 같다면 자공이 다만 능히 부자가 말한 바의 계급(등급)을 형용하니, 또한 그 올 것을 앎을 볼 수 있지 않다. 대저 이 장 여러 사람의 설명은 모두 그 문장의 뜻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설명이 비록 정밀하지만 끝내 그 합당하지 않는 것이 있다. 만약 범씨가 밖은 남음이 있고 안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무첨 무교를 좋다고 여긴 것은 또한 옳지 않다. 가령 자공이고서 과연 이와 같은 것에서 면하지 못하였다면 또한 족히 무첨 무교가 아름다움이 되는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여씨의 설명은 『語解』에 보이지 않고 문집에 보이니, 어쩌면 그가 젊었을 때 아직 이론이 확정되지 않았을 때의 의논인가? 이 밖에 증씨 장경부의 설명이 또한 볼 만한 것이 있다.

 

曽氏曰以貧 故無諂 以富 故無驕 貧富之道耳 樂非以貧 好禮非以富 出於情性而貧富不能解也 증씨왈, 가난함으로 아첨함이 없고 부유함으로 교만함이 없음은 빈부의 도리일 따름이다. 즐거움은 가난함으로 하지 않고 예를 좋아함은 부귀로 하지 않으니 성정에서 나와 빈부가 능히 해명할 수 없다.

O張敬夫曰安於無諂無驕 而不知進學 固未足貴 而所謂無諂無驕者 學者亦非可忽也 居貧而有一毫求之之意 居富而有一毫自恃之心 皆諂與驕也 此病未除而曰吾樂與好禮 未之聞也必也 無諂無驕而後 樂與好禮 可得而進焉 又不可以不知也

장경부가 말하기를, 무첨 무교에 편안하여 학문에 나아감을 알지 못함은 진실로 귀할 것이 못되니 이른 바 무첨 무교라는 것은 학자들이 또한 소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난함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구하는 뜻이 있고 부유함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 있음은 모두 아첨과 교만이다. 이 병통을 제거하지 않고 나의 즐거움과 예를 좋아함을 말한다면 반드시 이름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무첨 무교 이후에 즐거워하고 예를 좋아 한다면 진전이 있을 것이니, 또 알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6. 或問十六章之說 曰尹氏善矣 范楊亦佳 但知人之說 二家各得其一偏 而范氏未有不知之云 楊氏求為可知之說 則非此章之所指矣 吕氏充知有命之說 皆非至論 謝氏之說 既非本文意而又不免驕吝之私 亦猶其首章不愠之云也 侯周氏上句似范氏 下句似吕謝皆已辨於前矣

혹이 16장의 설명을 물으니,

왈, 윤씨의 설명이 훌륭하고, 범씨와 양씨는 또한 좋지만, 다만 知人의 설명은 두 사람이 각각 한편으로 편중한 점을 얻었고, 범씨는 미유불지(未有不知)의 말과 양씨 구위가지(求爲可知)의 설명은 이 장에서 가리키는 바가 아니다. 여씨의 충지유명(充知有命)의 설명은 모두 지극한 의논이 아니다. 사씨의 설명은 이미 본문의 뜻이 아니고 또 교만하고 인색한 사사로움을 피하지 못하니, 또한 머릿 장 불온의 말과 같다. 후씨와 주씨의 윗 구절은 범씨와 같고 아랫 구절은 여씨 사씨와 같은 것은 모두 이미 앞에서 변별하였다.

'논어 > 논어혹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일  (0) 2009.03.03
위정 2 해석  (0) 2009.02.05
5장  (0) 2008.11.17
4장  (0) 2008.11.17
3장  (0) 2008.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