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논어혹문

3장

황성 2008. 11. 6. 23:29

3. 或問子於前章 既以仁為愛之理矣 於此 又以為心之徳 何哉 曰仁之道大 不可以一言而盡也 程子論乾四德而曰四德之元 猶五常之仁 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 推此而言 則可見矣 蓋仁也者 五常之首也 而包四者 惻隱之體也 而貫四端 故仁之為義 偏言之則曰愛之理 前章所言之類 是也 專言之則曰心之德 此章 所言之類 是也 其實愛之理 所以為心之德 是以 聖門之學 必以求仁為要 而語其所以行之者 則必以孝弟為先 論其所以賊之者 則必以巧言令色為甚 記語者 所以列此二章於首章之次 而其序又如此 欲學者知仁之為急 而識其所當務與其所可戒也

 혹자가 묻기를, 그대가 앞 장에서 이기 인을 사랑의 이치라고 하였고, 여기에서는 또 마음의 덕이라고 한 것이 무엇 때문인가?

 왈, 인의 도는 커서 한 마디 말로 다 말할 수 없다. 정자가 건의 4덕1)을 논함에 4덕의 원(元)은 5상의 인과 같으니, 치우쳐 말하면 한 일이요, 전적으로 말하면 4가지를 포함한다고 하니, 이것으로 미룬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인이라는 것은 5상의 으뜸이요, 4가지를 포함하고, 측은지심의 체(體)요 4단을 관통하기 때문에 인의 뜻 됨은 치우쳐 말한다면 사랑의 이치이라고 하니, 앞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이 이것이요, 전적으로 말한다면 마음의 덕이라고 하니, 이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 그 실재 사랑의 이치는 마음의 덕이 되니, 이 때문에 성인 문하의 학문은 반드시 인을 구함을 요체로 삼으니 그 실행함을 말한다면 반드시 효제로 우선하고, 해침을 논한다면 반드시 ‘巧言令色’으로 심함으로 삼으니, 논어를 기록한 사람이 이 2장을 1장의 다음에 나열하고 그 순서가 또 이와 같으니, 학자로 하여금 인이 급함이 됨을 알고 그 마땅히 힘써야 할 바와 그 경계할 것을 알게 함이다. 


曰夫子所謂鮮仁 程子乃以非仁釋之 何也 曰夫子之言 所謂辭不廹切 而意已獨至者也 程子則懼夫讀者之不察 而於巧言令色之中 求少許之仁焉 是以推本聖人之意 直斷其不仁 以解害辭之惑也 說經如此 其可謂有功矣 而後之說者 猶紛紛然 置曲說於其間 其亦不察也夫

 묻기를, 부자가 이른 바 선인(鮮仁)을 정자는 곧 인이 아니다고 해석한 것은 무엇입니까?

 왈, 부자의 말은 이른 바 “말은 박절하지 않지만 뜻은 이미 지극 하다.[辭不廹切而意已獨至]”라는 것이다. 정자는 독자들이 성찰하지 않아 교언영색 가운데에 조금의 인을 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성인의 뜻을 미루어 근본하여 곧바로 그것이 불인이라고 단정하여 말을 해치는 의혹을 해명한 것이다. 경전을 설명함이 이와 같으니 공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후학들이 설명함이 오히려 어지럽게 잘못된 설명을 그 가운데에 두었으니 살피지 않은 것이로다.


曰范氏之說 如何 曰聖人之意 所謂鮮矣仁者 蓋曰如是之人 少有仁者之云耳 非謂如是之人 其仁少也 今曰有時而仁 又曰其心未必不仁 則失之矣 夫人心本 皆仁 雖或賊之 而豈可以多少論哉 且曰有時 則又不在乎心 而在乎時矣 又曰為利而其心未必不仁 則豈有其心為利而猶得為仁者耶 是皆牽於鮮之為少 而不察乎聖言婉微之體 是以 曲為之說 而失之 觀夫程子之言 則可以見其得失矣

 범씨의 논설은 어떻습니까?

 왈, 성인의 뜻은 이른 바 선의인(鮮矣仁)라는 것은 대개 이와 같은 사람은 인이 있는 사람이 적다고 말했을 따름이요, 이와 같은 사람은 그 인이 적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거늘 지금 때때로 인함이 있다고 말하고, 또 그 마음이 반드시 불인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잘못 되었다. 대저 마음의 본심은 모두 인하니, 비록 혹 해쳤더라도 어찌 많고 적음으로 논의할 수 있겠는가? 또 때에 있다고 말한다면 또 마음에 있지 않고 때에 있을 것이다.// 또 이익을 위하면 그 마음이 반드시 불인하지 않다고 말하니, 어찌 그 마음이 이익을 위하면서 오히려 인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 선(鮮)이 적음이 됨에 견인되어 성인 말씀의 완미한 본체를 살피지 않으니, 이 때문에 잘못 설명하여 망실하였다. 정자의 말을 관찰한다면 그 득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曰吕氏之說 不亦善乎 曰言固欲巧而不可巧其言 色固欲令而不可令其色 今曰欲巧欲令而不明此意 則已疎矣 且徒以修之内外為别而不知為已為人之有異 亦未足以定取舎之極也 蓋誠為已也 則修於外者 乃所以養其内而不患本之不立 誠為人也則其飾乎外者 安得謂之修 其為害 又豈但本之不立而已哉

 묻기를, 여씨의 설명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왈, 말은 진실로 공교롭고자 하지만 그 말을 공교롭게 할 수 없고 안색은 진실로 아름답게 하고자 하지만 그 안색을 아름답게 할 수 없거늘 지금 공교롭게 하고자 하고 아름답게 하고자 하면서 이 뜻을 밝히지 않다고 말하면 이미 성글다. 또 한갓 내외를 닦는 것으로 분별을 삼고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의 다름을 알지 못하니, 또한 취사의 지극함을 정할 것이 못된다. 대개 진실로 자신을 위함에 외면을 수양하는 것은 곧 그 내면을 함양함이요 근본이 서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고, 진실로 남을 위함에 그 외면을 꾸미는 것이 어찌 닦음을 이르겠는가? 그 해됨이 또 어찌 다만 근본이 서지 않을 따름이겠는가?


曰謝氏之說 所引多端而不為判决 子以其意為如何也 曰彼其所引 若多端者 然一言以蔽之 亦曰為已為人之不同而已 蓋意誠在於為已 則容貌辭氣之間 無非持養用力之地 一有意於為人 而求其說巳 則心失其正而鮮仁矣 故夫子告顔淵以克己復禮之目 不過視聴言動之間 而曾子所言 君子所貴乎道者 亦在於容色辭氣四者而巳 所謂遜以出之情信辭巧者 但不欲其直情徑行 以招悖入之患而已 至於詩人所謂令儀令色者 則大賢成德 能逺暴慢之效 郷黨之所記 恂恂怡怡者 則聖人盛徳之至 動容周旋中禮之妙也 若夫小人訐以為直 色厲内荏 則雖若與為巧令者不同 然覈其矯情飾偽之心 則實巧令之尤者耳 學者 於謝氏之說 以是辯之 庶乎其得之也 但所謂出詞氣者 則非曾子之意 請及其本章而論之

 묻기를, 사씨의 설명은 인용한 것이 단서가 많고 판결하지 않으니 그대는 그 뜻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왈, 저 사람이 인용한 것이 단서가 많은 것 같지만 그러나 한 마디 말로 가린다면 또한 위기와 위인이 같지 않을 따름이다. 대개 뜻이 성실함이 자신을 위함에 있다면 용모와 말씨의 사이에 가지고 기르며 힘을 쓰는 곳이 아님이 없는데, 한결같이 타인을 위함에 뜻이 있으면서 그 자신을 기쁘게 함만을 구한다면 마음이 그 바름을 잃어서 인함이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안연에게 극기복례의 조목을 알려줌에 시청언동의 사이에 지나지 않고, 증자가 말한 군자가 도를 귀중하게 여김은 또한 용모와 용색사기(容色辭氣) 4가지에 있을 따름이다. 이른 바 공손히 내어서 정신사교함은[遜以出之 情信辭巧]는 것은 다만 그 정을 곧게 하고 행실을 빨리하여 잘못되어 들어오는 근심을 부르지 않고자 할 따름이다. 시인이 이른 바 위의를 아름답게 하고 안색을 아름답게 한다[令儀令色]는 것은 대현과 성덕이 능히 포악하고 태만함을 멀리하는 징험이요, 향당에 기록한 신실하며 화평하다[恂恂怡怡]는 것은 성인의 성덕의 지극함이요, 용모를 움직이고 주선함이 예에 알맞은 묘체이다. 소인이 들추어내어 곧음으로 삼고 안색은 사나우면서 내면은 유약함과 같다면 비록 공교롭게 아름답게 하는 사람과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감정을 억누르고 꾸미고 거짓된 마음을 밝힌다면 진실로 교언영색이 뛰어난 것일 따름이다.

 학자는 사씨의 논설에 대해서 이것으로 분별한다면 그의 얻을 것이다. 다만 이른 바 사기를 낸다는 것은 증자의 뜻이 아니니 청컨대 그 본문의 문장에 미쳐서 의논하리라.


曰游楊周氏之說 如何 曰游氏大抵不切而其所謂誠敬偽謟者 名義 皆若未當 其曰不絶其為仁者 則又若范氏之失 而小不同也 楊氏所謂便儇皎厲者 其初本也 意本甚正而其次本 乃引表記以為說 則本末倒置而非聖人之意矣 彼雖託於夫子之言 其流傳之有誤乎喜援據而不擇是非 其累有如此者 且不察乎巧令之所以為巧令者 亦若吕氏之失 其曰非盡不仁者 又若范游之失而復小不同也 蓋范氏乃以一人而言 游氏以二人惡有淺深而言 楊氏則直以善惡相對而言耳 若周氏者 其庶幾乎 然其曰違仁多矣 似亦失程子本意而狂者蕩愚者詐以下不可曉 豈其辭之未達者與 

 묻기를, 유씨 양씨 주씨의 설은 어떻습니까?

 왈, 유씨는 대저 간절하지 아니하니 그 이른 바 성경위첨이라는 것은 의를 이름한 것이 모두 합당하지 않은 듯하다. 그 인이 됨을 끊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또 범씨의 실수와 같아서 조금 같지 않다.

 양씨가 이른 바 편현교려[便儇皎厲]라는 것은 그 초본에는 뜻이 본디 매우 옳지만 그 다음 본에 곧 『예기』의 표기(表記)를 인용하여 설명하니 본말이 도치되어 성인의 뜻이 아니다. 저가 비록 공자의 말에 의탁하였지만 그 전함에 끌어당겨 인용함을 좋아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음에서 그릇됨이 있어 그 여러 번 이와 같은 것이 있으니 짐짓 교언영색이 교언영색이 되는 까닭을 살피지 않았으니 또한 여씨의 실수와 같다. 그 모두 불인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또 범씨와 유씨의 실수와 같아서 다시 조금 같지 않다. 대개 범씨는 한 사람으로 말하였고, 유씨는 두 사람의 악이 얕고 깊은 것으로 말하고, 양씨는 곧바로 선악으로 상대하여 말했을 따름이다. 주씨는 그 가깝다. 그러나 그 인과 어긋남이 많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또한 정자의 본의를 잃었고 광자는 방탕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속인다고 狂者蕩愚者詐 한 이하는 이해할 수 없으니, 어쩌면 그 말이 달통하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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