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논어혹문

2장

황성 2008. 11. 5. 14:33

2. 或問仁何以為愛之理也 曰人禀五行之秀 以生 故其為心也 未發則具仁義禮智信之性 以為之體 已發則有惻隱羞惡恭敬是非誠實之情 以為之用 蓋木神曰仁 則愛之理也 而其發為惻隱 火神曰禮 則敬之理也 而其發為恭敬 金神曰義 則冝之理也 而其發為羞惡 水神曰智 則别之理也 而其發為是非 土神曰信 則實有之理也 而其發為忠信 是皆天理之固然 人心之所以為妙也 仁之所以為愛之理 於此 其可推矣

 혹이 묻기를, 인이 어떻게 사랑의 이치가 됩니까?

 왈, 사람이 5행의 빼어난 것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그 마음이 아직 드러나지 않으면 인의예지신의 성품을 갖추어 체(體)로 삼고, 이미 드러나면 측은 수오 공경 시비 성실의 정이 있어 용(用)으로 삼으니, 대개 목신을 인이라고 하니 사랑의 이치요, 측은지심을 드러낸다. 화신을 예라고 하니 경의 이치요,

그 공경을 드러내고, 금신을 의라고 하니 마땅함의 이치요, 그 수오지심을 발하고, 수신을 지라고 하니 분별의 이치요, 그 시비지심을 발하고, 토신을 신이라고 하니 진실로 소유한 이치요, 그 충신을 발하니, 이것은 모두 천리가 진실로 그러하니 인심이 오묘함이 되는 바이요, 인이 사랑의 이치가 되는 바를 여기에서 미룰 수 있다.


或曰然則程子以孝弟為行仁之本 而又曰論性則以仁為孝弟之本 何也 曰仁之為性 愛之理也 其見於用 則事親從兄 仁民愛物 皆其為之之事也 此論性而以仁為孝弟之本者 然也 但親者我之所自出 兄者同出而先我 故事親而孝 從兄而弟 乃愛之先見而尤切 人苟能之 則必有不好犯上作亂之效 若君子以此為務 而力行之 至於行成而德立 則自親親而仁民 自仁民而愛物 其愛有差等 其施有漸次 而為仁之道 生生而不窮矣 又豈特不好犯上作亂而已哉 此孝弟所以為行仁之本也

 혹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정자가 효제를 인을 행하는 근본으로 삼고, 또 성품을 논함에 인으로 효제의 근본으로 여긴 것은 어째서입니까?

 왈, 인은 성이 되니 사랑의 이치이다. 그 용(用)에 나타는 것은 사친(事親) 종형(從兄)과 인민(仁民) 애물(愛物)이 모두 일삼는 일이다. 여기에서 성을 논함에 인으로 효제의 근본이라고 한 것이 그러하다. 다만 어버이는 나가 태어난 바이고, 형은 한 가지에서 태어나 내보다 먼저 태어났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섬김이 효이고, 형을 따름이 제(悌)이니, 곧 사랑이 먼저 나타나고 더욱 간절하니, 사람이 진실로 능하다면 반드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고 난을 일으킴을 좋아하지 않는 효험이 있다. 만약 군자가 이것으로 일로 삼아 힘써 실천하여 행실이 이루어지고 덕이 섬에 이를 것 같으면 어버이를 친하게 여김으로부터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함으로부터 만물을 사랑하니, 그 사랑에는 차등이 있고 그 베풂에는 점점의 차례가 있어 인을 실천하는 도가 나고 나서 다하지 않을 것이다. 또 어찌 다만 윗사람을 범하고 난을 일으킴을 좋아하지 않을 따름이겠는가? 이것은 효제가 인을 행하는 바의 근본이 되는 바이다.


曰然則所謂性中只有仁義禮智而無孝弟者又何耶 曰此亦以為自性而言 則始有四者之名 而未有孝弟之目耳 非謂孝弟之理 不本於性而生於外也

묻기를, 그렇다면 이른 바 “성 가운데에는 다만 인의예지만 있고 효제는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왈, 이것은 또한 생각건대, 성으로부쿠 말한다면 처음 4가지의 이름이 있고 효제의 조목이 있지 않을 따름이니, 효제의 이치가 성에 근본하지 않고 밖에서 나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曰然則君子之務孝弟 特以為為仁之地也耶 曰不然 仁者 天之所以與我而不可不為之理也 孝弟者 天之所以命我而不能不然之事也 但人為物誘而忘其所受乎天者 故於其不能不然者 或忽焉 而不之務於此 不務則於其所不可不為者 亦無所本而不能以自行矣 故有子以孝弟為為仁之本 蓋以為是皆吾心之所固有 吾事之所必然 但其理有本末之殊 而為之 有先後之序 必此本先立而後其末 乃有自而生耳 非謂本欲為彼而姑先借此以為之地也 大率聖賢之言 若此類者甚衆 皆以是說求之則不失其立言之㫖矣

 묻기를, 그렇다면 군자가 효제가 효제를 힘씀에 다면 인을 행하는 근본으로 삼는가?

 왈, 그렇지 않다. 인이라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하여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이다. 효제라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사람이 물욕에 유혹되어 그 하늘에서 받은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능히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에 대해서 혹 소홀하여 여기에서 힘쓰지 않으니, 힘쓰지 않는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의 것에 대해서 또한 근본하는 바가 없어 능히 스스로 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자가 효제로 인을 행하는 근본으로 삼았으니, 대개 

이것은 내 마음의 고유한 바이고 내 일의 필연이니, 다만 그 이치는 본말의 다름이 있어 실행함에 앞뒤의 순서가 있으니, 반드시 이 근본이 먼저 수립된 이후에 그 말이 곧 절로 생겨나는 것이 있을 따름이요, 본디 저것을 하고자 함에 우선 이것을 빌려 지경으로 여긴다고 이르는 것은 아니니, 대저 성현의 말이 이러한 종류같은 것이 심히 많으니, 모두 이 논설로 구한다면 그 입언의 뜻을 잃지 않을 것이다.


曰然則義禮智信 為之 亦有本耶 曰有 請問之曰亦孝弟而已矣 但以愛親而言 則為仁之本也 其順乎親 則為義之本也 其敬乎親 則為禮之本也 其知此者 則為知之本也 其誠此者 則為信之本也 蓋人之所為 五常百行之本 無不在於此 孟子之論仁義禮智禮樂之實者 正為是爾 此其所以為至德要道也歟


묻기를, 그렇다면 인의예지신을 실천함에 또한 근본이 있는가?

 왈, 있다. 청하여 물으니, 또한 효제일 따름일 것이다. 다만 애친으로 말한다면 인을 행하는 근본이 된다. 그 어버이에게 순종함은 의를 행하는 근본이 된다. 어버이에게 공경한다면 예의 근본이 된다. 이것을 안는 것은 지를 행하는 근본이다. 이것을 성실히 함은 신을 행하는 근본이다. 대개 사람이 하는 바 오상과 백행의 근본이 여기에 있지 않음을 없으니, 맹자가 인의 예지 예악의 실재를 논하는 것은 정히 이것을 할 따름이니, 이것은 그 지덕(至德)과 요도(要道)가 되는 바일 것이다.


曰諸家之說 如何 曰范說大槩得之 但所引修身正心誠意者 為衍說耳 孝弟 自為人道之大端 非以其可以誠意而先之也 且所謂誠意者 欲其造次顛沛之間 思慮隱微之際 必以誠實而無一毫自欺之心 又豈獨於孝弟一事為然哉 為是說者 既不察乎論語之文 又不考乎大學之意 其亦甚矣 謝氏則正與程子說中 或人所問 由孝弟 可以至仁者 相似 而反乎程子之說者也 但其意不主乎為仁 而主乎知仁 比之 或說其失益逺耳 蓋其平日論仁 嘗以活者為仁 死者為不仁 但能識此活物 乃為知仁而後 可以加操存踐履之功 不能識此則雖能躬行力踐 極於純熟 而終未足以為仁也 夫謂活者為仁 死者為不仁 可矣 必識此然後 可以為仁則其為說之誤也 其誤如此 故其於旁引四條者 皆有若不知仁 則但為某事而已之說而又以孝弟特為近仁而非仁也 夫四條者 皆所以求仁之術 謂之非仁 猶可也 若孝弟 則固仁之發 而最親者 如木之根水之源 豈可謂根近木而非木 源近水而非水哉 其曰以事親從兄充之 則何往而非仁 又以不好犯上作亂 特為閭巷之人 由而不知之事 必其深念自省而有以察夫事親從兄之時之心然後 為知仁皆此意也 夫曰由孝弟充之而後 為仁 則是孝弟 非仁 必其識此活物而充之然後為仁也 故又以為閭巷之人 徒能謹於事親從兄 而不識其為活物 則終不可以入道 必其潛聴黙伺 於事親從兄之時 幸而得其所謂活物者然後 可以為知仁也 然直曰知仁 而不曰為仁 則又并與其擴充之云者 而忘矣 必如其說則是方其事親從兄之際 又以一心 察此一心 而求識夫活物 其所重者 乃在乎活物 而不在乎父兄 其所以事而從之 特以求夫活物而 初非以為吾事之當然也 此蓋源於佛學之餘習 而非聖門之本意 觀其論此而吕進伯以為猶釋氏之所謂禪彼 乃欣然受之而不辭則可見矣 又所謂人心之不偽 莫如事親從兄者 亦非是有子之意 乃論其當然之要 非論其偽不偽也 且若専以孝弟為不偽 則五常百行 豈皆出於人為之偽耶

 묻기를, 여러 사람의 설은 어떻습니까?

 왈, 범씨의 설이 대개 옳다. 다만 인용한 바 수신, 정심, 성의라는 것은 불필요한 말일 따름이다. 효제는 절로 인도의 큰 단서이니, 그 성의로서 우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른 바 ‘성의’라는 것은 순간 혹은 넘어지는 사이와 생각의 은미한 즈음에 반드시 성실하여 털끝만큼 이라도 스스로 속이는 마음이 없고자 하니, 또 어찌 유독 효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그러하겠는가? 이 말을 한 것은 이미 논어의 본문에서 살피지 않았고, 또 대학의 의사를 상고하지 않음이 그 또한 심할 것이다.

 사씨는 정히 정자의 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물은 바 ‘효제로 말미암아야지만 인에 이를 수 있다.[由孝弟 可以至仁]’는 것과 더불어 서로 같지만 정자의 설명과는 반대가 된다. 다만 그 사씨의 뜻은 인을 행함을 주장하지 않고 인을 아는 것을 주장하니, 혹자의 설명에 견주면 그 잘못됨이 더욱 아득할 따름이다. 대개 그 평소 인을 논함에 일찍이 활자(活者)로 인을 삼고 사자(死者)로 불인을 삼았으니, 다만 능히 이 활물을 알아서 곧 인을 안 이후에 조존(操存)하고 실천하는 공을 더할 수 있고,  능히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능히 몸소 실천함이 순수하고 익숙함에 지극하더라도 끝내 인이 될 수가 없다. 대저 사는 활자가 인이 되고 사자가 불인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반드시 이것을 안 이후에 인이 될 수 있다면 그 설의 잘못이다. 그 오류가 이와 같기 때문에 그 두루 4가지 조목1)을 인용한 것에 모두 만약 인을 알지 못한다면 다만 남의 일이 될 따름이라는 설이 있고, 또 효제로 다만 인에 가깝지만 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대저 4조목 이라는 것은 모두 인을 구하는 방법이요, 인이 아니라고 말하면 오히려 옳거니와, 효제는 진실로 인이 발동한 가운데 가장 친절한 것이 나무의 뿌리, 물의 근원과 같으니, 어찌 뿌리가 나무에 가까우면 나무가 아니겠으며 근원이 물에 가까우면 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사친과 종형으로 확충한다면 어디를 간들 인이 아니겠는가? 또 윗사람을 범하고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않음으로 다만 여항의 사람이 말미암아 알지 못하는 일로 삼았으니, 반드시 그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반성하여 사친 종형하는 때의 마음을 살핀 이후에 인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뜻이다.

 대저 효제로 확충한 이후에 인이 된다면 이 효제는 인이 아니니, 반드시 이 활물을 알아 확충한 이후에 인이 된다. 그러므로 또 여항의 사람이 한갓 능히 사친 종형에서 부지런히 행하면서 그 활물이 됨을 알지 못한다면 끝내 도에 들어갈 수 없으니, 반드시 그 사친 종형하는 때에 가만히 듣고 묵묵히 기다려 다행히 이른 바 활물을 얻은 이후에 인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인을 안다고 하고 인을 함을 말하지 않았으니, 또 아울러 그 확충이라고 말하는 것과 망각을 하고 만 것이니, 반드시 그 말과 같다면 이것은 바야흐로 그 사친 종형하는 즈음에 또 한 마음으로 이 한 마음을 살펴 활물을 앎을 구하니, 그 중점은 곧 활물에 있고 부형에게 있지 않으니 섬겨 따르는 것은 다만 활물을 구함이요, 애초에 내 일의 당연함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개 불학의 남은 습속에 근원하고 생문의 본래 뜻은 아니다.

  그 이것을 논하였되 여진백(吕進伯)이 생각하기를 오히려 석씨가 이른 바 ‘선’아라고 여긴 것을 저가 곧 기쁘게 받아서 사양하지 않음을 관찰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른 바 인심이 거짓되지 아니함은 사친과 종형 같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은 또한 유가의 뜻이 아니니, 곧 그 당연한 요체를 논한 것이요, 그 거짓과 거짓되지 않음을 논한 것은 아니다. 또 만약 오로지 효제로 거짓되지 않음으로 여긴다면 오상과 백행이 어찌 모두 인위적인 거짓에서 나오겠는가?// 

  

曰然則程子之論手足頑痺為不仁者 奈何 曰是固所謂愛之理者 與謝氏活者之說 相似 而其所以用力者 不同 學者不可不察也 蓋人能事親而孝 從兄而弟 則是吾之所謂愛之理者 常存不息而為仁之本 於此乎在也 事親而不知所謂孝 從兄而不知所謂弟 則是吾之本心 頑然不仁而應乎事者 皆不得其當 如手足之痺頑矣 仁與不仁 皆必責之踐履之實 非若謝氏反因孝弟以求活物 幸其瞥然見之 而遂以為得仁也

 묻기를, 그렇다면 정자가 의논에 수족이 마비됨이 불인이라고 한 것은 어떻습니까?

 왈, 이것은 진실로 이른 바 사랑의 이치라는 것이니, 사씨의 활자의 의논과 같지만 그 힘을 씀은 같지 않으니, 학자들은 살펴야 한다.

 대개 사람이 능히 어버이를 섬겨 효가 되고 형에게 순종하여 공경이 된다면 이것은 내가 이른 바 사랑의 이치라는 것이 항상 보존되어 종식되지 않아 인을 행하는 근본이 여기에서 존재한다. 어버이를 섬기지만 이른 바 효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형에게 순종하되 이른 바 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나의 본심이 완전히 불인하여 일에 호응하는 것이 모두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함이 마치 수족이 마비됨과 같을 것이다. 인과 불인은 모두 실천하는 실재를 요구하니, 사씨가 도리어 효제로 인하여 활물을 구하고, 그 언듯 봄을 다행으로 여겨 마침내 인을 얻는다고 여기는 것과는 같지 않다.


曰游氏以下諸說得失 願卒聞之 曰游氏說不好犯上作亂者得之 其論為仁之本則失程子之意矣 楊氏舉彼加此之說得之 其引有犯無隱則非本文之㫖矣 其曰務本之一事 蓋以務本為汎言 而孝弟為指其事耳 然曰一事 則似有大務本 而小孝弟之意 亦其言之小疵也 周氏進於道者 不可曉 豈非猶有惑志於老氏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之說耶

 묻기를, 사씨 이하 여러 사람의 의논의 옳고 잘못됨을 원컨대 마침내 묻습니다.     왈, 유씨의 의논 가운데 ‘不好犯上作亂’은 옳고, 그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말한 것은 정자의 뜻을 잃었다.

 양씨는 저것을 들어 여기에 더한다는 말은 옳고, 그 범함이 있을지언정 숨김은 없어야 한다[有犯無隱]는 것을 인용함은 본문의 뜻이 아닐 것이다. 그 근본에 힘쓰는 한 가지 일이라고 말한 것은 대개 근본에 힘쓰는 것으로 널리 말함으로 삼고 효제로 그 일을 가르킨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근본에 힘씀을 크게 여기고 효제를 작게 여긴 뜻이 있는 듯하니, 또한 그 말의 작은 병폐이다.

 주씨는 도에 나아간 것은 이해할 수 없으니, 어쩌면 오히려 노자의 도를 잃은 이후에 덕이 되고 덕을 잃은 이후에 인이 된다는 의논에 뜻을 의혹시킴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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