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몽구

羊祜識環

황성 2009. 6. 9. 10:07

羊祜識環(52)

晉羊祜字叔子 泰山南城人. 世吏二千石. 至祜九世 竝以淸德聞. 祜年五歲時 令乳母取所弄金環. 乳母曰 汝先無此物. 祜卽詣隣人李氏東垣桑樹中探得之. 主人驚曰 此吾亡兒所失物 云何持去. 乳母具言之. 李氏悲惋. 時人異之 謂李氏子卽祜之前身也. 祜博學能屬文. 魏高貴鄕公時 公車徵 拜中書侍郞. 武帝有滅吳之志 以祜都督荊州諸軍事 出鎭南夏. 累進征南大將軍南城侯. 卒贈大傅. 初有善相墓者. 言祜祖墓所有帝王氣. 若鑿之則無後. 後遂鑿之. 相者見曰 猶出折臂三公. 祜竟墮馬折臂 仕至公 而無子. 祜樂山水 每風景必造峴山 置酒言詠 終日不倦. 襄陽百姓於祜平生遊憩之所建碑立廟 歲時享祀. 望其碑者 莫不流涕. 杜預因名爲墮淚碑. 荊州人爲祜諱名云.

진(晉)나라 양호(羊祜)의 자는 숙자(叔子)니 태산(泰山) 남성(南城) 사람이다. 대대로 2천 석을 받는 관리였는데, 양호에 이르기까지 9세 동안 모두 청렴하고 도덕이 있는 것으로 소문났다.

양호의 나이 9세에 유모로 하여금 가지고 노는 금고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유모가 말하기를, “너는 앞서 이 물건이 없었다.”고 하니, 양호가 곧 이웃 사람 이씨집 동쪽 담 뽕나무 속에 이르러 찾게 하였다. 주인이 놀라며 말하기를, “이것은 내 죽은 아이가 잃은 물건인데 어찌 가지고 간다고 말하는가?” 하니, 유모가 전말을 이야기 하니, 이씨가 슬퍼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이씨의 아들은 양호의 전신이다고 하였다.

양호는 박학다식하며 속문(屬文)에 능하였다. 위(魏)나라 고귀향공(高貴鄕公) 때 공거(公車)로 징벽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郞)에 배수하였다. 무제가 오나라를 멸망시킬 뜻이 있어 양호를 형주제군사를 도독하게 하니, 출전하여 남하(南夏)에 주둔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남성후(南城侯)에 올랐다. 죽음에 태부(大傅)에 추증되었다.

초에 묘터를 잘 보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양호 조부의 묘소는 제왕의 기운이 있으니, 만약 파낸다면 후손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뒤에 마침내 팠다. 지관이 보고 말하기를, “그러나 팔이 부르진 삼공이 나올 것이다.” 하였다. 양호가 끝내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으며, 벼슬은 공에 이르렀지만 자식이 없었다.

양호는 산수를 좋아하여 매양 경치를 구경할 때면 반드시 현산(峴山)에 나아가 술자리를 마련하여 시를 읊어 종일토록 싫어하지 않았다. 양양(襄陽)의 백성들이 양호가 평소 노닐던 곳에 비를 세우고 사당을 건립하여 세시(歲時)에 향사(享祀)를 지냈다. 비를 바라보는 사람은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두예(杜預)가 인하여 타루비(墮淚碑)라고 이름지였다. 형주 사람들은 양호를 위하여 이름에 호(祜) 자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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