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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정집서

황성 2009. 4. 9. 16:48

太虛亭集序

古人有言 死而不朽者三 立德立功立言也 夫立德立功 人所難必 至於立言 亦豈易哉 六經 吾無間然矣 鄒夫子旣沒 立言者少 至西京董江都,賈太傅 以古文唱之 司馬遷,班固繼之 後得楊雄氏,劉向氏,王通氏 作者相承 唐有韓吏部,柳柳州,杜少陵,李謫仙 宋有歐,王,黃,蘇 元有楊,虞,揭,范 皆稟光嶽精英之氣 敷爲文章 雄蓋一時 名垂百代 雖謂之不朽 可也 寧城崔先生早有大志 博極群書 涵養精熟 發而爲文者亦復奧妙 名聲已挺於諸輩中 宣德甲寅 世宗臨雍策士 先生褒然爲大魁 擢入集賢殿 陪侍經幄 昵被知遇 在鑾坡者十七年 盡閱中祕書 淹貫今古 集文章之大成 獨步當時 文宗卽位 眷注亦隆 爲諫大夫 爲承旨 常兼館職 及佐我世祖 再參勳盟 位尊台鼎 正當作新文運之日 自任斯文制作之責 五經四書口訣 經國大典等編 皆所纂定也 逮我聖上臨御 又策勳烈 再入相 左右贊襄 恢弘文敎 撰世祖,睿宗實錄 皆爲總裁 屢掌文闈 得人亦盛 爵位愈高而文名益重 凡朝廷雄文大冊 事大表箋 皆出其手 他如公卿碑碣 官署寺院紀功載績者 與夫一時四方求文字者 得公片言隻字 如獲拱璧而珍寶之 居正先生妻弟也 先生移歸我家 居正年方志學 親承指誨 獲聞緖餘 後十載亦登第被選 濫側諸先生之後 盜竊文墨虛名 及先生入相 猥以不才 忝主文衡 揆分則踰 皆先生之賜也 先生平生以詞章爲無用空言 雖有著述 鮮存其稿 先生旣沒 嗣子永潾永灝勤於褒集 得詩文若干 未及彙集 相繼淪逝 居正竊念如先生之文章 不可泯滅無傳 謹會粹成編如左 欲序弁其首 則痛念先生存沒 悲不自勝 何能措一辭乎 然聞世之評先生之文者曰 先生天分至高 學力亦到 方其得意 肆筆成章 浩乎若長風驅帆 順流而下也 閃乎若騕褭騰驤 薾雲而上也 瑩乎若干將莫耶 光刃畢露也 其體裁雄渾峻壯 沈鬱淵願 雖富而不侈 雖覈而不鑿 雖奇而不怪 尤精於騈驪 深得陸宣公文法 眞可謂奇偉不凡之才矣 其所以立言不朽 又何讓於向之數君子者乎 抑聞之 立德之謂學 立言之謂文 言之成章者亦有功於斯文者也 德也功也言也三者相因 一而已矣 豈非學問之極功 作者之能事乎 今序先生之文 以此幷論之 大雅君子 其必有取捨者矣 先生諱恒 字貞父 太虛亭 其號也 龍集丙午淸和節 四佳逸老徐居正剛中 序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죽어도 섞지 않는 것1)은 세 가지가 있으니, 입덕 입공 입언이다.” 이라고 하였다. 입덕 입공은 사람이 기필하기 어렵거니와 입언에 이르러서도 어찌 쉽겠는가? 육경은 내 흠잡을 때가 없다. 맹자가 이미 돌아가시고 입언한 사람이 적었다. 서경(西京) 동 강도(董江都),가 대부(賈太傅)에 이르러서 고문을 창도하였으니,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가 계승하였고, 뒤에 양웅 씨(楊雄氏),유향 씨(劉向氏),왕통 씨(王通氏) 작자가 서로 계승하였다. 당나라에는 한 이부(韓吏部),류 유주(柳柳州),두 소릉(杜少陵),이 적선(李謫仙)이 있고, 송나라에는 구양수 왕안석 황정견 소식이 있고, 원나라에는 양재(楊載),우집(虞集),게혜사(揭傒斯),범곽(范//) 가 있어 모두 삼광오악(光嶽)의 정영한 기운을 받아 펴서 문장을 지어 한 시대를 풍미하여 백대에 이름을 드리웠으니, 비록 불후(不朽)라고 말하더라도 괜찮다.

 영성(寧城) 최 선생(崔先生)은 일찍 큰 뜻을 품어 널리 군서를 지극히 연구하여 정숙함을 함양하여 드러내었고, 문장을 만든 것이 또한 다시 오묘하였으니, 명성이 이미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빼어났다. 선덕(宣德) 갑인년에 세종이 임옹(臨雍)2)하여 선비들에게 책문을 짓게 하니, 선생이 포연(褒然)히 장원을 하였다. 발탁되어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경악(經幄)3)에서 임금을 모시고 가까이서 지우(知遇)를 입었다. 난파(鑾坡)4)에 있은 지 17년에 나라에서 비장한 책을 모두 읽어 문득 고금에 관통하여 모아 문장을 대성하였으니 당시에 독보적이었다.

 문종이 즉위하여 권주(眷注)함이 또한 융성하여 간대부(諫大夫)가 되었고 승지(承旨)가 되어 항상 겸직하였다. 우리 세조를 도움에 다시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지위가 태정(台鼎)에 이르렀다. 정히 문운(文運)을 만들어 새롭게 하는 때를 당하여 사문의 제작을 책임을 자임하니, 오경사서 구결(五經四書口訣)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의 책이 모두 찬정한 것이다.

 우리 성상이 임어(臨御)함에 미쳐서 또 훈렬(勳烈)에 책봉되어 다시 재상에 올라 좌우에서 도와 문교를 넓혔다. 세조와 예종 실록을 편찬함에 모두 총재(總裁)가 되어 여러 번 문위(文闈)를 관장하였다. 사람을 얻음이 또한 성대하였고, 작위는 더욱 높아짐에 문명이 더욱 무거웠다. 무릇 조정의 웅문대책(雄文大冊)과 사대표전(事大表箋)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기타 공경의 비갈과 관청 사원의 공적을 기록하여 실음과 당시 사방에서 문자를 구하는 사람이 공의 한 마디 말과 글자를 얻는다면 마치 벽옥을 안고 보배롭게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거정은 선생의 처남이다. 선생이 우리집에 장가듦에 내 나이 막 15세였는데, 직접 가르침을 받고 서여(緖餘)5)를 들었다. 10년 뒤에 또한 과거시험을 봄에 뽑아주어 외람되게 여러 선생의 뒤에 있게 되었으니, 문묵의 헛된 이름을 훔쳤다. 선생이 정승이 됨에 외람되어 나를 문형(文衡)을 주관하였으니, 분수에 지나친 것이었으나 모두 선생의 은덕이다.

 선생은 평소 사장을 쓸데없는 일과 부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여 비록 저술함이 이었지만 그 원고를 보존하는 것은 적었다. 선생이 이미 돌아가심에 아들 영린(永潾) 영호(永灝)가 부지런히 수집하여 시문 약간을 얻었지만 아직 미쳐 다 모으지 않았는데 서로 따라서 죽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건대, 선생의 문장은 민멸되어 전함이 없을 수 없다하여 삼가 모아서 책을 아래와 같이 이루었다. 그 머리에 붙일 서문을 쓰고자 함에 매우 선생이 돌아가심을 생각하니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니 어찌 능히 한 마디 말을 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에서 선생의 문장을 논평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니, “선생은 천성이 지극히 높고 학문이 또한 이르러 바야흐로 그 뜻을 얻었으며, 붓을 휘둘러 문장을 이루니 호연히 긴 바람이 배를 몰아 물결을 따라 내려가며, 번쩍 천리마가 머리를 들고 구름을 타고 오르는 듯, 밝게 간장(干將) 막야(莫耶)가 섬득한 칼날이 모두 드러나는 것과 같다. 그 체절(體裁)은 웅혼(雄渾) 준장(峻壯)하며 침울(沈鬱)하고 연원(淵願)하여 비록 풍부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비록 엄격하지만 천착하지 않으며, 비록 기이하지만 괴이하지 않고 더욱 변려문에 정밀하여 깊이 육선공(陸宣公)의 문법을 얻었으니 진실로 위대하고 범상하지 않는 재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말을 세워 없어지지 않는 것이 또 어찌 이전 여러 군자에게 양보하겠는가? 또 듣건대, 입덕(立德)을 학(學)이라 말하고 입언(立言)을 문(文)이라 말하니, 말이 문장을 이룬 것이 또한 사문에 공로가 있다. 덕과 공과 말 세 가지는 서로 따르니 한 가지 일 따름이니, 어찌 학문의 지극한 공이며 작가의 능사가 아니겠는가? 지금 선생의 문집에 서문을 씀에 이것을 나란히 말하니, 대아 군자는 반드시 취할 것이 있을 것이다. 선생의 이름은 항(恒)이며, 자는 정보(貞父)이고 대허정(太虛亭)은 호이다. 용집 병오 창화절(淸和節) 사가일로(四佳逸老) 서거정(徐居正) 강중(剛中)은 서문을 쓰노라

 


1) [死而不朽】指身雖死而言論、事業等長存. 《左傳·襄公二十四年》:“穆叔如晉. 范宣子逆之, 問焉, 曰:‘古人有言曰, “死而不朽”, 何謂也?’……<穆叔曰>:‘豹聞之, 大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國語·晉語八》:“魯先大夫臧文仲, 其身歿矣, 其言立於後世, 此之謂死而不朽.”

2) 임옹(臨雍) : 천자가 학궁(學宮)에 친림(親臨)하는 일. 옹(雍)은 곧 벽옹(辟雍)으로 태학(大學)을 말한다.

3) 경악(經幄) : 임금 앞에서 경전(經傳)을 강론하는 자리. 경연(經筵).

4)  금파(金坡)는 금란파(金鑾坡)의 약칭으로, 한림원(翰林院) 학사원(學士院)의 아칭이다. 당 나라 때에 한림원이 금란전(金鑾殿)에 있었다

5) 도(道)의 참됨[眞]으로 몸을 다스리고, 그 나머지[緖餘]로 국가를 다스리며, 그 찌꺼기로 천하를 다스린다 하였다.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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