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서발/기서발

불우헌집서

황성 2009. 4. 6. 18:13

不憂軒集序1401(태종1)∼1481(성종12)[黃景源1709(숙종 35)∼1787(정조 11)

孟子曰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 自周以來 學孔子而闢異端者蓋亦多矣 此豈皆聖人

맹자가 말하길“말이라도 양묵을 막아야 한다는 사람은 성인의 무리이다” 주나라 이래로 공자를 배우고 이단을 물리친 사람이 또한 많았으나 이들이 어찌 모두 성인의 무

之徒哉 然所謂仁義之士 如不能優游六藝 依歸聖人之門 則何以學聖人之道而爲其徒

리이겠는가 그러나 이른바 인의의 선비가 욱예에 우유하여 성인의 문하에 귀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성인의 도를 배워 그 무리가 될 수 있겠는가

哉 夫佛氏 春秋之楊墨也 楊墨 今之佛氏也 然則丁公所以斥佛氏者 雖謂之聖人之徒

불씨는 춘추의 양묵이요 양묵은 지금의 불씨이다 그러하니 정공이 불씨를 배척한 것은 비록 성인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거의 가까을 것이다

亦庶幾矣 公當莊憲極盛之時 游於太學 聞堯舜禹湯文武之敎 則其道亦已正矣 安知

공은 세종의 성대한 때를 당하여 태학에서 공부하여 요순우탕문무의 가르침을 들었으니 도도 이미 바르니 어찌 맹자가 이른바

非孟子所謂聖人之徒耶 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 又曰飛龍在天利見大人 莊憲在上之

 성인의 무리가 아니겠는가  역에 이르기를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봄이 이롭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봄이 이롭다 하였

大人也 公在下之大人也 下之大人 必有以訏謨諫諍 使上之大人 光臨於上 無纖翳之

으니 세종은 위에있는 대인이요 공은 아래에 있는 대인이다 아래에 있는 대인은 아래의 대인은 반드시 큰 계책으로 간쟁하여 위의 대인으로 위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여

蔽也 上之大人 必有以優容保全 使下之大人 靈承於下 無擯斥之憂也 是上下與之相

조그만 잘못도 없게 하고 위의 대인은 반드시 너그러움으로 보존해주어 아래의 대인이 아래에서 삼가 받들어 배척당하는 근심이 없게 해야 한다 이는 윗사람과 아랫사람

成 錫萬世無窮之光也 豈不休哉 然公致仕 歸老田里 猶上書條列時弊 康靖王賜酒慰

이 서로 도와 만대에 무궁한 영광을 전하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겟는가  그러나 공이 치사하고 전리로 돌아갔으나 오히려 상소하여 시폐를 나열하였으니 성종이 이

諭 特加三品散官 自中直大夫 陞通政 公如可從政言事 則何以致仕也 昔孔子致仕之

술과 위로하는 교지를 내리고 특별히 3품 산관으로 가자하여 중직대부에서 통정대부로 승격시켰다 공이 만일 언사에 종정할 수 있었다면 어찌 치사하였겠는가 옛날 공자

時 嘗沐浴請討陳恒 公奮於致仕之年 慷慨言事  亦可謂善學孔子也 公爲人 莫得以

가 치사하였을 때에 일직이 제계하고 진항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은 치사한 해에 떨치고 일어나 의분에 북받쳐 시폐를 말하였으니 또한 공자를 잘 배웠다고 이를

知焉 然精神心術 有詩焉淵慤而鮮華 有文焉疏達而當理 其可傳於後世也無疑矣 公

만 하다 공의 사람됨은 알수 없으나 정신과 마음이 시에서는 깊고 독실하며 곱고 화려하며 문장에서는 소통하고 이치에 맞으니 이것이 틀림없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공

後孫生員孝穆 使胤子翼祚 謀所以刻公之集 屬余序之 余旣慕公之德美 又感先祖翼

 후손 생원 효목이 맞아들 익조를 시켜 공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꾀하고 나에게 부탁하여 서문을 지어달라 하였다 내가 공의 아름다운 덕을 사모하고 또 선조 익성공이

成公力救之誼 是爲序 崇禎紀元後三丙午四月日 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兼判義禁

힘써 구원한 정의에 느낌이 있어 이에 서문을 쓰노라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이다

府事,吏曹判書,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奎


章閣檢校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賓客黃景源譔


정극인 [丁克仁] 1401(태종 1)∼1481(성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성(靈城).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 광주(廣州) 출신. 진사 곤(坤)의 아들이다(≪국조방목≫에는 寅의 아들로 되어 있다).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고, 여러 번 과시에 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그 뒤 풀려나 태인으로 남귀(南歸), 초사(草舍)를 짓고 불우헌이라 명명, 자호 또한 이를 사용하였다. 불우헌 앞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자제를 모아 가르치고,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풍교(風敎)에 힘썼다.1451년(문종 1) 일민천거(逸民薦擧)의 은전으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어 은일(隱逸) 6품(六品)을 받았다.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1) 한성판관 성순조(成順祖)의 역권(力勸)으로 전시(殿試)에 응시, 급제하여 김수령방(金壽寧榜) 정과(丁科) 13명에 들었다.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있다가 그 직을 사임하고 태인으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조정에서는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렸다.이로부터 다시 출사하여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내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하였다.1469년(예종 원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옮겨 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으로 특승되었고, 또 척불론을 펼치다가 하옥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석방되었다. 1470년(성종 1) 치사(致仕:나이가 많아서 관직을 내어놓고 물러남),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1472년 영달을 구하지 않고 향리 자제를 교회(敎誨)한 공으로 3품산관(三品散官)의 은영(恩榮)이 내리자 이에 감격, 〈불우헌가 不憂軒歌〉·〈불우헌곡 不憂軒曲〉을 지어 이를 송축하였다. 비록 환로의 영달은 없었으나 선비로서의 지개(志槪)와 풍도(風度)를 고수하였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81세로 별세하였다.문학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 〈불우헌가〉,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시가사에 공헌하였다. 정극인은 원래 광주(廣州) 두모포리 태생인데, 처가가 태인인 까닭으로 이곳에 우거하게 된 것이다.송세림(宋世琳)의 〈동중향음주서 洞中鄕飮酒序〉 발문에도 애초의 태인 사람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되었다.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황경원 [黃景源] 1709(숙종 35)∼1787(정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예학자(禮學者).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휘(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처신(處信)이고,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기(璣)이며, 어머니는 권취(權冣)의 딸이다. 승원(昇源)의 형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1727년(영조 3) 1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 의금부도사를 지내다가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이어 예문관검열·병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에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추사(追祀)를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이로부터 대사성·대사간·대사헌 겸 양관제학(兩館提學) 등의 청화직(淸華職)을 거쳐, 1761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고서(姑壻) 이정(李涏)의 상언사건 (上言事件)에 연좌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이듬해 합천으로 이배되었다가 고향으로 방환(放還)되고, 이듬해에는 풍천부사로 복관되어 영조가 죽기까지 12년 동안 호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 겸 대제학과 형조·예조·공조의 판서 등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모두 사양하고 중추부판사로 죽었다.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예학(禮學)에 정통하고 고문(古文)에도 밝아, 오원(吳瑗)·이천보(李天輔)·남유용(南有容) 등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그리고 항상 춘추대의(春秋大義)로 자임하여 1418년(영락 16, 태종 18)부터 1645년(홍광 1, 인조 23)까지의 ≪남명서 南明書≫를 편찬하였고, 또 명나라 의종 이래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조선 사람들의 전기(傳記)인 ≪명조배신전 明朝陪臣傳≫을 저술하였다. 문집으로 ≪강한집≫ 32권 15책이 있다.


시호 장헌(莊憲) 세종[世宗, 1397.4.10(음)/조선 제4대 왕(재위 1418~1450). 젊은 학자들을 등용하여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등의 과학 기구를 제작하게 했다.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쓰시마섬을 정벌하는 등 정치·경제·문화면에이름 도(祹). 자 원정(元正). .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소생.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군, 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4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왕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뒤 정치·경제·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허조(許稠) 등의 청백리(淸白吏)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위하여 노력하면서 의정부(議政府)를 견제했다. 또한 이를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卞季良)·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 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 자문·왕실 교육·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1443년(세종 25) 한글을 창제하고, 1446년 이를 반포하였다. 또한 이천(李蕆 )에게 명하여 경인자(庚寅字)·갑인자(甲寅字)·병진자(丙辰字)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가운데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이름난 활자이다.초기에는 억불책(抑佛策)을 써서 5교(五敎) 양종(兩宗:천태종·조계종)을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2종으로 통합하여 각 18개 사찰만 인정하고 경행(經行)을 금지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승과제도(僧科制度), 경행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음악(音樂)에도 관심을 기울여 1425년 관습도감(慣習都監)을 설치하고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아악기들이 제조되었으며, 편경과 편종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실록(實錄)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春秋館)·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에 4대 사고(史庫)를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과학기술 업적은 1442년 이천·장영실(蔣英實)로 하여금 우량(雨量)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欽敬閣)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게 했고, 혼천의(渾天儀)·해시계·물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 등을 시켜 중국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 명(明)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을 빌어 역서(曆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했다. 또한 천문·역법(曆法)·의상(儀象) 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이순지가 펴냈다.경제·사회 정책면은 1436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고 각도(各道)의 토지를 비척(肥瘠)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稅率)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했다. 그러나 결함이 많아 14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풍흉(豊凶)에 따라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과 토지의 비옥도(肥沃度)에 따라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에 의한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量案)을 작성하게 했다.그리고 의창(義倉)·의료제도·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제정했고, 노비(奴婢)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 사형(私刑)을 금하도록 했다. 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처녀진헌(處女進獻)을 폐지하는 한편, 명나라에 보내던 금(金)·은(銀)의 조공물(朝貢物)을 폐지하고 마(馬)·포(布)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女眞)과의 관계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六鎭)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1432).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崔潤德)·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곳에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노력하였다.그리고 일본과는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1426년 삼포(三浦)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14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卞孝文)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입항할 수 있는 세견선(歲遣船)을 50척으로 제한했고, 세사미(歲賜米)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受圖書人)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陵西面) 왕대리(旺垈里)에 있는 영릉(英陵)인데 처음에는 광주(廣州)에 있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겼다.훌륭한 치적을 쌓았다.5.15(양)~1450.2.17]


「纖翳】1.微小的障蔽. 多指浮云. 南朝宋劉義慶《世說新語·言語》:“司馬太傅齋中夜坐, 於時天月明淨, 都無纖翳.” 宋陸遊《入蜀記》卷六:“是日, 天宇晴霽, 四顧無纖翳.” 明劉基《梁甫吟》:“誰謂秋月明? 蔽之往往由纖翳.”2.指事情的障礙. 中國近代史資料叢刊《辛亥革命·蔡專使元培代表布告全國文》:“其至少數抱猜忌之見, 騰離間之口者, 皆將爲泰和所同化, 而無復纖翳之留.


「靈承】善於順應. 《書·多方》:“惟我周王, 靈承於旅.” 孔傳:“惟我周王, 善奉於衆, 言以仁政得人心.” 宋蘇軾《賀駕幸太學表》之二:“濟濟多士, 靈承上帝之休.” 明宋濂《西域軍中獲角瑞頌》:“我太祖皇帝之龍興也, 靈承帝命, 寵綏四方.”


시호 강정(康靖) 성종[成宗, 1457~1494] 조선 제9대 왕(재위 1469∼1494). 세종·세조의 치적을 기반으로 문화정책을 폈다.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히 시행했고 《경국대전》과 이를 보충한 《대전속록》을 간행했다.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휘(諱) 혈. . 세조(世祖)의 손자, 추존왕(追尊王)인 덕종(德宗)의 아들. 어머니는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비(妃)는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1년(세조 7)에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해졌으며, 1468년에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69년(예종 1) 13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7년간 세조비(世祖妃)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1476년(성종 7)부터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는데, 세종(世宗)·세조(世祖)가 이룩한 치적을 기반으로 하여 빛나는 문화정책을 펴나갔다.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철저히 시행하였으며, 1474년(성종 5)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여 이를 반포하였다. 1492년(성종 23)에는 《경국대전》을 더욱 보충하여 《대전속록(大典續錄)》을 간행하였다.서적의 간행에 힘을 써서 《여지승람(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동문선(東文選)》 《오례의(五禮儀)》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을 편찬·간행하였다. 한편 윤필상(尹弼商)·허종(許琮) 등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올적합(兀狄合)의 소굴을 소탕하였으며, 압록강 방면의 야인(野人)을 몰아냈다. 또한 세종 때의 집현전(集賢殿)에 해당하는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문신 중의 준재(俊才)를 골라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는 호당(湖堂) 제도를 두어, 유자(儒者)·문인들로 하여금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였다.더욱이 세조의 찬역(簒逆)을 도와준 훈구파(勳舊派) 학자들과 대립 관계에 있는 이른바 사림파(士林派)에 속한 사람들을 과감하게 발탁하는 등 인재등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사예(射藝)와 서화(書畵)에도 능하였다. 능은 선릉(宣陵)이다.


산관[散官] ; 散階 라고도 한다. 고려의 문·무산계(文武散階)나 조선왕조의 동·서반관계(東西班官階) 제도에서는 관리는 삭직(削職)되지 않는 한 퇴관(退官)하더라도 그 품계(品階)를 보유하고 그 품계에 상당한 예우를 받았으며, 무고하게 해직된 것이 밝혀져 복직될 경우나, 언관(言官)이라는 직책상의 공죄(公罪)로 인하여 해직된 자가 복직하면 그전에 사관(仕官)한 경력을 통산하였다.이 제도는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있었으며, 청나라 때는 봉증관(封贈官)이라고 하였다.


「淵慤】深厚篤實. 明宋濂《諸子辯·聱隅子》:“是書文雖高簡, 體實淵慤, 誠可上繼孟氏, 非餘子比也.”


시호 익성(翼成  황희[黃喜, 1363~1452]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본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호 방촌(厖 村). 초명 수로(壽老). . 개성(開城) 출생.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사헌감찰(司憲監察)·우습유(右拾遺)·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1400년(정종 2) 형조·예조·이조 등의 정랑(正郞)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廢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南原)에 이배(移配)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峨眉山月歌(아미산월가) : 아미산의 달 노래 - 李白 詩





峨 眉 山 月 半 輪 秋(아 미 산 월 반 륜 추)


아미산에 반쪽 된 가을 달님은


影 入 平 羌 江 水 流(영 입 평 강 강 수 류)


그림자만 평강물 따라 흐르네


夜 發 淸 溪 向 三 峽(야 발 청 계 향 삼 협)


밤 청계를 출발코 삼협을 바라


思 君 不 見 下 渝 州(사 군 불 견 하 유 주)


임 그리며 못 본 채 유주로 가네


                               〈七言絶句〉





語句 解釋


峨眉山(아미산) : 높이 三천 미터가 넘는 명산으로 사천성(四川省) 아미현(峨眉縣)에 있다. 두 봉우리가 우뚝 마주보고 솟아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초생 달 같은 양쪽 눈썹 같으므로 아미산이라 했다.


半輪(반륜) : 반 둘레, 여기서는 반달.


影(영) : 월영(月影), 달그림자.


平羌江(평강강) : 여산현(廬山縣)에서 흘러 아미산을 안고 돌아 민강(岷江)에 합한다.


淸溪(청계) : 평강강 하류의 건위성(犍爲縣)에 있는 마을.


三峽(삼협) : 양자강 상류의 협곡, 무협(巫협), 구당협(瞿唐峽), 서릉협(西陵峽).


思君(사군) : 그대를 생각하다. 여기서는 달을 보고 싶어 한다는 뜻.


渝州(유주) ; 지금의 중경(重慶).





補充 說明


 아마산 협곡에서 쳐다보는 가을 달은 가파르게 솟은 산에 가리어 오직 반쪽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달그림자는 평강 의 강물에 잠겨 비치며 함께 끝없이 흘러가고 있다.


 나는 밤에 배를 타고 청계를 떠나 삼협(三峽)으로 향하며 그대 밝은 달을 보고자 하나 끝내 보지 못한 채로 어둠 속 협곡을 타고 유주(渝州)로 내려가노라.


 유명한 칠언절구다. 이백은 달같이 높은 위치에서 지도를 내려다보듯 아미산, 평강강, 청계, 삼협, 유주를 자유자재로 그려 놓았다. 불과 二十八자 밖에 안 되는 칠언절구 속에 다섯 개의 지명 十二자를 엮어 넣었으면서도, 그들 고유명사가 시운(詩韻)이나 시의 이미지를 손상하기는커녕 적절하게 도와주고 있으니, 참으로 이백의 기교는 놀랍다 하겠다.


 이렇듯 높은 위치에서 관조를 하는 듯한 시이건만, 그 내용은 몹시도 답답하고 초조하고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한 심경을 읊고 있다. 즉 우뚝우뚝 치솟은 아미산에 밝은 가을 달마저 반쪽만이 내보아고 더욱 협곡이라 양쪽 둘레의 절벽이나 산에 가리워 달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 속을 내려가고 있었다. 하기는 달이 안 뜬 것이 아니라 오직 산에 가리웠을 따름이다.


 또 달이 어디 숨었거나, 걸음을 멈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달도 평강의 강물 타고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거늘 협곡에 묻힌 나에게는 밝은 달, 그리운 달빛이 깃들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초조하고 실망된 심정으로 다급히 어둠의 협곡을 타고 유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이백의 고향인 촉(蜀)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첫발을 내딛던 청년기 二十五세 때에 지은 것이라 한다.


 어둠의 협곡, 여울을 타고 초조한 심정으로 밝은 달 , 달에 비친 밝은 꿈의 세계를 향해 치닫고자 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백은 어려서부터 달을 몹시 사랑했으며 달의 시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옛 노래에도 있다.「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든 달아!」이백에게 있어 달은 그의 낭만과 이상의 상징이었으며, 동시에 어둠의 현실을 아름답게 비추어 줄 수 있는 문학미(文學美)의 상징이기도 했다.


 또한 이백에게 아미산과 달은 이물일체(二物一體)였다. 아미산을 보면 달, 달을 보면 아미산을 연상했다. 그래서 「서쪽 명월을 보면 아미산을 생각한다.(西看明月憶峨眉)라고 읊기도 했다.

[출처] 峨眉山月歌(아미산월가) : 아미산의 달 노래 - 李白 詩|작성자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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