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서발/기서발

별동집속집발

황성 2009. 3. 26. 18:07

別洞集續集跋

[柳道獻] 


別洞先生續集成 蓋遺文之散出於諸家而裒而刊者也 詩若干首 箋表附錄數編而已 先生未嘗論著 元集一冊 僅出於知縣公所輯 其何以得先生之萬一哉 然先生道學文章之盛 一時記載者未嘗乏也 模範牖迪之訓 後人誦慕者未嘗忘也 更何以他求哉 嗚呼 我東自勝國來 文學之士 專尙詞華 雕琢繪繡之非不工矣 而於道則未有聞 蓋不知內外輕重之分故耳 幸而程朱之言 稍稍東來 先生以私淑之人 奮孤寒而爲群儒倡 尤邃於易學 表章之 發揮之 以興起斯文爲己任 而洛閩遺書 燦然復明於世 其功已偉矣 退陶李先生曰 尹先正理學淵源 佔畢四佳所稱許如此 故其於魏天使心學答說 亦擧尹公之名 李先生一言以徵信於無窮矣 今去先生之世五百餘年 正聲寢而異端橫 微言熄而邪說作 駸駸乎幾於蕩然矣 此集之出 亦豈無補於世也哉 先生后孫友進甫與昌東袖道善基周書 示不佞曰 願略加纂次 俾惠一言 不佞作而曰 以獻也謏聞寡識 曷敢當是役 仰念鼎山諸先輩與吾祖往復書 可以知事契之所在 敢不樂爲之言 庚子閏八月初吉 後學豐山柳道獻 謹書

별동(別洞) 선생의 속집이 이루어졌으니 여러 사람의 남은 글에서 흩어져 나온 것을 모아서 간행한 것이다. 시 약간 수와 전표(箋表) 부록 몇 편일 따름이다. 선생이 일찍이 저술하지 않아 원 문집 1책은 겨우 지현공(知縣公)이 모은 것에서 나왔으니, 어찌 선생의 만분에 하나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선생의 도덕 문장의 성대함을 동시대의 사람이 기록하여 실은 것이 일찍이 끊기지 않고, 모범과 가르친 훈계를 후인이 암송하여 사모하는 사람이 일찍이 잊지 않았으니, 다시 어찌 다른 것을 구하겠는가?

 아. 우리나라는 고려 이후로 문학하는 선비가 오로지 사장만을 숭상하였으니 꾸미고 치장함이 공교롭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도학에 있어서는 들리지 않았으니, 내외 경중의 분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자와 주자의 말씀이 조금씩 동쪽으로 왔다. 선생은 사숙한 사람으로 외롭고 한미함을 떨쳐 여러 유학자의 선구자가 되었다. 더욱 역학(易學)에 심오하여 표장하고 발휘하여 우리 문장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염락의 학자들이 남긴 글이 찬란하게 다시 세상에 밝히니 그 공이 이미 위대하다. 퇴계 선생이 말하기를, “윤 선정(尹先正)은 이학의 연원을 점필재와 사가정이 칭찬한 바가 이와 같다. 그러므로 그 명나라 위씨 사신이 심학답설에 또한 윤공의 이름을 거론하였다.” 하니, 이 선생의 한 마디 말이 무궁함에서 징험하여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선생의 세대와는 500백년 차이가 나니, 바른 소리가 잠기고 이단이 횡행하며 은미한 말씀이 종식되고 사설이 일어나 점점 완전히 없어지는데 가까울 것이다. 이 문집이 출현함이 또한 어찌 세상에 도움이 없으리오. 선생의 후손 우진(友進) 군이 창동(昌東)과 도선(道善) 기주(基周)의 편지를 소매에 넣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대략 찬차(纂次) 더해주고 한 마디 말을 지어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식견이 적어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하겠는가마는? 우러러 생각하니, 정산(鼎山) 등 여러 선생이 우리 조부와 서신을 왕복하였으니, 사계(事契)1)의 소재를 알 수 있다. 감히 즐겁게 서문을 쓰지 않겠는가?

 경자 윤 8월 1일 후학 풍산 유도헌(柳道獻)은 삼가 쓴다.


1) [事契】猶情誼. 宋曾鞏《襄州與交代孫頎啓》:“惟事契之稠重, 實愚冥之幸會.” 宋秦觀《婚書》:“既事契之久敦, 宜婚姻之申結.”


'기서발 > 기서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우헌집서  (0) 2009.04.06
태재선생문집서  (0) 2009.04.06
양심당시집서  (0) 2009.04.06
기우선생문집  (0) 2009.03.26
양촌집중간서  (0) 2009.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