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저/창녕성씨

창녕성씨 찬성공 12세손 통덕랑 휘 안리공파 가첩 서

황성 2008. 7. 24. 17:12

창녕성씨 찬성공 12세손 통덕랑 휘 안리공파 가첩 서

 

족보는 선조를 높이고 친족을 수습하는 보감(寶鑑)이다. 만약 족보가 아니라면 세대를 살필 수 없다. 그러므로 가문이 있는 사람은 족보가 있지 아니함이 없는데 혹 운수가 막혀 떠돌아다녀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아 친족과 서로 막히게 되면 족보가 없어서 그 세대와 내력을 잃는 사람이 더러 있다.

어느 날 족종 용근(鎔根) 씨가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집은 증조고 부군으로부터 다른 지방으로 떠돌아다니며 산 지 이미 100년이나 오래 되었는데 집에는 보첩(譜牒)이 없고, 집에 전하는 문헌은 『효행록』과 『부용당선생문집』그리고 선고의 유서(遺書)가 있을 따름이다. 선대의 내력을 오래도록 살필 곳이 없으니 이것을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내가 보고 슬퍼하여 말하기를 “어느 성이든 논할 것 없이 한 번 족보에서 누락되면 대동보에 들기가 오히려 구애가 있는데, 하물며 그 내력을 살피 수 없음에 있어서랴? 그러나 집안에 노숙(老宿)한 사람이 있어서 묻는다면 혹 알 수 있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나의 숙부 주훈(柱勳) 씨가 대구에 계시는데 연세가 79세이다. 가서 물어본다면 혹 증명할 수 있는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세가 많은 정신으로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지금 만약 가서 물어 안다면 다행스러움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용근 씨와 함께 대구에 가서 그 숙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으니, 주훈 씨가 슬프게 상심하며 말하기를 “내 일찍이 돌아가신 형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조고 부군 휘 열교(悅敎) 공은 총각 때 초계 재동으로부터 동래 다대포에 와서 우거하여 자호를 은포(隱浦)라고 하고 이곳에서 그대로 살았다. 부군이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자손들이 또 각처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대동보를 편수할 때 소식이 서로 막혀 단자를 거두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또 족보에 누락되었다. 형세가 그렇게 하도록 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곧 가첩 한 권이 있으니, 그대는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내가 삼가 살펴보니 표면에 ‘창녕성씨 은포공파 가첩(昌寧成氏隱浦公派家牒)’이라고 적혀 있고, 그 내면은 곧 실로 나의 종선조 의령현감 휘 경(踁) 부군의 후손이다. 그러나 구보(舊譜)를 살피지 못하여 확연하게 알 수 없었으므로 집에 돌아와 삼가 살펴보니, 은포공은 곧 부용당 선생의 아우 통덕랑 휘 안리(安理) 공의 7세손 휘 복노(復魯)의 셋째 아들인 것이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이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살필 수 없기에 이른 것은 어찌 운수가 막혀 떠돌아다니다가 친족과 서로 막힌 소치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구보에 다만 이름 ‘열교(悅敎)’ 두 글자만 실려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그 자손이 실제로 전하는 가첩에 실린 바의 생몰연대 및 묘소와 배위로 증명하여 보충해 넣었다. 이에 용근 씨가 선조를 사모하는 정성이 비로소 그 효과를 얻었으니,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무릇 사람의 집안이 쇠미한 나머지에 문헌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혹 이와 같은 일이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한 번 굽고 한 번 펴는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내가 용근 씨의 집을 관찰하니 은포공 이전은 한 번 펴는 때이고, 이후는 한 번 굽힌 때이다. 원하건대 용근 씨는 이 때문에 스스로 위축되지 말고 분수를 지키고 안도하여 몸을 다스리고 행실을 삼가서 항상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에게 끼치는 뜻’을 품는다면 반드시 다시 펴는 때가 있을 것이니, 힘쓸지어다.

내 삼가 이 첩을 베끼고 그 표면을 고쳐 ‘찬성공십이세손 통덕랑 휘안리공파 가첩(贊成公十二世孫通德郞諱安理公派家牒)’이라 하고, 그 사실을 이상과 같이 서술하여 책 앞에 적는다. 자손 된 이는 공경히 지켜 잃지 않는다면 오늘 날 한 권의 가첩이 장차 후일 족보를 편수하는 때 하나의 큰 증거 자료가 될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계묘년 3월에 족후손 정섭(正燮)은 삼가 서문을 적다.

 

창녕성씨(가첩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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