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저/창녕성씨

수양재 기

황성 2008. 7. 24. 17:16

거창의 성재명(成在明) 군이 나를 괴산서사(槐山書舍)로 방문하여 그의 선대인 처사 우포공(愚圃公)의 수양재기(修陽齋記)를 부탁하였다. 나는 마침 노쇠하고 병들어 자리에 누워 있어서 글짓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효자가 멀리 와서 간곡하게 구하는 뜻을 저버릴 수 없어서 마침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가장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태영(台榮)이니 고려 보문각 태학사 만용(萬庸)의 후손이다. 대대로 창녕에 살았는데 봉화 현감 삼귀(三龜)에 이르러 거창으로 이사하였으니 공에게 16세가 된다. 이로부터 대대로 명성을 지켜 그 고을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공은 이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골상이 위대하고 기품이 준수하였다. 배울 나이가 되어 가르침과 독촉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스스로 일과의 공부에 힘쓰고, 또 능히 문의를 깨달아 이해하고, 의심나는 것을 질문함에 이따금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문장을 지음에는 먼저 생각하지 않고서 즉시 이루었다. 약관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익숙히 읽었고 낙민(洛閩)의 여러 책에 대하여 또한 모두 완역(翫繹)하여 그만두지 않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진정한 문로가 오로지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곧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에 제자의 예를 드리고 배우기를 여러 해에 진결(眞訣)을 들었다. 가정을 다스림에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고 남을 접할 때에는 충신(忠信)을 우선으로 하였다. 마음으로 얻은 정밀하고 확고함과 몸으로 행한 정성스럽고 착실함은 다만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시속 선비의 학문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근에서 풍성(風聲)을 듣고 와서 배우는 사람이 날마다 많아져서 재사에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하였다. 이에 문인 가운데 정수민(鄭秀玟)․백준흠(白俊欽)․신현정(申鉉淨)․신규동(辛圭東)․백명기(白明基)․성병렬(成炳烈)․백순기(白珣基)․이태수(李泰洙)․김종기(金宗基) 등 여러 사람이 계를 만들어 재화를 불려 공의 집 오른쪽에 집을 지어 강학의 장소로 삼고 편액을 ‘수양재’라고 하였는데, 땅이 수도산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이 돌아가심에 재사는 비록 그대로 있었으나 오히려 기문이 없었으니, 이것이 오늘날 재명 군 나에게 청함이 있는 것인데, 또한 그 문인의 뜻에서 나왔다. 내가 이미 공의 사행 시종과 이 재사 성취의 전말을 서술하였으니, 또한 그 편액을 이름한 뜻을 부연하여 돌려보낸다.

『주역』에 이르기를, “문사를 닦아 그 정성을 세움은 학업에 처하는 바이다.”라고 하였고, 『대학』의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두 수신을 근본을 삼는다.”고 하였고, 『중용』에 이르기를,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이른다.”고 하였고, 주렴계(주렴계)의 태극도설」에 “군자는 닦는지라 길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전성 후현이 서로 전수한 지결(旨訣)이고 학문의 지남(指南)이다. 우러러 공이 한가히 거처함을 상상하건대, 항상 이 편액을 보면서 오직 스스로 그 몸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것으로 그 문인과 자제를 인도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명으로 인하여 우연히 ‘자기를 이루고 남을 이루는 즈음’에 합한 것이다. 하늘이 공을 낳은 것은 이미 우연이 아니고 땅이 서로 얻음은 또한 길함을 만났으니, 나는 이 재사가 마땅히 이 산과 더불어 아울러 존재하고 공의 이름이 이 재사와 함께 천지 사이에서 불후하게 됨을 알겠다. 이에 기문을 적는다.

 

신축년 10월 상순에 광주(光州) 노근용(盧根容)은 기문을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