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저/창녕성씨

남호재 기

황성 2008. 7. 24. 17:17

진강(晋康)의 성씨는 영남에서 이름난 문벌이다. 그 선조 가운데 교리공 휘 안중(安重)이 있으니 높은 재능과 덕행으로 명망이 우리 유림에 무거웠다. 그 다섯 아들이 또 모두 남전옥(藍田玉)이었는데, 그 넷째 아들이 남호(南湖)이니 휘가 일장(日章)이다.

남호공은 재주와 생각이 범인을 초월하였고 일찍 문망(文望)이 드러나 여러 번 향시에 합격했으나 유사(有司)에게 뜻을 얻지 못하여 끝내 예부의 시험에 떨어졌다. 공이 말하기를 “그만이구나! 선비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어찌 과거에 있겠는가?” 하고, 곧 성현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마음을 오로지 하여 마을 가운데 광풍제월정(光風霽月亭)에 은거하면서 발분하여 독실하게 공부하니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는 사람이 날마다 성대하였다. 이윽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지리산 가운데서 방문하니, 남명 선생이 공의 가슴에 품은 것을 살피고는 서로 늦게 만남을 한스러워 하고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이로부터 서로 왕래하여 경의(敬義)의 참다운 공부를 강론하니 남명 문하의 제자들이 모두 공을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공이 돌아가신 지 400 남짓 한 지금 임신년 봄에 종손 환원(煥元)이 여러 친족과 함께 도모하여 자손이 모여 사는 단성현 금만촌에 사모함을 깃들일 집을 짓고 편액을 ‘남호재(南湖齋)’라고 하고, 그 문을 ‘도남문(圖南門)’이라고 하였다. 후손 천주(千柱)․태환(泰煥)․환권(煥權)이 그 일족 금호(琴湖) 환덕(煥德)과 함께 봉림서실(鳳林書室)로 나를 찾아와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성씨 가문에 세의(世誼)가 산처럼 무거우니, 어찌 늙고 병들어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 “한 고을의 선한 선비라야 한 고을의 선한 선비를 벗할 수 있고, 한 나라의 선한 선비라야 한 나라의 선한 선비를 벗할 수 있다.”고 하였고, 『공가가어(孔子家語)』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그 벗을 보라.”고 하였으니, 백세의 아래 공을 논하는 이가 한 마디로 말하여 남명의 벗이라는 ‘산해우(山海友)’ 세 글자로 당할 것 같으면 공의 공됨을 달리 구하기를 기다릴 것이 없다. 이 재사에 거처하는 이들이 경의(敬義)의 종지(宗旨)를 강론하기를 즐거워하여 사해의 어지러움을 알지 못한다면 이것이 남호재가 세상 밖에 초연하게 되는 까닭이리라.

 

임신년 중양절에 분성(盆城) 허형(許泂)은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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