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저/창녕성씨

통덕랑 창녕성공 하달(夏達) 묘갈명

황성 2008. 7. 24. 17:15

공의 휘는 하달(夏達), 자는 상언(尙彦), 관직은 통덕랑이다. 성씨의 계보는 창녕에서 나왔는데 고려 중윤 호장 휘 인보(仁輔)를 비조(鼻祖)로 한다. 2세 휘 송국(松國)은 문하시중인데 백행의 근원인 효를 극진히 하여 『효행록』이 있다. 3세 휘 한필(漢弼)은 문하찬성사이다. 4세 휘 군백(君百)은 광정대부 문하평리(門下評理)이다. 5세 휘 리(履)는 문하시랑 우문관 태학사이다. 6세 휘 을신(乙臣)은 정의대부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다. 7세 휘 사홍(士弘)은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 집현전 태학사이다. 8세 휘 만용(萬庸)은 판도판서 보문각 태학사인데 고려 말기에 나라에 충성한 열사(烈士)로서 경덕사(景德祠)에 제향되었다. 9세 휘 경(踁)은 중직대부 의령 현감이다. 10세 휘 자보(自保)는 평시서령(平市署令)이다. 11세 휘 민손(敏孫)은 성균 생원이다. 12세 휘 익동(翼仝)은 훈도이다. 13세 휘 윤(胤)은 집경전 참봉이다. 14세 휘 순(純)은 봉직랑 안릉 참봉이니 증조이다. 15세 휘 안지(安智)는 자가 명보(明甫)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니 적공랑(迪功郞)이고 조부이다. 임진왜란에 백형과 함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佑)가 의병을 모집하는 데 나아가 가문과 국가의 치욕을 씻기를 다짐하여 힘을 합해 공을 세웠으니, 사적이 문행열전(文行列傳)에 실려 있다. 부친의 휘는 수도(壽道), 자는 경복(景福)이니 부사과(副司果)이다. 무신년에 태어나고, 기유년 8월 14일에 돌아가시니 창녕 성산면 정녕 뒷산 선영 아래 제단을 설치하였다. 배위는 순창 설씨 홍(弘)의 따님이니 합단(合壇)하였다. 하달(夏達)을 양자로 삼았다. 생가의 부친은 수창(壽昌), 자는 주성(周聖)이니 통정대부 첨지중추이다. 배위는 숙인 밀양 양씨 의동(義東)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을유년(1525)에 태어나고 정묘년(1567)에 돌아가셨다. 묘소는 청도 각남면 구곡리 골서산 인좌(寅坐)에 있다. 배위는 공인(恭人) 수원 백씨 수채(受綵)의 따님이니 합장하였다.

공은 천품이 우아하고 정직하였다. 배우기에 이르러서는 과정을 따라나아가니 서당의 스승이 칭찬하였다. 정미년에 22세로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관직은 통덕랑이다. 국가의 변란에 공로가 많았다. 생가와 양가에 섬기기를 오직 정성으로 하여 그 뜻을 조금도 거스름이 없었으며 심지(心志)와 구체(口體)를 두루 봉양하였다.

네 아들 가운데 첫째 둘째 셋째 아들은 후손이 없다. 넷째 아들의 휘 남경(南琼), 자는 광현(光顯)이니 갑신년에 태어나고, 정축년 1월 19일에 돌아가셨다. 묘소는 선고의 묘소 아래 인좌에 있다. 배위는 밀양 박씨 경(慶)의 따님이니 합장하였다.

행장을 살펴보고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다음에 명을 붙인다.

 

대대로 빛나는 작위가 있었으니

가문의 명성 고을에 가득하네

고가의 법도를

생각하여 잊지 않았네

실천함에 반드시 삼가고

말을 함에 조리가 있었네

오백 년 남짓 지나도

유풍이 없어지지 않았네

묘소의 모습 거듭 새롭고

문호가 다시 베풀어졌네

정령이 기뻐하니

음덕을 발함이 유장하리라

계미년 11월에 10대손 형(炯)은 삼가 찬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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