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저/창녕성씨

경성재 기

황성 2008. 7. 24. 17:19

재사를 경성(景惺)으로 이름한 것은 성성재(惺惺齋) 성공을 경모하는 뜻이다. 세운 것은 여러 후손이고 경모하는 것은 원근의 선비들이 함께 하는 바이다. 어찌 선비들이 함께 하는가? 공의 학덕(學德)과 풍휘(風徽)가 오래 되어도 사라지지 않아 한 집의 자손만이 높이는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오호라! 공은 우리 부사(浮査) 선생의 아들이다. 부사 선생은 학문(學問)과 행의(行義)로 세상에 추중을 받았다. 아들 다섯 명이 모두 재주가 있고 어질었는데 당시에 순 낭릉(荀朗陵) 진 태구(陳大丘)의 칭호가 있었다. 공은 그 막내로서 가장 사랑을 받았는데, 선생은 일찍이 ‘성성(惺惺)’으로 그 재사를 명하여 잠(箴)을 지어서 고하여 성대함을 경계하여 기대하고 허여한 바가 있었다. 공은 또한 능히 부친의 뜻을 이어서 성대하게 명망과 실상이 당일과 후세에 드러나 전하였다.

지금 재사의 터는 곧 공이 옛적 도를 강론하고 문도를 가르친 곳의 근처이다. 진주의 서쪽 고금촌에 자손들이 대대로 살면서 대대로 남긴 법도를 지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다. 제사가 이미 이루어짐에 순영(純永)에게 기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돌아보건대, 순영은 외람되게 후손의 처지에 있고, 또한 공을 경모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드디어 감히 사양하지 않고 쓰기를 이상과 같이 하고, 다시 공의 여러 후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다음과 같이 한다.

 

마음은 몸의 주인이 되고 경(敬)은 마음의 주인이 되니 지키는 법은 성성(惺惺)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실로 부사 선생이 남명에게 받은 진결(眞訣)로서 공에게 끼친 것이고, 공이 평소에 복응하고 종사하여 혹시라도 실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로 학문의 극치이니 사람마다 쉽게 힘써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충신(忠信)과 효우(孝友)는 자신을 행하고 일에 처한 가운데 드러나니, 이것은 무릇 이 학문에 뜻을 둔 이가 바른 길을 따르고 지킨다면 모두 능하지 못함이 없을 듯하다. 또 지금 세상의 변고가 망극하고 인륜의 기강이 거의 다 폐할 지경이니, 비록 사류로서 공을 경모하는 사람일지라도 마땅히 이것으로 법칙으로 삼아야 하는데, 더구나 공의 후예가 된 사람이 더욱 여기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알기로는 공의 후손이 문학과 몸가짐으로 사류에 이름난 이가 많은 데, 오직 이 재사를 짓는 일에 시종 정성을 다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공이 후손에게 드리운 원대함이 세대가 멀다고 하여 문득 다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덧붙여 쓴다.

 

경자년 청명절에 족후생 순영(純永)은 삼가 기문을 적다.

창녕성씨(손왕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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