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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석(吳昌硕)

황성 2019. 7. 17. 00:25

안길(安吉)

오창석(吳昌硕)

 

오창석(吴昌硕, 18441927)은 절강성(浙江省) 안길(安吉)에서 태어나 만청(晚清) 민국(民国) 시기에 시, 서예, 그림, 전각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해파(海派)의 대표적 인물로서 중국 근대 예술계의 거장이다. 서화 방면에서는 특히 자유롭고 활달한 새 양식을 창시하였다.

그의 초명은 준() 또는 준경(俊卿)이었으나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로는 이름 대신 창석(昌碩)이라는 자()를 사용하였다. 호는 창석(仓石), 창석(苍石), 창석(仓硕), 부려(缶庐), 고철(苦铁), 대롱(大聋), 부도인(缶道人), 석존자(石尊者) 등이다. 항주(杭州)의 서령인사(西泠印社) 초대 사장(社长)으로서 임백년(任伯年), 포화(蒲华), 허곡(虚谷)과 함께 청말해파 사대가(清末海派四大家)’로 일컬어진다. 그는 시서화인(诗书画印)을 결집하여 일신(一身)을 삼고, 금석(金石) 서화(书画)를 융합하여 일로(一炉)를 삼았다. 오창석이 이끌어준 후배로는 제백석(齊白石), 왕일정(王一亭), 반천수(潘天寿), 진반정(陈半丁), 조운학(赵雲壑), 왕개이(王个簃), 사맹해(沙孟海) 등이 있다. 서화작품집으로는 오창석화집(吴昌硕画集),오창석작품집(吴昌硕作品集),고철쇄금(苦铁碎金),부려근묵(缶庐近墨),오창석인보(吴苍石印谱)》《부려인존(缶庐印存)등이 있고시작집으로는 부려집(缶庐集)이 있다.

오창석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매우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17세에 이르러서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으로 온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혼자서 각지를 헤매는 불행한 시절도 있었다. 동치(同治) 3(1864) 21세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9명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를 제외한 모두가 세상을 떠났음을 알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황무지를 개간하며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학문을 닦아 22세에 수재(秀才)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서화(書畵)와 전각(篆刻)을 학습하기 위해 전국으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 이때부터 40대 초반까지 소주(蘇州), 항주(杭州), 호주(湖州) 등 예술의 고장을 찾아 때로는 서화와 전각을 팔고 때로는 명가의 문객으로 머물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서화와 전각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이후 오창석은 상해(上海)를 중심으로 서화와 전각의 창작에 전념하였다. 상해에 터를 정한 광서(光緖) 13(1887) 44세부터 50세 중반까지 오창석의 서화와 전각은 고대의 법칙과 명가들의 그늘에서 점차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오창석은 해서는 종요(鍾繇, 151230)를 배우고, 행서는 왕탁(王鐸, 15921652)을 배웠으며, 구양순(歐陽詢, 557641)과 미불(米芾, 10511107)의 필법을 참고로 하였다. 특히 그의 서예와 전각은 모두 석고문(石鼓文)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자신의 서풍(書風)과 인풍(印風)을 개척하였다. 그는 어릴 때 스스로 전각을 배웠으며 후에 석고문의 필의(筆意)를 융화하여 창작하였다. 서예도 전각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당시의 명가를 따랐으나, 30대 이후에는 석고문의 필의를 터득하여 전서는 물론 행서와 초서에 응용하였다. 그는 65세에 석고문을 임서(臨書)하고 여기에 제발을 써서 나는 전서 중에서 석고문을 즐겨 임서하였는데, 수십 년 동안 이 일에 종사하면서 날마다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석고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창작은 물론 임서에서도 자형과 결구의 외형보다는 필획의 기운과 내면의 정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림은 50세가 넘어서 시작했으며 특히 화훼(花卉)를 잘 그렸다. 화풍은 서위(徐渭, 15211593)나 석도(石濤, 16421707)를 모범으로 삼아 독특한 경지를 열었고 글씨를 쓰는 법으로 그림을 그려 힘찬 느낌을 준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의 세한삼우(歲寒三友)와 기석(奇石)을 그린 작품은 호방하면서도 참신하다. 화풍은 보기 드문 구도와 소재를 택하고 서체의 필법을 최대한 구사하여 독특한 선의 느낌을 자아낸다. 또한 중후한 필선의 화법을 창출하여 동양 회화미술사상 새로운 문인화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장(印章)을 새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서의 필법과 장법 그리고 도법인데, 그 가운데 서법과 전각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창석은 인장에 있어서 장법은 회화의 포치와 기법에 채용된 필획의 경중, 소밀, 참치, 굴신 등의 수법을 사용하여 인장을 높은 균형과 조화에 이르도록 하였다. 그는 인장에서 포치는 서법의 의취를 강구하였으며, 도법은 절도법과 충도법을 병행하여 평형을 깨뜨리는 방법으로 인장의 예술적 효과를 강조하였고, 허와 실을 서로 살려서 인장의 예술적 수준을 매우 높게 하였다.

 

 

 

 

 

 

왕탁(王鐸, 15921652)의 필적


2019년 7월 중국여행(6자 지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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