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주석

영조4 4,22-23

황성 2013. 8. 26. 11:45

1) 달려가서 : 원문은 ‘來住’인데, 《承政院日記》의 다수 용례에 근거하여 ‘馳往’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 조명신이……아뢰기를:원문은 ‘趙命臣啓曰 承文院官員 以都提調意啓曰,’인데, 《承政院日記》의 일반적인 용례를 참조하여 ‘趙命臣啓曰’의 ‘啓曰’을 ‘以’로 고쳐 번역하였다.

3) 정석오가……아뢰기를:원문은 ‘鄭錫五啓曰 問事郞廳 以鞫廳諸大臣意啓曰,’인데, 《承政院日記》의 일반적인 용례를 참조하여 ‘鄭錫五啓曰’의 ‘啓曰’을 ‘以’로 고쳐 번역하였다.

4) 방미방 문서(放未放文書):사면령이 내린 뒤 죄수들을 풀어 줄 부류[放秩], 그대로 둘 부류[仍秩], 풀어 주지 않을 부류[未放秩], 여쭈어 결정할 부류[稟秩] 등으로 나누어 적은 문서로, 이를 토대로 사면이 시행된다.

5) 4자의 어필 : 영조가 예관 이유(李維)를 통해  ‘한 오리의 실로 무거운 솥을 붙잡았다.[一絲扶鼎]’라고 쓴 어필을 내렸다. 이해 4월 22일 비망기에 봉조하 최규서(崔奎瑞)가 무신난(戊申亂)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공훈을 세웠지만 공신에 봉작되는 것을 매우 사양하자 영조가 별도로 포상하는 의미에서 ‘일사부정’이란 글씨를 써서 내려주었다. <<承政院日記 英祖 4年 4月 22日>>

6)옛적……만들었습니다:큰 인재를 구하려면 가까이에 있는 작은 인재부터 등용하여 큰 인재가 스스로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전국 시대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곽외에게 현자를 초빙하는 방법을 묻자 곽외가 현자를 초빙하고자 한다면 못난 자신을 먼저 등용하면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이를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소왕이 곽외를 스승으로 섬기며 황금대(黃金臺)를 쌓아 천금을 대에 올려놓고 현사(賢士)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이 소문을 듣고 악의(樂毅)와 극신(劇辛) 등 여러 나라의 명사(名士)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戰國策 燕策1 史記 卷34 燕昭公世家

7) 어제……내리셨는데 : 이해 4월 22일에 영조가 선정전(宣政殿)에서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처음 변란을 고변한 것은 일등 공훈에 해당되지만 치사(致仕)한 사람에게는 공신에 봉록하지 못하는 것이 국가의 규례이니, 서울에 머물면서 때때로 고문(顧問)하게 하라.”라는 처분을 내렸다. <<承政院日記 4年 4月 22日>>

8) 오늘 내린 비망기 : 비망기의 내용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83冊 英祖 4年 4월 23日에 수록되어 있다.

9) 단서 철권(丹書鐵券) : 쇳조각에 지워지지 않게 붉은 글씨를 써서 공신(功臣)에게 주어 그 자손(子孫)이 죄를 지어도 죄를 면하도록 하던 일종의 증서를 이른다. 《漢書 高帝紀》

10) 한나라 ……하였습니다 : 곽산(霍山)의 모반에 김안상(金安上)이 곽씨의 친속들을 궁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공로를 세웠는데, 장장(張章)과 양운(楊惲) 등이 모두 당시의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박성후(博成侯)와 고창후(高昌侯)와 도성후(都成侯)에 봉해졌다. 《漢書 卷68 霍光金日磾傳》

11) 유효립(柳孝立) : 원문은 ‘柳汝立’인데, 《承政院日記》 인조 6년 1월 8일 기사에 근거하여 ‘汝’를 ‘孝’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2) 황성원(黃性元) : 원문은 ‘黃聖元’인데, 《承政院日記》 인조 6년 1월 29일 기사에 근거하여 ‘聖’을 ‘性’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3) 우리나라……받았습니다 : 유효립이 반란을 일으키기 하루 전에 허적(許적)이 반란의 기미를 먼저 알고 자기의 조카인 허선(許選)과 조카 사위 황진(黃縉)을 시켜서 글을 가지고 가서 고변하게 하였다. 이후 허적뿐만 아니라 심부름한 황성원, 황진 등 11명이 공신의 봉작을 받았다. 《仁祖實錄 6年 1月 3日, 3月 15日》

14) 구원병을……누락되었습니다 : 이덕형(李德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忠州)에서 이덕형을 만나길 요청하자 홀로 적진에 가서 담판하였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서 평양에서 정주(定州)까지 왕을 호종하였고, 정주에서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군의 파병을 성취시켰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를 호종한 공신에 대해서 녹훈할 때 서울에서 의주(義州)까지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신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국역 선조실록 34년 5월 1일>>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검색일:2012. 5. 6》

15) 위성 공신(衛聖功臣)에 녹훈되었고 : 1592년(선조25) 선조가 요동으로의 망명을 염두에 두고 의주로 피난하던 중에 본국에 남아 있을 조정으로 분조를 설치하고 6월 14일 영변(寧邊)에서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관장하게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분조를 호위했던 사람들을 위성 공신(衛聖功臣)으로 책봉했다. 이덕형의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 <연보>에 의하면 이덕형은 익사 공신(翼社功臣)과 형난 공신(亨難功臣)에 책봉되었다가 계해년(1623)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공훈이 삭제되었다고 하고, 위성공신의 명단에도 이덕형의 이름이 없다. 그러므로 조태억이 ‘위성 공신’이라고 언급한 것은 착오인 듯하다.

16) 나숭곤(羅崇坤) : 원문은 ‘羅嵩坤’인데, 《영조실록》 4년 3월 27일 기사에 근거하여 ‘嵩’을 ‘崇’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7) 이……일이다 : 소모사(召募使) 유숭(兪崇)이 장계를 올려 청안 현감(淸安縣監) 이정열(李廷說)은 사민(士民)이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벌한 공을 가로채 자신의 공으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보고하였다. <<備邊司謄錄 英祖 4年 4月 24日>> 

18) 안고경(顔杲卿)이……죽었다. : 당(唐)나라 안고경은 안녹산(安祿山)에 의해 상산 태수(常山太守)가 되었고,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킨 뒤 안고경에게 고관대작이 입는 붉은 색깔의 도포를 주었다. 그러나 안고경은 군사를 일으켜 안녹산을 토벌할 것을 꾀하여 상산에서 혈전을 벌였는데, 성이 함락되자 안녹산을 꾸짖기를 “조갈구(臊羯狗)야, 어찌 나를 빨리 죽이지 않느냐.” 하며,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新唐書 卷192 顔杲卿列傳》

19) 임상극(林象極) 등의 예 : 청안 현감(淸安縣監) 이정열(李廷說), 진천 현감(鎭川縣監) 임상극(林象極), 회인 현감(懷人縣監) 김도응(金道應)은 역적의 관문(關文)을 봉행(奉行)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나아가 반역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한 뒤에 임상극과 김도응은 모두 역모로 처벌을 받았지만 이정열은 홀로 고을 안의 사민(士民)이 의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벌한 공로를 가로채 처벌을 피하였다. 《英祖實錄 4年 4月 9日》

20) 심유현이……일 : 무신란이 나기 전에 무기를 마련하기 위해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있던 심유현이 군기고의 무기를 빼돌리고 정황을 없애고자 화약고에 불을 질렀다. 그러고는 이해 1월 1일 해시(亥時)에 본부의 화약고(火藥庫)에 화재가 발생하여 무기고의 건물이 불에 타서 흔적도 없어졌고 화약 등도 모두 불타 버렸다고 감영과 병영에 거짓으로 보고하여 결국 파직당하였다. 《英祖實錄 4年 1月 27日, 2月 18日》

21) 대고(大誥)가 정부에 내려졌으니 : 이해 4월 22일에 영조가 “승정원에서는 나의 이런 의도를 본받아서 대고(大誥)를 대신지어 중외(中外)의 신민들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라.” 하였으며, 또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에게 언문으로 번역하여 널리 선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英祖實錄 4年 4월 22일》

22) 과거시험을……것이니 : 이해 4월 22일 예조에서는 이인좌의 반란을 진압한 뒤에 종묘에 고하였으므로 신인이 함께 경축하는 의미에서 과거시험을 칠 것을 건의하였는데, 재정적인 문제로 정시와 별시 중에 어느 것으로 치를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4年 4月 22日》

23) 남구만(南九萬)의 건의 : 1684년(숙종10) 9월 11일 주강(晝講)에서 우의정 남구만이, 이전 과거에서는 별시(別試)도 강경(講經)이 있었지만 이 법이 오랫동안 폐지되었으니 앞으로는 삼백시(三百試)·육백시(六百試)를 막론하고 모두 강경을 실시하자고 건의하였다. 《肅宗實錄 10年 9月 11日》

24) 응판(應辦) : 과장(科場)에서 소요되는 물품을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응판관(應辦官)은 원래 예조가 정한 각 관사에서 윤번(輪番)으로 맡는데, 호조, 군자감, 광흥창, 사재감(司宰監), 사복시(司僕寺), 제용감(濟用監), 공조, 사도시(司䆃寺), 장흥고(長興庫), 양현고(養賢庫)이다. 《국역 만기요람 재용편4 호조각장사례(戶曹各掌事例) 전례방(前例房)》

25) 며칠……일 : 이해 4월 22일에 이병상이 상소하여 정세(情勢)와 병세(病勢)를 이유로 삭직해 줄 것을 청하자, 영조가 지나간 일을 뒤미처 제기하여 인혐하는 것은 지나치다. 사직하지 말고 조리한 다음 직임을 살피라고 전교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4年 4月 22日>>

26) 하잘것없어 : 원문은 ‘錄錄’인데, <<承政院日記>>의 다수 용례에 근거하여 ‘碌碌’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7) 문형(文衡)의……주관하였으니 : 이의현(李宜顯)은 대제학으로 <<景宗實錄>>을 찬수(纂修)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英祖實錄 3年 5月 8日>>

28) 며칠……책망하였습니다 : 이해 4월 22일에 무신난이 평정되자 영조(英祖)가 비망기를 내려 붕당을 붕우로, 군왕은 부모로 비유하여 붕당의 폐단에 대해 책망하기를,  “아, 군신(君臣)은 부자(父子) 사이 같은 것이다. 아버지가 환란을 겪고 있는데 그 아들이 감히 환란이 겨우 안정되자마자 그 아버지를 떠나서 출타하여 그 붕우(朋友)만을 위한 채 부모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英祖實錄 4年 4月 22日>>

29) 문장을……하여 : 글을 지을 때에는 작자의 진실한 의도를 드러내야지 그럴듯하게 거짓으로 꾸미려 해서는 안 됨을 말한다.《근사록(近思錄)》 권2 위학류(爲學類)에 “언사를 제대로 닦고 살피기 위해서는 성실한 자세의 확립이 요구된다. 만약 언사를 수식하는 데에만 마음을 쓴다면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30) 전례에……이르니 : 이해 3월 28일에 영조가 호남 어사(湖南御史) 김시형(金始炯)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별유(別諭)와 어찰(御札)을 주어 사도 순무사(四道巡撫使) 오명항(吳命恒)에게 전하게 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4年 3月 28日>>

31) 열……표창 : 이해 3월 26일에 영조가 ‘뜻은 확고하며 공은 높다.[志確功高]’라는 넉 자를 써서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에게 하사하게 하고, 이어서……군졸들을 위로하라는 내용의 유지를 내렸다. <<英祖實錄 4年 3月 26日>>

32) 문루(門樓)에……내리시니 : 이해 4월 19일 난을 진압하고 돌아온 오명항이 노포문(露布文)을 올리고 헌괵례(獻馘禮)를 거행하였는데, 상이 선온(宣醞)하라고 명하고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친히 내려 주며 “경의 공을 가상하게 여겨 친히 한 잔을 내리는 것이다. 경은 중군 별장(中軍別將)과 함께 나누어 마시라.” 하였다. <<英祖實錄 4年 4月 19日>>

33) 조보(趙普)가……한다 : 조보가 검교태위 겸 시중(檢校太尉兼侍中)으로 무승군 절도사(武勝軍節度使)로 부임할 때 황제가 시를 지어 전별하였는데, 조보가 받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폐하께서 신에게 시를 하사하시니, 마땅히 돌에 새겨 신의 뼈가 썩을 때까지 함께 지하에 묻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송기(宋琪)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어제 조보가 중서성에 와서 어시(御詩)를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신에게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성상에게 보답할 길이 없으니 내생에 견마의 정성을 바치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宋史 卷256》

34) 전국(戰國)……않았으니 : 전국 시대 때 적군에게 승리하면 반드시 자손에게 보여 무공을 잊지 않게 하였다. 반당(潘黨)이 초(楚)나라 왕에게 진(晉)나라 군인의 시체를 수습하여 경관(京觀)을 만들기를 권유하자, 초나라 왕이 일곱 가지 무덕(武德)을 말하고 자신은 그 가운데 한 가지도 소유하지 못하여 자손에게 보여 줄 무공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한 일이 있다.《春秋左氏傳 宣公12年》 경관은 무공을 과시하기 위해 적의 시체를 높게 쌓아서 만든 거대한 무덤이다. 여기서는 승전비(勝戰碑)를 말한다.

35) 일전에……적에 : 이해 4월 19일 사도 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 오명항이 군대를 정돈하여 조정으로 돌아와 숭례문(崇禮門)의 문루(門樓)에서 헌괵례(獻馘禮)를 거행했는데, 오명항이 황금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고 꿇어앉아서 적의 괴수 이웅보(李熊輔), 정희량(鄭希亮), 나숭곤(羅崇坤)의 세 수급(首級)을 단상에 올렸다. 《英祖實錄 4年 4月 19日》

36) 사냥개를……자 : 계획을 세워 명령한 자를 가리킨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초기에 소하(蕭何)의 공(功)을 제일로 쳤다 하여 제장(諸將)들이 공을 서로 다투자, 고조가 이르기를 “제군들은 사냥하는 법칙을 아는가?……사냥을 함에 있어 짐승을 쫓아 잡는 놈은 사냥개이고, 개를 풀어놓아서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켜 주는 자는 사람인데, 제군은 다만 가서 짐승을 잡은 처지일 뿐이니 그 공은 개에 해당하고, 소하는 개를 풀어놓아서 짐승을 가리켜 보여 준 처지이니 그 공은 사람에 해당한다.” 라고 하였다.《史記 卷53 蕭相國世家》

37) 임금이……달려간다 : 《논어(論語)》〈향당(鄕黨)〉에 “임금의 부름을 받으면 수레에 멍에를 멜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달려갔다.[君命召 不俟駕行矣]”라는 말이 있는데, 임금의 부름을 받고 급히 달려가는 의리를 말한다.

38) 손에……내려 : 박필몽(朴弼夢)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의 탄핵을 받아 귀양 갔는데, 1728년(영조4) 무신난이 일어나기 전에 사촌 동생인 태인 현감(泰仁縣監) 박필현(朴弼顯)과 서로 내통하여 거사를 도모하였다. 1728년 3월 22일 밤에 무장(茂長)의 배소(配所)에서 도망쳐 박필현의 군대와 합류하여 서울로 진격하고자 하다가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도(竹島)로 도망갔다가 체포되었다. <<英祖實錄 4年 3月 25日, 3月 26日>>

39) 고어(古語)에……경계시킨다 : <<채근담(菜根譚)>> <평의(評議)>에 “하늘이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고자 하면 꼭 먼저 작은 복을 내려 교만하게 하니, 복이 온다고 반드시 기뻐할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함께 보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늘이 사람에게 복을 주려면 꼭 작은 재앙으로 경계시키니, 재앙이 닥쳤다고 반드시 근심할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함께 보고 헤쳐 나가야 한다.[天欲祸人 必先以微福骄之 所以福来不必喜 要看他會受 天欲福人 必先以微祸儆之 所以祸来不必忧 要看他會救]”라는 말이 있다.

40) 봉천(奉天)에서……조서 : 당나라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반역을 피하여 봉천으로 파천했을 때 죄기조서(罪己詔書)를 내렸는데, 가는 곳마다 장수와 군사들이 감동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舊唐書 卷12 本紀>>

41) 하북(河北)의……있고 : 당나라 문종(文宗) 때 우승유(牛僧儒)가 이종민(李宗閔)과 결탁하고 이덕유(李德裕)․이길보(李吉甫) 부자(父子)와 서로 겨루며 당파를 만들어 헐뜯고 공격하며 국정 운영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는데, 문종이 탄식하기를 “하북의 도적을 없애기는 쉬워도 조정의 붕당을 없애기는 어렵구나.” 하였다. 《舊唐書 卷171  李德裕列傳>>

42) 초구(楚丘)의……있다 : 춘추 시대 위 문공(衛文公) 때 적(狄)의 침입으로 위나라가 멸망하자, 제 환공(齊桓公)이 적을 정벌하고 초구(楚丘)에 성을 쌓은 다음 위나라를 다시 세우고 문공을 임금으로 세워 주었다. 이후 문공은 근검의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해 대포(大布)의 옷을 입고 대백(大帛)의 관을 쓰고서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하여 위나라를 다시 부흥시켰다. 대포와 대백은 거친 베와 비단이다. 《春秋左氏傳 閔公2年》

43) 포위된……하였고 : 위진남북조 시대 때 양(梁)나라 원제(元帝)는 위(魏)나라 군대에 포위를 당하고도 《노자(老子)》를 강론하였다는 고사가 있다.《通鑑節要 卷32 梁紀》

44)일폭십한(一曝十寒):식물을 하루 동안 햇볕을 쬐게 하고 열흘 동안 응달에 두게 한다는 뜻으로, 임금이 군자를 가까이하는 때는 적고 소인을 가까이하는 때는 많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孟子 告子上》여기서는 흐지부지하다가 중간에 학문을 그만둠을 이른다.

45) 답하기를 : 원문에는 없는데, 《승정원일기》의 다수 용례에 근거하여 ‘答曰’ 2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46) 정축년에……것 :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정축년(1637)에 누르하치의 열네 번째 아들 도르곤인 구왕(九王)이 지휘하는 청나라 군대에 패배하여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었다. <<仁祖實錄 15年 1月 22日>>

47) 연전에……보았는데 : 1713년(숙종39)에 영조가 직접 강화도에 간 적이 있다. 비망기로 박성로(朴聖輅)에게 전교한 내용 중에 “내가 계사년(1713) 봄에 강도(江都)에 가서 기전(記傳)을 열람하고 또 사당과 서원을 보았는데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충의와 구원일(具元一), 황선신(黃善身), 강흥업(姜興業) 세 사람이 순절한 일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年 12月 15日>>

48) 검각(劍閣) : 중국 장안(長安)에서 서촉(西蜀)으로 들어가는 통로인데 예로부터 험준한 요해처로 유명하였다.

49) 한……못한다 :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검각이 험난하게 우뚝 솟아 버티고 있으니, 한 사나이가 관문을 지키면 일만 명이 공격해도 뚫지 못하네[劍閣崢嶸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고 하였다.《李太白集 卷2》

50)예수가(預受價):호조에서 공인(貢人)에게 명년이나 후년에 사들일 공물가(貢物價) 조로 미리 지급한 것을 말한다. 《承政院日記 景宗 3年 5月 22日》

51) 맹자가……하였으니 : 맹자가 <<서경(書經)>> 〈탕서(湯誓)〉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말로, 군주의 포학한 정사를 백성들이 원망한 말이다. “<탕서>에 ‘이 해는 언제나 없어질꼬? 내 너와 함께 망하겠다.’ 하였으니, 백성들이 그와 더불어 망하고자 한다면, 비록 연못의 누대 동물원을 소유한들 어찌 홀로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孟子 梁惠王上》

52)절약하면……된다 : 이 말은 당나라 육지(陸贄)가 한 말로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권21에 실려 있다. 육지가 말하기를 “지력(地力)이 만물을 생성할 적에 대수(大數)가 있고 인력(人力)이 만물을 생성함에 대한(大限)이 있으니, 취할 적에 법도가 있고 사용할 적에 절제하면 늘 풍족할 것이요, 취할 적에 법도가 없고 사용할 적에 절제하지 않으면 늘 부족할 것이다.……절약하면 비록 창고가 비었더라도 반드시 채워질 것이고, 절약하지 않으면 아무리 창고가 가득 찼더라도 반드시 비게 된다.”라고 하였다. 

53) 난(爛)과 환(煥) : 미상(未詳)이다. <<승정원일기>> 경종 4년 4월 24일에 경상도에서 이덕표(李德標) 등이 올린 상소 명단에 이란(李爛)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난’은 이란으로 추측된다. ‘환’은 미상이다.

54) 번질(反作) : 환곡을 상환받을 때 기한인 연말까지 상환받지 못한 분량을 다 상환받은 것처럼 곡부(穀簿)를 꾸며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이를 채우기 위해 그다음 해 봄에는 다시 그 수량만큼을 환곡으로 나누어 준 것처럼 꾸며 감사에게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때에 따라 환곡을 분급하지 않았으면서 분급한 것처럼 문서를 꾸미고 그 수량을 대동(大同)의 납부에 전용하는 경우에도 쓰였다. 《萬機要覽 財用編3 糶糴 還穀》 《承政院日記 英祖 17年 1月 12日》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경인문화사, 2001, 300쪽》

55) 송인명이……말 : 이해 4월 20일 인정문(仁政門)에서 친국할 적에 송인명이 “상께서 탕평하는 방도에 마음을 두었지만 물러남을 염려하여 이러한 엄한 하교를 내린 것입니다.……신의 생각으로는 의리에 있어서 정당한 곳은 결코 거꾸로 놓을 수 없고 이 밖에 모든 일은 서로 간에 각자 조금씩 줄여 신맛과 짠맛을 조절하면 탕평은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4年 4月 20日>>

56) 며칠……말 : 이해 4월 20일에 친국하는 데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에서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영조에게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한 사람을 등용하는 일은 반드시 인재를 많이 모은 뒤에야 재주를 지닌 사람을 채용할 수 있습니다.……반란을 막 진압하여 염려스런 일이 많은 때에 조정에 나온 대소 신료들을 흩어져 가지 않게 하는 것이 국가에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특히 홍치중(洪致中) 같은 자를 설득하여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한 사실을 가리킨다. <<承政院日記 英祖 4年 4月 20日>>

57) 지나간……좋겠지만 :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은 현재의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이 일신(一新)됨을 강조하기 위해 쓴 말이다. 선천의 일로 맡겨 둔다는 것은 그간의 일은 지나간 일로 보아 죄와 허물을 씻어 주고 잊어버린다는 뜻이고, 후천의 일로 간주한다는 것은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서 잘 대비하자는 뜻이다.<<承政院日記 英祖 9年 1月 5日>>

58) 정제두(鄭齊斗) : 1728년(영조4) 무신난(戊申亂)이 일어났을 때 반란을 최초로 고변한 최규서(崔奎瑞)와 함께 도성에 들어와, 무신난이 완전히 평정될 때까지 도성에 머물면서 산림의 자격으로 영조와 대담하면서 탕평정치의 원칙에 대해서 진언하였다. 정제두는 3월 25일부터 5월 2일까지 여섯 번 영조와 소대하였는데, 이때가 네 번째 만남이다.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998, 254~255쪽>>, <<霞谷集 卷2 筵奏>>

59) 무신봉사(戊申封事) : 남송 효종(南宋 孝宗) 15년(1188)에 주희(朱熹)가 마지막으로 효종에게 상언한 것으로 8년 전에 올린 <경자봉사(庚子封事)>와 같이 그 근본은 제왕(帝王)의 학(學)에 두고 있다. 즉 첫째 태자를 바르게 인도하고, 둘째 대신(大臣)의 적임자를 선택하며, 셋째 강유(綱維)를 일으키고, 넷째 풍속을 변화시키며, 다섯째 백성의 힘을 기르고, 여섯째 군정(軍政)을 정리할 것에 대해서 언급하되, 임금의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일이 모두 바르다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11 戊申封事>>

60) 정일(精一)의 중(中) : 오직 한 가지 일에 마음을 쏟아 최선을 다하는 중을 이른다.《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오직 전일하게 지켜야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하였다.

61) 자막(子莫)의 집중(執中) : 상황을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적인 중을 고집하는 경직된 중을 뜻한다. 자막은 노(魯)나라의 현자(賢者)이다. 그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도가 모두 중(中)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두 주장을 절충하여 중간을 잡고자 했다. 그러나 맹목적 중을 고집하여 권도를 쓸 줄 몰랐다. 이 때문에 맹자가 “자막은 중을 잡았다. 중을 잡은 것이 도에 가깝기는 하나, 중을 잡되 권도가 없는 것이 마치 하나를 잡은 것과 같으니라.[子莫執中 執中爲近之 執中無權 猶執一也]” 하였다. 《孟子 盡心上》

62) 옛사람이……없다 : 이 말은 예부터 전해오는 말인 듯하다.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불충한 자요, 진정표(陳情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불효자이다.[先正有言 讀出師表 而不流淚者 其人必不忠 讀陳情表 而不流淚者 其人必不孝]’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다. <<椒邱文集 卷9>>

63) 이……묻는다 : <<서경>> <진서(秦誓)>에 나오는 말이다.

64) 옛말에……있다 : 고어는 <<맹자>>를 이른다. 《맹자집주(孟子集註)》 <공손추상(公孫丑上)>에 “무엇을 지언이라 하는가?[何謂知言]”라고 한 주희(朱熹) 주석에 “맹자의 지언이란 바로 사람이 당상에 있어야만 비로소 당하에 있는 사람들의 곡직을 분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자신이 아직도 당하에 있는 사람들 속에 끼어 있다면 그 곡직을 분별하여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정자(程子)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65) 제갈량(諸葛亮)……경계 : 제갈량이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현신을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이 바로 전한(前漢)이 융성하게 일어난 이유이고, 소인을 가까이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이 바로 후한(後漢)이 기울어져 망한 이유이다.[親賢臣遠小人 前漢所以興隆 親小人遠賢臣 後漢所以傾頹也]”라고 경계 하였다.古文眞寶後集 出師表

66) 당파의……심해졌으며 : 1716년(숙종42)에 숙종(肅宗)이 윤증(尹拯)과 송시열(宋時烈) 간의 회니시비(懷尼是非)에 대해서 송시열 쪽이 옳다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리고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게 하였다. 이후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정권이 들어서게 되면서 노론과 소론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2, 2000, 113~118쪽>>

67) 근래에……한 말 : 111쪽 주 55) 참조.

68) 노론이……품었겠습니까 : 경종이 왕위에 오른 1721년 8월에 노론 사대신이 중심이 되고 이천기(李天紀), 김용택(金龍澤), 심상길(沈尙吉), 서덕수(徐德修), 정인중(鄭麟重) 등 5인과 더불어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로 세우자는 주장을 하고 이를 강행하려다 실패하여 역률(逆律)로 함께 처형되었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검색일:2012. 5. 5》

69) 이진유(李眞儒)……하겠습니까 : 1721년(경종1)에 이진유(李眞儒) 등이 당시 왕세제(王世弟)였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김창집(金昌集) 이하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으로 몰아 논죄하는 소를 올려 이들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뒤에 다시 사사(賜死)한 뒤로 두 집안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 <<景宗實錄 1年 12月 6日>>

70) 대갱(大羹)은……않지만 : 대갱은 조미하지 않고 희생의 고기를 통째로 푹 삶은 국물을 이른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生)>에 “대갱을 조미하지 않는 것은 그 바탕[質]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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