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인물고/사서인물고

황성 2012. 4. 1. 13:56


伯禹 夏后氏 名文命 字高密 帝顓頊之後 父鯀 娶於有莘氏之女 曰志 是爲脩已 孕歲有二月 堯戊戌五十八載六月六日 生禹於僰道之石紐鄉 長於西羗 西夷之人 父鯀治水無功 被殛 禹降在匹庶 四嶽咸擧之 舜進之堯 堯命繼鯀治水 禹思拯天下之溺 且傷父績不成 循江泝河 盡濟曁淮 勞身焦思 七年 聞樂不聽 過門不入 冠挂不顧 履遺不躡 功不及成 愁然沈思 見耕者五耦而式(軾) 過十室之邑則下以求秉德之士 乃按皇帝中經曆 謂九山東南天柱號曰宛委 其巖之巓有書 金簡靑玉爲字 皆瑑其文 禹乃東巡 登衡嶽 血白馬以祭 齋於皇帝巖嶽之下 三月庚子 登宛委山 發石得金簡玉書 悟通水之理 復返歸嶽 乘四載以行 始於霍山 徊集五嶽 巡行四瀆 與益夔共謀所過名山大澤 召其人而問之山川脈理鳥獸昆蟲之類 與夫殊國異域土地里數 凡諸所有 使益疏而記之 名之曰山海經云 禹三十未娶 行到塗山 娶塗山氏之女憍 僅歷辛․壬․癸․甲 復行治水 十月女憍生子 啓呱呱而泣 禹唯荒度土功 勿顧也 使大章步東西 竪亥度南北 暢八極之廣 旋天地之數 禹濟江南 省水理 黃龍負舟 舟中人怖駭 禹乃啞然而笑 曰我受命于天 竭力而勞 萬民生寄也 死歸也 爾何爲者 色不變 謂舟人曰 此天所以爲我用也 龍曳尾舍舟而去 南到蒼梧 見縛人 拊背而泣之 益曰斯人犯法 自合如此 泣之何也 禹曰天下有道 民不罹辜 天下無道 罪及善人 吾爲帝 統治水土 調民安居 使得其所 今乃罹法如斯 此吾徳薄不能化民證也 故哭之悲耳 於是周行㝢内 東造絶迹 西延積石 南踰赤㟁 北過寒谷 徊崑崙 察六扈 脈地理 名金石 寫流沙於西隅 决弱水於北漢 青泉赤淵 分入洞穴 通江東流 至於碣石 疏九河於潛淵 開五水於東北 鑿龍門 闢伊闕 隨山刊木 平治水土 九州攸同 則壤成賦 聲敎四訖 其詳具載尙書益稷禹貢諸篇 堯乃號禹曰伯禹 官曰司空 賜姓姒氏 統領州伯以廵十二部 堯崩 禹服三年之喪 晝夜悲泣 舜受堯禪 薦大禹 改官司徒 内輔虞位 外行九伯 癸酉五十載 舜崩 禪位命禹 禹服三年 形體枯槁 面目黎黑 讓位商均 退處陽山之南 隂河之北 萬民不附商均 追就禹之所禹 不得已踐天子之位 都安邑 以土德王 正建寅 丙子元歲春正月 封有功 爵有德 東巡會諸侯於塗山 見耆老 納詩書 審銓衡 平斗斛 執玉帛者萬國 乃大會計治國之道更名茅山曰會稽之山 二歲皐陶薨 遷益于天 三歲考功 五歲巡狩 八歲巡江南 戮防風氏 癸未八歲禹年百有六矣 尋崩于會稽 因葬之 今會稽山有禹冢云 啓賢能繼禹之道 乃嗣立


薛應旂曰 余嘗觀山海經徧載六合之外謂郭景純之傳疑也 及觀吳越春秋 載皇帝中經藏於宛委山中禹東巡得之因通水理遂周游五嶽四瀆殊方異域使益疏記之豈山海經固亦有所自乎余登稽山及過河東夏縣至今閭里父老咸稱神禹不然何以神之也且古者司職方掌外史地理所在必有所因而名而至人之經往往藏于名山大川固未可全謂其無據也孔安國輩乃泥河出圖洛出書天乃錫禹洪範九疇之文遂有龍馬神龜之說斯殆幾於附會矣而帝王世紀亦云大禹治水時神龜丹甲靑文負書出于洛水世遂襲以爲然則宋之天書又何怪哉

名文命 字高密 帝顓頊之後 父鯀 娶於有莘氏之女 曰志 是爲脩已 孕歲有二月 堯戊戌五十八載六月六日 生禹於僰道之石紐鄉 長於西羗 西夷之人

백우(伯禹) 하후씨(夏后氏)

이름은 문명(文命), 자는 고밀(高密), 황제 전욱(顓頊)의 후손이다. 아버지 곤(鯀)이 유신씨의 딸 지(志)에게 장가갔다. 이가 수기(脩已)이다. 임신한 지 한 14개월, 요임금 무술년 58년 6월에 우를 북도(僰道)의 석뉴향(石紐鄉)에서 낳았다. 서강(西羗)에서 성장하였으니, 서이(西夷) 사람이다.


父鯀治水無功 被殛 禹降在匹庶 四嶽咸擧之 舜進之堯 堯命繼鯀治水 禹思拯天下之溺 且傷父績不成 循江泝河 盡濟曁淮 勞身焦思 七年 聞樂不聽 過門不入 冠挂不顧 履遺不躡 功不及成 愁然沈思 見耕者五耦而式(軾) 過十室之邑則下以求秉德之士

아버지 곤(鯀)이 치수 사업에 공로가 없어 사형을 받고 우는 강등되어 필서(匹庶)의 지위에 있었다. 사악이 모두 천거하여 순이 요임금에게 나아가니, 요임금이 우에게 곤의 치수사업 계승하게 하였다. 우가 물에 잠기는 천하를 구제할 방법을 생각하고, 또 아버지의 공적이 아무런 성과가 없음을 아파하여 강하(江河)를 오르내리며 제수(濟水)에서 회수(淮水)에 이르렀다. 늘 노심초사하여 7년 동안 음악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집을 지나쳐 버리고, 갓을 잊어버려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신이 헤져도 그대로 두었다.1) 아무런 공효를 보지 못하면 근심하여 심사숙고하였다. 10인이 짝을 이루어 밭가는 것을 보면 수레앞턱을 잡고 예를 표했으며, 작은 고을을 지나면 내려서 덕이 있는 선비를 찾았다.


乃按皇帝中經曆 謂九山東南天柱號曰宛委 其巖之巓有書 金簡靑玉爲字 皆瑑其文 禹乃東巡 登衡嶽 血白馬以祭 齋於皇帝巖嶽之下 三月庚子 登宛委山 發石得金簡玉書 悟通水之理 復返歸嶽 乘四載以行 始於霍山 徊集五嶽 巡行四瀆 與益夔共謀 所過名山大澤 召其人而問之山川脈理鳥獸昆蟲之類 與夫殊國異域土地里數 凡諸所有 使益疏而記之 名之曰山海經云

마침내 <<황제중경력(皇帝中經曆)>>을 살펴보니, ‘구산(九山) 동남쪽에 있는 천주(天柱)를 완위(宛委)라고 한다. 그 바위 꼭대기에 도서(道書)가 있는데, 금간(金簡)에 청옥으로 글자를 만들어 모두 그 문장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우가 마침내 동쪽으로 순수하여 형악(衡嶽)에 올라 백마의 피를 받쳐 제사 지내고 황제암악(皇帝巖嶽)의 아래에서 재계하였다. 삼월 경자에 완위산(宛委山)에 올라 돌을 드러내고 금간옥서(金簡玉書)를 얻고 물길의 이치를 깨달았다. 다시 귀악(歸嶽)//으로 돌아와 사재(四載)2)를 타고 다녔다. 곽산(霍山)3)에서 시작하여 오악을 회집(徊集)하고 사독(四瀆)을 순행하였다. 익(益), 기(夔)와 함께 의논하여 명산대천을 지나면 현지 사람을 불러 산맥과 물길 어떤 종류의 짐승과 곤충이 살고 있는 지와 다른 국가와 다른 강역의 넓이와 길이 등 모든 것을 물어보고는 익에게 대략인 사실을 기록하게 하고 <<산해경(山海經)>>이라 하였다.


禹三十未娶 行到塗山 娶塗山氏之女憍 僅歷辛․壬․癸․甲 復行治水 十月女憍生子 啓呱呱而泣 禹唯荒度土功 勿顧也 使大章步東西 竪亥度南北 暢八極之廣 旋天地之數 禹濟江南 省水理 黃龍負舟 舟中人怖駭 禹乃啞然而笑 曰我受命于天 竭力而勞 萬民生寄也 死歸也 爾何爲者 色不變 謂舟人曰 此天所以爲我用也 龍曳尾舍舟而去

우는 서른인데도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하였다. 행차가 도산(塗山)에 이르러 도산씨(塗山氏)의  여교(女憍)와 결혼하고, 겨우 신(辛), 임(壬), 계(癸), 갑(甲) 4일을 함께 보내고는 다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시월에 여교가 아들 계(啓)를 낳았다. 계가 앙앙 울었지만 우는 오직 토공에 힘쓰느라 돌아보지 않았다. 대장(大章)으로 하여금 동서의 길이를 재고 수해(竪亥)에게 남북의 너비를 측량하게 하여 팔극의 넓이를 밝혀 천지의 수/를 새롭게 하였다. 우가 강을 건너 남쪽으로 물의 형세를 살펴볼 적에 황룡이 배 앞에 나타났다. 배에 탄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지만 우는 도리어 가만히 웃으면서 말하길, “나는 하늘에서 명을 받아 힘을 다해 노력하니 모든 백성이 살아서는 의지하고 죽어서는 귀의 한다. 너는 무엇을 하늘 놈인고.” 하였는데,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배에 탄 사람에게 말하길, “이것은 하늘이 나의 쓰임//으로 삼은 것이다.”하니, 용이 꼬리를 내리고 배에서 멀어졌다.


南到蒼梧 見縛人 拊背而泣之 益曰斯人犯法 自合如此 泣之何也 禹曰天下有道 民不罹辜 天下無道 罪及善人 吾爲帝 統治水土 調民安居 使得其所 今乃罹法如斯 此吾徳薄不能化民證也 故哭之悲耳 於是周行㝢内 東造絶迹 西延積石 南踰赤㟁 北過寒谷 徊崑崙 察六扈 脈地理 名金石 寫流沙於西隅 决弱水於北漢 青泉赤淵 分入洞穴 通江東流 至於碣石 疏九河於潛淵 開五水於東北 鑿龍門 闢伊闕 隨山刊木 平治水土 九州攸同 則壤成賦 聲敎四訖 其詳具載尙書益稷禹貢諸篇

남쪽으로 창오(蒼梧)에서 죄 지은 사람을 보고 등을 쓰다듬으며 통곡하였다. 익이 “이 사람이 지은 죄가 이처럼 명백한데,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까?”라고 하니, 우가 “세상에 도가 있으면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고, 세상에 도가 없으면 죄가 선인에게 미친다. 내가 황제가 되어 치수사업을 계승하여 백성을 화목하게 하고 편히 살며 각각 알맞은 곳을 얻게 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이처럼 죄를 지으니, 이는 나의 덕이 부족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키지 못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슬프게 운다.” 하였다. 이에 우내(㝢内)를 두루 돌아다녔다. 동으로는 절적(絶迹)에 이르고 서로는 적석(積石)에 미치고 남으로는 적안(赤㟁)을 넘고 북으로는 한곡(寒谷)을 지나 곤륜산(崑崙山)을 돌아 육호(六扈)를 살피며 지리(地理)의 맥을 찾고 금석에다 이름을 붙였다. 유사(流沙)를 서우(西隅)로 흐르게 하고 약수(弱水)를 북한(北漢)으로 돌렸다. 청천(青泉)과 적연(赤淵)을 나누어 동혈(洞穴)로 보내 강동의 강과 만나게 하였다. 갈석(碣石)에 이르러 구하(九河)를 잠연(潛淵)으로 보내고 오수(五水)를 동북으로 열었다. 용문(龍門)을 뚫고 이궐(伊闕)을 개척하여 산을 따라 나무를 베어 물길을 바로 잡고 치수사업을 하여 구주(九州)가 攸同// 모두 상(上), 중(中), 하(下) 세 토양(土壤)을 품절(品節)[분별]하여 부세(賦稅)를 거두었다. 명성과 말씀이 먼 사해(四海)까지 펴졌으니, 그 상세한 것은 모두 <<상서(尙書)>>의 <익직(益稷)> <우공(禹貢)> 등 편에 실려 있다.


堯乃號禹曰伯禹 官曰司空 賜姓姒氏 統領州伯以廵十二部 堯崩 禹服三年之喪 晝夜悲泣 舜受堯禪 薦大禹 改官司徒 内輔虞位 外行九伯 癸酉五十載 舜崩 禪位命禹 禹服三年 形體枯槁 面目黎黑 讓位商均 退處陽山之南 隂河之北 萬民不附商均 追就禹之所禹 不得已踐天子之位

요임금이 마침내 우를 백우(伯禹)라고 불렀다. 관직은 사공(司空)이며 사씨(姒氏) 성을 하사했다. 영주 백(領州伯)을 통솔하여 12부(部)를 순시했다. 요임금이 붕어하자 우가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밤낮으로 슬퍼했다. 순임금이 요임금의 선위를 받고 대우(大禹)를 하늘에 천거하였으며, 사도(司徒)로 관직을 고쳤다. 안으로는 우의 지위(虞位)를 돕고 밖으로는 구백(九伯)을 관찰하였다. 계유(癸酉) 즉위 50년에 순이 붕하시고 선위를 우에게 명하였다. 우가 3년 상으로 치르는 동안 몸은 마르고 얼굴은 검었다. 상균(商均)에게 지위를 양보하고 양산(陽山)의 남쪽과 음하(隂河)의 북쪽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는데, 온 백성이 상균에게 가지 않고 우가 있는 곳으로 따라오니, 우 어쩔 수 없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都安邑 以土德王 正建寅 丙子元歲春正月 封有功 爵有德 東巡會諸侯於塗山 見耆老 納詩書 審銓衡 平斗斛 執玉帛者萬國 乃大會計治國之道更名茅山曰會稽之山 二歲皐陶薨 遷益于天 三歲考功 五歲巡狩 八歲巡江南 戮防風氏 癸未八歲禹年百有六矣 尋崩于會稽 因葬之 今會稽山有禹冢云 啓賢能繼禹之道 乃嗣立

안읍(安邑)에 도읍하고 토덕(土德)으로 왕이 되었으며, 인(寅)으로 정월을 정했다. 병자 원년 봄 정월에 공신을 봉하고 덕이 있는 이에게 작위를 주고 동쪽으로 순수하여 도산(塗山)에서 제후와 회동하였다. 기로(耆老)들을 접견하니 시서(詩書)를 바쳤으며, 전형(銓衡)를 조사하여 두곡(斗斛)을 통일시켰다. 옥백을 잡은 이 만국(萬國)이 마침내 모두 모요 국가를 다스리는 방도를 의논하였다. 다시 모산(茅山)의 이름을 회계산(會稽山)으로 바꾸었다. 2년에 고요(皐陶)가 훙하고 하늘에 익을 천거하였다. 3년에 공적을 상고하고 5년에 순수하고, 8년에 강남으로 순행하여 방풍씨(防風氏)를 죽였다. 계미 8년 우의 나이 106세에 회계산에서 이윽고 붕어하니, 그곳에서 장사지냈다. 지금 회계산에 우의 무덤이 있다. 아들 계(啓)가 어질고 능력이 있어 우의 도를 계승하여 마침내 즉위하였다.


薛應旂曰 余嘗觀山海經徧載六合之外謂郭景純之傳疑也 及觀吳越春秋載皇帝中經藏於宛委山中 禹東巡得之 因通水理 遂周游五嶽四瀆 殊方異域 使益疏記之 豈山海經 固亦有所自乎 余登稽山及過河東夏縣 至今閭里父老 咸稱神禹 不然何以神之也 且古者 司職方掌外史 地理所在 必有所因而名而至人之經 往往藏于名山大川 固未可全謂其無據也 孔安國輩 乃泥河出圖 洛出書 天乃錫禹洪範九疇之文 遂有龍馬神龜之說 斯殆幾於附會矣 而帝王世紀亦云大禹治水時神龜丹甲靑文負書出于洛水世遂襲以爲然則宋之天書又何怪哉

설응기는 말한다.

내 언젠가 <<산해경(山海經)>>을 본적이 있었다. 육합(六合)의 밖을 두루 기록해 두었는데, 곽경순(郭景純)의 전함이 의심습럽다고 생각하였다. <<오월춘추(吳越春秋)>>를 보니, <<황제중경(皇帝中經)>>을 완위산(宛委山) 속에 숨겨두었는데, 우임금이 동쪽으로 순수하여 이 책을 찾아 수리(水理)를 깨달았다. 마침내 오악(五嶽)과 사독(四瀆), 수방(殊方)과 이역(異域)을 두루 돌아보고 익에게 대략적으로 기록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산해경>>은 실로 또한 본래 있었던 책인가? 내가 계산(稽山)에 오르고 하동(河東) 하현(夏縣)을 찾아갔는데, 지금도 마을 촌로들이 모두 신비로운 우임금이라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렇게 신비로운가. 또 옛적에 사직(司職)은 외사(外史)를 관장하였다. 지리지에 실은 것은 반드시 연유가 있어 명명하였는데, 사람의 경(經)은 자주 명산대천에 숨겨두었으니, 참으로 전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공안국(孔安國)의 무리들은 도리어 이하(泥河)에서 도(圖)가 출현하고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출현하고, 하늘이 마침내 우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문장을 주었다는 말을 보고 마침내 용마(龍馬) 신귀(神龜)의 설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아마 억지로 끌어 붙인 말일 것이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또한 ‘대우(大禹)가 치수사업을 할 적에 신귀(神龜)는 붉은 등껍질에 푸른 무늬 띠고 책을 업고 낙수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마침내 그것을 따라 옳다고 생각한다면 송나라의 천서(天書)가 또 어찌 괴이하겠는가.



1) 砥柱銘云禹掛冠莫顧過門不入 又淮南子云 禹之趨時 冠掛而不顧 履遺而不取補

2) 사재(四載) : 陸行乗車 水行乗船 泥行乗橇 山行乗檋 橇音蕝檋丘遥切

3) 南嶽衡山又名霍山泰岱衡與霍皆一山二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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