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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2012. 4. 1. 13:55


帝舜有虞氏 其先國于虞 始爲虞氏 系出虞幕 是生喬牛 喬牛生瞽瞍 初家于冀 瞽瞍娶握登 唐堯壬午歲 生舜於姚墟 握登蚤喪 瞽瞍再娶 而生象 象得親乃咸惡舜 御以不道 舜於是 往于田 泣昊天 號父母 負罪隱(引)慝 大杖避小杖受 事親拊弟 日以篤 唯恐不獲於象 動心忍性 死生不入於心 年二十 孝友聞四海 方是時口不設言 手不指麾 執玄德而化馳若神 歷陽之耕者侵畔 乃往耕焉 田父推畔 濩澤之漁者爭坻 乃往漁焉 鮫人巽長 東夷之陶者苦窳 乃陶于河濱 期年而器以利 牧羊于潢陽 而獲玉曆於河巖 所至嚮合 父母不愛 弟妹不親 雖耕稼陶漁 勞悴困苦 無入而不自適也 遷於負夏 販於頻丘 倩於傅虛 編蒲結罟 每徙而民歸之 至鄧之墟 小大悅之 秀士胥從 雄陶·方回·續牙·伯陽·東不訿·秦不宇·靈甫 不辟而至 周旋歷濩之間 爲之七友 迨旣禪 七人者始逃之 初堯在位七十載矣 見丹朱不肖 不足以嗣天下 乃求賢巽位 舜之潛德 堯實知之 於是 疇咨于衆 詢四岳 明明揚仄陋 四岳咸薦舜 謂父頑母嚚象傲 克諧以孝 蒸蒸乂 不格姦 堯曰我其試哉 乃徵之  得諸服澤之陽 問曰我欲致天下 爲之奈何 對曰執一無失 行微無怠 忠信無倦 而天下自來 問以奚事 對曰事天 問以奚任 對曰任地 又問奚務 對曰務人 曰人之情奈何 對曰妻子具 而孝衰于親 嗜欲得 而信衰于友 人之情乎 若夫從道則吉 反道則凶 猶影響也 帝館之于貳室 語禮樂 詳而不孛 語政治 簡而易行 論道 廣大而亡窮 論天下事 貫昵而條達 咸協于帝而咸可底績 于是 錫之絺衣雅琴 命之姚姓 妃以娥皇女英 以觀其内 九子事之 以觀其外 百官牛羊倉廪備 以事之于畎畝之中 二女篤盡道 九子尊虞 服勤靡懈 帝將胥天下而遷之 乃厯諸難 使宅百揆靡不時叙 屬之徽典 亡或不從 賓于四門 諸侯穆穆 烈風雷雨 納于大麓 而弗能迷也 堯之七十三載丙辰 遷舜於天 舜受終于文祖 遂攝位 是時 高陽氏有才子八人 天下謂之八愷 高辛氏有才子八人 天下謂之八元 世濟其美 堯未及擧 舜於是 擧八愷 使主后土 擧八元 使布五敎于四方 攝位二十八載 歲在癸未 堯崩 舜避堯子丹朱于南河之南 天下之朝覲謳歌獄訟者 不之丹朱而之舜 歷甲申乙酉二歲 然後之中 國踐天子之位 都于蒲阪 丙戌元載 月正元日 格于文祖 以土承火 色尙赤 改正易服 立七廟 祠中霤 社用土封 春杓夏禘秋嘗冬烝 五等建官 親親任賢 建弟象於有鼻 封皇帝之孫子 十有九人 爲侯伯 詢四岳 命九官咨 十二牧 三載考績 五載箾韶樂成 六載巡狩觀風 兵衛少而誅求寡 國用不匱 七載作大唐之歌 以美堯禪 九載 三考黜陟幽明 庶績咸熙 分比三苗 丁巳三十有三載 命禹總師 三十有五載 咨禹征有苗 三旬苗民逆命 帝乃誕敷文德 舞干羽於兩階 七旬有苗格 舜之爲君也 上循堯道 下任衆賢 師紀后 拜蒲衣 親善卷 學於務成軺 立誹謗木 設旌諫鼓 以廣直言之路 訪不逮於總章 養國老於上庠 養庶老於下庠 憲其行止 貴德尙齒 藏金巉巖之山 捐珠五湖之淵 俾下服度于以杜淫邪而絶覬媚 作米廩以藏帝籍 立兩學以敎國士 恭已南面 無爲而治 彈五絃之琴 歌南風之詩 曰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是時 土地方五千里 至於荒服 南撫交趾 北發肅愼 東長島夷 西渠析支 出入日月 罔不率俾 四海承風 暢於異類 鳳翔麟感鳥獸被德 四十有八載 南巡狩 崩于鳴條 三十徵庸 二十在位 五十載而崩 壽百一十二歲 葬于蒼梧山 九疑之陽 是爲零陵 禹封舜後於虞而客之 及周武王克商 封舜後胡公於陳 賜姓嬀氏


薛應旂曰 史遷謂學者多稱五帝 而尙書獨載堯以來事 蓋傳信也 然其時 去洪荒之世未遠 風敎固殊 總之不離古文者近是 其意固難爲淺見寡聞者道也 但仲尼 謂舜 無爲而治 今觀舜典所載 封山濬川 咨岳命官 諸所有事 經法具備 擬之堯時 益加詳焉 則其所謂無爲者 夫豈淸淨玄黙爾哉 蓋其所作爲者 一皆順則因物 非有所作爲於其間也 斯之謂無爲也 故曰後世 雖有作者 虞帝爲弗可及也已


제순(帝舜) 유우씨(有虞氏)


其先國于虞 始爲虞氏 系出虞幕 是生喬牛 喬牛生瞽瞍 初家于冀

선조가 우(虞)에 나라를 세워 비로소 우씨(虞氏)가 되었다. 선조는 우막(虞幕)이니, 이가 교우(喬牛)를 낳고, 교우가 고수(瞽瞍)를 낳았다. 처음엔 기(冀)에 살았다.


瞽瞍娶握登 唐堯壬午歲 生舜於姚墟 握登蚤喪 瞽瞍再娶 而生象 象得親乃咸惡舜 御以不道 舜於是 往于田 泣昊天 號父母 負罪隱(引)慝 大杖避小杖受 事親拊弟 日以篤 唯恐不獲於象 動心忍性 死生不入於心

고수가 악등(握登)에게 장가들어 당요(唐堯) 임오년에 요허(姚墟)에서 순을 낳았다. 악등이 일찍 죽고 고수가 다시 장가들어 상(象)을 낳았다. 상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마침내 순에게 악함으로 품고 폐륜을 저질렀다. 순이 이에 들에 가서 하늘에 하소연 하며 부모를 원망하고는 죄를 떠맡고 악을 자신에게 돌렸다. 순이 부모를 모실 적에 몽둥이로 때릴 때에는 도망을 갔고, 회초리로 때릴 때에는 맞았다. 어버이를 섬기고 아우를 보듬어 안기를 날로 돈독하게 하여 다만 상의 마음을 얻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격을 가다듬어 죽고 사는 문제에 연연하지 않았다.


年二十 孝友聞四海 方是時 口不設言 手不指麾 執玄德而化馳若神 歷陽之耕者侵畔 乃往耕焉 田父推畔 濩澤之漁者爭坻 乃往漁焉 鮫人巽長 東夷之陶者苦窳 乃陶于河濱 期年而器以利 牧羊于潢陽 而獲玉曆於河巖 所至嚮合 父母不愛 弟妹不親 雖耕稼陶漁 勞悴困苦 無入而不自適也 遷於負夏 販於頻丘 倩於傅虛 編蒲結罟 每徙而民歸之 至鄧之墟 小大悅之 秀士胥從 雄陶·方回·續牙·伯陽·東不訿·秦不宇·靈甫 不辟而至 周旋歷濩之間 爲之七友 迨旣禪 七人者始逃之

20세에 효도와 우애의 명성이 사방에 자자하였다. 이때에 말로 설교하지 않고, 손으로 지시하지 않아 현덕(玄德)을 마음속에 품고 이었음에도 그 감화는 신처럼 빨랐다. 역양(歷陽)에서 밭을 가는 자가 밭두둑을 침범해왔을 때 그대로 밭을 갈게 하니, 농부가 밭두둑을 내어주었고, 호택(濩澤)에서 고기 잡는 자가 자리를 다투더라도 그대로 고기 잡게 하니, 어부가  좋은 자리를 양보하였고, 동이(東夷)에서 도자기를 굽는 자가 그릇이 이지러지면 도리어 하빈(河濱)에서 그릇을 굽게 하였는데, 일 년이 되자 좋은 그릇을 구웠다. 황양(潢陽)에서 양을 길렀으며, 옥력(玉曆)1)을 하암(河巖)에서 얻었으니, 가는 곳마다 메아리가 치듯 울림이 있었다. 순은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형제자매와 친하지 않아 농사짓고 그릇을 만들며 고기를 잡으면서 힘들고 고달팠지만 어디를 가던 지 늘 여유로웠다. 부하로 옮겼으며 빈구(頻丘)에서 장사하고 부허(傅虛)에서 품팔이를 하여 부들자리와 거물을 짰는데, 옮길 때마다 백성들이 따라 왔다. 등(鄧) 땅에 이르자 노소가 기뻐하였으며, 훌륭한 자질을 가진 선비들이 따랐다. 웅도(雄陶), 방회(方回), 속아(續牙), 백양(伯陽), 진불자(陳不訿), 진불우(秦不宇), 영보(靈甫)가 부르지 않았는데 와서 역양(歷陽)과 호택(濩澤)에서 주선하였며 일곱이 되었다. 제위를 물려받자 7인이 모두 떠났다.


初堯在位七十載矣 見丹朱不肖 不足以嗣天下 乃求賢巽位 舜之潛德 堯實知之 於是 疇咨于衆 詢四岳 明明揚仄陋 四岳咸薦舜 謂父頑母嚚象傲 克諧以孝 蒸蒸乂 不格姦 堯曰我其試哉 乃徵之  得諸服澤之陽 問曰我欲致天下 爲之奈何 對曰執一無失 行微無怠 忠信無倦 而天下自來 問以奚事 對曰事天 問以奚任 對曰任地 又問奚務 對曰務人 曰人之情奈何 對曰妻子具 而孝衰于親 嗜欲得 而信衰于友 人之情乎 若夫從道則吉 反道則凶 猶影響也 帝館之于貳室 語禮樂 詳而不孛 語政治 簡而易行 論道 廣大而亡窮 論天下事 貫昵而條達 咸協于帝而咸可底績 于是 錫之絺衣雅琴 命之姚姓 妃以娥皇女英 以觀其内 九子事之 以觀其外 百官牛羊倉廪備 以事之于畎畝之中 二女篤盡道 九子尊虞 服勤靡懈 帝將胥天下而遷之 乃厯諸難 使宅百揆靡不時叙 屬之徽典 亡或不從 賓于四門 諸侯穆穆 烈風雷雨 納于大麓 而弗能迷也 堯之七十三載丙辰 遷舜於天 舜受終于文祖 遂攝位

초에 요 재위 70년에 아들 단주(丹朱)가 자질이 부족하여 제위를 물려받지 못할 것을 알고는 마침내 선위할 현자를 찾았다. 순의 숨은 덕을 요임금이 잘 아시고 이에 여러 사람에게 묻고 사악(四岳)에게 “현달한 자를 드러내어 밝히며, 한미한 자를 천거하라.”2) 하였다. 사악이 모두 순을 천거하며 말하길, “아버지는 완악하고 어머니는 어리석으며 상(象)은 오만한데도 능히 효(孝)로 화목하게 하여 점점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간악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제요(帝堯)가 말씀하기를 “내가 시험해보겠다.” 하시고는 불러서 복택(服澤)의 북쪽에서 만났다. 제요가 물었다. “내 천하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니, “하나를 잡아 잃지 않고 은미함을 행하여 태만하지 않고, 늘 충과 신을 마음에 간직하면 천하 사람들이 절로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누구를 섬기는가?”하니, “하늘을 섬기겠습니다.”하였다. “누구에게 맡기겠는가?”하니, “땅에게 맡기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또 “어디에 힘쓰겠는가?”라고 물으니, “사람의 일을 힘쓰겠습니다.” 하였다. 다시 “사람의 정은 어떠한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처자식이 있으면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고, 욕심을 다 채우고자 하면 벗에게 신임을 잃는 것은 사람의 정입니다. 그러나 법도를 따르면 길하고 법도를 어기면 흉한 것은 그 반응이 그림자와 메아리 같이 빠릅니다.” 하였다. 요제가 별궁에 머물게 하였는데, 예악(禮樂)을 논함에는 자세하여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고, 정치를 논함에는 간략하면서도 행하기 쉬웠다. 도를 논함에는 광대하고 무궁하였으며, 천하의 일을 논함에는 익숙하면서 통달하여 모두 요제의 마음에 꼭 맞아 공적을 세울 만 하였다. 이에 치의(絺衣)와 아금(雅琴)을 하사하고 요씨(姚氏) 성을 하사였다.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딸을 시집보내어 그 내정을 살피고 아홉 아들로 섬기게 하여 그 외정을 살피게 하고, 백관(百官)과 우양(牛羊)과 창름(倉廩)을 갖추어 순(舜)임금을 견묘(畎畝)의 가운데에서 봉양하게 하니, 두 처는 극진한 도리로 섬기며 아홉 아들은 우(虞)를 존경하여 부지런히 힘써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제요가 천하를 둘러보고 선위하려고 마침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게 하였다. 백규(百揆)에 앉히시니 백무가 때에 맞게 시행되었으며, 오전(五典)을 삼가 아름답게 하라 하시니 오전(五典)이 빠짐없이 순조롭게 되었다. 사문(四門)에서 빈객을 맞이하게 하시니 제후가 화목하며, 맹렬한 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올적에 큰 산기슭에 들어가게 하니 혼미하지 않았다. 요제 즉위 73년 병진에 하늘에 순을 천거하여 순이 문조(文祖)3)에서 종(終)을 받아 섭위하였다.


是時 高陽氏有才子八人 天下謂之八愷 高辛氏有才子八人 天下謂之八元 世濟其美 堯未及擧 舜於是 擧八愷 使主后土 擧八元 使布五敎于四方 

이때에 고양씨(高陽氏)의 재자(才子) 8인을 팔개(八愷)4)라고 하였으며, 고신씨(高辛氏)의 재자 8인을 팔원(八元)5)이라 하였는데,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요제 때엔 등용하지 않았는데, 순이 이때에 팔개를 등용하여 후토(后土)를 주관하고, 팔원을 등용하여 오교(五敎)를 사방에 펼치게 하였다. 


攝位二十八載 歲在癸未 堯崩 舜避堯子丹朱于南河之南 天下之朝覲謳歌獄訟者 不之丹朱而之舜  歷甲申乙酉二歲 然後之中國 踐天子之位 都于蒲阪 丙戌元載 月正元日 格于文祖 以土承火 色尙赤 改正易服 立七廟 祠中霤 社用土封 春杓夏禘秋嘗冬烝 五等建官 親親任賢 建弟象於有鼻 封皇帝之孫子 十有九人 爲侯伯 詢四岳 命九官咨 十二牧 三載考績

섭위 28년, 계미년에 요가 붕어하였다. 순(舜)이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를 남하(南河)의 남쪽에서 피하였는데, 천하에 조회하는 제후(諸侯)와 찬송하는 자와 송사하는 자 단주에게 가지 않고 순(舜)에게 갔다. 갑신년, 을유년 두 해를 지난 뒤에 도성으로 가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포판(蒲阪)에 도읍하였다. 병술 원년 정월 어느 날 문조(文祖)에 나아갔다. 토덕(土德)으로 화덕(火德)을 계승하였으며, 적색을 숭상하고 정월을 고치고 복식을 바꾸었다. 칠묘(七廟)를 세우고 중류(中霤 후토신(后土神))에 제사 지내고, 사직엔 토봉(土封)을 만들어 봄엔 작(杓), 여름엔 체(禘), 가을엔 상(嘗), 겨울엔 증(烝) 제사를 지냈다. 다섯 등급의 관직을 만들고 가까운 친척을 친애하고 현자를 등용하였다. 아우 상을 유비(有鼻)의 군주로 세웠다. 황제의 자손 19인을 봉하여 후백(侯伯)으로 삼았다. 사악에게 물어 아홉 관원을 명하고 12목(牧)에게 물으시어 3년에 한 번씩 공적을 상고하였다.


五載箾韶樂成 六載巡狩觀風 兵衛少而誅求寡 國用不匱 七載作大唐之歌 以美堯禪 九載 三考黜陟幽明 庶績咸熙 分比三苗

5년에 소소(箾韶) 음악이 이루어졌다. 6년에 순수하여 풍속을 관찰함에 호위하는 병사는 줄이고 주벌은 최소화 하니 국가의 비용이 넉넉하였다. 7년에 대당가(大唐歌)를 지어 요임금의 선위를 찬미하였다. 제위 9년에, 3년에 한 번씩 공적을 상고하고 세 번 상고한 다음 어두운 자와 밝은 자를 가려 내치고 올려주시니 여러 공이 모두 잘 이루어졌다. 삼묘(三苗)를 나누어 다스렸다.


丁巳三十有三載 命禹總師 三十有五載 咨禹征有苗 三旬苗民逆命 帝乃誕敷文德 舞干羽於兩階 七旬有苗格 舜之爲君也 上循堯道 下任衆賢 師紀后 拜蒲衣 親善卷 學於務成軺 立誹謗木 設旌諫鼓 以廣直言之路 訪不逮於總章 養國老於上庠 養庶老於下庠 憲其行止 貴德尙齒 藏金巉巖之山 捐珠五湖之淵 俾下服度于以杜淫邪而絶覬媚 作米廩以藏帝籍 立兩學以敎國士 恭己南面 無爲而治 彈五絃之琴 歌南風之詩 曰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정사 33년에 우에게 총사(總師)를 명하였다. 35년에 우에게 유묘(有苗)를 정벌하는 일 물었다. 30일 만에 유묘의 백성이 반란을 일으키니, 순제가 문덕(文德)을 베풀고 간우(干羽)6)를 양 계단에서 추니, 70일 만에 유묘가 스스로 항복하였다. 순의 통치 방법은 위로 요임금의 도를 계승하고 아래로 여러 어진 신하에게 맡겼다. 기후(紀后)7)를 군사로 삼았으며, 포의(蒲衣)를 제수하고 선권(善卷)을 친애하였다. 무성초(務成軺)에게 배워8) 비방목(誹謗木)을 세우고 선정(善旌)9)과 간고(諫鼓)를 설치하여 직언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발길을 총장(總章)10)에 미치지 않았다. 국로(國老)를 상상(上庠)에서 봉양하고 서로(庶老)를 하상(下庠)에서 봉양하여 그 행동거지를 본받았다. 덕을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를 존중하였다. 금을 참암산(巉巖山)에 묻고, 구슬을 오호연(五湖淵)에 버려 아랫사람에게 심복하게 하였다. 이에 음란하고 사악함을 막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쳤다. 미름(米廩)을 만들어 황제의 서적을 보관하고, 양학(兩學)을 세워 국사(國士)를 가르쳤으며, 공손한 자세로 남면(南面)한 채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다스렸다.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남풍시(南風詩)를 불렀다. 그 가사에 ‘남풍이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노여움을 풀겠구나. 남풍이 때 맞춰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넉넉히 하리로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하였다.


是時 土地方五千里 至於荒服 南撫交趾 北發肅愼 東長島夷 西渠析支 出入日月 罔不率俾 四海承風 暢於異類 鳳翔麟感鳥獸被德 四十有八載 南巡狩 崩于鳴條 三十徵庸 二十在位 五十載而崩 壽百一十二歲 葬于蒼梧山 九疑之陽 是爲零陵 禹封舜後於虞而客之 及周武王克商 封舜後胡公於陳 賜姓嬀氏

이때에 토지가 사방 5천리로 황복(荒服)11)에 이르고, 사방 오랑캐에 미쳐 남으로는 교지(交趾), 북으로는 북발(北發), 숙신(肅愼) 동으로는 장이(長夷), 도이(島夷) 서쪽으로는 거수(渠廋), 석지(析支)를 어루만져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지역은 모두 순종하였다. 사해가 풍교를 받들어 일류 외에 짐승에게도 교화가 통하여 봉황이 날고 기린이 감응하여 모든 짐승이 은택을 입었다. 즉위 48년에 남방을 순수하다가 명조(鳴條)에서 붕어하였다. 30세에 부름을 받아 등용되고 30년에 제위(帝位)에 올라 50년 만에 승하하셨으니,12) 나이는 112세였다. 창오산(蒼梧山) 구의(九疑)의 남쪽에 장사지내니 바로 영릉(零陵)이다. 우(禹)가 순의 후손을 우(虞)에 봉하고 빈객으로 대우하였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고 순의 후손 호공(胡公)을 진(陳)에 봉하고 규씨(嬀氏) 성을 하사하였다.


薛應旂曰 史遷謂學者多稱五帝 而尙書獨載堯以來事 蓋傳信也 然其時 去洪荒之世未遠 風敎固殊 總之不離古文者近是 其意固難爲淺見寡聞者道也 但仲尼 謂舜 無爲而治 今觀舜典所載 封山濬川 咨岳命官 諸所有事 經法具備 擬之堯時 益加詳焉 則其所謂無爲者 夫豈淸淨玄黙爾哉 蓋其所作爲者 一皆順則因物 非有所作爲於其間也 斯之謂無爲也 故曰後世 雖有作者 虞帝爲弗可及也已

설응기는 말한다.

사천이 이르기를, “학자들이 오제(五帝)에 대해서 많이들 말하지만 <<상서(尙書)>>에서는 유독 요임금 이후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데, 대개 진실함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시대는 아득한 고대와 멀지 않고 풍교(風敎)는 실로 지금과 달랐으니, 모두 고문과 차이가 없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종합하여 말하건대, 그 의미는 식견이 얕은 내가 말하기 어렵다. 다만 중니(但仲, 공자)가 순임금을 두고 무위이치(無爲而治)라고 평하였는데, 이제 순전(舜典)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산을 봉하고 내를 준설하며 사악에게 묻고 관직을 만든 것 등 여러 가지 일이 경법(經法)에 자세히 구비되어 있다. 요임금 시대와 비교하면 더욱더 상세하니, 무위(無爲)라고 한 것은 어쩌면 깨끗하고 현묘하다는 것이리라. 대개 순임금이 하신 일이라곤 일체 법칙을 따라 있는 산천을 바탕으로 해서이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없었으니, 이것을 ‘무위’라고 한다. 그러므로 후대에 비록 왕이 된 이가 있다 하더라도 우제에는 미치지 못하는 이유이다.” 하였다.



1) 옥력(玉曆) : 책력의 별칭임. 오신(五辰)은 《書經 皋陶謨》의 “오신을 돌보아 온갖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에서 나온 것으로 금ㆍ목ㆍ수ㆍ화ㆍ토의 다섯 시기인데, 곧 사계절을 뜻한다.

2) 上明 謂明顯之 下明 謂已在顯位者 揚 擧也 側陋 微賤之人也 言惟德是擧 不拘貴賤也 (서경 주)

3) 문조(文祖) : 요(堯)의 시조(始祖)의 사당이다.

4) 팔개(八愷) : 고양씨(高陽氏)의 여덟 재자(才子)인 창서(蒼舒)ㆍ퇴애(隤敱)ㆍ도연(檮戭)ㆍ대림(大臨)ㆍ방강(尨降)ㆍ정견(庭堅)ㆍ중용(仲容)ㆍ숙달(叔達)의 

5) 팔원(八元) : 고신씨(高辛氏)의 여덟 아들인 백분(伯奮)ㆍ중감(仲堪)ㆍ숙헌(叔獻)ㆍ계중(季仲)ㆍ백호(伯虎)ㆍ중웅(仲熊)ㆍ숙표(叔豹)ㆍ계리(季貍)의 를 가리킴.

6) 간우(干羽) : 간척무(干戚舞)와 우모무(羽旄舞)를 말한다. 간척무는 방패와 도끼를 손에 쥐고 추는 춤으로 무무(武舞)이고, 우모무는 꿩깃과 쇠꼬리를 손에 쥐고 추는 춤으로 문무(文舞)이다. 《周禮 春官 樂師》

7) 一作冀后

8) 學于務成軺 問于務成軺曰 天下未治 何以使我 對曰避天下之逆 從天下之順 天下不足治也 避天下之順 從天下之逆 天下不足失也 于是依乎中庸 明庶物 察人倫 執兩端 而用中於民 作五葆扇 立誹謗木善旌諫鼓 以廣直言之路 新序作務成子跗荀子作務成昭

9) 선정(善旌) : 중국 고대 요(堯) 임금 시절에 다섯 갈래 길에다 기를 세워 놓고 선한 말을 하려는 사람에게 그 기 아래 서서 말하게 하였다 한다. 《淮南子 主術訓》

10) 總章明堂一曰總期 尸子云有虞曰總章 商曰陽館 王通牛洪杜佑亦云故陳子昇云黄帝合宫有虞總章皆所以調元氣治隂陽也然考月令南明堂北玄堂東陽館西總章三正所尚故夏商周以玄明陽爲名惟虞非三正總章非西義宜吕氏之繆

11) 황복(荒服) : 오복(五服)의 하나. 중국 고대에 왕기(王畿) 밖을 원근에 따라 다섯으로 나눈 가장 바깥 지역. 5백 리 안을 전복(甸服), 1천 리까지를 후복(侯服), 1천 5백 리까지를 유복(綏服), 2천 리까지를 요복(要服), 2천 5백 리까지를 황복이라 하였다.

12) 舜生三十徵庸 三十在位 五十載 陟方乃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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