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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요

황성 2012. 4. 1. 13:53


帝堯陶唐氏祁姓 帝嚳之子 摯之弟也 母曰陳豐氏曰慶都 孕十有四月 高帝丁亥 生堯於丹陵 名曰放薰 摰立 堯年十三 佐摰封植受封於陶 年十五改國于唐 摯以荒淫而廢 諸侯尊堯 爲天子 都于平陽之安邑 以火德王 色尙白 甲辰元載 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 命羲仲羲叔和仲和叔 分掌四時方嶽之職 二載咨羲和定閏法允釐百工 庶績咸熙 其詳具載尙書堯典篇中 七載麒麟遊於藪澤 十有二載巡狩諸侯 西夏隳城守好貪求 於是伐而亡之 有苗不享征而克之于丹水之浦 命閼伯長火居商丘 命毋句氏 作離磬 制五絃徽 鼓大唐之歌 命夔放山川谿谷之音以歌八風 作大章之樂 作五廟 立五府 以享先祖 而祀五帝 五十載帝遊於康衢 兒童謠曰立我烝民 莫匪爾極 不識不知 順帝之則 時有老人擊壤而歌曰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 六十有一載 洪水懷襄1) 擧鯀俾乂 九載功用不成 七十載殛鯀于羽山 放驩兜于崇山 子丹朱及庶子九人 皆不肖 堯求賢德可以遜位 讓許由 由不受逃隱 群臣咸擧舜 舜賢明 堯亦聞之 於是以二女妻舜 九男事之 七十有二載 納舜於泰山之麓 使之主祭 命禹平水土 益掌火 棄敎民播種 契爲司徒 丙辰七十有三載 薦舜於天 舜受終於文祖 七十有六載 流共工于幽州 竄三苗于三危 八十載 禹告成功 詳具書禹貢篇 八十有一載 肇十有二州 封十有二山 濬川 封伯禹於有夏 封四岳於有呂 加賜伯益 封契於商 封棄於邰 於是 率群臣刻璧而書東沈洛水 言天命當傳舜之意 今逸書有中候運衡之篇 是也 堯之爲君也 其仁如天 其智如神 就之如日 望之如雲 富而不驕 貴而不豫(舒) 黃收純衣 彤車白馬 茅茨不翦(剪) 樸桷不斵 素題不枅 大路不畵 越席不緣 大羹不和 飯於上簋 飮於上鉶 金銀珠玉不飾 錦繡文綺不展 奇怪珍異不視 玩好之器不寶 淫泆之樂不聽 宮垣屋室不堊色 布衣掩形 麤裘禦寒 衣履不敝盡不更爲也 存心於天下 加志於窮民 一民饑曰我饑之也 一民寒曰 一民飢則曰我飢之 一民寒則曰我寒之 一民有罪則曰我陷之也 百姓戴之如日月 親之如父母 仁昭而義立 德博而化廣 故不賞而民勸 不罰而民治 景星曜 甘露降 朱草生 鳳凰至 嘉禾孶 醴泉湧 焦僥民來貢沒羽  又有草夾階而生 隨月生死以占日月之數 名曰蓂莢 癸未一百載 舜攝位之二十八載也 帝乃殂落 年一百十七歲 百姓如喪考妣 四海遏密八音 葬於濟陰之成陽西北 是爲穀林


薛應旂曰天生民而作之君 是君者 代天以生民者也 故稱之曰天子 夫天下大矣 生民衆矣 而生生之道 乃繫於一人之身 其責任不大艱難矣哉 余觀尙書載堯咨四岳以巽位而自敍任/位七十載蓋言耄期倦勤非避難也 四岳自言 德忝帝位 而師錫有鰥在下之虞舜 蓋言帝責之難爾 而唯有德者 斯足以當之 非故以難事累舜也 其時之人心氣象如何哉 故許由善卷之徒 當時目爲避難之士 而彼亦不自以爲高也 後世視君位 爲富貴尊榮逸樂之具 而失上天生民之初意 於是 莽操懿溫之徒 紛紛接跡於天下 而上古之逃隱者 斯擅其高矣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

기성(祁姓)이니, 황제 곡(嚳)의 아들이며, 지(摯)의 아우이다. 어머니 진풍씨(陳豐氏)는 경도(慶都)니, 임신한 지 14개월이 지나 고제(高帝) 정해(丁亥)에 단릉(丹陵)에서 요를 낳으니 이름이 방훈(放薰)이다. 지(摰)가 즉위 할 때 요의 나이 13세였다. 지가 나라 다스림을 도와 도(陶)에 봉지를 받았다. 15세에 당(唐)으로 국호를 고쳤다. 지가 술과 여자에 빠져 폐위되고 제후가 요를 추존하여 천자로 세웠다. 평양(平陽)의 안읍(安邑)에 도읍하였다. 화덕(火德)으로 왕이 되었고, 흰색[白]을 숭상하였다.

갑진(甲辰) 원년에 희씨(羲氏),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호천(昊天)을 공경히 따라서 해와 달과 성신(星辰)을 역상(曆象)2)하여 인시(人時)3)를 공경히 반포하게 하셨다. 희중(羲仲), 희숙(羲叔), 화중(和仲), 화숙(和叔)에게 명하여 사시(四時)와 사악(四嶽)의 직임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다. 2년에 “아. 희화(羲和)야 윤달을 정하여 진실로 백관을 다스려라. 모든 적무가 다 다스려지리라.4)” 하였다. 자세한 것은 모두 <<상서(尙書)>> <요전(堯典)>에 실려 있다.

7년에 기린이 수택(藪澤)에서 노닐었다. 12년에 제후를 순수하였는데, 서하(西夏)가 성곽을 수비하지 않고 탐욕을 부려 빼앗는 것을 좋아하자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유묘(有苗)가 공경하지 않자 정벌하여 단수포(丹水浦)에서 응징하였다. 알백(閼伯)5)에게 명하여 화(火)를 관장하며 상구(商丘)에 살게 하였다.

모구씨(母句氏)에게 명하여 이경(離磬)6)을 만들고 오현휘(五絃徽)를 만들어 대당가(大唐歌)를 연주하게 하였다.

기(夔)에게 산천과 계곡의 소리를 본떠서 팔풍(八風)7)을 노래하고, 대장악(大章樂)을 만들고, 오묘(五廟)를 만들며, 오부(五府)를 세워 선조에 제사지내고 오제(祀五帝)에게 제사 지내게 하였다.

50년에 요가 강구(康衢)에서 거닐었는데, 아이들이 다음과 같은 동요를 불렀다. “우리 백성들을 세운 것이 모두 임금의 덕이라, 백성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임금의 법칙을 따를 뿐이다.[立我烝民, 莫非爾極, 不識不知, 順帝之則.]” 당시 어떤 노인이 흙덩이를 치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들와가서 쉬도다.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 갈아서 밥을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

61년에 홍수로 천지가 온통 물에 잠기니 곤(鯀)을 등용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9년 동안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즉위 70년에 우산(羽山)에서 곤을 죽이고, 환도(驩兜)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하였다.

아들 단주(丹朱)와 서자 9인이 모두 어리석자 요가 어질고 덕을 지녀 왕위를 물려줄 사람을 찾아 허유(許由)에게 양위하였는데, 허유가 받지 않고 달아나 은거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순(舜)을 천거하였는데, 순의 현명함은 요도 진작에 듣고 있었다. 이에 두 딸을 시집보내고 아홉 아들에게 순을 섬기게 하였다.

72년에 태산 아래로 순을 보내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우(禹)에게 산천을 다스리게 하고, 익(益)에게 불[火]를 관장하게 하고, 기(棄)에게 파종하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하고, 설(契)을 사도(司徒)로 삼았다. 병진 73년에 하늘에 순을 천거하니, 순이 종묘에서 왕위를 받았다.

76년에 공공(共工)을 유주(幽州)로 유배 보내고 삼묘(三苗)를 삼위(三危)로 추방하였다. 80년에 우가 치수사업을 마쳤으니, 서경 우공편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81년에 12주8)를 설치하고 12산을 봉표하고 내를 준설하였다. 백우(伯禹)를 유하(有夏)에 봉하고 사악(四岳)을 유려(有呂)에 봉하였다. 백익(伯益)에게 상을 더 내리고, 설을 상(商)에 봉하고 기를 태(邰)에 봉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벽옥(璧玉)에 동침낙수(東沈洛水)을 새겼다. 말하자면 천명이 순에게 전해진다는 뜻이다. 지금 일서(逸書)에 <중후(中候)> <운형(運衡)>의 편이 바로 이것이다. 요가 군주가 됨에 그의 인은 하늘과 같고 그 지혜는 신과 같아 다가가면 해와 같고 멀리서 바라보면 구름과 같아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고 부귀하면서 사치스럽지 않았다. 제요(帝堯)는 황수(黃收)9)와 치의[純義]10)를 착용하고 동거(彤車)와 백마(白馬)를 탓다. 모자(茅茨)를 가지런하게 자르지 않고, 서까래는 조각하지 않고, 들보나 기둥은 장식하지 않고, 대로(大路)11)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월석(越席)12)은 선을 두르지 않고, 대갱(大羹)은 조미를 하지 않고, 상궤(上簋)로 밥을 먹으며, 상형(上鉶)으로 물을 마셨다. 금과 옥을 장식하지 않고, 화려한 비단을 진열하지 않고, 기괴하고 이상한 물건을 보지 않고, 보내 노리개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음탕한 음악을 듣지 않고, 담과 집을 회칠하고 채색하지 않고, 삼베옷을 몸에 걸치고 거친 갖옷으로 추위를 막았으며, 옷과 신발이 헤지지 않으면 다시 만들지 않았다. 천하에 마음을 두고 가난한 백성을 염려하여 한 백성이 주리면 ‘내가 잘못하여 주리게 하였다.’ 하고, 한 백성이 추위에 떨면 ‘내가 잘못하여 추위에 떨게 한다.’ 하였으며, 한 백성이라도 죄를 지으면 ‘내가 잘못하여 죄를 짓게 하였다.’ 하니, 백성들이 해와 달처럼 받들고 부모처럼 친애하였다.

인은 밝아지고 의는 확립되며, 덕은 널리 베풀어지고 교화는 광대하게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상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권면되었고, 벌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다스려졌다. 경성(景星)이 빛나며 감로가 내려며, 주초(朱草)가 자라며 봉황이 날아 왔다. 좋은 곡식이 풍성하고, 달콤한 샘이 솟았다. 초요(焦僥)13)의 백성이 와서 몰우(沒羽, 화살)를 바쳤다. 또 어떤 풀이 섬돌 옆에 돋았다. 달의 크기에 따라 자라고 죽으니 이것을 가지고 날짜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을 명협(蓂莢)이라 하였다. 계미 100년, 순이 섭정한 지 28년에 마침내 황제가 조락(殂落)하니 나이 117세였다. 백성들은 자신의 부모가 돌아간 듯 슬퍼하여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제음(濟陰)의 성양(成陽) 서북에 장사지냈으니, 이곳이 곡림(穀林)이다.


설응기는 말한다.

하늘이 백성을 낳아 군주를 세우니, 이 군주는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살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천자라고 한다. 대저 천하는 크고 백성은 많지만 생생지도(生生之道)는 바로 한 사람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 책임이 매우 무겁지 않겠는가. 내 <<상서>>를 살펴보니, 요가 사악(四岳)을 불러 지위를 선양할 적에 스스로 재위한 지 70년이라고 한 말이 실려 있으니, 이는 늙어 부지런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요, 어려움을 회피한 것은 아니다. 사악이 스스로 말하길 “우리는 황제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하고, 여럿이 요임금에게 추천하길 “재야에 있는 홀아비를 우순(虞舜)이라 합니다.” 하였으니, 이는 요제의 책임이 무거우니 오직 덕이 있는 자만이 감당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요, 의도적으로 어려운 일을 가지고 순을 옭아매려는 것이 아니니, 당시 사람들의 기상이 어떠한가. 그러므로 허유와 선권(善卷)의 무리를 당시엔 어려운 일을 회피하는 사람이라고 지목하였고, 저들도 고상한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엔 군위를 부귀와 영화 안락의 도구로 생각하여 하늘이 백성을 낳은 처음 뜻을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왕망(王莽), 조조(曹操), 사마의(사마懿), 한온(한溫)의 무리들이 마구 세상에 나오니 상고의 은자들이 이에 고상함을 드날렸다.



1) 회양(懷襄) : 회산 양릉(懷山襄陵)의 준말. 큰물이 창일하여 산과 언덕을 둘러싸고 있다는 말인데, 수습할 수 없는 낭패의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함.

2) 역상(曆象) : 책력을 기록하고 관상(觀象)하는 기구로 관찰함을 이른다.

3) 인시(人時) : 백성의 농사철.

4) 帝曰 咨汝羲曁和아 朞는 三百有六旬有六日이니 以閏月이라사 定四時成歲하여 允釐百工하여 庶績이 咸熙하리라제요(帝堯)가 말씀하였다. “아! 너희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야. 기(朞)는 366일(日)이니, 윤달을 사용하여야 사시(四時)를 정하여 해를 이루어 진실로 백공(百工)[백관]을 다스려서 모든 공적이 다 넓혀질 것이다.

5) 옛날 고신씨(高辛氏)의 두 아들 알백(閼伯)과 실침(實沈)이 서로 화복하지 못해 날마다 간과(干戈)로 싸우므로, 임금이 알백을 상구(商丘)에 옮겨 상별[商星]을 주장하게 하고 실침을 대하(大夏)에 옮겨 참별[參星]을 주장하게 하였다.《左傳》

6) 命母句氏作離磬世本樂録云磬叔所造乃無句也一作無間禮記云叔之離磬古史考云堯時人 <路史>

7) 팔풍(八風) : 팔방(八方)의 바람. 입춘(立春)에 조풍(調風)이 불고, 춘분(春分)에 명서풍(明庶風)이 불고, 입하(立夏)에 청명풍(淸明風)이 불고, 하지(夏至)에 경풍(景風)이 불고, 입추(立秋)에 양풍(凉風)이 불고, 추분(秋分)에 창합풍(閶闔風)이 불고, 입동(立冬)에 부주풍(不周風)이 불고, 동지(冬至)에 광막풍(廣莫風)이 분다고 한다.

8) 12주(州) : 기(冀)·연(兗)·청(靑)·서(徐)·형(荊)·양(揚)·예(豫)·양(梁)·옹(雍)·유(幽)·병(幷)·영(營)이다.

9) 황수(黃收) : 황색의 면관(冕冠).

10) 치의[純義] : 검은 색의 옷.

11) 大路上路四馬車也天子駕六馬不畫不文飾也

12) 縁結蒲爲席也

13) (焦僥) : 난쟁이들이 사는 나라. 《淮南子》 墜形訓에 “서남(西南) 쪽을 초요라 한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초요는 난쟁이 나라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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