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몽구

鄭莊置驛

황성 2009. 6. 3. 14:31

 鄭莊置驛(44)

前漢鄭當時字莊 陳人. 孝文時 以任俠自喜. 脫張羽阨 聲聞梁楚閒. 孝景時爲太子舍人. 每五日洗沐 常置驛馬長安諸郊 請謝賓客 夜以繼日 常恐不徧. 其知友皆大父行 天下有名之士. 武帝時 遷大司農. 當時爲大吏 戒門下 客至亡貴賤 亡留門者. 執賓主之禮 以其貴下人. 其推轂士及官屬丞史 常引以爲賢於己. 聞人之善言 進之上 唯恐後. 山東諸公以此翕然稱鄭莊. 後陷罪 起爲汝南太守卒. 家亡餘財. 先是下邽翟公爲廷尉 賓客亦塡門. 及廢門外可設爵羅. 後復爲廷尉. 客欲往. 翟公大署其門曰 一死一生 迺知交情 一貧一富 迺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

전한(前漢) 정당시(鄭當時)는 자가 장(莊)이니, 진(陳) 땅 사람이다. 효문제 시대에 임협(任俠)1)함을 스스로 기뻐하였다. 장우(張羽)의 곤액을 벗어나게 해주어 양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명성이 났다.

효경 때에 태자사인(太子舍人)이 되었다. 매월 5일 세목(洗沐)2)에 항상 장안의 여러 교외에 역마(驛馬)를 두고 빈객을 초대하여 전송함에 밤부터 아첨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항상 두루 미치지 못함을 걱정하였다. 그의 벗은 모두 대부의 항렬로 천하의 명성이 있는 선비였다.

무제 때 대사농(大司農)으로 옮겼다. 당시에 큰 관리가 되어 문하의 사람들을 경계하기를, “객이 이르면 귀천을 따지지 말고 문 밖에 머무르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빈주의 예를 차려 그의 귀함으로 남에게 낮추었다. 그가 사(士) 및 관속 승사(丞史)3)를  추곡(推轂)4)함에 항상 올려 자신보다 어질다고 하였다. 남의 좋은 말을 들으면 군상에게 진언하였으며, 오직 늦어짐을 근심하였다. 산동(山東)의 여러 공이 이 때문에 흡족히 정장(鄭莊)이라고 말했다. 뒤에 죄를 받아 여남태수(汝南太守)가 되어 죽으니,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이보다 앞서 하규(下邽)의 적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됨에 빈객이 또한 문을 메웠지만 관직에서 물러남에 미쳐서 문 밖에 참새 그물을 칠 수 있었다. 뒤에 다시 정위가 됨에 객이 가고자 하니, 적공이 크게 그 문에 쓰기를,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바로 교우의 정분을 알겠고, 한 번 가난 하고 한번 부귀함에 바로 교분의 태도를 알겠고, 한 번의 귀천은 교우의 정분이 바로 나타난다.” 하였다.


1) [任俠】2.任俠之士. 指能見義勇爲的人. 《史記·孟嘗君列傳論》:“孟嘗君招致天下任俠, 姦人入薛中蓋六萬餘家矣.”隋盧思道《遊梁城》詩:“賓遊多任俠, 臺苑盛簪裾.” 宋王安石《郭解》詩:“平日五陵多任俠, 可能推刃報王孫.” 劉澤湘《過西山辟支生墓》詩:“散盡千金交任俠, 拚將一劍報恩仇.”

2) [洗沐】2.借指休假. 漢制, 官吏五日一次, 沐浴休息. 唐宋時延爲十日一次. 《史記·張丞相列傳》:“<張蒼>常父事王陵. 陵死後, 蒼爲丞相, 洗集, 常先朝陵夫人上食, 然後敢歸家.”《新唐書·高力士傳》:“於是四方奏請皆先省後進, 小事即專決, 雖洗沐未嘗出.” 宋朱熹《示四弟》詩:“十日一洗沐, 諸生各歸休.” 參見“休沐”、“旬假”.

3) [丞史】丞及史. 秦漢時中央和地方官吏的助理官. 漢時, 丞相有兩長史, 御史有兩丞, 合稱丞史. 太守以下的郡丞、長史等佐官, 亦總稱丞史. 《史記·袁盎傳》:“鼂錯謂丞史曰:‘夫袁盎多受吳王金錢, 專爲蔽匿, 言不反.’”裴駰集解引如淳曰:“《百官表》御史大夫有兩丞. 丞史, 丞及史也.”《漢書·汲黯傳》:“<黯>擇丞史任之, 責大指而已, 不細苛.”顏師古注引如淳曰:“擇郡丞及史任之也. 鄭當時爲大司農, 官屬丞史, 亦是也.”

4) [推轂】.荐擧;援引. 《史記·魏其武安侯列傳》:“魏其、武安俱好儒術, 推轂趙綰爲御史大夫.”《南齊書·陸厥傳》:“永明末, 盛爲文章, 吳興沈約、陳郡謝朓、琅邪王融以氣類相推轂.” 宋司馬光《送祖擇之守陝》詩:“俊德爭推轂, 榮塗易建瓴.” 明歸有光《與徐子與書》:“實賴吾丈雅故推轂之.” 淸方文《送姜如農明府擢儀郞》詩:“群公極推轂, 玄幣爭相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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