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문/악록서원기

하루헌기

황성 2017. 11. 6. 10:39

何陋軒記

 

昔孔子欲居九夷 人以為陋 孔子曰君子居之 何陋之有 守仁以罪謫龍塲龍塲 古夷蔡之外 於今為要綏 而習類尚因其故 人皆以予自上國往將陋其地弗能居也而予處之旬月安而樂之求其所謂甚陋者而莫得獨其結題鳥言山棲羝服無軒裳宮室之觀文儀揖讓之縟然此猶淳龎質素之遺焉蓋古之時法制未備則有然矣不得以為陋也夫愛憎面背亂白黝丹浚奸窮黠外良而中螫諸夏蓋不免焉若是而彬鬱其容宋甫魯掖折旋矩矱將無為陋乎夷之人迺不能此其好言惡詈直情率遂則有矣世徒以其言辭物采之眇而陋之吾不謂然也始予至無室以止居於叢棘之間則鬱也遷於東峯就石穴而居之又隂以濕龍塲之民老稚日來視予喜不予陋益予比予嘗圃於叢棘之右民謂予之樂之也相與伐木閣之材就其地為軒以居予予因而翳之以檜竹蒔之以卉藥列堂階辯室奧琴編圖史講誦逰適之道畧具學士之來逰者亦稍稍而集於是人之及吾軒者若觀於通都焉而予亦忘予之居夷也因名之曰何陋以信孔子之言嗟夫諸夏之盛其典章禮樂厯聖修而傳之夷不能有也則謂之陋固宜於後蔑道徳而専法令搜抉鈎縶之術窮而狡匿譎詐無所不至渾樸盡矣夷之民方若未琢之璞未繩之木雖粗礪頑梗而椎斧尚有施也安可以陋之斯孔子所為欲居也歟雖然典章文物則亦胡可以無講今夷之俗崇巫而事鬼凟禮而任情不中不節卒未免於陋之名則亦不講於是耳然此無損於其質也誠有君子而居焉其化之也蓋易而予非其人也記之以俟來者

 

하루헌기

 

옛적에 공자께서는 구이(九夷 동방)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이 어째서 그렇게 편벽하고 누추한 곳에 거하려 하는지를 물었다. 공자가 이르길 군자가 거하는 곳이 어찌 누추하다 할 수 있겠는가?”

 

나 양명은 나라에 죄를 얻어 이곳 용장에 폄적되어 왔다. 이곳 용장은 고대로부터 이찰지역에도 속하지 못하는 땅 끝이었고, 지금은 그나마 수복으로 지정되었으나 여전히 이곳의 습속은 옛날과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벗들은 내가 경성에서 이렇게 먼 곳으로 유배를 가니 그렇게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지낼까를 염려하였다. 이제 이곳에 이른지 달포쯤 되었는데 즐겁고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그들이 말하던 누추함이 뭔지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구나. 물론 이들이 포두건을 쓰고 말소리가 마치 새소리같이 들리긴 하고, 짐승가죽으로 옷을 해 입기도 하고 대부분이 산위에 거주하기는 한다. 중원의 수레와 가마도 없고, 관복이나 위용을 갖춘 건물도 없으며 번다하기 그지없는 예의와 의식 절차도 없기는 하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이어진 순박하고 질박한 풍속을 여전히 갖고 있다. 그 옛날에 어찌 문물제도가 다 갖추어져 있었겠는가? 그러니 이러한 습속에 따라 사는 것인데 그것을 비루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내가 살았던 중원 땅은 비록 문물제도는 다 갖추었다고 하지만 앞에서는 친숙한 척 하고는 뒤에서는 원한을 품고, 시비가 어지러이 뒤섞이고 간교함이 극을 달리며, 겉으로는 선량하게 꾸미고 속으로는 악독한 계교를 부리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외모는 화려하게 꾸미고 송나라의 관을 쓰고 노나라의 의복을 입고, 그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예에 합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오히려 비루한 것이 아닌가? 내가 보기에 묘족은 전혀 그렇지가 않으니 그들은 말을 선하게 하고 욕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게 그들의 솔직한 감정에서 그대로 표출된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꾸밈없는 말을 듣고 그 말에 격식이 없다고 하여 비루하다고 한다면 나는 그 말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내가 처음 용장에 이르렀을 때 거주할 집이 없었다. 하여 부득이 가시나무 숲에 움막을 치고는 임시로 거주하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산 동쪽 봉우리 아래 돌로 된 동혈이 있어 옮겼지만 그곳 또한 어둡고 습기가 많아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이곳 용장 사람들은 노인이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멀리서 온 이방나그네가 신기하여- 매일 들여다 보곤 하였는데 내가 자신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얼마전 내가 숲의 우측 변두리를 개간하여 채마밭을 만들었다. 이를 본 이들이 내가 이곳에서 낙심하지 않고 오래 거하려 한다고 여기고는 다들 달라붙어 쓸 만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을 목재를 마련해서는 집 한 채를 지어 내가 거하게 해주었다. 집 옆으로는 측백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고, 앞뒤로는 몇 가지 꽃과 약초를 심었다. 집의 앞쪽에 섬돌을 놓고 내가 거하는 방 한쪽에는 거문고와 서책을 놓아 공부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점차 지역의 선비들이 찾아와 벗이 되고 방문이 잦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머무는 이 궁벽한 곳이나 저 선비들이 사는 성읍이나 아무 차이가 없게 느껴졌다. 그러니 내가 이곳 먼 남방 땅에 거한다는 것도 잊게 되었으니 이 집을 何陋[어째 누추하단 말인가.]’라고 이름을 지음으로 공자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밝히는 바이다.

 

! 중원 땅의 한족이 흥성하였을 때, 역대의 성현들께서 세우고 바로잡았던 문물제도와 예악문화가 아울러 잘 유전되어 내려왔다. 그러나 변방의 이민족들에게는 그와 같은 것이 없었으니 이런 이유로 저들(한족)이 이곳을 편벽되고 누추한 곳이라고 한다면 일리있는 말이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중원의 한족들이 도덕을 멸시하고 오로지 법령에만 의거하게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오히려 죄인을 붙잡아 가두는 수단조차도 사람을 다스리는데 무소용이 되고 교활함과 협잡이 판을 치게 되고 선대로부터 내려온 질박한 기풍은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묘족(苗族)은 그렇지 않으니 아직 깎아 다듬지 않은 박옥이고 자르고 손질하지 않은 원목이라. 일견 보기에는 세련됨도 없고 투박하고 우둔해보이지만 내가 보기엔 이는 충분히 다듬을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이들을 그저 비루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공자께서도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문물제도라든지 예악문화에 대해서 어찌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으랴! 당금에 있어서 묘족의 습속은 무속에 휘둘리고 귀신을 숭상하고 있다. 의례에 무지하여 범하기도 쉽고 일을 대하여서는 제 기질대로 행하기도 한다. 행위는 중용의 도에 부합되지 않으며 정비된 제도 또한 부족하니 결국은 비루하다는 평가를 면하질 못하는 것이라.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정비된 법령이나 제도와 예의를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한 연고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질박한 본성을 깎아내릴 수 없으니 만약 참된 군자가 이곳에 거하면서 이들을 잘 교화할 방법을 써서 묘족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이들의 변화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안타깝구나! 나는 그러한 일을 자임하기에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로다! 이 글을 적음으로 후대에 올 군자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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