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문/악록서원기

ㅇㅇ

황성 2008. 7. 3. 09:26

重新嶽麓書院

明鄒元標撰

司理陳君某署郡篆且期年 士誦民恱 政餘 思嶽麓先賢過化地 諸名公 時式臨焉 柰何任其頽圮而不治 恐無以繼先志開來學 乃捐俸及自理贖金 庀材鳩工 於是 祠宇前後廟堂齋舍 煥然一新 君思此役重 恐將來者 委徳意於草莽 走使求鄒子為記 予憶庚辰辛巳間 江陵在事 有詔 盡毁天下書院 諸凡先聖賢遺像捆而投於江者 盛服先生 嚬蹙言曰禍及斯道 吾道非耶 予語之曰子憂道之廢耶 夫道先天地而不老 後天地而獨存者 凡覆載雨露日月星辰人物禮儀威儀周旋進退皆道也 窮鄉委巷 邊鄙甌脱 無一息不與道游 豈以一祠宇為興廢重輕 有所待而興 必無所待而廢 豈道之謂歟 先生曰子之言道 固爾爾 然人之於道 仁者見曰仁 知者見曰知 百姓則日用不知 聖賢不忍其陷於不知也 故多方以誘誨提撕之 凡可以使之景從而觸其真心者 將無不致其情 如覩人之饑溺必思引而出之安全之地然後 其覺世之心 始遂 不然 天之生聖賢也 視斯世 一無足以動其心而上天生之之意孤矣 予拜而服其言 㑹予癸未起家 備官掖垣奏言 舊毁天下書院 傷道化蔑名教 非所以維風淑世 上報可而嶽麓則首報可中 予歸田 且廿餘年 常思率二三子 徘徊兹地 尋朱張二先生遺跡于往訓 畧一振起焉而又以世多畏途 無由親覩其盛 為歉而不知其傾頽 若是倘非陳君有千古之志 即明詔許復 竟與昔時境象何殊焉 君父子兄弟 世以正學為箕裘 其所佩服諸儒者深且篤矣 宜是典之重光也 可為吾道慶矣 予又憶當議復時 予謁大宗伯語 曰天下諸名書院 如嶽麓白鹿嵩陽睢陽諸勝境 今幸一新 然所以主張斯文 不可無人 愚意從近郡邑 年輪學博一人 典其事而禮各邑有道術者 如昔周允升彪徳美吳徳夫諸君子輩 嵗挈諸弟子 講肄其中 春秋凡二祀則斯典可垂之永永 不然 吾懼莓苔長 狐鼠夜嘷也 且宋時不有山長例乎 大宗伯曰子言良是 㑹宗伯去不果 今豈無司教者得尸其事乎 予并以系之記末 讀予文必有留心世道而不負陳君今曰之舉者 元某雖老 於兹地猶若夢寐見之 冀與諸君子 一下上其間 振二先生之澤於無涯也 是役也 主張於上則有觀察某公 續至太守某公 協力襄成則有二守某公别駕某公 皆以斯文為己任者 例得並書

사리 진군 아무개가 군의 임무를 맡은 지가 짐짓 일 년 됨에 선비들이 칭송하고 백성이 기뻐하였다. 정사를 하고난 나머지에 생각하기를, 악록은 선현이 지나서 교화한 곳이요, 여려 이름난 사람들이 때때로 경의를 표시하며 임하였으니, 어떻게 그 무너진 것을 방임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현의 뜻을 잇고 후학을 개도하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봉급을 헌납하고 스스로 희사한 것을 관리하여 재목을 갖추고 장인을 모으니, 이에 사우의 전후 묘당과 재사가 환하게 한 번 새로워졌다. 군이 생각하기를 이 부역은 중대하니, 혹 장차 오는 사람이 초목의 사이에서 덕의를 버려둠을 두려워하여 사람을 시켜서 나에게 기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기억하건대, 경진과 신사년 사이에 강릉에 일이 있어, 조서를 두었는데, 천하의 모든 서원을 철거하게 하였으니, 무릇 앞 성현의 유상을 두드려 강물에 던졌다. 성복선생(유학자를 지칭한다.) 찡거리며 말하기를, ‘화가 사도에 미치니 우리 도가 그릇되었는가?’하니,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도가 없어지는 것을 근심하는가? 대저 도라는 것은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 있었으나 늙지 아니하고 천지가 없어진 뒤에도 홀로 보존된다. 무릇 덮어주고 실어주는 우로와 일월과 성신과 인물과 예의와 위의와 주선하고 진퇴함이 모두 도이다. 궁벽한 마을 위항과 변방 변경에 한 순간이라도 도와 더불어 놀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하나의 재우로 흥망과 경중으로 삼으리오? 기다리는 것이 있어서 흥기함과 반드시 기다림이 없어서 폐해짐은 어찌 도를 이르는 것이겠는가?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가 도를 말한 것이 진실로 그러하거니와, 그러나 사람이 도에 대해서 인자는 보고서 인이라고 말하고, 지자는 보고서 知라고 말하고 백성은 일상생활함에 알지 못하니, 성현이 그 백성이 알지 못함에 빠짐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방법으로 회유하고 가르치고 제시하니, 무릇 가까이 붙어서 그 진심에 닿게 할 수 있는 것은 장차 그 정을 이르게 하지 않음이 없으니, 마치 사람이 굶주리고 물에 빠짐을 보고 반드시 끌어서 안전한 곳으로 나가게 한 연후에 그 세상을 깨우치는 마음이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성현을 냄에 이 세상을 보고 한 번이라도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면 상천이 태어나게 한 뜻이 외로울 것이다.”하니, 내가 절하고서 그 말에 복종하였다.

마침 내가 계미년에 집에서 일어나 궁궐에서 관직을 맡으면서 아뢰기를 “지난 날 천하의 서원을 훼손하여 도의 교화가 무너지고 훌륭한 가르침이 없어져서 풍속을 깨우치고 세상을 맑게 하는 바가 아닙니다.”하니, 주상께서 가능하다고 비답을 내림에 악록서원은 비답을 내리는 가운데 으뜸이었다. 내가 전원으로 돌아가 장차 20년에 항상 생각하기를,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을 배회하여 주희 장식 두 분의 선생님이 남긴 자취를 간 훈계에서 찾아 략 한 번 떨쳐 일어나기를 생각하였다. 또 세상에는 두려운 길이 많아서 직접 그 성대함을 볼 수 없음으로 아쉬움으로 여겼으나 그 무너짐이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 혹시 진군이 천고의 뜻을 두어서 곧 밝은 조서로 회복함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끝내 옛적 경상과 더불어 무엇이 다르겠는가? 진군의 부자와 형제가 대대로 유학으로 가학으로 삼았으니 그 여러 유학자에게 모범이 된 것이 깊고 돈독하다. 이 법이 거듭 빛남이 마땅하도다. 우리 도의 경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대종백을 배알하고 말하기를 “천하의 여러 이름 난 서원 악록 백록동 숭양 수양 같은 여러 승경은 지금 한 번 새로워 졌다. 그러나 사문을 주장함에 사람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부족한 제가 생각하기로는 가까운 군읍을 따라 해마다 학문에 박식한 한 사람을 번갈아 맡게 하여 그 사무를 담당하여 각 군읍에 도술이 있는 사람에게 예우하기를 마치 옛적 주윤승 표덕미 오덕부 여러 군자들이 해마다 제자를 거느리고 그 가운데에서 강론하고 학습하는 것과 같이 하여 봄가을로 무릇 두 번 제사지낸다면 이 법을 영원한 곳에 드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끼가 자라고 여우와 쥐가 밤에 우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또 송나라 당시에 산장의 관례가 있지 않습니까?”하니, 대종백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다.”하였다. 마침 대종백이 떠나가고 결단하지 못하였다. 지금 어찌 가르침을 맡아 그 일을 주관할 사람이 없겠습니까? 내가 아울러 기문의 끝에 붙이니, 나의 글을 읽으면 반드시 세도에 마음을 두어 진군의 오늘날의 거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원 아무개가 비록 늙었으나 이곳에서 오히려 몽매간에 보는 듯하였으니, 여러 군자와 더불어 한 번 그 사이에서 오르내려 두 선생의 은택을 무궁한 곳에서 떨치기를 바란다. 이 역사는 위에서는 주장하였으니, 관찰사 아무개가 있고, 이어서 태수 모공이 이르렀고, 협력하여 이룬 사람은 두 군수 모공과 별가 모공이 모두 사문으로 가신의 임무로 삼은 자이다. 관례대로 아울러 기록한다.

嶽麓書院記(원문).hwp
0.04MB

'기문 > 악록서원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루헌기  (0) 2017.11.06
악록서원기 장경부  (0) 2008.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