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용어정리

용2

황성 2013. 10. 11. 10:54

1)어지러운……않았으므로:참고로 논어 태백(泰伯)에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거주하지 말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2)은하(銀河)에……나이:28세를 가리킨다. 열수(列宿)는 28수(宿)의 별자리를 뜻한다.

3)탕산(碭山)의 부로(俘虜):부로는 송주(宋州) 탕산 출신으로,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後梁)의 태조가 된 주전충(朱全忠)을 가리킨다. 원래 황소(黃巢)의 적도(賊徒)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에 이르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그 뒤 소종(昭宗)과 애제(哀帝)를 시해하고 국호를 양(梁)으로 바꿨으나, 만년에 누차 패하면서 세력이 위축되다가 마침내는 차자(次子)인 주우규(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 新五代史 卷1 梁本紀 太祖

4)보리(菩提)의 당부(堂斧):불교의 사탑(寺塔)을 가리킨다. 보리는 깨달음이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불교를 의미하고, 당부는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말로 무덤을 뜻하는데, 사원의 탑이 원래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참고로 신라 문성왕(文聖王) 17년(855)에는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이 세워지고, 경문왕(景文王) 10년(870)에는 보림사(寶林寺)에 남북으로 두 개의 석탑이 세워지고, 3년 뒤에는 높이 23장(丈)의 황룡사(皇龍寺) 9층탑이 개수(改修)되었는데, 그 이듬해인 경문왕 14년에 고운이 당나라에서 등과(登科)하였다.

5)음탕한 여제(女弟):신라 정강왕(定康王)의 여동생인 김만(金曼) 즉 진성여왕(眞聖女王)을 가리킨다. 젊은 미소년을 불러들여 음행을 하는가 하면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사통했다는 설이 전한다.

6) 월영대(月影臺):창원(昌原)의 남쪽 바닷가에 있는 대이다. 고운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는데, 서거정(徐居正)의 시 월영대에 이르기를, “월영대 앞에 달은 길게 있건만, 월영대 위에 사람은 이미 갔네. 최고운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뒤, 흰 구름만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구나.[月影臺前月長在 月影臺上人已去 孤雲騎鯨飛上天 白雲渺渺尋無處]” 하였다.

7) 두류(頭流)의 암문(巖門):두류는 지리산(智異山)을 말하고, 암문은 쌍계사(雙溪寺)를 말한다. 쌍계사의 골짜기 입구에는 두 바위가 서로 마주 서 있어 대문의 모양새를 이루고 있는데, 고운이 이곳에서 글을 읽을 적에 동쪽의 바위에는 ‘쌍계(雙溪)’, 서쪽의 바위에는 ‘석문(石門)’이라고 새겼다고 한다.

8) 청량(淸涼)의 기판(棋板):청량산은 안동(安東)에 있는 산이며, 이 산의 풍혈(風穴) 입구에는 두 개의 판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운이 앉아서 바둑을 두던 판이라고 한다.

9)황엽(黃葉)……하는데:동국통감(東國通鑑)에 “고려 현종(顯宗) 경신(庚申) 11년(1020)에 신라의 집사성 시랑(執事省侍郞) 최치원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고, 선성(先聖)의 묘정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당초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고운이 보낸 글 중에 “계림에는 누런 잎이 지고, 곡령에는 소나무가 푸르다.[雞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최치원이 태조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그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밖에 동사찬요(東史纂要)서악지(西岳誌)청학동비명(靑鶴洞碑銘)에도 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이 각각 언급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청송은 새로이 흥기하는 고려를 가리키고 황엽은 시들어 가는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운이 비유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곡령은 개경(開京)의 송악(松嶽)을 가리킨다.

10)홍(洪)과……공신:고려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을 가리킨다.

11)엽각(獵較):사람들과 경쟁적으로 사냥하여 잡은 짐승으로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할 적에 노나라 사람들이 엽각을 하자 공자 역시 엽각하는 일을 행하였다.[孔子之仕於魯也 魯人獵較 孔子亦獵較]”라는 말이 나온다.

12)사술(四術)과 육경(六經):사술은 시(詩)․서(書)․예(禮)․악(樂)의 네 가지 경술(經術)을 말하고, 육경은 시경서경역경(易經)춘추(春秋)예기(禮記)악경(樂經)을 말한다.

13)선생은……하였고:고운집 권2 진감 화상 비명(眞監和尙碑銘)에 “심약의 말 중에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대체(大體)를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니,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도에 대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가 심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이름 지을 수가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沈約有云 孔發其端 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言至道矣 至若佛語心法 玄之又玄 名不可名 說無可說 雖云得月指或坐忘 終類係風影難行捕]”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불교를 폄하하여 비판한 말이 아닌데, 서문의 저자는 이를 잘못 해석해서 이렇게 인용한 듯하다. 아래의 말도 마찬가지이다.

14)노장(老莊)과……하였으며:고운집 권3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에 “공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네. 두 종교만이 천하의 법도로 일컬어졌으므로, 석가의 가르침은 경쟁하기 어려웠다네. 그래서 십만 리 밖에서 서역의 거울이 되었다가, 일천 년 후에야 동국의 촛불이 되었다오. 계림은 땅이 오산의 옆에 있는지라, 예로부터 도교와 유교에 기특한 자가 많았다네. 어여쁘게도 희중이 직분에 충실하여, 다시 불일을 맞아 공색을 분변하였다오. 종교의 문이 이로부터 단계별로 나뉘고, 말의 물길이 특색 있게 각자 퍼져 나갔다네.[麟聖依仁乃據德 鹿仙知白能守黑 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确力 十萬里外鏡西域 一千年後燭東國 鷄林地在鼇山側 儒仙自古多奇特 可憐曦仲不曠職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 言路因之理溝洫]”라는 말이 나온다.

15)장자방(張子房)이……하였다:고운집 권2 무염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에 “저 문성후는 한 고조(漢高祖)의 사부가 되어 만호에 봉해지고 열후의 지위에 오른 것을 크게 과시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 재상의 자손으로서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으니 비루한 일이다. 그가 가령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중간에 그만두어 학의 등 위의 하나의 허깨비 같은 몸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 대사가 처음에 속세를 초월하고 중도에 중생을 제도하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한 것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彼文成侯爲師漢祖 大誇封萬戶位列侯 爲韓相子孫之極 則㑋矣 假學仙有始終 果能白日上升 去於中止得爲鶴背上一幻軀爾 又焉珿大師拔俗於始 濟衆於中 潔己於終矣乎]”라는 말이 나온다. 자방(子房)은 한(漢)나라 개국 공신 장량(張良)의 자이고, 문성후(文成侯)는 그의 시호이다.

16)경학대장(經學隊仗):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의 약칭이다. 중국인 주경원(朱景元)이 지은 것으로, 고운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흠정사고전서총목(欽定四庫全書總目) 권137 자부(子部) 47 유서류존목(類書類存目) 1경학대장 3권의 저자와 책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17)이는……것이었다:후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후세에 제대로 평가해 주는 식견이 높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할 때, 흔히 양자운(揚子雲)과 소요부(邵堯夫)를 거론하는데, 자운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고, 요부는 송(宋)나라 소옹(邵雍)의 자이다.

18)창려(昌黎)가……것이다:고운이 어디까지나 유자(儒者)로서 불교를 배척했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무리하게 논리를 전개하며 견강부회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창려는 창려백(昌黎伯)에 봉해진 당(唐)나라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그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있을 적에 친하게 지냈던 노승 태전(太顚)과 작별하면서 자신의 의복을 남겨 주었던[留衣服爲別] 이야기가 그의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실려 있다.

19) 계원필경(桂苑筆耕)과……없었다:고운의 저술은 문집으로는 중국에서 지은 시문집인 계원필경 20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금체시(今體詩)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사륙집(四六集) 1권이 있고, 국내에서 지은 문집(文集) 30권이 있다. 역사서로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 있고, 불교 관계 저술로는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1권,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1권, 석이정전(釋利貞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계원필경 20권과 법장화상전 1권, 사산비명만이 현전한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고운의 문집은 고려 때부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나 모두 중간에 없어져 버렸다. 본 고운집계원필경집이나 동문선에 실린 것과 불교 관계 자료집, 금석문 등에 산재한 것을 한데 모아 놓은 것으로, 사실상 ‘습유(拾遺)’의 형태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잘못된 글자나 내용이 있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최영성, 譯註 崔致遠全集2, 아세아문화사, 1999, 18〜19쪽

20) 노상직(盧相稷):1855∼1931. 한말(韓末)의 뛰어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치팔(致八), 호는 소눌(小訥)이며, 밀양(密陽) 단장면(丹場面) 노곡(蘆谷)에 거주하였다.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실학(實學)에 관해서도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소눌집(小訥集), 역대국계고(歷代國界考), 역고(曆考), 육관사의목록(六官私議目錄), 심의고증(深衣考證), 주자성리설절요(朱子性理說節要)가 있다.

21)전모(典謨):서경요전(堯典)순전(舜典)을 이전(二典)이라 하고,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익직(益稷)을 삼모(三謨)라 한다. 이를 합쳐서 전모라고 하는데, 보통 요순과 같은 고대 성군의 훌륭한 정치를 말할 때 인용되기도 한다.

22) 고명(誥命):서경에 나오는 중훼지고(仲虺之誥)강고(康誥)주고(酒誥)소고(召誥)낙고(洛誥)미자지명(微子之命)채중지명(蔡仲之命)고명(顧命) 등을 말한다.

23) 왕이……말았다:왕은 헌강왕(憲康王)을 말한다. 고운이 28세 때인 885년(헌강왕11)에 귀국하여 헌강왕의 우대를 받았으나, 그해에 바로 헌강왕이 죽고 정강왕(定康王)이 즉위하였는데, 정강왕 역시 1년 만에 죽고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하였다.

24)공자(孔子)는……하였고: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탄식한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25)맹자(孟子)는……하였으니:맹자가 제(齊)나라를 떠나면서 “천리 먼 길을 와서 왕을 만나 본 것은 내가 뭔가 해 보려고 해서이다. 그러니 뜻이 맞지 않아서 떠나가는 것이 어찌 내가 원하는 바이겠는가. 내가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다.[千里而見王 是予所欲也 不遇故去 豈予所欲哉 予不得已也]”라고 해명한 말이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나온다.

26) 시경의……하더라도:화서(華黍)시경의 편명으로,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는 여섯 편 가운데 한 편이며, 탕정(湯征) 역시 서경의 편명으로,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는 5편 가운데 한 편이다. 시경에 그 편명만 있고 사(辭)가 없는 것은 남해(南陔), 백화(白華), 화서, 유경(由庚), 숭구(崇丘), 유의(由儀) 등 6편이고, 서경에 이름만 있고 전해지지 않는 것은 제고(帝告), 이옥(釐沃), 탕정, 여구(汝鳩), 여방(汝方) 등 5편이다.

27)황소(黃巢)에게……않고:격문을 지어서 황소를 경악하게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황소를 귀화시켰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순(舜) 임금이 문덕을 크게 펴면서, 방패와 새 깃을 손에 들고 두 섬돌 사이에서 춤을 추니, 70일 만에 삼묘(三苗)의 부족이 귀순해 왔다.[帝乃誕敷文德 舞干羽于兩階 七旬有苗格]”라는 말이 나오고,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첫 번째 정벌을 갈나라로부터 시작하니 천하가 모두 그 행동을 미쁘게 여겼다.[湯一征自葛始 天下信之]”라는 말이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28)악관(樂官)에게……것이다:고운집 권1에 당성에 나그네로 노닐면서 선왕의 악관에게 주다[旅遊唐城 贈先王樂官]라는 제목의 오언율시(五言律詩)가 있다. 서리(黍離)시경 왕풍(王風)의 편명인데, 동주(東周)의 대부가 행역(行役)을 나가는 길에 이미 멸망한 서주(西周)의 구도(舊都)인 호경(鎬京)을 지나가다가 옛 궁실과 종묘가 폐허로 변한 채 메기장과 잡초만이 우거진 것을 보고 비감에 젖어 탄식하며 부른 노래이다. 맥수(麥秀) 또한 조국이 멸망한 것을 슬퍼한 노래로, 은(殷)나라 기자(箕子)가 주(周)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허(殷墟)를 지나다가 차마 아낙네처럼 울지는 못하고 시를 지어 불렀다는 노래이다.

29)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을 말한다. 본 고운집에 실려 있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실린 열전을 전재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전재하지는 않고, 간간이 삭제하거나 보충한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의 내용, 불교도와 친분을 나눈 내용, 고려의 태조를 은밀히 도왔다는 내용 등은 삭제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격황소문(檄黃巢文)의 내용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등에서 따다가 보충해 넣었다. 또한 문투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수정한 부분도 종종 보인다. 삼국사기의 열전 부분은 기존의 번역서가 많이 나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병도(李丙燾)의 국역 삼국사기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역주(譯註)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상세한 주석이 달려 있다.

30)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1 신라시조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에 이르기를, “최치원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집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치원의 옛집이라고 한다.[致遠乃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 味呑寺南 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하였다.

31) 부친:고운의 아버지는 이름이 견일(肩逸)이며, 일찍이 숭복사(嵩福寺)의 창건에 참여하였다. 고운집 권3 대숭복사 비명(大嵩福寺碑銘)에 이르기를, “김순행(金純行)과 나의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이 일찍이 이곳에서 일을 하였다.” 하였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32)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율수현은 현재 중국 강소성(江蘇省) 율양현(溧陽縣)이고, 위(尉)는 도적을 잡고 죄수를 다루는 관직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33) 고변(高騈):당나라 말기의 문신으로 중국 섬서성 유주인(幽州人)이다. 글을 좋아하여 선비를 친구로 삼았는데, 여러 차례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황소의 난을 진압할 때 진격을 늦추자 싸울 의지가 없다고 하여 중도에 병권을 빼앗겼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3쪽 또 ‘騈’의 음은 ‘변’과 ‘병’ 두 가지인데, 이병도는 ‘변’으로 읽었고, 북한본․이재호본․신호열본에서는 ‘병’으로 읽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본에서는 ‘병’으로 읽었다.

34) 그중……떨어졌다: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편자가 임의로 추가해 넣은 것이다.

35) 태산군(太山郡):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일대이다.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다. 현재 정읍시 칠보면에는 최치원을 배향한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다. 이병도는 현재의 부여군 홍산면 일대로 보았으나(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83, 676쪽)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5쪽

36) 부성군(富城郡):신라 웅주(熊州)에 속한 군의 하나로, 현재의 서산시(瑞山市)이다. 고려 인종 때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명종이 관호를 없앴다가 충렬왕 때 서산으로 고쳤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3쪽

37) 진성왕……임명하였다: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편자가 임의로 보충해 넣은 것이다.

38) 강주(剛州)의 빙산(氷山):강주는 지금의 영주(榮州)로, 고려 성종 때 영주에 강주단련사(剛州團練使)를 두었다. 빙산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이다. 의성은 당시에 영주 소관 하에 있었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8쪽

39) 그리고……마쳤다: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을 보면, “모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사와 더불어 도우를 맺었다.[與母兄浮屠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최치원이 말년에 불교에 귀의한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부분을 삭제한 것은 편자가 최치원이 불교에 귀의하였던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40)나은(羅隱):833~909. 자는 소간(昭諫), 자호는 강동생(江東生)이다. 당시에 시명(詩名)을 천하에 진동시키며 특히 영사(詠史)에 뛰어났으나 기풍(譏諷)이 많은 까닭으로 종신토록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난리를 피해 향리로 내려갔다가 절도사(節度使) 전류(錢鏐)에게 발탁되어 종사관으로 몸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舊五代史 卷24 梁書 羅隱列傳

41) 고운(顧雲):당나라의 시인으로 최치원과 시를 주고받았던 인물이다. 자는 수상(垂象), 사룡(士龍)이라고도 한다. 지주(池州) 사람이다. 두순학(杜荀鶴)이나 은문규(殷文圭)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구화산(九華山)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함통(咸通) 15년(874)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변(高駢)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사(從事)하였다. 필사탁(畢師鐸)의 난 이후에는 삽주(霅州)로 물러나 살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건녕(乾寧) 초에 졸하였다. 저서로는 봉책연화편고(鳳策聯華編稿)소정잡필(昭亭雜筆)이 있다.

42)내……자라: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뿌리가 없어서 어디로 흘러갈 지 알 수 없자 천제(天帝)가 거대한 황금 자라 여섯 마리로 하여금 그 산을 머리로 떠받치게 했다는 신화가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전한다.

43) 고려인(高麗人):신라인(新羅人)의 오기(誤記)이다.

44) 고려……내렸다:고려사 권4 현종세가(顯宗世家) 1에 의하면, 현종(顯宗) 11년(1020) 8월에 최치원에게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그 동시에 선성(先聖)의 묘정(廟廷)에 종사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현종 14년 2월에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고 되어 있다.

45) 상태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이 서장은 언제 올린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진성여왕 7년(893)에 당에 조공 가던 사신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익사하였으므로 다시 부성군 태수(富城郡太守)로 있던 최치원을 불러서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고 도적이 잇달아 일어나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에 최치원이 다시 사신이 되어 당에 갔는데, 당나라의 주현(州縣)에서 공급(供給)을 계속해서 대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당의 재상인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서장을 올렸다.”라고 하였다. 東史綱目 卷5上 眞聖女主7年

46) 동해(東海)……신라입니다:이는 삼한과 삼국의 관계에 대한 국내의 최초의 설이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 권34 잡지(雜志) 지리(地理) 1에서 “신라의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하였는데, 이 설이 사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하여 이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설은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1 마한(馬韓)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바, 삼국유사의 찬자 역시 고운과 같은 삼한관(三韓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권근(權近)은 마한은 백제, 변한은 고구려, 진한은 신라라는 설을 주장하였다. 17세기의 한백겸(韓百謙)은 마한은 백제, 변한은 가야, 진한은 신라라는 설을 제창하였는데, 이후 지금까지 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그러나 천관우(千寬宇)는 삼한족(三韓族)의 이동설을 들어 마한이 고구려 지역에 살았던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해 삼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6쪽

47) 수황(隋皇)이……원인이었습니다:수나라의 2대 군주인 양제(煬帝)가 대운하(大運河)를 개통하고 장성(長城)을 쌓는 등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키는 한편 사치와 주색에 빠져 백성의 원망을 샀으며, 고구려 정벌에서 크게 실패하는 바람에 국력이 급히 쇠해져 국가가 혼란해지는 가운데 신하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피살되어 마침내 나라가 망하였다.

48) 정관(貞觀):당 태종(唐太宗)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이다.

49) 문황(文皇)이……돌렸습니다: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문황은 당나라 태종(太宗)의 시호(諡號)이다. 태종은 6월부터 9월까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돌아갔으며, 친정을 후회하였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당나라 군사는 7만에 불과하였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7쪽 고운이 이렇게 서술한 것은 외교적인 글이기 때문에 이렇게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50)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이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잘못으로, 고운이 잘못 기억하여 이렇게 쓴 것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의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 등 5도독부를 두었는데, 웅진도독부가 나머지 4도독부를 통할하였으며, 몇 년 뒤에 모두 없어지고 그 지역은 신라로 귀속되었다.

51) 하남(河南)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백제의 유민 중 1만 2807명을 잡아다 장안(長安)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669년에 고구려 유민 3만 명을 강회(江淮)와 산남(山南)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신당서(新唐書) 권220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보이고 있는바, 백제의 유민도 이 지방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67쪽

52) 안동도독부(安東都督部):668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설인귀(薛仁貴)를 총독(摠督)으로 삼은 다음 영토를 9도독부, 41주, 100현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뒤 고구려 유민들의 잇단 반란으로 676년에 도호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겼으며, 한때 폐지하였다가 699년에 안동도독부로 개칭, 얼마 뒤 다시 도호부로 복구하였다. 여러 번 이동이 있었으나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계기로 756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53) 태백산(太白山):백두산(白頭山)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동모산(東牟山)의 오기(誤記)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7쪽

54) 태복경(太僕卿)인 김사란(金思蘭):김사란의 직책이 동사강목 권4하 성덕왕 32년(733)에는 태복랑(太僕郞), 권5상 진성여주 7년(893)에는 태복경(太僕卿), 구당서(舊唐書) 권199상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국(新羅國)에는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으로 되어 있다.

55) 우리 왕 김모(金某):성덕왕(聖德王)을 가리킨다. 성덕왕의 본명은 융기(隆基)인데, 당 현종의 이름과 같아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56) 김장렴(金張廉):헌덕왕(憲德王)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가왕자(假王子)로 생각된다. 817년(헌덕왕9) 10월에 조공사로 당나라에 파견되었는데, 풍랑으로 인하여 표류하다가 현재의 중국 절강성 영파시인 명주(明州) 해안에 도착하여 절동(浙東) 관리의 도움으로 당나라 서울에까지 다녀왔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8쪽

57) 반신(叛臣)의 작란(作亂):886년에 당나라에서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을 가리킨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8쪽

58) 동사찬요(東史簒要):1606년(선조39)에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오운(吳澐)이 지은 역사책이다. 8권 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성룡(柳成龍)이 왕에게 바쳐 유림(儒林)의 표준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책이다. 1609년(광해1)에 계림부(鷄林府)에서 처음 간행했다가 1614년에 한백겸(韓百謙)의 충고로 지리지(地理志)를 첨가하고, 길재(吉再) 등 고려 말의 은자들을 추가해 개찬하였다. 권1의 군왕기(君王紀)와 권7의 열전(列傳)으로 되어 있어 기전체 형식에 가까우나, 지(志)가 없으며, 개찬할 때 간단한 지리지를 첨가했을 뿐이다.

59)나라의……하였으니:고운이 자신과 관련된 일 이외에는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알 바가 아니라는 식의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쟁신론(爭臣論)에 “마치 남쪽의 월나라 사람이 북쪽 진나라 사람의 살지고 여윈 것을 보는 것처럼 무관심해서, 마음속에 기쁨이나 슬픈 느낌을 전혀 갖지 않는다.[若越人視秦人之肥瘠 忽焉不加喜戚於其心]”라는 말이 나온다.

60)자기……일:논어 미자(微子)에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하여 인간의 큰 윤리를 어지럽히고 만다.[欲潔其身 而亂大倫]”라고 은자(隱者)를 비평한 말이 나온다.

61)보배를……일:논어 양화(陽貨)에 “보배를 속에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그냥 놔둔다면 그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라는 말이 나온다.

62)상자평(向子平):자평은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상장(向長)의 자이다. 왕망(王莽) 때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이 몇 년 동안 그를 부르면서 왕망에게 천거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다가 자녀들을 모두 시집 장가보낸 뒤에 자신을 이미 죽은 사람처럼 여기라고 하고는 집을 떠나 뜻이 맞는 벗들과 오악(五岳) 명산을 유람하며 종적을 감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向長

63)대효위(臺孝威):효위는 후한의 은사(隱士) 대동(臺佟)의 자이다. 무당산(武當山)에 숨어서 동굴에서 생활하며 약초를 캐며 살았는데, 장제(章帝) 건초(建初) 연간에 벼슬로 부르자 이에 응하지 않고 아예 멀리 떠나 종적을 감췄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臺佟

64)주량(朱梁):주전충(朱全忠)의 양(梁)나라라는 말로, 후량(後梁)을 가리킨다. 2쪽 주3 참조.

65)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4쪽 주9 참조.

66)인간의……돌아간다:한국문집총간 1집에 수록된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권17 태위에게 재차 올린 계문[再獻啓]에 나온 내용이다. 요로(要路)와 통진(通津)은 주요 도로와 사통팔달의 나루라는 뜻으로, 모두 현요(顯要)한 지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67) 혹자는……탄복하였다:조위(曺偉:1454∼1503)의 문집으로 한국문집총간 16집에 수록된 매계집(梅溪集)권4 제최문창전후(題崔文昌傳後)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위는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다. 성종 때 도승지, 호조 참판 등을 지냈으며, 1498년(연산군4)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오랫동안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 이후 순천(順天)으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죽었다.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68)무협 중봉(巫峽重峯)의……금의환향했다:고운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28세에 귀국했다는 말이다. 무협에 12봉이 있고 하늘에 28수가 있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69) 종사(從祀):대본에는 ‘從師’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4 현종세가1에 의거하여 ‘師’를 ‘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70) 신재(愼齋)……하였다:주세붕(周世鵬:1495∼1554)의 문집으로 한국문집총간 27집에 수록된 무릉잡고(武陵雜稿) 권5 상이회재(上李晦齋)에 나온다.

71)명 숙종(明肅宗):묘호(廟號)는 세종(世宗)이다. 숙종은 시호(諡號)이다.

72)우가(虞家)의……말: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도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말을 가리킨다. 주희(朱熹) 등 송유(宋儒)가 이것을 요(堯)․순(舜)․우(禹) 세 성인이 서로 도통(道統)을 주고받은 16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고 강조한 뒤로부터,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의 원리로 숭상되어 왔다.

73)마음으로……증삼(曾參)이요:고운이 유가(儒家)의 도를 전수받았다는 뜻의 표현이다. 공자(孔子)가 제자 증삼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자, 증삼이 “네, 그렇습니다.[唯]”라고 곧장 대답하고는, 다른 문인에게 “부자의 도는 바로 충서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설명해 준 내용이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

74)도가……안회(顔回)였네:공자가 제자 안회의 안빈낙도의 생활에 대해서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골목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한결같이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찬탄하면서 두 번이나 어질다고 칭찬한 말이 논어 옹야(雍也)에 나온다.

75)광풍(光風)이라……뜻이라면:송유(宋儒)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소싯적에 주돈이(周敦頤)를 공경하여 그에게 찾아가서 배운 것처럼 자신도 고운을 스승으로 받들고서 배우고 싶다는 뜻이다. 광풍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를 뜻하는 말인데,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너무도 고매해서, 흉중이 쇄락하기가 마치 맑은 바람이요 개인 달과 같았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는 말이 나온다. 염계는 주돈이의 호요, 무숙은 그의 자이다. 동락(東洛)은 동도(東都) 낙양(洛陽)이라는 뜻으로, 낙양 출신인 정씨(程氏) 형제를 가리킨다.

76)추월(秋月)이라……정이랄까:주희(朱熹)가 이통(李侗)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통의 인품을 “빙호추월처럼 투명하여 흠이 하나도 없다.[如氷壺秋月 瑩徹無瑕]”라고 평한 말이 송사(宋史) 권428 도학열전(道學列傳) 이통(李侗)에 나온다. 이통은 세상에서 연평 선생(延平先生)으로 일컬어졌는데, 40년 동안 세상과 단절하고 오로지 정좌(靜坐)하여 천리(天理)를 체득하는 공부에 힘썼다고 한다. 주희가 고종(高宗) 소흥(紹興) 경진년(1160) 겨울에 여산(廬山) 서림원(西林院)의 유가 상인(惟可上人)의 방에 우거하면서, 조석으로 왕래하며 연평에게 수업받은 사실이 회암집(晦菴集) 권2 제서림가사달관헌 재제(題西林可師達觀軒再題)에 병서(幷序)로 나온다.

77)벗을……있으니:참고로 논어 안연(顔淵)에 “군자는 학문을 통해서 벗을 모으고 벗을 통해서 자신의 인덕을 배양한다.[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78)치란(治亂)의……취훈(臭薰)이라:역사적으로 고운에 대해서 불교에 아첨했다면서 부정적으로 비평하기도 하고,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요 문학의 창도자라고 찬미하는 등 엇갈린 평가가 있어 왔다는 말이다. 취훈은 악취와 향기라는 뜻이다.

79)정별(旌別)하여……되었나니:서경 필명(畢命)에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표창하고 구별하여 그 집과 마을을 표시한다.[旌別淑慝 表厥宅里]”라는 말이 나온다.

80)장수(藏修):예기 학기(學記)에 나오는 말로, 학습에 전심하는 것을 뜻한다.

81)추로(鄒魯)에……분분했던가:서악정사를 건립할 당시에 비판하는 말이 많았던 것을 가리킨다. 한국문집총간 29집에 수록된 퇴계집(退溪集) 권3에 이강이가 서악정사를 새로 설치하고 시를 지어 부쳐 왔기에 차운하여 두 수를 짓다[李剛而新置西岳精舍 有詩見寄 次韻二首]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첫 번째 시의 자주(自註)에 “강이가 이 일을 경영하면서 비방을 많이 들었다.[剛而因此營作 多得謗]”라는 말이 나온다. 위에 소개한 퇴계의 시는 두 번째 시이다. 강이는 이정(李楨)의 자이다. 추로는 맹자와 공자의 고향으로, 문교(文敎)가 흥성한 지역을 가리키는데, 동방예의지국과 함께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82)구옹이……내는걸:처음에는 고운의 서원을 세우는 뜻을 모르고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금 보면 서악정사 덕분에 유생들이 교화를 받아서 훌륭한 인재로 양성되고 있지 않느냐는 뜻이다. 구옹은 구암(龜巖) 이정(李楨)을 가리킨다.

83)닭 잡던 당일:고운이 태인 군수(泰仁郡守)로 재직하던 때를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조그마한 고을에서 예악(禮樂)의 정사를 펼치는 것을 보고는, 공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랴.[割雞焉用牛刀]”라고 농담으로 말했던 고사가 전한다. 論語 陽貨

84)가시나무……말했다오:고운과 같은 현자가 작은 관직에 몸담고 있는 것을 탄식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이 구람(仇覽)을 주부(主簿)로 임명하려다가 그의 그릇이 워낙 큰 것을 보고서 “가시나무는 봉황이 깃들 곳이 못 된다. 100리의 지역이 어떻게 대현이 밟을 땅이리오.[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라고 탄식하고는 한 달 치 월급을 구람의 태학(太學) 학자금으로 내준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仇覽

85) 상서장(上書莊):이 상서장부터 아래의 가야산(伽倻山)까지는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를 근간으로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아 엮은 것이다. 상서장에 대해서 이곳에서는 고운이 진성왕(眞聖王) 때 올린 시무 십조(時務十條)의 상소문을 이곳에서 썼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의 경주부와 한국문집총간 198집에 수록된 성호전집(星湖全集) 권7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고려 태조가 일어날 때, 고운이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을 이곳에서 지어 올렸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86) 이종상(李鍾祥):1799∼1870.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정헌(定軒), 경주 출신이다. 서양 학문이 국내에 번지자 이를 근심하고 이 사설(邪說)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1866년(고종3)에 미국의 배 셔먼호가 침범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경주진 소모장(慶州鎭召募將)이 되어 의병을 모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정헌문집(定軒文集)이 있다.

87) 독서당(讀書堂):고운이 글을 읽었다고 하는 독서당은 여기에서 말한 경주 낭산(狼山)에 있는 것 이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도 있다.

88)황학(黃鶴):옛날 선인(仙人)인 자안(子安)이 황학을 타고 내려온 곳에 황학루(黃鶴樓)라는 누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이를 소재로 읊은 당(唐)나라 최호(崔顥)의 시 등황학루(登黃鶴樓)에 “황학은 한 번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년토록 부질없이 떠 있도다.[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라는 구절이 나온다.

89)금심(琴心):가야금 연주를 통해서 애모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을 금심으로 유혹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90)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문(記文):한국문집총간 98집에 수록된 기언(記言) 권28하 월영대기(月影臺記)를 말하는데, 현재 판본의 월영대기에는 이 글의 끝부분에 나오는 감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은 없다.

91)닭을……잡는다: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한다는 뜻이다. 저잣거리에서 이인(異人)이 고경(古鏡)을 팔고 있기에 당(唐)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구입해서 보니 그 거울에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는다.[先操雞後搏鴨]”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은 먼저 계림을 장악한 뒤에 영토를 압록강까지 넓힌다는 뜻으로, 고려의 왕건이 신라를 멸하고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사략(朝鮮史略) 권4와 어정전당시(御定全唐詩) 권875 고려경문(高麗鏡文)에 이 내용이 실려 있다.

92)단속사(斷俗寺)……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진주목(晉州牧) 불우(佛宇) 단속사(斷俗寺)에 “신라 병부 영(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승려 신행(神行)의 비명(碑銘)이 있다.”라고 하였고, 오대사(五臺寺) 조에 “수정사(水精寺)라고도 한다.”라고 하고, 권적의 기문(記文)을 실었다. 권적은 고려 말의 문신(文臣)인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의 아들로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고 두 차례나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길창군에 봉해졌다. 원화(元和)는 당 헌종(唐憲宗)의 연호로, 806년에서 820년까지이다. 광계 3년은 진성여왕(眞聖女王) 1년(887)에 해당한다.

93)용면(龍眠):송대(宋代)의 저명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별호(別號)인 용면거사(龍眠居士)의 준말이다.

94)점필의 풍류: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고운의 유적을 찾아와서 시를 읊고 노닐었던 것을 말한다.

95)이……최고이니: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남만(南蠻)에 와서 죽을 뻔했어도 나는 원망하지 않아, 이 유람 너무도 좋아 내 평생 최고였으니까.[九死南荒吾不恨 茲游奇絶冠平生]”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43 六月二十日夜渡海

96)애장사(哀莊寺):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에 창건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를 가리킨다.

97)포사(鮑謝):남조 송(宋)의 시인인 포조(鮑照)와 사영운(謝靈運)을 병칭한 말이다.

98) 신유한(申維翰)이……지었다:신유한(1681∼1752)은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이며, 고령(高靈) 출신이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시(詩)와 사(詞)에 능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한국문집총간 200집에 수록된 청천집(靑泉集) 권2에는 경운재게(景雲齋偈), 경운재가(景雲齋歌), 제경운재(題景雲齋) 등의 시가 실려 있다.

99) 단전요의(檀典要義):김용기(金容起)에 의해 일제 시대인 1925년에 출간된 책으로, 전체가 14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대동사강(大東史綱)등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100)태백산(太白山)에……해독하였다:이른바 천부경(天符經) 81자인데,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서 이 경문의 유래나 구두를 찍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학계에 정설이 없다. 여기에서도 굳이 번역을 시도하지 않았다. 태백산은 묘향산(妙香山)을 가리킨다.

101) 동사보유(東史補遺):1630년(인조8) 전후에 조정(趙挺, 1551〜1629)이 지은 역사책으로, 4권 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단군 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102) 서악지(西岳誌):정극후(鄭克後, 1577∼1658)가 편찬한 책으로,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西岳洞)에 있는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대해 적은 책이다. 1916년에 재간하였다. 정극후는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효익(孝翼), 호는 쌍봉(雙峯)이며, 경주 출신이다.

103)나약한……것입니다:참고로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맹자가 “백이(伯夷)의 풍도를 듣고 나면, 완악한 자들도 행동을 방정하게 하고 나약한 자들도 뜻을 세우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라는 말이 나온다.

104) 오산(鼇山)이……실어:오산은 경주에 있는 금오산(金鼇山)을 가리키고, 문수(蚊水) 역시 경주에 있는 문천(蚊川)을 가리킨다.

105)노래자(老萊子)의 뜰:어버이가 계신 고향 집이라는 뜻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은사(隱士)인 노래자가 나이가 70인데도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목적으로 색동옷을 입고서 춤을 추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初學記 卷17 註

106)양양히 좌우에 계시면서:중용장구(中庸章句) 제16장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양양히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는 말이 나온다.

107)장성(將聖):공자(孔子)를 가리킨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우리 선생님은 실로 하늘이 이 세상에 내려 성인이 되게끔 하신 분이다.[固天縱之將聖]”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子罕

108)사문(斯文)이……않았음이라:논어 자장(子張)에 “문왕과 무왕의 도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아 사람들에게 남아 있으므로, 현자는 큰 것을 알고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작은 것을 알고 있다.[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라는 말이 있다.

109)봉황이……태산(泰山):고운과 같은 큰 인물이 몸을 굽혀서 태인과 같은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왔다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38쪽 주83 참조. 태산(泰山)은 태인(泰仁)의 옛 이름이다. 무성서원은 태인에 있다.

110) 학사당(學士堂):합천 가야산(伽倻山)의 홍류동(紅流洞)에 있는 당이다.

111) 계림사(桂林祠):대구(大邱)에 있는 최치원의 영당(影堂)으로, 1755년(영조31)에 건립하였으며, 이후 일제 시대 때 이건(移建)하였다.

112) 이원조(李源祚):1792~1871.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철종 때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냈으며, 이후 공조 판서를 지냈다. 저서로는 응와문집(凝窩文集)이 있다.

113)정공(鄭公)의 향리(鄕里)를 세우고:후한(後漢)의 경학가(經學家)인 정현(鄭玄)이 가향(家鄕)인 북해(北海) 고밀현(高密縣)으로 돌아오자, 북해상(北海相)인 공융(孔融)이 그를 존경한 나머지 고밀현에 명령하여 특별히 ‘정공향(鄭公鄕)’을 설치하도록 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114)안락(顔樂)의……것:소식(蘇軾)의 시 안락정(顔樂亭) 서문에 “안자가 옛날 살던 이른바 누항이라는 곳에 우물이 있다. 그 우물물을 마시던 안씨는 벌써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지 않았으나, 교서 태수 공군 종한이 처음 그 땅을 얻어 그 우물을 준설한 뒤에 그 위에다 정자를 짓고는 ‘안락정’이라고 명명하였다.[顔子之故居 所謂陋巷者 有井存焉 而不在顔氏久矣 膠西太守孔君宗翰 始得其地 浚治其井 作亭於其上 命之曰顔樂]”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5

115) 황경원(黃景源):1709~1787.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유현(儒賢)으로서 대사헌과 각 조(曹)의 판서를 지냈다. 삼례(三禮)와 고문(古文)에 밝고 서도에도 능하였다. 남명서(南明書)를 편찬하였으며, 또 조선 사람으로 중국 조정에 절의(節義)를 지킨 사람을 들어 명배신전(明陪臣傳)을 지었다. 문집인 강한집(江漢集)이 있다.

116)좌복야(左僕射)……멸망하였다:당(唐)의 마지막 황제인 소선제(昭宣帝) 천우(天祐) 2년(905)에 재상 유찬(柳瓚)이 주전충(朱全忠)의 뜻에 영합하여 대신(大臣)인 배추(裴樞) 등을 모함해서 활주(滑州) 백마역(白馬驛)에서 죽일 적에, 과거에 누차 급제하지 못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이진(李振)이 주전충의 좌리(佐吏)로 있다가 “이 자들은 스스로 청류라고 말을 하니 황하에 던져 넣어서 영원히 탁류가 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此輩自謂淸流 宜投於黃河 永爲濁流]”라고 하자, 주전충이 웃으면서 허락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舊五代史 卷18 梁書 李振列傳 고운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다.

117)백이(伯夷)와……있다:이 내용이 논어 계씨(季氏)에 나온다.

118) 조지겸(趙持謙):1639∼1685.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광보(光甫), 호는 우재(迂齋)이며, 광주(廣州) 출신이다. 소론의 거두 중 일인이었다. 저서로 우재집(迂齋集)이 있고, 편서로 송곡연보(松谷年譜)가 있다.

119)일소(逸少)의 고사: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120) 풍악(楓岳) 아래 고을:강원도 고성(高城)을 가리킨다. 조지겸은 1681년(숙종7)에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풍악은 금강산(金剛山)의 별칭이다.

121) 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12세 때를 말한다. 별은 세성(歲星), 즉 목성(木星)으로, 옛사람들은 세성이 12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돈다고 여겼다.

122)소금 장수인 노적(老賊):황소(黃巢)를 가리킨다. 그의 집안이 대대로 소금을 파는 일에 종사해서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舊唐書 卷200下 黃巢列傳

123)매자진(梅子眞)처럼……하면:고운이 외방에 나가 고을 수령이 된 것을 말한다. 자진(子眞)은 한(漢)나라 매복(梅福)의 자이고, 동묵(銅墨)은 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를 말한다. 매복이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는 성의 동문(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떠난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漢書 卷67 梅福列傳

124)연문(羨門):고대 선인이었던 연문자고(羨門子高)를 가리킨다. 진 시황(秦始皇)이 일찍이 동해(東海) 가를 유람하면서 연문자고 등의 선인을 찾았다고 한다.

125)홍류(紅流) 한 절구(絶句):가야산(伽倻山) 홍류동(紅流洞)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을 읊은 절구에 “미친 듯 바위에 부딪치며 산을 보고 포효하니, 지척 간의 사람의 말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저어해서,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감싸게 하였다네.[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라는 말이 나온다. 고운집 권1에 가야산 독서당에 제하다[題伽倻山讀書堂]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126)난정(蘭亭)의……것이다:73쪽 주119 참조.

127) 청학동(靑鶴洞)의 비명(碑銘):이 비명의 작자에 대해서 대본에는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편찬자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 비명은 정두경(鄭斗卿)의 문집인 중간본 동명집(東溟集) 권10에 최학사고운비서(崔學士孤雲碑序)라는 제목으로 전재(全載)되어 있는바, 바로 정두경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정두경의 호가 동명(東溟)이므로, 편찬자가 ‘정동명(鄭東溟)’을 ‘정홍명(鄭弘溟)’으로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다. 고운집동명집에 나오는 글을 서로 비교해 보면 글자의 출입이 아주 많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동명이 뒤에 비석에 글을 새길 적에 글을 수정하거나 글자 수를 증감한 것인 듯하다. 또한 대본에는 중간 중간에 빠진 부분이 있어 ‘缺’로 처리되어 있다. 번역을 하면서 글자의 출입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교감하지 않고, 단지 ‘缺’로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동명집에 나오는 글에서 보충하여 번역하되, (  )로 묶어 구분해 주었다.

128)단목(檀木)의……되었고:단목은 신단수(神檀樹), 진인(眞人)은 단군(檀君), 태백산(太白山)은 묘향산(妙香山)을 가리킨다.

129)동명(東明)의……되었다:조천석(朝天石)은 평양(平壤)의 부벽루(浮碧樓) 곁에 있던 바위 이름이다. 옛날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부벽루 아래 기린굴(麒麟窟)에서 기린마(麒麟馬)를 길러 이 말을 타고 기린굴에서 조천석으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130)좌임(左衽):오른쪽 옷섶을 왼쪽 옷섶 위로 여미는 오랑캐의 의복 제도를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孔子)가 관중(管仲)의 공을 찬양하면서 “만약에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머리를 풀고 좌임하는 오랑캐의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131)사문(斯文)이……않겠는가:고운이 유가(儒家)의 도통을 계승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광(匡) 땅에서 횡포를 부렸던 양호(陽虎)로 오인받아 그곳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위태로웠을 때 “문왕이 돌아가신 지금에는 사문이 나에게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늘이 사문을 망칠 작정이라면 나와 같은 자가 사문에 참여하지 못했겠지만, 하늘이 사문을 망치지 않으려 한다면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고 강한 자부심을 표명한 대목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132)육가(陸家)의 연화(蓮花):세상에서 보기 드문 명산(名産)이라는 뜻으로, 특출한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남조 양(梁) 임방(任昉)의 술이기(述異記) 권상에 명산품을 열거하면서, 왕씨(王氏)의 귤원(橘園)과 육가의 백련(白蓮)과 고가(顧家)의 반죽(斑竹)을 거론하였다.

133)제(齊)와 양(梁)의 시체(詩體):남조(南朝)의 제와 양의 시대에는 시를 지을 때에 대부분 음률(音律)과 대우(對偶)를 중시하여 사조(詞藻)가 화려한 대신 내용은 결여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를 문학사상 제량체(齊梁體)라고 부른다.

134)균천악(鈞天樂):균천광악(鈞天廣樂)의 준말로, 중국의 궁중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균천은 천제(天帝)의 거소인데, 춘추 시대에 조간자(趙簡子)가 5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균천에 올라가서 광악을 듣고 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43 趙世家

135)상호봉시(桑弧蓬矢)의 뜻:천지 사방을 경륜할 큰 뜻을 말한다. 옛날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상목(桑木)으로 활을 만들어 문 왼쪽에 걸고 봉초(蓬草)로 화살을 만들어서 사방에 쏘는 시늉을 하며 장차 이처럼 웅비할 것을 기대했던 풍습이 있었다. 禮記 內則

136)창해에……좇아:고운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 당나라에 들어간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 사신은 장건(張騫)을 가리킨다. 그가 한 무제(漢武帝)의 명을 받고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나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았는데, 이때 뗏목을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나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天中記 卷2 중국이 천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뗏목을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137)기주(冀州)……것이로다:천리마처럼 뛰어난 인재가 아직도 조정에 선발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중국 사람들이 고운을 보고서 비로소 알았다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에 “백락이 기주(冀州) 북쪽의 들판을 한 번 지나가자 말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伯樂一過冀北之野 而馬群遂空]”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백락은 천리마를 잘 알아보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또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사회(士會)가 진(秦)나라에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할 적에, 진(秦)나라 요조(繞朝)가 채찍을 증정하면서 사회의 진짜 의도를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그대는 진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지 말라. 나의 계책이 마침 채용되지 않았을 뿐이다.[子無謂秦無人 吾謀適不用也]”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文公13年 여기에서 진나라는 변방의 신라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38)계찰(季札)이……것:춘추 시대 오(吳)나라 공자 계찰(季札)이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周)나라의 음악을 듣고 열국(列國)의 치란과 흥망을 아는 등 정확하게 비평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139)상여(相如)가……것: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촉군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에 성도의 성(城) 북쪽에 있는 승선교(昇仙橋)에 이르러 그 다리 기둥에 “고거사마를 타지 않고서는 다시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不乘駟馬高車 不復過此橋]”라고 써서 기필코 공명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는데, 뒤에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을 한 무제(漢武帝)에게 인정받고 출세한 고사가 진(晉)나라 상거(常璩)의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전한다.

140)석우(石友)는……증정하였으며:고운과 동년(同年)인 중국인 고운(顧雲)이 고운이 귀국할 때 송별시를 지어 준 것을 말하는데, 고운집 고운 선생 사적(孤雲先生事蹟)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그 시가 소개되어 나온다. 석우는 금석(金石)처럼 정의(情誼)가 굳건한 벗이라는 뜻이다.

141)김승(金丞)은……승진시켰다:신라 헌강왕(憲康王)이 고운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한 것을 가리킨다. 김승은 김씨(金氏)인 승(丞)이라는 뜻이다. 승은 관직 이름으로, 고대에 천자를 보필하는 4인 중의 하나였다.

142)돌아보면……읊조렸는데:선진 문명의 중국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고국이 너무도 그리워서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가 중선(仲宣)인 위(魏)나라 왕찬(王粲)이 후한(後漢) 말 동란 때에 형주(荊州)의 누대에 올라 고향 생각을 하며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는데, 그중에 “아름답긴 하다마는 우리의 땅이 아님이여, 어찌 잠깐이라도 머무를 수 있으리오.[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라고 탄식한 구절이 나온다. 文選 卷11 또 전국 시대 월(越)나라 사람 장석(莊舃)이 초(楚)나라에 와서 벼슬하며 집규(執圭)라는 직책의 고관이 되었다가 병에 걸렸는데, 초왕(楚王)이 “누구를 막론하고 병이 들었을 때에는 고향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한번 시험해 보라.”라는 혹자의 말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장석이 무의식적으로 월나라 노랫가락을 읊조리고 있더라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70 張儀列傳

143) 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동방삭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청(曼淸)이다. 해학과 직언을 잘하였고 선술(仙術)을 좋아하였는데, 하늘나라의 반도(蟠桃) 3개를 훔쳐 먹어 3천 년을 살았다고 한다. 성정은 별의 영기(靈氣)를 말한다.

144) 노담(老聃)의 자기(紫氣):노담은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노자가 일찍이 주(周)나라에서 사관(史官)으로 있다가 주나라가 쇠해진 것을 보고는 주나라를 떠나갔는데, 노자가 서쪽으로 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관의 영(令)으로 있던 윤희(尹喜)가 이에 앞서 함곡관 위에 자색 기운이 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얼마 뒤에 노자가 동쪽에서 푸른 소를 타고 왔다고 한다. 列仙傳

145) 신선……옮겨왔다:대본에는 ‘缺’로 되어 있는데, 정두경의 동명집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이 부분의 원문은 ‘仙骨出塵 方朔之星精下降 錦衣還國 老聃之紫氣東來’이다.

146)무협 고봉(巫峽高峯)의……돌아와서:고운이 12세에 중국에 들어가서 28세에 금의환향했다는 말이다. 32쪽 주68 참조.

147)계림(雞林)에는……탄식하였다:신라는 쇠망하고 고려는 흥성한다고 고운이 비유했다는 것이다. 4쪽 주9 참조.

148)뜬구름……흘렸나니:고운이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와 시무(時務) 10여 책을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올렸으나 허사로 돌아간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비통한 심정으로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을 올리면서 “삼가 일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두 가지요, 장탄식할 만한 것이 여섯 가지이다.[竊惟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고 전제한 뒤에 하나하나 설명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48 賈誼傳

149)이……알아주었겠는가:당시 세상에 지기(知己)가 없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친구인 종자기(鍾子期)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다.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였는데, 종자기가 죽고 나서는 백아가 더 이상 세상에 지음(知音)이 없다고 탄식하며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린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呂氏春秋 本味

150)홍진이……돌아갔고:혼란한 세상에서 벼슬하는 일을 그만두고 산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서 유유자적했다는 말이다. 74쪽 주123 참조.

151)자지(紫芝):자줏빛의 영지(靈芝)를 가리킨다. 진(秦)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상산(商山)에 은거한 네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등 사호(四皓)가 자지를 캐먹고 배고픔을 달래면서 자지가(紫芝歌)를 지어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152)화서(華胥):황제(黃帝)가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이상 국가의 이름이다. 황제가 이 나라를 여행하면서 무위자연의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는 꿈을 꾸고는, 여기에서 계발되어 천하에 크게 덕화를 펼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列子 黃帝

153)내가……분이로다:대본은 ‘吾喪我’이다. 장자 제물론 첫머리에 나오는 말인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고 일체 물아(物我)의 경계를 떠난 자유로운 경지를 뜻하는 표현이다.

154) 현빈(玄牝):만물을 생성하고 기르는 본원(本源)을 뜻하는 말로, 노자(老子) 제6장에 이르기를, “곡신은 죽지 않는데, 이것을 일러 현빈이라고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 하였다.

155) 참동(參同)의 계(契):한나라 때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책인 참동계로, 주역의 효상(爻象)을 빌려 금(金)을 단련하는 법을 논하였다.

156) 곰처럼……폈으며:옛날에 행하던 일종의 양생법(養生法)으로, 곰과 같이 나뭇가지를 기어오르고 새처럼 다리를 쭉 뻗는 것을 말한다. 장자 각의(刻意)에 이르기를,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여 심호흡을 하며,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새가 다리를 쭉 뻗듯 체조를 하는 것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157) 경화(瓊華):전설 속에 나오는 경수(瓊樹)의 꽃으로, 옥가루와 비슷하다고 한다.

158) 팔구(八區):팔방(八方)과 같은 말로, 천하를 가리킨다.

159) 구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신선이 되어 떠나갔다는 뜻이다. 자진은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이다. 도가(道家)의 고사에 “주나라 영왕의 태자 진이 칠월 칠석날에 흰 학을 타고 피리를 불며 구산(緱山)의 마루에 머물러 있다가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하였다. 後漢書 卷82 方術列傳上 王喬

160) 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成子)를 방문하였다:공동산(崆峒山)은 계주(薊州)에 있는 산이고, 광성자는 중국 상고 시대의 선인(仙人)이다. 광성자가 공동산의 석실(石室)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황제 헌원씨(皇帝軒轅氏)가 그를 찾아가 함께 노닐면서 수신법(修身法)을 물었다고 한다.

161) 현빈(玄牝)에……없었다:대본에는 ‘缺’로 되어 있는데, 동명집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 부분의 원문은 ‘玄牝 自得衆妙之門 藥鍊金丹 更續參同之契 養形神於物外 熊經鳥伸 脫軀殼於人間 蟬蛻龍變 不食五穀 吸風露而嘰瓊華 揮斥八區 乘雲氣而騎日月 揖子晉於緱嶺 訪廣成於崆峒 至人無名 混萬象而同體 神氣不變 曠千載而猶存 出入不知端倪 變化難窮終始’이다.

162)진(秦)나라의……보이고:진 시황(秦始皇)이 네모진 거울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거울에 비춰 보면 몸속의 오장이 다 보임은 물론이요, 마음속의 선악까지도 모두 밖으로 드러났다는 전설이 진(晉)나라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 권3에 나온다.

163)신우(神禹)의……것:하우(夏禹)가 치산치수를 하며 범람하는 홍수를 막으려고 8년 동안 분주히 돌아다닌 끝에 중국을 구주(九州)로 나누고 안정시킨 고사를 말한다.

164)70명의 고제(高弟):공자(孔子)의 뛰어난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시서예악을 교재로 가르쳤는데, 제자가 대개 3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서 육예를 몸으로 통달한 사람은 72인이었다.[孔子以詩書禮樂敎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라는 말이 나온다.

165)나는……떠올리고:장자(莊子) 자신이 물고기가 아닌데도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던 것처럼, 정두경(鄭斗卿) 역시 고운은 아니지만 고운의 심회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다. 장자가 친구인 혜시(惠施)와 함께 호량(濠梁)을 거닐다가 피라미가 한가롭게 노니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다.[是魚之樂也]”라고 하자, 혜시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子非魚 安知魚之樂]”라고 반박하면서 벌어지는 호량의 토론이 장자 추수(秋水) 맨 마지막에 나온다.

166)영천(穎川)의……꿈꾼다:고운이 세상의 영화 따위는 돌아보지 않고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기 뜻에 맞게 생활한 것을 가리킨다. 요(堯) 임금 때의 은사(隱士)인 허유(許由)가 일찍이 기산(箕山) 아래 영수(穎水) 북쪽에 은거하였는데, 요 임금이 제위를 맡기려 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귀를 씻었고, 또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자 어떤 사람이 표주박 하나를 주니 그것을 나무에 걸어 두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그 표주박까지도 번거롭다고 하며 내버렸다는 고사가 전한다.

167) 회해(淮海)……내렸고:고운이 신라로 돌아올 적에 중국 황제가 칙서를 주어 보낸 것을 말한다. 회해는 회수(淮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지역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일대의 지역을 가리킨다. 고운이 신라로 돌아오기 전에 이곳에서 종사(從事)하였는데, 당시 직함은 ‘회남입신라 겸 송국신등사(淮南入新羅兼送國信等使)인 전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前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 사비어대(賜緋魚袋)’였다.

168) 참산(巉山)의……고하였다: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올 적에 참산의 신에게 제사 지낸 것을 말한다. 참산은 안휘성(安徽省) 사현(泗縣)의 동남쪽 지역의 오하현(五河縣)과의 경계 지역에 있는 산인 참석산(巉石山)을 가리키는 듯하다. 한국문집총간 1집에 수록된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권20에 제참산신문(祭巉山神文)이란 제문과 장귀해동참산춘망(將歸海東巉山春望)이란 시가 있는데, 이 작품들은 고운이 우리나라로 돌아올 적에 지은 것이다.

169)불명(佛銘)을……하였다:이는 고운을 유자(儒者)로 인식시키려는 후손의 강박 관념이 빚어낸 오류로서, 결코 고운의 본의가 아닐 것이다.

170)경학(經學):경학대장(經學隊仗)이라는 책을 가리키는데, 이는 고운의 저술이 아니다. 7쪽 주16 참조.

171) 규성(奎星):문성(文星)으로, 문장(文章)과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한다.

172) 헌안왕(憲安王) 1년 정축:정축년(857)은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으로 하면 헌안왕 1년이 되고 훙년칭원법(薨年稱元法)으로 하면 헌안왕 2년이 된다.

173) 천령(天嶺)과 의창(義昌):천령은 함양(咸陽)의 고호이고, 의창은 창원(昌原)의 고호이다.

174) 도주(道州)의 일곡(日谷):도주는 청도(淸道)의 고호이고, 일곡은 청도군 각남면에 있는 지명으로, 이곳에 고운의 영정을 모신 계동사(啓東祠)가 있다. 이곳에 있는 영정은 본디 해인사에 있던 것인데, 구한말에 왜적의 약탈이 두려워 최씨 문중에서 해인사 주지와 교섭하여 이곳으로 이봉(移奉)한 것이라고 한다.

1) 옥루(玉漏)에선……있는데:궁문(宮門)을 열 시간인 5경(更)이 아직 안 되었다는 말이다. 옥루는 물시계의 미칭(美稱)이다. 예전에 백관들이 새벽부터 집결하여 물시계 소리를 듣고 있다가 대궐 문이 열리는 시각이 되면 일제히 조정에 나아가서 조회에 참석하였는데, 그때까지 대기하는 장소를 대루원(待漏院) 혹은 대루청(待漏廳)이라고 하였다. 당 헌종(唐憲宗) 원화(元和) 2년(807)에 건복문(建福門) 밖에 백관의 대루원을 설치한 고사가 있다. 舊唐書 卷14 憲宗本紀

2) 은하(銀河)는……돌았다:은하수가 하늘에서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운한(雲漢)에 “밝은 저 은하수여, 하늘에서 환히 빛나며 돌고 있네.[倬彼雲漢 昭回于天]”라는 구절이 있는데, 조씨(曹氏)의 주에 “은하수는 동쪽에서 시작하여 미수(尾宿)와 기수(箕宿) 사이를 경유하는데 이를 한진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꿈틀꿈틀 서쪽을 향하다가 남쪽으로 칠성 남쪽에 가서 사라지니, 이것이 바로 은하가 회전하는 도수이다.[天漢起于東方 經尾箕之間 是爲漢津 委蛇向西 南行至七星南而沒 此其回之度也]”라고 하였다.

3) 화정(華亭)에서는……것이요:화정은 지금의 상해시(上海市) 송강현(松江縣) 서쪽에 있는데, 학의 산지로 유명하다. 진(晉)나라 육기(陸機)가 벼슬길에 들어서기 전에 동생 육운(陸雲)과 함께 이곳에서 10여 년을 살았는데, 나중에 참소를 받고 처형당하기 직전에 “화정의 학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만 그 일이 또 어떻게 가능하겠는가.[欲聞華亭鶴唳 可復得乎]”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尤悔

4) 파협(巴峽)에서는……것이다:파협은 촉(蜀) 땅 파군(巴郡)의 삼협(三峽)을 가리킨다. 이곳의 원숭이 울음소리는 특히 애절해서 듣는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5) 유영(柳營)의……것이요:병영 안의 야경 활동을 끝냈다는 말이다. 유영은 서한(西漢)의 장군 주아부(周亞夫)의 군영 이름인 세류영(細柳營)의 준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시찰을 왔을 때에도 군사들이 장군의 명령만 따르면서 황제를 제지한 고사로 유명한데, 이후 군기가 엄한 장군의 군영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史記 卷57 絳侯周勃世家 조두(刁斗)는 낮에는 취사 용구로 쓰다가 밤이 되면 순라(巡邏)를 돌면서 치는 군대의 기물(器物)로, 구리로 되어 있다.

6) 계전(桂殿)의……것이다:관원들이 의관을 정제하며 조회 준비를 한다는 말이다. 계전은 계수(桂樹), 즉 향나무로 만든 궁전이라는 뜻이고, 잠홀은 관잠(冠簪)과 수판(手板)으로, 관원의 의관을 가리킨다.

7) 금옥(金屋)……남았으리:참고로 양귀비(楊貴妃)를 노래한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금옥 안에서 화장하고 애교 있게 밤에 모셨으며, 옥루 위의 연회가 끝나면 취하여 춘풍과 동화됐네.[金屋粧成嬌侍夜 玉樓宴罷醉和春]”라는 구절이 나온다. 白樂天詩集 卷12

8)珠:대본에는 ‘利’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아 동문선(東文選) 권4 우흥(寓興)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9)어찌하여……들어가는지:어떤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서 귀한 구슬을 얻자, 그의 부친이 “천금의 가치가 나가는 구슬은 반드시 깊은 못 속에 숨어 사는 흑룡의 턱 밑에나 있는 법이다. 네가 그 구슬을 손에 넣은 것은 필시 그 용이 잠든 때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흑룡이 깨어났더라면 너는 가루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夫千金之珠 必在九重之淵 而驪龍頷下 子能得珠者 必遭其睡也 使驪龍而寤 子尙奚微之有哉]”라고 하면서 경계시킨 ‘탐주(探珠)’의 고사가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나오는데, 보통 임금의 총애를 얻어 고위 관직에 오르는 사람의 위태로운 상황이나 벼슬길의 험난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0) 心垢水:대본에는 ‘心垢’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아 동문선 권4 우흥(寓興)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1)담박한……원:참고로 장자 산목(山木)에 “군자의 우정은 담박하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교제는 달콤하기가 감주와 같다.[君子之交淡若水 小人之交甘若醴]”라는 말이 나온다.

12)매우(梅雨):매실이 누렇게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초여름부터 시작되는 장맛비를 가리킨다. 이 기간 동안에는 공기가 음습하여 곰팡이가 쉽게 슬기 때문에 매우(霉雨)라고 부르기도 한다.

13)맥풍(麥風):보리 익는 계절, 즉 맥추(麥秋)에 불어오는 바람을 말한다. 맥신(麥信)이라고도 한다.

14) 가을밤……속에:이 시에 대해 허균(許筠)은 “고운(孤雲) 최 학사(崔學士)의 시는 당말(唐末)에 있어 역시 정곡(鄭谷)이나 한악(韓偓)의 유를 벗어나지 못하여 대개는 경조하고 부박하여 후한 맛이 없다. 다만 이 절구 한 수는 아주 뛰어나다.” 하였다. 惺所覆瓿稿 卷25 惺叟詩話, 韓國文集叢刊 74輯

15)가을바람……달리노라:참고로 다른 판본(板本)에는 ‘惟’가 ‘唯’로, ‘擧世’가 ‘世路’로, ‘萬古心’이 ‘萬里心’으로 되어 있다.

16) 요주(饒州):지금의 강서성 파양현(鄱陽縣)에 있던 지명이다.

17) 산양(山陽):산양이란 지명이 여러 곳에 있는데, 여기서는 고운의 활동 범위로 볼 때 아마도 지금의 강소성 회안현(淮安縣) 남쪽에 있는 지명을 가리키는 듯하다.

18) 초산(楚山):여기서는 강남 지방의 산을 범칭한 것인 듯하다.

19) 서경(西京)……시:김준(金峻)에 대해서는 일생이 미상인데,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에 이르기를, “당나라 소종 경복 2년(893)에 납정절사(納旌節使)인 병부 시랑(兵部侍郞)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서 죽었으므로, 곧바로 추성군 태수(橻城郡太守)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하였는데, 이 시에 나오는 김준과 동일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20)소진되려……향기: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며 떨쳤던 예전의 그 화려한 명성도 이제 와서는 점차 시들해져 간다는 말이다. 계수(桂樹)는 과거 급제를 비유하는 시어(詩語)이다.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장원을 한 극선(郤詵)에게 진 무제(晉武帝)가 소감을 묻자, 극선이 “계수나무 숲의 가지 하나를 꺾고, 곤륜산(崑崙山)의 옥돌 한 조각을 쥐었다.”라고 답변하였는데, 월궁(月宮)에 계수나무가 있다는 전설을 여기에 덧붙여서 과거 급제를 ‘월궁절계(月宮折桂)’로 비유하기도 한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21)인사(仁祠):불교 사원의 별칭이다. 범어(梵語) Śākya의 음역인 석가(釋迦)의 뜻이 능인(能仁)인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22)난야(蘭若):범어(梵語) araṇya의 음역인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출가자가 수행하는 조용한 곳, 즉 불교 사원을 가리킨다.

23) 황산강(黃山江) 임경대(臨鏡臺):황산강은 양산(梁山)에서 서쪽으로 18리 되는 곳에 있는 낙동강(洛東江)을 말하는데, 신라 때에는 사대독(四大瀆)의 하나였다. 임경대는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하는데, 황산역의 서쪽 절벽 위에 있다.

24)연무……넘실넘실:참고로 한국문집총간 29집에 수록된 퇴계집(退溪集) 권3 천사에 도착하여 이대성을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到川沙待李大成未至]라는 제목의 칠언절구 기구(起句)에 똑같은 표현이 보인다.

25)가야산(伽倻山) 독서당(讀書堂)에 제하다:이 시는 농산정(籠山亭) 혹은 가야산 홍류동(伽倻山紅流洞)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26)안씨(顔氏)의……얻었네:공자(孔子)의 제자 안회(顔回)처럼 안빈낙도의 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범인의 처지이지만, 어렸을 때의 맹자(孟子)처럼 훌륭한 이웃과 함께 사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가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골목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한결같이 변치 않으니 안회는 참으로 어질다.[一簞食一瓢飮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칭찬한 말이 나온다. 맹가의 이웃은, 마지막에 학궁(學宮)의 옆으로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27)정려(精廬):정사(精舍)와 같은 말로, 여기서는 불교 사찰을 가리킨다.

28)진여(眞如):범어(梵語) tathatā를 의역한 불교 용어로, 진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眞實不虛妄]는 뜻이고 여(如)는 체성(體性)이 변하지 않는다[不變其性]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한다. 일반적으로 만유(萬有)의 근원이요 본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각 종파에 따라 그 함의가 서로 다르다. 이 밖에 여여(如如), 여실(如實), 법계(法界), 법성(法性), 실상(實相), 여래장(如來藏), 법신(法身), 불성(佛性)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29) 운봉사(雲峰寺):경북 문경(聞慶)의 운달산(雲達山)에 있는 김용사(金龍寺)를 가리키는 듯하다. 김용사는 신라 진평왕 10년(588) 운달 조사가 운봉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으며, 조선 시대 때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30) 당성(唐城)에……주다:이 시의 제목이 동문선 권9에는 당성에 나그네로 놀러 갔더니, 선왕 때의 악관이 있었다. 장차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할 적에 밤에 두어 곡을 불면서 선왕의 은혜를 그리워하며 슬피 울기에, 시를 지어 주다.[旅遊唐城 有先王樂官 將西歸 夜吹數曲 戀恩悲泣 以詩贈之]로 되어 있다. 당성은 지금의 남양만(南陽灣) 일대의 지역으로, 옛날에 이곳에  당은포(唐恩浦)가 있었는데, 통일 신라 시대 때 당나라로 가는 사절들이 대부분 이곳을 경유하여 출입하였다. 고운이 893년(진성여왕7)에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어 중국에 들어간 일이 있는데, 이때 당성에 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즉 여기에서 말하는 선왕은 진성왕의 전왕인 정강왕(定康王)은 왕위에 있은 지 1년도 채 못 되었으니, 아마도 헌강왕(憲康王)을 가리키는 듯하다. 악관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31)반염(攀髥):수염을 붙잡는다는 뜻으로, 임금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신하와 후궁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붙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28 封禪書, 卷12 孝武本紀

32)윤주(潤州)……올라:참고로 장호(張祜)의 가을 밤에 윤주 자화사 상방에 올라[秋夜登潤州慈和寺上方]라는 칠언율시가 어정전당시(御定全唐詩) 권511에 나온다. 장호는 당나라 두목(杜牧)과 동시대의 시인이다. 윤주는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진강시(鎭江市)이다. 상방(上方)은 주지가 거하는 방장(方丈)이라는 말과 같다.

33)서리에……봄빛일세:나라가 망해서 임금이 후궁과 노닐며 노래를 지어 부를 수도 없게 되었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서 봄풀이 푸르게 돋아났다는 말이다. 남조 진(陳)의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가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매일 비빈(妃嬪) 등과 함께 노닐면서 새로 지은 시에 곡을 부쳐 노래를 부르게 하다가 끝내 나라를 망하게 한 고사가 있는데, 전해 오는 곡 가운데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노래가 있다. 줄여서 옥수가(玉樹歌)라고 부르는데, 보통 망국의 노래를 뜻한다. 陳書 卷7 皇后列傳 금릉(金陵)은 곧 남경(南京)으로, 삼국 시대 오(吳)를 비롯해서 동진(東晉)과 송(宋)․제(齊)․양(梁)․진(陳) 등 육조(六朝)가 이곳에 도읍했는데, 중당(中唐)과 만당(晩唐) 때에는 윤주(潤州)를 금릉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34)사가(謝家):금릉과 가까운 선성(宣城)의 태수를 지낸 남조 제(齊)의 저명한 시인 사조(謝脁)를 가리킨다. 당시에 그가 세운 누대는 사공루(謝公樓) 혹은 북루(北樓)로 지칭되며 많은 시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고취곡(鼓吹曲)입조곡(入朝曲) 중에 나오는 “강남의 멋지고 화려한 땅, 금릉은 바로 제왕의 고을이라오.[江南佳麗地 金陵帝王州]”라는 표현은 금릉을 찬미한 시구로 특히 유명하다.

35) 우이현(盱眙縣):강남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고을 이름이다.

36)내가……날아왔으니:고운이 제비처럼 봄에 이곳을 떠났다가 가을에 다시 찾아왔다는 말이다. 제비는 춘사일(春社日)에 강남(江南)을 떠났다가 추사일(秋社日)에 돌아온다고 한다. 춘분과 추분에서 가장 가까운 무일(戊日)을 각각 춘사일과 추사일이라고 한다.

37)혜강(嵇康)의……말고: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산도(山濤)가 요직인 선조랑(選曹郞)에 자신의 후임으로 친구인 혜강을 추천하자, 혜강이 그에게 절교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중에 “나는 성격이 또 게을러서 근육을 움직이는 일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얼굴은 보통 한 달에 보름 동안은 씻지 않고,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가렵지 않으면 머리도 감지 않는다. 또 소변이 마려워도 참고서 일어나지 않다가 방광이 꽉 차서 몸을 뒤틀 정도가 되어야 일어난다.[性復疎嬾 筋駑肉緩 頭面常一月十五日不洗 不大悶癢 不能沐也 每常小便 而忍不起 令胞中略轉 乃起耳]”라고 하고, 또 “나는 평소에 글을 주고받는 습관도 없고 또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관청에 나가면 업무가 많아서 서류가 책상 위에 가득할 텐데,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면 예교(禮敎)를 범하고 의리를 해칠 것이요, 내가 억지로 해 보려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素不便書 不喜作書 而人間多事 堆案盈机 不相酬答 則犯敎傷義 欲自勉强 則不能久]”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文選 卷43 與山巨源絶交書 거원(巨源)은 산도의 자이다.

38)어떡하나……해: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이 일단 바다에 이르면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한번 지나간 시절도 다시는 되돌릴 수가 없는 법인데, 계절의 변화가 시흥이 넘쳐 나는 봄 경치를 재촉하며 얼른 데려가려고 하니, 시인의 입장에서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39)생각하면……쓰다니:진(晉)나라 유령(劉伶)은 술을 너무도 좋아해서 주덕송(酒德頌)이라는 글을 짓기까지 하였는데, 언제나 술병을 차고 다니면서 종자(從者)에게 삽을 메고 자기 뒤를 따라오게 하며 자기가 죽으면 바로 묻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갈증이 심해서 아내에게 술을 달라고 청하자, 아내가 술을 버리고 그릇을 깨면서 울며 간하기를 “당신은 술을 너무 과하게 마십니다. 이는 섭생하는 도가 아니니, 반드시 끊어야 할 것입니다.[君酒太過 非攝生之道 必宜斷之]”라고 하니, 유령이 “좋은 말씀이오. 하지만 나는 스스로 금주할 수가 없으니, 귀신에게 축원하며 맹세를 해야겠소. 지금 당장 술과 고기를 차려 오시오.[善 吾不能自禁 惟當祝鬼神自誓耳 便可具酒肉]”라고 하였다. 이에 처가 그 말대로 따르니, 유령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하늘이 유령을 낸 것은 술로 이름을 내라는 뜻이니, 한꺼번에 한 섬의 술을 마시고 다섯 말로 해장을 하게 하실 것이요, 부녀자의 말은 부디 듣지 마시기를.[天生劉伶 以酒爲名 一飮一斛 五斗解酲 婦兒之言 愼不可聽]”이라고 하고는, 그 주육으로 다시 대취했다고 한다. 晉書 卷49 劉伶列傳

40) 고운(顧雲):당나라의 시인으로 최치원과 시를 주고받았던 인물이다. 자는 수상(垂象)이며, 또 사룡(士龍)이라고도 한다. 지주(池州) 사람이다. 두순학(杜荀鶴)이나 은문규(殷文圭)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구화산(九華山)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함통(咸通) 15년(874)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변(高駢)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사(從事)하였다. 필사탁(畢師鐸)의 난 이후에는 삽주(霅州)로 물러나 살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건녕(乾寧) 초에 졸하였다. 저서로는 봉책연화편고(鳳策聯華編稿)소정잡필(昭亭雜筆)이 있다.

41)동풍(東風)……버들가지로:꽃이 피고 지는 봄철 석 달 동안 헤어진 벗을 생각하는 마음이 유독 간절했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사람들이 헤어질 때에는 장안(長安) 동쪽 패교(覇橋)에 와서 버들가지를 꺾어 작별 선물로 주곤 하였으므로, 버들가지가 증별(贈別) 혹은 송별의 비유로 쓰이게 되었다. 三輔黃圖 卷6 橋

42)변방……서한이요:한 무제(漢武帝) 때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흉노의 선우(單于)가 그를 굴복시키려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북해(北海) 주변의 황량한 변방에 그를 안치하고 양을 치게 하였다. 그 뒤 소제(昭帝)가 흉노와 화친을 맺고서 소무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자, 흉노 측에서는 소무가 이미 죽었다고 속였는데, 이에 한나라 사신이 “우리 천자가 상림원에서 기러기를 쏘아 잡았는데, 기러기 발목에 묶인 편지에 ‘소무 등이 어느 늪 속에 있다.’라고 하였다.[天子射上林中 得雁 足有係帛書 言武等在某澤中]”라고 기지를 발휘하며 다그친 덕분에 소무가 19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는 안족전서(雁足傳書)의 고사가 있다. 漢書 卷54 蘇建傳 蘇武

43)지는……꿈이로다:옛날 장주(莊周)가 꿈속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면서 즐겁게 노닐다가 꿈을 깨고 보니 엄연히 인간인 장주더라는 호접몽(胡蝶夢)의 이야기가 장자 제물론(齊物論) 마지막에 나온다.

44)지금은……시절:늦은 봄날이라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육칠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기우제 드리는 곳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자, 공자가 감탄하며 허여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先進

45)백운향(白雲鄕):제향(帝鄕) 즉 경도(京都)를 가리키는 시어이다. 장자 천지(天地)의 “저 흰 구름을 올라타고 천제(天帝)의 거소에서 노닌다.[乘彼白雲 游于帝鄕]”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46)똑같은……있으리오:가도(賈島)와 장교(張喬)가 모두 고심하며 시를 짓는다는 점에서 시풍(詩風)이 같다고 세상에 전해지고 있지만, 고운이 볼 때 가도는 인품이나 처신 등의 측면에서 장교에 미치지 못하는 만큼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식(蘇軾)이 당나라 사람의 시풍을 논하면서 “맹교의 시는 한산(寒酸)하여 살풍경하고, 가도의 시는 살은 없이 뼈만 앙상하다.”라는 뜻으로 언급한 ‘교한도수(郊寒島瘦)’의 평이 유명한데, 장교의 시 역시 청아하다는 평과 함께 한 구절을 읊을 때마다 고심참담(苦心慘憺)하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낭선(浪仙)은 중당(中唐)의 시인 가도의 자이다. 그리고 송년(松年)은 장교의 자라고 원주(原註)에 나와 있다. 장교는 당 의종(唐懿宗) 함통(咸通) 연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는데,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고향인 지주(池州) 구화산(九華山)에 은거하면서 10년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학문에 전심하며 뜰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곡(鄭谷), 허당(許棠), 임도(任濤), 이창부(李昌符) 등과 함께 방림십철(芳林十哲)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시집 2권이 세상에 전하는데, 어정전당시(御定全唐詩) 권638과 권639에 그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唐摭言 卷10 唐才子傳 卷6

47)소아(騷雅):굴원(屈原)의 이소(離騷)시경소아(小雅)대아(大雅)를 합한 말로,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48)행장(行藏):용행사장(用行舍藏)의 준말로, 자신의 도를 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여 조정에 나아가기도 하고 은퇴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의 “써 주면 나의 도를 행하고 써 주지 않으면 숨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49)장빈(漳濱):몸져누웠다는 뜻의 시어(詩語)이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건안 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유정(劉楨)이 조조(曹操)의 아들인 조비(曹丕)와 절친하였는데, 그가 조비에게 빨리 찾아와 주기를 간청하면서 보낸 시의 내용 중에 “내가 고질병에 심하게 걸려서, 맑은 장수(漳水) 가에 몸져누워 있다.[余嬰沈痼疾 竄身淸漳濱]”라는 말이 문선(文選) 권23 증오관중랑장(贈五官中郞將) 4수 중 둘째 시의 첫 구절에 나온다.

50)돛……할까:남조 송(宋)의 좌위장군(左衛將軍) 종각(宗慤)이 소년 시절에 자신의 뜻을 토로하면서 “장풍을 타고서 만리의 파도를 쳐부수고 싶다.[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宋書 卷76 宗慤列傳 또 이백(李白)의 시에 “장풍을 타고 파도를 쳐부술 때가 언젠가 오면, 곧장 구름 돛 달고서 푸른 바다를 건너리라.[長風破浪會有時 直挂雲帆濟滄海]”라는 표현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2 行路難

51)뗏목을……나고:한(漢)나라 장건(張騫)이 무제(武帝)의 명을 받고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나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았는데, 이때 뗏목을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나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天中記 卷2

52)약……떠오르네:신선이 사는 동해(東海)의 봉래산(蓬萊山)에 장생불사약이 있다고 방사(方士) 서복(徐福)이 진 시황(秦始皇)을 속인 뒤에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가 소식이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에 도착했더라는 전설이 전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53) 여지도(輿地圖)에 제하다:이 시에 대해서 임하필기(林下筆記) 권33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에 “이규보(李奎報)는 백운소설(白雲小說)에서 ‘최치원은 당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올랐으니 파천황(破天荒)의 공이 있었다. 그러므로 동방 학자들은 모두 그를 유종(儒宗)으로 여긴다. 그의 이 시구에 대해서 그와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은 「이 시구는 바로 하나의 여지지(輿地誌)이다.」라고 말했다.’ 하였다.” 하였다.

54)성수해(星宿海):옛날에 황하(黃河)의 발원지라고 믿었던 곳의 이름이다. 중국 청해성(靑海省)에 있는데, 그곳에 물이 고여 있는 수많은 웅덩이들이 위에서 굽어보면 성수(星宿)가 벌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宋史 卷91 河渠志 黃河上

55)황량한……노닐고:춘추 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미인 서시(西施)를 위해 고소대(姑蘇臺)를 세우고는 날마다 이곳에서 노닐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에 오자서(伍子胥)가 간절히 간했는데도 듣지 않자, 오자서가 “이제 곧 오나라가 망하여 고소대 아래에서 사슴이 노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今見麋鹿遊姑蘇之臺]”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월(越)나라에 멸망당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118 淮南衡山列傳 일설에 고소대는 부차의 선왕(先王)인 합려(闔閭)가 쌓은 것이라고 한다.

56) 벽송정(碧松亭):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에 있는 정자로, 고운이 노닐었던 곳이라고 한다.

57) 희랑 화상(希朗和尙)에게 증정하다:희랑 화상은 통일 신라 시대에 해인사(海印寺)에 있던 승으로, 고운과 시문(詩文)으로 사귀었고, 화엄경(華嚴經)에 정통했다. 뒤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귀의를 받았으며, 견훤의 귀의를 받은 관혜(觀惠)의 남악(南岳)에 대항하여 북악(北岳)이라는 일파를 세웠다. 그의 목상(木像)이 해인사에 있다. 해인사의 부속 암자인 희랑대(希朗臺)는 그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와 관련하여,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蹟)에 “희랑대덕 군이 하절기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강하였는데, 나는 오랑캐를 막아 내느라고 청강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한 번 읊조리고 한 번 노래하되, 5측(側) 5평(平)을 써서 10절을 지어 장(章)을 이루어서 그 일을 기린다.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 최치원[希朗大德君 夏日於伽倻山海寺 講華嚴經 僕以捍虜所拘 莫能就聽 一吟一咏 五側五平 十絶成章 歌頌其事 防虜太監 天嶺郡守 遏粲 崔致遠]” 하였다. 이 명기(名記)로 보면 이 시는 10수임이 분명한데, 현재는 6수만이 전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최영성, 譯註 崔致遠全集2, 아세아문화사, 82쪽

58)보득(步得)이……가르침:화엄(華嚴)의 교설을 가리킨다. 보득은 범어(梵語) Buddha의 음역으로, 깨달은 사람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가리킨다. 이밖에 몰태(沒馱), 보타(步他), 부도(浮圖) 등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석가가 6년 고행 끝에 중인도(中印度) 마갈다국(摩竭陀國)의 도성인 가야성(伽耶城)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 위에서 대각(大覺)을 이루고는, 그로부터 14일째 되는 날에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등 상위의 보살(菩薩)들을 위해서 방편이 아닌 자내증(自內證)의 법문을 그 자리에서 설했는데, 그 내용을 모은 것이 바로 화엄경(華嚴經)이라고 한다.

59)부살(扶薩)들이 철위산(鐵圍山)에서 결집하였네:전설로 전해 오는 이른바 ‘철위의 결집’을 말한다. 결집은 불타가 입멸한 뒤 그 유법(遺法)을 제대로 보전할 목적으로 비구들이 한곳에 모여 입으로 전해오는 교법을 정리하고 편집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타가 입멸한 해의 제1차 결집부터 서기 1954년의 결집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모두 여섯 차례의 결집이 이루어졌다. 철위의 결집은 문수(文殊)와 미륵(彌勒) 등의 대보살(大菩薩)들이 불타의 10대 제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로 꼽히는 아난(阿難)을 데리고 철위산에 가서 화엄경법화경(法華經)열반경(涅槃經) 등 대승 경전(大乘經傳)을 결집했다는 것을 말한다. 大智度論 卷100 하지만 이는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대승불교의 신봉자들에 의해 대승 경전도 똑같이 불설(佛說)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이라고 한다. 부살은 보살(菩薩)과 같은 말이다. 보살은 범어 bodhisattva의 음역인 보리살타(菩提薩埵)를 줄인 말로, 깨달은 중생 혹은 대각을 구하기 위해 수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60)필추(苾蒭):범어(梵語) bhikṣu의 음역으로 비구(比丘)라고도 한다. 희랑을 가리킨다.

61)잡화(雜花)가……이루리라:희랑의 화엄경 강론을 계기로 해서, 그동안 난해하여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화엄경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른바 화엄학이 앞으로 성황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잡화는 화엄을 가리킨다. 고운집 권2 무염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의 사(詞)에 “오백 년 운세에 맞춰 이 땅에 태어나서, 십삼 세에 속세 떠나 출가한 뒤에, 화엄이 대붕의 길을 이끌어, 험한 바다 위에 배를 띄웠어라.[五百年擇地 十三歲離塵 雜花引鵬路 窽木浮鯨津]”라는 말이 나오는데, ‘잡화인붕로(雜花引鵬路)’의 주(註)에 “부석산에서 화엄경을 수업하였다.[授花嚴于浮石]”라고 하여 잡화를 화엄으로 해석하였다. 삼절(三絶)은 공자(孔子)가 만년에 주역 읽기를 좋아해서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준말로, 열심히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것을 뜻한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62)용당(龍堂)의……표하리라:불경(佛經) 그중에서도 특히 화엄경은 ‘용(龍)’이라는 글자와 관련이 깊다. 용왕(龍王)의 용궁에 불교의 경장(經藏)이 소장되어 있었다는 전설에 기인하여 불경을 용장(龍藏)이라고 하고, 용궁에 들어가서 화엄경을 가지고 왔다는 용수(龍樹)의 또 다른 이름이 용맹(龍猛)이고 용승(龍勝)이며, 또 이러한 연유에서 화엄경을 용경(龍經)이라고도 한다. 용당의 묘설(妙說)은 용궁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화엄경을 가리킨다. 묘설은 부처의 설법을 가리킨다. 당나라 법장(法藏)의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권1에 의하면, 불타가 입멸하고 700년쯤 뒤에 용수가 용궁에서 화엄경의 3본(本)을 보았는데, 상(上)과 중(中) 2본은 분량이 엄청나게 많아서 수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10만 게(偈) 48품(品)의 하본(下本)만 암송하여 인도에 전파했다고 한다. 용종(龍種)은 과거 구원겁(久遠劫) 이전에 남방(南方) 평등 세계(平等世界)에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이루어 용종상여래(龍種上如來)로 있었다는 문수(文殊)를 가리킨다. 佛說首楞嚴三昧經 卷下 용맹이 용종의 공을 전했다는 것은 지혜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문수처럼 용수가 난해한 화엄경을 알기 쉽게 해설했다는 말로, 그가 대부사의론(大不思議論)을 저술하여 화엄경의 문의(文義)를 해석하고, 다시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을 지어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의 일부를 주석한 것을 가리킨다. 용산(龍山)은 해인사(海印寺)가 있는 가야산(伽倻山)을 뜻한다. 석가가 성도(成道)하고 나서 자기가 실제로 깨달은 경지인 화엄 즉 용경(龍經)의 내용을 보살들에게 알려 주기 전에 해인(海印)의 삼매(三昧)에 들었다고 한다. 또 가야산의 가야는 석가가 성도한 마갈다국(摩竭陀國)의 도성 이름이기도 하다. 의룡(義龍)은 교의에 밝은 고승이라는 뜻으로, 희랑(希朗)을 가리킨다. 고운집 권3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에 “의룡이 구름처럼 일어났다.[義龍雲躍]”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주(註)에 “의정이 경의학(經義學)에 능통했기 때문에 의룡이라고 하였다.[義淨能通義學 故曰義龍]”라는 말이 나온다.

63)마갈제성(磨羯提城):마갈다국(摩竭陀國)과 같다.

64)차구반국(遮拘盤國):차구가국(遮拘迦國)과 같다. 서역(西域)의 우전국(于闐國)에서 동남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곳의 국왕이 특히 대승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어서 궁중에 반야(般若)․대집(大集)․화엄(華嚴) 등 3부(部)의 대승 경전을 봉안하고 전독(轉讀)의 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당나라 승려 지승(智昇)이 지은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권7에 보인다.

65)오늘……알겠도다:희랑의 강경을 찬미한 것이다. 동묘(東廟)는 동방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해인사를 가리킨다.

66)진전(眞詮):진제(眞諦)와 같은 뜻의 불교 용어이다. 진제는 세속의 법도인 속제(俗諦)와 상대되는 말로, 출세간(出世間)의 최상인 구경(究竟)의 진리를 뜻한다.

67)멋지도다……뿐이라오:해인사(海印寺)가 비록 동쪽 변두리 신라의 가야산 속에 있지만, 하늘은 이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서, 오직 희랑이라는 불교 교학의 천재를 통하여 석가가 해인 삼매의 경지에서 선포한 화엄의 지고한 뜻을 밝히게 하려고 하였을 뿐이라는 말이다. 해우(海隅)는 바다 한구석이라는 뜻으로, 신라를 가리킨다.

68)도수(道樹)의……해석했고:용수가 화엄경에 대한 논을 지어 해설했다는 말인데, 139쪽 주62 참조. 도수는 보리수(菩提樹)를 가리킨다.

69)동림(東林)의……번역했네:동진(東晉)의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혜원(慧遠)의 제자 법령(法領)이 차구반국(遮拘盤國)에 가서 화엄의 전분(前分) 3만 6천 게송을 구해 왔고, 불현 삼장(佛賢三藏)이 화엄경을 번역할 적에 남림사(南林寺)의 법업(法業)이 구술한 내용을 붓으로 적어 50권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동림과 남림이 협조한 인연을 언급한 대목이 고운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나온다. 불현(佛賢)은 각현(覺賢) 혹은 불타발다라(佛陀跋陀羅)라고도 한다. 아지(雅志)는 경전을 완전히 구비하여 번역하려 했던 혜원의 평소의 뜻이라는 말이다.

70)빈공(斌公)이……같으리오:희랑의 강론이 중국에서 행해진 어떤 고승의 화엄경 강의보다도 뛰어나다는 말이다. 빈공은 만년에 남림사(南林寺) 법업(法業)의 제자가 되어 화엄경을 전수받고 강경(講經)의 제일인자가 된 담빈(曇斌)을 가리킨다. 남조 송 명제(宋明帝) 태시(泰始) 초에 장엄사(莊嚴寺)에서 대법회를 개최했을 적에, 천자의 조칙을 받고 당시의 고승 혜량(慧亮)과 함께 번갈아 법주(法主)가 되었으며, “담빈과 혜량이 금성을 떨친다.[斌亮振金聲]”라는 말과 함께 “맑은 말과 오묘한 실마리가 끊어지려다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淸言妙緖 將絶復興]”라는 칭송을 받았다. 高僧傳 卷7 釋曇斌, 釋慧亮 피안(彼岸)은 생사가 있는 차안(此岸)을 떠나서 생사를 초탈한 열반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다. 금성(金聲)을 떨쳤다는 것은 화엄경을 본격적으로 강론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는 집대성한 분이시다. 집대성이란 종(鍾)과 같은 금의 소리가 먼저 퍼지게 하고 나서, 맨 마지막에 경쇠와 같은 옥의 소리로 거둬들이는 것을 말한다.[孔子之謂集大成 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라는 말이 나온다. 불적(佛跡)은 부처의 자취라는 뜻이다.

71)삼삼(三三)의 광회(廣會):부처가 화엄경을 설한 아홉 차례의 법회라는 뜻이다. 신역 화엄경(新譯華嚴經)에서는 일곱 곳에서의 아홉 차례 법회라는 뜻의 칠처구회(七處九會)를 말하고, 구역 화엄경(舊譯華嚴經)에서는 칠처팔회(七處八會)를 말한다고 하였다. 참고로 칠처(七處)는 보리장(菩提場), 보광명전(普光明殿), 도리천(忉利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타화천(他化天), 서다림(逝多林) 등이다.

72)십십(十十)의 원종(圓宗):중중무진(重重無盡)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교리를 펼치는 화엄종(華嚴宗)이라는 뜻이다. 십이라는 숫자는 화엄종에서 무궁무진하게 전개되는 법계(法界)를 표시한다. 그래서 화엄종에서 주장하는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의 용어 가운데 하나인 ‘중중무진’을 ‘십십무진(十十無盡)’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一切卽一)’이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을 ‘일즉십 십즉일(一卽十十卽一)’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중국 불교의 교판(敎判)에서는 법화경(法華經)을 소의경전(所依經傳)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과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화엄종을 원종이라고 칭한다.

73)유통(流通)을……하리니:화엄의 교설이 막힘없이 전해지게 함으로써,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유통을 말하려고 한다면, 지금 희랑 화상이 강경하며 증험해 보여준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밝혀 나가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유통은 불법(佛法)을 먼 지역까지 빠짐없이 전파하여 말세 중생이 모두 봉행하게 해야 한다는 뜻의 불교 용어이다. 불경의 내용을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누는 것을 삼분과경(三分科經)이라고 하는데, 이는 동진(東晉)의 도안(道安)이 창시하여 유송(劉宋) 이후에 성행한 것으로, 유통에 관한 부분을 소홀히 하지 않는 중국 불교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현험(現驗)은 지금 분명히 드러나 증험이 되고 있는 사실이라는 말이다.

74) 호원 상인(顥源上人)에게 부치다:호원 상인의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 진주목(晉州牧) 쌍계사(雙溪寺)를 보면, 이 시는 고운이 쌍계사에 있으면서 호원 상인에게 부친 시라고 전해진다고 하였다.

75)시인의……달리는데:다른 판본과 신증동국여지승람권30 진주목에는 결락된 부분이 ‘景’으로 되어 있기에, 이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76)사해(四海)는……생각나오: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계교하며 함정을 파는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유자(儒者)와 불승(佛僧)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떠나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호원 상인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고승(高僧) 도안(道安)이 형주(荊州)에 와서 저명한 문학가인 습착치(習鑿齒)를 만나, “나는 미천 석도안(彌天釋道安)이요.”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습착치 역시 “나는 사해 습착치(四海習鑿齒)요.”라고 재치 있게 답변하며 서로 친해진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82 習鑿齒列傳 미천은 하늘에까지 잇닿았다는 말로, 지기(志氣)가 고원(高遠)함을 비유한 말이다. 사해는 원래 습착치 자신을 비유한 말인데, 여기에서는 고운이 그 고사를 인용하면서도 이 세상이라는 뜻으로 슬쩍 바꿔서 사용하였다.

77)천계(天雞)가……선창(先唱)하고:신라가 모든 제후국에 앞서서 모범을 보이며 중국에 경하해야 마땅할 것이라는 말이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桃都)라는 이름의 거목이 있고, 그 위에 천계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치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고 한다. 述異記 卷下

78)원하되 욕심부리지 않는다:정치가의 자격을 묻는 자장(子張)에게 공자(孔子)가 대답한 이른바 오미(五美) 중의 하나이다. 참고로 오미는 혜택을 베풀되 낭비하지 않고[惠而不費], 일하게 하되 원망을 받지 않고[勞而不怨], 원하되 욕심부리지 않고[欲而不貪], 여유가 있되 교만하지 않고[泰而不驕], 위엄스러우면서도 사납지 않은 것[威而不猛]을 말한다. 論語 堯曰

79)덕은……없다:춘추 시대 진(晉)나라 숙향(叔向)이 주(周)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빙문할 적에, 주나라 조정의 경사(卿士)가 되어 왕실을 돕던 선 정공(單靖公)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일을 처리하며 주선을 잘하자, 주 무왕(周武王) 때의 사관(史官)인 사일(史佚)이 “나와서 행동할 때에는 공경함보다 좋은 것이 없고, 집에 거할 때에는 검소함보다 좋은 것이 없고, 덕은 사양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일 처리는 자문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動莫若敬 居莫若儉 德莫若讓 事莫若咨]”라고 한 말을 숙향이 인용하면서 극구 칭송한 고사가 있다. 國語 卷3 周語下

80)법령이……있습니다:노자(老子) 57장에 “이 세상에 금기 사항이 많아질수록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진다. 백성들이 이기를 많이 가지면 국가는 그만큼 더 혼란해진다. 사람이 기교가 많으면 괴이한 물건이 더욱 생겨난다. 법령이 세밀하게 밝아질수록 도적은 그만큼 더 많아진다.[天下多忌諱 而民彌貧 民多利器 國家滋昏 人多伎巧 奇物滋起 法令滋彰 盜賊多有]”라는 말이 나온다.

81)울루(鬱壘)의 반도(蟠桃):어느 곳인지 확실치 않다. 동해에 도삭산(度朔山)이 있고, 그 위에 거대한 복숭아나무가 3천 리나 서려 있으며, 그 나무의 동북쪽에 있는 귀문(鬼門)으로 온갖 귀신들이 출입하는데, 울루와 신도(神荼)라는 두 형제 신인(神人)이 귀신들을 사열하다가 악한 귀신들은 갈대로 꼰 새끼줄로 묶어서 호랑이의 먹이로 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天中記 卷4

82)이제(夷齊)의 고죽(孤竹):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죽국(孤竹國)으로, 중국 영평부(永平府) 난주(灤州)에 있다. 그런데 옛날에 황해도 해주(海州)를 고죽국이라고 칭하고, 또 이곳에 그 나라 임금들의 무덤과 백이숙제의 사당이 있다는 전설이 전하였으므로, 고운이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

83)구주(九疇)의……하겠습니까:기자(箕子)의 교화를 받았다는 말이다. 은(殷)나라가 망한 뒤에 기자가 주 무왕(周武王)을 위해서 치국안민의 도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해 주었으며, 그 뒤에 조선(朝鮮)에 봉해져 동방에 와서는 팔조교(八條敎) 등을 세워 백성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구주는 요(堯)․순(舜)․우(禹) 이래의 정치와 도덕의 원칙이 된 아홉 가지 강령이라는 뜻인데, 서경 홍범(洪範)에 나온다.

84)들에……갖추었으며: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 예(濊)에 “사람들이 결코 도둑질하지 않았으므로 문을 잠그는 법이 없었다. 부인은 정숙하고 신실하였으며, 먹고 마실 때에도 각각 변두를 갖추었다.[其人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飮食以籩豆]”라는 말이 나온다. 대나무로 만든 그릇을 변(籩)이라고 하고, 나무로 만든 그릇을 두(豆)라고 한다.

85)풍속이……하면서도:문헌통고(文獻通考) 권324 동이총서(東夷總序)에 “천성이 유순해서 법도대로 다스리기 쉽다. 동이 중에는 군자가 사는 불사의 나라도 있다. 산해경에 의하면 군자들이 의관을 갖추고 허리에 칼을 찬다고 하였다.[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 山海經曰 君子衣冠帶劍]”라는 말이 나온다.

86)남려(南閭):예(濊)의 임금 이름이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예에 “원삭 1년(기원전 128)에 예의 임금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명을 인솔하여 요동으로 가서 귀부(歸附)하니, 무제가 그 지역을 창해군으로 삼았다.[元朔元年 濊君南閭等畔右渠 率二十八萬口 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라는 기록이 보인다. 우거(右渠)는 위만(衛滿)의 손자이다.

87)동호(東戶):상고 시대 전설상의 임금인 동호계자(東戶季子)의 준말이다. 그가 다스리던 세상에는 도덕이 확립되고 경제가 번성하여 “길에 떨어진 물건도 사람들이 줍지 않았으며, 농기구나 먹고 남은 양식 등도 모두 밭머리에 그냥 놔두고 돌아올 정도였다.[道路不拾遺 耒耜餘糧宿諸畝首]”라고 하였다. 淮南子 卷10 繆稱訓

88)흑수(黑水):만주 동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말갈족(靺鞨族)의 하나로, 발해(渤海)가 강성할 때에는 발해에 편입되었고, 나중에는 거란(契丹)에 귀속되었다. 흑수는 흑룡강(黑龍江)이다. 신오대사(新五代史) 권74 사이 부록(四夷附錄) 제3 흑수말갈(黑水靺鞨)에 “흑수말갈은 본래 이름이 물길인데, 후위 때 처음으로 중국 역사에 등장한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고려, 서쪽으로는 돌궐, 북쪽으로는 실위와 경계를 접하는데, 대개는 숙신씨의 땅이다. 그 무리는 수십 개의 종족으로 나뉘는데, 그중에서 흑수말갈이 가장 북방에 위치하며 특히 날래고 사납다.[黑水靺鞨本號勿吉 當後魏時見中國 其國東至海 南界高麗 西接突厥 北隣室韋 蓋肅愼氏之地也 其衆分爲數十部 而黑水靺鞨最處其北 尤勁悍]”라는 기록이 보인다.

89)녹림(綠林):원래는 산림 속에 숨어서 정부에 반항하거나 재물을 탈취하는 무장 집단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견훤(甄萱)과 궁예(弓裔) 등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90)겁회(劫灰):겁화(劫火)의 재라는 뜻으로, 재앙을 뜻하는 불가(佛家)의 용어이다. 하나의 세계가 끝날 즈음에 겁화가 일어나서 온 세상을 다 불태운다고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나온 검은 재에 대하여,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1 竺法蘭

91)창해(滄海)의……심해지고:사람들이 동란 중에 의지할 곳 없이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범녕(范甯)이 지은 춘추곡량전 서문(序文)에 “공자가 창해의 횡류를 보고 위연히 탄식했다.[孔子睹滄海之橫流 乃喟然而嘆]”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백성들이 어지럽게 이산하는 것이 마치 물이 마구 넘쳐흐르는 것과 같다.[百姓散亂似水之橫流]”라고 하였다.

92)곤강(崑岡)의……결과:선인과 악인이 모두 참혹한 병화를 당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곤강은 곤륜산(崑崙山)으로, 서경 윤정(胤征)에 “곤강에 불길이 번짐에 옥석이 모두 탄다.[火炎崑岡 玉石俱焚]”라는 말이 있다.

93)고우(膏雨):제때에 내리는 단비라는 뜻으로, 중국 황제의 은혜를 비유하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9년에 “소국이 대국을 우러러 바라보는 것을 비유하자면, 온갖 곡식이 단비를 우러러 바라보는 것과 같다.[小國之仰大國也 如百穀之仰膏雨焉]”라는 말이 나온다.

94)훈풍(薰風):성군(聖君)의 교화를 비유하는 말이다.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처음으로 만들어 남풍가(南風歌)를 지어 부르면서 “훈훈한 남쪽 바람이여, 우리 백성의 수심을 풀어 주기를. 제때에 부는 남풍이여, 우리 백성의 재산을 늘려 주기를.[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이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禮記 樂記 注

95)희중(羲仲)의 벼슬:신라 왕의 직책을 말한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96)연릉(延陵)의 절개:왕위를 사양하는 것을 말한다. 연릉은 춘추 시대 오(吳)나라 왕 수몽(壽夢)의 넷째 아들로서 왕위도 사양하며 현자로 칭송받은 계찰(季札)을 가리키는데, 그가 연릉에 봉해진 관계로 연릉계자(延陵季子) 혹은 줄여서 연릉이라고 일컫는다.

97) 나이는……만하고:15세가 되려 한다는 말이다. “내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라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爲政

98) 산……교양되었기에:주역 몽괘(蒙卦) 단(彖)에 “어렸을 때에 바르게 교양됨이 성인의 공부이다.[蒙以養正 聖功也]”라는 말이 나오고, 상(象)에 “산 아래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는 것이 몽괘의 상이다. 군자는 이 상을 보고서 물처럼 과감하게 행하고 산처럼 든든한 덕을 기른다.[山下出泉 蒙 君子 以 果行育德]”라는 말이 나온다.

99) 언덕……사모하였습니다:시경 구중유마(丘中有麻)는 현인을 사모하는 시인데, 그중에 “언덕 가운데 오얏이 있으니, 저기에서 그분을 만류하도다.[丘中有李 彼留之子]”라는 말이 나온다.

100)바닷가에……않고:중국에 가는 뱃길이 막혔다는 말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는 바다와 은하(銀河)가 서로 통했으므로 매년 8월이 되면 바닷가에서 뗏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진(晉)나라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 권10에 나온다.

101)후목(朽木):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폐인(廢人)이라는 뜻의 겸사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썩은 나무는 거기에 어떻게 새겨 볼 수도 없다.[朽木不可雕也]”라고 제자 재여(宰予)의 게으름을 호되게 질책한 공자(孔子)의 말이 나온다.

102)오묘한……드러냈고:주역 관괘(觀卦) 상(象)에 “선왕이 이 괘를 보고 만방을 순시하며 백성의 풍속을 관찰하여 가르침을 베풀었다.[先王 以 省方觀民 設敎]”라는 말이 나온다.

103)방명(芳名)을……합니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27년에 “천자는 덕의(德義)를 펴는 일이 아니면 순수하지 않고, 제후는 백성을 위하는 일이 아니면 거동하지 않으며, 경은 군주의 명령이 없으면 국경을 넘지 않는다.[天子非展義不巡守 諸侯非民事不擧 卿非君命不越竟]”라는 말이 나온다.

104)하(夏)나라……것이고: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봄에는 밭갈이가 잘 되었는지 살펴보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보충해 주고, 가을에는 수확이 잘 되었는지 살펴보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도와준다. 그래서 하나라 속담에도 ‘우리 임금님이 나들이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쉬며, 우리 임금님이 즐기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도움을 받으리오. 한번 노닐고 한번 즐기시는 것이 제후들의 법도가 된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春省耕而補不足 秋省斂而助不給 夏諺曰 吾王不遊 吾何以休 吾王不豫 吾何以助 一遊一豫爲諸侯度]”라는 말이 나온다.

105)상서(商書)에서……것입니다: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집집마다 서로 경하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을 기다렸는데, 임금님이 오시니 이제 살아났다.’라고 하였다.[攸徂之民 室家相慶 曰徯予后 后來其蘇]”라는 말이 나온다.

106)양계(兩階)에서……한편:성군(聖君)의 덕화를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순(舜) 임금이 이에 문덕을 크게 펴면서, 방패와 깃털을 들고 두 섬돌 사이에서 춤을 추니, 그로부터 70일 만에 묘족이 귀순해 왔다.[帝乃誕敷文德 舞干羽于兩階 七旬有苗格]”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107)칠종칠금(七縱七擒)의 전략:강압적으로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인덕(仁德)을 베풀어 마음속으로부터 진정으로 열복(悅服)하게 만드는 작전을 말한다. 삼국 시대 촉 후주(蜀後主) 건흥(建興) 3년(225)에 제갈량(諸葛亮)이 남중(南中)을 평정하여 4개 군(郡)을 재정비할 적에, 추장(酋長) 맹획(孟獲)을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생포하여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했던 고사가 있다. 三國志 蜀志 諸葛亮傳

108)일유일예(一遊一豫)의 기쁨:천자의 순행에 따른 즐거움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153쪽 주104 참조.

109)선장(仙掌)에서 길을 열고:어떤 험준한 산이라도 천자의 순행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새로 닦을 것이라는 말이다. 선장은 서촉(西蜀)에 있는 화산(華山)의 봉우리 이름이다. 그 암벽에 다섯 손가락을 모두 갖춘 손바닥 형상의 흔적이 완연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화악지(華嶽志)에 전한다. 그리고 진 혜왕(秦惠王)이 서촉 지방을 정벌하려고 했으나 길을 알지 못하자, 다섯 마리의 석우(石牛)를 만들어 꽁무니에 황금을 묻힌 다음 황금 똥을 누는 소라고 속였는데, 이에 촉왕(蜀王)이 오정역사(五丁力士)를 시켜서 검각(劍閣)의 험한 산길을 개통하여 끌고 오게 하자, 진나라 군대가 그 뒤를 따라 서촉 땅으로 들어왔다는 ‘석우개도(石牛開道)’의 고사가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진혜왕본기(秦惠王本紀)에 전한다.

110)화봉(華封)에서 축수(祝壽)한 것:화주(華州) 지역을 지키는 사람[華封人]이 요(堯) 임금이 순행할 적에 수(壽)와 부(富)와 다남(多男)을 축원했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나온다.

111)피사(避舍):평소에 거하던 정침(正寢)을 피하고 다른 곳에 유숙함으로써 감히 편안하게 거하지 못한다는 뜻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 “천자가 순수하면 제후는 피사한다.[天子巡狩 諸侯辟舍]”라는 말이 나온다.

112)분수(汾水)에서 노래한 즐거움:한 무제(漢武帝)가 하동(河東)을 순시할 적에 배를 띄우고 신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매우 즐거워지자 추풍사(秋風辭)를 지어 불렀는데, 그중에 “누선을 띄워 분수를 건너감이여, 중류를 가로지르며 흰 물결을 날리도다.[泛樓船兮濟汾河 橫中流兮揚素波]”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이 노래를 ‘분수의 노래’라고 칭하기도 한다.

113)대산(岱山)에서 봉선(封禪)하는 의식:황제가 직접 태산(泰山)에 가서 천지(天地)에 행하는 대제(大祭)의 의식을 말한다. 대(岱)는 태산의 별칭이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임종 직전에 지은 봉선문(封禪文)에 의거해서 한 무제가 동쪽 노(魯)나라 지역의 태산에 가서 봉선을 행했던 유명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봉(封)은 태산 위에 흙으로 단을 쌓고 하늘의 은공에 보답하는 제사를 말하고, 선(禪)은 태산 아래 양보산(梁父山)의 땅을 깨끗이 쓸고 땅의 은덕에 보답하는 제사를 말하는데, 예로부터 천명을 받고 천하를 안정시켜 태평 시대를 구가하게 한 제왕이 행하는 의식으로 일컬어져 왔다.

114)치구(致寇):자격 없는 사람이 과분하게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의 겸사이다. 주역 해괘(解卦) 육삼(六三)의 “짐이나 져야 할 사람이 귀인의 수레에 타고 있는 격이다. 도적의 침입을 초래할 것이니, 마음이 곧아도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負且乘 致寇至 貞 吝]”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115)탄(坦):진성여왕(眞聖女王)의 이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1 신라본기(新羅本紀) 진성왕(眞聖王)에는 이름이 만(曼)으로 되어 있다. 진성여왕의 부왕인 경문왕(景文王)의 이름도 본기에서는 응렴(膺廉)이라고 하고, 표(表)에서는 응(凝)이라고 하였다.

116)홍곡(鴻鵠)의 뜻:일반 평민의 신분에서 왕이나 삼공(三公)이 되는 등 현실적으로는 좀체 이루기 어려운 원대한 포부를 말한다. 진(秦)나라 말기에 진승(陳勝)이 소싯적에 빈궁하여 남에게 고용되어 밭을 갈다가 휴식할 적에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부귀해지거든 서로 잊지 말자.”라고 하니, 그 사람이 비웃으며 “품팔이하는 주제에 무슨 부귀이냐.”라고 핀잔을 주었는데, 이에 진승이 장탄식을 하면서 “제비나 참새가 어떻게 하늘 높이 나는 기러기의 뜻을 알겠는가.[燕雀安知鴻鵠之志哉]”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8 陳涉世家

117) 제멋대로……가운데:대본에는 ‘風雨衍期’로 되어 있는데, 문맥으로 보아 뜻이 통하지 않기에 ‘衍’을 ‘愆’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18)동릉(東陵):도적의 근거지를 가리킨다. 장자 변무(騈拇)에 “백이는 명예 때문에 수양산 아래에서 죽었고, 도척은 이익 때문에 동릉 위에서 죽었다.[伯夷死名於首陽之下 盜跖死利於東陵之上]”라는 말이 나온다.

119)남묘(南畝):농작물이 잘 자라는 양지 바른 농토를 말한다. 시경 대전(大田)에 “나의 날카로운 보습으로, 남녘 두렁에 일을 시작하여, 백곡의 씨를 뿌린다.[以我覃耜 俶載南畝 播厥百穀]”라는 말이 나온다.

120)정고보(正考父)가……고사:정고보는 공자(孔子)의 선조인데,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7년에 “상경이 되자 더욱 공경스러운 자세를 취하였다.[三命玆益共]”라는 말과 함께, “대부 때에는 고개를 수그리고, 하경(下卿) 때에는 등을 구부리고, 상경(上卿) 때에는 몸을 굽혔다.[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라는 그의 정명(鼎銘)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공(共)에는 공(恭)의 뜻이 들어 있다.

121)한 번……계책:예기 표기(表記)에 “임금을 섬길 적에, 나아가기는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는 쉽게 한다면 자리에 질서가 잡힐 것이요, 반면에 나아가기는 쉽게 하고 물러나기는 어렵게 한다면 문란해질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세 번 읍한 다음에야 나아가고 한 번 사양하고는 곧바로 물러남으로써 문란해지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다.[事君難進而易退 則位有序 易進而難退 則亂也 故君子三揖而進 一辭而退 以遠亂也]”라는 말이 나온다.

122)자애로운……능가하고:진성여왕이 조카인 자기를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다는 말이다. 후한 제오륜(第五倫)이 형의 아들이 병을 앓자 밤중에 열 번이나 찾아가서 살펴보았던 ‘오륜십기(五倫十起)’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41 第五倫列傳

123)세 번 사양한 것:춘추 시대 진 문공(晉文公) 중이(重耳)가 주(周)나라 천왕(天王)으로부터 패자(覇者)에 임명될 적에 세 차례 사양하고 나서 받았던 ‘진후삼사(晉侯三辭)’의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僖公28 남조 양(梁)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 장표(章表)에 “옛날 진 문공이 패자의 임명을 받을 적에 세 번 사양하고 명을 따랐기 때문에, 한나라 말기에 사양하는 표문을 올릴 적에는 세 번 사양하는 것으로 관례를 삼았다.[昔晉文受冊 三辭從命 是以漢末讓表 以三爲斷]”라는 말이 나온다.

124)이……다르다:동방의 군자국인 신라는 다른 곳의 미개한 나라들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삼방(三方)은 서쪽․남쪽․북쪽의 나라들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권28하 지리지(地理志)에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저 너머 나라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며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구이 땅에 살고 싶다고 했으니, 그것도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桴於海 欲居九夷 有以也夫]”라는 말이 나온다.

125)온……것:대학장구(大學章句) 전 9장에 “임금의 집안이 인을 행하면 온 나라가 인한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임금의 집안이 사양을 하면 온 나라가 사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라는 말이 나온다.

126)두……데: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쇠도 자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에서는 난초 향기가 풍겨 나온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는 말이 나온다.

127)소수(疏受)의 일:한 선제(漢宣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 소광(疏廣)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갈 때, 그의 조카인 소수 역시 태자소부(太子少傅)의 벼슬을 그만두고서 행동을 함께했던 일을 말한다. 당시에 신라의 왕이 제후의 신분으로서 당나라 조정에서는 삼공(三公)의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진성여왕 자신을 태부(太傅)인 소광에 비유하고, 조카로서 후계자인 효공왕을 소부(少傅)인 소수에 비유한 것이다. 삼공은 주(周)의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 한(漢)의 승상(丞相)․태위(太尉)․어사대부(御史大夫), 당(唐)의 태위(太尉)․사도(司徒)․사공(司空) 등을 가리킨다. 漢書 卷71 疏廣傳

128)꼭……하고:논어 헌문(憲問)에 “그분은 꼭 말해야 할 때가 된 뒤에야 말하기 때문에 남들이 그의 말을 듣기를 싫어하지 않는다.[夫子時然後言 人不厭其言]”라는 말이 나온다.

129)한번……없는:논어 자한(子罕)에 “삼군 속에서 보호를 받는 장수는 빼앗아 올 수 있을지라도, 한 개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신념은 빼앗을 수가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라는 말이 나온다.

130)옹원(擁轅)의 간청:급히 떠나야 할 수레바퀴를 부여안고 멈춰 세운 채 자신의 요청을 들어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는 뜻으로, 절박한 심정에 쫓겨 한사코 요구하며 고집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제 경공(齊景公)에게 분성괄(盆成适)이 안영(晏嬰)을 통해 “사정이 이러한데도 신의 요청을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신은 모친의 시신을 모신 영구차를 끌고 도성 문 밖 처마 밑에 붙어 있으면서, 감히 먹고 마실 엄두도 내지 못하고서 떠나야 할 수레바퀴를 부여안고 멈춰 세운 채, 나무가 말라 죽을 때까지 둥지를 떠나지 않는 새처럼 그 자리를 지키며, 옷을 벗어 한쪽 어깨와 정강이뼈를 드러내고 대기하면서 임금이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랄 것입니다.[若此而不得 則臣請輓尸車 而寄之於國門外宇溜之下 身不敢飮食 擁轅執輅 木乾鳥棲 袒肉暴骸 以望君愍之]”라고 말한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晏子春秋 卷7 外篇上

131)끝내는……것입니다:신발을 벗듯 미련 없이 왕위를 떠날 것이라는 말이다. 순(舜) 임금은 천자의 지위도 헌 신발 버리듯 할 것[猶棄敝蹝]이라는 말이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고, 한 무제(漢武帝)는 신선이 되기 위해 처자를 버리는 것을 신발을 벗듯 할 것[如脫屣]이라는 말이 사기 권12 효무본기(孝武本紀)에 나온다.

132)신이……하였습니다만:효공왕(孝恭王)이 어머니처럼 모시는 진성여왕(眞聖女王)의 걱정을 덜어 드리기 위해 일단 왕위를 계승한 다음, 진성여왕의 자문을 받아 가면서 정사를 행하기로 했다는 말이다. 작실(作室)은 집을 짓는다는 말로, 선왕의 유업을 이어 바람직한 정치를 행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서경 대고(大誥)에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는 말이 나온다. 의문(倚門)은 자식의 안부를 걱정하는 어버이의 간절한 심정을 비유한 말이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손가(王孫賈)가 15세에 민왕(閔王)을 섬겼는데, 그 모친이 “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올 때면 내가 집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고,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내가 마을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다.”라고 말한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戰國策 齊策6

133)송목(宋穆)이……만큼:춘추 시대 송 목공(宋穆公)도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었고, 진성여왕은 생전에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둘 사이의 차이가 현격하다는 말이다. 송 목공은 선공(宣公)의 아우인데, 선공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그가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여 9년간 재위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대사마(大司馬) 공보(孔父)를 불러 선공의 아들인 여이(與夷)가 현능(賢能)하다고 하며 그를 즉위시키도록 부탁하고, 자기의 아들 풍(馮)은 정(鄭)나라로 내보낸 뒤에 세상을 떠났다. 春秋左氏傳 隱公3年

134)사안(謝安)이……것입니다:일단 왕위에 오른 이상에는 태자로 있을 때에 품고 있었던 원대한 뜻을 현실 정치에 발휘하여 뭇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진(晉)나라 사안이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20여 년 동안 한가히 은거하면서 조정의 부름에도 계속해서 응하지 않다가 마침내 나이 40에 몸을 일으켜 벼슬길에 나아가 삼공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처음에 환온(桓溫)의 사마(司馬)로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환온에게 약초를 바쳤는데, 그 속에 원지(遠志)라는 약초가 있는 것을 환온이 보고는 “이 약초는 또 소초라고도 하는데, 어째서 하나의 물건에 상반된 두 개의 이름이 있는 것인가?[此藥又名小草 何以一物而有二稱]”라고 사안에게 물었으나, 사안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학륭(郝隆)이 옆에 있다가 “이것은 대답하기 매우 쉬운 문제입니다. 산속에 가만히 있을 때에는 원지라고 부르고, 산을 나오면 소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此甚易解 處則爲遠志 出則爲小草]”라고 대답하니, 사안의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排調 신라의 왕이 당나라에서 삼공의 대우를 받는 점을 감안하여 고운이 이 사안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135)제횡도(齊橫島):제나라 전횡(田橫)의 섬이라는 말로, 오호도(嗚呼島) 혹은 반양산(半洋山)으로 알려져 있다. 전횡은 전국 시대 제왕(齊王)의 후예로서 진(秦)나라 말기에 자립하여 왕이 된 뒤에 형세가 불리해지자 부하 500여 인과 함께 섬으로 피해 들어갔는데, 그 뒤에 왕후(王侯)로 봉해 주겠다는 한 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서 낙양(洛陽)으로 가던 도중에 머리를 굽혀 신하가 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면서 자결하자, 이 소식을 들은 섬의 500여 인도 모두 자살하여 그 뒤를 따랐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4 田儋列傳

136)진제교(秦帝橋):진나라 황제의 다리라는 뜻으로, 전설로 전하는 진 시황(秦始皇)의 석교(石橋)를 가리킨다. 진 시황이 동해(東海)에 바윗돌로 징검다리를 놓아 바다를 건너가서 해가 뜨는 곳을 보려고 하자, 신인(神人)이 바위를 바다로 몰고 가면서 채찍질을 하였으므로 바윗돌이 모두 피를 흘리며 붉게 변했다는 이야기가 진(晉)나라 복심(伏深)의 삼제약기(三齊略記)에 나온다.

137)지의(地義):천지간의 당연한 이치로서 변할 수 없는 법도라는 뜻인 천경지의(天經地義)의 준말로, 삼강오상(三綱五常)과 같은 예(禮)를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5년에 “대저 예라는 것은 하늘의 떳떳한 도이고, 땅의 후한 덕이며, 사람이 행하는 길이다.[夫禮 天之經也 地之義也 民之行也]”라는 말이 나온다.

138)화성(化成):시서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교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역 비괘(賁卦) 단(彖)에 “천문을 관찰하여 사시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에 교화를 펼친다.[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成天下]”라는 말이 나오는데, 당(唐)나라 공영달(孔穎達)이 해설하기를 “성인이 인문을 관찰한다는 것은 시서예악을 의미하니, 이 가르침을 법도로 삼아서 천하를 교화시킨다는 말이다.[言聖人觀察人文 則詩書禮樂之謂 當法此敎而化成天下也]”라고 하였다.

139)종묘사직을……것이다:예기 제통(祭統)에 “종묘사직을 지키는 자손이 그 선조에게 선행이 없는데도 칭찬한다면 이는 속이는 것이요, 선행이 있는데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밝지 못한 것이요, 알고서도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질지 못한 것이니, 이 세 가지를 군자는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子孫之守宗廟社稷者 其先祖無美而稱之 是誣也 有善而弗知 不明也 知而弗傳 不仁也 此三者 君子之所恥也]”라는 말이 나온다.

140)몸을……마지막이다:효경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이 몸은 모두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자신의 몸을 바르게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을 드러나게 해 드리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는 말이 나온다.

141) 함통(咸通):당 의종(唐懿宗)의 연호로 860년에서 873년까지이다.

142)동이(東暆):낙랑군(樂浪郡)에 속한 현(縣)의 이름으로, 여기서는 신라를 가리킨다.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이 지은 한예문지고증(漢藝文志考證) 권8 동이령(東暆令)에 “지리지에 의하면 그 현은 낙랑군에 있다.[地理志 縣在樂浪郡]”라고 하였다.

143)북극(北極):북신(北辰), 즉 북극성과 같은 말로, 중국의 황제 혹은 조정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덕정(德政)을 펴게 되면, 가만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북극성 주위로 뭇별들이 향해 오는 것처럼 될 것이다.[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라는 말이 나온다.

144)멀리……없었지만:신라라는 협소한 공간을 벗어나서 중국의 선진 문명을 접하고 견문을 넓힐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오(吳)나라 공자 계찰(季札)이 중원의 각 나라에 사신으로 나가서 풍속을 살폈는데, 특히 노(魯)나라에서 주대(周代) 각국의 음악을 모두 듣고는 하나하나 적절하게 품평을 가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145)노(魯)나라의 경지:논어 옹야(雍也)에 “제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선왕의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나온다.

146)중화(中和)와 선포(宣布)의 시가: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뜻한다. 한 선제(漢宣帝) 때 익주 자사(益州刺史) 왕양(王襄)이 천자의 풍화(風化)를 천하에 알리기 위하여 왕포(王褒)로 하여금 중화(中和), 낙직(樂職), 선포(宣布) 등의 시를 짓게 한 다음 이를 녹명시(鹿鳴詩)의 가락에 맞춰서 노래하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64下 王褒傳

147)태평(太平) 금직(錦織)의 송가:조선사략(朝鮮史略) 권2에 “왕이 또 직접 태평송을 지은 뒤에 비단에 수놓아 황제에게 바쳤다.[王又自製太平頌 織錦爲紋以獻]”라는 기록이 보인다. 왕은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황제는 당 고종(唐高宗)을 가리킨다.

148)죽어서도……일: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4년에 “덕을 세우는 것이 최상이요, 공을 세우는 것이 그다음이요, 말을 세우는 것이 그다음인데, 이 세 가지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를 일러 썩지 않는다고 한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라는 이른바 삼불후(三不朽)에 대한 말이 나온다.

149)찬연히 볼만한 점:양(梁)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지은 문선(文選) 서문(序文)에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그래도 시경의 풍도를 찬연히 볼만한 점이 있었는데, 한나라 중엽부터는 그 길이 점차 달라지고 말았다.[故風雅之道 粲然可觀 自炎漢中葉 厥塗漸異]”라는 말이 나온다.

150) 건부(乾符):당 희종(唐僖宗)의 연호로 874년에서 879년까지이다.

151)초자(楚子)의 소매를 떨치고:신라 헌강왕(憲康王)이 그 소식을 듣고는 격분하여 복수하려고 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 장왕(楚莊王)이 자기의 사신을 송(宋)나라에서 죽였다는 말을 듣자 격분한 나머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달려 나가느라, 신발은 궁전 앞 토방에서 신고, 칼은 침문 밖에서 허리에 차고, 수레는 포서라는 시가지에서 올라탔는데, 이렇게 해서 마침내 9월에 송나라를 포위하였다.[投袂而起 屨及於窒皇 劍及於寢門之外 車及於蒲胥之市 秋九月 楚子圍宋]”라는 ‘초자투몌(楚子投袂)’의 고사가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14년에 나온다.

152)종군(終軍)의 밧줄을 자청하면서:적의 괴수를 결박할 밧줄을 청했다는 말로, 직접 전쟁터에 나가 적을 격파하고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 종군(終軍)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청하면서 “긴 밧줄 하나만 주시면 남월왕을 꽁꽁 묶어 대궐 아래에 바치겠다.[願受長纓 必羈南越王而致之闕下]”라고 장담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64下 終軍傳

153)하뢰(下瀨)의 군대:하뢰장군(下瀨將軍)의 군대라는 뜻으로, 중국에 귀의한 신라의 의용군이라는 뜻이다. 남월(南越)의 승상 여가(呂嘉)가 반란을 일으켜 남월왕 조흥(趙興)과 왕태후와 한(漢)나라 사신을 죽이자, 한 무제(漢武帝) 원정(元鼎) 5년(기원전 112)에 노박덕(路博德)을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삼고, 양복(楊僕)을 누선장군(樓船將軍)으로 삼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예전에 한나라에 귀의하여 후(侯)가 된 남월 사람 2인을 각각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뢰장군(下瀨將軍)에 임명한 뒤에 함께 토벌에 참가해서 반란을 평정하게 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113 南越列傳

154)두레박줄이……아니라:고변(高駢)의 역량이 부족해서 이를 보완하려고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 미약한 신라의 힘을 빌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두레박줄이 짧다는 것은 재능이나 식견이 부족해서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지락(至樂)의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의 물을 길을 수가 없다.[綆短者不可汲深]”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긴 채찍은 보기에는 그럴 듯해도 실제로는 효용 가치가 별로 없거나 역불급(力不及)인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신라의 겸사로 쓰였다.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15년에 “채찍이 아무리 길다 해도 말의 배까지 휘두를 수는 없다.[雖鞭之長 不及馬腹]”라는 말이 나온다.

155)단지……목적으로:먼저 성대하게 아군 연합군의 위세를 과시하여 적군이 겁을 먹게 한 뒤에 무력으로 제압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심산으로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이려 했다는 말이다. 사기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먼저 겁을 주고 나서 실력으로 제압하는 작전이 원래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兵固有先聲而後實者 此之謂也]”라는 말이 나온다.

156)월포(越庖):분수를 모르고 주제넘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월권(越權)과 같은 말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의 “요리하는 사람이 주방에서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고 해서 시동이나 축관이 제기를 뛰어넘어 와서 그 일을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庖人雖不治庖 尸祝不越樽俎而代之矣]”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157)고즙(叩楫):노를 들어 뱃전을 친다는 말로, 중원의 회복을 다짐하며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진(東晉)의 조적(祖逖)이 중원의 회복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서 초모(招募)한 군대를 이끌고 장강(長江)을 건너갈 적에, 강 한복판에서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노를 들어 뱃전을 치며 “중원을 평정하지 않고서는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강을 두고 맹세한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2 祖逖列傳

158)속으로는……모르겠습니다:그동안 하북도(河北道)의 청주 절도사로서 신라의 지역까지도 관할하며 각별한 관계를 맺어 온 자기를 무시한 채 직접 고변(高駢)의 휘하에 들어가서 출전하려고 하는 신라의 행위를 괘씸하게 여겨서 출동을 저지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159) 무덕(武德):당 고조(唐高祖)의 연호로 618년에서 626년까지이다.

160) 개원(開元):당 현종(唐玄宗)의 연호로 713년에서 741년까지이다.

161)위악(韡萼):형제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진성여왕의 오빠인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형제간의 우애를 읊은 시경 상체(常棣)에 “아가위 꽃송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 지금 어떤 사람들도 형제만 한 이는 없지.[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는 말이 나온다.

162)육아(蓼莪):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돌아가신 어버이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시인데, 여기서는 경문왕(景文王)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부(王裒)가 시경을 가르칠 적에 이 시편의 “슬프고 슬프다 우리 부모여, 나를 낳아 기르느라 얼마나 애쓰셨나.[哀哀父母 生我劬勞]”라는 구절을 접할 때마다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학생들이 나중에는 이 편을 생략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88 孝友列傳 王裒

163)강호(岡岵):형과 부친을 뜻하는 시어이다. 시경》 〈척호(陟岵)는 효자가 부역을 나가서 어버이와 형을 잊지 못하는 심정을 노래한 것인데, 그 첫째 장에 “저 민둥산에 올라가서 아버님 계신 곳을 바라본다.[陟彼岵兮 瞻望父兮]”라고 하였고, 셋째 장에 “저 산등성이에 올라가 형님 계신 곳을 바라본다.[陟彼岡兮 瞻望兄兮]”라고 하였다.

164)가장……것:예기 제의(祭義)에 “효에는 세 가지가 있다. 어버이를 높여 드리는 것이 가장 크고, 어버이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그다음이고, 제대로 봉양하는 것이 마지막이다.[孝有三 大孝尊親 其次弗辱 其下能養]”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165)은혜만을……소인:논어 이인(里仁)에 “군자는 늘 나라의 법도를 생각하고, 소인은 늘 은혜만을 생각한다.[君子懷刑 小人懷惠]”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166)비간(比干):은(殷)나라 왕실의 종친으로, 포학하고 음란한 주왕(紂王)에게 간하다가 살해당하였다.

167)곽상보(郭尙父):당 덕종(唐德宗) 때 상보(尙父)의 호를 하사받은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킨다. 숙종(肅宗) 때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져서 곽 분양(郭汾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려 20년 동안 천하의 안위를 한 몸에 짊어진 불세출의 명장이다. 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168)약간……벼슬이고:한 고조(漢高祖) 말년에 여후(呂后)가 소하(蕭何) 사후에 누가 그 상국(相國) 자리를 이을 만한지 묻자, “조참(曹參)이 좋다.”라고 대답하였고, 그 다음을 물으니, “왕릉이 괜찮다. 하지만 약간 고지식한데, 진평이 도와주면 될 것이다.[王陵可 然陵少戇 陳平可以助之]”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 高祖本紀 혜제(惠帝) 6년(기원전 189)에 왕릉이 우승상(右丞相)에 임명되었는데, 여후가 여씨(呂氏)들을 왕으로 봉하려 했을 적에 왕릉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자, 여후가 그를 태부(太傅)로 옮겼다. 형식상으로는 승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명예직으로서 승상의 실권을 빼앗은 것이었다. 구첨(具瞻)은 모두가 쳐다보는 자리라는 뜻으로, 재상(宰相)을 뜻한다.

169)중용(中庸)으로……지위입니다:후한(後漢) 호광(胡廣)은 벼슬하는 30여 년 동안 여섯 황제를 섬기면서 사공(司空) 1회, 사도(司徒) 2회, 태위(太尉) 3회를 역임하고 태부(太傅)에 올랐는데, 당시에 “어떤 일이든 잘 모르면 백시에게 물어보라, 천하의 중용은 호공에게 있나니라.[萬事不理問伯始 天下中庸有胡公]”라는 말이 경사(京師)에 유행했다고 한다. 백시는 호광의 자이다. 後漢書 卷44 胡廣列傳 진배(眞拜)는 명예직이 아닌 실직이라는 말이다.

170)존몰(存歿)을 비교하기 어렵고:중국의 신하에게는 생전에 수여되었고, 신라의 왕에게는 사후에 추증된 만큼, 똑같은 차원에서 비교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말이다.

171)절피남산(節彼南山)의……합니다마는:자격도 없이 태사(太師) 등의 직위를 추증받아서 겸연쩍다는 뜻의 겸사이다. 시경 절남산(節南山)은 가보(家父)라는 주(周)나라 대부가 태사(太師) 윤씨(尹氏)를 풍자한 시인데, 그중에 “우뚝 솟은 저 남산이여, 바윗돌이 겹겹이 쌓여 있도다. 빛나고 빛나는 태사 윤씨여, 백성들이 모두 그대만을 쳐다보고 있도다.[節彼南山 維石巖巖 赫赫師尹 民具爾瞻]”라는 말과 “윤씨가 나라를 공평하게 다스려야 할 위치에 있었고 보면, 온 세상이 제대로 유지되도록 노력했어야 할 것이다.[秉國之均 四方是維]”라는 말과, “빛나고 빛나는 태사 윤씨여, 고르게 다스리지 못했으니 일러 무엇하겠는가.[赫赫師尹 不平謂何]”라는 말과, “가보가 이에 시를 지어서, 임금이 당한 환란의 원인을 구명하였노라.[家父作誦 以究王訩]”라는 말 등이 나온다. 삼사(三師)는 삼공(三公)과 유사한 말로,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를 가리킨다.

172)방저동해(放諸東海)의……바입니다:종(縱)으로 하면 상하의 끝까지 이르고, 횡(橫)으로 하면 사방의 끝까지 이르고, 후세에 전하면 끝나는 때가 없는 위대한 효의 도를 공경히 따르겠다는 말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대저 효의 덕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을 세워 두면 하늘과 땅에 가득 차고, 이것을 펼쳐 두면 사방의 바다에 퍼지고, 후세에 전하면 아침저녁이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을 밀어서 동해에 이르게 하면 동해와 수준(水準)이 같아지고, 이것을 밀어서 서해에 이르게 하면 서해와 수준이 같아지고, 이것을 밀어서 남해에 이르게 하면 남해와 수준이 같아지고, 이것을 밀어서 북해에 이르게 하면 북해와 수준이 같아진다.[夫孝 置之而塞乎天地 溥之而橫乎四海 施諸後世而無朝夕 推而放諸東海而準 推而放諸西海而準 推而放諸南海而準 推而放諸北海而準]”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173)제후장(諸侯章):제후의 효(孝)의 도리에 대해서 논한 효경(孝經) 제후장을 말한다.

174)효자전(孝子傳):숱하게 많지만 그중에서 전한(前漢) 소광제(蕭廣濟)의 효자전 15권을 비롯하여, 유향(劉向)․사각수(師覺授)․송궁(宋躬)․정집(鄭緝) 등의 효자전이 유명하다.

175)구족(九族)을……한다면:진성여왕이 성현을 본받아서 수신과 제가를 제대로 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이다. 서경 요전(堯典)에 “요 임금이 큰 덕을 제대로 밝혀 구족을 친애하자 구족이 화목하게 되었다. 구족이 화목해지자 기내(畿內)의 백성들을 평등하게 다스리며 밝게 가르쳤다. 백성들이 밝게 되자 만방의 제후국을 화목하게 하였다.[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라는 말이 나오는데, 극명준덕(克明俊德)은 수신, 친구족(親九族)은 제가, 평장백성(平章百姓)은 치국, 협화만방(協和萬邦)은 평천하에 해당한다. 구족(九族)은 고조(高祖)로부터 현손(玄孫)까지의 친척을 말한다.

176)부모님……시:시경 소완(小宛)은 난세에 형제가 서로 조심하며 화를 면하자고 다짐한 시인데, 그중에 “나의 마음 근심하고 슬퍼하면서, 옛날의 선인을 생각하노라. 먼동이 트도록 잠을 못 자고, 부모님 두 분을 생각하노라.[我心憂傷 念昔先人 明發不寐 有懷二人]”라는 말과,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어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는 말과, “두려워하고 마음 졸이며, 살얼음 밟듯 할지어다.[戰戰兢兢 如履薄氷]”라는 등의 말이 나온다.

177)적신(積薪)의……사라졌습니다마는:발해가 신라보다 위에 있게 될 걱정은 없어졌다는 말이다. 적신은 장작더미를 쌓을 때 나중의 장작이 맨 위에 놓이는 것처럼 뒤에 온 자가 오히려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급암(汲黯)이 공손홍(公孫弘)이나 장탕(張湯) 등 자신의 후배들이 자기보다 높은 지위로 계속 승진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는 한 무제(漢武帝)에게 “폐하가 신하들을 임용하는 것을 보면 마치 장작더미를 쌓는 것 같아서, 뒤에 온 자들이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陛下用群臣如積薪耳 後來者居上]”라고 호소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178)집목(集木)의……합니다:나무에서 혹시라도 떨어질까 조심하는 것처럼 매사에 조심하며 실수가 없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절실해진다는 말이다. 시경 소완(小宛)에 “우리는 온유하고 공손해야 한다, 나무 위에 아슬아슬 앉아 있는 것처럼. 우리는 무서워하며 조심해야 한다, 깊은 골짜기를 굽어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전전긍긍해야 한다, 얇은 얼음을 밟고 있는 것처럼.[溫溫恭人 如集于木 惴惴小心 如臨于谷 戰戰兢兢 如履薄氷]”이라는 말이 나온다.

179)근본을……것:예기 향음주의(鄕飮酒義)에 “동이에 청수(淸水)를 담아 두는 것은 사람들에게 예법이 나온 근본을 잊지 않도록 가르치기 위함이다.[尊有玄酒 敎民不忘本]”라는 말이 나온다.

180)법도를……있다:채숙(蔡叔)의 아들 채중(蔡仲)을 타이른 서경 채중지명(蔡仲之命)에 “소자 호야. 네가 조부인 문왕(文王)의 덕을 따르고 부친의 행실을 고쳐서 법도를 삼가며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명하여 동쪽 지방의 제후로 삼노니, 너의 봉국(封國)에 가서 공경히 행할지어다.[小子胡 惟爾率德改行 克愼厥猷 肆予命爾 侯于東土 往卽乃封 敬哉]”라는 말이 나온다.

181)율말(栗末):북사(北史) 권94 물길열전(勿吉列傳)에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신당서(新唐書)219 북적열전(北狄列傳) 흑수말갈(黑水靺鞨)금사(金史) 권1 서언(序言)에는 속말(粟末)로 되어 있다. 물길(勿吉)은 말갈(靺鞨)의 별칭이다.

182)이들은……칭하였습니다:걸사우(乞四羽)는 말갈(靺鞨) 추장의 이름으로 걸사는 성이요, 우는 이름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 권326 사예고(四裔考) 3 발해(渤海)에서는 구당서(舊唐書) 권199하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말갈(渤海靺鞨)신당서(新唐書) 권219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渤海)에 기록된 대로 걸사비우(乞四比羽)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10 당기(唐紀) 26에는 걸사북우(乞四北羽)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자치통감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앞서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 별종인 대조영이 영주로 옮겨져서 이곳에 거주하였다. 그러다가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기회에 대조영이 말갈의 걸사북우와 함께 무리를 모아 영주를 빠져나온 뒤 동쪽으로 이동해서 험준한 형세를 의지하고 근거지를 삼았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가 장군 이해고로 하여금 남은 무리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해고가 걸사북우를 공격하여 목을 베고는 군대를 이끌고서 천문령을 넘어 대조영을 압박하였다. 대조영이 이를 맞아 싸우니, 이해고가 크게 패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 대조영이 마침내 무리를 인솔하고 동쪽으로 동모산에 거하여 성을 쌓고 거하였다. 대조영은 용맹이 뛰어나고 전투를 잘하였으므로, 고구려와 말갈 사람들이 점점 그에게 귀의하였다. 땅은 사방 2천 리, 호구는 10여 만, 정예 군사는 수만에 이르렀다. 이에 대조영이 스스로 진국왕이라고 칭하였다.[初高麗旣亡 其別種大祚榮徙居營州 及李盡忠反 祚榮與靺鞨乞四北羽聚衆東走阻險自固 盡忠死 武后使將軍李楷固討其餘黨 楷固擊乞四北羽斬之 引兵踰天門領 逼祚榮 祚榮逆戰 楷固大敗 僅以身免 祚榮遂帥其衆 東居東牟山 築城居之 祚榮驍勇善戰 高麗靺鞨之人稍稍歸之 地方二千里 戶十餘萬 勝兵數萬人 自稱振國王]” 이진충은 거란의 추장 출신으로, 당나라의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과 송막 도독(松漠都督)을 역임하였는데, 측천무후 만세등봉(萬歲登封) 1년(696)에 귀성주 자사(歸誠州刺史) 손만영(孫萬榮)과 함께 영주 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한 뒤 무상가한(无上可汗)이라고 자칭하며 위세를 과시하였고, 이진충이 죽은 뒤에는 손만영이 대신 무리를 이끌다가 장구절(張九節)의 토벌을 받고 가노(家奴)에게 살해되었다. 진국(振國)은 진국(震國)이라고도 하는데, 대조영이 진국의 왕이라고 일컬은 것은 측천무후 성력(聖歷) 1년(698)의 일이다. 그리고 그 뒤 당 현종(唐玄宗) 선천(先天) 2년(713)에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임명하였고, 그의 관할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아 도독(都督)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참고로 걸사우와 대조영 부친의 관련 내용이 신오대사(新五代史) 권74 사이 부록(四夷附錄) 발해(渤海)에 실려 있어 눈길을 끄는데, 그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측천무후 때 거란이 북쪽 변방을 공격하자, 고구려의 별종인 대걸걸중상이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서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통치하였다. 무후가 장수를 보내 걸사비우를 격살하고, 대걸걸중상 역시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 대조영이 그 뒤를 잇고는 걸사비우의 무리까지 모두 차지하였는데, 그 무리 40만 인이 읍루를 점거하고는 당나라에 신복하였다.[武后時 契丹攻北邊 高麗別種大乞乞仲象與靺鞨酋長乞四比羽走遼東 分王高麗古地 武后遣將擊殺比羽 而乞乞仲象亦病死 仲象子祚榮立 因竝有比羽之衆 其衆四十萬人 據挹婁臣于唐]”

183)만리의……세상:성군(聖君)이 출현하여 난세를 평정하고 천하를 안정시킨 시대라는 말이다. 회남자 병략훈(兵略訓)에 “성인의 용병은 마치 머리를 빗고 논밭을 김매는 것과 같아서 제거하는 것은 적고 이롭게 하는 것은 많다.[聖人之用兵也 若櫛髮耨苗 所去者少 而所利者多]”라는 말이 나온다. 만리는 천하를 뜻한다. 천하가 통일되어 풍조가 같아지는 것을 만리동풍(萬里同風)이라고 한다.

184)10년……들었습니다:중국의 은덕을 한참 동안 받고는 이에 감격하여 귀순했다는 말이다. 시경 반수(泮水)에 “저 부엉이 퍼덕거리며 날아와서, 반궁(泮宮) 숲 속에 모여 앉도다. 우리 뽕나무 오디를 먹고, 나에게 좋은 소리를 안겨 주도다.[翩彼飛鴞 集于泮林 食我桑黮 懷我好音]”라는 말이 나온다.

185)강관(絳灌)과……인내하였습니다:신라가 발해와 함께 같은 반열에 서게 된 것만도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는 갈등을 빚지 않고 서로 잘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그대로 꾹 참으면서 지내왔다는 말이다. 강관(絳灌)은 한(漢)나라의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관영(灌嬰)의 합칭이다. 사기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회음후 한신(韓信)은 강후나 관영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언젠가 한신이 장군 번쾌의 집에 들르자, 번쾌가 무릎 꿇고 절하면서 영송하였으며, 말끝마다 신하라고 칭하면서 ‘대왕께서 신의 집에 영광스럽게 왕림해 주시다니요.’라고 하였다. 한신이 문을 나서며 쓴웃음을 지으면서 ‘내가 살아서 그만 번쾌 따위와 한 줄에 서게 되다니.’라고 하였다.[羞與絳灌等列 信嘗過樊將軍噲 噲跪拜送迎 言稱臣 曰大王乃肯臨臣 信出門笑曰 生乃與噲等爲伍]”라는 말이 나온다. 염인(廉藺)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의 합칭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에는 원만하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화해하여 잘 지내게 된 고사가 전하는데,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지금 두 호랑이가 싸우면 형세상 둘 다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염파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피하는 이유는 국가의 위급을 우선하고 사사로운 원한은 그다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今兩虎共鬪 其勢不俱生 吾所以爲此者 以先國家之急而後私讐也]”라는 인상여의 말이 나온다.

186)발해는……되는데도:발해는 마치 순금을 거르고 남은 모래와 자갈[沙礫] 같아서 신라와는 천양지차가 나는 만큼 아예 비교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운니(雲泥)는 한 사람은 하늘 위의 구름에 올라타고 한 사람은 땅 위의 진흙탕을 밟고 다닌다는 승운행니(乘雲行泥)의 준말로, 둘 사이의 지위가 현격히 차이가 날 때 쓰는 말이다.

187)어찌……것입니다:신라가 조회 때에 발해와 함께 같은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발해가 워낙 사양하는 염치가 없이 무례하게 굴기 때문에 감정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격좌(隔坐)는 상피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자리를 서로 떨어지게 하여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피혐하는 것을 말한다. 삼국 시대 오(吳)나라 사람 기척(紀陟)이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자, 그 부친 기량(紀亮)이 상서령(尙書令)인 점을 감안하여 병풍으로 그들 사이를 가로막아서 격리되게 하라고 조령(詔令)을 내린 양척격좌(亮陟隔坐)의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48 吳書 孫皓傳 註 강계(降階)는 주인이 손님을 영접하면서 자신은 동계(東階)를 밟고 손님은 서계(西階)를 밟게 할 경우 손님이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동계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188)소가……않냐:신라의 덕이 비록 쇠했어도 발해를 혼내 줄 만한 잠재력은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숙향(叔向)이 노(魯)나라 자복혜백(子服惠伯)에게 “소가 비록 수척해졌다고 하더라도, 돼지의 위에 엎어진다면, 돼지가 겁이 나서 죽지 않겠는가.[牛雖瘠 僨於豚上 其畏不死]”라고 은근히 위협한 이야기가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3년에 나온다.

189)쥐가……것:발해가 무례하니 탐욕스러운 쥐와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시경 상서(相鼠)에 “쥐를 봐도 몸을 갖추고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사람으로서 예가 없다면, 빨리 죽지 않고 무얼 하는고.[相鼠有體 人而無禮 人而無禮 胡不遄死]”라는 말이 나오는데, 고운이 단장취의한 것이다.

190)노(魯)나라의……것:노나라 사람이 장부(長府)라는 창고를 만들 적에 민자건(閔子騫)이 “옛것을 그대로 쓰면 어때서 하필 새로 지어야만 하는가.[仍舊貫如之何 何必改作]”라고 말하니, 공자가 “저 사람이 말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말을 하면 꼭 도리에 맞게 한다.[夫人不言 言必有中]”라고 평한 말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191)주(周)나라의……것:시경 문왕(文王)에 “주나라가 비록 오래되긴 하였지만, 하늘의 명이 다시 새롭게 되었도다.[周雖舊邦 其命維新]”라는 말이 나온다. 주나라는 물론 신라를 비유한 말이다.

192)융적(戎狄)의……법이니:춘추좌씨전 민공(閔公) 원년에 “융적은 승냥이나 늑대와 같은 존재이니 욕심을 끝까지 채워 줄 수가 없고, 중국의 제후들은 친근하게 대해야 할 대상이니 포기하면 안 된다.[戎狄豺狼 不可厭也 諸夏親暱 不可弃也]”라는 말이 나온다.

193)등국(滕國)이……끄집어내어:발해가 여러 가지 이유를 끌어대면서 신라보다 윗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11년에 “등후와 설후가 노나라에 와서는 서로들 자기가 어른이라며 석차(席次)를 다투었는데, 설후는 ‘우리나라가 먼저 봉해졌소.’라고 하였고, 등후는 ‘우리는 주나라 왕실에서 복관(卜官)의 우두머리를 지냈고, 설나라는 주나라 왕실과 다른 성씨이니, 우리가 아랫자리에 있을 수 없소.’라고 하였다.[滕侯薛侯來朝 爭長 薛侯曰 我先封 滕侯曰 我周之卜正也 薛庶姓也 我不可以後之]”라는 말이 나온다.

194)갈왕(葛王)의……제공하였는데:발해가 어린애 장난처럼 억지를 부려 사람들의 비웃음을 자초했다는 말이다. 진서(晉書) 권77 제갈회열전(諸葛恢列傳)에 “왕도(王導)가 언젠가 제갈회와 장난으로 족성의 선후를 다투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왕갈이라고 말하지 갈왕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제갈회가 응수하기를 ‘사람들이 마려라고 말하지 않고 여마라고 하지만 어찌 나귀가 말보다 낫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들이 허물없이 친하게 지낸 것이 이와 같았다.[導嘗與恢戱爭族姓曰 人言王葛 不言葛王也 恢曰 不言馬驢 而言驢馬 豈驢勝馬耶 其見親狎若此]”라는 말이 나온다.

195)호시국(楛矢國):호시를 공물로 바치는 숙신씨(肅愼氏)의 나라라는 말로, 여기서는 발해를 가리킨다. 진(陳)나라 제후의 궁정(宮庭)에 떨어져 죽은 송골매의 몸에 돌화살 촉[石弩]의 호시(楛矢)가 박혀 있었는데, 공자(孔子)가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송골매가 멀리서 왔다. 이는 숙신씨의 화살이다. 옛날 무왕이 상나라를 정복한 뒤 사방 이민족과 교통하며 각기 토산물로 공물을 바치게 하면서 직분을 잊지 않게 하였다. 이에 숙신씨가 호시와 석노를 바치게 되었다.[隼之來也遠矣 此肅愼氏之矢也 昔武王克商通道于九夷百蠻 使各以其方賄來貢 使無忘職業 於是肅愼氏貢楛矢石砮]”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국어(國語) 노어 하(魯語下)에 나온다. 호시는 호목(楛木)으로 만든 화살이다. 호목은 가시나무에 속한 나무로, 질겨서 잘 부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196)남월(南越)을……뜻:당나라가 발해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당 현종(唐玄宗) 선천(先天) 2년(713)에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임명하며 타협했던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가 무제(武帝)라고 자칭하며 중국의 변방을 침입하자 여후(呂后)가 군대를 보내 토벌하였으나 실패하고 회군하였는데, 문제(文帝) 때에 다시 육가(陸賈)를 사신으로 보내 수호(修好)하면서 자치를 허락하니, 조타가 그때부터는 제호(帝號)를 버리고 다시 남월왕으로 처신하면서 춘추(春秋)로 중국 조정에 조회했던 고사가 사기 권113 남월열전(南越列傳)에 나온다.

197)동조(東曹)를……답변:신라의 윗자리를 원하는 발해의 요청을 거절한 당 소종(唐昭宗)의 비답을 비유한 말이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모개(毛玠)가 동조연(東曹掾)이 되어 최염(崔琰)과 함께 인사 행정을 공정히 행하면서부터 사람들이 염절(廉節)을 스스로 닦는 풍조가 형성되자, 태조(太祖)가 “사람을 이와 같이 써서 천하의 사람들이 저절로 다스려지게 하고 있으니, 내가 할 일이 또 뭐가 있겠는가.[用人如此 使天下人自治 吾復何爲哉]”라고 감탄하기까지 하였는데, 청탁이 일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예전에는 서조가 윗자리에 있고 동조가 그다음이었으니 동조를 없애는 것이 좋겠다.[舊西曹爲上 東曹爲次 宜省東曹]”라고 강변하자, 태조가 “해도 동쪽에서 떠오르고, 달도 동쪽부터 차오르며, 사람들이 방위를 말할 때에도 동쪽을 먼저 거론한다. 동조를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日出於東 月盛於東 凡人言方 亦復先東 何以省東]”라고 하고는 오히려 서조(西曹)를 없앴다는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12 魏書 毛玠傳

198)감화를……오릅니다:진성여왕(眞聖女王)의 오빠인 헌강왕(憲康王)이 살아서 이런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힌 것이 더욱 유감스럽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가성(佳城)은 묘지를 가리킨다. 등공(滕公)으로 불린 서한(西漢)의 하후영(夏侯嬰)이 생전에 땅을 파다가 석곽(石槨)을 얻었는데, 거기에 “가성이 어둠에 묻혔다가 3천 년 만에 해를 보리니, 아, 등공이 이 방에 거하리로다.[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 지내게 했다는 등공가성(滕公佳城)의 전설이 전한다. 西京雜記 卷4

199)연(燕)과……적에:참고로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 예(濊)에 “한나라 초기에 크게 혼란해지자, 연․제․조 지역의 사람들 중에 수만 가구나 살던 곳을 떠나 피해 왔는데, 그중에서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기준(箕準)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漢初大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而燕人衛滿擊破準而自王朝鮮]”라는 말이 있다.

200)합포(合浦)의……것:합포의 바닷속에서 진주가 많이 나왔으나 어느 태수가 탐욕을 부리자 점차 교지군(交阯郡)으로 진주가 옮겨 갔는데, 후한(後漢)의 맹상(孟嘗)이 합포에 부임하여 폐단을 개혁하고 청렴한 정사를 펼치자, 그동안 생산되지 않던 진주가 예전처럼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孟嘗

201)연진(延津)의……것:진(晉)나라 장화(張華)와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라는 암수의 두 보검을 각각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죽고 나서 두 보검이 절로 연평진(延平津) 속으로 날아 들어가서 두 마리 용으로 바뀐 채 유유히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拾遺記 卷10

202)진한(秦韓):양서(梁書) 권54 제이열전(諸夷列傳) 동이(東夷)에 “신라로 말하면, 그 선조는 본래 진한의 종족이었다. 진한은 또 진한이라고도 하는데, 중국과 만리의 거리에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진나라 시대에 부역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마한으로 오자, 마한이 역시 동쪽 경계를 떼어 주며 거주하게 하였는데, 그들이 진나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한이라고 이름 붙였다.[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故 名之曰秦韓]”라는 말이 나온다. 또 고운집 권1 숙위하는 학생을 번국으로 방환해 주기를 주청한 장문[奏請宿衛學生還蕃狀]에 “소방(小邦)의 땅은 진한이라고 칭해지고 도는 추로를 흠모합니다.[當蕃 地號秦韓 道欽鄒魯]”라는 말이 보인다.

203)이곳에서는……있었으니:삼국지(三國志) 위지(魏書) 동이전(東夷傳)에 “그곳의 사람들은 몸집이 모두 크고 의복이 청결하였으며 머리를 길게 길렀다.[其人形皆大 衣服淸絜 長髮]”라는 말이 나온다.

204)오색(五色)의 붓: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비유한 말이다. 남조(南朝)의 문학가 강엄(江淹)이 송(宋)․제(齊)․양(梁) 3조(朝)에 걸쳐서 문명(文名)을 떨쳤는데, 만년에 이르러 꿈속에서 곽박(郭璞)이라고 자칭하는 이에게 오색필(五色筆)을 돌려주고 난 뒤로는 문재(文才)가 감퇴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205)국어(國語)의 효경(孝經):본국의 말로 기록된 효경이라는 뜻이다. 당 현종(唐玄宗)이 직접 주해(註解)한 효경을 신문왕(神文王)에게 하사한 일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인데, 고운집 권1 사은표(謝恩表)에 그 내용이 나온다.

206)상두(床頭)의 주역(周易):진(晉)나라 왕담(王湛)의 고사이다. 왕담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숨겼으므로, 형제 친척 모두가 그를 바보로 취급하였다. 형의 아들인 왕제(王濟)가 문재를 자부하던 중에 왕담을 찾아왔다가 책상머리에 주역이 있는 것을 보고서[見床頭有周易] 처음에는 무시했으나,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본 뒤에 워낙 조예가 깊고 차원이 높아서 자기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음을 절감하고는, “집안에 명사가 계시는데, 30년이 되도록 몰라 뵙다니, 이는 나의 죄이다.[家有名士 三十年而不知 濟之罪也]”라고 탄식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晉書 卷75 王湛列傳

207)노교(老敎):노자(老子)의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참고로 신라 효성왕(孝成王) 2년(738)에 당 현종(唐玄宗)이 사신을 보내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등의 책을 왕에게 준 일이 있다.

208)신문(身文):사람의 말을 가리킨다. “말이란 인간 사회에서 각자 자신의 몸을 꾸미는 것이다. 지금 내가 몸을 숨기려 하는데, 말을 어디에 쓰겠는가.[言 身之文也 身將隱 焉用文之]”라는 개지추(介之推)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24年

209)심화(心畫):글 또는 글씨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권5 문신(問神)의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따라서 소리와 그림으로 나타난 것만 보아도, 그 사람이 군자인지 소인인지 알 수가 있다.[言心聲也 書心畫也 聲畫形 君子小人見矣]”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210)호리병 속의 객: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을 말한다. 그가 시장에서 약을 파는 선인(仙人) 호공(壺公)을 따라 그의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신선 세계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 고대광실 안에서 맛좋은 술과 음식을 실컷 먹고 나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神仙傳 壺公

211)우송(虞松)이……것:삼국 시대 위(魏)나라 중서령(中書令) 우송이 표문을 다시 지어 오라는 사마경왕(司馬景王)의 명을 받고 고민하다가 중서시랑(中書侍郞) 종회(鍾會)가 다섯 글자를 고쳐 준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冊府元龜 卷551 才敏 대본에는 ‘虞松五守之難’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으로 보아 뜻이 통하지 않기에 ‘守’를 ‘字’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12)곡영(谷永)이……것:한나라 곡영이 “천문 현상과 관련하여 경씨의 역에 정통하였으므로 재이에 대해서 설명을 잘하였는데, 전후에 걸쳐서 위에 상소하여 건의한 것이 40여 회에 이르렀다.[其於天官 京氏易最密 故善言災異 前後所上四十餘事]”라는 말이 한서(漢書) 권85 곡영전(谷永傳)에 나온다. 경씨의 역은 한나라 맹희(孟喜)의 문인 초연수(焦延壽)에게서 역(易)을 배운 경방(京房)이 창립한 금문(今文) 역학(易學)을 말한다. 또 곡영의 글에 대해서, “정성이 내면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그 글과 말이 깊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점이 있다.[精誠由中 故其文語 感動人深]”라고 평한 말이 후한(後漢)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권13 초기(超奇)에 나온다.

213)아직……희망하였습니다:신라 헌강왕(憲康王)이 자신의 실력을 당 희종(唐僖宗)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직접 글을 지어 사신 편에 올리려고 했다는 말이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조식(曹植)이 자신의 실력을 시험 삼아 한번 발휘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는 뜻으로 명제(明帝)에게 구자시표(求自試表)를 올린 고사가 있다. 三國志 魏書 卷19 陳思王植傳 또 후한(後漢) 제오륜(第五倫)이 광무제(光武帝)의 조서를 읽을 때마다 “이분은 성군이시다. 한번 뵙기만 하면 막힘없이 통할 텐데.[此聖主也 一見決矣]”라고 탄식하자, 동료들이 “자네는 주장(州將)에게 말을 해도 설득시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만승천자를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爾說將尙不下 安能動萬乘乎]”라고 비웃었는데, 이에 제오륜이 “아직 지기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 도가 서로 같지 않은 탓이다.[未遇知己 道不同故耳]”라고 답변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41 第五倫列傳 주장(州將)은 군장(郡將) 즉 군수(郡守)를 가리킨다.

214)동쪽의……듣고는:당 희종(唐僖宗) 중화(中和) 4년(884)에 하동 절도사(河東節度使) 이극용(李克用)이 황소의 군대를 토벌하여 완승을 거둔 뒤에 자결한 황소의 머리를 희종에게 바치자, 희종이 종묘에 바치고 고하게 하였다. 호표(虎豹)는 황소의 반군을 뜻한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주공(周公)이 무왕(武王)을 도와 주왕(紂王)을 복주(伏誅)한 뒤에, “호랑이와 표범과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 멀리 쫓아내니, 천하가 크게 기뻐하였다.[驅虎豹犀象而遠之 天下大悅]”라는 말이 나온다. 경예(鯨鯢)는 잔 물고기를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는 큰 고래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황소를 가리킨다. 현륙(顯戮)은 처형한 뒤에 그 시체를 전시하는 것을 말한다.

215)서북으로……있었겠습니까:중국 황제에 대한 충성심만은 자부할 수 있었지만, 문자를 구사하여 표현하는 면에서 완벽을 기했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황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했다는 말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서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조정에 귀의하지 않고 등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 우공(禹貢)에 “마치 백관이 임금에게 조회하듯,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등 온갖 물줄기가 바다로 모여 든다.[江漢朝宗于海]”라는 말이 나오고, 강물이 1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향한다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성어(成語)가 순자 유좌(宥坐)에 나온다.

216)오산(鼇山):자라가 등 위에 받치고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동해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 고운집 권3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에 “계림은 땅이 오산의 옆에 있는지라, 예로부터 도교와 유교에 기특한 자가 많았다네.[鷄林地在鼇山側 儒仙自古多奇特]”라는 말이 나온다.

217)접수(鰈水)의 고장:우리나라를 옛날에 접역(鰈域)이라고 불렀다.

218)정삭(正朔)을 받드는 의례:중국에 귀순한다는 뜻으로 정기적으로 조회하며 조공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정삭은 정월 초하루라는 뜻으로, 역성혁명을 이룬 제왕이 새로 반포한 역법(曆法)을 가리키는데, 정삭을 받든다는 것은 그 통치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219)거서(車書)의 아름다움:온 세상이 중국과 같은 선진 문화권에 편입되어 혜택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8장의 “지금 온 천하가 같은 수레를 타고 같은 문자를 쓰게 되었다.[今天下車同軌 書同文]”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220)제오륜(第五倫)이……탄식했다:186쪽 주213 참조.

221)조칙을……하였는데:자식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황제가 조칙을 내려 신라의 왕을 교화시켰다는 말이다. 의방(義方)은 정도(正道)를 의미한다.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에 현대부(賢大夫) 석작(石碏)이 “자식을 사랑한다면 바른 도리로 가르쳐서 삿된 길로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于邪]”라고 위 장공(衛莊公)에게 충간한 명언이 나온다.

222)개원황제(開元皇帝)가……당시:당 현종(唐玄宗) 때 풍파 없이 바다가 고요한 것처럼 태평한 시대가 계속되었던 시기라는 말이다. 현종이 정치에 힘을 기울여서 치세(治世)를 이룩한 개원(開元 713~741) 연간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개원지치(開元之治)라고 일컫는다. 주 성왕(周成王) 때에 남만(南蠻)의 부족 국가에서 사신이 와서 주공(周公)에게 흰 꿩을 바치며, “하늘에 폭풍우가 일지 않고, 바다에 거센 물결이 일어나지 않은 지가 어언 3년이나 되었는데, 아마도 중국에 성인이 계셔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조회하러 왔다.”라고 말한 ‘해불양파(海不揚波)’의 고사가 전한다. 韓詩外傳 卷5

223)흥광(興光)과 헌영(憲英):신라 성덕왕(聖德王)과 경덕왕(景德王)의 이름이다. 성덕왕이 재위 35년에 죽고 아들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였으며, 효성왕이 5년 만에 죽자 동모제(同母弟)인 경덕왕이 즉위하였다. 성덕왕은 초명이 융기(隆基)였는데, 712년(성덕왕11) 3월에 당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어 왕명(王名)을 고치게 하자, 흥광이라고 개명하였다. 이해 8월에 당 예종(唐睿宗)이 태자 융기(隆基)에게 제위를 전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당 현종(唐玄宗)이다.

224)은구(銀鉤):아름다운 필적의 글을 뜻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색정(索靖)이 서법(書法)을 논하면서 “멋지게 휘돈 것이 흡사 은 갈고리와 같다.[婉若銀鉤]”라고 초서를 평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60 索靖列傳 대본에는 ‘銀駒’로 되어 있는데, 색정열전에 의거하여 ‘駒’를 ‘鉤’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25)경(卿)의……것이니:신라는 당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왕실의 형제 친척처럼 친근하게 대해야 할 나라라는 말이다. 노(魯)나라는 주공(周公)의 봉국(封國)이고 위(衛)나라는 주공의 동생 강숙(康叔)의 봉국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사를 보아도 형제처럼 비슷하다.[魯衛之政 兄弟也]”라고 평한 공자(孔子)의 말이 나온다.

226) 대력(大曆):당 대종(唐代宗)의 연호로 766년에서 779년까지이다.

227)전모(典謨)와 훈고(訓誥):서경 요전(堯典)순전(舜典)의 전(典)과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의 모(謨)와 이훈(伊訓)의 훈(訓)과 탕고(湯誥)강고(康誥) 등의 고(誥)를 합칭한 말로 옛날 성현의 말씀, 즉 경전의 글을 뜻한다.

228)원좌(瑗座):최원(崔瑗)의 자리라는 뜻으로, 좌우명을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최원은 잠명(箴銘)을 잘 지었는데, 특히 “남의 단점은 지적하지 말고, 나의 장점은 얘기하지 말라. 남에게 베푼 것은 부디 기억하지 말 것이요, 남에게 받은 것은 모쪼록 잊지 말 것이다.[無道人之短 無說己之長 施人愼勿念 受施愼勿忘]”로 시작되는 그의 좌우명은 유명하다.

229)사신(師紳):전손사(顓孫師)의 띠라는 뜻으로, 비망록(備忘錄)을 가리킨다. 전손사는 자장(子張)의 성명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스승인 공자의 말을 “자장이 띠에 적었다.[子張書諸紳]”라는 기록이 나온다.

230)식알(式遏):식알구학(式遏寇虐)의 준말로, 악인의 발호(跋扈)를 막는 것을 말한다. 시경 민로(民勞)에 “남을 해치고 포악하게 구는 자를 막아서, 백성들이 근심하게 하지 말지어다.[式遏寇虐 無俾民憂]”라는 말이 나온다.

231)시옹(時雍):성군의 화평한 정치를 말한다. 서경 요전(堯典)에 “백성들이 성군의 덕에 크게 감화된 나머지 온 누리에 화평한 기운이 감돌았다.[黎民於變時雍]”라는 말이 나온다.

232)신은……상황에서:찬란했던 신라의 장구한 역사가 마치 거대한 고목처럼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데도, 정작 진성여왕(眞聖女王) 자신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에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이 무력감을 느끼며 세월만 보내고 있다는 말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내가 어찌 뒤웅박처럼 한곳에 매달린 채 먹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233)백제(百濟)가……표문:이 글은 고운의 작품이 아닌데, 문집에 잘못 수록되었다. 백제의 왕을 위해서 지을 리도 없거니와 시간적으로도 고운과 약 400년의 격차를 보이고 있고, 문체나 어휘를 구사하는 면에서 보더라도 고운의 솜씨가 결코 아니다.

234)여례(餘禮):백제 개로왕(蓋鹵王) 때의 왕족이다. 472년(개로왕18)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진(南進)을 막기 위해 군사 원조를 요청하러 북위에 가서 효문제(孝文帝)에게 표문을 올렸으나 실패하였다. 三國史記 卷25 蓋鹵王本紀

235)파진악(破陣樂):당나라의 악곡(樂曲)인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의 준말로, 파진무(破陣舞)라고도 하는데, 당 태종(唐太宗)이 진왕(秦王)의 신분으로 유무주(劉武周)를 정벌할 적에 직접 지어서 군중에서 부르게 했던 노래이다. 그 뒤에 황제로 즉위하고 나서 다시 여재(呂才)에게 이 노래에 음률을 맞추게 하고 이백약(李百藥)과 우세남(虞世南)과 저량(褚亮)과 위징(魏徵) 등에게 가사를 짓게 하여 칠덕무(七德舞)로 이름을 바꾸고는 연회 때마다 반드시 이 무곡(舞曲)을 연주하게 하였다. 정관(貞觀) 1년(627)에 군신(群臣)에게 연회를 베풀면서 처음으로 진왕파진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시신(侍臣) 봉덕이(封德彛)가 문악(文樂)보다는 무악(武樂)이 더 낫다고 하자, 태종이 “문무의 도는 시대에 맞춰서 행해야 한다.[文武之道 各隨其時]”라고 말한 내용이 구당서(舊唐書) 권28 음악지(音樂志) 1에 나온다.

236)항잔(航棧):배를 타고 가고 잔도(棧道)를 건너간다는 말로, 육로와 해로로 통행하는 것을 말한다. 산 넘고 바다 건넌다는 제산항해(梯山航海)와 같은 말이다.

237)명령(螟蛉)의 새끼:생도의 별칭이다. 시경 소완(小宛)의 “언덕 가운데의 콩을 서민들이 거두어 가는 것처럼, 명령의 새끼를 과라가 업어 데리고 가서 키우니, 그대도 아들을 잘 가르쳐서, 좋은 방향으로 닮도록 하라.[中原有菽 庶民采之 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옛사람들은 과라(蜾蠃) 즉 나나니벌이 명령(螟蛉) 즉 뽕나무 벌레를 데려다가 자기의 양자로 삼아 길러서 과라로 만든다고 믿었다.

238)침신(琛贐):공물(貢物)로 보내는 진귀한 보배라는 뜻이다.

239)미름(米廩):우순(虞舜)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하는 학교 이름이다. 주대(周代) 노(魯)나라에서도 그 이름을 답습했다고 한다. 예기 명당위(明堂位)에 “미름은 우순씨 시대의 학교이다.[米廩 有虞氏之庠也]”라는 말이 나온다.

240)직산(稷山) 아래:직하(稷下)라는 말과 같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이 이곳에 학궁(學宮)을 세웠다.

241)사술(四術):시(詩)․서(書)․예(禮)․악(樂)의 네 가지 경술(經術)을 말한다.

242)입락(入洛)의 현재(賢才):진(晉)나라의 저명한 문학가인 육기(陸機)와 육운(陸雲) 형제를 말한다. 육기가 아우 육운과 함께 낙양(洛陽)에 들어가서[入洛] 사공(司空)으로 있던 장화(張華)를 찾아가자, 장화가 한 번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오래 사귄 사람처럼 예우하며 제공(諸公)에게 천거했던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58 吳書 陸遜傳 陸抗 註

243)기욕(沂浴)의 숫자:10여 명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5, 6명과 아이들 6, 7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드리는 곳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자, 공자가 감탄하며 허여한 내용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244) 개원(開元):당 현종(唐玄宗)의 연호로 713년에서 741년까지이다.

245)구준(衢樽):사람마다 실컷 마시도록 대로(大路)에 놓아둔 술동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어진 정사를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회남자 무칭훈(繆稱訓)에 “성인의 도는 마치 대로에 술동이를 놔두고서 지나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에 따라 각자 적당히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置尊邪 過者斟酌 多少不同 各得所宜]”라는 말이 나온다.

246)가정에서는…… 되었으며:가정에서 학부형들이 자제들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말이다. 맹자(孟子)가 어려서 공부를 중단하고 집에 돌아오자, 맹자의 어머니가 베틀[機]에서 짜던 베를 칼로 자르고는 “네가 공부를 중단한 것은, 내가 이 베를 자른 것과 같다.[子之廢學 若吾斷斯織也]”라고 하였는데, 맹자가 이 말을 듣고 분발하여 대유(大儒)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列女傳 卷1 鄒孟軻母 이를 단직(斷織) 혹은 단기(斷機)의 훈계라고 한다.

247)회초리로……것입니다:서경 순전(舜典)에 “관부(官府)에서는 채찍의 형벌을 행하고, 학교에서는 회초리의 처벌을 행한다.[鞭作官刑 扑作敎刑]”라는 말이 나온다. 또 한서(漢書) 권4 문제본기(文帝本紀)에, 문제의 시대에는 범법자(犯法者)가 없었으므로, “거의 형벌을 쓸 일이 없게끔 되었다.[幾致刑措]”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248)예법상……가운데:학생들이 향학열에 불타 스승을 찾아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예법상 학생이 와서 배운다는 말은 들었지만, 선생이 가서 가르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禮聞來學 不聞往敎]”라는 말이 나온다.

249)학문에……하였습니다:벼슬길에 먼저 나아가 출세하려고 경쟁했다는 말이다. 논어 자장(子張)의 “학문을 하고서 여유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學而優則仕]”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250)교상(膠庠):주대(周代)에 태학(太學)을 교라고 하고 소학(小學)을 상이라고 했는데, 뒤에는 학교의 뜻으로 통칭하였다.

251)도야(桃野):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하는 말이다. 중국 동남쪽에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145쪽 주77 참조.

252)행단(杏壇):공자(孔子)가 강학(講學)했던 곳으로, 학교를 비유한 말이다. 장자 어부(漁父)의 “공자가 치유의 숲 속에서 노닐며, 행단 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나니, 제자들은 글을 읽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孔子遊乎緇帷之林 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孔子絃歌鼓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행(杏)을 은행나무로 간주하여 학교에 이 나무를 많이 심었던 데에 반해서 중국에서는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다.

253)해인(海人)과……성명(姓名):바닷가 모퉁이에 있는 신라의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천객(泉客)은 연객(淵客) 즉 교인(鮫人)을 말한다. 교인이 남해 바닷속에서 베를 짜면서 울 때마다 눈물방울이 모두 진주로 변했다고 하는데, 세상에 나왔다가 주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한 그릇 가득 눈물을 쏟아 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남조 양(梁) 임방(任昉)의 술이기(述異記) 권상에 전한다. 본래는 연객이었는데,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해서 천객으로 고쳤다고 한다.

254)사람은……사실:이사(李斯)가 지은 상서진시황(上書秦始皇)에 “왕천하(王天下)하는 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기 때문에 그 덕을 밝힐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는 사방의 한계가 없고, 사람에게는 나라의 차이가 없어서, 사시에 아름다운 물건을 채우고, 귀신이 복을 내리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오제와 삼왕이 천하무적이 된 까닭이다.[王者不却衆庶 故能明其德 是以地無四方 人無異國 四時充美 鬼神降福 此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文選 卷20이 글의 제목이 고문진보(古文眞寶)에는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로 되어 있다.

255)관맹(寬猛):관대함과 준엄함이라는 뜻으로, 이를 상호 보완하여 융통성 있게 사태에 대처하면서 조화롭게 정책을 운용할 때에 쓰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0년에 “정책이 관대하면 백성이 방자해지는데, 방자해지면 준엄함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정책이 준엄하면 백성이 잔혹해지는데, 잔혹해지면 관대하게 베풀어야 한다. 관대함으로 준엄함을 보완하고 준엄함으로 관대함을 보완해야 하니, 정치는 이렇게 해서 조화되는 것이다.[政寬則民慢 慢則糾之以猛 猛則民殘 殘則施之以寬 寬以濟猛 猛以濟寬 政是以和]”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나온다.

256)안표(顔瓢):안회(顔回)의 바가지라는 뜻으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골목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한결같이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257)공석(孔席):공자의 자리라는 말로, 난세를 구하기 위해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을 형용할 때 쓰는 표현이다. 동한(東漢) 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戱)에 “공자가 앉은 자리는 따스해질 틈이 없고, 묵자의 집 굴뚝은 검게 그을릴 틈이 없다.[孔席不暖 墨突不黔]”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258)홍점(鴻漸)하는……생각하고:공부에 힘써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자들이 태양과 같은 중국 황제의 덕에 감복하여 그곳에 가서 학문을 성취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주역 점괘(漸卦)의 6효(爻)가 모두 기러기가 나아간다는 뜻의 홍점(鴻漸)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학문이 점차 발전하거나 관직이 계속 오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홍점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다. 또 태양의 운행에 따라 기러기가 9월에 남쪽으로 왔다가 1월에 북쪽으로 가기 때문에, 태양의 뒤를 좇는다고 하여 기러기를 수양(隨陽)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259)의술(蟻術)에……사모하여:의술은 예기 학기(學記)의 “개미 새끼는 때로 익힌다.[蛾子時術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개미는 새끼 때부터 부지런히 흙을 입에 물어다 쌓는 일을 익혀서 마침내 거대한 개밋둑을 완성한다는 뜻인데, 사람이 부지런히 공부해서 성공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아(蛾)는 의(蟻)의 옛 글자이다. 전(羶)은 누린내 나는 고기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백성이 선호하는 중국 황제라는 뜻으로 쓰였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개미는 양고기를 좋아하여 모여든다. 양고기는 누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순 임금의 행동에도 누린내 나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백성이 좋아하여 모여드는 것이다.[蟻慕羊肉 羊肉羶也 舜有羶行 百姓悅之]”라는 말이 나온다.

260)많은……있겠습니까:예기 예기(禮器)를 보더라도 “예법상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음을 밖으로 써서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禮之以多爲貴者 以其外心者也]”라는 말이 나오는 만큼, 이번에 최신지 등 8인을 보내는 것도 예법상 어긋난다고 할 수는 없으니 인원이 너무 많다고 혐의할 것은 없으리라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261)당구(堂構):긍당긍구(肯堂肯構)의 준말로, 가업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대고(大誥)의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262)천리 길을……법인데:장자 소요유(逍遙遊)에 “가까운 교외에 가는 자는 세끼 밥만 가지고 갔다가 돌아와도 배가 여전히 부르고, 백 리를 가는 자는 전날 밤에 양식을 찧어서 준비해야 하고, 천 리를 가는 자는 석 달 동안 양식을 모아야 한다.[適莽蒼者 三飡而反 腹猶果然 適百里者 宿舂糧 適千里者 三月聚糧]”라는 말이 나온다.

263)종을……것:식견이 협소하고 천박한데도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무모하게 덤빈다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이 지은 답객난(答客難)의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고, 바가지로 퍼서 바닷물을 재며, 풀 줄기로 종을 치는 격이다.[以管窺天 以蠡測海 以筳撞鍾]”라는 말을 전용(轉用)한 것이다. 文選 卷45

264)경쇠를……것:공자(孔子)가 위(衛)나라에서 도를 행하려는 뜻을 지니고 경쇠를 치고 있을 적에, 마침 삼태기를 메고 그 집 앞을 지나가던 은자(隱者)가 그 소리를 들어 보고는 “마음을 둔 것이 있구나, 경쇠를 두들김이여.[有心哉 擊磬乎]”라고 평한 대목이 논어 헌문(憲問)에 나온다.

265)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듯:한(漢)나라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 권16 난룡(亂龍)의 “호박(琥珀)은 지푸라기를 달라붙게 하고, 자석은 바늘을 끌어당기는 법이다.[頓牟掇芥 磁石引針]”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266)시루에……사정:후한(後漢) 범염(范冉)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내무(萊蕪)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되었던 그가 가난하게 살면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자, 사람들이 “범사운의 시루 속에서는 먼지만 풀풀 일어나고, 범 내무의 가마솥 속에는 물고기가 뛰어 논다.[甑中生塵范史雲 釜中生魚范萊蕪]”라고 노래를 지어 불렀던 기록이 전한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冉 사운(史雲)은 범염의 자이다

267)몸이……하고:학업에 정진하는 동안 굶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말한다. 포학(飽學)은 학식을 풍부하게 쌓는 것을 말한다. 뇌재기중(餒在其中)은 논어 위령공(衛靈公)의 “군자는 도를 행하려고 꾀할 뿐 먹을 것을 꾀하지는 않는다. 농사를 지어도 굶주림이 그 속에 있고, 학문을 해도 먹을 녹이 그 속에 있는 법이다. 그래서 군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을까 걱정할 뿐이요, 가난할까 걱정하지는 않는 것이다.[君子謀道不謀食 耕也 餒在其中矣 學也 祿在其中矣 君子憂道不憂貧]”라는 말에서 발췌한 것이다.

268)자취가……것이요:재능을 인정받고 인도를 받아 마침내 부끄럽지 않게 문장의 기예를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암투(暗投)는 밤에 길 가는 행인의 앞에다 명월주(明月珠)나 야광주(夜光珠)를 몰래 던져 주면 고맙게 생각하는 대신 모두 칼에 손을 대면서 좌우를 두리번거릴 것이라는 명주암투(明珠暗投)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재능을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질시와 비난을 받으며 소외당하는 것을 말한다. 史記 卷83 鄒陽列傳 예성이하(藝成而下)는 기예를 이루어 아랫자리에 거한다는 뜻으로, 예기 악기(樂記)의 “덕성을 이룬 사람은 상위에 거하고, 기예를 이룬 사람은 하위에 거한다.[德成而上 藝成而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269)솜옷을 껴입는 영광:아랫사람을 보살펴 주는 중국 조정의 배려를 뜻하는 말이다. 초(楚)나라가 소(蕭)를 칠 적에 군사들이 추위에 떨고 있자, 초왕(楚王)이 삼군(三軍)을 순찰하며 어깨를 어루만지고 위로해 주니, 군사들 모두가 마치 솜옷을 껴입은 것처럼[挾纊] 느끼면서 사기가 충천했다는 고사가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12년에 나온다.

270)신이……가운데:신라라는 좁은 땅을 벗어나 중국 도성으로 공부하러 떠나는 학생들이 부러워서 왕 자신도 뒤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는 뜻으로 비유한 말이다. 시경 벌목(伐木)에 “깊은 골짜기에서 꾀꼬리 훌쩍 날아올라, 높은 나뭇가지 위로 옮겨 가누나.[出自幽谷 遷于喬木]”라는 말이 나오고,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권1 학행(學行)에 “천리마처럼 되기를 소원하는 말은 역시 천리마의 무리요, 안회(顔回)처럼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역시 안회의 무리이다.[睎驥之馬亦驥之乘也 睎顔之人亦顔之徒也]”라는 말이 나온다.

271)절차(切瑳)한……못하겠습니다: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한번 발휘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서 이번에 장문(狀文)을 올리는 기회에 멋지게 작성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말이다. 기양(技癢)은 어떤 기예를 지닌 사람이 그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만나면 멋지게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에 손이 근질근질해서 참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절차는 절차탁마(切磋琢磨)와 같은 말이다.

272)소방(小邦)의……칭해지고:참고로 고운집 권1 조서 두 함을 내린 것을 사례한 표문[謝賜詔書兩函表]에 “진한(辰韓)이라는 이름은 진한(秦韓)의 잘못이다.[辰韓誤秦韓之名]”라는 말이 나온다.

273)추로(鄒魯):맹자(孟子)와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공맹의 가르침 즉 유교를 뜻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274)부사(父師):은나라 삼공(三公)의 하나인 태사(太師)와 같은 말로, 여기서는 기자(箕子)를 가리킨다.

275)공 사구(孔司寇)가……뿐이요:공자가 구이(九夷) 즉 동이족(東夷族)의 지역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누추한 곳이라고 걱정을 하니, “군자가 살고 있다면 그 땅이 누추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대답한 내용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노 정공(魯定公) 14년에 공자가 사구가 되어 재상의 일을 섭행한 일이 있다. 사구는 법무부 장관에 해당한다.

276)담자(郯子)는……자랑하였고:담자는 담나라 군주인 자작(子爵)이라는 뜻이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소공(昭公) 때 그가 노나라에 와서 관직을 새의 이름으로 명명한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자신의 먼 조상인 소호씨(少皥氏)의 행적을 거론하며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공자가 그를 찾아가서 배운 뒤에 “내가 듣건대, 천자의 관직이 정당함을 잃었을 때에는 사방의 이민족에게 배울 수도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역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吾聞之 天子失官 學在四夷 猶信]”라고 평한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昭公17年 담나라가 옛날 동해(東海) 부근에 있었고, 또 공자가 사이(四夷)라고 평했기 때문에 담자가 우리 동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고운이 이렇게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277)서생(徐生)은……따름입니다:서생은 진 시황(秦始皇) 때의 방사(方士) 서복(徐福)을 가리킨다. 서불(徐巿)이라고도 한다. 그가 동해(東海)의 삼신산(三神山) 즉 동방에 불사약이 있다고 진 시황을 속인 뒤에 동남동녀 수천 명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간 뒤에 소식이 없었다는 기록이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전한다. 완선(頑仙)은 처음 선도(仙道)를 맛본 서투르고 어설픈 신선이라는 뜻이다.

278)거서(車書)가 통일된 것:온 세상이 중국의 문화권으로 편입되어 하나로 통일되었다는 말이다. 178쪽 주219 참조.

279)충적(蟲跡):충서(蟲書) 혹은 충전(蟲篆)과 같은 말로, 진(秦)나라의 여덟 가지 서체(書體) 중의 하나이다.

280)결승(結繩):문자가 없던 태고 시대에 노끈으로 매듭을 맺어 사용했던 부호이다. 신농씨(神農氏)가 이 결승의 정사(政事)를 행하다가 복희씨(伏羲氏) 때에 이르러 팔괘(八卦)를 긋고 나무에 새긴 최초의 문자를 만들어서 서계(書契)의 정사를 행했다는 기록이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사기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보인다.

281)성기(成綺):비단결처럼 화려하게 문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남조 제(齊)의 시인 사조(謝脁)가 지은 시 만등삼산환망경읍(晩登三山還望京邑)에 “남은 노을 흩어져서 깁을 이루고, 맑은 강은 깨끗하기 명주 같아라.[餘霞散成綺 澄江靜如練]”라는 명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282)타산의……까닭에:중국에 가서 사우(師友)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성취하지는 못하고서 그저 유명한 문인의 글 중에서 명구를 뽑아 글을 엮어 보려고 애썼다는 말이다. 시경 학명(鶴鳴)에 “타산의 돌이 숫돌이 될 수 있다.[他山之石 可以爲錯]”라는 말과, “타산의 돌이 옥을 갈 수 있다.[他山之石 可以攻玉]”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중국에 가서 학업을 닦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인용되었다. 육해(陸海)는 바다와 같은 육기(陸機)의 글이라는 뜻으로, 문재가 풍부한 문인 혹은 그런 글을 뜻하는 말이다. 남조 양(梁)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권1에 “육기의 재능은 바다와 같고, 반악의 재능은 강과 같다.[陸才如海 潘才如江]”라고 평한 말이 있다.

283)조(趙)나라……일쑤였고:연(燕)나라 수릉(壽陵) 땅의 청년이 조(趙)나라 서울 한단(邯鄲)에 가서 그곳의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본래의 자기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린 나머지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한단 학보(邯鄲學步)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莊子 秋水

284)영(郢) 땅의……어려웠습니다: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대중가요인 하리(下里)파인(巴人)은 수천 명이 따라 부를 수 있었으나, “양춘이나 백설 같은 고상한 노래에 대해서는 국중에서 이것을 이어 화답하는 자가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다.[其爲陽春白雪 國中屬而和者 不過數十人]”라는 이야기가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에 나온다. 文選 卷45 영(郢)은 초(楚)나라 서울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물론 중국 도성의 비유로 쓰였다.

285)유사(有司)가……부끄러웠습니다:논어 태백(泰伯)에 “변두에 관한 일이라면 전담하는 관원이 별도로 있으니 당신이 신경 쓸 것이 없다.[籩豆之事 則有司存焉]”라는 뜻으로 증자(曾子)가 맹경자(孟敬子)에게 충고해 준 말이 있다. 변두에 관한 일이란 죽기(竹器)와 목기(木器)로 된 제기(祭器)를 진설하는 등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의식주 등 생활에 관한 일이라는 뜻으로 인용하였다. 환언하면 신라의 입장에서는 중국 유학생의 경비를 대는 일이 매우 부담이 되어서 중국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286)석상(席上)의 보배:자리 위의 보배라는 뜻으로,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뛰어난 학덕(學德)을 소유하게 된 유자(儒者)를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공자(孔子)에게 자리를 권하자, 공자가 모시고 앉아서 “유자는 자신의 자리 위에 진귀한 보배를 준비해 놓고서 초빙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禮記 儒行

287)이물(二物)로……텐데:회초리로 체벌을 가하는 등 엄한 훈도를 받으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하와 초 두 가지 회초리를 사용하여 위의를 수렴하게 한다.[夏楚二物 收其威也]”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하(夏)는 모양이 둥글고, 초(楚)는 모양이 모난 체벌 도구를 가리킨다.

288)대롱으로……합니다:아직 공부가 미흡하다는 비평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실력을 곧장 현실에 응용해 보고 싶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소년 시절에 도박 놀음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훈수를 하자, 그 어른들이 “대롱으로 표범을 보고는 그 반점 하나만을 보는 식이다.[管中窺豹 時見一斑]”라고 비웃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方正 그리고 진(晉)나라 차윤(車胤)이 입사(入仕) 전에 집안이 가난해서 불 밝힐 기름을 살 돈이 없자 항상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를 잡아 망사 주머니에 넣어서 그 불빛으로 책을 읽었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3 車胤列傳

289)열흘을 달리는:순자 수신편(修身篇)의 “천리마가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노둔한 말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그 거리를 따라잡을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 則亦及之矣]”라는 말을 인용한 것인데, 귀환하는 학생을 노둔한 말에 비유한 것이다.

290)한번 베는:후한(後漢) 반초(班超)가 “옛날 위강은 열국의 대부였는데도 여러 융족들을 안정시킬 수 있었는데, 더구나 위대한 한나라의 위엄을 받들고 가는 내가 무딘 칼이나마 한번 베는 데에 사용할 수 없겠는가.[昔魏絳列國大夫 尙能和輯諸戎 況臣奉大漢之威 而無鉛刀一割之用乎]”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後漢書 卷47 班梁列傳 班超 이 역시 무딘 칼을 귀환하는 학생들에게 비유한 것이다.

291)재삼(在三)의 의리:부(父)․사(師)․군(君)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라는 뜻이다. 국어(國語)7 진어(晉語) 1의 “사람은 세 분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니,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어버이는 낳아 주셨고, 스승은 가르쳐 주셨고, 임금은 먹여 주셨기 때문이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292)권백(勸百)의 정리:관원을 시험해 살피면서 권면하는 정리라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의 “날로 살펴보고 달로 시험하여 일솜씨에 걸맞게 급료를 주는 것은 백관을 권면하는 것이다.[日省月試 旣稟稱事 所以勸百工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293)요갈(遼碣):요동(遼東)과 발해(勃海) 인근에 있는 갈석(碣石)의 병칭이다.

294)부끄러울……되었습니다:우물 안 개구리라 할 신라의 학생들이 이제는 떳떳하게 중국에 가서 견문을 넓힐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요시(遼豕)는 귀할 것이 없는 미천한 요동(遼東)의 돼지라는 뜻으로, 흔히 겸사로 쓰이는 말이다. 요동의 돼지가 흰 새끼를 낳자 이를 기이하게 여긴 농부가 임금에게 바치러 가다가 하동의 돼지들이 모두 흰색인 것을 보고는 부끄럽게 여겨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후한서(後漢書) 권33 주부열전(朱浮列傳)에 나온다. 천앵(遷鸎)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훌쩍 날아오르는 꾀꼬리라는 뜻으로, 시경 벌목(伐木)에 꾀꼬리가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 위로 옮겨 간다.[出自幽谷 遷于喬木]”라는 말이 나온다.

295)닭을……할지라도:대본에는 ‘賤雞貴鶴’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賤雞貴鵠’의 오사(誤寫)이다. 가까운 신라보다는 멀리 있는 발해의 응시자를 더 특이하게 보고 귀하게 여겨서 우수한 성적으로 뽑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권18 제세편(齊世篇)에 “오늘날 세상의 학자들은 고대의 것은 높이고 현재의 것은 낮춘다. 또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기는데, 이는 고니는 멀리 있고 닭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도를 설하는 것이 공자(孔子)나 묵자(墨子)보다 더 깊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그들과 같이 할 수가 없고, 품행을 세운 것이 증자(曾子)나 안자(顔子)보다 더 높다고 하더라도 명성을 그들과 같이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속성은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천하게 여기고 멀리서 들은 것은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今世之士者 尊古卑今也 賤雞貴鵠 鵠遠而雞近也 使當今說道深於孔墨 名不得與之同 立行崇於曾顔 聲不得與之鈞 何則 世俗之性 賤所見 貴所聞也]”라는 말이 나온다.

296)어쩌면……있겠습니다:모래밭에서 금싸라기를 가려낸 것처럼 우수한 답안이 눈에 띄어서 급제자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말이다. 남조 양(梁)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권1에 “반악(潘岳)의 시는 비단을 펼쳐 놓은 것처럼 찬란해서 좋지 않은 대목이 없고, 육기(陸機)의 글은 모래를 헤치고 금을 가려내는 것과 같아서 왕왕 보배가 보인다.[潘詩爛若舒錦 無處不佳 陸文如披沙簡金 往往見寶]”라는 말이 나온다.

297)한비(韓非)가……어려웠으니:그동안 과거 급제자의 명단에 발해가 신라와 함께 끼어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사기 권63에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이 있다. 노자는 도가(道家)의 창시자이고, 한비는 법가(法家)의 집대성자이다. 노담(老聃)의 담은 노자의 자이다. 노자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이(耳)이다.

298)하언(何偃)이……일이었습니다:하언의 죽음이 유우의 앞에 있어서 유우가 환호작약하게 했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는 뜻으로, 과거 시험에서 신라가 발해에게 패배하여 발해를 기쁘게 하며 비웃게 한 것이 한스럽다는 말이다. 하언은 당시에 오소도(烏昭度)와 함께 급제한 신라의 이동(李同)을 가리키고, 유우는 수석을 차지한 오소도를 가리킨다. 유우는 남을 업신여기면서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다른 사람이 자기의 위에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瑀性陵物護前 不欲人居其上] 시중(侍中) 하언이 유우에 대해서 “여론을 검증해야 한다.[參伍時望]”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유우가 “나에게 여론을 검증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我於時望何參伍之有]”라고 격분하여 마침내 관계를 단절하기도 했다. 그런데 등에 종기가 발작해서 위독한 상태에 있던 유우가 하언 역시 똑같은 병을 앓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보다 먼저 죽은 것에 대해서 “환호작약하며 소리치다가 죽었다.[歡躍叫呼 於是亦卒]”라는 기록이 전한다. 宋書 卷42 劉穆之列傳 劉瑀 참고로 고운집 권1에 북국이 위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을 사례하며 올린 표문[謝不許北國居上表]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여기에서 거상(居上)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북국(北國)은 물론 발해를 가리킨다.

299)키로……합니다만:진(晉)나라 왕탄지(王坦之)와 범계(范啓)가 서로 앞을 양보하면서 걸어가다가 뒤에 처지게 된 왕탄지가 “곡식을 까불며 바람에 날리면 겨와 쭉정이가 앞에 있게 마련이다.[簸之揚之 糠秕在前]”라고 한마디 하자, 범계가 “조리질하며 물에 흔들면 모래와 자갈이 뒤에 있게 마련이다.[洮之汰之 沙礫在後]”라고 응수했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排調

300)어떻게……있겠습니까: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세상이 모두 흐리다면 어찌하여 그 진흙을 휘저어서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으며, 사람들이 모두 취했다면 어찌하여 그 술지게미를 먹거나 박주를 마시지 않고서, 무슨 까닭으로 깊이 생각하고 고상하게 행동하여 스스로 추방을 당하게 한단 말인가.[世皆濁 何不淈其泥 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 而歠其醨 何故深思高擧 自令放爲]”라는 말이 나온다.

301)촉칭(蜀稱):촉나라의 저울이라는 뜻으로, 촉한(蜀漢)의 재상이었던 제갈량(諸葛亮)의 공평무사한 마음을 말한다. 정관정요(貞觀政要) 권5 공평(公平)에 “옛날 제갈공명은 소국의 재상이었는데도 ‘나의 마음은 저울과 같아서 사람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할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지금 나는 대국을 다스리고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昔諸葛孔明小國之相 猶曰吾心如稱 不能爲人作輕重 況我今理大國乎]”라는 당 태종(唐太宗)의 말이 나온다.

302)진대(秦臺):진나라 누대 위의 거울이라는 진대경(秦臺鏡)의 준말로, 진 시황(秦始皇)이 사람의 마음속을 환히 비추어 보았다는 전설의 거울을 가리키는데, 보통 관리들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303)섬계(蟾桂)의 주인:과거 급제자를 뽑는 시관(試官)을 비유하는 말이다. 섬계는 두꺼비가 사는 월궁의 계수나무라는 뜻으로, 그곳의 계수나무 가지를 꺾었다는 섬궁절계(蟾宮折桂)의 준말인데,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장원을 한 극선(郤詵)에게 진 무제(晉武帝)가 소감을 묻자, “달나라 계수나무 숲의 가지 하나를 꺾은 격이요,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을 캔 격이다.[猶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304)용문(龍門):황하 상류의 물이 급격히 쏟아져 내리는 협곡의 이름인데, 세 계단으로 되어 있는 그 폭포수를 물고기가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과거 급제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305)강장(絳帳):붉은 휘장이라는 뜻으로, 사석(師席)을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마융(馬融)이 항상 붉은 휘장을 드리워 앞을 가린 채 학생들을 가르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60上 馬融列傳

306)선을……취지: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의 “성 그 자체는 하늘의 도요, 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성의 경지에 이르면 굳이 애쓰지 않고도 중도를 행하며 생각하지 않고도 터득하여 자연스럽게 도에 합치되니, 이런 분이 성인이다. 반면에 성하려고 노력하는 자는 선을 택해서 굳게 잡고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라는 공자의 말을 발췌한 것이다. 선니(宣尼)는 공자의 별칭이다. 한 평제(漢平帝) 원시(元始) 1년(1)에 공자를 추시(追諡)하여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고 하였다.

307)오수(鼇岫):신라의 수도인 경주(慶州)의 금오산(金鼇山)을 가리킨다.

308)제명(鯷溟):제잠(鯷岑)의 바다라는 말로, 동해를 가리킨다. 제잠은 동방의 별칭이다.

309)악경(樂鏡)의 경지:수경(水鏡)과 같은 악광(樂廣)의 경지라는 뜻으로,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시의 세계라는 말이다. 진(晉)나라 위관(衛瓘)이 조정의 명사들과 담론하는 악광의 모습을 보고서 이미 없어진 청담(淸談)의 기풍이 다시 살아난 것 같다고 탄식하고는, 자제들에게 그를 찾아가 인사하게 하면서 “이 사람은 사람 중의 수경이다. 그를 보면 마치 운무를 헤치고 청천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此人 人之水鏡也 見之若披雲霧睹靑天]”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賞譽

310)구당(丘堂):공구(孔丘)의 전당(殿堂)이라는 뜻으로, 태학(太學)을 가리킨다.

311)선한……것:후한(後漢)의 공융(孔融)이 예형(禰衡)을 추천한 글에 “선한 사람을 보면 깜짝 놀라며 반기듯이 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기를 마치 원수 대하듯 한다.[見善若驚 疾惡若讐]”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37 薦禰衡表

312)감히……삼을:노 애공(魯哀公)이 공자의 말을 듣고 나서 “나의 세상을 마치도록 감히 선비를 가지고 희롱하는 대상으로 삼지 않으리라.[終沒吾世 不敢以儒爲戱]”라고 말한 내용이 예기 유행(儒行)에 나온다.

313)제천(濟川):험난한 물길을 거뜬히 건넌다는 뜻으로, 재상의 자격이 있는 인재를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은 고종(殷高宗)이 명재상 부열(傅說)에게 “내가 만일 큰 물을 건너게 되면 그대를 배와 노로 삼겠다.[若濟巨川 用汝作舟楫]”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書經 說命上

314)상진(桑津):해 뜨는 부상(扶桑)의 나루라는 뜻으로, 동방을 가리킨다.

315)괴시(槐市):중국 태학(太學)의 별칭이다. 한대(漢代)에 장안(長安)의 유생들이 토산물 등을 무역하던 시장인데, 그곳에 괴수(槐樹) 수백 그루가 줄 지어 서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316)금마문(金馬門):한(漢)나라 궁궐 문의 이름으로, 동방삭(東方朔), 주보언(主父偃), 엄안(嚴安) 등 문인들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기다리던 곳인데, 보통 학사원(學士院) 혹은 조정의 뜻으로 쓰인다.

317)거오산(巨鼇山):거대한 자라가 머리에 이고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키는데, 보통 관각(館閣)의 뜻으로 쓰인다. 발해(渤海) 동쪽에 있는 대여(岱輿)․원교(員嶠)․방호(方壺)․영주(瀛洲)․봉래(蓬萊)의 다섯 신산(神山)이 조수(潮水)에 밀려 표류하자, 천제(天帝)가 각각 3마리씩 모두 15마리의 거대한 자라로 하여금 이 산들을 머리에 이고 있게 하였는데, 뒤에 용백국(龍伯國)의 거인이 6마리를 낚아 갔으므로 대여와 원교의 두 산은 서극(西極)으로 떠내려가고, 방호와 영주와 봉래의 세 산만 남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318) 대중(大中):당 선종(唐宣宗)의 연호로 847년에서 860년까지이다.

319)예전에……않으려는: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백이와 숙제는 남이 예전에 저지른 잘못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래서 원망하는 사람이 드물었다.[伯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라는 말이 나온다.

320)함구(含垢):더러운 것을 포용한다는 뜻으로, 당나라에서 발해의 과오를 관대하게 용서했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15년의 “내와 못은 오물을 받아들이고, 산과 숲은 독충을 끌어안으며, 훌륭한 옥도 하자를 품고 있다. 마찬가지로 나라의 임금이 더러운 것을 포용하는 것은 하늘의 도이다.[川澤納汙 山藪藏疾 瑾瑜匿瑕 國君含垢 天之道也]”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321)모전(慕羶):중국 황제의 은덕을 사모하는 뜻이 간절했다는 말이다. 200쪽 주259 참조.

322)중국에서……있었겠습니까:발해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에 왕래하게 한 것만도 고맙게 여길 일인 만큼, 신라와 지위 면에서 선후를 따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는 말이다.

323)노나라를……같았으니:당나라와의 관계가 친근하다고 할 신라를 뒤로 미루고, 소원하다고 할 발해를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9년에 “기나라는 하나라의 후예로서 동방의 오랑캐와 가깝게 지내고, 노나라는 주공의 후예로서 우리 진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관계이다.[杞夏餘也 而卽東夷  魯周公之後也 而睦於晉]”라고 전제한 뒤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진나라가 꼭 노나라를 여위게 하고 기나라를 살지게 해야 한단 말인가.[何必瘠魯以肥杞]”라고 반박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324)정나라는……있었겠습니까:당나라 최 시랑이 사리에 밝지 못해서 일 처리가 온당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비유한 것이다. 초(楚)나라가 신주(申舟)를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송(宋)나라에 길을 빌린다는 인사를 하지 말게 하고, 공자(公子) 풍(馮)을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정(鄭)나라에 길을 빌린다는 인사를 하지 말게 하자, 신주가 “정나라는 눈이 밝은 반면에 송나라는 귀가 어두우니, 진나라에 가는 사신은 해를 당하지 않겠지만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鄭昭宋聾 晉使不害 我則必死]”라고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는 기록이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14년에 나온다.

325)조리질하며……할지라도:신라가 실력으로 발해에게 졌다면 치욕스럽지만 그 패배를 감수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212쪽 주299 참조.

326)그쳐야……것이니:발해를 저지해야 할 때는 저지해야 하는데, 신라와 똑같이 대우하였으니, 이는 매우 옳지 않다는 말이다. 주역 간괘(艮卦) 단(彖)에 “그쳐야 할 때는 그치고 행해야 할 때는 행하여 동정 간에 그때를 잃지 않으니 그 도가 광명하다.[時止則止 時行則行 動靜不失其時 其道光明]”라는 말이 나온다.

327)치민(淄澠):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치수(淄水)와 민수(澠水)의 병칭인데, 여기서는 신라와 발해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두 강물의 물맛이 서로 다르지만, 섞어 놓으면 판별하기 어려운데, 맛을 잘 아는 역아(易牙)는 곧잘 분별해 내었다고 한다. 呂氏春秋 精諭

328)같은……일이었습니다:온 세계가 중국의 문화권에 편입되어 하나로 통일된 것은 경하할 만한 일이지만, 지위의 선후와 고하를 따져서 제대로 대우하기는커녕, 오히려 발해를 신라보다 우위에 놓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이다. 모자와 신발은 물론 신라와 발해를 비유한 말이다. 수레와 문자의 통일에 대해서는 188쪽 주219 참조.

329)우심(牛心):소의 염통이라는 뜻이다.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어려서 말을 더듬자 그를 기이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는데, 주의(周顗)가 그를 눈여겨보고는 당시에 귀하게 여겼던 소 염통구이를 다른 손님들보다 먼저 권하며 맛보게 하면서부터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330)계구(雞口):닭의 입이라는 뜻으로, 과거 응시생 중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쓰였다.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 일이다.[寧爲雞口 無爲牛後]”라는 말에서 발췌한 것이다. 戰國策 韓策

331)설후(薛侯)와……하고:발해와 석차(席次)를 다투는 어색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했다는 말이다. 181쪽 주193 참조.

332)조장(趙將)으로……하였습니다:발해의 응시생이 신라에게 패배한 것을 깨끗이 승복하게 하였다는 말이다. 조장은 조나라의 장수 염파(廉頗)를 가리킨다. 인상여(藺相如)가 재상(宰相)에 임명되었을 때, 염파가 승복하지 않고 인상여를 만나면 모욕을 가하려고 계속 시도하였으나, 인상여가 나라의 일을 우선시하며 염파의 행위를 전혀 상관하지 않자, 염파가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정중히 사과하며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333)적신(積薪):장작더미를 쌓을 때 나중의 장작이 맨 위에 놓이는 것처럼, 뒤에 온 자가 오히려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발해가 신라보다 위에 놓이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자세한 내용은 175쪽 주177 참조.

334)예초(刈楚):가시나무를 베었다는 말로, 수석을 차지하여 신라의 위에 놓여 있던 발해를 제거해 주었다는 뜻으로 쓰였다. 시경 한광(漢廣)의 “삐죽 솟은 잡목 중에서, 특별히 가시나무를 벤다.[翹翹錯薪 言刈其楚]”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335)구류(九流):선진(先秦) 시대의 9개 학술의 유파로, 유(儒)․도(道)․음양(陰陽)․법(法)․명(名)․묵(墨)․종횡(縱橫)․잡(雜)․농(農) 등의 학파를 말한다.

336)잘 이끌어 주는:안연(顔淵)이 스승인 공자(孔子)의 도에 대해서 감탄하며 술회한 뒤에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면서,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법으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는 논어 자한(子罕)의 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337)궐리(闕里):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의 고리(故里)인데, 여기서는 중국의 뜻으로 쓰였다.

338)호향(互鄕):풍습이 비루해서 모두 상대하기를 꺼려했다는 마을 이름인데, 여기서는 신라의 뜻으로 쓰였다. 호향의 동자가 찾아오자 공자가 선뜻 만나 주었다는 이야기가 논어 술이(述而)에 나온다.

339)무우(霧雨)……일:은거를 비유한 말이다. 남산(南山)의 검은 표범은 무우(霧雨)가 계속된 7일 동안 먹을 것이 없어도 가만히 머물러 있을 뿐, 산 아래로 내려가서 먹을 것을 구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털 무늬를 아름답게 보전하기 위해서였다는 남산현표(南山玄豹)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列女傳 卷2 賢明傳 陶答子妻

340)임우(霖雨)가 되는 일:재상(宰相)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상(商)나라 임금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얻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나서 “만약 나라에 큰 가뭄이 들면, 내가 그대를 장맛비로 삼으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書經 說命上

341)이서(圯書):태공병법(太公兵法)을 말한다. 한(漢)나라의 개국 공신 장량(張良)이 한 노인의 신발을 다리 밑[圯下]에서 주워 준 인연으로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받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342)위결(渭訣):위수 노인(渭水老人)의 비결이라는 뜻으로, 역시 태공의 병법을 말한다.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은 위수(渭水) 가의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343)남산(南山)의……자질:아름답게 보전한 표범의 털 무늬처럼 뛰어난 자질이라는 말이다. 221쪽 주339 참조.

344)내이(萊夷):서경 우공(禹貢)에 “내주(萊州)의 부락민은 목축을 주로 한다.[萊夷作牧]”라는 말이 나온다.

345)천사(千駟)의 마(馬)의 명성:춘추 시대 제 경공(齊景公)이 천사의 말을 소유하였는데, 그가 죽은 날에는 백성들이 그를 일컬을 만한 덕이 없었다는 말이 논어 계씨(季氏)에 나온다. 1사(駟)는 4마(馬)이다.

346)관안(管晏):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명재상인 관중(管仲)과 안영(晏嬰)의 병칭이다.

347)오고(五羖)의 양(羊)의 예법:춘추 시대 진 목공(秦穆公)이 5장의 양피를 속죄금으로 주고 포로가 된 현인 백리해(百里奚)를 데려와서 재상으로 삼은 뒤에 그의 도움을 받아 패업을 달성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5 秦本紀

348)육계(六階)의 영광:단번에 여섯 품계를 뛰어넘어 방백(方伯)에 임명되는 영광이라는 말이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백제를 부흥하려는 복신(福信) 등의 군대를 물리치자, 고종(高宗)이 그 공을 인정하여 “육계를 뛰어 올려 가자(加資)하고 대방주 자사에 정식으로 임명했다.[超加仁軌六階 正授帶方州刺史]”라는 기록이 전한다. 舊唐書 卷84 劉仁軌列傳 유인궤 역시 그 전에 청주 자사(靑州刺史)를 지낸 적이 있다.

349) 정관(貞觀):당 태종(唐太宗)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이다.

350)분수를:대본에는 이 앞에 ‘此所謂太師侍中 姓名亦不可知也’ 14자가 있는데, 이는 원주가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

351)공성(孔聖)은……하였고:공자가 진(陳)나라에 있을 적에 양식이 떨어져서 종자(從者)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에 자로(子路)가 성난 얼굴로 군자도 궁할 수가 있느냐고 묻자, 공자가 “군자는 아무리 궁해도 이를 편안히 여기면서 자신의 절조를 굳게 지키지만, 소인은 궁하면 제멋대로 굴기 마련이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고 답변한 내용이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온다.

352)맹가(孟軻)는……받았습니다:맹자의 제자 팽경(彭更)이 “수레 수십 대와 종자 수백 명을 이끌고 제후에게 얻어먹는 것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後車數十乘 從者數百人 以傳食於諸侯 不以泰乎]”라고 묻자, 맹자가 도리에 어긋나면 밥 한 그릇도 받으면 안 되지만 도리에 맞으면 천하를 받아도 지나치지 않다고 대답한 말이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온다.

353)사군(四郡):한사군(漢四郡)의 준말로, 동방이라는 말과 같다.

354)칠주(七州)의 천박한 학식:어려서부터 스승을 찾아 각처를 돌아다니며 공부했다는 뜻의 겸사이다. 후한(後漢)의 경란(景鸞)이 소싯적에 스승을 찾아 경서를 배우기 위해 칠주의 지역을 모두 돌아다녔다는 칠주섭렵(七州涉獵)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79下 儒林列傳 景鸞

355)부자(夫子)의……어렵습니다:노(魯)나라 대부 숙손무숙(叔孫武叔)이 자공(子貢)을 공자보다 낫다고 칭찬하자, 자공이 “궁궐의 담장에 비유해 보건대, 나의 담장은 어깨에 닿을 정도여서 집안의 좋은 것들을 모두 엿볼 수 있지만, 부자의 담장은 그 높이가 몇 길이나 되기 때문에 정식으로 대문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부함을 볼 수가 없다.[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라고 말한 내용이 논어 자장(子張)에 나온다.

356)노면(露冕):후한 명제(後漢明帝) 때에 형주 자사(荊州刺史) 곽하(郭賀)가 뛰어난 성적을 거두자, 황제가 삼공(三公)의 의복과 면류(冕旒)를 하사하면서, 수레를 타고 다닐 때마다 장막을 걷어 백성들이 그 복장을 볼 수 있게 했던 고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이 상공 즉 양양 자사(襄陽刺史) 이울(李蔚)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後漢書 卷26 郭賀列傳

357)주옹반낭(酒甕飯囊):술독과 밥주머니라는 말로, 그저 먹고 마실 줄만 알 뿐 일 할 줄은 모르는 무능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후한(後漢)의 예형(禰衡)이 “순욱 정도는 그래도 억지로 데리고 얘기해 볼 수 있지만, 그 이외의 사람들은 나무나 진흙으로 만든 인형과 같아서 사람과 모습은 비슷해도 사람의 정기가 없으니, 모두 술독이나 밥주머니일 뿐이다.[荀彧猶强可與語 過此以往 皆木梗泥偶 似人而無人氣 皆酒甕飯囊耳]”라고 조롱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抱朴子 彈禰

358)행시주육(行屍走肉):걸어 다니는 시체와 뛰어다니는 고깃덩어리라는 말로, 형체만 갖추었을 뿐 정신은 빈약해서 쓸모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의 임말(任末)이 스승의 상을 당해 급히 달려가다가 길에서 죽었는데, 임종할 적에 조카에게 자신의 시신을 스승의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면서 “사람이 학문을 좋아하면 몸은 비록 죽더라도 영혼은 살아 있는 것과 같은데, 이와 반대로 학문을 하지 않으면 몸은 살아 있더라도 걸어 다니는 시체요 뛰어다니는 고깃덩어리라고 할 것이다.[夫人好學 雖死若存 不學者 雖存 謂之行屍走肉耳]”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拾遺記 後漢

359)천엽(穿葉):잎을 꿰뚫는 활 솜씨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 공왕(楚共王)의 장군인 양유기(養由基)가 100보 떨어진 거리에서 버들잎을 활로 쏘아 백발백중시켰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 周本紀

360)단근(斷根):뿌리 잘린 가을날의 쑥대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라는 말이다.

361)여곽(藜藿):명아주 잎과 콩잎으로 끓인 국이라는 뜻으로, 빈궁한 자의 음식을 뜻하는 말이다.

362)궤손(簋飧):궤에 해당하는 음식이라는 뜻으로, 후하게 대접하여 배불리 먹게 한다는 말이다. 시경 권여(權輿)의 “나에게 매양 사궤의 음식을 베풀더니, 이제는 매양 음식이 배부르지 않도다.[於我乎每食四簋 今也每食不飽]”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궤는 1두(斗) 2승(升)이 들어가는 질그릇이다.

363)염매(鹽梅)의 맛:소금과 식초 등 조미료가 적절히 가미된 맛있는 음식이라는 말이다.

364)담적(啗炙)의 은혜:고기구이를 먼저 먹게 하는 등 특별 대우를 해 준 은혜라는 말이다. 219쪽 주329 참조.

365)식어(食魚):전국 시대 맹상군(孟嘗君)의 문객인 풍훤(馮諼)이 “밥상에 생선이 없다.[食無魚]”라고 불평하며 노래하자, 맹상군이 더 좋은 대접을 하면서 ‘밥상에 생선이 오르게 했다.[食有魚]’는 고사가 있다. 戰國策 齊策4

366)재주는……있고:후위(後魏)의 서지재(徐之才)가 어려서 주사(周捨)의 집에 가서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강의를 들었는데, 어느 날 주사가 음식상 앞에서 우스갯소리로 그에게 “서랑은 의리를 생각할 마음은 없고 먹을 생각만 하는가?[徐郞不用心思義 而但事食乎]”라고 묻자,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려 한다.[虛其心而實其腹]”라는 노자의 말로 답변하여 감탄하게 했던 고사가 있다. 北齊書 卷33 徐之才列傳 北史 卷90 徐謇列傳

367)병은……합니다:너무 잘 먹고 잘 마셔서 오히려 병이 날까 걱정이 된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한(漢)나라 매승(枚乘)의 칠발(七發)에, 초(楚)나라 태자가 병에 걸리자 오객(吳客)이 찾아가서 “아름다운 여인은 본성을 해치는 도끼요, 맛좋은 주효(酒肴)는 위장을 썩히는 약물이다.[皓齒蛾眉 命曰伐性之斧 甘脆肥醲 命曰腐腸之藥]”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368)계수나무처럼 비싼 땔감: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초(楚)나라에 가서 “초나라의 밥은 옥보다도 귀하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도 귀하다. 지금 내가 옥으로 지은 밥을 먹고 계수나무로 불을 때고 있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今臣食玉炊桂 不亦難乎]”라고 불만을 토로한 고사가 전한다. 戰國策 楚策3

369)봉(鳳)을……수치스럽고:진(晉)나라 여안(呂安)이 천리 길을 달려 혜강(嵇康)의 집에 찾아갔다가, 혜강이 마침 외출하여 만나지 못하고 그의 형인 혜희(嵇喜)의 영접을 받게 되자, 여안이 문 안에 들어서지도 않고 문 위에다 ‘봉(鳳)’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그냥 갔는데, 나중에 혜강이 이를 보고 궁금해하는 형에게 “봉은 범조(凡鳥)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던 제봉재문(題鳳在門)의 고사가 전한다. 봉(鳳)을 파자하면 범(凡)과 조(鳥)가 된다. 世說新語 簡傲

370)황소를……합니다:세설신어(世說新語) 경저(輕詆)에 “무게가 천근이나 나가는 큰 소가 여물을 먹는 것은 보통 소보다 10배는 되는데,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가는 것은 한 마리의 바짝 마른 암소보다도 못하다.[有大牛重千斤 噉芻豆十培於常牛 負重致遠 曾不若一羸牸]”라는 말이 나온다.

371)거대한……경우:먹고 마시는 데에 한없는 욕심을 부린다는 말이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조식(曹植)의 여오계중서(與吳季重書)에 “먹는 것은 거대한 골짜기를 메우는 것과 같고, 마시는 것은 밑 빠진 술잔에 붓는 것과 같다.[食若塡巨壑 飮若灌漏巵]”라는 말이 나온다.

372)살얼음을 밟는 심정:겁내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175쪽 주178 참조.

373)음식에……가운데:논어 학이(學而)에 “군자는 음식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일은 민첩하게 행하고 말은 신중히 하며, 도가 있는 이를 찾아가서 질정한다.[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374)물러나기는 쉽게 한다:예기 표기(表記)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159쪽 주121 참조.

375)냇물을……가운데:시경 형문(衡門)의 “누추한 집이지만 그 아래에서 충분히 노닐고 쉴 수 있으며, 졸졸 흐르는 냇물을 보면서 굶주림을 잊고 즐길 수 있도다.[衡門之下 可以棲遲 泌之洋洋 可以樂飢]”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376) 결계(結界):안거(安居)하여 결속(結束)하며 수행에 정진하기 위해서 경계를 획정한 지역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로, 도량의 구역이라는 말과 같다.

377)시라(尸羅)의 땅:시라는 범어(梵語) śīla 즉 쉬일라의 음역으로,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의 죄악을 방지한다는 뜻을 지니는데, 보통 계(戒) 혹은 율(律)을 가리킨다. 시라의 땅이란 범어에서 소리 나는 대로 신라를 가리키는 동시에, 계행(戒行)이 청정한 땅이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시라는 청량(淸涼), 수습(修習), 안정(安靜) 등으로 의역된다.

378)천어(天語):범어(梵語)를 가리킨다. 고대 인도의 바라문(婆羅門)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범천(梵天)이 쓰는 언어라 하여 천어라고 칭하였다.

379)바라제(波羅提):범어 prātimokṣa를 음역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의 준말로, 불교의 계율(戒律)을 뜻한다.

380)가야(伽倻):석가모니가 정각(正覺)을 이룬 보리가야(菩提伽耶) 혹은 불타가야(佛陀伽耶)의 준말이다. 이는 범어 Bodhgayā와 Buddhagayā의 음역이다. 6년 고행 끝에 이곳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십이인연(十二因緣)과 사제법(四諦法) 등을 깨달았다고 한다.

381)이실(二室):중국 숭산(嵩山)의 태실(太室)과 소실(少室)의 두 산을 가리킨다.

382)오대(五臺):중국 산서(山西)의 오대산을 말한다. 아미산(峨眉山), 보타산(普陀山), 구화산(九華山)과 함께 중국 불교의 4대 영산(靈山)으로 꼽히는데, 특히 화엄경(華嚴經)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주처(住處)라는 기록이 있는 관계로 예로부터 문수가 시현(示現)하는 도량으로 일컬어져 왔다.

383)문에……엄하였다:해인사의 강원(講院)과 율원(律院)을 통하여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는 말이다. 의룡(義龍)은 교의(敎義)에 능통한 학승(學僧)이라는 뜻이고, 율호(律虎)는 계율(戒律)에 밝은 율승(律僧)이라는 뜻이다. 고운집 권3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에 “경의(經義)에 밝은 용들이 구름처럼 뛰어오르고 계율(戒律)에 철저한 범들이 바람처럼 휘날린다.[義龍雲躍 律虎風騰]”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주(註)에 “의정이 경의(經義)의 학술에 능통했기 때문에 의룡이라고 하였고, 찬녕이 율학을 잘 알았기 때문에 율호라고 하였다.[義淨能通義學 故曰義龍 贊寧能解律學 故曰律虎也]”라는 해설이 나온다. 산왕(山王)은 산신령을 가리킨다.

384)삼보(三寶):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를 합칭한 불교의 용어인데, 불보는 깨달은 부처를 가리키고, 법보는 부처의 교법(敎法)을 가리키고, 승보는 부처의 교법대로 수행하는 승려들을 가리킨다.

385)연좌(宴坐):좌선(坐禪)을 뜻한다. 연좌(燕坐)라고도 한다. 90일 동안의 연좌는 음력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 여름철 석 달 동안 외출하지 않고 수행하는 승려들의 하안거(夏安居)를 가리킨다.

386)포금(布金)할 사람:포금은 황금을 땅에 깐다는 뜻으로, 사원 건립 기금을 시주하는 불교 신도를 가리킨다. 인도(印度) 사위성(舍衛城)의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수달 장자가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했다는 기원포금(祇園布金)의 고사가 전한다. 大唐西域記 卷6

387)안정된……쉽다:노자(老子) 64장에 “안정된 상태에서 미리 조심해야 지탱하기 쉽고, 조짐이 드러나기 전에 대처해야 도모하기 쉽다.[其安易持 其未兆易謀]”라는 말이 나온다.

388)미리……한다:논어 요왈(堯曰)에 “미리 가르쳐 주지도 않고서 잘못했다고 죽이는 것을 학이라고 하고, 미리 경계하지도 않고서 성공을 요구하는 것을 폭이라고 한다.[不敎而殺謂之虐 不戒視成謂之暴]”라는 말이 나온다.

389)사방의……같다:이하의 건축 공사 내용은 생략하고 수록하지 않은 듯하다.

390)건물을 3층(層)으로 짓고:대본에는 ‘起屋三層’으로 되어 있는데, 송(宋)나라 희녕(熙寧, 1068~1077) 연간의 소거혈처(巢居穴處) 고사와 관계되어 있는 만큼, 후대에 가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송(宋)나라 왕득신(王得臣)이 지은 진사(塵史) 권3 해학(諧謔)에, 왕공신(王拱辰)은 낙양(洛陽)에 화려하게 3층짜리 집을 짓고[起屋三層] 살고, 사마광(司馬光)은 한 길짜리 지하실을 파고 거하였는데, 소옹(邵雍)이 부필(富弼)에게 “요즘 한 사람은 둥지에서 살고 한 사람은 굴을 파고 산다.[近有一巢居一穴處者]”라고 하면서 이 사정을 설명하자 부필이 크게 웃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391)유진(庾塵):유량(庾亮)의 먼지라는 뜻으로 권력의 위세를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때 정서장군(征西將軍) 유량이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는데, 언젠가 바람이 세게 불면서 먼지를 일으키자, 유량을 혐오하던 왕도(王導)가 부채로 먼지를 털어내면서 “원규의 먼지가 사람을 더럽힌다.[元規塵汚人]”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輕詆 원규(元規)는 유량의 자이다.

392)장무(張霧):장해(張楷)가 일으키는 안개라는 뜻으로, 사술(邪術)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의 장해가 화음산(華陰山)에 숨어 살면서 사방 5리(里)에 안개를 잘 일으켰는데, 3리의 지역에 안개를 끼게 했던 배우(裴優)가 찾아가서 더 나은 술법을 배우려고 하자 장해가 피하면서 만나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後漢書 卷36 張霸列傳 張楷

393)마음을……한다:진(晉)나라 한백(韓伯)이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성인이 이것을 가지고 재계하여 그 덕을 신명하게 한다.[聖人以此齋戒 以神明其德夫]”라는 대목을 해설한 말이다. 대본에는 “洗心曰齋 防患曰戒”로 되어 있다. 한백은 그의 자인 강백(康伯)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394)왕제(王制)에……해설하였다:남조 송(宋) 범엽(范曄)이 지은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을 고운이 인용해서 소개한 것이다. ‘夷者柢也 言仁而好生’이 대본에는 ‘夷者也 言仁也而好生’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동이열전에 의거해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후한서에는 이 내용 바로 다음에 “그래서 군자의 나라와 불사의 나라가 동방에 있게까지 된 것이다.[至有君子不死之國焉]”라는 기록과, 동이의 아홉 종족[九種]의 이름이 이어진다. 왕제예기의 편명이다.

395)이아(爾雅)에는……하였다:제9 석지(釋地) 야(野)에 나온다.

396)희중(羲仲)에게……하였다: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오는데, 고운이 몇 글자를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397)게다가……하겠는가:동방에서 서쪽으로 불법(佛法)을 구한 결과 이 땅에 불교가 전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시경 황의(皇矣)에 “이에 고개 돌려 서쪽을 돌아보고, 여기에 집터를 내려 주었다.[乃眷西顧 此維與宅]”라는 말이 나온다.

398)구종(九種)이……것이니:동방에서 불교에 귀의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구종은 구이(九夷) 즉 동이(東夷)와 같은 말로, 동방을 가리킨다. 삼귀(三歸)는 불교 용어인 삼귀의(三歸依)의 준말로,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399)위로는……있다:고운이 중간에 몇 구절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400)왕이나……한다:주역 고괘(蠱卦) 상구(上九)에 나오는 말이다.

401)마음이……사람:주역 이괘(履卦) 구이(九二)에 “정도를 밟고 가니 탄탄하다. 마음이 조용하고 안정된 사람이라야 바르고 곧으며 길하리라.[履道坦坦 幽人貞吉]”라는 말이 나온다.

402)사람이……것: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사람이 도를 크게 할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크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403)도는……않다:중용장구(中庸章句) 제13장에 “도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을 멀리한다면, 그것은 도라고 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404)도야말로……것:노자(老子) 51장의 “도가 존귀하고 덕이 귀중한 것은 어느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언제나 절로 그러한 것이다.[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 而常自然]”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405)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아야만:위(衛)나라 정치를 위해서는 무엇부터 할 것이냐는 자로(子路)의 물음에 대해서, 공자가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에 대해 자로가 현실과 먼 발언이라고 비평을 하자, 공자가 그 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해 준 내용이 논어 자로(子路)에 나온다.

406)도강명대(道強名大):노자 25장의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도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 그것을 억지로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라는 말을 요약한 것이다.

407)덕성이상(德成而上):예기 악기(樂記)의 “덕성을 이룬 사람은 상위에 거하고, 기예를 이룬 사람은 하위에 거한다. 품행을 이룬 사람은 앞에 거하고, 사업을 이룬 사람은 뒤에 거한다.[德成而上 藝成而下 行成而先 事成而後]”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408)지위를……얻는다:중용장구(中庸章句) 제17장의 “큰 덕의 소유자는 반드시 이에 합당한 지위를 얻고, 반드시 이에 합당한 작록을 받고, 반드시 이에 합당한 명예를 얻고, 반드시 이에 합당한 수명을 얻게 마련이다.[大德必得其位 必得其祿 必得其名 必得其壽]”라는 말을 요약해서 정리한 것이다. 고운 당시에는 중용이 분리되지 않고 예기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409)돈화(敦化)의 설:예기 중용(中庸)의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과 같고, 큰 덕은 화육이 돈후하다.[小德川流 大德敦化]”라는 말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 정현(鄭玄)은 “소덕천류는 적셔 주고 싹을 틔우는 것으로서 제후를 비유한 것이요, 대덕돈화는 만물을 돈후하게 생육하는 것으로서 천자를 비유한 것이다.[小德川流 浸潤萌芽 喩諸侯也 大德敦化 厚生萬物 喩天子也]”라고 해설하였다.

410)동자학사(童子學士):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를 지은 남조 양(梁) 종름(宗懍)의 어렸을 때의 별명이다. 그가 어려서 총민(聰敏)하고 호학(好學)하여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으므로 향리에서 동자학사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양서(梁書) 권41 왕규열전(王規列傳) 종름(宗懍)에 나온다.

411)사리불(舍利弗):범어(梵語) Śāriputra의 음역으로, 불타의 10대 제자 중의 하나이며, 지혜제일(智慧第一)로 꼽힌다.

412)삼계대사(三界大士):석가모니에 대한 존칭이다. 삼계는 불교 용어로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키고, 대사는 범어 mahāpuruṣa의 의역으로 무상사(無上士)와 뜻이 같은 경칭이다. 삼계존(三界尊) 혹은 삼계웅(三界雄)이라고도 한다.

413)범을……것이다:범을 길들이듯 민심을 순화시키려면 사이비나 가식이 아니라 불법에 입각하여 진정 참된 마음으로 백성을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장(子張)이 노 애공(魯哀公)을 본 뒤로 7일이 지났는데도 예우를 하지 않자 섭공호룡(葉公好龍)의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갔다는 이야기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序) 잡사(雜事) 5에 나온다. 섭공 자고(葉公子高)가 너무도 용을 좋아해서 집안 이곳저곳에 용을 새겨 장식해 놓자 진짜 용이 내려와서 머리를 내밀고 꼬리를 서렸는데, 섭공이 이를 보고는 대경실색하여 달아났으니, 이는 섭공이 진정으로 용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용 같으면서도 용 아닌 것을 좋아한 것[是葉公非好龍也 好夫似龍而非龍者也]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414)촛불을……것:전국 시대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에 “태양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 텐데, 촉룡이 어째서 비춰 주는가.[日安不到 燭龍何照]”라고 하였는데, 후한(後漢) 왕일(王逸)의 해설에 “하늘의 서북쪽에 해가 없는 암흑의 나라가 있는데, 그곳은 용이 촛불을 입에 물고 비춰 준다.[天之西北有幽冥無日之國 有龍銜燭而照之也]”라는 말이 나온다.

415)길상(吉祥):길상천녀(吉祥天女)의 준말로, 불교의 호법 천신(護法天神) 중의 하나인 여신(女神)이다. 사대천왕(四大天王)의 하나인 비사문천(毘沙門天)의 누이로, 대중에게 대공덕(大功德)을 베풀기 때문에 공덕천(功德天)이라고도 한다. 金光明最勝王經 大吉祥天女品

416)적수(赤手)에……빛내었다:중국에 들어가서 불법(佛法)을 구한 뒤에 귀국하여 신라를 빛냈다는 말이다. 황제(黃帝)가 적수에서 노닐고 돌아오다가 잃어버린 현주(玄珠)를 상망(象罔)이 찾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천지(天地)에 나온다. 청구(靑丘)는 동방의 별칭이다.

417)위원(衛瑗)이……나이:50세를 뜻한다. 위원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인 거백옥(蘧伯玉)을 가리킨다. 그의 본명은 거원(蘧瑗)이다. 그가 “나이 50에 49년 동안의 잘못을 깨달았다.[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라는 말이 회남자 원도훈(原道訓)에 나온다. 노성(魯聖)은 노나라의 성인이라는 말로,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논어 술이(述而)에 “나에게 몇 년의 수명을 더 허락하여 50세에 주역을 읽게 해 준다면 큰 허물은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418)예악(禰鶚):독수리와 같은 예형(禰衡)이란 뜻으로, 출중한 인물을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後漢) 공융(孔融)이 예형을 조정에 추천하면서 “사나운 새가 수백 마리 있어도 한 마리의 독수리보다 못하니, 예형을 조정에 세우면 필시 볼 만한 점이 있을 것이다.[鷙鳥累百 不如一鶚 使衡立朝 必有可觀]”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0下 文苑列傳 禰衡

419)송계(宋雞):닭과 대화한 송처종(宋處宗)이라는 뜻으로, 고상한 변론에 능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송처종이 사람의 말을 잘하는 닭과 종일토록 창가에서 대화한 결과 청담(淸談)의 말솜씨가 크게 늘었다는 송종계창(宋宗雞窓)의 고사가 남조 송(宋) 유의달(劉義達)의 유명록(幽明錄)에 나온다.

420)유학(幼學):어려서 학업을 닦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사람이 태어나 10년이 되면 유라고 하니, 그때에 비로소 배움의 길에 나아갈 수 있다.[人生十年曰幼 學]”라는 말이 나온다.

421)우담(優曇):불교에서 말하는 인도의 상서로운 꽃 우담발라(優曇跋羅)의 준말이다. 꽃이 꽃턱[花托] 속에 숨어 있다가 한번 피고 나면 곧바로 오므라들어서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에 무화과(無花果) 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 전설에 의하면, 이 꽃은 3천 년에 한번 핀다고 하며,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여 설법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곤 한다.

422)해회(海會):모든 물줄기가 바다에서 만나는 것처럼, 장엄하게 열리는 불교의 성대한 집회를 뜻한다.

423)높은……것:효경 제후장(諸侯章)에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위태롭지 않게 하는 것이 존귀함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방법이요, 채우면서도 흘러넘치지 않게 하는 것이 부유함을 오래도록 지키는 방법이다.[高而不危 所以長守貴也 滿而不溢 所以長守富也]”라는 말이 나온다.

424)위엄이……것:공자가 자장(子張)에게 다섯 가지 미덕[五美]을 가르쳐 주면서 “군자는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하는 법이다. 그러면 그 모습이 엄숙해서 사람들이 쳐다보고 외경심을 갖게 마련인데, 이것이 바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것이 아니겠느냐.[君子正其衣冠 尊其瞻視 儼然人望而畏之 斯不亦威而不猛乎]”라고 말한 내용이 논어 요왈(堯曰)에 나온다.

425)삼존(三尊):불교 용어로 삼보(三寶)와 같은 말이다. 235쪽 주384 참조.

426)사중(四衆):불교의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 즉 남자 승려․여자 승려․남자 신도․여자 신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부중(四部衆) 혹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도 한다.

427)상왕(象王):코끼리를 높인 말로 보통 부처를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고승의 뜻으로 쓰였다. 사자(獅子)도 마찬가지이다.

428)학아즉수(虐我則讎):서경 태서 하(泰誓下)에 “나를 보살펴 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이다.[撫我則后 虐我則讎]”라는 말이 나온다.

429)당인불양(當仁不讓):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인을 행해야 할 때에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 법이다.[當仁不讓於師]”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430)뒤에……도착하였다:서진(西晉) 장재(張載)가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는 부친 장수(張收)를 따라 촉으로 들어가서 검각명(劍閣銘)을 지었는데, 익주 자사(益州刺史) 장민(張敏)이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 글을 위에 아뢰니 세조(世祖)가 사신을 보내 돌에 새기게 했던 고사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양(梁)나라 유협(劉勰)이 지은 문심조룡(文心雕龍) 명잠(銘箴)에 “오직 장재의 검각명을 보건대, 그 재능이 탁월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빠른 발로 치달려서 뒤에 떠나 먼저 도착하였으니, 민한 지역에 그 명이 새겨진 것도 온당한 일이었다고 하겠다.[惟張載劍閣 其才淸采 迅足駸駸 後發前至 勒銘岷漢 得其宜矣]”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431) 대력(大曆):당 대종(唐代宗)의 연호로 766년에서 779년까지이다.

432)정수를 얻었다:인가를 얻고 의발(衣鉢)을 전수받았다는 말이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가 제자 4인의 경지를 점검하면서, 3인에게는 각각 나의 가죽[皮]과 살[肉]과 뼈[骨]를 얻었다고 한 뒤에, 마지막 혜가(慧可)에 대해서는 나의 정수[髓]를 얻었다고 하며 의발을 전수한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3 菩提達磨

433)묘덕(妙德):이른바 문수 삼명(文殊三名) 중의 하나이다. 범어(梵語) Mañjuśrī를 음역한 것 중에, 첫째 문수사리(文殊師利)는 묘덕(妙德)으로 의역되고, 둘째 만수시리(滿殊尸利)는 묘수(妙首)로 의역되고, 셋째 만수실리(曼殊室利)는 묘길상(妙吉祥)으로 의역된다.

434)청량(淸涼):청량산 즉 문수가 거한다는 오대산(五臺山)의 별칭이다.

435)오계(五髻)를……하였다:문수의 도량을 가야산에 꾸미려 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희사(喜捨)하며 공사를 도왔다는 말이다. 오계는 다섯 개의 상투라는 뜻으로, 문수보살을 가리킨다. 그의 정수리에는 전․후․좌․우․중앙의 다섯 곳에 다섯 개의 상투가 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흔히 오계문수(五髻文殊)라고 부른다. 또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자신의 터럭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다.[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라고 양주(楊朱)를 비판한 내용이 나온다.

436)삼학(三學):불교 승려가 닦아야 할 이른바 계(戒)․정(定)․혜(慧)의 공부를 말하는데, 계는 계율(戒律), 정은 선정(禪定), 혜는 이를 통해서 발휘되는 지혜(智慧)를 뜻한다.

437)대장(大壯)의……하니:사원을 웅장하게 지은 것을 말한다. 주역 대장괘(大壯卦) 단(彖)에 “큰 것이 바른 것이다. 그 정대함 속에서 천지의 실정을 볼 수가 있다.[大者 正也 正大而天地之情 可見矣]”라는 말이 나온다.

438)연성(連城):연성벽(連城璧)의 준말로,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15성과 바꾸자고 청한 화씨벽(和氏璧)을 말한다.

439)진주가……것:순자 권학(勸學)에 “옥이 산에 있으면 초목에도 윤기가 흐르고, 진주가 나오는 연못은 물가가 마르는 법이 없다.[玉在山而木草潤 淵生珠而崖不枯]”라는 말이 나온다.

440)작은……된다:서경 여오(旅獒)에 “밤낮으로 혹시라도 부지런하지 않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작은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마침내 큰 덕에 누를 끼친 결과, 마치 아홉 길의 산을 쌓아 올리다가 한 삼태기의 흙을 덜 부어 망쳐 버리는 것처럼 될 것이다.[夙夜罔或不勤 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는 말이 나온다.

441)천작(天爵):사람이 주는 작위(爵位)라는 뜻의 인작(人爵)과 상대되는 말로,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인데,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 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천작이요, 공경대부 같은 종류는 인작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는 말이 나온다.

442)이미……있겠는가:일단 불교에 귀의했으면 속세의 욕망을 버리고 수도에 매진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용상(龍象)은 물속의 용과 땅 위의 코끼리처럼 큰 힘을 지닌 아라한(阿羅漢)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이다. 새는 여기에서 범부 중생의 뜻으로 쓰였다.

443)당(堂)에서부터 대문까지 가며:대본의 ‘堂基’는 ‘自堂徂基’의 준말로, 질서 있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사의(絲衣)는 제사를 도와 지내고 연향(宴饗)하는 시인데, 그중에 “실 베옷이 깨끗하고, 머리에 쓴 고깔이 공손하다. 당에서부터 대문까지 가고, 양을 살펴보고 나서 소를 살펴본다.[絲衣其紑 載弁俅俅 自堂徂基 自羊徂牛]”라는 말이 나온다.

444)부장(負牆)하는……한다:배우는 불자(佛子)들은 열심히 참선에 정진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부장은 어른을 만나 뵌 뒤에 담장 쪽으로 물러나 단정히 서서 존경하며 피하는 뜻을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취학(就學)의 뜻으로 쓰인다. 벽관(壁觀)은 면벽하고 좌선하는 것을 뜻한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전해지는 달마(達磨)가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면벽하며 좌선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고 칭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3 菩提達磨

445)획린(獲麟)과 진승(晉乘):사서(史書)를 뜻한다. 획린은 춘추좌씨전 애공(哀公) 14년의 “서쪽 들판으로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붙잡았다.[西狩獲麟]”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노(魯)나라의 역사책인 춘추를 가리킨다. 또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진나라의 승과 초나라의 도올과 노나라의 춘추는 모두 역사책이다.[晉之乘 楚之檮杌 魯之春秋 一也]”라는 말이 나온다.

446)천리마와……사람들: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권1 학행(學行)에 “천리마처럼 되기를 소원하는 말은 역시 천리마의 무리요, 안회(顔回)처럼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역시 안회의 무리이다.[睎驥之馬亦驥之乘也 睎顔之人亦顔之徒也]”라는 말이 나온다.

447)삼해(三害):진(晉)나라 때 남산(南山)의 범과 물속의 뱀과 주처(周處)가 향리에서 세 가지 해악으로 꼽혔는데, 나중에 주처가 개과천선하여 범을 사살하고 뱀을 때려잡아 편안하게 한 뒤에 뜻을 분발하여 학문에 매진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58 周處列傳

448)구사(九思):군자가 생각하는 아홉 가지 일로, 밝게 보기를 생각하고[視思明], 밝게 듣기를 생각하고[聽思聰], 안색을 온화하게 하기를 생각하고[色思溫], 용모를 공손하게 하기를 생각하고[貌思恭], 진실하게 말하기를 생각하고[言思忠], 공경히 일할 것을 생각하고[事思敬], 의심나면 묻기를 생각하고[疑思問], 화나면 어려움을 생각하고[忿思難], 얻을 것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는 것[見得思義] 등이다. 論語 季氏

449)삼귀(三歸):삼보(三寶) 즉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에 귀의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삼귀의(三歸依)라고 칭한다.

450)육도(六度):생사의 차안에서 열반의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섯 개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도 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정려(靜慮), 지혜(智慧) 등으로 되어 있다.

451)소가……것:주역 태괘(泰卦) 괘사(卦辭)에 “태괘는 음(陰)인 소가 가고 양(陽)인 대가 오는 상(象)이니, 길하고 형통하다.[泰 小往大來 吉亨]”라는 말이 나온다.

452)불……것:유마경(維摩經) 불도품(佛道品)에 “불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은 희유한 일이라고 말할 만하다. 마찬가지로 욕망 속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도 이와 같이 희유한 일이다.[火中生蓮花 是可謂稀有 在欲而行禪 稀有亦如是]”라는 말이 나오는데, 번뇌 속의 중생이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453)사덕(四德):옛날에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규범으로 꼽혔던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용(婦容), 부공(婦功)을 말한다. 周禮 天官 九嬪

454)이런……있었겠는가:진(晉)나라 범녕(范甯)이 생질인 왕침(王忱)의 풍류를 칭찬하자, 왕침이 “이런 외숙이 안 계시면, 어떻게 이런 생질이 있겠습니까.[不有此舅 焉有此甥]”라고 답변한 고사가 유명한데, 고운이 이를 변용한 듯하다. 晉書 卷75 王湛列傳 王忱

455) 보건대:대본에는 ‘都’로 되어 있는데, 문맥으로 보아 ‘覩’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456)취의(毳衣):승려가 입는 네 종류의 의복 가운데 하나로, 새털로 짜서 만든 옷을 말한다.

457)이처도(伊處道):이차돈(異次頓)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한다. 대본의 원주에 “목숨을 바쳐 불법을 일으킨 열사이다.[殉命興法之烈士也]”라고 하였다.

458)촉룡(燭龍):촛불을 입에 물고 비춰 주는 용이라는 뜻이다. 242쪽 주414 참조.

459)수상(燧象):꼬리에 불을 붙여 적진에 뛰어 들게 하는 코끼리라는 뜻으로, 전쟁을 상징한다. 춘추 시대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교전할 때에 초왕(楚王)이 이 전법을 사용한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定公4年

460)아나율(阿那律)이……인연:아나율은 범어(梵語) Aniruddha의 음역으로, 불타의 종제(從弟)이면서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불타의 설법 중에 잠을 잤다는 책망을 받은 뒤로 서원을 세우고 잠을 자지 않다가 눈병에 걸려 실명하였으나 수행에 더욱 정진한 결과 천안제일(天眼第一)이 되어 천상과 지하의 육도(六道) 중생을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전생에 도둑이 되어 절에 훔치러 들어갔다가 꺼지려 하는 등불의 심지를 화살로 바로잡아 돋운[以箭正燈炷] 인연으로 불제자(佛弟子)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461)유마힐(維摩詰)이……설법:인도(印度) 비야리성(毗耶離城)의 유마힐이 속인인 거사(居士)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불조(佛祖)의 뒤를 이었다는 말이다. 유마힐이 중생의 병이 다 낫기 전에는 자신의 병도 나을 수 없다면서 드러눕자, 석가모니가 문수보살(文殊菩薩) 등을 보내 문병하게 하였는데, 문수가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서 물었을 때 유마힐이 묵묵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문수가 탄식하며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으로 들어간 것이다.[是眞入不二法門也]”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維摩經 文殊師利問疾品

1) 비(碑):지금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고운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지금까지 사용한 대본에 오자와 탈자 등 문제가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1995년에 이우성 교역으로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한 신라사산비명의 2부 주석(註釋)에 수록된 대본을 채택하여 번역하였다. 다만 글의 순서는 고운집 차례를 그대로 따랐다. 신라사산비명에는 성주산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山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되어 있다.

2)제당(帝唐)이……창월(暢月):당 소종(唐昭宗) 즉위년(888) 11월을 뜻한다. 문덕(文德)은 희종(僖宗)의 연호이지만, 희종은 그해 2월에 장안(長安)으로 돌아와서 다음 달에 죽고, 그 뒤를 이어 소종이 즉위하였다. 창월(暢月)은 11월의 별칭이다. 예기 월령(月令)에 “중동지월(仲冬之月)을 창월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3)보살계 제자(菩薩戒弟子):보살계는 대승 보살(大乘菩薩)이 수지하는 계율로, 소승 성문(小乘聲門)의 계율과 상대되는 말이다. 범망경(梵網經)의 계본(戒本)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계본이 있는데, 보통 전자의 십중금계(十重禁戒)와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를 가리킨다. 남조(南朝)의 양 무제(梁武帝)와 진 무제(陳武帝), 수(隋)나라 문제(文帝)와 양제(煬帝) 등이 모두 보살계를 받아 보살계 제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보살계를 받는 풍조가 한때 성행하였다.

4)소판(蘇判):신라 17등 관계(官階) 중의 셋째 등급으로, 소판니(蘇判尼)라고도 하고, 잡찬(迊飡) 혹은 잡판(迊判)이라고도 한다.

5)재삼(在三)의 의리:부(父)․사(師)․군(君)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라는 뜻이다. 국어(國語) 진어(晉語) 1의 “사람은 세 분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니,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어버이는 낳아 주셨고, 스승은 가르쳐 주셨고, 임금은 먹여 주셨기 때문이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6)한 분의……것이다:부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개(開)․시(示)․오(悟)․입(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을 설법했다는 내용이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나온다.

7)문고(文考)와 강왕(康王):문고는 선친이라는 뜻으로,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부친인 경문왕(景文王)을 가리키고, 강왕은 경문왕의 태자요 진성여왕의 오빠인 헌강왕(憲康王)을 가리킨다. 문고는 서경 강고(康誥)의 “지금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선친인 문왕(文王)의 언행을 공경히 따라야 한다.[今民將在祗遹乃文考]”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8)하늘이……않았으므로:하늘이 국가를 위해서 원로를 이 세상에 남겨 두지 않고 일찍 데려갔다는 말이다.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의 “원로 한 분을 아껴 남겨 두어서 우리 임금을 지키게 하지 않는구나.[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공자(孔子)가 죽었을 때에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내린 조사(弔辭)에도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나라의 원로를 조금 더 세상에 있게 하여 나 한 사람을 도와 임금 자리에 있게 하지 않는구나.[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屛余一人以在位]”라고 탄식한 구절이 있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

9)실을 물들이고:흰 실이 다양하게 물이 드는 것처럼 본래는 똑같은 사람이지만 각자 속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고운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입신출세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묵자(墨子)가 염색할 실을 보고서 “푸른 물에 염색하면 푸르게 되고 누런 물에 염색하면 누렇게 되니, 어디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색이 함께 변하는구나.[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있다. 墨子 所染

10)국사(國士):나라에서 최고로 꼽히는 가장 우수한 재능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진(晉)나라의 자객 예양(豫讓)이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으려다 실패하여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음을 당할 적에, “내가 예전에 섬겼던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는 나를 중인(衆人)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중인으로 대접하는 것이고, 지백은 나를 국사로 예우했기 때문에 나도 그에게 국사로서 보답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豫讓

11)벼……용서하시고:고운이 명성에 걸맞지 않게 사실은 실력이 별로 없는데도 관대히 용납해 주었다는 뜻의 겸사이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의 “벼 싹에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과 같았고, 벼 곡식에 쭉정이가 섞여 있는 것과 같았다.[若苗之有莠 若粟之有秕]”라는 말을 전용한 것이다.

12)계수(桂樹)에……생각하시어:고운이 옛날 당나라 과거에 급제했던 실력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뜻의 겸사이다. 계수는 과거 급제와 관련된 비유로 많이 쓰이는데, 진 무제(晉武帝) 때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장원(壯元)을 한 극선(郤詵)이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숲의 가지 하나요,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이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13)짧은……것:재능이나 식견이 부족해서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장자 지락(至樂)의 “주머니가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가 없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의 물을 길을 수가 없다.[褚小者不可以懷大 綆短者不可以汲深]”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14)돌이……일:진나라 위유 지방에서 돌이 말을 했다[石言于晉魏楡]는 소문과 관련하여, 사기궁(虒祁宮)을 화려하게 짓느라고 기력이 고갈되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사광(師曠)이 임금에게 해설한 내용이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8년에 나온다.

15)거북이가……일:진(晉)나라 공유(孔愉)가 거북이를 돈 주고 사서 방생(放生)을 하자, 그 거북이가 고맙다는 뜻으로 물속에서 몇 차례나 왼쪽을 돌아보고 사라졌는데[龜中流左顧者數四], 공유가 나중에 여부정후(餘不亭侯)에 봉해져서 인장(印章)을 주조할 적에 그 인장의 거북이가 세 번이나 왼쪽을 돌아보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晉書 卷78 孔愉列傳

16)산을……하지는:진(晉)나라 육기(陸機)가 지은 문부(文賦)의 “돌이 옥을 감추고 있으면 그 때문에 산이 빛나고, 물이 진주를 품고 있으면 내가 그 때문에 아름답게 된다.[石韞玉而山輝 水懷珠而川媚]”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文選 卷17

17)나무숲이……여기게만:남조 제(齊)의 공치규(孔稚珪)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의 “나무숲은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시냇물은 한없이 수치스러워한다.[林慙無盡 澗愧不歇]”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18)마음으로……법인데: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4년에 “덕행을 세우는 것이 최상이요, 공업을 이루는 것이 그다음이요, 훌륭한 말을 남기는 것이 그다음인데, 이 세 가지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를 일러 썩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라는 노(魯)나라 숙손표(叔孫豹)의 말이 나온다.

19)이……것:한(漢)나라 양웅(揚雄)의 해조(解嘲)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한다면 좋겠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는 안 될 때에 한다면 좋지 않을 것이다.[爲可爲於可爲之時則從 爲不可爲於不可爲之時則凶]”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20)전각(篆刻):조충전각(雕蟲篆刻)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로 문장을 꾸미기나 하는 작은 기예라는 뜻의 겸사이다.

21)붕(鵬)처럼……행적:중국에 갔다가 신라에 돌아온 행적이라는 말이다. 대붕(大鵬)이 9만 리 창공 위로 올라가 남명(南冥)에서 북명(北冥)으로 날아간 이야기가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또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술을 닦은 뒤 천년 만에 한 마리 학이 되어 고향을 찾은 이야기가 수신후기(搜神後記) 권1에 나온다.

22)반열반(般涅槃):고승의 죽음을 가리킨다. 범어 parinirvāṇa의 음역으로, 반열반나(般涅槃那) 혹은 줄여서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반(般), 즉 pari는 완전(完全)하다는 뜻으로, 완전 해탈의 경지에 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멸도(滅度), 원적(圓寂) 등으로 의역된다.

23)솔도파(窣覩波):탑(塔)을 말한다. 범어(梵語) stūpa의 음역으로, 솔도파(率都婆), 솔도파(窣堵波), 수두파(藪斗婆)라고도 하며, 줄여서 탑파(塔婆) 혹은 탑이라고 한다.

24)장차……차에:남이야 뭐라고 하든 간에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글을 작성해 보려고 했다는 말이다. 장자 변무(騈拇)에 “남이 좋아하는 것만 덩달아 좋아하고, 정작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지 못하는 자[適人之適而不自適其適者]”가 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25)필추(苾蒭):비구(比丘) 즉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남자 승려를 말한다. 범어(梵語) bhikṣu의 음역으로, 필추(苾芻), 비추(備芻)라고도 하며, 걸사(乞士)로 의역된다.

26)제구(虀臼):사(辭), 즉 글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이른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절묘 호사(絶妙好辭)라는 뜻으로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는데, 후한 말에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함께 길을 가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양수는 곧바로 알아챘으나 조조는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30리를 더 가서야 깨닫고는,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有智無智較三十里]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참고로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사(辭)의 약자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27)광범위하게……것이다:진(晉)나라 두예(杜預)가 춘추좌씨전서문에서 저자인 좌구명(左丘明)의 글에 대해서 “일마다 반드시 광범위하게 기술하고 자세히 말하였다. 그 글은 유창하고 그 뜻은 심원하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건의 처음을 탐색하고 종말을 궁구하게 하며, 사건과 관련된 미세한 일을 찾고 궁극적인 것을 구명하게 해 준다.[必廣記而備言之 其文緩 其旨遠 將令學者原始要終 尋其枝葉 究其所窮]”라고 극찬한 내용이 나온다. 가외(可畏)는 후생(後生)을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의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다. 앞으로 후생들이 지금의 나보다 못하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28)서소(西笑)하는 이:원래는 서쪽의 장안(長安)을 향해 웃음 짓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관동(關東) 즉 중원(中原)의 사람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서쪽 즉 중국을 사모하여 건너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후한(後漢) 환담(桓譚)의 신론(新論) 거폐(祛蔽)에 “사람들이 장안의 음악을 들으면 문을 나서면서 서쪽을 향해 웃음 짓고, 고기 맛이 좋은 것을 알면 푸줏간을 대하고서 입맛을 크게 다신다.[人聞長安樂 則出門西向而笑 知肉味美 則對屠門而大嚼]”라는 관동의 속담을 소개하는 말이 나온다.

29)광노(狂奴)의 고태(故態):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엄광(嚴光)에게 사도(司徒) 후패(侯覇)가 후자도(侯子道)를 보내 초청하였는데, 엄광이 후패를 매도하면서 입으로 간단히 대답하자 후자도가 보고할 말이 별로 없는 것을 혐의하여 몇 마디만 더 해 달라고 요청하니, 엄광이 “채소를 사면서 더 달라고 떼쓰는 격이다.[買菜乎 求益也]”라고 핀잔을 주었다. 후패가 이 사연을 적어서 광무제(光武帝)에게 보고하니, 광무제가 웃으면서 “미친 작자의 옛날 하던 버릇 그대로이다.[狂奴故態也]”라고 했다는 고사가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에 나온다. 엄광은 광무제의 어릴 때 친구이다.

30)원심(猿心):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로,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조급하게 동요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대일경(大日經) 주심품(住心品)에서 설명하는 60종(種)의 심상(心相) 중에 원후심(猿猴心)이 나온다. 그리고 심신이 산란하여 제어하기 어려울 때, 심원의마(心猿意馬)라는 비유를 쓰기도 한다.

31)시순(時順):태어나고 죽는 것으로, 사람의 일생을 말한다. 장자 양생주(養生主)의 “마침 그때에 태어난 것은 선생이 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요, 마침 이때에 세상을 떠난 것은 선생이 갈 때가 된 것이니 도리상 순응해야 할 일이다. 자기에게 닥친 시운을 편안히 여기고서 그 도리를 이해하여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슬픔과 기쁨 따위의 감정이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32)내가……바이다:고운이 한서(漢書)의 기술 방식에서 한 수 배웠다는 말이다. 반사(班史)는 반고(班固)가 지은 사서(史書)인 한서를 가리키고, 일반(一斑)은 표범 무늬 중의 하나의 반점(斑點)이라는 말이다.

33)원각 조사(圓覺祖師)에게 10세손이 되고:원각은 중국 선종(禪宗) 초조(初祖)인 달마(達磨)에게 당 대종(唐代宗)이 내린 시호인데, 달마로부터 혜가(慧可), 승찬(僧瓚), 도신(道信), 홍인(弘忍)을 거쳐 6조(祖) 혜능(慧能)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남악 회양(南嶽懷讓), 마조도일(馬祖道一),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거쳐 무염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34)득난(得難):탑본(榻本)의 원주(原註)에 “나라에 5품이 있으니, 성이․진골․득난이 있다. 득난은 얻기 어려운 귀한 성이라는 말인데, 문부에 ‘혹 쉽게 구해 어려운 것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육두품을 지칭하는데, 숫자가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일명에서 구명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다음 5품에 사두품과 오두품이 있는데, 이것은 말할 것도 없다.[國有五品 曰聖而 曰眞骨 曰得難 言貴姓之難得 文賦云 或求易而得難 從言六頭品 數多爲貴 猶一命至九 其四五品不足言]”라고 하였다. 문부(文賦)는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작품이다. 주관(周官)에서는 일명(一命)의 관직이 가장 낮고, 구명(九命)이 가장 높다.

35)조 문왕(趙文王)의 옛일:검술을 좋아했던 일을 말한다. 장자 설검(說劒)에 “옛날 조 문왕이 검술을 좋아하였으므로 문하에 모여 식객 노릇을 하는 검사가 3천 명이 넘었다.[昔趙文王喜劍 劍士夾門而客三千餘人]”라는 말이 나온다.

36)법장(法藏):아미타불(阿彌陀佛)이 성불하기 전에 인지(因地)에서 비구(比丘)로 수행할 때의 이름이다.

37)아해(阿孩):탑본의 원주(原註)에 “방언에 아라고 하니 중국말과 다를 것이 없다.[方言謂兒 與華無異]”라고 하였다.

38)세성(歲星)이……때:12세를 말한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9년의 “나이가 12세라면 이것을 일종이라고 이르니, 세성 즉 목성(木星)이 끝까지 한번 천체(天體)를 돈다는 것이다.[十二年矣 是謂一終 一星終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39)구류(九流):선진(先秦) 시대의 9개 학술의 유파로,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 등의 학파를 말한다.

40)의(䚷):탑본의 원주에 “방언으로 허락하는 말이다.[方言許諾]”라고 하였다.

41)힘은…… 왕성하였다:말세의 쇠한 운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다. 공공씨(共工氏)가 전욱(顓頊)과 싸우다가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치받자 하늘 기둥이 부러지면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고 땅은 동남쪽으로 꺼졌다. 이에 여와씨(女媧氏)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땅의 사방 기둥을 받쳐 세우고, 오색(五色)의 돌을 구워서 터진 하늘을 메웠다[補天]는 전설이 있다. 淮南子 覽冥訓 列子 湯問

42)빠른……도착하였다:나이는 비록 어려도 재능이 워낙 뛰어나서 어떤 어른도 따라갈 수가 없다는 뜻으로 극찬한 말이다. 서진(西晉) 장재(張載)가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는 부친 장수(張收)를 따라 촉으로 들어가서 검각명(劍閣銘)을 지었는데, 익주 자사(益州刺史) 장민(張敏)이 이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그 글을 위에 아뢰니, 세조(世祖)가 사신을 보내 그 글을 돌에 새기게 했던 고사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양(梁)나라 유협(劉勰)이 지은 문심조룡(文心雕龍) 명잠(銘箴)에 “오직 장재의 검각명을 보건대, 그 재능이 탁월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빠른 발로 치달려서 뒤에 떠나 먼저 도착하였으니, 민한 지역에 그 명이 새겨진 것도 온당한 일이었다고 하겠다.[惟張載劍閣 其才淸采 迅足駸駸 後發前至 勒銘岷漢 得其宜矣]”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43)나는……없으니: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전(交戰)할 적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진나라 진영을 유린하며 기세를 떨치고 돌아온 뒤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팔아 주겠다.[欲勇者 賈余餘勇]”라고 소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44)밤중의……쉽고:유식(唯識) 계통의 불교 종파에서 말하는 삼성(三性) 중의 하나인 망집(妄執)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설명할 때 흔히 거론하는 사례의 하나로, 노끈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있다고 인식하면서 집착하는 오류를 가리킨다.

45)공중의……어렵다:길쌈을 하여 실을 매우 가늘게 만들었는데도 ‘거칠다[麤]’고 항의하는 광인(狂人)에게 허공을 가리키면서 “이 실은 너무도 가는 실이라서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자, 광인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대승(大乘)에서 주장하는 공(空) 사상을 허공의 실에 비유한 것으로, 고승전(高僧傳) 구마라습전(鳩摩羅什傳)에 그의 스승 반두달다(盤頭達多)의 말로 나온다.

46)물고기는……아니요: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당신의 그런 행동 방식으로 그런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以若所爲 求若所欲 猶緣木而求魚也]”라는 말이 나온다.

47)토끼는……아니다: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적에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죽자, 이때부터 일손을 놓고는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토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토끼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가 한비자 오두(五蠹)에 나온다.

48)하루에……잃었다:재능이 워낙 출중해서 제자가 스승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한 달에 걸쳐 외울 분량을 각현(覺賢)이 하루에 모두 외워 버리자, 그의 스승인 구바리(鳩婆利)가 “하루에 30명의 몫을 감당했다.[一日敵三十夫也]”라고 찬탄한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불타발다라전(佛陀跋陀羅傳)에 보인다. 남천(藍茜)이 본색(本色)을 잃었다는 말은, 쪽[藍]과 꼭두서니[茜]에서 나온 청색과 홍색이 쪽과 꼭두서니보다 더 진하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비유로 쓴 말이다.

49)요배(坳杯)의 비유:요배는 움푹 패인 마루에 담긴 한 잔의 물이라는 뜻으로, 신라와 같은 좁은 땅에서는 포부를 펼 수 없으니, 더 넓은 중국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의 “물이 쌓인 것이 두텁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우기에 역부족이다. 한 잔의 물을 움푹 패인 마루 위에 부어 놓으면, 지푸라기야 배처럼 뜨겠지만 잔을 놓으면 달라붙을 것이다. 이는 물이 얕고 배가 크기 때문이다.[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50)용의……되었다:중국에 가서 불법(佛法)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천금의 가치가 나가는 구슬은 반드시 깊은 못 속에 숨어 사는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는 법이다.[夫千金之珠 必在九重之淵 而驪龍頷下]”라는 말이 나온다.

51)내……아닌데:시경 백주(柏舟)의 “내 마음은 돌멩이가 아니라서 굴려 볼 수도 없고, 내 마음은 돗자리가 아니라서 돌돌 말 수도 없네.[我心非石 不可轉也 我心非席 不可卷也]”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52) 장경(長慶):당 목종(唐穆宗)의 연호로 821년에서 824년까지이다.

53)기년(耆年)의 노인:60세 정도의 노인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가 60이 되면 기라고 하며, 이때에는 남에게 지시하며 일을 시킨다.[六十曰耆 指使]”라는 말이 나온다.

54)그를 붙잡고서 말하기를:참고로 시경 억(抑)에 “손으로 잡아 줄 뿐만이 아니라 일로 보여 주며, 대면하여 가르쳐 줄 뿐만이 아니라 그 귀를 붙잡고 말해 주노라.[匪手攜之 言示之事 匪面命之 言提其耳]”라는 말이 나온다.

55)멀리……것:상고 시대에 복희씨가 “가까이는 자신에게서 상(象)을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 팔괘를 만들었다.[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 始作八卦]”라는 말이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온다.

56)강서(江西):중국 선종(禪宗) 남종(南宗)의 제7조(祖) 남악 회양(南嶽懷讓)의 제자로, 강서 지방에서 돈오(頓悟)의 선풍(禪風)을 떨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가리킨다.

57)향산(香山)의……사이였다:당 무종(唐武宗) 때에 백거이(白居易)가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있다가 치사(致仕)한 뒤에 향산으로 들어가서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자호하고는 승려 여만(如滿) 등과 함께 향화사(香火社)를 결성하고 만년을 보냈던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58)유검루(庾黔婁):남조 양(梁)의 효자이다. 부친이 병들자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치겠다고 기도했는가 하면, 병의 증세를 살피기 위해 부친의 대변을 맛보기도 하였다. 또 부친이 죽자 예법을 초과하여 여묘살이를 하며 극진히 거상(居喪)하였다.

59)인수(印綬)가 닳아 없어지도록:한신(韓信)이 항우(項羽)의 사람됨에 대해서 유방(劉邦)에게 “항왕은 사람을 만나면 공경하고 자애로운 태도로 대하면서 말 역시 인정이 넘치게 하며, 누가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고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지만, 정작 자기 부하가 공을 세워서 작위를 내려 봉해 주어야 할 경우에는 그 인수(印綬)가 닳아 없어지도록 손에 쥐고서 차마 주지를 못하니, 이것이 이른바 부인의 인이라고 하는 것이다.[項王見人恭敬慈愛 言語嘔嘔 人有疾病 涕泣分食飮 至使人有功當封爵者 印刓敝 忍不能與 此所謂婦人之仁也]”라고 평한 고사가 있다. 대본의 ‘완(刓)’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60)황제의 명령:불교를 혁파하라는 당 무종(唐武宗)의 명령을 말한다. 이때 수만 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수십만의 승려가 환속되는 등 중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폐불이 단행되었다. 불교계에서는 이를 회창(會昌)의 법난(法難)이라고 한다.

61)연성벽(連城璧):전국 시대 진 소왕(秦昭王)이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15성과 바꾸자고 청한 화씨벽(和氏璧)으로, 나라의 진귀한 보배를 뜻한다. 조나라 인상여(藺相如)가 이 구슬을 가지고 진나라에 갔다가 성을 주겠다는 진나라의 약속이 미덥지 못하자, 다시 화씨벽을 온전히 보전해서 조나라로 돌아가게 했던 ‘완벽귀조(完璧歸趙)’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62)우담(優曇):우담발라(優曇跋羅)의 준말이다. 불교 전설에 의하면, 이 꽃은 3천 년에 한 번 피는데, 그때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가 출현하여 설법을 한다고 한다.

63)의문(倚門)의 바람: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초조하게 안부를 걱정하는 어버이의 간절한 심정을 말한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손가(王孫賈)가 15세에 민왕(閔王)을 섬겼는데, 그 모친이 “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올 때면 내가 집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고,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내가 마을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다.[女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 女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戰國策 齊策6

64)산중재상(山中宰相):남조 제(齊)의 고사(高士) 도홍경(陶弘景)을 가리킨다. 그가 고제(高帝) 때에 제왕시독(諸王侍讀)을 지내다가 관복을 벗어서 신무문(神武門)에 걸어 놓고 사직소를 남긴 뒤에 구용(句容)의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였는데, 양 무제(梁武帝)가 즉위하여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으므로 산중재상이라고 일컬어졌다. 南史 卷76 隱逸列傳下 陶弘景

65)대사를……풀고는:시경 야유만초(野有蔓草)의 “해후하여 서로 만났으니, 이제 나의 소원을 풀었도다.[邂逅相遇 適我願兮]”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66)대사는……셈이니:가문(家門)으로는 무열왕(武烈王)의 부친인 용수(龍樹)의 후손이 되고, 불문(佛門)으로는 대승(大乘)의 공관(空觀)을 확립한 용수보살(龍樹菩薩)의 법손(法孫)이 된다는 말이다. 용수보살은 선종(禪宗)에서 초조(初祖)인 마하가섭(摩訶迦葉) 이후 제13조로 추앙되었다.

67)이곳은……곳입니다:탑본(榻本)의 원주(原註)에 “선조의 휘는 인문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한 공을 인정하여 임해군공으로 봉하였다.[祖諱仁問 唐酬伐穢貊 封爲臨海郡公也]”라고 하였다.

68)금전(金田):황금을 땅에 깐 지역이라는 뜻으로 사원을 가리킨다. 금지(金地)라고도 한다. 인도(印度) 사위성(舍衛城)의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說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大唐西域記 卷6

69) 대중(大中):당 선종(唐宣宗)의 연호로 847년에서 859년까지이다.

70)종을……하고:예기 학기(學記)에 “질문에 잘 대응하는 자는 종을 치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작게 두드리면 작게 울려 주고,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울려 준다.[善待問者如撞鍾 叩之以小者小鳴 叩之以大者則大鳴]”라는 말이 나온다.

71)거울이……하면서: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가 효경을 강독하려고 하자, 사안(謝安)과 사석(謝石)이 사람들과 함께 사적으로 강습하였다. 이때 차윤(車胤)이 사씨(謝氏)에게 질문하는 것을 어려워하면서 원교(袁喬)에게 “묻지 않으면 덕음(德音)에 손상되는 점이 있을 것이고, 많이 물으면 두 분 사씨를 귀찮게 할 것이다.”라고 하니, 원교가 “필시 그런 혐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차윤이 “그런 줄을 어떻게 아는가?”라고 하니, 원교가 “밝은 거울이 자주 비춰 준다고 피곤해 한 적이 언제 있었으며, 맑은 강물이 온화한 바람을 마다한 적이 언제 있었던가.[何嘗見明鏡疲於屢照 淸流憚於惠風]”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72)산상(山相)에게……말:산중재상(山中宰相) 즉 김흔(金昕)에게 대답한 “인연이 있으니 머물러야 하겠지요.[有緣則住]”라는 말을 가리킨다.

73)외람되게……것:자격도 없는 사람이 허명만 지니고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의 겸사이다. 제 선왕(齊宣王)이 피리 연주를 좋아하여 항상 300인을 모아 합주하게 하자, 남곽처사(南郭處士)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 슬쩍 끼어들어 피리 부는 흉내만 내면서 국록을 타 먹곤 하였는데, 선왕이 죽고 민왕(湣王)이 즉위한 뒤에 한 사람씩 연주하게 하자 본색이 드러날까 겁낸 나머지 도망쳤다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內儲說上

74)바람을 피한 새:자신의 생리에 맞지 않는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뜻으로 비유한 말이다. 원거(鶢鶋)라는 해조(海鳥)가 바람을 피해 노(魯)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임금이 그 새를 정중히 모셔다가 종묘(宗廟)에서 환영연을 베풀면서, 순(舜) 임금의 소악(韶樂)을 연주하고 소․양․돼지고기의 요리로 대접하니, 그 새는 눈이 부시고 근심과 슬픔이 교차하여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하고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3일 만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지락(至樂)에 나온다.

75)무우(霧雨)……표범:남산(南山)의 검은 표범은 무우(霧雨)가 계속된 7일 동안 먹을 것이 없어도 그 속에 가만히 숨어 있을 뿐, 게걸스러운 멧돼지와는 달리 산 아래로 내려가서 먹을 것을 구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털 무늬를 아름답게 보전하기 위해서였다는 남산현표(南山玄豹)의 고사가 전한다. 列女傳 卷2 賢明傳 陶答子妻

76)남북상(南北相)으로 있었는데:탑본(榻本)의 원주(原註)에 “각각 남상과 북상의 관직에 거하였으니, 좌상과 우상이라는 말과 같다.[各居其官 猶左右相]”라고 하였다.

77)주풍(周豐)이……말:노 애공(魯哀公)이 은사 주풍에게 유우씨(有虞氏)와 하후씨(夏后氏)가 백성에게 신임과 공경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 묻자, 주풍이 “잡초 우거진 무덤 사이에서는 백성들에게 슬퍼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 스스로 슬퍼하고, 사직과 종묘 근처에서는 백성들에게 공경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 스스로 공경한다. 은나라 사람이 맹서하는 글을 짓자 백성들이 배반하기 시작하였고, 주나라 사람이 회합하는 일을 행하자 백성들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예의와 충신과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이 없이 백성의 위에 군림한다면, 비록 굳게 약속을 한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풀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墟墓之間 未施哀於民而民哀 社稷宗廟之中 未施敬於民而民敬 殷人作誓 而民始畔 周人作會 而民始疑 苟無禮義忠信誠慤之心以涖之 雖固結之 民其不解乎]”라고 대답한 기록이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온다.

78)백종(伯宗):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로 진 경공(晉景公)을 섬겼다. 경공 14년에 양산(梁山)이 무너지는 변고가 발생했을 때, 백종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는 현상이라고 위무하면서 사태를 원만히 수습한 고사가 전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5년에 “양산이 무너지자 진나라 군주가 역마를 보내 백종을 급히 부르게 하였다.[梁山崩 晉侯以傳召伯宗]”라는 말이 나온다.

79)원공(遠公):진(晉)나라의 고승 혜원(慧遠)을 가리킨다.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머물면서 한번도 산 밖으로 나간 적이 없으며, 환현(桓玄)이 칭제(稱帝)하며 조서를 내려 승려들에게 속인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했을 때에도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반박하였다.

80)태제(太弟):탑본의 원주(原註)에 “추후에 혜성대왕의 시호를 봉하여 높였다.[追封尊諡惠成大王]”라고 하였다. 혜성대왕은 경문왕의 아우 위홍(魏弘)의 시호이다.

81)유(有)만……것이다:문심조룡(文心雕龍) 논설(論說)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해서 인용한 것이다.

82)몸을……있는: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로, 원래는 공자가 순(舜) 임금을 찬양한 말이지만, 여기서는 아무 일도 하는 것 없이 그저 임금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뜻의 겸사로 쓰였다.

83)남종(南宗):중국 선종(禪宗) 가운데 6조(祖) 혜능(慧能) 계열의 돈오(頓悟)를 위주로 하는 종파를 가리킨다. 북종(北宗)은 점수(漸修)를 위주로 하는 신수(神秀) 계열의 종파를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모두 남종 계열이다.

84)순(舜)……말인가: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안연(顔淵)의 말인데, 임금 자신도 노력하면 대사와 같은 훌륭한 경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을 공경하고 부러워하며 자신을 경책한 말이다.

85)나라……되었다:사람들이 자기 내부의 불성(佛性)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사람의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의주(衣珠)는 옷 속의 보주(寶珠)라는 말로, 불성을 뜻하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 “속옷 속에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不覺內衣裏 有無價寶珠]”라는 말이 나온다. 무옥(廡玉)은 처마 아래에 놓인 옥돌이라는 말로, 타인의 보배를 뜻하는 말이다. 직경이 1자나 되는 옥돌을 얻은 농부가 불길한 괴석이라고 속이는 이웃집 사람의 말을 듣고 처마[廡] 아래에 놔두었다가 다시 발광하는 현상에 놀라 들판에 버린 것을 이웃집 사람이 몰래 왕에게 바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속집(續集) 권26 득옥능변(得玉能辨)에 나온다.

86)헌강대왕(獻康大王)이 익실(翼室)에 거하여:헌강왕이 부왕(父王)인 경문왕의 상을 당하여 정전(正殿) 대신 익실에 거하면서 상복을 입었다는 말이다. 익실은 정전 옆의 좌우에 있는 방이다.

87)계옥(桂玉):계수나무 땔나무와 옥으로 지은 밥이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초(楚)나라에 가서 “초나라의 밥은 옥보다도 귀하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도 귀하다. 지금 내가 옥으로 지은 밥을 먹고 계수나무로 불을 때고 있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今臣食玉炊桂 不亦難乎]”라고 불만을 토로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楚策3

88)건부제(乾符帝)가 석명(錫命)하던 해:건부황제 즉 당 희종(唐僖宗)이 헌강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조서(詔書)를 내린 해라는 뜻으로, 헌강왕 4년(878)에 해당한다.

89)만전(蠻牋):당나라 때 품질 좋은 신라의 종이를 칭하는 별명이었다. 보통 만전(蠻箋)이라고 한다.

90)하상지(何尙之)가……심성(心聲):남조 송 문제(宋文帝)가 불경(佛經)을 지남(指南)으로 하여 태평 시대를 이루고 싶다면서 그 대책을 묻자, 시중(侍中) 하상지가 혜원 법사(慧遠法師)의 말을 인용한 뒤에 사람들에게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을 행하도록 하고 이를 나라의 정치에 확대 적용하면 감옥의 죄수가 없어지고 아송(雅頌)의 정치가 흥기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대답한 말이 양나라 승우(僧祐)가 지은 홍명집(弘明集) 권11에 수록된 하상지의 답송문황제찬양불교사(答宋文皇帝讚揚佛敎事)에 나온다. 심성(心聲)은 말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권5 문신(問神)의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따라서 소리와 그림으로 나타난 것만 보아도, 그 사람이 군자인지 소인인지 알 수가 있다.[言心聲也 書心畫也 聲畫形 君子小人見矣]”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91)삼외(三畏)는……같으니:유교와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서로 통한다는 취지로 한 말이다. 삼외는 군자가 두려워하는 세 가지 일로,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을 두려워하는 것[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이다. 삼귀(三歸)는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오상(五常)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다. 오계(五戒)는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음주(不飮酒)를 말한다.

92)황제가……가을:당 희종(唐僖宗)이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서촉(西蜀) 성도(成都)로 몽진(蒙塵)한 중화(中和) 1년(881)의 가을로, 헌강왕 7년에 해당한다.

93)나라에……옳겠는가: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을 궤 속에 넣어서 그냥 보관해 두어야 합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까?[有美玉於斯 韞櫝而藏諸 求善賈而沽諸]” 하고 묻자, 공자가 “팔아야지, 팔아야 되고말고. 나 역시 제값을 주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94)마니(摩尼):범어(梵語) maṇi의 음역으로, 말니(末尼)라고도 하며, 보주(寶珠)로 의역된다. cintā-maṇi는 진타마니(眞陀摩尼)로 음역되는데, 이것은 여의주(如意珠)라는 뜻이다.

95)수레……구슬:전국 시대 양 혜왕(梁惠王)이 자신의 야광주를 자랑하며 “전후로 각각 12채의 수레를 비출 수 있는 구슬이 10개나 된다.[照車前後各十二乘者十枚]”라고 자랑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

96)옛날……있었다:한(漢)나라 소하(蕭何)가 유방(劉邦)에게 “왕께서는 평소에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고 계시는데, 지금 대장을 임명하면서도 마치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하고 있기 때문에 한신(韓信)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떠나간 것이다.[王素慢無禮 今拜大將如呼小兒耳 此乃信所以去也]”라고 충고하여 다시 예우하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찬후(酇侯)는 소하의 봉호(封號)이다.

97)한왕이……때문이었다:상산(商山)의 네 노인은 진(秦)나라 말기에 전란을 피해 상산에 들어가서 은거했던 4인의 백발노인, 즉 동원공(東園公)․기리계(綺里季)․하황공(夏黃公)․녹리선생(甪里先生) 등의 상산사호(商山四皓)를 가리킨다. 이들은 한 고조(漢高祖)가 초빙할 때에는 전혀 응하지 않다가 나중에 장량(張良)의 권유를 받고 나와서 태자로 있던 혜제(惠帝)를 보필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98)내가……되겠는가: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세상에서 누구나 존경해야 할 대상이 세 가지 있으니, 작위와 연치와 덕성이 그것이다. 조정에서는 작위만 한 것이 없고, 향리에서는 연치만 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의 어른 노릇을 하는 데에는 덕성만 한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중 작위 하나를 가지고서 연치와 덕성의 둘을 지닌 사람에게 거만하게 굴어서야 되겠는가.[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德一 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 惡得有其一以慢二哉]”라는 말이 나온다.

99) 외로운……있어서이겠는가: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구름은 아무 생각 없이 봉우리 위에서 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을 안다.[雲無心以出峀 鳥倦飛而知還]”라는 구절이 나온다.

100)대왕(大王)의 바람:전국 시대 굴원(屈原)의 제자인 송옥(宋玉)이 초 양왕(楚襄王)의 교만과 사치를 풍자할 목적으로 풍부(風賦)라는 글을 지으면서, 바람을 대왕지풍(大王之風)과 서인지풍(庶人之風)으로 구분하였는데, 후대에는 보통 제왕의 뜻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文選 卷13

101)집착함이 없는 것:논어 자한(子罕)의 “공자는 네 가지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그에게는 사적인 뜻과 기필(期必)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과 이기적인 마음이 없었다.[子絶四 毋意毋必毋固毋我]”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102)상사(上士):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하는 보살(菩薩)을 가리킨다. 석씨요람(釋氏要覽) 권상에 “자리와 이타의 행이 없는 자를 하사라 하고, 자리는 있고 이타는 없는 자를 중사라 하고, 자리와 이타의 행이 있는 자를 상사라 한다.[無自利利他行者 名下士 有自利無利他者 名中士 有二利 名上士]”라는 유가론(瑜伽論)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103)육의(六義):시경에 나타나는 문학의 창작 정신 및 원칙을 말하는데, 시의 작법상 세 가지의 체제라 할 풍(風)․아(雅)․송(頌)과 세 가지의 표현 방법이라 할 부(賦)․비(比)․흥(興)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104)사선(四禪)……자였다:사선은 불교 용어로 사선정(四禪定) 혹은 사정려(四靜慮)라고 한다. 초선(初禪)과 제이선(第二禪)과 제삼선(第三禪)과 제사선(第四禪)의 과정이 있는데, 제사선에는 사청정(捨淸淨)․염청정(念淸淨)․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심일경성(心一境性) 등 사지(四支)의 경지가 있다. 제삼선의 묘락(妙樂)을 여의었기 때문에 사청정(捨淸淨)이라고 칭하고, 오직 수양하는 공덕만 생각하기 때문에 염청정(念淸淨)이라고 칭한다고 한다.

105)예전에……되었습니다:증점(曾點)과 증삼(曾參) 부자(父子)가 모두 공자의 제자가 되었던 것처럼, 선왕(先王)인 경문왕과 헌강왕 자신 또한 똑같이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와 염유(冉有)와 공서화(公西華)가 먼저 자신의 포부에 대해 답변을 올리자 공자가 마지막으로 증점의 생각을 물었는데, 이에 증점이 “조용히 비파를 연주하고 있다가 크게 한바탕 튕기고서 내려놓은 뒤에 일어나서는[鼓瑟希 鏗爾 舍瑟而作]” 자신의 뜻을 말하여 공자의 허여를 받은 고사가 전한다. 論語 先進 또 증점의 아들인 증삼 즉 증자(曾子)가 공자를 모시고 앉았을 적에 공자가 이르기를 “선왕(先王)들은 지덕(至德)과 요도(要道)가 있어서 천하를 순하게 다스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화목하여 상하가 서로 원망함이 없었다. 네가 그것을 알겠느냐?”라고 하니, 증자가 자리를 피해 일어나면서[避席] “삼(參)이 불민하니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孝經 開宗明義章

106)공동(崆峒)의 가르침:지인(至人)의 가르침이라는 말로, 대사의 교시를 뜻한다. 고대 전설상의 선인(仙人)인 광성자(廣成子)가 공동산(崆峒山)의 석실(石室)에 은거하였는데, 황제(黃帝)가 재위(在位) 19년 만에 그를 찾아가 도를 묻고 수도 끝에 지도(至道)의 정수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장자 재유(在宥)에 나온다. 공동산(崆峒山)은 공동산(空同山)이라고도 한다.

107)위수(渭水) 물가의 노옹(老翁):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가리킨다. 그가 위수 물가의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108)흙다리 가의 유자(孺子):한(漢)나라의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그가 한 노인의 신발을 흙다리[圯橋] 밑에서 주워 준 인연으로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받은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109)옛날……있었는데:진서(晉書)9 태종간문제기(太宗簡文帝紀)에 “사문(沙門) 지도림(支道林)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계왕은 육체는 좋은데 정신은 볼 것이 없다.[會稽有遠體而無遠神]’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회계왕은 간문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봉호이다.

110)인신(人臣)……갖추었으니:진(晉)나라 승상 왕도(王導)가 우비(虞)에게 “공유는 공재는 있어도 공망이 없고, 정담은 공망은 있어도 공재가 없다. 공재도 있고 공망도 있는 사람은 바로 그대이다.[孔愉有公才而無公望 丁潭有公望而無公才 兼之者 其在卿乎]”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晉書 卷76 虞列傳 공재는 삼공(三公)이 될 만한 재능을 말하고, 공망은 그 인망을 말한다.

111)은구(銀鉤):아름다운 필체의 글씨를 뜻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색정(索靖)이 서법(書法)을 논하면서 “멋지게 휘돈 것이 흡사 은 갈고리와 같다.[婉若銀鉤]”라고 초서(草書)를 평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60 索靖列傳

112)중수(中壽):80세를 가리킨다. 장자 도척(盜跖)에 “인생은 상수(上壽)가 100세요 중수(中壽)가 80세요 하수(下壽)가 60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온갖 걱정과 우환을 제외하고 진정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수 있는 기간은 한 달 중에서 4, 5일에 불과할 따름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113)옛날의 관리들:한(漢)나라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가리킨다. 상국(相國)인 소하가 죽자 조참이 그 직책을 계승하여 소하의 법도를 그대로 준행하다가 3년 뒤에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를 찬양하여 “소하의 법도는 분명하기가 선을 그은 것 같았네. 조참이 그 뒤를 이어 이를 지켜서 잃지 않도록 하였네. 청정한 정사를 행한 그 덕분에,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네.[蕭何爲法 顜若畫一 曹參代之 守而勿失 載其淸淨 民以寧一]”라고 노래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54 曹相國世家

114)몸가짐은……느렸다:진(晉)나라의 현인(賢人)인 조문자(趙文子)에 대해서 “몸가짐이 겸손하여 마치 옷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듯하였으며, 말은 낮고 느려서 마치 입으로 말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其中退然 如不勝衣 其言吶吶然 如不出諸其口]”라고 칭찬한 말이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온다.

115)누더기……성자:노자(老子) 70장에 “성인은 겉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지만, 안에는 보배 구슬을 품고 있다.[聖人被褐懷玉]”라는 말이 나온다.

116)도(道)를……실천하여:노자 41장에 “상등의 인물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천한다. 중등의 인물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게 반응한다. 하등의 인물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라는 말이 나온다.

117)갈림길 속의 갈림길:도망친 양을 잡으려고 쫓아 가다가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이 있어서[岐路之中 又有岐焉]’ 끝내는 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망양지탄(亡羊之歎)’의 고사가 전한다. 列子 說符

118)조사(祖師)께서도……이기셨는데:불교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일컬어지는 가섭(迦葉)이 어느 날 진흙을 발로 이기고 있자[踏泥], 한 사미(沙彌)가 보고는 왜 손수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내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서 해 주겠느냐.[我若不爲 誰爲我爲]”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五燈會元 卷1 一祖摩訶迦葉尊者

119)도량에 앉아 지낸다: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세상에 쓸모없는 노쇠한 이 몸이야, 그저 소요하며 도량에 앉아 지냄이 적격이리.[世間無用殘年處 祗合逍遙坐道場]”라는 말이 나온다. 白樂天詩後集 卷17 道場獨坐

120)인사(麟史):춘추의 별칭이다. 춘추가 애공(哀公) 14년 “서쪽 들판으로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붙잡았다.[西狩獲麟]”라는 경문(經文)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인경(麟經)이라고도 한다.

121)공후(公侯)였던……것이다:춘추좌씨전 민공(閔公) 원년 맨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다.

122)우리의……이르렀다:논어 옹야(雍也)에 “제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123)더불어……없으리라:춘추 시대 제(齊)나라 의중(懿仲)이 자기 딸을 진경중(陳敬仲)에게 출가시키려 할 때 점을 쳐서 얻은 괘(卦) 중에 “8세 뒤의 후손에 이르러서는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으리라.[八世之後 莫之與京]”라는 말이 나온다. 春秋左氏傳 莊公22年

124)여섯 마적(魔賊):인식 주체인 인간의 육근(六根) 즉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대하여 그 인식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육경(六境)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육경은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125)이……아니겠는가:왕자(王者)와 같은 위인이 나올 500년의 시운(時運)에 맞추어서 대사가 이 세계에 출현하였다는 말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500년마다 왕자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다.[五百年必有王者興]”라는 말이 나오고, 진심 하(盡心下)에 요순(堯舜)과 탕(湯)과 문왕(文王)과 공자(孔子) 사이의 세월이 각각 500여 년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천(大千)은 불교 용어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준말이다.

126)복기시(復其始)의 설:“공후였던 사람의 자손이 반드시 그의 사조(始祖)의 지위로 복귀할 것이다.[公侯之子孫必復其始]”라는 춘추좌씨전의 설을 말한다.

127)가도(可道)가……함은:노자(老子) 1장에 “도라고 명명할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도가 아니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는 말이 나온다.

128)즉불(卽佛)이……함은:어떤 승려가 마조 선사(馬祖禪師)에게 “화상은 어찌하여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설하십니까?”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爲止小兒啼]”라고 하였고,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다시 묻자, 대답하기를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오등전서(五燈全書) 권5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에 나온다.

129)요 임금의……있었나니:중국에 건너가 고승들을 역방(歷訪)하며 불법을 구한 끝에 마음으로 크게 깨닫고 나서는 그동안에 방편으로 이용했던 것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뗏목은 물을 건너기 위한 것인 만큼 일단 건너고 나면 필요없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방편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관광(觀光)은 주역 관괘(觀卦) 육사(六四)의 “나라의 휘황한 빛을 봄이니, 왕에게 나아가 손님이 되는 것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선진 문물을 접하여 견식을 넓힌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130)도야(桃野):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한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고, 그 위에 천계(天雞)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치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下

131)인방(仁方):동방(東方)을 뜻한다. 인(仁)은 오행(五行) 중 목(木)에 소속되는데, 방위로 볼 때 동쪽에 해당한다.

132)삼고(三顧):후한(後漢) 말에 제갈량(諸葛亮)이 남양(南陽) 융중(隆中) 땅에서 초옥(草屋)을 짓고 농사지으며 은거하고 있다가, 세 번이나 그곳을 찾아온 유비(劉備)의 정성에 감동되어 세상에 나왔던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를 말한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133)칠보(七步)로……않았지만:북제 문선제(北齊文宣帝)가 승조(僧稠)를 만나러 왔을 때 영접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자 제자들이 의아해하면서 그 이유를 물으니, 승조가 “옛날 빈두로 존자가 아육왕(阿育王)을 영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일곱 걸음을 걸은 탓으로 7년 동안 나라가 잘못되게 하였다.[昔賓頭盧迎王七步 致七年失國]”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續高僧傳 卷16 僧稠傳

134)나오는……귀하였고:대사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무척 드물었다는 말이다. 섭룡(葉龍)은 섭공(葉公)에게 나타난 용이라는 뜻이다. 섭공자고(葉公子高)라는 사람이 너무도 용을 좋아해서 집안 이곳저곳에 용을 새겨 장식해 놓자 진짜 용이 내려와서 머리를 내밀고 꼬리를 서렸는데, 섭공이 이를 보고는 대경실색하여 달아났다는 섭공호룡(葉公好龍)의 이야기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序) 잡사(雜事) 5에 나온다.

135)떠나는……높았나니:대사가 세속에 잠깐 머물다가 산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훌훌 떨치고 미련없이 떠나갔다는 말이다. 명홍(冥鴻)은 까마득히 하늘 위로 치솟아 사라지는 기러기라는 뜻이다.

136)물……여기다가:세상에 나와야 할 때에는 편협하게 은거만을 고수하지 않고 과감하게 나와서 행동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고승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 거주하면서 호계(虎溪)라는 시냇물을 결코 건너지 않았는데, 도잠(陶潛)과 육수정(陸修靜)을 배웅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 물을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蓮社高賢傳 百二十三人傳 또 허유(許由)와 소보(巢父)가 기산(箕山) 영수(潁水)에 숨어 살았는데, 요(堯) 임금이 제위를 맡기려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고서 귀를 씻었고, 이 말을 들은 소보는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서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137)골에……뛰어났어라:일단 산중에 들어가서는 철저하게 사원의 청규(淸規)를 지키며 엄격하게 수행했다는 말이다. 전진(前秦) 때의 고승 승랑(僧朗)이 금여곡(金輿谷)에서 수도하면서 승단(僧團)을 엄격하게 이끌었으므로, 그곳을 낭공곡(朗公谷)이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5 僧朗傳

138)도외(島外):동해 삼신산(三神山)이 있는 섬의 밖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중국을 가리킨다.

139)호중(壺中):호리병 속의 선경(仙境)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궁중을 가리킨다. 동한(東漢)의 술사(術士)인 비장방(費長房)이 선인(仙人) 호공(壺公)의 총애를 받아 그의 호리병 속에 들어가서 선경의 낙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下 費長房

140)천인사(天人師):하늘과 사람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불(佛)의 10호(號) 중의 하나이다.

141)그저……것이로다: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후세에 지금을 보는 것이 또한 지금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슬픈 일이다.[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悲夫]”라는 말이 나온다.

142)계봉(雞峯)에……건재하리라:미래불(未來佛)인 미륵(彌勒)이 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이 비석은 건재할 것이라는 말이다. 계봉은 계족산(雞足山)으로 곧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부처의 수제자인 가섭(迦葉)이 여래(如來)의 의발(衣鉢)을 전수받고는 이를 부처의 부촉에 따라 미륵에게 전하기 위해 계족산에 가서 선정에 든 뒤에 가부좌하고 입멸하자 계족산 세 봉우리가 하나의 산으로 합쳐졌는데, 장차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손가락으로 튕기면 그 산이 다시 열리면서 가섭이 선정에서 깨어나 의발을 전하게 된다는 불교 설화가 전해 온다. 佛祖統記 卷5 始祖摩訶迦葉尊者

143) 진감 화상 비명:신라사산비명에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智異山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로 되어 있다.

144)여룡(驪龍)이……사람:여룡 즉 흑룡(黑龍)이 잠들어 있을 때에 잡아 먹힐 위험을 무릅쓰고 턱 아래에 있는 구슬을 훔쳐 온 사람의 이야기가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나온다.

145)오승(五乘):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통하여 인간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인승(人乘), 십선(十善) 및 사선(四禪) 팔정(八定)을 통하여 천상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천승(天乘), 사제 법문(四諦法門)을 통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게 하는 성문승(聲聞乘), 십이인연(十二因緣) 법문을 통하여 벽지불과(辟支佛果)를 얻게 하는 연각승(緣覺乘), 육도(六度) 법문을 통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보살승(菩薩乘)을 가리킨다. 오연(五衍)이라고도 한다.

146)1천……하고:당(唐)나라 도선(道宣)이 지은 광홍명집(廣弘明集) 권3 가훈귀심편(家訓歸心篇)에 “불교는 1만 행동을 공으로 돌리고 1천 가문이 선에 들어오게 한다. 그 변재와 지혜로 말하면 어찌 단지 칠경이나 백씨의 박학함 정도로 그치겠는가. 요순이나 주공과 공자 그리고 노장 등도 미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萬行歸空 千門入善 辯才智慧 豈徒七經百氏之博哉 明非堯舜周孔老莊所及也]”라는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말이 실려 있다.

147)온 나라가……일으키게:대학장구 전 9장에 “임금의 집안 하나가 인을 행하면 온 나라가 인한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임금의 집안 하나가 사양을 하면 온 나라가 사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라는 말이 나온다.

148)신독(身毒):천축(天竺)과 같은 말로, 인도(印度)의 옛 이름인데, 여기서는 불교의 뜻으로 쓰였다. 후한서(後漢書) 권88 서역열전(西域列傳) 천축(天竺)에 “천축국은 신독이라고도 하는데, 월지에서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으며, 풍속은 월지와 같다.[天竺國 一名身毒 在月氏之東南數千里 俗與月氏同]”라는 말이 나온다.

149)궐리(闕里):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孔子)의 고리(故里)인데, 여기서는 유교의 뜻으로 쓰였다.

150)시를……된다: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이다.

151)말의……있다:예기 제의(祭義)에 나온다.

152)석가여래(釋迦如來)와……때문이다: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5편 중 네 번째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의 대목에 나오는 글인데, 고승전(高僧傳) 권6 석혜원전(釋慧遠傳)에 수록되어 있다. 고운이 내용을 생략하거나 덧붙인 부분이 있지만 대의는 큰 차이가 없다.

153)공자는……다했다:심약(沈約)은 남조 양(梁)의 저명한 문학가이다. 이 내용은 그의 내전 서(內典序)에 나오는데, 광홍명집(廣弘明集) 권19에 수록되어 있다.

154)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응당 달을 보아야 할 텐데, 손가락만을 쳐다보고는 그것이 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선가(禪家)에서 문자와 명상(名相)에 집착하지 말고 실상(實相)을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쓰는 비유이다. 楞嚴經 卷2

155)앉아서 잊는 경지:좌망(坐忘)은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말로, 주객(主客)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道)와 합일된 정신의 경지를 뜻하는데, 불가(佛家)의 삼매(三昧)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56)나는……하던가:공자가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予欲無言]”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가 어떻게 도를 전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는 운행하고 만물은 자라난다.[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양화(陽貨)에 나온다.

157)정명(淨名)이……대하고:정명은 인도(印度) 비야리국(毘耶離國)의 장자(長者)로서 석존(釋尊)의 속제자(俗弟子)였다는 유마거사(維摩居士)를 가리킨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유마거사를 찾아와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유마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문수가 탄식하며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으로 들어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維摩經 入不二法門品

158)선서(善逝)가……것:선서는 부처의 10호(號) 가운데 하나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염화시중(拈花示衆)했을 때에, 대중이 모두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오직 가섭(迦葉)만이 파안미소(破顔微笑)를 짓자, 석가가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했다는 말이, 육조 대사(六祖大師)의 법보단경(法寶壇經) 서문오등회원(五燈會元) 권1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에 나온다.

159)천시(天時)를……없어서:농사지어 수확할 토지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훔쳐서[盜天地之時利] 농사짓고 살아간다는 말이 나온다.

160)철숙(啜菽)의 봉양:콩죽을 쑤어 먹는다는 말로, 빈한한 집에서 효성스럽게 어버이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집이 가난해서 어버이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고 한탄하자, 공자가 “콩죽을 쑤어 먹고 맹물을 마시더라도 어버이를 기쁘게만 해 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효도이다.[啜菽飮水 盡其歡 斯之謂孝]”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161)채란(采蘭):진(晉)나라 속석(束晰)의 보망시(補亡詩) 남해(南陔)에 나오는 ‘언채기란(言采其蘭)’이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배로운 향초를 캐어 어버이에게 드린다는 뜻에서 어버이 봉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162)희미(希微)의 경지:소리와 형체가 없는 도(道)의 세계를 말한다. 노자(老子) 14장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희라 하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을 미라 한다.[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라는 말이 나온다.

163)내가……되겠는가:논어 양화(陽貨)에 “내가 어찌 뒤웅박처럼 한곳에 매달린 채 먹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164)오체투지(五體投地):두 무릎과 두 팔과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불교 예법의 하나로, 접족작례(接足作禮)․두면예족(頭面禮足)이라고도 한다.

165)불이……같았다:상호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하며, 같은 기운끼리 서로 찾는다. 물은 축축한 곳으로 번져 가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타들어 간다.[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라는 말이 나온다.

166)동방의 성인(聖人):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석안함전(釋安含傳)에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의하면, 의상은 진평왕 건복 42년(620)에 태어났는데, 이해에 동방의 성인인 안홍 법사가 서역의 두 삼장과 중국의 승려 2인과 함께 당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崔致遠所撰義相傳云 相真平建福四十二年受生 是年東方聖人安弘法師與西國二三藏 漢僧二人至自唐]”라는 말이 나온다.

167)칠도인(漆道人):동진(東晉)의 고승(高僧) 도안(道安)의 별칭이다.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 권2 전량(前涼) 석도안(釋道安)에 “나이 11세에 출가하여 불도징을 사사하였다. 글을 읽으면 하루에 만언을 기억하였으며, 재변으로 맞설 사람이 없었다. 성품이 총명하였으나 모습은 추하였으므로, 당시에 칠도인이 사방을 놀라게 한다고 말하였다.[年十一出家師事佛圖澄 讀書日記萬言 才辯無敵 性聰而貌醜 時語曰漆道人驚四隣]”라는 말이 나온다. 또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진효무제(晉孝武帝)에 “도안은 모습이 총민하고 피부 색깔이 검었으며 담론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칠도인이 사방을 놀라게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또 왼쪽 팔에 사방 1치쯤 도장 형태의 살점이 돋아났으므로 세상에서 인수보살이라고 불렀다.[安貌銳而姿黑 喜談論 故諺曰 漆道人驚四隣 左臂有肉 方寸隆起如印 世號印手菩薩]”라는 말이 나온다.

168)도읍……사람:춘추 시대 송(宋)나라 공자 한(罕)을 가리킨다. 송나라 황국보(皇國父)가 태재(太宰)가 되어 임금인 평공(平公)을 위해 누대를 지었는데, 그 일이 농사에 방해가 되었으므로 공자 한이 추수가 끝난 뒤에 공사할 것을 청했지만 평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을 하는 자들이 “택문 가의 얼굴 흰 사람은 실로 우리의 이 공사를 일으켰고, 도읍 안의 얼굴 검은 사람은 실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네.[澤門之晳 實興我役 邑中之黔 實慰我心]”라고 노래했다는 고사가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7년에 나온다.

169)적자(赤頿):진(晉)나라의 고승 불태야사(佛馱耶舍)를 가리킨다. 불조통기(佛祖統記) 권26 십팔현전(十八賢傳) 불태야사에 “스님은 수염이 붉고 비바사론을 잘 해석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사람들이 붉은 수염의 논주라고 불렀다.[師頿赤 善解毘婆沙論 時人號赤頿論主]”라는 말이 나온다.

170)청안(靑眼):푸른 눈이라는 뜻으로, 보통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171)성선(聖善):모친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개풍(凱風)의 “어머님은 성스럽고 선하신데, 우리 중에는 괜찮은 자식이 없도다.[母氏聖善 我無令人]”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172)해후하여……풀었으니:시경 야유만초(野有蔓草)의 “우연히 서로 만나, 평소의 소원을 풀었도다.[邂逅相遇 適我願兮]”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173)서남쪽에서……것:주역(周易) 곤괘(坤卦) 괘사(卦辭)에 “서남쪽으로 가면 벗을 얻고, 동북쪽으로 가면 벗을 잃는다.[西南得朋 東北喪朋]”라는 말이 나온다.

174)불지견(佛知見):부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개(開)․시(示)․오(悟)․입(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을 설법했다는 내용이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보인다.

175)지관(止觀):망상을 쉬고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불교 수행법으로, 법화경을 소의경전(所依經傳)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에서 특히 강조한다.

176)흑의(黑衣)의 인걸: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제무제(齊武帝)에 “장간사의 현창에게 조칙을 내려 법헌과 함께 승주가 되게 한 뒤에, 강남과 강북의 일을 나누어 맡게 하니, 당시에 이들을 흑의의 두 인걸이라고 불렀다.[勅長干寺玄暢同法獻為僧主 分任江南北事 時號黑衣二傑]”라는 말이 나온다.

177)미천(彌天):하늘에 가득하다는 뜻으로, 진(晉)나라 고승 도안(道安)의 별명인데, 여기서는 진감 선사를 비유하였다.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진효무제(晉孝武帝)에 “고사 습착치가 도안을 찾아와서 자칭 사해 습착치라고 말하자, 도안이 미천 석도안이라고 대답하였는데, 당시에 사람들이 명답변이라고 하였다.[高士習鑿齒詣安 自稱四海習鑿齒 安答曰 彌天釋道安 時以為名對]”라는 말이 나온다.

178)의원의……것:장자 인간세(人間世)에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들어가라. 의원의 집에는 환자가 많이 모이는 법이다.[治國去之 亂國就之 醫門多疾]”라는 말이 나온다.

179)오도(於菟):호랑이의 별칭이다.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4년에 “초나라 사람들은 젖을 곡이라 하고, 호랑이를 오도라 한다.[楚人謂乳穀 謂虎於菟]”라는 말이 나온다.

180)유기(兪騎):유아기(兪兒騎)의 준말로, 제왕의 대가(大駕)가 행차할 때 의장대(儀仗隊)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호위 기마병을 말한다. 유아는 발걸음이 날래어 잘 달리는 등산(登山) 귀신 이름이다.

181)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이……일:송고승전(宋高僧傳)2 선무외전(善無畏傳)에 나온다.

182)축담유(竺曇猷)가……일:맹호(猛虎) 수십 마리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송경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유독 한 마리가 졸고 있자 여의장(如意杖)으로 머리를 두드려 깨워 질책하였다는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11 축담유전(竺曇猷傳)에 나온다.

183)난야(蘭若):범어(梵語) araṇya의 음역인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출가한 승려의 한적한 수행처, 즉 사원을 뜻한다.

184)개성(開成)……나서:민애왕 김명(金明)이 희강왕(僖康王)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왕위에 오른 것을 말하는데, 그도 1년 뒤에 김양(金陽) 등에게 살해되는 운명을 맞는다.

185)산에서……청한다:속고승전(續高僧傳)16 승조전(僧稠傳)에 “북위(北魏) 효명제가 일찍이 그의 훌륭한 덕에 감화되어 전후에 걸쳐 세 차례나 초빙하였으나, 승조가 사양하면서 ‘어느 하늘 아래나 왕의 땅 아닌 곳이 없으니, 산에서 수도하며 대도에 어긋나지 않게 해 주기를 청한다.’라고 하니, 황제가 마침내 허락하고는 산으로 공양을 보내었다.[魏孝明帝夙承令德 前後三召 乃辭云 普天之下莫非王土 乞在山行道不爽大通 帝遂許焉 乃就山送供]”라는 말이 나온다.

186)원공(遠公)의 동림(東林):진(晉)나라 고승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세운 동림사(東林寺)를 말하는데, 주변의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

187)연화세계(蓮花世界):불교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가리킨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보살행(菩薩行)을 닦으며 발원해서 성취한 청정 장엄(淸淨莊嚴) 세계를 말하는데, 신역 화엄경(新譯華嚴經) 권8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88)호리병……이야기: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선인(仙人) 호공(壺公)을 따라 그의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선경인 별천지(別天地)가 펼쳐져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새로 세운 쌍계사(雙溪寺)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189)중생의……것이다:능가경(楞伽經) 권1 일체불어심품(一切佛語心品)의 게(偈)에 “위열중생고 기착궤중상(為悅衆生故 綺錯繢衆像)”이라는 말이 나온다.

190)양사(梁史)에도……있는데:양서(梁書) 권41 저상열전(褚翔列傳)에 “저상이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시중이 되었을 때에 모친의 병이 위독해지자, 사문을 청해 복을 빌었다. 그러자 한밤중에 홀연히 문밖에 기이한 빛이 보이고, 또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새벽녘에 병이 마침내 낳았다.[翔少有孝性 爲侍中時 母疾篤 請沙門祈福 中夜忽見戶外有異光 又聞空中彈指 及曉疾遂愈]”라는 말이 나온다.

191)측조(側調):고악(古樂) 삼조(三調) 중의 하나이다. 송(宋)나라 왕작(王灼)의 벽계만지(碧溪漫志) 권5에 “대체로 옛 음악은 성률의 높고 낮음에 따라 셋으로 나눈다. 청조와 평조와 측조가 그것인데, 이를 삼조라고 한다.[蓋古樂取聲律高下合爲三 曰淸調平調側調 此之謂三調]”라는 말이 나온다.

192)코를 막는 것:타인의 기예를 부러워하여 본받으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젊었을 때 콧병을 앓아서 마치 낙양(洛陽) 서생(書生)의 성조(聲調)처럼 굵고 탁한 코 먹은 소리를 잘 내었는데, 당시의 명류(名流)들이 이 음성을 좋아하여 모방하려고 해도 잘 안 되자 ‘손으로 코를 막고 읊조렸다.[手掩鼻而吟]’라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雅量

193)능곡(陵谷):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의 “높은 언덕은 골짜기로 뒤바뀌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으로 변했도다.[高岸爲谷 深谷爲陵]”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194)쇠를……같이하여: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쇠도 자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에서는 난초 향기가 풍겨 나온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는 말이 나온다.

195)양곡(暘谷):전설 속의 해 뜨는 곳을 말한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196)서하(西河)의 문도(門徒):선사의 제자의 제자를 가리킨다. 서하는 노년에 물러나 서하 지역에서 거처하며 교수했던 공자(孔子)의 제자 자하(子夏)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선사의 제자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197)이름이……하였는데도:장자 양생주(養生主)에 “좋은 일을 하면서도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爲善 无近名]”라는 말이 나온다.

198)해야……함으로써:한(漢)나라 양웅(揚雄)의 해조(解嘲)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하면 좋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는 안 될 때에 하면 좋지 않다.[爲可爲於可爲之時則從 爲不可爲於不可爲之時則凶]”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199)훈지(塤篪)가 서로 화답하듯: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이다. 헌강왕과 정강왕은 형과 아우 사이이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의 “맏형은 질나발을 불고 둘째 형은 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200)구준(衢罇):사람마다 실컷 마시도록 대로에 놓아둔 술동이라는 뜻으로, 성인(聖人)의 도를 가리킨다. 회남자 무칭훈(繆稱訓)의 “성인의 도는 마치 대로에 술동이를 놔두고서 지나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에 따라 각자 적당히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置尊邪 過者斟酌 多少不同 各得所宜]”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201)다섯 가지 기능:보잘것없는 재능이라는 뜻의 겸사이다. 순자 권학(勸學)에 “교룡은 발이 없어도 잘도 나는데, 땅강아지는 다섯 가지 기능을 지녔으면서도 궁하기만 하다.[螣蛇無足而飛 梧鼠五技而窮]”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날 수는 있어도 지붕 위에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나무를 타고 올라갈 수는 있어도 꼭대기까지는 가지 못하며, 헤엄을 치기는 해도 골짜기를 건너가지는 못하고, 구멍을 팔 수는 있어도 몸을 가리지는 못하며, 달릴 수는 있어도 사람보다 먼저 가지는 못하니, 이것을 다섯 가지 기능[五技]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202)돌에……일이라서:진나라 위유 지방에서 돌이 말을 했다[石言于晉魏楡]는 소문과 관련하여, 사기궁(虒祁宮)을 화려하게 짓느라고 기력이 고갈되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사광(師曠)이 임금에게 해설한 내용이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8년에 나오는데, 그 내용 중에 “돌이 말하지 못하는 물건이지만, 혹시 신이 붙어서 말할 수도 있는 일이고, 아니면 백성들이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石不能言 或馮焉 不然民聽濫也]”라는 말이 나온다.

203)도(道)라는……것이니:노자 25장에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억지로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라는 말이 나온다.

204)어떤……않고:장자 지북유(知北遊)에 “어떤 생각이나 어떤 염려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된다. 어떤 곳에도 머물지 말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에 편히 머물게 된다. 어떤 것도 따르지 않고 어떤 방법도 쓰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얻게 된다.[無思無慮始知道 無處無服始安道 無從無道始得道]”라는 말이 나온다.

205)비바람……한결같았다오:시경 풍우(風雨)는 난세에도 절조(節操)를 변하지 않는 군자를 그리워하는 시인데, 그중에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닭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도다. 이미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風雨如晦 雞鳴不已. 旣見君子 云胡不喜]”라는 말이 나온다.

206)운근(雲根):산 위의 바위를 뜻하는 시어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충주 고을은 삼협의 안에 있는지라, 마을 인가가 운근 아래 모여 있네.[忠州三峽內 井邑聚雲根]”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오악(五岳)의 구름이 바위에 부딪쳐 일어나기 때문에, 구름의 뿌리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4 題忠州龍興寺所居院壁

207)천인(天人)의……닳도록:가로세로 높이가 각각 40리 되는 반석(磐石)을 천인이 100년에 한 번씩 옷자락으로 스쳐서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을 소겁(小劫)이라 하고, 80리 되는 반석이 닳는 기간을 중겁(中劫), 800리 되는 반석이 닳는 기간을 대아승지겁(大阿僧祇劫) 즉 무량겁(無量劫)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권하 불모품(佛母品)에 나온다. 그 반석은 겁석(劫石)이라고 칭한다.

1)무편(無偏):편벽됨이 없는 정사를 뜻한다. 서경 홍범(洪範)에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도가 넓게 펼쳐진다.[無偏無黨 王道蕩蕩]”라는 말이 나온다.

2)불궤(不匱):지극한 효성을 뜻한다. 시경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성이 다함이 없으니, 영원히 그대에게 복을 내리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말이 나온다.

3)조상의 덕을 닦으면서:시경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나온다.

4)비패(秕稗):쭉정이와 피라는 뜻으로, 가식적이고 미흡한 것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10년에 “야외에서 향연을 베풀면서 궁중의 기물을 모두 갖춘다면 이는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는 것이 되고, 만약 갖출 것을 제대로 갖추지 않는다면 이는 벼 곡식 대신에 쭉정이와 피를 올리는 것이 된다. 쭉정이와 피를 올리는 것처럼 되면 임금에게 욕이 돌아갈 것이요,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는 것이 되면 나쁜 이름이 돌아올 것이다.[饗而旣具 是棄禮也 若其不具 用秕稗也 用秕稗君辱 棄禮名惡]”라는 말이 나온다.

5)제사를 올리면서:시경 생민(生民)에 “처음 주(周)나라 사람을 낳은 것은, 바로 강원이었나니, 낳을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렸다오.[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라는 말이 나온다.

6)빈번(蘋蘩):마름과 쑥이라는 뜻으로, 귀하진 않아도 정성껏 올리는 제물(祭物)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에, “진실로 확실한 신의만 있다면 빈번과 온조(薀藻) 같은 변변치 못한 야채와 나물이라도 귀신에게 음식으로 올릴 수가 있고, 왕공에게도 바칠 수가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7)덕의…… 것이다:서경 군진(君陳)에 “지극한 정치를 하면 향기로워서 신명에게도 감응이 되는 법이니, 서직과 같은 곡식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는 말이 나온다.

8)더위……주고:주 무왕(周武王)이 더위 먹은 사람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게 하며 왼손으로 부축하고 오른손으로 부채질해 주니, 천하 사람들이 그 덕에 귀의했다는 말이 회남자 인간훈(人間訓)에 나온다.

9)죄인을……것:우왕(禹王)이 외출하여 죄인을 보자 수레에서 내려 물어보고는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군도(君道)에 나온다.

10)마음속으로……없다:대본에는 ‘勞心而扇暍泣辜 豈若拯群品於大迷之域 竭力而配天饗帝 豈若奉尊靈於常樂之鄕’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1집에 수록된 고운집에는 ‘豈若’이 ‘莫非’로 되어 있다. 문리로 보아 ‘莫非’가 합당하겠기에, ‘豈若’을 ‘莫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1)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서경 요전(堯典)에 “요 임금이 큰 덕을 제대로 밝혀 구족을 친애하자 구족이 화목하게 되었다. 구족이 화목해지자 기내(畿內)의 백성들을 평등하게 다스리며 밝게 가르쳤다. 백성들이 밝게 되자 만방의 제후국을 화목하게 하였다.[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라는 말이 나온다. 구족(九族)은 고조(高祖)로부터 현손(玄孫)까지의 친척을 말한다.

12)삼보(三寶):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를 합칭한 불교의 용어이다. 불보는 부처를 가리키고, 법보는 부처의 교법(敎法)을 가리키고, 승보는 부처의 교법대로 수행하는 승려들을 가리킨다.

13)옥호(玉毫):여래(如來) 32상(相)의 하나로, 미간에 있다는 백옥과 같은 흰 털을 말하는데, 거기에서 대광명(大光明)을 발산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비춘다고 한다. 백호(白毫)라고도 한다.

14)조종(朝宗):제후와 백관이 제왕(帝王)을 찾아가서 조회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온갖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비유할 때 표현하는 말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마치 백관이 임금에게 조회하듯, 장강(長江)과 한수(漢水)가 바다로 모여 든다.[江漢朝宗于海]”라는 말이 나온다.

15)육도(六度):생사의 차안(此岸)에서 열반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여섯 개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도 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정려(靜慮), 지혜(智慧) 등으로 되어 있다.

16)섬부주(贍部洲):염부제(閻浮提)라고도 한다. 수미산(須彌山) 사대주(四大洲)의 남주(南洲)에 있는 지역으로, 원래는 인도(印度)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인간 세상의 총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長阿含經 卷18 閻浮提洲品

17)도사다(都史多):범어(梵語) Tuṣita의 음역으로, 보통 도솔천(兜率天)이라고 한다. 도솔천은 불교의 이른바 욕계(欲界) 육천(六天) 가운데 넷째 층에 있는 하늘로, 외원(外院)과 내원(內院)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 내원에서 미래불(未來佛)로 이 땅에 하생(下生)하려고 준비하면서 천신(天神)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

18)금성(金城):신라의 도성을 말한다.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 21년(기원전 37)에 지금의 경주(慶州)에 쌓았던 토성이다.

19)파진찬(波珍飡):신라 17관등(官等) 중 넷째 등급으로, 진골(眞骨)만이 받을 자격이 있었다. 파진간(波珍干) 혹은 해간(海干)이라고도 하였다.

20)사안(謝安)이……것:진(晉)나라 사안이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계속되는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유유자적했던 고와동산(高臥東山)의 고사가 전하는데, 20여 년 동안 한가로이 산수 간에 노닐 당시에 항상 가무에 능한 기녀(妓女)를 대동하고서 풍류를 한껏 즐겼다고 한다. 世說新語 排調

21)혜원(慧遠)이……것:동진(東晉)의 고승 혜원이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유유민(劉遺民)과 뇌차종(雷次宗) 등 명유(名儒)를 비롯하여 승속(僧俗)의 18현(賢)과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백련사(白蓮社)라는 염불 결사(念佛結社)를 맺은 고사가 있다. 서경(西境)은 서방 정토를 가리킨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22)바라월(波羅越):비둘기[鴿]를 뜻하는 천축(天竺)의 말로, 여기서는 바라월사(波羅越寺) 즉 합사(鴿寺)를 가리킨다. 달친(達嚫)이라는 나라에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승가람(僧伽藍)이 있는데, 이는 큰 돌산을 뚫어서 만든 5층의 사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1층부터 각각 코끼리․사자․말․소․비둘기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맨 위층의 형태를 취해서 바라월사라고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법현고승전(法顯高僧傳) 권1에 나온다.

23)굴린차(崛恡遮):남천축국(南天竺國)에 있었다는 굴우차(堀遮)라는 사원으로, 기러기 절[雁寺]이라는 뜻이다. 어떤 비구(比丘)가 파계하여 남해(南海)의 기러기로 태어났는데, 몸집이 3장(丈)이나 되고 사람 말을 하며 끊임없이 화엄경(華嚴經)을 외웠다. 남자 불교 신도 한 사람이 보물을 캐러 바다를 건너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모래섬에 올라갔다가 그 기러기를 만나 사연을 듣고는 기러기를 위해 사원을 지어 주기로 하고 기러기 등에 타고서 목적을 달성한 뒤에 약속대로 안사(雁寺)를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경조(京兆) 숭복사(崇福寺) 승(僧) 사문(沙門) 법장(法藏)이 편집한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권4 풍송(諷誦) 7 중천축일조삼장(中天竺日照三藏)에 나온다.

24)쌍림(雙林)으로……지은:김원량(金元良)이 저택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라는 사찰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남조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5년(539)에 선혜대사(善慧大士)가 저택을 희사하여 절강(浙江) 오의현(義烏縣) 운횡산(雲橫山) 아래에 사원을 창건하였는데, 사원 경내에 쌍도수(雙檮樹)가 있는 것을 계기로 쌍림사(雙林寺)라고 칭한 고사가 있다. 이 사원은 뒤에 이름이 보림사(寶林寺)로 바뀌었다. 續高僧傳 卷25 慧雲傳 景德傳燈錄 卷27 善慧大士

25)취두(鷲頭):여래(如來)가 법화경(法華經) 등 대승 경전(大乘經傳)을 설했다고 하여 불교 성지로 꼽히는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중인도(中印度) 마갈다국(摩竭陀國) 왕사성(王舍城)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의 모양이 독수리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취두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어(梵語)를 음역한 것이다.

26)용이(龍耳):감여가(堪輿家)가 풍수지리(風水地理) 면에서 명당으로 꼽는 장지 중의 하나이다.

27)금계(金界):황금을 땅에 깐 지역이라는 뜻으로 사원을 가리킨다. 금지(金地) 혹은 금전(金田)이라고도 한다.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수달다(須達多) 장자(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다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大唐西域記 卷6

28)옥전(玉田):왕릉(王陵)을 뜻한다. 고대 제왕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썼던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29)인산(因山):보통 왕과 왕비 등의 장례식으로 국장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산의 형세를 그대로 활용해서 능을 만들고, 별도로 봉분을 하지는 말라는 뜻으로 쓰였다.

30)유씨(游氏)의…… 놔두었으므로:정(鄭)나라 간공(簡公)의 장례 행렬이 지나갈 길에 유씨(游氏)의 사당이 있었는데, 자산(子産)이 그 사당을 헐지 말고 피해서 길을 내도록 지시한 고사가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2년에 나온다. 또 한 무제(漢武帝) 말기에 노 공왕(魯恭王)이 자기 궁실을 넓히려고 공자(孔子)의 구택을 헐다가 갑자기 종경(鐘磬)과 금슬(琴瑟)의 소리가 들려 오자, 두려운 생각이 들어 공사를 중지하고는 그 벽 속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 등 수십 종의 고문 경전(古文經傳)을 발굴했던 고사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31)수달다(須達多):석가(釋迦)에게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서 희사한 장자(長者)의 이름으로, 급고독(給孤獨) 장자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김원량(金元良)을 가리킨다. 326쪽 주27 참조.

32)단지……것이겠는가:풍수지리 면에서 명당이기 때문에 왕릉으로 삼으려고 그러는 것일 뿐이지, 불교를 탄압하려는 목적에서 사원을 없애려고 하여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 외국의 국왕이 사원을 모두 없애려고 하였는데, 초제사(招提寺)가 아직 헐리지 않았을 때, 밤에 백마 한 마리가 탑을 돌며 슬프게 우는 것[夜有一白馬 繞塔悲鳴]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회개하며 중지하고는 초제사를 백마사라고 개명했다는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1 섭마등전(攝摩騰傳)에 나온다. 청오(靑烏)는 금낭(錦囊)과 함께 대표적인 풍수지리서로 꼽히는 책 이름인데, 지관(地官)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33)알고서……되는:“국가의 이익이 될 일을 알고서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충이다.[公家之利 知無不爲 忠也]”라는 말이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9년에 나온다.

34)각각……된다:논어 자한(子罕)에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야 음악이 바로잡혀서 아와 송이 각각 제 자리를 얻게 되었다.[吾自衛反魯 樂正 雅頌各得其所]”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35)옷소매……않고: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마치 장막처럼 이어져서 바람이 불어와도 그 사이를 통과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거렸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제(齊)나라 서울 임치(臨淄)에 가면,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장막을 이루고, 땀방울을 서로 흩뿌리면 금방 비를 이룬다.”라는 말이 나온다.

36)5리(里)의…… 것:후한(後漢)의 장해(張楷)가 5리의 지역에 안개가 자욱이 끼게 하는 술법을 잘 구사하였으므로, 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그가 은거한 홍농산(弘農山)으로 모여들어 저잣거리를 이루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6 張霸列傳 張楷

37)왕토(王土):왕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경 북산(北山)의 “하늘 아래 모든 곳이 왕의 땅 아님이 없으며, 땅의 모든 물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하 아님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38)어둠에……하였다:왕릉 주위의 형세를 묘사한 것이다. 등공(滕公)으로 불린 서한(西漢)의 하후영(夏侯嬰)이 생전에 땅을 파다가 석곽(石槨)을 얻었는데, 거기에 “가성이 어둠에 묻혔다가 3천 년 만에 밝은 해를 보리니, 아, 등공이 이 방에 거하리로다.[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 지내게 했다는 등공가성(滕公佳城)의 전설이 전한다. 西京雜記 卷4 또 제갈량(諸葛亮)이 오(吳)나라 도읍인 건강(建康)에 와서 산천의 형세를 살펴본 뒤에 “종산은 용이 서린 듯하고, 석두산은 범이 웅크린 듯하니, 이곳은 제왕이 거할 곳이다.[鍾山龍盤 石頭虎踞 此帝王之宅]”라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續集 卷1 吳都形勢

39)하구(瑕丘):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공숙문자(公叔文子)가 거백옥(蘧伯玉)과 함께 산책하다가 죽으면 묻히고 싶다고 한 언덕 이름이다. 禮記 檀弓上

40)양곡(暘谷):해 뜨는 곳이다.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에 “해는 양곡에서 떠올라 함지에서 목욕한다.[日出於暘谷 浴於咸池]”라는 말이 나온다.

41)기수(祇樹):사원(寺院)의 별칭이다. 옛날 인도의 기타태자(祇陀太子) 소유의 원림(園林)을 급고독(給孤獨) 장자(長者)가 구입하여 정사(精舍)를 세운 다음 석가모니에게 희사했다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준말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도 하는데, 죽림정사(竹林精舍)와 더불어 불교 초기의 양대 사원으로 꼽힌다.

42)곡림(穀林):요(堯) 임금을 매장한 곳으로, 제왕의 능을 뜻한다.

43)교산(喬山):황제(黃帝)의 장지(葬地)이다.

44)필맥(畢陌):주(周)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이 묻힌 곳이다.

45)접수(鰈水):가자미[比目魚]가 나는 바다라는 뜻으로, 동해(東海) 즉 동방을 가리킨다. 이아 석지(釋地)에 “동방에 가자미가 있는데, 짝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그 이름을 접이라고 한다.[東方有比目魚焉 不比不行 其名謂之鰈]”라는 말이 나온다.

46)사우(寺宇)를……못하였다:땅에서 탑이 불쑥 솟아나온 것처럼 사원을 이전하는 공사가 일단 쉽게 끝나기는 하였으나, 사원다운 면모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하였다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그때 부처 앞에 높이 500유순 가로세로 250유순 되는 칠보로 장식된 탑이 땅에서 솟아나와 공중에 서 있었다.[爾時佛前有七寶塔。高五百由旬。縱廣二百五十由旬。從地踊出住在空中]”라는 말이 나온다. 화성(化城)은 환화(幻化)의 성이라는 뜻으로, 사원의 별칭이다. 험난한 여행 길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할 목적으로 도사(導師)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큰 성 하나를 화작(化作)해서 제공했다는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47)아홉 조정: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부터 시작해서 47대 헌안왕(憲安王)에 이르는 9대에 걸친 조정을 말한다.

48)삼리(三利)의 수승(殊勝)한 인연:경문왕(景文王)이 사원을 중건하게 된 것을 말한다. 삼리는 세 가지 이익이라는 말로, 경문왕의 즉위와 관련된 고사이다. 헌안왕(憲安王)이 아들이 없자 김응렴(金膺廉), 즉 경문왕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는데, 장녀(長女)보다 소녀(少女)가 아름다웠으나, 장녀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이익[三利]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장녀와 결혼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三國史記 卷11 新羅本紀 憲安王

49)선대왕(先大王)은……드리웠다:경문왕의 출생을 묘사한 말이다. 홍저(虹渚)는 상고시대의 제왕인 소호씨(少昊氏)의 모친 여절(女節)이 무지개[虹]처럼 별빛이 화저(華渚)에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소호씨를 낳았다는 전설을 요약해서 표현한 것이다. 宋書 卷27 符瑞志上 오잠(鼇岑)은 경주(慶州) 금오산(金鼇山)을 가리킨다.

50)옥록(玉鹿)에서……진작시키더니:옥록은 검을 뜻하는 옥록로(玉鹿盧)의 준말로, 검술 등 무예에 뛰어난 조예를 보이면서 풍류도(風流道)를 떨쳐 일으켰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 풍류(風流)는 난랑비(鸞郞碑)의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을 풍류라고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51)금초(金貂):황금당(黃金璫)과 초미(貂尾)로 장식한 관(冠)으로, 높은 품계의 관원을 뜻한다.

52)용전(龍田):누구나 볼 수 있도록 밭에 출현한 용이라는 뜻으로, 이미 덕과 실력으로 인정을 받는 현인(賢人)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왕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주역 건괘(乾卦) 구이(九二)에 “출현한 용이 밭에 있으니, 임금님을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라는 말이 나온다.

53)봉소(鳳沼):비원(秘苑) 속의 못이라는 뜻으로, 중서성(中書省) 즉 조정을 가리킨다. 봉황지(鳳凰池)라고도 한다.

54)계옥(啓沃):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며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 고종(殷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러내려 적시게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부탁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書經 說命上

55)팔병(八柄):군신(群臣)을 어거하는 작(爵), 녹(祿), 여(予), 치(置), 생(生), 탈(奪), 폐(廢), 주(誅) 등의 여덟 가지 권한을 말하는데, 주례(周禮) 천관(天官) 태재(太宰)에 그 설명이 나온다.

56)사유(四維):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말한다.

57)기국(杞國)의 근심:옛날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天地崩墮] 자기 몸을 부칠 곳이 없게 된다 하여 침식을 폐하고 걱정을 했다는 기국우천(杞國憂天)의 고사가 있다. 列子 天瑞 보통은 쓸데없는 걱정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천붕(天崩)의 근심 즉 임금이 죽는 우환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58)사슴의……하였다:본격적으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혼란을 틈타서 기회를 엿보며 득세하려는 무리가 없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제(齊)나라 변사(辯士) 괴통(蒯通)이 한 고조(漢高祖)에게 팽형(烹刑)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진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법도가 해이해짐에, 진나라 이외의 산동 지역이 크게 소란해지면서 다른 성씨들이 일제히 일어나고 영걸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다. 진나라가 사슴을 잃자 천하가 모두 그 뒤를 좇았는데, 이에 재주가 뛰어나고 발빠른 자가 먼저 사슴을 잡게 되었다.[秦之綱絶而維弛 山東大擾 異姓竝起 英俊烏集 秦失其鹿 天下共逐之 於是高材疾足者先得焉]”라는 등의 말로 화를 모면한 고사가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말미에 나온다. 여기에서 사슴은 제왕의 지위를 뜻한다.

59)대저(代邸):제왕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거하던 곳을 뜻하는 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황제가 되기 전에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거처를 대저라고 칭하였는데, 진평(陳平)과 주발(周勃) 등이 여씨(呂氏)들을 소탕하고 소제(少帝)를 폐한 뒤에 대왕을 대저에서 영입하여 황제로 추대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漢書 卷4 文帝本紀

60)화락한……않구나:시경 한록(旱麓)에 나온다.

61)상제가……따른다:서경 미자지명(微子之命)에 “상제가 이에 흠향하고 아래 백성들이 공경하며 따르기에 그대를 상공으로 세워 이 동하를 다스리게 하노라.[上帝時歆 下民祗協 庸建爾于上公 尹茲東夏]”라는 말이 나온다.

62)수귀(守龜):임금이 점복(占卜)에 쓰는 귀갑(龜甲), 혹은 점치는 사람[卜人]을 뜻한다.

63)제(齊)나라를……않았더라면:논어 옹야(雍也)에 “제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선왕의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64)어찌……뿐이었겠는가:왕이 한번 행차하는 데에 따른 비용이 엄청나게 들 것이라는 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노대(露臺)를 지으려다가 백금(百金)의 비용이 든다는 말을 듣고는 “백금은 중등 생활을 하는 열 집의 재산에 해당한다.[百金 中人十家之産也]”라고 하면서 그만두게 한 고사가 한서(漢書) 권4 문제본기(文帝本紀) 찬(贊)에 나온다.

65)태제(太弟)인 상국(相國):원주(原註)에 “뒤에 혜성대왕의 존귀한 시호로 추봉되었다.[追奉尊諡惠成大王]”라고 하였다.

66)영원(鴒原)의 무성함이여:형제간의 우애가 돋보인다는 말이다. 영원은 시경 상체(常棣)의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 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67)코끼리가……일:성군(聖君)의 치세를 뜻하는 말이다. 순(舜) 임금이 창오(蒼梧)에서 죽자 코끼리가 감화를 받아서 그를 위해 밭을 갈고, 우왕(禹王)이 회계(會稽)에 묻히자 새가 그를 위해 김매 주었다는 상경조운(象耕鳥耘)의 전설이 한(漢)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권4 서허(書虛)에 나온다.

68)소가 헐떡거리는 것:서한(西漢)의 재상인 병길(丙吉)이, 길에서 싸워서 사람들이 죽고 다친 일은 묻지를 않고, 소가 혀를 빼 물고서 헐떡이는 것[牛喘吐舌]을 보고는, 음양(陰陽)의 조화가 깨어진 나머지 계절의 기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여 이를 자세히 물어보았던 고사가 한서(漢書) 권74 병길전(丙吉傳)에 보인다.

69)천리(天吏):사계절을 가리킨다.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에 “사시는 하늘의 관리요, 일월은 하늘의 사신이다.[四時者 天之吏也 日月者 天之使也]”라는 말이 나온다.

70)십훈(十煇)로……듯하였다:굳이 점을 쳐 보지 않아도 원성왕이 꿈속에서 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는 말이다. 십훈은 열 가지의 다양한 햇무리 모양을 말하는데, 옛날에 이 모양을 보고 인사(人事)의 길흉을 점쳤다. 구령(九齡)은 주 무왕(周武王)의 꿈 이야기이다. 무왕이 꿈속에서 상제로부터 아홉 개의 치아[九齡]를 받았다는 말을 부친인 문왕(文王)이 듣고서, 치아는 연령과 관계된 만큼 90세까지 살 것이라고 해몽하고는, 자기의 100세 수명에서 3년을 무왕에게 주어 93세까지 살게 하고 자신은 97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온다.

71)자기……것:효경 성치장(聖治章)에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패덕이라 하고, 자기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고 타인을 공경하는 것을 패례라고 한다.[不愛其親而愛他人者 謂之悖德 不敬其親而敬他人者 謂之悖禮]”라는 말이 나온다.

72)너의……않느냐:시경(詩經)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나온다.

73)3년……있다:그동안 사원의 중수와 관련하여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낸 것을 후회하면서 이제 시간을 아껴서 바로 공사에 착수하고 싶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 장왕(楚莊王)이 즉위 후 3년 동안 환락에 빠진 채 정사를 행하지 않자, 오거(伍擧)가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이는 무슨 새인가.[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라고 하니, 장왕이 “3년 동안 날지 않았어도 한번 날면 하늘에 솟구칠 것이요, 3년 동안 울지 않았어도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三年不蜚 蜚將沖天 三年不鳴 鳴將驚人]”라고 답변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0 楚世家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3년에 “숙손은 관소에 머무는 시간이 단 하루만 되더라도 그 담장이나 지붕을 손질하여, 그가 떠날 때에는 처음 들어갔을 때와 똑같게 하였다.[叔孫所館者 雖一日必葺其牆屋 去之如始至]”라는 말이 나온다.

74)아이를……잡혔다:남조 송 명제(宋明帝)가 상궁사(湘宮寺)를 화려하게 세우고는 큰 공덕을 지었다고 자랑하자, 우원(虞愿)이 옆에 있다가 “폐하가 이 사원을 세운 것은 모두 백성들이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전당 잡힌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부처가 만약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응당 슬피 울며 애통하게 여길 것이다. 그 죄가 탑보다도 더 높이 쌓였을 것인데, 무슨 공덕이 있다고 하겠는가.[陛下起此寺 皆是百姓賣兒貼婦錢 佛若有知 當悲哭哀愍 罪高佛圖 有何功德]”라고 반박한 고사가 전한다. 南齊書 卷53 良政列傳 虞愿

75)건례선문(建禮仙門):한(漢)나라 궁궐에 건례문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여 조정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선문은 궁궐의 문을 가리킨다.

76)소현정서(昭玄精署):승도(僧徒)를 총괄했던 소현시(昭玄寺)라는 관아를 말한다.

77)단계(檀溪)의 숙원:사원을 중수하려는 소망을 말한다. 동진(東晉)의 고승 도안(道安)이 효무제(孝武帝) 영강(寧康) 1년(373)에 양양(襄陽)에서 제일가는 단계사(檀溪寺)를 세우고, 다시 양주 자사(梁州刺史) 양홍충(洋弘忠)으로부터 구리 1만 근을 시주 받아 장륙불상(丈六佛像)을 주조한 뒤에, 이제는 숙원을 이뤘으니 언제 죽어도 좋다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단계사는 금덕사(金德寺)라고도 한다. 高僧傳 卷5 釋道安傳

78)내원(㮈苑)의 전공(前功):김원량(金元良)이 예전에 저택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를 세운 공덕을 말한다. 내원은 내녀(㮈女)의 동산이라는 말인데, 범어 āmra의 의역으로, 암몰라원(菴沒羅園)으로 음역된다. 내수(㮈樹)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내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는데, 뒤에 마갈다국(摩竭陀國)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의 왕비가 되었으며, 양의(良醫) 기바(耆婆)를 낳았다고 한다. 그 동산은 중인도(中印度) 폐사리(吠舍釐 Vaiśālī) 성 부근에 있었으며, 내녀가 불타에게 바치자 불타가 이곳에서 유마경(維摩經)을 설했다고 한다. 김원량이 신라 왕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고운이 왕비인 내녀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出曜經 卷3 四分律 卷39

79)수(倕):수(垂)라고도 한다. 순(舜) 임금의 대신(大臣)으로 공공(共工)이 되어 백공(百工)의 일을 주관하였다. 史記 卷1 五帝本紀

80)노(獿):고대의 유명한 미장이 이름이다.

81)초지(初地):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보살(菩薩)의 십지(十地) 중 첫째 단계로, 일명 환희지(歡喜地)라고 한다.

82)500년을……하였는데: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초나라 남쪽에 있는 명령은 500년을 봄으로 삼고, 500년을 가을로 삼는다.[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라는 말이 나온다.

83)번산(樊山)에서……이때에:그 당시야말로 제왕의 공업(功業)을 이룰 좋은 기회였다는 말이다. 옛날에 제왕이 행차할 때 따르는 행렬의 맨 마지막 수레에는 표범 꼬리를 매달아서 위용을 과시했다고 한다.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무창(武昌)의 번산(樊山)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어떤 노파가 무엇을 잡았느냐고 묻기에 표범 한 마리를 잡았다고 했더니, 그 노파가 “어째서 표범 꼬리를 수레에 매달아 세우지 않느냐.[何不豎豹尾]”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欽定淵鑑類函 卷429 豹1 번산은 원산(袁山)이라고도 한다.

84)형산(荊山)의……하였겠는가:뜻밖에도 경문왕이 세상을 떠나는 변고를 당하여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채굴하여 형산(荊山) 아래 호수 가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신하와 후궁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수염과 활을 안고 통곡하며 그 활을 오호궁(烏號弓)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85)뛰어난……소유하였다:참고로 진서(晉書) 권9 태종간문제기(太宗簡文帝紀)에 “사문(沙門) 지도림(支道林)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계왕은 체격은 뛰어난데 정신은 볼 것이 없다.[會稽有遠體而無遠神]’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회계왕은 간문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봉호이다.

86)침문(寢門)에서……것:경문왕(景文王)이 죽은 것을 말한다. 주 문왕(周文王)이 세자로 있을 적에, 매일 세 번씩 침문에 가서 부왕인 왕계(王季)의 안부를 내수(內豎)에게 묻고는 편안하시다는 답변을 들으면 기뻐하며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온다.

87)익실(翼室)에서……일:거상(居喪)하는 것을 말한다. 주 성왕(周成王)이 죽었을 때, “남문 밖에 가서 태자 소(釗)를 마중하여, 왕실의 옆방인 익실로 맞아들인 뒤에 상차(喪次)의 주인이 되게 하였다.[逆子釗於南門之外 延入翼室 恤宅宗]”라는 말이 서경 고명(顧命)에 나온다.

88)등 문공(滕文公)이……것:부왕인 정공(定公)이 세상을 떠나자 맹자(孟子)에게 물어서 거상(居喪)을 극진히 한 일이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89)초 장왕(楚莊王)이……것:초 장왕이 즉위 후 3년 동안 환락에 빠져 있다가 본격적으로 정사를 행하여 마침내 제후(諸侯)의 패자(覇者)가 된 고사를 말한다. 337쪽 주73 참조.

90)향적반(香積飯):중향국(衆香國)의 향적여래(香積如來)가 먹는 음식을 말한다. 향적 여래가 이 향적반을 화보살(化菩薩)에게 발우 가득 담아 주고, 화보살이 다시 유마 거사(維摩居士)에게 가득 담아 주어, 비야리성(毗耶離城) 및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그 향기가 두루 퍼지게 했다는 이야기가 유마경(維摩經) 향적불품(香積佛品)에 나온다. 그래서 보통 승려의 음식을 향적반 혹은 향반(香飯)이라고 하고, 사찰의 주방(廚房)을 향적이라고 한다.

91)근심이……이어받았으니:중용장구(中庸章句) 제18장에 나온다. 고운이 중간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92)경력(慶曆) 경오년(景午年):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2년 병오년, 즉 신라 정강왕(定康王) 1년(886)을 가리킨다. 당의 연호 중에 경력이라는 연호는 없다. 혹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나라 황실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피하여 ‘병(丙)’을 ‘경(景)’으로 바꿔 썼다. 원(元)나라 왕극관(汪克寬)이 지은 춘추호전부록찬소(春秋胡傳附錄纂疏) 권수상(首上) 논명휘차자(論名諱箚子) ‘역갑을지기 이병위경자(易甲乙之紀 以丙爲景者)’ 조의 해설에 “당 고조의 부친 원제의 이름이 병이었기 때문에, 당나라 역사에서 갑자를 기록할 때에는 모두 병을 경으로 하였다. 한유(韓愈)의 유주라지묘비(柳州羅池廟碑)에도 경진년에 사당이 이루어졌다고 칭하였다.[唐高祖父元帝名昞 故唐史紀甲子皆以丙爲景 韓文羅池廟碑 稱景辰廟成]”라는 말이 나온다.

93)명(銘)은……마음이다:예기 제통(祭統)에 나온다. 고운이 중간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는데,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솥에 명을 새기는데, 명은 기물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기록하면서 선조의 미덕을 일컬어 후세에 분명히 드러낸다. 선조에게는 모두 미덕도 있고 잘못도 있겠지만, 명의 의리는 미덕만 칭하고 잘못은 칭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니, 오직 현자만이 할 수가 있다.[夫鼎有銘 銘者自名也 自名以稱揚其先祖之美 而明著之後世者也 爲先祖者 莫不有美焉 莫不有惡焉 銘之義 稱美而不稱惡 此孝子孝孫之心也 唯賢者能之]”

94)월계(月桂)의……하였지만: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말이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천하제일로 뽑힌 극선(郤詵)이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숲의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 꺾고,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을 손에 쥔 것과 같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95)우구(虞丘)의 비통함: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자식의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주(周)나라 우구에게 슬피 통곡하는 이유를 물으니,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夫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라고 대답했다는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가 있다. 우구는 고어(皐魚) 혹은 구오자(丘吾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孔子家語 致思

96)계로(季路)의 헛된 영화:계로는 공자의 제자 중유(仲由)의 자이다. 자로(子路)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옛날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을 때에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자기는 되는 대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100리 바깥에서 쌀을 등에 지고 오곤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나서 높은 벼슬을 하여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보는 신분이 되었지만, 이는 단지 헛된 영화일 뿐이요, 당시에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어버이를 위해 쌀을 지고 왔던 그때의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술회한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致思

97)산서(山西) 출신:무인(武人)을 말한다. “산동 지방에서는 재상이 나오고, 산서 지방에서는 장수가 나온다.[山東出相 山西出將]”라는 속어(俗語)가 한서(漢書) 권69 조충국신경기전(趙充國辛慶忌傳)에 보인다. 관동출상 관서출장(關東出相 關西出將)이라고도 한다. 산은 화산(華山)을 가리키고, 관은 함곡관(函谷關)을 가리킨다.

98) 사술(四術):시(詩), 서(書), 예(禮), 악(樂)의 네 가지 경술(經術)을 말한다.

99) 육경(六經):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경(樂經)을 말한다.

100)이궐(貽厥):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시경 문왕유성(文王有聲)의 “풍수 옆에도 기 곡식이 자라는데, 무왕이 어찌 이곳에 천도(遷都)하는 것과 같은 큰일을 하지 않으리오. 그의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의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려 함이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豐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101)나의……것이요:비명을 모두 진실되게 지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으리라는 말이다. 후한(後漢) 채옹(蔡邕)이 곽태(郭太)의 비문을 짓고 나서 노식(盧植)에게 “내가 비명을 많이 지었지만, 그때마다 모두 부끄러운 느낌을 가졌는데, 곽유도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吾爲碑銘多矣 皆有慙德 唯郭有道無愧色耳]”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유도(有道)는 곽태의 자이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102)나의……것이다:손에 쥔 붓끝에서도 힘이 넘쳐날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전할 적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진나라 진영을 유린하며 기세를 떨치고 돌아온 뒤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팔아 주겠다.[欲勇者 賈余餘勇]”라고 소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103)하늘을……재면서:분수를 모르고 무모하게 덤빈다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이 지은 답객난(答客難)에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고, 바가지로 퍼서 바닷물을 재며, 풀 줄기로 종을 치는 격이다.[以管窺天 以蠡測海 以筳撞鍾]”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104)달이……무너져:헌강왕(憲康王)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105)훈지(塤篪)를……만났다:헌강왕과 정강왕(定康王)이 형과 아우 사이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시경(詩經) 하인사(何人斯)에 “백씨는 질나발을 불고 중씨는 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는 말이 나온다.

106)멀리……되었다:정강왕이 즉위한 뒤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임금의 형과 누이를 각각 태양과 달에 비유하였다.

107)달……하였다:진성여왕(眞聖女王)이 오빠인 정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을 말한다.

108)신주를 품었다:진성여왕이 성군(聖君)이 될 거룩한 성품을 지녔다는 말이다. 광박물지(廣博物志) 권10 부의 중(斧扆中)에 “순(舜) 임금이 석추를 쥐고 신주를 품었다.[虞舜握石椎 懷神珠]”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석추를 쥐었다는 것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의 도를 안다는 말이고, 신주를 품었다는 것은 성성(聖性)을 소유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09)채석을 구웠다:신라의 쇠한 운세를 만회하려고 힘썼다는 말이다. 공공씨(共工氏)가 전욱(顓頊)과 싸우다가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치받자 하늘 기둥이 부러지면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고 땅은 동남쪽으로 꺼졌다. 이에 여와씨(女媧氏)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땅의 사방 기둥을 받쳐 세우고, 오색(五色)의 돌을 구워서 터진 하늘을 메웠다는 전설이 있다. 淮南子 覽冥訓 列子 湯問

110)보우(寶雨)의……것이다:성스러운 자질과 훌륭한 품행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여왕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보우는 당(唐)나라 때 달마유지(達摩流支)가 번역한 불경 이름으로, 현수불퇴전보살기(顯授不退轉菩薩記)라고도 하는데, 동방의 월광천자(月光天子)가 장차 지나국(支那國)의 여왕이 될 것이라고 부처가 수기(授記)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開元釋敎錄 卷9 대운(大雲)은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만들어진 불경 이름이다. 승려 10인이 대운경을 만들어 바치면서 그녀가 하늘의 명을 받아 여제(女帝)가 되었다고 찬양하자, 그 불경을 천하에 반포하고 제주(諸州)에 대운사(大雲寺)를 건립하도록 명한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6 則天武后本紀

111)못이……고사:후한(後漢)의 초성(草聖) 장지(張芝)와 진(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못가에서 붓글씨 연습을 열심히 해서 못물이 검게 변했다는 고사를 말한다.

112)서까래와……일:진(晉)나라 왕순(王珣)의 꿈에 어떤 사람이 서까래처럼 큰 붓[大筆如椽]을 건네주자, 꿈을 깨고 나서는 “내가 솜씨를 크게 발휘할 일이 있을 모양이다.[當有大手筆事]”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뒤에 황제가 죽어 애책문(哀冊文)과 시의(諡議) 등을 모두 왕순이 도맡아 지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王珣

113)장융(張融)이……일:남조 제(齊)의 장융이 초서에 능하여 항상 자부를 하였는데, 언젠가 황제가 “경의 글씨는 자못 골력이 있긴 하나 이왕의 필법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卿書殊有骨力 但恨無二王法]”라고 하니, “신에게 이왕의 필법이 없는 것이 유감이 아니오라, 이왕에게 신의 필법이 없는 것이 또한 유감입니다.[非恨臣無二王法 亦恨二王無臣法]”라고 답변했던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32 張邵列傳 張融 이왕은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를 가리킨다.

114)조조(曹操)가……8자(字):절묘하게 잘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이른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는데, 후한 말에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함께 길을 가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양수는 곧바로 알아챘으나 조조는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30리를 더 가서야 깨닫고는,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그 은어는 절묘한 호사(好辭)라는 뜻이다.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사(辭)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115)세상을……메우고:불교의 설에 의하면, 하나의 세계가 끝날 즈음에 겁화(劫火)가 일어나서 온 세상을 다 불태운다고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나온 검은 재에 대하여,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1 竺法蘭

116)먼지가……뒤덮을지라도:선녀 마고(麻姑)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을 만나서, “저번에 우리가 만난 이래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밭으로 변한 것을 이미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보니까 물이 또 과거에 보았을 때에 비해서 약 반절로 줄어들었으니, 어쩌면 다시 땅으로 변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接侍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于往者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말하자, 왕방평이 웃으면서 “바닷속에서 또 먼지가 날리게 될 것이라고 성인들이 모두 말하고 있다.[聖人皆言 海中復揚塵也]”라고 말했다는 신화 속의 이야기가 전한다. 神仙傳 卷7 麻姑

117)약목(若木):고대 신화에 나오는 나무 이름으로, 서방의 해가 지는 곳에서 자라는 큰 나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상(扶桑)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물론 부상의 뜻으로 쓰였다. 부상은 동해 속에 있다는 상상의 신목(神木) 이름으로, 해가 뜰 때에는 이 나무의 가지를 흔들고서 올라온다고 한다.

118)옥초(沃焦):전설 속의 큰 산 이름으로, 동해의 남쪽에 있다고 한다.

119)가위(迦衛):가비라위(迦毗羅衛)의 준말로, 석가(釋迦)가 생장한 왕성(王城)의 이름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에 “나의 부친은 이름이 정반으로 찰리 왕족이요, 모친은 이름이 대청정묘이며, 부왕이 다스린 성의 이름은 가비라위이다.[我父名淨飯 剎利王種 母名大清淨妙 王所治城名迦毗羅衛]”라는 말이 나온다.

120)우이(嵎夷):해 뜨는 동쪽 바닷가를 가리킨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121)열렬한……차지했도다:경문왕(景文王)이 순(舜) 임금과 같은 성군이 될 자질을 지녔으므로 헌안왕에게 인정을 받아 맏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명우(命禹)는 순 임금을 가리킨다. 논어 요왈(堯曰)의 “순 임금도 요 임금에게 받은 가르침을 가지고 우 임금에게 명하였다.[舜亦以命禹]”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요 임금이 신하인 순에게 국정을 맡기기 전에 그를 시험해 볼 목적으로 큰 산 속으로 들여보냈는데[納于大麓], 사나운 바람과 뇌우(雷雨)에도 방향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서경 순전(舜典)에 실려 있다.

122)도야(桃野):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한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고, 그 위에 천계(天雞)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추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下

123)상포(桑浦):부상(扶桑)의 바다라는 말로, 동해를 가리킨다.

124)보덕(報德):진 문제(陳文帝) 천가(天嘉) 1년(560)에 세운 사찰 이름으로, 절강(浙江) 장흥현(長興縣)의 치소(治所)에서 서북쪽으로 1리(里) 지점에 있으며, 진(陳)나라 주홍(周弘)과 서릉(徐陵)이 각각 지은 보덕사 비(碑)와 탑명(塔銘)이 유명하다.

125)흥국(興國):수 문제(隋文帝)가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킬 때, 45주(州)에 각각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세우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문제가 출생한 곳인 섬서(陝西) 대려현(大荔縣)의 사원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한다.

126)용수(龍首):장안(長安)에 있는 산 이름인데, 한(漢)나라 소하(蕭何)가 여기에 미앙궁(未央宮)을 지었으므로 왕궁 혹은 왕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127)나의……민망하나:옆에서 팔을 잡아끌며 방해하는 것처럼 글씨가 엉망으로 되었다는 말의 겸사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령(單父令)이 되었을 때, 관리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는 옆에서 자꾸 팔을 잡아당겨[掣肘] 글씨가 삐뚤어질 때마다 화를 냄으로써, 참언(讒言)을 잘 듣는 노군(魯君)을 풍자했던 고사가 전한다. 呂氏春秋 具備

128)오상(五常):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말한다.

129)동방(動方):만물이 생동하는 방위라는 뜻으로, 동방(東方)과 같은 말이다.

130)삼교(三敎):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를 말한다.

131)욱이(郁夷):우이(嵎夷)와 같은 말로, 해 뜨는 동방을 가리킨다.

132)가위(迦衛):석가(釋迦)가 태어난 곳으로, 불교를 뜻한다. 349쪽 주119 참조.

133)돌을……일이다:서로 의기투합해서 매우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이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의 병법을 터득하고 나서 군웅(群雄)에게 유세할 적에는 마치 물을 돌에 뿌리는 것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以水投石 莫之受], 한 고조(漢高祖)에게 유세를 하자 마치 돌을 물에 던지는 것처럼 모두 받아들여졌다[以石投水 莫之逆]는 이야기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이강(李康)의 운명론(運命論)에 나온다. 또 공자가어(孔子家語) 육본(六本)에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해 주면 모래 더미 위에 물을 뿌려 주는 것처럼 쉽게 받아들이지만, 그런 사람이 아닐 때에는 귀머거리를 모아놓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得其人 如聚沙而雨之 非其人 如會聾而鼓之]”라는 말이 나온다.

134)희희(熙熙)한 태평의 봄날이요:노자(老子) 20장에 “사람들 마냥 즐거워하며,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봄날 누대에 오른 듯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라는 말이 나온다.

135)모든……가운데:대본에는 이 부분이 ‘性參釋種’으로 되어 있으나, 탑본(榻本)에 따라 ‘性’을 ‘姓’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36)존귀한……하였으며:예컨대 진흥왕(眞興王)의 경우가 그러한데,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에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이라 칭하다가 죽었다. 왕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다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效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라고 하였다.

137)다라(多羅):범어(梵語) pattra의 음역인 패다라(貝多羅)의 준말로, 불경을 서사(書寫)한 나무 잎사귀를 말한다. 패엽(貝葉)이라고도 한다.

138)바다가……것이니:대본에는 ‘海印東流’로 되어 있는데, 탑본에 따라 ‘印’을 ‘引’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서토(西土) 즉 중국에 들어온 불교가, 다시 바다를 향해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결국에는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 말이다.

139)노(魯)나라에서……기록하고:부처의 탄생을 비유한 표현이다.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권1에 “노나라 춘추에 의하면, 장공 7년 여름 4월 신묘일 밤에 항성이 보이지 않고 한밤중에 별이 비처럼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 기록을 보면 그때가 바로 여래가 왕궁에서 탄생한 때와 일치한다.[魯春秋 莊公七年夏四月辛卯夜 恒星不見 夜中星隕如雨 案此即是如來誕生王宮時也]”라는 말이 나온다.

140)한(漢)나라에서……때:후한 명제(後漢明帝)가 부처의 꿈을 꾸고 나서 불교를 받아들였던 때라는 말이다. 명제가 밤에 신장이 6장(丈)이나 되는 금인(金人)이 목덜미에 일륜을 두르고 공중을 날아오는[項佩日輪飛空而至]’ 꿈을 꾼 뒤에, 서방에 불(佛)이라는 신(神)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천축(天竺)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를 수입하고 백마사(白馬寺)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권4에 나온다.

141)낙양(洛陽) 시내를 범람하고:대본에는 ‘濫觴洛宅’으로 되어 있는데, 탑본에 의거하여 ‘觴’을 삭제하였다. 주 소왕(周昭王) 때 궁전과 대지가 진동하고 강하(江河)와 연못과 우물의 물이 범람하자 왕이 태사(太史) 소유(蘇由)에게 물으니, 그가 “대성인이 서방에서 태어났는데, 1천 년 뒤에 그 가르침이 중국에 들어올 것이다.[有大聖人生於西方 一千年外聲教及此]”라고 답변했다는 기록이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4에 나온다.

142)진(秦)나라 궁전을 비추었던:대본에는 이 부분이 ‘懸鏡秦宮’으로 되어 있는데, 탑본에 의거하여 ‘懸’을 삭제하였다. 전거는 미상(未詳)이다.

143)삼척(三尺)의 입:언변이 뛰어난 것을 뜻하는 말이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의 “삼척의 입을 가지고 싶다.[願有喙三尺]”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144)오색(五色)의 붓::문재(文才)가 뛰어난 것을 뜻하는 말이다. 남조 양(梁)의 문학가 강엄(江淹)이 만년에 곽박(郭璞)에게 오색필(五色筆)을 돌려주는 꿈을 꾸고 나서는 문재가 감퇴되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145)이국관국(以國觀國):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살핀다는 뜻으로, 한 나라의 종교 등 총체적인 문화 현상을 가지고 그 나라의 전반적인 수준을 가늠한다는 말인데, 노자(老子) 54장에 나온다.

146)감천궁(甘泉宮)에서……같았다:한 무제(漢武帝) 때에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정벌하고 금인(金人) 즉 불상을 노획해 오자, 이를 감천궁에 안치하고 분향하며 섬겼던 일을 말한다. 魏書 卷114 釋老志

147)양(梁)나라……해요:528년에 해당한다. 보살제(菩薩帝)는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불교를 숭상하며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켰던 남조 양(梁)의 무제(武帝)를 가리킨다. 양서(梁書) 권3 무제본기 하(武帝本紀下)에 “대통 1년(527) 3월 신미일에 대가(大駕)가 동태사에 거둥하여 사신하는 의식을 행하고 갑술일에 환궁하여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大通元年 三月辛未 輿駕幸同泰寺捨身 甲戌還宮 赦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148)중귀(中貴)가……하면:이차돈(異次頓)의 순교와 진흥왕(眞興王)의 삭발 출가를 가리킨다. 중귀는 궁중의 귀인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근신이라는 말이다. 상선(上仙)은 천상의 신선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임금을 가리킨다.

149)표저(漂杵):격렬하게 싸우는 전쟁을 뜻하는 말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하여 목야(牧野)에서 전투할 적에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했다.[血流漂杵]”라는 글이 서경 무성(武成)에 나온다.

150)건고(鞬櫜):활을 활집에 넣고 화살을 화살통에 넣는다는 뜻으로, 병기(兵器)를 쓰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다.

151)비바사(毘婆娑)가……비추었다:소승불교가 먼저 전해지고, 그다음에 대승불교가 들어왔다는 말이다. 비바사는 주해서(註解書)의 이름인 범어(梵語) vibhāṣa의 음역으로, 광해(廣解) 혹은 광설(廣說) 등으로 의역되는데, 부파불교(部派佛敎) 중 소승에 속하는 상좌부(上座部)의 논서(論書)를 집대성했다고 일컬어지는 구사론(俱舍論)의 별칭으로 흔히 쓰인다. 사군(四君)은 한사군(漢四郡)의 준말로, 동방이라는 말과 같다. 마하연(摩訶衍)은 범어 mahāyāna의 음역인 마하연나(摩訶衍那)의 준말로, 대승의 교법(敎法)을 가리킨다. 일승(一乘)은 삼승(三乘)과 같은 방편법(方便法)이 아니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도리를 그대로 밝힌 단 하나밖에 없는 최고(最高) 구경(究竟)의 불법이라는 말인데, 불승(佛乘), 혹은 일불승(一佛乘)이라고도 한다.

152)무외(無外):장자 천하(天下)에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대일이라고 한다.[至大無外 謂之大一]”라는 말이 나온다.

153) 장경(長慶):당 목종(唐穆宗)의 연호로 821년에서 824까지이다.

154)대역(大易)에서……아니겠는가:주역 건괘(乾卦)의 잠룡(潛龍)에 대해 공자(孔子)가 건괘 문언(文言)에서 설명하면서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근심이 없고,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 즐거우면 행하고 걱정되면 떠난다. 그의 뜻이 확고해서 동요시킬 수가 없다.[遯世無悶 不見是而無悶 樂則行之 憂則違之 確乎其不可拔]”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또 중용장구 제11장에 “군자는 중용의 도를 따를 뿐, 세상에서 숨어 살며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라는 말이 나온다.

155)겨울……빼어나듯:도잠(陶潛)의 사시(四時)에 나오는 “동령수고송(東嶺秀孤松)”이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156)개미가 양고기를 좋아하듯:장자 서무귀(徐无鬼)에 “개미는 양고기를 좋아하여 모여든다. 양고기는 누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순 임금의 행동에도 누린내 나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백성들이 좋아하여 모여드는 것이다.[蟻慕羊肉 羊肉羶也 舜有羶行 百姓悅之]”라는 말이 나온다.

157)매가 변화하듯:예기 월령(月令)에, 중춘(仲春)의 달에는 “매가 변화하여 비둘기가 된다.[鷹化爲鳩]”라는 말이 나온다.

158)순풍(順風)의 요청: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을 말한다. 순풍은 순하풍(順下風)을 줄인 말이다. 장자 재유(在宥)에, 광성자(廣成子)가 남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누워 있을 때, 황제(黃帝)가 “발치로부터 무릎 걸음으로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다.[順下風 膝行而進 再拜稽首而問]”라는 말이 나온다.

159)개무(開霧)의 기약:안개가 걷히면 내려오는 기약이라는 뜻으로, 산중에서 세상에 내려와 교화를 펴는 것을 말한다. 남산(南山)의 검은 표범은 안개가 짙게 끼어 있는 동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도 자신의 아름다운 털 무늬를 보전하기 위하여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남산현표(南山玄豹)의 고사를 변용한 것이다. 列女傳 卷2 賢明傳 陶答子妻

160)명검(名劍)이……하고:검이 용으로 변하여 물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중국에서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종적을 감춘 채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장화(張華)와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라는 암수의 두 보검을 각각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죽고 나서 두 보검이 절로 연평진(延平津) 속으로 날아 들어가서 두 마리 용으로 바뀐 채 유유히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拾遺記 卷10

161)진주(珍珠)가……하였는데:신라로 귀환한 것을 말한다. 합포(合浦)의 바닷속에서 진주가 많이 나오더니, 어느 태수(太守)가 탐욕을 부리자 점차 교지군(交阯郡)으로 진주가 옮겨 갔는데, 후한(後漢)의 맹상(孟嘗)이 합포에 부임하여 폐단을 개혁하고 청렴한 정사를 펼치자, 진주가 다시 예전처럼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孟嘗

162)이름에서……쫓아온다:후한(後漢)의 법진(法眞)이 네 차례에 걸친 황제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 버리자, 친구인 곽정(郭正)이 “법진의 이름은 들을 수 있어도 몸은 만나 보기 어렵다. 이름에서 도망쳐도 이름이 나를 따라오고, 명성에서 도피해도 명성이 나를 쫓아오니, 백세의 스승이라고 이를 만하다.[法眞名可得聞 身難得而見 逃名而名我隨。避名而名我追 可謂百世之師矣]”라고 찬탄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3 法眞列傳

163)문을……보고:지증 대사(智證大師)가 중국에 건너가지 않고도 신라에서 혼자 도를 깨쳤다는 말이다. 노자(老子) 47장의 “문을 나서지 않고서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서도 천도를 볼 수 있다.[不出戶 知天下 不闚牖 見天道]”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164)칠현(七賢):소승(小乘)인 구사종(俱舍宗)에서 칠성(七聖)에 상대하여 칭하는 수행의 경지를 가리키는데, 오정심위(五停心位)․별상념주위(別相念住位)․총상념주위(總相念住位)․난법위(煖法位)․정법위(頂法位)․인법위(忍法位)․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 등으로 되어 있다.

165)십주(十住):화엄경(華嚴經)에서 보살(菩薩)의 수행 단계를 모두 52계위(階位)로 나누는데, 그중 11계위에서 20계위까지를 십주(十住)라고 한다. 그 52계위의 수행의 경지를 따질 때, 이미 큰 지혜를 발해서 범부의 성품을 떠난 십지보살(十地菩薩)을 십성(十聖)이라 하고, 어느 정도 비슷하게 알기는 하나 아직 범부의 성품을 떠나지 못한 채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행인을 삼현(三賢)이라고 한다. 십주의 내용은 구역 화엄경(舊譯華嚴經) 권8 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에 소개되어 있다.

166)4조(祖):중국 선종의 4조인 도신(道信)을 말한다. 3조 승찬(僧璨)의 법맥을 이어 5조 홍인(弘忍)에게 전하였다. 파두산(破頭山)에 30여 년 머물렀는데, 나중에 쌍봉산(雙峰山)이라고 개칭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쌍봉 도신(雙峰道信)이라고 불렀다. 동산(東山) 황매사(黃梅寺)에 탑을 세웠는데, 제자인 홍인이 그곳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므로, 도신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초조(初祖)로 일컫는다. 당 대종(唐代宗)이 대의 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탑명(塔銘)은 자운(慈雲)이다. 續高僧傳 卷26 佛祖統紀 卷29

167)중서(中書)……비명(碑銘):도신(道信)에 대한 비명을 말한다. 수(隋)나라 비장방(費長房)이 지은 역대삼보기(歷代法寶記) 도신(道信) 맨 마지막에 “중서령 두정륜이 비문을 지었다.[中書令杜正倫撰碑文]”라는 말이 나온다. 두정륜(杜正倫)은 당 고종(唐高宗) 현경(顯慶) 2년(657)에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168)필만(畢萬)의……증험되었다:지증 대사(智證大師) 때에 와서 4조(祖) 도신(道信)의 선풍(禪風)이 신라에서 크게 진작되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필만이 진 헌공(晉獻公)을 섬기면서 큰 공을 세워 위(魏)에 봉해지자, 진나라 장복대부(掌卜大夫) 곽언(郭偃)이 “필만의 후손은 반드시 크게 번창할 것이다.[畢萬之後必大]”라고 예언한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閔公1年 필만의 후손인 위씨(魏氏)는 나중에 한씨(韓氏), 조씨(趙氏)와 함께 진나라를 3분하여 제후(諸侯)가 되고 급기야는 전국 칠웅(戰國七雄)의 하나로 국세를 크게 떨쳤다.

169)위엄이……사람:논어 술이(述而)에 “공자는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였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고, 공손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라는 말이 나온다.

170)승견불(勝見佛):과거 칠불(過去七佛) 중의 제1불(第一佛)로, 승관불(勝觀佛)이라고도 한다. 범어(梵語) Vipaśyin을 음역한 비바시불(毘婆尸佛)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71)관불일(灌佛日):석가(釋迦)가 탄생한 4월 8일을 말한다. 석가가 탄생할 때 제석천(帝釋天)과 용왕(龍王)이 향탕(香湯)으로 목욕시켰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여, 불탄일(佛誕日)이 되면 불상에 향수를 끼얹는 의식을 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관불회(灌佛會)라고 하며 욕불(浴佛)이라고도 한다.

172)망정(蟒亭)의 일:후한(後漢) 안세고(安世高)가 전생(前生)에 함께 수도하다가 성을 잘 내어 공정(亭) 묘(廟)의 거대한 이무기[大蟒] 신(神)이 된 자를 위해 제도(濟度)하며 동사(東寺)를 지어 사람으로 환생시켰다는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神僧傳 卷1 安世高傳 지증 대사가 전생에 용이었다는 이야기와 결부시킨 것이다.

173)상실(象室)의 꿈:마야부인(摩耶夫人)의 꿈에 호명보살(護明菩薩)이 상아가 여섯 개인 흰 코끼리[六牙白象]를 타고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석가를 잉태했다는 꿈 이야기를 말한다. 佛本行經 卷1 降胎品

174)가죽을……자:화를 잘 내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동안우(董安于)는 완만한 성격을 고치려고 허리에 활 줄을 차고 다녔고, 전국 시대 서문표(西門豹)는 조급한 성격을 고치려고 허리에 무두질한 가죽을 차고 다녔다[佩韋]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觀行

175)의려(倚閭):자식의 안부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모친이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손가(王孫賈)가 15세에 민왕(閔王)을 섬겼는데, 그 모친이 “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올 때면 내가 집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고,[倚門而望]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내가 마을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다.[倚閭而望]”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齊策6

176)완효서(阮孝緖):남조 양 무제(梁武帝) 때의 효자이다. 종산(鍾山)에서 공부하던 중에 괜히 가슴이 뛰어서 집에 돌아와 보니 모친이 병들어 있었는데, 모친의 병에 산삼이 특효라는 말을 듣고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사슴의 인도로 산삼을 발견하여 모친의 병을 낫게 했다고 한다.

177)지독(舐犢)하는 자:송아지를 핥아 주는 자라는 뜻으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버이를 뜻하는 말이다. 양표(楊彪)의 아들 양수(楊修)가 조조(曹操)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뒤에 조조가 양표에게 왜 그토록 야위었느냐고 묻자, 양표가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는 애정을 아직도 지니고 있어서 그렇다.[猶懷老牛舐犢之愛]”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楊彪

178)음사(飮蛇)한 자:뱀 그림자가 비친 술을 마신 자라는 뜻으로, 공연히 오해하여 의심하는 사람을 말한다. 진(晉)나라 악광(樂廣)이 친구와 술을 마실 적에 그 친구가 술잔 속에 비친 활 그림자를 뱀으로 오인하고는 마음속으로 의심한 나머지 병이 들었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병이 절로 나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43 樂廣列傳

179)의식적으로……것:황제(黃帝)가 적수(赤水)에서 노닐고 돌아오는 도중에 현주(玄珠)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지 못하다가 무심(無心)한 상망(象罔)이 찾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천지(天地)에 나온다.

180)발이……것:한(漢)나라 공융(孔融)의 논성효장서(論誠孝章序)에 “주옥은 발이 어도 저절로 오니, 이는 사람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현자는 발이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珠玉無脛而自至 以人好之也 況賢者之有足乎]”라는 말이 나온다.

181)변길보살(遍吉菩薩):불교 4대 보살의 하나로, 자비의 화신인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이칭이다.

182)먼저……법인데:이윤(伊尹)이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부름을 받고 나아갈 적에 자신의 포부를 토로하면서 “하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낼 적에 먼저 안 사람이 늦게 아는 사람을 깨우치게 하고, 먼저 깨달은 자가 늦게 깨닫는 자를 깨우치게끔 하였다. 나는 하늘이 낸 사람들 가운데 먼저 깨달은 사람이다. 따라서 내가 이 도를 가지고 이 사람들을 깨우쳐야 할 것이니, 내가 깨우치지 않는다면 그 누가 하겠는가.[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予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覺斯民也 非予覺之而誰也]”라고 말한 대목이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다.

183)정교(鼎敎):유(儒)․불(佛)․도(道) 삼교(三敎)를 가리킨다.

184)이윤(伊尹):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재상(宰相)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윤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다스린들 백성이 아니랴.’ 하면서 치세에도 나아갔고 난세에도 나아갔다.[伊尹曰 何事非君 何使非民 治亦進 亂亦進]”라는 말이 나온다.

185)송섬(宋纖):진(晉)나라의 은사(隱士)이다. 주천 태수(酒泉太守) 마급(馬岌)이 예의를 갖추어 방문했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얼굴을 보이지 않자, 마급이 “이름은 들을 수 있어도 몸은 볼 수 없고, 덕은 우러를 수 있어도 모습은 볼 수 없으니, 내가 지금에 와서야 선생이 사람 중의 용이라는 것을 알겠다.[名可聞而身不可見 德可仰而形不可睹 吾而今而後知先生人中之龍也]”라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宋纖

186)도중(塗中):진흙탕 속이라는 뜻으로, 지금 거처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초왕(楚王)이 장자(莊子)를 재상으로 초빙하자, 장자가 “나는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아가련다.[吾將曳尾於塗中]”라면서 거절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莊子 秋水

187)문상(汶上):문수(汶水) 물가라는 뜻으로, 장차 망명할 장소를 가리킨다. 계씨(季氏)가 공자의 제자인 민자건(閔子騫)을 비(費) 땅의 수령으로 삼으려 하자, 민자건이 “다시 한번 나를 부르러 온다면, 나는 필시 노(魯)나라를 떠나 제(齊)나라의 문수 물가에 있게 될 것이다.[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雍也

188)읍사(邑司):당나라 때 공주(公主)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정부 기구이다. 舊唐書 卷42 職官志1

189)바보의 골짜기: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부로(父老)가 소를 길렀는데 소가 송아지를 낳자 그 송아지를 팔아서 망아지를 사 왔다. 그러자 젊은 사람이 소는 망아지를 낳지 못한다면서 마침내 그 망아지를 데리고 갔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그를 우공(愚公)이라고 부르고 그가 살던 골짜기를 우공의 골짜기 즉 우곡(愚谷)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 정리(政理)에 나온다.

190)누가 밥주머니라고 기롱하였던가:후한(後漢)의 예형(禰衡)이 “순욱 정도는 그래도 억지로 데리고 얘기해 볼 수 있지만, 그 이외의 사람들은 나무나 진흙으로 만든 인형과 같아서 사람과 모습은 비슷해도 사람의 정기가 없으니, 모두 술독이나 밥주머니일 뿐이다.[荀彧猶强可與語 過此以往 皆木梗泥偶 似人而無人氣 皆酒甕飯囊耳]”라고 조롱한 고사가 있다. 抱朴子 彈禰

191)죽……것이다:공자(孔子)의 선조인 정고보(正考父)의 솥[鼎]에 “대부 때에는 고개를 수그리고, 하경(下卿) 때에는 등을 구부리고, 상경(上卿) 때에는 몸을 굽히고서, 길 한복판을 피해 담장을 따라 빨리 걸어간다면, 아무도 나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리라. 나는 이 솥에 미음을 끓이고 죽을 끓여 내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가리라.[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 循墻而走 亦莫余敢侮 饘於是 鬻於是 以餬余口]”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7年

192)민천(民天):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 즉 식량이 되는 곡식을 말한다. 사기(史記) 권97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의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193)구고(九臯)의……퍼지자:지증 대사가 희사하려는 일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졌다는 말이다. 시경 학명(鶴鳴)에 “학이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우니, 그 소리가 위로 하늘에까지 들리도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는 말이 나온다.

194)속명(續命)한 자:목숨을 이은 자라는 뜻으로, 은혜를 받은 백성을 가리킨다. 남조 제(齊)의 유선명(劉善明)이 청주(靑州)에 기근이 들었을 때 곳간을 열어 향리의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자 백성들의 그의 집의 밭을 속명전(續命田)이라고 불렀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南齊書 卷28 劉善明列傳

195)상가(賞歌)한 자:가인(歌人)에게 지나치게 후한 상을 내린 자라는 뜻으로, 재물을 함부로 헛되게 쓰는 사람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 열후(烈侯)가 음악을 좋아한 나머지 자기가 아끼는 가인 두 사람에게 각각 1만 묘(畝)의 전지(田地)를 내리려 하다가 상국(相國) 공중련(公仲連)에게 저지당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43 趙世家

196)간혜지(乾慧地):보살(菩薩)의 53수행(修行) 계위(階位) 중 십지(十地)의 제1지에 속하는 지위로서, 초발심(初發心)한 보살을 가리키는데, 지혜는 있어도 선정(禪定)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견정지(見淨地)라고도 한다.

197)정혜(定慧):불가(佛家)에서는 탐진치(貪嗔癡)의 삼독(三毒)을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계는 계율, 정은 선정, 혜는 이를 통해서 발휘되는 지혜를 뜻한다.

198)뽕나무……되었으니:대사의 감화를 받고 귀의했다는 말이다. 시경 반수(泮水)에 “저 부엉이 퍼덕거리며 날아와서, 반궁(泮宮) 숲 속에 모여 앉도다. 우리 뽕나무 오디를 먹고, 나에게 좋은 소리를 안겨주도다.[翩彼飛鴞 集于泮林 食我桑黮 懷我好音]”라는 말이 나온다.

199)팔을 끊은 자:마음속 깊이 스승에게 귀의한 제자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심충(沈忠)을 가리킨다. 중국 선종(禪宗)의 2조(祖)가 된 혜가(慧可)가 처음에 소림사(少林寺)로 달마(達磨)를 찾아가서 밤새도록 눈이 쌓인 뜰에 공손히 서서 도를 구했으나 달마는 면벽만을 한 채 한마디 말도 건네지를 않았는데, 이에 혜가가 계도(戒刀)로 자신의 왼쪽 팔을 끊어 그 팔을 바치자 달마가 비로소 입실을 허락했다는 설중단비(雪中斷臂)의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3 菩提達磨

200)용미도(龍尾道)를……자:반역을 도모한 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산중의 도적을 가리킨다. 당 현종(唐玄宗) 때 반란을 일으켰던 안녹산(安祿山)이 함원전(含元殿) 앞의 용미도(龍尾道)를 파헤치려다가 그만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201)영육(靈育):북위(北魏)의 승려 현고(玄高)의 본명이다.

202)법심(法深):동진(東晉)의 승려 축잠(竺潛)의 자이다.

203)계족산(雞足山):부처가 법화경(法華經) 등 대승 경전(大乘經傳)을 설했다고 하여 불교의 성지로 꼽히는 영취산(靈鷲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대사가 주석(住錫)하고 있는 희양산(曦陽山)을 가리킨다.

204)가슴속에 옥을 품고서:노자(老子) 70장에 “성인은 겉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지만, 안에는 보배 구슬을 품고 있다.[聖人被褐懷玉]”라는 말이 나온다.

205)우대우(牛戴牛):소가 소 한 마리의 값이 나가는 귀한 쇠뿔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말로, 대사에 대한 세상의 높은 평가를 비유한 말이다. 주례 고공기(考工記) 궁인(弓人)에 “쇠뿔의 길이가 2자 5치이고, 세 가지 색깔이 제대로 갖추어졌으면, 이를 우대우라고 한다.[角長二尺有五寸 三色不失理 謂之牛戴牛]”라는 말이 나온다.

206)새를……것입니다:산승(山僧)은 산으로 돌아가서 살게 하는 것이 큰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는 말이다. 원거(爰居)라는 해조(海鳥)가 노(魯)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임금이 그 새를 정중히 모셔다가 종묘에서 환영연을 베풀면서, 순(舜) 임금의 소악(韶樂)을 연주하고 진수성찬을 대접하니, 그 새는 눈이 부시고 근심과 슬픔이 교차하여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하고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 “이는 자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대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넓은 고원에서 노닐게 해야 한다.[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夫以鳥養養鳥者 宜栖之深林 遊之壇陸]”라고 비평한 내용이 장자 지락(至樂)에 나온다.

207)등후(鄧侯):진나라 등유(鄧攸)를 가리킨다. 오군 태수(吳郡太守)로 선정을 베풀다가 떠날 즈음에 백성들이 그의 배가 출발하지 못하도록 한사코 막자 한밤중에 조각배를 타고 몰래 떠났는데,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둥둥 울리는 오경(更)의 북소리여, 닭 울음소리에 하늘이 밝아 오네. 등후는 끌어당겨도 머무르지 않고, 사령은 등을 떠밀어도 떠나지 않네.[紞如打五鼓 鷄鳴天欲曙 鄧侯拖不留 謝令推不去]”라고 했다 한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208)지학(支鶴):지둔(支遁)의 학이라는 뜻으로,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고승전(高僧傳) 권4 지둔전(支遁傳)에 “학을 선물한 자가 있었다. 지둔이 학에게 말하기를 ‘너는 하늘 높이 솟구쳐 날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귀와 눈을 위한 노리개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하고는 마침내 날려 보내었다.[有餉鶴者 遁謂鶴曰 爾冲天之物 寧為耳目之翫乎 遂放之]”라는 말이 나온다.

209)조구(趙鷗):조나라의 갈매기라는 뜻으로, 고승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임금을 비유하는 말이다. 천축(天竺)의 명승(名僧)인 불도징(佛圖澄)이 후조(後趙)의 황제인 석호(石虎)와 어울려 노닌다는 말을 듣고는, 지도림(支道林)이 “징공이 석호를 바닷가에서 어부와 함께 노니는 갈매기로 삼았구나.[澄以石虎爲海鷗鳥]”라고 평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210)토끼를……하고: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적에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죽자, 이때부터 일손을 놓고는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토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토끼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가 한비자 오두(五蠹)에 나온다.

211)물고기를……하였으니: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의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연못을 내려다보며 물고기만 탐내기보다는, 뒤로 물러나서 그물을 짜는 것이 나을 것이다.[臨淵羨魚 不如退而結網]”라는 속담이 인용되어 있다. 漢書 권56 董仲舒傳

212)정대춘(井大春)이……수레:대춘은 후한(後漢) 초의 은사(隱士)인 정단(井丹)의 자이다. 신양후(信陽侯) 음취(陰就)가 연(輦)을 타고 가려 할 적에, 정단이 웃으면서 “내가 듣건대 옛날 걸왕이 사람에게 수레를 끌게 했다던데, 어쩌면 이런 경우도 해당되지 않겠는가.[吾聞桀駕人車 豈此耶]”라고 하니, 좌중의 얼굴색이 모두 변하였는데, 결국 음취도 그 말을 듣고는 어쩔 수 없어서 연을 타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음취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황후인 음여화(陰麗華)의 동생이요, 명제(明帝)의 외삼촌이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井丹

213)호계(虎溪):동진(東晉)의 고승 혜원(慧遠)이 거처한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의 시냇물 이름이다.

214)곡수(鵠樹):석가(釋迦)가 입멸할 때 흰색으로 변했다는 사라쌍수(沙羅雙樹)를 가리키는데, 학수(鶴樹)라고도 한다.

215)학(鶴)이 돌아온 것: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고 나서 1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고향을 찾아와서는 요동 성문의 화표주(華表柱) 위에 내려앉았다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搜神後記 卷1

216)외손(外孫)의 글:좋은 글이라는 말이다.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라는 글자가 된다. 358쪽 주114 참조.

217)신이……다행이었는데:고운이 우수한 인재는 못 되지만 그래도 당나라에 가서 인정을 받고 돌아오게 되어 다행이라는 말의 겸사이다. 동전(東箭)은 동남죽전(東南竹箭)의 준말로, 재질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아 석지(釋地)의 “동남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회계의 죽전이 있다.[東南之美者 有會稽之竹箭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또 춘추 시대 초(楚)나라 악관(樂官)인 종의(鍾儀)가 진(晉)나라에 잡혀가서도 고국을 잊지 못한 나머지 초나라 모자인 남관(南冠)을 쓰고서 초나라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끝내는 그곳에서 군자라는 호평을 받고 석방되어 돌아왔던 고사가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9년에 나온다.

218)바야흐로……말았다:그동안 쌓아 온 실력을 조정에서 마음껏 발휘해 보려고 하였는데, 자신을 알아주던 헌강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말이다. 운부(運斧)는 도끼를 휘두른다는 뜻으로, 탁월한 재질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초(楚)나라 장석(匠石)이 상대방의 코끝에다 하얀 흙을 얇게 발라 놓고는 도끼를 바람 소리가 나게 휘둘러 그 흙만 떼어 내고 상대방은 다치지 않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莊子 徐无鬼 호궁(號弓)은 활을 안고 호곡한다는 뜻으로, 임금의 죽음을 가리킨다. 351쪽 주84 참조.

219)돌이……알았고:비석이 말할 수 있었다면 불평을 토로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8년에, “돌은 말하지 못하는 물건이지만, 혹시 신이 붙으면 말할 수도 있는 일이다.[石不能言 或馮焉]”라는 말이 나온다.

220)애체(靉靆)라는……주겠는가:법화경(法華經)을 암송하는 사미(沙彌)가 애체라는 두 글자를 항상 잊어버리곤 하였는데, 이는 그가 전생에 암송하던 법화경의 책자 중에 애체라는 두 글자가 좀이 슬어서 안 보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승려가 꿈속에 나타나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홍찬법화전(弘贊法華傳) 권6 송지(誦持)의 실명(失名)한 석모(釋某)의 전에 나온다.

221)소요(逍遙)에서……없었다:지증 대사가 헌강왕 앞에서 설한 법문을 들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소요는 장안(長安)의 소요원(逍遙園)을 가리킨다. 속고승전(續高僧傳) 권5 석승민전(釋僧旻傳)에 “축도생이 장안에 들어오자 후진(後秦)의 임금인 요흥이 소요원에서 접견하고는 도융의 의리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게 하였는데, 왕복하며 반복해서 말한 것이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대중 모두가 그의 풍신을 보고는 그의 영걸스러움에 심복하였다.[竺道生入長安 姚興於逍遙園見之 使難道融義 往復百翻言無不切 衆皆覩其風神 服其英秀]”라는 말이 나온다.

222)매양……못하였다:고운이 지증 대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솜씨가 서툴러서 멋진 글을 짓지 못할까 망설이기만 했다는 말이다. 노자(老子) 74장에 “뛰어난 목수 대신 나무를 깎는다면, 손을 다치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夫代大匠斲者 希有不傷其手矣]”라는 말이 나온다. 또 어떤 장자(長者)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왼쪽 주먹을 펴지 못하는 아들을 데리고 천축(天竺)의 24조(祖)인 사자 존자(師子尊者)를 찾아와서 하소연하자, 존자가 찬찬히 살펴보다가 “내 구슬을 돌려다오.”라고 말하니, 그 아들이 주먹을 펴고 구슬을 돌려주었는데, 이는 존자가 전생에 승려의 신분으로 서해(西海) 용왕재(龍王齋)에 참석했을 때 동자에게 맡겨 둔 구슬이었다는 이야기가 연등회요(聯燈會要) 권2 이십사조사자존자(二十四祖師子尊者)에 나온다.

223)한만(汗漫)의 유람:속세를 초월한 신선의 유람을 말한다. 옛날 진(秦)나라 노오(盧敖)가 북해(北海)에서 노닐다가 선인(仙人)인 약사(若士)를 만나 함께 벗으로 노닐자고 청하자, 약사가 “나는 구해(九垓) 밖에서 한만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니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헌다. 구해는 구천(九天)을 말한다. 淮南子 道應訓

224)공동(崆峒):황제(黃帝)가 스승으로 섬겼다는 공동산(崆峒山)의 광성자(廣成子)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지증 대사를 의미한다.

225)수신(受辛):사(辭)를 파자(破字)한 것이다. 358쪽 주114 참조.

226)금구(金口):금인(金人)의 입이라는 말로, 신중하게 발언하는 것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주(周)나라 태묘(太廟)에 갔을 적에 입을 세 겹으로 봉한[三緘其口] 금인을 보았는데, 그 등 뒤에 새긴 명문(銘文)을 보니 “옛날에 말조심을 하던 사람이다. 경계하여 많은 말을 하지 말지어다. 말이 많으면 실패가 또한 많으니라.[古之愼言人也 戒之哉 無多言 多言多敗]”라고 써 있더라는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觀周

227)남은……있다:자세한 내용은 356쪽 주102 참조.

228)육마(六魔):육경(六境)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가리킨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을 오염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데, 육적(六賊) 혹은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229)육폐(六蔽):청정심(淸淨心)을 은폐하며 육도(六度)를 방해하는 6종의 악심(惡心)으로, 간탐심(慳貪心), 파계심(破戒心), 진에심(瞋恚心), 해태심(懈怠心), 산란심(散亂心), 우치심(愚癡心) 등을 가리킨다.

230)육도(六度):생사의 차안에서 열반의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섯 개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도 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정려(靜慮), 지혜(智慧) 등으로 되어 있다.

231)육통(六通):부처와 보살이 정혜(定慧)의 힘에 의해 시현하는 6종의 무애자재(無礙自在)한 묘용(妙用)으로, 육신통(六神通)이라고도 하는데, 신족통(神足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 등으로 되어 있다.

232)겨와……하다:진(晉)나라 왕탄지(王坦之)와 범계(范啓)가 서로 앞을 양보하면서 걸어가다가 뒤에 처지게 된 왕탄지가 “곡식을 까불며 바람에 날리면 겨와 쭉정이가 앞에 있게 마련이다.[簸之颺之 糠秕在前]”라고 한마디 하자, 범계가 “조리질하며 물에 흔들면 모래와 자갈이 뒤에 있게 마련이다.[淘之汰之 沙礫在後]”라고 응수했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世說新語 排調

233)자취가……않겠는가:역대의 제왕이 고승들과 궁전에서 만나 불법(佛法)에 대해서 문답을 나눈 것처럼 헌강왕이 지증 대사를 월지궁(月池宮)으로 인도하여 마음에 대해서 질의하고 답변을 들은 것 또한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난전(蘭殿)은 제왕의 화려한 궁전을 뜻하는 말이다.

234)백량(柏梁)의……지으면서:이른바 백량체(柏梁體)로 명(銘)을 지었다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에 백량대(柏梁臺)를 세우고 그 위에서 신하들과 연음(宴飮)을 하며 구(句)마다 압운(押韻)을 하는 칠언시(七言詩)를 읊었다. 그래서 각 구에 압운을 한 칠언시를 후대에 백량체라고 부르게 되었다. 三輔黃圖 卷5 臺榭

235)공자(孔子)는……의거하였으며:논어 술이(述而)에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고, 예에 노닐어야 한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236)노자(老子)는……지켰다네:노자 28장에 “숫컷의 강함을 알면서도 암컷의 약함을 지킬 줄 알면 모든 시내가 모여드는 천하의 계곡이 되고, 분명하게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을 지키면 천하의 법도가 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라는 말이 나온다.

237)오산(鼇山):자라가 등 위에 받치고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동해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

238)희중(羲仲):해 뜨는 동쪽 바닷가에서 봄 농사를 관장한 요(堯) 임금의 신하 이름인데, 여기서는 신라의 임금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360쪽 주120 참조.

239)토굴(兎窟):토끼가 위험한 상황을 감안하여 미리 세 개의 굴을 뚫어 놓는다는 교토 삼굴(狡兎三窟)의 준말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퇴로를 미리 확보해 놓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240)양기(羊岐):양을 찾으러 나갔다가 만난 갈림길이라는 말이다. 도망친 양을 잡으려고 쫓아 가다가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이 있어서[岐路之中 又有岐焉]’ 끝내는 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망양지탄(亡羊之歎)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列子 說符

241)상망(象罔):무심(無心)을 뜻한다. 368쪽 주179 참조.

242)한선(寒蟬):추운 가을날 울지 못하는 매미를 말하는데, 흔히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243)삼대……법:순자 권학(勸學)에 “꾸불꾸불 자라는 쑥도 삼대 밭 속에서 크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곧게 된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는 말이 나온다.

244)화엄(華嚴)……찬(讚):원래의 대본에는 이 제목 아래에 화엄 불국사의 석가여래상을 수놓은 당번에 대한 찬[華嚴佛國寺繡釋迦如來像幡讚]이라는 이 제목의 내용과 대화엄종 불국사의 아미타불상에 대한 찬[大華嚴宗佛國寺阿彌陀佛像讚]이라는 제목의 서로 다른 내용 두 개가 불완전하게 한데 뒤섞여 있다. 그래서 두 개의 제목으로 나누어 원문을 다시 수정해서 번역하였는데, 수정본은 최영성, 譯註 崔致遠全集2, 아세아문화사, 1999에 수록된 대본을 채택하였다.

245)수레의……가졌으며:관찰사로서 한 지방을 잘 규찰하며 통솔하였다는 말이다. 동한(東漢)의 가종(賈琮)이 기주 자사(冀州刺史)로 부임할 때 관례를 뒤엎고 수레의 휘장을 걷어 올리게 하면서 “지방 장관은 멀리 보고 널리 들어야 하는데, 어찌 거꾸로 수레의 휘장을 드리운 채 자신의 귀와 눈을 가려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1 賈琮列傳 동호부(銅虎符)는 한대(漢代)에 구리로 범 모양처럼 만든 군대 출동용 부절(符節)인데, 보통 지방 장관의 관인(官印)을 뜻한다.

246)금초관(金貂冠):황금당(黃金璫)과 초미(貂尾)로 장식한 관(冠)으로, 높은 품계의 관원을 비유하는 말이다.

247)큰 강을……했으리오:재상으로서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고 대업을 이루기도 전에 아까운 인재가 그만 뜻밖에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뜻이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현상(賢相) 부열(傅說)을 얻고 나서 “만일 큰 강을 건너게 되면 내가 그대를 배와 노로 삼을 것이요, 만일 큰 가뭄을 만나게 되면 그대를 단비로 삼을 것이다.[若濟巨川 用汝作舟楫 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말한 내용이 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나온다.

248) 삼귀(三歸):불교의 삼보(三寶)인 불(佛)․법(法)․승(僧)에 귀의하는 것이다.

249)요오 상인(姚塢上人)은……하였으며:요오 상인은 동진(東晉)의 고승 지둔(支遁)을 가리킨다. 그가 요오산(姚塢山)에 거했기 때문인데, 이 사실이 고승전(高僧傳)4 지둔전(支遁傳)에 나온다. 그의 말로 인용한 구절은 지둔이 지은 아미타불상찬(阿彌陀佛像讚)에서 고운이 발췌한 것인데, 광홍명집(廣弘明集)15에 나온다.

250)광잠 대사(匡岑大師)는……하였다:광잠 대사는 동진의 고승 혜원(慧遠)을 가리킨다. 광잠 즉 광산(匡山)은 그가 거했던 여산(廬山)의 별칭이다. 그의 말로 인용한 구절은 그가 여산 동림사(東林寺)에서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나서 유유민(劉遺民)에게 부탁하여 지은 서문(誓文)을 고운이 발췌한 것인데, 고승전 권6 혜원전(慧遠傳)에 나온다.

251)연장(蓮藏):불교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가리킨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보살행(菩薩行)을 닦으며 발원해서 성취한 청정 장엄(淸淨莊嚴) 세계를 말하는데, 신역 화엄경(新譯華嚴經) 권8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52)안양(安養):안양국(安養國)의 준말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교주로 있는 서방 정토 즉 극락세계를 가리킨다. 중생이 안심하고 양신(養身)할 수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253)아축여래(阿閦如來):동방의 묘락국(妙樂國)에서 설법하고 있다는 현재불(現在佛)의 이름이다.

254)남방을 순행한 동자: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 보살(求道菩薩) 선재동자(善財童子)를 가리킨다. 처음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찾아갔다가 다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남쪽으로 여행하여 110성(城)의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법문을 구한 결과 마침내 미진수(微塵數)의 삼매문(三昧門)에 들어 섰다고 한다.

255)부낭(浮囊)을……돌아왔나니: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구도하다가 진리를 체득하고 귀국했다는 말이다. 부낭은 물을 건널 때 사용하는 공기 주머니로, 여기서는 배를 타고 중국에 건너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뗏목은 일단 물을 건너고 나면 더 이상 소용이 없는 물건으로, 여기서는 진리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편적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256)피안과……했다오:피안과 차안이라는 말만 존재할 뿐, 보다 높은 차원에 올라서면 피안이 곧 차안이요 차안이 곧 피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는 말이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만 같지 않고, 말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만 같지 않으니, 하늘과 땅은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라는 말이 나온다.

257)천생의……하면:선승(禪僧)이면서도 교학(敎學)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각현(覺賢)은 동진(東晉) 때 북인도(北印度)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저명한 역경승(譯經僧)이다. 원명은 불타발다라(佛馱跋陀羅)이며, 불현(佛賢)이라고도 한다.

258)우두(牛頭)의……하였어라:중국 선종(禪宗) 4조(祖) 도신(道信)의 제자인 우두법융(牛頭法融)의 법맥을 이어, 화두(話頭) 참구(參究)를 위주로 하는 조사선(祖師禪)과는 달리, 무심(無心)을 종지로 한 선풍(禪風)을 떨쳤다는 말이다. 상망(象罔)에 대해서는 378쪽 주179 참조.

259)원종(圓宗):교의(敎義)가 원만(圓滿)한 대승(大乘)의 종파라는 뜻인데, 보통 화엄종(華嚴宗)과 천태종(天台宗)이 스스로 원종 혹은 원교(圓敎)라고 칭한다.

260)화성(化城):신통력으로 세운 으리으리한 환화(幻化)의 성이라는 뜻으로, 순응이 창건한 해인사(海印寺)를 비유한 말이다. 화성(化城)은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온 말로 보통 사원을 뜻한다. 341쪽 주46 참조.

261)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하였나니:혼돈(混沌)에 구멍을 뚫듯 가야산(伽倻山)에 토목 공사를 일으켜, 화엄(華嚴)의 연화장세계가 펼쳐지는 해인사(海印寺)를 세웠다는 말이다. 해인사는 이정과 순응이 애장왕(哀莊王)의 귀의를 받아 창건하였다. 남해의 임금인 숙(儵)과 북해의 임금인 홀(忽)이 중앙의 임금인 혼돈의 덕에 감화된 나머지,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눈․귀․코․입의 일곱 구멍을 하루에 하나씩 뚫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장자 응제왕(應帝王)에 나온다.

1)건노(建奴):청나라를 말한다. 건은 건주위(建州衛)를 말하는데, 명나라 성조(成祖)가 여진족(女眞族)의 근거지였던 길림(吉林) 부근과 목릉하(穆陵河) 유역에 설치한 것으로 청나라가 발원한 곳이다.

2)공신이……않은 것:공신은 이른바 사대장(四大將)으로 김류(金瑬), 신경진(申景禛), 이귀(李貴), 이서(李曙)를 말한다. 이들이 명을 어기고 군관(軍官)을 두어 사병(私兵)을 기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仁祖實錄 5年 4月 25日

3)최명길(崔鳴吉)이 주장한 별묘(別廟):인조의 생부(生父)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위해 별묘를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조가 할아버지인 선조를 이어 보위에 올랐으므로 생부인 정원대원군을 추숭하여 태묘(太廟)에 모실 수는 없고 별도로 사당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仁祖實錄 4年 1月 25日

4)혼조(昏朝):정치가 문란한 조정을 일컫는 말로, 폐위당한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을 일컬을 때 쓴다. 여기에서는 광해군을 뜻한다.

5)장묘(章廟):인조의 생부인 정원대원군을 말한다. 나중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어 능호가 장릉(章陵)이다.

6)나라를 망친 전철:광해군이 즉위하여 생모 공빈(恭嬪)을 추숭한 일을 말한다. 광해군은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여 신하들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빈을 추존하여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삼고, 능호(陵號)를 성릉(成陵)이라고 하였다. 光海君日記 2年 3月 29日

7)공빈(恭嬪):광해군의 생모이다.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김희철(金希哲)의 딸로 선조(宣祖)의 후궁으로 들어가 임해(臨海)와 광해(光海) 두 왕자를 낳았고, 1577년(선조10)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후에 광해군이 즉위하여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 宣祖修訂實錄 10年 5月 1日 光海君日記 2年 3月 29日

8)잔치를 베푼 일:인조가 관등(觀燈)하는 날 저녁 후원에 오색 비단으로 만든 등불 수백 개를 줄지어 걸어놓고 즐긴 일을 말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인조실록 13823일 조에 자세하다.

9)후궁을 뽑은 일:장류(張留)의 딸 장씨(張氏)를 숙의(淑儀)로 선발한 일을 말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인조실록 13년 8월 23일 조에 자세하다.

10)집을 지은 일:대군(大君)의 집을 지은 일을 말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인조실록 13년 8월 23일 조에 자세하다.

11)등롱금(燈籠錦)의 일:등롱금은 금실로 등롱의 무늬를 넣어 짠 비단을 말한다. 송나라 때 재상 문언박(文彦博)이 촉(蜀) 땅을 맡아 다스릴 때 등롱금을 비빈(妃嬪)에게 바치고 집정(執政)이 되었다. 宋史 卷316 唐介列傳

12)좋은 말을 훔쳐:실록에는 “관가의 말을 훔쳐[盜官馬]”로 되어 있다. 仁祖實錄 14年 7月 2日

13)영돈녕부사의 의견:영돈녕부사는 김상용(金尙容)을 말한다. 김상용은, 조경이 향인을 비호할 줄만 알고 임금을 경외할 줄은 모른다 하여 의금부에서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仁祖實錄 14年 7月 2日

14)명나라……것:명나라 태조(太祖)가 맹자를 보다가 이루 하(離婁下)>에 “임금이 신하 보기를 토개(土芥)처럼 하면 신하는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라고 한 대문을 보고, 신자(臣子)로서 할 말이 아니라고 하여 맹자를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한 일을 말한다. 明史 卷139 錢唐列傳

15)석진(石晉)이……것:석진은 오대(五代) 후진(後晉)의 석경당(石敬瑭)을 가리킨다. 석경당이 거란(契丹)의 군주 야율덕광(耶律德光)의 도움으로 제위(帝位)에 오른 뒤에 야율덕광에게 신하로 복종하여 섬긴 일을 말한다. 新五代史 卷72 四夷附錄 契丹

16)죽음을……팔고:김상헌이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었으나, 자손들에게 구조되어 죽지 않은 것을 말한다. 仁祖實錄 15年 1月 28日

17)관백설(關白說):한국문집총간 90집 용주유고(龍洲遺稿) 권23에 동사록(東槎錄)>이 실려 있고, 그 안에 관백설>이 있다.

18)이산(尼山)에 고변(告變)이 있어:이산현(尼山縣)의 초관(哨官) 이석룡(李碩龍)이 고변한 사건이다. 仁祖實錄 24年 3月 28日

19)조석윤(趙錫胤)과 이응시(李應蓍)의 일:이응시는 강직한 사람으로 장령이 되자마자 상소를 올려 언관인 이경여(李敬輿), 심로(沈), 홍무적(洪茂績)을 귀양 보낸 것을 비판하고 강직한 경계의 말을 한 것으로 인해 체직되었다가 뒤이어 유배를 당했고, 조석윤은 대사간으로서 이응시를 구하다 파직되었는데, 이들을 변호하는 내용이다. 仁祖實錄 24年 11月 13日

20)이경여(李敬輿):실록 등에 근거하여 원문의 ‘景’을 ‘敬’으로 바로잡았다.

21)이경여(李敬輿)……일:유배되어 있는 이들을 소방(疏放)할 것을 청한 일이다. 仁祖實錄 25年 4月 5日

22)구왕(九王):청나라 태조(太祖)의 열넷째 아들 예충친왕(睿忠親王) 도르곤(多爾袞)의 별칭으로, 태종의 아홉째 동생이라는 뜻이다. 태종이 죽자 어린 세조(世祖)를 즉위시키고 섭정왕(攝政王)이 되었으므로 섭정친왕(攝政親王)이라고도 부른다. 淸史稿 卷218 諸王4 국역 심전고 제2권 유관잡록 산해철망기

23)원두표(元斗杓)에……논핵:이유태(李惟泰)의 상소에는 조석윤(趙錫胤)을 원당(原黨)으로 지목하여 논핵하였다고 되어 있다. 孝宗實錄 卽位年 9月 2日

24)사문(査問)한다는 것:인조가 승하하였을 때 청나라의 조문이 있었는데, 그때 청나라의 칙서에 황부왕(皇父王)이라 한 것을 우리나라의 답서에 섭정왕이라고 한 것과 조제(吊祭)할 때 곡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 의도를 사문한다는 것이다. 황부왕은 태종의 동생인 이른바 구왕(九王)으로 세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섭정왕이 된 자이다. 孝宗實錄 1年 3月 1日

25)밀계(密啓):효종 즉위년에 청나라의 조문에 사은하기 위해 청나라로 간 사은사가 그곳에서 구류를 당했는데, 이 사은사 일행이 그쪽 사정을 적어 보낸 밀계이다. 실록에는 역관 이형장(李馨長)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孝宗實錄 1年 3月 1日

26)의순공주(義順公主):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의 딸이다. 청나라 구왕이 우리나라와 혼인 맺기를 원하였으므로 공주로 삼아 보냈는데, 1650년(효종1)에 청나라로 갔다가 1656년에 돌아왔고, 1662년(현종3)에 죽었다.

27)정경부인:조경의 부인 김씨를 말한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이조 판서 김찬(金瓚)의 딸이며, 향년은 67세이다. 1650년(효종1) 윤11월 9일에 효종이 대신과 비변사의 신하를 인견한 자리에서 이시백(李時白)이, 조경이 처상(妻喪)을 당했다고 진달하였다. 孝宗實錄

28)김홍욱(金弘郁)이……뒤로:김홍욱은 1654년(효종5) 7월 7일 황해 감사로 재직 중에 상소를 올려 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사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제기하였다가 의금부에 체포되었으며, 국문을 받다가 곤장을 맞아 죽었다. 당시에 이 억울한 죽음을 듣고 슬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孝宗實錄

29)시호에……유계(兪棨):시호는 인조(仁祖)의 시호를 말한다. 효종 즉위년에 심대부(沈大孚)가 상소하여 선왕의 시호를 ‘조(祖)’로 하는 것이 예에 맞지 않다는 이론을 제기하였고, 뒤이어 유계가 상소하여 심대부의 의견을 옹호하고 조종조(祖宗朝)에 ‘인(仁)’ 자를 쓴 선왕이 있음을 들어 이론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이 효종의 심기를 많이 건드려 처벌을 받았다. 유계는 1658년(효종9)에 이르러서야 사면을 받아 서용되었고, 심대부는 끝내 사면받지 못하고 죽었다. 孝宗實錄 卽位年 5月 23日, 9年 10月 20日

30)윤선도(尹善道)의 일:1660년(현종1) 4월 18일에 윤선도가 상소를 올려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를 자최삼년복(齊衰三年服)으로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적통(嫡統)을 이어받은 아들은 할아버지와 체(體)가 된다는 점과 아버지가 적자의 상에 참최삼년복(斬衰三年服)을 입는 것은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종(祖宗)의 적통을 이어받아서라는 점을 들어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기년복(朞年服) 주장을 공격하였는데, 4월 24일에 상소를 불태우라는 명이 내렸고, 30일에 함경도 삼수군(三水郡)에 안치하라는 처분이 내렸다. 이때에 이르러 윤선도가 죄인 심리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조경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顯宗實錄

31)대부인:조경의 계모인 송 부인을 말한다. 조경은 1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28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로 80세가 되도록 계모인 송 부인을 봉양하였다.

32)물건……행하도록:파시(罷市)와 같은 의미이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천자(天子)가 붕(崩)하면 7일 동안 항시(巷市)하고, 제후(諸侯)가 훙(薨)하면 3일 동안 항시한다.” 하였는데, 주(註)에 “마을 거리로 옮겨 교역하는 것이니, 이것은 서인(庶人)이 나라의 대상(大喪)을 위하여 근심하고 슬퍼해서 ‘저자를 파하는 것[罷市]’인데, 일용(日用)에 필요한 물건이 또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을 거리로 저자를 옮겨 물건을 교역하는 것이다.” 하였다.

33)설포(薛包)의 어짊:설포는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는 맹상(孟嘗)이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 지극한 효행이 알려졌으며, 계모가 구박하여 쫓아냈는데도 매일 아침 들어가 마당을 쓸고 아침저녁 문안을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39 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

34)나라를 망친 전철:광해군이 생모 공빈(恭嬪)을 추숭한 일을 말한다. 상세한 내용은 5쪽 주 6) 참조.

35)이응시(李應蓍)와 조석윤(趙錫胤)의 일:이응시와 조석윤은 모두 언사(言事)로 처벌받았다. 상세한 내용은 14쪽 주 19) 참조.

36) 이유태(李惟泰):실록 등에 근거하여 원문의 ‘維’를 ‘惟’로 바로잡았다.

37)임해군(臨海君)……일:임해군은 광해군의 형으로 이름은 진(珒)이다. 광해군이 즉위한 해 2월 14일에 양사에서 ‘오랫동안 이심(異心)을 품어 사사로이 군기(軍器)를 저장하고 몰래 사사(死士)를 양성하였다’는 이유로 임해군을 절도(絶島)에 유배할 것을 청하여 진도(珍島)에 안치(安置)하는 것으로 처결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2월 18일부터 5월 5일까지 임해군의 종들을 추국한 일을 말한다. 光海君日記

38)무신년의 옥사:무신년은 광해군이 즉위한 해로, 임해군의 옥사를 말한다. 위의 주 참조.

39)영창(永昌)의 옥사:영창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으로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소생이다. 이름은 의(㼁)이다. 서양갑(徐羊甲), 심우영(沈友英), 허홍인(許弘仁), 박응서(朴應犀), 박치의(朴致毅) 등이 처음에는 도적으로 붙잡혔으나 1613년(광해군5) 4월 25일에 박응서가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고변하고, 5월 6일에 서양갑이 영창을 추대하려 했다고 공초함으로써 일어난 옥사이다. 光海君日記

40)연흥(延興):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으로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의 봉호이다.

41)밀직(密直)을……올랐으나:밀직은 승정원을 말한다. 권진은 1613년(광해군5)에 승지에 제수되어 1615년까지 형방승지로 있으면서 여러 옥사를 담당하였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7년 6월 5일에 “승지 권진은 오랫동안 추국청에 출사하였으니, 가자하라.”는 전교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42)근무한……것:순자격(循資格)이라는 제도로 당나라 현종(玄宗) 때 배광정(裴光庭)이 만든 법이다. 능력과 관계없이 근무한 연한에 따라 승진시키는 제도로 일종의 연공서열법이라고 할 수 있다. 新唐書 卷108 裴行儉列傳

43)양지원(梁之垣):1622년(광해군14) 4월 18일에 노추(奴酋)를 토벌하는 임무를 띠고 남로 감군(南路監軍)이 되어 우리나라로 왔는데, 40여 일간 서울에 머물렀다. 光海君日記

44)계축년의 옥사:1613년(광해군5)에 일어난 영창대군 옥사를 말한다. 48쪽 주 39) 참조.

45)모의:양산에 귀양 가 있는 권진(權縉)을 암살하는 모의이다. 국역 국조보감 제34권 인조조>에는 통제사(統制使) 구인후(具仁垕)와 우병사(右兵使) 신경유(申景裕)가 권진이 이괄(李适)과 호응할까 염려하여 당시 경상도 관찰사인 민성휘(閔聖徽)에게 죽이도록 하였다고 되어 있다.

46)자사(子奢)는……키워주어:자사는 미남의 이름이고 조보(刁父)는 추녀의 이름이다. 순자(荀子) 권18 부(賦)>에 “여추와 자사는 중매하는 사람이 없고, 모모와 역보를 좋아한다.[閭娵子奢 莫之媒也 嫫母力父 是之喜也]” 하였는데, 군자는 싫어하고 소인을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주에 여추는 옛날의 미녀이고 자사는 정(鄭)나라의 미남 자도(子都)라고 하였으며, 모모는 추녀로 황제(黃帝) 때 사람이고 역보는 속본(俗本)에 조보(刁父)로 되어 있는데 미상이라고 하였다.

47)소호(少昊) 금천씨(金天氏):중국 고대 오제(五帝)의 한 사람으로, 성은 기(己)이고 이름은 지(摯), 또는 현효(玄囂)이다.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의 아들이다.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의 덕을 닦았다 하여 소호라고 하고, 금덕(金德)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하여 금천씨라고 한다. 十八史略 卷1 五帝

48)금관(金官):김해(金海)의 고호(古號)이다. 수로왕(首露王)이 국호를 가락(駕洛), 또는 가야(伽倻)로 일컫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고,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가야를 합병한 뒤에 가야의 군주 구형(仇衡)에게 이곳을 식읍(食邑)으로 봉해 주고 이름을 금관군(金官郡)으로 하였다. 世宗實錄 地理誌 金海都護府

49)중국의……것:은상(殷商)은 탕(湯) 임금이 하(夏)를 정벌하고 세운 상(商)을 일컫는 말이다. 처음에 국호를 상이라고 하였다가 후에 반경(盤庚)이 하수(河水)의 범람을 피해 은(殷)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은이라고 한 뒤 이렇게도 일컬었던 것이다. 양위(梁魏)는 전국 시대 삼진(三晉)의 하나인 위(魏)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이 역시 혜왕(惠王)이 대량(大梁)으로 도읍한 뒤로 양(梁)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합쳐서 이렇게 일컬은 것이다.

50)지(誌):허국(許國)의 국지(國誌)를 말한다. 기언 권33 동사(東事) 가락(駕洛)>에 “허황의 국지에 그 선군의 명을 기록하기를”이라고 되어 있다.

51)후 5년:고려 충혜왕이 복위했을 때의 왕년을 말하는 것으로, 서기 1344년이다.

52)16년:중국 원나라 순제(順帝)의 연호인 지정(至正) 16년을 말하는 것으로, 서기 1356년이며 공민왕 5년에 해당한다. 국역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1 병신 5년 조에 “가을 7월에 옛 관제를 회복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53)25년:간지가 을사년이고 향년이 67세인 것에 의거하여 원문 ‘十四年’의 ‘十四’를 ‘二十五’로 바로잡았다.

54)지정 황후(至正皇后):원나라 순제(順帝)의 비인 기 황후(奇皇后)를 말한다. 지정은 순제의 연호이다. 기 황후는 고려 기자오(奇子敖)의 딸이고, 기철(奇轍)의 동생이다. 충숙왕 복위 2년(1333)에 몽고에 들어가 고려인 내시의 힘으로 원나라 황실의 궁녀가 되었고, 그 후 자신이 낳은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어 황통(皇統)을 이으면서 황후로 책봉되었다.

55)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1478~1543)의 호이다. 자는 국경(國卿)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허자(許磁)의 아들 강(橿)이 김안국의 외손녀와 혼인한 사실이 기언 별집 권26 모재 김 선생 행장>에 실려 있다.

56)공 태사(龔太史):1537년(중종32)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공용경(龔用卿)을 말한다.

57)동궁:장경왕후 소생으로, 후의 인종(仁宗)을 말한다.

58)병정록(丙丁錄):임보신(任輔臣)이 지은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으로 일부가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수록되어 있다. 임보신이 죽기 2년 전인 1556년(명종11)이 병진년이고 이듬해가 정사년으로 그때 쓴 사화집(史話集)이다.

59)처음에……추천하였다:구수담(具壽聃)은 진복창(陳复昌)과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진복창이 곧잘 강직한 말을 하는 것에 심복하여 옥당(玉堂)에 들어간 뒤에 진복창을 추천하여 지평이 되게 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明宗實錄 5年 5月 15日

60)잘못……죄수:명종이 즉위하여 윤임(尹任) 일당을 제거한 을사년의 옥사 때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송인수(宋麟壽), 이림(李霖), 임형수(林亨秀), 나숙(羅淑), 정원(鄭源), 이약빙(李若氷), 이약해(李若海), 이중열(李中悅), 김저(金䃴), 성자택(成子澤), 나식(羅湜) 11명과 귀양 가 있는 이언적(李彦迪), 권응정(權應挺), 한숙(韓淑), 권응창(權應昌) 등 30여 명을 말한다. 明宗實錄 5年 5月 15日

61)민제영을……꾸며서:민제영(閔齊英)은 공주에 귀양 가 있는 민제인(閔齊仁)의 동생이고, 당진은 공주와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곧 죄인의 자제를 거두어 서용하여 죄인이 있는 곳과 가까운 고을의 원을 삼았다는 것으로 죄안을 삼은 것이다. 明宗實錄 5年 5月 15日

62)동각잡기(東閣雜記):선조 때의 학자 이정형(李廷馨:1549~1607)의 저작으로 대동야승에 수록되어 있다. 동각은 이정형의 호이다.

63)대행왕(大行王):인종(仁宗)을 말한다.

64)대군:명종(明宗)을 말한다.

65)대계(大計):보위를 계승하는 일을 말한다.

66)동애(東崖) 남중(南仲):동애는 허자의 호이고, 남중은 자이다.

67)회의군(懷義君)에게……증손:회의군은 종실 이철남(李哲男)의 봉호로,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인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의 증손이고 성종 을사년의 옥사 때 희생된 계림군 이류(李瑠)의 손자이다. 미수가 계림군의 증손이라고 한 것은 오류인 듯하다.

68)진원군(珍原君):성종의 15자(子) 양원군(楊原君) 이희(李憘)의 증손으로 이름은 세완(世完)이다. 기언 별집 권13에 공자 진원군 애사(公子珍原君哀詞)>가 있다.

69)사재(四宰):의정부 우참찬의 별칭이다.

70)휴암(休庵)과……내용:휴암은 백인걸(白仁傑:1497~1579)의 호이고, 면앙은 송순(宋純:1493~1583)의 호이다. 한국문집총간 43집에 수록된 우계집(牛溪集) 권6 의정부 우참찬 백공 행장(議政府右參贊白公行狀)>에 “주모자가 허자(許磁)를 시켜 먼저 공에게 뜻을 알리게 하니, 허자는 공의 오랜 벗이다. 허자가 백방으로 끌어들이려고 설득하였으나 공은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라고 하고, 한국문집총간 26집에 수록된 면앙집(俛仰集) 권4 면앙집부록유사(俛仰集附錄遺事) 행적(行蹟)>에 “허자는 부군의 옛 벗인데, 역시 공신으로 몰라보게 부귀해졌다. 부군이 농으로 말하기를, ‘공의 집안에 미녀가 어찌 그리 많소? 모두 전날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구려.’ 하니, 허자가 얼굴을 붉히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71)공정대왕(恭定大王)의 증손:공정은 태종(太宗)의 시호이다. 67쪽 찬성공 부인 묘갈음기>에는 양녕대군의 증손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의 증손은 오류인 듯하다.

72)도산(陶山)……있다:도산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31집에 수록된 퇴계집(退溪集) 외집(外集) 권1동애(東厓) 허 상공에게 아들이 있는데, 평소 그의 지행(志行)이 고결하다고 들어왔던 터에 지금 그가 지은 절구를 정독해 보고는 또 그의 문아(文雅)함이 이와 같음을 알았다. 감탄한 나머지 그 운을 써서 뜻을 나타낸다.>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73)조모……묘갈음기:진주 강씨는 전함사 별제 허강(許橿)의 처로, 개찬한 것은 권43에 조비(祖妣) 정경부인 강씨 묘갈음기로 수록되어 있다.

74)설부(說部):양천(陽川) 허균(許筠:1569~1618)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편명이다. 인용한 내용은 권23에 실려 있다.

75)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 부군 묘갈:전함사 별제 부군은 미수의 조부 강(橿)이다. 개찬한 것은 권43 첫머리에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행 전함사 별제 선교랑(宣敎郞) 부군 비(碑)로 수록되어 있다.

76)수호자(垂胡子):선조(宣祖) 때 사람 임기(林芑)의 호이다. 문장에 능하고 시문(詩文)이 호방(豪放)하며,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주를 달았다고 한다. 五洲衍文長箋散稿 經史篇 經史雜類 剪燈新話辨證說

77)왕방산인(王方山人):기언 별집 권24에 실린 증 좌찬성 조공 묘갈명에는 ‘왕방장인(王方丈人) 홍춘수(洪春壽)’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선조(宣祖) 때에 문장으로 이름났던 인물인 듯하다.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홍춘수를 문장이 뛰어나고 사명(辭命)에 유능하다고 천거한 바 있었다. 藥圃集 藥圃先生年譜, 韓國文集叢刊 39輯

78)박지화(朴枝華):1513~1592.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암(守庵),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서얼 출신으로 교관(敎官)을 지냈고, 예서(禮書)에 정통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자결하였다. 국역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 서원

79)무오년에 옥사:무오년은 1618년(광해군10)으로 허균(許筠)의 옥사를 말한다. 허균은 허엽(許曄)의 아들로, 대북파(大北派)에 가담하였다가 반역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光海君日記

80)초당(草堂):허엽(許曄:1517~1580)의 호이다.

81)이 문충공(李文忠公):문충은 이원익(李元翼:1547〜1634)의 시호이다. 이원익은 미수의 처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조부가 되니, 허교(許喬)와는 사돈 관계이다.

82)동애공(東崖公):허교의 조부가 되는 허자(許磁)의 호이다.

83)계운궁(啓運宮):인조의 생모로 성은 구씨(具氏)이다.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었는데, 인조의 반정으로 군부인에서 부부인(府夫人)으로 진봉(進封)되었다. 계운궁은 이때 받은 궁호(宮號)이다. 인조 10년에 생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이 원종(元宗)으로 추숭되면서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숭되었다.

84)혜릉(惠陵):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초기 능호이다. 나중에 목릉(穆陵)으로 고쳤다. 인목왕후는 1632년(인조10) 6월 28일에 훙서하여 10월 6일에 목릉에 안장하였다. 국역 연려실기술 4집 제12권 선조조 고사본말 선조

85)이 숙인(李淑人)의 장명(葬銘):이 숙인은 미수의 종형인 허후(許厚)의 전처로, 딸 하나를 낳고 23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개찬한 것은 권44에 관설(觀雪) 선생 전 부인 이씨 묘지(墓誌)로 수록되어 있다.

86)숙인 이씨:미수의 처인 전주 이씨로, 이원익의 손녀이다. 57세의 나이로 운명하였고, 그 후 23년이 지나 미수가 우의정이 되면서 정경부인이 되었다. 권43에 정경부인 전주 이씨 묘명(墓銘)이 있다.

87)이 문정공(李文靖公):문정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호이다. 기언 권9에 목은화상기(牧隱畫像記)>가 있다.

88)관설옹(觀雪翁):이름은 후(厚)이고, 자는 중경(重卿)으로, 관설은 호이다. 미수의 중부(仲父) 허량(許亮)의 아들로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지냈다.

89)영월(寧越):영월 군수를 지낸 미수의 막내아우인 허서(許舒)를 말한다.

90)세고(世故):1636년(인조14)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말한다.

91)호안(湖安):중종의 4세손으로 이름은 욱(澳)이고 자는 백첨(伯瞻)이다. 기언 별집 권21에 묘갈명이 있다.

92)능봉(綾峯):중종의 4세손으로 이름은 칭(偁)이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가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요구할 때 능봉수(綾峯守)에서 군으로 승격되어 심집(沈諿)과 함께 청나라 진영으로 갔던 사람이다. 仁祖實錄 14年 12月 15日, 16日

93)실직(悉直)을 맡게 되었고:실직은 강원도 삼척(三陟)의 이칭이다. 1660년(현종1)에 올린 예론(禮論) 때문에 좌천되어 삼척 부사로 나간 것을 말한다. 顯宗實錄 1年 9月 24日

94)서문(西門)에서 전해 온 부고:미수가 쓴 둘째 아우 의(懿)의 제문에 “내가 전에 언사(言事)로 좌천되었을 때, 지방으로 나온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막내아우가 죽었고, 겨우 1개월 만에 또 종형 관설옹(觀雪翁)이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종형인 허후(許厚)의 부고를 말하는 듯한데, 서문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95)모정시(毛鄭詩):삼경(三經)의 하나인 시경을 말한다. 기언 권31 경설(經說) 시설(詩說)에 “모장(毛萇)은 시경에 주(注)를 냈고, 정현(鄭玄)은 시경에 전(箋)을 냈으니, 이것을 모정시라고 한다.” 하였다.

96)의춘(宜春):경상도 의령(宜寧)의 이칭이다. 미수 연보에 의하면 44세 때 의령에 있었는데, 난을 피해 남쪽 지방에서 10여 년 동안 타향살이한 것으로 되어 있다. 記言 年譜 卷1, 韓國文集叢刊 99輯

97)을사년의 일:1545년(명종 즉위년)에 대윤(大尹)인 윤임(尹任) 일당을 제거한 옥사를 말한다.

98)도산(陶山)……말하였다:69쪽 주 26) 참조.

99)영(令) 부군 묘:허강(許橿)의 조부인 의영고 영 허원(許瑗)의 묘를 말한다.

100)익양군(益陽君):성종의 여덟째 아들인 이회(李懷)의 봉호이다.

101)대옥(大獄):1618년(광해군10)에 일어난 허균(許筠)의 옥사를 말한다. 75쪽 주 6) 참조.

102)이 문충공(李文忠公):이원익(李元翼)이다. 76쪽 주 8) 참조.

103)계운궁(啓運宮):인조의 생모이다. 상세한 내용은 76쪽 주 10) 참조.

104)12년:천계(天啓) 12년이다. 천계는 명나라 희종(熹宗)의 연호로 재위 기간이 7년밖에 되지 않지만, 천계 연호를 연장해서 쓰는 예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듯하다.

105)혜릉(惠陵):인목왕후(仁穆王后)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76쪽 주 11) 참조.

106)현인(顯仁) 원년:현인은 효종(孝宗)의 시호로, 원년은 서기 1650년이다.

107)5세:권42 합천 군수(陜川郡守) 묘갈음기(墓碣陰記)에 “태위가 공부 상서(工部尙書) 순(純)을 낳고, 상서가 직사관(直史館) 이섭(利涉)을 낳고, 직사관이 예빈 소경(禮賓少卿) 경(京)을 낳고, 소경이 예부 상서 수(遂)를 낳고, 상서가 첨의중찬(僉議中贊) 공(珙)을 낳았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원문의 ‘三’을 ‘五’로 바로잡았다.

108)66세:뒤이어 나오는 유인 권씨 묘명유인 권씨 묘표에 의거하여 원문 ‘六十七’의 ‘七’을 ‘六’으로 바로잡았다.

109)중흥한 시대:1623년에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가 즉위한 일을 말한다.

110)강 대민공(姜戴敏公):대민은 강석덕(姜碩德:1395~1459)의 시호이다. 자는 자명(子明)이고, 호는 완역재(玩易齋)로 허량(許亮)의 외조가 된다.

111)횡성(橫城)의 옥사에 연루되었는데:횡성의 옥사는 1627년(인조5) 10월에 일어난 이인거(李仁居)의 옥사를 말한다. 이인거는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고 자칭하고 노적(奴賊)과 화친을 주장하는 간신을 죽인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향하다가 유학(幼學) 진극일(陳克一)의 고변으로 체포된 사람이다. 仁祖實錄 5年 10月 1日  이인거가 강원도 횡성에 은거할 때 허후(許厚)와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이로 인해 허후가 이 옥사에 연루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권46 설공(雪公) 편년기사(編年記事) 상>에 보인다.

112)처음 장례한 때:유인 권씨(權氏)를 두미협(斗尾峽)에 장례한 때를 말하는 것으로 정묘년(1627, 인조5)을 말한다.

113)이소(履素):이중호(李仲虎:1512~1554)의 호로, 자는 풍후(風后)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의 현손이다. 기묘사화 이후 은거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국역 연려실기술 2집 제9권 인종조 고사본말 인종조의 명신

114)덕신 공자(德信公子):덕신정(德信正) 이난수(李鸞壽)를 말한다. 세조의 현손이다.

115)이영언(李英彦):영언은 이정호(李挺豪:1578~1639)의 자이다. 호는 만각(晚覺), 또는 사심(師心)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세손이다. 기언 별집 권21 만각 이 선생(李先生) 묘명(墓銘)>에 상세한 내용이 나온다.

116)조 숙인(趙淑人):허후(許厚)의 후처로, 기언 별집 권26 관설 선생 행장(觀雪先生行狀)>에 의하면, 허후가 내시학 교관이 되고 2년 뒤에 운명하였다고 한다.

117)삼백……예의(禮儀):중용(中庸)에서 자사가 한 말인데, 주자는 주에서 “위의는 경례(經禮)이고, 예의는 곡례(曲禮)이다.” 하였다. 경례는 관혼상제(冠婚喪祭) 같은 예의 큰 절목이고, 곡례는 경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승강(昇降)이나 진퇴(進退) 같은 작은 절목이다.

118)상당(上黨):충청도 청주(淸州)의 이칭이다.

119)북원(北原):강원도 원주(原州)의 이칭이다.

120)이인거(李仁居)의 사건:1627년(인조5) 10월에 횡성(橫城)에서 일어난 역모를 말한다. 상세한 내용은 110쪽 주 5) 참조.

121)이씨:허후(許厚)의 전처가 이씨(李氏)인데, 그 친정 집안을 말한다. 119쪽 관설 선생 전 부인 이씨 묘지에 의하면 후처인 조씨(趙氏) 소생 시(翨)가 이씨의 친정 오라버니를 외숙을 섬기는 도리로 섬겼다고 하였다. 시는 황()의 아우이다.

122)문소(聞韶):경상도 의성(義城)의 이칭이다. 허후는 정축년(1637, 인조15)에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제수되었으나, 4년 만에 파직되었다.

123)인조가……해:인조반정이 일어난 해로 1623년이다.

124)흑한(黑漢)이……해:흑한은 청나라이다. 이자성(李自成)의 연경 함락으로 명나라가 망하고 곧이어 청나라 세조(世祖)가 이자성을 공격하여 연경을 차지한 해가 1644년이다. 이로부터 4년 뒤는 1648년을 말한다.

125)인조를……해:인조가 승하한 해는 1649년이고, 그해 9월 20일에 장례를 치렀으니, 1649년을 말한다.

126)16년: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인 영락(永樂) 16년으로, 서기 1418년, 태종 18년이다.

127)태백(泰伯)과 우중(虞仲):중국 고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다. 후에 문왕(文王)이 된 창(昌)은 태왕의 셋째 아들인 계력(季歷)의 아들인데, 태왕의 뜻이 계력에게 전위하여 문왕에게 미치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태백과 우중이 피하여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문신단발(文身斷髮)하고 살았다. 史記 卷4 周本紀

128)순성군(順成君):원문은 ‘順原君’인데, 세종실록 9년 1월 3일 기사에 의거하여 ‘原’을 ‘成’으로 바로잡았다.

129)금상……임신일:방사백(旁死魄)은 서경(書經) 무성(武成)>에 의거하여 초이틀을 말하고, 재생백(哉生魄)은 서경 강고(康誥)>에 의거하여 보름 다음 날인 16일을 뜻한다. 여기의 임신일은 17일이니, 방사백이라 한 것은 재생백의 오류인 듯하다.

130)외후손(外後孫):미수의 증조모인 찬성공 부인이 양녕대군의 증손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권41 찬성공 부인 묘갈음기> 참조.

131)당시에……반대하였다:한국문집총간 12집 사숙재집(私淑齋集) 권7에 실려 있는 강회백(姜淮伯)의 행장에 “이때 연복사의 공역을 대대적으로 일으키고, 또 도참을 써서 장차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였다. 공은 상소하여 논박하고 겸하여 시사(時事)를 진달하니, 왕이 가납(嘉納)하였다.”라고 한 것을 참고로 보충 번역하였다.

132)6년……죽고:익양(益陽)은 정몽주(鄭夢周)의 봉호이다. 사숙재집7에 실려 있는 강회백의 행장에, 정몽주 등과 함께 오랑캐 복장을 혁파하고 중국 제도를 따를 것을 건의한 때는 우왕(禑王) 13년인 1387년이라고 되어 있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당한 때는 공양왕 4년인 1392년이니, 여기에서 6년은 건의한 때로부터 6년 만이라는 말이다.

133)소헌대비(昭憲大妃):세종의 비 심씨(沈氏)로, 소의공(昭懿公) 심천보(沈天保)의 딸이다. 1446년(세종28)에 승하하였고, 능호는 영릉(英陵)이다.

134)이 문절공(李文節公):문절은 이행(李行:1352~1432)의 시호이다. 자는 주도(周道)이고, 호는 기우(騎牛)이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은 기우 선생이 완역재에게 준 시에 대한 서문[騎牛先生贈玩易齋詩序]>에서 “완역재 강 대민의 학문이 문절에서 나왔다.” 하였다. 四佳文集 卷6 序

135)2년:간지가 계미년이고 향년이 65세인 것에 의거하여 원문의 ‘三’을 ‘二’로 바로잡았다.

136)대곡(大谷):성운(成運:1497~1579)의 호이다. 자는 건숙(健叔)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명종조의 유일(遺逸)로 보은(報恩)의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국역 연려실기술 3집 제11권 명종조 고사본말 명종조의 유일

137)추강(秋江)……저술:추강은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호이다. 사우전(師友傳)>은 한국문집총간 16집에 수록된 추강집(秋江集) 권7 잡저(雜著)>에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138)상국(相國):오리 이원익을 말한다. 함천군의 차남이다.

139)창수(倉守)를 그만두었으니:창수는 광흥창 수(廣興倉守)를 말한다. 기언 별집 권17 이 전첨 묘지(李典籤墓誌)>에 의하면, 이수약(李守約)은 1653년(효종4)에 광흥창 수로 옮겼다가 곧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맡았는데, 1661년(현종2)에 다시 광흥창 수로 옮겨 1년 만에 늙었다는 이유로 체직하였다고 하며, 그때 나이가 73세였고, 이로부터 6년 뒤인 79세에 졸하였다고 한다.

140)처형을……박윤장(朴允章):박윤장은 박홍구(朴弘耈)의 서질(庶姪)로, 1624년(인조2)에 박홍구가 광해군을 다시 추대하기 위해 일으킨 역모에 가담하였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것을 말한다. 仁祖實錄 2年 11月 8日

141)원문에는 없으나 전후의 체재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142)이소(履素):이중호(李仲虎)의 호이다. 113쪽 주 7) 참조.

143)이정호 영언(李挺豪英彦):115쪽 주 9) 참조.

144)덕신 공자(德信公子):덕신정(德信正) 이난수(李鸞壽)를 말한다. 세조의 현손이다.

145)경전요해(經傳要解):원문은 ‘經傳解’인데, 기언 권44 관설 선생 묘지명기언 별집(別集) 권26 관설 선생 행장을 참고하여 ‘要’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146)삼백……예의(禮儀):원문은 ‘禮儀三百 威儀三千’인데, 중용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118쪽 주 11) 참조.

147)11년:권44 관설 선생 묘지명>에 의거하여 원문 ‘十二年’의 ‘二’를 ‘一’로 바로잡았다.

148)보황(黼荒)을 다시 베풀었습니다:이장하였다는 말이다. 보황은 상여를 덮는 천으로, 보는 도끼무늬이고 황은 덮어씌운다는 뜻이다. 천의 가장자리에 흑색과 백색으로 도끼 모양의 무늬를 넣었기 때문에 보황이라고 한다. 禮記 喪大記

149)지평……해:신미년(1631, 인조9)으로 허후의 나이가 44세 되는 해이다.

150)고려가……있었다:기언 권67 자명비 음기(自銘碑陰記)>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때 허선문(許宣文)이 군량을 조달한 공로가 많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

151)11년:150쪽 주 7) 참조.

152)전중(傳重):승중(承重)과 같은 말이다. 적자가 질병이 있거나 사망했을 경우에 적손이 바로 조부를 계승하는 것으로, 조부 쪽에서 말하면 전중이고, 손자 쪽에서 말하면 승중이다.

153)제주(題主):사람이 죽은 뒤에 목패 위에 생전의 관직을 쓰고 묵필(墨筆)로 ‘아무개의 신왕(神王)’이라고 써두었다가 출빈(出殯)하기 전에 명망 있는 사람을 청하여 주필(朱筆)로 ‘王’ 자 위에 점을 찍어 ‘主’ 자를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점주(點主)라고도 한다.

154)속칭(屬稱):신주에 쓰는 친속 관계의 호칭으로, 속(屬)은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祖), 고(考) 등과 같은 친속 관계의 호칭이고, 칭(稱)은 관직이나 호(號) 등이다.

155)방제(傍題):신주의 아래 왼쪽에 제사를 받드는 사람의 세대와 이름을 쓰는 것을 말한다.

156)이장 경보(李丈敬甫):기언 별집 권7 감사 권수(權脩)에게 보내는 편지>에 “종형의 유문(遺文)을 편차해서 보낸다. 이 교관(李敎官)이 논한 것과는 같지 않다. 부표(付標)한 두 권은 이 교관이 정한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고, 또 “이 일은 전적으로 경보가 주관한 것이라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싶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보는 벼슬이 교관으로 설공유편을 간행하는 일을 담당한 사람인 듯하다. 이름이나 관계는 미상이다.

157)안렴사(按廉使) 권영숙(權永叔):영숙은 권수(權脩)의 자이다. 숙종실록 3년 12월 1일에 “권수는 광해군 때의 권신(權臣) 권진(權縉)의 아들로서, 이에 연좌되어 명예와 지위가 드러나지 않았다. 허목(許穆)이 그 재주를 천거하여 하읍(下邑)에서 등용되었고 관직이 뛰어올라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하였다.

158)용주공(龍洲公):조경(趙絅:1586~1669)의 호로, 자는 일장(日章),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159)상장군탄(上章涒灘):고대의 간지로, 상장은 십간(十干)의 경(庚)에 해당되고 군탄은 십이지(十二支)의 신(申)에 해당된다. 따라서 미수가 86세 되던 해인 경신년(1680, 숙종6)을 뜻한다. 원문의 ‘尙章’은 십간의 계(癸)에 해당되는 것으로 간지에 맞지 않으므로 바로잡았다.

160)전횡(田橫)의 섬: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천자가 되자, 제왕(齊王) 전횡은 주살될까 두려워 그 무리 500명을 거느리고 해도(海島)로 들어갔다. 고황제(高皇帝)가 사신을 보내 부르니 전횡이 할 수 없이 그 객(客) 두 사람과 함께 낙양(雒陽) 근처 30리 지점에까지 와서 신하의 신분으로 한왕을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여 자결하고 그 객에게 자기 머리를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황제가 듣고 눈물 흘리며 왕자(王者)의 예로 장례하게 하였는데, 장례를 마치고 나자 두 객도 전횡의 무덤 곁을 파고 들어가 자결하였다. 고황제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사신을 보내 섬에 남은 그 무리를 불러오게 하였는데, 사신이 섬에 도착해 보니, 이 소식을 들은 섬에 남은 무리 500명도 모두 자결하였다. 史記 卷94 田儋列傳

161)15국풍(國風):시경(詩經) 국풍에 실린 정풍(正風)과 변풍(變風)을 가리키는데, 정풍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이고, 변풍은 패풍(邶風), 용풍(鄘風), 위풍(衛風), 왕풍(王風), 정풍(鄭風), 제풍(齊風), 위풍(魏風), 당풍(唐風), 진풍(秦風), 진풍(陳風), 회풍(檜風), 조풍(曹風), 빈풍(豳風)이다.

162)옛날……하였다:공자가어(孔子家語) 권5 자로초견(子路初見)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가어 원문에는 ‘불신즉불복(不信則不服)’의 복(服) 자가 실천한다는 뜻의 복(復) 자로 되어 있고, ‘불공즉무례(不恭則無禮)’의 무(無) 자가 자기가 예를 잃게 된다는 의미의 실(失) 자로 되어 있다.

163)기자견(箕子畎):은(殷)나라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을 하고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한 흔적을 말한다. 한백겸(韓百謙)의 기전도설(箕田圖說)에 의하면, “기자가 남긴 정전제도가 맹자(孟子)가 논한 ‘정(井)’ 자의 제도와 같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중에 함구(含毬)와 정양(正陽) 두 문 사이의 구획이 가장 분명한데, 그 제도가 모두 ‘전(田)’ 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전이 네 구획으로 되어 있는데 구마다 모두 70묘(畝)이다. 큰길 안에서 횡(橫)으로 보면 전(田) 넷에 8구획이 있고, 종[竪]으로 보아도 또한 전 넷에 8구획이 있어 64구획이 아주 네모반듯하여 그 법상(法象)이 꼭 소 강절(邵康節)의 선천방도(先天方圖)와 같다.” 하였다. 국역 연려실기술 별집 권11 정교전고 전제

164)환도(環涂):왕성을 빙 두른 길을 가리킨다. 환도는 7궤(軌)인데, 이것은 오늘날의 7차선과 같은 의미이다. 周禮 冬官考工記

165)방삼문(方三門):주례 동관고공기 장인영국(匠人營國)에 “장인이 국도(國都)를 경영하는데, 사방 9리이고, 사방에 3문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매 방위에 각각 세 개의 문이 있으므로 네 방위를 모두 합치면 12개의 문이 된다는 것이다.

166)9경(經)……9궤(軌)이다:왕성 안에 남북으로 난 길을 경(經)이라 하고, 동서로 난 길을 위(緯)라고 하는데, 각각 너비가 9궤이다. 궤란 수레의 폭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궤가 8척(尺)씩이므로 도로의 너비가 72척이 된다. 周禮 冬官考工記

167)천자의 5문(門):주례 천관총재(天官冢宰) 혼인(閽人)에, 왕궁의 중문(中門)을 맡아 지킨다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서 인용한 정사농(鄭司農)의 말에 의하면 “왕은 5문인데, 바깥쪽부터 고문(皐門), 치문(雉門), 고문(庫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이다.” 하였다.

168)관부와 차사(次舍):주례 천관총재에 “궁정(宮正)이 왕궁의 계령(戒令)과 규금(糾禁)을 관장하고, 때로 궁중의 관부와 차사의 중과(衆寡)를 비교한다.” 하였는데, 정현의 주에 “관부란 궁중에 있는 관부로서 선부(膳夫), 옥부(玉府), 내재(內宰), 내사(內史) 따위이다. 차(次)는 여러 관리가 직숙(直宿)하는 곳이다. 사(舍)는 거처하고 있는 시(寺)이다.” 하였다.

169)성우(城隅) 9치(雉):주례 동관고공기 장인건국(匠人建國)에 나오는 말인데,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의하면, 치(雉)는 높이 1장(丈) 길이 3장의 규격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높이가 9장이라는 말이다. 우(隅)는 부사(浮思)이니, 작은 누대[樓]이다.

170)명당(明堂):정현은 제왕이 정교(政敎)를 밝히는 당이라고 정의하였다. 은대(殷代)에는 중옥(重屋)이라고 하고, 주대(周代)에 명당이라고 하였다. 경복궁으로 말하면 근정전(勤政殿)과 같은 성격이다.

171)벽옹(辟廱):천자의 태학(太學)이다. 시경 영대(靈臺)의 주자(朱子) 주에 “벽(辟)은 벽(璧)과 통하고, 옹(廱)은 못[澤]이다.” 하였다. 학궁을 빙 둘러 못을 파고 네 곳에 다리를 놓아 못을 건너서 들어가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모양이 벽(璧)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172)지금은……어지럽다:1662년에 명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한 말이므로 이 글은 1662년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173)우공(禹貢)에……떨쳐:서경(書經) 우공에,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씩으로 구분하여 명칭을 달리하여 구분하였는데, 왕성이 포함된 맨 안쪽이 전복(甸服)이고, 그 다음이 후복(侯服)이고, 그 다음이 유복(綏服)이고, 그 다음이 요복(要服)이고, 맨 끝이 황복(荒服)이다. 여기에서 말한 유복은 왕성에서부터 1000리와 1500리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이 500리 중에서 안쪽 300리는 문교(文敎)로 다스리고, 바깥쪽 200리는 무력을 떨쳐서 그 안쪽을 호위한다는 뜻이다. 이른바 해내(海內)의 천하라고 하면 황복까지를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유복까지가 중국이고, 그 너머 요복부터는 만이(蠻夷) 지역에 해당한다.

174)7세(世):원문에는 ‘六世’로 되어 있는데 명사(明史)에 의거하여 ‘六’을 ‘七’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75)한(漢)나라……약조하였다:한초(漢初)에 흉노가 한왕 신(韓王信)을 공격하여 항복받고 진양(晉陽)에까지 내려오자 고제가 몸소 군병을 이끌고 나가서 싸우다가 흉노의 선우(單于) 묵특(冒頓)의 계책에 빠져 백등(白登)에서 포위되었는데, 선우의 왕비인 연지(閼氏)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포위에서 풀려난 뒤에 유경(劉敬)을 시켜 흉노와 화친을 맹약하였다. 漢書 卷94 匈奴傳

176)오호(五胡):중국 북방의 강력한 5대 이민족으로 흉노족(匈奴族), 선비족(鮮卑族), 갈족(羯族), 저족(氐族), 강족(羌族)을 말한다.

177)완안씨(完顔氏):금나라의 성씨가 완안씨이니, 태조는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이고, 태종(太宗)은 완안성(完顔晟)이다.

178)기악온씨(奇渥溫氏)가……지배하였다:기악온씨는 몽고족의 성씨이니, 원사(元史)1 태조본기(太祖本紀)에 “태조 법천계운성무황제(太祖法天啓運聖武皇帝)는 휘(諱)가 철목진(鐵木眞)이고, 성은 기악온씨이며, 몽고부인(蒙古部人)이다.” 하였다. 몽고족인 원나라가 1206년에 건국하여 1367년에 멸망했으므로 실제로는 161년간 중국을 지배한 것이다.

179)3세(世):청나라 세조(世祖) 대에 이른 것을 말한다.

180)향례(享禮)……예:제후가 천자에게 근현(覲見)을 마치고 나서 천자에게 세 차례 연향을 베풀 때 비단에 벽(璧)을 올려서 바치고 뜰에 본국에서 가지고 온 특산물을 늘어놓는 예를 말한다. 그러나 이때는 명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므로 그런 예를 행할 수 없음을 개탄한 말이다. 儀禮 覲禮

181)석노(石砮)와 호시(楛矢):석노는 돌로 만든 화살촉이고, 호시는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인데 숙신씨(肅愼氏)가 중국에 바치던 공물(貢物)이다. 國語 魯語下

182)소도(蘇塗):마한(馬韓)을 중심으로 한 삼한(三韓) 시대에 천신(天神)에게 제사 지내던 특정한 지역을 가리킨다. 수도와 각 읍에서 각각 한 사람씩을 제주(祭主)로 뽑아 천군(天君)이라고 하고, 이 천군이 소도에 거주하면서 제사를 주관한다. 이곳에는 큰 나무를 세워 영고(鈴鼓)를 달고, 죄인이 달아나 그곳으로 들어가면 잡아가지 못하며, 이 나무를 솟대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그 유래가 남아 있다. 三國志 卷30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183)뒤에……한다:당장(唐臧)은 당장경(唐臧京)의 준말이다. 유주(儒州)는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권상로(權相老)가 편찬한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 등에는 모두 당장경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조(古朝鮮條)에는 “주 무왕(周武王)이 즉위하여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이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기고 뒤에 다시 아사달(阿斯達)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184)육국(六國):중국 전국 시대 7웅(雄) 중에서 진(秦)을 제외한 함곡관(函谷關) 이동의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조(趙), 위(魏) 여섯 나라를 일컫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전국 시대를 가리킨다. 戰國策 趙策2

185)한서(韓書)에……하였고:한서(韓書)는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다. 한서(漢書)에는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말은 있지만 변한과 낙랑이 기자를 봉한 곳이라는 말은 없다.

186)우발수(優渤水):‘優浡水’로도 표기하는데, 여기에서는 원문대로 적었다.

187) 울나(尉那):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 지역이다.

188)궁이 즉위하여 66년 동안:66년이라는 숫자는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태조대왕(太祖大王)에는, 태조왕이 7세에 즉위하여 즉위한 지 94년 되는 해 12월에 수성(遂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別宮)으로 물러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태조왕의 재임 기간은 94년이다.

189)해(奚):열하(熱河)에 살던 종족 이름이다. 신당서(新唐書) 권219 북적열전(北狄列傳)에 “해(奚) 또한 동호(東胡)의 한 종족으로, 흉노에게 격파되었다.”라고 하였다.

190)유리(留利):이 글에서 원문이 대부분 ‘類利’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만 달리 표기되어 원문대로 적었다.

191)4세:원문에 ‘三世’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92)구이(九夷):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구이(九夷)에 가서 사시려고 하였다.”라고 한 부분의 주자(朱子) 주(註)에 “동방의 이(夷)는 9종(種)이 있다.” 하였고, 후한서(後漢書) 권58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이(夷)는 9종이 있는데,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이다.” 하였다. 이 중에서 탐라는 어느 종족인지 알 수 없다.

193)흑치국(黑齒國):고대의 나라 이름인데, 고적(古籍)에 설이 분분하여 확정해서 말하기 어렵다. 산해경(山海經) 권9 대황동경(大荒東經)에 흑치국조가 있는데, 곽박(郭璞)의 주에 보면 “왜(倭)의 동쪽 40리 지점에 나국(裸國)이 있고 나국의 동남쪽에 흑치국이 있는데 배로 1년 걸리는 거리이다.” 하였다.

194)최부(崔溥):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7년(성종18)에 제주 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官)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같은 배에 탄 43명과 함께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표류하여 온갖 고초를 겪고 반년 만에 귀국하였다. 즉시 왕명으로 일기 형식의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여 중국 연안의 해로(海路), 기후, 산천, 도로, 관부, 풍속, 민요 등을 소개하였다. 특히 수차(水車)의 제작과 이용 방법을 배워와서 충청도 지방의 한발(旱魃) 때 이를 사용하게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후 1497년(연산군3)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단천(端川)에 유배되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당하였다가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成宗實錄 19年 8月 4日, 23年 1月 14日 中宗實錄 6年 3月 14日

195)당시에……않았고:1663년(현종4) 8월 5일에 미수가 전 부사로서 상소하여, 가의(賈誼)가 지은 신서(新書)보부편(保傅篇)을 인용하여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사부(師傅)를 위임하기를 건의하였는데, 현종이 그 소장을 예조에 내려 논의하게 하였다. 이때 예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자 책봉을 한 전례가 없다고 하면서 사부를 두어 보양(保養)하는 것만 찬성하였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원자가 탄생하여 종묘에 고하고 경과(慶科)를 실시한 것으로도 이미 국본(國本)이 정해진 것이므로 미수의 이 말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고, 미수가 인용한 성왕에게는 적자(赤子) 때부터 가르침을 행하였다는 말은 지론(至論)이나, 세자를 책봉하는 것은 조종조의 전례를 따라 늦추어 행하기를 주장하였는데, 영부사 이경석(李景奭), 좌의정 원두표(元斗杓), 우의정 정유성(鄭維城)도 정태화와 같은 의견을 냈다. 이에 상이 책봉례를 뒤에 천천히 하라고 명하였다.

196)반곡(返哭)하고……하되:원문은 ‘返哭 惟朝夕哭’인데, 의례(儀禮) 기석례(旣夕禮)의 본문에 의거하여 ‘惟’를 ‘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97)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송나라 주희(朱熹)가 의례를 중심으로 예기와 경사(經史)에 있는 예설(禮說), 선유(先儒)들의 학설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원집 37권과 속집 29권으로 되어 있다. 원집의 내용은 가례(家禮), 향례(鄕禮), 학례(學禮), 방국례(邦國禮) 등이고, 속집은 황간(黃幹)이 편찬한 상례(喪禮) 15권과 양복(楊復)이 편찬한 의례상복도식(儀禮喪服圖式) 2권과 제례(祭禮)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정체(正體):체(體)는 부자지간을 규정하는 말이고, 정(正)은 적자(嫡子)․적손(嫡孫)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정체는 적통으로서 직계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儀禮經傳通解續 卷1

199)전중(傳重):제주(祭主)를 물려주거나 물려받는 것이니, 곧 종자(宗子) 또는 종손(宗孫)이 되는 것이다. 儀禮經傳通解續 卷1

200)5속(屬)의 친속(親屬)인 자:참최(斬衰), 자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 다섯 가지의 복(服)에 해당되는 본종(本宗), 처족(妻族), 외족(外族)을 가리킨다. 漢書 卷73  韋賢傳 顔師古註

201)천자와 제후는 방기(旁期)를 끊지만:방기란 정통이 아닌 방계 친속의 기복(期服) 이하를 말한다. 이 말은 예경(禮經)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중용(中庸)에 “기년(期年)의 상(喪)은 대부(大夫)에게까지 이르고 삼년상은 천자에게까지 이른다.”라는 말을 근거로 주례(周禮) 춘관종백(春官宗伯) 사복(司服)의 “무릇 흉사(凶事)가 있으면 변복(弁服)을 입는다.”의 소(疏)에서 가공언(賈公彦)이 “천자와 제후는 방기는 끊지만 정통(正統)의 기복(期服)은 강복(降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202) 사복(司服):원문은 ‘司服職’인데, 주례의 편차에 근거하여 ‘職’을 연문으로 보아 삭제하였다.

203)전유(顓臾):산동성(山東省) 비현(費縣)의 서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204)의리로써 마쳤는데:순(舜)에게 선양(禪讓)하고, 28년 후에 세상을 떠난 일을 가리킨다. 禮記 祭法 孔穎達疏

205)상(喪):원문은 ‘喪服’인데, 주례 사복(司服)에 근거하여 ‘服’을 연문으로 보아 삭제하였다.

206)기공(寄公):의례 상복(喪服)에 “기공이란 무엇인가? 땅을 잃은 임금이다.” 하였으니, 자기 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에 더부살이하는 제후를 가리킨다.

207)본종오복도(本宗五服圖):가례(家禮) 권4 상례(喪禮)에 나온다.

208)밭갈이는……갈고:국어(國語) 주어 상(周語上)의 “왕이 한 이랑을 갈고, 반(班)이 그 3배수로 간다.”의 주에 “반(班)은 위차(位次)이다. 3배수로 간다는 것은 각각 그 윗사람보다 3배를 간다는 말이니, 왕이 한 이랑을 갈고, 공이 3이랑을 갈고, 경이 9이랑을 갈고, 대부가 27이랑을 간다는 말이다.” 하였다.

209) 왕제(王制):의례경전통해(儀禮經典通解)에 포함되어 있는 의례집전집주(儀禮集傳集注)왕조례(王朝禮) 왕제(王制)를 말한다.

210)상춘(上春)에……거느리고:상춘은 정월이다. 6궁(宮)은 황후의 침궁(寢宮)인 정침(正寢) 하나와 연침(燕寢) 다섯을 합한 것이다. 6궁의 사람들이란 3부인(夫人), 9빈(嬪), 27세부(世婦), 81어첩(御妾)을 가리키는데, 이들이 6궁에 나누어 거처하기 때문에 6궁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禮記 昏義

211)교제(郊祭)와 체제(禘祭):교제는 천자가 교외(郊外)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이고, 체제는 천자가 종묘(宗廟)에서 지내는 큰 제사로서 태조(太祖)의 선친을 태묘에서 제사하고 태조를 배향(配享)한다. 中庸章句 第18章

212)내외 명부(內外命婦):내명부와 외명부이다. 내명부는 궁궐 안에 거주하는 비(妃), 빈(嬪), 세부(世婦), 여어(女御)를 가리키고, 외명부는 공(公)․경(卿)․대부(大夫)의 부인을 가리킨다. 周禮 天官冢宰 內宰 鄭玄注 禮記 喪大記 鄭玄注

213)3궁(宮):제후의 부인(夫人)은 왕후(王后)의 절반이기 때문에 3궁이 된다. 禮記正義 祭義 孔穎達疏 195쪽 주 16)의 ‘6궁’ 설명 참조.

214)부위(副褘):부(副)는 머리를 꾸미는 장식이고, 위(褘)는 부인의 예복이다. 禮記 祭義 陳澔

215)소뢰(小牢):제사의 규모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희생으로 소․양․돼지를 사용하는 경우를 태뢰(太牢)라고 하고, 양과 돼지만 사용하는 경우를 소뢰라고 한다. 禮記 玉藻 嚴陵方氏注

216)보불(黼黻)과 문장(文章):예복을 치장하는 화려한 색채를 말한다. 순자(荀子) 비상(非相)의 양경(楊倞) 주(注)에 “보불과 문장은 모두 아름다운 색인데, 흰색과 검은색을 보(黼)라고 하고, 검은색과 푸른색을 불(黻)이라고 하고, 푸른색과 붉은색을 문(文)이라고 하고, 붉은색과 흰색을 장(章)이라고 한다.” 하였다.

217)직의……것:공자가 주(周)나라에 가서 태조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갔는데, 사당 오른쪽 계단 앞에 금으로 된 사람의 동상이 있었다. 그 입을 세 번 봉하였고 그 등에 명문이 새겨져 있었으니, 말과 행동을 경계하는 내용이었다. 본서의 기언 서(記言序)에 전문(全文)이 실려 있다. 원문에는 왼쪽 계단이라고 했는데, 공자가어와 다른 책에는 모두 오른쪽 계단으로 되어 있다. 孔子家語 觀周 第11

218)사(肆), 헌(獻), 관(灌):주례 춘관종백 대종백(大宗伯)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소(疏)에 나온 정현(鄭玄)의 말에 의하면, 사(肆)는 익힌 고기를 올릴 때 희생을 21개의 조각으로 나누는 것이고, 헌(獻)은 시동(尸童)에게 예제(醴齊)를 올리는 것이고, 관(灌)은 울창주(鬱鬯酒)를 땅에 부어 강신(降神)하는 것이다.

219)본종복(本宗服):자기를 중심으로 위로는 고조까지, 아래로는 현손(玄孫)까지, 옆으로는 삼종형제와 삼종자매까지, 즉 참최복부터 시마복까지 다섯 가지 정복(正服)을 입는 사람을 통틀어 본종이라고 한다. 家禮 喪禮 本宗五服之圖

220)삼상(三殤):16세 이상 19세 이하에 죽은 것은 장상(長殤)이 되고, 12세 이상 15세 이하에 죽은 것은 중상(中殤)이 되고, 8세 이상 11세 이하에 죽은 것은 하상(下殤)이 되고, 7세 이하는 복(服)이 없고, 태어난 지 3개월이 되지 못했을 경우는 상(殤)이 되지 못한다. 儀禮 喪服

221)삼부(三父):개가(改嫁)한 어머니의 남편 즉 의붓아버지로서 동거한 자, 개가한 어머니의 남편 즉 의붓아버지로서 동거하지 않은 자, 그리고 계모(繼母)가 또 개가하여 관계가 이루어진 의붓아버지를 가리킨다. 讀禮通考 卷3 三父八母服圖

222)팔모(八母):첩의 자식이 아버지의 정실(正室)을 지칭하는 적모(嫡母),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 계모(繼母), 아들이 있는 아버지의 첩인 서모(庶母), 어머니가 없는 서자인 자기를 아버지가 다른 첩에게 기르도록 명하여 자기를 길러준 자모(慈母), 어려서 젖을 먹여준 유모(乳母), 동종(同宗) 또는 3세 이전에 버려진 자기를 길러준 양모(養母), 아버지에게 쫓겨난 출모(出母), 아버지가 죽은 뒤에 재가(再嫁)한 가모(嫁母)를 가리킨다. 家禮 三父八母服制之圖

223)5세에 단문(袒免)하는 복:자기를 중심으로 삼종형제 즉 동고조(同高祖) 8촌까지가 본종(本宗)으로서 시마(緦麻) 3개월 복을 입고, 증고조의 자식 즉 고조의 형제 이하가 5세로서 이들에 대해서는 정복(正服)인 시마를 입을 수 없고, 단지 왼쪽 소매를 벗어 팔뚝을 드러내고[袒], 갓을 벗고 좁은 삼베로 머리를 묶어[免] 슬픔을 표시할 뿐이며, 6세가 되면 단문마저 하지 않는다. 禮記 大傳

224)사구공(司寇公):신설(申渫)의 증조인 신광윤(申光潤)을 가리킨다.

225)옛날……못했고:공자가 이르기를, “하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지만 기(杞)나라가 증거를 대주지 못하고, 은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송나라가 증거를 대주지 못하는 것은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주자의 주에 “기는 하나라의 후예이고, 송은 은나라의 후예이다.” 하였다. 論語 八佾

226)주자대전(朱子大全)에……한다:원문 ‘大傳’의 ‘傳’은 ‘全’의 오자이므로 바로잡았다. 회암집(晦庵集) 권14 서주고후(書奏藁後)에 “예경의 글은 참으로 궐략이 있으니 후인을 기다릴 부분이 없지 않다.[禮經之文 誠有闕略 不無待於後人]”라고 되어 있다.

227)위의(威儀)가……가지이며:118쪽 주 11) 참조.

228)요(堯)……16자(字):요가 순(舜)에게 천자의 자리를 선양(禪讓)하면서 “아, 너 순아, 하늘의 역수가 너의 몸에 있으니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咨爾舜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厥中]” 하였고, 순이 우(禹)에게 선양하면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히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여 세 구를 더 붙였다. 이것을 16자 심법이라고 하여 송대(宋代)의 유학자들이 심학(心學)과 도통(道統)의 중요한 관념으로 삼았다. 論語 堯曰 書經 大禹謨

2)학문이……없다:이것은 맹자(孟子)가 호생불해(浩生不害)에게 한 말인데, 미수가 부분적으로 변형하여 인용하였다. 주자(朱子)의 주에 따르면, 대(大)는 화순(和順)이 안에 가득 차서 행동이나 일로 드러나는 단계이고, 화(化)는 대의 단계에서 생각하지 않고 힘쓰지 않은 가운데 자연스럽게 도에 맞게 되는 단계로서 인위가 개입되지 않는 성(聖)의 단계이다. 신(神)은 성스러워서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경지이니 성(聖) 위에 신(神)의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孟子 盡心下

3)167억:원문에는 ‘六百十七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4)그 대수(大數)는……끝나니:360일 12개월이 1년이고, 30년이 1세(世)이며, 12세가 1운(運)이고, 30운이 1회(會)이며, 12회가 1원(元)이므로 소운(小運) 즉 1운은 12만 9600일이 되며, 두 번 변하면 129,600×129,600=167억 9616만 일이 되고, 세 번 변하여 16,796,160,000× 16,796,160,000=2해 8211경 990조 7456억 일이 된다. 皇極經世書 卷13 觀物外篇上

5)서한(西韓)의 해변(海邊):전라도 나주를 말한다.

6)하도(河圖)의……문(文):복희씨(伏羲氏) 때 용마(龍馬)가 하수(河水)에서 나왔는데 등에 이상한 무늬가 있었다. 이 무늬를 하도라고 하는데, 1과 6은 북쪽에, 2와 7은 남쪽에, 3과 8은 동쪽에, 4와 9는 서쪽에, 5와 10은 중앙에 배열되어 있었다. 복희씨가 이것을 보고 처음으로 8괘를 만들었으니, 이것을 복희팔괘(伏羲八卦) 또는 선천팔괘(先天八卦)라고 한다. 우(禹)가 치수(治水)에 성공했을 때 낙수(洛水)에서 신령한 거북이 나왔는데, 그 등에 이상한 무늬가 배열되어 있었다. 이 무늬를 낙서라고 하는데, 북쪽에 1, 남쪽에 9, 동쪽에 3, 서쪽에 7, 동북쪽에 8, 서북쪽에 6, 동남쪽에 4, 서남쪽에 2가 배열되어 있었다. 우가 이것을 보고 차례로 나열해서 구류(九類)를 이루었으니,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이것이다. 周易 繫辭傳上 孔穎達正義 書經 洪範 孔穎達正義

7)팔괘(八卦)의……차례:복희팔괘는 원래 3획괘로서 건(乾), 태(兌),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이다. 이 팔괘가 서로 조합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의 경우의 수가 64괘이다. 구주는 홍범의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을 차례로 배열한 것이다. 周易 伏羲六十四卦方位之圖 書經 洪範

8)선천(先天)의……작용:복희가 그린 팔괘를 선천팔괘라 하고, 문왕이 그린 팔괘를 문왕팔괘 혹은 후천팔괘라고 한다. 선천팔괘는 천지(天地)의 정위(正位)를 정하여 배열한 것이고, 후천팔괘는 실용에 들어가서 그 자리를 배열한 것이다. 周易 易本義圖

9)천구(天球)의……운행:천체(天體)가 지극히 둥글어서 주위(周圍)가 365도(度) 4분의 1이다. 하루에 지구를 한 바퀴씩 도는데 1도를 더 지나고, 해는 하늘에 걸려 있으면서 역시 하루에 지구를 한 바퀴씩 도는데 천체보다 1도 못 가기 때문에 365일 940분의 235일이 지나야 해와 만나게 된다. 달 역시 지구를 도는데, 천체보다 13도 19분의 7을 못 가기 때문에 29일 940분의 499일이 지나서 해와 한 번 만나게 된다. 書經 堯典 蔡沈註

10)하편(下篇)의 세변(世變):기언 권26 하편 세변정곤재사(鄭困齋事)를 가리킨다.

11)김세룡(金世龍)의 처(妻):인조의 서녀(庶女)로 김자점(金自點)의 손자 김세룡과 혼인한 효명옹주(孝明翁主)이다.

12)국법에……법:의친지벽(議親之辟), 의고지벽(議故之辟), 의현지벽(議賢之辟), 의능지벽(議能之辟), 의공지벽(議功之辟), 의귀지벽(議貴之辟), 의근지벽(議勤之辟), 의빈지벽(議賓之辟) 이상 여덟 가지이다. 죄를 지은 사람이 이상의 조건에 해당하면 감면하거나 사면한다. 周禮 秋官司寇 小司寇之職

13)배향신(配享臣)을 논한 차자:이 차자는 1676년(숙종2) 9월 10일에 올린 것이다. 정태화(鄭太和)를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는 문제로 민희(閔熙)가 정태화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리자 미수가 이에 반대하는 내용으로 올린 차자이다. 肅宗實錄

14)네 종류의 기년설(期年說):전중(傳重)을 했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않는 경우가 네 가지이다. 첫째 정체(正體)이면서 전중을 얻지 못한 경우이니, 적자(嫡子)가 폐질(廢疾)이 있어서 종묘를 감당할 수 없는 경우이다. 둘째 전중했으나 정체가 아닌 경우이니, 서손(庶孫)이 후사(後嗣)가 된 경우이다. 셋째 체이면서 정이 아닌 경우이니, 서자(庶子)가 후사가 된 경우이다. 넷째 정이면서 체가 아닌 경우이니, 적손(嫡孫)이 후사가 된 경우이다. 체(體)는 부자지간을 규정하는 말이고, 정(正)은 적자(嫡子), 적손(嫡孫)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정체는 적통으로서 직계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儀禮經傳通解續 卷1

15)체이부정(體而不正)의 설:효종이 승하했을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효종을 위해 어떤 복을 입어야 할지 논하는 자리에서 송시열이 “소현세자의 아들은 정이불체(正而不體)이고, 대행대왕(大行大王)은 체이부정(體而不正)이다.”라고 하자 정태화가 국제(國制)에 아버지가 아들의 상에 장자와 차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여, 이 자리에서 자의대비의 복이 기년으로 결정되었다. 顯宗實錄 卽位年 5月 5日

16)장자(長子)와……입는다:이 말은 대명률이나 구족도에 나오는 말이 아니고, 황조통전(皇朝通典) 권62 복제(服制)의 자최부장기조(齊衰不杖期條)에 나오는 말로, “계모(繼母)가 장자와 중자를 위하여 이 복을 입는다.”라고 되어 있다.

17)인선대비(仁宣大妃)의……것:인선대비는 효종의 비인데, 1674년(현종15) 2월에 승하하자 당시 대왕대비인 자의대비가 인선대비에 대해 어떤 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처음에는 서인의 주장에 따라 대공(大功)으로 정했다가 그해 7월에 다시 남인이 문제를 제기하여 8월 1일에 대왕대비가 기년복으로 바꾸어 성복(成服)하였으니, 이것이 소위 2차 예송(禮訟)이다. 미수는 남인으로서 1차 예송 때는 삼년설을 주장하였고, 2차 예송 때는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顯宗實錄

18)윤순거(尹舜擧)가……짓자:1663년(현종4) 영월 군수(寧越郡守) 윤순거가 단종이 쫓겨난 본말, 사묘제향(祠廟祭享)의 절차, 여러 신하들의 사적, 후인들의 제기(題記)를 갖추 기록하여 노릉지(魯陵誌)라 하였다. 국역 연려실기술 권4 단종조 고사본말 복위봉릉

19)진(陳)나라……대답하였으니:노(魯)나라 소공이 오(吳)나라에 장가들었는데, 오나라는 노나라와 동성(同姓)인 희성(姫姓)이었으므로 진나라 사패(司敗)가 이 일을 가지고 공자에게 소공이 예를 아는 임금인지 물은 것이다. 공자의 처지에서 자기 선대 임금의 과실을 드러낼 수 없고, 또 동성에게 장가든 것을 예를 안다고 할 수 없어, 자기 임금을 두둔한다는 비판을 받을 줄을 알면서도 예를 안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論語 述而여기에서는 단종을 복위하는 문제를 제기한다면 선왕인 세조의 처사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야 하는데 후대의 신하로서 선왕의 잘못을 말할 수 없는 것이 공자가 소공의 잘못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경우이기 때문에 미수가 위 내용을 끌어온 것이다.

20)정릉(貞陵)을 복원한 일:정릉은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康氏)의 능이다. 그의 아들인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이 태종의 손에 죽었다. 1396년(태조5)에 세상을 떠나자 황화방(皇華坊) 북쪽 정릉동(貞陵洞)에 장사 지냈는데, 태조가 승하한 이듬해인 태종 기축년(1409, 태종9)에 도성에 무덤을 두는 일이 고금에 없다는 이유로 양주군(楊州郡) 남사아리(南沙阿里)로 이장한 뒤 돌보지 않고 방치하였다. 1669년(현종10) 1월에 송시열(宋時烈)이 발의하여 그해 10월 1일에 종묘(宗廟)에 승부(陞祔)되었다. 국역 연려실기술 권1 태조조 고사본말 정릉폐복

21)남구만(南九萬)의 상소:1679년(숙종5) 2월 10일에 남구만이 소를 올려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중전의 서모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첩을 구타한 사건과 대사헌 윤휴(尹鑴)가 서도(西道)의 금송(禁松)을 함부로 베어 자기 집을 지은 일을 탄핵했다가 도리어 무고죄를 뒤집어쓰고 같은 해 3월 19일에 유배된 일이 있었다. 肅宗實錄

22)종묘에 고하자는 의론:2차 예송 때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아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에 대왕대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인선대비에 대해 처음에는 서부(庶婦)에 대한 복인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했다가 뒤에 적부(嫡婦)에 대한 복인 기년복으로 고쳤다. 그 전에 효종이 승하했을 때 적자(嫡子)에 대한 복이 아닌 서자에 대한 복인 기년복으로 했다고 하여 이때에 와서 인선대비에 준해서 효종을 적자로 인정하는 것으로 종묘에 고하고 아울러 송시열의 죄를 다스린 것을 고하고 반교문을 내리기를 요청한 일을 가리킨다. 이 일은 1675년(숙종1)에 장령 조사기(趙嗣基)에 의해 제기되어 1679년 6월 13일이 되어서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肅宗實錄

23)강도(江都)의 적서(賊書):1679년(숙종5) 3월 각 도의 승군(僧軍)을 징발하여 강화도에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이때 감독관 수사(水使) 이우(李偶)에게 이유정(李有湞)이란 자가 사람을 시켜 봉서(封書)를 전하니, 그 내용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손자인 임창군(臨昌君)을 추대하여 반정(反正)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국청을 설치하여 이유정을 붙잡아 추문하고, 그해 4월 29일에 이유정은 복주되었다. 그러나 일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남인들에 의해서 이유정을 사주한 자가 송시열이라는 주장이 일어나게 된다. 국역 연려실기술 권33 숙종조 고사본말 이유정투서지변 肅宗實錄

24)솥의……흉하다:주역 정괘(鼎卦) 구사(九四) 효사(爻辭)에 나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공자가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풀이하기를, “덕은 낮으면서 지위가 높고, 지혜는 적으면서 큰일을 도모하고, 힘은 적으면서 무거운 짐을 지면 화가 미치지 않기 어렵다. 이것은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미수는 여기에서 허적이 영의정의 직임을 감당할 역량이 없으면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폐단이 생긴다고 주장한 것이다.

25)대일통(大一統):춘추의 맨 앞에 “원년(元年) 봄 왕정월(王正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원년은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을 가리키고, 봄은 절기를 가리킨다. 그 다음에 나오는 왕정월에 대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어찌하여 왕정월이라고 하였는가? 대일통을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서언(徐彦)의 소(疏)에서 설명하기를, “왕자(王者)가 천명(天命)을 받아 정월을 제정하여 천하를 통솔하면서 모든 만물로 하여금 이것을 받들어 시작을 삼게 하기 때문에 대일통이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26)구벌(九伐):주례 하관사마(夏官司馬) 대사마지직(大司馬之職)에 “구벌의 법으로 방국(邦國)을 바로잡는다.”라고 하고, 구체적인 실례를 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제후 중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거나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범하면 그 토지를 삭감하고, 현량(賢良)을 멋대로 죽이고 백성을 해치면 정벌(征伐)하고, 폭정을 행하고 이웃 나라를 속이면 그 임금을 폐지하고, 안으로 폭정을 하고 밖으로 다른 나라를 능멸하면 교체하고, 전야(田野)가 황무(荒蕪)하고 백성이 흩어지면 그 토지를 삭감하고, 험고(險固)함을 믿고 천자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쳐들어가고, 까닭 없이 친족을 죽이면 잡아서 그 죄를 다스리고, 신하가 그 임금을 추방하거나 시해하면 죽이고, 천자의 명령을 어기고 정법(政法)을 따르지 않으면 이웃 나라와 교통을 하지 못하게 하고, 내외(內外)의 인륜을 패란(悖亂)시키면 주살(誅殺)한다.”

27)옥에……나왔습니다: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뜻이 들어가지 않고, 옥에 갇힌 죄수들이 제 발로 나온 뒤에 기자(箕子)와 상용(商容)이 은거하였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사마정(司馬貞)은 색은(索隠)에서 “백성의 뜻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나라가 어지러워 민심이 이반된 것이고, 옥에 갇힌 죄수가 제 발로 나왔다는 것은 정치가 문란해서 옥관이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0 樂毅列傳

28) 주관(周官):서경 주서(周書)의 편명이다.

29)제 경공(齊景公)이……하였으니:노 소공(魯昭公) 말년에 공자가 제(齊)나라에 갔을 때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대답하자 경공이 감탄하면서 한 말이다. 곧 나라가 이 꼴이 되면 망하게 되므로 창고에 곡식이 아무리 많이 쌓여 있더라도 먹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論語 顔淵

30)성인이……것입니다:공자의 제자 번지(樊遲)가 농사짓는 법에 대해 묻자 자신은 늙은 농부만 못하다고 대답하고 나서 말하기를,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고, 윗사람이 의(義)를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고, 윗사람이 신(信)을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성실하지 않는 자가 없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論語 子路

31)자사(子思)가……것입니다:노(魯)나라 목공(穆公)이 자사를 봉양하면서 식량과 고기를 보내주었는데, 처음에는 자사가 절을 하고 받았다. 그 후에 담당자가 계속해서 식량과 고기를 가져오니, 그때마다 자사가 절을 하고 받았는데, 나중에는 자사가 그 사령을 대문 밖으로 내치고서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고는 더 이상 받지 않고 사절하였다. 이는 어진 군자를 봉양하는 예가 아니고, 음식으로 군자를 번거롭게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목공이 부끄러워하고 깨달아서 다시는 하리를 시켜 음식물을 보내오지 않았다. 孟子 萬章下

32) 주관(周官)의 부포(夫布):주관주례를 가리킨다. 주례》 〈지관사도(地官司徒) 여사(閭師)에 부포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33)전(傳)에……하였으니:맹자 진심 하(盡心下)에는 “예의가 없으면 상하가 어지러워진다.[無禮義則上下亂]”라고 하였다.

34)숙향(叔向):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양설힐(羊舌肹)이다.

35)천맥법(阡陌法):천맥은 토지의 경계에 있는 길로, 남북을 천이라 하고 동서를 맥이라 한다. 이는 기존의 정전법(井田法)에서 도랑과 두둑의 역할을 했던 수(遂)ㆍ구(溝)ㆍ혁(洫)ㆍ회(澮)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 전지(田地)의 활용면에서 볼 때 유실되는 토지가 많다고 여겼다. 그래서 도랑을 사방으로 터버리고 두둑을 무너뜨려 평탄하게 함으로써 이 공간도 모조리 전토(田土)로 조성해 세금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조세법이다. 象村稿 卷57 求正錄, 韓國文集叢刊 72輯

36)병전(兵典)의 총관조:경국대전(經國大典) 병전(兵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 있는 내용이다.

37)절강(浙江)의 병기(兵技):이는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병서(兵書)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가리킨다. 왜구(倭寇)가 명나라의 연해를 침구(侵寇)할 때 척계광이 절강성(浙江省)에 있으면서 새로운 진법을 만들어 왜구 격퇴에 많은 효과를 보았는데, 이 경험을 토대로 엮은 책이 기효신서이다. 선조실록 26년과 27년 조에 보면 임진란 때 왜구가 물러간 다음 조선의 군병을 재건하면서 대부분 이 책을 근거로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을 시키고 있다. 원문에는 ‘江浙’로 되어 있는데, 선조실록에 의거하여 ‘浙江’으로 바로잡았다.

38)경국대전(經國大典):원문에는 경국육전(經國六典)으로 되어 있는데, 경국육전은 태조 때 지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중에서 치전(治典:뒤의 이전吏典), 부전(賦典:뒤의 호전戶典), 예전(禮典), 정전(政典:뒤의 병전兵典), 헌전(憲典:뒤의 형전刑典), 공전(工典)을 합하여 등사한 책으로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책이다. 그러나 세조 6년에 시작하여 성종 2년에 완성된 책은 경국대전이다. 실제로는 세조 6년에 호전을 만든 것으로 시작하여 예종 1년에 완성되고, 성종 1년, 2년, 5년, 16년의 개정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므로 완성된 해는 성종 16년(1485)으로 잡아야 한다. 따라서 원문 ‘經國六典’의 ‘六’은 ‘大’로 바로잡았다.

39)형명(形名):형(形)은 깃발이고, 명(名)은 징이나 북이니, 군대를 지휘하는 기물이다. 대전회통(大典會通) 병전(兵典) 선전관청(宣傳官廳)에 “형명(形名), 계라(啓螺), 시위(侍衛), 전명(傳命), 부신(符信)의 출납 등의 일을 관장한다.” 하였고, 시위(侍衛)에는 “왕이 제사를 친히 지낼 때에는 형명이 단(壇) 밖에 멈추고, 묘(廟)나 능(陵)일 경우에는 그 문 밖에 멈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형명이 지휘하는 깃발이나 징․북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고, 그것을 가지고 지휘하는 사람 즉 형명수(形名手)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는 물건을 가리킨다.

40)만인과(萬人科):만인과는 한국문집총간 41집에 수록된 지천집(遲川集)중 이귀(李貴)의 행장에 처음 보이는데, “혼조(昏朝)에 이르러 또 만인과를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수문쇄록(謏聞瑣錄) 속잡록(續雜錄) 정축년 상(丁丑年上)에 “그 후에 관에 명령하여 만인과를 보여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각기 한 가지 기술만 있으면 과거를 허락하여 그 노고에 보답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국역 인조실록 16년 6월 16일 조에 보면, “수십 년 이래 병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과목(科目)이 많아져 만인과와 오천인과(五千人科)가 있기까지 하여 수많은 출신이 계속해서 나왔고 경외(京外)의 포수(砲手)는 공사 노비가 대신 시사(試射)하고 함부로 부거(赴擧)하여 출신 아닌 자가 없을 정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만인과는 광해군 때 처음 만들어져 병자호란 이후에 제도로 시행되었는데, 그 대상은 공사천까지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는 만과(萬科)라고도 불리면서 무과의 이칭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41)부(府)를 설치하려고:관아를 설치하고 속관(屬官)을 두는 일이다. 중국 한나라 때 삼공(三公), 대장군(大將軍), 장군(將軍) 등에게 허용하였던 제도이다.

42)원일(元日):예기집설(禮記集說)에서 진호(陳澔)는 ‘상신(上辛)’이라고 하였고, 왕개운(王闓運)은 매달 첫 번째 신일(辛日)을 상신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날은 정월 첫째 천간이 신(辛)인 날이다.

43)원신(元辰):예기집설에서 진호는 교제(郊祭) 후의 길일(吉日)이라고 하였고, 공영달(孔穎達)은 “천간(天干)을 일(日)이라 하고, 지지(地支)를 신(辰)이라고 하는데 밭가는 때는 해일(亥日)을 쓰기 때문에 원신(元辰)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44)정월……간다:이 부분은 몇 가지 설을 섞어서 하나의 논지로 말한 것이니 즉 예기 월령(月令)에 나온 것을 근간으로 해서 주례예기 명당위(明堂位) 및 진호의 주석을 조합해 놓은 것이다. 원문의 ‘正月元日’은 월령의 “是月也 天子乃以元日祈穀于上帝”에서 ‘是月也’와 ‘元日’을 떼어 붙여서 만든 것이고, ‘奏黃鍾 歌大呂 舞雲門’은 주례 춘관종백(春官宗伯) 대사악(大司樂)에서 끌어온 말이고, ‘配以后稷’은 예기 명당위에서 끌어온 말이다. 그리고 끝의 ‘士賤不與於耕……農夫終畝’는 월령의 진호 주석을 붙여 넣은 것인데, 진호는 농부(農夫)라고 하지 않고 서인(庶人)이라고 하였다.

45)교제(郊祭)와 체제(禘祭):196쪽 주 17) 참조.

46)38구(句):뒤에 실린 친경송은 36구인데,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 어려워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47)예(禮):국어(國語) 주어 상(周語上)에 나오는 내용인데, 국어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순서가 뒤바뀌고, 중간에 예기 월령(月令)의 내용을 끼워 넣고, 글자를 바꾸고 가감(加減)한 것이 많이 있다. 이는 미수가 기억에 의존하여 썼기 때문인 듯하다.

48)농상(農祥):국어 위소(韋昭)의 주에 의하면, 28수(宿) 중 방성(房星)인데 입춘일(立春日) 새벽에 남쪽 하늘에 나타난다. 농사지을 시기이기 때문에 농상이라고 한 것이다.

49)해와……이르면:국어 위소의 주에 의하면, 천묘(天廟)는 28수 중 실성(室星)인 영실성(營室星)인데, 맹춘(孟春)의 달에 해와 달이 모두 영실성에 있다고 했으니, 즉 12차(次)의 추자(娵訾)의 자리에 해와 달이 모인다는 말이다.

50)사공(司空):토지를 담당하는 관원이다.

51)사도(司徒):백성의 교화를 담당하는 관원이다.

52)전준(田畯):농사를 장려하고 감독하는 관원이다.

53)고인(瞽人)이……고하면:고인은 소경으로서 바람 소리를 아는 자인데, 여기에서는 악태사(樂太師)를 가리킨다. 협풍(協風)은 온화한 바람이다. 國語 周語上

54)일을 다스려:국어에 의거하여 원문 ‘御史’의 ‘史’를 ‘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55)예주(醴酒):주기(酒氣)가 없는 단술이다.

56)울인(鬱人):주례 춘관종백 울인에 “관기(祼器)를 관장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관기란 강신할 때 쓰는 울창주를 담는 술항아리이다.

57)울창주(鬱鬯酒):강신할 때 쓰는 술로서, 창주(鬯酒)에 울금(鬱金)이라는 향초를 풀어 향이 나게 한 술인데, 울인이 이 술을 이준(彛尊)에 담아서 진설한다. 周禮 春官宗伯 鬱人

58)희인(犧人):주례 춘관종백에 “사준이(司尊彛)가 6준(尊)과 6이(彛)의 위치를 관장한다.”고 되어 있는데, 희인은 곧 사준이를 가리킨다.

59)친히……싣고:이 부분은 국어의 내용이 아니라 예기 월령(月令)에 있는 내용인데, 미수가 국어의 내용으로 오인한 듯하다. 진호(陳澔)의 주에 의하면, 보개(保介)의 보(保)는 임금의 수레 오른쪽에 동승하는 호위 무사이고, 개(介)는 갑옷을 착용했다는 뜻이며, 어(御)는 수레를 모는 마부이다. 즉 임금이 왼쪽에 타고, 마부가 가운데에 있고, 갑옷을 착용한 호위 무사가 오른쪽에 타는데, 쟁기를 마부와 호위 무사 사이에 싣는다는 말이다.

60)선부(膳夫):왕의 음식과 반찬을 담당하는 관원이다.

61)농정(農正):위소(韋昭)의 주에 의하면, 농정은 전대부(田大夫)로서, 적례(籍禮)를 진설하여 그 신에게 제사 지내 농사가 잘되도록 기원하는 일을 맡은 관원이다.

62)적례(籍禮):천자가 적전(籍田)을 친히 쟁기질하는 의식이다.

63)공(公)……갈고:국어 위소의 주에 의하면, 공은 왕의 세 배인 3번을 갈고, 경은 공의 세 배인 9번을 갈고, 대부는 경의 세 배인 27번을 가는 것이다.

64)재부(宰夫):여기의 재부는 주례 천관총재(天官冢宰)의 속관인 재부가 아니라 음식을 담당하는 하리(下吏)를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宣公2年

65)태뢰(太牢):제사 때에 소, 양, 돼지 세 가지 희생을 모두 갖춘 제사상을 태뢰라고 하는데, 소 한 가지만 갖춘 것을 태뢰라고 하기도 한다.

66)반(班):위소의 주에 의하면, 왕을 따라간 공, 경, 대부를 말한다.

67)악사(樂師)가……살피고:국어 위소의 주에 의거하여 원문 ‘樂師以同律省風土’의 ‘同’을 ‘音’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 내용은 국어 본문의 내용이 아니라 위소의 주석이다. 이 말은 음률을 통해서 풍토를 살핀다는 말로, 풍기(風氣)가 온화하면 토기(土氣)가 작물을 기르기에 적당한 것이다.

68)사구(司寇)가……명하기를:국어에 의거하여 원문 ‘司寇命其旅田’의 ‘田’을 ‘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69)농사(農師):농사를 담당하는 관원이다. 사기(史記) 권4 주본기(周本紀)에 “제요(帝堯)가 기(棄)를 등용하여 농사로 삼으니 천하가 그 이로움을 얻었다.” 하고, 한(漢)나라 왕찬(王粲)의 무본기(務本記)에 “농사를 두어 감찰하고, 전준(田畯)을 두어 살피게 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위소는 “농사는 상사(上士)이다.” 하였다.

70)직(稷)이 세 번째로 가고:직은 후직(后稷)이니, 위소의 주에 의하면, 후직은 농관(農官)의 군(君)이기 때문에 농정 다음에 간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후직이 농관의 장이고, 그 아래가 농정이고, 농정 아래가 농사임을 알 수 있다.

71)사공(司空)이 네 번째로 가고:위소의 주에 의하면, 사공은 도로와 농수로(農水路)를 담당하기 때문에 후직 다음에 간 것이다.

72)사도(司徒)가 다섯 번째로 가고:위소의 주에 의하면, 사도는 백성을 살피기 때문에 사공 다음에 간 것이다.

73)태보(太保)가……가고:위소의 주에 의하면, 태보와 태사는 천자의 삼공(三公)으로서 왕을 보좌하여 도를 논하고, 백관을 두루 감찰하므로 일을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사도 다음에 간 것이다.

74)태사(太史)가 여덟 번째로 가고:위소의 주에 의하면, 태사는 관부에서 처리하는 문서를 수납하기 때문에 태사(太師) 다음에 간 것이다.

75)종백(宗伯)이 아홉 번째로 가고:위소의 주에 의하면, 종백은 경관(卿官)으로서 왕의 대례(大禮)를 돕는 일을 담당하고, 만약 왕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왕을 대신하기 때문에 태사(太史) 다음에 간 것이다.

76)대순(大徇):위소의 주에 의하면, 왕이 공, 경, 대부를 거느리고 친히 농토를 순행하는 것이다.

77)왕의 일은 다 마찬가지다:이 말은 위 문단이나 아래 문단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인용하는 과정에서 잘못하여 딸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78)6궁(宮)의 부인들:195쪽 주 16) 참조.

79)자성(粢盛):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하휴(何休)의 주에 의하면, ‘자(粢)’는 기장[黍]과 피[稷]이고, ‘성(盛)’은 그것을 그릇에 담은 것을 말하니, 제기(祭器)에 담아서 제사 지내는 곡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80)종사(鐘師)가 북[鞞]을 담당하고:종사는 고대의 악관(樂官) 명칭이다. 주례 춘관종백(春官宗伯)에 “종사가 금(金)으로 주악(奏樂)하는 것을 관장한다.”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금을 쳐서 음악을 연주하는 절도로 삼는다. 금은 종(鍾)과 박(鎛)이다.” 하였는데, 북[鞞]은 자림(字林)에 “비(鼙)는 작은 북인데 비(鞞)와 비(鼙)는 같다.” 하였다.

81)궁정(宮正)이 경필(警蹕)을 담당하여:주례 천관총재(天官冢宰)에 “궁정이 궁중의 경계, 규찰, 궁금(宮禁)을 담당한다.” 하였고, 문선(文選) 반악(潘岳)의 적전부(籍田賦)에 “궁정이 문려(門閭)에 경필을 베풀면, 천자가 이에 옥련(玉輦)에 탄다.” 하였는데, 미수는 적전부를 인용한 것이다.

82)간장(干將)을……들고:양웅(揚雄)의 감천부(甘泉賦)에 “간장을 차고 옥척(玉戚)을 잡고서 어지럽게 달려가도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서 인용한 말이다. 간장은 오월춘추(吳越春秋) 합려내전(闔閭內傳)에 의하면, 춘추 시대 오나라 대장장이인 간장과 막야(莫邪) 부부가 만든 자웅(雌雄) 쌍검(雙劍) 중에서 양검(陽劍)인데, 천하의 명검으로 알려져 있다. 옥척은 옥으로 장식한 도끼이다.

83)봉인(封人)이 유궁(壝宮)을 설치하고:주례 지관사도(地官司徒)에 “봉인이 왕의 사유(社壝)를 설치하는 것을 담당한다.” 하였는데, 정현의 주에 “흙을 쌓아서 선(墠)과 단(壇)을 만드는 것이니, 제사 지내기 위해서이다.” 하였고, 주례 천관총재 장사(掌舍)에 “단(壇), 유궁(壝宮), 극문(棘門)을 만든다.” 하였는데, 이때 유궁은 천자가 궐 밖으로 나가 휴식하거나 묵을 때에 설치하는 흙으로 담장을 두른 일종의 임시 궁실이다. 여기에서는 이 두 가지 내용을 합쳐서 양웅의 반안인(潘安仁)에 나오는 “봉인이 유궁을 설치하고, 장사가 목책(木柵)을 설치한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84)삼신(三神)에게……것:삼신은 천신(天神), 지기(地祇), 산악(山岳)을 가리키는데, 양웅의 감천부에 “천지를 감동시켜 삼신에게 복을 맞이한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85)사사(司事):국어 주어(周語)에 “태사(太史)가 양관(陽官)을 거느리고 우리 사사에게 명하였다.” 하였는데, 위소(韋昭)의 주에 “사사는 농사를 주관한다.” 하였다.

86)삼궁(三宮)이 종자를 바치니:삼궁은 제후(諸侯)의 부인을 가리킨다. 예기 제의(祭義)에 “삼궁의 부인(夫人)과 세부(世婦) 중에서 길한 자를 가려 잠실(蠶室)에 들어가 누에를 치게 한다.”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제후의 부인은 삼궁이니, 왕후의 절반이다.” 하였다. 종자를 바치는 것은 앞의 글 친경서(親耕序)에 자세히 나와 있다.

87)노주(勞酒):왕이 친경례(親耕禮)를 마치고 대침(大寢)으로 돌아와 신하들과 주연을 베푸는데, 이것을 노주라고 한다. 禮記 月令

88)해가……돌아오고: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의하면, 지난해 12월에 해가 현효(玄枵)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 후로 매달 자리를 옮겨서 이달에 이르러 다시 현효의 자리에 돌아왔음을 말한다.

89)달이……모이며: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의하면, 지난해 12월에 달이 해와 현효(玄枵)에서 모였는데, 그 후로 매달 모이는 자리를 옮겨서 이달에 이르러 다시 현효의 자리에서 모인다는 말이다.

90)별이……나타나서:공영달의 소에 의하면, 28수(宿)가 하늘을 따라서 운행하여 매일 하늘을 한 바퀴씩 돌면서 매일 뜨는 시각이 달라지다가 이달에 이르러 다시 원래의 위치에 같은 시각에 뜬다는 말이다.

91) 방국(邦國)과 도비(都鄙):방국은 제후국을 말하고, 도비는 천자 나라의 도회지와 시골을 말한다.

92)요성(妖星) 20가지: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는 21가지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큰 수만을 들어 20가지라고 기록하였다. 진서에 의하면 혜성(彗星), 패성(孛星), 천부(天棓), 천창(天槍), 천참(天欃), 치우기(蚩尤旗), 천충(天衝), 국황(國皇), 소명(昭明), 사위(司危), 천참혜(天欃彗), 오잔(五殘), 육적(六賊), 옥한(獄漢), 순시(旬始), 천봉혜(天鋒彗), 촉성(燭星), 봉성(蓬星), 장경(長庚), 사전성(四塡星), 지유장광(地維藏光) 이상 21가지이다.

93)까마귀 날아 오르내릴 때:이 말은 실제 까마귀와는 상관이 없고 연회를 연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소정대씨전(夏小正戴氏傳) 권4의 10월 조에 ‘黑烏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전(傳)에 “흑오(黑烏)란 무엇인가? 까마귀이다. 욕(浴)이란 나는 것이니, 금방 올라갔다 금방 내려왔다 하는 것이다.” 하였다.

94)제생들 성대하도다:제생은 성균관의 학생들을 가리킨다. 이 연회를 성균관에서 열었기 때문에 제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시경 대아(大雅) 영대(靈臺)에 “아, 질서정연하게 북을 침이여! 아, 즐거운 벽옹(辟雍)에서 하도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아래 글의 “종과 북이 둥둥 울리네[鍾鼓逢逢]”와 “악사들 일을 아뢰도다[矇瞍于公]”가 영대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아 제생들이 성균관 학생임을 알 수 있다.

95)종과……아뢰도다:시경을 인용한 말인데, 글자를 약간 변형하였다. ‘종고(鍾鼓)’는 시경에 ‘타고(鼉鼓)’로 되어 있고, ‘우공(于公)’은 시경에 ‘주공(奏公)’으로 되어 있는데, 주자(朱子)는 공(公) 자를 일[事]로 풀이하였다. 詩經 大雅 靈臺

96)잔을……올리네:이 시는 전체적으로 시경을 그대로 인용하고, 끝부분에서 자기의 뜻을 담았다. 주인이 손님에게 술잔을 올리고 손님이 답하여 주인에게 술잔을 올리는 것을 헌초(獻酢)라고 하고, 주인이 다시 술잔을 씻어 손님에게 권하면 손님이 받아서 놓아 두고 마시지 않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예이다. 詩經 大雅 行葦

97)칠월(七月):시경 빈풍(豳風)에 들어 있는 시이다.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이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지 못하므로 후직(后稷)과 공류(公劉)의 풍화(風化)가 말미암은 바를 말하여, 소경인 악사(樂師)로 하여금 조석으로 이 시를 외워 가르치게 하였다. 그 내용은 농사를 준비하고, 누에를 치고, 길쌈을 하고, 수확하고, 지붕을 이는 일들을 월별로 읊어서 성왕이 농사짓는 법과 어려움을 알게 한 것이다.

98)재삼(載芟):시경 주송(周頌)에 들어 있는 시이다. 모서(毛序)에 의하면, 봄에 적전(籍田)을 갈면서 사직(社稷)에 풍년을 기원한 시라고 한다. 그 내용은 농구를 챙기고, 파종하고, 김매고, 들밥 먹고, 수확하고 술 빚어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일련의 과정을 노래한 것이다.

99)양사(良耜):시경 주송에 들어 있는 시이다. 그 내용은 농구를 챙기고, 파종하고, 김매고, 수확하고, 제사 지내는 일련의 과정을 노래한 것이다. 모서에 의하면, 가을에 사직(社稷)에 보답하는 제사를 올리는 시라고 한다.

100) 예맥(穢貊):미수는 예맥의 ‘예’ 자는 주로 ‘獩’로 표기하였고, ‘穢’나 ‘薉’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원문대로 적었다.

101)석색(石索):고대 마한(馬韓)이 통치한 54국 가운데 소석색국(小石索國)과 대석색국(大石索國)을 가리킨다. 국역 연려실기술 별집 권19 삼한

102)변악노(弁樂奴):고대 진한(辰韓)이 통치한 12국 가운데 하나로 변악노국(弁樂奴國)을 가리킨다. 국역 연려실기술 별집 권19 삼한

103)안영(晏嬰):춘추 시대 제(齊)나라 대부로서 자는 평중(平仲)이다.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을 두루 섬겼는데, 경공 때에 상신(相臣)이 되었다. 저서에 안자춘추(晏子春秋)가 있다.

104)격양가(擊壤歌):요 임금 때 천하가 태평하여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어떤 노인이 땅을 두드리면서 노래하기를, “해가 뜨면 나가서 농사짓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쉬네. 샘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였다. 이는 백성들이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藝文類聚 卷11

105)굴원(屈原)에……평한 것:미수는 이 말을 굴원이 직접 한 말처럼 구사하였으나 실은 사마천(司馬遷)이 굴원에 대해 평한 말이고, 명나라 진제(陳第)는 그의 저서인 굴송고음의(屈宋古音義)에서 이것이 굴원에 대한 평가 중에서 매우 훌륭한 평가라고 칭찬하였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106)당고(儻錮)의 화(禍):후한 환제(後漢桓帝)가 환관들의 무고를 듣고 이응(李膺)을 위시하여 태학(太學)의 학사 2백여 명을 금고(禁錮)시킨 사건을 말한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107)위학(僞學)의 금(禁):송 영종(宋寧宗) 때 한탁주(韓侂冑)와 조여우(趙汝愚)가 대립하였는데, 이때 주자(朱子)를 위시한 도학(道學)을 주창한 학자들이 조여우의 편을 들었다. 그 후 한탁주가 집권하자 도학을 위학이라고 지목하여 조여우 이하 59인을 모두 파척(罷斥)하고 도학을 금지시킨 사건을 말한다. 宋史 卷37 寧宗本紀1

108)원충갑(元冲甲)의 사단(祠壇)을 설치하였으며:1596년(선조29) 8월의 일이다. 원충갑은 고려 충렬왕 때의 향공진사(鄕貢進士)이다. 원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패배한 내안(乃顔)의 잔당 두목으로 2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합단(哈丹)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670년(현종11)에 충렬사(忠烈祠)로 사액(賜額)하였다. 국역 동사강목 6집 제12하 계미년 국역 현종실록 11년 윤2월 7일

109)국상(國殤):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楚辭 九歌

110)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정구(鄭逑)가 송나라의 성리학자 정호(程顥), 정이(程頤), 사마광(司馬光), 장재(張載), 주자(朱子) 5인의 예설을 모아 만든 책이다. 관(冠), 혼(婚), 상(喪), 제(祭)와 잡례(雜禮) 등을 체계 있게 분류하여 전집(前集) 8권 3책, 후집(後集) 12권 4책으로 만들었다. 전집은 주로 천자와 제후에 대한 예를 다루었고, 후집은 일반 사대부에 관한 예를 다루었다.

111)중종으로……않았다:무조(武曌)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후(后)로서, 고종이 죽자 아들인 중종(中宗)을 즉위시켰다가 폐위하고, 다시 중종의 동생인 예종(睿宗)을 즉위시켰다. 다시 예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랐다. 舊唐書 卷6 則天皇后本紀》 《朱子語類 卷136여기에서 주자는 중종이 어머니에 의해 폐위를 당하면서도 거역하지 않고 따랐다고 말한 것이다.

112)길(吉), 흉(凶), 회(悔), 린(吝):주역의 대표적인 점사(占辭)로서 장차 일어날 상황을 예시하는 말이다. 회(悔)는 후회를 하게 된다는 말이고, 린(吝)은 곤궁한 일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113)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선조22)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로,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등이 상고(上告)하여 정여립 등이 모반한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진안(鎭安)으로 도망갔다가 관군의 포위 속에 자살하고 정옥남은 잡혀 왔다. 이때 옥사를 맡아 처리한 사람은 서인 정철(鄭澈)이었다. 동인의 명사(名士) 중에서 이발(李潑), 이길(李洁), 백유양(白惟讓), 유몽정(柳夢井), 최영경(崔永慶) 등이 단지 정여립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으며, 정언신(鄭彦信), 정언지(鄭彦智), 정개청(鄭介淸) 등이 유배되고, 노수신(盧守愼)은 파직되었다. 옥사는 2년이나 걸려서 처리되었는데, 이때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입었으며, 한때는 전라도를 반역지향(叛逆之鄕)이라 하여 그 지방 인재의 등용에 제한이 가하여졌다.

114)백사(白沙)……없애버렸다:백사집은 맨 처음 강릉에서 간행되어 이를 강릉본(江陵本)이라고 하고, 6년 뒤에 진주에서 중간되었는데 이를 진주본(晉州本)이라고 한다. 미수는 강릉본에 기축록이 들어 있었는데, 중간본인 진주본에서는 이것을 빼내고 위작 기축록을 끼워 넣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강릉본에는 원래 기축록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윤선도(尹善道)는 교묘하게 개작하여 진주본에 수록하였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강릉본에 기축기사(己丑記事)기축록이 수록되어 있었다는 미수의 말은 사실과 다른 것이 분명하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白沙集

115)정철(鄭澈)이……변경해서:정개청(鄭介淸)의 글에 동한진송소상부동설(東漢晉宋所尙不同說)이 있는데 이를 절의설(節義說)이라고 한다. 기축옥사 때에 정철의 당여인 정암수(丁巖壽) 등이 이것을 배절의설이라고 이름하여 정개청을 무함한 일을 가리킨다. 愚得錄 附錄上 困齋先生事實, 韓國文集叢刊 40輯

116) 심옹(心翁):이정호(李挺豪:1578〜1639)의 호이다. 115쪽 주 9) 참조.

117)설옹(雪翁):미수의 당형(堂兄) 허후(許厚:1588~1661)이다. 호는 관설(觀雪), 돈계(遯溪), 일휴(逸休)이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남인으로서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服喪)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의 기년설에 반대하여 삼년설을 주장하였다. 권46 설공(雪公) 편년기사(編年紀事)에 행적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118) 경전요해(經傳要解):143쪽 주 5) 참조.

119)백해(白海):원나라 이후에 백해군(白海軍)이니 백해주(白海州)니 하는 지명이 기록에 등장하고, 원 세조(元世祖) 17년에 백해에 행궁(行宮)을 짓고 19년에는 이 행궁에 행행(行幸)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원나라 때에 만들어진 지명이며, 다른 자료에도 발해(渤海)나 낙타산(駱駝山)이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발해만(渤海灣) 지역을 가리키는 듯하다. 元史 卷160 王思廉列傳

120)부경(浮磬):물속에 있는 돌인데 윗부분이 물 위로 돌출하여 나와 있기 때문에 물에 떠 있는 돌처럼 보이고, 이 돌로 경쇠[磬]를 만들기 때문에 부경이라고 한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서주(徐州)에서 생산된다고 하였다. 백제 서남쪽 바닷가에서 바라보이는 중국의 위치가 서주이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다.

121)도이(島夷)가……하며:서경 우공 양주(楊州)에 “도이는 훼복을 입는다.[島夷卉服]” 하였는데, 채침(蔡沈)의 주(註)에 “도이는 중국 동남쪽 섬에 사는 오랑캐이고, 이들이 입는 옷감이 갈포(葛布)와 부들로 짠 베와 목면 등속이다.”라고 하였다.

122)서주(徐州)에서……올리네:서경 우공 서주에 “회이는 조개와 진주와 어물을 바친다.[淮夷蠙珠曁魚]”라고 하였는데, 채침의 주에 “어물은 제사에 쓰는 것인데, 지금 호(濠), 사(泗), 초(楚)가 모두 회수(淮水)의 백어(白魚)를 바치니, 이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제도이다.” 하였다.

123)전횡(田橫)의 섬:160쪽 주 1) 참조.

124)구이(九夷)와 팔만(八蠻):주례(周禮)에는 사이(四夷)와 팔만으로 나오고, 서경(書經)이아(爾雅)에는 구이와 팔만으로 나오는데, 이에 대한 설은 선유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이아 이순(李巡)의 주(註)에는 구이와 팔만을 하나하나 거론하고 있지만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여기에서는 중국 구주(九州) 밖의 여러 만이(蠻夷)를 통틀어 말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25)몇 번을 거듭 통역하여:주(周)나라 성왕(成王) 때에 남방(南方)의 월상(越裳)이 세 번 통역을 거쳐 와서 입조(入朝)한 일이 있다. 남방은 중국과 언어와 풍속이 달라 여러 단계의 통역을 거쳐야만 의사소통이 되기 때문이다. 尙書大傳 卷4

126)하남은 온조(溫祚)의 나라이니: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아들인 비류(沸流)와 온조가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漢山)에 이르러 정착하려 하자 열 명의 신하가 하남(河南)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 고악(高岳)에 의거하며, 남쪽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대해(大海)가 막혀 있으므로 천험의 지리(地利)라고 하면서 도읍하기를 청했으나 비류가 듣지 않고 미추홀(彌雛忽)로 돌아가 정착하였다. 이에 온조가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익(輔翼)으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三國遺事 卷2 紀異 第2

127)팽조(彭祖)나 상자(殤子)가 매일반이니:팽조는 요(堯) 임금 때부터 은(殷)나라 말기까지 800년을 살았다는 사람이고, 상자는 19세 이전에 죽은 사람을 가리킨다. 장자(莊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상자만 한 장수가 없고, 팽조만 한 단명이 없다.” 하였는데, 이 말은 큰 관점에서 보면 팽조의 장수나 상자의 단명이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128)자신의……않았네:증자가 “저들이 부(富)를 내세우면 나는 내 인(仁)으로 상대하고, 저들이 관작(官爵)을 내세우면 나는 내 의(義)로 상대하니 내가 어찌 부족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孟子 公孫丑下

129)귀허(歸墟):전설상 바다 속에 있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을 말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발해(渤海)의 동쪽 몇 십만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곳에 큰 골짜기가 있는데, 실로 밑이 없는 골짜기이다. 그 아래는 밑이 없고, 이름을 귀허라고 한다.” 하였다.

130)기(虁)는 외발이고: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에 “동해 가운데 유파산(流波山)이 있는데, 바다로 7천 리를 들어간다. 그 위에 짐승이 있는데, 모양은 소와 같고 몸은 푸른색이고 뿔이 없으며 다리가 하나이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나오면 반드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데, 그 빛이 해나 달과 같고 그 소리는 우레와 같은데, 이름을 기라고 한다.” 하였다.

131)거북은 동자가 여섯이며:신령한 동물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거북이다. 이아(爾雅) 석어(釋魚)의 ‘별삼족(鱉三足)’에 대한 곽박(郭璞)의 주에 “지금 오흥군(吳興郡) 양선현(陽羨縣)의 산 위에 연못이 있는데, 못 안에 발이 세 개인 자라와 눈동자가 여섯인 거북이 있다.”라고 하였다.

132)교인(鮫人):전설상의 인어(人魚)이다. 진(晉)나라 사람 장화(張華)가 지은 박물지(博物志)에 “남해 밖에 교인이 있는데 물고기처럼 물에 산다. 그들은 비단을 짜서 뭍에 나와 남의 집에 기거하며 팔고, 떠날 때에 주인에게 빈 그릇을 달라고 하여 그 그릇에 눈물을 흘려 진주를 만들어서 선물로 준다.” 하였다.

133)능어(鯪魚)들:유종원(柳宗元)의 초해고문(招海賈文)에 “능어들 나란히 헤엄치고 귀가 들쭉날쭉하네.[三角騈列耳離披]”라는 글이 있는데, 한순(韓醇)의 주에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능어의 등과 배에 모두 가시가 있어서 삼각유(三角羑)와 같다고 하였다.” 하였다.

134)양빙(陽氷)은 두께가 오촌이고:햇볕을 쬔 얼음을 양빙이라고 한다. 왕염손(王念孫)의 독서잡지(讀書雜志)에서 안자춘추(晏子春秋)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음빙(陰氷)은 햇볕을 쬐지 않은 얼음이고, 양빙은 햇볕을 쬔 얼음이다. 햇볕을 쬐지 않은 얼음은 꽁꽁 얼어 있고, 햇볕을 쬔 얼음은 두께가 5촌밖에 되지 않는다.” 하였다.

135)음화(陰火)는 가만히 타네:음화는 바다 속에 사는 생물이 발산하는 빛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가(王嘉)가 쓴 습유기(拾遺記)당요(唐堯)에 “서해의 서쪽에 부옥산(浮玉山)이 있고 산 아래에 큰 굴이 있는데, 굴 속에는 물이 차 있고 그 색이 불과 같다. 낮에는 투명하여 밝지 않다가 밤이 되면 굴 밖까지 빛이 나서 꺼지지 않는데 이것을 음화라고 한다.” 하였다.

136)고르지……흑치국:유종원의 초해고문에 “임금이 돌아오지 않음이여, 끝내 고르지 않은 이 드러내고 비늘 무늬 피부를 가진 흑치의 포로가 되었네.[君不返兮 終為虜黑齒棧齴鱗文肌]”라는 구절이 있는데, 한순(韓醇)의 주에 “흑치는 바다 밖의 나라 이름이다.” 하였고, 동종열(童宗說)의 주에 “잔(棧)은 치아가 고르지 않은 것이고, 언(齴)은 치아가 드러난 것이다.” 하였다. 五百家註柳先生集 卷18

137)조와(爪蛙):옛날 사바국(闍婆國)인데, 동으로는 옛날 여인국(女人國)과 접해 있고, 서로는 삼불제국(三佛齊國)과 접해 있고, 남으로는 옛날 대식국(大食國)과 접해 있고, 북으로는 점성국(占城國)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송나라 순화(淳化) 연간과 대관(大觀)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바 있다. 嶺海輿圖 南夷島紀

138)호연(蠔蜒):수상생활을 하는 족속의 일종이다. 연만(蜒蠻)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어연(魚蜒)으로 그물질을 잘하고, 하나는 호연으로 자맥질을 잘하고, 하나는 목연(木蜒)으로 재목을 잘 벤다. 通雅 卷14 地輿

139)오의국(烏衣國):당나라 금릉(金陵) 사람 왕사(王謝)가 풍랑을 만나 한 섬에 표류하였는데 섬 사람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나라를 오의국이라고 하였는데, 왕이 자기의 딸과 혼인을 시켰다. 왕사가 고향을 그리워하자 왕이 구름을 태워 보냈는데, 집에 돌아와서야 그곳이 제비 나라였다는 것을 알았다. 記纂淵海 卷97

140)나인국(裸人國):목현허(木玄虛)의 해부(海賦)에 “바람 따라 나인(裸人)의 나라에 들어가고, 물결따라 흑치(黑齒)의 나라에 표류한다.” 하였는데, 이선(李善)의 주에 회남자(淮南子)를 인용하여 “서남으로부터 동남에 이르면 나인의 나라와 흑치의 백성이 있다.” 하였고, 허신(許愼)의 주에 “그 백성은 옷을 입지 않고, 그 사람들은 치아가 검다.” 하였다. 文選 卷12 海賦

141)삼불제국(三佛齊國):본래 남만(南蠻)의 별종인데, 점성(占城) 남쪽에 있다. 송나라 건륭(建隆) 초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嶺海輿圖 南夷島紀

142)사화공국(沙華公國):동남쪽 바다에 사화공국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대부분 큰 바다에 나가서 해적질을 하고, 사람을 잡아서 매매한다. 嶺外代答 卷3 東南海上諸雜國

143)석목(析木)과 천허(天墟):목현허의 해부에 “그 바다가 끝없이 넓어 남쪽으로는 주애(朱崖)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천허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석목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에 닿는다.” 하였다. 천허와 석목은 모두 별자리인데, 여기에서는 이 별자리가 가리키는 분야(分野)를 가리킨다. 원문의 ‘折木’은 해부에 의거하여 ‘析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文選 卷12 海賦

144)망상(蝄像)은 사람을 잡아먹고:공자가 계환자(季桓子)에게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목석(木石)의 괴물은 기(夔)이고, 물의 괴물은 용과 망상이고, 흙의 괴물은 분양(羵羊)이라고 하더라.” 하였는데, 위소(韋昭)의 주에 “망상은 사람을 잡아먹는다.” 하였다. 國語 魯語下

145)천오(天吳):조양(朝陽)의 골짜기에 신이 있어 천오라고 하는데, 바로 수백(水伯)이다. 머리가 여덟 개이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다리가 여덟 개 꼬리가 여덟 개인데 모두 청황색을 띠고 있다. 山海經 海外東經

146)해동(海童)과……막아서고:목현허의 해부에 “해동은 길을 가로막고, 마함(馬銜)은 지름길을 막아서네.[有海童邀路馬銜當蹊]”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해동은 해신의 동자이다. 육유(陸綏)의 해부도(海賦圖)에 “마함은 그 모습이 말의 머리에 뿔이 하나이고 용의 형상이다.” 하였다. 文選 卷12 海賦

147)구관조……트니:노나라 문공(文公)과 성공(成公) 시기에 동요가 있었는데, 그 가사에 “구관조 날아와 둥지 트니 공(公)이 나가서 욕을 당하도다.[鸜之鵒之 公出辱之]”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공이 나가서 욕을 당한다는 말은 소공(昭公)이 국외로 달아나 욕을 당한다는 말이다. 미수가 이 말을 끌어다 쓴 것은, 이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고, 왕자들이 볼모로 심양에 끌려간 일을 빗대기 위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昭公25

148) 은거한 자 칠인이로다:공자가 은거하는 일에 대해 말하면서 이 말을 하였는데, 그 일곱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주자 역시 주석을 내면서 낱낱의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論語 憲問

149)사(師)와……들어가고:노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현자들이 떠나서 은거하였는데, 노나라의 악관이었던 소사(少師)인 양(陽)과 경쇠를 치던 양(襄)은 해도(海島)로 들어갔다. 論語 微子

150)토정(土正)과……후직(后稷)이네:토정은 땅을 담당하는 관원인데, 공공씨(共工氏)의 아들 구룡(句龍)이 수토(水土)를 평정하여 토정이 되었다. 선색(先穡)은 상세(上世)에 백성에게 농사를 가르쳤던 사람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 지내는 대상인데, 주(周)나라의 시조 후직이 순 임금 때 농관이 되어 백성에게 농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선색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春秋左氏傳 昭公29年

151)삼양(三陽)……수선하고:삼양은 양효(陽爻) 셋이 올라오는 때이니, 음력으로 정월을 가리킨다. 이때에 농기구를 수선하여 농사 준비를 한다는 말이다. 시경에는 신(辰) 자 대신 일(日) 자를 쓰고 있다. 詩經 豳風 七月

152)사양(四陽)……베네:사양은 양효 넷이 올라오는 때이니, 음력 2월을 가리킨다. 이때에 풀과 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쟁기질한다. 詩經 周頌 載芟

153)복숭아를……보답:시경 대아(大雅) 억(抑)에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주면 오얏으로 보답한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임금이 덕을 행함에 있어 위의(威儀)에 허물이 없으면 법도가 되지 않는 경우가 적은 것이 이와 같다는 말이다.

154)노사(魯史):공자가 노나라의 사책(史冊)에 의거하여 춘추를 썼기 때문에 춘추라고 하지 않고 노사라고 바꾸어 말한 것이다.

155)대일통(大一統):229쪽 주 15) 참조.

156)공문(空文)을 남기셨도다:당대에 쓰이지 못한 글을 말한다. 사마천(司馬遷)이 쓴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춘추를 지어 공문(空文)을 남겨서 예(禮)와 의(義)를 결단하여 한 왕의 법을 대신하였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183

157)기후를……있어:서경 요전(堯典)에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에 있게 하시니, 이곳이 곧 양곡(暘谷)이다. 뜨는 해를 공경히 맞이하여 농사 때를 고르게 한다.” 하였는데, 희중이 측후관(測候官)으로서 동표(東表)가 있는 우이 지역에 나가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살펴서 농사지을 때를 정한 것이다.

158)제곡(帝嚳)이……관찰하여: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제곡 고신씨(高辛氏)가 해와 달의 운행을 관찰하여 맞이하고 전송하였다.” 하였는데, 장수절(張守節)이 말하기를, “책력을 만들어 상현과 하현, 보름과 그믐, 초하루에 해와 달이 이르지 않았을 때 맞이하고, 지나간 뒤에 전송한다.” 하였다. 欽定書經傳說彙纂 卷1 虞書

159)금인(金人)의 명문(銘文):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공자가 주(周)나라에 가서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갔는데, 사당의 오른쪽 섬돌 앞에 금인(金人)이 있었다. 그 입을 세 번 봉하고 그 등에 “옛날에 말을 조심한 사람이다. 경계할지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다. 일을 많이 만들지 말라. 일이 많으면 근심이 많다.”라는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 孔子家語 觀周 第11

160)함():미수의 둘째 아들이다. 원문은 글자가 뭉개져 알 수 없는데, 권43 정경부인 전주 이씨 묘명(墓銘)에 함이 안협 현감(安峽縣監)이라고 나온다.

161)십익(十翼)에……하였고:십익은 주역 설괘전(說卦傳)을 가리킨다. 이 전의 제8장에서 팔괘(八卦)를 각각 동물에 배치하였는데, “건(乾)은 말이 되고, 곤(坤)은 소가 되고, 진(震)은 용이 되고, 손(巽)은 닭이 되고, 감(坎)은 돼지가 되고, 이(離)는 꿩이 되고, 간(艮)은 개가 되고, 태(兌)는 양이 된다.” 하였다.

162)홍범(洪範)에……하였다:서경 홍범에 오행(五行)의 성질을 말하면서, “수(水)는 윤택하고 아래로 내려가고, 화(火)는 불타고 위로 올라가고, 목(木)은 굽거나 곧고, 금(金)은 그대로 따르거나 변하고, 토(土)는 이에 가색(稼穡)한다.” 하였다.

163)세시(歲時)에 대나(大儺)를 하고:주례 하관사마(夏官司馬) 방상시(方相氏)에 “방상시가 창과 방패를 들고 때[時]에 나(儺)를 한다.” 하였는데, 이 시(時) 자를 정현(鄭玄)은 사시(四時)라고 하였고, 가공언(賈公彦)은 봄, 가을, 겨울 세 계절로 보았다. 여기에서 대나는 가공언의 설에 의하면 12월에 백성들도 함께 하는 것을 가리킨다.

164)박수가……해소하며:주례 춘관종백(春官宗伯) 남무(男巫)에 “봄에 초미(招弭)하여 질병을 제거한다.” 하였는데, 정현의 주에 “초(招)는 복을 부르는 것이고, 미(弭)는 흉화(凶禍)를 해소하여 안정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165)무녀(巫女)가……제거한다:주례 춘관종백 여무(女巫)에 “여무가 세시(歲時)에 불제(祓除)와 흔욕(釁浴)을 관장한다.” 하였는데, 정현의 주에 “세시에 불제한다는 것은 3월 상사일(上巳日)에 물에 가서 목욕하는 것이고, 흔욕은 향내나는 약초로 목욕하는 것이다.” 하였다.

166)양책(禳磔):양은 화를 제거한다는 뜻이고, 책은 희생을 찢는다는 뜻이니, 희생을 잡아 역귀(疫鬼)를 쫓아내는 의식을 말한다. 禮記 月令

167)효종:원문에는 ‘仁祖’로 되어 있으나 기언 권16 삼현사기(三賢祠記)에 의거하여 ‘孝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68)금상……경진일:숙종 8년을 가리키는데, 미수 연보에는 숙종 7년에 고려 서 장령 묘기(高麗徐掌令墓記)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년의 오차가 생긴다. 그러나 숙종 74월 상순에는 경진일이 없고, 숙종 84월 상순에는 경진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보가 오류인 듯하다.

169)임사홍(任士洪):원문에는 ‘任士弘’으로 되어 있으나 성종실록연산군일기에 의거하여 ‘弘’을 ‘洪’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70)좌씨(左氏):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리킨다.

171)전국장단서(戰國長短書):전국책(戰國策)의 별칭으로, 장단경(長短經)이라고도 한다. 유향(劉向)이 지은 서(序)에 “책의 이름을 혹은 국책(國策), 혹은 국사(國事), 혹은 장단(長短), 혹은 사어(事語), 혹은 장서(長書), 혹은 수서(修書)라고 하는데, 신 유향의 생각으로는 전국 시대에 유사(遊士)들이 등용된 나라를 보좌하면서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내서 도모한 것이므로 전국책이라고 해야 합당합니다.” 한 것으로 보아 유향 이전에는 일정한 이름이 없었던 것 같다.

172)서한(西漢):한서(漢書)를 가리킨다.

173)태사공(太史公):사기(史記)를 가리킨다. 사마천(司馬遷)의 관직이 태사령이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174)상여(相如):사마상여(司馬相如)인데, 그가 지은 사부(辭賦)를 가리킨다.

175)양웅(揚雄):양웅의 저작인 법언(法言)이나 태현경(太玄經) 등을 가리킨다.

176)우서(虞書)와 하서(夏書):서경(書經)의 편명으로, 우서에는 요전(堯典), 순전(舜典),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 익직(益稷)이 들어 있고, 하서에는 우공(禹貢), 감서(甘誓), 오자지가(五子之歌), 윤정(胤征)이 들어 있다.

177)상시(商詩):시경(詩經) 상송(商頌)을 가리킨다.

178)주고(周誥)의 난삽함:주고는 단일 편명이 아니라 서경 주서(周書)에 들어 있는 여러 고문(誥文)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특히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소고(召誥), 낙고(洛誥) 다섯 편과 반경(盤庚) 세 편을 합쳐서 삼반오고(三盤五誥)라고 하여 서경 중에서 가장 어려운 편으로 꼽는다.

179)황제(黃帝)로부터……이르렀다: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상한선은 황제(黃帝)로 잡고, 한 무제(漢武帝) 원수(元狩) 원년(B.C.122) 10월에 무제가 옹주(雍州)에 행행(行幸)하여 흰 기린을 잡은 것으로 하한선을 잡았으니, 공자가 춘추를 쓰면서 획린(獲麟)에서 붓을 그친 것과 같은 의미이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180)거평(居平):나주목(羅州牧) 회진현(會津縣)에 있던 부곡(部曲)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5 全羅道 羅州牧

181)만물이 모두 형통하여:주역 곤괘(坤卦) 단전(彖傳)에 “포용하고 너그러우며 빛나고 위대하여 만물이 모두 형통하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182)각각……한다:주역 건괘(乾卦) 상전(象傳)에 “건도(乾道)가 변(變)하여 화(化)함에 각각 성명(性命)을 바룬다.” 하였는데, 주자의 본의(本義)에 “이는 건도가 변화하여 이롭지 않은 바가 없는데, 만물이 각기 그 성명을 얻어서 스스로 온전히 함을 말하였으니, 이(利)와 정(貞)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하였다.

183)지극한……않는다:중용장구(中庸章句)제27장에 “크도다, 성인의 도여! 널리 만물을 태어나게 하고 길러주어 그 고대(高大)함이 하늘의 고대함을 다하였도다. 넉넉하게 크도다. 경례(經禮)의 의절(儀節)이 300가지이고, 곡례(曲禮)의 위의(威儀)가 3000가지나 되는데, 그 사람을 기다린 뒤에야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어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주자의 주에 “지극한 덕은 그 사람을 말하고, 지극한 도는 위의 두 절(節)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어린다[凝]는 것은 모임이며 이룸이다.” 하였다.

184)타고난……것이니:중용장구22장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능히 다한다는 것은 아는 것이 밝지 않음이 없고, 대처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다.

185)천하의……것이니:중용장구 제32장의 일부이다. 주자의 주에 “대경(大經)이란 오품(五品)의 인륜이다. 오직 성인의 덕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망녕됨이 없기 때문에 인륜에 있어 각각 그 당연한 실상을 다하여 모두 천하 후세의 법이 될 수 있으니 이른바 경륜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186)지성스럽지……된다:중용장구 제25장에 “성(誠)이란 사물의 마침과 시작이니, 성(誠)하지 않으면 사물이 성립될 수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성(誠)을 귀하게 여긴다.” 하였는데, 성(誠)이란 진실하여 망녕됨이 없는 것이다. 진실로써 사물이 시작되고 진실로써 사물이 종결되는데 그 진실이 빠지면 사물이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이다.

187)곧은……않았네:유하혜(柳下惠)가 옥관(獄官)으로 있으면서 세 번이나 쫓겨나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 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로 가라고 권하니, 유하혜가 말하기를, “도를 곧게 펴서 남을 섬기면 어디를 가든 세 번 쫓겨나지 않겠는가. 도를 굽혀서 남을 섬기려고 한다면 굳이 부모의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갈 것이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로, 김현경(金顯卿)의 강직함을 칭찬한 내용이다. 論語 微子

188)경뢰절(驚雷節):음력 2월을 가리킨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중춘(仲春)의 달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 천둥소리가 비로소 울리고 번개가 치며, 동면하던 벌레들이 땅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여 땅 위로 구멍을 뚫고 나오려 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189)우계(羽溪):강릉 도호부(江陵都護府)에 속한 우계현(羽溪縣)이다. 미수(眉叟)는 병자호란을 만나 영동(嶺東)으로 피난을 갔는데, 우계에 이른 것은 1637년(인조15) 봄이었다.

190)부상(扶桑):동해(東海)에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나무로, 그 아래에서 해가 떠오른다 하여 해가 뜨는 곳 또는 해를 지칭한다. 《淮南子 天文訓》

191)청제(靑帝)가……매고:청제는 오제(五帝) 중의 하나로 동방에 위치하여 봄을 주관하는 신(神)이다. 목제(木帝) 또는 창제(蒼帝)라고도 한다. 푸른 용에 멍에 맨다는 것은 오행(五行)에서 청색이 동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즉 봄이 왔음을 형용한 구절이다.

192)희백(羲伯)이……나왔어라:희백은 요(堯) 임금의 신하 희중(羲仲)으로, 희(羲)는 그의 성(姓)이고 백(伯)은 관작인데, 역상(易象)을 맡아 농사철을 알려 주는 일을 담당하였다. 우이(嵎夷)는 해가 뜨는 곳으로, 고대 중국의 동쪽 끝인 산동(山東)의 해변에 있었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나누어 명하여 우이에 머물게 하시니, 이곳은 양곡이라고 일컫는바, 나오는 해를 공경히 맞이하여 봄에 시작하는 일을 고르게 차례대로 행한다.” 하였다.

193)금오(金烏)가 높이 나니:금오는 태양 속에 산다는 세 발을 가진 까마귀로, 삼족오(三足烏)라고도 한다. 태양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며, 여기에서는 일출을 가리킨다.

194)의춘(宜春):경상도 의령(宜寧)을 가리킨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미수는 관동(關東)으로 피난 갔다가 죽령(竹嶺)을 넘어 영남으로 내려가 1645년까지 10여 년 동안 객지 생활을 하였는데, 그중 1638년부터 1641년까지는 의령 모의촌(慕義村)에서 우거(寓居)하였다.

195)남쪽……되니:원문의 일남(日南)은 동지를 뜻하는 일남지(日南至)의 준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난을 만나 떠돌다가 남쪽 끝인 의령까지 오게 된 것을 한탄하는 것으로 보아 이렇게 번역하였다.

196)소문(召文):옛날 소문국(召文國)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경상도 의성(義城)이다. 신라 때 문소군(聞召郡)으로 삼았다가 고려 때 의성현으로 바뀌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5 慶尙道 義城縣》

197)방이(傍珥):해나 달 주위를 두른 둥근 테 모양의 빛, 즉 무리를 말한다.

198)촉룡(燭龍)이……듯:촉룡은 적수(赤水)의 북쪽 장미산(章眉山)에 있었던 신(神)의 이름으로, 붉은색 뱀의 몸에 사람 얼굴을 하였으며 신장은 천리나 되는데, 촉룡이 눈을 뜨면 천지가 밝아지고 눈을 감으면 천지가 어두워졌다고 한다. 《山海經 大荒北經》  한문(寒門)은 북쪽에 있는 극도로 한랭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199)축융(祝融)이……듯:축융은 태고(太古) 시절 제곡(帝嚳)의 화관(火官)이었는데 뒤에 화신(火神)으로 높여졌다. 여기에서는 하늘을 붉게 물들인 햇무리와 한재(旱災)를 형용하기 위해서 불의 신인 축융을 언급하였다.

200)요(堯) 임금……떨어뜨렸다더니:요 임금 때 10개의 해가 한꺼번에 떠서 농작물과 초목이 모두 말라 버려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 이에 요가 예에게 명하여 해를 쏘게 하자, 예가 9개의 해를 맞혀서 땅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淮南子 本經訓》

201)칠 년간……일:탕(湯)이 즉위한 후 8년 동안 7년을 큰 가뭄이 들어 곡식이 다 말라 죽었는데, 탕이 상림(桑林)에서 6가지 일로써 자신의 정치가 잘못되었음을 자책하며 하늘에 빌자 하늘이 감동하여 큰비가 내렸다는 고사이다. 격천(格天)은 정성이 하늘에까지 닿아 감동시킴을 이른다. 《呂氏春秋 順民》 《莊子 秋水》

202)구 년간……없으리라:요 임금 때 9년 동안 장마가 계속되어 순(舜) 임금이 계위한 뒤에도 심각하였다. 백성들이 땅에서 살 수가 없자 우(禹)에게 홍수를 다스리도록 명하였는데, 우가 자연적인 형세에 따라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땅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우는 치수(治水) 사업을 펼치는 8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고 자신의 집 앞을 세 번 지나가면서도 한 번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書經 禹貢》 《孟子 滕文公上》 《莊子 秋水》 이 구절은 가뭄이 워낙 심한 상황이어서 9년간 계속 비가 오더라도 치수 사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말이다.

203)양후(陽侯):파도의 신을 가리킨다. 항상 배를 전복시키므로 파도를 지칭하기도 한다. 《戰國策 卷27 韓策2》

204)시장도 옮겨 보고:고례(古禮)에 천자나 제후의 상을 당했을 때와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시장을 옮겼는데, 이것은 한재나 국상을 당했을 때 재리(財利)를 추구하지 않고 기초적인 생필품만 조달함으로써 근심과 경건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禮記 檀弓下》

205)황모(黃母):문맥상 불귀신을 가리키는 듯하나, 그에 해당하는 전거는 찾지 못하였다.

206)구망(句芒)의……재앙인데:구망은 본래 목신(木神)이나, 오행(五行)에서 목(木)은 동방(東方)과 봄을 가리키므로 여기에서는 봄의 신을 지칭한다. 1쪽 주 4) 참조.  백제(白帝)는 서방(西方)을 맡은 신으로, 여기에서는 가을의 신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봄을 맡은 신이 잘못하여 가뭄이 들면 농사를 그르쳐서 가을에 수확을 거두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207)동쪽으로……없어라:황하(黃河)가 도도하게 동쪽으로 흐르듯 극심한 가뭄의 기세를 막을 수 없음을 형용한 말로 보인다.

208)서울……하는구나: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가뭄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그저 걱정스러운 마음을 시로만 표현할 뿐이라는 뜻이다. 이때 미수가 서울을 떠나 객지로 떠도는 처지였기 때문에 자신의 심사를 아울러 담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백(李白)의 시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에 “이 모두 뜬구름이 하늘 가린 탓이라, 장안을 보지 못해 근심하게 하는구나.[總爲浮雲能蔽日 長安不見使人愁]”라고 한 구절을 끌어다 이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李太白文集 卷18》

209)신포서(申包胥)의……보존했고:신포서가 손발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나라를 위해 애쓴 덕에 초나라가 보존되었다는 말이다. 신포서는 춘추 시대 초나라의 대부이다.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 서울 영(郢)으로 침입하여 왕이 피난하는 국난을 만나 신포서가 진(秦)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가 지원을 허락하지 않자, 신포서는 대궐 뜰에서 밤낮으로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서 7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에 진나라 애공(哀公)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구원병을 내어 오나라를 물리쳤다. 《春秋左氏傳 定公4年》

210)노중련(魯仲連)의……부지했지: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나라의 고사(高士)이다. 전국 시대 말에 제후들이 강성한 진(秦)나라를 황제국으로 떠받들려 하였는데, 노중련이 “포악한 진나라를 황제국으로 떠받든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에 뛰어들어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며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저지했던 일을 말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211)은반(殷盤):《서경》 〈상서(商書) 반경(盤庚)〉으로, 은(殷)나라 임금 반경(盤庚)이 백성들에게 고한 글이다. 내용이 난삽하고 해독하기 어려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12)초옥(楚玉)을……두려워서이니:초옥은 춘추 시대 초나라 변화(卞和)의 옥으로, 화씨벽(和氏璧)이라고도 불린다. 변화가 형산(荊山)에서 보옥(寶玉)이 들어 있는 박옥(樸玉)을 찾아내어 초나라 여왕(厲王)에게 바쳤으나, 옥이 아니고 돌이라는 옥공(玉工)들의 감정(鑑定) 때문에 죄를 받아 왼쪽 발이 잘렸다. 여왕이 죽은 후 다시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같은 이유로 오른쪽 발이 잘렸다. 뒤에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이를 다시 바쳤는데, 왕이 그것을 옥공에게 다듬게 한 결과 세상에서 다시 얻기 어려운 귀중한 보옥을 얻게 되었다. 《韓非子 卷4 和氏》 여기에서는 미수가 자신이 세상에 나가지 않는 것은 그로 인해 혹독한 정치적 화란을 겪게 될까 두려워해서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213)생생(生生):끊임없이 생성하는 만물, 또는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이치를 가리킨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낳고 낳음을 역이라 한다.[生生之謂易]”라고 하였다.

214)천지를……있지:만물이 각각 그 성(性)을 이루는 것이 중화에 달렸다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215)촉도(蜀道):험난하기로 이름난 중국 촉(蜀) 지방의 잔도(棧道)를 가리킨다. 이백(李白)은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에서 “아, 위태롭고도 높도다! 촉도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네.[噫噓嚱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한 바 있다. 李太白集 卷2

216)장저(長沮)와 걸닉(桀溺):춘추 시대 초나라의 은사(隱士)이다. 세상을 피해 함께 농사지으며 은거하였고, 공자(孔子)가 세상을 바꾸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비판하였던 사람들이다. 《論語 微子》

217)박 사재(朴四宰):사재(四宰)는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다.

218)사패비(賜牌婢):임금이 종친이나 공신에게 내려 주는 여종을 말한다.

219)맥북(貊北):고대 한반도 북쪽에 자리 잡았던 고조선 등 예맥(穢貊) 계열의 초기 국가를 가리키나, 여기에서는 강원도 일대를 말한다.

220)용종(龍鐘)의……낭간(琅玕)이라네:용종은 용종죽(龍鍾竹)으로 대나무의 별칭이며, 낭간은 경옥(硬玉)의 하나로 짙은 녹색 또는 청백색을 띠는데 여기서는 대나무의 푸른 빛깔을 가리킨다. 두보(杜甫)의 시 〈정부마댁연동중(鄭駙馬宅宴洞中)〉에 “그늘진 골 공주 집에 고운 연무 자욱한데, 손이 머문 여름 자리 푸른 낭간이로다.[主家陰洞細煙霧 留客夏簟靑琅玕]”라고 한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

221)영륜(伶倫)은……배웠고:영륜은 황제(黃帝) 때의 악관(樂官)으로, 황제의 명을 받고 악률(樂律)을 처음 만들었다. 맨 먼저 곤륜산(崑崙山) 동쪽에 가서 해계(嶰磎) 골짜기의 대를 취하여 황종(黃鍾)의 궁(宮)을 만들고, 또 12관(管)을 만든 다음 곤륜산 아래에 가서 봉황의 울음소리를 들어 12율(律)을 구별하였다고 한다. 《呂氏春秋 仲夏紀 古樂》

222)푸른 눈길:반가운 눈길을 뜻한다. 진(晉)나라 완적(阮籍)이 미운 사람을 만나면 백안(白眼)으로 보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청안(靑眼)으로 보았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223)모아(毛兒):경상도 의령(宜寧)에 속한 지명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1 慶尙道 宜寧縣》

224)학사의 옛 필적:최치원(崔致遠)이 짓고 쓴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를 가리킨다. 이 비문은 신라(新羅) 진성여왕(眞聖女王) 1년(887)에 세운 것이라 한다. 《記言 卷28 智異山靑鶴洞記, 韓國文集叢刊 98輯》

225)진결(眞訣) 전해지지 않아:신선이 되는 비결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최치원이 말년에 은거하여 유랑하다가 신선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226)학……산:청학동(靑鶴洞)을 두고 한 말이다. 옛날에 이곳에 푸른 학이 살고 있어서 청학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나, 미수가 이곳을 유람했던 당시에는 학이 날아오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記言 卷28 智異山靑鶴洞記, 韓國文集叢刊 98輯》

227)현포(玄圃):곤륜산(崑崙山) 정상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곳이다.

228)영대(靈臺):해남(海南) 천관산(天冠山)에 있는 통령대(通靈臺)를 가리킨다. 《記言 卷28 天冠山記, 韓國文集叢刊 98輯》

229)양지(良知):인간이 배우지 않고도 아는 것, 즉 본연적인 지혜를 말한다. 《孟子 盡心上》

230)옛사람 하신 말씀:《맹자》 〈진심 상〉에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은 양능(良能)이요,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은 양지이다. 어린아이라도 제 어버이를 사랑할 줄을 모르는 이는 없고, 장성함에 미쳐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231)군자는……여기니:확충은 인간의 본연적인 선(善)을 미루어 넓히고 채워 나가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효성을 더욱 미루어 넓히고 채워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232)열……구천이니:이곳의 창포는 1치[寸]에 아홉 마디가 있는 구절포(九節蒲)인데, 구절포는 창포 중에서도 좋은 것으로 꼽힌다 한다. 여기에서는 키가 10장(丈)이나 되도록 자란 구절포를 묘사한 것이다. 《記言 卷28 天冠山記, 韓國文集叢刊 98輯》

233)신선이……흔들흔들:구정봉(九井峯) 위에 있는 종처럼 생긴 흔들바위를 가리킨다. 이 바위는 한 사람이 흔들어도, 열 사람이 흔들어도 똑같이 흔들리므로 신선이 흔든다고 말한 것이다. 《記言 卷28 月嶽記, 韓國文集叢刊 98輯》

234)장생(長生)……않으니:한국문집총간 98집에 수록된 《기언》 권28 〈월악기(月嶽記)〉에는 “도갑(道岬) 아래에 ‘국장생(國長生)’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고, 그 아래 황산(皇山)에는 ‘황장생(皇長生)’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부로(父老)들은 도선(道詵)이 새긴 것이라고 한다. 만력(萬曆) 연간에 원수(元帥) 서평공(西平公)이 호남을 순행하다가 이 돌을 만나 국장생을 캐내게 하였는데, 그 아래에는 새겨진 석표(石標) 사좌(四座)가 있었다. 돌이 깊이 박혀 있었으므로 캐내려 하다가 무익하다고 여겨 다시 묻어 버렸다.”라고 되어 있다.

235)녹거(鹿車):월악산 용암(龍巖) 아래에 있는 세 개의 돌수레[石車] 중에 가장 큰 것의 이름이다. 《記言 卷28 月嶽記, 韓國文集叢刊 98輯》

236)상제(上帝)……노닐리라:안개가 걷혔으면 하는 바람을 한유(韓愈)의 고사와 연관시켜 표현한 것이다. 한유가 일찍이 형산(衡山)에 오를 때 가을비가 내리므로 정성을 다해 기도했더니 구름이 깨끗이 걷혔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소식(蘇軾)이 지은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표연히 바람 타고 상제의 곁에서 오니, 아래로 탁세에서 쭉정이를 쓸어버리게 했네.[飄然乘風來帝旁 下與濁世掃粃糠]”라 하고, 또 “너풀너풀 머리 풀고 큰 들에 내려오는 듯.[翩然被髮下大荒]”이라 하였는데, 뒤 구절은 한유의 〈잡시(雜詩)〉에 “너풀너풀 날아서 큰 들로 내려가, 머리 풀어헤치고 기린을 타련다.[翩然下大荒 被髮騎麒麟]”라고 한 구절을 차용한 것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8》 《韓昌黎集 卷5》

237)사마천(司馬遷)의……부쳤으니:사마천이, 자신이 《사기(史記)》를 엮은 것은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편찬했던 것과 같은 뜻이라고 했던 것을 비판한 말이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238)태현경(太玄經)……부끄러워하였어라:양웅(揚雄)은 후한(後漢) 말의 뛰어난 학자이고, 《태현경》은 양웅이 《주역》을 본떠서 지은 책인데, 그 내용이 매우 심오하여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조롱했다. 이에 양웅이 〈해조부(解嘲賦)〉를 지어 “나는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 몇몇 사람들과는 나란히 할 수 없소이다. 그러므로 묵묵히 혼자서 나의 태현(太玄)을 지킬 뿐이오.”라고 한 것을 말한다. 《漢書 卷87 揚雄傳》

239)천년이……나오리라:유흠(劉欽)이 양웅의 《태현경》과 《법언(法言)》을 본 뒤에 “공연히 고생만 하였구려. 학자들은 녹봉과 영리만 구할 줄 알고 《주역》도 제대로 모르는데, 더구나 《태현경》을 어찌 알겠소. 나는 후세 사람들이 항아리 덮개로나 쓸까 걱정스럽소.”라고 했는데, 양웅은 웃기만 하고 응수하지 않았다. 위의 주 51) 참조. 양웅의 뜻은 후세에 반드시 자신의 학문을 이해해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漢書 卷87 揚雄傳》 여기에서는 미수가 노력하면 누구나 양웅과 같은 학문적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낸 말로 생각된다.

240)장함(獐含):경상도 의령(宜寧)의 옛 이름이다.

241)푸른 이우[靑犁牛]:산의 형상이 얼룩소를 닮았거나 산봉우리 이름이 ‘이우’인 듯하나, 확인할 길이 없어서 그대로 번역하였다.

242)소보(巢父)와 허유(許由):요(堯) 임금 시절의 은사(隱士)로서, 요 임금이 천하를 맡기려고 했으나 받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들이다. 《高士傳》

243)호방하여……노닐었다네:호상(濠上)은 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강인 호수(濠水) 가를 말한다.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호수 근처에서 피라미가 노니는 것을 보고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논한 고사가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莊子 秋水》

244)봉새도……않는데:봉새는 성왕(聖王)의 시대를 알리는 상서로운 새이다. 공자(孔子)가 “봉황(鳳凰)이 날아오지 않고 황하(黃河)에서 하도(河圖)가 나오지 않으니, 나는 이제 그만이로구나.”라고 탄식한 데서 나온 말로, 여기에서는 공자의 말을 빌어 세상의 어지러움을 탄식한 것이다. 《論語 子罕》

245)옛날에……주조했다지만:하(夏)나라 때 우 임금이 구주(九州)를 상징하여 솥[鼎]을 주조했는데,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에 걸쳐 국권(國權)을 상징하는 보물로 인식되었다. 《史記 卷28 封禪書》

246)팔풍무(八風舞):춤의 이름으로, 미치광이처럼 음란하고 추한 동작의 세속적인 춤이다. 《新唐書 卷109 祝欽明列傳》

247)장씨(蔣氏):장문익(蔣文益:1596~1652)으로, 본관은 아산(牙山), 자는 명보(明輔), 호는 조경암(釣耕菴)이며, 선조는 본래 중국인이다. 목장흠(睦長欽),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등에게서 사사하였고, 밀양(密陽)의 금호(琴湖)에서 지내며 김응조(金應祖), 미수 등과 교유하였다. 《海左集 卷31 釣耕菴蔣公墓地銘, 韓國文集叢刊 240輯》

248)춘궁(春宮)에서……하리:춘궁은 동방의 청제(靑帝)가 거처하는 궁이다. 청녀(靑女)는 상신(霜神)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에서는 봄을 뜻하는 ‘청(靑)’으로 보아야 문맥이 통한다. 즉 봄의 여신이 자신의 계절인 봄을 맞이하여 곱게 몸단장을 한다는 뜻이다.

249)전욱(顓頊)이……오래리라:전욱은 상고의 오제(五帝) 가운데 하나로서 북방에 위치하여 겨울을 주관하였다. 《禮記 月令》 이 구절은 전욱이 주관하는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250)축융(祝融)이……올리니:축융은 본래 제곡(帝嚳)의 화관(火官)이었으나 후에 화신(火神)으로 높여졌다. 화개(華蓋)는 천문(天文)에서 대제성(大帝星) 위에 위치한 9개의 별 이름인데, 여기에서는 천제(天帝)를 지칭하였기 때문에 화개군이라고 높여서 부른 것이다. 이 구절은 여름 신이 장차 봄을 이어 활동하기 위해서 멀리서 천제에게 예를 올린다는 뜻이다.

251)전중(傳重):상제(喪祭)나 종묘의 중한 책임을 손자에게 전한다는 뜻으로, 손자가 할아버지를 이어 종통을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전중(傳重)이라 하고, 손자의 입장에서는 승중(承重)이라고 하였다.

252)일찍이……만들었네:해옹(海翁)은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호이고, 삼강(三江)은 함경도 삼수(三水)를 가리킨다. 효종(孝宗)이 승하한 후 송시열(宋時烈)을 필두로 한 서인(西人)들은 효종이 인조(仁祖)의 차자(次子)라는 점을 들어 인조의 계비(繼妃)인 조 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를 기년(朞年)으로 정했는데, 미수를 비롯한 다수의 남인들은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였다. 미수가 먼저 상소한 뒤에 윤선도가 이어서 상소하여 극언하였다가 삼수로 귀양 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記言 卷65 自序, 韓國文集叢刊 98輯》 대본에는 ‘適使海爲三江流’로 되어 있으나, 문맥이 통하지 않으므로 연보에 의거하여 ‘爲’를 ‘翁’으로 바로잡았다. 《記言 年譜 卷1 癸卯, 韓國文集叢刊 99輯》

253)원사(元嗣)로서……하였더니:미수와 윤선도 등 남인들이,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통을 이었으므로 장자(長子)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말한다. 《記言 卷65 自序, 韓國文集叢刊 99輯》

254)천자는……터:과거에 일식이 발생했을 때 일식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행했던 의식들이다. 정씨(庭氏)는 주나라의 관명으로, 도성 부근의 요망스러운 새들을 쏘아 죽이는 일을 담당하였다. 《周禮訂義 卷66》 《周禮 卷34 秋官 司寇》

255)요(堯) 임금……두려워하셨네:《서경》 〈고요모(皐陶謨)〉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임(孔壬)은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은 잘 꾸미지만 크게 간악한 마음을 품은 자를 말한다.

256)이 홍주(李洪州):이명웅(李命雄:1590~1642)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이(珽而), 호는 송사(松沙)이며, 부친은 완흥군(完興君) 유징(幼澄)이다. 1626년(인조4) 음보(蔭補)로 동궁세마(東宮洗馬)가 되고, 같은 해 9월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다. 1631년에는 평안도 순찰사로 나가 성첩(城堞)을 수축하고 국방 대책을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는 화의를 반대하였고, 뒤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가산산성(架山山城)을 쌓는 데 공을 세웠으나, 무리하게 공역(工役)을 추진했다는 탄핵을 받아 파면되어 돌아왔다.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완양군(完陽君)에 추봉(追封)되었다. 《記言 別集 卷20 李觀察碑銘, 韓國文集叢刊 99輯》

257)촉(蜀) 땅의……짖듯이:중국의 촉 땅은 늘 안개가 끼어 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화창한 날이면 개들이 해를 보고 짖고, 남쪽 지역은 기후가 따뜻해서 눈이 거의 내리지 않기 때문에 눈이 올 때면 개들이 미친 듯이 달리며 짖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견문이 좁아 사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괴이하게 여기는 것을 뜻한다. 《柳河東集 卷34 答韋中立論師道書》 여기에서는 이명웅(李命雄)이 산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헐뜯고 비난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258)산비(山碑):가산산성의 축성에 관한 기록으로, 한국문집총간 98집에 수록된 《기언》 권10 중편(中篇)에 실려 있는 〈가산축성석기(架山築城石記)〉를 가리킨다.

259)제공(諸公)과……수답하다:이 시는 미수가 70세 되던 1664년(현종5)에 지은 것으로, 이때 미수는 용주(龍洲) 조경(趙絅)과 함께 철원(鐵原), 영평(永平) 근처의 삼부락(三釜落)과 화적연(禾積淵)을 유람하였다. 《記言 年譜 卷1 甲辰, 韓國文集叢刊 99輯》

260)높은……걸닉(桀溺):장저(長沮)와 걸닉은 춘추 시대의 은사(隱士)이다. 13쪽 주 29) 참조.

261)밭……잊고:요(堯) 임금 때 90세의 노인이 땅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쉰다. 우물을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서 곡식을 먹으니, 요 임금의 공력이 내게 무슨 상관이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堯何等力]”라고 하였는데, 태평성대에 백성들이 각기 만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킨다. 《論衡 卷8 藝增》

262)초당(草堂):정화악(鄭華岳)의 초당으로, 정화악은 본관은 경주이며 조부는 호(晧), 부친은 홍기(弘基)이다. 한국문집총간 99집에 수록된 《기언》 별집 권9의 〈정생초당제명기(鄭生草堂題名記)〉에 의하면, 송령(松嶺)의 정생이 새로 초당을 지었으므로 친구들과 함께 방문하여 매화를 감상하고 벽에 이름을 썼다고 한다.

263)극가(克家):정창기(鄭昌基:1611~?)의 자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부친은 호(晧)이다. 초당 주인인 정화악의 백부이다.

264)현수(玄叟):정동설(鄭東卨)의 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부친은 미수와 동문수학한 정희성(鄭希)이다.

265)석호(石湖)의 매보(梅譜):송대 석호 범성대(范成大)의 《범촌매보(范村梅譜)》를 가리킨다.

266)송옥(宋玉)이……건:송옥은 전국 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굴원(屈原)의 뒤를 이어 초사(楚辭)의 대가로 일컬어진다. 그의 〈구변(九辯)〉 중 첫 번째 작품에 “슬프도다, 가을 기운이여. 소슬하구나, 초목이 떨어지고 쇠락함이여.[悲哉秋之爲氣也 蕭瑟兮草木搖落而變衰]”라고 하여 가을의 서글픈 정서를 잘 나타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文選 卷34》

267)낙부(樂夫):유명립(柳命立:1600~1647)의 자(字)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부친은 병조 판서 희분(希奮)이다. 1621년(광해군13)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합격하여 검열(檢閱)이 되었다. 1622년 대교(待敎)가 되었으나, 1623년(인조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때에 득세하였던 유경종(柳敬宗) 등의 유씨 세력이 제거됨에 따라 거제도에 유배를 당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전적(典籍)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창원(昌原)에서 생을 마쳤다. 《記言 卷21 柳內翰銘, 韓國文集叢刊 98輯》

268)허춘장(許春長):허격(許格)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춘장(春長), 호는 창해(滄海) 또는 숭정처사(崇禎處士)이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에게 사사하였다.

269)생생(生生)이 역(易)이란 걸:생생은 천지가 끊임없이 만물을 생성하는 이치이다. 11쪽 주 26) 참조.

270)홍군징(洪君徵):홍우원(洪宇遠:1605~1687)으로, 군징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남파(南坡)이며, 부친은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영(榮)이다. 1645년(인종23)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합격하였다. 1663년(현종4) 수찬(修撰)으로서 조 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로 유배된 윤선도(尹善道)의 석방을 주장하다 파직되는 등, 직언으로 누차 파직당한 바 있다. 숙종 초 남인 정국 하에서 이조 판서, 대사성, 예조 판서, 지충추부사를 지냈으나,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고, 문천(文川)으로 이배된 뒤 1687년 그곳에서 죽었다. 1689년 복작(復爵)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 시는 홍우원이 명천에 유배되어 있을 때 보낸 것이다.

271)진 시황(秦始皇)이……했지만:진 시황 34년(기원전 213)에 승상 이사(李斯)의 건의에 따라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자행되었는데, 이때 유학 및 제자백가의 서적을 모두 불태우면서 진나라의 역사 기록과 의약서, 점술서 등 몇 종만 예외로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272)정성스레 가인괘(家人卦)로 경계했건만:가인(家人)은 주역의 괘 이름이다. 홍우원이 1675년(숙종1) 가인괘를 들어 대비(大妃)가 정사에 관여하는 폐단을 간(諫)한 적이 있는데, 1680년 이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으므로 이를 언급한 것이다. 肅宗實錄 141

273)곤궁해도……않고서:《주역》 〈곤괘(困卦)〉의 내용으로, 군자가 비록 곤궁해도 처신이 의(義)를 벗어나지 않으면 그 도(道)가 스스로 형통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274)문을……것:음양(陰陽)의 소장성쇠(消長盛衰)를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문을 닫음을 곤(坤)이라 이르고, 문을 엶을 건(乾)이라 이르며, 한 번 닫고 한 번 엶을 변(變)이라 이르고, 왕래하여 다하지 않음을 통(通)이라 이른다.[闔戶謂之坤 闢戶謂之乾 一闔一闢謂之變 往來不窮謂之通]”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275)곤궁함은……것이라:《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의 내용으로, 곤궁함을 통해서 스스로 그 능력을 시험한다는 말이다.

276) 경신년:대본에는 ‘尙章’으로 되어 있으나, 시의 내용이 경신환국(庚申換局)과 관련된 것으로 볼 때 ‘庚’에 해당하는 고갑자 ‘上章’의 오기로 보인다. 판각상의 오류로 판단되어 바로잡았다.

277)이덕귀(李德龜):1619~?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징(子徵)이며, 부친은 행 경산 현령(行慶山縣令) 광필(光弼)이다. 1646년(인조4)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278)청성문(靑城門)……사냥해도:청성문은 한(漢)나라 때 장안(長安)의 동남쪽에 있던 성문(城門)으로, 본래 이름은 패성문(覇城門)이나 문의 색깔이 푸르다 하여 청성문 또는 청문(靑門)이라 불렸다. 진(秦)나라 때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졌던 소평(召平)이 진나라가 멸망한 후에 청문 밖에 오이를 심었는데, 맛이 뛰어나고 오색(五色)을 띤 오이가 열렸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이를 ‘청문과(靑門瓜)’ 또는 ‘동릉과(東陵瓜)’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서 청문은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물러가 생활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로 널리 사용된다. 《三輔黃圖 卷1 都城十二門》 여기에서는 백 창원(白昌原)이 전원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279)씩씩하고……생각했네:흉문(凶門)은 장군이 출정할 때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북향의 문으로, 마치 장례를 치르듯이 출정하여 필사의 의지를 드러낸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淮南子 兵略訓》 여기에서는 백 창원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충절을 품고 있었다는 뜻으로 쓰였다.

280)군평(君平)이……과감하여:군평은 전한(前漢)의 은사(隱士) 엄준(嚴遵)의 자이다. 그는 촉(蜀) 땅에 은거하여 성도(成都)의 저잣거리에서 점을 쳐주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는데, 하루에 100전(錢)만 벌면 가게 문을 닫고 발을 내리고서 저술을 일삼았다고 한다. 《高士傳》 여기에서는 조순(趙純)이 자연 속에서 은거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281)완양군(完陽君):이명웅(李命雄)의 봉호(封號)이다. 33쪽 주 69) 참조.

282)이 별검(李別檢):이진규(李震奎:1619~1665)로, 완양군(完陽君) 이명웅(李命雄)의 아들이다. 행의(行誼)로 등용되어 정릉 참봉(靖陵參奉)과 빙고 별검(氷庫別檢)을 지낸 바 있다. 《記言 別集 卷20 李別檢墓表, 韓國文集叢刊 98輯》

283)이십 년……지냈어라:이진규의 부친 완양군이 1642년 별세하고 뒤를 이어 조모 조씨(趙氏)가 별세하여 이진규가 6년 동안 상복을 입었고, 1659년에는 모친 전주 유씨(全州柳氏)가 사망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치르던 중에 죽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284)강 산음(姜山陰):산음 현감(山陰縣監)을 지낸 강탁(姜逴:1585~1665)이다. 강탁은 초명(初名)은 규(逵)이고, 자는 여달(汝達), 별호는 광재(光齋)이며, 본관은 진양(晉陽), 부친은 응백(應伯)이다. 《記言 別集 卷19 姜山陰墓銘, 韓國文集叢刊 99輯》

285)민광훈(閔光勳):1595~1659. 자는 중집(仲集),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부친은 부윤(府尹) 기(機)로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인조(仁祖) 초 음보(蔭補)로 별검(別檢)이 되어 출사하고, 1628년(인조6)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합격하였다. 병조와 공조의 참의(參議),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있을 때는 의창(義倉)을 설치하였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피신 중이던 원손(元孫)을 인근 섬으로 피신시킨 바 있다.

286)입암(立巖):민제인(閔齊仁:1493~1549)의 호이다. 자가 희중(希仲)이며, 본관은 여흥(驪興), 부친은 전적(典籍) 귀손(龜孫)이다. 민광훈에게는 고조가 된다.

287)애공(崖公):미수의 증조부인 동애공(東崖公) 허자(許磁:1496~1551)를 가리킨다.

288)내한(內翰)……몸으로:유낙부(柳樂夫)는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지낸 유명립(柳命立)이다. 38쪽 주 80) 참조. 인조반정 후 거제도에 유배되었던 유명립이 1636년에 풀려나 뭍으로 나왔으나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창원에서 살고 있었던 것을 말한다. 《記言 卷21 柳內翰銘, 韓國文集叢刊 98輯》

289)윤 수재(尹秀才) 승리(昇离):본관은 파평(坡平), 부친은 형(珩)이며, 미수의 사위이다. 미수에게 고문(古文)을 배웠으나 28세에 요절하였다. 《記言 卷42 尹生墓銘, 韓國文集叢刊 98輯》

290)그렇지만……않았다네:공자가 “안회는 그 마음이 3개월 동안 인을 떠나지 않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에 이를 뿐이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論語 雍也》

291)기이(期頤):100세의 노인을 가리킨다. 《예기》 〈곡례(曲禮)〉에 “100세를 기이라고 한다.[百年曰期頤]” 하였다.

292)팔백……마찬가지:팽조(彭組)는 7, 8백 살까지 살았다는 전설상의 인물이고, 상자(殤子)는 어려서 죽은 아이를 말한다. 《莊子 齊物論》 여기에서는 장수하는 사람이나 요절하는 사람이나 인간의 수명이 유한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293)은(殷)나라……섬겼으니:은나라 사람들은 질박함을 숭상하여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였다고 한다. 《禮記集說 檀弓下》

1)우인(虞人)은……취하였습니다:우인은 원유(苑囿)를 지키는 관리이다. 제나라 경공(景公)이 사냥을 나갔을 적에 우인을 부를 때 쓰는 피관(皮冠) 대신 대부를 부를 때 쓰는 깃발[旌]을 써서 우인을 불렀는데, 그가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그를 죽이려 했다. 이에 대해서 공자(孔子)는 “지사(志士)는 자신의 시신이 도랑에 버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용사(勇士)는 죽임을 당해 머리가 잘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한다.”라며 그의 행위를 인정했다. 《孟子 滕文公下》

2)인견(引見)했을 때의 문답:미수(眉叟)는 1657년(효종8) 7월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8월에 재차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사임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여 숙배하였다. 이 문답은 숙배한 후 입대(入對)했을 때의 문답으로, 《효종실록(孝宗實錄)》에는 그해 10월 5일(갑술) 조에 그 내용이 일부 기록되어 있다.

3)분발(分發):조보(朝報)를 발행하기 전에 조정의 범사(凡事)를 각 관아의 하인들이 작은 종이쪽지에 써서 관원에게 보내는 것을 가리킨다. 《孝宗實錄 1年 6月 3日》

4)단서(丹書)의……하였는데:단서는 천명이 기록되어 있는 천서(天書)로, 하도(河圖)나 낙서(洛書)와 같은 부류이다. 인용된 글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등극한 뒤 태공망(太公望)에게 “황제(黃帝) 전욱(顓頊)의 도가 남아 있습니까?” 하니, 태공망이 “단서에 있습니다.”라고 하고, 3일을 재계한 뒤 그 경계의 내용을 써서 올렸다고 한다. 《大學衍義 卷2》

5) 탄식:대본에는 ‘’으로 되어 있으나, 판각상의 오류로 판단되어 ‘恣’로 바로잡았다.

6)하(夏)나라의……회복하였는데:소강(少康)은 하나라를 중흥시킨 군주이다. 과(過)나라의 요(澆)가 소강의 아버지 상(相)을 죽이고 하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이때 임신 중이던 상의 부인 민(緡)이 하수구로 빠져 나가 친정인 잉(仍)으로 돌아가서 소강을 낳았다. 요가 소강을 죽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그는 갖은 위기를 넘기고 과를 멸망시키며 우(禹) 임금의 업적을 이었다. 성(成)은 토지의 면적으로 사방 10리이고, 려(旅)는 주(周)나라 제도에서 인구 500명에 해당하는 행정 단위이다. 《春秋左氏傳 哀公元年》

7)월왕(越王)……것입니다:월왕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회계산(會稽山)에서 치욕적으로 패전한 뒤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복수하던 때의 고사를 말한다. 《春秋左氏傳 哀公元年》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8)보부편(保傅篇):《대대례기(大戴禮記)》의 편명(篇名)이다.

1) 난무:대본에는 ‘創攘’으로 되어 있으나, ‘創’은 ‘搶’의 오기로 보인다. 판각상의 오류로 판단되어 바로잡았다.

2)중비(中批):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의망(擬望)을 거치지 않고 왕의 특지(特旨)로 관원을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3)월름(月廩):원래는 유현(儒賢)이나 빈사(賓師)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다달이 식량을 보내 주는 것이었는데, 조선 시대에는 의정(議政)으로서 시골에 있으면서 녹을 받지 않는 경우에 지방관으로 하여금 다달이 관에서 곡식을 지급하게 하는 것을 월름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도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대신(大臣)을 예우하는 의미가 담긴 경우가 많았으며, 미수의 경우처럼 정해진 녹봉과 월름을 함께 지급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월름은 유현이나 빈사, 대신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다달이 관에서 곡식을 지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白湖全書 卷8 擬乞遞職致仕疏》 《萬機要覽 財用編2 料祿 祿制雜規》

4)옛날의……아꼈습니다:군주가 상벌(賞罰)을 함부로 시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 한 소후(韓昭侯)가 해진 바지를 궤에 넣어 잘 보관해 두라고 하자, 시종이 “군께서는 불인(不仁)하십니다. 좌우에게 주지 않고 보관해 두게 하시다니요.”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소후는 “명주(明主)는 한 번 웃고 한 번 찡그리는 것도 아낀다고 하였다. 나는 이 바지를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줄 것이다.”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韓非子 卷9 內儲說上》

5)국가……상소:이 상소는 1675년(숙종1) 미수(眉叟)가 우참찬(右參贊)으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 예송(禮訟)과 관련하여 덕원부(德源府)에 귀양 가 있던 송시열(宋時烈)을 엄하게 처벌하기를 청하는 내용이다. 《肅宗實錄 1年 1月 13日, 閏5月 8日》

6)관원을……임명한다:《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周官)〉에 “태사․태부․태보를 세우노니 이가 삼공이니,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음양을 조화하여 다스리니, 관원을 반드시 구비할 것이 아니요, 오직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임명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7)총재(冢宰):이조 판서를 가리킨다.

8)주관전(周官傳):《주례(周禮)》에 대한 주석서로, 한(漢)나라 때 마융(馬融)이 지어 정현(鄭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79下 董鈞列傳》

9)정법(政法)의 득실:대본에는 ‘得’ 자가 빠져 있으나, 문맥을 살펴 이렇게 번역하였다.

10)분황(焚黃):관직이 추증(追贈)될 때에 그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 앞에 나아가 이를 고하고 임명장의 부본(副本)인 누런 종이를 불태우던 의식이다.

11)아버지에게……달:계추(季秋)는 음력 9월을 가리킨다. 《가례(家禮)》 〈제례(祭禮)〉에 “계추에 아버지 사당에 제사 지낸다.[季秋祭禰]”라고 하고, 그 주(註)에 “9월 15일을 가리킨다.” 하였다.

12)승냥이와……정리:조상에게 보답하기 위해 제사 지내려는 정성을 뜻한다. 초봄에 시냇물이 녹으면 수달이 본격적으로 물고기를 잡기 시작하고, 가을이 깊어져서 짐승이 크게 자라면 승냥이가 대대적인 사냥을 하는데, 옛사람들이 여기에다 조상에게 먼저 제사 지낸다는 의미를 부회한 것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수달이 물고기로 제사 지낸 뒤에야 우인(虞人)이 못에 통발을 설치하고, 승냥이가 짐승으로 제사 지낸 뒤에야 전렵을 한다.[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 然後田獵]”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13)상로(霜露)의 감회:《예기》 〈제의(祭義)〉에 “상로가 내리면 군자가 이를 밟고서 반드시 서글픈 마음을 갖게 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14)김수항(金壽恒)의 차자:김수항(1629~1689)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이다.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며, 부친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광찬(光燦)이다. 김수항은 남인이 집권하고 있던 1675년(숙종1) 7월에 판중추부사로서 차자를 올려 미수를 비롯한 남인 정권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肅宗實錄 1年 7月 15日》

15)전고(前古)의……견주었습니다:전고의 난망지주(亂亡之主)는 아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유폐했다는 죄목으로 폐위되었던 광해군(光海君)을 가리킨다. 1651년(효종2) 김자점(金自點)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김자점의 손자에게 출가한 인조의 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그 어머니인 인조의 후궁 귀인(貴人) 조씨(趙氏)가 연루되어 귀인 조씨는 사사되고 효명옹주는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귀인 조씨의 소출인 숭선군(崇善君) 징(澂)과 낙선군(樂善君) 숙(潚)을 유배 보내는 문제가 거론되었으나, 진선(進善) 송시열(宋時烈)은 상소에서 이들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들을 유배 보내게 되면 소인(小人)들이 망녕되이 군상(君上)의 마음을 헤아려서 광해군 때 정항(鄭沆)이 강화 부사(江華府使)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뜻에 맞추어 영창대군을 살해했던 일의 전철을 다시 밟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미수는 효종 초 송시열이 한 이 말이 효종과 또 당시 세자 책봉을 앞두고 있던 현종(顯宗) 모두를 빗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孝宗實錄 2年 11月 23日․27日, 12月 15日․17日․19日, 3年 2月 3日》 《宋子大全 卷7 辭職仍論澂潚等事疏》

16)증모(曾母)와 맹모(孟母)의 비유:증모는 증자(曾子)의 어머니이고, 맹모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뜻한다. 어떤 사람이 증자의 어머니에게 와서 “증삼(曾參)이 사람을 죽였다.”라고 말하자, 증자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하고 태연히 베를 짰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해도 믿지 않았으나, 다시 다른 사람이 와서 똑같은 말을 하자 증자의 어머니가 북[杼]을 던지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고 한다. 즉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도 참소하는 말이 반복되면 의심하게 된다는 뜻의 고사이다. 1675년(숙종1) 3월에 숙종의 외조부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올린 차자 가운데 “대저 세 번 이른 참언(讒言)에는 자모(慈母)라도 북을 던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전에도 있었지만, 맹모의 삼천지교가 이간하는 말을 불러온다는 것은 전에 들어 보지 못했는데, 외간에 전파되어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한 구절을 가리킨다. 이때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 복창군(福昌君) 정(楨)과 복평군(福平君) 연(㮒)이 궁중에 출입하면서 궁녀들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이를 안 대비 김씨(金氏)가 이 문제를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숙종이 의견을 달리하여 따르지 않은 데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肅宗實錄 1年 3月 12日》

17)박헌(朴瀗)이라는……아뢰었는데:1675년(숙종1) 6월에 박헌이 상소하여 송시열을 공격하면서 복창군과 복평군의 일을 언급했던 것을 말한다. 《肅宗實錄 1年 6月 14日》

18)정(楨)과……것:숙종은 이들을 1675년 3월 15일 영암(靈巖)과 무안(務安)으로 정배(定配)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환(放還)하고 곧이어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肅宗實錄 1年 3月 15日, 9月 16日》

19)사흉(四凶):요 임금 때의 네 명의 악인(惡人)으로, 공공(共工), 환두(驩兜), 삼묘(三苗), 곤(鯀)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공공을 유주에 유배하고 환도를 숭산에 유치하고 삼묘를 삼위에 몰아내고 곤을 우산에 가두어 네 사람을 벌주었다.[流共工于幽洲 放驩兜于嵩山 竄三苗于三危 殛鯀于羽山 四罪]”라고 하였다. ‘극(殛)’에 대해서는 “가두어서 곤궁하게 하는 것이다.”라는 주희(朱熹)의 설과 ‘죽이는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뒤 구절에서 ‘극사(殛死)’라고 쓴 것으로 볼 때 미수는 죽인다는 뜻으로 본 것이 확실하다.

20)곤(鯀)은……못했는데:곤은 우(禹)의 아버지로 사흉 중의 한 사람이다. 요 임금 때 큰 홍수가 있어 사방이 물에 잠겼는데, 요 임금이 곤에게 물길을 다스리도록 명했으나 9년 동안 공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요 임금은 곤에 대해서 명을 거역하고 족류(族類)를 패망시킨 자로 평한 바 있다. 위의 주 18) 참조.

21)그에……대신(臺臣):송시열이 정한 복제(服制)의 문제점을 들어 송시열을 귀양 보내기를 청했던 정언(正言) 이수경(李壽慶)을 가리킨다. 이수경은 1675년(숙종1) 1월에 이 문제로 상소한 이후에도 누차 상소하여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등의 처벌을 청하여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는데, 미수는 숙종에게 그를 천거하고 처벌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肅宗實錄 1年 1月 2日․7日, 閏5月 9日》 《記言 年譜 卷2, 韓國文集叢刊 99輯》

22)오청(五聽):옥사를 다스릴 때 관련인의 진술을 듣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첫째는 그 말을 듣는 것[辭聽], 둘째는 표정을 살피는 것[色聽], 셋째는 숨소리가 고른지를 살피는 것[氣聽], 넷째는 그가 남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는지를 살피는 것[耳聽], 다섯째는 말할 때의 눈동자가 명료한지를 살펴보는 것[目聽]이다. 《周禮 秋官 司寇》

23)삼자(三刺):사형을 확정 판결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첫째는 죽여야 할 것인지를 군신(群臣)들에게 물어보는 것, 둘째는 하리(下吏)들에게 물어보는 것, 셋째는 백성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周禮 秋官 司寇》

24)대벽(大辟)․소벽(小辟):대벽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소벽은 사형 이외의 죄를 가리킨다. 《禮記 文王世子》

25)탕(湯) 임금이……것:은(殷)나라 탕 임금 때 7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탕 임금이 자신의 몸을 재물로 삼아 상림에서 비를 빌며 여섯 가지 일로써 자책하자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事文類聚 天道部 禱雨》

26) 선을 쌓아:대본에는 ‘善’ 자 앞에 한 글자가 결락되었으나, 확인할 길이 없기에 문맥에 맞도록 ‘積善’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27)주수도설(舟水圖說):주수(舟水)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배와 물에 비유한 말로, 《순자(荀子)》 〈왕제(王制)〉에 “임금은 배이고 서민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라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 주수도설은 숙종이 화공(畵工)을 시켜서 주수도(舟水圖)를 그리게 한 뒤 자신이 직접 이에 대한 설을 지은 것이다. 《肅宗實錄 1年 11月 16日, 附錄 肅宗大王誌文》

28)임진일:임진일은 날짜로 11월 8일인데, 《숙종실록》에는 숙종이 삼공에게 〈주수도설〉을 하사한 날이 경자일인 16일로 되어 있다.

29)구서 구가(九敍九歌):《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덕은 정사를 선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정사는 백성을 기르기 위한 것이니, 수․화․금․목․토와 곡식이 잘 닦여지며, 정덕과 이용과 후생이 화하여, 아홉 가지 공이 펴져서 아홉 가지 펴진 것을 노래한다.[德惟善政 政在養民 水火金木土穀惟修 正德利用厚生惟和 九功惟敍 九敍惟歌]”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30)중용(中庸)에……천도(天道)입니다:《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몸을 성실하게 하는 데 방법이 있으니 선을 밝게 알지 못하면 몸을 성실히 하지 못할 것이다.[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라 하고, 제21장에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밝아짐을 성이라 이르고 명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짐을 교라고 이르니, 성실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실해진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31)안일과……두려워하소서:《서경》 〈고요모(皐陶謨)〉에 나오는 내용이다.

32)대우모에……하였으니:인용된 구절은 고요가 우 임금에게 아뢴 말로서 《서경》 〈고요모〉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수가 인용하면서 출전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33)십건(十愆):은(殷)나라 때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경계했던 위정자의 열 가지 잘못으로, 궁중에서 늘 춤을 추는 것, 집에서 술에 취하여 노래하는 것, 재화(財貨)에 빠지는 것, 여색에 빠지는 것, 유람을 즐기는 것, 항상 사냥에 빠져 있는 것,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 충직한 말을 거스르는 것, 나이 많고 덕 있는 이를 멀리하는 것, 완악한 자들을 가까이하는 것을 가리킨다. 《書經 伊訓》

34)요(堯) 임금과……입혀졌으며:강구(康衢)는 사방으로 통하는 넓은 길이다. 《열자(列子)》 〈중니(仲尼)〉에 “요 임금이 15년 동안 정치를 한 뒤에 천하가 제대로 다스려졌는지, 민심의 향배가 어떠한지를 알아보고자 미복(微服) 차림으로 강구에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어떤 아이가 성세(盛世)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라고 하였고, 《서경》 〈요전(堯典)〉에 사신(史臣)이 요 임금의 덕을 총괄하여 칭송하면서, “광채가 사해에 입혀지고 상하에 이르렀다.[光被四表 格于上下]”라고 하였던 데서 나온 말이다.

35)우(禹)는……하였고:《서경》 〈고요모〉에 나오는 내용이다.

36)아형(阿衡)은 이훈(伊訓)을 지었고:아형은 은나라의 관명(官名)으로 이윤(伊尹)을 가리킨다. 〈이훈〉은 《서경》 〈상서(商書)〉의 편명으로, 성탕(成湯)이 이룩한 덕을 분명히 말하여 사왕(嗣王)을 훈계한 내용이다.

37)무왕(武王)은……하였습니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4년에 “옛날 주(周)나라 신갑(辛甲)이 사관으로 있을 때에는 백관으로 하여금 각각 자신이 관장한 일로써 왕의 잘못을 경계하고 간언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두예(杜預)의 주에 “신갑은 주나라 무왕의 태사(太史)였다.” 하였다.

38)부열(傅說)이……것이니:부열은 은나라 고종(高宗) 때의 어진 재상이고, 무정(武丁)은 고종의 이름이다. 고종이 그를 꿈에서 보고 인상착의를 그림으로 그려서 널리 찾게 하여 부암(傅巖)의 들에서 찾아내어 재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인용된 구절은 《서경》 〈열명 중(說命中)〉에 나오는 내용이다.

39)걸(桀)에게는……당했고:걸은 하나라의 폭군이다. 용봉(龍逢)은 그 당시의 현인(賢人)인 관용봉(關龍逢)인데, 걸의 폭정을 보고 간언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莊子 人間世》

40)주(紂)에게는……해부당했으니:주는 은나라의 폭군이고, 비간(比干)은 주의 숙부로서 미자(微子)․기자(箕子)와 함께 은나라의 삼인(三仁)으로 꼽힌다. 주가 갈수록 음란해지자 비간이 목숨을 걸고 여러 차례 간언하였는데, 주가 “내가 들으니 성인(聖人)은 심장에 구멍이 일곱 개라고 하였다.” 하고는 비간을 죽여 그 심장을 해부하였다. 《史記 卷3 殷本紀》

41)무왕은……되었고:난신(亂臣)은 난을 다스리는 신하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쳐서 승리한 후에 말하기를, “나에게 난을 다스리는 신하 10인이 있는데 마음이 같고 덕이 같으니, 주(紂)가 비록 지극히 친한 친척들이 있어도 나의 인인(仁人)만 못하다.” 하였다. 《書經 泰誓中》

42)주(紂)는……망했으니:녹대(鹿臺)는 주의 재물 창고로, 진귀한 보물과 재화를 보관했던 곳이다.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이곳의 재물을 흩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書經 武成》

43)큰 내를……같다:《서경》 〈미자(微子)〉에 나오는 내용으로, 주(紂)가 어지러운 정치를 하는데도 신하들이 이를 본받고 바로잡는 사람이 없는 것을 개탄한 말이다.

44)하서(夏書)에 이르기를:본문에 인용한 구절은 《서경》 〈우서(虞書) 익직(益稷)〉의 내용으로, 미수가 인용 시 출전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45)언관(言官)을……차자:이 차자는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인견(引見)한 자리에서 정언(正言) 이수경(李壽慶)이 대신(大臣)들을 배척하였다가 체차되고, 이 일로 영의정 허적(許積)과 좌의정 권대운(權大運)이 사직한 것과 관련해서 올린 것이다. 《肅宗實錄 1年 7月 20日》

46)진선정(進善旌)과 비방목(誹謗木):요 임금 때 언로를 열어 놓기 위해 설치했던 깃발과 나무판자이다. 진선정은 다섯 곳으로 통하는 넓은 길에 기를 세워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아래에 서서 좋은 말을 아뢰게 한 것이고, 비방목은 교량 위에 나무판자를 세워 놓고 백성들에게 정치의 과오를 쓰게 했던 것이다. 《史記 卷10 孝文本紀》

47)학문에……연령:15세를 말한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 자립하였고, 마흔에는 사물의 이치에 의혹하지 않았고, 쉰에 천명을 알았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숙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이때 15세였으나, 미수는 왕이 아직 어리다는 뜻에서 공자의 말을 끌어다 쓴 것이다.

48)사전(赦典)을……차자:사(泗)는 종실인 영평정(寧平正) 이사(李泗)이다. 이사가 강석(講席)에서 미수와 윤휴(尹鑴)를 강하게 비난했다가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했는데, 미수는 이 일로 인해 연천(漣川)으로 내려갔고, 아울러 상소하여 이사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다면서 형벌을 낮추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다 다시 이 차자를 올림으로써 이사에 대한 처벌을 정배(定配)로 낮추도록 한 것이다. 《肅宗實錄 2年 4月 12日․15日․28日, 6月 17日》

49)예기에……하였으니:《예기》 〈왕제(王制)〉에 나오는 내용으로, 80세가 되면 왕이 다달이 사람을 시켜서 음식을 보내고 안부를 묻게 한다는 것이다.

50)예기에……하였으니:《예기》 〈왕제〉에 나오는 내용이다. 대본에는 ‘拜君命’ 다음에 한 글자가 결락되었으나, 이본(異本)에 의거하여 ‘首’ 자를 보충하였다. 그러나 《예기》 본문에는 ‘八十拜君命 一坐再至 瞽亦如之’로 되어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51)공자(孔子)는……절필하였고:《춘추(春秋)》는 공자가 편찬한 노나라 역사서로, 은공(隱公) 원년부터 애공(哀公) 14년까지 242년간의 기록이다. 기린은 중국 고대에 성인(聖人)의 출현을 알리는 성스러운 동물로 알려져 있었다. 노나라 애공 14년에 서쪽 교외에서 사냥하다가 기린을 잡았는데, 이는 공자의 출현을 세상에 알리는 징조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린이 잡혀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공자는 자신의 도를 펼 수 없음을 알고 슬퍼하면서 편찬 중이던 《춘추》의 집필을 끝냈다고 한다. 《春秋公羊傳 哀公14年》

52)돌아가시려……노래하였으며:공자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면서 집 앞에서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쓰러지는구나, 철인(哲人)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뒤따라 방으로 들어온 자공(子貢)에게 “내가 장차 죽을 것이다.[予殆將死也]”라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7일 뒤에 공자가 별세하였다. 《禮記 檀弓上》

53)증삼(曾參)은……하였습니다:증자(曾子)가 병상에서 대부(大夫) 계손(季孫)이 보내 준 자리[簀]를 깔고 있었는데, 이는 대부들이 사용하는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었다. 한밤중에 병이 위독한 상황에서 자리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깔라고 명하므로 자제들이 내일 아침에 바꾸어 드리겠다고 하였는데, 증자는 “나는 바른 것을 얻고 죽으면 그것으로 족하다.[吾得正而斃焉 斯已矣]”라고 말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부축하여 자리를 바꾸었는데, 자제들이 미처 제자리로 돌아가서 앉기도 전에 증자가 별세하였다. 《禮記 檀弓上》

54)소옹(邵雍)은……하였습니다:소옹은 송나라 때의 명신(名臣)으로, 상수학(象數學)에 밝았으며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을 저술한 바 있다. 인용한 말은 소옹이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사마광(司馬光)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 말이다. 《宋名臣言行錄 外集 卷5》

55)정사당(政事堂)을……비판했었는데:송나라 때 장사손(張士遜)이 문하시랑(門下侍郞)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있으면서 금병(禁兵)이 오랫동안 변방 방수에 동원되는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였다. 연관(輦官)을 선발하여 금군을 삼는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연관들이 처자를 이끌고 와서 장사손의 앞을 가로막고 시끄럽게 호소하는 소동을 벌였는데, 장사손의 말이 놀라 날뛰는 바람에 장사손이 말에서 떨어져서 다쳤다. 이때 간관(諫官)으로 있던 한기(韓琦)가, 나라에 일이 많은 때에 장사손이 병구완이나 하고 있다며 “정사당이 어찌 병을 조리하는 곳이겠습니까.” 하고 비난하였다. 한기의 공격을 받은 장사손은 누차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송나라 때 재상으로서 치사하는 관례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宋史 卷311 張士遜列傳》 《九朝編年備要 卷11》

56)배향(配享)할……일:선왕(先王)인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할 신하를 논의하는 일을 가리킨다. 대신들이 처음에 정태화(鄭太和), 조경(趙絅), 김좌명(金佐明)으로 의견을 올려 확정했으나, 곧바로 김좌명에 대해서 배향이 적합하지 않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肅宗實錄 2年 7月 17日, 21日》  현종 묘정의 배향 논의 과정에 대해서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33에 자세히 실려 있다.

57)전(前)……계사(啓辭):1675년(숙종1) 7월에 김수항(金壽恒)이 응지 상소(應旨上疏)를 올려 남인들을 공격한 일로 원주(原州)에 부처(付處)되었다가 다시 영암(靈巖)에 정배되었다. 이듬해 7월에 숙종이 김수항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대신(臺臣)들이 반대 계사를 올리려고 논의하자 대사간 정재숭(鄭載嵩)이 이에 반대하며 피혐(避嫌) 계사를 올려 체차되었다. 《肅宗實錄 1年 7月 15日, 2年 7月 27日․30日》 《承政院日記 肅宗 2年 7月 30日》

58)국제(國制)의……않은데:1659년 효종의 국상 때 조 대비(趙大妃)의 복제를 놓고 벌어졌던 기해예송(己亥禮訟)과 관련된 것이다. 이때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西人)들은 기년설을 주장했는데, 논거로 제시한 것이 《의례주소(儀禮註疏)》의 사종지설(四種之說)이었다. 이에 따르면 효종은 왕위를 계승했지만 장자(長子)가 아닌 경우인 체이부정(體而不正)에 해당하므로 효종의 종통을 부정하는 듯한 혐의가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미수 등 남인은 왕위를 계승한 이상 장자로 대우하여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정태화(鄭太和)가 송시열을 설득하여 《대명률(大明律)》과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국제와 체이부정의 기년이 다르다고 한 것은, 국제는 장자와 중자(衆子)의 구별 없이 기년복을 입고, 체이부정에서는 왕위를 계승했더라도 장자로 인정하지 않고 중자에 대한 복으로 기년복을 입는다는 차이점을 말한 것이다. 예송에 대해서는 《현종실록》, 《기언 연보》, 《송자대전(宋子大全)》 및 예학(禮學)에 관한 각종 연구서들을 참조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하였음을 밝혀 둔다.

59)공의전(恭懿殿)의 복제(服制):공의전은 인종(仁宗)의 비 효순공의인성 왕후(孝順恭懿仁聖王后) 박씨(朴氏)이다.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상례 때 명종(明宗)의 복제를 처음에는 형수에 대한 복(服)으로 논했다가, 왕통을 계승한 경우라는 반론이 제기되어 다시 삼년복으로 개정하였다. 《承政院日記 顯宗 1年 5月 1日》

60)그 몸에는……무익하다:1660년(현종1) 4월에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기해년 복제의 잘못을 논하였다가 삼수(三水)에 안치되었는데, 이듬해 4월 조경(趙絅)이 상소를 올려 그에 대한 조처가 과중하였다고 논하였다. 이에 조경을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정태화(鄭太和)가 좌의정 심지원(沈之源)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조경을 구호(救護)하면서, “조경은 이미 산야에 물러나 있는 사람이니, 삭출(削黜)한다 하더라도 그와는 상관이 없고, 조정의 일의 체모에만 방해가 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미수는 정태화의 이 말을 “그의 명성만 높여 주고 산림(山林)을 처벌했다는 비판을 조정에 돌리는 일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顯宗實錄 1年 4月 18日, 2年 4月 21日․24日》

1)국무(國誣)를……차자:국무는 국가적인 무고(誣告)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청나라에서 《황명기략(皇明記略)》 등 명나라 역사책을 편찬하면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무력 혁명으로 기술한 내용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사실을 조선 조정에서는 숙종조에 두 차례 변무사(辨誣使)를 파견하여 기록을 시정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이 차자를 올린 때는 1676년(숙종2)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등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시점이었다. 《肅宗實錄 2年 8月 6日, 12月 12日》 《燃藜室記述 卷33 肅宗朝故事本末 奏請卞仁祖之誣》

2)계축년과 무오년의 변고:광해군(光海君)이 1613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의 관작을 삭탈하여 강화도에 안치하고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했던 일을 말한다.

3)이기(李芑)가 밀지(密旨)를 받고:명종 초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 세력과 그 지지 세력인 사림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으켰던 을사사화(乙巳士禍)와 관련된 일로,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이를 지시하기 위해서 비밀 교지를 내렸던 것이다. 《燃藜室記述 卷10 明宗朝故事本末 乙巳士禍》

4)대행대왕(大行大王):국왕이 붕어하고 시호(諡號)를 아직 정하기 전에 부르는 말로, 여기에서는 인종(仁宗)을 가리킨다.

5)대군(大君):뒷날의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6)지난번에……의망하였으니:대사헌 목내선(睦來善)을 지적해서 한 말이다. 목내선은 허적(許積)을 수반으로 한 탁남(濁南)의 일원으로, 미수와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 사람이다. 이전에 이조 판서로 있다가 미수에게 논박을 받아 체차되었는데, 이때 대사헌으로 임명되자 미수가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였고, 이에 대해 목내선이 또 상소를 올리면서 논박이 계속되었다. 《肅宗實錄 1年 6月 4日, 3年 5月 27日, 6月 3日․7日》

7)고수(高叟)의 시 해석:고수는 전국 시대 고자(高子)라는 사람이다. 그가 시를 해석하는 것이 구절 하나하나에만 집착하고 전체적인 뜻을 보지 못했으므로 맹자(孟子)가 고루하다고 평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孟子 告子下》

8)좌전(左傳)을……하였습니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3년에 나오는 노나라 계무자(季武子)의 일을 말한다. 계무자는 적자(嫡子)가 없었는데, 큰아들을 놔두고 자신이 사랑하는 작은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장손(臧孫)이 이를 지지하였으므로 계무자는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반면 맹손(孟孫)은 그를 매우 미워하였는데, 맹손이 죽자 장손이 매우 슬피 울면서, “계손이 나를 좋아한 것은 병통이 되고, 맹손이 미워한 것은 약석이 되니, 아무리 좋은 병통이라도 나쁜 약석만 못한 것이다.[季孫之愛我 疾疢也 孟孫之惡我 藥石也 美疢不如惡石]”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1677년(숙종3) 10월 5일 문과(文科)의 증광 회시(增廣會試)의 부(賦)의 제목으로 “아름다운 병이 나쁜 약만 못하다.[美疢不如惡石]”라는 구절이 출제되었는데, 유생들이 글을 지을 수 없다고 거부하여 제목을 바꾸어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9)현묘(顯廟)께서 시정하신 뜻:1674년(현종15)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례 때 효종(孝宗)의 어머니 조 대비(趙大妃)의 복제를 기년(朞年)으로 정한 것을 가리킨다. 처음에 송시열 등 서인 쪽에서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했는데, 남인들이 반대하자 현종(顯宗)이 이를 받아들여 기년으로 정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0)탈종(奪宗):고대의 종법(宗法)에서, 장자(長子)가 아닌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장자의 권한을 그가 차지하여 종통을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11)주관(周官)에……했지만:《주례(周禮)》 〈추관(秋官) 사구(司寇)〉에 “옥사를 다룰 때는 오성(五聲)을 들어서 민정(民情)을 살피고, 여덟 종류 의형(議刑)의 법을 적용하여 형벌을 감면하는 대상에 부친다.” 한 말을 줄여서 쓴 것이다. 오성을 듣는다는 것은 옥사를 다스릴 때 관련인의 진술을 듣는 다섯 가지 방법이다. 87쪽 주 22) 참조.

12)죽어……같으니:증자(曾子)가 병을 앓고 있을 때 노나라 대부(大夫) 맹경자(孟敬子)가 문병을 왔는데, 증자가 “새가 장차 죽으려 할 때는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에는 그 말이 착한 법이다.”라고 하고는 군자가 귀하게 여겨야 할 세 가지 도에 대해서 말해 준 데서 나온 것이다. 《論語 泰伯》 여기에서는 미수 자신의 말이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13)서추(西樞)로……차자:서추는 중추부(中樞府)를 가리킨다. 의정(議政)이 체직(遞職)되면 서반(西班) 곧 중추부의 직함을 맡겨 예우하는데 이를 송서(送西)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차자는 미수가 자신을 우의정에서 체차해 주기를 청한 것이다.

14)월름(月廩):유현(儒賢)이나 빈사(賓師), 대신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다달이 관에서 곡식을 지급하는 것이다. 71쪽 주 3) 참조.

15)희름(餼廩):월름(月廩)과 같은 말이다. 71쪽 주 3) 참조.

16)강가로……이후:1678년(숙종4) 초여름 미수가 서강(西江)의 옹막촌(瓮幕村)에 머물렀던 때를 말한다. 당시 미수가 누차 사직 상소를 올려도 왕이 윤허하지 않다가, 윤3월 4일 체차를 허락하자 이튿날 바로 성을 나가 서강의 옹막촌에 머물렀는데, 이는 왕이 다시 중추부의 직함을 제수할 경우에는 떠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성으로 들어오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이 차자를 올린 4월까지 줄곧 연천(漣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강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記言 年譜 卷2, 韓國文集叢刊 99輯》

17)양기(陽氣)가……적체되어: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현상을 두고 한 말이다. 비괘(否卦)는 건상곤하(乾上坤下)로 이루어진 괘인데, 《주역(周易)》 〈비괘(否卦)〉에 “비는 인도人道)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호병문(胡炳文)은 “사람의 한 몸에 양기가 위에 충만하고 음기가 아래에 적체되어 원기가 고갈되었으므로 인도가 아닌 것이며, 사람의 한 마음에 인욕(人欲)이 내면을 지배하고 천리(天理)가 외면을 수식하여 사람다움을 잃었으므로 사람이 아닌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周易本義通釋 卷1》

18)맹무백(孟武伯)이……하였으니:《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나오는 내용이다.

19)화(火)는……법이다:《대대례기(大戴禮記)》 〈무왕천조(武王踐阼)〉에 나오는 내용이다.

20)포폄(褒貶):매년 6월과 12월에 벼슬아치들의 근무 성적을 매기는 일이다. 경관(京官)은 해당 관아의 제조(提調)와 당상관(堂上官)이, 지방관은 관찰사와 절도사가 상․중․하의 세 단계로 고과(考課)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면 이를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 반영하였다. 《經國大典 吏典 褒貶》

21)영릉(寧陵)……변고:영릉은 효종(孝宗)의 능이다. 영릉은 본래 현재의 경기도 동구릉(東九陵) 자리에 있었는데, 능을 축조한 이듬해부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어 누차 보수를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637년(현종14) 5월 종실인 영림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가 상소하여 석물(石物)에 틈이 생겨서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고 봉분의 제도도 매우 소루하다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나선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봉심(奉審)을 거쳐 능을 옮기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고 여주군 영릉(英陵) 옆으로 천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논의 과정에서 송시열은 소를 올려 구릉(舊陵)이 음양의 기운이 순조롭고 상서로운 곳이라고 하며 능을 옮기지 말고 개봉(改封)하기를 청함으로써 현종으로부터 질책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서 송시열을 비난하는 자들은 그가 애초에 효종의 능을 정하는 일을 주관했었기 때문에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顯宗實錄 14年 3月 24日, 6月 20日》 《燃藜室記述 卷31 顯宗朝故事本末 寧陵遷奉時事》

22)앞장서서……주멸당했는데:1679년(숙종5) 3월에 어떤 사람이 강도(江都)의 축성장(築城將) 이우(李)에게 투서하였는데, 종통(宗統)이 차례를 잃었다는 것으로 여러 장수들을 격동시키는 한편 이우에게 행군(行軍)의 일을 지휘하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조사 과정에서 이유정(李有湞)의 역옥으로 확대되어 관련자들이 국문을 받고 처형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또 이때 송시열의 문인 송상민(宋尙敏)이 예론(禮論)에 대한 장문의 소를 올려 송시열이 애초에 정한 복제(服制)가 옳다는 것을 극론하였다가 장살(杖殺)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상소에서도 효종의 종통 문제가 언급되었기 때문에 송시열이 남인 정국 하에서 다시 한 번 정치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肅宗實錄 5年 3月, 4月, 5月》 《宋子大全 附錄 卷7》

23)송시열이……발론하여:단궁(檀弓)의 고사와 자유(子游)의 고사는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의중자(公儀仲子)가 적손(嫡孫)을 놔두고 적자의 아우를 세웠는데, 공의중자가 죽었을 때 단궁이 문(免)을 한 채로 조문하고는 후사를 왜 그렇게 정했냐고 따지고 물었다. 문은 상을 당한 사람이 관을 벗고 흰 천으로 머리를 묶는 것으로, 원래 5세의 복(服)이며, 또 붕우가 다른 나라에서 죽고 상주가 없을 때도 문을 한다고 한다. 이것은 단궁이 예법에 맞지 않는 복장으로 조문을 함으로써 후사 문제가 잘못되었음을 풍자한 것이다. 또 사구혜자(司寇惠子)가 적자 호(虎)를 폐하고 서자를 세웠는데, 혜자가 죽자 자유가 예법에 맞지 않는 복장으로 조문을 하고 빈객의 자리가 아닌 신하들의 자리에 가서 섬으로써 그 잘못을 깨닫게 하였다. 즉 송시열이 이 두 가지 고사를 들어 인조가 소현세자의 아들을 폐하고 효종을 후사로 삼은 것을 비판했다고 말한 것이다.

24)대상(代喪)의……수의:대상은 예컨대 조부가 별세하여 아직 장사 지내지 못한 상태에서 부친상을 당한 경우, 승중(承重)한 손자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조부상의 상복을 입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1674년(현종15) 2월 별세한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장사를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같은 해 8월 현종이 붕어했기 때문에 숙종이 현종 대신 조모상의 상복을 입는 예절에 대해서 논한 것이다. 수복(受服)은 상복을 입는 시점을 말한다. 《肅宗實錄 卽位年 10月 13日》

25)중전(中殿)의……수의:이 수의는 인선왕후의 상에 대한 숙종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복제를 논한 것이다. 인선왕후는 숙종의 조모로서 인경왕후에게 시조모가 된다. 숙종이 전중(傳重)하였으므로 인경왕후가 남편을 따라 삼년복을 입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나, 이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전중하는 복을 누가 입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미수는 《의례(儀禮)》를 근거로 전중하는 복을 명성왕후가 입고, 인경왕후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肅宗實錄 卽位年 12月 15日》

26)월불(越紼)하여……지낸다:《예기》 〈왕제(王制)〉에 “상중에는 3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고 오직 천지와 사직의 제사만을 지내되, 월불하여 제사를 지낸다.[喪三年不祭 唯祭天地社稷 爲越紼而行事]”라고 한 것을 말한다. 월불은 상엿줄을 넘는다는 뜻인데 월불하여 제사 지낸다는 것은 미처 장사 지내기 전이라도 천지와 사직의 제사는 반드시 지내야 한다는 뜻이다.

27)정사년:숙종 3년으로, 1677년이다.

28)이계(李烓)의 일:이계(16031642)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희원(熙遠), 호는 명고(鳴皐)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8대손이며, 부친은 사인(舍人) 진영(晉英)이다. 1621년(광해군13)

29)조정(趙挺)의 일:조정(1551~1629)은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여호(汝豪), 호는 한수(漢叟)․죽천(竹川)이며, 부친은 충수(忠秀)이다. 1583년(선조16)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1586년 다시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덕(輔德)으로 세자를 호종(扈從)하였고, 1601년과 160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우참찬

1)이생 구(李生絿):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유(大柔)이다. 미수의 사위인 윤승리(尹昇离)의 사위로, 미수에게는 손녀사위가 된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記言 年譜 附錄 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99輯》

2)정동직 문옹(鄭東稷文翁):1623~1658.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우경(虞卿)․문옹(文翁)이다. 미수보다 28년 연하이다. 부친은 희성(希聖)으로, 미수와 함께 총산(蔥山) 정언용(鄭言)에게 수학하였다. 1650년(효종1)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3)횡거(橫渠)가……것:횡거는 송나라 유학자 장재(張載)이고, 정완(訂頑)은 서명(西銘)을 가리킨다. 장재가 ‘악함을 바로잡다’라는 뜻의 ‘정완’이라는 글을 지어 자리 오른쪽에 붙이고, ‘어리석음을 고치다’라는 뜻의 ‘폄우(貶愚)’라는 글을 지어 자리 왼쪽에 붙였는데, 주자(朱子)가 세인(世人)의 비난을 우려하여 제목을 각각 서명(西銘)과 동명(東銘)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서명을 두고 “이치는 하나이나 분수가 다름을 밝혔다.”라고 평한 바 있다. 《古文眞寶 後集 卷10》 《近思錄 卷2 爲學》 국역 대본에는 ‘證頑’으로 되어 있으나 판각상의 오류로 판단되어 ‘證’을 ‘訂’으로 바로잡았다.

4)회암(晦庵):송나라 주희(朱熹)의 호이다.

5)남당(南塘):진백(陳柏)의 호이다. 진백은 자가 무경(茂卿)이나,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退溪集 卷17 答奇明彦》

6)이지렴 양이(李之濂養而):1628~1691. 본관은 함풍(咸豊), 자는 양이(養而), 호는 치암(恥菴)이다. 부친은 부위(副尉) 초옥(楚玉)이며, 미수보다 33년 연하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이며, 저서로 《치암집(恥菴集)》이 있다.

7)박 국자(朴國子):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1631~1695)를 가리키는 듯하다. 박세채는 1649년(인조27)에 진사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2년 만에 과거를 포기하고 귀향한 바 있다. 1660년(현종1) 3월 미수가 상소하여 기해년(1659)에 효종이 승하했을 당시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제를 기년(朞年)으로 정했던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것은 남인계(南人系) 윤휴(尹鑴) 등의 삼년설(三年說)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박세채는 《복제사의(服制私議)》를 지어 남인계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한 바 있다. 미수가 이 편지를 쓴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내용으로 볼 때 복제(服制) 논쟁이 벌어졌던 무렵에 박세채가 편지로 질의한 것에 대해 미수가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판단된다.

8)가례(家禮) 대소종도(大小宗圖) 주(註):아래 인용문은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0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수는 이를 《가례》의 내용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9)차적(次嫡):적자 가운데 다음 번 장자(長子)를 가리킨다.

10)정체(正體):종통을 이은 적장자(嫡長子)를 말한다.

11)종형(從兄):미수의 중부(仲父) 허량(許亮)의 아들인 허후(許厚:1588~1661)로, 자는 중경(重卿), 호는 관설(觀雪)․둔계(遯溪)․일휴(逸休)이다. 미수보다 7년 연상이다. 전서(篆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둔계집(遯溪集)》이 있다.

12)진호(陳澔)의……하였습니다:대본에는 진호의 《집설(集說)》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예기대전(禮記大全)》의 내용이며, 내용도 조금 차이가 있음을 밝혀 둔다.

13)사계공(沙溪公):김장생(金長生)으로, 사계는 그의 호이다.

14) 집설:대본에는 ‘輯說’로 되어 있으나, 판각상의 오류로 판단되어 ‘輯’을 ‘集’으로 바로잡았다. 아래 두 건도 같다.

15)불보우(不報虞):사정이 있어서 우제를 지내지 못한 것을 말한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시마(緦麻)와 소공(小功)의 상에서는 우제와 졸곡 때에 관(冠)을 벗고 머리를 흰 천으로 묶는 문(免)을 한다. 장례가 끝났어도 우제를 지내지 못할 경우에는 주인이라도 모두 관을 쓰고, 우제를 지낼 때에는 모두 문을 한다.” 하였다.

16)강쇄:대본에는 ‘隆殺’로 되어 있는데,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7)종형이……의논하다:연보에 의하면 1649년(효종 즉위년) 10월의 일이다. 이때 인조의 국휼 중 미수의 종형 허후(許厚)의 큰아들 허황(許)이 18세에 두질(痘疾)로 죽었으므로 상을 치르는 문제를 의논한 것으로 보인다. 《記言 卷44 堂姪誌, 年譜 卷1, 韓國文集叢刊 98․99輯》

18)3년……자:부모상을 당한 자가 국상 등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제때에 장사 지내지 못하고 3년을 넘겼을 경우를 말한다.

19)종백(宗伯)에게 답하다:종백은 예조 판서를 가리킨다. 이 글은 숙종 즉위년인 1675년 12월에 올린 것으로, 그해 2월에 사망한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연제(練祭) 뒤에 중궁전(中宮殿)의 복제(服制)에 관해 예조가 문의한 데 대한 답이다.

20)종복(從服):남편의 복제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인선왕후는 숙종의 할머니로서 숙종의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에게 시할머니가 되는데, 이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생존해 있었다. 이런 경우 전중(傳重)하는 복은 인경왕후가 할 수 없고 명성왕후가 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러므로 손자로서 전중하는 숙종의 복제를 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肅宗實錄 卽位年 12月 15日》

21)김현경(金顯卿):김중영(金重榮:1607~1682)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둔암(遯菴)이며, 현경은 그의 자이다. 부친은 사복시 주부 신길(愼吉)이며, 미수보다 12년 연하이다. 미수와 상례에 대해서 문답한 글이 있고, 또 미수가 그의 애사(哀辭)를 지은 것으로 볼 때 절친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記言 別集 卷17 司僕主簿金公墓碣, 韓國文集叢刊 99輯》 《順菴集 卷25 敎官遯菴金公行狀, 韓國文集叢刊 229輯》

22)장사……모신다:인용된 내용은 《예기》 〈단궁 하(檀弓下)〉의 “우제(虞祭)가 되면 시동(尸童)을 세우고 궤연을 마련한다.[虞而立尸 有几筵]”라는 글 아래에 실린 《집설》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23)공자(孔子)가……하였네:《예기》 〈단궁 상〉에 나오는 내용이다.

24)임재숙(林載叔)에게 답하다:임재숙은 임담(林墰:1596~1652)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청요(淸曜)․청구(淸癯)이며, 재숙은 그의 자이다. 부친은 감사 서(㥠)이며, 미수보다 1년 연상이다. 이 편지는 임담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였던 1644년(인조22) 무렵에 쓴 것으로 보인다.

25)고종(瞽宗):은(殷)나라의 학교 이름이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종백(宗伯)〉에 “도와 덕이 있는 자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고, 그가 죽으면 예악의 시조로 삼아서 고종에서 제사 지냈다.”라고 하였다.

26) 우애로우며:대본에는 ‘友’ 자가 없으나, 유종원(柳宗元)의 도주훼비정신기(道州毁鼻亭神記)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柳河東集 卷28

27)신약(神約):신에 대한 약조라는 뜻으로, 천자의 명사(命祀)와 교사(郊祀), 제후의 군망(群望)과 묘사(廟祀) 등이 그것이다. 주나라 때 사약(司約)이 신약, 민약(民約), 지약(地約), 공약(功約), 기약(器約), 지약(摯約)의 여섯 가지 약조에 관한 일을 주관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묵형에 처했다고 한다. 《周禮 秋官 司寇》

28)오자서(伍子胥)나……되었습니다:오자서는 춘추 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원(員)이다. 그의 부형(父兄)이 모두 초나라 평왕(平王)에게 죽임을 당하자, 오나라로 가서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도와 초나라를 정벌하였으나, 후에 월나라의 모략으로 오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오왕이 그의 시체를 가죽자루에 담아 삼강(三江)에 띄워 보내게 하니, 오나라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서 삼강 가에 ‘서산사(胥山祠)’라는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 지냈다. 《史記 卷66 俉子胥列傳》  개지추(介之推)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개자추(介子推)라고도 한다. 진 문공(晉文公)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망명길에 올라 19년 동안 국외를 전전할 때 그를 도왔으나, 문공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개지추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문공이 녹봉을 수여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며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뒤에 문공이 면산을 개지추에게 추봉(追封)하고 그 이름을 ‘개산(介山)’이라고 하였으며, 사람들이 개산사(介山祠)라는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 지냈다. 《史記 卷39 晉世家》 《春秋分記 卷26》

29)색제(索祭):천자가 매년 12월에 지냈던 사제(蜡祭)를 가리키는데, 만물의 혼령을 찾아내어 향응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농경을 주관하는 선색(先嗇)과 사색(司嗇), 옛날의 전준(田畯)으로서 백성에게 공이 있었던 농(農), 전관(田官)이 거처했던 밭두둑 사이 농막인 우표철(郵表畷), 묘호(猫虎), 제방(堤坊), 도랑, 곤충 등 여덟 신이 포함된다. 《禮記 郊特牲》

30)목 진사(睦進士)에게 주다:이 편지는 삼현사(三賢祠)를 건립하기 위한 논의 단계에서 주고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목 진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이원익(李元翼)이 생전에 강감찬(姜邯贊)과 서긍(徐兢)을 제향하는 이현사(二賢祠)의 설립을 추진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25년이 지난 뒤인 1658년(효종 9) 고을의 인사들이 삼현사를 세워 이원익을 함께 제향하였다. 삼현사는 금천현(衿川縣) 한천동(寒泉洞)에 있었다. 《記言 卷16 三賢祠記, 韓國文集叢刊 98輯》 《梧里集 附錄 卷5 三賢祠記, 韓國文集叢刊 56輯》

31)강 인헌(姜仁憲):고려의 명신 강감찬(姜邯贊:948~1031)으로, 인헌은 그의 시호이다.

32)서 장령(徐掌令):고려 후기의 문신 서견(徐甄)을 가리킨다. 1391년(공양왕3)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며, 이듬해 간관(諫官)들과 함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탄핵하였다. 그러나 곧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고 이성계와 조준․정도전이 실권을 장악하자 유배되었다.

33)이 문충(李文忠):이원익(李元翼:1547~1634)으로, 문충은 그의 시호이다.

34)문하(門下)에 출입한 사사로움:미수의 부인이 이원익의 장남인 완선군(完善君) 이의전(李義傳)의 딸로서, 미수가 이원익의 손서(孫壻)가 되기 때문에 한 말이다.

35)도 정절(陶靖節)……진요옹(陳了翁):도 정절은 진(晉)나라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이고, 유응지(劉凝之)는 남조(南朝) 송나라 사람이다. 이공택(李公擇)은 송나라 이상(李常)이며, 진요옹은 송나라 진관(陳瓘)이다.

36)충암(忠庵):기묘명인(己卯名人)으로 일컬어지는 김정(金淨:1486~1521)으로, 충암은 그의 호이다.

37)하서(河西):조선 중기의 학자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호이다.

38)동도(東都):경주(慶州)를 가리킨다.

39)홍유후(弘儒侯):신라 중기의 학자 설총(薛聰:655~?)을 가리킨다. 홍유후는 고려 때 추증된 그의 시호이다.

40)대발한(大發翰):태대각간(太大角干)과 같은 말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을 줄여서 쓴 것으로, 김유신(金庾信)을 가리킨다. 신라 문무왕 8년(668) 고구려를 멸망시킨 김유신을 예우하기 위해 대각간(大角干) 위에 설치한 관직이다. 《三國史記 卷38 職官志》

41)문창후(文昌侯):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崔致遠:857~?)으로, 문창은 고려 때 추증된 그의 시호이다.

42)의려(倚廬):부모의 상중에 상주가 집상(執喪)하는 여막으로, 중문(中門) 밖 동쪽 담장 아래에 있었다. 《禮記 喪大記》

43)악실(堊室):사방 벽을 흰 진흙으로 바른 방을 말한다.

44)저최(苴衰):저마(苴麻)로 만든 상복을 말한다.

45)하사(嘏辭):제사 지낼 때, 축(祝)이 제사 받는 조상을 대신하여 주인에게 전하는 축복의 말을 가리킨다.

46)고이성(告利成):제사 때 축이 시동(尸童)에게 공양(供養)의 예가 이루어졌다고 고하는 절차로, 제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47)수조(受胙):제사 지낸 고기를 받는 의식으로, 음복(飮福)하는 절차를 말한다.

48)합독(合櫝):부부의 신주를 한 독(櫝) 안에 모시는 의식이다.

49)참신(參神):제사 지낼 때 신주(神主)에 절하고 뵙는 절차를 말한다.

50)사신(辭神):제사를 마치고 신주를 들이기 전에 신주에게 절하는 절차를 가리킨다.

51)심제(心制):심상(心喪)과 같은 말이다. 미수는 1653년(효종4)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상을 당했는데, 이 편지와 아래 편지는 그 상례와 관계된 내용으로 보인다. 즉, 미수의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경우에 해당되어 기년복(朞年服)을 입게 되는데, 자식 된 도리로 비록 삼년상을 치르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으로 삼년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담제 등의 말이 언급된 것이다.

52)가륭(加隆)의 보답:부모의 삼년상을 가리킨다. 《예기》 〈삼년문(三年問)〉에 “그렇다면 어찌하여 3년으로 하는가. 융중(融重)함을 더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然則何以三年也 曰加隆焉爾也]” 한 데서 나온 말이다.

53)명기(明器):장사 지낼 때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묻기 위하여 만들었던 각종 기물(器物), 동물, 시종자(侍從者) 등의 형상을 가리킨다. 명기(冥器)와 같은 말이다.

54)추령(蒭靈):풀로 만든 사람이나 말을 가리킨다.

55)하장(下帳):장사 지낼 때 시신과 함께 묻기 위해서 작게 만든 기물들이다. 상복(上服)의 반대말로, 상(狀), 장(帳), 인석(茵席)․의자․탁자 등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복두(幞頭), 난삼(幱衫) 등은 신상(身上)에 쓰이는 것이기 때문에 상복이라 하는 데 반해 이들 기물은 신하(身下)에 쓰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장이라고 한다. 《與猶堂全書 3集 第7卷, 韓國文集叢刊 283輯》

56)노생 사제(盧生思齊):본관은 광주(光州), 부친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경명(景命)이다. 《記言 別集 卷17 司憲府監察盧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99輯》

57)충원(忠原):지금의 충청도 충주(忠州)를 가리킨다.

58)천구(遷柩)를 고하는 의식:발인 하루 전에 사당에 영구(靈柩)를 옮긴다는 것을 아뢰는 의식이다.

59)조전(祖奠):발인 하루 전날 저녁에 올리는 제전(祭奠)이다.

60)견전(遣奠):발인할 때 문 앞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61)조묘(朝廟):사당에 알현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62)권생 성중(權生聖中):164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시(子時)이다. 미수와 같은 동네에 살며 교유하였던 권종길(權宗吉)의 손자이며, 부친은 익()인데 숙부 목(穆)의 양자가 되었다. 미수보다 49년 연하이며, 미수가 그의 자를 지어 주었다. 《記言 別集 卷11 權君聖中字說, 卷17 權處士碣銘, 韓國文集叢刊 99輯》

63)한강(寒岡):정구(鄭逑)의 호이다.

64)무신년 대상:선조(宣祖)의 상(喪)을 말한다.

65)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의 호이다.

66)월불(越紼)하여 예를 행한다:상엿줄을 넘어가서 예를 행한다는 뜻이다. 156쪽 주 26) 참조.

67)이생 택(李生澤):1649~?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림(季霖)이며, 부친은 내시교관(內侍敎官) 제항(濟沆)이다. 미수보다 54년 연하이다. 1675년(숙종1)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68)이익귀(李益龜):1634~? 본관은 전주, 자는 백붕(百朋)이다. 부친은 통훈대부 광보(光輔)이며, 미수보다 39년 연하이다. 1663년(현종1)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69)회격(灰隔):장사 지낼 때 광중(壙中)에 관을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것을 말한다.

70)죽은……한다:《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2장에 대한 주석이다.

71)길인(吉人)의……물건:길인은 상중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흉인(凶人)의 반대말로, 일반 사람들을 가리킨다. 망건이 머리가 흘러내리는 불편함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72)이 뜻이 매우 정미하다:《가례》 〈통례(通禮) 사당(祠堂)〉에 “일이 있으면 아뢴다.[有事則告]”라는 구절의 주에, “추증(追贈)이 있으면 신주의 관작을 고쳐서 쓰되 함중은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를 두고 한 말이다.

73)남궁억(南宮億):1639~?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대년(大年)이다. 부친은 통훈대부 집(鏶)이며, 미수보다 44년 연하이다. 1678년(숙종4) 증광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74)삼가(三加)의 예:관례(冠禮)를 말한다. 고대 관례 때 처음에는 치포관(緇布冠)을, 두 번째는 피변(皮弁)을, 세 번째는 작변(爵弁)을 씌웠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75)정숙자(程叔子):송나라 유학자 정이(程頤)를 지칭하는 말로, 그의 형 정호(程顥)와 형제간의 서열을 기준으로 이렇게 높여 부른 것이다.

76)옛날에는……되었다:《의례주소(儀禮註疏)》 사관례(士冠禮)에 나오는 내용이다.

77)사의……한다:《주자전서(朱子全書)》 권37에 나오는 내용이다.

78)예설:정구(鄭逑)의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를 가리키는 듯하다.

79)백운 주씨(白雲朱氏):원나라 주사준(朱士俊)을 가리킨다.

80)겁(袷):대본에는 ‘衿’으로 되어 있는데, 《한강집(寒岡集)》 및 정민정(程敏政)이 편찬한 《명문형(明文衡)》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81) 때문이다:대본에는 ‘歟’로 되어 있으나, 가례의절에 따라 ‘矣’로 바로잡았다.

82)현훈(玄纁):검은색과 옅은 붉은색의 헝겊으로 장례 때 산신에게 드리는 폐백으로 무덤 속에 묻는다.

83)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의 호이다.

84)경임(景任):정경세의 자(字)이다.

85)공정대왕(恭靖大王)만……없으니:공정대왕은 조선의 2대 왕 정종(定宗)을 가리킨다. 정종은 사후에 묘호가 없었으므로 예종(睿宗) 때 묘호를 추상하려다가 예종이 승하하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성종(成宗), 중종(中宗), 인조(仁祖) 때 다시 이 문제가 거론되었으나, 미루어지다가 숙종 7년(1681)에서야 정종이라는 묘호가 추상되었다. 《成宗實錄 6年 1月 15日, 12年 8月 13日, 13年 7月 20日》 《中宗實錄 10年 8月 17日》 《仁祖實錄 10年 3月 9日》 《肅宗實錄 7年 9月 18日》  이 문답은 정종의 묘호 추상이 논의되던 숙종 7년에 주고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86)공백료(公伯寮)가……잘못:공백료는 공자 제자로 노나라 사람이다. 공백료가 노나라의 권력자 계손(季孫)에게 자로를 참소하여 자로(子路)를 위태롭게 했던 일을 말한다. 《論語 憲問》  여기에서는 이 일로 공백료를 공자 사당에서 내쳐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거론한 것이다.

87)신당(申黨)이 신정(申棖)이라는 것:신당은 《사기(史記)》 권67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자(字)가 주(周)이다.”라고만 되어 있는데, 정현(鄭玄)은 그가 신정(申棖)과 동일 인물이라고 하였다. 신정은 공자의 제자로서 공자로부터 기욕(嗜慾)이 많다는 평을 들었던 사람이다. 《論語 公冶長》 이 또한 공자에게서 부정적인 평을 받았던 신정을 공자 사당에 배식해서는 안 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88)실침(實沈)은 대하(大夏)로 옮겨지고:실침은 중국의 고대 황제인 고신씨(高辛氏)의 둘째 아들이다. 그 형 알백(閼伯)과 불화하여 전쟁을 일삼았으므로 고신씨가 알백을 상구(商丘)로, 실침을 대하로 옮기게 하였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元年》

89)명지세(冥之世)는 태원(太原)에 봉해졌는데:명지세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혹 빠진 글자가 있거나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90)남의(南疑):구의산(九疑山)을 가리킨다.

91)상구씨(爽鳩氏)……지냈고:상구씨는 소호(少皞)의 사구(司寇)로서 제나라 땅에 처음 거주하였고, 나머지 세 사람도 모두 태공 이전에 제나라 땅에 봉해졌던 사람들이다. 《春秋左氏傳 昭公20年》

92)예를……직분:예기 중용(中庸)에 “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하지 못하며, 제도를 만들지 못하며, 문을 상고하지 못한다.[非天子 不議禮 不制度 不考文]”라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93)불천지주(不遷之主):불천위(不遷位)와 같은 말로, 큰 공훈이 있어 친진(親盡)이 된 뒤에도 체천(遞遷)하지 않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神位)를 가리킨다.

94)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아래 인용된 글은 《예기》 대문(大文)과 주(註)의 내용을 섞어서 쓴 것임을 밝혀 둔다.

95)자모(慈母):자신을 길러 준 서모(庶母)를 가리킨다. 《儀禮 喪服》

96)작명을……선비는:대본에는 ‘命士’로 되어 있는데, 《예기》 〈상복소기〉에 근거하여 ‘不命之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97)강복(降服):상복을 원래 정해진 것보다 한 단계 낮추어 입는 것으로, 시집간 딸이 친정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양자로 간 아들이 본생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기년복을 입는 사례가 여기에 속한다.

98)반우(返虞):장사 지낸 뒤 신주(神主)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서 우제(虞祭)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99)반혼(返魂):장사 지낸 뒤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1)예(禮)에:아래 인용된 구절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장공(莊公) 3년 조에 대한 주소(註疏)의 내용이다.

2)대공(大功)인……경우:대공인 자는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할 친척으로, 죽은 사람의 종형제(從兄弟)를 가리킨다. 죽은 사람의 자식이 어려 상주 노릇을 하지 못하여 종형제가 대신 상주가 되는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3)한군 덕량(韓君德亮):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중(明仲)이며, 부친은 사과(司果) 해(湝)이다. 《記言 卷15 中篇 雙柏齋銘序, 韓國文集叢刊 98輯》

4)도자(韜藉):신주독(神主櫝)을 씌우는 집으로, 위와 측면 부분을 도(韜)라고 하고 바닥 부분을 자(藉)라고 하는데, 흔히 비단을 겹으로 포개 붙여서 만들었다. 《가례(家禮)》 권수(卷首)에 독도자식(櫝韜藉式)이 실려 있다.

5)부방(趺方):신주(神主)의 받침대 부분으로, 몸체에 해당하는 주신(主身)을 받치는 것이다.

6)포(苞)와 소(筲)는 명기(明器)로서:명기는 장사 지낼 때 무덤에 함께 묻는 기물(器物)로, 일반적으로 대나무나 나무, 진흙 등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포와 소는 《가례》 권수에 도식이, 권5에 설명이 실려 있다. 국역 대본에는 ‘苞’가 ‘笣’로 되어 있으나 《가례》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7)방상시(方相氏):주대(周代)의 관명으로 역귀(疫鬼)와 산천의 악귀를 쫓는 일을 맡았다. 대상(大喪) 때 악귀를 쫓기 위하여 무서운 모습으로 분장을 하고 영구를 인도하였다. 《周禮 夏官 司馬》 《家禮 卷5 葬禮》

8)구의(柩衣):영구를 덮는 보자기를 가리킨다.

9)차운로(車雲輅):1559~163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만리(萬里), 호는 창주(滄洲)이며, 부친은 호조 좌랑 식(軾)이다. 차천로(車天輅)의 동생으로, 미수보다 36년 연상이다. 1580년(선조13)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입격하였고, 1583년 알성 문과에 입격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창주집(滄洲集)》이 있다.

10)백설(白雪)에……않으니:백설은 초나라의 가곡 이름으로, 곡조가 높아서 부르기 어려운 곡이다. 어떤 사람이 초나라의 국도(國都)인 영(郢)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처음에 하리(下里)파인(巴人)을 노래하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양아(陽阿)해로(薤露)를 노래하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고, 양춘(陽春)백설을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만큼 곡조가 높아 화답하기 어려운 노래를 뜻한다. 《文選 卷45 對楚王問》 여기에서는 부르기 어려운 백설곡은 화답하는 사람이 적듯이, 세상에 으뜸가는 뛰어난 문장은 속인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11)입으로 외우고:대본에는 ‘誦於’ 아래에 한 글자가 결락되었는데, 문맥을 살펴 ‘口’ 자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12) 바보:대본에는 ‘疑’ 자로 되어 있으나, 뜻이 잘 통하지 않아 ‘儗’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3)수고롭게……하고:공자(孔子)가 뜻을 펴지 못하여 떠돌다가 진(陳), 채(蔡)에서 극도의 곤궁함을 겪었던 일을 말한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14)제(齊)……뒤에야:맹자가 제(齊)나라와 양(梁)나라를 찾아갔다가 뜻을 펴지 못했던 일을 말한다. 《史記 卷74 孟子列傳》

15)태사공(太史公)은……저술하였습니다:《사기》 권13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나오는 내용이다.

16)추상열일벽립만인(秋霜烈日壁立萬仞):사람들이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일컬어서 “가을 서리처럼 매섭고 여름 햇볕처럼 따갑다.[秋霜烈日]”라고 한 말과, 조식이 평소 “장부의 행동거지는 무겁기가 산과도 같아서 만 길의 절벽처럼 우뚝 서 있다가 때가 이르렀을 때 펴야 하는 것이다.[丈夫動止 重如山岳 壁立萬仞 時至而伸]”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東岡集 卷17 南冥先生言行錄, 韓國文集叢刊 50輯》

17)구암(龜巖):이정(李楨:1512~1571)으로,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강이(剛而)이며, 구암은 그의 호이다. 부친은 담(湛)이다. 1536년(중종31) 별시 문과에 입격하였다. 어릴 때는 송인수(宋麟壽)에게 학문을 배웠고, 성장한 뒤에는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저서로 《구암집(龜巖集)》, 《성리유편(性理遺編)》, 《경현록(景賢錄)》 등이 있다.

18)곤변(鯀變) 씨:1551~? 구암 이정의 손자로, 자는 자거(子擧), 호는 백인재(百忍齋)이며, 부친은 응인(應寅)이다. 1570년(선조3)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사부(詞賦)로 이름을 떨쳤으며, 문집으로 《백인재유고(百忍齋遺稿)》가 있다. 허목의 동생인 허의(許懿)의 처 사천 이씨(泗川李氏)가 이곤변의 손녀로, 미수와는 인척 간이었다. 《記言 卷42 許松禾葬銘, 韓國文集叢刊 98輯》 《龜巖集 卷2 附錄 墓碣銘, 韓國文集叢刊 33輯》

19)학봉(鶴峯):김성일(金誠一)의 호이다.

20)남명이……뒤로부터:남명 조식이 이정을 배척한 것은 경상도 진주(晉州)의 음부옥(淫婦獄) 때문이었다. 음부옥은 진주의 고(故) 진사(進士) 하종악(河宗嶽)의 후처 이씨(李氏)의 음행 소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옥사이다. 이 사건에 조식과 이정이 서로 다른 입장으로 미묘하게 대립하다가 급기야 조식이 이정과 절교하고, 조식의 문인들이 과부 이씨와 간부(姦夫)의 집을 헐고 향리에서 내쫓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이 일은 조정에까지 보고되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이정의 손자 이곤변이 그 조부의 결백함을 밝히기 위해서 ‘졸변(拙辨)’을 짓고, 조식의 손자 조준명(曺浚明)이 이를 반박하는 ‘반변(反辨)’을 짓는 등, 두 사람의 사후에도 이 사건으로 인해 양쪽 집안과 지역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鄭萬祚, 宣祖初 晉州 淫婦獄과 그 波紋, 韓國學論叢 22, 國民大學校韓國學硏究所, 1999》 미수는 이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21)진창(陳倉)의 석고(石鼓):진창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진창산(陳倉山)이고, 석고는 북 모양의 돌에 새겨져 있었던 고전(古篆)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주(周)나라 문왕(文王)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설, 선왕(宣王)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설, 진(秦)나라 때 만들어졌다는 설 등 다양한 학설이 있다.

22)회계산(會稽山)의 비석:진 시황(秦始皇)의 공덕을 기린 비석으로, 글씨는 이사(李斯)가 쓴 것이라 한다.

23)이양빙(李陽氷)의 옥저체(玉筯體):이양빙은 당대(唐代)의 서예가이다. 옥저는 진(秦)나라 때 이사(李斯)가 만든 서체로서 소전(小篆) 중의 하나이다. 이양빙은 특히 이 옥저체를 잘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4)유형원 덕부(柳馨遠德夫):1622~1673.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 호는 반계(磻溪)이며, 부친은 예문관 검열 흠(憌)이다. 미수보다 27년 연하이다.

25)문옹(文翁):정동직(鄭東稷:1623~1658)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문옹은 그의 자이다. 159쪽 주 2) 참조.

26)억계(抑戒) 12장(章):《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을 가리킨다. 군자의 위의(威儀)를 경계시킨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27)조용주(趙龍洲)에게 주다:조용주는 조경(趙絅:1586~1669)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이며, 용주는 그의 호이다. 부친은 봉사(奉事) 익남(翼男)이며, 미수보다 9세 연상으로 미수와 막역한 교유를 맺었다. 1612년(광해군4) 식년 진사시, 1626년(인조40) 정시 문과에 합격하였다. 1643년에는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호란 때 척화를 주장했던 일로 1650년(효종1)에는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용주집(龍洲集)》, 《동사록(東槎錄)》이 있다. 이 편지는 용주가 일본으로 사행을 간 1643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28)한마디……조롱했고:탐묵한 정승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가리킨다. 조경이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올린 상소에서, 홍서봉이 병조 판서로 재직할 당시 뇌물을 받은 사실을 거론한 것을 가리킨다. 《龍洲遺稿 卷6 司諫應旨疏, 韓國文集叢刊 90輯》

29)노련(魯連)을……곡하였는데:노련은 전국 시대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다. 당시 제후들이 포학한 진(秦)나라를 황제국으로 떠받들려 하자, 노중련이 반대하면서 “내 차라리 동해(東海)에 뛰어들어 죽을지언정 진나라를 황제국으로 떠받드는 것은 보지 않겠다.”라고 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은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였고, 청나라와의 화의가 맺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가서 은거하다가 5년 뒤에 죽었다. 조경은 정온을 조상(弔喪)한 시 〈노련(魯連)〉에서 정온의 높은 기개를 노중련의 행동과 견주었는데, 그 마지막 구절에 “내가 노련편을 지어, 멀리서 동계 노인을 애도하노라. 뒷사람들 알는지 모를는지, 피눈물을 하늘 향해 뿌리노라.[我把魯連篇 遙挽桐溪老 後人知不知 洒血向蒼昊]”라고 하였다. 《龍洲遺稿 卷5 五言古詩 魯連, 韓國文集叢刊 90輯》

30)천춘(千春) 어른:천춘은 이경(李藑:1579~1650)의 자이다. 이경은 본관이 경주, 호는 서간노옹(西澗老翁)이며, 부친은 찰방 귀남(貴男)이다. 내섬시 봉사, 상서원 직장 등을 지냈다. 《記言 別集 卷23 西澗翁墓表陰記, 韓國文集叢刊 99輯》

31)왕휘지(王徽之)의……말:차군(此君)은 대나무의 미칭(美稱)이다. 진(晉)나라 왕휘지가 일찍이 남의 빈집을 빌려서 살면서도 반드시 대나무를 심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대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어찌 단 하루인들 차군이 없을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邪]”라고 하였던 데서 나온 말이다. 《晉書 卷80 王徽之列傳》

32)오마(五馬):다섯 마리의 말로, 고을 수령의 행차를 가리킨다. 한나라 때 태수(太守)가 다섯 마리가 끄는 수레를 탔던 것에서 나온 말로 여기에서는 조경이 미수 자신을 찾아 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33)문소(聞韶):경상북도 의성(義城)의 고호(古號)이다.

34)사인(舍人) 홍우원(洪宇遠)에게 주다:홍우원(1605~1687)은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이다. 부친은 한성부 서윤 영(榮)이며, 미수보다 10년 연하이다. 1645년(인조23) 별시 문과에 입격하였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南坡集 年譜, 韓國文集叢刊 106輯》  편지는 1662년(헌종3) 무렵에 쓴 것으로 보인다.

35)이관징(李觀徵):1618~1695.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빈(國賓), 호는 근옹(芹翁)․근곡(芹谷)이다. 부친은 증 이조참판 심(襑)이며, 미수보다 23년 연하이다. 1639년(인조17)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653년(효종4) 별시 문과에 입격하였다. 1660년 효종 사후에 조 대비(趙大妃)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삼년설을 주장한 미수를 구제하려다가 전라도 도사로 좌천되는 등 남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해서(楷書)에 일가를 이루었고, 김생(金生)의 필법을 연구하였다. 저서로 《근곡집(芹谷集)》이 있다.

36)임담(林墰):1596~1652.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재숙(載叔), 호는 청요(淸曜)․청구(淸癯)이다. 부친은 감사 서(㥠)이며, 미수보다 1년 연하이다. 1616년(광해군8)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5년(인조13) 증광 문과에 입격하였다. 이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7)윤선도(尹善道):1587~1671.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이다. 부친은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유심(惟深)이나 강원도 관찰사 유기(惟幾)에게 입양되었다. 미수보다 8년 연상이다. 남인으로서 몇 차례 유배 생활을 하다가 1657년(효종8) 다시 벼슬길에 나섰으나, 복제(服制)에 관해 상소한 일로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10여 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저서로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으며, 시조 작가로도 유명하다.

38)바닷가는……들었으니:바닷가는 미수가 좌천되어 있던 삼척(三陟)을 가리키고, 그곳은 윤선도가 귀양 가 있던 삼수이다.

39)백헌(白軒)……올리다:이경석(李景奭:1595~1671)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쌍계(雙溪)이다. 종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6대손이며, 부친은 동지중추부사 유간(惟侃)이다. 미수와는 동갑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양관(兩館) 대제학 등을 거쳐 인조 말년에 영의정을 거쳐 1659년(현종 즉위년) 영돈녕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 《백헌집(白軒集)》이 있다. 이 편지는 미수가 삼척 부사로 재직하던 1660년에서 1662년 사이에 쓴 것으로 보인다.

40)옛사람이……것:맹자(孟子)가 인정(仁政)에 대해 한 말로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 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41)종형(從兄)에게 답하다:종형은 허후(許厚:1588~1661)로, 자는 중경(重卿), 호는 관설(觀雪)․둔계(遯溪)․일휴(逸休) 등이고 부친은 미수의 중부(仲父) 양(亮)이다. 미수보다 7년 연상이다. 전서(篆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둔계집(遯溪集)》이 있다. 이 편지는 1648년(인조26)에 쓴 것이다.

42)이 포천(李抱川)에게 주다:이 포천은 포천 현감(抱川縣監)을 지낸 이수약(李守約:1590~1668)으로 보인다. 이수약은 미수의 장인인 완선군(完善君) 이의전(李義傳)의 장남이자 이원익(李元翼)의 손자로, 미수에게는 매형이 된다. 미수보다 5년 연상이다. 《記言 別集 卷17 李典籤墓碣銘, 李典籤墓誌, 韓國文集叢刊 99輯》  이 편지는 미수가 모친상을 당한 이듬해인 1648년(인조26)에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수약은 1645년 포천 현감에 제수되었다가 병으로 곧바로 돌아왔고, 1647년 부친상을 당하여 이때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를 포천으로 지칭한 것은 이 때문으로 생각된다.

43)선장(先狀):선대의 일생을 기록한 글로서, 작고한 선대의 행장, 묘지, 묘지명, 묘갈, 묘갈명 등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이수약의 조부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행장을 가리킨다. 이원익의 손서(孫壻)인 미수는 이원익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서 문헌 정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행장을 찬하는 문제가 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 民族文化推進會, 1998, 383쪽》

44)교관(敎官) 이명시(李命蓍)에게 주다:이명시는 미수의 종형 허후의 제자로 허후의 상례를 주관했던 사람이나, 그의 생몰년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 편지는 허후의 사후 그를 원주의 서원에 제향하는 문제에 대해 논한 것으로 보인다. 허후는 1693년(숙종19) 원주(原州)의 도천서원(陶川書院)에 제향되었다.

45)정창시(鄭昌詩):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장남이다. 1590년(선조23)에 태어났고, 1641년(인조19)에 별세한 부친 정온의 상례를 치르고 얼마 뒤 사망하였다고 한다. 미수보다 5년 연상이다. 고령 현감(高靈縣監), 운봉 현감(雲峯縣監), 공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46)지난해에는……주셨으니:1647년 미수가 경상도 의령에서 모친상을 당하여 상여를 모시고 연천으로 돌아오던 때를 말한 듯하다. 이때 고령 현감으로 있던 정창시가 나와서 조문을 한 것으로 보인다.

47)선장(先狀):정창시의 부친인 동계 정온의 행장을 가리킨다. 한국문집총간 98집에 수록된 《기언》 권39에 〈동계선생행장(桐溪先生行狀)〉이 실려 있다.

48)공최(功衰)를 입은 몸:공최는 부모상에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 바꿔 입는 상복이다. 미수가 이때 모친상의 연제를 지낸 상태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49)상상(殤喪):성년이 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상(喪)을 가리키는 말로, 윤 용담이 성년이 되지 않은 아들의 상을 당했던 듯하다.

50)구양자(歐陽子)가……제문(祭文):구양자는 송대(宋代)의 문인 구양수(歐陽脩)인 듯하다. 그러나 ‘성년이 못 되어 죽은 자식[殤子]’과 그 제문은 출전을 찾지 못하였다.

51)수규(首揆):영의정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영의정은 허적(許積)이었다.

52)유수(留守)……주다:권대운(1612~1699)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시회, 호는 석담(石潭)이며, 부친은 사어(司禦) 근중(謹中)이다. 미수보다 7년 연하이다. 숙종 초 미수가 우의정으로 재직할 때 좌의정을 맡았으며, 1689년(숙종15) 영의정에 올랐다. 이 편지는 권대운이 개성 유수로 재직하던 1665년에서 1666년 사이에 쓴 듯하다. 《樊巖集 卷45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權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236輯》

53)선장(先狀):권대운의 조부 권협(權悏)의 묘지명을 가리킨다. 미수는 권협의 묘지명과 권대운의 부친 권근중(權謹中)의 묘갈명을 모두 지었고, 그 밖에도 권대운 선대의 묘문(墓文)을 여러 편 지은 바 있으나, 아래 편지 내용에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언급된 것으로 볼 때 여기서는 권협의 묘지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記言 別集 卷18 吉昌府院君權公墓地銘, 贈吏曹判書權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99輯》

54)태재(太宰):이조 판서를 지칭한 말이다.

55)강교(江郊)로 나온 뒤:1678년(숙종4) 초여름 미수가 도성을 나와 서강(西江)의 옹막촌(瓮幕村)에 머물렀던 때를 말한다. 당시 우의정이었던 미수가 누차 사직 상소를 올려도 왕이 윤허하지 않다가, 윤3월 4일 체차를 허락하자 이튿날 바로 성을 나가 서강의 옹막촌에 머물렀다. 그러나 다시 성으로 들어오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연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4월까지 서강에 머물렀다. 《記言 年譜 卷2, 韓國文集叢刊 99輯》

56)문언박(文彦博)이……태도:문언박은 북송 때의 명신으로,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노국공(潞國公)에 봉작되었다. 당개(唐介)는 성품이 매우 강직하였는데, 전중어사(殿中御史)가 되어 황제 앞에서 재상(宰相)인 문언박을 강력히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자신도 영주 별가(英州別駕)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문언박은 다시 재상이 되자 황제에게 청하여 당개를 조정으로 불러들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후덕하다고 일컬었다. 《宋史 卷313 文彦博列傳》

57)민옹(閔翁):민희(閔熙:1614~1687)를 지칭한 말이다.

58)부암(傅巖)의 판축(板築):부암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재상인 부열(傅說)이고, 판축은 공사 현장에서 담장이나 성을 쌓는 일로, 고종이 부암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부열을 발탁하여 재상을 삼은 일을 말한다. 《書經 說命上》

59)김덕원(金德遠):1634~1704.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휴곡(休谷)이다. 부친은 판관 인문(仁文)이며, 미수보다 39년 연하이다. 정치적으로 미수를 지지하는 청남(淸南) 계열 인사로서, 복제 논쟁에서도 미수의 설을 따랐다. 기사환국 이후 우의정에 임명되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갑술환국 후에는 제주도에 유배되는 등 정국의 향방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60)우득록(愚得錄):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1529~1590)의 문집이다.

61)공자(孔子)가……것:공자가 제자 민자건(閔子騫)을 두고 한 말로, 《논어》 〈선진(先進)〉에 나오는 내용이다.

62)권생 규(權生珪):권규(權珪:1648~1723)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국서(國瑞)․덕장(德章), 호는 남록(南麓)이다. 부친은 영의정 대운(大運)이며, 미수보다 53년 연하이다. 부친과 함께 남인의 당색을 고수했던 인물이다. 전서(篆書)에 뛰어났다.

63)이인징(李麟徵):1643~1729.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서(玉瑞), 호는 운강(雲崗)이다. 부친은 지평 완()이며, 미수보다 48년 연하이다. 1675년(숙종1) 사마시에 입격하고, 1679년 문과에 입격하였다. 1689년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으며, 승지로 오랫동안 재직하였다.

64)한군 오규(韓君五奎):생몰년이 분명히 기록된 자료는 없지만 1621년(광해군13)에 태어나서 1652년(효종3)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청주, 자는 문서(文瑞)이며, 부친은 혜(橞)이다. 미수보다 26년가량 연하이며, 미수에게 수학한 듯하다.

65)한숙(韓塾):1646~? 본관은 청주, 자는 수이(受而)이다. 부친은 오규(五奎)이며, 미수보다 51년 연하이다. 1673년(현종14)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1)윤휴 희중(尹鑴希仲):1617~1680.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희중,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이다. 부친은 대사헌 효전(孝全)이며, 미수보다 22년 연하이다. 본래는 당색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았으나, 예송으로 서인 측과 틈이 생긴 이후로는 남인으로 활약하였고, 특히 미수와 함께 청남(淸南)에 속하였다. 저서로 《독서기(讀書記)》, 《백호집(白湖集)》 등이 있다.

2)송장(宋丈):송석우(宋錫祐:1584~?)로,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계신(季愼), 호는 육우당(六友堂)이다. 부친은 숙(塾)이며, 미수보다 11년 연상이다. 1624년(인조2) 식년 생원시에 입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한산(寒山)에서 노년을 보냈다. 《記言 別集 卷9 寒山六友堂記, 鄭生草堂題名記, 韓國文集叢刊 99輯》

3)윤생 이후(尹生爾厚) 재경(載卿)에게 답하다:윤이후(1636~?)는 본관은 해남이고, 재경은 그의 자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손자로서, 부친은 진사 의미(義美)이며, 미수보다 41년 연하이다. 1679년(숙종5)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689년 증광 문과에 입격하였다. 이 편지에서는 윤선도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남긴 글을 정리하는 문제로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보인다.

4)권생 성중(權生聖中):본관은 안동, 자는 자시(子時)이다. 185쪽 주 62) 참조.

5)이석관(李碩寬):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은(大隱)이며, 후백(後白)의 현손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6)병이……멀어지네: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시 〈세모귀남산(歲暮歸南山)〉에 나오는 구절이다. 《事文類聚 前集 卷33》

7)청문(靑門)에서의 송별:청문은 도성의 동문(東門)이다. 1678년(숙종4) 4월 미수가 연천(漣川)으로 돌아올 때 이석관이 동문 밖 관왕묘(關王廟)에까지 나와 전송했던 것을 말한다. 《記言 別集 卷15 戊午記行, 韓國文集叢刊 99輯》

8)정지호 자피(鄭之虎子皮):1605~1677.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피, 호는 무은(霧隱)이다. 부친은 증 이조 참판 응원(凝遠)이며, 미수보다 10년 연하이다. 1635년(인조13) 진사시에 입격하고, 163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지, 형조 참판, 대사간 등을 지냈고, 죽은 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記言 別集 卷18 贈判書鄭公墓碑銘》

9)정행백(鄭行百):정지호의 둘째 아들로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다.

10)이봉징(李鳳徵):1640~1705.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명서(鳴瑞), 호는 은봉(隱峰)이며, 부친은 지평 완()이다. 248쪽 주 62)의 이인징(李麟徵)의 형이며, 미수보다 45년 연하이다. 1675년(숙종1) 증광 문과에 입격하였다.

11)박신규(朴信圭):16311687.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봉경(奉卿), 호는 죽촌(竹村)이다. 부친

12)조위봉(趙威鳳):1621~167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문(鹿門)이다. 부친은 미수와 친밀하게 교유하였던 우참찬 경(絅)이며, 미수보다 26년 연하이다.

13)서강지(西江紙):서강은 한강의 서강을 가리키는 듯하다. 1678년(숙종4) 윤3월 4일에 미수가 우의정 직책을 체차하겠다는 왕의 윤허를 받고 곧바로 연천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성을 나와 서강의 옹막촌(瓮幕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다시 성으로 들어오라는 명이 있어 한 달가량 머무른 적이 있었다. 《記言 年譜 卷2, 韓國文集叢刊 99輯》  이때 왕에게 올린 차자 또는 지인들에게 준 서신을 서강지라고 한 것인지, 아니면 그와 상관없이 조위봉이 미수에게 서강과 관련된 글씨를 요청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풀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다.

14)허정 중옥(許珽仲玉):1621~?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중옥(仲玉), 호는 송호(松湖)이다.

15)이생 택(李生澤):1649~?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림(季霖)이다. 188쪽 주 67) 참조.

16) 슬프고 처량한:대본에는 ‘寥慄’로 되어 있으나 ‘寥’는 ‘㵳’의 오기인 듯하다. 판각상의 오류로 판단되어 바로잡았다.

17)죄를……뿐이네:1680년(숙종6) 5월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면서 미수의 관직이 삭탈되었는데, 그 뒤에도 대간(臺諫)의 탄핵이 계속되었으므로 미수가 왕이 하사한 은거당(恩居堂)을 피해 촌사(村舍)로 나와서 명을 기다렸던 일을 가리킨다. 《記言 年譜 卷2, 韓國文集叢刊 99輯》

18)송석우(宋錫祐):251쪽 주 2) 참조. 송석우는 1624년(인조2)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그러나 지인(知人)들은 그를 진사라는 호칭으로 부른 듯하다. 《司馬榜目》

19)희중(希仲):윤휴(尹鑴)의 자이다. 250쪽 주 1) 참조.

20)어등(魚登)에 갔을 적에는:1664년(현종5) 1월에 민응협(閔應協:1597~1663)의 상에 문상하러 갔던 때를 말한다. 미수는 그길로 손령(蓀嶺)으로 용주(龍洲) 조경(趙絅)을 찾아가서 만났다. 《記言 別集 卷15 甲辰記行, 韓國文集叢刊 99輯》

21)남궁억(南宮億):1639~?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대년(大年)이다. 191쪽 주 73) 참조.

22)종묘에……날짜:1679년 3월에 강도(江都)의 축성장(築城將) 이우(李)의 투서 사건에서 불거져 나온 역옥을 수사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한 일과 관련해서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기로 한 날짜를 말한다. 《肅宗實錄 5年 3月, 4月, 5月》

23)죄인에게 가율(加律)하는 일:1679년 이우의 사건이 역옥으로 확대되어 조정에 큰 파란을 일으켰고, 또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송상민(宋尙敏)이 예론(禮論)에 대한 장문의 소를 올려 송시열이 애초에 정했던 복제(服制)가 옳다는 것을 극론(極論)하였다가 장살(杖殺)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상소에서도 효종의 종통 문제가 언급되었다. 이로 인해 남인들이 귀양 가 있는 송시열에게 가율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肅宗實錄 5年 3月, 4月, 5月》 《宋子大全 附錄 卷7》 《記言 別集 卷4 請勿罪人加律箚, 韓國文集叢刊 99輯》

24)대은(大恩)을 입은 후:1680년(숙종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미수의 관직이 삭출(削黜)되었고, 이어 대간(臺諫)이 중도부처(中道付處)하도록 계사를 올렸으므로 미수는 촌사(村舍)에서 명을 기다리다가 6개월 만에 대간이 정계(停啓)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중도부처하라는 대간의 요청을 숙종이 받아들이지 않아 자신에게 더 이상 죄가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은이라고 말한 것이다. 《記言 年譜 卷2, 韓國文集叢刊 99輯》

25)고문(古文)을 금지시키라는 요청:1682년 판서 이정영(李正英)이 미수의 전서체(篆書體)를 금지시키도록 청한 일을 말한다. 《記言 年譜 卷2, 韓國文集叢刊 99輯》

26)한은 중징(韓垽仲澄):1619~1688.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징, 호는 만은(漫隱)이다. 부친은 참판 형길(亨吉)이며, 미수보다 24년 연하이다. 미수의 종형 허후(許厚)와 미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경전(經傳)에 주력하였으며, 특히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많은 힘을 쏟았다. 천거를 받아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27)권수(權脩):1618~? 본관은 안동, 자는 영숙(永叔)이다. 부친은 군수 담(紞)이나 병조 판서를 지낸 백부 진(縉)에게 입양되었다. 미수보다 23년 연하이다. 1618년(광해군10)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665년(현종6) 문과 정시에 합격하였고, 숙종 때에 승지,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허후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28)윤 판서(尹判書):윤휴(尹鑴)를 가리킨다.

29)노릉(魯陵)을 복위하는 일:노릉은 조선의 제6대 왕 단종(端宗)을 가리킨다. 단종은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서인으로 강등된 채 죽었는데, 1681년(숙종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가 1698년에 이르러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윤휴는 1679년에 단종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으며, 미수에게 준 편지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白湖集 卷10 請復魯陵疏, 卷14 與許眉叟書, 韓國文集叢刊 123輯》

30)설옹(雪翁):미수의 종형 관설(觀雪) 허후(許厚)를 가리킨다.

31)아들아이가……걸려들었는데:이태서(李台瑞)는 진사 취인(就仁)의 아들로서 대북(大北)의 후손이다. 직강(直講)으로 재직한 적이 있었으나 숙종 초 미수의 추천으로 예빈시 정, 승문원 검교 등을 지냈는데, 1680년(숙종6) 허견(許堅)의 역모에 연루되어 장폐(杖斃)되었다. 《肅宗實錄 1年 4月 10日, 6年 4月 10日․17日》 《燃藜室記述 卷34 肅宗朝故事本末 庚申大黜陟許堅之獄》  실록 등에 정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이태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미수의 아들이 연루되어 조사를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32)이생 진무(李生晉茂):1608~1677. 본관은 전주, 초명(初名)은 진설(晉卨)이며, 호는 취우(醉愚)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으로, 부친은 혁(愅)이나 족부(族父) 분(昐)에게 입양되었다. 미수의 둘째 아들 함()의 장인으로서 미수와는 사돈 관계이다. 미수의 종형 허

33)웅강(熊江):이진무가 살고 있는 연천의 웅연을 가리킨다.

34)문석 강애(文石江崖)에 부치다:이진무(李晉茂)에게 부친 편지이다. 이진무가 살고 있던 웅연(熊淵)의 강기슭에 초서(草書) 같은 무늬가 박힌 바위가 있어서 이것을 문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記言 別集 卷15 戊戌舟行記, 韓國文集叢刊 99輯》  또한 아래 〈강가의 처소에 부치다〉도 이진무에게 부친 편지이다.

35)박감(朴):1602~?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이온(以蘊)이다. 부친은 사섬시 직장을 지낸 수근(守謹)이며, 미수보다 7년 연하이다. 1633년(인조11)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36)이생 운태(李生云泰):본관은 전주, 자는 대래(大來), 호는 남계(楠溪)이며, 부친은 장악원 첨정을 지낸 순암(純馣)이다.

37)성은을……못하니:서호(西湖)는 한강의 서강(西江)으로, 1678년(숙종4) 초여름 미수가 서강의 옹막촌(瓮幕村)에 머물렀던 것을 이른다. 257쪽 주 13) 참조.

38)강동(江東)으로……장한(張翰)처럼:장한은 중국 진(晉)나라 때 사람으로 강동의 오군(吳郡) 출신이다. 장한이 벼슬살이를 위해 고향을 떠났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고향 오군의 별미인 농어회와 순채나물이 그리워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를 말한다. 《晉書 卷92 張翰列傳》

39)지(誌)에……했는데:두우(杜佑)의 《통전(通典)》 〈백제(百濟)〉에 “바다 가운데 삼도(三島)가 있는데 이곳에서 황칠(黃漆)이 난다.” 하였다. 삼도는 제주도를 가리킨다.

40)단술을 준비한 뜻:상대방을 예우하는 것을 뜻한다. 한나라 때 목생(穆生)은 술을 마시지 못했는데, 초 원왕(楚元王)이 그를 존경하여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단술을 준비하곤 하였다. 그러다 원왕의 손자 무(戊)에 이르러서 잊어버리고 단술을 준비하지 않자, 목생은 “단술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임금이 게을러졌기 때문이다.” 하고 떠나 버렸다 한다. 漢書 卷36 楚元王劉交傳

41)그날……것이네:이운태가 미수를 찾아와 주는 것이야말로 미수 자신을 어른으로 대접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42)한오상(韓五相):1620~1656. 본관은 청주, 자는 세익(世翊)이다. 부친은 현감 무(楙)이며, 미수보다 25년 연하이다. 1648년(인조26)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여 헌릉 참봉(獻陵參奉)을 지냈고, 사후에 주서 겸 춘추관기사관(注書兼春秋館記事官)에 추증되었다. 《記言 別集 卷23 贈注書韓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99輯》

43)조생 감(趙生瑊):본관은 한양, 자는 국보(國寶)이며, 부친은 승지 조사기(趙嗣基:1617~1694)이다.

44)차면(次面):반가운 편지를 가리키는 말로, 그리워하는 사람을 대면한 것에 버금간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45)이생 사겸(李生思謙)에게 주다:이사겸은 자가 익지(益之)로, 달리 인물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기언》 별집 권5에 상례에 관해서 미수와 주고받은 문목(問目)이 실려 있다. 이 편지는

46)현경(顯卿):미수가 교유한 인물 중에 현경이라는 자를 가진 인물은 두 사람이 있다. 김중영(金重榮:1607~1682)은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둔암(遯菴), 부친은 사복시 주부 김신길(金愼吉)이며, 효종조에 교관(敎官)을 지낸 바 있다. 미수보다 12년 연하로서, 미수와 상례에 대해서 문답한 글이 있고, 또 미수가 그의 애사(哀辭)를 지었다. 또 한 사람은 변유기(卞惟幾)로,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미수가 창원 근처에서 우거할 때 교유한 변창후(卞昌後)가 그의 부친이다. 여기에서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47)나생 두춘(羅生斗春):1646~? 본관은 나주, 자는 시이(始而), 부친은 행 의금부 도사 진(袗)이다. 1690년(숙종16)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미수보다 51년 연하이다.

48)김학배(金學培):1628~167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휴(天休), 호는 금옹(錦翁)이다. 부친은 암(黯)이며, 미수보다 33년 연하이다. 김시온(金是榲)의 문인으로, 1663년(현종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예조 좌랑에까지 이르렀다.

49)표은공(瓢隱公):표은은 김시온(金是榲:1598~1669)의 호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이승(以承)이며, 부친은 진사 철(澈)이다.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경학과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참봉 등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칭하였다. 문집으로 《표은집(瓢隱集)》이 전해진다. 《記言 別集 卷19 崇禎處士墓銘, 韓國文集叢刊 99輯》

50)참봉 정창기(鄭昌基)에게 주다:정창기(1611〜?)는 본관은 경주, 자는 극가(克家)이며, 부친은 호(晧)이다. 미수가 낙천와기(樂天窩記)를 지어 주는 등 친밀한 교유를 맺었다. 미수보다 16년 연하이다. 정창기에게 준 몇 편의 편지도 시기적인 순서대로 편집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51)빈……것:《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인적 드문 황량한 고장으로 달아난 자는 다른 사람의 발소리만 들어도 기뻐하는 법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극히 얻기 어려운 소식이나 반가운 소식을 듣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52)한 글자는……두렵네:추신으로 붙인 구절이다. 한 글자는 다음 편지에 나오는 내용들과 연관된 것으로, 정창기가 지은 글에 쓰인 글자를 두고 한 말로 생각된다.

53)또:이 편지는 예송(禮訟)과 관련된 정창기의 글을 미수가 미리 검토한 뒤 자구(字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하도록 권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54)낭선군(朗善君) 우(俁)에게 답하다:이우(李俁:1637~1693)는 본관은 전주, 자는 석경(碩卿), 호는 관란정(觀瀾亭)이다. 선조의 열두째 아들인 인흥군(仁興君) 영(瑛)의 큰아들로 낭선군에 봉해졌다. 미수보다 42년 연하이며, 서화에 능하였다. 몇 차례 청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는데, 이 편지는 그가 1678년(숙종4) 사행을 다녀온 후에 쓴 것으로 보인다.

55)복창 공자(福昌公子):이정(李楨:?~1693)으로, 본관은 전주이며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 요(㴭)의 아들이다.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56)신우비(神禹碑):중국 호남성(湖南省) 형산(衡山)의 구루봉(岣嶁峯)에 있었다는 비로 구루비(岣嶁碑)라고도 불린다. 하(夏)나라 우(禹)가 썼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후세 사람의 위작(僞作)으로 알려져 있다. 미수가 이에 대해 발문과 기문을 쓴 바 있다. 《記言 卷6 上篇 衡山神禹碑跋, 別集 卷9 衡山碑記, 韓國文集叢刊 98․99輯》

57)삼한(三韓)의 밖으로 나가:대본에는 ‘三韓之外’ 앞의 한 글자가 불분명한데, 한국문집총간 99집에 수록된 《기언》 별집 권9 〈형산비기(衡山碑記)〉에 ‘出三韓之外’라고 한 것에 근거하여 번역하였다.

58)이생 구(李生絿):본관은 전주, 자는 대유(大柔)이다. 159쪽 주 1) 참조.

59)권일(權佾):1608~? 본관은 안동, 자는 자만(子萬)이다. 부친은 군기시 부정 담(紞)이며, 미수보다 13년 연하이다.

60)양주학(楊州鶴):인간이 바라는 소망을 모두 겸비하는 것을 말한다. 예전에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 소원을 말하였는데, 한 사람은 많은 돈을 갖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 하자, 이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많은 돈을 허리에 차고서 학을 타고 양주 고을의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淵鑑類函 鳥部三 鶴》

61)감사 이명웅(李命雄)에게 주다:이명웅(1590~1642)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이(珽而), 호는 송사(松沙)이다. 부친은 완흥군(完興君) 유징(幼澄)이며, 미수보다 5년 연상이다. 이 편지는 미수가 경상남도 의령(宜寧)에 우거(寓居)하던 1639년(인조17) 무렵에 쓴 것으로, 당시 이명웅은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62)황간(黃磵) 어른:황간 현감을 역임한 이정호(李挺豪:1578~1639)를 가리킨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언(英彦), 호는 만각(晩覺)이며, 부친은 부사과(副司果) 습(習)이다. 미수의 종형 허후(許厚)와 동문수학하였다. 《記言 別集 卷 21 晩學李先生墓銘, 韓國文集叢刊 99輯》

63)성현(省峴)의 윤 독우(尹督郵):성현은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에 속한 지명이다. 윤 독우는 미수의 큰사위 윤승리(尹昇离)의 부친 윤형(尹珩:1594~?)을 가리킨다. 윤형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초보(楚寶)이며, 1637년(인조15) 별시에 입격하여 봉상시 정을 지냈다. 당시에 찰방(察訪)으로 재직한 듯하다.

64)길보(吉甫):이창원(李昌源:1588~1654)으로,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부친은 판서 덕형(德泂)이다. 당진(唐津), 덕산(德山) 등의 현감을 지냈다.

65)또:이 편지는 이명웅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다가 산성(山城) 공역(工役)을 무리하게 추진했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돌아가던 1640년 무렵에 쓴 것으로 보인다.

66)또:이 편지는 이명웅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초기에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는 앞의 두 편지보다 앞선 것인 듯하다.

67)막북(漠北):본래는 몽고고원의 사막 이북을 지칭하는 말이나, 여기에서는 단순히 척박한 북쪽 지방이라는 뜻으로, 평안도 지역을 가리킨다. 이명웅이 평안도 순찰사로 재직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68)마음을……뜻:하늘이 시련을 통해서 더 큰 인재로 만들려 한다는 뜻이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하늘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게 하고, 그 근골(筋骨)을 수고롭게 하며, 그 체부(體膚)를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빈궁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행하는 데에 그 하는 바를 어그러지게 하니, 이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인내심을 키워 주어 그 능하지 못한 바를 증익시켜 주려는 것이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69)의춘(宜春):경상도 의령(宜寧)을 가리킨다. 2쪽 주 7) 참조.

70)권환(權瑍):1636~1726. 본관은 안동, 자는 중장(仲章), 호는 제남(濟南)이다. 부친은 증 이조 참판 대윤(大胤)이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대운(大運)의 조카이다. 미수의 제자로 미수보다 40년 연하이다. 저서로 《제남집(濟南集)》이 있다.

71)부친……행실:권상(權常)이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되고 관직을 제수받은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선조수정실록 22년 12월 1일에 기록된 권상의 졸기(卒記)에 “권상은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7세에 아버지가 죽자 성인(成人)처럼 애통해하였고 몸소 제전(祭奠)을 집행하였으며, 어머니를 볼 적마다 슬피 울어 항상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고, 삼년상을 마치고서도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배례하고 전(奠)을 드렸으며, 아침저녁 출입할 적에 반드시 뵙기를 종신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효행으로 아뢰자, 상이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벼슬이 승진되어 시정(寺正)에 이르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고 하였다.

72)소경왕(昭敬王):선조(宣祖)의 시호이다.

73)괴원(槐院):승문원(承文院)의 별칭이다.

74)서경(西京):평양(平壤)의 별칭이다.

75)근각(筋角)과 초황(硝黃):근각은 동물의 힘줄과 뿔로서 활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며, 초황은 화약을 만드는 재료이다.

76)선무 공신(宣武功臣):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내린 공신호로서 1604년에 책록(冊錄)하였다. 일등공신으로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 세 사람이 책록되었다.

77)견성윤(甄城尹):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이른다. 견성은 전주의 옛 이름으로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도읍을 정한 성읍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78)조상(詔相):의식을 치를 때 사용되는 언사(言辭)나 절차를 인도하는 일을 말한다.

79)이관(李琯):1518∼1577.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혼계(渾溪)이며, 세종의 아들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증손이다. 평상시의 언행과 부모의 상례를 소학가례에 따라 행하여 당시에 성리학적 생활 태도의 수립을 선도하였다. 아울러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는데 소학, 가례, 논어를 통하여 학문의 기초를 삼게 하였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80)한효순(韓孝純):1543∼162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이다. 1610년(광해군2)에 이조 판서로서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광해군의 핵심 측근이 되었으며, 1617년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이에 반대하는 이항복(李恒福)과 기자헌(奇自獻) 등을 탄핵, 유배시켰으며, 결국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 유폐(幽閉)하였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 후 관직이 추탈되었다.

81)이경중(李敬中):1542∼158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직(公直), 호는 단애(丹崖)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81년 이조 좌랑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이 당시 명망을 떨치고 있음을 보고는 극력 배척하며 청현(淸顯)의 자리에 두지 말라고 논책하였다가 도리어 정인홍(鄭仁弘), 박광옥(朴光玉), 정탁(鄭琢) 등 동인의 언관들로부터 논핵(論劾)당하여 파직되었다.

82)옹주(翁主):선조의 후궁인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소생 정선옹주(貞善翁主)를 가리킨다.

83)주전(周傳)에……말:주전일주서(逸周書)를 가리킨다. 일주서 시법해(諡法解)에, 의를 통해 나라를 구하는 것을 경[由義而濟曰景]이라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생을 잘 마감하는 것을 정[寬樂令終曰靜]이라 하였다.

84)그……새겼으니:이정(彝鼎)은 종묘(宗廟)에서 술을 따라 두는 제기(祭器)로서, 옛날에 공로가 있는 신하의 이름을 이 제기에 새겨서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다.

85)권공(權公):권대운(權大運)을 가리킨다.

86)영가(永嘉):경상북도 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87)진사공(進士公):권위중(權偉中)을 가리킨다.

88)영국 공신(寧國功臣):1644년(인조22)에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여 난을 일으키려 한 심기원(沈器遠)의 역모(逆謀)를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이때 구인후(具仁垕), 김류(金瑬) 등이 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후대의 기록인 숙종실록 2065일 기사에, 남구만(南九萬)이 숙종에게 이전의 영국 원종공신이 2000명에 달하도록 남발한 것을 거론한 것으로 보아 특별한 공이 없는 사람도 책록된 것으로 보인다.

89)복주(福州):경상북도 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90)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

91)제릉(齊陵)을 보수하는 일:제릉은 조선 태조의 비(妃)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능으로, 1629년(인조7) 2월 30일에 정자각(丁字閣)이 불에 타는 변고가 있었다. 仁祖實錄 이때 권신중(權信中)이 제릉이 있는 풍덕(豊德)의 군수로 재임 중이라 보수의 책임을 맡은 것이다.

92)수장(壽藏):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무덤을 이른다.

93)통헌대부(通憲大夫):의빈부(儀賓府) 정2품의 하위 칭호이다.

94)순효대왕(純孝大王):인조(仁祖)의 시호이다.

95)공산(公山):충청도 공주(公州)의 옛 이름이다.

96)봉헌대부(奉憲大夫):의빈부 정2품의 상위 칭호이다.

97)숭덕대부(崇德大夫):의빈부 종1품의 하위 칭호이다.

98) 파조항시(罷朝巷市):국상이 있거나 고관이 죽었을 때 조정의 업무를 정지하고 시장의 거래를 중지시키는 조처를 정조시(停朝市)라고 하는데, 파조항시는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파조는 조정을 파하는 것이고, 항시는 정규 시장의 거래가 중지됨에 따라 마을 안에다 생활필수품을 사고팔 수 있도록 설치한 일종의 임시 골목 시장을 이른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천자가 붕(崩)하면 항시(巷市) 7일이고, 제후가 훙(薨)하면 항시(巷市) 3일이다.” 하였다.

99)강정대왕(康靖大王):성종(成宗)의 시호이다.

100)성중(誠中):이성중(1539∼1593)의 자는 공저(公著), 호는 파곡(坡谷)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1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3)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수어사가 되어 임금을 호종하였다. 피난 중에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선조의 요동(遼東) 피난에 반대하였다. 7월에는 중국 구련성(九連城)에 파견되어 명나라의 원병을 청했고, 그 원병이 오자 이여송(李如松) 진영의 군량 조달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1593년 7월 함창에서 과로로 병사하였다. 뒤에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01)이중호(李仲虎), 장륜(張倫):두 인물 모두 서얼 출신의 저명한 학자이다. 이중호(1512∼1554)는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학문이 뛰어나 수백 명의 학도들이 모여들었고 서경덕, 이황이 그의 학문을 극찬하였다고 한다. 장륜은 역학 훈도(譯學訓導)를 지냈으며 그를 따르는 학도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102)의성대비(懿聖大妃):1532∼1575. 명종(明宗)의 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 청송 심씨(靑松沈氏)에게 올린 존호이다. 대비는 요절한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어머니이며,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기도 하였다.

103)공의대비(恭懿大妃):1514∼1577. 인종(仁宗)의 왕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 반남 박씨(潘南朴氏)에게 올린 존호이다.

104)대사간……올려:1579년(선조12) 5월 1일과 22일에 대사간을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를 말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해당일 조에 수록되어 있다.

105)숙헌(叔獻):이이(李珥)의 자이다.

106)유 문충공(柳文忠公):문충은 유성룡(柳成龍)의 시호이다.

107)기축년의 사건:1589년(선조22) 기축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이른다.

108)세 정씨:이경중과 갈등 관계에 있던 정여립, 정인홍, 정철을 가리킨다.

109)재이(災異):1635년(인조13) 3월 14일에 비바람으로 목릉(穆陵)과 혜릉(惠陵)이 무너져 내린 사건을 이른다.

110)인성군(仁城君)의 아들들:인성군은 선조(宣祖)의 후궁인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소생으로 이름은 공(珙)이다. 그는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할 때 종친들을 거느리고 폐모론에 동조하였고, 인조반정 후에는 서인 세력에 의해 배척을 받아 간성(杆城), 원주(原州), 진도(珍島)로 귀양을 다니다가 반정공신인 이귀(李貴)에 의해 역모 혐의를 받고 1628년(인조6) 귀양지에서 자살하였다. 그의 세 아들 이길(李佶), 이억(李億), 이건(李健) 역시 인성군이 대역죄인이 됨에 따라 역신의 자손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633년(인조11) 이귀가 죽자 무옥(誣獄)임이 밝혀져 1635년 제주도에서 울진으로 이배되고, 1637년 귀양에서 풀려났다.

111)대사간……청하였다:목릉과 혜릉이 비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천재지변이 발생하자 대사간 정온이 상소를 올려 인성군의 세 아들을 유배에서 풀어 줄 것을 청하였고, 이에 대해 서인 계열의 간관들이 들고 일어나 정온을 처벌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仁祖實錄 13年 5月 2日

112)유석이……것이다:1638년(인조16) 7월 29일 사헌부 장령 유석(柳碩)이 계사를 올려 병자호란 때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한 김상헌(金尙憲)을 논핵하다 당시의 집권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2년이 지난 1640년에 다시 이 문제가 제기되어 대간들이 유석을 처벌하자고 논핵하자 이만(李曼)은 그들에 동조하지 않고 도리어 유석을 비호하는 말을 하다가 체차되었다. 仁祖實錄 16年 7月 29日, 18年 1月 9日

113)정명수(鄭命壽):?∼1653. 평안도 은산에서 태어난 천인 출신으로 1619년(광해군11) 강홍립(姜弘立)의 군대를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청국어를 배워 그곳에 살면서 우리나라 사정을 자세히 밀고하여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의 통역으로 입국하여 청나라 힘을 배경으로 조정에 압력을 가해 영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1639년 처족인 정주(定州)의 관노(官奴) 봉영운(奉永雲)을 정주 군수로 임명하도록 강요하고, 이어 병조의 관리들을 구타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며 조정을 좌우하다가 청나라로 건너가 살았다. 그곳에서도 왕을 모독하고 갖은 행패를 부렸으며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歲幣)를 노략질하였다. 1653년 심양(瀋陽)에서 강효원(姜孝元), 이사용(李士用), 정뇌경(鄭雷卿) 등에게 모살(謀殺)되었다.

114)가산산성(架山山城):경상북도 칠곡(漆谷)에 있는 산성이다.

115)표류해……보냈다:이 주본과 한인 선박은 1649년(효종 즉위년) 10월에 조선에서 사은사로 가는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의 편에 함께 보냈다.

116)섭정왕(攝政王):청 태조(淸太祖)의 열넷째 아들 예친왕(睿親王)으로 이름은 도르곤[多爾袞]이다. 1644년에 태종(太宗)의 뒤를 이어 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세조(世祖)를 보좌하여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 또는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의 칭호를 가지고 국정을 독점하였다.

117)정철(丁哲):효종실록 6년 10월 11일 기사에는 ‘정석(丁晳)’으로 되어 있다.

118)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조선 시대에 다섯 집을 1통으로 조직하여 범죄자의 색출과 세금의 징수, 부역의 동원을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시행했던 제도로, 성종 때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처음 시행하였다. 숙종 때 김석주(金錫冑) 등에 의해 재정비되었으며, 헌종 때에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더욱 강화되었다.

119)자모법(子母法):자모는 이자[子]와 본전[母]을 뜻한다. 즉 빚을 주고 이자를 지나치게 받아들이는 것을 제한하는 법으로, 이자가 본전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한 자모정식지법(子母停息之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20)금상(今上):현종(顯宗)을 가리킨다.

121)연경에……돌아왔다:이만은 1663년(현종4)에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정사(正使) 정유성(鄭維城)을 수행하여 부사(副使)로 연경에 갔다 왔는데, 연경에서 허룡(許龍)과 언남(彦男)이 유황(硫黃)을 몰래 사들인 일이 나중에 발각되어 청나라에서 사신까지 보내어 이를 추궁하고 관련자를 문책하였다. 顯宗實錄 4年 11月 9日

122)하지사(賀至使)로 연경(燕京)에 갔다가:1659년(현종 즉위년) 11월에 동지사(冬至使)의 부사가 되어 정사 채유후(蔡裕後), 서장관 권상구(權尙矩)와 함께 청나라에 갔다 온 일을 가리킨다. 顯宗改修實錄 卽位年 11月 3日

123)서추(西樞):중추부(中樞府)의 별칭이다.

124)금상(今上):숙종(肅宗)을 가리킨다.

125)나라의 예가 바로잡혔다:현종 즉위년인 기해년(1659)에 효종의 죽음에 대해 모후(母后) 조 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을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주장에 따라 기년(朞年)으로 정하였고, 1674년(현종15)에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또다시 조 대비의 복상이 문제가 되어,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그해 7월 15일에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18일에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였다. 즉위 전부터 송시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숙종은 현종의 묘지문과 행장을 짓는 일을 계기로 송시열이 효종을 인조의 서자(庶子)로 취급하여 복제(服制)를 정한 것으로 단정하고 이를 송시열의 제자인 이단하(李端夏)로 하여금 현종의 행장에 송시열이 “예를 잘못 정했다.[誤定禮]”라고 쓰게 하였다. 그리고 12월 13일 현종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축출에 나서 이듬해까지 서인들이 정계에서 대거 밀려나고 외척인 김석주(金錫冑)와 허목(許穆), 허적(許積), 윤휴(尹鑴), 권대운(權大運) 등 남인이 집권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을 갑인환국(甲寅換局)이라고 하며, 나라의 예가 바로잡혔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126)각 군문(軍門):수어청(守禦廳),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을 가리킨다. 肅宗實錄 3年 5月 19日

127)구경(九卿):삼정승에 다음가는 아홉 개의 높은 관직을 일컫는 말로서, 의정부의 좌우참찬(左右參贊), 육조 판서(六曹判書),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이른다.

128)숙부인 영돈녕(領敦寧):한준겸(韓浚謙)을 가리킨다.

129)4촌 남매:원문은 ‘종조곤자매(從祖昆姉妹)’로 되어 있는데, 앞에서 제시한 계보로 보아 ‘4촌 남매’로 번역되어야 한다.

130)국구(國舅):한준겸(韓浚謙)을 가리킨다.

131)덕으로……계승하였다:한준겸, 한선일, 한두상의 덕을 차례로 언급한 것이다.

132)사관(四館):과거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네 기관인 성균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을 이른다.

133)무공랑(務功郞):종친부나 의빈부의 정7품 문관의 품계이다.

134)큰 난리:병자호란을 가리킨다.

135)성동(成童):15세를 이른다.

136)임단(臨湍):임진(臨津)과 장단(長湍)을 합한 이름으로 연천(漣川)과 인접해 있다.

1)악록공(岳麓公):악록은 허성(許筬:1548∼1612)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로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며 허균(許筠)의 큰형이기도 하다. 1590년(선조23)에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다녀와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 어사(召募御史)가 되어 군병의 모집에 노력하였다. 1607년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게 되어 고명칠신(顧命七臣)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선조대에 학문과 덕망으로 사림의 촉망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2)변장(邊將)을 살해하였으므로:1605년(선조38) 1월 18일에 여진족이 쳐들어와서 동관보(潼關堡)를 함락시키고 첨사 전백옥(全伯玉)을 죽인 일을 가리킨다. 亂中雜錄 四 乙巳年

3)안부종사(按部從事):관찰사의 종사관으로, 여기에서 관찰사는 경상도 관찰사인 심연(沈演)을 이른다.

4)우영 군관(右營軍官):경상우병사 민영(閔栐)의 군관인 박충겸(朴忠謙)을 이른다. 이때 허완은 경상좌병사로 좌영(左營)을 통솔하였다.

5)그 사적이……있다: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열녀도(烈女圖) 권3 이씨거적(李氏拒賊)에 나온다. 이 책은 1617년(광해군9)에 유근(柳根)이 편찬한 윤리서로서, 1431년(세종13)에 설순(薛循)이 편찬한 삼강행실도와 1514년(중종9)에 신용개(申用漑)가 편찬한 속삼강행실도를 증보한 것이다. 함안 이씨의 사적은 이씨거적 편에 “이씨는 서울 사람으로 유학 강응백의 아내이다. 임진왜란 때 아들을 데리고 풍덕산(豊德山) 골짜기로 피난을 하였다가 왜적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왜적의 협박으로 말을 타고 앞장서 가다가 갑자기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칼로 자신을 죽여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씨가 끝까지 고집하며 마음을 바꾸지 않자 왜적이 그녀를 죽이고 그 아들도 함께 죽였다. 선조 때에 정문(旌門)을 내렸다.” 하였다.

6)이 문충공(李文忠公):문충은 이원익(李元翼)의 시호이다.

7)사친(私親):인조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1580∼1619)을 가리킨다. 정원군은 인조가 즉위하자 처음에는 대원군(大院君)에 추존되었다가 그 뒤 왕으로 추존되어 원종(元宗)으로 불렸다.

8)예묘(禰廟):아버지를 모신 사당을 이른다.

9)도산(陶山):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킨다.

10)을묘년:이의신(李懿信)에게서 비롯된 천도의 논의는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시작되었고, 연차별 서술과 최동식의 몰년이 을묘년(1615)의 전 해인 갑인년(1614)임을 미루어 볼 때 번역대본의 을묘년은 임자년의 잘못이다.

11)진한(秦漢)의 고사(古事):진 시황(秦始皇)이 술사(術士)의 말을 듣고 불사약을 구하고 아방궁(阿房宮)을 짓는 등 부역을 일으켰다가 곧 망하였으며, 한 무제(漢武帝)도 술사의 말을 듣고 승로반(承露盤)을 만들고 부역을 일으켜 재정이 매우 궁핍했던 고사를 말한다.

12)안위(安衛)가 고변한 사건:1613년(광해군5) 3월 1일에 수군절도사를 지낸 김제(金堤) 사람 안위가 상소를 올려 같은 고을의 진사 조덕홍(趙德弘) 등이 역모를 하였다고 고변한 사건을 말한다. 光海君日記 5年 3月 1日

13)폐조(廢朝):광해군을 가리킨다.

14)주사(籌司):비변사(備邊司)의 별칭이다.

15)안택지(安宅誌)와 사방해(四方解):이 두 편의 글은 곽기수(郭期壽)의 문집인 한벽당문집(寒碧堂文集) 하권에 수록되어 있다.

16)자는 모(某):노대하의 자는 수오(受吾)이다.

17)소재 상국(穌齋相國)이……하였는데: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이다. 노수신은 1547년(명종2) 3월에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인하여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가 윤9월에 다시 진도(珍島)로 이배(移配)되어 그곳에서 1565년 12월 고향 근처인 괴산(槐山)으로 양이(量移)될 때까지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괴산에서 2년을 보낸 후 1567년 선조의 즉위와 함께 유배에서 풀려났다. 여기에서 노대하가 19살이 되는 해는 1564년으로서, 진도 유배 생활의 마지막 2년 동안 노수신에게 학문을 배운 것이 된다.

18)북관(北關):함경도를 가리킨다.

19)익위(翊衛):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서 세자를 보좌하는 정5품의 관직이다.

20)전부(典簿):종친부에 속한 정5품 관직이다.

21)소경대왕(昭敬大王):선조(宣祖)의 시호이다.

22)함경도에서는……되었고:전주(全州)에서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된 국경인(鞠景仁)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전으로 있다가 1592년 5월에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함경도에 침입하여 회령에 박두하게 되자 경성부(鏡城府)의 아전으로 있던 숙부 국세필(鞠世弼), 명천(明川)의 아전 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고을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칭 대장이 되어 이곳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온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그리고 그들을 수행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을 결박하여 가등청정 진영에 넘겨주어 조정에 대한 한풀이를 하였다. 宣祖實錄

23)대신들의……얻었다는:왜장 가등청정이 강화 문서를 작성하여 포로가 된 두 왕자와 신하들에게 강제로 서명하게 한 뒤 그 문서를 조선에 전달하기 위해 같은 시기에 잡혀온 이홍업을 지목하여 그로 하여금 문서를 가지고 행재소가 있는 의주(義州)로 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홍업은 적의 문서를 가지고 온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한 행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다. 宣祖實錄 25 10

24)영가 권씨(永嘉權氏):안동 권씨(安東權氏)를 가리킨다. 영가는 안동의 옛 이름이다.

25)직제학……날렸고:김하진(金夏振)의 5대조인 직제학 김천령(金千齡)은 1496년(연산군2)에 문과에 장원하였고, 고조부 대사헌 김만균(金萬鈞)은 1528년(중종23)에 문과에 장원하였고, 증조부 호서 절도사 김경원(金慶元)은 1553년(명종8)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文科榜目

26)선침 재랑(宣寢齋郞):선릉 참봉(宣陵參奉)을 이른다.

27)37세에 별세하였다:박세당(朴世堂)이 쓴 묘표에 의하면, 김하진은 무진년(1628, 인조6) 2월 1일에 태어나 계묘년(1663, 현종4) 5월 28일에 사망하기까지 36세를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위의 내용과는 1년의 차이를 보인다. 西溪集 卷14 宣陵參奉金君墓表, 韓國文集叢刊 134輯

28)문소(聞韶):경상북도 의성(義城)의 옛 이름이다.

29)수일(守一):김수일(金守一:1528∼?)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중형(仲兄)이다.

30)강좌(江左):강좌는 강의 왼편, 즉 낙동강의 왼편인 경상좌도를 가리킨다.

31)금상(今上):현종(顯宗)을 가리킨다.

32)공헌왕(恭憲王)……갔는데:공헌왕은 명종(明宗)의 시호이고, 사화는 명종 즉위 초인 1545년에 발생한 을사사화(乙巳士禍)에서 시작하여 1547년의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이르기까지 문정왕후와 그의 아우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의해 자행된 일련의 사림 탄압 사건을 통틀어 이른다. 정황(丁璜:1512∼1560)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遊軒)이다. 1545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있을 때 인종(仁宗)의 장례를 문정왕후가 서둘러 갈상(渴喪)으로 치르려고 하자 극력 반대하여 의례대로 거행하게 하였다. 을사사화로 파직되어 낙향하였다가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곤양(昆陽)에 유배되었고, 이듬해에 거제도로 이배(移配)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33)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진무 공신은 1624년(인조2)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功臣號)이다. 일등공신으로는 장만(張晩), 정충신(鄭忠臣), 남이흥(南以興)이 책록되었다.

34)상경(上卿):판서(判書)를 가리킨다.

35)무예를……나왔다:박진영(朴震英)은 24세 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군수 유숭인(柳崇仁)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을 공격하였다. 왜란 때의 전공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용궁 현감(龍宮縣監)이 되었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한직을 전전하였다.

36)위포생(韋布生):가죽띠[韋帶]와 베옷[布衣]를 입은 서생을 뜻하는 말로서,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가리킨다.

37)상당(上黨):충청북도 청주(淸州)의 옛 이름이다.

38)공은 휘는 모(某):이 글은 광해군 때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재직한 현극(玄極:1554∼1632)의 묘갈명이다.

39)무과(武科)에 급제하여:현극은 1580년(선조13)에 별시 무과(別試武科)에 병과(丙科) 7위로 합격하였다. 武科榜目

40)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선무 공신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1604년(선조37)에 내린 공신호로서, 일등공신으로는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이 책록되었다.

41)이영언(李英彦):1581∼1642. 호는 사심(師心) 또는 만각(晩覺)이며, 종실인 덕신정(德信正) 이난수(李鸞壽)에게서 대학(大學)주역(周易)을 배웠다. 인조가 학문이 뛰어난 인재로 불러서 등용함에 따라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고 황간 현감(黃磵縣監)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에 대한 행력에 대해서는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미수가 지은 간략한 유사(遺事)에 몇 가지 단편이 보일 뿐이다. 미수는 위의 유사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영언을 위해 노덕명(老德銘)을 지어 주었고 미수의 종형인 허후(許厚)가 제문(祭文)까지 지어 준 것을 보면 미수와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記言 卷8 李英彦先生遺事, 卷65 自序, 韓國文集叢刊 98輯

42)정문부(鄭文孚):1565∼1624.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588년(선조29)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수찬, 정언을 지냈으며 1591년 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회령(會寧)에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반란군의 주동자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자 이에 격분하여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을 참수하고 함경도 각지에 주둔한 왜적들과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관북 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598년 호조 참의, 1601 예조 참판을 지내고, 1602년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과 함께 한강을 유람하였으며, 1610년에는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43)공은……돌아가셨으며:본문대로 본다면 이후석은 1593년에 태어나 1666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사망 당시 나이는 74세가 되어 앞뒤가 서로 모순된다. 그의 생몰연도에 대해 상고해 보면, 이후석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실을 기록한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무술년생, 즉 1598년으로 되어 있는 반면,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한 1628년의 문과방목(文科榜目)에는 계사년생, 즉 1593년으로 되어 있는 등 국가의 관찬 문헌에서조차 출생연도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다. 한편 현대에 출간된 신구문화사의 한국인명대사전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 등재된 인물사전에는 공통적으로 이후석이 1598년에 태어나 1666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상에서 볼 때 이후석의 출생연도는 1593년과 1598년 두 가지 설로 나눌 수 있으며, 사망연도는 1666년으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미수가 말한 대로 향년 70세는 되지 못한다.

44)유양(惟讓):백유양(1530∼1589)의 자는 중겸(仲謙)이고 백인호(白仁豪)의 아들이자 백인걸(白仁傑)의 조카이다. 1572년(선조5)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 병조 참지를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아들 백수민(白壽民)이 정여립의 형 정여흥(鄭汝興)의 딸을 아내로 맞았던 탓으로 연좌되어 사형을 당하자 관직에서 사직하였고, 이어 호남(湖南) 생원 양천회(梁千會)의 상소로 인하여 역모 혐의를 받아 투옥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宣祖修正實錄

45)부친……제수되었으며:백홍제(白弘悌:1572∼1646)는 자가 여순(汝順)이며, 2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천(泗川)으로 피난을 갔다가 노모와 함께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왜적의 칼을 빼앗아 배 안의 왜적을 죽인 다음 남녀 포로 70여 명과 함께 탈출하였다. 이 공으로 군자감 봉사에 제수되었다. 記言別集 卷14 義烈傳, 韓國文集叢刊 99輯

46)반궁(泮宮):성균관(成均館)의 별칭이다.

47)성동(成童):나이 15세를 가리킨다.

48)노릉(魯陵):단종(端宗)을 가리킨다.

49)송규암(宋圭庵):규암은 송인수(宋麟壽:1499∼1547)의 호이다. 송인수는 성리학의 대가로 1534년 김안로(金安老) 일당의 미움을 받아 경상도 사천(泗川)에 유배되어 1537년에 석방되었다. 당시 그는 유배지에서 이정(李楨) 등 지역의 선비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는데, 조언(趙椻) 또한 이때 배운 것으로 보인다.

50)역모를 고변:1589년 기축년에 발생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고변한 것을 가리킨다. 당시 정여립은 금구의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51)최수우(崔守愚):수우는 최영경(崔永慶:1529∼1590)의 호이다. 자는 효원(孝元),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전라도 관찰사 최중홍(崔重洪)의 증손으로,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서울 출생으로 학행(學行)이 뛰어나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75년에 선대의 전장(田庄)이 있는 진주(晉州)의 도동(道洞)으로 은거하여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오건(吳健), 조종도(趙宗道) 등과 교유하였다. 이때 사축(司畜)으로 부름을 받아 잠시 관직에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그만두었다. 1576년에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창건하여 스승 조식을 제향하였으며,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가공의 인물인 길삼봉(吉三峯)으로 무고되어 위관(委官)인 정철(鄭澈)에게 국문(鞫問)을 받다가 죽었다. 1591년에 신원(伸冤)되어 대사헌에 추증되었으며 1611년에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

52)양경(兩京):한양(漢陽)과 평양(平壤)을 이른다.

53)중강(重江):압록강을 이른다. 곽종석(郭鍾錫)이 쓴 조종도의 신도비명에는 대가(大駕)가 압강(鴨江), 즉 압록강을 건넌 것으로 되어 있으며, 조종도의 문집인 대소헌일고(大笑軒逸稿)에 수록된 연보에는 임금이 “이미 용만을 건넜다.[已過龍灣]”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의주(義州)에서 중국의 구련성(九連城)으로 건너가는 압록강의 수중에 검동도(黔同島)와 난자도(蘭子島)의 두 섬이 있고 이 두 섬 사이로 흐르는 강의 이름을 중강(中江)이라고 표기하였는데, 미수가 이를 중강(重江)이라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곳은 대표적인 국경무역인 중강개시(中江開市)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중강을 건넜다는 말은 임금이 나라를 포기하고 국경을 넘어갔다는 뜻이다.

54)용만(龍灣):평안북도 의주(義州)의 옛 이름이다.

55)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의……제수하였다:조종도의 연보에 의하면, 1592년 가을에 장악원 첨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자 겨울에 단성 현감에 제수하였다고 하였다. 大笑軒逸稿 年譜, 韓國文集叢刊 47輯

56)그해에……주관하였다:김성일이 경상우도 관찰사가 되어 고을을 순시할 때 조종도는 단성 현감으로서 김성일을 보좌했는데, 마침 전염병이 돌아 김성일이 진주(晉州)에서 사망하게 되자 이노(李魯), 박성(朴惺) 등과 함께 초상을 주관하고 두류산(頭流山) 아래에 임시로 안장하였다. 大笑軒逸稿 年譜, 韓國文集叢刊 47輯

57)체상(體相):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을 가리킨다.

58)황석산성(黃石山城):경상도 안음(安陰), 즉 현재의 안의(安義)에 위치한 산성으로 호남과 영남을 잇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체찰사 이원익이 함양 군수 조종도를 비롯하여 안의 현감 곽준(郭䞭),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에게 명령하여 성을 지키게 한 것이다.

59)기묘당적(己卯黨籍):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정광필(鄭光弼), 안당(安瑭), 이장곤(李長坤) 등 기묘명현 82명의 약전(略傳)을 수록한 책으로 김정국(金正國:1485∼1541)이 편찬하였다.

60) 귀양살이 13년:윤선도가 실제 유배 생활을 한 것은 1616년부터 1623년까지 8년 동안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13년으로 한 것은 유배를 떠난 1616년부터 유배에서 돌아와 그가 첫 벼슬로 부임한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제수받은 1628년까지를 모두 합쳐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61)김제남(金悌男)의……것:윤선도는 1616년 12월 21일에 상소를 올리면서 이이첨을 비판하고 이원익(李元翼)을 두둔하는 과정에서, 김제남의 죽음이 역모를 꾸미다가 죽은 것이라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인정하는 말을 하였다. 光海君日記 8年 12月 21日

62)형가(荊軻)는……요구하였다:형가는 전국 시대 위(衛)나라 사람으로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의 명을 받아 진 시황(秦始皇)을 죽이러 갈 때 진 시황에게 의심받지 않으려고 진나라에서 망명해 온 번오기(樊於期)의 머리를 요구하여 가지고 갔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63)대군(大君):인조의 왕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이른다.

64)과거에 급제하여:1633년(인조11)에 실시한 증광시(增廣試)에 병과 제17위로 급제한 것을 말한다. 文科榜目

65)금쇄동(金鎖洞)과 문소동(聞簫洞):모두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해남 윤씨(海南尹氏) 종가 인근의 절경이다. 윤선도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금쇄동기(金鎖洞記)산중신곡(山中新曲)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두 책은 현재 필사본으로 전해지며 각각 보물 제482-2호와 제482-3호로 지정되어 있다.

66)소현세자(昭顯世子)가……안치(安置)하였다:큰 옥사는 강빈옥사(姜嬪獄事)를 가리킨다. 1645년(인조23)에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姜氏)가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조 소용(趙昭容)과 반목이 생겨 싸우던 중에 세자가 죽게 되자, 이것을 핑계로 조 소용은 세자를 강빈이 죽였다고 무고하였고 왕실을 저주하였다고 고하였다. 이로 인해 강빈은 후원에 유폐되었다가 1646년 3월에 왕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었으며,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은 제주에 안치되었다.

67)관직(館職):예문관, 춘추관, 성균관 등의 관직을 통칭한 것이다.

68)사예(司藝):성균관의 정4품 벼슬이다.

69)시폐(時弊)에……올리고:구체적인 내용은 효종실록 3년 10월 22일 기사에 나온다.

70)반정공신……청하였다:구체적인 내용은 효종실록 3년 11월 7일 기사에 나온다.

71)산릉……일:윤선도의 주장에 따라 수원에 정해진 산릉 터가 송시열의 주장으로 번복되어 양주(楊州)의 건원릉(健元陵) 경내로 바뀐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능은 15년이 지난 1673년(현종14)에 다시 세종의 영릉(英陵)이 있는 여주(驪州)의 홍제동(弘濟洞)으로 개장하게 된다.

72)태후(太后):인조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를 가리킨다.

73)체이부정(體而不正):장자가 아닌 나머지 아들을 가리킨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소(疏)에 이르기를 “비록 승중(承重)이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않는 경우가 사종(四種)이 있다. 첫째는 정(正)이며 체(體)이지만 전중(傳重)할 수가 없으니 이는 적자가 폐질(廢疾)이 있어서 종묘를 주관할 수 없는 경우이고, 둘째는 전중은 하였으나 정도 아니요 체도 아닌 것이니 이는 서손(庶孫)으로 후사를 삼은 경우이고, 셋째는 체이면서 정이 아닌 것이니 이는 서자(庶子)를 후사로 삼은 경우이고, 넷째는 정이면서 체가 아닌 것이니 이는 적손(嫡孫)을 후사로 삼은 경우이다.” 하였다. 송시열과 송준길이 이 말을 쓴 것은 효종이 인조의 장자가 아닌 차자이기 때문에 인조의 왕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는 서자에 대한 예에 따라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74)단궁지문(檀弓之免)과 자유지최(子游之衰):예기(禮記) 단궁(檀弓)에, 공의중자(公儀仲子)가 아들이 죽자 손자를 후사(後嗣)로 세우지 않고 작은아들을 세운 것을 본 단궁이 그것이 예가 아님을 알고는, 나중에 공의중자가 죽자 예에 맞지 않은 문복(免服)의 차림으로 조문을 함으로써 과거의 잘못된 예를 기롱하였다. 또 사구혜자(司寇惠子)의 초상에 그의 아우 문자(文子)가 적자(嫡子)를 폐하고 적자의 아우를 상주로 세우자 자유가 예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자신도 예가 아닌 최복 차림으로 조문함으로써 이러한 행위를 기롱하여 적자 호(虎)를 상주로 세우게 하였다.

75)인선왕후(仁宣王后):1618∼1674. 효종의 왕비 덕수 장씨(德水張氏)이다.

76)태왕태후(太王太后):자의대비(慈懿大妃)를 가리킨다.

77)대공복(大功服):9개월 복제(服制)를 이른다.

78)금상(今上):숙종(肅宗)을 가리킨다.

79)덕원(德源):함경남도 남단 동해 가의 고을이다.

80)웅천(熊川):경상남도 남단 남해 가의 고을이다.

81)장기(長鬐):경상북도 영일만 부근 동해 가의 고을이다.

82)이유정(李有湞)의 사건:숙종 5년(1679) 3월 각 도의 승군(僧軍)을 징발하여 강화도에 돈대(墩臺)를 쌓았다. 이때 감독관 수사(水使) 이우(李㒖)에게 이유정이란 자가 사람을 시켜 봉서(封書)를 전하였는데, 그 내용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손자인 임창군(臨昌君)을 추대하여 반정(反正)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송시열의 제자인 송상민(宋尙敏)이 덕원으로 유배된 스승의 원통함을 풀고자 예론(禮論)을 제기하여 장문(長文)의 봉서를 올린 사건과 우연히 맞물러 큰 파장을 불러왔다.

83)용주(龍洲):조경(趙絅)의 호이다.

84)비간은……죽었고:비간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무도함을 보고 “신하 된 자는 죽음으로 간해야 한다.” 하고 3일 동안을 간하자, 주왕이 노하여 “나는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일곱 개 있다고 들었다.” 하며, 죽여서 비간의 심장을 갈라 보았다고 한다.

85)백이는 굶어 죽었으며:백이는 은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신하로서 임금을 정벌하는 것은 아니라고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하고 동생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86)굴원은……던졌는데:굴원은 초(楚)나라의 충신으로, 양왕(襄王)이 참소를 믿고 장사(長沙)로 방축(放逐)하자 어부사(漁父辭)를 지어 자신의 뜻을 밝히고 울분을 참지 못해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87)분관(分館):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의 삼관(三館)에 나누어 배치하여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1)당성(唐城)의……책:당성은 경기도 남양의 옛 이름으로서, 남양의 인물과 지리에 대하여 기록해 놓은 지리지(地理誌)를 가리킨다. 홍인우(洪仁祐:1515∼1554)의 행장에 의하면, 이러한 홍씨의 내력이 여지지(輿地誌)에 수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耻齋遺稿 附錄 行狀, 韓國文集叢刊 36輯

2)학업……일기:이 일기로 보이는 내용이 한국문집총간 36집에 수록된 치재유고(耻齋遺稿) 권2에 일록초(日錄鈔)라는 제명(題名)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일기에는 저자가 24세인 1538년부터 몰년인 1554년까지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3)이심원(李深源):1454∼1504.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증손이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학문에 뛰어났으나 갑자사화 때 임사홍(任士洪)의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4)이 선생(李先生):이황(李滉)을 가리킨다.

5)도당(都堂):의정부를 가리킨다.

6)양봉래(楊蓬萊):양사언(楊士彦)을 가리킨다.

7)문묘종사(文廟從祀)에……하다:1635년부터 서인들에 의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에 대한 문묘종사가 거론되자 남인 측의 홍유부(洪有阜), 이상진(李象震) 등이 이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8)금상(今上):숙종을 가리킨다.

9)조월천(趙月川):조목(趙穆)을 가리킨다.

10)폐주(廢主):광해군을 가리킨다.

11)왕부(王府):의금부를 가리킨다.

12)설옹(雪翁) 선생:허후(許厚:1588∼1661)를 가리킨다. 미수의 종형(從兄)으로 자는 중경(重卿), 호는 관설(觀雪), 돈계(遯溪), 일휴(逸休)이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23년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효종의 장례 때에는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있으면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에 반대하여 삼년상을 주장하였다.

13)인순왕후(仁順王后):1532∼1575. 명종(明宗)의 왕비 심씨(沈氏)이다.

14)저주사건(咀呪事件):선조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인목대비가 그 원인이 죽은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무당을 동원하여 의인왕후의 능인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한 사건을 말한다.

15)대비(大妃):인목대비를 가리킨다.

16)일곱 명의 신하:선조의 비밀 유교를 받은 일곱 신하, 즉 신흠(申欽),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한준겸(韓浚謙), 유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허성(許筬)을 말한다.

17)관왜(館倭):왜관(倭館)에 머물러 있는 왜인을 이른다.

18)굳센……정이다:시법(諡法)에 “의리를 펼치고 강함을 행하는 것을 경이라 한다.[布義行剛日景]” 하고 이에 대한 설명으로 “굳센 기상으로 의리를 실천한다.[以剛行義]” 하였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크게 생각하는 것을 정이라 한다.[安民大慮日定]” 하고 이에 대한 설명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생각한다.[以慮安民]” 하였다.史記 諡法解

19)큰 옥사:1613년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를 가리킨다.

20)야성(野城):경상북도 영덕(盈德)의 옛 이름이다.

21)원종(元宗):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이 왕으로 추존된 후에 받은 묘호이다.

22)구우(瞿佑)가……구해본(句解本):전등신화(剪燈新話)는 명나라 초기에 구우가 엮은 소설집으로 당송 이래로 전해오던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전통을 이어받아 새롭게 유행시킨 작품이다. 이 책은 세종 때에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후에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명종 연간에는 이 책에 주석을 달아서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란 이름으로 윤춘년(尹春年:1514~1567)이 상하 2책으로 간행하였다. 여기에서는 윤춘년의 구해본을 가리킨다.

23)수춘(壽春):강원도 춘천(春川)의 옛 이름이다.

24)대행대왕(大行大王):인조를 가리킨다.

25)소상(小祥):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로서, 연상(練祥)이라고도 한다.

26)주문공(朱文公):주자(朱子)를 가리킨다.

27)대상(大祥):죽은 지 2년 만에 지내는 제사이다.

28)담제(禫祭):대상을 치른 다음다음 달 하순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내는 제사로서, 죽은 날로부터 27개월 만에 지낸다.

29)임금의……일:이도장(李道長)이 유직(柳㮨) 등을 사주하여 성혼과 이이를 비판하면서 추종하는 사람이 적을까 우려하여 거짓으로 비답(批答)을 조작하여 성혼과 이이를 배척한 일을 말한다.

30)체신달순(體信達順)의 도:신실(信實)한 덕을 실천하여 화순(和順)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말로, 태평성대의 도를 뜻한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즉 선왕이 예를 닦아 도덕이 행해지게 하고, 신실한 덕을 실천하여 화순한 세상에 이르게 하는 것일 뿐이니, 이렇게 본다면 태평성대라는 것도 화순한 도가 실현된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是無故 先王能修禮以達義 體信以達順 故此順之實也]” 하였다.

31)금상(今上):숙종을 가리킨다.

32)감반(甘盤)의 구은(舊恩):감반은 은(殷)나라 현신(賢臣)이다. 그는 은나라 고종(高宗)이 즉위하기 전에 고종의 사부(師傅)를 지냈다. 때문에 고종이 즉위한 후 옛 은혜를 갚기 위해 그를 재상 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심광수가 효종(孝宗)의 사부를 지냈으므로 이에 견주어 말한 것이다.

33)기성랑(騎省郞):병조(兵曹)의 낭관을 이른다.

34)장릉(長陵):인조(仁祖)의 능이다.

35)장헌왕(莊憲王):세종(世宗)의 시호이다.

36)장묘(章廟):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가리킨다.

37)사간(司諫)……하옥되었는데:조경이 1636년(인조14) 6월 24일에 상소를 올려 당시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뇌물을 받은 사실을 탄핵하다 도리어 하옥된 것을 말한다. 仁祖實錄 14年 6月 24日, 7月 2日

38)공이……않았다:화친을 주장한 자는 구체적으로 최명길(崔鳴吉)을 가리킨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인조실록 15년 1월 4일 기사에 보인다.

39)궁관(宮官):세자시강원에 소속된 관원을 통칭한 말이다.

40)고신(告身):관리의 임명장을 이른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공명첩(空名帖)을 가리키는 것으로, 흉년이나 전쟁이 일어나 정부에서 돈이나 곡식을 모금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관직을 팔 때 사용되었다.

41)어류성(禦留城):일반적으로 어류성(御留城)이라고도 한다. 어류성은 문경의 조령(鳥嶺) 동쪽에 있는 산성으로 고려 태조가 이곳에 잠깐 머물렀다 하여 어류성이라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17 산성(山城)에, 어류성의 동남쪽은 절벽이 만 길이나 되어 새와 짐승도 넘지 못하며, 북쪽은 동남쪽에 비해 조금 낮지만 또 인력(人力)으로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어 성첩(城堞)을 약간만 설치해도 안심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북 지방에 일이 생기면 파천하여 머물 곳이 될 것이고 남방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다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42)효자는……옛말:예기(禮記) 제의(祭儀)에, “효자로서 어버이를 깊이 사랑하면 반드시 온화한 기운이 생기게 되고, 온화한 기운이 생기면 반드시 기쁜 표정을 짓게 되며 기쁜 표정을 짓게 되면 반드시 부드러운 태도를 지니게 된다.[孝子之有深愛者 必有和氣 有和氣者 必有愉色 有愉色者 必有婉容]” 하였고, 또 “문왕이 제사를 지낼 때 죽은 이를 섬기기를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하였다.[文王之祭也 事死者如事生]”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43)관설(觀雪) 선생:관설은 미수의 종형인 허후(許厚)의 호이다.

44)순천도정(順川都正):이관(李琯:1518∼1577)을 가리킨다. 이관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혼계(渾溪)이며, 세종의 아들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증손이다. 평상시의 언행과 부모의 상례를 소학가례에 따라 행하여 당시에 성리학적 생활 태도의 수립을 선도하였다. 아울러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는데 소학, 가례, 논어를 통하여 학문의 기초를 삼게 하였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45)척암(惕庵):선조(宣祖) 때의 학자인 김근공(金謹恭:?∼?)의 호이다. 자는 경숙(敬叔),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목사 김현(金琄)의 서자(庶子)이다. 관직은 동몽 훈도(童蒙訓導)를 지냈으며 4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소학을 배웠으며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다고 한다. 燃藜室記述 卷18 宣祖朝儒賢

46)행촌(幸村):민순(閔純:1519∼1591)의 호이다. 자는 경초(景初),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또 다른 호는 행촌(杏村)․습정(習靜)이다. 신광한(申光漢)과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그 역시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다고 한다.

47)양이(兩李):이발(李潑:1544∼1589)과 이길(李洁:1567∼1589) 형제를 가리킨다. 이발은 송선과 함께 김근공, 민순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으며 동인(東人)의 거두로 서인(西人)과 대립 관계에 있던 중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남에 따라 잡혀 들어와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아우 이길과 함께 장살(杖殺)되었다.

48)개천(開天):충청북도 충주에 위치한 개천동(開天洞)을 이른다.

49)난리:1628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가리킨다.

50)덕신공자(德信公子):종실인 덕신정(德信正) 이난수(李鸞壽)를 가리킨다.

51)주사(主司):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시관(試官)을 가리킨다.

52)주사랑(籌司郞):주사는 비변사(備邊司)의 별칭이므로 주사랑은 비변사의 낭관(郎官), 즉 비변사 낭청(備邊司郎廳)을 가리킨다.

53)중서관(中書官):승정원의 승지를 가리킨다.

54)성사(省司):감사(監司), 즉 관찰사(觀察使)를 가리킨다.

55)분충찬모정사 공신호(奮忠贊謨靖社功臣號):줄여서 정사 공신(靖社功臣)이라고 한다. 1623년에 반정(反正)을 일으켜 인조(仁祖)를 왕위에 추대한 공을 포상하기 위해 내린 공신호로서, 일등공신에 김류(金瑬),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이서(李曙), 최명길(崔鳴吉) 등이 녹훈(錄勳)되었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의하면, 이 정사 공신은 1623년(인조1) 윤10월 18일에 녹훈이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이등공신에 녹훈된 이괄이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송시범(宋時范)은 이들과 함께 삼등공신에 녹훈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은, 이듬해 4월이 되어서야 이미 사망한 송시범에게 공신호를 내렸다는 묘비(墓碑)의 말과 서로 어긋난다. 추측컨대, 정사 공신의 정식 녹훈이 1623년 윤10월에 이루어지고 이듬해 이괄의 난을 평정한 후 녹훈의 재조정이 필요하여 4월에 다시 이루어졌는데, 이때 송시범이 추가로 녹훈된 것을 인조의 사후에 편찬된 인조실록에서 아무런 구분 없이 한꺼번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56)탕정(湯井):충청남도 온양(溫陽)의 옛 이름이다.

57)양응정(梁應鼎):1519~1581.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이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아들이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58)차천로(車天輅):1556~1615. 개성(開城) 출신으로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이며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특히 시에 능하여 한호(韓濩)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다. 태상(太常)은 봉상시(奉常寺)의 옛 이름으로 차천로가 봉상시 판관과 봉상시 첨정을 지낸 것에 연유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59)만인갱(萬人坑):원나라 순제(順帝)의 지정(至正) 연간인 1358년에 중국에서 큰 전쟁이 벌어져 도성문 동쪽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인 적이 있었는데,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에서 자정원사(資政院使)의 벼슬을 지낸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희사하여 구덩이 수십 개를 만들고 그곳에다 시체를 묻어서 합장한 다음 재를 올려 준 일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의롭게 여겨 ‘만인갱’이라 불렀으며, 당대 및 후대의 명현들이 이 일을 소재로 시를 짓고 또 시첩으로 만들기도 하였는데, 정언옹도 이 만인갱을 소재로 시를 남긴 듯하다. 四佳集 詩集 卷1 悲義塚辭, 韓國文集叢刊 10輯

60)정희성(鄭希聖):1589~1638.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행력은 229쪽 처사(處士) 정군(鄭君) 묘갈문(墓碣文) 참조.

61)태백(太伯)과 우중(虞仲):주(周)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세 아들 가운데 첫째와 둘째 아들이다. 고공단보가 왕위를 셋째 아들인 계력(季歷)에게 전하여 그의 아들인 문왕(文王) 창(昌)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이 이를 알아채고 약을 캐러 간다는 핑계로 형만(荊蠻)의 땅으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62)승중상(承重喪):장자(長子)가 부모보다 먼저 죽고 그 부모가 나중에 죽으면 장손(長孫)이 죽은 장자를 대신하여 맏상주 노릇을 하는 것을 말한다.

63)건주위(建州衛) 정벌: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이 1491년(성종22)과 1492년 사이에 건주위 야인(建州衛野人)들을 정벌한 것을 가리킨다. 국역 대본에는 건주(建州)의 ‘建’ 자가 ‘虔’ 자로 잘못되어 있는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8 기묘당적(己卯黨籍) 박영(朴英)과 한국문집총간 18집에 수록된 박영의 문집인 송당집(松堂集) 권3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64)강정왕(康靖王):성종(成宗)의 시호이다.

65)폐왕(廢王):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킨다.

66)정붕(鄭鵬):1467~1512.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으로, 경상도 선산(善山) 출신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영남 사림파의 학풍을 이어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67)박경(朴耕):?~1507. 자는 백우(伯牛), 서얼 출신으로 글씨를 잘 썼다. 1507년(중종2)에 박원종(朴元宗), 유자광(柳子光) 등을 죽이고 역모를 꾀한다는 무고를 받아 국문(鞫問)을 받고 참형을 당하였다.

68)공희왕(恭僖王):중종(中宗)의 시호이다.

69)삼포왜란(三浦倭亂):삼포는 세종 때 일본 사람들의 왕래를 허가한 동남 해안의 세 포구로서, 동래(東萊)의 부산포(釜山浦), 창원(昌原)의 제포(薺浦), 울산(蔚山)의 염포(鹽浦)를 가리킨다. 이후 삼포를 왕래하는 일본인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그 폐단이 심각할 정도에 이르자, 1510년 조선에서는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통고하여 그들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또 일본 선박에 대한 감시를 엄중히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삼포의 일본인들이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킨 것이 삼포왜란이다.

70)성절(聖節):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이른다.

71)선생이……고발되어:김해의 백성 김억제(金億齊)가 송사(訟事)에 진 것에 원망을 품고 박영이 경주 부윤(慶州府尹) 유인숙(柳仁淑)과 함께 권신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했다고 무고한 일을 가리킨다. 大東野乘 己卯錄補遺 朴英傳

72)권신이 패사(敗死)하자:권신은 김안로(金安老:1481~1537)를 가리킨다. 김안로는 중종 때의 대표적인 권신으로서, 1537년에 왕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왕의 밀명을 받은 문정왕후의 당숙 윤안인(尹安仁)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된 후 사사(賜死)되었다.

73)예전에……한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한국문집총간 18집에 수록된 송당집 권3 일선지(一善誌)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박영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두문부출하며 독서에 빠져 있다는 말을 인근에 사는 정붕(鄭鵬)이 듣고는 박경(朴耕)과 함께 찾아왔다. 정붕이 박영에게 “그대는 무인(武人)인데 독서를 해서 무엇 하겠는가?” 하고 묻자, 박영이 “지난날 잘못된 길을 걸은 것이 후회되어 독서를 통해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알고자 해서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정붕이 또 “읽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인가?” 하고 물으니, 대학(大學)이라고 대답하였다. 정붕이 느닷없이 손을 들어 냉산(冷山)을 가리키며, “저 산 너머는 어떠하던가?” 하니, 박영이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아직 대학을 읽지도 않았군.” 하고는 돌아갔다. 박영이 그 말을 들은 후로 대학 한 책만을 파고들어 몇 년 동안 연구를 한 후 정붕을 찾아갔더니, 정붕이 또다시 “그대는 냉산 너머를 보았는가?” 하고 물었다. 박영이 “산 너머의 모습은 바로 앞에 보는 모습과 같으니 어찌 피차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자, 정붕이 “이제야 그대가 독서한 보람이 있구나.” 하고는 함께 학문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청산대학(靑山大學)이라 불렀다.

74)회암백록동규해(晦庵白鹿洞規解):이 편의 내용은 한국문집총간 18집의 송당집 권1에 수록되어 있다.

75)소문(素問):저자와 저작연대 미상의 의서로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여러 저자들에 의하여 차례차례 편찬된 것을 당(唐)나라 왕빙(王冰)이 탈간(脫簡)된 부분을 보완하여 편집한 것이다. 그 내용은 황제(黃帝)와 명의(名醫) 기백(岐伯)의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음양오행(陰陽五行), 침구(鍼灸), 맥(脈) 따위에 관하여 쓴 책이다. 이 책은 또 다른 의서인 영추(靈樞)와 함께 황제내경(黃帝內經)의 표리를 이루고 있다.

76)난경(難經):중국(中國) 고대의 한의서(漢醫書)로서, 진(秦)나라의 명의(名醫) 편작(扁鵲)이 지었다고 한다. 한의학의 근본(根本)이 되는 황제내경(皇帝內經)소문(素問), 영추(靈樞)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골자만을 추려서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이다.

77)관직(館職):홍문관의 부제학 이하와 성균관의 대사성 이하 관원의 총칭이다.

78)서호(西湖):고향인 양천(陽川) 인근의 한강(漢江)인 서강(西江)의 별칭이다.

79)유 원외(劉員外):이름은 유황상(劉黃裳)이다.

80)대신(大臣)의……제정하고:대신은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이원익(李元翼)을 가리키며, 선혜법은 흔히 대동법(大同法)으로 불린다. 이 대동법은 1608년에 이원익의 건의로 방납(防納)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실시하였는데,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던 기존의 공납(貢納)을 일률적으로 미곡(米穀)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한 것이다. 중앙에 선혜청(宣惠廳), 경기에 경기청(京畿廳)을 두고 방납의 폐해가 가장 심한 경기에서부터 이 제도를 실시하였다.

81)흥원(興原):강원도 원주(原州) 관할의 지명이다.

82)태조(太祖)의 공신(功臣):이의(李薿)는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보좌한 장수로서, 조선이 개국된 1392년 개국 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太祖實錄 1年 10月 9日

1)회소(懷素):727~785. 당나라 때 승려이자 서예가로서,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썼다.

2)국자 양시(國子兩試):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이른다. 미수가 지은 김세렴 행장에 의하면, 1615년(광해군7) 을묘년에 생원시와 진사시의 두 시험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3)5년……지냈다:1619년(광해군11) 5월 14일에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한 이원익(李元翼)을 비롯하여 조희일(趙希逸), 이귀(李貴), 김세렴 등이 유배에서 감형되어 방귀전리(放歸田里)의 처분을 받은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 방귀전리는 방축향리(放逐鄕里)라고도 하며 관리를 벼슬살이에서 쫓아내는 형벌의 일종이다. 국역 대본의 ‘임편거주(任便居住)’ 또한 같은 의미로 쓰였다. 光海君日記 11年 5 14日

4)공석애(公晳哀):공자의 제자로서 공극(公克)이라고도 한다.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자는 계차(季次) 또는 계황(季况)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의하면, 절개를 굽혀 가신(家臣)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여 공자가 특별히 칭찬한 바 있다.

5)원헌(原憲):공자의 제자로서,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이며 자는 자사(子思)이다. 공자가 노나라 사구(司寇)로 있을 때 읍재(邑宰)를 지냈으며, 공자가 물러나자 자신도 물러나 초야에 숨어 살았다.

6)강정왕(康靖王):성종(成宗)의 시호이다.

7)소경왕(昭敬王):선조(宣祖)의 시호이다.

8)북쪽 변방:기자헌은 이때 함경도 길주(吉州)로 유배되었다. 光海君日記 10年 1月 6日

9)큰……몰살당했다:기자헌은 인조반정을 모의할 때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 반정의 주모자들이 사람을 시켜 거사에 참여할 것을 청하였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고, 반정에 성공한 후에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반정 공신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다. 마침 1623년 7월 27일에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신(李愼), 가선대부 유응경(柳應㓏), 현령 유응시(柳應時)가 기자헌과 유경종(柳敬宗)의 부자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을 함에 따라 큰 옥사가 일어나 기자헌은 결국 서산(瑞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內應)의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되고 그 일족도 몰살되었다. 燃藜室記述 卷23 仁祖朝故事本末 柳夢寅之獄

10)김장생(金長生):1548~1631.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며 조선 후기 예학(禮學)의 대표적 인물이다. 송익필(宋翼弼)과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고향인 연산에서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에 임명되어 호남과 호서의 의병을 모집하는 일에 나서기도 하였다.

11)계림(鷄林):경상도 경주(慶州)의 옛 이름이다.

12)노릉(魯陵):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을 가리킨다.

13)육신의 사건:1456년(세조2)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愷),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 여섯 신하가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金礩)의 밀고로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을 말한다.

14)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의 호이다.

15)태상시(太常寺):봉상시(奉常寺)의 별칭이다.

16)풍악산(楓嶽山):금강산(金剛山)의 별칭이다.

17)마하연(摩阿衍):금강산에 있는 유점사(楡岾寺)의 말사로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지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摩訶衍’으로 표기한다.

18)무오사화(戊午史禍):1498년(연산군4)에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화는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면서 자신이 기초한 사초(史草) 속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삽입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士禍)이므로 다른 사화와는 달리 이처럼 ‘사화(史禍)’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일로 김종직은 죽은 사람의 관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을 당했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허반(許磐)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쓰고 죽었으며, 강겸(姜謙), 표연말(表沿沫), 홍한(洪瀚), 정여창(鄭汝昌),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유배 보내졌고, 이종준(李宗準), 최부(崔溥), 이원(李黿), 이주(李冑),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유배 보냈으며, 어세겸(魚世謙),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되었다.

19)갑자년: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가리킨다. 이 사화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폐출과 사사(賜死)의 사연이 임사홍(任士洪)에 의해 보고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이 사화에서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파(李坡), 김승경(金升卿),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등은 윤씨를 폐한 일에 연좌되어 모두 극형에 처해졌고, 홍귀달(洪貴達), 권달수(權達手), 이유령(李幼寧), 변형량(卞亨良), 이수공(李守恭), 곽종번(郭宗藩), 이심원(李深源), 박한주(朴漢柱), 강백진(康伯珍), 최부(崔溥), 성중엄(成仲淹), 박은(朴誾), 이원(李黿), 김굉필(金宏弼), 신증(申澄), 심순문(沈順門), 강형(姜詗), 김천령(金千齡), 정인인(鄭麟仁), 이주(李胄), 조지서(趙之瑞), 정성근(鄭誠謹), 정여창(鄭汝昌) 등은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나 바른말로 간언했다는 이유로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이미 죽은 자는 모두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20)이장곤(李長坤)의 일:이장곤은 1474년(성종5)에 태어나 1495년(연산군1)에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502년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의하면, 이장곤은 1505년 5월 22일에 자신을 천거한 이극균(李克均:1435~1504)이 갑자사화에 화를 당함에 따라 그에 연좌되어 1505년 5월 22일에 섬으로 유배를 보내라는 처분을 받았으며, 1506년 8월에 유배지인 거제도(巨濟島)에서 도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건은 후대에 왕명을 피해 도망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많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이원은 본 묘갈에서 보듯이 갑자사화로 인해 1504년 10월 24일에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가 죽은 때는 이장곤이 아직 유배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이야기는 이원을 부각시키기 위해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21)폐왕(廢王):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킨다.

22)궁액(窮厄)을 당해 별세하였고:이홍업은 1579년(선조12)에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병조 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함경도의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전주(全州)에서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된 국경인(鞠景仁)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이곳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온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그리고 그들을 수행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을 결박하여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 진영에 넘겨주어 조정에 대한 한풀이를 하였다. 이에 가등청정은 강화 문서를 작성하여 포로가 된 두 왕자와 신하들에게 강제로 서명하게 한 뒤 그 문서를 조선에 전달하기 위해 같은 시기에 잡혀온 이홍업을 지목하여 그로 하여금 문서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의주(義州)로 가게 하였다. 의주에 도착한 이홍업은 적의 문서를 가지고 온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한 행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고, 이 일로 4년 동안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그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75쪽 감찰(監察) 이군(李君) 묘갈음기(墓碣陰記) 참조.

23)손자:실제로는 증손이다. 세계(世系)에 의하면 발의 아들은 경윤(憬胤), 손자는 대건(大建), 증손은 시발이다.

24)동문선(東文選):1518년(중종13)에 신용개(申用漑), 김전(金銓), 남곤(南崑) 등에 의해 편찬된 속동문선(續東文選)을 가리킨다.

25)선조(宣祖)에게는……된다:중종의 여러 아들 중 금원군은 희빈(熙嬪) 홍씨(洪氏)의 소생이고 덕흥군, 즉 후대의 덕흥대원군은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소생이다. 덕흥군의 아들로는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河城君)이 있는데, 하성군이 바로 선조이다. 호안군 이욱은 실제 선조의 첫째 형인 하원군의 손자이나, 부친 영제군이 둘째 형인 하릉군의 양자로 들어가고, 하릉군은 덕흥군의 이복형인 금원군의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계보상으로는 금원군의 양자인 하릉군의 손자가 되지만, 혈연상으로는 덕흥대원군의 아들이자 선조의 형인 하원군의 손자가 된다.

26)현황제(顯皇帝):신종(神宗)의 시호이다.

27)갑자년의 변란:1624년 갑자년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을 가리킨다.

28)무고(誣告)를……들어갔으나:이괄의 난이 일어나고 기자헌(奇自獻) 부자 등이 내응했다는 무고를 받았을 때, 이욱 또한 종형제인 호성정(湖城正) 이락(李洛)과 함께 종실(宗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붙었다 하여 잡혀 들어와 국문을 받고 1624년에 흥해(興海)로 유배를 당했다. 그리고 1626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석방되었다. 仁祖實錄 2年 3月 17일, 4年 7月 4日

29)묵최(墨衰):상례(喪禮)에서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죽은 어머니의 담제(禫祭) 뒤와 출계(出系)한 사람이 생가 부모의 소상(小祥) 뒤에 입는 상복으로서, 다듬은 베로 만든 직령(直領)에 묵립(墨笠)과 묵대(墨帶)를 갖춘 복제(服制)를 일컫는다.

30)강도(江都):강화도(江華島)의 별칭이다.

31)이경여(李敬輿):1585~1657.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연보에 의하면, 이경여는 1633년(인조11) 1월에 전라도 관찰사에 부임하여 이듬해 봄까지 재직하였다.

32)금상:현종(顯宗)을 가리킨다.

33)관설공(觀雪公):관설은 허후(許厚:1588~1661)의 호이다.

34)재랑(齋郞):능참봉(陵參奉)을 이른다.

35)주자기보통편(朱子紀譜通編):주자(朱子)의 제자 이방자(李方子)가 지은 주자연보(朱子年譜)와 명나라 대선(戴銑)이 지은 주자실기(朱子實紀)를 합쳐 1660년에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이 편찬한 책이다. 총 6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정식 서명은 문공선생기보통편(文公先生紀譜通編)이다.

36)장헌왕(莊憲王):세종(世宗)의 시호이다.

37)폐주(廢主):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킨다.

38)공희왕(恭僖王):중종(中宗)의 시호이다.

39)능서랑(陵署郞):능참봉(陵參奉)을 이른다.

40)헌문왕(憲文王):인조(仁祖)의 시호이다.

41)나라가 중흥(中興)하던 해: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1623년을 가리킨다.

42)장묘(章廟):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가리킨다. 당시 이귀(李貴)와 최명길(崔鳴吉)의 주도로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후에 정원군은 결국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다. 그 무덤의 이름이 장릉(章陵)이므로 장묘라 한 것이다.

43)형의 아들 선흥(善興):정백창의 아들이다. 정백창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해에 사망하였으므로 정백형이 부친을 모시고 간 것이다.

44)사부(祠部):예조(禮曹)를 가리킨다.

45)복주(福州):경상도 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46)영새(寧塞):평안도 삭주(朔州)의 옛 이름이다.

47)영가 권씨(永嘉權氏):영가는 경상도 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즉 안동 권씨를 가리킨다.

48)함께……최명길(崔鳴吉):이정호와 최명길(崔鳴吉:1586~1647)은 1605년(선조38)에 시행한 생원시(生員試)에 함께 합격했으며, 이때 최명길은 장원을 차지하였고, 이정호는 3등 40위로 합격하였다.

49)덕신공자(德信公子):종실(宗室)인 덕신정(德信正) 이난수(李鸞壽)를 가리킨다.

50)선왕(先王):인조(仁祖)를 가리킨다.

51)난리: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가리킨다.

52)곡례(曲禮), 소의(少儀), 제자직(弟子職):곡례소의예기(禮記)의 편명으로서, 곡례는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예의(禮儀)에 대해 기록한 것이고, 소의는 상견례(相見禮)와 제사 음식을 올리는 천수례(薦羞禮)와 같은 작은 의례(儀禮)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제자직관자(管子)의 편명으로서, 학생들이 지켜야 하는 법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53)한성(韓城):충청도 한산(韓山)의 옛 이름이다.

54)상경(上卿):정1품과 종1품의 판서를 가리킨다.

55)왕자(王子):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1622~1658)를 가리킨다.

56)한원(翰苑):예문관(藝文館)의 별칭이다.

57)대성(臺省):대간(臺諫)의 별칭으로 사헌부(司憲府)를 가리킨다.

58)만월(滿月):경기도 고양(高陽)에 있는 산 이름이다. 김세렴(金世濂)이 쓴 오단(吳端)의 신도비명에 의하면, 그 무덤이 고양현(高陽縣) 만월봉(滿月峯) 을좌(乙坐)의 언덕에 있다고 한다. 東溟集 卷8 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贈議政府右議政吳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95輯

59)원훈(元勳):심대(沈岱)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冊錄)되었다. 이때 1등으로 책록된 사람은 이항복(李恒福)과 정곤수(鄭崐壽) 두 사람뿐이다.宣祖實錄 37年 6月 25日

60)정한강(鄭寒岡) 선생:한강은 정구(鄭逑:1543~1620)의 호이고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61)모친……지었다:심대부의 형은 광해군의 총신(寵臣)인 심대복(沈大復)을 가리킨다. 심대복은 안성 군수(安城郡守)로 재직할 때 아내의 간계에 빠져 모친을 별실에 감금한 일로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함경도 경흥(慶興)으로 유배되었다. 심대부는 이렇게 불효한 형과 모친에 대해 자식과 아우의 도리를 잃지 않고 잘 섬겼다 하여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息山集 卷20 孝子烈婦忠奴列傳, 韓國文集叢刊 178輯 凝川日錄 卷3 癸亥年下 仁祖實錄 1年 5月 7日, 15年 8月 4日

62)세……유배되어:해평도정(海平都正) 이길(李佶), 해안도정(海安都正) 이억(李億), 해원정(海原正) 이건(李健)이 제주도(濟州島)에 유배된 것을 가리킨다.

63)명나라……주둔하였는데:모문룡(毛文龍)은 황손무(黃孫茂)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 모문룡은 1621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이듬해 1622년에 평안도 철산(鐵山) 앞바다의 가도(椵島)를 점거하여 진영을 구축한 뒤 조선과 삼각관계를 형성하여 후금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후금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 본국인 명나라를 배반하고 후금에 투항하려다 1629년에 명나라에서 파견한 요동 경략(遼東經略) 원숭환(袁崇煥)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명나라 부총병(副摠兵) 진계성(陳繼成)이 가도의 군무를 지휘하였으나 1630년에 독부 도사(督府都司) 유흥치(劉興治)가 반란을 일으켜 진계성을 살해하였다. 1631년 유흥치는 장도(張燾), 심세괴(沈世魁) 등에게 살해되고 가도는 다시 도독 황룡(黃龍)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나 황룡은 1633년 명나라 반장(叛將) 공유덕(孔有德)에게 살해되었고, 공유덕은 동료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후금에 투항하였다. 그 후 가도에는 1634년에 명나라 감군(監軍) 황손무가 들어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다스리게 되었다. 이상에서 볼 때 심대부가 송화 현감으로 부임한 것은 모문룡이 죽은 지 5년이 지난 1634년이므로 이때 명나라 장수는 모문룡이 아닌 황손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소 불완전한 문장으로 보인다.

64)서로(西路):평안도와 황해도, 즉 관서(關西)와 해서(海西)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65)나라를 빛낸[光國] 큰 공:선조가 조선 건국 초부터 200년에 걸쳐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을 해결한 공을 일컫는다. 종계변무는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고쳐 줄 것을 지속적으로 주청하였던 사건이다. 태조실록대명회전에는 이성계가 고려 때의 권신이자 이성계의 정적인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대명회전의 개정을 끊임없이 요구하였고 그 결과 조선의 요구대로 개정이 이루어져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개정된 대명회전 중수본(重修本) 가운데 수정된 조선 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지고 돌아왔다. 조선에서는 이에 그치지 않고 1587년 유홍(兪泓)을 보내어 대명회전의 반사(頒賜)를 요청했는데, 명나라에서는 중수된 대명회전 중에서 조선관계 부분이 수록된 한 권만 보냈다. 선조는 이것을 종묘, 사직, 문묘에 고하였으며, 그 뒤 1589년에 성절사(聖節使) 윤근수(尹根壽)가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 옴으로써 200년간의 종계변무의 외교상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이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1590년에 책록된 공신호를 광국 공신(光國功臣)이라 하는데, 위의 윤근수, 황정욱, 유홍이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66)거짓 책:허균이 1614년 천추사로 중국에 가서 구입해 온 명나라 문인 오원췌(伍員萃)의 저작 임거만록(林居漫錄)을 가리킨다. 이 책은 필사본의 형태로 구입되었는데, 그 속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결과가 반영되지 않고 예전대로 이성계(李成桂)의 계보가 과거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가 하면, 뜻밖에도 광해군이 그의 형 임해군(臨海君)의 자리를 빼앗아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허균은 왕명을 받고 다시 중국으로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허균은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 판서에까지 오른다. 그런데 문제의 도서 임거만록은 허균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이후에 계속 제기되었다. 즉 허균이 광해군에 관한 내용을 써넣은 임거만록 필사본을 만들고, 이를 심복 현응민(玄應旻)을 시켜 북경의 책 시장에 내다 팔게 하고는 즉시 다시 사들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진위(眞僞) 문제야 어떠하든, 이 사건으로 인해 종계변무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났고 선조의 묘호 문제도 그와 함께 다시 제기되었던 것이다.

67)불천위(不遷位):공이 큰 인물의 신위(神位)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것 또는 그 신위를 이른다.

68)세실(世室):대대로 허물지 않고 신주를 모시는 종묘(宗廟)를 이른다.

69)예법: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그 내용이 나온다.

70)용주공(龍洲公):용주는 조경(趙絅)의 호이다.

71)우리 태조(太祖)……조암(趙巖):조암은 풍양 조씨에서 시조로 받드는 인물로서 후대에 조맹(趙孟)으로 불렸다. 본래 풍양, 즉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에 은거하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부탁으로 신라를 정벌하는 전투에 참가하였고, 그 공으로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책봉되었다. 따라서 본 국역 대본에서 조선 태조를 가리키는 ‘아태조(我太祖)’로 표기한 것은 미수(眉叟)의 착오로 보인다.

72)하빈(河濱):대구부의 속현(屬縣)이다.

73)자도(子都):옛날 얼굴이 예쁜 남자의 이름이다.

74)모모(嫫母):전설에서 황제(黃帝)의 네 번째 부인으로 그 모습이 추했다고 한다.

75)일남(日南):중국의 교주(交州)에 속하는 남방의 고을 이름으로, 그곳의 바다 속에서 보주(寶珠)가 많이 생산된다고 한다. 여기서는 남해안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76)영안도 병마평사(永安道兵馬評事):영안도는 함경도를 가리킨다. 1467년(세조13)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함흥(咸興) 출신의 이중화(李仲和)가 이시애를 추종하여 감사와 수령을 죽이는 등 악행을 저지름에 따라 1470년(성종1)에 함흥을 유수부(留守府)에서 군(郡)으로 읍호(邑號)를 강등시키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출신지인 영흥(永興)을 부(府)로 승격시켜 또 다른 계수관(界首官)인 안변(安邊)과 함께 들어 영안도로 개칭하였다. 成宗實錄 1年 2月 17日

77)무자중뢰경수시권(戊子重牢慶壽詩卷):중뢰(重牢)는 결혼 60주년을 맞이하여 잔치를 여는 회혼례(回婚禮)를 일컫는 말이며 경수(慶壽)는 장수를 축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무자년(1648)에 이구징이 결혼 60주년을 맞이하고 나이 80이 된 것을 축하하여 하객들이 지은 시를 모아 시첩으로 만든 것이다.

78)성동(成童):15세를 이른다.

79)이영언(李英彦) 선생:영언은 이정호(李挺豪)의 자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204쪽 만각(晩覺) 이 선생(李先生) 묘명 참조.

80)혈질(血疾):결핵이나 폐병을 가리킨다.

81)대령(大寧):황해도 해주(海州)의 옛 이름이다.

82)총산(蔥山):미수의 스승인 정언옹(鄭彦:1645~1612)의 호이다. 정언옹에 대한 구체적인 행력은 161쪽 총산(蔥山) 선생 묘갈 참조.

83)모비(母妃):인목대비(仁穆大妃)를 가리킨다.

84)향년 60세:위에서 정희성이 태어난 해가 1589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사망한 해가 1638년이라면, 향년은 50세가 되어야 한다. 아마도 몰년이나 향년 가운데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85)혜장대왕(惠莊大王):세조(世祖)의 시호이다.

86)정의대부(正義大夫):종친부(宗親府) 종2품 하위 칭호이다.

87)중의대부(中義大夫):종친부 종2품 상위 칭호이다.

1)김근공(金謹恭):1526~1568.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에게 배웠고 동몽 훈도(童蒙訓導)를 지냈다. 아내 송씨(宋氏)는 참판을 지낸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의 서매(庶妹)이다. 頤庵遺稿 卷8 惕菴金君墓表, 韓國文集叢刊 36輯

2)행촌(幸村):민순(閔純)의 호인데, 여러 자료에 행촌(杏村)과 행촌(幸村)이 섞여 나온다.

3)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선조22)에 동인(東人)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이다. 이 옥사는 당시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 이축(李軸),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서 백유양(白惟讓), 이발(李潑), 이길(李洁), 김우옹(金宇顒), 정언신(鄭彦信), 정언지(鄭彦智), 정창연(鄭昌衍) 등 동인 인물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당하였다.

4)남계(南溪):이길(李洁:1547~1589)의 호이다.

5)해옥(海獄):1616년(광해군8)에 해주 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가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 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하여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이이첨 일파인 황해도 관찰사 백대형(白大珩) 등에 의해 남형죄(濫刑罪)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옥사(獄死)한 사건을 말한다. 燃藜室記述 卷21 廢主光海君故事本末 崔沂海州之獄

6)대비(大妃):인목대비(仁穆大妃)를 가리킨다.

7)장작감 첨정(匠作監僉正):장작감은 토목, 건축 등을 담당하던 고려 시대의 관청명으로, 조선 시대의 선공감(善工監)에 해당하는데, 조선 시대에 와서도 선공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첨정은 종4품 관직이다.

8)사수(泗水) 가에서……섬기면서:한강(寒岡) 정구(鄭逑)는 72세이던 1614년(광해군6)에 칠곡군(柒谷郡)에 있는 사수(泗水) 물가로 이사했으며 1617년에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짓고 그곳에서 거처하였다. 사수는 사양정사 앞을 흐르는 강을 말하는데 금호강(琴湖江) 하류이다. 이도장(李道長)은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寒岡先生年譜

9)겨울에……공격하여:1636년 병자년 겨울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말한다.

10)중흥세(中興世):인조 시대를 가리킨다.

11)중서(中書):중서성(中書省)을 줄인 말이다. 대개 우리나라에서는 승정원 또는 의정부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승정원을 가리킨다.

12)찬성공이……되었고:광해군일기에 의하면, 1615년(광해군7) 윤8월 5일에 이덕형(李德泂)이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3)제부(諸部)의……얻어:신라는 서기 32년(유리왕9)에 그 이전의 육촌(六村)을 육부(六部) 체제로 정비하여 그 이름을 바꾸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하였는데,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을 양부(梁部)로 바꾸고 이씨(李氏) 성(姓)을 하사하였다.

14)강양(江陽):합천의 옛 이름이다.

15)어머니의 초상을 당하여:한국문집총간 96집에 수록된 백헌집(白軒集) 권43의 구성부사 증 우찬성 이공 신도비명(龜城府使贈右贊成李公神道碑銘)과 한국문집총간 234집에 수록된 간옹문집(艮翁文集 권17의 증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 가선대부 구성도호부사 이공 시장(贈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行嘉善大夫龜城都護府使李公諡狀)에는 조모상(祖母喪)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16)표리(表裏):옷감의 겉감과 안감이다. 옷을 한 벌 지을 수 있는 옷감을 말한다.

17)흑한(黑漢)의 군사:청나라 군사를 말한다.

18)납서(蠟書):밀랍(蜜蠟)으로 싸서 봉한 편지를 말한다.

19)팔계군(八溪郡) 북쪽 오세향(吳世鄕):한국문집총간 234집에 수록된 간옹집(艮翁集) 권17의 증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 가선대부 구성도호부사 이공 시장(贈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行嘉善大夫龜城都護府使李公諡狀)에는 ‘오세향’이 ‘오서촌(烏棲村)’으로 나온다. 팔계군은 초계군(草溪郡)이다.

20)우리……것이다: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말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東史綱目 第3下 壬寅 八月

21)정 문간공(鄭文簡公)의 일:1637년(인조15) 1월 무진일에 당시 69세이던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우리나라가 청(淸)나라에 항복하는 것에 분개하여 할복 자결을 시도한 일을 말한다. 桐溪集 文簡公桐溪先生年譜, 韓國文集叢刊 75輯

22)광해군……급제하였다:이성원은 1610년(광해군2)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621년 별시(別試)에 을과(乙科) 제3인으로 급제하였으며, 1623년(인조 원년) 개시(改試)에 을과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

23)천계(天啓) 9년:명나라 희종(憙宗)의 연호인 천계로 7년에서 끝나고 다음은 의종(毅宗)의 숭정(崇禎) 시대인데, 여기서는 숭정 2년을 천계 9년으로 표기하였다.

24)아무[某]:별제 최침(崔琛)이다.

25)해양(海陽):길주(吉州)의 옛 이름이다.

26)유 총병(劉摠兵):유정(劉綎)을 가리킨다.

27)진 도독(陳都督):진린(陳璘)을 가리킨다.

28)행야(行夜)를 영솔하고:행야는 야간 순찰이라는 뜻이다. 이순신(李純信)은 선조와 광해군 때에 수차례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29)금병(禁兵)을 담당한:금병은 임금의 금위(禁衛)를 담당하는 군병(軍兵)을 말한다. 내금위(內禁衛)나 겸사복(兼司僕)의 장(長)을 담당했다는 말인 듯하다.

30) 조회를……닫았으며:국상이 있거나 고관이 죽었을 때의 조처로, 원문은 ‘罷朝巷市’이다. 이에 대해서는 21쪽 주 28) 참조.

31)금상(今上):숙종을 가리킨다.

32)강자구(姜子久):강학년(姜鶴年:1585∼1647)을 가리킨다. 자가 자구(子久)이고 호는 복천(復泉)이다. 대사헌 강첨(姜籤)의 아들이다.

33)해도(海島)의 고림(高林):강화도 교동(喬桐)을 말한다.

34)예묘(禰廟):원종(元宗)을 가리킨다.

35)강빈옥사(姜嬪獄事):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청나라에서 돌아와 얼마 되지 아니하여 1645년(인조23) 3월에 세자가 죽자, 이를 기화로 조 소용(趙昭容)이 세자빈 강씨를 무고하였다. 인조는 1646년에 강빈을 사사하고 그 소생 석철(石鐵), 석린(石麟) 석견(石堅)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燃藜室記述 卷27 仁祖朝故事本末 姜嬪之獄

36)조경(趙絅)이……하였다:용주 조경이 지은 제이지평문(祭李持平文)이 한국문집총간 90집에 수록된 용주유고(龍洲遺稿) 권13에 실려 있다.

37)이 백부(李栢府):백부는 사헌부의 별칭이다. 이완이 사헌부 지평이었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38)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 자는 후지(厚之)이고 호는 하서 또는 담재(湛齋)이다.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고, 이황(李滉) 등과 가깝게 지냈다. 중종 35년 경자년(1540)에 문과 별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39)이소재(履素齋):이중호(李仲虎:1512~1554)의 호이다. 이중호는 자는 풍후(風后)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당대에 문장으로 명망이 높아 문하에 제자들이 수백 명이었는데, 실천 학문을 중시하여 학생들에게 소학 공부를 강조하였다.

40)종신토록……애통해하였다:예기 제의(祭義)에 “군자는 종신(終身)의 상(喪)이 있으니 기일(忌日)을 말한다.” 하였다. 해마다 기일이 되면 마치 초상 때처럼 애통해하여 그 슬픔이 종신토록 이어지므로 ‘종신의 상’이라 한 것이다.

41)태일(太一)에 재초(齋醮)하는 것:소격서에는 태일전(太一殿), 삼청전(三淸殿) 및 여러 제단(祭壇)에 각각 해당하는 수백 개의 신위가 있었다. 태일전은 칠성(七星)을 비롯한 여러 별을 제사하는 곳이며, 재초는 재앙을 물리치고 복록을 기원하는 도교의 제례 의식이다.

42)한구암(韓久庵):구암은 한백겸(韓百謙:1552~1615)의 호이다.

43)두 번……낳았다:한국문집총간 90집에 수록된 용주유고(龍洲遺稿) 권15 연봉 이 선생 묘갈(蓮峯李先生墓碣)에 의하면, 전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가 1남을 낳았으니 돈오(惇五)이며, 후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돈서(惇敍), 돈실(惇實), 돈림(惇臨)이고 사위는 조수항(趙壽恒)이다.

44)창수(倉守):한국문집총간 141집에 수록된 남계집(南溪集) 권82 광흥창 수 증 좌승지 이공 행장(廣興倉守贈左承旨李公行狀)에 의하면, 이돈오는 갑술년(1634, 인조12)에 광흥창 수(廣興倉守)에 제배되었다.

45)벽상공신(壁上功臣):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할 때에 큰 공을 세운 개국 공신들에게 고려 태조 왕건이 내린 공신호(功臣號)이다. 고려는 통일 후 신흥사(新興寺)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동서(東西) 벽에 삼한 공신(三韓功臣)을 그려 넣었는데, 이를 삼한 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 하였다. 그 뒤 고려 명종(明宗) 즉위에 공을 세운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에 대해서도 명종이 이들의 초상을 그려 조정의 벽에 붙이게 하고 벽상공신이라 하였다.

46)김제민(金齊閔):1527~1599. 자는 사효(士孝)이며, 호는 오봉(鰲峯)이다. 1558년(명종13)에 진사가 되었고, 1573년(선조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화순 현감, 순창 군수 등을 거쳤다. 童土集 卷6 軍器寺正金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100輯

47)첨(籤):1557∼1611. 자는 공신(公信)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병자년(1576, 선조9)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고 신묘년(1591)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조 참의, 부제학, 대사간,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梧里集續集 卷2 大司憲姜公墓誌, 韓國文集叢刊 56輯

48)신담(申湛):1519~1595. 자는 중경(仲卿)이고 호는 어성(漁城)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충청도 관찰사, 경주 부윤, 부제학, 예조 참판, 전주 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박학하였는데 특히 한자(韓子)초사(楚辭)에 조예가 깊었다. 사위가 일곱 명이었는데, 노대하(盧大河), 홍민신(洪敏臣), 유기(柳起), 강첨(姜籤), 김천명(金天命), 소백복(蘇百福), 이덕형(李德泂)이다. 鵝溪遺稿 卷6 嘉善大夫禮曹參判申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47輯 宣祖實錄 28年 11月11日

49)덕신정(德信正):세조의 왕자인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의 증손 이난수(李鸞壽)이다. 자는 문수(文叟)이며 호는 서곡(西谷)이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명망이 높았다.

50)14년:실제로는 숭정 7년에 해당하는데, 천계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51)상소하여……하였다:1634년(인조12) 11월에 장령 강학년이 상소하여 광해군의 세자 이지(李祬)를 사사(賜死)한 것과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사사한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백이(伯夷)가 있다면 틀림없이 포악으로 포악을 바꾸었다는 비판을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 상소로 강학년에 대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이 빗발쳤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고 천하가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자 백이와 숙제(叔齊)는 그것을 수치로 여겨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먹고 살다 죽었다. 그때에 지어 부른 노래에 “포악으로 포악을 바꾸어 놓고도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지 못하네.”라는 내용이 있다. 무왕이 무도한 은나라를 쳤지만 그 명분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은나라나 주나라나 옳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仁祖實錄 12年 11月 3日 史記 卷61 伯夷列傳

52)이 문충공(李文忠公):이원익(李元翼:1547~1634)을 가리킨다.

53)나라에……곧았구나: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곧구나, 사어(史魚)는. 나라에 도가 있어도 화살처럼 곧았고 나라에 도가 없어도 화살처럼 곧았으니.” 하였다. 공자(孔子)가 위(衛)나라 대부 사어의 강직함을 칭찬한 말인데, 여기서 강학년의 강직함을 기리는 말로 인용하였다.

54)교리:원문에는 글자가 빠졌는데, 다음에 나오는 김 전한(金典翰) 갈문(碣文)을 참고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55)3년……높았다:김홍도는 명종 3년 무신년 별시에 갑과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1)강씨(姜氏):소현세자 빈(昭顯世子嬪)을 가리킨다.

2)이조 판서……말하였다:효종실록에 의하면 1649년(효종 즉위년) 8월에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차자를 올려, 사사로이 집안사람에게 벼슬을 제수했다는 내용으로 심액을 탄핵하였고, 탄핵을 지지하는 언관(言官)들이 나서서 심액이 자기의 외손(外孫) 오정위(吳挺緯)를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삼은 것, 동서(同婿)의 아들 이시중(李時中)을 의성 현령(義城縣令)으로 삼은 것, 그리고 외손 안광욱(安光郁)을 도감 낭청에 차임한 것 등을 들어 심액을 공격하였다. 당시 언관들은 심액을 탄핵하는 의견과 심액을 두둔하는 의견으로 나뉘어 논란이 분분하였다. 집의 엄정구는 오정위를 경기 도사에 차임할 때에 이조 낭관으로서 그 정사에 참여했으므로 논란이 일자 인피하였다.

3)김자점의……있었다:효종실록에 의하면, 1649년(효종 즉위년) 9월에 집의 송준길(宋浚吉)이, 김자점의 전횡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이시만(李時萬), 이이존(李以存), 신면(申冕), 이지항(李之恒), 이해창(李海昌), 엄정구(嚴鼎耈), 황호(黃㦿) 등을 탄핵하여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이들에 대한 대간의 탄핵이 이어졌다.

4)양사(兩司)가……면하였다:효종실록에 의하면, 1652년(효종3) 1월에 대사헌 심지원(沈之源), 장령 이형(李逈), 지평 한진(韓縝)이,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鉽)을 이조 낭관으로 천거해 끌어 주었다는 죄목으로 엄정구를 삭탈관작하여 문외출송하라고 아뢰었다. 정언 조사기(趙嗣基)와 오정원(吳挺垣)이 엄정구의 무죄를 주장하며 쟁집하였다.

5)재(在):1351~1419. 자는 경지(敬之), 호는 귀정(龜亭)이다. 이름이 겸(謙)이었는데, 태조(太祖)가 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1396년(태조5)에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대사헌, 예문관 대제학, 경상도 관찰사, 병조 판서, 이조 판서,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1411년(태종11)에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뒤에 보국숭록대부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올랐다. 燃藜室記述 卷2 太宗朝故事本末 太宗實錄 世宗實錄 宜寧府院君 南在 卒記 龜亭遺藁上 年譜, 韓國文集叢刊 6輯

6)선장군(先將軍):남이흥(南以興)의 아버지인 남유(南瑜)를 가리킨다.

7)표리(表裏):옷감의 겉감과 안감이다. 옷을 한 벌 지을 수 있는 옷감을 말한다.

8)광주(廣州)에……투항하였다:인조실록 2년(1624) 2월 15일 기사에, “적장(賊將) 이수백(李守白),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괄(李适)과 한명련(韓明璉)을 베어 행재소에 와서 바쳤다.” 하였다.

9)대항은……되었다:권대항(權大恒)은 선조(宣祖)의 후궁 온빈(溫嬪) 한씨(韓氏) 소생의 정화옹주(貞和翁主)에게 장가들었다.

10)삼세가 중추부에 들었으니:할아버지 권상(權尙)과 아버지 권희(權憘)와 권익중(權益中)이 모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1)조정에는……있었는데:효종이 승하했을 때에 일어난 기해예송(己亥禮訟)을 말한다.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어떤 복제를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西人)들은, 자의대비는 이미 장남인 소현세자를 위해서 삼년복을 입었으며 효종은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삼년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고, 허목(許穆)을 비롯한 남인(南人)들은, 왕통을 계승한 경우에는 사가(私家)의 복제를 적용해서는 안 되며 형제의 순서와 관계없이 장자(長子)의 예로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2)차장(次長):장자(長子)가 죽거나 유고가 있어 장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차자(次子)를 대신 세워 장자로 삼은 경우 그 차자를 말한다.

13)계례(笄禮):남자의 관례(冠禮)에 해당하는 여자의 성인 의식(成人儀式)이다. 혼인을 하거나 15세가 된 여자는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음으로써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14)숭정 무진년……급제하였다:하진(河溍)은 인조 11년 계유년(1633)에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 원문에 ‘戊辰年 仁祖六年’이라 한 것은 오류인 듯하다. 國朝文科榜目

15)사직하면서……말하였다:인조실록 25년(1647) 10월 18일 기사에 의하면, 하진이 진주에 있으면서 지평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소를 올려 사직하고 이어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간 이경여(李敬輿), 홍무적(洪茂績), 심노(沈), 북쪽 변방으로 귀양 간 이응시(李應蓍)를 석방할 것을 청하였으며, 효종실록 즉위년(1649) 9월 1일 기사에 의하면, 부사직(副司直) 하진이 상소하여, 이경여, 홍무적, 이응시, 심노 등을 완전히 풀어 주라고 청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라고 청하였다.

16)스무 살에……들어갔다:이성구는 1603년(선조36)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거관 유생(居館儒生) 가운데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자를 상사(上舍)에서 기숙하게 하는데 이러한 사람을 상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학(四學)의 승보시(陞補試)를 통해서 취재(取才)된 자를 기재(寄齋)라 한다.

17)무신년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이성구는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별시(別試) 을과(乙科)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

18)동료 중에……파직되었다:한국문집총간 123집에 수록된 백호집(白湖集) 권20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세자사 이공 시장(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世子師李公諡狀)에 “봉교 이경안(李景顔)이 조유도(趙有道)를 천거하여 사국(史局)에 들이려고 하자 공이 조유도가 척리(戚里)라는 이유로 그를 막았다. 이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하였다.

19)백사(白沙)……일어났다:백사는 이항복(李恒福)의 호이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광해군 5년 5월 5일에 이항복은 역모에 연관된 정협(鄭浹)을 추천했었다는 이유로 좌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5월 28일부터 누차 같은 이유로 양사가 합계로 이항복의 파직을 청하였다.

20)권세를……파직되었다:광해군일기에 의하면, 당시의 대간들이 역모에 연관된 심우영(沈友英)이 이성구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이성구를 공박하였다. ‘아무 집안’이라 함은 이성구의 집안을 말한다.

21)무오년에……것이었다:광해군일기 10년 8월 6일 기사에, “비변사가, ‘영평(永平)과 포천(抱川)을 합해 한 부(府)로 만들고 그대로 감영(監營)을 설치하여 북로(北路)의 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감사에게 부윤(府尹)을 겸하게 해야 하겠는데, 다만 부윤이란 칭호는 반드시 옛 도읍이거나 한때의 주필처(駐蹕處)였던 곳이라야 하니, 이번에 영평에 새로 설치하는 부는 대도호부(大都護府)라고 일컬어 그 체면을 중하게 해서 본도 감사에게 겸직하게 하고 판관은 이번 정사에서 시종 문관 중에 재망(才望)이 있는 자를 급히 가려서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기 감사는 예로부터 도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 만약 영평부로 나가 있으면 급한 일이 있을 때에 매우 염려스러울 것이다. 무신을 부사로 삼으면 문신 판관을 차출해 보내고 문신을 부사로 삼으면 무신 판관을 골라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하였고, 10년 9월 12일 기사에 “이성구로 영평 판관을 삼았다.” 하였다.

22)침향산(沈香山):나무판자를 이용하여 만든 가무(歌舞) 도구이다. 산(山)의 형태를 만들고 산에는 사슴, 부처, 스님 등을 그려 넣었으며 산 앞으로 못과 연꽃을 그려 넣었다.

23)목릉(穆陵):선조(宣祖)의 능이다.

24)정묘년에……갔다:인조실록에 의하면, 청나라의 침입으로 인조 5년 1월 말에 평안도 능한산성(凌漢山城)이 함락되자 조정에서는 분조(分朝)하자는 의논이 일어났고 세자를 전주로 보내 분조하기로 결정하여 인조 5년 2월 10일에 세자가 전주에 이르렀다.

25)이때……있었는데:인조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을 추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정원군은 뒤에 원종대왕(元宗大王)으로 추숭되었다.

26)김류가……하였다:한국문집총간 123집에 수록된 백호집(白湖集) 권20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세자사 이공 시장(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世子師李公諡狀)에 “최명길(崔鳴吉)이 국서(國書)를 지어 장차 오랑캐의 군영으로 가기 위해 대궐에 이르자,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그 국서를 빼앗아 찢어버리고 이어 궐정(闕庭)에서 통곡하였다. 그러자 공은 눈물을 거두고 개연히 탄식하며, ‘이 오랑캐를 무찌를 수 있겠는가?’ 하니, 김상헌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다. 공이 ‘이 산성은 지킬 수 있겠는가?’ 하니, 다시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적을 무찌를 수 없는 데다 산성도 지킬 수 없다면 장차 군상(君上)을 어느 지경에 두겠단 말인가. 종사(宗社)가 망하는 것은 필부(匹夫)의 죽음과는 다르다. 필부의 죽음도 쉬운 일이 아닌데 더구나 종사가 망하는 일이겠는가.’ 하니, 김상헌이 노하여 말하기를, ‘공들은 바로 자기 몸과 처자를 보전하기 위함일 뿐이다.’ 하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후일을 두고 보자. 누가 제 몸과 처자를 보전하기 위함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가 정축년 정월이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강도(江都)가 함락되고 공의 온 집안이 순절하자 정승 김류(金瑬)가 말하기를, ‘이공은 지난날 했던 말에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하였다. 한국문집총간 230집에 수록된 순암집(順菴集) 권18의 오절순난록발(五節殉難錄跋)에 “정축년(1637, 인조15) 변란에 오랑캐가 강도를 함락하여 그 참벌(斬伐)이 너무나 참혹하였다. 당시에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중에도 분사(汾沙) 상국(相國) 이성구(李聖求)의 집안이 더욱 특별하다. 상국의 부인 권씨(權氏)와 아들 하나, 며느리 하나, 딸 둘이 모두 적을 만나 굽히지 않고 함께 효열(孝烈)로 죽어 한집안에서 다섯 명의 절사자(節死者)가 나왔다.” 하였다.

27)이계(李烓)의 사건:1637년(인조15)에 호란(胡亂)이 진정되자 최명길이 우리나라가 청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은 경위에 대해 진술한 자문(咨文)을 지어 명나라에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를 위무하였는데, 그 사신이 탄 배가 선천(宣川)에 이르자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계에게 서찰을 보내 물자와 식량을 넉넉히 보급해 주라고 하였다. 청나라는 우리가 명나라와 교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선천 부사 이계를 잡아 가두고 조사하였는데 이계가 그간의 정황을 공초하였다. 燃藜室記述 卷26 仁祖朝故事本末 獨步

28)권흔(權盺):1568~? 자는 숙절(叔節)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인조의 국구(國舅)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매서(妹婿)이다. 1602년(선조35) 임인년에 알성시(謁聖試) 을과(乙科)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권흔의 둘째 딸이 이성구의 아내가 되었다. 象村稿 卷24 贈領議政韓公墓誌銘, 韓國文集叢刊 72輯 國朝文科榜目

29)이일상(李一相):1612~1666. 자는 함경(咸卿)이고 호는 청호(靑湖)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628년(인조6)에 17세의 나이로 알성시(謁聖試)에 병과(丙科) 2위로 급제하였다. 부제학,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예조 판서 등을 거쳤다. 아버지는 이명한(李明漢)이고 할아버지는 이정귀(李廷龜)이며 외할아버지는 박동량(朴東亮)이다. 南溪集續集 卷21 禮曹判書贈右議政李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42輯

30)갈아도 얇아지지 않음이요:논어 양화(陽貨)에 나오는 말이다. 필힐(佛肹)이 중모읍(中牟邑)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고는 공자(孔子)를 초빙하니 공자가 그곳에 가려고 하였는데,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의문을 제기하자 공자가 답하기를, “단단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다면. 희다고 하지 않겠는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면.”이라 하였다. 가든 가지 않든 외부 환경에 따라 지조가 바뀌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31)나아가서는……않았고: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유하혜(柳下惠)는 더러운 군주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작은 벼슬도 낮게 여기지 않아서, 나아가서는 재능을 다 발휘하여 일하면서[進不隱賢] 반드시 그 올바른 도리를 다하였다.” 하였다.

32)물러나서는……없었으니:맹자 공손추 상에 “유하혜는 버려져도 원망하지 않았고 곤궁해도 근심하지 않았다.” 하였으며,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不怨天]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不尤人]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워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한다.’ 하였다.” 하였다. 여기서는 타인에 의해 배척되거나 임금에게 버림을 받아 물러나 지낼 때에도 주변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33)평난 공신(平難功臣):1589년(선조22)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평정하고, 그 공로를 포상하여 이듬해(1590)에 내린 공신호(功臣號)이다. 일등 추충분의병기협책평난 공신(推忠奮義炳幾恊策平難功臣)은 박충간(朴忠侃), 이축(李軸), 한응인(韓應寅) 등 3인, 이등 추충분의협책평난 공신은 민인백(閔仁伯), 한준(韓準), 이수(李綏), 조구(趙球), 남절(南截), 김귀영(金貴榮), 유전(柳㙉), 유홍(兪泓), 정철(鄭徹), 이산해(李山海), 홍성민(洪聖民), 이준(李準) 등 12인, 삼등 추충분의평난 공신은 이헌국(李憲國), 최황(崔滉), 김명원(金命元), 이증(李增), 이항복(李恒福), 강신(姜紳), 이정립(李廷立) 등 7인으로 모두 22인이다. 박충간 이하는 고변을 했고 민인백 이하는 역도의 괴수를 잡았고 김귀영 이하는 추관(推官)으로서 죄인의 공초를 받았다. 宣祖修正實錄 23年 8月 1日

34)인조 말년에……하였고:1648년(인조26) 무자년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 1등으로 합격하였다.

35)그해에 대과(大科)에 선발되었으나:1652년(효종3) 임진년 증광시 문과에 올랐다.

36)오현(五賢)을……뒤였는데:1610년(광해군2) 9월에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오현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중외에 교서를 내렸다.

37)남명(南冥):조식(曺植)의 호이다.

38)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의 호이다.

39)퇴도(退陶):이황(李滉)의 호이다.

40)공관(空館):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집단 시위 행태를 말한다.

41)신유년에……들어갔다:이덕형은 1615년(광해군7)에 도승지로 있다가 외직을 청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 전라도 관찰사, 병조 참판,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621년(광해군13) 5월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42)시종(侍從)의 장관 자리:승정원 도승지를 말한다.

43)심기원(沈器遠):?~1644. 자는 수지(遂之)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계해반정에 공을 세워 1623년(인조 원년) 윤10월에 김류(金瑬),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이서(李曙), 신경진(申景禛), 최명길(崔鳴吉), 이흥립(李興立), 구굉(具宏), 심명세(沈命世) 등과 함께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 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 1등에 들었다.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반란과 1627년 정묘호란 때에 공을 세웠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방어하였다. 1644년에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임하자 이일원(李一元), 권억(權澺) 등과 함께 종실인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모의하였는데 부하 황헌(黃瀗), 이원로(李元老)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具仁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강화 유수, 공조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권필(權韠)의 문인이다. 燃藜室記述 卷23 仁祖朝故事本末 癸亥靖社 大東野乘 癸亥靖社錄

44)죄인의……것이다:성호사설(星湖僿說 권9 인사문(人事門) 성세인정(聖世仁政)에 “죄인이지만 이미 죽은 자에게는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지 않도록 한 것은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힘을 쓴 것이고, 수노연좌(收孥連坐)에 해당하는 자에게 대년(待年)의 형률(刑律)을 면제시켜 주도록 한 것은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이 힘을 쓴 것이다.” 하였다. 수노연좌는 죄인의 아내와 자녀들을 연좌시켜 노비로 만드는 것을 말하고, 대년의 율이란 연좌된 자들이 나이 16세 미만의 미성년자일 경우에 16세가 될 때를 기다렸다가 형법을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45)인조가……시행하였다:이행원(李行源)은 1648년(인조26)에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있으며, 1649년(효종 즉위년)에 다시 암행어사가 되어 북변을 염문하고 효종 1년에 복명하였다. 선조(宣祖) 때에 육진(六鎭)의 번호(藩胡)들이 난리를 일으켜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자 조정에서 농우(農牛)를 나누어 보내 농사를 도왔는데, 각 고을에서는 소가 죽으면 그 소 값을 징수하였으므로 폐단이 차츰 커져서 이때에 와서는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이 막심하였다. 이행원이 이러한 사실을 복명하니, 효종이 이를 탕감하게 하였다. 仁祖實錄 26年 閏3月 23日 孝宗實錄 1年 4月 1日

46)술초(述初):이광원(李光源)의 자이다.

47)설옹(雪翁) 선생:허목(許穆)의 종형(從兄)인 허후(許厚:1588~1661)이다. 자는 중경(重卿)이고 호는 관설(觀雪), 성재(惺齋), 돈계(遯溪) 등이다. 인조반정이 있은 뒤에 이원익(李元翼)의 천거로 내시 교관이 되었으며, 의성 현령(義城縣令), 공조 정랑, 지평, 장령, 장악원 정(掌樂院正) 등을 거쳤다. 원주(原州)에서 오래 살았다. 記言別集 卷26 觀雪先生行狀, 韓國文集叢刊 99輯

48)덕은현(德恩縣):은진(恩津)을 가리킨다.

49)수양(首陽):해주(海州)를 말한다. 해주를 대령(大寧), 고죽(孤竹)이라고도 부른다.

50)정희성 유립(鄭希聖有立):정희성(1589~1638)은 자(字)가 유립(有立)이다. 아버지는 정문형(鄭文亨)이고, 어머니는 경주 정씨(慶州鄭氏) 정명선(鄭明善)의 따님이다. 정희성은 이호연(李浩然)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정동익(鄭東益), 정동직(鄭東稷), 정동설(鄭東卨), 정동석(鄭東奭), 정동룡(鄭東龍)이다. 記言別集 卷21 處士鄭君墓碣文, 韓國文集叢刊 99輯

51)허물인……옮겨갔다:주역 익괘(益卦) 상(象)에 “바람과 우레가 익(益)이니, 군자는 이것을 보고, 선(善)을 보면 바로 옮겨가고 허물이 있으면 바로 고친다.” 하였다. 선을 보고 옮겨가 그 선을 실천하면 천하의 모든 선을 자기의 선으로 삼을 수가 있고 허물이 있을 때마다 곧바로 고쳐 나가면 허물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52)황호(黃㦿):1604~1656. 자는 자유(子由)이고 호는 만랑(漫浪)이며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624년(인조2) 증광시에 을과 4위로 급제하였다. 교리, 장령, 대사성,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6년에는 통신사 종사관이 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星湖全集 卷62 漫浪黃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200輯

53)이현기(李玄紀):1647~1714. 자는 원방(元方)이고 호는 졸재(拙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증조부는 이수광(李睟光)이고 할아버지는 이성구(李聖求)이며 아버지는 이동규(李仝揆)이다. 1673년(현종14) 생원시에 장원을 하였고, 1676년(숙종2) 문과 정시에 병과 3위로 급제하였다. 우부승지와 대사성을 거쳐 호남과 영남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國朝文科榜目

54)천장급제(天場及第):이달충(李達衷)이 지은 계림부임후재사표(鷄林赴任後再辭表)에, “충렬왕(忠烈王)이 유아(儒雅)를 포숭(褒崇)하여 당대의 문한지사(文翰之士)들을 몸소 시험 보여 등차를 매기고는 천장급제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왕이 친림한 중시(重試)를 특별히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東文選 卷42 鷄林赴任後再辭表

55)아버지를……때였다:이경(李藑)의 아버지 이귀남(李貴男)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갑오년(1594, 선조27)에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游齋集 卷23 奉訓郞桃源道察訪李公墓誌銘, 韓國文集叢刊 156輯

56)계유년에 상사(上舍)에 올랐다:우복룡(禹伏龍:1547〜1613)은 1573년(선조6) 식년시에서 진사(進士) 3등 22위로 성균관 상사에 들어갔다.

57)이 문충공(李文忠公)……순행하였는데:당시에 이원익(李元翼)은 우의정으로서 도체찰사가 되어 경상도 지역을 순행하였다. 원문에 ‘영상(領相)’이라 한 것은 오류인 듯하다.

58)삼경(三京):시대에 따라 가리키는 지역이 다소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는 서울, 평양, 개성을 말한다.

59)요직에……하였고:1600년(선조33) 2월에 정언 안극효(安克孝)가, 홍주 목사(洪州牧使) 우복룡(禹伏龍)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한 것을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선조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사간원이 계속 아뢰니 개정하도록 하였다. 宣祖實錄 33227日, 28

60)임해군(臨海君):1574〜1609. 선조(宣祖)의 서장자(庶長子)이며 이름은 진(珒)이다. 성품이 난폭하였으므로 아우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광해군 즉위 초에 명나라에서 장자 임해군이 즉위하지 못한 사유를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광해군을 반대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광해군 지지 세력들이 역모(逆謀)의 죄명을 씌워 임해군을 진도(珍島)에 유배시켰다. 얼마 뒤 다시 교동(喬桐)에 이배(移配)하였고 광해군 1년(1609)에 사사(賜死)하였다.

61)덕원(德遠):정인홍(鄭仁弘)의 자이다.

62)송중회(宋仲懷):송선(宋瑄:1544〜1629)을 가리킨다. 중회는 그의 자이다. 호는 목옹(木翁)이다. 김근공(金謹恭)과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배웠다. 과천(果川), 포천(抱川), 강음(江陰), 운봉(雲峯), 당진(唐津) 등의 현감과 재령(載寧), 곡산(谷山), 단양(丹陽) 등의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세자익위사 익위, 형조 정랑 등을 거쳤다. 記言 別集 卷20 木翁宋先生墓碣銘, 韓國文集叢刊 99輯

63)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1504. 자는 낭옹(浪翁)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며 박팽년(朴彭年)의 외손이다. 1489년(성종20)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에 나주(羅州)로 장류(杖流)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에 죽었다. 佔畢齋集 附錄 門人錄, 韓國文集叢刊 12輯 燃藜室記述 卷6 燕山朝故事本末 戊午黨籍

64)계운궁(啓運宮):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를 가리킨다. 구사맹(具思孟:1531〜1604)의 딸로 정원군(定遠君:1580〜1619)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 되었다. 인조가 즉위한 뒤에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이 되었고, 궁호(宮號)를 계운궁이라 하였다.

65)세자:인조의 장자(長子)인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를 말한다. 1625년(인조3)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1627년에 강석기(姜碩期)의 딸과 혼인하였다.

66)정사 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정사 공신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공신 칭호이고, 원종공신은 각 등급의 정공신(正功臣)에 들지는 못했으나 일에 어느 정도 기여한 사람들에게 등외로 내린 칭호이다.

67)천도(天道)는……미워한다:주역 겸괘(謙卦) 단전(彖傳)에 “천도(天道)는 가득한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것에는 더해 주며, 지도(地道)는 가득한 것을 변화시키고 겸손한 쪽으로 흐르게 하며, 귀신(鬼神)은 가득한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에 복을 주며, 인도(人道)는 가득한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 하였다.

68)군자답구나……취했겠는가: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부자께서 자천(子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군자답구나, 이 사람은.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러한 덕을 취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69)주계군(朱溪君):이심원(李深遠:1454∼1504)이다. 태종의 현손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증손이다. 자는 백연(伯淵)이고 호는 성광(醒狂), 묵재(黙齋)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학식이 매우 높아 당대의 선비들이 그에게 배운 이가 많았다. 갑자사화 때에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70)황사우(黃士佑):1486∼1536. 황사우(黃士祐)로 표기된 곳도 있다. 자는 국보(國輔)이고 호는 용헌(慵軒)이며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514년(중종9) 별시에 갑과(甲科) 2위로 급제하여 대사간, 도승지, 부제학, 형조 참판, 호조 판서, 이조 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황윤규(黃潤奎), 황응규(黃應奎), 황서규(黃瑞奎)이다.

71)기대항(奇大恒):1519〜1564. 자는 가구(可久)이다. 1546년(명종1) 식년시에 을과(乙科) 4위로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이조 참판,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기자헌(奇自獻)의 할아버지이다.

72)기준(奇遵):1492〜1521. 자는 자경(子敬)이고 호는 복재(服齋)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4년(중종9) 별시에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하여 수찬, 장령,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 때에 귀양을 갔다가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

73)홍춘수(洪春壽):한국문집총간 39집에 수록된 약포집(藥圃集) 약포선생연보(藥圃先生年譜)에 의하면, 1594년(선조27)에 선조가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각자 인재를 천거하라는 명을 내리자 약포 정탁(鄭琢)도 그 명단을 적어 올렸는데, 홍춘수를 문장이 탁월하고 사명(辭命)에 유능한 인물이라 하여 천거하였으며, 한국문집총간 63집에 수록된 어우집(於于集) 권5 여윤진사빈서(與尹進士彬書)에 “지금 홍춘수라는 사람은 박학(博學)하고 문장을 잘하는 선비인데, 사기(史記)를 수백 번을 읽고 백이전(伯夷傳)은 수만 번을 읽었는데도 아득히 그 맥락을 터득하지 못하여 일찍이 후회를 한 적이 있다.” 하였다. 홍춘수는 그 행적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선조 때에 문장으로 이름이 났던 인물인 듯하다.

74)태사공(太史公)의 글:태사공은 사마천(司馬遷)을 말하고 그의 글은 사기를 가리킨다.

75)압도(鴨島):고양(高陽) 남쪽 강(江) 안에 있는 섬이다. 선공감(繕工監)이 갈대를 채취하던 곳이었다. 世宗實錄 地理誌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1 高陽郡

76)임숙영(任叔英):1576〜1623. 자는 무숙(茂叔)이고 호는 소암(疎菴), 해동산인(海東散人)이며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1601년(선조34)에 진사가 되었고, 1611년(광해군3) 별시에 병과(丙科) 7위로 급제하였다. 별시 전시(殿試)에서 대책(對策) 응제문(應製文)에 척신(戚臣)을 비판하는 과격한 내용을 담아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방목(榜目)에서 삭과(削科)되었다가 나중에 회복되었다. 승문원 박사, 봉상시 직장, 홍문관 박사, 수찬,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澤堂集 卷6 司憲府持平疎菴任君墓誌銘, 韓國文集叢刊 88

77)유사신(柳思新):1526〜? 자는 중화(仲華)이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1555년(명종10) 식년시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1556년 알성시에 병과(丙科) 3위로 급제하였다. 호조 정랑을 거쳤다. 國朝文科榜目

78)송하(宋賀):1524〜? 자는 경숙(慶叔)이다. 1546년(명종1) 식년시에서 생원(生員) 12위, 진사(進士) 341위로 합격하였고, 1549년 식년시에 병과(丙科) 10위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문학, 홍문관 교리, 사간원 사간, 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國朝文科榜目

79)성장해서는……올랐다:용주(龍洲) 조경(趙絅)은 1626년(인조4)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인조, 효종, 현종 때에 벼슬살이를 하여 대사간, 대제학, 이조 판서,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665년(현종6)에 나이 여든이 된 원로라 하여 숭록대부에 올랐다. 記言 卷40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趙龍洲諡狀, 韓國文集叢刊 98輯

80)김찬(金瓚):1543〜1599. 자는 숙진(叔珍)이고 호는 눌암(訥菴)이다. 1567년(명종22)에 진사가 되었고 같은 해 식년시에 을과(乙科) 5위로 급제하였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청현직을 두루 거쳐, 대사헌, 부제학, 예조 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5녀 1남을 두었는데, 사위는 송석조(宋碩祚), 홍여익(洪汝翼), 심적(沈績), 조경(趙絅), 윤세구(尹世耈)이고 아들은 김홍건(金弘建)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친교가 깊었다. 龍洲遺稿 卷15 吏曹判書訥菴金公墓碣, 韓國文集叢刊 90輯 樊巖集 卷41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訥菴金公諡狀, 韓國文集叢刊 236輯

81)응(應):홍응(洪應:1428〜1492)은 자는 응지(應之)이고 호는 휴휴당(休休堂)이다. 1451년(문종1)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였고, 1466년(세조12)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3등 추충정난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익성군(益城君)에 책봉되었으며, 1471년(성종2)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오르고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형조 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세종과 세조 때에 경서(經書)의 구결(口訣)을 정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燃藜室記述 卷6 成宗朝故事本末 成宗朝相臣, 別集 卷9 官職典故 科擧三登科摠目, 別集 卷14 文藝典故 諺解

82)상(常):홍상(洪常)은 1466년(세조12)에 의빈부 부빈(儀賓府副賓)이 되고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딸 태안군주(泰安郡主)와 혼인하였으며, 1469년(예종1)에 의빈부 승빈(儀賓府承賓) 당양군(唐陽君)에 책봉되었다. 의경세자는 뒤에 덕종(德宗)으로 추증되었고 태안군주는 명숙공주(明淑公主)로 작호가 올랐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성종(成宗), 명숙공주가 덕종의 왕자와 공주이다. 성종은 홍상을 특별히 예우하였다.

83)이천기(李天基):1607〜1670. 자는 재원(載元)이고 호는 허주(虛舟)이다. 1633년(인조1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35년 알성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정언, 지평, 교리, 경주 부윤(慶州府尹), 판결사(判決事), 호조 참의, 여주 목사(驪州牧使),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陶菴集 卷40 觀察使李公墓誌, 韓國文集叢刊 195輯

84)동도공(東都公):강익문(姜翼文)의 장남인 강대수(姜大遂)를 가리킨다.

85)20세에……제수받았다:강대수(姜大遂)는 1610년(광해군2) 식년시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12년 증광시(增廣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

86)이각(李殼):번역 대본에 ‘李’으로 되어 있으나, 한국문집총간 속편 24집에 수록된 한사집(寒沙集) 권7 묘갈명(墓碣銘), 가장(家狀) 등을 근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87)아무:금치담(琴致湛)의 셋째 아들 금재(琴梓:1498〜1550)이다. 금재(琴榟)로 쓰기도 한다. 자는 숙재(叔材)이다. 어머니는 예안 김씨(禮安金氏)인데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딸이다. 금재의 2남 2녀 가운데 장녀가 이준(李寯)과 혼인하였다. 退溪集 卷47 通仕郞行禮安訓導琴公墓誌, 韓國文集叢刊 30輯

88)경리(經理):경리조선군무 도찰원 우첨도어사(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 양호(楊鎬)이다.

89)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1478〜1548. 자는 중허(仲虛)이고 호는 충재(冲齋), 송정(松亭)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496년(연산군2)에 진사가 되었고 1507년(중종2) 증광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도승지, 예문관 직제학, 경상도 관찰사, 형조 참판, 우찬성, 예조 판서,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행장을 지었다. 冲齋集 卷8 權公行狀, 權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9輯

90)문간공(文簡公) 상경(尙敬):한상경(韓尙敬:1360〜1423)이다. 자는 숙경(叔敬)이고 호는 신재(信齋)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고려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의 좌랑(禮義佐郞), 우정언(右正言), 종부 영(宗簿令), 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 등을 역임하였다. 태조 때에 개국(開國)을 보필한 공로로 개국 공신이 되었으며, 중추원 도승지(中樞院都承旨),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 충청도 관찰사, 경기좌도 관찰사, 공조 판서, 사헌부 대사헌,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책봉되었다. 世宗實錄 西原府院君韓尙敬卒記

91)정사현(鄭思顯):1509〜1564. 자는 백미(伯微)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 수업(受業)하였으며, 진우(陳宇), 김희년(金禧年), 장임중(張任重), 유경인(柳敬仁) 등과 교유하였다. 명종 때에 예문관 봉교, 병조 정랑, 예조 정랑,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은 정길(鄭吉), 정곡(鄭谷), 정약(鄭若)이고 사위는 조수준(趙守準), 민덕봉(閔德鳳)이다. 記言 別集 卷25 司憲府持平鄭公墓陰記, 韓國文集叢刊 99輯

92)봉성군(鳳城君)……사람이다:봉성군은 중종의 여섯째 아들이다. 어머니 희빈(熙嬪) 홍씨(洪氏)는 홍경주(洪景舟)의 딸이다. 1545년에 인종이 죽고 명종이 12세로 즉위하자 모후(母后)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이 인종의 외가 세력인 윤임(尹任) 등을 역모(逆謀)로 몰아 죽였다. 이때에 명종을 대체할 군주로 봉성군이 추대 대상이 되었다 하여, 귀양을 보냈다가 1547년에 사사(賜死)하였다.

93)의인왕후(懿仁王后)의 어머니:종실 문천정(文川正) 이수갑(李壽甲)의 따님이다. 이수갑의 딸 가운데 한 사람은 박응순(朴應順)에게 시집가서 의인왕후를 낳았고, 또 한 사람은 강응운(姜應運)에게 시집가서 강수곤(姜秀崑)을 낳았다. 강수곤이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자 의인왕후의 어머니가 데려다 장성할 때까지 길렀다. 寒水齋集 卷34 僉正贈參判姜公秀崑行狀, 韓國文集叢刊 151輯

94)아무:강선여(姜善餘:1574〜1647)이다. 자는 적이(積而)이다. 1610년(광해군2) 식년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병조 정랑, 영천 군수(榮川郡守) 등을 역임하고, 1627년(인조5)에 명나라 희종(熹宗)이 죽자 이듬해 봄에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진향사(進香使)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여 그 공로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고, 3대가 벼슬이 추증되었다. 그 뒤 동지돈녕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宋子大全 卷166 同知敦寧府事姜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13輯 南溪集 卷77 敦寧府僉正贈吏曹參判姜公墓誌銘, 韓國文集叢刊 141輯

95)침(琛):허침(許琛:1444〜1505)은 자는 헌지(獻之)이고 호는 이헌(頤軒)이다. 1462년(세조8)에 진사가 되었고 1475년(성종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승지,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동지중추부사, 경상도 관찰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하고 좌의정에 올랐다. 1494년에는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신종호(申從濩), 권건(權健), 조위(曺偉), 유호인(兪好仁), 김흔(金訢) 등과 교유하였으며, 형 허종(許琮)과 더불어 명재상으로 일컬어졌다. 慕齋集 卷14 許文貞公行狀, 韓國文集叢刊 20 燕山君日記 許琛卒記

96)굉(硡):허굉(許硡:1471〜1529)은 자는 굉지(硡之)이고 호는 징와(澄窩)이다. 1492년(성종23) 사마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503년(연산군9)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 때에 삼사(三司)의 청현직을 두루 거쳐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평안도 관찰사, 경기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예조 판서, 이조 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중종13)에는 진위사(陳慰使)로 북경을 다녀오면서 역대통감찬요(歷代通鑑纂要)를 사왔으며, 1528년에는 평안도 순변사(平安道巡邊使)가 되어 야인(野人)을 정벌하였다. 燃藜室記述 卷9 中宗朝故事本末 中宗朝名臣 國朝文科榜目 中宗實錄 許硡卒記

97)진산군(晉山君) 희맹(希孟):강희맹(姜希孟:1424〜1483)은 자는 경순(景醇)이고 호는 사숙재(私淑齋), 국오(菊塢), 운송거사(雲松居士), 무위자(無爲子), 만송강(萬松岡) 등이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1441년(세종2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447년(세종29)에 별시 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조 참의, 공조 참판, 예조 판서, 형조 판서를 거쳤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南怡)의 옥사가 처리되자 익대 공신(翊戴功臣)이 되고 진산군에 봉해졌다. 그 뒤에 판중추부사, 이조 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은 강귀손(姜龜孫)과 강학손(姜鶴孫)이고 사위는 성세명(成世明), 김성동(金誠童), 신렴(申濂) 등이다. 私淑齋集 卷11 私淑齋先生文良姜公行狀, 韓國文集叢刊 12

98)죽취일(竹醉日):음력 513일이다. 이날에 대나무를 옮겨 심으면 대나무가 잘 자란다고 한다.

99)중업(仲業):번역 대본에 결자(缺字)이나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을 참고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100)유후(裕後):강유후(姜裕後:1606〜1666)는 자는 여수(汝垂)이고 호는 옥계(玉溪)이다. 1649년(인조27)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 세자시강원 사서, 경기 도사 등을 거쳐 1656년(효종7)에 청주 목사가 되었으며, 다시 사헌부 지평, 정주 목사(定州牧使), 강계 부사(江界府使), 의주 부윤(義州府尹) 등을 역임하였고, 가선대부에 올라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고서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宋子大全 卷168 黃海監司姜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13輯

101)25세에……드러났다:1552년(명종7) 식년시에서 생원은 1등 2위로, 진사는 3등 19위로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司馬榜目

102)의리가 끊어졌다:성(姓)이 다른 두 집안이 혼인으로 인하여 인척 관계가 이루어지는데, 자녀를 출산하지 못하고 부인이 사망하거나 특별한 까닭이 있어서 부부가 헤어지는 경우에는 두 집안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없기 때문에 인척 관계가 끊어진다. 이것을 의절(義絶)이라고 한다.

103)중인이……급제하였으며:장중인(張仲仁)은 1624년(인조2) 갑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35년 을해년 증광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

104)금상 2년:이글이 쓰일 당시 장중인은 해주 목사(海州牧使)의 직임을 맡고 있다고 하였는데, 장중인의 해주 목사 제배는 효종 3년의 일이다. 承政院日記 孝宗 3年 7月 8日

105)심상(心喪):스승의 초상에 대해 제자가 행하는 상례(喪禮)이다. 상복은 입지 않고 마음으로 슬퍼하고 근신한다.

106)만력(萬曆) 말년:만력은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만력 말년에 명나라의 세력이 약화되고 청나라가 세워졌다.

107)병자년의 패배:1636년(인조14)에 청나라가 침입하여 일으킨 병자호란 때의 패배를 말한다.

108)공씨전(孔氏傳):한(漢)나라 때에 공안국(孔安國)이 58편으로 정리하여 전서(傳序)를 붙인 상서(尙書)고문상서(古文尙書)라고 하는데, 이는 공벽(孔壁)에서 나온 것으로서 원래는 과두문자(蝌蚪文字)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 과두문자를 고쳐 금문(今文)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서경(書經)이다. 공씨전이라 함은 이 서경을 말한다. 五洲衍文長箋散稿 十三經注疏及諸家經解五經四書大全辨證說

109)약룡은……되었다: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이약룡(李若龍)은 1652년(효종3) 증광시(增廣試)에서 생원 3등 33위로 합격하였다.

110)채무일(蔡無逸):1496〜1546. 자는 거경(居敬)이고 호는 일계(逸溪)이며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지중추부사 채수(蔡壽)의 손자이다. 1522년(중종17) 사마시에서 생원 1등을 하였고, 1540년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 1위로 급제하였다. 금화사 별좌(禁火使別坐), 주서(注書), 정언, 예조 좌랑, 부안 현감(扶安縣監), 헌납 등을 역임했다. 그림을 잘 그렸다. 國朝人物考

111)익창(益昌):김익창(金益昌:1614〜?)은 자는 익지(益之)이다. 1652년(효종3) 증광시에서 갑과 3위로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

112)중종……되었다:국조문과방목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정사현(鄭思顯)은 1543년(중종38) 식년시에서 생원 2등 13위로 합격하였고, 1549년(명종4) 식년시 문과(文科)에 병과 12위로 급제하였다.

113)영인(令人):4품 문무관(文武官) 아내의 봉작(封爵)이다.

114)정화옹주(貞和翁主):선조(宣祖)의 열째 딸이다.

115)덕수 이씨(德水李氏)이니……누이이다:감찰(監察) 이원수(李元秀)가 아들 넷과 딸 셋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이고 넷째 아들이 옥산(玉山) 이우(李瑀)이며 큰딸이 조대남(趙大男)에게 시집갔다. 宋子大全 卷193 監察贈左贊成李公墓表, 韓國文集叢刊 114輯

116)석전(石田) 성 상사(成上舍):성로(成輅:1550〜1615)를 가리킨다. 자는 중임(重任)이고 호는 잠암(潛巖), 삼일당(三一堂), 석전, 평량자(平涼子)이다. 1570년(선조3) 식년시에서 진사(進士)가 되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문인이며 석주(石洲) 권필(權韠)과 절친했다. 정철과 권필의 불행을 보고는 세상일에 뜻을 끊고 술을 즐기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마쳤다. 아들은 없고 딸 둘을 두었는데 큰딸은 조영(趙嶸)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정철의 손자인 정운(鄭沄)에게 시집갔다. 白軒集 卷35 處士成公行狀, 韓國文集叢刊 96輯

117)김주(金輳):1564〜1636. 자는 지원(志遠)이고 호는 운암(雲巖)이다. 대대로 성주(星州)에서 살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38) 증광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624년(인조2)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조 좌랑, 무안 현감(務安縣監) 등을 역임하였으며, 성로, 권필 등과 절친했다. 國朝文科榜目 谿谷集 卷12 故禮曹正郞金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92輯

118)이정귀(李廷龜):1564〜1635. 자는 성징(聖徵)이고 호는 월사(月沙), 추애(秋崖), 습정(習靜), 치암(癡菴), 보만정주인(保晩亭主人) 등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85년(선조18) 식년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590년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호조 판서, 양관 대제학, 우참찬, 동지중추부사, 이조 판서, 병조 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3輯, 月沙集, 민족문화추진회

119)성화(成化) 연간:성화는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1465년(세조11)에서 1487년(성종18)까지이다.

120)대령(大嶺):큰 고개라는 일반명사인데, 여기서는 새재[鳥嶺]를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121)삼명(三命)에……굽힘이네:춘추좌씨전 소공(昭公) 7년 9월 기사를 보면, 공자(孔子)의 선조인 송나라 정고보(正考父)는 상경(上卿)이었으나 태도가 매우 공손하였다고 한다. 솥을 만들어 명(銘)을 새겼는데, 그 명에 “일명(一命)에는 고개를 숙이고 이명(二命)에는 등을 구부리고 삼명(三命)에는 몸을 구부리어, 길을 갈 때에 담장에 바짝 붙어서 빠르게 걸으면 감히 나를 업신여기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 솥에 된 죽도 끓이고 묽은 죽도 끓여서 입에 풀칠을 하며 살리라.” 하였다. 일명은 대부, 이명은 하경(下卿), 삼명은 상경을 말한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였다는 뜻이다.

122)21세에 상상(上庠)에 올랐다:상상은 국가 설치 대학을 가리키며, 상상에 올랐음은 사마시에 합격하였음을 뜻한다. 박광옥(朴光玉)은 1546년(명종1) 식년시에서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司馬榜目

123)음식이나 밝히는 사람: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음식을 밝히는 자는 사람들이 천박하게 여긴다. 작은 것[口腹]을 기르느라 큰 것[心志]을 잃기 때문이다.” 하였다.

124)3세:이 묘표의 앞부분에 “4세조부터 광주에 살았다.”고 하였으니, 오류이거나 아니면 ‘4세조’를 제외한 대수(代數)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125)청송처사(聽松處士) 성수침(成守琛):1493〜1564. 자는 중옥(仲玉)이고 호는 청송, 죽우당(竹雨堂), 파산청은(坡山淸隱), 우계한민(牛溪閒民) 등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우 성수종(成守琮)과 함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기묘사화 이후에 세상에 뜻을 끊고 은둔하였다. 1541년(중종36)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552년(명종7)에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 예산 현감(禮山縣監), 토산 현감(免山縣監), 적성 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뒤에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민사도(閔思道)이고 아들은 성혼(成渾)이다. 聽松集 卷2 行狀, 韓國文集叢刊 26輯 高峯集 卷3 坡山成先生墓誌銘, 韓國文集叢刊 40輯 大東野乘 己卯錄補遺 卷下 成守琛傳

126)남선(南銑):1582〜1654. 자는 택지(澤之)이고 호는 회곡(晦谷), 대몽(大夢)이며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아버지는 무주 현감 남복시(南復始)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김명원(金命元)의 딸이다. 1606년(선조39) 증광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629년(인조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산 현감(高山縣監), 사헌부 지평, 안악 군수(安岳郡守),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거쳐 황해도, 평안도, 전라도, 강원도, 경기의 관찰사와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형조 판서, 예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潛谷遺稿 卷13 吏曹判書南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86輯 國朝文科榜目

127)노파(蘆坡) 이 상사(李上舍):이흘(李屹:1557〜1627)이다. 자는 산립(山立)이고 호는 노파거사(蘆坡居士), 삼산초은(三山樵隱)이다. 澗松集 卷5 喜靜堂行狀, 韓國文集叢刊 89輯 桐溪集 卷4 洗馬李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75輯

128)구암(龜巖) 이 선생(李先生):이정(李楨:1512〜1571)이다. 자는 강이(剛而)이고 구암은 호이다.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에게 배웠다. 청주 목사, 좌승지, 대사간, 경주 부윤, 호조 참의, 순천 부사(順川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뒤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구암정사(龜巖精舍)를 지어 동쪽에 거경재(居敬齋), 서쪽에 명의재(明義齋)를 두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龜巖集 卷2 行狀, 韓國文集叢刊 33輯

129)숭정(崇禎) 연간:숭정은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1628년(인조6)부터 1644년(인조22)까지이다.

130)만력(萬曆) 연간: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1573년(선조6)에서 1619년(광해군11)까지이다.

131)사심(師心) 이영언(李英彦):이정호(李挺豪:1578〜1639)이다. 자는 영언이고 호는 사심, 만각(晩覺)이다.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와 덕신정(德信正) 이난수(李鸞壽)에게 배웠다.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세상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인조반정 이후에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공조 좌랑, 황간 현감(黃澗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記言 別集 卷21 晩覺李先生墓銘, 韓國文集叢刊 99輯

132)세자가……한다: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자 명종이 왕족들 가운데에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을 간택하여 세자로 삼았다. 하성군이 선조가 된다.

133)매서(梅墅) 강 학유(姜學諭):강종경(姜宗慶:1543〜1580)이다. 강극성(姜克成)의 아들이며, 자는 중업(仲業)이고 호가 매서이다. 1572년(선조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그 뒤 성균관 학유가 되었으나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 성혼(成渾)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의복(醫卜), 역학(易學) 등에 밝았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國朝人物考

134)그대는……타고났다:번역 대본에 ‘不得其淸’으로 되어 있으나, 한국문집총간 43집에 수록된 우계집(牛溪集) 권6 제강생문(祭姜生文)에 근거하여 ‘不’을 ‘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35)우계가……하였다:우계집 권6 제강생문에 그 전문(全文)이 나온다.

136)정빈(靜嬪) 민씨(閔氏):1567〜1626. 아버지는 강화 도호부사 민사준(閔士俊)이고 어머니는 맹사성(孟思誠)의 6세손인 맹씨 부인이다. 선조와의 사이에 왕자 둘과 옹주 셋을 낳았는데, 왕자는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과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이며, 옹주는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에게 시집간 정인옹주(貞仁翁主), 길성군(吉城君) 권대임(權大任)에게 시집간 정선옹주(貞善翁主),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鑌)에게 시집간 정근옹주(貞謹翁主)이다. 記言 卷19 靜嬪閔氏墓誌, 韓國文集叢刊 98輯

137)장왕자(長王子):선조와 정빈 민씨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 가운데 큰아들인 인성군 이공(李珙)을 말한다. 유효립(柳孝立)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진도(珍島)에 귀양 가 지내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138)권제(權制):정해진 제도가 아닌 상황에 맞게 변통한 제도를 말한다.

139)복사(服舍):초상이 났을 때에 매장하기 전까지 상주가 거처하는 임시 막사를 말한다.

140)예에……하였다:예기 제의(祭義)에 내용이 보인다. 부모가 돌아가신 날인 기일(忌日)이 해마다 돌아오는데 이때에는 마치 초상(初喪) 때처럼 애통해하므로 슬픔이 종신토록 간다는 뜻이다.

141)상이 문병하면……삼갔다:논어 향당(鄕黨)에 “병이 있을 때에 임금이 문병을 오면 머리를 동쪽으로 두시고 조복(朝服)을 몸에 얹고 띠를 걸쳐놓으셨다.” 하였다. 조복을 얹는다는 말은, 병든 몸을 일으킬 수 없어서 조복을 입지 못하므로 누운 채로 조복을 몸 위에 얹어 마치 조복을 입은 것처럼 시늉을 하여 예의를 갖춘다는 뜻이며, 북향을 한다는 말은, 임금이 남향을 할 수 있도록 자기의 자리를 옮겨 북쪽을 향한다는 뜻이다.

142)하간(河間)의 피복(被服):하간은 한(漢)나라 때의 하간 헌왕(河間獻王) 유덕(劉德)을 말한다. 유덕은 유학(儒學)을 좋아하고 책 모으기를 좋아하여 백성들로부터 책을 받으면 사본(寫本)을 잘 만들어서 돌려주었으므로 많은 백성들이 유덕에게 책을 갖다 바쳤다. 이렇게 하여 선진(先秦)의 고서(古書)를 많이 모았다. 피복은 항상 유자(儒者)로서 유술(儒術)을 실천하면서 지냈다는 뜻이다. 漢書 卷53 景十三王傳 河間獻王劉德

143)동평(東平)의 낙선(樂善):동평은 한나라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아들인 동평 헌왕(東平憲王) 유창(劉蒼)을 말한다. 한나라 명제(明帝)가 동평왕에게 묻기를 “집에 있을 때에 무엇으로 즐기느냐?”라고 하니, 동평왕이 대답하기를 “선행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42 光武十王列傳 東平憲王蒼

144)강맹경(姜孟卿):1410〜1461. 자는 자장(子章)이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1429년(세종11)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 의정부 사인, 사헌부 집의 등을 거쳐 1452년(문종2)에 도승지에 올랐다. 세조의 왕위 계승을 도운 공로로 좌익 공신(佐翼功臣)이 되었고, 1459년(세조5)에 영의정이 되었다. 世祖實錄 領議政姜孟卿卒記 私淑齋集 卷7 議政府領議政晉山府院君文景姜公墓碑銘, 韓國文集叢刊 12輯

145)규암(圭菴) 송 학사(宋學士):송인수(宋麟壽:1499〜1547)이다. 자는 미수(眉叟)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21년(중종16)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응교 등을 거쳤다. 1534년에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아 경상도 사천(泗川)에 유배되었다가 1537년에 석방되어 돌아와 병조 참판, 대사성,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47년(명종2)에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1輯, 圭菴集, 민족문화추진회 明宗實錄 宋麟壽卒記

146)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이황(李滉:1501〜1570)이다.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퇴계(退溪), 도산(陶山)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退溪集, 민족문화추진회

147)이 선생(李先生)과……담당하니:퇴계 이황은 1552년(명종7)과 1553년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退溪集, 민족문화추진회

148)이듬해에……올렸다:명종실록에 의하면, 1553년(명종8) 10월 23일에 명종이 청홍도 관찰사(淸洪道觀察使) 이몽량(李夢亮)의 아룀을 인하여, 선정(善政)을 베푼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정(李楨), 홍주 목사(洪州牧使) 임윤(任尹) 등 청홍도 지방관들에게 향표리(鄕表裏) 1습(襲)씩을 하사하여 포상하였으며, 1554년 9월에는 “청주 목사 이정(李楨)은 효행이 특이하고 또 두 대왕의 국상(國喪)에 심상(心喪) 삼년을 행했다고 하니 가자(加資)하도록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한국문집총간 33집에 수록된 구암집(龜巖集) 권2 행장(行狀)에 의하면, 당시에 사천(泗川) 수령 이광진(李光軫)이 이정의 효행이 특별하다고 아뢰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하였다고 하였다.

149)한훤(寒暄) 김 선생(金先生):김굉필(金宏弼:1454〜1504)이다. 자는 대유(大猷)이고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한훤당(寒暄堂)은 그의 호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소학(小學)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림에 모두 예법을 따랐다. 1494년(성종25)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주부(主簿)로 발탁되었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에 점필재의 문인이라 하여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고 얼마 뒤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에 처형되었다. 高峯集 卷2 景賢堂記, 韓國文集叢刊 40輯

150)정두(鄭斗)가……하였다:이는 문세(文勢)로 보아 정두가 지은 행장(行狀)의 내용에서 인용한 것인 듯한데, 한국문집총간 33집에 수록된 구암집2 행장과 문맥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151)비록……없었다: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 직신(直臣) 급암(汲黯)에 대해 무제가 묻기를 “급암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엄조(嚴助)가 대답하기를 “급암에게 직무를 주어 벼슬을 시킨다면 보통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없겠지만, 어린 군주를 보필하고 전대에 이룬 왕업을 지켜나가는 일은 비록 스스로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이라 자처하는 자들일지라도 급암의 지조를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맹분과 하육은 중국 고대의 이름난 용사(勇士)이다. 漢書 卷50 汲黯傳

152)갈천(葛川) 선생:임훈(林薰:1500〜1584)이다. 자는 중성(仲成)이고 호는 갈천, 자이당(自怡堂), 고사옹(枯査翁) 등이며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韓國文集叢刊解題 1輯, 葛川集, 민족문화추진회

153)박순(朴淳):1523〜1589.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사암(思菴), 청하자(靑霞子)이며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40년(중종35)에 진사가 되었으며, 1553년(명종8) 계축년 친시(親試)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조 좌랑,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대제학, 한성부 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고 1579년(선조12)에 영의정이 되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思菴集, 민족문화추진회

154)용문(龍門)의 문헌공(文獻公)의 사당:용문서원(龍門書院)을 말한다. 문헌공 정여창(鄭汝昌)을 모신 서원으로, 경상도 안음현(安陰縣)에 있었다.

155)사가독서:1608년(광해군 즉위년) 11월 6일에 이조와 예조와 대제학이 의논하여 사가서당(賜暇書堂)할 12인을 뽑아 아뢰었는데, 이이첨(李爾瞻), 홍서봉(洪瑞鳳), 이지완(李志完), 김상헌(金尙憲), 이민성(李民宬), 유숙(柳潚), 김치(金緻), 정광성(鄭廣成), 조희일(趙希逸), 이후(李厚), 이구(李久), 목대흠(睦大欽)이었다. 光海君日記 卽位年 11月 6日

156)동지(冬至)를……갔다:1616년(광해군8) 8월 15일에, 동지사(冬至使) 상사(上使) 권경우(權慶祐), 부사(副使) 목대흠(睦大欽), 서장관 정홍원(鄭弘遠)이 북경으로 출발했다. 光海君日記 8年 8月 15日

157)어머니의……것이다:양자법언(揚子法言 지효편(至孝篇)에 “오래오래 함께할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다. 효자는 날을 아낀다.” 하였다. ‘날을 아낀다[愛日]’는 말은 시간의 흐름을 안타까워한다는 뜻이다. 주경(駐景)은 빛을 잡아둔다는 말이니, 시간의 흐름을 중지시켜 어머니의 늙음을 막는다는 뜻이다.

158)백씨(伯氏)와 중씨(仲氏):목서흠(睦敍欽)과 목장흠(睦長欽)이다.

159)윤이지(尹履之):1579〜1668. 자는 중소(仲素)이고 호는 추봉(秋峯)이며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손자이고, 영의정 윤방(尹昉)의 아들이다. 1616년(광해군8) 증광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충청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강원도 관찰사, 호조 참판, 경기 관찰사,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松谷集 卷10 海恩君尹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19輯

160)이명(李溟):1570〜1648.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연(子淵)이며 호는 구촌(龜村)이다. 1591년(선조24) 식년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606년(선조39)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이조 정랑, 홍문관 응교, 우부승지, 전라도 관찰사, 경기 관찰사, 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國朝人物考

161)황제가……적에:1506년(연산군12) 3월에 명나라 무종(武宗)의 등극(登極) 조칙(詔勅)을 반포하기 위해 한림 시독(翰林侍讀) 서목(徐穆)과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 길시(吉時)가 사신으로 나왔다. 燕山君日記 12年 3月 10日

162)공의 아우: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을 말한다.

163)방석(芳碩)의……옛일:방석은 조선 태조의 여덟째 왕자이다.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방원(芳遠)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1406년(태종6)에 소도(昭悼)라는 시호를 내렸고, 1437년(세종19)에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를 후사로 정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164)지형을……있다:경상도 비안현(庇安縣)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주선하여 만든 저수지가 있었는데, 이를 상공제(相公堤)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안국제(安國堤)라고 고쳤다고 한다. 慕齋集 卷15 附錄 慕齋先生行狀, 韓國文集叢刊 20輯

165)허자(許磁):1496〜1551. 자는 남중(南仲)이고 호는 동애(東崖)이다. 1523년(중종18) 알성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이조 정랑,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호조 판서, 좌찬성,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허목의 증조부이다. 記言 卷41 贊成公墓碑, 韓國文集叢刊 98輯

166)윤개(尹漑):1494〜1566.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여옥(汝沃)이며 호는 회재(晦齋)이다. 1516년(중종11) 식년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예조 판서, 이조 판서, 한성부 좌윤,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한어(漢語)를 잘하였다. 大東野乘 己卯錄補遺 卷上 尹漑傳 明宗實錄 鈴平府院君尹漑卒記

167)사마공(司馬公)은……하였고:사마공은 사마광(司馬光)을 말한다. 자는 군실(君實)이며, 태사 온국공(太師溫國公)을 증직받았으므로 사마 온공(司馬溫公)이라 불린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이다. 사마광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없지만 다만 평생에 한 일이 남을 대하여 말 못할 일이 없을 뿐이다.” 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168)매일……있었으니:송나라의 조변(趙抃)은 날마다 하루에 한 일을 밤이 되면 의관을 갖추고 향을 피운 후 하늘에 고했으며, 하늘에 고할 수 없는 일은 감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316 趙抃列傳

169)육경여(陸敬輿):당나라 때의 명신 육지(陸贄)이다. 경여는 그의 자(字)이다. 시호는 선공(宣公)이다. 시폐(時弊)를 논한 그의 주의(奏議)들은 명문장으로서 우리나라에서도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가 많이 읽혔다.

170)여회숙(呂晦叔):송나라 때의 명신 여공저(呂公著)이다. 회숙은 그의 자이다.

171)채계통(蔡季通):송나라 학자 채원정(蔡元定)이다. 계통은 그의 자이다. 서경집전(書經集典)을 지은 채침(蔡沈)의 아버지이다.

172)임열(任說):1510〜1591.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자는 군우(君遇)이고 호는 죽애(竹崖), 죽계(竹溪)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531년(중종26)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1533년 별시(別試)에 병과로, 1536년 중시(重試)에 을과로, 1538년 탁영시(擢英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과거에 세 번 급제하였다. 직제학, 대사간,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글을 보는 안목이 높고 고시(考試)에 남다른 특장이 있어서 그가 발탁한 사람은 모두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國朝文科榜目 宣祖實錄 知中樞府事任說卒記

173)권용중(權用中):1536〜? 자는 중정(仲正)이다. 1568년(선조1) 증광시(增廣試)에서 진사가 되었다. 선조 때에 내자시 정(內資寺正), 사복시 정(司僕寺正) 등에 제수되었다. 권이중(權以中)의 아우이다.

174)장언침(張彦忱):1549〜? 자는 사부(士孚)이고 호는 모은(暮隱)이다. 1588년(선조21) 식년시에서 을과로 급제하였고 해주 판관(海州判官),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회양 부사(淮陽府使) 등을 역임했다. 역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175)덕신정(德信正):세조의 왕자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의 증손으로, 이름은 이난수(李鸞壽)이고 자는 문수(文叟)이며 호는 서곡(西谷)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문장과 학문을 좋아하였다. 박주(朴洲)에게서 글을 배웠다. 예를 좋아하여 가례(家禮)의 일부를 언해(諺解)하였다. 順菴集 卷13 橡軒隨筆, 韓國文集叢刊 230輯

176)대학(大學)의 전(傳)을 강하고:원문은 ‘傳’인데, 기언 권44 관설 선생 묘지명과 권46 설공 편년기사 등에 근거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177)이소재(履素齋):이중호(李仲虎:1512〜1554)이다. 자는 풍후(風后)이며, 이소재는 그의 호이다. 종실 고양부정(高陽副正) 이억손(李億孫)의 서자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인 유우(柳耦)에게 배웠다. 그의 문하생이 수백 명이었는데 소학을 학문의 기초로 삼아 가르쳤다고 한다. 明宗實錄 司果李仲虎卒記

178)사심(師心) 이정호(李挺豪):1578〜1639. 자는 영언(英彦)이고 호는 사심, 만각(晩覺)이다. 고려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6세손이다. 광해군 때에는 장단(長湍)의 적운(積雲)에 은거해 살다가 인조반정 이후에 공조 좌랑, 황간 현감(黃澗縣監) 등을 역임했다. 허후와 함께 덕신정(德信正)에게 대학을 배웠다. 記言 別集 卷21 晩覺李先生墓銘, 韓國文集叢刊 99輯81쪽 주 27) 참조.

179)용주(龍洲) 조경(趙絅):1586〜1669. 자는 일장(日章)이고 호는 용주, 주봉(柱峯), 간옹(鬝翁)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12년(광해군4) 식년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626년(인조4) 정시(庭試)에서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조 정랑, 대사간, 대제학, 이조 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거쳤다. 韓國文集叢刊解題 3輯, 龍洲遺稿, 민족문화추진회

180)심대부(沈大孚):1586〜1657.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신숙(信叔)이며 호는 범재(泛齋)이다. 1613년(광해군5) 증광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633년(인조11) 증광시에서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 송화 현감(松禾縣監), 이조 정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記言 別集 卷21 泛齋沈公墓碣銘

181)강학년(姜鶴年):1585〜1647. 자는 자구(子久)이고 호는 복천(復泉), 자운(紫雲)이며, 본관이 진양(晉陽)이다. 대사헌 강첨(姜籤)의 아들이며 부제학 신담(申湛)의 외손이다. 1609년(광해군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진천 현감(鎭川縣監), 신녕 현감(新寧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記言 別集 卷22 復泉姜公墓銘

182)이명웅(李命雄):1590〜1642. 자는 정이(挺而)이고 호는 송사(松沙)이다. 1626년(인조4)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수찬, 이조 정랑, 지평, 대사간,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 홍주 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記言 別集 卷20 李觀察碑銘

183)신익량 군보(申翊亮君輔):1590〜1650. 신익량은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가 군보이며 호는 상봉(象峯)이다. 1612년(광해군4) 식년시에 진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원주(原州)에서 10년 동안 독서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동궁을 호종하여 전주(全州)에 갔었고, 얼마 뒤에 거창 현감(居昌縣監), 태인 현감(泰仁縣監)을 거쳤다. 1635년(인조13)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진주 목사(晉州牧使), 청주 목사(淸州牧使), 밀양 부사(密陽府使), 덕원 부사(德源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陶菴集 卷48 觀察使申公行狀, 韓國文集叢刊 195輯

184)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이다.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가 한강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소학사서언해교정청(小學四書諺解校正廳) 낭청(郞廳), 함안 군수(咸安郡守), 강릉 부사(江陵府使), 강원도 관찰사, 경서언해교정청(經書諺解校正廳) 당상(堂上) 등을 역임하였다. 심경발휘(心經發揮),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등의 저술이 있다. 光海君日記 前大司憲鄭逑卒記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寒岡集, 민족문화추진회

185)우곡(愚谷):정경세(鄭經世:1563〜1633)이다. 자는 경임(景任)이고 호가 우복(愚伏)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형조 판서, 이조 판서, 양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愚伏集, 민족문화추진회

186)지난해에……설치하였다:1646년(인조24)에 공청도(公淸道) 공주목(公州牧)을 강등하여 공산현(公山縣)으로 삼고, 이산(尼山), 연산(連山), 은진(恩津)을 혁파하여 한 개 현(縣)으로 통합하여 은산현(恩山縣)이라고 하고, 공청도를 홍청도(洪淸道)로 바꾸었다. 仁祖實錄 24年 5月 1日

187)두려워하지……않았으며:논어 자한(子罕)에 “지자(知者)는 의혹하지 않고 인자(仁者)는 근심하지 않고 용자(勇者)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였다.

188)서경에……하였다:서경 순전(舜典)에, 순(舜) 임금이 백이(伯夷)에게 말하기를, “그래, 백이야! 너를 질종(秩宗)으로 삼노니 밤낮 경건한 자세로 곧게 하면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하였다.

189)한결같이:번역 대본에 글자가 결락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一’ 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190)장묘(章廟):인조의 아버지이다. 인조반정 이후에 대원군(大院君)이 되었다가 1627년(인조5)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다. 그 능(陵)이 김포에 있다.

191)죽림서원(竹林書院):여산(礪山)에 있다.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성혼(成渾), 송시열(宋時烈)을 향사(享祀)하였다.

192)동방선행수문(東方善行謏聞):한국문집총간 84집에 수록된 황종해의 문집인 후천집(朽淺集) 권8에는 동방명인사적수문대략(東方名人事跡謏聞大略)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193)목악고사(木嶽古事):후천집 권8에는 목현사적(本縣事蹟)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194)있어도……않는다:논어 태백(泰伯)에 나온다.

195)남명(南冥):조식(曺植:1501〜1572)이다. 자는 건중(楗仲)이고 호는 남명, 산해(山海),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등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정에서 누차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지리산의 덕천동(德川洞)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더욱 강학(講學)에 힘썼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南冥集, 민족문화추진회

196)덕계(德溪):오건(吳健:1521〜1574)이다. 자는 자강(子强)이고 호가 덕계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552년(명종7) 식년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558년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 정랑, 지평, 부응교, 전한, 군기시 정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德溪集, 민족문화추진회

197)임해군(臨海君):선조의 서장자(庶長子)이다. 7쪽 주 5) 참조.

198)강우(江右):낙동강 오른쪽 지역을 말한다. 대개 경상우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99)김범(金範):1512〜1566. 자는 덕용(德容)이고 호는 후계(后溪)이며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1540년(중종35) 진사시에 장원한 뒤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뒤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특별히 옥과 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다. 蒼石集 卷13 后溪傳, 韓國文集叢刊 64輯 沙西集 卷7 后溪金公旌門跋, 韓國文集叢刊 67輯

200)이제신(李濟臣):1536〜1583. 자는 몽응(夢應)이고 호는 청강(淸江)이다. 1558년(명종13)에 생원이 되었고, 156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울산 군수(蔚山郡守), 사간원 정언, 청주 목사(淸州牧使), 사헌부 지평, 사간원 사간, 진주 목사(晉州牧使), 강계 부사(江界府使),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象村稿 卷24 淸江先生墓誌銘, 韓國文集叢刊 72

201)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1499〜1572. 자는 원길(原吉)이고 호는 남당(南堂), 홍련거사(紅蓮居士), 양와(養窩), 동고(東皐)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1522년(중종17)에 생원이 되었고, 1531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한성부 우윤을 거쳐 1543년에 대사성을 하였고 그 뒤 평안도 관찰사, 병조 판서, 대사헌, 이조 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1輯, 東皐遺稿, 민족문화추진회

202)성세창(成世昌):1481〜1548. 자는 번중(蕃仲), 호는 돈재(遯齋),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1501년(연산군7)에 진사가 되었고, 1507년(중종2) 정묘년 증광시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성현(成俔)의 아들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강원도 관찰사,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 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大東野乘 己卯錄補遺 成世昌傳 朝鮮王朝實錄

203)홍인우(洪仁祐):1515〜1554. 자는 응길(應吉)이고 호는 경재(敬齋), 치재(耻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537년(중종3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황(李滉), 박순(朴淳) 등과 교유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耻齋遺稿, 민족문화추진회

204)네 사람이……대답하였는데:자로(子路), 증석(曾晳),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가 공자를 모시고 있을 때에 공자가 각기 자기의 뜻을 말하게 한 내용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205)조목(趙穆):1524〜1606. 자는 사경(士敬)이고 호는 월천(月川), 동고(東皐)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누차 조정에서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거의 대부분 부임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힘썼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月川集, 민족문화추진회

206)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 자는 과회(寡悔)이고 호는 소재, 이재(伊齋), 십청정(十靑亭) 등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534년(중종29)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1543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2)에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진도(珍島)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뒤에 이준경(李浚慶) 등의 계청으로 석방되어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그 뒤 대사간,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 판서, 대제학,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蘇齋集, 민족문화추진회

207)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 자는 태휘(太輝)이고 호가 초당이다. 1540년(중종35)에 진사가 되었고, 1546년(명종1)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과 사헌부와 이조의 청현직을 두루 거쳐, 대사성, 삼척 부사(三陟府使), 도승지, 부제학,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草堂集, 민족문화추진회

208)구용(九容):군자가 갖추어야 할 아홉 가지 모습인데, 예기 옥조(玉藻)에 나온다. 발은 진중하고[足容重], 손은 공손하고[手容恭], 눈은 단정하고[目容端], 입은 무겁고[口容止], 목소리는 고요하고[聲容靜], 머리는 곧고[頭容直], 기운은 엄숙하고[氣容肅], 서 있는 모습은 덕스럽고[立容德], 얼굴빛은 장엄하게[色容莊]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9)구사(九思):군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아홉 가지 생각인데, 논어 계씨(季氏)에 나온다. 볼 때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視思明],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聽思聰], 얼굴빛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色思溫],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貌思恭], 말은 진실할 것을 생각하고[言思忠], 일은 경건할 것을 생각하고[事思敬], 잘 모르는 것은 묻기를 생각하고[疑思問], 분할 때에는 어려움 당할 것을 생각하고[忿思難], 이득 될 일이 있으면 정의를 생각해야[見得思義] 한다는 것이다.

210)이산해(李山海):1539〜1609. 자는 여수(汝受)이고 호는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 죽피옹(竹皮翁), 시촌거사(柿村居士) 등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어릴 적에 계부(季父) 이지함(李之菡)에게 수학(受學)하였으며, 1558년(명종1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61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도승지, 대사헌, 이조 판서, 양관 대제학,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1591년(선조24)에는 정철(鄭澈)을 탄핵하여 강계(江界)로 유배 보냈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鵝溪遺稿, 민족문화추진회

211)이지렴 양이(李之濂養而):1628〜1691. 이름이 지렴이고 자가 양이이며 호는 치암(恥庵)이다.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宋子大全 隨箚 卷13, 韓國文集叢刊 116輯

212)노인(老人):미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213)포세옹(逋世翁):이홍업(李弘業)이다. 당시 경성 판관이었는데, 강화(講和)를 요구하는 왜적의 서신을 가지고 와서 성천(成川)에서 세자에게 보고하였는데, 대신들이 “적서(賊書)를 가지고 와서 나라를 욕되게 했다.” 하여 죽이려 하였다. 유성룡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길주(吉州)로 귀양 가 포세옹이라 자호하며 지내다 4년 만에 석방되어 거산역(居山驛)에 살다 죽었다. 記言 卷19 李持平陰記, 韓國文集叢刊 98輯

214)이소(履素):이중호(李仲虎)를 가리킨다. 121쪽 주 17) 참조.

215)한 의금(韓義禁):당시에 동지의금부사를 지낸 한여직(韓汝溭)을 가리키는 듯하다.

216)평일에……것이며:제교(祭郊)는 제교(濟絞)와 음이 같은데, 이를 ‘거제(巨濟)에서 교형(絞刑)을 당한다.’는 뜻으로 본 것이다.

217)아들의……죽었으니:두(斗)는 파자(破字)하면 이십(二十)이고 북두칠성은 일곱 개의 별이므로 이 둘을 합하면 이십칠(二十七)이 된다.

218)수학(數學):천문, 지리, 운세 등과 관련한 수리(數理)를 말한다.

219)서고청(徐孤靑):서기(徐起:1523〜1591)로, 고청은 호이다.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자가 대가(待可)이며, 호가 고청초로(孤靑樵老), 구당(龜堂), 이와(頤窩)이다. 공주(公州) 충현서원(忠賢書院) 별묘(別廟)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고청유고(孤靑遺稿)가 전한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孤靑遺稿, 민족문화추진회

220)삼분오전:삼황(三皇)이 남긴 책을 삼분(三墳)이라 하고 오제(五帝)가 남긴 책을 오전(五典)이라 하는데, 옛 전적(典籍)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221)엄(淹):이 연보의 부록에 실린 이익(李瀷)이 지은 신도비명과 한국문집총간 199집에 수록된 성호전집(星湖全集)58 미수 허 선생 신도비명에는 ‘潭’으로 되어 있다. 뒤의 25세와 26세의 ‘엄(淹)’도 이와 같다.

222)임(銋):위의 두 자료에는 ‘鎏’로 되어 있다. 뒤의 25세와 26세의 ‘임(銋)’도 이와 같다.

223)정화(政和):번역 대본에 ‘征和’로 되어 있으나, 송나라 휘종(徽宗)의 당시 연호가 ‘政和’이므로 ‘征’을 ‘政’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24)무인년:번역 대본에 ‘戊辰’으로 되어 있으나, 송나라 소흥(紹興) 28년, 고려 의종 12년은 무인년이므로 ‘辰’을 ‘寅’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25)가정(嘉定):번역 대본에 ‘嘉靖’으로 되어 있으나, 송나라 영종의 당시 연호가 ‘嘉定’이므로 ‘靖’을 ‘定’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26)홍무(洪武) 13년:번역 대본에 ‘洪武十四年’으로 되어 있으나, 우왕 6년 경신년은 홍무 13년이므로 ‘四’를 ‘三’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27)관설(觀雪) 선생:미수(眉叟)의 종형 허후(許厚)이다.

228)계운궁(啓運宮):인조(仁祖)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를 가리킨다. 11쪽 주 9) 참조.

229)육신의총(六臣疑塚):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형살(刑殺)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의 묘이다. 의총이라 한 것은 확실한 표시를 하지 못하고 전해 오기 때문이다.

230)강우(江右):낙동강 우안(右岸)을 말하는데, 대략 경상우도를 가리키는 말로 쓴다.

231)탕왕(湯王)은 반명(盤銘)을 지었고:탕왕이 대야에다 경계하는 글을 새겨 넣었는데, 그 글에 “참으로 하루 새로워졌으면 나날이 새로워져야 하고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하였다. 大學章句 傳2章

232)무왕(武王)은……하였으니:춘추좌씨전 양공(襄公) 4년 조에 “주(周)나라 무왕 때에 신갑(辛甲)이 태사(太史)가 되어 백관들에게 명해서, 천자의 잘못을 경책하는 말을 하게 하였다.” 하였다.

233)염(殮)과 빈(殯):염은 죽은 이의 몸을 씻긴 다음 옷을 입히는 것이며, 빈은 발인(發引)할 때까지 관을 안치하는 것이다.

234)재궁(梓宮)을……있었는데:재궁은 왕이나 왕비의 관(棺)을 말한다. 당시에 효종의 널이 시신의 크기에 맞지 않아 목재를 덧대어 만들었다.

235)상칠(上漆):‘옻을 올린다’라는 뜻이다. 관에 옻칠을 하는 것인데, 대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정한 횟수만큼 칠을 한다.

236)춘(輴):상구(喪柩)를 싣는 일종의 수레이다.

237)임금의……올리고:번역 대본에 ‘君殯用欑 輴至于上’으로 되어 있으나,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의거하여 ‘君殯用輴 欑至于上’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38)보기(寶器):왕권을 상징하는 보배로운 기물(器物)을 말한다. 왕가(王家)에 큰 제사가 있거나 초상을 당했을 때에 꺼내어 진설하였다가 일을 마치면 거두어 보관한다.

239)우보(羽葆):임금의 장례 때에 쓰는 의장(儀仗)의 일종이다. 새의 깃을 묶음으로 만들어 드리운다.

240)성삼계삼(聲三啓三):운구(運柩)를 위해 빈궁(殯宮)을 열 때에, 소리를 세 번 내고 빈궁을 연다고 세 번 말하여 신령(神靈)에게 빈궁을 연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의식이다. 儀禮 旣夕禮

241)벽이란 이관(杝棺)입니다:벽(椑)은 속널을 말한다. 천자(天子)의 널은 네 겹으로 하는데, 혁관(革棺) 한 겹, 이관 한 겹, 재관(梓棺) 두 겹이다. 혁관은 물소 가죽을 사용하며 이관은 피나무로 만들고 재관은 가래나무로 만든다. 가래나무로 만든 두 겹의 관은 안쪽의 관을 속관(屬棺)이라 하고 바깥쪽의 관을 대관(大棺)이라 한다. 禮記 檀弓

242)방상(方喪):신하가 임금의 초상에 입는 복제이다. 부모의 초상에는 치상 삼년(致喪三年)을 입는데, 정(情)과 의(義)를 극진히 하는 것이다. 임금의 초상에는 의는 극진히 해야 하지만 정은 극진한 것이 아니므로, 복제는 부모의 초상 때와 같이 하지만 슬픔을 표현하는 절차는 부모 초상 때처럼 하지 않는다. 방(方)은 견주어 같게 한다는 뜻이다.

243)예기에……하였는데:예기 악기(樂記)에 나온다. 미수(眉叟)의 인용문과 악기의 본문은 글자가 다소 다르다.

244)수기(隋紀):번역 대본에 ‘隋記’로 되어 있으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근거하여 ‘記’를 ‘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45)상산(象山):중국 송대의 학자 육구연(陸九淵)이다. 상산은 그의 호이며, 자는 자정(子靜)이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246)기해년 상복(喪服)의 잘못:1659년에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복제를 두고 논란이 일어났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은 기년설을 주장하였고 남인(南人)은 삼년설을 주장하였다. 결국 기년설이 채택되었고 남인들은 탄압을 받았다.

247)두 송씨(宋氏):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가리킨다.

248)의례의……진달했더니:번역 대본에 ‘以議禮之制陳章’으로 되어 있으나, ‘議禮’는 ‘儀禮’가 합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249)두 유신(儒臣):송시열과 송준길을 말한다.

250)위징(魏徵)의 소릉(昭陵)의 일:위징은 당대(唐代)의 명신으로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소릉은 당 태종의 황후 능이다. 태종이 황후를 장사한 뒤 후원(後苑) 안에 관망대를 만들어 놓고 늘 바라보다가, 한번은 위징과 함께 올라가서 위징에게 능이 잘 보이느냐고 하자, 위징이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태종이 손가락으로 소릉을 가리키니, 위징이 “신은 폐하께서 헌릉(獻陵)을 바라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은 신이 이미 보았습니다.” 하자, 태종이 울며 조망대를 헐었다. 新唐書 卷97 魏徵列傳

251)의례의 소설(疏說):번역 대본에 ‘議禮疏說’로 되어 있으나, ‘議禮’는 ‘儀禮’가 합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252)황면재(黃勉齋):송대(宋代)의 학자인 황간(黃榦)이다. 자는 직경(直卿)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주자(朱子)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253)단궁(檀弓)이 단문(袒免)한 것:단궁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서 예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고 문(免)은 오세(五世)의 친족에게 입는 복제(服制)이다. 공의중자(公儀仲子)라는 사람이 맏아들이 죽자 맏손자를 세우지 않고 둘째 아들[庶子]을 세웠다. 당시의 예법으로는 맏손자를 세우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공의중자가 예법을 어기고 둘째 아들을 세워 승중(承重)하게 하자, 단궁은 예법에 맞지 않는 단문(袒免) 차림으로 조문을 함으로써 공의중자를 기롱하였다. 禮記 檀弓上

254)자유(子游)가……것:사구(司寇) 혜자(惠子)가 죽었을 때에 문자(文子)가 혜자의 적자(適子)를 놓아두고 서자(庶子)를 후사로 삼았다. 공자의 제자인 자유가 그것이 예법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혜자의 초상에 역시 예법에 맞지 않는 마최(麻衰) 차림으로 조문을 함으로써 문자를 기롱하였다. 여기서 서자라는 말은 둘째 아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禮記 檀弓上

255)적부(嫡婦)로서……입는다:적자(嫡子)가 폐질이 있거나 혹 다른 원인이 있어서, 죽은 뒤에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후사가 될 수 없으니, 그 적자의 아내[嫡婦]에 대해서는 시부모는 소공(小功)을 입는다는 말이다. 적부에 대해서 원래는 대공(大功)을 입는 것이 원칙이나 후사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서부(庶婦)에게 입는 복제와 동일하게 소공을 입는다는 뜻이다.

256)공의전(恭懿殿):인종(仁宗)의 비(妃)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257)삼례도(三禮圖):송나라 섭숭의(聶崇義)가 찬(撰)한 것과 명나라 유적(劉績)이 찬한 것이 있는데, 여기서는 섭숭의가 찬한 책을 가리키는 듯하다.

258)약정(約正):향약을 시행하는 향소(鄕所)의 임원이다.

259)이사(里社):지신(地神)에게 제사하는 사당이다.

260)영월공(寧越公):미수의 막내아우 허서(許舒)이다.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지냈다. 인조의 아우 능창대군(綾昌大君) 이전(李佺)의 서녀(庶女)와 혼인하였다.

261)모래 바다:기언 권37 척주기사(陟州記事) 제직사신청점이장(穄稷事申請粘移狀)에 “동해는 모래 바다여서 해안이 모두 모래로 이루어져 물기가 없다.” 하였다.

262)양곡(暘谷):해가 처음 솟아 나오는 골짜기를 말한다.

263)희백(羲伯):서경 요전(堯典)에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에 머물게 하여 그곳을 양곡이라 하시고, 솟는 태양을 공경히 맞이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 희중을 미수는 희백이라고 쓴 것인 듯하다.

264)석목(析木):성차(星次)의 이름으로, 미성(尾星)과 기성(箕星)이 이에 해당한다. 지역 구분으로 말하자면, 고조선의 영토였던 압록강 건너편 지역, 중국의 유연(幽燕) 지방이 이 별자리에 해당한다. 방위로는 인방(寅方)인데, 인방은 동북쪽을 말한다. 여기서는 동해의 위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265)빈우(牝牛):기성과 미성의 두 별자리를 빈우궁이라 한다.

266)교인(鮫人):상반신은 인체(人體)이고 하반신은 어체(魚體)라는 상상의 동물이다. 눈물을 흘리면 모두 진주(珍珠)가 된다고 한다.

267)천오(天吳):해가 솟는 조양(朝陽)의 골짜기에 산다고 하는 수신(水神)의 이름이다. 물을 다스리는 수백(水伯)이다.

268)기(夔):동해 먼 바다에 유파산(流波山)이라는 산이 있고 그곳에 기라는 짐승이 사는데, 형체는 소와 같고 뿔이 없으며 다리가 하나라고 한다. 기가 물속을 드나들 때에는 풍우(風雨)가 일어난다고 한다.

269)아침에……빛나면:번역 대본에 ‘日出朝暾 轇軋烗煌’으로 되어 있는데, 기언 권28하 동해송(東海頌)에는 ‘出日朝暾 轇軋炫熿’으로 되어 있으며, 기언 권65 자서(自序)에는 ‘出日朝暾 轇軋炫煌’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동해송을 기준으로 교감하였다.

270)부상(扶桑):동쪽 바다 멀리 있는 나라인데 그곳에 뽕나무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부상이라 한다고 한다.

271)사화(沙華):동남쪽 바다 멀리 있는 나라인데 바다에 나가서 해적질을 하며 사람을 잡아서 매매한다고 한다.

272)흑치(黑齒):이가 까만 오랑캐 종족의 이름이라 한다.

273)마라(麻羅):동남쪽 바다 멀리 사는 종족인데 사람을 잡아먹으며 두개골로 그릇을 만들어 쓴다고 한다.

274)보가(莆家):동남쪽 바다 멀리 사는 종족이라 한다.

275)연만(蜒蠻):남쪽 오랑캐 종족의 이름이라 한다.

276)조와(爪蛙):남쪽 오랑캐 종족의 이름이라 한다.

277)불제(佛齊):남쪽 오랑캐 종족의 이름이라 한다. 삼불제(三佛齊)라고도 한다.

278)이중 삼중 통역 거쳐:번역 대본에 ‘百蠻重驛’으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驛’은 ‘譯’이 타당하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279)목조(穆祖)의 아버지:이성계의 오대조부 이양무(李陽茂)이다.

280)어머니:이성계의 오대조모이니,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281)서별당기(西別堂記):기언 권13에는 서별당중작기(西別堂重作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282)보부편(保傅篇):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지은 신서(新書)의 편명이다.

283)해옹(海翁)만……만들었고:해옹은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호이고, 삼강(三江)은 함경도 삼수(三水)이다. 1660년(현종1) 4월에 윤선도가 상소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삼년상으로 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종통(宗統)을 부인한 죄목과 산릉(山陵)을 잘못 쓴 죄목을 들어 송시열(宋時烈)을 논핵하였다가, 이 일로 삼수에 안치(安置)되었다.

284)원사(元嗣)는……말했다가:미수가,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통을 승계하였으므로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장자(長子)로 대우해야 한다고 한 것을 말한다.

285)송나라……즉위하였는데:송나라 효종(孝宗)이 죽었을 때에 제위를 물려받은 광종(光宗)이 심질(心疾)이 있어 집상(執喪)을 하지 못하자, 광종의 아들 가왕(嘉王)을 황태자로 삼아 복상(服喪)하게 하였다. 곧이어 가왕이 즉위하니, 이가 영종(寧宗)이다.

286)상복을 논한 차자:주희(朱熹)의 문집인 회암집(晦菴集) 권14에 걸토론상복차자(乞討論喪服箚子)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287)정지(鄭誌):정현(鄭玄)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오고간 경서(經書)에 대한 문답을 모아 엮은 책이다.

288)백종(百種):온갖 곡식의 신을 말한다.

289)농(農):농은 옛날의 권농관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권농을 맡은 신을 가리키는 듯하다.

290)우(郵):권농관이 거처하면서 농사를 독려하던 우사(郵舍)이다.

291)표철(表畷):표(表)는 밭두둑이고 철(畷)은 밭 사이의 길이다.

292)금수(禽獸):호랑이와 고양이이다. 예기 교특생(郊特牲)의 공소(孔疏)에 의하면, 호랑이는 멧돼지를 잡아먹고 고양이는 들쥐를 잡아먹어 농사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제사 지낸다고 한다.

293)자기가……하였으니:논어 위정(爲政)에 나온다.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가 제사할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하는 것은 아첨하는 짓이다.” 하였다.

294)예가 번거로우면 혼란스럽다:서경 열명 중(說命中)에 “제사를 함부로 설만하게 지내는 것을 일러 공경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니, 예가 번거로우면 혼란하여 귀신을 섬기기가 어려워진다.” 하였다.

295)창강(滄江) 조속(趙涑):1595~1668.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희온(希溫)이며 호는 창강, 취옹(醉翁), 취병(醉病) 등이다. 수묵화를 잘 그렸으며, 시서화삼절(詩書畫三絶)로 일컬어졌다.

296)봉황이……울었다:시경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네,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이 자라네, 저 해 뜨는 곳에서.” 하였다. 이것을 줄여서 ‘봉황이 해 뜨는 언덕에서 운다[鳳鳴朝陽]’라고 하는데, 흔히 ‘현자(賢者)가 나서서 바른말을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한다.

297)일찍이……하였다:한국문집총간 97집에 수록된 겸재집(謙齋集) 권9에 제허희화논예소후(題許熙和論禮疏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298)소제(蕭齊):소도성(蕭道成)이 세운 제(齊)나라를 말하는데, 479년에 일어나 502년에 망하였다.

299)열 가지 허물:서경 이훈(伊訓)에 “궁중에서 항시 춤에 빠지고 집에서 취하여 노래하는 것을 무풍(巫風)이라 하고, 감히 재화의 취득에 집중하고 여색에 빠지고 항상 놀이를 즐기고 사냥을 즐기는 것을 음풍(淫風)이라 하고, 감히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충직한 말을 거부하고 덕망 있는 원로를 멀리하고 못된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난풍(亂風)이라 한다.” 하였다. 이것을 삼풍십건(三風十愆)이라 한다.

300)세 가지 경계:논어 계씨(季氏)에 “군자는 세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니, 천명(天命)을 두려워하며 대인(大人)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소인은 천명을 알지 못해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대인을 함부로 대하며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 하였다.

301)3년을……불렀다:어설픈 공부로 허튼소리를 한다는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에 나온다. 진(秦)나라에게 패전(敗戰)하고 진나라로 조회(朝會) 가려 하는 위(魏)나라 왕에게 주흔(周訢)이 충고하기를, “송나라의 어떤 사람이 3년 동안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는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어머니가 ‘네가 공부를 3년간 하고 돌아와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째서이냐?’ 하니, 아들이 대답하기를 ‘제가 훌륭하게 여기는 분으로는 요 임금과 순 임금보다 나은 분이 없는데 요 임금과 순 임금은 이름을 부르며, 제가 대단하게 여기는 것으로는 하늘과 땅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하늘과 땅은 이름을 부릅니다. 지금 어머니는 요 임금이나 순 임금보다 훌륭하지 않으며 하늘이나 땅보다 크지 않으므로 어머니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가 공부한 것을 장차 모두 실천할 것이라면, 네가 어미 이름 부르는 것을 바꾸기 바란다. 네가 공부한 것을 더러 행하지 않을 것도 있다면, 우선은 어미 이름 부르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지금 왕께서 진나라를 섬기는 데에 있어서, 조회에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낼 수 있다면 바라건대 다른 사람을 보내시고, 왕께서 들어가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소서.” 하였다.

302)금인(金人)의 명(銘):공자가어(孔子家語) 관주(觀周)에 나온다. 공자가 주(周)나라에 가서 태조(太祖)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가니 입을 세 겹으로 봉인한 금인이 있었는데, 그 등에 이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금인은 금으로 만든 인형을 말한다.

303)십익(十翼):주역 경문(經文)의 뜻을 부연설명한 열 편의 글이라는 뜻인데,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인용한 글은 그중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온다.

304)불여묵사지(不如黙社誌):기언 권23 계구(戒懼)에는 ‘묵(黙)’이 ‘묵(嘿)’으로 되어 있다.

305)올바르게……바이니:증자(曾子)가 죽기 직전에 깔자리를 바꾸게 하고 죽은 일을 말한다. 증자가 깔고 누워 있던 깔자리는 당시의 노(魯)나라 대부(大夫)였던 계손씨(季孫氏)한테 선물로 받은 것이었는데, 곁에서 시중들던 동자(童子)가 너무 화려한 깔자리라고 하자, 증자가 즉시 신분에 맞지 않는 깔자리를 바꾸어 깔게 하였다. 禮記 檀弓上

306)인선왕후(仁宣王后):1618(광해군10)~1674(현종15). 효종의 정비(正妃)이다. 장유(張維)의 딸로 1630년(인조8)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부인이 되어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고,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307)자부(子婦)의……있습니다:맏며느리에게는 기년복을 입고 그 외의 며느리에게는 대공복을 입는다는 말이다.

308)이번에……것입니다:기해년 효종대왕의 초상 때 자의대비(慈懿大妃)가 기년복을 입은 것이 중자(衆子)에게 기년복을 입어주는 옛 예법을 따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초상 때에도 중자부(衆子婦)에 대해 입는 대공복(大功服)으로 고쳐 부표(付標)했다는 뜻이다.

309)대전(大典) 오복조(五服條):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오복조를 말한다.

310)정희왕후(貞熹王后)께서……것이니:정희왕후는 세조(世祖)의 비(妃)이고 장순왕후(章順王后)는 예종(睿宗)의 비이며, 소혜왕후(昭惠王后)는 덕종(德宗)의 비이고 공혜왕후(恭惠王后)는 성종(成宗)의 비이다. 모두 차자(次子)가 왕위를 승계하여 그 부인이 왕후가 되었을 때에 시어머니가 둘째 며느리에게 복을 입어주는 경우에 해당한다.

311)대전에……없으니:경국대전 예전 오복조(五服條)에 “자(子)는 기년(期年)이다.”라고만 하여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 않았으나, 며느리에 대해서는 “장자처(長子妻)는 기년이다.”라고 하고 또 “중자처(衆子妻)는 대공(大功)이다.”라고 하여 장자와 중자를 구분해서 말하였다. 만약 중자가 승중했을 경우에 중자처에 대해서 장자처와 동일한 대우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응당 “중자처는 대공이다.”라는 항목 아래에 “승중했을 경우에는 기년이다.”라는 주석이 있을 법한데, 법전에 그것이 없다는 말이다.

312)상사나……따른다:등(滕)나라 정공(定公)의 상에 세자였던 문공(文公)이 맹자의 조언대로 삼년상을 치르려 하자, 대신들이 반대하면서 이 말을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313)마음에……품고는:번역 대본에 ‘內懷衆庶大功之議’로 되어 있으나, 현종실록에 근거하여 ‘議’를 ‘意’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14)예관(禮官):예조(禮曹)의 당상관들을 말한다.

315)중도부처(中道付處):유배형(流配刑)의 하나이다. 서울에서 변방까지의 사이에 중간쯤 되는 적절한 장소에 배소(配所)를 지정하여 그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다. 중도부처(中途付處)라고 쓰기도 한다.

316)중비(中批):규정에 의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임금이 특명으로 벼슬을 주는 것을 말한다.

317)종복(從服):자신이 응당 입어야 할 복을 입는 것을 ‘정복(正服)’이라 한다면, 자신이 그 복을 입을 위치가 아닌데도 타인의 복제를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복을 입는 것을 ‘종복’이라 한다. 이를테면, 아내가 친정 부모의 복을 입을 때에 남편이 그에 따라 함께 복을 입는다든지, 아내가 남편의 친속들을 위해 복을 입을 때에 남편의 복제에 준하여 복을 입는다든지, 남편이 남의 후사가 되었을 때에 아내가 그 집의 며느리로서의 복을 입는 경우 등이다.

318)예경(禮經):여기서는 예기를 말하며, 인용한 내용은 그 잡기 하(雜記下)에 나온다.

319)기뻐하며:번역 대본에 ‘恰悅’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恰’은 ‘怡’가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320)고과법(考課法):관리들의 치적을 평가하여 상벌을 시행하는 법을 말한다.

321)장오법(贓汚法):뇌물이나 청탁 등을 받은 부정한 관리를 다스리는 법을 말한다.

322)거주법(擧主法):관리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 그 관리를 천거한 인물을 함께 처벌하는 법을 말한다.

323)제(齊)나라……하였는데: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

324)신하들을……않고:번역 대본에 ‘不私其身’으로 되어 있으나, 기언 권52 부추언덕례정형재상차(復推言德禮政刑再上箚)에 근거하여 ‘身’을 ‘臣’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25)윤휴(尹鑴)가……진달하였는데:숙종실록 즉위년(1674) 12월 1일 기사에 “장령 윤휴가 밀봉한 책자(冊子)를 올려 복수 설치(復讎雪恥)의 뜻을 진달하였다.” 하였고, 1년(1675) 1월 10일 기사에는 소대(召對)에서 윤휴의 상소를 강론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1년 1월 11일 기사에는 주강(晝講)에서 윤휴의 상소를 강론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국문집총간 123집에 수록된 백호집(白湖集) 권5 책자소(冊子疏)에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326)장수를 가려 뽑아:번역 대본에 ‘選將師’로 되어 있으나, 기언 별집(別集) 권3 진사려지계차(陳師旅之戒箚)에 의거하여 ‘師’를 ‘帥’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27)무기를 정비하여:번역 대본에 ‘收器械’로 되어 있으나, 위 자료에 의거하여 ‘收’를 ‘修’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28)황세정(黃世禎)의 상소:상소 내용이 숙종실록 1년 1월 18일 기사에 실려 있다. 황세정이 상소하여 송시열과 송준길을 옹호하고, 복제 문제에 대해 송시열과 의견이 달랐던 허목, 윤휴, 윤선도(尹善道) 등을 비판하였다.

329)보부편(保傅篇):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지은 신서(新書)의 편명이다.

330)차자(箚子)의 대략에:번역 대본에 ‘箚略曰’이란 말이 없으나 기언 별집 권3 서진고요모차(書進皐陶謨箚)에 근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331)기석례(旣夕禮):의례(儀禮)의 편명이다. 비슷한 내용이 의례 상복(喪服)에도 나온다. 인용한 내용은 빈소를 차린 뒤에 행하는 상례 절차이다.

332)의려(倚廬):상주가 거처하는 초막이다.

333)반곡(返哭):안장을 마치고 신주를 모시고 묘지로부터 조묘(祖廟)로 돌아와서 곡을 하는 것을 말한다.

334)상복소기(喪服小記):예기의 편명이다.

335)상복(喪服):의례의 편명이다.

336)바깥 침소에서 거처하며:번역 대본에 ‘舍外’로 되어 있으나, 의례에 근거하여 ‘寢’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337)초상장(初喪章):가례 상례(喪禮) 조석곡전 상식장(朝夕哭奠上食章)을 범범하게 가리켜 초상장이라 한 듯하다.

338)조전(朝奠)의 의식과 같다:번역 대본에 ‘朝奠如儀’로 되어 있으나, 가례에 근거하여 ‘如朝奠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조전은 매일 이른 아침에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곡하고 음식을 올리는 절차를 말한다.

339)우제를……합니다:가례 상례 우제장(虞祭章)에 나오는 내용을 간접인용한 말이다.

340)은전(殷奠):은(殷)은 크다는 뜻이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평상시보다 더욱 성대하게 차린 전제(奠祭)를 올리는데, 이때에 천신(薦新)도 함께 행하여 기장과 피로 지은 밥을 올린다.

341)상대기(喪大記)의……하였습니다:상대기예기의 편명이다. 보(補)는 보주(補註)를 말하는 것인데, 미수가 읽은 예기가 어떠한 판본인지 확인하지 못하여 인용문의 내용이 어디까지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의례주소(儀禮注疏), 의례요의(儀禮要義) 같은 예서(禮書)에 이와 비슷한 문장이 실려 있기 때문에 인용문으로 묶어 번역하였다.

342)예경(禮經)의……것이다:이 내용은 퇴계집(退溪集) 권32 답우경선(答禹景善)에 실려 있다.

343)어제……하였다가:숙종실록 1년(1675) 윤5월 26일 기사에 보면, 이날 소대(召對)에서 김만중이, 김종일의 증직을 청한 허목의 말 중에 “김종일은 정란(政亂) 이후로는 물러나 몸을 고결히 하고 지냈다.”라는 구절에 있는 ‘정란(政亂)’을 문제 삼으며, 김종일이 물러나 지내던 시절이 효종과 현종 때에 해당하는데 효종과 현종 시대를 가리켜 정치가 어지러웠던 시대라고 한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말이라고 하며, 허목을 비판하였다.

344)이익상(李翊相)이……체직되었고:숙종실록 1년(1675) 4월 28일 기사에 나온다. 대사헌 이익상이, 대사헌 의망 과정에서 있었던 허목의 실수를 문제 삼아 허목을 추고할 것을 청하려 하다가, 장령 강석구(姜碩耈)가 반대하자 각자 인피하였는데, 이익상은 이 일로 인하여 강릉 부사로 전보되었다.

345)오속(五屬):오복(五服) 이내의 친속(親屬)을 말한다. 오복은 참최(斬衰), 재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이다.

346)상사(喪事)에……제사한다:예기 왕제(王制)에 “상중에는 3년 동안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오직 천지(天地)와 사직(社稷)에 대한 제사는 상사에 구애받지 않고 지낸다.” 하였다.

347)논어……위비의야(爲非義也)까지:논어 자로 3장을 말한다. 3장은 경문(經文) ‘자로왈위군(子路曰衛君)’으로 시작하여 주주(朱註) ‘위비의야(爲非義也)’로 끝이 난다.

348)사람을……잃습니다:서경 주서(周書) 여오(旅獒)에 나온다. 군자(君子)를 우습게보고 업신여기면 자신의 덕이 손실되고 사물에 이목(耳目)을 빼앗기면 자신의 의지가 손실된다는 말이다.

349)이른……조심하여:번역 대본에 ‘夙夜警忌’로 되어 있으나, 기언 별집 권3 인한재진언소(因旱災進言疏)에 의거하여 ‘警’을 ‘敬’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50)세룡(世龍)의 아내:세룡은 김자점(金自點)의 손자이다. 그의 아내는 인조의 후궁 조씨(趙氏)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이다. 김자점이 역모(逆謀)에 걸려 멸문지화를 당하자 효명옹주도 극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는데, 효종의 관대한 처분으로 목숨을 건진 채 유폐되어 있었다.

351)정(楨)과 연(㮒):효종의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복녕군(福寧君) 이유(李栯),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이다. 1675년(숙종1)에 이정과 이연이 궁중에 출입하면서 궁녀 상업(常業), 귀례(貴禮) 등과 관계를 맺어오다가 이 일이 드러나 귀양을 갔다.

352)팔벽(八辟)이……법인데:주례 추관사구(秋官司寇) 소사구지직(小司寇之職)에 나온다. 죄가 있을 때에 법전에 명시한 처벌을 내리지 않고 특별히 의논하여 죄를 사면하거나 견감하는 여덟 가지 경우가 있는데, 왕의 친족, 왕의 옛 친구, 덕행이 있는 자, 재능이 있는 자, 공로가 있는 신하, 벼슬이 높은 신하, 나랏일에 부지런한 관리, 사방에서 온 빈객을 말한다. 이것을 팔벽이라 하기도 하고 팔의(八議)라 하기도 한다.

353)충성을……하려는:번역 대본에 ‘竭忠進言’으로 되어 있으나, 기언 별집 권3 청추서언자차(請推恕言者箚)에 의거하여 ‘進’을 ‘盡’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54)조정에서……것입니다:번역 대본에 ‘樂容於朝矣’로 되어 있으나, 위 자료에 의거하여 ‘容’을 ‘用’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55)진선정(進善旌)과 비방목(誹謗木):선언(善言)을 진달하도록 하는 깃발과 비방을 적을 수 있는 나무이다. 중국 상고 시대 요(堯) 임금 때에 사통팔달[五達]의 큰길에 깃발을 세워놓고 누구든지 그 깃발 아래에 와서 말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순(舜) 임금 때에는 나무를 세워두고 그 나무에 백성들이 와서 정치의 과오를 적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비방목도 요 임금 때의 일이라고 기록된 곳도 있다.

356)삼종(三從)의 예법:여자들이 지켜야 하는 세 가지 도리를 말한다. 혼인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혼인한 뒤에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는 것이다.

357)태백(泰伯)과 우중(虞仲):태백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장자이다. 태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태백, 중옹(仲雍), 계력(季歷)이었다. 태왕이 상(商)나라를 정벌할 생각이 있었는데 태백이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으니, 날 때부터 성덕(聖德)이 있었다. 태왕은 왕위를 계력에게 물려주어 창에게 전해지게 하려 하였다. 이에 태백은 이 뜻을 알고 중옹과 함께 나라를 떠났다. 창이 문왕(文王)이다. 논어 태백(泰伯)에 “태백은 지덕(至德)이라 이를 만하다.” 하였다. 지덕사(至德祠)라는 이름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358)상구(爽鳩)는……없고:상구는 형관(刑官)을 말하니, 상구가 탈이 없다 함은 도적이나 범죄자가 없고 송사(訟事)가 없어 나라가 안정되었음을 뜻한다. 대농(大農)은 나라의 재부(財賦)를 담당하는 호조(戶曹)를 가리킨다.

359)질병이……삼가셨습니다: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께서 조심하신 것은 재계(齊戒)와 전쟁과 질병이었다.” 하였다. 그 주주(朱注)에 “질병은 내 몸이 죽고 사는 요인이다.” 하였다. 성인은 공자를 가리킨다.

360)고금의……것은:번역 대본에 ‘說讀古今事物盡變’으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說’은 ‘閱’이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361)부이무교장(富而無驕章):논어 헌문(憲問) 11장에 “가난하면서 원망이 없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함이 없기는 쉽다.” 하였다.

362)순(舜) 임금이……않았다:논어 태백(泰伯) 18장에 나온다.

363)주공(周公)은……하였습니다:사기 권33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나온다. 주공이 노(魯)나라로 떠나는 아들 백금(伯禽)에게 훈계하기를, “나는 문왕(文王)의 아들이고 무왕(武王)의 아우이며 성왕(成王)의 숙부이니, 이 정도면 천하에서 비천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한 번 머리를 감는 동안에 세 번이나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일어나고 한 끼 밥을 먹는 사이에 세 번이나 입에 든 밥을 뱉고 일어나서 선비를 맞이하였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천하의 현인들을 놓칠까 봐 염려하였다. 네가 노나라에 가거든 나라의 군주라 하여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하였다.

364)맹공작장(孟公綽章):논어 헌문 12장에 “맹공작은 조씨(趙氏)나 위씨(魏氏)네 가문의 가로(家老)가 된다면 역량이 넉넉하겠지만 등(滕)나라나 설(薛)나라의 대부(大夫)가 될 수는 없다.” 하였다.

365)상등(上等)인……다릅니다:논어 선진(先進) 2장에 “덕행에는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이고,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이고, 정사에는 염유(冉有), 계로(季路)이고,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이다.” 하였다.

366)헌문편(憲問篇):번역 대본에 ‘子張篇’으로 되어 있는 것을 고쳐서 번역하였다.

367)고종(高宗)은……않았다:논어 헌문 43장에 나온다.

368)수기이경장(修己以敬章):논어 헌문 45장이다.

369)무위이치장(無爲而治章):논어 위령공 4장이다.

370)불대이출(不對而出):논어 위령공 6장에 “군자답다, 거백옥(蘧伯玉)은.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을 하였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거두어 품을 수 있었다.” 하였는데, 그 주주(朱注)에 “이를테면, 거백옥이 손림보(孫林父)와 영식(寗殖)이 군주를 추방하고 시해하려는 모의를 했을 적에 대답을 하지 않고 나갔으니 또한 그 한 가지 일이다.” 하였다. 거백옥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대부(大夫) 거원(蘧瑗)이다.

371)구궁(丘宮)의 변고: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4년에 나온다. 위(衛)나라 헌공(獻公)이 손림보와 영식에게 무례한 일을 하여, 이들이 군주를 교체하려고 거백옥에게 의견을 물었다. 거백옥은 “신하는 군주를 범할 수 없으며, 비록 군주를 교체하더라도 현재의 군주보다 정치를 더 잘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고는, 가까운 관문으로 빠져나가 외국으로 갔다. 헌공이 공자 자교(子蟜), 자백(子伯), 자피(子皮)로 하여금 손림보와 구궁에서 화해의 맹약을 하게 하였는데, 손림보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헌공이 자행(子行)을 손림보에게 보내 화해하려 했으나 손림보가 또 죽여버렸다. 결국 헌공은 제(齊)나라로 망명했다.

372)유상지여하우불이장(惟上智與下愚不移章):논어 양화(陽貨) 3장이다.

373)몸과……학문입니다:논어 양화 1장의 주주(朱注)의 양씨(楊氏) 말에 “양웅(揚雄)은 ‘공자가 양화에 대해서는 공경하지 않아야 할 대상을 공경한 것이니, 몸을 굽혀 도를 펴기 위해서였다.’ 하였으니, 공자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374)습관에……것이니:논어 양화 2장에 “성품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지는 것이다.” 하였다.

375)오가지패(五家紙牌):다섯 가구를 1통(統)으로 만든 일종의 호적제도이다. 같은 통에 소속된 사람들을 하나의 종이에 나란히 적어 주머니에 넣어서 차고 다니게 하였다. 肅宗實錄 1年 9月 26日

376)만인과(萬人科):대개 병란을 겪은 이후로 무인을 늘리기 위해 한꺼번에 만 명을 뽑던 무과(武科)를 말한다.

377)어제주수도설(御製舟水圖說):숙종실록 부록(附錄) 숙종대왕 행장에 “상이 일찍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주수도(舟水圖)를 그리게 하고 친히 글을 지어 그 위에 써서 좌석 옆에 걸어두고 자신을 경계하였다. 하루는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해야 배가 편안하고 신하가 어질어야 임금이 편안하다. 경들은 이 그림의 뜻을 깊이 유념하여 보필의 책무를 다하도록 하라.’ 하셨다.” 하였다. 배와 물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 또는 임금과 백성의 관계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순자(荀子) 왕제편(王制篇)애공편(哀公篇), 신서(新序) 잡사(雜事), 공자가어(孔子家語) 오의해(五儀解), 후한서(後漢書) 권95 황보규열전(黃甫規列傳),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에 나온다.

378)명덕(明德)을 밝히는 일:번역 대본의 ‘明德’은 ‘明明德’을 줄인 말이다. 대학장구 경(經)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明明德]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至善)에 멈춤에 있다.” 하였다. 이 명덕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광명한 덕을 말한다.

379)요(堯) 임금의……미쳤고:강구(康衢)는 사통팔달의 큰 거리를 말한다. 열자 중니(仲尼)에 “요 임금이 50년 동안 천하를 다스리고는 천하가 다스려졌는지 아닌지, 백성들이 자기를 받드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미복 차림으로 강구에 나가서 아이들의 노래를 들었다.” 하였다. 서경 요전(堯典)에, 요 임금의 덕을 칭송하면서 “광명이 사방 끝까지 미쳤으며 하늘과 땅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번역 대본에 ‘光彼四表’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彼’는 ‘被’가 타당하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80)우(禹) 임금은……하였으며:서경 고요모(皐陶謨)에 나온다. 우 임금이 고요의 말을 듣고 훌륭하다고 여겨 절을 하였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자로(子路)는 남이 자기의 허물을 일러주면 기뻐하였고, 우 임금은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 하였다.

381)이윤(伊尹)은 이훈(伊訓)을 지었고:이훈서경의 편명이다. 이윤이 성탕(成湯)의 공덕을 밝혀 사왕(嗣王)인 태갑(太甲)을 훈계한 내용이다.

382)무왕(武王)은……하였습니다:대학연의 권34 반유지계(盤游之戒)에 “무왕 때의 사관 신갑(辛甲)이 백관들에게 왕의 잘못을 규계하게 하였다.” 하였다.

383)허물은……나오니:허물은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방심하다가 우연히 실수로 생기는 것이라는 뜻이다.

384)걸(桀)에게는……갈라졌습니다:하(夏)나라의 현인(賢人) 관용봉(關龍逢)이 폭군 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비간(比干)은 은(殷)나라 주(紂)의 숙부였는데, 주의 정치에 대해 누차 간언을 올리니, 주가 심장을 갈라 죽였다. 莊子 胠篋

385)탕(湯) 임금은……않았고: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왕께서는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화리(貨利)를 증식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중훼지고는 탕 임금의 신하인 중훼가 탕 임금과 여러 신하들을 상대로 권면하는 말을 아뢴 것이다.

386)이윤은……하였습니다:서경 이훈(伊訓)에 나온다.

387)무왕은……통일하였고:난신(亂臣)은 잘 다스리는 신하라는 뜻이다. 서경 태서 중(泰誓中)에 “수(受)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있으나 마음이 다르고 덕이 다르지만 나는 난신 열 명이 있는데 마음이 같고 덕이 같다.” 하였다.

388)주왕(紂王)은……망했습니다:녹대(鹿臺)는 은나라 주왕이 보물과 비단 등의 재화를 쌓아두었던 장소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녹대에 있던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서경 무성(武成)에 “녹대의 재화를 흩고 거교(鉅橋)의 곡식을 풀어서 사방 백성들에게 크게 나누어주니 모든 백성들이 감복하였다.” 하였다.

389)고요(皐陶)가……뜻입니다:서경 익직(益稷)에 “순 임금이 노래하기를 ‘고굉(股肱)이 기쁘게 일을 하면 원수(元首)가 흥기하고 백공(百工)이 많은 공을 이룰 것이다.’ 하니, 고요가 이어서 노래하기를 ‘원수가 현명하시면 고굉이 선량하고 서사(庶事)가 편안할 것입니다.’ 하고 또 ‘원수가 자잘한 일까지 간섭하면 고굉이 태만하고 만사가 무너질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권면하는 노래를 한 것이다.

390)사호(四皓):상산사호(商山四皓)를 말한다. 진(秦)나라 말엽에 진나라의 혼란을 피하여 상산에 은거해 살았던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등 네 노인이다.

391)도안(都案):보포(保布)를 거두기 위해 그 대상 인력을 정리한 일종의 인명부이다.

392)의당……합니다:번역 대본에 ‘所宜竭力勞心以備不虞之戒’로 되어 있으나, 기언 권51 논정폐차(論政弊箚)에 의거하여 ‘戒’를 ‘計’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93)그래도……있으니:번역 대본에 ‘惟可姑緩’으로 되어 있으나, 위 자료에 의거하여 ‘惟’를 ‘猶’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94)사람을……있으니:번역 대본에 ‘殺人亡國而有不計者’로 되어 있으나, 위 자료에 의거하여 ‘計’를 ‘戒’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395)갈아도……이르렀다:논어 양화(陽貨)에 “단단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하얗다고 하지 않겠는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하였다. 중모(中牟) 지역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킨 필힐(佛肹)이 공자를 초빙하니 공자가 그곳에 가려고 하였는데 자로(子路)가 의문을 품었다. 이에 공자가 이 말을 하여, 필힐이 불선하다고 해도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396)총관(摠管):도총관(都摠管)과 부총관(副摠管) 등이 있는 오위도총부를 가리킨다.

397)오위(五衛):당시의 중앙 군사조직이었던 중위(中衛) 의흥위(義興衛), 좌위(左衛) 용양위(龍驤衛), 우위(右衛) 호분위(虎賁衛), 전위(前衛) 충좌위(忠佐衛), 후위(後衛) 충무위(忠武衛)이다.

398)아문(衙門):총관보다 뒤에 설치한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수어청(守禦廳), 호위청(扈衛廳), 총융청(摠戎廳) 등을 말한다.

399)그중에……글자입니다:논어 자장에는 ‘신(信)’을 거론한 곳이 두 곳인데, 하나는 2장의 ‘신도불독(信道不篤)’이고, 하나는 10장의 ‘신이후노기민(信而後勞其民)’과 ‘신이후간(信而後諫)’이다. 여기서는 10장의 신(信)을 논하는 말인 듯하다.

400)사람이……못한다:논어 안연(顔淵) 7장에 “예로부터 사람은 모두 죽음이 있지만 사람은 신의가 없으면 서지 못한다.” 하였다.

401)일민(逸民)을……급선무입니다:논어 요왈(堯曰) 1장에 나오는 ‘거일민(擧逸民)’에 관련한 말이다.

402)자장문어공자(子張問於孔子):논어 요왈 2장이다.

403)인(仁)을……것이고:논어 안연 1장에 “인을 실천하는 것이 자기를 말미암는 것이지 남을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404)인을……것이며:논어 위령공(衛靈公) 35장에 나온다.

405)오형(五刑)에……크니:효경(孝經) 오형장(五刑章)에 나온다. 오형은 묵(墨), 의(劓), 비(剕), 궁(宮), 대벽(大辟)이며 서경, 예기, 주례(周禮) 등에도 나온다.

406)말을……드물고:논어 학이에 “말을 교묘히 하는 자와 얼굴을 애교스럽게 꾸미는 자는 어진 이가 드물다.” 하였다.

407)말재주……뒤엎습니다:논어 양화에 “말재주로 나라를 엎어버리는 자를 싫어한다.” 하였다.

408)말을 알면……됩니다:논어 요왈에 “말을 알지 않으면 사람을 알 수 없다.” 하였다.

409)국법을……하였는데:승정원일기 현종 1년 4월 20일 기사의 간원(諫院) 계사에 “왕법(王法)으로 보자면 유배만 보내고 그칠 일이 아닙니다. 윤선도에 대해 속히 국법을 바르게 적용하소서.[請尹善道亟正邦刑]”라고 하였다.

410)윤선도가……불쌍합니다:윤선도는 1660년(현종1)에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제(服制)에 대해 삼년설을 주장하며 송시열의 죄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 일로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고, 1665년에 광양으로 이배되었으며, 1671년(현종12)에 보길도(甫吉島) 부용동(芙蓉洞)에서 세상을 떠났다. 韓國文集叢刊解題 3輯, 孤山遺稿, 민족문화추진회

411)영평정 이사가……하였다:숙종실록 2년(1676) 4월 12일 기사에 이 내용이 나온다.

412)촌수가 먼 종파(宗派)로서:번역 대본에 ‘以未裔宗派’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未’는 ‘末’이 타당하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13)지나치거나……아닙니다:번역 대본에 ‘過不中皆不及’으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中’은 ‘及’이, ‘及’은 ‘中’이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414)하소정(夏小正):대대례기(大戴禮記)의 편명이다.

415)혼조(昏朝):광해조(光海朝)를 말한다.

416)선왕들께서……곳입니다:번역 대본에 ‘先生養國老之所’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生’은 ‘王’이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417) 임금은 천하의 의표이니:번역 대본에 ‘君有萬國之表’로 되어 있으나, 기언 권52 속집 상고문십일명차(上古文十一銘箚)에 의거하여 ‘有’를 ‘惟’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18)여분(旅賁):창과 방패를 들고 왕의 수레를 좌우로 호위하는 벼슬아치이다.

419)관사(官師):낮은 벼슬아치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벼슬아치의 우두머리라고 하기도 한다.

420)사공(師工):악사(樂師)와 맹인(盲人)이라 하기도 하고, 맹인 악사라 하기도 한다. 잠언을 읽어주는 일을 하였다.

421)고사(瞽史):악사와 사관(史官)이다.

422)수레를……주었습니다:국어(國語) 초어 상(楚語上),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의 주주(朱注) 등에 나오는데, 미수(眉叟)는 시경의 주석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423)옛적에……새겼습니다:치평요람(治平要覽) 권1 주(周)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무왕이 즉위한 지 사흘 만에 사상보(師尙)를 불러 묻기를 “황제(黃帝)와 전욱(顓頊)의 도가 아직도 있는가?” 하니, 사상보가 대답하기를 “단서(丹書)에 있습니다. 듣고자 하신다면 재계(齋戒)를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무왕이 사흘을 재계한 뒤에 사상보가 단서를 받들고 읽었다. 그 단서에 이르기를 “공경이 나태를 누르는 자는 길하고 나태가 공경을 누르는 자는 망한다. 의로움이 욕심을 누르는 자는 순조롭고 욕심이 의로움을 누르는 자는 흉하다. 무릇 일이란 강직하지 않으면 굽고 공경하지 않으면 부정하게 된다. 굽은 자는 멸망하고 공경하는 자는 만세토록 잇는다.” 하였다. 무왕이 이 말을 듣고서 두렵게 여겨, 자리의 네 모서리, 거울, 목욕통, 기둥, 지팡이, 칼, 창 등에 명(銘)을 새겼다.

424)월령(月令):예기의 편명이다.

425)변무(卞誣)하는 일: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 등 중국의 역사서에 인조반정이 ‘찬탈’로 기록된 것을 바로잡으려던 일을 말한다. 당시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이 정사로, 정석(鄭晳)이 부사로 파견되었다.

426)경설(經說) 20편:역설(易說)이 4편, 예설(禮說)이 2편, 악설(樂說)이 5편, 정설(政說)이 2편이어서 도합 20편이 된다.

427)제노어(齊魯語):제논어(齊論語)노논어(魯論語)를 가리키는 말인 듯하며, 오늘날의 논어를 말한다.

428)기자(箕子)의 팔정(八政)의 교화:기자가 조선(朝鮮)에 와서 8조의 금법(禁法)을 만들어 백성을 교화했다고 한다. 그중 3개 조항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전하는데,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 배상하며,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주인의 노예가 되거나 50만 전(錢)을 내고 속죄한다고 하였다.

429)석노(石砮):번역 대본에 ‘石弩’로 되어 있으나, ‘弩’는 ‘砮’가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430)중중(衆仲)이……하였습니다:춘추좌씨전 은공(隱公) 4년에 나온다.

431)혼란했던 시대:광해군 때를 가리킨다.

432)이것이 무슨 정사입니까:번역 대본에 ‘此何故也’로 되어 있으나, 기언 권53 논정폐소(論政弊疏)에 의거하여 ‘故’를 ‘政’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33)어찌……없겠습니까:번역 대본에 ‘豈非哀矜變通之術也’로 되어 있으나, 위 자료에 의거하여 ‘非’를 ‘無’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34)친경에 대한 의논:번역 대본에 ‘親耕儀’로 되어 있으나, 기언 권49 속집 친경의(親耕議)에 의거하여 ‘儀’를 ‘議’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35)태침(太寢):천자(天子)가 정무(政務)를 보는 노침(路寢)을 말한다. 노침은 정전(正殿)이다.

436)노주(勞酒):친경(親耕)을 마치고 잔치를 열어 여러 신하들을 위로하는 의식이다.

437)밭갈이는……먹습니다:이 내용은 주례주소(周禮註疏),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예기집설(禮記集說) 등의 예서(禮書)에 실려 있다. 태뢰(太牢)는 소, 양, 돼지 등 3종의 희생을 갖춘 음식상이다. 왕이 먼저 먹고 공, 경, 대부가 차례대로 먹으며 서민이 나중에 먹는다. 신분에 따라 음식상의 등급을 차례차례 낮추는 것인지 아니면 음식을 먹는 순서를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438)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도 실려 있습니다:국조오례의 권2 길례(吉禮) 향선농의(享先農儀)에 실려 있다. 다만 국조오례의에 실려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적용하는 실제의 예법이므로 예서(禮書)에 실린 것과 취지는 같으나 내용은 다르다.

439)1천 묘를 다 갈고 나면:번역 대본에 ‘千畝旣從’으로 되어 있으나, 기언 권49 속집 친경의에 의거하여 ‘從’을 ‘終’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40)옛적에……때문입니다:주례주소(周禮註疏) 춘관총재(春官冢宰) 내재(內宰)의 주소(註疏)에 나오는 내용이다. 의례경전통해(儀禮經典通解)에 포함되어 있는 의례집전집주(儀禮集傳集注)의 주석에도 실려 있다.

441)왕제(王制):의례집전집주왕조례(王朝禮) 왕제(王制) 조항을 말한다.

442)내재(內宰):왕궁 안의 정령(政令)을 담당하는 벼슬아치이다.

443)육궁(六宮):고대에 천자의 황후는 정침(正寢)에 거처하였고, 3부인(夫人)과 9빈(嬪)과 27세부(世婦)와 81어처(御妻)는 5개의 연침(燕寢)에 나누어 거처하였다. 육궁은 이 여섯 처소를 말하며, 육궁의 사람들이란 이 처소에 거처하는 천자의 비빈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444)동륙(穜稑):늦벼를 동(穜)이라 하고 올벼를 육(稑)이라 한다.

445)교(郊) 제사와 체(禘) 제사:교 제사는 천자가 만민을 대표하여 하늘에 지내는 제사이고, 체 제사는 적자(嫡子)가 종족을 대표하여 시조(始祖)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446)전준(田畯):농무(農務)를 담당하는 벼슬아치이다.

447)고례(古禮):주례(周禮)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448)송제고사(宋齊古事)에……하였습니다:오례통고(五禮通考),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에 실려 있다.

449)왕제:의례집전집주왕조례(王朝禮) 왕제(王制) 조항을 말한다.

450)내외 명부(內外命婦):황제의 비(妃), 빈(嬪), 세부(世婦), 어처(御妻) 등을 내명부라 하며, 경, 대부(大夫)의 처(妻)를 외명부라 한다.

451)북교(北郊):북쪽 교외를 말한다. 부인은 순음(純陰)을 높이기 때문에 북쪽으로 나가는 것이다.

452)삼궁(三宮):천자는 6궁인데 제후는 그 절반이기 때문에 3궁이 된다.

453)소뢰(小牢):제사나 잔치에서 소, 양, 돼지를 희생으로 사용하여 상을 차리는 것을 태뢰(太牢)라 하고 양과 돼지만을 쓰는 것을 소뢰라 한다. 번역 대본에 ‘小牽’으로 되어 있으나, 예기 제의(祭義)에 의거하여 ‘牽’을 ‘牢’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54)옛날에는……일이었다:예기 제의(祭義)에도 실려 있는데, 미수는 의례집전집주에서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455)숭릉(崇陵):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의 능이다.

456)갑진년에 혜성이 나타나고:현종실록에 의하면, 1664년 10월 9일부터 진수(軫宿), 익수(翼宿), 누수(婁宿), 규수(奎宿)로 옮겨가면서 혜성이 관측되다가 이듬해 1월 6일에 사라졌으며, 2월 11일에 다시 혜성이 나타나서 3월까지 관측되었다.

457)임자년……않는다면:숙종실록 3년(1677) 5월 28일 기사에 의하면, 당시에 묘당에서 대신들이 모여서 각종 폐단을 바로잡을 변통절목을 만들어 시행하였는데, 그중 둔전에 대한 절목 가운데 “각 아문의 둔전 중에서 임자년(1672) 이후에 새로 설치한 것은 혁파한다. 수어청의 둔전 중에서 조모(調募)에 긴요한 곳은 신설한 곳이더라도 혁파하지 않는다.”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러므로 미수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458)나라가 분열되고 쪼개진다:논어 계씨(季氏)에 “지금 자로(子路)와 염유(冉由)는 계씨를 보좌하면서, 먼 지방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는데도 불러오지도 못하고 나라가 분열되고 쪼개지는데도 지키지도 못한다.” 하였다.

459)정총산(鄭蔥山):정언옹(鄭彦㝘:1545~1612)이다. 자는 우용(宇容)이다. 명종, 선조 시대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미수가 젊을 적에 정희성(鄭希聖)과 함께 총산에게 배웠다. 記言 卷20 蔥山先生墓碣

460)논공행상……했는데:당시 허자(許磁), 이기(李芑) 등 4인이 보익 일등공신(保翼一等公臣)에 책록되었는데, 일등공신의 자제까지 녹훈하라는 명종의 전교가 있었다. 국역 명종실록 즉위년 8월 30일

461)일찍이:번역 대본에 ‘常’으로 되어 있으나, 기언 별집 권4 변선무소(辨先誣疏)에 ‘嘗’으로 되어 있고 문리로 보아도 ‘嘗’이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462)문정조(文定朝):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8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친정 동생인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인종의 외척인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하였는데, 미수는 이 명종조(明宗朝)를 폄하하여 문정조라 한 것이다.

463)동각잡기(東閣雜記):이정형(李廷馨)이 지은 야사(野史)로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들어 있다.

464)대행왕(大行王)께서……않았습니다:대행왕은 인종(仁宗)을 가리키며, 대군은 왕위에 오르기 이전의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465)선정신(先正臣):퇴계 이황을 가리킨다.

466)선경(先卿):미수의 증조부인 허자를 가리킨다.

467)맹자가……하였다:맹자 고자 상(告子上) 16장에 “맹자가 말하기를 ‘천작이라는 것도 있고 인작이라는 것도 있다.[孟子曰 有天爵者 有人爵者] 인(仁), 의(義), 충(忠), 신(信)을 바탕삼아 선(善)을 즐기며 게을리 아니함은 천작이고, 경, 대부(大夫)는 인작이다. 옛사람은 천작을 닦았으며 인작은 따라왔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천작을 닦아서 인작을 추구하고 인작을 얻은 뒤에는 천작을 버리니, 매우 미혹한 것이다.” 하였다. 번역 대본과 자구(字句)의 차이가 다소 있으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번역하였다.

468)춘장(春場):식년시, 별시 등의 문과(文科) 시험을 말한다. 주로 봄에 실시하였다.

469)내가……하였다: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 7장에 나온다.

470)끝을……하라:서경 태갑 하(太甲下)에 나온다.

471)스스로……않았다: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온다.

472)아약(兒弱)과……있는데:아약은 어린이이고, 물고는 죽은 사람이다. 당시에 1인당 대략 2필의 베를 징수하였는데, 강보에 싸인 어린이, 이미 죽은 사람, 도망간 사람 등에게까지도 부세를 부과하여 베를 거두었으며, 당사자가 베를 내지 못할 경우에는 이웃이나 친족에게 부과하여 거두었다.

473)방국(邦國)과 도비(都鄙):방국은 제후국을 말하며, 도비는 천자 나라의 도회와 시골을 말한다.

474)상위(象魏):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나라의 법령을 게시하는 장소를 말한다. 대개 대궐의 문(門)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대궐 또는 대궐 문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475)임하기를……권면됩니다:논어 위정(爲政) 20장에 나온다.

476)새로워지는 백성을 진작시킨다:서경 강고(康誥)에 나온다.

477)중훼지고(仲虺之誥):서경의 편명이다.

478)탕(湯) 임금의……하였고:대학장구전(傳) 2장에 나온다.

479)오직……것이다:서경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나온다.

480)부지런히……하소서:번역 대본에 ‘孜孜益新 聖敬日勤’으로 되어 있으나, 기언 권54 속집 진군덕일신잠잉걸귀차(進君德日新箴仍乞歸箚)에 ‘孜孜益勤 聖敬日新’으로 되어 있고 문리로 보아도 ‘新’과 ‘勤’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 타당할 듯하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81)전에……것:효종실록 10년(1659) 2월 8일 기사에 의하면, 병조 참지 유계(兪棨)가 도망한 자, 죽은 자, 노약자 등의 이름을 군적(軍籍)에서 삭제하여 군역(軍役)을 덜어주고 그 대신에 사족(士族)들에게 베를 거두어 그 부족분을 보충하자고 건의하였다.

482)부포(夫布):일정한 직업이 없는 자들에게서 거두던 일종의 주민세이다.

483)사민(四民):사(士), 농(農), 공(工), 상(商)을 말한다.

484)숙향(叔向)이……하였습니다:춘추좌씨전 소공(召公) 6년에 나온다.

485)비록……않았지만:번역 대본에 ‘終不得罪於明時’로 되어 있으나, 기언 별집 권4 고귀진언차(告歸進言箚)에 ‘終’이 ‘縱’으로 되어 있고 문리로 보아도 ‘縱’이 타당하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86)측근의 사람들을:번역 대본에 ‘便侫’으로 되어 있으나, 기언 별집 권4 진언차(進言箚)에 ‘便嬖’로 되어 있고 문리로 보아도 ‘嬖’가 타당하므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487)요 임금은……하였으며: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온다.

488)탕 임금은……꾸짖었으니:은(殷)나라 탕(湯) 임금이 가뭄이 7년 동안 이어지자 자기 몸을 희생으로 삼아 상림(桑林)의 들판에 가서 기도하며 여섯 가지 일로 자책하였다. 여섯 가지는, 정치가 절도가 없는가, 백성이 직업을 잃었는가, 궁실이 너무 큰가, 여알(女謁)이 성행하는가, 뇌물이 행해지는가, 참소하는 자들이 설치는가 등이다. 十八史略 殷 殷王成湯

489)반성하며……일들입니다:번역 대본에 ‘反身修德之本也’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本’은 ‘事’가 타당할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490)질병은 성인께서도 조심하셨습니다:논어 술이(述而)에 “부자(夫子)께서 조심하신 것은 재계(齊戒)와 전쟁과 질병이셨다.” 하였다.

491)옛적에……것입니다:논어 위정(爲政)에 이 내용이 나온다.

492)무왕(武王)과……하였습니다:대대례기, 의례경전통해, 패문운부 등에 실려 있다.

493)안영(晏嬰)이……헐었습니다:춘추좌씨전 소공(昭公) 3년에 나온다. 제(齊)나라의 안영이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간 뒤에 제나라 경공(景公)이 안영의 집이 시장에 가까운 누추한 곳에 있어서 시끄럽고 불편하다고 하여 집터를 새로 잡아서 새 집을 지어주었다. 안영이 돌아와서 경공에게 사은(謝恩)하고는 집을 헐고 원래대로 복구하여 이전에 그 터에 살던 사람들에게 다시 와서 살게 하였다.

494)황 익성공(黃翼成公):황희(黃喜)이다. 익성은 황희의 시호이다.

495)이 문충공(李文忠公):이원익(李元翼)이다. 문충은 이원익의 시호이다.

496)도당씨(陶唐氏) 때의 격양가(擊壤歌):옛날 요(堯) 임금 때에 천하가 태평성대가 되어 백성들이 잘살게 되자 나이 팔구십 되는 노인들이 땅을 치고 배를 두드리며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노래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는구나.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 밥을 먹네.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람.”이라 하였다.

497)옥루(屋漏)에도……하여:옥루는 방의 서북쪽 모퉁이를 말한다. 대개 이곳은 방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서 신주(神主)를 안치하는 장소이다. 옥루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방에 은밀히 혼자 있을 때에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498)함흥(咸興) 본궁(本宮)의 네 왕(王):함흥부에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살던 옛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태조(太祖)의 선대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와 그들의 후비(后妃)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499)경방(京房)이……하였고:한서(漢書) 권27 오행지(五行志)에 “경방의 역전(易傳)에 ‘소인이 집을 허물면[小人剝廬] 그 요얼로 산이 무너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을 일러 음이 양을 탄 것이며 약이 강을 탄 것이라고 이른다.’ 하였다.” 하였다. “소인이 집을 허물면”이라는 것은 주역 박괘(剝卦)에 나오는 말인데, “박괘의 상구(上九)의 자리를 소인이 차지하고 있으면 집을 허물게 된다. 그리되면”이라는 뜻이다.

500)유흠(劉歆)은……하였습니다:한서 권27 오행지에 나온다.

501)태무(太戊)의 상상(祥桑):사기(史記) 권3 은본기(殷本紀)에 나온다. 은나라 태무 임금 때에 뽕나무와 닥나무가 한 등걸에서 자라는 재변이 생겼는데, 태무가 재상 이척(伊陟)의 간언을 듣고 덕을 닦자 그 나무가 말라 죽었다고 한다.

502)무정(武丁)의 구치(雊雉):사기 권3 은본기에 나온다. 무정(武丁)이 탕(湯) 임금을 제사할 때에 꿩이 솥귀에 올라앉아 우는 재변이 일어났는데, 신하 조기(祖己)의 간언에 따라 무정이 덕을 닦아 은나라가 부흥하게 되었다고 한다.

503)진 시황(秦始皇)……듯합니다:박랑사(博浪沙)는 지명이다. 한(韓)나라가 진(秦)나라에게 멸망당하자, 한나라에서 대대로 벼슬하던 명문 집안 출신인 장량(張良)이 한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역사(力士)를 고용하여 박랑사에서 진 시황을 철퇴로 저격하였는데, 철퇴가 빗나가 저격에 실패하였다. 진 시황은 범인을 잡으려고 천하에 명령을 내려 열흘 동안 대대적으로 수색하였다. 사기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자치통감 권7 진기(秦紀) 시황제(始皇帝) 등에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대색십일(大索十日)’이라고 하였다.

504)상께서도 사형을 감면하여:번역 대본에 ‘自上亦待之不死’로 되어 있으나, 기언 별집 권4 청물죄인가율차(請勿罪人加律箚)에 의거하여 ‘待’를 ‘貸’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505)하늘은……흠향합니다:서경 태갑 하(太甲下)에 나오는 글과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506)착한……망합니다:서경 태갑 하에 “덕이 있으면 다스려지고 덕이 없으면 혼란해진다.[德惟治 否德亂]” 하였다. 집전(集傳)에서는 ‘否德’을 ‘덕이 없으면[無是德]’이라고 풀이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아래의 ‘否德之積’과 맞추기 위해 ‘악한 덕’으로 번역하였다.

507)착한……불러옵니다:서경 이훈(伊訓)에 “상제는 마음이 불변이 아니어서, 착한 일을 하면 온갖 상서를 내리고 착하지 않은 일을 하면 온갖 재앙을 내린다.[惟上帝不常 作善 降之百祥 作不善 降之百殃]” 하였는데, 이것을 응용한 것이다.

508)하늘의 경계를……마소서:시경 대아(大雅) 판(板)에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여 감히 안일하게 지내지 말며, 하늘의 변덕을 공경하여 감히 사냥이나 즐기지 말라.[敬天之怒 無敢戱豫 敬天之渝 無敢馳驅]” 하였는데, 이것을 응용한 것이다.

509)제(齊)나라……같습니다:관중(管仲)은 춘추 시대에 제나라 환공(桓公)을 패자(覇者)가 되도록 보좌한 인물이다. 환공이 관중의 의견을 존중하여 의례(儀禮) 절차를 모두 관중에게 물어서 시행하게 했던 고사가 있다. 資治通鑑 卷61 漢紀 孝獻皇帝

510)어찌……자처하면서:번역 대본에 ‘安敢自處與無罪者’로 되어 있으나, 기언 권52 속집 사식물차(辭食物箚)에 의거하여 ‘者’ 다음에 ‘同’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511)자사(子思)가……까닭입니다:자사는 공자의 손자로 이름은 급(伋)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노(魯)나라 목공(穆公)이 자주 문안하고 자주 고기를 하사하였는데, 자사가 불쾌하게 여기다가 마침내는 심부름 온 자를 문 밖으로 내보내고 머리를 조아리며 두 번 절하고 그 고기를 받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이제야 임금이 나를 개나 말을 기르듯이 기른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하였다.

512)6년……당하였다:정원로(鄭元老)가,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과 함께 역모를 하였다고 고변하여 큰 옥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남인(南人)이 대거 축출되고 서인(西人)이 집권하였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고 한다.

513)홍수(紅袖)의……일:홍수는 궁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1675년(숙종1)에 복창군 이정(李楨)과 복평군 이연(李㮒)이 궁중에 출입하면서 궁녀 상업(常業), 귀례(貴禮) 등과 관계를 맺어오다가 이 일이 드러나 귀양을 갔는데, 이 당시에 미수는 청대(請對)하여 이들을 변호하였다.

514)홍남파(洪南坡):홍우원(洪宇遠:1605〜1687)이다. 자는 군징(君徵)이고 남파는 호이다. 1645년(인조23)에 왕세자 책봉을 경하하는 경과(慶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조 판서, 예조 판서 등을 지내고 1680년(숙종6) 경신환국 때에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 이정(李楨)과 이연(李㮒)의 홍수(紅袖)의 변고를 다스릴 때에 대비(大妃)가 간여하자, 홍우원이 주역 가인괘(家人卦)를 인용하여 여자가 조정의 일에 간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515)진황(秦皇)이……않았으나:진 시황 34년에 시(詩), 서(書) 등의 각종 서적을 불태웠으며 35년에 유학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당시에 주역은 복서(卜筮)를 다루는 책이라는 이유로 분서(焚書)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516)석막(石幕):부령(富寧) 일대를 말한다. 명천(明川)은 함경도 최북단 지역의 남쪽에 있다.

517)읍루(挹婁):백두산 서북쪽의 만주 벌판에 정착해 살던 종족 이름이다. 홍우원의 유배지인 명천 지역이 만주를 거쳐 멀리 사막에까지 이어지는 궁벽한 곳이라는 말이다.

518)곤궁……즐기며:주역 곤괘(困卦) 단전(彖傳)에 “곤궁하여도 형통한 바를 잃지 않는다.[困而不失其所亨]” 하고, 그 전(傳)에 “비록 곤궁하고 험난한 상황에 있더라도 천명을 즐기고 의리에 편안하여 스스로 그 기쁨을 얻는다. 시대가 비록 곤궁하나 처신이 의리를 잃지 아니하면 그 도가 절로 형통해진다.” 하였다.

519)천도는……있네: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문을 닫음을 곤(坤)이라 하고 문을 엶을 건(乾)이라 한다. 닫혔다가 열렸다가 하는 것을 변(變)이라 하고 그 반복이 끊임이 없음을 통(通)이라 한다.” 하였다. 하늘의 이치가 고정불변인 것이 아니라 변화하듯이 사람의 처지도 불우한 때도 있고 형통한 때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늘의 이치가 선(善)과 정의 쪽으로 귀결되므로 선인(善人)은 곤궁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말이다.

520)곤(困)은……시험한다네: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곤은 덕을 분변하는 것이다.[困 德之辨也]” 하고, 그 본의(本義)에 “곤은 그것으로 스스로 그 힘을 시험한다.[困 以自驗其力]” 하였다. 곤궁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보고 스스로 내면 수양의 정도를 판단한다는 말이다.

521)고려(高麗)……지었다:기언 권58 고려 서 장령 묘기(高麗徐掌令墓記)에는 이 다음해인 숙종 8년 4월 상순 경진일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실제 4월 경진일은 숙종 7년이 아닌 8년에 있는 갑자이므로 연보의 이 부분은 오류인 듯하다.

522)서회(書懷) 3수:기언 권57 산고속집에 우언(偶言)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523)무성무취의……않았네: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 無聲無臭]” 하였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부자께서 성(性)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었다.” 하였다. 지극한 천도에 대해서는 공자도 별로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524)화복은……모인다네:문선(文選)에 실린 가의(賈誼)의 복조부(鵩鳥賦)에 “화(禍)는 복(福)이 붙어 있는 곳이고 복은 화가 숨어 있는 곳이라네. 근심과 기쁨이 한 집에 모이고 길함과 흉함이 같은 장소에 있네.” 하였다.

525)금인(金人)의……있나니:219쪽 주 76) 참조.

526)서회(書懷):기언 권57 산고속집에 부지산외사(不知山外事)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527)만목춘오(萬木春塢):기언 권55 속집 거실(居室)에는 ‘塢’가 ‘隖’로 되어 있다.

528)감동이……법:주역 함괘(咸卦) 구사효(九四爻)의 전(傳)에 나오는 말인데, 근사록(近思錄) 도체(道體)에 인용되어 있다.

529)은인(殷人)이 귀신을 공경하였으니:은인은 공자를 가리킨다. 논어 옹야(雍也)에 “번지(樊遲)가 지(知)를 여쭈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힘쓰고 귀신을 경건히 대하되 멀리하면 지(知)라고 할 수 있다.’ 하셨다.” 하였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나는 은나라 사람이다.[丘也 殷人也]” 하였다. 근사록 도체 등을 보면, 대개 천지의 공용[天地之功用], 조화의 자취[造化之迹], 두 기의 양능[二氣之良能] 등으로 귀신을 설명하고 있다.

530)옥당(玉堂)……받았다:숙종실록 10년 1월 기사에 의하면, 당시에 홍만조(洪萬朝)는 홍문관 수찬이었고 이현조(李玄祚)는 예문관 대교였다.

531)이 문순공(李文純公)의 전례(前例):이 문순공은 이황(李滉)이다. 1570년(선조3)에 이황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집안에서 행장을 갖추어 시호를 청하는 일을 하지 않자, 조정에서 행장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특례로 시호를 내리는 일의 적합성 여부를 논란하다가 1576년에 시호를 내렸다.

532)일찍……같았고:미수는 이원익(李元翼)을 종유하다가 그의 손서(孫婿)가 되었는데, 이는 당나라 때에 이한(李漢)이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제자이자 사위였던 것과 비슷하다.

533)만년에……같았다:서백(西伯)은 왕호를 받기 이전의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말한다. 여망(呂望)은 태공망(太公望)이다. 태공망이 주(紂)의 학정을 피해 은둔해 살다가 서백이 노인 봉양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백에게로 가서 벼슬하여, 뒤에 서백의 아들 무왕(武王)이 천하를 평정할 때에 무왕을 보좌하였다.

534)그림자를 쏘는 화살:논형(論衡) 언독편(言毒篇)에 의하면, 고대에 중국 남부 지방의 강물 속에 자라처럼 생긴 동물이 살았는데 눈이 없고 귀가 매우 밝아서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 모래를 머금었다가 쏘기도 하고 물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를 향해 독을 쏘기도 하였다 한다. 타인을 중상모략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535)절개가……길(吉)하니:주역 예괘(豫卦) 육이효(六二爻)에 “육이(六二)는 절개가 돌과 같아서 하루해가 다 가기 전에 떠나니 정(貞)하고 길하다.” 하였다.

536)방에 들어오는 창:후한(後漢) 때에 하휴(何休)가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저술하니, 정현(鄭玄)이 그에 반박하는 내용의 발묵수(發墨守), 침고황(鍼膏肓), 기폐질(起廢疾)을 썼는데, 하휴가 보고 탄식하기를 “강성(康成)은 내 방에 들어와 내 창을 가지고 나를 치는가?”라고 했다 한다. 이를 ‘입실조과(入室操戈)’라 하며, 상대의 이론을 이용하여 상대를 공격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후한서(後漢書) 권35 정현열전(鄭玄列傳)에 나온다.

537)행장(行藏)은……맞았으며:행장은, 논어 술이(述而)에 “써주면 나가서 도를 행하고 써주지 아니하면 도를 품고 은둔해 살아간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이것을 용사행장(用舍行藏), 또는 용행사장(用行舍藏)이라 한다. 논어 미자(微子)에 “유하혜(柳下惠)와 소련(少連)은 뜻을 낮추고 몸을 욕되게 살았으나 말이 윤리에 맞았으며 행실이 생각에 맞았다.” 하였고, 또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은 숨어 살면서 말을 멋대로 하였으나 몸이 맑음에 맞았고 폐치됨이 권도에 맞았다.” 하였다.

538)덕행에……않았다:번역 대본의 ‘武德’은 ‘懋德’의 오류로 보아 고쳐서 번역하였다. 숙종 즉위 초에 미수가 올린 글에 덕행을 힘써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다만 오류가 아니라면 ‘武德’은 무정(武丁)을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은 고종(殷高宗) 무정이 삼년상을 마치고 부열(傅說)을 발탁하여 정승을 삼고 말하기를 “금(金)이라면 너를 써서 숫돌을 삼을 것이며, 큰 강을 건넌다면 너를 써서 배와 노를 삼을 것이며, 큰 가뭄이 들면 너를 써서 비를 삼을 것이다. 네 마음을 열어 내 마음에 물을 대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는 무정이 즉위 초에 부열에게 자신을 잘 보좌할 것을 부탁하는 말이다. 서경 열명(命說)에 나온다.

539)이윤(伊尹)에게처럼……하였다:이윤은 은나라의 현인으로서, 이름이 지(摯)이다. 이윤이 신야(莘野)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가 탕(湯) 임금이 세 차례나 초빙하자 나와서 탕 임금을 보좌하였다.

540)풍헌(風憲)의 장관을 맡기니:미수는 1674년(숙종 즉위년) 11월에 대사헌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541)전형(銓衡)을 담당하게 하였더니:미수는 1675년(숙종1)에 이조 참판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곧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542)북신(北辰)에……적석(赤舃)이었고:북신은 궁궐 또는 임금을 뜻하며, 소미성(少微星)은 처사(處士) 또는 대부(大夫)를 가리킨다. 황비(黃扉)는 재상의 거처 또는 재상을 가리키며, 적석은 고대에 천자나 제후, 또는 높은 벼슬아치가 신던 붉은 가죽신이다. 궁궐에 조회하는 미수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543)남극에……단심(丹心)이었다:삼태성(三台星)은 삼정승을 의미한다. 단심은 미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544)갈아도……않으니:논어 양화(陽貨)에 “단단하다 하지 않으랴,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하얗다 하지 않으랴,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하였다.

545)지주(砥柱):황하(黃河) 중류에 우뚝 서 있다는 돌기둥을 말한다. 역경과 고난에 맞서서 변함없이 버티어나가는 큰 인물의 지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546)영광전(靈光殿):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아들 노 공왕(魯恭王)이 세운 궁전으로 산동(山東) 곡부현(曲阜縣)에 있었다. 한나라 중기에 도적떼에 의하여 다른 궁전들이 다 파괴되었을 때에 영광전만 우뚝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문선(文選) 권11에 동한(東漢) 때의 왕문고(王文考)가 지은 노영광전부(魯靈光殿賦)가 실려 있다.

547)성의가……못하였고:이방(李昉)은 송나라의 대학자이다. 이방이 사공(司空) 벼슬에서 치사(致仕)하고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지도(至道) 원년(995)에 태종(太宗)이 수레를 보내 이방을 초빙하여 몸소 술을 따라주고 좋은 안주를 가려서 하사하였다.

548)예의야……못하였다:위징(魏徵)은 당나라 태종 때의 명재상이다. 직간(直諫)으로 태종을 바르게 보필하였다. 통감절요 당기(唐紀)에 “위징이 태종에게 아뢰기를 ‘신이 다행히 폐하를 섬기게 되었는데, 폐하께서는 신을 양신(良臣)이 되게 하시고 충신(忠臣)이 되게 하지 마소서.’ 하자, 태종이 ‘충신과 양신이 다른가?’ 하니, 위징이 ‘직(稷), 설(契), 고요(皐陶)는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합쳐 함께 존영(尊榮)을 누렸으니, 이들은 충신이며, 용방(龍逢), 비간(比干)은 면전에서 간쟁을 하다가 자신들은 죽고 나라는 망했으니, 이들은 충신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기뻐하여 비단 500필을 하사하였다.” 하였다.

549)오피궤(烏皮几):검은 염소가죽으로 장식한 작은 의자를 말한다.

550)비둘기……것은:태평어람(太平御覽) 권383 인사부(人事部)에 “나이 일흔이 된 노인에게 옥장(玉杖)을 내리는데 길이는 9척(尺)이고 지팡이 머리에 비둘기 모양을 새겨 꾸민다. 비둘기는 목이 메지 아니하는 새이므로, 노인이 목이 메지 말라는 뜻으로 그렇게 한다.” 하였다. 후한서 예의지(禮儀志)에도 “나이 여든 아흔이 된 노인에게 옥장을 내린다.” 하였고, 위와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예문유취(藝文類聚) 권92 조부(鳥部) 구(鳩)에, 풍속통(風俗通)의 말을 인용하여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項羽)와 싸우다가 패하여 숲속에 숨었는데 항우가 추격해 왔다. 그때 비둘기가 그 숲 위에서 우니, 추격하던 자들이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는 그냥 지나갔다. 그리하여 그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한 고조가 즉위한 뒤에 그 새를 기특하게 여겨 구장(鳩杖)을 만들어서 노인들에게 하사하였다.” 하였다.

551)오피궤를……있다:원문 ‘賜烏皮而便身 漢事然也 飾鳩像而禁噎 周制存焉’은 전거(典據)의 정황으로 보건대 ‘漢事然也’와 ‘周制存焉’의 위치가 바뀌어야 타당할 듯하다.

552)영수(靈壽):영수목(靈壽木) 또는 영수목으로 만든 지팡이를 말한다. 영수목은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고 지팡이를 만들기에 적합한 나무라고 한다.

553)마른 오동나무:은자(隱者)가 기대어 앉는 궤안(几案)을 말한다. 장자 덕충부(德充符), 제물론(齊物論) 등에 나온다.

554)조정에서……나이:예기 왕제(王制)에 “쉰 살에 집안에서 지팡이를 짚고 예순 살에는 마을에서 지팡이를 짚고 일흔 살에는 하사받은 지팡이를 짚고 나라 안을 다닐 수 있으며 여든 살에는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을 수 있다. 아흔이 된 사람에게는 천자(天子)가 물을 일이 있으면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하였다.

555)큰 산과 큰 강: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는 대표적인 산과 강을 말한다.

556)기성(箕星)과 미성(尾星):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傅說)이 죽어 별이 되어 기미(箕尾)를 타고 열성(列星)과 나란하게 되었다.” 하였다. 부열은 은(殷)나라 고종(高宗) 무정(武丁)의 명재상이다. 미성 뒤에 작은 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부열성(傅說星)이라 한다.

557)서체가 꾸불꾸불 웅건했다:주(籒)는 주(周)나라 태사(太史)였던 인물로서 그가 만든 서체를 주문(籒文)이라 하는데 서체가 대전(大篆)과 비슷하다고 한다. 창(蒼)은 황제(黃帝) 때에 새 발자국을 보고 과두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창힐(蒼詰)을 말한다. ‘籒骨蒼筋’은 미수의 전서(篆書) 서체가 태사 주가 만든 주문의 골격과 창힐이 만든 과두문자의 힘줄과 같다는 뜻이다.

558)명성은……같았다:시경 학명(鶴鳴)에 “학이 늪지대 깊은 곳에서 울어도 그 소리가 들판에까지 들린다. 학이 늪지대 깊은 곳에서 울어도 그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린다.” 하였다. 현인이 깊은 시골에 은둔해 살아도 그 명성이 크게 알려지게 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559)속백(束帛)에 벽옥(璧玉):비단 예물에 벽옥을 더하는 것으로서, 인재를 초빙할 때에 사용하는 최고의 예물을 뜻한다.

560)성조(聖祖)께서……두었더니:성조는 효종을 말한다. 미수는 효종 때에 지평,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561)기해년에 성조께서 승하하시자:기해년은 1659년이다. 이해에 효종이 승하하였다.

562)영고(寧考):돌아가신 선친을 말한다. 숙종의 선왕인 현종을 가리킨다.

563)태산과……베풀어졌고:높고 큰 산이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원을 생산하고 보유하여 사람들에게 그 자원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듯이, 미수가 조정에 우뚝 자리 잡고 있으니 그 은택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졌다는 뜻이다.

564)구정(九鼎)과……진정되었다:구정은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아홉 나라에서 조공으로 받아들인 쇠를 녹여서 만든 아홉 개의 큰 솥이다.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때까지 국보로 전수되었다고 한다. 대려(大呂)는 주나라 종묘에 있던 큰 종의 이름이다. 구정과 대려는 매우 중요하고 명망이 있는 인물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565)약석(藥石):병을 치료하는 약제(藥劑)와 폄석(砭石)이다. 잘못을 바로잡도록 규계(規戒)하는 말의 비유로 사용한다.

566)경신년에……망극하였다:경신년은 1680년(숙종6)이다.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된 경신환국 때의 일들을 말한다.

567)시세를……기르니:번역 대본에 ‘遵養時邁’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邁’를 ‘晦’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568)사람을……배반하니:번역 대본에 ‘鞠人忮背’로 되어 있으나, 문리로 보아 ‘鞠’을 ‘鞫’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569)기영(箕潁):기산(箕山)과 영수(潁水)를 말한다. 옛날 요 임금이 현인(賢人) 허유(許由)한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하자 허유가 사양하고 기산 아래 영수의 북쪽에 은거해 살았다. 은거해 사는 현인을 가리키거나 은거하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미수가 허유에 견줄 만하다는 뜻이다.

570)수사(洙泗):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이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지역에 있었으며 공자가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으므로 공자 및 유가(儒家)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571)천인(天人)의 학문:천리(天理)와 인사(人事)에 대한 학문을 말한다.

572)도산(陶山)의……받았다: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에 소속되며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스승으로 모셨음을 말한다.

573)하늘과……같았다: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건(乾)은 쉬움[易]으로써 주장[知]하고 곤(坤)은 간략함[簡]으로써 능하다. 쉬우면 알기 쉽고 간략하면 따르기 쉽다.” 하였다.

574)꿈에서 아시고: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의하면,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꿈에 천제(天帝)가 훌륭한 보필을 내려주었으므로 고종이 잠에서 깬 뒤에 꿈에서 보았던 모습을 그려서 그 사람을 찾았는데, 부암(傅巖)의 들판에서 부열을 찾아내어 정승을 삼았다고 한다. 미수의 등용을 부열의 등용에 견주어 말한 것이다.

575)영고(寧考):경종의 선왕인 숙종을 가리킨다.

576)큰……같았다:구(球)는 구옥(球玉) 또는 옥경(玉磬)이며, 유(卣)는 제사에 쓰이는 귀한 술병이다. 모두 나라의 보배라는 의미로 쓰인다.

577)그림은……반사했고:번역 대본에 ‘圖頒魚水’로 되어 있으나, 숙종실록 1년 11월 25일 기사에 의거하여 ‘魚’를 ‘舟’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숙종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주수도(舟水圖)를 그리게 하고 친히 글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였으며, 신하들에게 보이며 경계한 적이 있다. 269쪽 주 59) 참조.

578)금성(錦城):나주(羅州)의 옛 이름이다. 미수의 외가(外家) 고을이다.

579)은반(殷盤)과 주고(周誥):은반은 서경 상서(商書)에 있는 반경 상(盤庚上), 반경 중, 반경 하를 말하며, 주고는 서경 주서(周書)에 있는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소고(召誥), 낙고(洛誥)를 말한다.

580)목(穆)에……된다:미수 연보 세계도(世系圖)에 의하면, 22세가 된다.

581)실직은……땅이었다:실직(悉直)은 삼척 지역에 있던 옛날의 나라 이름이다.

582)금상(今上)……되었다:미수 연보에 의하면, 미수가 대사헌에 제수된 것은 숙종 즉위년인 1674년 11월이다.

583)춘(輴):183쪽 주 10) 참조.

584)보기(寶器):184쪽 주 12) 참조.

585)우보(羽葆):184쪽 주 13) 참조.

586)성삼계삼(聲三啓三):184쪽 주 14) 참조.

587)벽(椑):184쪽 주 15) 참조.

588)군자는……여겨진다:논어 자장(子張)에 “군자는 한 마디 말에 지혜롭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지혜롭지 못하다고 여겨지기도 하니, 말은 삼가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589)요순우상전심법도(堯舜禹相傳心法圖):기언 권50 속집에는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590)이어서 이룬다[賡載]:서경 익직에, 고요(皐陶)가 순(舜)의 노래에 이어 화답하는 노래를 부른 것을 갱재가(賡載歌)라 하였다. 임금의 말이나 노래에 신하가 화답하는 것을 갱재라고 한다.

591)맞으러……잇달았고:‘浚之郊’는 준읍(浚邑)의 교외이고 ‘渭之濱’은 위수(渭水) 물가를 말한다. 시경 간모(干旄)에 “펄럭이는 소 꼬리털 깃발이여. 준읍의 교외에 있구나.” 하였다. 준읍은 위(衛)나라 읍명(邑名)인데, 위나라 대부가 수레에 소 꼬리털 깃발을 꽂고서 준읍으로 현자(賢者)를 만나러 가는 모양을 형용한 내용이다. 위수 물가는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낚시질을 하고 있던 강태공(姜太公)을 발탁한 곳이다. 미수가 살고 있던 곳으로 미수를 초빙하러 오는 임금의 사신이 잇달았음을 비유한 것이다.

1)구용(九容):옛날 군자가 수신하고 처세할 적에 견지해야 하는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발걸음을 경망하게 하지 않고, 손으로 아무 데나 어지럽게 가리키지 않고, 눈은 흘겨보지 않고, 말을 경박하게 하지 않고, 목소리를 온화하게 하여 괴상한 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를 곧게 세워 마구 갸우뚱거리거나 돌아보지 않고, 기운을 엄숙하게 하고, 서 있을 때에는 바르게 서서 덕 있는 기상을 지니고, 낯빛을 장중하게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는 것이다. 禮記 玉藻

2)사물(四勿):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하기 위한 실천 지침으로 제시한 네 가지 금기 사항으로,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마음을 동하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는 것이다. 論語 顔淵

3)반시(泮試):성균관의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수학하는 유생들에게 보인 시험이다.

4)태학사(太學士):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의 이칭이다.

5)택당(澤堂):이식(李植:1584~1647)의 호이다.

6) 무슨……면직되었다가:1653년 2월 26일에 연석(筵席)에서 효종이 “근래 대관들이 한마디도 없이 조용한데 어찌 조정에 잘못된 일이 없겠는가.……양사의 장관을 모두 체차시키고 싶다.”라고 하자 그 이튿날인 27일에 대사헌, 대사간과 함께 양사의 관원들이 인피하였는데, 옥당의 차자에 따라 김수항 등 대부분의 양사 관원들이 체차되었다. 孝宗實錄 4年 2月 26日, 27日

7)복역(覆逆):승정원에서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고 복계(覆啓)하여 반대하는 것을 말한다.

8)퇴우(退憂):김수흥(金壽興:1626~1690)의 호이다.

9)추고(推考):죄과 있는 관원을 신문하여 그 죄상을 고찰하는 것으로, 관원에 대한 일종의 징계 조치이다.

10)폐모소(廢母疏):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를 억누르기 위해 뼈를 능묘에 묻고 잘라낸 고깃점에 임금의 이름을 써서 까마귀와 솔개에게 먹이는 등 저주를 하고 자신의 아들인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고 주장하며 폐출하라고 청한 상소를 말한다. 光海君日記 9年 11月 28日

11)동춘(同春):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호이다.

12)기(紀):햇수를 세는 단위로, 1기는 12년에 해당한다.

13) 대국(大國)은……있다: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문왕(文王)을 본받으면 큰 나라는 5년, 작은 나라는 7년 만에 반드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라고 한 것을 인용한 말이다.

14)주 선왕(周宣王)과 한 광무제(漢光武帝):모두 쇠퇴한 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이다.

15)위 무공(衛武公)은……하는데: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의 장하 주(章下註)에 국어(國語) <초어(楚語)>에 있는 좌사(左史) 의상(倚相)의 말을 인용하기를, “옛날 위 무공은 나이가 95세였는데도 도성 안에 경계하여 말하기를, ‘조정에 있는 자들은 모두 내가 늙었다 하여 나를 버리지 말고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공손히 하고 조심하여 나를 경계시키라.’ 하였다.” 하고 언제 어디서든 경계의 뜻을 담은 글과 말을 가까이하였다고 하였다.

16)보전(寶篆):죽은 왕이나 왕비의 존호(尊號)를 새긴 도장을 금보(金寶)라고 하는데, 여기에 전자체(篆字體)로 쓰는 글씨를 말한다. 이때 김수항은 보전문 서사관(寶篆文書寫官)이었다.

17) 수리(修理)를 감독하던 중관(中官):차지 중사(次知中使)였던 내관 윤완(尹完)을 가리킨다. 顯宗實錄 1年 7月 26日

18)지평……논죄하였는데:현종실록(顯宗實錄) 1년 6월 11일에 정언 이지익이 대사간 이정기(李廷夔) 등과 함께 “전라우수사 이동현(李東顯)이 쌀과 베를 배 1척에다 가득 싣고 그 배까지 싸잡아서 이조 참판의 집으로 보냈는데 이조 참판 이응시(李應蓍)가 그 서간을 받지 않고 전임자에게 떠넘겼고, 전임 참판 이일상(李一相)도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여 쌀 실은 배가 오래도록 강가에 정박하고 있다는 소문이 몹시 자자하게 전파되고 있습니다.”라며 이동현을 뇌물죄로 다스릴 것을 청한 일이 보이고, 12일에는 이 일을 덮어두려 했다는 이유로 이지익이 이응시와 이일상을 탄핵한 일이 보인다. 또 현종실록 2년 9월 17일에는 지평 이지익이 위의 일로 인피하면서 “일찍이 호서(湖西)에서 방백에게 간청하여 군영의 미곡을 아산현(牙山縣)에서 받아내 배를 이용해 집으로 운반한 뒤, 그 적곡(糴穀)을 전의현(全義縣)에 이록(移錄)시켜 황조(荒租)로 대납(代納)하고는 민간에 나누어 주게 하여 미곡으로 바꿔서 징수하게 하였다.”라고 이일상의 또 다른 죄상을 아뢴 일이 보인다. 여기에서는 이일상이 호서의 군량미를 실은 배를 받은 것만 논죄했다고 하였으나, 실은 위의 두 가지 일을 함께 논한 것으로 보인다.

19)문형(文衡):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을 이른다.

20)양관(兩館):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을 이른다.

21)정청(政廳):인사 행정을 담당한 이조, 병조의 관원이 궁중에서 정사를 보는 곳을 이른다.

22)북로(北路):함경도를 가리킨다.

23) 대신의……명하고:약방 도제조 정태화(鄭太和)가 현종과 면대하여 관원에 대한 처벌이 심하여 국사를 집행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하자, 현종이 “이조 당상과 낭청에 대해서는 체직 추고만 하고 파직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한 것을 이른다. 顯宗改修實錄 5年 4月 20日

24)관북(關北):함경도를 가리킨다.

25) 고공(雇工)과……폐단:조선 시대에 북방의 변경이 안정되기 전에는 함경도의 거주민들이 모두 변경 수비의 임무를 지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생업에 지장이 있게 되자,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을 고공으로 정해 주어 농사일을 대신하게 하고 토착민 중에 솔정(率丁)을 정해 주어 물품을 공급하게 하였다. 뒤에 변경이 안정된 뒤에도 이러한 풍습이 그대로 남아 고공과 솔정을 노비처럼 부리고 심지어는 10세가 되기 전부터 잡아다 부리고 생사여탈권까지 쥐었다고 한다. 보인은 솔정을 이른다. 顯宗改修實錄 5年 12月 30日

26)위 무공(衛武公)이……가다듬으셨습니다:스스로 경계했다는 뜻으로, 자세한 내용은 10쪽 주 15) 참조.

27)아전(亞銓):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관서의 차관으로, 여기서는 당시에 이조 참판이었던 이상진(李尙眞)을 가리킨다. 顯宗改修實錄 6年 1月 28日

28) 좌랑……내렸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6년 1월 28일 기사에, 이조 참판 이상진(李尙眞)이 판결사 김소(金素)를 승지의 물망에 올리려 하였으나 좌랑 홍만용(洪萬容)이 끝내 단자에 김소의 이름을 쓰려 하지 않고 붓을 던지며 일어나자 추고를 청하고 그에 따라 현종이 홍만용을 하옥시킨 일이 보인다.

29)이수광(李睟光)의 고사:인조조에 이수광이 이조 판서로 있을 적에 그가 병 때문에 인사 개편에 참여하지 못한 틈을 타서 동료가 그를 내의원 제조에 제수하였는데, 이수광이 인혐하고 고사하자 인조가 윤허한 일을 가리킨다. 文谷集 卷10 吏曹判書三告加由後乞遞三疏, 韓國文集叢刊 133輯

30)도심(道心)을……훈계:인조(仁祖)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봉림대군이 눈물을 흘리며 고사하였는데, 이때 인조가 “나는 이미 결정하였고 여러 사람의 의견도 모두 같으니 너는 고사하지 말고 삼가 도심을 지키라.”라고 훈계한 말을 가리킨다. 孝宗實錄 卽位年 5月 8日 뒤에 결국 봉림대군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었다.

31)큰 사업을……뜻:청나라를 정벌하려던 효종(孝宗)의 뜻을 말한다.

32)희풍(熙豐):송 신종(宋神宗) 때의 연호인 희령(熙寧)과 원풍(元豐)을 합칭한 말이다.

33)을야(乙夜), 병야(丙夜):을야는 2경(更) 곧 밤 9시부터 11시 사이를, 병야는 3경 곧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를 이른다.

34)성인이……것입니다:공자가 나라를 다스릴 적에 주의할 점 세 가지를 말하였는데, 첫째 일을 신중히 하여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하고, 둘째 씀씀이를 절제하여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셋째 백성들을 농한기에만 부려야 한다는 것이다. 論語 學而여기서는 둘째 사항에 대해 말한 것이다. 곧 씀씀이를 절제하는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기본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35) 영남……말하였다:현종개수실록 8년 2월 29일에, 자신들과 논의가 맞지 않고 색목(色目)이 같지 않으면 현우(賢愚)를 따지지 않고 일체 물리쳤다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을 비난하고, 조복양(趙復陽), 김만기(金萬基), 민유중(閔維重), 원만리(元萬里), 이민서(李敏敍) 등을 의기(義氣)가 없는 자들이라고 비난하고, 김익렴(金益廉)을 간악한 성품과 짐승 같은 행실을 지닌 자라고 비난하고, 김수항(金壽恒)과 김수흥(金壽興)이 자리에 연연하여 시류에 따라 인사 행정을 하고 친한 사람을 사간원의 장관에 맨 먼저 후보자로 올려 대관에게 아첨하고 임금을 견제하는 기화로 삼았으며 외척의 힘을 빌려 임금의 위엄을 막으려 했다고 비난한, 유학 황연(黃壖)의 상소가 보인다.

36)청나라가……미쳤으니:1666년(현종7) 7월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우리나라 사람이 몰래 염초(焰硝)를 사 온 일과 청나라로 잡혀갔던 사람이 도망 온 것을 묵인해 주고 청나라로 돌려보내지 않은 일에 대해 조사하였다. 이때 도망 온 자를 돌려보내지 않은 일에 대해 현종이 죄를 자처하자 뒤에 청나라에서 현종에게 벌금을 물렸다. 顯宗實錄 7年 7月 10日, 12月 25日 대신이 목숨을 걸고 죄를 자처했더라면 대신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을 텐데 임금에게 죄가 있는 것으로 청나라에 보고하도록 놓아 두었기 때문에 현종이 치욕적으로 벌금을 물게 되었다는 말이다.

37)최일은……삼았습니다:1667년(현종8) 2월에 헌납 최일이 자신은 “임금이 죄를 감당하는 것을 보고도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으므로, 당시에 힘껏 쟁집하지 않은 대신들을 논죄하는 합계(合啓)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된 일을 가리킨다. 顯宗實錄 8年 2月 4日임금이 조사 받은 일에 대해서는 29쪽 주 36) 참조.

38) 9월에……자들이었다:1667년(현종8) 9월 14일에 열린 인사 행정에서 현종이 승지의 후보자를 더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이조에서 홍처량(洪處亮), 이시술(李時術), 민유중(閔維重)을 올리자, 현종이 또 더 의망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김우석(金禹錫), 이익(李翊)을 올리자 이익을 낙점하였다. 김우석과 이익은 승정원일기에 관한 일로 분분하게 쟁변하여 오랫동안 청직(淸職)으로의 진출이 막혀 있던 자들이었다. 顯宗實錄 8年 9月 14日

39)별대(別隊):본대 밖에 따로 조직한 군대이다. 현종실록 10년 7월 23일 조에 훈련 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는 논의가 보인다.

40)정초청(精抄廳):정초군(精抄軍)의 군무를 맡아 보는 관아이다. 인조 때에 정초군을 설치하고 입직하는 위장(衛將)이 통솔하게 하였다가 1648년(인조26)에 병조 판서로 대장을 삼아 지휘하게 하였으며 1668년(현종9)에 정초청을 설치하고 숙위에 관한 군무를 맡게 하였다가, 1682년(숙종8)에 훈련 별대(訓鍊別隊)와 함께 금위영(禁衛營)에 합쳤다.

41) 주 세종(周世宗)이……하였는데:자치통감(資治通鑑) 권292 후주기(後周紀) 3의 내용으로, 주 세종의 이 말은 쓸모없는 군사를 많이 키우는 것보다 소수의 정예군을 키우는 것이 낫다는 기조의 말이다.

42)서로(西路):황해도와 평안도를 이른다.

43)거(莒)……말라:춘추 시대 제(齊)나라에 내란이 발생하자 공자 소백(小白)이 거(莒)나라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돌아와 임금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환공(桓公)이다. 환공이 포숙(鮑叔)에게 나라를 잘 다스릴 방도를 묻자 포숙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는 거 땅에 계셨던 때를 잊지 마소서.” 하였다. 新唐書 卷97 魏徵列傳 곧 과거에 곤액을 당했던 시절을 잊지 말아서 안일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라는 말이다.

44)노기(盧杞):?~대략 785. 그는 말재주가 있어 당 덕종(唐德宗)에게 신임을 받고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발탁되었던 인물인데,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시기하여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사지(死地)로 내몰아 양염(楊炎), 두우(杜佑), 안진경(顔眞卿) 등을 모해하였다.

45)주 부자(朱夫子):주희(朱熹:1130~1200)를 이른다.

46)10역(驛):10리가 1역이므로 10역은 100리이다.

47)내용……있었다:이단하(李端夏)가 지은 홍주원(洪柱元)의 치제문(致祭文)에 의하면, 효종은 나라의 제도에 구애되어 홍주원을 정승 자리에 두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하고, 홍주원이 유배간 조석윤(趙錫㣧)과 박장원(朴長遠)에 대해 해명하자 효종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끝내는 홍주원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매우 융숭하게 예우했다고 한다. 顯宗改修實錄 13年 11月 1日

48) 1년이……쌓인다:근사록(近思錄) 치법류(治法類)에 인용된 정이(程頤)의 말이다.

49)당나라……일:722년 11월에 전 광주 도독(廣州都督) 배주선(裴伷先)이 하옥되자 중서령(中書令) 장가정(張嘉貞)이 곤장을 치도록 현종(玄宗)에게 주청하였다. 이에 병부 상서(兵部尙書) 장열(張說)이 아뢰기를, “신은 듣건대, 대부에게는 형장(刑杖)을 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부가 임금과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비를 죽이면 죽였지 욕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하자, 현종이 수긍하였다. 新唐書 卷127 張嘉貞列傳

50)영릉(寧陵):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이다.

51)복토(復土):하관(下棺)한 후에 파낸 흙으로 덮고 봉분을 만드는 일을 말한다.

52)장릉(長陵):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이다.

53)금오문(金吾門):의금부의 정문이다.

54)동은(峒隱):이의건(李義健:1533~1621)의 호이다.

55)두자미(杜子美):당나라 시인 두보(杜甫:712~770)로, 자미는 그의 자이다.

56)가을에……지었다:대본은 ‘秋 復入白雲山 得故峒隱李公釣臺樂之規 築室其上 取杜子美詩語 名以送老’인데, 한국문집총간 162집에 수록된 농암집(農巖集) 권24의 <영령정기(泠泠亭記)>에 ‘得故李氏釣臺而樂之 遂名之曰風珮洞 而送老菴作焉’이라 한 것에 근거하여 ‘規’는 ‘遂’의 오자로 보아 고쳐 번역하였다.

57)인선대비(仁宣大妃):1618~1674. 효종(孝宗)의 비 장씨(張氏)이다.

58)빈청(賓廳):조선 시대에 3정승과 2품 이상의 고위 관리들이 모여 국사를 의논하던 궁궐 내의 회의실을 이른다.

59)자의대비(慈懿大妃):1624~1688. 인조(仁祖)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로, 자의는 1651년(효종2)에 받은 존호이다.

60)우재(尤齋):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호이다.

61)동춘(同春):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호이다.

62)승중(承重):아버지를 여읜 맏아들이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상사(喪事) 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주 노릇을 하는데, 이러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맏아들이 없으면 둘째 아들이 승중한다.

63)대행대비(大行大妃):인선대비(仁宣大妃), 곧 효종(孝宗)의 비 장씨(張氏)를 가리킨다.

64) 외부의 의론:송시열(宋時烈) 등의 주장으로, 가례복도(家禮服圖) 및 시왕(時王)의 제도에 며느리의 복은 기년복과 대공복(大功服)의 구분이 있으며, 기해년 국상 때에도 대왕대비가 기년복을 입었으므로 이때에는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顯宗實錄 15年 2月 27日

65)퇴우공(退憂公):김수항의 작은형 김수흥(金壽興:1626~1690)으로, 퇴우는 그의 호이다.

66)장순(章順):1445~1461. 예종(睿宗)의 비 한씨(韓氏)의 봉호이다.

67)공혜(恭惠):1456~1474. 성종(成宗)의 비 한씨(韓氏)의 봉호이다.

68)예경의 4종(種)의 설:승중했어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경우에 대한 설로, 네 가지란 첫째, 정(正)이고 체(體)이기는 하나 전중(傳重)할 수 없는 경우, 즉 적자가 불치병이 있어서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지 못한 경우, 둘째, 전중은 했지만 정도 아니고 체도 아닌 경우, 즉 서손이 후사가 된 경우, 셋째,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닌 경우, 즉 서자가 후사가 된 경우, 넷째, 정이기는 하나 체가 아닌 경우, 즉 적손이 후사가 된 경우이다. 儀禮注疏 卷11 喪服

69)삼성추국(三省推鞫):삼성, 즉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의 관원이 한데 모여 강상(綱常)의 중죄를 범한 자를 국문하는 일이다.

70)위관(委官):중죄인의 국문을 주관하는 벼슬로, 의정 대신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 임명한다.

71)총호사(摠護使):국상이 났을 때 상례와 장례에 관한 일을 총괄하여 보살피는 임시 벼슬이다.

72)원상(院相):임금이 죽은 뒤 26일 동안 정무를 맡아 보는 임시 벼슬로서, 원로대신 중에서 임명한다.

73) 곽세건(郭世楗)이란 자가 상소하여:곽세건은 진주(晉州)의 유학(幼學)이며 이 상소는 숙종실록(肅宗實錄) 즉위년 9월 25일에 보인다. 아래의 송(宋) 아무개가 원래의 상소에는 송시열(宋時烈)로 되어 있다.

74) 우재가……명하자:다른 사람은 김석주(金錫冑)를 가리킨다. 숙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에 송시열이 지문(誌文) 짓는 일을 사양하자 숙종이 김만기(金萬基)에게 시키려고 하다가 김수항의 반대와 추천을 받아들여 결국 김석주에게 명한 일이 보인다.

75)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1631~1695)의 호이다.

76) 성균관……비판하였다:이윤악(李胤岳) 등 90여 인의 성균관 유생이 올린 상소와 임금의 비답이 숙종실록 즉위년 11월 11일 기사에 보인다.

77) 유현이……통탄스러워하셨다:대본은 ‘儒賢之議禮 先朝常痛其見欺’인데, 숙종실록 즉위년 11월 11일 기사에는 ‘禮’ 뒤에 ‘乖舛’ 2자가 더 있다.

78) 대관(臺官)이……청하였다:대관은 장령 남천한(南天漢)이며, 이 계사는 숙종실록 즉위년 11월 20일에 보인다.

79)숭릉(崇陵):현종(顯宗)의 능이다.

80)대비(大妃):현종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를 가리킨다

81) 진 목제(晉穆帝)는……삼았습니다:목제는 동진(東晉)의 첫 임금이다. 채모(蔡謨:281〜356)는 자는 도명(道明), 시호는 문목(文穆)으로, 명제(明帝) 때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각주의 자사(刺史)를 거치고 광록대부(光祿大夫)에까지 오른 인물로, 박학하고 예제(禮制)에 밝았다. 348년부터 350년까지 목제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채모가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자 신하들이 그의 오만불손함을 문제삼아 처벌하기를 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채모가 소복차림으로 자제들을 데리고 스스로 정위(廷尉)에 이르러 대죄하자, 황태후가 그는 선왕의 스승이었다며 처벌을 면해 주고 서인(庶人)으로 삼게 하였다. 晉書 卷77 蔡謨列傳

82)김 아무개:숙종실록 1년 3월 8일 윤휴(尹鑴)의 계사에는 ‘金壽恒’으로 되어 있다.

83) 처음에……빠뜨렸다:1673년(현종14)에 이익수(李翼秀)가 윤휴(尹鑴)와 이남(李枏)의 사주를 받고 영릉(寧陵) 즉 효종의 능의 석물(石物)에 하자가 있다 하여 이를 과장하고 충동질하여 능을 옮기자고 청함으로써 애초에 영릉을 조성할 당시의 책임자였던 송시열(宋時烈) 등을 타격하려 한 일을 이르는 듯하다. 宋書續拾遺 附錄 卷2 墓誌

84) 이정(李楨)과……일:이정과 이연(李)은 모두 인조(仁祖)의 손자이자 인평대군(麟平大君) 이요(李㴭)의 아들로, 이정의 봉호는 복창군(福昌君), 이연의 봉호는 복평군(福平君)이다. 궁인이란, 군기시(軍器寺)의 서원(書員) 김이선(金以善)의 딸 김상업(金常業)과 내수사(內需司)의 종 귀례(貴禮)를 가리킨다. 이정과 이연이 궁중에 출입하며 궁인과 교통하여 자식까지 갖게 된 일을 말한다. 肅宗實錄 1年 3月 12日

85)명성대비(明聖大妃):1642~1683. 현종의 비 김씨(金氏)이다.

86)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가인괘 단(彖)의 “여자의 바른 자리는 안에 있고, 남자의 바른 자리는 밖에 있다.”라는 말을 가리킨다.

87)천하에……없다:소학집주(小學集註) 권5 가언(嘉言)에 이 말이 보이는데, 진순(陳淳)의 설에 따르면 이는 “효자의 마음은 부모와 하나가 되어 모든 부모의 과실을 다 자기의 과실로 여기기 때문에 자연히 부모에게 옳지 않은 점이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88)신록(新錄):홍문관의 교리와 수찬 등을 새로 뽑는 일을 말한다.

89)김 문경공(金文敬公):김집(金集:1574~1656)으로, 문경은 그의 시호이다.

90)임금을……합니다:춘추 시대 주루국(邾婁國) 고공(考公)의 초상에 서국(徐國) 임금이 용거(容居)를 시켜 조문하게 하고 아울러 주옥(珠玉)을 보내어 직접 앉아서 반함(飯含)의 예를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천자국이 제후국을 조문하는 예이기 때문에 주루국에서는 신하가 와서 임금의 예를 행하는 경우는 없다며 거부하였다. 이에 용거가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임금을 대신하여 일을 할 적에는 감히 임금을 잊지 않고 또한 선조도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容居聞之 事君 不敢忘其君 亦不敢遺其祖]” 하며 주루국의 선군(先君)인 구왕(駒王)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적에 늘 임금의 예를 행하였으므로 자신도 임금의 예를 행할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용거가 서국의 왕족이라서 구왕이 용거의 선조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禮記 檀弓下 여기서는 김수항이 자신의 선조인 김상용의 행적이 왜곡되는 것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91)친척을……준다:제(齊)나라로 도망간 노(魯)나라 공자 경보(慶父)가 노나라에 온 것을 춘추(春秋)에 “제 중손(齊仲孫)이 왔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에 대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 조에 “왜 제 중손이라고 하였는가? 제나라에 귀속시킨 것이다. 왜 제나라에 귀속시켰는가? 노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왜 노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는가? 춘추는 존귀한 사람을 위하여 과실을 숨겨 주고, 친한 사람을 위하여 과실을 숨겨 주며 어진 사람을 위하여 과실을 숨겨 준다.” 하였다. 여기서는 왕실의 친인척들에 대해서 과실을 숨겨 줄 때에 춘추의 이러한 의리를 끌어댄다는 말이다.

92)양궁(兩宮):대전(大殿)과 자전(慈殿), 즉 숙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다.

93)바닷가:송시열이 유배가 있던 경상도 장기(長鬐)를 이른다.

94)길……바라보았다:송나라 신종(神宗)이 죽었다는 부음을 듣고 사마광(司馬光)이 대궐로 달려가자 호위 군사들이 모두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 하며 이마에 손을 대었으며, 백성들이 길을 꽉 메우고 바라보며 “낙양으로 돌아가지 말고 머물러 천자를 보좌해서 백성을 구제하소서.” 하였다. 이는 당시에 신종의 뒤를 이은 철종(哲宗)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었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김수항이 도성으로 돌아올 적에도 이 고사처럼 백성들이 길을 메우고 바라보며 공경의 뜻을 표했다는 말이다.

95) 도당(都堂):홍문관의 교리 이하의 벼슬아치를 선출하기 위해 의정부에 모여 권점을 행하는 주체를 뜻하는 말로, 영경연사(領經筵事), 대제학 좌참찬과 우참찬, 이조의 판서와 참의가 이에 해당한다. 銀臺條例 禮典 儒臣

96)권점(圈點):벼슬아치를 뽑을 때 뽑고자 하는 후보자의 이름 아래에 둥근 점을 찍는 일, 또는 그 점을 이른다. 홍문관, 예문관 등 중요 관아의 벼슬아치를 임명할 때에 홍문관, 예문관, 의정부의 관원 등이 권점을 행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임금이 최종 결정을 내려 임명한다.

97)관각(館閣):홍문관과 예문관을 이른다.

98)소공(召公)……어렵습니다:이때 진강하고 있는 서경(書經) <군석(君奭)>은 국가의 원로대신인 소공이 조정을 떠나려 하자 주공(周公)이 만류하는 내용인데, 그 당시의 어려움과 현실의 어려움을 비교하여 말한 것이다.

99) 심려(心膂):심장과 등뼈처럼 마음 놓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심복(心腹)과 비슷한 말이다.

100)우두머리는……않는다:하(夏)나라 때에 희화(羲和)가 직무를 유기하고 술에 빠져 고을을 망치자 천자 중강(仲康)이 윤후(胤侯)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는데, 윤후가 희화를 정벌한 뒤에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한 말이다. 書經 胤征

101)두 마음을……것이다:24년 5월에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한단(邯鄲)을 함락하여 왕랑(王郞)을 죽이고 궁중의 문서를 수습할 적에 왕랑과 사통하거나 자신을 비방한 내용의 편지 수천 장을 장군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리고 한 말이다. 後漢書 卷1上 光武帝紀

102)숙향(叔向):양설힐(羊舌肹)의 자이다.

103)공신 회맹(功臣會盟):공훈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책에 써 올릴 때에 임금과 신하가 모여서 서로 맹세하는 의식이다.

104)정공신(正功臣):원종공신(原從功臣)과 대비되는 말로,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이른다.

105) 5인:이원성(李元成), 김익훈(金益勳), 이광한(李光漢), 조태상(趙泰相), 신범화(申範華)를 이른다. 承政院日記 肅宗 6年 9月 18日

106)신호(申壕):대본은 ‘申琥’인데, 효종실록(孝宗實錄) 3년 1월 10일 기사 등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07)신독(愼獨):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것이다.

108)병야(丙夜):3경(更), 즉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를 말한다.

109)흰 무지개가……이변:해 좌우에 흰 운기(雲氣)가 길게 뻗어 있어 마치 흰 무지개가 해를 꿴 듯이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110)인경왕비(仁敬王妃):1661~1680. 숙종의 비 김씨(金氏)이다. 이때 천연두에 걸려 8일 만에 죽었다.

111)흠위(廞衛):제왕의 장의(葬儀) 행렬에 쓰는 여러 가지 도구를 말한다.

112)인광(闉壙):묘혈(墓穴)의 바닥을 석회로 채워 넣어 그 위에 관곽(棺槨)을 올려놓게 만든 것이다.

113)원훈(元勳):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임금이 아끼고 믿으며 가까이하는 늙은 신하를 이른다.

114)삼양(三陽)이 회복되어:음력 1월에 해당하는 주역(周易)의 태(泰) 괘는 여섯 개의 효가 모두 음효(陰爻)인 10월의 곤(坤) 괘에서 양효(陽爻) 세 개를 회복하여 이루어진 괘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15)주인(遒人)이……방법:주인은 임금의 명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사람을 이른다. 서경(書經) <윤정(胤征)>에 “매년 초봄에 주인이 목탁(木鐸)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말하기를, ‘관원들은 잘못을 바로잡아 주고 백공들은 기술에 대하여 간하라. 혹시라도 이렇게 공손히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라의 떳떳한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116)월령(月令)의……뜻:예기(禮記) <월령(月令) 계춘지월(季春之月)>에 “제후들에게 이름난 선비를 초빙하고 어진 이를 예우하도록 면려한다.” 하였다.

117)진대(賑貸)를……조령(詔令):한 문제(漢文帝)가 사방에 명하기를 “화창한 봄에 초목 같은 생물들은 모두 즐거워하는데 우리 백성 가운데 환과고독(鰥寡孤獨) 같은 곤궁한 사람은 혹 죽을 지경 놓여 있어도 돌보아 주거나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짐이 백성의 부모로서 장차 어떻겠는가. 진대할 방도를 의논하라.” 하였다. 漢書 卷4 文帝紀

118) 1년이……쌓인다:근사록(近思錄) 치법류(治法類)에 인용된 정이(程頤)의 말이다.

119) 나날이……퇴보한다:근사록 위학류(爲學類)에 인용된 정이(程頤)의 말이다.

120)끝이라고……어지럽다:주역 <기제(旣濟) 단(彖)>에 있는 말로, 근사록 권8에는 이에 대해 “보통 사람은 일이 이룩되고 나면 구차히 안주하기 때문에 쇠하고 어지러워지는 반면에 성인은 도가 궁해지기 전에 변통하기 때문에 어지러움이 없이 유종의 미를 거둔다.”라고 부연 설명하였다.

121)빈사(賓師):관직에 있지 않으면서 임금에게서 빈객과 스승의 예우를 받으며 자문에 응하거나 학문을 강하는 사람을 이른다.

122)죄인……의리:한서(漢書) 권48 <가의전(賈誼傳)>에 “대신이 중대한 죄를 지어 견책을 받게 되면 상복(喪服) 차림으로 쟁반에 물을 담고 그 위에 칼을 올려놓고서 죄를 청하는 곳에 스스로 나아가 죄를 청했지 임금이 신하를 보내어 잡아오게 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에 여순(如淳)의 말을 인용하기를, “물은 성질이 수평을 유지하려 하므로 임금이 공평한 법으로 다스리는 것을 상징한다. 검을 올려놓은 것은 자결하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하였다. 대신은 처벌할 때에도 이처럼 예우했다는 말이다.

123)원우(元祐):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이다.

124)하늘이……것이다:사마광(司馬光)이 좌복야(左僕射)가 되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폐기하려 하자 장돈(章惇), 여혜경(呂惠卿)의 무리가 “선왕의 법을 폐기한 것에 대해 훗날 부자간의 의리를 근거로 문제 삼는다면 붕당의 화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충고하였는데, 사마광은 훗날의 화가 두려워 옳은 일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史略 卷6 宋哲宗

125)시장(柴場):땔나무를 베는 일정한 장소이다. 서울의 각 관사는 강변에 일정한 면적의 시장을 두었다.

126) 14세 이하의 어린이:대본은 ‘兒弱’인데, 대전회통(大典會通) 병전(兵典) 성적(成籍)에 황구(黃口)나 아약(兒弱)을 군적에 충정한 수령을 처벌하는 조항이 있는데, 소자(小字)로 ‘황구’는 5세 이하, ‘아약’은 14세 이하라고 되어 있다.

127)양서(兩西):황해도와 평안도를 이른다.

128)관서(關西):황해도와 평안도를 이른다.

129) 이조 좌랑……제수하자:김진귀(金鎭龜)는 숙종의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로, 이때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다음 날 광주 부윤의 마지막 후보자로 들어가 낙점받았다. 肅宗實錄 8年 6月 28日

130)왕증(王曾):대본은 ‘王朝’인데,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전집(前集) 권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31)풍정례(豐呈禮):임금이나 왕비, 대비 등에게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서 올리는 의식을 이른다.

132)문정공(文正公)이……인피(引避)하였다:문정공은 김수항(金壽恒)의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의 시호이다. 1635년(인조13)에 감시(監試)의 생원시(生員試)를 보일 적에 서울과 지방에서 출제한 문제의 개수가 달랐다. 이에 양사(兩司)에서 합격자 전원의 합격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김상헌이 ‘과거 시험장에 변고가 있었더라도 문제가 있는 시험관을 파직하거나 해당 응시자의 합격을 취소할 뿐, 합격자 전원의 합격을 취소하지는 말라.’라는 선조(宣祖) 때의 과거 시험 규칙을 들어 반대하였다. 仁祖實錄 13年 8月 23日, 9月 4日

133)송 문정공(宋文正公):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가리킨다.

134)치사(致仕):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는 것을 이른다. 70세가 되면 치사하는 것이 상례였다.

135)중도부처(中道付處):유배형의 한 가지로, 평소의 공로 등 정상을 참작하여 유배지로 가는 중간 지점의 한 곳을 지정하여 그곳에 안치시키는 처분이다.

136)아방(兒房):대궐을 지키는 장신(將臣)들이 때때로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는 방이다.

137)현석 박공(玄石朴公):박세채(朴世采:1631~1695)로, 현석은 그의 호이다.

138)송 문정공이……돌렸으며:1683년(숙종9) 2월 27일에 송시열이 차자를 올려 “일을 담당하여 곡절을 아는 대신도 실상을 알지 못하는데, 더구나 신처럼 노쇠한 사람이 어찌 감히 기력을 내어 김익훈을 구원하겠습니까. 지금 신이 김익훈을 구원하느라 여력이 없다고들 하는데, 이는 정말 신은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한 것을 이른다. 宋子大全 卷17 引咎仍乞致仕箚, 韓國文集叢刊 108輯

139)3월에 실록(實錄)이 완성되어:1683년(숙종9) 3월 11일에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 개수본 24권이 완성되었는데, 이때 김수항이 총재관(摠裁官)으로서 총 책임을 맡았다. 肅宗實錄 9年 3月 11日

140)사마광(司馬光)이……바라보았다는데:백성들이 공경의 뜻을 표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72쪽 주 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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