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절요/권1

여진시랑서

황성 2011. 9. 14. 16:06

與陳侍郞書

熹嘗謂天下之事有本有末, 正其本者, 雖若迂緩而實易爲力 :救其末者, 雖若切至而實難爲功. 是以昔之善論事者, 必深明夫本末之所在而先正其本, 本正則未之不治非所憂矣. 且以今日天下之事論之, 上則天心未豫而饑饉薦臻, 下則民力已殫而賦斂方急, 盜賊四起, 人心動搖. 將一二以究其弊, 而求所以爲圖回之衒, 則豈可以勝言哉? 然語其大患之本, 則固有在矣.

제가 언젠가 생각해 보니, 천하의 일은 본말(本末)이 있으니, 그 근본을 바르게 하는 사람은 비록 만약 멀고 느슨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힘쓰기 쉽고, 그 말단을 구하는 자는 비록 절실하고 지극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일을 잘 논하는 자는 반드시 본말의 소재를 밝혀 먼저 근본을 바르게 하니, 근본이 바르면 그 말단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근심할 바가 아닙니다. 또 현재 천하의 일로 논의하면, 위로는 하늘이 기쁘지 않아 기근은 거듭되고, 아래로는 백성의 힘이 이미 고갈되었는데도 세금 거두는데 골몰하여 도적이 사방으로 일어남에 백성이 동요합니다. 낱낱이 그 폐단을 찾아서 회복하는 방법을 구한다면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큰 근심의 근원을 말하면 진실로 다른 곳에 있습니다.

 

蓋講和之計決而三綱頹․萬事隳, 獨斷之言進而主意驕於上, 國是之說行而公論鬱於下, 此三者, 其大患之本也. 然爲是說者, 苟不乘乎人主心衍之蔽, 則亦無自而入. 此所以於前日之書不暇及他, 而深以夫格君心之非者有望於明公. 蓋是三說者不破, 則天下之事無可爲之理, 而君心不正, 則是三說者又豈有可破之理哉? 不審閤下前日之論, 其亦嘗及是乎?抑又有大於此者, 而山野之所弗聞弗知者乎?閤下誠得本而論之, 則天下之事一擧而歸之於正, 殆無難者, 而吾之去就亦易以決矣. 竊不自勝其憤懣之積, 請復得而詳言之.

강화(講和)의 계책이 결정됨에 윤리가 무너지며 온갖 일이 잘못되고, 독단(獨斷)의 이론이 나옴에 임금의 뜻이 위에서 교만해지고, 국시(國是)의 말이 등장함에 공론이 아래에서 막히니, 이 세 가지는 큰 근심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말을 주장하는 자 군주의 마음의 폐단을 틈타지 않으면 한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전날의 편지에서 다른 일에 미칠 겨를이 없이, “깊이 임금 마음의 그릇 된 것을 바르게 하라”는 것으로 당신에게 기대한 이유입니다. 이 세 가지 이론을 깨뜨리지 않으면 천하의 일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이 세 가지 이론을 또 어떻게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쌓인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여 다시 상세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夫沮國家恢復之大計者, 講和之說也. 壞邊陲捕禦之常規者, 講和之說也. 內咈吾民忠義之心, 而外絶故國來蘇之望者, 講和之說也. 苟逭目前宵旰之憂, 而養成異日宴安之毒者, 亦講和之說也. 此其爲禍, 固已不可勝言, 而議者言之固已詳矣. 若之所言, 則又有大於此者. 蓋以祖宗之讎, 萬世臣子之所必報而不忘者. 苟曰力未足以報, 則姑爲自守之計, 而蓄憾積怨以有待焉, 猶之可也. 今也進不能攻, 退不能守, 顧爲卑辭厚體以乞憐於仇讎之戎狄, 幸而得之, 則又君臣相慶, 而肆然以令於天下曰: 凡前日之薄物細故, 吾旣捐之矣, 欣欣焉無復豪分忍痛, 含冤․迫不得已之言, 以存天下之防者. 鴫呼!孰有大於祖宗陵廟之讎者? 而忍以薄物細故捐之哉!夫君臣之義, 父子之恩, 天理民彝之大, 有國有家者所以維繫民心, 紀綱政事, 本根之要也. 今所以造端建極者如此, 所以發號施令者如此, 而欲人心固結於我而不離, 庶事始終有條而不紊, 此亦不待知者而凜然以寒心矣.

而爲此說者之徒懼夫公論之沸騰而上心之或悟也, 則又相與作爲獨斷之說, 傅會經訓, 文致姦言, 以深中人主之所欲, 而陰以自託其私焉. 本其爲說, 雖原於講和之一言, 然其爲禍則又不止於講和之一事而已, 是蓋將重悞吾君, 使之傲然自聖, 上不畏皇天之譴告, 下不畏公論之是非, 挾其雷霆之威․萬鈞之重以肆於民上, 而莫之敢攖者, 必此之由也. 鳴呼! 其亦不仁也哉! 甚於作俑者矣. 仁人君子其可以坐視其然, 而恬然不爲之一言以正之乎?

此則旣然矣, 而旬日之間, 又有造爲國是之說以應之者, 其欺天罔人, 包藏險慝, 抑又甚焉. 主上旣可其奏, 而羣公亦不聞有以爲不然者, 請有以詰之. 夫所謂國是者, 豈不謂夫順天理․合人心而天下之所同是者耶? 誠天下之所同是也, 則雖無尺土一民之柄, 而天下莫得以爲非, 况有天下之利勢者哉? 惟其不合乎天下之所同是而彊欲天下之是之也, 故必懸賞以誘之, 嚴刑以督之, 然後僅足以劫制士夫不齊之口, 而天下之眞是非則有終不可誣者矣. 不識今日之所爲若和議之比, 果順乎天理否耶? 合乎人心否耶? 誠順天理․合人心, 則固天下之所同是也, 異論何自而生乎? 若猶未也, 而欲主其偏見, 濟其私心, 彊爲之名, 號曰國是, 假人主之威以戰天下萬口一辭之公論, 吾恐古人所謂德惟一者似不如是, 而子思所稱‘具曰予聖, 誰知鳥之雌雄’者, 不幸而近之矣.   

무릇 국가를 회복시키는 큰 책략을 방해하는 것은 강화의 이론이고, 변방 수비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도 강화의 이론입니다. 안으로는 백성의 충성된 마음을 어기는 것이고, 밖으로는 국가 소생의 희망을 좌절시키는 것도 강화의 이론입니다. 눈앞에 닥친 시급한 근심을 구차하게 회피하여 미래의 짐독(鴆毒)과 같은 안일함을 양성하는 것도 또한 강화의 이론입니다. 재앙은 다 말할 수 없으며, 강화의 설이 잘못됐다고 의논하는 자의 이론도 상세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큽니다. 대대로 조종의 원수는 후손이 반드시 복수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니, 진정 ‘복수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고 한다면, 우선 스스로 힘을 길러 복수심을 불태우면서 복수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나아가되 공격할 수 없고 물러나서 지킬 수 도 없어, 말을 낮추고 많은 폐백을 주며 오랑캐에게 화친을 구걸하여 다행히 성사되면 군신이 서로 경사로 여겨 떠들썩하게 온 나라에 포고령을 내려 말하기를 “지난날 자잘한 일[薄物細故]은 이미 버려버렸다”라고 하여, 기뻐하면서 다시는 조금도 분통을 참으며 원통함을 머금고 부득함에 절박한 말을 하여 나라의 안전을 보전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 어떤 일이 조종의 능묘를 침탈한 원수보다 크다고 이를 차마 자질구레한 일[薄物細故]로 여겨 잊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군신간의 의(義)와 부자간의 은(恩)은 큰 천리와 인륜이니,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민심(民心)을 결속시키고 정사(政事)를 바로 잡는 근본요체입니다. 이제 (국가경영의) 단초를 열고 표준을 세우는 것이 이와 같고, 정책을 발하고 법령을 베푸는 것이 이와 같으면서도, 인심이 나에게 결속되어 떠나지 않고, 모든 일의 시종(始終)이 조리(條理)가 있어 문란하지 않기를 바라니, 이는 또한 지자(知者)를 기다릴 것도 없이 몸이 싸늘하게 한심합니다. 이런 말을 지어낸 무리는 공론(公論)이 일어나 임금의 마음이 혹 깨닫는 것을 두려워해서 서로 독단(獨斷)의 말을 만들어 경훈(經訓)을 견강부회(傳會)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내어 인주의 욕심을 잘 채워주고 속으로는 자기의 사사로움을 의탁하니, 그 이론의 근본을 보면, 비록 강화(講和)라는 한 마디 말에 근원하지만, 그 재앙은 강화(講和)란 한 일에만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임금을 심하게 그르쳐서 오만하게도 스스로 성인(聖人)이라 여기게 하여, 위로 하늘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래로는 공론(公論)의 시비(是非)를 두려워하지 않고, 우레같은 위엄과 만균(萬鈞)같은 무거움을 옆에 끼고 백성의 위에 방자하게 군림하는데도, 감히 제지할 수 없게 된 것은 반드시 이러한 독단(獨斷)의 이론 때문입니다. 아. 참으로 불인(不仁)하니, 허수아비를 만든[作俑] 자 보다 더욱 심합니다. 인인(仁人)과 군자(君子)가 어찌 그렇게 되는 것을 좌시(坐視)하면서 편안히 한 말씀을 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이미 그렇다고 하더라도, 열흘 사이에 또 국시(國是)의 이론을 주장해서 독단(獨斷)의 이론에 호응하는 자가 있어서, 하늘과 사람을 기만하고 음험하고 사특한(險慝) 계책을 품고 있는 것이 더더욱 심하거늘, 임금이 이미 그들의 주장을 옳다고 여기시고, 조정의 여러 대신들 또한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으니, 제가 이것을 힐난해 보겠습니다. 이른바 국시(國是)라는 것이 어찌 천리를 따르고 인심을 화합하여 온 천하가 모두 옳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온 천하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라면(國是), 비록 조그만 땅이나 한명의 백성을 다스릴 권한이 없다고 하더라도 천하가 잘못이라고 여길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지금의 천하의 이익과 권세를 지닌 사람이겠습니까? 오직 천하의 사람들이 옳다고 한 것에 화합하지 않고,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옳게 여기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상을 내걸어 회유하고 엄한 형벌로 독책한 연후에야 겨우 사대부(士大夫)들이 불평하는 입을 억지로 막을 수 있지만, 천하의 진정한 시비는 끝내 속일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화의(和議)와 같은 일이 과연 천리(天理)에 따르고 인심(人心)에 화합하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진실로 천리(天理)를 따르고 인심(人心)에 화합한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여길 것이니, 다른 이론(異論)들이 어디에서 생겨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편견(偏見)을 주장하여 그 사이에 사심(私心)을 이루어 억지로 국시(國是)라 이름 짓고, 임금의 위엄을 빌려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공론(公論)과 다투려 한다면, 저는 옛사람들이 이른 바 “덕은 한결 같아야 한다[德惟一]”고 한 것이 이와 같이 않을 듯하니, 오히려 불행하게도 자사(子思)가 “모두 자기가 성인이라고 하니 누가 까마귀의 암수를 알겠는가”라고 했던 지경에 가까울까 두렵습니다.

 

昔在熙寧之初, 王安石之徒嘗爲此論矣, 其後章惇蔡京之徒又從而紹述之, 前後五十餘年之間, 士大夫出而議於朝, 退而語乎家, 一言之不合乎此, 則指以爲邦朋邦誣, 而以四凶之罪隨之. 蓋近世主張國是之嚴, 凜乎其不可犯, 未有過於斯時者. 而卒以公論不行, 馴致大禍, 其遺毒餘烈至今末已. 夫豈國是之不定而然哉? 惟其所是者非天下之眞是, 而守之太過, 是以上下相徇, 直言不聞, 卒以至於危亡而不悟也. 傳曰: ‘差之亳釐, 繆以千里’, 况所差非特毫釐哉!鳴呼, 其可畏也已!奈何其又欲以是重誤吾君, 使之尋亂亡之轍跡而躬駕以隨之也?

옛날 송(宋)의 신종(神宗)의 희녕(熙寧)의 초년에 왕안석(王安石)의 무리가 이 국시(國是)의 이론을 주장했는데, 뒤에 장돈(章惇)과 채경(蔡京)의 무리가 또 이것을 이어서 계승하여 전후 약 50여년 사이에 사대부(士大夫) 나아가서 조정(朝廷)에서 논의하고 물러나서는 집에서 말할 때 한 마디라도 국시(國是)의 이론에 합치하지 않으면 국가의 붕당이며, 국가를 모함하는[邦朋邦誣] 것이라고 지목하여 사흉(四凶)의 죄를 적용시켰습니다. 대개 근세에 국시(國是)를 주장하는 엄격함이 범할 수 없는 것이 지금보다 심한 경우가 없으되 끝내 공론(公論)이 행해지지 않아서 큰 재앙을 초래해서 후대에 끼친 악독한 영향이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 그렇겠습니까. 오직 옳다고 여기는 것이 천하의 참으로 옳은 것이 아닌데도 지나치게 고수했기 때문에 상하(上下)가 서로 따라 직언(直言)이 들리지 않아 결국은 위망(危亡)한 지경에 이르러도 깨닫지 못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처음의 조금의 차이가 나중엔 천리로 차이가 난다”라고 하니, 하물며 차이가 비단 호리(豪釐)만이 아닌 경우이겠습니까. 아! 참으로 두려울 뿐입니다. 어째서 또 이것으로 우리 임금을 심히 그르쳐서 어지럽고 멸망하는 앞 자취를 찾아 찾아서 몸소 말을 몰아 따라가게 하십니까.

 

鳴呼!此三說者, 其爲今日大患之本明矣. 然求所以破其說者, 則又不在乎他, 特在乎格君心之非而已. 明公不在朝廷則已, 一日立乎其位, 則天下之責四面而至. 與其顚沛於末流而未知所濟, 孰若汲汲焉以勉於大人之事, 而成己成物之功一擧而兩得之也?

아! 이 강화(講和) 독단(獨斷) 국시(國是) 이 세 말이 오늘날 커다란 우환의 근본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이론을 논파하려 한다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임금의 마음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있을 뿐입니다. 명공께서 조정에 계시지 않으신다면 그만이겠지만 하루라도 그 지위에 계신다면 천하의 책임 추궁이 사방에서 몰아칠 것입니다. 말류(末流)에 빠져드는 데도 구제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 보다는 서둘러 대인(大人)의 일에 힘써서 성기성물(成己成物)의 공적을 일거양득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杜門求志, 不敢復論天下之事久矣. 於閤下之言竊有感焉, 不能自已, 而復發其狂言如此, 不審高明以爲如何也. 尙書計就職已久. 方群邪競逐, 正論消亡之際, 而二公在朝, 天下望之, 屹然若中流之底柱, 有所恃而不恐. 雖然, 時難得而易失, 事易毁而難成. 更願合謀同力, 早悟上心, 以圖天下之事. 此非獨之願, 實海內生靈之願也.

저는 두문불출하고 뜻을 구하느라 다시 감히 천하의 일을 논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 합하(閤下)의 말에 유감이 있어 스스로 그만 두지 못하고 다시 이와 같이 말하니, 고명(高明)께서 어떻게 여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상서(尙書) 왕공(王公: 王應辰)은 직무에 나간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여러 사악한 무리들이 앞 다투어 날뛰고 정론(正論)이 사라지는 때를 만나 두 분께서 함께 조정에 계시니 천하 사람들이 도도한 물길 한 가운데 우뚝 버티고 있는 지주(底柱)처럼 기대하면서 믿는 바가 있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때(時)를 얻기란 어렵고 잃기는 쉬우며, 일이란 어그러지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원하건대 두 분이 지혜를 합하고 힘을 합하여 빨리 임금을 깨우쳐서 천하의 일을 도모하십시오. 이것은 다만 저의 바람일 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의 모든 백성의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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