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문초/한문공문초

한문공문초인

황성 2008. 5. 24. 12:14
 

韓文公文抄引


 위진(魏晉) 이래 송(宋) 제齊) 양(梁) 진(陳)으로부터 수당(隋唐) 때에 이르기까지 공자 육예의 유지가 끊이지 않음이 마치 띠와 같았다. 창려(昌黎) 한퇴지(韓退之)가 헌종과 덕종 연간에 우뚝히 일어나서 맹자(孟子) 순경(荀卿) 가의(賈誼) 조조 동중서(董仲舒) 사마천(司馬遷) 유향(劉向) 양웅(楊雄) 및 반고(班固) 부자의 뜻을 거슬러 올라가서 췌마(揣摩)하였다. 이때에 칭찬하는 사람이 절반이었고, 비방을 하는 사람이 반이었으나, 유독 유종원(柳宗元) 이고(李翶) 황보식(皇甫湜) 맹교(孟郊) 등 몇 사람이 그를 추종하여 깊이 알고 돈독히 좋아하였을 따름이다. 왜 그런고? 온 세상의 사람이 귀머거리인데 홀로 황종(黃鐘)과 대려(大呂)을 가지고 그 사이에서 연주하고자 하니, 심하도다. 그 어려움이여!

 또 300년에 구양수 소식 등의 사람들이 서로 이어서 출현하여 비로소 드러내어 천하의 문장이 다시 고문으로 달려갔다. 아! 수당(隋唐)의 문장은 부미하고 유약함에 근심하였으니 퇴지가 출현하여 명성을 떨치니, 진실로 이미 어려우니, 곧 근대의 문장이 수고롭기만 하고 옳지 못함에 근심하는 것과 같으니 그 힘씀이 더욱 어긋나지 않을 것인가? 그 어려움이여! 요컨대 반드시 도에 근본하여 옛 육예의 유지를 찾아야 이에 옛 작자의 뜻이라고 이를 수 있다. 내가 그러므로 한나서 서경(西京) 이하 8대의 쇠락함에 한 사람을 미치지 못한다.

 내가 먼지 먼저 창려 한공 유를 들어 그의 표장(表狀) 9수 서계장(書啓狀) 46수 서(序) 33수 기전(記傳) 12수 원론의(原論議) 10수 변․해․설․송․잡저(辯解說頌雜著) 22수 비(碑) 및 묘지갈명(墓誌碣銘) 52수 애사(哀詞)․제문(祭文)․행장(行狀) 8수를 기록하여 16권을 만든다.

 창려는 비지에 특기가 있어 더욱 우뚝하나, 나는 가만히 의심하건대 대사인 사마천의 뜻에 혹 한 칸에 포함되어 그의 왕성한 기운으로 도려내니 폭척은 준일하나 운절은 부족한 듯 하다. 서기서변해 및 다른 잡저는 공이 홀로 문호를 선창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달마가 서쪽에  와서 홀로 선창을 개창한 것과 같다.

 귀안(歸安) 녹문(鹿門) 모곤(茅坤)은 쓰노라   

韓文公文抄引(4).hwp
0.0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