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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황성 2026. 7. 15.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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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욱……있는데논어》 〈술이(述而)에서 공부를 하다가 막혀서 가슴속으로 애타지 않고, 말로 표현하지 못해 입을 달싹이며 답답해하지 않는다면[不憤不啓 不悱不發] 스승이 깨우쳐 줄 수 없다고 한 것을 원용한 말이다.

2) 세 개의 역() :《논어》 〈학이(學而)첫 장에 배우고 그것을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고 한 것에서 또한[]’이 세 번 반복된 것을 가리킨다.

3) 노사(蘆沙) 선생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조정의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깊은 궁리와 사색을 통해 이일분수(理一分殊)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수립하였다. 한말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문도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지금의 경상남도 일원에도 폭넓게 포진해 있었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4) 태백(泰伯)……양보했다태백은 주나라 태왕(太王)의 장남이다. 태왕이 막내아들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이 있자 태백이 그 뜻을 알고 아우 중옹(仲雍)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문신(文身)을 하고 단발(斷髮)을 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대해 공자는 태백을 찬미하면서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고 말할 만하다. 세 번 천하를 양보하였는데, 백성들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구나.[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라고 하였다. 論語 泰伯

5) 백이와……간하였던 : ()나라 무왕(武王)이 주()를 정벌하려 할 때에,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신하로서 왕을 시해하는 것은 인()하지 못한 일이라며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하였던 고사를 가리킨다. 史記 伯夷列傳

6) 讀禮 자체가 상을 치르는 것입니다. 정말 예서를 읽는 것이 아닌 듯. (사전에 친상(親喪) 중에 있다.”로 되어 있습니다.

7) 우암(尤菴) 선생송시열(宋時烈, 1607~1689),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8) ()나라……타이른다:《시경》 〈소아(小雅)의 작품인 소반(小弁)에 대한 고자(告子)의 해석을 맹자(孟子)가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소반은 주()나라 유왕(幽王)이 포사(褒姒)를 총애하여 포사가 백복(伯服)을 낳자 원래 부인인 신후(申后)와 그의 아들인 태자 의구(宜臼)를 내쳤는데, 이를 애통하고 박절하게 여겨 지은 시인데, 이에 대해 고자가 소반은 원망의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소인(小人)의 시라고 해석하였다. 이에 맹자가 고루하다. 고수(高叟)의 시 해석이여! 여기에 사람이 있는데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월()나라 사람이 활을 당겨 사람을 쏘려 하면 웃으면서 타이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소원하기 때문이고, 자기 형이 활을 당겨 사람을 쏘려 하면 눈물을 흘리며 타이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친척이기 때문이다. 소반의 원망은 어버이를 친애한 것이니, 어버이를 친애하는 것은 인()이다.”라고 하면서 비판하였다. 孟子 告子下

9) 이 내용은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보인다.

10) 이택(麗澤) 벗이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줌을 뜻한다. 주역(周易)태괘(兌卦)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11) 노인을……미치는: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내 노인을 노인으로 섬겨서 남의 노인에게까지 미치며, 내 어린이를 어린이로 사랑해서 남의 어린이에게까지 미친다면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라고 한 것을 원용한 말이다. 여기서는 오준석이 자신의 노쇠함을 답장이 늦은 점을 양해해 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2) 하도(河圖)……것입니까하도는 중국 복희씨(伏羲氏)가 나라를 다스릴 때 황하(黃河)에서 나온 용마(龍馬) 등의 무늬를 말하고, 낙서(洛書)는 하()나라 우() 임금이 9년 동안 치수(治水)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 등의 무늬를 말하는데, 이는 모두 성군(聖君)의 세상에 나오는 상서로 알려져 있다. 漢書 河圖洛書》 《書經 顧命

13) 서계(書契)나무에 새겨서 쓴 최초의 문자를 말한다. 신농씨(神農氏) 때에는 문자가 없어서 노끈으로 매듭을 묶어 의사를 표현하는 정사(政事)를 폈는데, 복희씨(伏羲氏) 때에 이르러 서계를 만들어서 이를 대체하였다고 한다. 周易 繫辭傳下》 《史記 五帝本紀

14) 주자(周子)주돈이(周敦頤, 1017~1073),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이다. 중국 성리학의 틀을 만들고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된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의 저술은 7권의 주자전서(周子全書)로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 태극도설(太極圖說)이 가장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힌다.

15) 사계(沙溪) 선생김장생(金長生, 1548~1631)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예학(禮學)과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문집으로 사계선생전서가 있다.

16) 도암(陶菴)이재(李縡, 1680~1746), 도암은 그의 호이다. 자는 희경(熙卿), 호는 한천(寒泉)이다. 김창협의 문인으로 호락논쟁(湖洛論爭) 당시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하여 낙론(洛論)을 주창했다. 저서로 사례편람(四禮便覽)등이 있고 문집으로 도암집이 있다.

17) 조주(祧主) 5() 이상이 되어 기제사를 모시는 순서가 끝나 가묘(家廟)에서 조묘(祧廟)로 옮기게 된 신주를 말한다.

18) 하자평(何子平)남조(南朝) ()나라 사람으로 효성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60세가 다 된 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여 기근과 전란으로 8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는데, 그 사이에 마치 어린애처럼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더울 때는 시원한 곳을 피하고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南史 孝義傳上

19) 단괄(袒括)단문괄발(袒免括髮)’의 준말이다. 처음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시행하는 고대의 예절로, 한 어깨의 옷을 벗어 매는 것과 머리를 삼으로 묶는 것을 가리킨다.

20) 죄가……단락 방몽(逄蒙)이 스승인 예(羿)를 죽인 것에 대해 맹자가 예에게도 책임이 있다.”라고 하자, 공명의(公明儀)죄가 없을 듯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맹자가 ()할지언정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는가.”라고 한 대목을 가리킨다. 孟子 離婁下

21) 문왕(文王)……합니다文王何可當也는 현토의 방식에 따라 문왕 당시의 시세로는 은()나라를 당할 수 없다.’문왕의 덕을 후인이 당할 수 없다.’로 해석이 구분된다. 전자는 이황의 현토를 따른 언해의 해석이고 후자는 이이의 해석이다.

22) 불가기(不可磯)()는 물가에 나와 있는 돌로 물이 여기에 부딪치면 격렬해지기 때문에 부모에게 조금만 과실이 있어도 자식이 격하게 노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가 어버이의 허물이 큰데 원망하지 않으면 이는 더욱 소원해지는 것이고, 어버이의 허물이 적은데도 원망하면 이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 소원해지는 것은 효가 아니고 ()’하지 못하는 것도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기는 물이 부딪치는 돌이니, 불가기는 조금만 부딪쳐도 대번에 노함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孟子 告子下

23) 죽지……뿐입니다원문의 呼臯고복(皐復)’과 같은 말로, 상을 당하였을 때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초혼(招魂)하는 것이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사람이 죽었을 때 지붕 위에 올라가 혼을 불러 말하기를, 아아! 아무개여 돌아오라 하고 소리친다.[升屋而號告曰 皐某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24) 중뢰연(重牢宴) : 회혼연(回婚宴)으로, 결혼한 지 61년이 되는 해에 베푸는 잔치이다.

25) 엄자산(崦嵫山)중국 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 서쪽에 있는 산이다. 해가 들어가는 곳이라는 전설이 있어, 만년(晚年) 또는 노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이소(離騷)내가 희화에게 행차를 늦추어, 엄자산 향하여 다가가지 말도록 했도다.[吾令羲和弭節兮, 望崦嵫而勿迫.]”라는 구절에 왕일(王逸)엄자는 해가 들어가는 산이다.”라고 풀이하였다.

26) 한 통의……음식부화한 겉치레를 완전히 버리고 질박한 도의를 지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 〈감괘(坎卦) 육사(六四)에서 동이의 술과 궤 둘을 질그릇으로 사용하고, 맺음을 들이되 통한 곳으로부터 하면 끝내 허물이 없으리라.[樽酒簋貳用缶, 納約自牖, 終无咎.]”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전()에서 한 동이의 술과 두 그릇의 밥을 사용하되 다시 질그릇을 그릇으로 삼았다면 질박함이 지극한 것이다.[所用一樽之酒, 二簋之食, 復以瓦缶爲器, 質之至也.]”라고 하였다.

27) 청송(聽訟)……청송 조목은 대학의 전문 4장에 인용된 공자의 말을 가리킨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송사(訟事)를 다스림은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하나, 반드시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訟事)함이 없게 하겠다.’라고 하셨으니, 실정(實情)이 없는 자가 그 거짓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러 근본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子曰, 聽訟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 한편 전문 4장은 위치에 관한 논란이 있었는데, 경문의 끝에다 두어야 한다는 존재하였다.??

28) 얼굴을……대답한다두보(杜甫)만성(漫成)에 나오는 구절로, 여기서는 마음이 이리저리 갈려서 한 곳으로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를 비유한다. 杜少陵詩集 卷10

29) 조용히……않네()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유령(劉伶)이 자신의 술취한 모습을 형용한 주덕송(酒德訟)의 구절이다. “멍하니 취해 있기도 하고 어슴푸레 깨어 있기도 하여, 조용히 들어도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고, 눈여겨보아도 태산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兀然而醉 恍爾而醒 靜聽不聞雷霆之聲 熟視不見泰山之形라고 하였는데, 역시 감각에 쏠려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를 비유하기 위해 인용되었다.

30) 개확(慨廓)()을 당하여 그 슬픔이 축쇄(縮殺)되어 가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은 상을 당한 초기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말하고, ()는 빈소(殯所)에 봉안한 다음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말하고, ()는 소상(小祥)을 당하여 세월이 빠른 것을 탄식하는 마음을 말하고, ()은 대상(大祥) 때 정의(情意)가 허전한 것을 표현한 말이다. 禮記 檀弓上

31) 경춘(景春)에게 답변하는 장:《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대장부(大丈夫)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경춘의 질문에 맹자가 대답한 내용을 가리킨다. 맹자는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여,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이 절개를 바꾸지 못하며, 위무가 뜻을 꺾지 못하는 것, 이를 대장부라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32) 노재(魯齋)허형(許衡, 1209~1281)으로 노재는 그의 호이다. 원나라 초기의 학자로 정주학(程朱學)에 조예가 깊었다. 원나라 세조(世祖) 때 벼슬이 국자 좨주(國子祭酒)에 이르렀는데 원나라에 벼슬한 것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그의 출처에 관한 논란이 많았다.

33) ()……:《주역의 박괘(剝卦)는 음이 성하고 양이 다 없어진 괘상이고 복괘(復卦)는 하나의 양이 다시 아래에서 소생하는 괘상인데, 험난함이 지나가고 결국 태평함이 온다는 의미이다.

34) 간고(幹蠱)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일을 완성함을 말한다. 주역》 〈고괘(蠱卦) 초육(初六)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35) 속수(涑水) 선생북송(北宋)의 명재상인 사마광(司馬光, 1019~1086)으로, 산서성(山西省) 하현(夏縣) 속수향(涑水鄕) 사람이기 때문에 세칭 속수 선생으로 불렸다. 자는 군실(君實), 호는 우부(迂夫),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사후에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져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칭한다. 철종(哲宗)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하였다.

36) ()나라를……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자치통감에서 조조(曹操)의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인정하였는데, 이는 유비(劉備)의 촉()을 정통으로 인정한 주희(朱熹)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견해와 배치된다. 의맹(疑孟)11편에서 맹자의 사상에 대한 의문을 드러낸 바 있다.

37) 백이(伯夷)……것은백이는 고죽국(孤竹國) 왕의 장자(長子)였는데 부왕(父王)이 막내아들인 숙제(叔齊)를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다. 그 후 부왕이 죽자 숙제는 왕위를 사양하였으나 백이는 이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이다.”라고 하고 끝내 거절하고 떠났다. 史記 伯夷列傳

38) 무왕(武王)……죽었으니()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백이는 그 아우 숙제와 함께 의리상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던 고사를 말한다. 史記 伯夷列傳

39) 고삼(苦蔘)……공부한 일당나라 때 유공작(柳公綽)의 아내 한씨(韓氏)가 고삼(苦蔘)과 황련(黃連)과 웅담(熊膽)을 섞어 환약을 만들게 한 다음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 공부할 때마다 이 환약을 입에 머금고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했다는 고사를 가리킨다. 小學 廣明倫

40) 범씨(范氏)……물들었던 일북송의 재상 범중엄(范仲淹)이 젊어서 주야로 학업을 익히느라 휘장 꼭대기가 촛불의 그을음으로 먹빛이 되었는데其帳頂如墨色그가 귀하게 되자 귀부인이 자손들에게 보여주면서 너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 부지런히 공부하느라 등불 그을음이 남은 흔적이다.此汝父少時勤學燈烟跡也.라고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純正蒙求》 《小學

41) 예양(豫讓)……보답하였으니전국 시대 예양(豫讓)이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 및 이들을 멸망시킨 지백(智伯)을 차례로 섬겼는데,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대우한 범씨와 중항씨에게는 보통 사람으로 보답하여 그들을 위해 원수를 갚지 않았고, 국사(國士)로 대우한 지백에게는 국사로 보답하여 지백을 죽인 조 양자(趙襄子)를 암살하여 복수하고자 하였다. 史記 刺客列傳

42) 예양의 일예양은 자신이 모시던 지백(智伯)을 조양자(趙襄子)가 죽이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버린 자객이다. 예양이 위장을 위해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이처럼 꾸미고 달군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된 것을 친구가 알아보고서 말하기를 자네의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차라리 조양자의 신하가 되면 복수를 쉽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는가?” 하니, 예양이 말하기를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미 몸을 바쳐 신하가 되어 놓고 다시 그를 죽이려 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장차 천하와 후세에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史記 刺客列傳한편, 이 고사는 소학계고(稽古)편에도 실려 있다.

 

예양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나라의 협객으로 지백(智伯)의 신하였다. 조양자가 지백을 죽이자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몸에 옻칠하여 문둥병 환자처럼 변신하였고,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었으며, 시장에서 걸식하며 거지 행세를 하였다. 하지만 결국 복수에 실패하고 조양자의 옷을 세 번 벤 뒤 자결하였다. 史記 刺客列傳 豫讓

43) 왕신민(汪信民)의 말:《소학》 〈선행(善行)왕신민이 늘 말하기를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汪信民嘗言, 人常咬得菜根, 則百事可做.]”라는 구절을 가리킨다.

44) 도동원(道東院)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서원이다. 1605(선조38)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7道東(도동)’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78(숙종4)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45) 선정(先正)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김굉필(金宏弼, 1454~1504),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일컬었다. 1498(연산군4) 무오사화 때 희천(熙川)과 순천(順天)으로 유배되고 1504(연산군10) 갑자사화에 사사(賜死)되었다.

46) 응몽공(應夢公)……것이니김응몽(金應夢)과 김응길(金應吉)은 김굉필의 현손이다.

47) 남강원(南康院)현 전라남도 강진군 소재의 서원으로 송시열(宋時烈), 박광일(朴光一)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남강사(南康祠)라고도 한다. 이 서원은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송시열이 강진에서 배를 타려다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잠시 근처의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 머물며 유생들에게 강론을 하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803(순조 3)에 창건되었다.

48) 장연사(長淵祠)현 전라남도 나주군 소재의 서원으로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시조인 문다성(文多省)을 비롯한 문공유·문극겸·문유필·문익점 등 다섯 사람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1871(고종8)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3년부터 다시 세워지기 시작하여 규모를 일신하였다.

49) 삼광 선생(三光先生) 문공(文公)남평 문씨(南平文氏)의 시조인 문다성(文多省)으로 신라의 지증왕과 진흥왕, 진지왕 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지냈다. 갓난아기 때 남평현의 장자못이라는 연못가의 높은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50) 네 선생문다성과 함께 배향된 문공유·문극겸·문유필·문익점을 말한다.

51) 엄자산(崦嵫山)중국 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 서쪽에 있는 산이다. 해가 들어가는 곳이라는 전설이 있어, 만년(晚年) 또는 노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52) 백하(柏下)양상형(梁相衡, 1833~1907)으로 박창수(朴昌壽, 1817~1897)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백하유고가 전한다.

53) 왕상서(汪尙書)왕응진(汪應辰, 1118~1176)이다. 남송(南宋)의 문신이자 학자로 고종(高宗) 소흥(紹興) 5(1135) 진사시에 급제하고 벼슬이 이부 상서에 이르렀다. 강직한 성품으로 자주 직간을 올렸으며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다.

54) 진승상(陳丞相)진준경(陳俊卿, 1113~1186)이다. 남송의 재상으로 효종 때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냈고 승상에 올랐다. 인재 등용과 군비(軍備) 강화에 힘썼다. 주희(朱熹)가 행장을 지었다.

55) 위국공(魏國公) 장준(張浚)1097~1164. 남송의 재상으로 금()나라에 빼앗긴 국토를 회복하는 데 뜻을 두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장식(張栻)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56) 원풍대신(元豊大臣)원풍(1078~1085)은 송나라 신종의 연호이다. 이 시기에 왕안석(王安石)을 위시한 채확(蔡確채경(蔡京) 등의 신법당(新法黨)이 집권하여 개혁정책을 단행하였다.

57) 이천(伊川)……일은이천은 송()나라의 유학자 정이(程頤)를 말한다. 송 철종(宋哲宗)을 시강(侍講)할 때, 하루는 강()을 마치고 신하들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철종이 일어나 기둥에 기대 버들가지를 꺾자, 정이가 바야흐로 봄을 만나 만물이 소생하는 때에 까닭 없이 나뭇가지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伊洛淵源録 卷4 伊川先生

58) 우계(牛溪) 선생성혼(成渾, 1535~1598)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551(명종6)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이이(李珥)와 교유하고 이황(李滉)을 사숙(私淑)하였으며, 조정에서 연이어 내려오는 벼슬을 거의 사양하고 인재 양성과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문집으로 우계집이 있다.

59) 노사(蘆沙) 선생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다. 자는 대중(大中),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노사는 그의 호이다.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조정의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깊은 궁리와 사색을 통해 이일분수(理一分殊)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수립하였다. 한말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문도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지금의 경상남도 일원에도 폭넓게 포진해 있었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60) 이최선(李最善) : 1825~188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유(樂裕), 호는 석전(石田)이다. 전라도 창평(昌平)에 거주하였으며 기정진의 문인이다. 1859(철종10)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병인양요 때 호남의 종친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서울로 올라갔는데, 기정진은 이를 격려하는 시를 써준 바 있다.

61) 연재(淵齋) 송 좨주(宋祭酒)송병선(宋秉璿, 1836~1905)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이며 연재는 그의 호이다.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에 기용된 뒤 경연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연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62) 면암(勉菴) 최 상서(崔尙書)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이며 면암은 그의 호이다.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배우고, 1855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1906년에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이후 전라북도 지방 진위대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대마도(對馬島)에 감금되어 단식하던 중 병을 얻어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63) 김현옥(金顯玉)1844~1910.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풍오(豊五)이며 호는 산석(山石)이다. 기정진의 문인으로 송병선·최익현 등과도 교유하였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기우만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일을 도모하려고 하였는데, 일을 이루지 못하고 화개(花開)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산석집(山石集)이 전한다.

64) 선사(先師)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항로(李恒老)의 신도비명인 화서 이선생 신도비명(華西李先生神道碑銘)을 가리킨다.

65) 송사(松沙)기우만(奇宇萬)) 1846~1916.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김평묵(金平默, 1819~1891) 등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다음, 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66) 애산(艾山) :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이다. 경상도 합천에서 살았고 기정진의 문인이다. 1894(고종31) 갑오개혁 이후 친일파의 개혁에 거의통문을 내기도 하였고 1905(고종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호남과 영남에 포고문을 내어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여 일본과 담판하기를 촉구하는 한편,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서 최익현(崔益鉉)과 거의하기로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등이 있다.

67) 식음당문집(息蔭堂文集)오현석(吳玄錫)의 문집이다.

68) 문절공(文節公)신상(申鏛, 1480~1530)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용(大用), 호는 위암(韋庵),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이조 판서가 되어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 김정(金淨), 김구(金球) 등을 비롯한 사림파 학자들의 등용에 크게 노력하였다. 사림파와 훈구 세력의 대립이 첨예화되자 양파의 중재에 힘썼고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죄를 입자 그들의 구명에 힘을 기울였다.

69) 입재(立齋) 송공(宋公)송근수(宋近洙, 1818~1903),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언술(彦述), 호는 입재(立齋),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송시열(宋時烈)8대손이다. 1882(고종19)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교섭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1884년에 청환수의제변개지령소(請還收衣制變改之令疏)를 올리고 낙향하여 재상산림(宰相山林)이란 칭호를 얻었다. 1895(고종32) 단발령에 단식으로 항의하였으며 그해 9월에 문석봉(文錫鳳)의 유성의병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가 있다.

70) 농암(農巖) 선생김창협(金昌協, 1651~1708)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기사환국 때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사사되자 사직하고 은거하였고,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 김수항이 신원되면서 대제학과 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직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등이 있다.

71) 대로(大老)송시열(宋時烈, 1607~1689),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72) 유기일(柳基一)1845~1904.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성존(聖存)이고 호는 용계(龍溪용서(龍西)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향적산(香積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척양록(斥洋錄)등의 저술 활동과 문인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저서로는 용서고(龍西稿)가 있다.

73) 현안(玄晏)의 부탁 현안은 진()나라 황보밀(皇甫謐)의 호()이다. 진나라의 좌사(左思)10년 동안 구상하여 삼도부(三都賦)를 지었는데, 황보밀이 서문을 써서 칭찬하자 부자와 귀족들이 서로 다투어 베끼는 바람에 낙양의 종잇값이 일시에 폭등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晋書 文苑傳여기서는 행장을 쓰는 일을 가리킨다.

74) 심석(心石)송병순(宋秉珣, 1839~1912)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다. 송시열(宋時烈)9세손이고,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1888(고종25)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905(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토왜(討倭)의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돌렸으며,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두문불출하여 시문(詩文)으로 망국의 슬픔을 달랬으나 끝내 대의를 지켜 음독 자결하였다. 저서에 심석재집(心石齋集)등이 있다.

75) 납량사의(納凉私議)기정진은 46세인 1843(헌종9)납량사의를 지었는데, 이 글은 저자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 글에서 근세에 성()을 논하는 자들이 이일(理一)과 분수(分殊)에 대하여 모르는 까닭에 이일을 형기(形氣)에서 떨어진 것으로 한정하고 분수를 형기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한정시켰으며, 그 결과 이일과 분수가 별개의 것이 되고 성()과 명()이 제멋대로 결정되어 성에 대한 논의가 분열되었다.”라고 전제한 뒤에 이일원적(理一元的) 관점에서 주리론(主理論)을 전개하였다.

76) 신득구(申得求)1850~1900. 자는 익재(益哉), 호는 농산(農山),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문인으로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이발기발(理發氣發)을 주장하여 이황(李滉)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의 학설인 천설(天說)이 이율곡의 주장에 어긋난다 하여 사문난적으로 몰려 많은 저술과 가산이 불태워지는 불행을 겪었으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음독 자결하였다. 송병선(宋秉璿전우(田愚)와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농산집이 있다.

77) 고수(瞽瞍)() 임금의 아버지이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의하면 성질이 완악(頑惡)하다.” 하였고, 맹자(孟子)》 〈만장(萬章) 에 의하면 아들인 순()을 죽이려고 창고(倉庫)의 지붕을 이게 하고는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질렀으며, 우물을 파게 하고 못 나오도록 흙을 처넣어 메우는 등 그 처사가 불선(不善)했다.” 하였다. 그럼에도 순 임금은 고수를 50이 되도록 사모하며 효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78) 근사속록(近思續錄) : 송병선이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의 언론을 모아 엮은 책으로, 142책이다.

79) 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 1606~1672),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이(李珥)를 사숙하였고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예학에도 밝았다. 노론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로, 송시열의 당숙이기도 하다. 저서에 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다.

80) 종용당(從容堂)1647(인조25)에 충남 금산(錦山)의 선비들이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산화한 의병들의 충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1663(현종4)에 종용사(從容祠)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조헌(趙憲), 고경명(高敬命), 영규대사(靈圭大師) 7백 명의 위패를 모셨다. 일제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8년에 복원되었다.

81) 중봉 선생(重峯先生)조헌(趙憲, 1544~1592)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인이다. 1567(명종22)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감찰, 보은 현감(報恩縣監) 등을 역임하고 고향인 옥천(沃川)으로 물러나 강학에 힘쓰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가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였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중봉집(重峯集)이 전한다.

82) 윤월정(尹月汀)윤근수(尹根壽, 1537~1616),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이다. 김덕수(金德秀),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2(명종17)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기묘사화 당시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冤)을 청하였다가 과천 현감으로 체직되었다. 1589(선조22)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 공신(光國功臣) 1등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83) 김문곡(金文谷)김수항(金壽恒, 1629~1689)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51(효종2)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89(숙종15)에 영의정을 맡고 있었는데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남인의 탄핵을 받고 진도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1694(숙종20)에 신원, 복관되었다. 저서에 문곡집등이 있다.

84) 김곡운(金谷雲)김수증(金壽增, 1624~1701)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연지, 호는 곡운(谷雲)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며, 김수항(金壽恒)의 형이다.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있던 1675(숙종1)에 송시열과 김수항이 예송(禮訟)의 여파로 조정에서 축출되자 강원도 춘천(春川)의 곡운에 은거하였고, 1680년에 다시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복귀하였다. 이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김수항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출사하지 않았다. 문집으로 곡운집(谷雲集)이 있다.

85) 명곡(明谷) 선조오희도(吳希道, 1583~1623),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득원(得原), 명곡은 그의 호이다. 금성(錦城)의 옛 고향 대명곡(大明谷)에 거처하면서 명곡이라고 자호(自號)하였고, 만년에는 뒷산 기슭에 집을 지어 망재(忘齋)라고 하였다. 1623(인조1) 알성 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는데, 관직에 나간 바로 그해에 천연두에 걸려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86) 운재(雲齋)최영조(崔永祚, 1859~1927)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석윤(錫胤)으로 최익현(崔益鉉)의 아들이다. 저서에 운재집이 있다.

87) 만 리……갔으니최익현은 1873(고종10) 11월에 시폐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내용이 과격하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3년을 보냈다. 유배에서 풀려난 그다음 해인 1876년에는 다시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를 올려 일본이 요구한 수호(修好)와 통상(通商)을 결사반대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는 명을 받고 소흑산도(小黑山島)로 유배된 바 있다.

88) 증자(曾子)의 효도어버이의 뜻을 받드는 효성을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 증자가 부친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의 일과 증자의 아들이 증자를 봉양할 때의 일을 비교해 거론하면서, 효행은 비슷하지만 증자는 부모의 뜻을 봉양하였고[養志], 증자의 아들은 부모의 몸만 봉양한 것[養口體]이라며, 진정한 효도는 뜻을 봉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89) 화서(華西)이항로(李恒老, 1792~1868),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이며 화서는 그의 호이다. 1808(순조8) 한성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강학을 하며 최익현,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을 길렀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로 꼽힌다. 저서로는 화서집이 있다.

90) 중암(重菴)김평묵(1819~1891)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장(稺章)이며 중암은 그의 호이다. 이항로의 문인으로 홍직필에게서도 수학하였다. 같은 문하의 유중교와 대학의 명덕(明德)을 이()로 보느냐, ()로 보느냐의 견해 차이로 당시에 큰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81년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일로, 섬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문집으로 중암집(重菴集)이 있다.

91) 괴원(槐園)이준(李埈, 1812~1853)으로 이항로의 아들이다.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자는 백흠(伯欽)이며 괴원은 그의 호이다. 1835(헌종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가학(家學)하면서 은거하며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문집으로 괴원집(槐園集)이 있다.

92) 유중불하(留中不下)유중(留中)’이라고도 한다. 임금이 상소를 읽고 처리할 필요가 없다고 여길 때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기 위하여 소장(疏章)을 궁중에 그대로 두고 관계 기관에 회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93) 송 성담(宋性潭)송환기(宋煥箕, 1728~1807),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 또는 성담,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송시열의 5대손이자 송인상(宋寅相)의 아들이다. 심성논변에서는 한원진(韓元震)을 지지하였으며, 문집에 성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94) 운평(雲坪)송능상(宋能相, 1709~1758)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사룡(士龍)이며 운평은 그의 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현손이고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쌓아 약관에 명성을 떨쳤다. 1740(영조16) 학행(學行)으로 천거 받아 출사하였다. 경학과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저서로 운평문집이 있다.

95) 임금호(林錦湖)임형수(林亨秀, 1514~1547),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이다. 1535(중종30)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역임하여 부제학에 올랐다. 1547(명종2)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소윤 윤원형(尹元衡)에게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절도에 안치된 뒤 곧 사사되었다.

96) 외암집(巍巖集)……외암 이간(李柬, 1677~1727)의 문집이다. 이간은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인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남당(南塘)은 한원진(韓元震, 1682~1751)으로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호락논쟁에서 호론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조선 후기, 노론 계열의 성리학자들이 대립하여 심과 성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논쟁하였는데, 주로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한 김창협, 김창흡, 이간 등이 한 파를 이루어 이를 낙론 또는 낙파라 하였으며 충청 지역에 사는 남당 한원진 등이 또 한 파를 이루어 이를 호론(湖論) 또는 호파라 하였다.

97) 삼연(三淵)김창흡(金昌翕, 1653~172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이다. 성리학에 침잠하여 이황과 이이를 절충하는 경향을 보였고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을 지지하였다. 시에도 큰 영향을 미쳐 당대 문단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저서에 삼연집(三淵集)등이 있다.

98) 삼은(三隱)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길재(吉再)를 가리킨다.

99) 운곡(耘谷)의 출처운곡은 원천석(元天錫, 1330~?)의 호이다. 그는 고려 말에 문란한 정치를 개탄하여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 태종(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었기에 이방원이 즉위하여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또 태종이 원천석의 집으로 찾아가도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피하였다고 한다.

100) 야은(冶隱)……전문(箋文)야은은 길재(吉再, 1353~1419)의 호이다. 그는 고려 때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내고 조선이 건국한 뒤에는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제수받았는데, 전문(箋文)을 올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信不事二君]”라고 하여 사양하였다. 해당 전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고려 조정을 신씨의 조정이라고 표현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는 우왕(禑王)이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길재가 고려에 대한 지조(志操)를 바꾼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101) 강재(剛齋)송치규(宋穉圭, 1759~1838),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 시호는 문간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6대손이다. 유일(遺逸)로 여러 번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평생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는데, 72세가 되던 1830(순조30)에 왕의 부름을 받아 세손의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으로 나아가 대사헌 및 이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102) 역천(櫟泉)송명흠(宋明欽, 1705~1768)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많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764(영조40)에 찬선(贊善)으로서 경연관이 되어 정치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사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 역천집이 있다.

103) 추양(秋陽)송계간(宋啓幹, 1764~1841)으로 본관은 은진, 자는 직경(直卿)이며 추양은 그의 호이다. 송명흠의 손자이다.

104) 금곡(錦谷)송내희(宋來熙, 1791~1867)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칠(子七)이며 금곡은 그의 호이다. 1838년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어 이후 장령, 집의 등을 거쳐 뛰어난 학행을 인정받아 1853년에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에 천거되었다.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857년부터 10년 가까이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내고, 뒤에 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금곡문집이 있다.

105) 윤증(尹拯)1629~1714).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송시열의 문인이었으나, 송시열이 지은 윤선거 묘갈명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서로 사이가 벌어졌다. 이후로 소론(少論)의 영수로 추대되어 노론인 송시열과 대립하였다. 문집으로 명재유고(明齋遺稿)가 전한다.

106) 맹자의 호연장(浩然章):《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 2장의 내용이 호연지기(浩然之氣)에 대한 것이므로 일명 호연장이라 일컫는다.

107) 호변장(好辯章):《맹자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있다. 공도자(公都子)사람들이 모두 선생님께서 변론으로 남을 이기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감히 묻거니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맹자가 내 어찌 말로 남 이기기를 좋아하겠는가.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대답한 대목을 가리킨다.

108) 경춘(景春)……:《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대장부(大丈夫)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경춘의 질문에 맹자가 대답한 내용을 가리킨다. 맹자는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여,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이 절개를 바꾸지 못하며, 위무가 뜻을 꺾지 못하는 것, 이를 대장부라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09) 조문……기른다조자대열(弔者大悅)’은 전국 시대 등()나라 정공(定公)이 죽었을 때 세자가 맹자의 조언을 듣고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르자 조문객들이 세자의 안색이 수척하고 통곡하는 모습이 애달파 조문 온 사람들이 크게 감복하였다[弔者大悅].’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孟子 滕文公上자반이축(自反而縮)’은 맹자가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대해 증자(曾子)의 말을 인용하여 스스로 반성해 보아 바르다면[自反而縮] 비록 천만 사람이 있는 곳에라도 나는 가서 대적할 것이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孟子 公孫丑上직이양(以直養)’은 맹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말하면서 그 기운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정직으로써 잘 기르고[以直養] 해침이 없으면, 천지의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라고 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孟子 公孫丑上

110) 대학의……않았습니다:《대학장구() 10장에서 군자는 혈구의 도()가 있다. 윗사람에게서 싫었던 점을 가지고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서 싫었던 점을 가지고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서 싫었던 점을 가지고 뒷사람에게 가하지 말며, 뒷사람에게서 싫었던 점을 가지고 앞사람을 따르지 말며, 오른쪽 사람에게서 싫었던 점을 가지고 왼쪽 사람과 사귀지 말며, 왼쪽 사람에게서 싫었던 점을 가지고 오른쪽 사람과 사귀지 말 것이니, 이것을 일러 혈구의 도()라고 하는 것이다.[君子有絜矩之道也.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라고 한 것을 말한다.

111) 중용의……일은:《중용장구1장에 하늘의 명을 성이라고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112) 귀신장(鬼神章)귀신의 덕이 성대하구나.[鬼神之爲德 其盛矣乎]”로 시작하는 중용장구16장을 가리킨다.

113) 사대(四代)……한다사대는 하(), (), () 삼대와 순임금의 우() 시대를 일컫는다. 여기에 해당하는 논어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나라의 역법을 쓰고, 은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음악은 소무를 쓰고, 정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정나라 음악은 마음을 음탕하게 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은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라고 하였다. 論語 衛靈公

114) 구경장(九經章):《중용장구20장을 말한다. 해당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몸을 닦으면 도가 확립되고, 어진이를 높이면 의혹되지 않고, 친척을 친히 하면 숙부와 형제들이 원망하지 않는다.修身則道立 尊賢則不惑 親親則諸父昆弟 不怨

115) 혈구장(絜矩章):《대학장구() 10장을 가리키는데, 경문(經文)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풀이한 것이다.

116) 이들보다이들은 자로와 우임금을 가리킨다. 이 구절의 앞 내용은 자로는 사람들이 그에게 과실이 있음을 말해 주면 기뻐하였다. 우왕은 선한 말을 들으면 절하였다.[子路, 人告之以有過則喜. , 聞善言則拜.]”인데, 이들보다 순임금이 위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孟子 公孫丑上

117) 부모님을……하였습니다증자는 아버지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리고 상을 물릴 때 반드시 남은 것을 누구에게 주고 싶은지 물었으며, 아버지가 남은 음식이 있는지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해 맹자는 증자가 부모의 뜻을 받들었다고 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는 증자와 같이 하는 것이 괜찮다고 하였다. 孟子 離婁上이에 대하여 정자(程子)맹자가 어버이 섬기기를 증자(曾子)와 같이 한다면 괜찮다.’라고 하였는데, 일찍이 증자의 효를 충분하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周易傳義 師卦 九二

118) 맹자가 유하혜(柳下惠)……귀결하였습니다맹자가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는 유하혜에 대해 화()하기로는 성()의 경지라고 고평했다가, 만장하(萬章下)에서는 남의 선악(善惡)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은 오만함이 있었으므로, 불공(不恭)하다고 비판한 부분을 가리킨다. 孟子 公孫丑上, 萬章下

119)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의 설어떤 사람이 먼저 이()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먼저 기()가 있는 것인가?”라고 묻자, 주자가 답하기를 이는 일찍이 기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그러나 이는 형이상자이고 기는 형이하자이다. 형이상과 형이하로 말을 한다면 어찌 선후가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理氣上

120) 관중(管仲)관중은 춘추 시대에 제환공(齊桓公)을 도와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으나 유교에서 주창하는 왕도(王道) 정치를 행하지는 못하였다.

121) 신문(晨門하괴(荷蕢)신문(晨門)은 새벽에 문() 여는 것을 맡은 사람이고, 하괴(荷蕢)는 삼태기를 지고 다니는 사람이니 모두 옛날 노()나라ㆍ위()나라의 은사(隱士)이다. 論語 微子

122) 소홀(召忽)춘추 시대 제()나라 공자(公子) ()를 모시던 신하이다. 규가 공자 소백(小白)과 왕위를 다투었는데, 소백이 왕위에 오른 뒤에 규를 죽이고 소홀을 신하로 삼으려 하자, 소홀은 규를 따라 자살하였다. 史記 齊太公世家

123) 비은장(費隱章):《중용장구12장을 가리킨다.

124) 구경장(九經章):《중용장구20장을 가리킨다. 이 장에서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 지켜야 할 아홉 가지 강령(綱領)인 수신(修身 자신을 수양하는 것), 존현(尊賢 어진이를 존중하는 것), 친친(親親 친척과 친하는 것), 경대신(敬大臣 대신을 존경하는 것), 체군신(體群臣 신하의 처지가 되어 그 마음을 살피는 것), 자서민(子庶民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 내백공(來百工 모든 공인(工人)을 나오게 하는 것), 유원인(柔遠人 먼 곳의 사람의 회유하여 오게 하는 것), 회제후(懷諸侯 제후를 편안케 안무하는 것)를 제시하였다.

125) 광산옹(狂山翁)

126) 기자(箕子)의 양광(佯狂)양광은 거짓으로 미친 척 하는 것을 말한다. ()나라 태사(太師) 기자가 주왕(紂王)의 폭정을 보고 간언을 올렸으나 듣지 않자 신하가 되어서 자신의 간언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여 떠나는 것은 바로 군주의 악을 드러내고 자신은 백성들에게 환심을 얻는 것이니, 나는 차마 이렇게 할 수 없다.”라고 한 뒤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하며 노예가 되더니 마침내 숨어서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슬퍼하였다.’라고 하였다. 史記 微子世家

127) 증점(曾點)의 광간(狂簡)광간은 뜻은 크나 행실이 뜻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진()에 있을 때 이르기를 돌아가련다, 돌아가련다. 오당의 소자들이 광[]하고 소략[]하여 찬란하게 문장만 이루었을 뿐이요 그것을 재단할 줄을 모르는도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한 광()이 바로 증점 등을 가리켰던 데서 온 말이다. 증점의 광간을 예로 들면, 일찍이 공자가 그에게 뜻을 물었을 때, 그가 대답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면서 돌아오겠습니다.”FK고 하여, 성현의 기상을 발휘한 것이 있다. 論語 公冶長·先進

128) 완적(阮籍)의 창광(猖狂)창광은 예속(禮俗)에 구애받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나라 완적은 천성이 방달불기(放達不羈)하여 때로는 마음 내키는 대로 수레를 타고 아무 곳으로나 가다가 더 이상 갈 수 없이 길이 막히면 통곡하고 돌아왔다 한다. 晉書 卷49 阮籍傳이를 두고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서 완적은 창광하니 어찌 궁도의 통곡을 본받으랴.阮籍猖狂 豈效窮途之哭라고 표현한 바 있다.

129) 연성(連城)의 보옥이른바 화씨지벽(和氏之璧)으로 얻기 힘든 보배를 뜻한다. ()나라 혜문왕(惠文王) 때에 초나라의 화씨지벽을 얻자, ()나라 소왕(昭王)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서 성 15개와 옥을 바꾸자고 했던 데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廉頗藺相如列傳

130) 표범은……것이다()나라 유향(劉向)열녀전(列女傳)》 〈도답자처(陶答子妻)첩이 들으니 남산에 검은 표범이 있는데 안개비 속에서 이레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산 위에 가만히 있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털을 윤택하게 하여 문장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131) 주역에서는……쉰다:〈수괘(隨卦) ()못 가운데 우레가 있는 것이 수()이니, 군자가 보고서 날이 어두워지면 안으로 들어가 그 몸을 편안히 쉰다.[澤中有雷,, 君子以, 嚮晦入宴息.]”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은거한다는 의미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132) 자벌레가……것이:《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 ()자벌레가 몸을 굽히는 것은 장차 몸을 펴기 위함이요, 용과 뱀이 칩거하는 것은 몸을 보존하기 위함이다.[尺蠖之屈, 以求信也, 龍蛇之蟄, 以存身也.]”라고 하였다. 자취를 감춰 몸을 보존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133) 회옹(晦翁)의 자사(字辭)주희의 자사에 나무는 뿌리에 감추어야 봄에 잎이 성하게 피고, 사람은 몸에 감추어야 신명이 안에서 살찌는 것이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나무가 뿌리에 생명을 숨겨 봄에 화창하게 펼치듯이, 사람은 몸에 덕성을 숨겨 신명(神明)이 안에서 살찌는 것을 말한다.

134) 피음사둔(詖淫邪遁)의 말:《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한쪽으로 치우친 말에서 그의 마음이 가려 있음을 알며, 지나친 말에서 마음이 빠져 있음을 알며, 부정한 말에서 마음이 도()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며, 회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 것이다.

135) 옛날의……끝맺었으니:《순자(荀子)》 〈권학(勸學)학문하는 뜻은 선비가 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성인이 되어 마치는 데에 있다.其義則始乎爲士 終乎爲聖人라는 말이 나온다.

136) 춘담자(春潭子) : 기동준(奇東準, 1860~?)의 호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평중(平仲)이다. 기정진의 문인이며, 전라도 광주(光州)에 거주하였다.

137) 난성(蘭成)이 석책(射策)하는 나이15세를 말한다. 난성은 북주(北周) 때 사람 유신(庾信)의 어릴적 이름이다. 周書 卷41 庾信傳석책(射策)은 과거의 일종으로 경서(經書)의 의의(疑義)와 시무(時務)에 대한 문제의 답안을 책()에 써서 올리게 하여 그 사람의 우열을 결정하는 것이다.

138) 아홉……:《서경》 〈여오(旅獒)밤낮으로 부지런하지 못한 점이 혹시라도 있지 않게 해야 한다. 자그마한 행동이라도 신중히 하지 않으면 끝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칠 것이니, 이는 마치 아홉 길의 산을 만들 적에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그 공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에서 인용한 말로, 큰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139) 병산(屛山)()나라 유자휘(劉子翬, 1101~1147)이다. 자는 언충(彦沖), 호는 병옹(病翁)이다.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하였으며, 주희(朱熹)의 아버지인 주송(朱松)과 친구로, 주송이 죽은 뒤에 주희를 가르쳤다. 주역에 뛰어났으며, 특히 복괘(復卦)를 중시하였다. 문집으로 병산전집(屛山全集)이 있다.

140) 재생명(哉生明)초사흘을 말한다. 이때에 달빛이 생기기 시작하므로 재생명이라 한다. 서경》 〈무성(武成)“4월 재생명[厥四月哉生明]”이라 하고, 그 주에 재는 비로소이다. 비로소 밝음이 나타나니 월 3일이다.[, 始也, 始生明, 月三日也.]”라고 하였다.

141) 지학(志學)의 나이15세를 말한다. 논어》 〈위정(爲政)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學問)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라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하였다

142) 하서(河西) 선생김인후(金麟厚, 1510~1560),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540(중종35)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부수찬으로 세자를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1545(인종1) 인종이 승하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칭탁하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문묘(文廟)에 종향되었다. 저서로 하서집이 있다.

143) 한 명의……대니한 사람의 힘으로는 여러 사람을 당할 수 없게 됨을 말한다. 맹자(孟子)가 대불승(戴不勝)에게 묻기를, 초나라 대부가 그 아들에게 제나라 말을 가르치고자 할 때 제나라 사람과 초나라 사람 가운데 누구를 스승으로 삼게 하겠느냐고 하자, 대불승이 제나라 사람을 스승으로 삼게 하겠다고 답하였다. 이에 맹자가 말하기를 한 제나라 사람이 스승이 되었는데 여러 초나라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면, 비록 날마다 매를 치면서 그 아들이 제나라 말을 하기를 구하더라도 될 수 없으니, 그 아들을 제나라 마을 장·악 사이에 몇 년을 두면 저절로 그 말을 배워 비록 날마다 매를 쳐서 초나라 말을 하게 하더라도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데서 인용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144) 처음에는……것이니송나라 주돈이(周敦頤)통서(通書)》 〈지학(志學)성인은 하늘처럼 되기를 희망하고, 현인은 성인처럼 되기를 희망하고, 선비는 현인처럼 되기를 희망한다.[聖希天, 賢希聖, 士希賢.]”라고 한 것을 원용한 표현이다.

145) 고산(鼓山) 임 선생임헌회(任憲晦, 1811~1876),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이다. 송치규(宋穉圭)ㆍ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1874년에 이조 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ㆍ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ㆍ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저서로는 고산집(鼓山集)이 있다.

146) 노주(老洲) 오 문원공(吳文元公)오희상(吳熙常, 1763~1833)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1800(정조24) 천거로 세자익위사 세마에 제수되고, 황해도 도사 등을 지낸 뒤,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廣州)의 징악산(徵嶽山)에 은거하고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노주집이 있다.

147) 병산(屛山)……글자유자휘(劉子翬)가 주희에게 자를 지어 주면서 쓴 축사(祝辭)나무는 뿌리에 감추어야 봄에 잎이 성하게 피고, 사람은 몸에 감추어야 정신이 안에서 살찐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를 말한다. ‘병산은 유자휘의 호이다.

148) 천하의……()이다:《중용장구20장에 ··3가지는 천하에 통행되는 덕이니,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혹은 태어나면서 이것을 알고,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이것을 아는데, 그 앎에 이르러서는 똑같다. 혹은 편안히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롭게 여겨 이것을 행하고, 혹은 억지로 힘써서 이것을 행하는데, 그 성공함에 미쳐서는 똑같다. …… 학문을 좋아함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인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에 가깝다.”라고 하였다.

149) ()……독행(篤行)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여 돈독히 실행하는 공부를 말한다. 중용장구20장에 공자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돈독히 실행하여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辯之, 篤行之.]’라고 하였다.” 하였다.

150) 성으로……경지:《중용장구21장에 성으로 말미암아 이치에 밝아짐을 성이라 이르고, 이치에 밝음으로 말미암아 성해짐을 교라 이르니, 성하면 이치가 밝아지고 이치가 밝아지면 성해진다.[自誠明謂之性, 自明誠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고 하였다.

151) 자신의……하고주희가 극기복례를 언급하면서 자신을 극복하는 데에 또한 별다른 기교나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외로운 군사가 갑자기 강한 적을 만났을 때 단지 최선을 다해 목숨을 바쳐 전진할 뿐 더 이상 무얼 따지겠는가.[克己亦別無巧法, 譬如孤軍猝遇强敵, 只得盡力舍死向前而已, 尙何問哉?]”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卷41

152) 삼태기의……만들 듯이끝까지 노력하여 목표한 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경》 〈여오(旅獒)아홉 길 산을 만들 적에,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공이 허물어진다.爲山九仞, 功虧一簣.라고 하였고, 맹자》 〈진심 상(盡心上)우물을 아홉 길을 팠더라도, 샘물에 미치지 못하면, 우물을 버리는 것이다.掘井九軔, 而不及泉, 猶爲棄井也.라고 하였다.

153) 번지(樊遲)……하였다:《논어》 〈자로(子路)번지(樊遲)가 농사일을 배울 것을 청하자, 공자께서는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하셨다. 채전(菜田) 가꾸는 일을 배울 것을 청하자, ‘나는 늙은 원예사만 못하다.’ 하셨다.[樊遲請學稼, 子曰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吾不如老圃.]”라고 하였다.

154) 공자께서……법이다:《논어》 〈위령공(衛靈公)군자는 도를 도모해야지 먹을 것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 농사를 지어도 그중에 굶주림이 있는 법이요, 학문을 하여도 먹을 녹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는 도가 행해지지 못할까 근심하고 가난할까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君子謀道不謀食. 耕也, 餒在其中矣, 學也, 祿在其中矣. 君子憂道不憂貧.]”라고 한 말이 나온다.

155) 유신(有莘)……된다이윤(伊尹)은 신야에서 농사지으며 살다가 탕왕(湯王)이 세 차례 정중하게 초빙하자 세상에 나와 상()나라를 일으켰고, 제갈량(諸葛亮)은 남양(南陽)에서 밭을 갈며 지내다가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감동하여 촉()의 승상이 되었다. 孟子 萬章上》 《三國志 蜀書 諸葛亮傳상림(桑林)의 비은나라 탕왕이 7년의 가뭄을 만났을 때 상림의 들에서 하늘에 기도하여 큰비가 내렸던 일을 말한다. 事文類聚 天道部 禱雨

156) 서유자(徐孺子)유자(孺子)는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의 자로, 그는 집이 가난하여 몸소 밭을 갈았는데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53 徐穉列傳

157) 동소남(董邵南)()나라 사람으로 안풍(安豐)에 은거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며 살았다. 한유(韓愈)가 그의 이러한 삶을 두고 동생행(董生行)이란 글을 지었다.

158) 멀리……것이학문의 길에서 언제나 멀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라 주희의 초년 시절 스승인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가 주희에게 내가 주역에서 입덕(入德)의 문을 얻었으니, 이른바 멀지 않아 되돌아온다[不遠復]’라는 것이 바로 나의 세 글자 부적이다.”라고 하였는데, ‘불원복(不遠復)’주역》 〈복괘 초구(初九)멀리 가지 않고 되돌아오니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요, 크게 좋을 것이다.[不遠復, 无祗悔, 元吉.]”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心經 卷1

159) 삶과 의리의 분변원문의 웅어지변(熊魚之辨)’은 맹자(孟子)생선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웅장(熊掌)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생선을 버리고 웅장을 취하리라. 삶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의()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고 한 말을 원용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160) 노학구(老學究)늙어서 세상에 쓸모 없는 속된 학자를 의미한다. 흔히 글방 선생을 가리키기도 한다.

161) 시체가……않는:《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의지가 굳은 선비는 곤궁하여 자기 시체가 구학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맹한 사람은 언제라도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한 것을 원용한 말이다. 여기서는 죽음을 각오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162) 스스로……의리:《서경》 〈상서(商書) 미자(微子)에 보인다. ()나라가 쇠약해지자 미자(微子)가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에게 상의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편안히 가져 사람마다 스스로 선왕에게 의로운 뜻을 바쳐야 한다.[自靖, 人自獻于先王.]”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망한 조선에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로 보인다.

163) 맥수(麥秀)의 탄식나라가 망한 것을 이른다. 기자(箕子)가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길에 멸망한 은나라의 옛 궁궐터를 지나면서 보리와 벼와 기장만이 우거진 모습을 보고 고국의 멸망을 슬퍼하면서 맥수가(麥秀歌)를 지었는데, “우북한 보리 이삭이여, 벼와 기장이 무성하구나. 저 사나운 아이여! 나와 서로 좋지 못하였네.[麥秀漸漸兮, 禾黍油油. 彼狡童兮, 不與我好兮.]”라고 하였다

164) 풍천(風泉)의 생각풍천은 시경》 〈회풍(檜風) 비풍(匪風)조풍(曹風) 하천(下泉)을 아울러 일컫는 말로, 두 시는 모두 제후의 대부가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것을 탄식해 읊은 것이다. 여기서는 망한 조선에 대한 감회를 일컫는다.

165) 절지(竊脂)기름을 훔쳐 먹는 새라는 뜻으로 콩새의 별명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122절지새가 곡식을 쪼아 먹지 않는 것처럼, 옛날 제왕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않았다.[古之帝王……其不爲不善……如竊脂之不穀]”라고 하였다.

166) 길료(吉了)진길료(秦吉了)로 새의 이름이다. 이 새는 만이(蠻夷)의 산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167) 구학(丘壑)의 뜻은일(隱逸)하고 싶은 마음을 말한다. 구학(丘壑)일구일학(一丘一壑)’의 준말로 은거지(隱居地)를 뜻한다. 한서(漢書)》 〈서전 상(敍傳上)한 골짜기에서 고기 낚으니 만물이 그의 뜻에 간여하지 않고, 한 언덕에서 소요하니 천하가 그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漁釣於一壑, 則萬物不奸其志; 棲遲於一丘, 則天下不易其樂.]”라고 한 데서 비롯하였다.

168) 나라의……마음원문은 풍천지사(風泉之思)’인데, () 나라 왕실이 쇠미해짐을 탄식한 시경회풍(檜風)의 비풍(匪風)과 조풍(曹風)의 하천(下泉) 시를 슬픈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일제에 의해 나라가 병합된 조선의 상황을 슬퍼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69) 난와(難窩)오계수(吳繼洙, 1843~1915),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합(重涵), 호가 난와이다. 1895(고종32) 을미사변이 일어나 일본인들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이를 토평하기 위하여 기우만(奇宇萬)이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그에 가담하였다. 경술국치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두문불출하던 중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한 일로 장성 헌병부대에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영사재(永思齋)에 들어가 오직 독서만으로 생애를 보냈다. 문집으로 난와유고(難窩遺稿)가 있다.

170) 맥수가(麥秀歌)기자(箕子)가 백마를 타고 주()나라로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나라의 궁궐터를 지나면서 벼와 기장이 우거진 모습을 보고 고국의 멸망을 슬퍼하면서 지어 부른 노래이다. 史記 宋微子世家

171) 무하향(無何鄕)어디에도 없는 고을[無何有之鄕]이란 뜻으로, 장자(莊子)가 말한 이상향(理想鄕)이다. 장자가 혜자(惠子)와 더불어 논변하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큰 나무를 갖고서 아무 쓸모가 없다고 걱정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나무를 무하유지향의 광막한 벌판에 심어 두고서 하릴없이 그 곁을 서성이거나 그 밑에 누워서 소요해 볼 생각은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莊子 逍遙遊

172)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 1390~1453.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433년 야인(野人)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했다. 고려사(高麗史)를 개찬할 때 총책임을 맡았고 세종실록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총지휘하였다.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유명(遺命)을 받들어 12세의 단종(端宗)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에게 두 아들과 함께 격살(擊殺)되었다. 저서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있다.

173)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 : 한기(1008~1075)와 범중엄(989~1052)은 북송(北宋) 초기의 명신들로, 함께 인종(仁宗) 경력(慶曆) 연간의 신정(新政)을 주도하였고 서하(西夏)의 침략을 막고 오랫동안 병사(兵事)를 맡으면서 명성을 쌓아 한범(韓范)’이라 병칭되었다.

174)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 주 선왕(周宣王) 때의 현신(賢臣)이다. 방숙은 북벌(北伐)에 참여한 뒤 반란을 일으킨 형만(荊蠻)을 평정하였으며 소호는 회이(淮夷)를 정벌하였다. 방숙이 형만을 정벌한 것은 시경》 〈소아(小雅) 채기(采芑)에 실려 있고, 소호가 회이를 정벌하고 선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일은 시경》 〈대아(大雅) 강한(江漢)에 실려 있다.

175) 화양(華陽)의 송자(宋子) :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화양(華陽)’은 그가 우거한 동리이다.

176) 몽촌(夢村) 김 상국(金相國)김종수(金鍾秀 : 1728~1799)를 말한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정부(定夫), 호는 진솔(眞率) 또는 몽오(夢梧)이다. 1781(정조5)에 대제학에 올라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802(순조2)에 유언호(兪彦鎬)와 함께 정조묘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몽오집이 있다.

177) ……절도와향교에서 예를 강습하는 행사인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거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178) 일헌(逸軒) 선생 정공(鄭公)정심(鄭諶, 1520~1602)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실(仲實)이며 일헌은 그의 호이다. 1568(선조1)에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은 이조정랑을 지냈다. 나주의 설재서원(雪齋書院)에 배향되었다.

179) 박회재(朴懷齋)박광옥(朴光玉, 1526~1593).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이며 회재는 그의 호이다. 전라도 광주에 세거(世居)하였고 나주 선도면(船道面)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실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고향의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하였다. 1602년 광주 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회재유집(懷齋遺集)이 있다.

180) 건제(健齋) 김문열공(金文烈公)김천일(金千鎰, 1537~1593)이다.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ㆍ극념당(克念堂),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항의 문인으로 1573년 학행으로 발탁되어 군기시 주부가 되었고 이후 용안 현감(龍安縣監) 및 강원도와 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나주(羅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순사(殉死)하였다.

181) 제봉(霽峯) 고충렬공(高忠烈公)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태헌,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은거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사(殉死)하였다. 저서에 제봉집이 있다.

182) 단순한 오자원문의 어로(魚魯)’는 비슷한 글자를 잘못 쓰는 오류를 말한다. 포박자(抱朴子)》 〈하람(遐覽)글씨를 세 번 베껴 쓰면 어 자가 노 자로 변하고, 허 자가 호 자로 변한다.[書三寫, 魚成魯, 虛成虎.]”라고 하였다.

183) 높은……마음:《시경소아(小雅) 거할(車舝), “높은 산을 우러러봄이여, 큰길을 따라가도다.高山仰止 景行行止한 데서 온 말로, 사모(思慕)하고 존경(尊敬)하는 것을 의미한다.

184) 설재(雪齋) 문정공(文靖公)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인 정가신(鄭可臣, ?~1298)이다. 자는 헌지(獻之),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원나라 황제에게 학문을 인정받아 한림학사 가의대부를 제수받았다. 전고(典故)에 밝고 문장에 능하여 많은 사명(辭命)을 지었으며, 저서에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이 있다.

185) 영모재(永慕齋) 경무공(景武公)정식(鄭軾, 1407~1467) 조선 초의 문신으로 세조 초에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조선 초기의 군사제도와 군적정리에 공을 세운 바 있다.

186) 건천(巾川) () 선생정광(程廣, ?~?~)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전중판시사(殿中判寺事)를 역임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고려에 충절을 지키기 위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묘소는 광주(光州) 금당산(金塘山) 정랑동(程郞洞)에 있다.

187) 이천(伊川) 선생정이(程頤, 1033~1107),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이다. 중국 북송 때의 학자로, 당시 대학의 학제가 너무 경쟁 위주인 것을 보고 예양(禮讓)을 위주로 교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이정전서(二程全書)가 있다.

188) 정포은(鄭圃隱)정몽주(鄭夢周, 1337~1392)이다.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달가(達可)이며 포은은 그의 호이다. 고려 말엽에 이성계(李成桂)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기회를 보아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李芳遠)의 부하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1517(중종12) 문묘에 종사되었다. 저서로 포은집이 있다.

189) 이인재(李麟齋)이종학(李鍾學, 1361~1392)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자는 중문(仲文)이며 인재는 그의 호이다. 고려 말엽의 문신으로 조선이 건국되면서 정도전 등이 그를 살해하려 했으나 문하생인 김여지의 도움으로 이배(移配)되던 중 무촌역(茂村驛)에서 살해되었다. 뒤에 신원(神寃)되고 문헌서원(文獻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인재유고가 있다.

190) 민농은(閔農隱)민안부(閔安富, ?~?)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영숙(榮叔)이며 농은은 그의 호이다. 고려 말엽의 문신으로 1392(태조1) 조선이 개국하자 이에 반대하여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서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191) 안천석(泉石)안성(安省, 1344~1421)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석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일삼(日三), 호는 설천(雪泉천곡(泉谷),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1380(우왕6)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 판관 등을 지냈다. 1411(태종11) 참지의정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참찬에 이르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192) 서금천(徐衿川)서견(徐甄, ?~?)이다.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여와(麗窩)로 안향(安珦)의 문인이다.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탄핵하였으나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고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후 풀려나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나 금천(衿川)에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다.

193) 남사천(南沙川)남을진(南乙珍, 1331~1391)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태조 때까지 살았다.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 등과 교유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사천현 봉황동에 은거하였다. 후에 태조가 그를 조정으로 불렀으나 불응하였고, 사천백(沙川伯)에 봉하였으나 이 역시 받지 않고서 적성의 감악산(紺嶽山) 석굴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194) 김농암(南籠巖)김주(金澍, ?~?)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택부(擇夫)이며 농암은 그의 호이다. 고려 말엽의 문신으로, 1392(공양왕4) ()나라에 하절사(夏節使)로 갔다 돌아오던 중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통곡하고 명나라로 되돌아가 은거하였다. 저서로 농암일고가 있다.

195) 이정(彝鼎)이정은 종묘(宗廟) 제사에 쓰는 제기(祭器)로 이는 술잔이고 정은 솥이다. 옛날에는 큰 공을 세우면 그 일을 술그릇이나 솥에 새겨 길이 전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196) 주나라를……여겨:《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가 나라를 종주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 숙제만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의리를 지키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서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서 먹었다.[武王已平殷亂 天下宗周 而伯夷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고 하였다. 여기서는 새 왕조인 조선을 섬기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197) 질풍……신하당 태종(唐太宗)이 직신(直臣) 소우(蕭瑀)를 칭찬하며 하사한 시에 거센 바람 아래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난리 속에 충성스런 신하를 알 수 있다.[疾風知勁草, 版蕩識誠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新唐書 蕭瑀列傳

198) 서문원문의 현아ᇿ(玄晏)은 훌륭한 글의 서문을 쓰는 일을 말한다. 현안은 진()나라 황보밀(皇甫謐)의 호이다. 좌사(左思)삼도부(三都賦)를 지었는데, 처음에는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황보밀이 서문을 써서 칭찬하자 너도나도 서로 베끼느라 낙양의 지가(紙價)가 올랐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左思

199) 윤회산(尹晦山)윤태원(尹泰元, 1833~1906)이다. 그는 1886(고종23)에 나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200) 박눌재(朴訥齋)박상(朴祥, 1474~1530)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중종 10(1515)에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재직할 때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과 함께 상소하여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고, 임금을 협박하여 국모를 내쫓은 박원종(朴元宗) 등 세 훈신(勳臣)을 처벌하기를 청하다가 오림역(烏林驛)에 유배되었다. 저서로 눌재집이 있다.

201) 박남곽(朴南郭)박동열(朴東說, 1564~1622)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열지(說之), 호는 남곽·봉촌(鳳村)이다. 1613(광해군5)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다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중풍으로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폐고(廢錮)된 지 10년 만인 1622년 끝내 사망하였다.

202) 촉군 태수(蜀郡太守) 문옹(文翁) : ()나라 경제(景帝) 때의 인물로 촉군을 다스렸는데 촉 지방이 궁벽하여 오랑캐 풍속이 있는 것을 보자 크게 교화를 펴고 문풍(文風)을 일으켰다. 漢書 文翁傳

203) 광주 자사(廣州刺史) 공규(孔戣)()나라의 문장가인 한유(韓愈)남해신묘비에서 남해신묘를 중수하고 제사를 잘 올린 광주 자사 공규를 찬양한 바 있다.

204) 남양 태수(南陽太守) 소두(召杜)소두는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의 병칭으로 모두 한나라 때 전후로 남양 태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백성들은 이들을 칭송하여 전에는 소부(召父)가 있었는데 뒤에는 두모(杜母)가 있었다.” 하였다. 漢書 循吏傳》 《後漢書 杜詩列傳

205) 귀래(歸來) 선생 신공(申公)신말주(申末舟, 1429~1503). 자는 자집(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1454(단종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로 벼슬을 사임하고 물러나 순창에 살면서, 귀래정을 지어 산수를 즐겼다. 작품으로 십로계첩(十老契帖)이 있다.

206) 난정(蘭亭)에서의 유흥동진(東晋)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 계축년(353) 3월에 회계(會稽) 산음현(山陰縣)의 난정에서 40여 인의 명사(名士)들과 함께 모여 수계를 하고 주연을 베풀어 시를 지으면서 풍류를 즐겼다. 古文眞寶 後集 蘭亭記

207) 낙양 기영회(洛陽耆英會)()나라 문언박(文彦博)이 낙양에서 벼슬하면서 사마광(司馬光), 부필(富弼) 13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던 모임이다. 당시에 문언박 등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거의 다 70세가 넘은 관직이 있는 사람이었다. 宋史 文彦博傳

208) 삼상육신(三相六臣)삼상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희생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苯)을 가리킨다. 육신은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죽음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으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를 말한다.

209) 진양(晉陽) 정공(鄭公)정휴동(鄭休東, ?~?)이다. 그는 이 서문의 청탁자인 정도원(鄭道源)5대조로 1746(영조22)에 함평군 월야면 외치리에 백화정(百花亭)을 세웠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화정처사(花亭處士)라고 불렀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원인손(元仁孫)이 이곳을 방문하여 화초와 수목이 아름답다 하여 백화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松沙集 西巖鄭公行狀

210) 문간공(文簡公) 원상1721~1774.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靜)이다. 1750(영조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3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한편 원인손의 시호는 문민(文敏)’인데 오준선이 문간이라고 한 것은 착오로 보인다.

211) 정형(鄭兄) 관일(貫一)정도원(1841~1899)으로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서암(西巖)이며 관일은 그의 자이다. 임헌회(任憲晦)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중년 이후에는 백화정에서 경서와 역사서를 강론하고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松沙集 西巖鄭公行狀

212) 노사(蘆沙) 선생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다.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조정의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깊은 궁리와 사색을 통해 이일분수(理一分殊)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수립하였다. 한말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문도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지금의 경상남도 일원에도 폭넓게 포진해 있었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13) 임전재(任全齋) 선생임헌회(任憲晦, 1811~1876),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이다. 송치규(宋穉圭), 홍직필(洪直弼) 등에게 수학하였다. 1874년에 이조 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ㆍ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저서로 고산집(鼓山集)이 있다.

214) 그 기문(記文)기정진과 임헌회가 작성한 백화정기(百花亭記)를 가리킨다. 蘆沙集, 鼓山集

215) 송계(松溪) 선생 유공(柳公)유공신(柳公信, 1579~1655)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송계는 그의 호이다. 지극한 효행으로 1623(인조원년)에 정려가 내려졌다.

216) 적암공(適菴公)유상진(柳尙軫)이다. 168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217) 하분(河汾)의 풍도하분은 하수(河水)와 분수(汾水)의 병칭으로, ()나라 왕통(王通)이 물러나 강학하던 곳이다. 왕통은 용문(龍門) 사람으로, 자는 중엄(仲淹)인데 흔히 문중자(文中子)라고 불린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독실하게 공부하였고, 사방을 유람하였다. 조정에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올렸으나 쓰이지 않자 물러나 하수와 분수 사이에서 강론하였는데, 문하에서 수업을 받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위징(魏徵), 이정(李靖) 등 쟁쟁한 학자가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하분문하(河汾門下)라고 칭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는 문인들이 문중자라고 사시(私諡)를 올렸다. 舊唐書 王勃列傳

218) 병신년에……결정되고1716(숙종42)에 있었던 병신처분(丙申處分)을 가리킨다. 이 처분은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부자와 송시열(宋時烈) 간의 오랜 시비에 대하여 송시열이 지은 윤선거의 묘갈명과 윤증의 신유의서를 바치게 하여 숙종이 직접 읽어 본 뒤에 윤증을 배사(背師)로 규정하고 윤선거 문집의 목판을 헐어 버리라고 명한 것으로, 가례원류(家禮源流)사건에서 보여 주었던 소론에 대한 지지를 전면 부정하고 노론의 전제 정치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2, 동방미디어, 2002, 113~118

219) 손재(遜齋) 박 선생박광일(朴光一, 1655~1723)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요, 자는 사원(士元)이며 손재는 그의 호이다. 송시열(宋時烈)에게 사사하였다. 숙종 때 천거되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위(翊衛)ㆍ왕자 사부(王子師傳)ㆍ세자시강원 자의(世子侍講院諮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산수(山水)를 즐기다가 영조 때 죽었다. 저서에 손재집등이 있다.

220) 비해공(匪懈公)오대빈(吳大贇)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사빈이다. 손재집(遜齋集)8 처사 오공 행장(處士吳公行狀)오대빈은 산속에서 고요함을 지키며 옛사람들의 서적에 잠심하였는데, 어사(御史)가 조정에 천거하였다.[大贇守靜山間, 潛心古人書籍, 御史薦聞于朝.]”라는 짤막한 소개가 있다.

221) 흥국사(興國寺)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로 북송(北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에 있던 사찰이다. 북송의 대학자들인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이곳에서 종일 학문을 강론한 일이 있었던 장소이다. 二程遺書 卷2

222) 아호사(鵝湖寺)의 모임()나라 순희(淳煕) 2(1175)에 주희와 육구연(陸九淵)이 여조겸(呂祖謙)의 주선으로 신주(信州)의 아호사에서 사흘 동안 철학 논쟁을 벌인 것을 말한다.

223) 송백(松柏)……것이다:《논어》 〈자한(子罕)에 실린 공자의 말을 가리킨다. 공자는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송백이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말하였다. 이는 혼란한 시대를 만난 다음에야 군자의 굳은 지조를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224) 곤오산(昆吾山)의 보검곤오산의 광물을 제련해서 만든 보검으로, 옥을 자를 수 있다고 하여 곤오할옥도(昆吾割玉刀)라고도 불리는데, 주 목왕(周穆王) 때 서호(西胡)가 바쳤다는 고사가 전한다. 海內十洲記 鳳麟洲

225) 기야(冀野)중국 기주의 북쪽 들판으로 예로부터 명마(名馬)가 많이 생산되었다.

226) 정군(鄭君) 태완(台完)정석진(鄭錫珍, 1851~1896)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태완, 호는 난파(蘭坡)이다. 정찬기(鄭讚基)의 아들이며, 오계수(吳繼洙)에게 수학하였다. 1893(고종30) 큰 흉년이 들자 가산을 털어 빈민을 구제하였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나주가 위태로워지자 민종렬의 천거로 도통장이 되어 여섯 차례 승전을 거두어 특별히 해남 군수(海南郡守)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기우만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듬해 3월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官軍)에게 체포되어 관군 대장 김병욱(金炳旭)에게 죽임을 당했다가 이듬해 신원(伸冤)되었다. 저서로 난파집(蘭坡集)1권이 있다.

227) 동비(東匪)의 난리1894(고종31)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가리킨다.

228) 나주 목사 민공(閔公)민종렬(閔種烈)로 상세한 정보는 불상이다.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때 동학군에 대항하여 성을 굳게 지킨 공으로 호남 초토사(湖南招討使)에 임명된 사실이 고종실록에 보인다. 동학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어 궤멸시킨 민종렬의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895(고종32)에 나주 관아 앞에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 세웠으며 기우만(奇宇萬)이 비문을 지었다. 高宗實錄 321028

229) 강수(江水)……되고:《서경》 〈하서(夏書) 우공(禹貢)형산(荊山)과 형양(衡陽) 사이가 형주(荊州)이니,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 모여 바다로 흘러드니 구강(九江)이 매우 바르게 흐르며 타수(沱水)와 잠수(潛水)를 잘 인도하니 운토(雲土)와 몽택(夢澤)이 다스려졌다.[荊及衡陽惟荊州, 江漢朝宗於海, 九江孔殷, 沱潛既道, 雲土夢作乂.]”라고 하였다.

230) 공자께서……여기셨다:《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孔子)가 제자인 자천(子賤)을 평가하면서 군자답다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하였겠는가.[君子哉, 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231) 송강(松江) 정문청공(鄭文淸公)정철(鄭澈, 1536~1593),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62(명종17)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문집으로 송강집(松江集)이 전한다.

232) 고암(鼓巖) 양공(梁公)양자징(梁子澂, 1523~1594)으로 자는 중명(仲明)이며, 고암은 그의 호이다. 소쇄 처사(瀟灑處士) 양산보(梁山甫)의 아들이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사위이자 문인으로 유학에 깊은 성취를 보였다.

233) 금강(錦江) 기공(奇公)기효간(奇孝諫, 1530~1593)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백고(伯顧)이며 금강은 그의 호이다. 일생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창의(南門倡義)에 참여, 주도적으로 활약하여 선문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봉해졌다.

234) 호암(壺巖) 변공(卞公)변성온(卞成溫, 1540~1614)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호암(壺巖)이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의 후손이며 김인후(金麟厚)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35) 영귀서원(詠歸書院)전남 곡성군 겸면 현정리에 있다. 1564(명종19)에 전라도 옥과(玉果) 유림들이 옥과 현감을 지낸 김인후의 학문과 절의를 추모코자 건립한 서원이다. 1729(영조5)에 유팽로(柳彭老)와 신이강(辛二剛)을 추가 배향하고, 1797(정조21)에 허계(許繼), 1846(헌종12)에 허소(許紹)를 추가 배향하였다.

236) 기옹(畸翁) 정 선생정홍명(鄭弘溟, 1582~1650)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菴),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아들이고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16(광해군8) 증광 문과에 급제한 뒤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대제학에 이르렀다. 고문(古文)에 밝고 학문은 김장생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저서로 기암집이 있다.

237) 운암(雲巖) 이공(李公)이흥발(李興浡, 1600~1673)의 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유연(悠然), 호는 운암이다. 1636(인조14) 청나라 사신이 와서 화친을 청하자,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뒤 1637년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가 명나라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며 학문을 닦았다. 그 뒤 인조, 효종, 현종조에 걸쳐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죽은 뒤 고향에 정문이 세워지고,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238) 역천(櫟泉) 송문원공(宋文元公)송명흠(宋明欽, 1705~1768)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많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764(영조40)에 찬선(贊善)으로서 경연관이 되어 정치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사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 역천집이 있다.

239) 본암(本菴) 김공(金公)김종후(金鍾厚, 1721~1780),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고(伯高), 호는 본암·진재(眞齋)이다. 민우수(閔愚洙)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진사가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지평, 장령, 경연관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본암집이 있다.

240) 영지(靈芝)……하겠는가영지는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약초이고 예천(醴泉)은 맛이 달고 시원한 샘물인데, 삼국 시대 오()나라 우번(虞翻)이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 뛰어난 인재는 가문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나오는 법이라는 뜻으로 지초는 뿌리가 없고, 예천은 근원이 없다.[芝草無根, 醴泉無源.]”라고 하였는데, 뒤에 정자(程子)체설(禘説)에서 혹자가 이르기를 영지는 뿌리가 없고 예천은 근원이 없다.’라고 하는데, 물건에 어찌 뿌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或謂:靈芝無根, 醴泉無源. 物豈有無本?]”라고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太平御覽 卷510》 《二程文集 巻上 附録

241) 높은……생각을:《시경》 〈소아(小雅) 거할(車舝)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고인의 큰 덕행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242) 통보(通譜)같은 성의 사람끼리 서로를 동족으로 인정한다는 말로, 족보를 함께 함을 이른다.

243) 명가리(鳴珂里)()는 귀인(貴人)이 쓰는 마구(馬具)의 구슬 장식이다. 당나라의 장가정(張嘉貞)이 재상이 되고 그의 아우인 장가우(張嘉祐)가 금오장군(金吾將軍)이 되어 형제가 함께 조정에 드나들었다. 그들이 다닐 때 옥구슬이 부딪혀 울렸기 때문에 당시에 그들이 사는 곳을 명가리(鳴珂里)’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 고사를 인용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함으로써 자신의 고향을 이름 낸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唐書 張嘉貞列傳

244) 이일상(李一相)1860~?.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도(聖道), 호는 회계(晦溪)이다.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광주(光州)에 거주하였다.

245) 사람과……죽은 자를 애도하는 심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와 왕헌지(王獻之) 두 형제가 평소에 정의가 매우 두터웠는데, 아우 왕헌지가 병들어 먼저 죽자, 왕휘지가 조문하러 가서 왕헌지의 시신이 안치된 영상(靈牀)으로 올라가 아우가 즐겨 탔던 거문고를 꺼내 퉁겨 보았는데, 음조가 맞지 않자 거문고를 내던지며 자경이여, 자경이여! 사람과 거문고가 모두 죽었구나.[子敬!子敬! 人琴具亡.]”라고 하면서 애통해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자경(子敬)’은 왕헌지의 자이다. 世說新語 傷逝

246) 소백(小柏) 나공(羅公)나영집(羅英集, 1846~1909)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명숙(明淑), 호는 소백(小柏)이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마침내 단념하고 위기지학에 힘썼다. 동학(東學)의 무리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나주 목사(羅州牧使) 민종렬(閔種烈)을 지략(智略)으로 도왔다. 만년에 정원에 잣나무를 심어 절조를 붙이고 소백을 자호로 삼았다.

247) 다섯 살이 많았는데원문의 견수지년(肩隨之年)’예기》 〈곡례 상(曲禮上)나이가 자신보다 5년이 더 많은 사람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되 조금 뒤처져 따라가야 한다.[五年以長則肩隨之.]”라고 한 데서 온 표현이다.

248) 백아(伯牙)……혜시(惠施)옛날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잘 타고,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는 백아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백아의 심중(心中)을 잘 알았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기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타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卷5 湯問또한 장자가 그의 친구 혜시(惠施)의 무덤을 지나면서 말하기를 혜시가 죽은 이후로 나는 바탕으로 삼을 사람이 없다.自夫子之死也 吾無以爲質矣라고 하였다. 莊子 徐无鬼

249) 오월(梧月)최봉의(崔鳳儀, 1823~1876)이다. 자 순서(舜瑞)이고 오월은 그의 호이다. 사후 10년 뒤인 1885(고종22)에 효성으로 조정에 알려져 교관에 증직되고 정려를 받았다. 1889(고종26)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松沙集 贈參判崔公墓碣銘

250) 오두적각(烏頭赤腳)검은 머리에 붉은 주칠을 한 다리라는 뜻으로 정려문을 미화한 표현이다.

251) 눈과……같고()나라 때 왕상(王祥)이 계모를 잘 봉양하였는데, 계모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므로 얼음을 깨고 구하려고 하자 얼음이 저절로 깨지면서 잉어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小學 卷6 善行

252) 산에서……비슷하지만동소남(董召南)은 당()나라 사람으로, 부모 봉양을 위하여 부엌에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였다. 한유(韓愈)가 지은 동생행(董生行)! 동생이여. 아침이면 나가 밭 갈고, 밤이면 돌아와 옛사람의 책을 읽도다. 종일토록 쉬지 못하였으니, 혹은 산에서 나무하며, 혹은 물에서 고기 잡네. 부엌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당()에 올라 안부를 물었네.[嗟哉董生, 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라고 하였다. 小學 善行

253) ……듯하고:《시경》 〈소아(小雅) 백구(白駒)몹시도 깨끗한 흰 말이여, 저 빈 골짜기에 있도다. 싱싱한 꼴 한 묶음을 가져다주노니, 그 사람 옥과 같네. 그대의 음성을 금옥처럼 귀하게 하여, 멀리하는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皎皎白駒, 在彼空谷. 生芻一束, 其人如玉. 毋金玉爾音, 而有遐心.]”라고 하였는데, 이는 현자(賢者)를 생각하는 마음을 깃들인 것이다.

254) 치의(緇衣)……듯하여:《시경정풍(鄭風) 치의(緇衣)대감님 검은 옷이 잘도 어울리네, 해지면 내가 또 새로 기워 올리리라. 대감님 조정에서 돌아오시면, 대감님의 밥상 내가 차려 드리리.緇衣之宜兮 敝予又改爲兮 適子之館兮 還予授子之粲兮한 데에서 온 말이다. 어진이를 정성스럽게 좋아한다는 뜻으로 사용됨.

255) 전욱(顓頊)상고 시대의 제왕 이름이다. 오제(五帝) 가운데 하나이며, 고양씨(高陽氏)라고도 하는데, 황제(黃帝)의 손자라고 전해진다. 약수(若水)에서 태어나고, 제구(帝丘)에서 살았으며, 20세에 제위(帝位)에 올랐다고 한다.

256) 정백휴보(程伯休父)중국 주()나라의 대부로, 선왕(宣王) 때 사마(司馬)가 되어 회수(淮水) 북쪽에 있는 서주(徐州)의 오랑캐를 정벌하였다.

257) 태중대부(太中大夫)송나라의 정향(程珦, 1006~1090)으로, 태중대부는 그의 직명이다. 자는 백온(伯溫)이며,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의 아버지이다. 인종 연간에 주돈이(周敦頤)와 교유하면서 정호·정이 형제를 그에게 보내어 수학하게 하였다.

258) 명도(明道)와 이천(伊川)명도는 북송(北宋)의 대유(大儒)인 정호(程顥)의 호이고, 이천은 그 아우인 정이(程頤)의 호이다.

259) 예교성(曳橋城)순천성을 말한다.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돌로 만든 성이다. 정유재란 때 소서행장(小西行長)이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매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260) 종족을……그러하다정이(程頤)가 말하기를,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보계를 밝히고 세족을 거두며 종자에 관한 법을 세워야 한다.[管攝天下人心, 收宗族, 厚風俗, 使人不忘本, 須是明譜系, 收世族, 立宗子法.]”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9

261) 시경에……하였으니: 〈대아(大雅) 문왕(文王)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고 하였다.

262) 오악(五嶽)중국의 태산(泰山), 화산(華山), 형산(衡山), 항산(恒山), 숭산(嵩山)을 가리킨다.

263) 세상에……해주겠는가:《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 자로가 노()나라를 떠나면서 안연에게 무슨 말로 나를 증별하려는가?” 하자, 안연이 자로에게 무슨 말로 나를 유별하려는가?”라고 하여 서로 격려의 말을 해 준 일이 보인다.

264) 보필해주는 것원문의 강보(强輔)’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강력한 친구를 뜻한다.

265) 인금구망(人琴俱亡)의 아쉬움은 없다()나라 때 왕휘지(王徽之)와 왕헌지(王獻之) 두 형제가 평소에 정의가 매우 두터웠는데, 아우 왕헌지가 병들어 먼저 죽자, 왕휘지가 조문하러 가서 왕헌지의 시신이 안치된 영상(靈牀)으로 올라가 아우가 즐겨 탔던 거문고를 꺼내 퉁겨 보았는데, 음조가 맞지 않자 거문고를 내던지며 자경이여, 자경이여! 사람과 거문고가 모두 죽었구나.[子敬!子敬! 人琴具亡.]”라고 하면서 애통해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자경(子敬)’은 왕헌지의 자이다. 世說新語 傷逝이 구절은 사람은 죽었지만 시문이 남아있다는 의미이다.

266) 황소(黃巢)의 난황소(?~884)는 당()나라 희종(僖宗) 연간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다. 875년에 수천 명의 추종자들을 모아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켜 중국 전체를 휩쓸고 881년에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했다. 그 후 자신을 스스로 대제(大齊)의 초대 황제라고 일컬었다. 884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267) 도총제(都摠制) ()여칭(呂稱, 1351~1423)이다. 자는 중보(仲父), 호는 저곡(樗谷)이며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조선조 개국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13(태종13)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268) 영지(靈芝)……않겠는가영지는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약초이고 예천(醴泉)은 맛이 달고 시원한 샘물인데, 삼국 시대 오()나라 우번(虞翻)이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 뛰어난 인재는 가문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나오는 법이라는 뜻으로 지초는 뿌리가 없고, 예천은 근원이 없다.[芝草無根, 醴泉無源.]”라고 하였는데, 뒤에 정자(程子)체설(禘説)에서 혹자가 이르기를 영지는 뿌리가 없고 예천은 근원이 없다.’라고 하는데, 물건에 어찌 뿌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太平御覽 卷510》 《二程文集 巻上 附録

269) 산초 열매처럼원문의 초료(椒聊)’시경》 〈당풍(唐風)의 편명으로,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시이다. 그 시에 이르기를 산초 열매 주렁주렁, 한 됫박을 채우고도 남네.椒聊之實 蕃衍盈升하였다.

270) 난와(難窩) 오공(吳公)오계수(吳繼洙, 1843~1915),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합(重涵), 호가 난와이다. 1895(고종32) 을미사변이 일어나 일본인들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이를 토평하기 위하여 기우만(奇宇萬)이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그에 가담하였다. 경술국치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두문불출하던 중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한 일로 장성 헌병부대에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영사재(永思齋)에 들어가 오직 독서만으로 생애를 보냈다. 문집으로 난와유고(難窩遺稿)가 있다.

271) 봄바람 같은 온화한 기상원문의 춘풍(春風)’명도(明道) 선생 정호(程顥)의 제자들이 스승 정호의 인품과 덕행을 일컬을 때 썼던 말로, 그가 앉은 자리에는 항상 봄바람처럼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다는 의미이다. 주희(朱熹)도 정호에 대한 찬()에서 상서로운 해와 구름 같고 온화한 바람과 단비 같네.”라고 하였다. 晦庵集 六先生畫像贊

272) 인물평원문은 월조(月朝)로 월조평(月朝評월단평(月旦評)과 같은 말로 인물을 품평하는 것이다. 후한 때 허소(許劭)가 그의 종형 허정(許靖)과 함께 향당(鄕黨)의 인물을 평하기를 좋아해서 매월 초하루마다 인물에 대한 품제(品題)를 다시 작성하였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後漢書 許劭列傳

273) 요임금처럼……게을러지자:《서경》 〈대우모(大禹謨)내가 제위에 있은 지 33년이 되어 늙어서 부지런히 해야 할 정사에 게으르다.[朕宅帝位, 三十有三載, , 倦于勤.]”라고 하였다. 서경에 의하면 이것은 순()의 말인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태도를 요()의 행실로 간주해서 요지권근(堯之倦勤)’이라는 숙어로 사용하였다.

274) 천 년을……소원:《장자》 〈천지(天地)에 성인(聖人)천세(千歲)토록 살다가 인간 세상이 싫어지면 떠나서 신선이 되어 올라가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千歲厭世, 去而上僊, 乘彼白雲, 至於帝鄕.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고종이 왕으로서 천수를 누리고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지 못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75) ()나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원문의 사한(思漢)’은 전한(前漢)이 왕망(王莽)에 의하여 멸망한 뒤에도 한나라 유민들이 여전히 한나라의 치세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후한(後漢)을 건국하게 된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일제에 의해 조선이 멸망했으나 백성들이 조선 왕실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276) ()나라에……하늘원문의 조송지천(祚宋之天)’국운의 융성을 기원할 때 쓰는 표현이다. 사략(史略)6 송 철종(宋哲宗) ()어떤 이가 사마광(司馬光)에게 이르기를 장돈과 여혜경 등이 훗날 부자간의 논의로 상()을 이간시킨다면 붕당의 화가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자, 사마광이 일어나 손을 모으고서 준엄하게 말하기를 하늘이 송나라에 복을 내린다면 기필코 이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선의 국운이 부흥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277) 기향(箕鄕)……통고하였고윤의병(尹誼炳)은 전라도 함평군 사람이다. 그는 1920년 고종의 국상 때 조선 각지의 학교에 통고하기를 ()로 말하자면 국상 기간이 지나면 상복을 벗는 것이 옳겠으나, 지금은 독립과 복수이 기약이 없는 때이니 다 함께 상복을 벗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騎驢隨筆

278) 두보(杜甫)영회고적(詠懷古跡)5수 가운데 촉주규오행삼협(蜀主窺吳幸三峽)옛 사당 소나무에 수학이 둥지 트니, 세시복랍에 촌옹이 분주히 제사드리네. 무후의 사옥이 항상 근처에 있어, 군신을 일체로 하여 똑같이 제사드리네.[古廟杉松巢水鶴 歲時伏臘走村翁 武侯祠屋長隣近 一體君臣祭祀同]”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7 詠懷古跡촉나라 군주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이 함께 있어 촌옹이 세시(歲時), 삼복(三伏), 납일(臘日)에 지내는 제사에 군신을 함께 제사하였음을 말한다.

279) 애산(艾山) 정공(鄭公)정재규(鄭載圭, 1843~1911)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이다. 경상도 합천에서 살았고 기정진의 문인이다. 1894(고종31) 갑오개혁 이후 친일파의 개혁에 거의통문을 내기도 하였고 1905(고종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호남과 영남에 포고문을 내어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여 일본과 담판하기를 촉구하는 한편,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서 최익현(崔益鉉)과 거의하기로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등이 있다.

280) 풀 한 다발원문의 생추(生蒭)’는 변변찮은 부의(賻儀)를 뜻한다. 후한(後漢) 서치(徐穉)가 매우 가난하여 곽임종(郭林宗)의 모친상에 조문하러 가서 풀 한 다발을 집 앞에 두고 상주를 보지 않은 채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徐穉列傳

281) 뛰어난 자제 : 원문의 자명(慈明)’은 형제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순자명은 순상(荀爽)의 자이다. ()나라 순숙(荀淑)의 아들 팔 형제가 모두 훌륭하여 사람들이 순씨팔룡(荀氏八龍)’이라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순상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後漢書 荀淑列傳

282) 요임금은……하고:《서경》 〈우서(虞書) 요전(堯典), 요 임금이 큰 덕을 제대로 밝혀 구족을 친애하니 구족이 화목하게 되었다.[克明竣德 以親九族 九族旣睦]”라고 하였다.

283) 미산(眉山)()나라의 문장가 소순(蘇洵, 1009~1066)이다. 소순의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으로 사천성(四川省) 미산 출신이다. 그는 미산 소씨(眉山蘇氏) 족보를 만들고 소씨족보서(蘇氏族譜序)를 지었는데 그 일부분에 우리 족보를 보는 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에게 공손히 하여야겠다는 마음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觀吾之譜者, 孝悌之心, 可以油然而生矣.]”라고 하였다. 古文眞寶

284) 미암(眉巖) 선생……희춘(希春)유희춘(1513~1577)의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이고 미암은 그의 호이다. 1547(명종2)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미암일기(眉巖日記), 강목고이(綱目考異)등의 저서를 남겼다.

285) 대려(帶礪)의 맹세임금이 공신(功臣)의 집안을 영구히 대접한다는 맹세의 말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개국 공신들을 봉작(封爵)하면서 황하가 띠[]와 같이 작아지고 태산이 숫돌[]과 같이 평지가 되도록 나라에서 영구히 보존하리라.”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資治通鑑 漢紀 世宗孝武皇帝

286) 송사(松沙)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이며 송사는 그의 호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고 출옥하였는데 이후 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287) 백수(白水)기우몽(奇宇蒙, 1852~?)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성초(性初), 호는 백수이다. 기정진의 문인이자, 넷째 손자이다.

288) ()임금이……글자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제위를 물려줄 때에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열여섯 글자를 전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書經 大禹謨

289) 수사(洙泗)와 낙민(洛閩)수사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노()나라에 있던 두 물의 이름으로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낙민은 낙양(洛陽)과 민중(閩中)으로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낙양 출신이고, 주희가 민중 출신이다. ‘수사낙민은 곧 공자와 정자, 주자를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다.

290) 김군(金君) 공섭(公燮)김곤(金坤, 1872~?)이다.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공섭, 호는 인재(忍齋)이다. 죽헌(竹軒) 김운보(金云寶)의 후손으로, 거주지는 영광이다. 기우만의 문인이다.

291) 뛰어난……마음두보(杜甫)의 시에 이미 그대와 뜻이 맞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새삼 뛰어난 공인(工人)의 홀로 애쓰는 마음 깨닫네.[已知仙客意相親, 更覺良工心獨苦.]”라고 하였다. 이는 기술이 뛰어난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듯이 학문에 매진하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6 題李尊師松樹障子歌

292) 서산(西山)남송(南宋)의 학자 진덕수(眞德秀, 1178~1235)로 서산은 그의 호이다. 경전의 긴요한 구절을 뽑아 모아 심경(心經)을 편찬하였다.

293) 백하(柏下)양상형(梁相衡, 1833~1907)으로 박창수(朴昌壽, 1817~1897)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백하유고가 전한다.

294) ……법인데:《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텅 빈 골짜기에 숨어 사는 사람은 명아주와 콩잎이 족제비가 다니는 좁은 길마저 막고 있는 터라, 빈 골짜기에서 홀로 걷다가 쉬다가 하노라면, 다른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화들짝 기뻐하는 것이다.[逃空虛者, 藜藿柱乎鼪鼬之逕, 踉位其空, 聞人足音, 跫然而喜.]”라고 한 것을 원용한 표현이다.

295) ()이 깎이면:《주역》 〈박괘(剝卦)의 주석에서 ()은 흩어져 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원문의 양박(陽剝)’밝고 길한 양()이 것이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세상의 운수가 쇠퇴하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296) 태어난 날원문의 남규초도(覽揆初度)’는 생일을 이른다. 굴원(屈原)이소(離騷)황고께서 나의 출생한 때를 관찰하여 헤아리사, 비로소 내게 아름다운 이름을 내리셨다.[皇覽揆余于初度兮, 肇錫余以嘉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97) 선을……데서:《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선을 쌓은 집안에는 후손에게 반드시 경사가 있게 마련이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후손에게 반드시 재앙이 돌아오게 마련이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298) 기주(箕疇)의 오복(五福)기주서경》 〈홍범(洪範)구주(九疇)’를 가리킨다. 구주를 기자(箕子)가 서술했다고 하여 기주라고 부른다. 서경》 〈홍범에서는 장수[], (), 안녕[康寧], 덕을 좋아함[攸好德], 천수를 누림[考終命]오복(五福)’으로 들었다

299) 해주(海籌)와 반도(蟠桃)의 글 : 장수를 축원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해주(海籌)’ 소식(蘇軾)동파지림(東坡志林), “일찍이 세 노인이 서로 만났는데 혹자가 한 노인의 나이를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세상이 한 번 개벽되어 바다가 뽕나무밭으로 변할 때에 산가지 하나를 내려 놓았는데, 근래 이 산가지가 이미 열 칸의 집에 가득하다.’”라고 하여, 자신의 장수를 자랑한 데서 유래하여 후대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말로 상용되었다. ‘반도는 신녀인 서왕모의 정원에서 자라는 복숭아를 가리키는데, 이 복숭아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역시 장수를 기원하는 글에 상용하는 표현이다. 山堂肆考 蟠桃

300) 문성공(文成公)정인지(鄭麟趾, 1396~1478)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로 세종에서 문종 대에 걸쳐 한글 창제 및 각종 제도의 정비에 기여하였다. 1453년 판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적극 참여하여 좌의정으로 발탁되었고 정난공신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455년 세조의 즉위 후에는 좌익공신(左翼功臣)에 책봉되었다.

301) 익위공(翊衛公) 휘 광조(光祖)정광조(1416~?)는 정인지의 장남이자 세종(世宗)의 손녀 사위이다. 단종의 세자 시절에 좌익위(左翊衛)를 역임하였다.

302) 부사(府使) 휘 승은(承恩)1433~1509. 1451(문종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7(세조3)에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있다가 부친 정광조의 상을 당하였다.

303) 급총서(汲冢書):《급총주서(汲冢周書)라고도 하는데 진()나라 때에 급군(汲郡) 사람 부준(不準)이 도굴한 전국 시대 위 양왕(魏襄王)의 무덤에서 나온 선진(先秦)의 과두문자(蝌蚪文字)로 기록된 죽간의 고서(古書) 75편을 가리킨다.

304) 불천지묘(不遷之廟)신위(神位)가 공덕(功德)이 있다는 평가를 받아 영원히 옮기지 않는 신주를 불천지주(不遷之主)라 하는데, 이를 모시는 사당을 말한다.

305) 자손의 번성원문의 초료(椒聊)’시경》 〈당풍(唐風)의 편명으로,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시이다. 그 시에 이르기를 산초 열매 주렁주렁, 한 됫박을 채우고도 남네.椒聊之實 蕃衍盈升하였다.

306) 백이(伯夷)……공자가 논어》 〈태백(泰伯)에서 태백을 평가하기를, “태백은 지극한 덕의 소유자라고 할 만하다. 세 번이나 천하를 사양하였으되, 백성들이 그의 덕을 칭송할 자취조차 남은 게 없구나.” 하였고, 술이(述而)에서는 백이와 숙제에 대해 ()을 추구하여 인을 얻은 사람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이들의 이름이 후대에 영원히 칭송받게 된 일을 가리킨다.

307) 고종사(高從事)당나라 때의 시인 고적(高適, 700~765)으로, 자는 달부(達夫)로 창주(滄州) 발해(渤海) 사람이다.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거쳐 몇 차례나 절도사(節度使)로 나가 난을 평정하다가 나이 50세가 되어서야 시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변새(邊塞)의 정취를 잘 읊어 잠삼(岑參)과 함께 고잠(高岑)으로 병칭되었다.

308) 호량(濠梁)과 복수(濮水)속세를 벗어나 한가히 소요(逍遙)할 만한 공간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호량은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징검다리 위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논한 곳이고, 복수는 장자가 초()나라 왕의 초빙도 거절한 채 낚시하던 곳이다. ()나라 간문제(簡文帝)가 이를 원용하여 화림원(華林園)에서 마음에 맞는 곳을 찾으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울창하게 우거진 이 숲과 물 사이에 들어서니, 호량과 복수 가에 와 있는 느낌이 저절로 든다.”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309) 한자(韓子)()나라의 문장가인 한유(韓愈, 768~824)이다.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당송팔대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창려선생집이 있다.

310) 제봉(霽峯) 고충렬(高忠烈) 선생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태헌, 시호는 충렬이다.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은거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금산(錦山) 전투에서 아들 고인후(高仁厚)와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등과 더불어 순절하였다. 저서에 제봉집이 있다.

311) 충정공(忠貞公) 계상(繼商)1466~154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종성(宗聖), 시호는 충정이다. 1495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다.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312) 수양성(睢陽城)의 뇌만춘(雷萬春)과 남제운(南霽雲)()나라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리에 수양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장순(張巡)의 편장(偏將)들로, 용맹을 떨치고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舊唐書 張巡列傳

313) 장덕(長德)나이가 많고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314) 고 한포재(寒圃齋) 이 선생이건명(李健命, 1663~1722)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이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의 한 사람으로,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 등과 함께 연잉군(延礽君)이 세제에 책봉되도록 힘썼다. 이로 인해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났을 때에 소론(少論)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 위리안치되고 참수형에 처해졌다.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고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신원되었다. 저서로는 한포재집이 있다.

315) 보천욕일(補天浴日)여와(女媧)가 터진 하늘을 꿰매어 비가 새지 않도록 하고, 희화(羲和)가 감연(甘淵)에서 해를 목욕시켜 가뭄을 막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말로,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고 만회하여 위대한 공적을 세우는 것을 뜻한다. 列子 湯問

316) 희암(希菴) () 거사 : 양재경(梁在慶, 1859~1918)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여정(汝正), 호는 희암이다.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웠으며, 쓸 데 없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의지를 잃을 수 없다 하여 과거를 보지 않았다. 1895(고종32) 기우만이 장성에서 창의하였을 때 상중인 관계로 큰아들 양회인(梁會寅)을 보내 돕도록 하였고, 1902년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노사집(蘆沙集)간행에 참여하였다. 1905년 쌍봉리 쌍봉마을 뒤편에 한후정(寒後亭)을 세우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317) 극심한 액운원문의 백륙(百六)’106년마다 도래하는 극심한 액운을 뜻한다. 음양가(陰陽家)의 설에 따르면 1(4500)에 다섯 번의 양액(陽厄)과 네 번의 음액(陰厄)이 찾아오며 양액이 106년마다 있게 되는데 이를 백륙회(百六會)라 하여 재앙을 의미한다고 한다. 漢書 律歷志上여기서는 조선이 멸망한 것을 뜻한다.

318) 의소(擬疏)상소의 초고(草稿)를 말하는데, 대개 기초(起草)만 해두고 실제로 올리지는 않은 상소를 말한다.

319) 학포(學圃) 선생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이고 학포는 그의 호이다. 1516(중종11) 문과에 급제하고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등 사림들이 축출되자 이들의 억울함을 항소(抗疏)하다가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에 은거하였다. 저서에 학포유집이 있다.

320) 온화함으로 이겨내는 군자:《시경》 〈소완(小宛)엄숙하고 성스러운 사람은 술을 마시되 온순함으로 이겨낸다.[人之齊聖, 飮酒溫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21) 맹자, “맹시사(孟施舍)는 자기의 용맹함을 말하되 적을 헤아린 뒤에 전진하며 승리를 생각한 뒤에 교전한다면 이것은 적의 삼군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내 어찌 반드시 이길 수 있겠는가. 두려움이 없을 뿐이다.[量敵而後進, 慮勝而後會, 是畏三軍者也, 舍豈能爲必勝哉? 能無懼而已矣.]’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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