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주자대전 15권
강의․의장․차자 講義 議狀 箚子
경연에서의 강의 經筵講義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 10월 14일 환장각대제 겸시강의 신분으로 즉위한 지 세 달 정도인 영종에게 경연에서 대학에 대해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이 해 6월 9일 효종이 세상을 떠났고, 7월 5일 광종은 영종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7월 11일 비각수찬․담주지사였던 주자는 조여우의 천거에 의해 임안으로 가서 새로운 황제에게 시사를 아뢰었다. 8월 5일에 환장각대제 겸시강을 제수한다는 명이 있었고, 10월 4일 주자는 임안에 도착해서 황제에게 「갑인행궁편전주차」 다섯 통을 올렸다. 그리고 이 날 주자는 대학을 강의하라는 명을 받고 경연에 참석했고, 실록원동수찬을 겸하라는 명을 받는다. 이 「강의」는 제2의 대학장구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만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이 강의에서는 대학의 전6장까지 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고, 군데군데 대학장구와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 자구나 해석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大學臣熹曰: 大學者, 大人之學也. 古之爲敎者, 有小子之學, 有大人之學. 小子之學, 澀掃應對進退之節, 詩․書․禮․樂․射․御․書․數之文是也. 大人之學, 窮理․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道是也. 此篇所記皆大人之學, 故以‘大學’名之.
대학 신 주희는 아룁니다. 대학이란 대인의 학문입니다. 옛날의 교육에는 어린아이[小子]의 학문이 있고 대인의 학문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학문이란 쇄소, 응대, 진퇴의 절목에 관한 것과 시․서․예․악․사․어․서․수 등과 관련된 문자들입니다. 대인의 학문이란 궁리․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입니다. 이 편에 기록된 것은 모두 대인의 학문이기 때문에 대학이라고 이름지은 것입니다.
臣又嘗竊謂自天之生此民, 而莫不賦之以仁․義․禮․智之性, 敍之以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之倫, 則天下之理, 固已無不具於一人之身矣. 但以人自有生而有血氣之身, 則不能無氣質之偏以拘之於前, 而又有物欲之私以蔽(2-573)之於後, 所以不能皆知其性, 以至於亂其倫理而陷於邪僻也. 是以古之聖王設爲學校, 以敎天下之人, 使自王世子․王子․公․侯․卿․大夫․元士之適子以至庶人之子, 皆以八歲而入小學, 十有五歲而入大學, 必皆有以去其氣質之偏․物欲之蔽, 以復其性, 以盡其倫而後已焉. 此先王之世所以自天子至於庶人無一人之不學, 而天下國家所以治日常多而亂日常少也.
신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늘이 이 백성을 낳으면서 인․의․예․지의 성(性)을 부여해서, 군신․형제․부부․붕우의 윤리를 펴도록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즉 천하의 이치[理]는 이미 한 사람의 몸에 구비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생명을 가지면서 혈기의 몸이 있으므로, 기질의 치우침 때문에 앞에서 구속하고, 또 물욕의 사사로움이 뒤에서 가리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모두들 그들의 성을 알 수 없어서, 윤리를 어지럽히고 사벽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옛날의 성왕들은 학교를 세워 천하 사람들을 교육하면서 왕세자․왕자․공․후․경․대부․원사의 적자에서부터 서인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8세가 되면 소학에 입학시켰고, 15세가 되면 대학에 입학시켰습니다. 반드시 기질의 치우침과 물욕의 가리움을 물리치도록 해서 그들의 성을 회복하고, 윤리를 극진하게 한 다음에야 그쳤습니다. 이것이 선왕들의 시대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이유이며, 천하의 국가가 다스려진 시절은 항상 많고 어지러웠던 시절은 항상 적었던 이유입니다.
及周之衰, 聖賢不作, 於是小學之敎廢而人之行藝不脩, 大學之敎廢而世之道德不明. 其書雖有存者, 皆不過爲世儒誦說口耳之資而已, 未有能因其文以旣其實, 必求其理而責之於身者也. 是以風俗敗壞, 人才衰乏, 爲君者不知君之道, 爲臣者不知臣之道, 爲父者不知父之道, 爲子者不知子之道, 所以天下之治日常少而亂日常多, 皆由此學不講之故也. 至于我朝, 天運開泰, 於是河南程顥及其弟頤始得孔․孟以來不傳之緖, 而其所以開示學者, 則於此篇之旨深致意焉.
주나라의 쇠퇴기에 이르러 성현들이 나타나지 않게 되자, 소학의 가르침은 사라져서 사람들이 육예를 실천하는 것도 제대로 닦이지 못했으며, 대학의 가르침이 사라져서 세상의 도덕이 밝을 수 없었습니다. 그 책은 비록 남아있었지만 모두가 속세의 유자들이 외우고 지껄이는 입과 귀를 위한 밑천[資]에 불과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책의 문장에서 기인하여 그 실제를 극진히 발휘하려는[旣] 사람도 없었고, 반드시 그 이치를 추구해서 스스로에게 떠맡기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풍속의 무너지고, 사람들의 재주는 쇠퇴하였으며, 군주는 군주의 도를 알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를 알 지 못하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를 알 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의 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천하가 다스려지던 날은 언제나 적었고, 어지러운 날은 언제나 많았으니, 이 모두는 이 학문을 강론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우리 송나라에 이르러서 하늘의 운행이 태평성대를 열자, 이 때에 하남의 정호 및 그 동생인 정이가 비로소 공․맹 이래로 전수되지 않던 단서를 얻어서, 학자들에게 보이려 하면서 이 편의 가르침에 대해 깊이 뜻을 두게 되었습니다.
若其言曰: ‘大學乃孔氏遺書, 須從此學則不差.’ 又曰: ‘大學乃初學入德之門, 於今可見古人爲學次第者, 賴有此篇尙存, 其他則莫如論․孟.’ 其可謂知言之要矣. 後之君子欲修己以治人而及於天下國家者, 豈可以舍是而他求哉? 臣以無能, 獲奉明詔, 使以此篇進講, 謹誦所聞, 釋其名義如右, 惟聖明之留意焉.
예를 들어 그들은 말했습니다. “대학은 공씨가 남긴 책이다. 반드시 여기에서부터 배워간다면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말했습니다. “대학은 처음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덕에 들어가는 문이다. 오늘날 옛사람들이 학문을 하던 순서를 보려는 자는 이 편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에 힘입을 것이요, 나머지는 논어․맹자만 한 것이 없다.” 그들은 지언(知言)의 요체를 알았다고 할만 합니다. 나중의 군자들이 자신을 수양함으로써[修己]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천하와 국가에까지 미치도록 하려면 어찌 이 책을 버리고 다른 것에서 구하겠습니까? 신은 무능하지만, 밝은 조칙을 받들어보니, 이 편을 진강하라고 하셨습니다. 삼가 들은 내용을 외우고 그 개념과 의미[名義]를 풀이한 것이 아래와 같습니다. 오직 천자께서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2-574)大學之道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그침에 있다.
臣熹曰: 大學者, 大人之學也. 明, 明之也.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至明而不昧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故當有以明之而復其初也. 親, 程氏以爲字當作‘新’, 是也, 其義則去其舊而新之云爾. 言旣能自明其明德, 又當推以及人, 使人亦有以去其舊染之汗也. 止者, 必至於是而不遷之意. 至善則事理當然之極也. 言明明德․新民皆當至於至善之地而不遷, 蓋必其有以盡夫天理之極, 而無一毫人欲之私也. 此三者, 大學之綱領也.
신 희는 아룁니다. 대학이란 대인의 학문입니다. ‘명(明)’은 밝힌다[明之]는 뜻입니다.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에서 얻는 것으로, 지극히 밝고 어둡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기품에 구애되고 인욕에 가리워서 때때로 어두운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응당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친(親)’은 정씨는 마땅히 ‘신(新)’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옳습니다. 그 의미는 그 옛 것을 물리치고 새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미 스스로 밝은 덕을 밝혔으며, 또 마땅히 미루어서 남에게까지 미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또한 옛날에 물든 더러움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친다[止]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서 옮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극한 선은 사리의 당연한 극치입니다. 밝은 덕을 밝히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모두 마땅히 지선의 경지에 이르러서 옮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드시 천리의 극치를 모두 발휘해서 조금이라도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대학의 삼강령입니다.
臣竊謂天道流行, 發育萬物, 而人物之生, 莫不得其所以生者, 以爲一身之主. 但其所以爲此身者, 則又不能無所資乎陰陽五行之氣. 而氣之爲物, 有偏有正, 有通有塞, 有淸有濁, 有純有駁. 以生之類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 以人之類而言之, 則得其淸且純者爲聖․爲賢, 得其濁且駁者爲愚․爲不肖. 其得夫氣之偏且塞而爲物者, 固無以全其所得以生之全體矣, 惟得其正且通而爲人, 則其所以生之全體無不皆備於我, 而其方寸之間虛靈洞徹, 萬理粲然, 有以應乎事物之變而不昧, 是所謂明德者也.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천도가 유행해서, 만물을 발육하고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 그 태어나는 까닭을 얻어 한 몸의 주재로 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 몸을 가지게 되는 것은 또 음양 오행의 기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기라는 것은 치우침과 올바름, 통함과 막힘, 맑음과 탁함, 순수함과 뒤섞임이 있습니다. 태어나는 종류로 말하자면 바르고 통한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으면 사물이 됩니다. 사람의 종류별로 말하자면 맑고 순수한 것을 얻은 사람은 성인이나 현인이 되고, 탁하고 또 뒤섞인 것을 얻은 사람은 어리석고 못난 인간이 됩니다. 기의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어 사물이 된 것들은 본시 생명의 전체가 되는 것을 얻어 온전히 할 수 없으며, 오직 올바르고 통한 것을 얻어 사람이 된 것들은 생명의 전체를 이루는 것이 나에게 구비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마음[方寸之間]은 허령통철하고 온갖 이치가 찬연해서, 사물의 변화에 응수하되 어둡지 않으니, 이것이 명덕이란 것입니다.
人之所以爲人而異於禽獸者, 以此 : 而其所以可爲堯舜而參天地․贊化育者, 亦不外乎此也. 然又以其所得之氣有淸濁純駁之不齊也, 是以極淸且純者, 氣與理一, 而自無物欲之蔽, 自其次者而下, 則皆已不無氣禀之拘矣. 又以拘於氣禀之心, 接乎事物無窮(2-575)之變, 則其目之欲色, 耳之欲聲, 口之欲味, 鼻之欲臭, 四肢之欲安佚, 所以害乎其德者, 又豈可勝言也哉!二者相因, 反覆深固, 是以此德之明日益昏昧, 而此心之靂, 其所知者不過情欲利害之私而已. 是則雖日有人之形, 而實何以遠於禽獸? 雖曰可以爲堯舜而參天地, 然亦不能有以自知矣. 是以聖人施敎, 旣已養之於小學之中, 而後開之以大學之道. 其必先之以格物致知之說者, 所以使之卽其所養之中而發其明之之端也. 繼之以誠意․正心․修身之目者, 則又所以使之因其已明之端而致其明之之實也. 夫旣有以發其明之之端, 而又有以致其明之之實, 則吾之所得於天而未嘗不明者, 豈不超然無有氣質物欲之累, 而復得其本然之明哉? 是則所謂明明德者, 而非有所作爲於性分之外也.
사람이 사람이 되고 짐승들과 다른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이 요순처럼 될 수 있고 천지에 참여하고 화육을 도울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사람이라고 해도 얻은 기에는 맑고 탁함, 순수하고 뒤섞임이 고르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지극히 맑고 순수한 사람은 기와 이치가 하나가 되어서 저절로 물욕의 가리움이 없고, 그 다음부터 이하로는 모두 이미 기품의 구속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기품에 가리운 마음으로 사물의 끝없는 변화에 접하노라면 즉 눈이 색을, 귀가 소리를, 입이 맛을, 코가 냄새를, 사지가 안일을 원하는 것이 덕을 채지는 것들이니 이런 것들을 또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가 서로 원인이 되고, 반복하면서 깊고 견고해지기 때문에 이 덕의 밝음은 날이 갈수록 어둡고 몽매해지고, 이 마음의 신령함이 인식하는 대상들은 정욕과 이해의 사사로움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지만 진실로 어떻게 짐승과 멀리 떨어졌다고 하겠습니까? 요순이 될 수 있고 천지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할지라도 또한 스스로 알 수도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성인이 가르침을 베풀 때에 이미 소학에서 수양한 다음에 대학의 도를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그 반드시 격물치지의 설을 앞세운 것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수양한 것 가운데 나아가서 밝히는 단서를 발명토록 하려는 때문이었습니다. 誠意․正心․修身의 조목으로 이어간 것은 또 사람들에게 이미 밝힌 단서로 인하여 발히는 실질을 이루도록 하려는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밝히는 단서를 발명했고, 또 밝히는 실질을 이루었다면 내가 하늘에서 얻은 것은 밝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초연하게 기질과 물육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본연의 밝음을 회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이 ‘밝은 덕을 밝힌다’는 것이요, 성품의 분수 밖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然其所謂明德者, 又人人之所同得, 而非有我之得私也. 向也俱爲物欲之所蔽, 則其賢愚之分固無以大相遠者. 今吾旣幸有以自明矣, 則視彼衆人之同得乎此而不能自明者, 方且甘心迷惑, 沒溺於卑汙苟賤之中而不自知也, 豈不爲之惻然而思有以救之哉? 故必推吾之所自明者以及之, 始於齊家, 中於治國, 而終及於平天下, 使彼有是明德而不能自明者, 亦皆如我之有以自明, 而去其舊染之汙焉. 是則所謂新民者, 而亦非有所付畀增益之也.
그러나 ‘밝은 덕’이란 또 사람마다 똑같이 얻은 것이지, 나만이 사사로이 얻은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모두 물욕에 가리웠을 지라도 현자와 어리석은 사람은 구분이란 본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나는 이미 다행히 스스로 밝혔지만 하늘에서 똑같이 얻었으면서도 스스로 밝히지 못한 저 중인들을 보면 甘心迷惑 비근하고 더럽고 천한 것 가운데 빠져있으면서도 스스로 알 지 못하니, 어찌 불쌍히 여겨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내가 스스로 밝힌 것을 미루어 그들에게까지 이르러가되,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중간 단계를 거쳐 천하를 평정하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고, 저 밝은 덕을 가졌으면서도 스로 밝힐 수 없는 자들도 모두 나처럼 스스로 밝히고 과거에 물든 더러움을 물리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곧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요, 다른 무엇을 그들에게 주어서 보태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2-576)然德之在己而當明, 與其在民而當新者, 則又皆非人力之所爲 : 而吾之所以明而新之者, 又非可以私意苟且而爲也. 是其所以得之於天而見於日用之間者, 固已莫不各有本然一定之則矣. 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而傳所謂君之仁, 臣之敬, 子之孝, 父之慈, 與人交之信, 乃其目之大者也. 衆人之心固莫不有是, 而或不能知, 學者雖或知之, 而亦鮮能必至於是而不去. 此爲大學之敎者所以慮其理雖復而有不純, 欲雖克而有不盡, 將無以盡夫修己治人之道, 而必以是爲明德新民之標的也. 欲明德而新民者, 誠能求必至是而不容其少有過不及之差焉, 則其折以去人欲而復天理者, 無毫髮之遺恨矣.
그러나 나에게 있는 덕은 응당 밝혀야 할 것이요, 백성에게 있는 것은 응당 새롭게 해야 할 것은 또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밝혀서 새롭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또 사사로운 뜻으로 구차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얻어서 일상 생활에 드러나는 것이 본시 이미 본연의 일정한 법칙을 갖고있기 때문입니다. 그 법칙의 의리와 정미함의 극치는 이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지극한 선’이란 명목을 붙인 것이다. 대학의 전문(傳文)에서 말하는 군주의 인자함, 신하의 공경, 자식의 효, 아버지의 자애, 다른 사람과의 교제에서 신뢰 등등은 그러한 명목 가운데 큰 것들입니다. 중인들의 마음에도 본시 이것이 없지 않지만, 간혹 알아차리지 못하고, 학자들은 비록 알았다고는 하지만 역시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 있는 자는 드뭅니다.
이것이 대학의 가르침이 그 이치를 비록 회복했더라도 순수하지 못하고, 욕망을 비록 극복했지만 다 극복하지를 못해서, 장차 수기치인의 도를 완전하게 실현하지 못하게 될까 근심하는 이유이며, 반드시 (수기치인의 도들 완전하게 실현하는) 이것으로 명덕과 신민의 목표를 삼는 이유입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려는 자는 진실로 반드시 이런 단계에 이르기를 추구하되 조금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한다면 인욕을 물리치고 천리를 회복함이 조금치의 유한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知止而後有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安而後能慮, 盧而後能得.
그칠 곳을 안 연후에 의지에 일정한 방향성이 있고,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된 다음에 마음은 고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진 다음에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해진 다음에 정치하게 사려할 수 있고, 정치하게 사려한 다음에 얻게 됩니다.
臣熹曰: 止者, 所當止之地, 卽至善之所在也. 知之則志有定向. 靜謂心不外馳, 安謂所處而安, 慮謂思無不審, 得謂得其所止.
신 희는 아룁니다. ‘지(止)’란 응당 그쳐야 할 곳이니, 지선의 소재처입니다. 그것을 알면 의지에 일정한 방향이 있게 됩니다. ‘고요함’이란 마음이 밖으로 내달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편안함’이란 머무르는 곳에 편안한다는 말입니다. ‘사려’란 세밀한 생각을 말합니다. ‘얻는다’는 것은 그쳐야 할 곳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臣謹按, 此一節推本上文之意, 言明德新民所以止於至善之由也. 蓋明德新民固皆欲其止於至善, 然非先有以知其所當止之地, 則不能有以得其所當止者而止之. 如射者固欲其中, 然不先有以知其所當中之地, 則不能有以得其所當中者而中之也. 知止云者, 物格知至而於天下之事皆有以知其至善之所在, 是則吾所(2-577)當止之地也. 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理旣有定, 則無以動其心而能靜矣. 心旣能靜, 則無所擇於地而能安矣. 能安則日用之間從容閑暇, 事至物來, 有以揆之而能慮矣. 能慮則隨事觀理, 極深硏幾, 無不各得其所止之地而止之矣.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 한 구절은 윗 문장의 뜻에 근본을 두고 미루어서, 명덕과 신민이 지어지선의 유래임을 말했습니다. 명덕과 신민은 본래 모두 지어지선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을 알지 못한다면 마땅히 그쳐야 할 것을 얻어서 그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활쏘는 사람은 본래 과녁에 적중하기를 원하지만, 먼저 적중시켜야 할 곳을 알 지 못한다면 마땅히 적중시켜야 할 곳을 얻어서 적중시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칠 곳을 안다’고 말한 것은 사물이 궁구되고 앎이 이르러서 천하의 일에 대해 모두 그 지선의 소재를 알게되면, 이것이 곧 내가 마땅히 그쳐야 할 곳입니다. 그쳐야 할 곳을 알 수 있다면 마음 속에 사사물물이 모두 일정한 이치가 잇게 됩니다. 이미 이치에 일정함이 잇다면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서 고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이미 고요해지면 그칠 곳을 선택하지 않아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편안할 수 있으면 일상 생활의 활동과 한가함 속에서 일이 이르고 물이 다가오면 그것을 헤아려서 사려할 수 있습니다. 능히 사려하면 일에 따라 이치를 관찰하여 마음의 본질을 탐구하고 일의 기미를 연구하여 각각 그칠 곳을 얻어 그치게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臣熹曰: 明德爲本, 新民爲末, 知止爲始, 能得爲終. 本始所先, 末終所後, 此結上文兩節之意.
물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시종이 있으니, 먼저 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신 희는 아룁니다. 명덕은 본이요, 신민은 말입니다. 그칠 곳을 아는 것은 처음이요, 능히 얻는 것은 끝입니다. 본과 시작은 먼저할 것이요, 말과 끝은 나중에 할 것입니다. 이것은 윗 문장 두 구절의 뜻을 결론지은 것입니다.
臣竊謂明德․新民兩物而內外相對, 故曰本末. 知止․能得一事而首尾相因, 故曰終始. 誠知先其本而後其末, 先其始而後其終也, 則其進爲有序而至於道也不遠矣. 蓋欲治人者不可不先於治己, 欲體道者不可不先於知道. 此則天下國家之達道通義, 而爲人君者尤不可以不審. 是以臣愚竊願陛下深留聖意, 伏乞睿照.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명덕과 신민은 두 가지 물건이 안팎에서 상대하기 때문에 본말이라고 합니다. 그칠곳을 아는 것과 능히 얻는 것은 한 가지 일이지만 머리와 꼬리처럼 서로 이어졌기 때문에 종시라고 합니다. 진정으로 본을 앞세우고, 말을 뒤돌릴 줄 알고, 시작을 앞세우고 끝을 뒤로 돌릴 줄 안다면 나아감에 순서가 있어서 도에 이르는 것 역시 멀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다스리려는 사람은 자신을 다스리는 일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고, 도를 체득하려는 사람든 도를 아는 일[知道]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데 보편적인 방법[達道]이요 통용되는 원칙[通義]이요, 군주가 된 사람은 더욱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신은 폐하께서 깊이 유의하시고, 밝게 살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옛날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던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를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하게 했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았으며, 그 몸을 닦으려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했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했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지식의 완성을 추구했으니, 지식의 완성은 격물에 달려 있다.
臣熹曰: 明明德於天下者, 使天下之人皆有以明其明德也. 心者, 身之所主也. 誠, 實也. 意者, 心之所發也. 實其心之所發, 欲其一於善而無自欺也. 致, 推極也. 知, 猶識也. 推極吾之知(2-578)識, 欲其所知無不盡也. 格, 至也. 物, 猶事也. 窮至事物之理, 欲其極處無不到也. 此八者, 大學之條目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힌다는 것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그 밝은 덕을 밝히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몸의 주재입니다. ‘정성스러움’이란 진실함이요, 뜻이란 마음의 발현입니다. 마음의 발현을 진실하게 하는 것은 선에 한결같아서 자기를 속임이 없는 것입니다. ‘致’란 극치에까지 미루어 가는 것입니다[推極]. ‘知’란 인식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의 지식을 극치에까지 미루어 가서, 아는 것에 미진함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格’이란 이른다[至]는 말입니다. ‘物’이란 일[事]과 같습니다. 삼루의 이치를 궁구해서, 그 지극한 곳에까지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는 대학의 조목입니다.
臣謹按, 此言大學之序, 其詳如此, 蓋綱領之條目也. 格物․致知․誠意․正心․脩身者, 明明德之事也. 齊家․治國․平天下者, 新民之事也. 格物致知, 所以求知至善之所在, 自誠意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也. 所謂明明德於天下者, 自明其明德而推以親民, 使天下之人皆有以明其明德也. 人皆有以明其明德, 則各誠其意, 各正其心, 各修其身, 各親其親, 各長其長, 而天下無不平矣. 然天下之本在國, 故欲平天下者, 必先有以治其國. 國之本在家, 故欲治國者, 必先有以齊其家. 家之本在身, 故欲齊家者, 必先有以修其身. 至於身之主, 則心也. 一有不得其本然之正, 則身無所主, 雖欲勉彊以修之, 亦不可得而修矣. 故欲修身者, 必先有以正其心. 心之發則意也. 不能純一於善而不免爲自欺, 則心爲所累, 雖欲勉彊以正之, 亦不可得而正矣. 故欲正心者, 必先有以誠其意. 若夫知, 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 不能推而致之, 使其內外昭融, 無所不盡, 則隱微之際, 私欲萌焉. 雖欲勉彊以誠之, 亦不可得而誠矣. 故欲誠意者, 必先有以致其知. 致者, 推致之謂, 如喪致乎哀之(2-579)致, 言推之而至於盡也. 至於物, 則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也. 不能卽而窮之, 使其精粗隱顯究極無餘, 則理所未窮, 知固不盡, 雖欲勉彊以致之, 亦不可得而致矣. 故致知之道在乎郞事觀理以格夫物. 格者, 極至之謂, 如‘格于文祖’之格, 言窮之而至其極也.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것은 대학의 순서를 말한 것으로 이처럼 자세한 것은 강령의 조목입니다.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이란 밝은 덕을 밝히는 일입니다. 제가․치국․평천하는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격물치지’는 지선의 소재를 알려고 하는 소이입니다. 성의로부터 평천하에 이르기까지는 지선을 얻어서 그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힌다’는 것은 그 밝은 덕을 밝힘에서부터 백성을 새롭게 함에 미루어 나아가고,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명덕을 밝힐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 모두가 그 밝은 덕을 밝힐 수 있다면 각각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각각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각각 그 몸을 닦고, 각각 그 어버이를 친애하고, 각각 그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해서 천하가 평화롭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근본은 나라[國]에 있기 때문에 천하에 평화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의 근본은 집에 있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하고, 집안의 근본은 몸에 있기 때문에 집안을 가지런히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몸을 닦는다. 몸의 주재에 이르면 곧 마음이다. 하나라도 그 본래의 바름을 얻지 못하면 몸에는 주재가 없어서, 비록 억지로 애쓰면서 닦으려 해도 또한 닦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몸을 닦으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이 있는 것이다., 마음의 발현은 곧 뜻이다. 선에 순일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속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음이 얽매인다. 비록 억지로 애쓰면서 바로잡으려 해도 역시 바르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앎’이란 마음의 신명으로, 온갖 이치를 妙해서 만물을 宰하는 것이다. 미루어 완성해서 안팎이 훤히 트이고 하지 않는다면 극진하지 않음이 없으며, 숨겨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사욕이 싹트면 비록 애써 억지로 정성스레 하여도 정성스러울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의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앞서서 지식을 극진히 완성한다. ‘치’란 미루어 완성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상에는 애통함을 지극해 한다[喪致乎哀]는 말에서의 ‘지극히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즉, 미루어서 지극함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외물’에 이르면 외물은 이치의 소재입니다. 사람이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외물에 즉해서 궁구하고 정추와 은현 간에 극치까지 탐구하여 남겨진 것이 없게 할 수 없다면 이치가 궁구되지 못하고, 앎은 본시 극진할 수 없으니, 비록 억지로 애써 완성하려 하더라도 역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앎을 극진히 하는 도는 일에 즉하여 이치를 관찰함으로써 물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른다’는 것은 극치에 이르다[極至]는 뜻입니다. 예를 들자면 ‘문조에 이르다[格于文祖]’고 할 때의 ‘이르다’는 것입니다. 궁구하여 그 극치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물이 이른 다음에 앎이 지극해지고, 앎이 지극해진 다음에 뜻이 정성스러워 지며, 뜻이 정성스러운 다음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른 다음에 몸이 닦입니다. 몸이 닦인 다음에 집안이 가지런해 지고, 집안이 가지런한 다음에 나라가 다스려지며, 나라가 다스려진 다음에 천하가 평화로와 집니다.
臣熹曰: 物格者, 物理之極處無不到也. 知至者, 吾心之所知無不盡也. 知旣盡, 則意可得而實矣. 意旣實, 則心可得而正矣.
신 주희는 아룁니다. ‘물이 이른다’는 것은 물리의 극처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앎이 지극하다는 것은 내 마음이 아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앎이 이미 지극하면 뜻은 진실해 질 수 있고, 뜻이 이미 진실하면 마음은 바르게 될 수 있습니다
臣謹按, 此覆說上文之意也. 物格者, 事物之理各有以詣其極而無餘之謂也. 理之在物者, 旣詣其極而無餘 : 則知之在我者, 亦隨所詣而無不盡矣. 知無不盡, 則心之所發可一於善而無不實矣. 意不自欺, 則心之本體可致其虛而無不正矣. 心得其正, 則身之所處可不陷於其所偏而無不修矣. 身無不修, 則推之天下國家亦擧而措之耳, 豈外此而求之智謀功利之末哉?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것은 윗 문장의 의미를 순서를 뒤집어 말한 것입니다. ‘물이 이른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각각 그 극처에 이르러 나머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치가 물에 있는 것은 이미 그 극처에 나아가 나머지가 없다면 나에게 있는 앎도 역시 도달하는 곳을 따라서 극진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앎이 극진하지 않음이 없다면 마음이 발현한 것은 선에 한결같아서 진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뜻이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마음의 본체는 그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脩身爲本.
천자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臣熹曰: 壹是, 一切也. 正心以上, 皆所以脩身也 : 齊家以下, 則擧此而措之耳.
신 주희는 아룁니다. ‘일시[壹是]’는 ‘모두[一切]’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바루는 것 이상은 모두 몸을 닦으려는 것입니다. 집안을 가지런히 한다는 이하는 이것을 들어 쓴다는 것일 뿐입니다.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 未之(2-580)有也.
그 근본이 어지럽고서 말단이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고, 두터이 해야 할 곳에 박하게 대하면서 박하게 대할 곳에 두터이 할 사람은 없습니다.
臣熹曰: 本, 謂身也. 所厚, 謂家也. 此兩節結上文兩節之意.
신 주희는 아룁니다. 근본이란 몸을 말합니다. 두터이 할 것이란 집을 말합니다. 이 두 구절은 윗 문장의 두 구절의 뜻을 결론맺은 것입니다.
臣竊謂以身對天下․國家而言, 則身爲本而天下․國家爲末. 以家對國與天下而言, 則其理雖末嘗不一, 然其厚薄之分亦不容無等差矣. 故不能格物致知以誠意正心而修其身, 則本必亂而末不可治. 不親其親, 不長其長, 則所厚者薄而無以及人之親長. 此皆必然之理也. 孟子所謂天下國家皆本於身, 又謂於所厚者薄, 無所不薄, 其言皆本於此. 蓋君猶表也, 民猶影也, 表正則影無不正矣. 君猶源也, 民猶流也, 源淸則流無不淸矣. 若夫天下之物, 則有親有疏, 有近有遠, 而心之應物則有重有輕, 有長有短. 親者重而疏者輕, 近者長而遠者短, 重而長者在所先, 輕而短者在所後, 亦理勢之必然, 非人之所能爲也. 是以此章詳陳大學之條目, 曰格物, 曰致知, 曰誠意, 曰正心, 曰修身, 曰齊家, 曰治國, 曰平天下. 凡有八事, 而於章末獨以修身․齊家二事結之, 亦猶前章知所先後之云, 而其旨益以深矣. 臣願陛下淸閑之燕從容諷味, 常存於心, 不使忘失, 每出一言, 則必反而思之曰, 此於修身得無有所害乎? 每行一事, 則必反而思之曰, 此於修身得無有所害乎? 小而噸笑念慮之間, 大而號令黜陟之際, 無一不反而思之, 必無害也然後從之, 有害則不敢也. 則又夙興而思之曰, 吾於吾親得無有末厚乎? 夜寐而思之曰, 吾於吾親得無有未厚乎? 以至於出人起居․造次食息, 無(2-581)時不反而思之, 必已厚也然後守之而勿失, 一有未厚, 則又恐懼而益加厚焉. 念念如此, 無少間斷, 則庶乎身修親悅, 擧而措諸天下無難矣. 惟陛下深留聖意.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몸을 천하․국가와 대비시켜 말한다면 몸은 근본이 되고 천하와 국가는 말단이 됩니다. 집을 국가와 천하에 대비시켜 말한다면, 그 이치는 비록 똑같지만두터움과 박함의 구별은 역시 차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격물 치지를 통해 성의 정심과 수신을 할 수 없다면 근본은 반드시 어지러워지고 말단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 어버이를 친애하지 않고, 그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두터이 할 곳에 박하게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의 어버이와 어른에게까지 미칠 수 없다는 것은 모두 필연의 이치입니다. 맹자가 말한 천하 국가는 모두 몸에 근본을 한다는 것이나, 두터이 할 곳에 박하게 한다면 박하게 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은 모두 여기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군주는 겉표면과 같고, 백성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겉이 바르면 그림자도 바르지 않음이 없습니다. 군주는 원천과 같고 백성은 흐름과 같습니다. 원천이 맑으면 흐름은 맑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일 천하의 물이라면 친함이 있고 소홀함이 있으며, 가까움과 멂이 있습니다. 마음이 물에 응하는 것에도 무거움과 가벼움이 있고, 길고 짧음이 있습니다. 친한 사이는 무겁고 소원한 사이는 가볍습니다. 가까운 이는 길고 먼 사람을 짧습니다. 무겁고 긴 경우는 먼저 해야할 경우이고, 가볍고 짧은 경우는 뒤에 해야할 경우라는 것 역시 이세(理勢)의 필연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까닭으로 이장에서는 대학의 조목을 자세하게 진달했으니,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입니다. 여덟 가지 일이 있는데, 장의 마지막에서 유독 수신과 제가라는 두 일로 결론지은 것 역시 앞 장에서 ‘앞 뒤로 할 것을 안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그 뜻이 더욱 심오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한가할 때의 종용한 풍미를 항시 마음에 간직해서 잊지 않도록 하시면서, 매양 말 한 마디를 하실 때는 반드시 돌이켜 생각하기를 “이것이 수신에 어떤 장애가 있지는 않는가?”라고 하고, 매양 한 일을 실행하시면서는 즉 반드시 돌이켜 생각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수신에 어떤 장애가 있지는 않는가?”라고 하십시오. 작게는 웃고 찡그리며 염려하는 사이에, 크게는 호령과 승진 및 파직하는 사이에 돌이켜 생각해서 반드시 해가 없은 이유 다음에 좇되, 해로움이 있으면 감히 하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생각하기를 “내가 나의 친한 이에 두터이 하지 못한 점이 있지 않았는가? 저녁에 잠들면서 생각하며 말하기를 내가 나의 친한 이에 두터이 하지 못함이 있지 않았는가?라고 하고, 출입과 기거, 순간적이거나 먹고 마시는 사이에도 돌이켜 생각하지 않는 때가 없되 반드시 이미 두터이 한 후에는 지키고 잃지 않으며, 하나라도 두터이 하지 못함이 잇으면 또 두려워하면서 더둑 두터이 한다. 생각마다 이렇게 하고, 조금이라도 간단이 없다면 거의 수신에 則庶乎身修親悅, 들어서 천하에 조치하더라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니 폐하께서는 깊이 유의하십시오.
臣又謹按, 自此以上皆大學經文, 自‘則近道矣’以上爲前章, 自‘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以下爲後章. 前章略提綱領, 後章細分條目, 鉅細相涵, 首尾相應, 極爲詳備. 蓋夫子所誦古經之言而曾子記之. 自此以下, 傳文十章, 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 當俟異日詳究其說. 然必先讀經文, 使之習熟而綱領條目羅列胸中, 如指諸掌, 然後博考傳文, 隨事體察而實致其力, 使吾所以明德而新民者無不止於至善, 而天下之人皆有以見其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之效․則大學之道不在於書而在於我矣. 伏惟陛下深留聖意, 則天下幸甚!
신이 또 삼가 살피건대, 이 이상은 모두 대학의 경문입니다. “則近道矣” 이상은 앞 장이고,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이상은 뒷 장입니다. 앞 장은 대략 강령을 들었고, 뒷 장은 자세하게 조목을 나눴습니다. 크고 세밀한 것이 서로를 포함하고, 머리와 꼬리가 상응하니, 극히 상세하게 갖추었습니다. 공자께서 외우셨던 옛 경의 말을 증자가 기록한 것입니다. 이 아래로 전문 10장은 증자의 생각을 제자들이 기록했습니다. 훗날을 기다렸다가 그 이론을 상세하게 고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경의 글을 읽고 익숙하게 익힌 다음에 강령과 조목을 흉중에 나열하고서, 마치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한 연후에 전문을 널리 살피고, 일에 따라 체찰하면서 진실하게 그 노력을 다 기울여서 나의
康謂曰: “克明德.”
‘강고’에서는 “덕을 잘 밝힌다”고 했습니다.
臣熹曰: 克, 能也, 又有勝義. 言文王能明其明德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극(克)’은 ‘잘 한다[能]’는 말입니다. 또 ‘뛰어나다[勝]’는 뜻도 있습니다. 문왕이 그 밝은 덕을 잘 밝혔음을 말했습니다.
太甲曰: “顧諟天之明命.”
‘태갑’에서는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臣熹曰: 顧, 目在之也. 諟, 古‘是’字通用. 天之明命, 卽人之明德也. 言先王之心常欲明其明德, 如目在夫物, 不敢忘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고(顧)’는 언제나 눈이 거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시(諟)’자는 과거에 ‘시(是)’자와 통용했습니다. 하늘의 밝은 명은 곧 사람의 밝은 덕입니다. 선왕의 마음이 항상 그 밝은 덕을 발히려는 것이 마치 눈이 물에 있으면서 감히 잊지 않는 것과 같음을 말했습니다.
帝典曰: “克明峻德.”
‘제전’에서 말했습니다. “큰 덕을 잘 밝힌다.”
臣熹曰: 峻, 書作‘俊’, 大也. 大德卽明德也. 言堯能明其大德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준(峻)’은 서경에서 ‘준(俊)’이라고 썼는데 크다[大]는 뜻입니다. 큰 덕은 곧 밝은 덕입니다. 요임금은 그 큰 덕을 잘 밝혔음을 말했습니다.
皆自明也.
모두 스스로 밝히는 것입니다.
臣熹曰: 結所引書以釋明明德之意, 皆謂自明己之明德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밝은 덕을 밝힌다는 뜻을 풀이하기 위해 인용한 글들을 결론맺은 것으로 모두 스스로 자신의 밝은 덕을 밝힌다는 말입니다.
臣謹按, 此傳之首章, 釋經文明明德之義. 舊本脫誤, 今移在此. 其曰‘克(2-582)明德’者, 見人皆有是明德而不能明, 唯文王能明之也. 夫人之所以不能明其明德者, 何哉? 氣禀物欲害之也. 蓋氣偏而失之太剛, 則有所不克 : 氣偏而失之太柔, 則有所不克 : 聲色之欲蔽之, 則有所不克 : 貸利之欲蔽之, 則有所不克. 不獨此耳, 凡有一亳之偏蔽得以害之, 則皆有所不克. 唯文王無氣禀物欲之偏蔽, 故能有以勝之而無難也. 其曰‘顧諟天之明命’者, 人受天地之中以生, 所謂命也, 故人之明德非他也, 卽天之所以命我而至善之所存也. 是其全體大用蓋無時而不發見於日用之間, 事親事長, 飮食起居, 其所當然, 各有明法. 人唯不察於此, 是以氣票物欲得以蔽之而不能自明. 常目在之, 無少間斷, 眞若見其參於前․倚於衡也, 則明德常明而天命在我矣. 其曰‘克明峻德’者, 人之爲德, 未嘗不明, 而其明之爲體, 亦未嘗不大, 但人自有以昏之, 是以旣不能明, 而又自陷於一物之小. 唯堯爲能明其大德而無昏暗狹小之累., 是則所謂止於至善也. ‘皆自明也’者, 言此上所引三句, 皆言人當有以自明其明德也. 能自明其明德, 則能治其天下國家而有以新民矣.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것은 전의 첫 장으로 경문의 ‘밝은 덕을 밝힌다’는 의미를 풀이했습니다. 과거의 판본에는 탈락와 오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극명준덕’이라고 말한 것은 사람들 모두 이 밝은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 밝히지 못하는 것을 오직 문왕만은 밝혔음을 보인 것입니다. 사람이 그 밝은 덕을 밝히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품과 물욕이 해치기 때문입니다. 기가 치우쳐 잃음이 지나치게 강하면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기가 치우쳐 잃음이 지나치게 유약하면 극복하지 못함이 있습니다. 성색의 욕구가 가리면 극복하지 못함이 있다. 재물의 욕망이 가리면 극복하지 못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치우치고 가리운 것이 있어 해친다면 모두 극복할 수 없다. 오직 문왕은 기품과 물욕의 치우침과 가리움이 없었기 땜누에 이겨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라’고 말한 것은 사람은 천지의 ‘중(中)’을 얻어 태어나는 것이 이른 바 ‘명(命)’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밝은 덕이란 다른 것이 아니요, 곧 하늘이 나에게 명한 것으로 지선이 보존된 것이다. 이것은 그 전체와 큰 작용이 일상사에 불현하지 않는 때가 없으며, 어버이와 어른을 섬기고 먹고 마시며 기거하는 데 그 마땅한 바는 각각 밝은 법이 있다. 사람이 오직 이것을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기품과 물욕이 가리워서 스스로 밝힐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거기에 눈을 두고 조금도 간단이 없으면 참으로 참전의형과 같아서 밝은 덕은 언제나 밝고 천명은 나에게 있게 될 것이다. ‘능히 큰 덕을 밝힌다’고 한 것은 사람의 덕됨은 밝지 않은 때가 없고 그 밝음이 체가 됨도 크지 않음이 없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어둡게 만들기 때문에 이미 밝힐 수 없고 또 하나의 사물이란 작은 영역으로 스스로를 빠트린다. 오직 요임금은 그 큰 덕을 능히 밝혔고, 어둡고 협소한 장애가 없었다. 이것이 곧 ‘지극한 선에 그친다’는 말이다. ‘모두 스스로 밝힘이다’고 한 것은 이 위에서 인용한 세 구절은 모두 사람이 마땅히 그의 명덕을 스스로 밝힐 수 있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의 명덕을 스스로 밝힐 수 있다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임금의 대야에 이르기를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고 했다.
臣熹曰: 盤, 沐浴之盤也. 銘, 銘其器以自戒之辭也. 苟, 誠也. 湯以爲人之洗濯其心以去惡, 如沐浴其身以去垢, 故銘其盤. 言誠能一日有以滌(2-583)其舊染之汙而自新, 則當因其已新者而日日新之, 又曰新之, 不可略有間斷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반’이란 목욕 그릇입니다. ‘명’이란 그릇에 새겨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입니다. ‘구(苟)’는 ‘진실로[誠]’의 뜻입니다. 탕임금은 사람이 그 마음을 세탁해서 악을 물리치는 것이 그 몸을 씻어 때를 없애는 것과 같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그릇에 새긴 것입니다. 진실로 능히 하루라도 그 예전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슷로 새롭게 하려면 마땅히 이미 새롭게 한 것으로 인하여 날로날로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해서 조금이라도 그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康誥曰: “作新民.”
‘강고’에서는 “새로워진 백성을 진작시키라”고 말했습니다.
臣熹曰: 鼓之舞之之謂作, 言振起其自新之民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북치고 춤추게 만드는 것을 ‘작(作)’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새로워진 백성을 진작시키라는 말입니다.
詩曰: “周雖舊邦, 其命維新.”
시경에서는 말했습니다. “주나라는 비록 옛 나라이지만 그 명이 새롭다.”
臣熹曰: 言周國雖舊, 至文王能新其德以及於民, 而始受天命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주나라는 비록 오래되었지만, 문왕대에 이르러서 그 덕을 새롭게 해서 백성들에게까지 미쳤기 때문에 비로소 천명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그 극치를 쓰지 않음이 없다.
臣熹曰: 自新新民, 皆欲止於至善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모두 지극한 선에 머무르려는 것입니다.
臣謹按, 此傳之二章, 釋新民之義也. 蓋沐浴之盤者, 常用之器, 而銘者, 自警之辭也. 古之聖賢兢兢業業, 固無時而不戒謹恐懼, 然猶恐其意有所怠而忽忘之也, 是以於其常用之器, 各因其事而刻銘以致戒焉, 欲其常接乎目, 每警乎心而不至於忽忘也. 其辭所謂‘苟日新, 日日新, 又日新’者, 則取沐浴之事而言之. 蓋人之有是德, 猶其有是身也. 德之本明, 猶其身之本潔也. 德之明而利欲昏之, 猶身之潔而塵垢汙之也. 一旦存養省察之功眞有以去其前日利欲之昏而日新焉, 則亦猶其疏瀹澡雪而有以去其前日塵垢之汙也. 然旣新矣, 而所以新之之功不繼, 則利欲之交將復有如前曰之昏 : 猶旣潔矣, 而所以潔之之功不繼, 則塵垢之集將復有如前日之汙也. 故必因其已新而日日新之, 又日新之, 使其存養省察之功無少間斷, 則明德常明而不復爲利欲之昏. 亦如人之一日沐浴而日日沐浴, 又無日而不沐浴, 使其疏瀹澡雪之功無少間斷, 則身常潔淸而不復爲舊染之(2-584)汙也. 昔成湯所以反之而至於聖者, 正惟學於伊尹而有得於此, 故有感乎沐浴之事而刻銘於盤以自戒焉. 而稱其德者, 亦曰不邇聲色, 不殖貨利, 又曰以義制事, 以禮制心, 又曰從諫弗咈, 改過不吝, 又曰與人不求備, 檢身若不及, 皆日新之謂也. 至詩所謂‘聖敬日躋’者, 則其語意於日新爲尤近, 而‘敬’之一字, 又見其所以日新之本. 蓋不如是, 則亦何地可據而能日繼其功哉? 其後伊尹復政太甲, 復以‘終始惟一, 時乃日新’爲丁寧之戒. 蓋於是時, 太甲方且自怨自艾於桐, 處仁遷義而歸, 是亦所謂苟日新者. 故復推其嘗以告于湯者告之, 欲其日進乎此, 無所間斷, 而有以繼其烈祖之成德也. 其意亦深切矣. 至周武王踐祚之初, 受師尙父丹書之戒, 而於几席․觴豆․刀劍․戶牖․盥槃莫不銘焉, 則亦聞湯之風而興起者, 皆可以爲萬世帝王之法矣. 傳者釋新民之義而及於此, 蓋以是爲自明之至而新民之端也. 其曰‘作新民’者, 武王之封康叔, 以商之餘民染紂汙俗而失其本心也, 故作康誥之書而告之以此, 欲其有以鼓舞而作興之, 使之振奮踴躍, 以去其惡而遷於善, 舍其舊而進乎新也. 然此豈聲色號令之所及哉? 亦自新而已矣. 其曰‘周雖舊邦, 其命維新’者, 言周之有邦, 自后稷以來, 千有餘年, 至於文王, 聖德日新而民亦丕變, 故天命之, 以有天下. 是其邦(2-585)雖舊而命則新也. 蓋民之視效在君, 而天之視聽在民. 若君之德昏蔽穢濁而無以日新, 則民德隨之, 亦爲昏蔽穢濁而日入於亂. 民俗旣壞, 則天命去之, 而國勢衰弊, 無復光華. 如人向老, 如日將暮, 日凋日瘁, 日昏日暗, 不覺滅亡之將至. 若其有以自新而推以及民, 使民之德亦無不新, 則天命之新將不旋日而至矣. 其曰‘君子無所不用其極’者, 盤銘言自新也, 康誥言新民也, 文王之詩自新新民之極也. 故曰君子無所不用其極. 極, 卽至善之云也. 用其極者, 求其止於是而已矣.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것은 전의 제2장으로,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뜻을 풀이했습니다. 목욕하는 그릇은 일상적으로 쓰는 도구입니다. ‘명’이란 스스로를 경계하는 말입니다. 옛 성현들은 전전긍긍하면서 본시 계근공구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그 뜻에 소홀함이 있어서 잊어버릴까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일상적으로 쓰는 도구에까지 각각 그 일로 인하여 명을 새겨 경계한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눈에 접하게 해서 매양 마음에 경계하면서 소홀이여겨 잊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 문사에서 말한 “진신로 날로 새롭게하려거든 날마다 새롭게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것은 목욕하는 일을 (비유로) 선택해서 말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이 덕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이 몸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본래 밝음은 사람의 몸이 본래 깨끗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밝은데도 이욕이 어둡게하는 것은 몸이 본래 깨끗한데도 때가 더럽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날에 존양 성찰의 노력을 통해 참되게 지난날의 이욕으로 인한 어두움을 물리치고 날로 새롭게 하는 것은 곧 삶아 씻어서 눈처럼 희게함으로써 지난날의 때로 인한 더러움을 물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새롭게 했다고 해서 새롭게 하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이욕이 번갈아가면서 다시 지난날과 같은 어두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미 새롭게 한 것으로 인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해서 존양과 성찰의 노력이 조금이라도 간단이 없게 한다면 밝은 덕은 항상 밝고 다시 이욕에 의해 어두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사람이 어느 하루 목욕하고서, 날마다 목욕하고, 또 목욕하지 않는 날이 없어서 삶고 씻어서 눈처럼 희게하는 노력을 조금도 간단이 없도록하면 몸이 언제나 맑고 깨끗해서 다시는 과거에 물든 더러움을 갖게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에 성탕이 여기에서 돌이켜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까닭도 바로 이윤에게 배우면서 이런 점에 소득이 있었기 때문에 목욕하는 일에서 감발하여 그 용기에 명을 새기고 스스로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덕을 칭찬하는 사람들도 “(듣기좋은) 소리나 (보기좋은) 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재물이나 이익을 심지 않았다”고 했고, 또는 “의로움으로 일을 제어하고 예의로 마음을 제어했다”고 했으며, 또 “간쟁하는 말을 좇되 어기지 않았으며, 허물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것을 구비하기를 요구하지않았고, 자기를 단속할 때는 마치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날로 새롭게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경에서 말하는 “聖敬日躋”란 것은 그 말의 뜻이 날로 새롭게 한다는 것에 더욱 가깝습니다. 그리고 ‘경’이란 한 글자에서 또한 날로 새로울 수 있는 근본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지 않다면 또한 어떤 곳에 근거를 두고서 날마다 그 노력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 후에 이윤이 다시 태갑(太甲)을 政할 때 다시금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는 이것이 바로 날로 새롭게 함이다’라고 정녕스럽게 훈계했습니다. 이 당시에 태갑은 蓋於是時, 동 땅에서 스스로 원망하며 스스로 애艾하다가, 인으로 돌아오고 의로움으로 옮겨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 역시 ‘진실로 날로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윤은 다시 그가 일찍이 탕왕에게 고했던 것을 미루어 날마다 여기에 나아가서 간단이 없어 그 열조의 성덕을 계승할 수 있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 뜻이 더욱 깊고 절실합니다. 주나라의 무왕이 즉위할 초기에 사상보(師尙父)에게서 단서(丹書)의 경계를 받아서 궤석(几席)․상두(觴豆)․도검(刀劍)․호유(戶牖)․관반(盥槃) 등 어느 곳에나 명을 새기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것 역시 성탕의 유풍을 듣고서 흥기한 것이니 모두가 영원한 제왕의 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에서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풀이하면서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으로 자기를 밝히는 극치와 동시에 백성을 새롭게 하는 단서를 삼은 것입니다. ‘백성을 새롭게 고무시키가’는 것은 무왕이 강숙(康叔)을 봉할 때, 상나라의 남은 백성들이 주임금의 더러운 습속에 물들어 그들의 본심을 잃었기 때문에 ‘강고’를 지어서 이렇게 고한 것이니, 그들을 고무시키고 흥기시켜 그들로 하여금 떨치고 분연히 일어나 잘못을 버리고 선으로 옮아가며,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소리나 소리 정령으로 미칠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스스로를 새롭게 할 따름일 뿐입니다. ‘주나라는 비록 옛 나라이지만 그 명은 새롭다’는 것은 주나라는 후직(后稷) 이후로 천여년이 지났으며, 문왕에 이르러서 성스러운 덕이 날로 새로워 백성 역시 크게 변했기 때문에 하늘이 명하여 천하를 소유하게 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나라는 비롯 오래되었지만 명은 새롭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보고 본받는 것은 군주에게 있고,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백성에게 있습니다. 만일 군주의 덕이 어둡고 가리우며 더럽고 탁해서 날로 새로울 수 없다면 백성들의 덕도 이것을 따라서 또한 어둡고 가로막이고 더럽고 탁하게 되어 날마도 혼란 속으로 빠져듭니다. 백성들의 풍속은 이미 무너지고 천명도 떠났으며 국가의 기세는 쇠퇴하면 다시 영화로운 빛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늙으려하고, 해가 저물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어떤 날은 시들었다 어떤 날은 병들고, 어떤 날은 희미하게 저물었다 어떤 날은 캄캄하게 어두워져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멸망이 이르게 됩니다. 만일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서 백성들에게 미루어 미칠 수 있어서 백성들의 덕이 새롭지 않음이 없다면 천명의 새로움은 얼마가지 않아서 이를 것입니다. ‘군자는 그 극을 쓰지 않음이 없다’는 말은 성탕의 목욕그릇의 명에는 ‘스스로를 새롭게 한다’고 했고, ‘강고’에서는 백성을 새롭게 한다고 했으며, 문왕의 시는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극치이기 때문에 군자를 그 극을 쓰지 않음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극’이란 곧 ‘지극한 선’을 말합니다. 그 극을 쓴다는 것은 여기에 그침을 구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詩云: “邦畿千里, 惟民所止.”
시경에서는 말했습니다. “왕의 도읍 천리여 백성이 머무는 곳이로다.”
臣熹曰: 邦畿, 王者之都也. 止, 居也. 言物各有所當止之處也.
신 희는 아룁니다. ‘방기(邦畿)’란 왕의 도읍입니다. ‘지(止)’는 ‘머물러 산다[居]’는 뜻입니다. 사물은 각각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詩云: “緡蠻黃鳥, 止于丘隅.” 子曰: “於止知其所止, 可以人而不如鳥乎?”
시경에서는 말했습니다. “지저귀는 꾀꼬리는 산 모롱이에 머물도다.” 공자께서 말했습니다. “그칠 때에 그 그칠 곳을 아나니 사람으로서 새만 못할 수 있겠는가?”
臣熹曰: 緡蠻, 鳥聲. 丘隅, 岑蔚之處. ‘子曰’ 以下, 孔子說詩之辭, 言人當知所當止之處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면만(緡蠻)’이란 새가 지저귀는 소리입니다. ‘구우(丘隅)’는 산이 높고 울창한 곳입니다. ‘자왈(子曰)’ 이하의 부분은 공자께서 이 시의 글을 설명하면서 사람은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을 응당 알아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詩云: “穆穆文王, 於緝熈敬止.” 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爲人子止於孝, 爲人父止於慈, 與國人交止於信.
시경에서는 “빛나는 문왕이시여, 아! 계속해서 밝히시며 공경하며 그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군주가 되어서는 인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함에 그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그치고 부모가 되어서는 자애에 그치고, 사람들과 사귀면서는 믿음에 그친다.
臣熹曰: 穆穆, 深遠之意. 於, 嘆美攝. 緝, 繼續也. 熙, 光明也. 敬止, 言其無不敬而安所止也. 引此而言聖人之止無非至善, 五者乃其目之大者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목목(穆穆)’은 깊고 멀다는 뜻입니다. ‘오(於)’는 찬탄하는 말입니다. ‘집’은 계속한다는 말이요, ‘희’는 빛난다는 말입니다. ‘경지’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치는 곳에 편안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용하여 성인의 그침은 지극한 선이 아님이 없음을 말했습니다. 다섯 가지는 그 조목 가운데 큰 것입니다.
詩云: “瞻彼淇奧, 綠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喧兮. 有斐君子, 終不可諠兮.” 如切如磋者, 道學也 : 如琢如磨者, 自脩也 : 瑟兮僩兮者, (2-586)恂慄也 : 嚇兮喧兮者, 威儀也 : 有斐君子, 終不可諠兮者, 道盛德至善, 民之不能忘也.
시경에서는 말했습니다. “저 기수 모퉁이를 보라. 푸른 대는 무성토다. 문채나는 군자는 자른 듯 간 듯하며, 쪼은 듯 간 듯하도다. 엄밀하고 굳셈이여, 성대히 드러나도다. 문채나는 군자여 끝내 잊을 수 없도다.” 자른 듯 간 듯이란 학문을 말하고, 쪼은 듯 간 듯이란 스스로 닦는다는 말입니다. 엄밀하고 굳셈이란 두려워함이요, 성대하게 드러남이란 위엄있는 행동거지입니다. 문채나는 군자를 끝내 잊을 수 없다는 것은 도는 성대하고 덕은 지극히 선해서 백성들이 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臣熹曰: 淇, 水名. 奧, 隈也. 菉, 詩作‘綠’. 猗猗, 美盛貌. 斐, 文貌. 切, 以刀鋸. 琢, 以椎鑿, 皆栽物使成形質也. 磋以鑢錫, 磨以沙石, 皆治物使其滑澤也. 治骨角者旣切而復嗟之, 治玉石者旣琢而復磨之, 皆言其治之有緖而進進不已也. 瑟, 嚴密之貌. 僩, 武毅之貌. 喧, 詩作‘恒’. 嚇喧, 宣著盛大之貌. 諠, 詩作‘讓’, 忘也. 道, 言也. 學, 謂謂習討論之事. 自脩者, 省察克治之功. 恂, 鄭氏謂作‘峻’, 恂慄, 戰催也. 威, 可畏也. 儀, 可象也. 引詩而釋之, 以見能得至善之所由, 而又以贊其德容之盛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기(淇)는 물 이름입니다. 욱(奧)은 모퉁이입니다. 녹(菉)은 시에서는 녹(綠)으로 썼습니다. 의의(猗猗)는 아름다움이 성대한 모양입니다. 비(斐)는 문채나는 모양입니다. 자르는[切] 일에는 칼과 톱을 사용하고, 쪼는[琢] 일에는 망치와 끌을 사용합니다. 모두 물건을 재단해서 형태와 재질을 이루는 것입니다. (뼈나 뿔을) 가는[磋] 일은 줄과 대패를 사용하고, (돌이나 옥을) 가는[磨] 일에는 모래와 돌을 사용합니다. 모두 물건을 다스려서 매끄럽고 윤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뼈나 뿔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르고나서 다시 갈고, 돌과 나무를 다스리는 사람은 먼저 쪼으고나서 다시 갑니다. 모두 다스림에 실마리가 있고 나아가는 과정이 그치지 않음을 말햇습니다. 슬(瑟)은 엄하고 빈틈없는 모양입니다. 한(僩)은 무위가 굳센 모양입니다. 훤(喧)은 시에서는 훤(咺)으로 썼습니다. 혁훤(嚇喧)은 드러나고 성대한 모양입니다. 훤(諠)은 시에서는 훤(諼)으로 썼는데 잊는다(忘)는 뜻입니다. 도(道)는 말한다(言)는 뜻입니다. 학문[學]이란 강론하고 익히며 토론하는 일을 말합니다. 스스로를 닦는다[自脩]는 것은 살피고 관찰하며, 이겨내고 다스리는 공부입니다. 순(恂)은 정씨는 준(峻)이라고 보았습니다. 순율(恂慄)이란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위(威)는 두려워 할 만한 것입니다. 의(儀)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시를 인용해서 풀이함으로써 지극한 선이 유래하는 곳을 잘 얻었음을 보였고, 또 덕과 용모의 성대함을 찬탄했습니다.
詩云: “於戱! 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
‘시에서는 “아아! 이전의 왕을 잊지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군자는 그의 현명함을 현명하게 여기고 그가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며, 소인은 그가 즐겁게 해준 것을 즐겁게 여기고 그 이롭게 해준 것을 이롭게 여기나니 이 때문에 세상에 없는데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臣熹曰: 於戱, 嘆詞. 前王, 謂文․武也. 君子, 謂其後賢後王. 小人, 謂後民也. 此言前王盛德至善之餘澤, 使天下後世無一物不得其斫, 所以雖已沒世, 而人思慕之, 愈久而不忘也. 此兩節咏嘆淫洙, 其味深長, 當熟玩之.
오희(於戱)는 감탄사입니다. 이전의 왕[前王]은 문왕와 무왕을 말합니다. 군자(君子) 이후의 현자와 왕을 말합니다. 소인(小人)은 이후의 백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전 왕들의 성대학 덕과 지극한 선의 남겨진 은택이 천하 후세의 한 물건도 제 방소를 얻지 않음이 없게 함을 말한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이미 세상을 떠났더라도 사람들이 사모해서 오래될수록 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절은 읆조리고 감탄함이 넘쳐 흐르니 그 맛이 깊고 오래가는 지라 마땅히 익숙하도록 완미해야 합니다.
臣謹按, 此傳之三章, 釋經文‘止於至善’之義. 其曰‘邦畿千里, 維民所止’者, 以民止於邦畿, 明物之各有所止也. 其曰‘可以人而不如鳥乎’者, 言鳥於其欲止之時猶知其當止之處, 豈可人爲萬物之靈, 而反不如鳥之能知所止而止之也? 其引‘穆穆文王’以下一節, 則以聖人之止而明至善之所在也. 蓋天生烝民, 有物有則, 是以萬物庶事莫不各有當止之所. 但所居之位不同, 則所止(2-587)之善不一. 故爲人君, 則其所當止者在於仁, 爲人臣, 則其所當止者在於敬, 爲人子, 則其所當止者在於孝, 爲人父, 則其所當止者在於慈, 與國人交, 則其所當止者在於信. 是皆天理人倫之極致, 發於人心之不容己者. 而文王之所以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者, 亦不能加毫末於是焉. 但衆人類爲氣禀物欲之所昏, 故不能常敬而失其所止. 唯聖人之心表裏洞然, 無有一亳之蔽, 故連續光明, 自無不敬, 而所止者莫非至善, 不待知所止而後得所止也. 故傳引此詩而歷陳所止之實, 使天下後世得以取法焉. 學者於此誠有以見其發於本心之不容已者而緝熈之, 則其敬止之功是亦文王而已矣. 詩所謂‘上天之載, 無聲無臭, 儀刑文王, 萬邦作孚’, 正此意也. 然君之所以仁, 臣之所以敬, 子之所以孝, 父之所以慈, 朋友之所以信, 皆人心天命之自然, 非人之所能爲也. 但能因事推窮以至其極, 而又推類以盡其餘, 則天下之物皆有以見其至善之所在而止之矣. 其引‘膽彼淇澳’以下, 舊本脫誤, 今移在此. 其意則以明夫所以得其至善而止之之方, 與其得止之驗也. 夫如切如磋, 言其所以講於學者已精而益求其精也. 如琢如磨, 言其所以脩於身者已密而益求其密也. 此其所以擇善固執, 日就月將而得止於至善之由也. 恂慄者, 嚴敬之存乎中也. 威儀者, 輝光之著乎外也. 此其所以睟面盎(2-588)背, 施於四體, 而爲止於至善之驗也. 盛德至善, 民不能忘, 蓋人心之所同然, 聖人旣先得之, 而其充盛宣著又如此, 是以民皆仰之而不能忘也. 盛德, 以身之所得而言也 : 至善, 以理之所極而言也. 切磋琢磨, 求其止於是而已矣. 其引‘於戱!前王不忘’以下一節, 則因上文民不能忘而言也. 蓋賢其賢者, 聞而知之, 仰其德業之盛也. 親其親者, 子孫保之, 思其覆育之恩也. 樂其樂者, 含哺鼓腹而安其樂也. 利其利者, 耕田鑿井而享其利也. 此皆先王盛德至善之餘澤, 故雖已沒世, 而人猶思之, 愈久而不能忘也.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것은 전의 3장으로 경문의 ‘지극한 선에 그친다’는 뜻을 풀이했습니다. “왕의 도읍 천리여, 백성이 머무는 곳이도다”라는 것은 백성들이 왕의 도읍에 머무는 것으로써 사물들이 각각 그칠 곳이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새만 못할 것인가?”라는 것은 새조차 머물고자 할 때에는 오히려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을 아는데, 어찌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거꾸로 새가 머물 곳을 알아 머무는 것만 못할 것인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빛나는 문왕이시어”란 구절 아래의 한 절을 인용한 것은 성인의 그침으로써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을 밝힌 것입니다. 하늘이 백성을 낳으면서 사물이 있으면 곧 법칙이 있으니, 이 때문에 세상 모든 것과 모든 일에는 각각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머무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그쳐야 할 선도 한 가지가 아닙니다. 때문에 군주가 되어서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은 인에 있고, 신하기 되어서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은 공경에 있으며, 자식이 되어서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은 효도에 있고, 부모가 되어서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은 자애로움에 있고, 백성들과 사귀면서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은 믿음에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천리와 인륜의 극치요, 사람의 마음에서 발용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왕이 천하의 모범이 되고, 후세에 전해질 수는 까닭 역시 여기에 조금도 더 덧붙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인과 같은 부류들은 기의 품부와 외물로 인한 물욕에 가리우기 때문에 항상 공경할 수 없어서 그쳐야 할 곳을 잃어버립니다. 오직 성인의 마음만은 안팎이 훤하니 뚫려 조금의 가리움도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빛이 나고 스스로 공경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그치는 곳이 지극한 선이 아님이 없으니, 이것은 그칠 곳을 알 기를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야 그칠 곳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에서는 이 시을 인용하여 여러 차례 그칠 곳의 실상을 진술하여 천하 후세가 법도로 취하도록 하였습니다. 학자들이 여기에서 진실로 그만 둘 수 없는 본심의 발현을 계속해서 밝히면, 그 공경하게 그치는 공도 역시 문왕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시에서 “높다란 하늘의 일은 소리도 냄새도 없으려니와, 문왕을 본받으면 모든 나라들이 고무되고 믿으리라.[上天之載, 無聲無臭, 儀刑文王, 萬邦作孚]”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러나 군주가 어질어야 하는 까닭, 신하가 공경해야 하는 까닭, 자식이 효도해야 하는 까닭, 부모가 자애로와야 하는 까닭, 친구로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모두 사람의 마음과 천명의 저절로 그런 것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의 일로 인하여 잘 유추하고 궁구하여 그 극치에 이르고, 또 종류별로 추론해서 그 나머지에로 모두 넓혀나갈 수 있다면 천하의 사물에 대해 모두 그 지선이 있는 곳을 알아서 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기수 모퉁이를 보라[膽彼淇澳]”는 이하의 대목은 과거의 판본에서는 탈락과 오류가 있어서 지금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그 뜻은 그 지극한 선을 얻어 그칠 수 있는 방법과 그 그침을 얻은 징험을 밝힌 것입니다. 마치 자른 듯이, 간 듯이라는 것은 배운 것을 강론함이 이미 정치하더라도 더욱 그 정치함을 추구해야 함을 말했고, 마치 쪼은 듯이 간 듯이 라는 말은 자기에게서 닦은 것이 이미 정밀하더라도 더욱 그 정밀함을 추구해야 함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선을 선택해서 굳게 붙잡고[擇善固執], 날마다 나아가고 달마다 전진해서 지극한 선의 유래를 얻어 그치는 까닭입니다. 순율(恂慄)이란 엄하고 공경함이 마음 속에 보존되는 것이요, 위의(威儀)란 광채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굴에는 함치르르하게 드러나고 등 뒤로는 풍요롭게 넘쳐흘러 몸뚱이의 곳곳에 베풀어져서[睟面盎背, 施於四體] 지극한 선에 그친 징험이 되는 이유입니다.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을 백성들이 잊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똑같이 그런 것을 성인은 먼저 얻고서 이렇게 가득채워 발게 드러내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면서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대한 덕[盛德]이란 자신의 몸으로 얻은 것을 말합니다. 지극한 선[至善]이란 이치의 지극한 것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자르고 갈고, 쪼으고 가는[切磋琢磨] 것은 여기에서 그치기를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 이전의 왕을 잊지 못하도다[於戱! 前王不忘]”의 아래 한 구절은 윗 문장의 백성들이 잊지 못한다는 것으로 인하여 말했습니다. 그의 현명함을 현명하게 여긴다는 것은 듣고 알아서 그의 덕과 업의 성대함을 우러르는 것입니다. 그가 친하게 여기는 이를 친하게 여긴다는 것은 자손들이 보존하면서[子孫保之] 덮어주고 기른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즐거운 것을 즐긴다는 것은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면서 그 즐거움을 편안히 즐긴다는 것입니다. 그 이로움을 이롭게 여긴다는 것은 밭갈고 우물 파면서 그 이로움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이전 왕들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이 남긴 은택이기 때문에 비록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사람들이 오히려 생각하기를 오랠수록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志, 此謂知本.
공자는 “송사를 다스림은 내가 남과 같지만 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정이 없는 자가 그 말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크게 두렵게 하기 때문이니 이를 일러 ‘근본을 안다’고 합니다.
臣熹曰: 猶人, 不異於人也. 情, 實也. 引夫子之言, 而言聖人能使無實之人不敢盡其虛誕之辭, 蓋我之明德旣明, 自然有以畏服民之心志, 故訟不待聽而自無也. 觀於此言, 可以知本末之先後矣.
신 주희는 아룁니다. 남과 같다[猶人]는 것은 남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情)은 실정[實]입니다. 공자의 말씀을 인용해서 성인이 실정이 없는 사람들이 허탄한 말을 다할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은 나의 밝은 덕이 이미 밝으면 저절로 백성들이 마음과 뜻으로 두려워하고 복종하기 때문에 송사는 다스리기를 기다릴 것이 없이 저절로 사라짐을 말했습니다. 이 말을 살펴보면 근본과 말단의 선후 관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臣謹按,, 此傳之四章, 釋經文‘物有本末’之義也. 舊本脫誤, 今移在此. 蓋言聖人德盛仁熟, 所以自明者皆極天下之至善, 故能大有以畏服其民之心志, 而使之不敢盡其無實之辭. 是以雖其聽訟無以異於衆人, 而自無訟之可聽. 蓋己德旣明而民德自新, 則得其本之明效也. 或不能然, 而欲區區於分爭辯訟之間, 以求新民之效, 其亦末矣.
신은 삼가 살피건대, 이것은 전의 4장으로 경문의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다[物有本末]”는 의미를 풀이했습니다. 과거의 판본에는 탈락과 오류가 있어서 지금 이곳으로 옮겼놓았습니다. 성인은 덕이 성대하고 어짊[仁]이 성숙해서 스스로 밝힌 것은 모두 극치에 다다른 천하의 지극한 선이기 때문에 크게 그 백성들의 마음과 의지를 두렵게 복종시킬 수 있었고, 그들이 실정이 없는 말을 감히 다 말하지 못하도록 함을 말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비록 그 송사를 처리함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없지만 스스로는 처리할만한 송사를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덕이 이미 밝고 백성의 덕이 저절로 새로워지는 것은 그 근본을 얻은 분명한 효과입니다. 혹 그렇게 할 수 없어서 구구하게 다투고 소송하는 사이에서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효과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역시 말단입니다.
(2-589)臣又謹按, 自此以上大學之傳, 以釋正經前章之義者也. 其言‘克明德’者, 欲學者自彊其志, 以勝其氣禀之偏․物欲之蔽而能明其明德也. 其言‘顧諟天之明命’者, 欲學者之於天理心存目在而不可以頃刻忘也. 其言‘苟日新, 日日新, 又日新’者, 欲學者深自省察, 一日沛然有以去惡而遷善, 則又如是日日加功而無間斷也. 其言‘如切如磋, 如琢如磨’者, 欲學者之不以小善自足, 而益進其功, 以求止於至善, 亦日新之意也. 凡此數者, 其言雖殊, 其意則一. 臣願陛下深留聖意而實致其功, 必使一日之間曉然有以見夫氣禀物欲之爲己害, 脫然有以去之而無難, 則天理之明瞭然在目, 而有以爲日新之地矣. 然後日日新之又日新之, 如旣切而復磋之, 如旣琢而復磨之, 以至於至善在我而無所不用其極, 則宋雖舊邦, 而天之所以命陛下者則新矣. 如其不然, 則臣恐天下之勢將有如前章所謂向老而將暮者. 臣不勝大懼, 惟陛下之留意焉!
신은 또 삼가 살피건대, 이곳 위에 있는 대학의 전은 정경(正經) 앞 장의 의미를 풀이한 것입니다. “덕을 잘 밝힌다[克明德]”고 말한 것은 학자들이 스스로 그 의지를 굳세게해서 기의 품부로 인한 치우침과 사물로 인한 욕망의 가리움을 이기고 그의 명덕을 잘 밝히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라[顧諟天之明命]”고 말한 것은 학자들이 천리(天理)를 마음에 보존하고 눈 앞에 두어서 짧은 순간조차 잊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진실로 어느 하루 새로웠거든 날로날로 새롭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는 말은 학자들이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서 어느 하루에 패연(沛然)한 태도로 그 악을 물리치고 선으로 옮겨갈 수 있었거든 또 이처럼 날마다 공부를 더해서 간격을 두지 말기를 바란 것입니다. “마치 자른 듯이, 간 듯이, 마치 쪼은 듯이 간 듯이[如切如磋, 如琢如磨]”라는 말은 학자들이 작은 선에 만족해하지 말고 더욱 그 공부를 진보시켜 지극한 선에 머무는 단계를 추구하기를 바란 것이니 역시 날로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 몇 가지는 그 말이 비록 다르지만 그 뜻은 같습니다. 신은 원컨대 폐하께서 깊이 유의하시고 진실로 그 공부를 이루어서 반드시 어느 하루에 환하게[曉然] 기품과 물욕이 자기를 해치는 것을 보게 되거든 탈연(脫然)한 태도로 물리치는데 어려움이 없게 하히시어서 천리의 밝음이 명료하게 눈 앞에 있게 되고 날로 새로워지는 경지를 이루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기를 마치 이미 자르고서 다시 갈고, 마치 이미 쪼으고서 다시 가는 것처럼 해서 지극한 선이 나에게 있고, 그 극치를 쓰지 않음이 없는 데에 이른다면 송나라는 비록 옛 나라이지만 하늘이 폐하에게 내리는 천명은 새로울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은 천하의 형세가 장차 앞 장에서 말한 ‘(사람이) 늙어가려 하고 (날이) 저물려고 하는’ 것과 같이 될까 두렵습니다. 신은 커다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폐하께서는 유의하십시오.
此謂知本.
이를 일러 근본을 안다고 합니다.
程子曰: 衍文也.
정자는 이 문단은 연문이라고 했습니다.
此謂知之至也.
이를 일러 앎이 지극하다고 합니다.
臣熹曰: 此句之上當有闕文.
신 주희는 아룁니다. 이 구절의 위에는 응당 빠진 문장이 있습니다.
臣謹按, 此傳之五章, 其次當釋物格知至之義, 今亡其辭, 而獨留此一句, 乃章末之結語也. 臣嘗竊考此篇之旨, 其綱領有三, 其條目有八, 而格物致知最爲先務. 今乃獨遺其本傳之文, 不知其所以發明此旨者果爲何說, 甚可惜也. 然(2-590)而尙賴程氏之言, 有可以補其亡者. 如曰: ‘學莫先於正心誠意, 然欲正心誠意, 必先致知. 而欲致知, 又在格物. 致, 盡也 : 格, 至也. 凡有一物必有一理, 窮而至之, 所謂格物者也. 然而格物亦非一端, 如或讀書講明道義, 或論古今人物而別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其當否, 皆窮理也. 但能今日格一件, 明日又格一件, 積習旣多, 然後脫然有貫通處.’ 又曰: ‘窮理者, 非謂必盡窮天下之理, 又非謂止窮得一理便到, 但自一身之中, 以至萬物之理, 理會得多, 自當脫然有悟處. ’又曰: ‘格物非欲盡窮天下之物, 但於一事上窮盡, 其他可以類推. 至於言孝, 則當求其所以爲孝者如何. 若一事上窮不得, 且別窮一事, 或先其易者, 或先其難者, 各隨人淺深. 譬如千蹊萬徑, 皆可以適國, 但得一道而人, 則可以推類而通其餘矣.’ 蓋萬物各具一理, 而萬理同出一原, 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 至於論其所以用力之本, 則其言又曰: ‘學道以知爲先, 致知以敬爲本. ’又曰: ‘涵養須是敬, 進學則在致知. ’又曰: ‘致知在乎所養, 養知莫過於寡欲. ’論其所以爲敬之方, 則其言又曰: ‘主一之謂敬, 無適之謂一.’ 又曰: ‘但莊整薺肅, 則心便一, 一則自無非僻之干, 存之久而天理明矣.’ 至其門人謝良佐之言, 則曰: ‘敬是常惺惺法’, 尹淳之言則曰: ‘人能收歛其心, (2-591)不容一物, 則可以謂之敬矣.’ 此皆切至之言, 深得聖經之旨. 傳文雖亡, 然於此可以得其梗槪矣.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것은 전의 5장으로 그 다음에는 당연히 격물(格物)과 지지(知至)의 의미를 풀이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 말이 없고 단지 이 한 구절만 남아 있는데, 이 구절은 장의 끝에서 결론맺는 말입니다. 신은 과거에 이 대학의 요지[旨]에 대해 고찰해 보았더니, 그 강령은 셋이고, 조목은 여덟인데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본문의 문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요지를 발명한 내용이 과연 어떤 설명인 지를 알 수 없는 것은 아주 애석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정씨의 말에 의존해서 그 사라진 내용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말들입니다. “배움[學]이란 성의와 정심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정심과 성의하려면 반드시 앞서서 치지해야 한다. 치지를 하려면 또 격물에 달려있다. 치(致)는 다하다[盡]는 듯이다. : 격(格)은 이르다[至]는 뜻이다. 하나의 사물에는 반드시 하나의 법칙이 있다. 그것을 궁구해서 이르는 것이 ‘격물(格物)’이다. 그러나 격물이란 본래 한 가지 단서가 아니기 때문에 혹은 독서를 통해 도의를 강명하고, 혹은 고금의 인물을 논해서 그 시비를 구별하고 혹은 사물에 응접하면서 그 당부에 처신하는 것이 모두 이치를 궁구하는 것[窮理]이다. 다만 오늘 한 가지에 이르고 내일 또 한 가지에 이르러서, 누적되고 익힌 것이 이미 많다면, 그 다음에 탈연하게 관통하는 곳이 있을 것이다.” 또 말했습니다.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은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모두 궁구한다는 말이 아니요, 또 하나의 이치를 궁구해서 거기에 도달하면 그친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한 몸 속에서부터 만물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이해하는 것이 많아지면 자연히 탈연하게 깨닫는 곳이 있다는 말이다.” 또 말했습니다. “격물이란 천하의 사물을 모두 궁구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일에서 극치에 이르도록 궁구하면 그 나머지는 종류별로 유추할 수 있다. 효도를 말할 경우에는 당연히 효도해야 하는 이유가 어떤 것인지를 추구해야 한다. 만일 한 가지 일에서 궁구해서 얻지 못하면 또 따로 한 가지 일을 궁구해야 한다. 혹은 그 쉬운 일을 먼저 하기도 하고, 혹은 그 어려운 일을 먼저하기도 해서 각 사람의 수준 차이를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수 천 수만의 길이 모두 국으로 갈 수 있지만 다만 한 길만을 얻어 가면 종류별로 유추해서 그 나머지에도 통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은 각각 하나의 이치를 갖추고 있고, 온갖 이치는 하나의 근원에서 같이 나왔으니 이것이 추론해서 통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힘써야할 근본을 논한 곳에 이르러서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를 배우는 것은 앎을 우선시 한다. 앎을 이루는 것은 공경함을 근본으로 삼는다.” 또 말했습니다. “함양은 반드시 공경함을 통해서, 학문에 나아감은 앎의 완성에 달려있다.” 또 말했습니다. “앎을 완성하는 것은 기르는 것에 달려 있다. 앎을 기르는 것은 욕심을 줄이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
공경함의 방법을 논하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을 공경함이라고 한다. 다른 곳에 한 눈 팔지 않는 것을 ‘하나[一]’라고 한다.” 또 말했습니다. “단지 장중하고 단정하고 가지런하고 엄숙하게 하면 마음은 하나가 된다. 마음이 하나가 되면 저절로 비벽의 간여가 없다. 보존함이 오래되면 천리가 밝아진다.”
그의 제자인 사량좌는 “공경함이란 항시 깨어있는 법”이다라고 했고, 윤순은 “사람이 그 마음을 수렴해서 하나의 사물도 용납하지 않는다면 공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간절하고 지극한 말들로서 깊이 성인의 경의 요지를 얻은 것입니다. 전문이 비록 없지만 여기에서 그 대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故臣又拾遺意而論之曰: 天道流行, 造化發育, 凡有聲色貌象而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旣有是物, 則其所以爲是物者莫不各有當然之則, 具於人心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 而非人之所能爲也. 今且以其至切而近者言之, 則心之爲物, 實主於身, 其體則有仁․義․體․智之性, 其用則有惻隱․羞惡․恭敬․是非之情, 渾然在中, 隨感而應, 各有攸主而不可亂也. 次而及於身之所具, 則有口․鼻․耳․目․四支之用. 又次而及於身之所接, 則有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之常. 是皆必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所謂理也. 外而至於人, 則人之理不異於己也. 遠而至於物, 則物之理不異於人也. 是乃書所謂降衷, 詩所謂秉彝, 劉子所謂天地之中, 子思所謂天命之性, 孟子所謂仁義之心, 程氏所謂天然自有之中, 張載所謂萬物之一原, 邵雍所謂道之形體者. 但其氣質有淸濁偏正之殊, 物欲有淺深厚薄之異, 是以華之與愚, 人之與物, 相與殊絶而不能同耳. 以其理之同, 故以一人之心而於天下萬物之理無不能知. 以其禀之異, 故於其理或有所不能窮也. 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 知有不盡, 則其心之(2-592)所發必不能純於義理而無雜乎物欲之私, 此其所以意有不誠, 心有不正, 身有不脩, 而天下․國家不可得而治也. 昔者聖人蓋有憂之, 是以於其始敎, 爲之小學, 而使人習於誠敬, 則所以養其德性․收其放心者, 已無所不用其至矣. 及其進乎大學, 則所謂格物致知云者, 又欲其於此有以窮究天下萬物之理而致其知識, 使之周偏精切而無不盡也. 若其用力之方, 則或考之事爲之著, 或察之念慮之微, 或求之文字之中, 或索之講論之際, 使於身心性情之德, 人倫日用之常, 以至天地鬼抻之變, 鳥獸草木之宜, 莫不有以見其所當然而自不容已者. 而又從容反覆而日從事乎其間, 以至於一日脫然而貫通焉, 則於天下之理皆有以究其表裏精粗之所極, 而吾之聰明睿知亦皆有以極其心之本體而無不盡矣. 凡此推演, 雖出管窺, 然實皆聖經賢傳之意, 造道人德之方也.
그러므로 신이 또 그들이 남긴 뜻을 모아서 논하기를 “천도가 유행해서 모든 것을 만들어 변화시미고 낳고 자라게 하는데, 소리와 색, 형태와 형상을 지니고서 천지 사이에 가득차 있는 것은 모두 사물[物]입니다. 이미 이 사물이 있으면 이 사물을 이루는 것에도 각각 당연한 법칙이 있고, 사람의 마음에 갖추어져 스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 가운데 지극히 절실하고 가까운 것으로 말하자면 마음이란 사물은 실제로 몸을 주재하는데 그 체에는 인․의․예․지의 성이 있고, 그 용에는 측은․수오․공경․시비의 정이 있습니다. 渾然하게 속에 있으면서 감하는 것에 따라 응하면서도 각각 주재하는 것이 있어 어지러울 수 없습니다. 그 다음 몸이 갖추고 있는 것에는 입․귀․코․눈이란 사지의 용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몸이 접하는 것에는 군신․부자․부부․장유․부부의 오상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반드시 당연한 법칙이 있어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이치[理]’입니다. 밖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르러도 다른 사람의 이치 역시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멀리 사물에 이르러도 사물의 이치도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에서 말하는 ‘강충’이요, 시에서 말하는 ‘병이’이며 유자(劉子)가 말한 천지의 중[天地之中]이요 자사가 말한 ‘천명의 성[天命之性]이요 맹자가 말한 ’인의의 마음[仁義之心]이요 정씨가 말한 천연의 것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중[天然自有之中]이요, 장재가 말한 ‘만물의 한 근원[萬物之一原]이요, 소옹(邵雍)이 말한 '도의 형체[道之形體]’입니다. 다만 그 기질에 청탁․편정의 차이가 있고, 물욕에 천심과 심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 사람과 사물이 서로 차이나고 단절되어서 같을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이치가 같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이 천하의 사물의 이치에 대해 알 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품부의 차이 때문에 그 이치에 혹 궁구하지 못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치에 궁구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앎에 극진하지 못함이 있습니다. 앎에 극진하지 못함이 있으면 그 마음의 발동도 반드시 의리에 순수하지도 못하고, 물욕의 사사사로움과 뒤섞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뜻에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으면 마음에 바르지 못함이 있고, 몸에는 닦이지 못함이 있고,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옛날 성인들은 이런 점을 근심하셨기 때문에 처음 가르칠 때에 소학을 만들어 사람들이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을 익히도록 했기 땜누에 그 덕성을 기르고 잃어버린 마음을 거두는 것이 이미 그 지극함을 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나아가 대학에 이르면 격물치지 운운한 내용도 여기에서 천하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지식을 완성하고, 그것을 두루 통하고 정치하며 절실하게 해서 극치에 이르지 않음이 없기를 바란 것입니다. 힘쓰는 방법과 같은 것은 사건이나 행위의 드러난 것에서 살피기도 하고, 생각과 사려의 미세한 것에서 살피기도 하며, 문자 가운데서 추구하기도 하고 강론하는 사이에서 찾기도 해서, 몸과 마음 성과 정의 덕, 인륜 관계와 일상적인 활동에서 천지와 귀신의 변화와 조수와 초목의 마땅함에 이르기까지 그 당연한 것을 알아서 스스로 그만둠을 용납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 여유있게 반복하면서 날마다 그 사이에 종사해서 어느 하루에 탈연하게 관통하는 데에 이르면 천하의 이치의 이치에 대해 모두 겉과 속, 정치함과 거침의 극칙를 탐구하게 되고, 나의 총명함과 예지 역시 모두 그 마음의 본체를 지극히 발휘하여 극진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렇게 추론하며 넓혀가는 것은 비록 우물 안에서 하늘을 헤아리는[管窺] 격의 제 소견에서 나왔지만, 그러나 실은 모두 성현들의 경전의 뜻이요, 도를 짓고 덕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抑臣聞之, 治古之世, 天下無不學之人, 而王者之子弟, 其敎之爲尤密. 蓋自其爲赤子之時, 而敎已行矣. 及其出就外傅, 則又有小學之學. 及其齒於胄子, 則又有大學之學. 凡所以涵養其本原․開導其知議之具, 已先熟於爲臣爲子之時, 故其內外凝肅, 思慮通明之效, 有以見於君臨天下之日. 所以能秉本執要, 酬酢從容, 取是舍非, 賞善罰惡, 而姦言邪說無足以亂其心術也. 降及後(2-593)世, 敎化不脩, 天下之人例不知學, 而尊且貴者爲尤甚. 蓋幼而不知小學之敎, 故其長也無以進乎大學之道. 凡平日所以涵養其本原, 開導其知識者, 旣已一切鹵莽而無法, 則其一旦居尊而臨下, 決無所恃以應事物之變而制其可否之命. 至此而後, 始欲學於小學, 以爲大學之基, 則已過時而不暇矣. 夫手握天下之圖, 身據兆民之上, 可謂安且榮矣. 而其心乃茫然不知所以御之之述, 使中外小大之臣皆得以肆其欺蔽眩惑於前, 騁其擬議窺覦於後, 是則豈不反爲大危太累而深可畏哉? 然而尙幸有可爲者, 亦曰敬而已矣. 若能於此深思猛省, 痛自策勵, 兼取孟子․程氏之言, 便從今日從事於敬, 以求放心, 則猶可以涵養本原而致其精明, 以爲窮理之本. 伏惟陛下深留聖意, 實下功夫, 不可但崇空言, 以應故事而已也. 臣義切愛君, 不覺煩瀆, 下情無任恐懼懇激之至.
신은 또 들었습니다. 천하가 다스려지던 고대에는 천하에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왕의 자식들은 그 가르침이 더욱 치밀했습니다. 어린아이[赤子]였던 시절부터 가르침은 이미 실행되었습니다. 외보(外傅)에게 나아갈 때가 되면 또 소학이란 학문이 있었고, 주자(胄子)의 나이가 되면 또 대학이란 학문이 있었습니다. 그 본원을 함양하고 그 지식을 열고 인도하는 도구들이 이미 신하가 되고 자식이 되는 시기에 앞서서 성숙했기 때문에 안팎이 응결하여 엄숙하고, 사려가 통하고 분명한 효과가 천하에 군림하는 날에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근본과 요체를 붙잡고서 여유있게 수작하고, 시비를 가리고, 선악에 대해 상벌을 내 리면서도 간사한 말과 사특한 설이 그 심술을 어지럽히기에는 충분치 못했습니다. 후세로 내려와 교화가 닦이지 않고, 천하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배울 줄을 모르는데 높고 귀한 사람은 더욱 심했습니다. 어려서는 소학이란 가르침을 알 지 못하고, 자라서는 대학의 도에 나아가지도 못했습니다. 평일에 그 본원을 함양하고 그 지식을 열어 인도하는 것도 이미 모두다 잡초만 무성한 격으로 법도라고는 없었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존귀한 지위에 올라 아래를 굽어볼 때에 붙잡고서 사물의 변화에 응하고 가부를 제어할 명이라고는 결단코 없었습니다. 여기에 도달한 다음에 비로소 소학을 배워서 대학의 기초로 삼으려 하지만 이미 시기는 지났고 겨를은 없습니다. 손으로 천하를 도모하는 계획을 붙잡고 몸은 뭇 백성들의 위에 있으니 편안하고 영화롭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멍하니 제어할 방법을 알 지 못하고, 조정 안팎의 크고 작은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앞에서는 멋대로 속이고 가리고, 현혹시키게 하고, 뒤에서는 내키는대로 결정하고 의론하고 엿보고 넘보게 하니 이것이 어찌 도리어 크게 위태롭고 크게 누가 되어 깊이 두려워할 것이 아니겟습니까? 그러나 다행이 할만한 것이 남아있으니 또한 ‘공경함’일 뿐입니다. 만일 여기에서 깊이 생각하고 맹명하게 반성해서 통렬하게 스스로 채찍질하고, 맹자와 정씨의 말을 가려서 다시 오늘날 공경함[敬]에 종사함으로써 놓친 마음을 구한다면 오히려 본원을 함양하고 정치함과 밝음을 이루어서 이치를 궁구하는 근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살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유의하시고 실제로 공부에 손쓸 것이요, 단지 헛된 말을 믿고서 고사에 응하는데만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하는 마땅히 절실히 군주를 사랑하는지라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폐하를 번거롭게 모독했습니다. 저[下情]는 지극히 두렵고 간절하고 격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말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臣熹曰: 毋者, 禁止之辭也. 人心本善, 故其所發亦無不善. 但以物欲之私雜乎其間, 是以爲善之意有所不實而爲自欺耳. 能去其欲, 則無自欺而意無不誠矣.
신 주희는 아룁니다. 무(毋)는 금지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선하기 때문에 그 발용[發]하는 것도 역시 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다만, 주관적인 사물로 인한 욕망[物欲之私]이 그 사이에 끼어들면 선을 실행하려는 뜻에도 진실하지 못한 점이 있게되고 스스로 속일 뿐입니다. 그 욕망을 잘 물리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속이지도 않고 뜻은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慊. 故君子必愼其獨也.
마치 나쁜 냄새를 미워하듯,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듯, 이것을 ‘스스로 만족해 한다[自慊]’고 합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된 경우를 삼가는 것입니다.
臣熹曰: 如惡惡臭, 惡之深也. 如好好色, 好之切也. 慊, 快也, 足也. 獨者,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之地也. 好善惡惡, 深切如此, 則是意常快足而無自欺矣. 必愼其獨者, 所以察之於隱微之間, 不使其有物欲之雜而爲自欺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마치 나쁜 냄새를 미워하듯이 미워하는 것은 깊이 미워하는 것이요,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듯이 좋아하는 것은 절실하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겸(慊)은 상쾌하다[快]는 뜻이요, 만족하다[足]는 뜻입니다. ‘홀로 된 경우[獨]’란 남들은 아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이 아는 지경입니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이처럼 깊고 절실하기 때문에 뜻은 언제나 유쾌하고 만족스러워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홀로된 경우를 삼가는 것은 사물로 인한 욕망이 끼어들어 스스로 속이지 않도록 은미한 사이에서 살피는 것입니다.
小人閑居爲不善, 無所(2-594)不至, 見君子而後厭然揜其不善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 然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愼其獨也.
소인이 한가롭게 지낼 때 선하지 못한 행동을 저지르되,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가 군자를 본 다음에는 짐짓 그 선하지 못함을 가리고 그 선함을 드러내려 하지만, 남들이 자기를 보기를 허파나 간을 들여다보는 듯하니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이것을 ‘마음 속에서 정성스러우면 밖으로 구체화된다’고 하니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된 경우를 삼가는 것입니다.
臣熹曰: 閒居, 獨處也. 厭然, 鎖沮閉藏之貌. 小人爲惡於隱微之中, 而詐善於顯明之地, 則自欺之甚也. 然旣實有是思於中, 則其證必見於外, 徒爾自欺而不足以欺人也. 君子之謹獨, 不待監此而後能, 然亦不敢不監此而加勉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한가로이 지낸다[閒居]는 것은 혼자 머무른다는 말입니다. 짐짓[厭然]이란 가로막고 감추는 모양입니다. 소인이 은미한 곳에서는 악을 저지르다가 밝게 드러나는 곳에서 선을 꾸미는 것은 심하게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제는 이런 생각이 마음 속에 있으면 그 증거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한낮 자기 자신만을 속일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을 속이기에는 충분치 못합니다. 군자가 홀로된 경우를 삼가는 것이 이것을 거울삼은 다음에야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거울삼아 노력을 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증자는 말했습니다. 열 개나 되는 눈이 보고 있고, 열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으니 그 엄함이여!
臣熹曰: 言雖幽隱之中, 吾所獨知之地, 而衆所共見, 有如此者, 可畏之甚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비록 어둡고 감춰진 속에서 나 홀로 아는 경지라 할지라도 뭇 사람들이 이처럼 함께 보고 있다는 것은 깊이 두려워할 만한 것임을 말했습니다.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부유함은 집안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하나니, 마음은 넓어지고 몸은 펴집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臣熹曰: 胖, 安舒也. 言富則能潤屋矣, 德則能潤身矣, 故心無愧怍, 則體常舒泰, 德之潤身者然也. 蓋善之實於中而形於外者如此, 又君子之所以不可不謹獨而誠其意也.
신 주희는 아룁니다. 반(胖)은 편안하고 펴진다는 뜻입니다. 부유함은 집안을 윤택하게 할 수 있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몸이 언제나 쭉 펴지고 편안해지는데, 이것은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그런 것임을 말했습니다. 선이 이렇게 마음 속에서 진실해서 밖으로 구체화되는 것은 또 군자가 홀로된 경우를 삼가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臣謹按, 此傳之第六章, 承上章之言, 以釋經文誠意之義者也. 臣又詳說之曰: 民之秉彝本無不善, 故人心之發, 莫不知善之當爲而欲爲之. 惟其氣禀之雜․物欲之私有以害之, 是以爲善之意有所不實而不免爲自欺也. 所謂自欺者, 外有欲善之形, 而其隱微之間常有不欲者以拒乎內也. 外有惡惡之狀, 而其隱微之間常有不惡者以主乎中也. 是以其外雖公而中則私, 其形常是而心則否, 是皆自欺之類也. 所謂誠其意者, 亦禁乎此而已矣. 能禁乎此, 則其心之所發在於好善, 則表裏皆好, 而隱微之間無一毫之不好 : 心之所發在於惡惡, 則表裏皆惡, (2-595)而隱微之間無一毫之不惡. 是以其好善也如好好色, 其惡惡也如惡惡臭, 而方寸之間無有纖芥不快不足之處, 是則所謂自慊而意之誠也. 能自慊而意誠, 則其隱微之間無非善之實者. 君子於此亦致其謹, 而不使一毫之私得以介乎其間而已. 若小人之自欺, 則不惟形於念慮之間, 而必見於事爲之際. 此知其爲惡而揜之, 則旣不足以自欺, 人之視己如見其肺肝, 則又不足以欺人, 亦何益之有哉? 此君子所以又以爲戒而必謹其獨也. 其引曾子之言以下, 則所以明夫隱微之間實有不善, 則人皆知之, 如十目之所同視, 十手之所同指, 無不見之, 甚可畏也. 隱微之間, 實無不善, 則其形於外也亦然. 蓋多財之人其屋必美, 有德之人其身必修, 其心廣大, 則其體必安舒. 此又以著理之必然, 而見君子所以必誠其意之指也. 然考之於經, 則所以能誠其意者, 乃在夫知至. 蓋知無不至, 則其於是非得失皆有以剖析於毫釐之間, 而心之所發必無外善內惡之弊. 所以有主於中, 有地可據, 而致謹於隱微之間也. 若知有不至, 則其不至之處惡必藏焉, 以爲自欺之主, 雖欲致其謹獨之功, 亦且無主之能爲而無地之可據矣. 此又傳文之所未發, 而其理已具於經者, 皆不可以不察也. 然猶爲衆人言之耳. 若夫人君, 則以一身託乎兆民之上, 念慮之間一有不實, 不惟天下之人皆得以議其後, 而禍亂乘之, (2-596)又將有不可遏者. 其爲可畏, 又不止於十目所視․十手所指而已. 願陛下於此深加省察, 實用功夫, 則天下幸甚!如其不然, 則今日區區之講讀, 亦徒爲觀聽之美而已, 何益於治道有無之實, 以窒夫禍亂之原哉?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것은 전의 6장으로 윗 장의 말을 이어 경문의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의미를 풀이했습니다. 신은 또 자세히 말하기를 “백성들의 떳떳한 본성은 선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인심의 발동은 선의 마땅히 실행해야 함을 알아 실행하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습니다. 오직 그 기의 품부가 뒤섞이고 물욕의 사사로움이 해치기 때문에 선을 실행하려는 뜻에 진실하지 못함이 있어서 스스로를 속이는 지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인다’는 말은 밖으로는 선을 바라는 모양이 있지만, 그 은미한 사이에는 언제나 원치 않는 마음이 안에서 가로막고 있고, 밖으로는 악을 미워하는 형상이지만 그 은미한 사이에는 항상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속에서 주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밖으로는 비록 공평하지만 안으로는 사사롭고, 그 형상은 언제나 옳은 것 같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 이들이 모두 스스로 속이는 부류입니다.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것은 역시 이것을 금지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금지할 수 있다면 그 마음의 발출은 선을 좋아함에 있으면 안팎이 모두 좋아하게 되고 은미한 곳에도 조금도 좋아하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또 마음의 발출이 악을 미워함에 있으면 안팎이 모두 미워해서 은미한 곳에서도 조금도 미워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선을 좋아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듯이 하고, 그 악을 미워함은 나쁜 냄새를 미워하듯이 해서 마음 속에 조금치의 불쾌함이나 불만족스러움이 없는 이곳을 스스로 만족해하고 뜻이 정성스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족해서 뜻이 정성스럽다면 그 은미한 곳도 선의 진실함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군자가 이곳에서도 그 삼감을 지극하게 이루어서 조금의 사욕조차 그 사이에 개입되는 일이 없게 만들 뿐입니다. 소인이 자기를 속이는 경우에는 염려하는 사이에 구체화될 뿐 아니라 반드시 일과 행위의 틈새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은 그의 악함을 알고서 가리려 하면 이미 자기를 속이기에도 충분치 못할 뿐 아니라 사람이 자기를 보는 것이 마치 간이나 폐를 들여다 보는 것 같으니 다른 사람을 속이기에는 더욱 부족하니 또 어떤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군자가 또 경계하면서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증자의 말을 인용한 아래의 문장들은 은미한 곳에 실제로 선하지 못함이 있으면 마치 열 개의 눈이 함께 보는 것처럼, 열 손이 함께 가르키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보지 못하는 이가 없으니 매우 두려워 할 만 하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은미한 곳에 실제로 선하지 않음이 없으면 밖으로 구체화되는 것도 역시 그렇습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은 그 집안이 반드시 아름답고 덕이 있는 사람은 그 몸이 반드시 닦이니, 그 마음이 넓고 크면 그 몸은 반드시 편하고 여유롭게 펴집니다. 이것은 또 이치의 반드시 그러함을 드러내어서 군자가 반드시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는 뜻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경을 살펴보면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앎이 지극함[知至]에 있습니다. 앎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으면 시비와 득실에 대해 모두 조그만한 틈조차 분석해내어서 마음의 발용이 반드시 밖은 선하지만 안은 악한 폐단이 없게 됩니다. 때문에 마음 속에 주재가 있고 근거할 만한 지경이 있어서 은미한 곳에서도 삼감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만일 앎에 지극하지 못함이 있으면 그 지극하지 못한 곳에는 반드시 악이 잠복하게 되어 스스로 속이는 주체가 됩니다. 비록 홀로를 삼가는 공부를 이루려고 하여도 잘 해낼 수 잇는 주체도 없고 근거할 지경도 없게 됩니다. 이것은 전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이지만 그 이치는 이미 경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모두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또 일반인을 위해서 말했을 뿐입니다. 군주라면 한 몸을 억조창새의 위에 의탁하고 있어서, 염려하는 사이에 하나라도 진실하지 못함이 있으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뒤에 의론할 뿐 아니라 재앙과 난리가 편승해서 장차 막을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그 두려워 할 점은 열 눈이 보고, 열 손이 가리킨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여기에 대해서 깊히 성찰하시어 실제로 공부에 힘쓰신다면 천하를 위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제가 읽고 강론한 내용 역시 한낮 보고 듣기에나 좋은 허울에 불과할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의 실재 여부와 재앙과 난리의 근원을 막는데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조묘에 관해 논한 장계(그림 포함) (2-597)祧廟議狀(幷圖)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 윤10월 6일 조청랑(朝請郞)․환장각대제 겸시강 ․겸실록원동수찬의 신분으로 영종에게 올린 차자이다. 당시 세상을 떠난 효종의 장례가 끝나고 태묘에 효종의 신주를 부묘할 때가 되자, 새로운 신주를 들이는 것에 맞추어 태묘에 안치된 역대 신주의 배치를 조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예관들의 의견은 희조(僖祖: 송태조 조광윤의 고조인 趙眺에게 추증된 시호)와 선조(宣祖: 조광윤의 부친인 趙弘殷에게 추증된 시호)의 신주를 조묘로 옮기자는 것이었는데 반해, 당시 환장각대제였던 주자는 이 글을 통해 그 부당성을 네 가지에 걸쳐 지적하면서 자신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 나타난 주자의 주장과 관련된 묘제(廟制), 조묘 및 협제(祫祭), 체제(褅祭) 등의 제법(祭法)에 관한 주자의 상세한 의론은 중용혹문 18장, 19장 부분에 서술된 내용과 대전․권69 ‘褅祫議’를 참조하기 바란다. 특히 소(昭)와 목(穆), 천자의 7묘제에 대한 위현성(韋玄成)과 유흠(劉歆)의 설명의 차이, 체제와 협제의 의미와 의의 등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한원진의 주자언론동이고 권5 ‘禮’ 부분에서도 이 문제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한원진의 결론을 인용하자면, 「조묘의장」은 효종의 부묘라는 일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장을 담고있는 글이므로, 주자의 묘제 자체에 대한 정론은 ‘조묘의장’이 아니라, 중용혹문과 「체협의」를 통해 파악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