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눌제 박상

황성 2024. 10. 15. 15:36

通政大夫羅州牧使 贈吏曹判書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舘事諡文簡朴先生訥齋神道碑銘 并序

 

訥齋朴先生以嘉靖庚寅四月十一日終距今爲三百三十年墓無顯刻搢紳處士莫不嗟歎曰先生之賢何待碑而顯惟載烈象容自古及今未之或改也且尹橘亭衢所撰行狀卽成於易簀翌年已載於先生文集而迄未乞言於作者後人之責也十一代孫鼎休庸是憂懼又裒稡遺事之散出者倣年譜規例屬筆於余余辭之不獲就其狀譜所錄謹爲序次焉

朴氏祖於新羅而有高麗副正英. 系忠州副正以後, 傳五世, 至之誠贈民部尙書是生世梁都僉議事光理民部議郞三爲開城小尹以淸直名世蘇郡事贈判書智興進士贈左贊成卽先生之高曾祖禰也前妣羅州鄭氏監司耕之女繼妣桂城徐氏生員宗夏之女擧三男長禎生員號荷村力學篤行佔畢齋金文簡公曰眞廊廟器也早世. 季祐留守以興起斯文爲己任以子淳貴贈領相號六峯. 卽先生也

諱祥字昌世贊成公自懷德遷于光州徐夫人感異夢而生先生於成化甲午五月十八日生而神氣英爽異於凡兒少從伯氏學强記過人稍長能自劬學文詞日進丙辰捷司馬辛酉登第爲校書正字博士承文校檢侍講司書等職乙丑出爲全羅都事丙寅杖殺昏朝嬖人于錦城舘幾不得免禍中廟反正旋授司諫院獻納論戚里越資之罪會當考試之役辭以旣不能盡所職不敢承膺上命下于理太學生上書訟之宰相亦交救得觧而凡有彈論無所避謇然有直聲

執政惡之出補韓山郡守銓曹舊規不得擅擬臺諫於外官適有擧劾者改授內職以親老乞養得除臨陂縣令莅數年引疾觧歸辛未冬拜弘文修撰校理又陞應教館中疏章必屬先生操紙立就文約義盡未幾以親年益高上疏乞歸養壬申秋拜潭陽府使觀察使以淸謹聞特賜表裏以奬之錄淸白.

乙亥春章敬王后誕元子七日而上賓中壼無主時敬嬪朴氏生福城君嵋而年稍長寵冠後宮覬覦非分朝野憂懼者且半歲矣以灾異求言冲菴金文簡公方宰淳昌郡先生與之議曰元子在襁褓而朴氏寵傾若遵成廟朝故例難爲元子地莫如復立愼氏伸無故廢處之寃明無以妾爲妻之義以全舊恩而防側位之窺也遂合辭抗䟽仍極論三勳臣朴元宗柳順汀成希顔等劫制君父放逐國母之罪言甚痛切䟽入臺諫李荇等請拿鞫上曰此國之大事雖下該曹亦難施行留此䟽於政院命政府六曹弘文館議啓皆以爲承求言之教言雖不中不可罪之上不允禍將不測鄭相國光弼救觧止被徒配之典先生有詩曰

去年秋仲月梁獄訴幽情

萬死投荒塞微軀保聖明

以自述懷丙子夏因旱䟽放復授儀都樂僉諸職荇等皆罷出

先是靜庵趙文正公極論荇等之失又合司請削反正時濫勳自是羣小陰譖陽詆遂搆己卯之禍丁丑春出爲順天府使遭徐夫人喪居廬三載哀毁骨立服闋復拜儀賓經歷繕工監正不就

時衮貞用事神武禍起同時儕流已竄黜無餘先生以義不可緘默具䟽將陳子弟親戚咸以爲䟽雖上無益於事祗增其禍先生喟然而歎遂焚之盖朱夫子遇遯之意也

辛巳春拜尙州牧使換忠州牧使纔經己卯斬伐以學爲諱而金十淸世弼結屋於州境金慕齋安國近居驪江先生經紀講學之所常往來評話發揮性理

時王陽明文字東來不久與十淸見其傳習錄斥之以爲禪學又被衮凶䟽亦不以遭讒自嫌盡心職事道伯又以廉能聞蒙賜表裏秩滿拜司䆃副正

丙戌冬擢重試壯元陞通政階以前在忠州有軍丁漏失罷歸丁亥夏拜羅州牧使己丑夏以痢祟不能視事卽爲輿還淹滯歲餘醫不能良春秋五十有七葬于本州芳荷洞鳳凰山卯坐之原卽前夫人墓右也

先生體不逾中人而慷慨有氣節自少志學不求溫飽立朝以後益自淬礪雖遭棄斥不沮不挫至於乙亥之䟽冒死抗言扶持世道表正人紀其危忠壯氣可以撼山岳而摩星斗是以讜直之名洋溢一世縱未克伸於當時而小人之異己者亦歎服羞愧嗚呼! 此豈勢利之所能移威武之所能屈哉蓋其所養有素學問淵博以資擴充故持身肅整而準繩有截處心莊栗而言笑不妄

其接物也溫然可愛其臨事也凜然不可犯莅官居家終日端坐儼然若齊無偸惰戱豫之色雖庸人傲夫自不覺其起敬而不敢侮狎也其爲詩文亦不樂熟軟力去陳言獨追古作者爲徒正廟所謂奇壯濃郁不失三百篇之遺意者其不以是歟其立朝少居於內而在外者恒多莅民做治綱條法度非無可述而天若假以年使得展施其所成就豈止於此而己乎嗚呼惜哉

英廟己未因百官議擧溫陵復位遣官致祭於先生祠命贈吏曹判書兩館大提學謚文簡博聞多見曰文正直無邪曰簡遂令錄後先生之議雖屈於寁而伸於久豈非天定之能勝人乎

正廟乙卯特許祠版不祧收用祀孫列聖朝崇報之典靡不用極而後来人士景慕不己凡先生杖履所及皆立祠以享之淳昌郡東剛泉議䟽之處亦樹石于臺上而陶菴李文正公縡紀其蹟而系以銘如干遺稿卽先生之弟六峰所編而門人林石川億齡刊行文谷金文忠公蒐輯遺漏厘附重鋟始就完本至此而可無遺憾者矣

配晉陽柳氏縣令宗漢之女有美德淑行先先生二十四年卒墓在先生墓左繼配河東鄭氏生員稅之女葬于鳳凰山西北麓巽坐之原男敏齊府使; 敏中, 進士. 柳氏出敏古監役鄭氏出. 府使子仁壽希壽出進士系, 縣令與高霽峯敬命, 擧義錄勳, 號悔軒內外曾玄以下多不盡錄

嗚呼我朝治教莫盛於中明之世有志之士莫不以洛閩爲凖則先生與靜菴冲菴同德相濟羽翼斯道往往欲堯舜君民

先生與冲菴先進讜議遂被忌克者媒糱其間靜菴力救之迨夫蔑貞身或不免而先生猶超然不怵於禍福此豈非定力所能者邪然則退溪李文純所謂元祐完人河西金文正所謂不待言傳口授而啓發其良心重峯趙文烈所謂力護善人終身被斥尤菴宋文正所謂稟質純慤學識精明立朝風旨聿爲度程等語皆深識先生者而足以發揮於千載矣

由是觀之其學問思辨達于事物紛糾之表以自裕於行藏至其激論讜議隨其當爲而爲之勇往不縮者實根於所學之正世徒以忠直論先生者易見著外之事而未究存中之實者也

銘曰

允矣先生天賦卓穎

瑩如寒玉恬若古井

持身循規簡抗肅整

本之經術造詣精明

發之音族二南性情

進道之闢蚤歲蜚英

及處諫省謇然直聲

與世抵捂低回吏治

曩在乙亥壼極失位

隣有同德壤接淳潭

斥奸聯封琅圅

鋸前鑊後無幾微色

羣凶屭慝羅織孔棘

言雖見斥忠則愈顯

薄譴旋宥趨冗避選

蟲篆忽成神武夜開

打作一網賢俊騈摧

于時遭艱含晦邅迍

遇遯焚藁其奈非辰

連典州府迹以之泯

天不假年遽臯東榮

旣豐其畀胡躓其行

閱禩幾百留章終伸

瞻彼溫寢象設重新

宸感臣忠贈秩節惠

廟不世祧兼卹遺裔

士林虔奉享以俎豆

啓佑後人永垂窮宙

惟此一邱衣履之藏

我銘其隧以詔無疆

 

崇禎紀元四己未季夏上澣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 經筵官宋來熙撰

崇政大夫行吏曹判書判義禁府事兼知 經筵春秋館 實錄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舘事原任 奎章閣直提學侍講院右賓客安東金炳㴤書

 

 

광주 서창동 박상(朴祥) 신도비

 

통정대부 나주목사 증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시문간 박선생 눌재 신도비명 병서(通政大夫羅州牧使贈吏曹判書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舘事諡文簡朴先生訥齋神道碑銘 并序)

 

눌재(訥齋) 박 선생(朴先生)은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411일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지금으로부터 330년 전이다. 묘소에 비석이 없어 진신과 처사들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선생의 어짊이 어찌 비석을 기다려 드러나겠는가. 오직 그 모습 더욱 빛나 예부터 지금까지 혹시라도 바뀌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또 윤귤정(尹橘亭) ()가 지은 행장은 바로 선생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작성하여 이미 선생의 문집에 실렸는데도 아직껏 글을 짓는 이에게 비문을 청하지 않았으니 후인의 책임이다. 11대손 정휴(鼎休)가 이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또 흩어져 있는 유사(遺事)를 모아 연보의 규례를 모방하여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여 그 행장과 연보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삼가 차서를 만들었다.

박씨(朴氏)는 신라(新羅)에서 비롯되었으며 고려 부정(副正) ()에 이르렀다. 세계는 충주 부정 이후 5대를 전해 지성(之誠)에 이르러 민부 상서(民部尙書)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세양(世梁)을 낳았으니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지냈고, 광리(光理)는 민부 의랑(民部議郞)을 지냈으며 세 번 개성 소윤(開城小尹)을 지내 청렴하고 곧은 것으로 세상에 명성이 났다. ()는 군사를 지냈으며 판서에 추증되었고, 지흥(智興)은 진사로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니, 곧 선생의 고조, 증조, 조부, 선고이다. 전비(前妣) 나주 정씨(羅州鄭氏)는 감사 경()의 따님이다. 계배(繼妣) 계성 서씨(桂城徐氏)는 생원 종하(宗夏)의 따님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정()은 생원으로 호는 하촌(荷村)이며 학문에 힘쓰고 독실한 행실이 있었으니, 점필재(佔畢齋) 김 문간공(金文簡公)이 말하기를 진실로 종묘의 그릇이다.”라고 하였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막내 우()는 유수를 지냈으며, 사문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아들 순귀(淳貴)로 인하여 영상에 증직되었다. 호는 육봉(六峯)이다.

세 자식 가운데 중간이 바로 선생이다. 휘는 상()이고, 자는 창세(昌世)이다. 찬성공(贊成公)이 회덕(懷德)에서 광주(光州)로 옮겼다. 서씨(徐氏) 부인이 기이한 꿈을 꾸고, 선생을 성화(成化) 갑오년(1474, 성종5) 518일에 낳았다. 태어날 때부터 신기가 영특하고 빼어나 보통 아이와 달랐다. 어려서부터 백씨(伯氏)와 함께 공부하였는데 기억력이 남달랐고, 조금 자라자 스스로 학문에 힘써 문장이 날로 진보하였다. 병진년(1496, 연산군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신유년(1501, 연산군7)에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박사, 승문원 교검, 시강원 사서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을축년(1505, 연산군11)에 외직으로 나가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지냈고 병인년(1506, 연산군12)에는 혼조에서 총애한 사람을 금성관에서 장살하였는데 화를 면하지 못할 뻔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문득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자 척리(戚里)로 자급을 뛰어넘은 것에 대한 죄를 논하였다. 마침 고시를 담당하게 되자 이미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감히 명에 응하지 않았다. 상이 처벌하라고 명하자 성균관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송사하였고, 재상들 또한 번갈아 가며 구원하여 풀려나게 되었는데, 무릇 탄핵하고 논하는 데 있어 회피하는 적이 없어 강직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집정자가 이를 미워하여 외직인 한산 군수(韓山郡守)에 보임하였다. 전조의 옛 규정에 대간(臺諫)을 외직에 마음대로 의망할 수 없었는데 마침 논핵할 것이 있어 내직에 다시 제수되었다. 부모님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봉양하기를 청하여 임피 현령(臨陂縣令)에 제수되었다. 몇 년을 다스리다가 병을 칭탁하고 돌아왔다. 신미년(1511, 중종6) 겨울에 홍문관 수찬, 교리에 제수되었고 또 응교로 승진하였다. 홍문관의 소장은 반드시 선생에게 맡겼으니, 종이를 잡고 즉시 글을 지을 적에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뜻이 극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부모의 연세가 더욱 많아졌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고향으로 가서 부모를 봉양하기를 청하였다. 임신년(1512) 가을에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관찰사가 청렴하고 근실하다 하여 특별히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장려하였고 청백리에 녹용하였다.

을해년(1515) 봄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원자를 낳았는데 7일 만에 훙서하여 중궁에 주인이 없었다. 이때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복성군(福城君) ()를 낳았고 조금 자라 후궁 가운데에서 가장 총애하자 바라서는 안될 일을 분수에 넘치게 바라 조야가 근심하고 두려워한 지 또한 반년이었다. 가을에 재앙과 이변으로 인하여 구언하였다. 충암(冲菴) 김 문간공(金文簡公)이 당시에 순창군(淳昌郡)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선생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원자가 강보에 있는데 박씨에 대한 총애가 넘치니 만약 성종 때의 옛 규례를 따른다면 원자의 지위가 위태로울 것이다. 신씨(愼氏)를 복위시키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허물도 없이 폐위된 원통함을 펴고, 첩을 처로 삼지 말라는 의가 없음을 밝혀 옛 은혜를 온전히 하고 곁자리에서 엿보는 것을 막아야 한다.”라고 하고, 마침내 합사하여 상소하고 인하여 세 공신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 등이 군부를 겁박하여 국모를 내쫓은 죄를 극론하였는데 말이 매우 통절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대간 이행(李荇) 등이 의금부에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길 이는 나라의 큰일이니 비록 해당 조에 내려 보내더라도 또한 시행하기 어렵다.”라고 하고, 이 상소를 정원에 머물러 두고 정부, 육조, 홍문관에 명하여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모두 구언의 하교를 받든 것이니 비록 말이 적중하지 않더라도 죄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화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정 상국(鄭相國) 광필(光弼)이 구원하여 도배(徒配)하는 형전을 내리는 정도에서 그쳤다. 선생이 시를 지었다.

 

去年秋仲月 지난해 가을 달

梁獄訴幽情 양옥에서 그윽한 정을 하소연하였네

萬死投荒塞 만 번 죽어 황량한 변방에 버려져도

微軀保聖明 미천한 이 몸 성군을 보호하리라

 

이는 스스로의 회포를 술회한 것이다. 병자년(1516) 여름 가뭄으로 인해 석방되었고, 겨울에 다시 의빈부 도사, 장악원 첨정 등의 직에 제수되었다. 이행(李荇) 등은 모두 파면되었다.

이에 앞서 정암(靜庵) 조 문정공(趙文正公)이 이행 등의 잘못을 극론하고 또 합사(合司)하여 인조반정 때 함부로 받은 훈작을 삭탈할 것을 청하였다. 이로부터 소인배들이 음으로 참소하고 양으로 비방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다. 정축년(1517, 중종12) 봄에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나갔다가 겨울에 서씨(徐氏) 부인의 상을 만나 여막에서 삼년 동안 거처하였는데 매우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졌다. 상복을 벗은 뒤에 의빈부 경력, 선공감 정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권력을 휘둘러 신무문(神武門)의 화가 일어나 당시에 벼슬하던 동료들이 이미 귀양 가거나 쫓겨나 남은 이가 없었다. 선생은 의리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 하여 소를 갖추어 장차 진달하려 하니, 자제와 친척들이 모두 상소를 올리더라도 일에 무익하고 다만 그 화를 더할 뿐이다.”라고 하므로 선생이 탄식하고 마침내 불태워 버렸는데, 이는 주부자(朱夫子) 우둔(遇遯)의 뜻을 취한 것이다.

신사년(1521, 중종16) 봄에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제수되고 여름에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전임되었다. 기묘사화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학문을 꺼렸는데 김십청(金十淸) 세필(世弼)이 고을 경계에 집을 지었고, 김모재(金慕齋) 안국(安國)이 가까이 여강(驪江)에 살았기에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는 곳으로 삼고 늘 왕래하며 평론하여 성리의 오묘함을 발휘하였다.

이때 왕양명(王陽明)의 문장이 우리 동방으로 온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십청과 함께 그 전습록(傳習錄)을 보고 선학(禪學)이라 배척하였다. 겨울에 또 남곤이 올린 흉악한 상소의 참소를 만났으나 스스로 인혐하지 않고 맡은바 직무에 정성을 다하였다. 관찰사가 또 청렴하고 능력이 있다고 보고하여 표리를 하사 받았다. 임기가 차자 사도시 부정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526) 겨울 중시에 장원으로 뽑혀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전에 충주 목사로 있을 때 군정에 누락된 것이 있다 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정해년(1527) 여름에 나주 목사에 제수되고 기축년(1529) 여름에 이질에 걸려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즉시 돌아와 한 해 남짓을 머무르며 치료하였지만 효험이 없었으니, 향년 57세였다. 본고을 방하동(芳荷洞) 봉황산(鳳凰山)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바로 전부인의 묘소 오른쪽이다.

선생은 체구가 보통 사람을 넘지 않았으나 강개하여 기절이 있었고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따뜻하거나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아간 뒤에는 더욱 스스로 갈고 닦아 노력하여 비록 버려지고 배척당하더라도 좌절하지 않았다. 을해년(1515)의 소에 이르러 죽음을 무릅쓰고 항언하여 세도를 부지하고 인륜을 바로잡았으니 그 높은 충정과 장대한 기절은 산악을 흔들고 하늘의 별에 닿을 만하였다. 이 때문에 곧은 명성이 한 세상에 넘쳐 비록 당시에 펴지 못하였으나 소인배들이 자기와 다르다 하여 또한 탄복하고 부끄러워하였다. , 이 어찌 세력과 이익으로 능히 움직일 수 있고 위엄과 무력으로 굽히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대개 평소에 수양한 것이 있어 학문이 깊고 넓어 확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므로 몸가짐이 엄숙하고 가지런하여 법도가 있었고 마음가짐이 장엄하여 말하고 웃는 것이 망령되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따뜻하여 사랑스러웠으며 일에 임할 적에는 늠름하여 범할 수 없었다. 관직에 있거나 집에 있거나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엄연히 재계하는 듯하여 나태하거나 안일한 기색이 없었으므로 용렬한 사람이나 오만한 지아비라도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나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였다. 그 시문 또한 익숙하고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힘써 진부한 말을 제거하고 홀로 옛 작자를 스승으로 삼으니 정조가 이른바 기이하고 장엄하며 농욱하여 시경의 남은 뜻을 잃지 않았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출사하여서는 내직에 있는 것이 적고 외직에 있는 것이 항상 많았는데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강령과 법도가 서술할 만한 것이 없지 않으나 하늘이 만약 수명을 빌려주어 뜻을 펼 수 있게 하였다면 그 성취한 바가 어찌 여기에서 그쳤겠는가. , 애석하다.

영조(英祖) 기미년(1739, 영조15) 백관의 의논에 따라 온릉(溫陵)을 복위시키고 관원을 보내 선생의 사당에 치제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조 판서, 양관 대제학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으니, 널리 듣고 많이 봄을 문()이라 하고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음을 간()이라 한다. 마침내 후손을 녹용하게 하였다. 선생의 의논이 비록 잠시 굽혔지만 오래도록 펴졌으니 어찌 천리가 정해지면 흉포한 무리를 멸망시키는 것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정조 을묘년(1795, 정조19)에 특별히 사판을 부조(不祧)토록 허락하고 사손(祀孫)을 수용하였으며 열성조에서 융숭하게 보답한 전례를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고 후대 인사들이 경모하기를 그치지 않아 무릇 선생의 발자취가 미친 곳에는 모두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다. 순창군(淳昌郡) 동강천(東剛泉) 의소(議䟽)하던 곳에 또한 대 위에 비석을 세웠는데 도암(陶菴) 이 문정공(李文正公) ()가 그 자취를 기록하고 명을 붙였다. 약간의 유고는 곧 선생의 아우 육봉(六峰)이 편찬한 것으로 문인 임석천(林石川) 억령(億齡)이 간행하고, 문곡(文谷) 김문충공(金文忠公)이 누락된 것을 수집하여 거듭 인쇄하여 비로소 완본을 이루었으니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다.

배위 진양 유씨(晉陽柳氏)는 현령 종한(宗漢)의 따님이다. 미덕과 숙행이 있었으며 선생보다 24년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묘소는 선생의 묘소 왼쪽에 있다. 계배(繼配)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생원 열()의 따님으로 봉황산(鳳凰山) 서북쪽 기슭 손좌(巽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 민제(敏齊)는 부사이고, 민중(敏中)은 진사로 유씨(柳氏)의 소생이다. 민고(敏古)는 감역으로 정씨의 소생이다. 부사의 아들은 인수(仁壽), 희수(希壽)이니, 희수는 진사의 양자로 갔으며, 현령을 지냈다. 고제봉(高霽峯) 경명(敬命)과 의병을 일으켜 녹훈되었다. 호는 회헌(悔軒)이다. 내외 증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 우리 조선의 치교는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때보다 더 성대한 적이 없으니, 뜻이 있는 선비들은 낙민(洛閩)을 표준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생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충암(靜菴 김정(金淨))과 더불어 덕을 같이하고 서로 도와 우리 유학의 도를 도와 왕왕 요순군민(堯舜君民)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선생은 충암과 더불어 올곧은 논의를 진달하였다가 마침내 시기하는 자들에게 모함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정암이 힘써 구원하였다. 정도가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러 혹 화를 면하지 못하였지만 선생은 오히려 초연히 화복에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굳게 정하고 동요되지 않는 힘이 발휘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퇴계(退溪) 이문순(李文純)의 이른바 원우 완인(元祐完人)’이라고 한 말, 하서(河西) 김문정(金文正)이 이른바 말로 전하여 구술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그 양심을 계발하였다.’라고 한 말, 중봉(重峯) 조문열(趙文烈)이 이른바 선인(善人)을 힘써 보호하다가 종신토록 배척을 받았다.’라고 한 말, 우암(尤菴) 송문정(宋文正)이 이른바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학식이 정명하여 조정에서의 풍채(風采)와 의지(意志)가 마침내 본보기가 되었다.’라고 한 말 등은 모두 선생을 깊이 안 것으로 족히 천 년에 드러낼 만하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그 학문과 사변은 어지러운 사물의 밖으로 벗어나 행장(行藏)에 스스로 넉넉하였고, 그 격론과 곧은 의논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따라 하여 용맹스럽게 가고 위축되지 않은 것은 실로 배운 바의 바름에 근본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한갓 충직으로만 선생을 논하는 자가 밖으로 드러난 일은 쉽게 보나 마음속에 있는 실상은 연구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允矣先生 진실로 선생은

天賦卓穎 천부적으로 탁월하고 빼어났네

瑩如寒玉 차가운 옥처럼 맑고 투명하며

恬若古井 고요한 우물처럼 편안하였네

持身循規 몸가짐은 법도를 따랐고

簡抗肅整 간결하고 꼿꼿하며 엄숙하고 가지런하였네

本之經術 경술에 근본하여

造詣精明 정명한 경지에 이르렀네

發之音族 음악에 발휘하였으니

二南性情 이남의 성정을 갖추었네

進道之闢 도에 나아가는 길을 열었으니

蚤歲蜚英 젊은 나이에 영재로 드러났네

及處諫省 사간원의 직임을 맡았을 적에

謇然直聲 강직하게 곧은 명성이 있었네

與世抵捂 세상 사람들과는 달랐으니

低回吏治 아전의 다스림 기를 펴지 못했네

曩在乙亥 예전 을해년에

壼極失位 중궁이 지위를 잃었네

隣有同德 이웃에 같은 덕을 지닌 이 있어

壤接淳潭 순창(淳昌)과 담양(潭陽)이 경계를 접하였네

斥奸 강상을 부지하고 간사한 자를 배척하였으니

聯封琅圅 연명으로 소장을 올렸네

鋸前鑊後 끓는 가마가 앞에 놓여 있으며 톱이 뒤에 설치되었지만

無幾微色 놀라는 기색이 없었네

羣凶屭慝 여러 흉악한 자들이

羅織孔棘 무함함이 매우 심하였네

言雖見斥 말이 비록 배척을 당하였으나

忠則愈顯 충성은 더욱 드러났네

薄譴旋宥 가벼운 견책을 입고 곧 용서받아

趨冗避選 쓸모없는 곳으로 달려가 피선하였네

蟲篆忽成 별안간 벌레가 글자를 형성하였으니

神武夜開 밤중에 궐문이 열렸네

打作一網 한 그물을 만들었으니

賢俊騈摧 현준이 차례로 목숨을 잃었네

于時遭艱 이때 어려움을 만나

含晦邅迍 덕을 감추고 머뭇거렸네

遇遯焚藁 올리려고 써 놓았던 상소문을 불태웠으니

其奈非辰 때가 좋지 않은 것 어찌하랴

連典州府 주와 부를 연이어 맡았으나

迹以之泯 자취가 이로써 사라졌네

天不假年 하늘이 수명을 빌려주지 않아

遽臯東榮 갑자기 동영으로 혼이 올랐네

旣豐其畀 이미 그 주신 것이 풍성하니

胡躓其行 어찌 그 행적을 없애랴

閱禩幾百 기백 년을 제사 지내니

留章終伸 남긴 소장 결국 펼치지네

瞻彼溫寢 저 온침을 보니

象設重新 상이 새롭게 설치되었네

宸感臣忠 임금이 신하의 충성에 감동하여

贈秩節惠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네

廟不世祧 사당은 대대로 옮기지 않고

兼卹遺裔 아울러 후손을 돌보아주셨네

士林虔奉 사림이 경건하게 받들어

享以俎豆 제물을 마련하여 제향하네

啓佑後人 후인들을 인도해 도와주시어

永垂窮宙 영원히 무궁한 우주에 드리우네

惟此一邱 오직 이 한 언덕

衣履之藏 선생의 옷과 신이 묻힌 곳일세

我銘其隧 내가 그 묘도에 명을 지어

以詔無疆 무궁한 후대에 알리노라

 

숭정(崇禎) 기원후 후 네 번째 기미년(1859) 계하(季夏) 상한(上澣)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성균관좨주 경연관(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經筵官) 송내희(宋來熙)가 찬하다

숭정대부 행이조판서 판의금부사 겸지경연 춘추관실록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원임규장각직제학 시강원우빈객(崇政大夫行吏曹判書判義禁府事兼知經筵春秋館實錄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舘事原任奎章閣直提學侍講院右賓客) 안동(安東) 김병주(金炳㴤)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