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문초/한문공문초 권지15

전중시어사이군묘지명

황성 2013. 1. 15. 14:52

 

殿中侍御史李君墓誌銘


殿中侍御史李君 名虚中 字常容 其十一世祖沖 貴顯拓拔世 父惲 河南温縣尉 娶陳留太守薛江童女 生六子 君最後生 愛於其父母 年少長 喜學 學無所不通 最深於五行書 以人之始生年、月日、所直日辰支干 相生勝、衰死王相, 斟酌推人夀夭貴賤利不利, 輙先處其年時, 百不失一二. 其説汪洋奥美, 關節開解, 萬端千緒, 參錯重出, 學者就傳其法, 初若可取, 卒然失之, 星官歴翁, 莫能與其挍得失. 進士及第, 試書判入等, 補袐書正字 母喪 去官卒喪 選補太子挍書. 河南尹奏疏 授伊闕尉 佐水陸運事 故宰相鄭公餘慶繼尹河南 以公為運佐如初 宰相武公元衡之出劔南 奏奪為觀察推官 授監察御史 未㡬 御史臺疏言行能髙 不冝用外府 即詔為真御史 半歳分部東都臺 遷殿中侍御史 元和八年四月 詔徴既至 宰相欲白以為起居舍人 經一月 疽發背 六月乙酉卒 年五十二 其年十月戊申 葬河南洛陽縣 距其祖澠池令府君僑墓十里 君昆弟六人 先君而没者四人 其一人嘗為鄭之滎澤尉 信道士長生不死之説 既去官 絶不營人事 故四門之寡妻孤孩與滎澤之妻子衣食百須 皆由君出 自初為伊闕尉佐河南水陸運使 換兩使經七年不去 所以為供給教養者 及由蜀來輩類御史 皆樂在朝廷進取 君獨念寡稚 求分司東出 嗚呼其仁哉 君亦好道士説 於蜀得秘方 能以水銀為黄金 服之冀果不死 將疾 謂其友衛中行大受、韓愈退之 曰: “吾夢大山裂, 流出赤黄物如金.” 左人曰是所謂大還者, 今三矣. 君既没愈 追占其夢 曰山者艮, 艮為背, 裂而流赤黄, 疽象也. 大還者, 大歸也, 其告之矣. 妻范陽盧氏, 鄭滑節度使兼御史大夫羣之女, 與君合徳, 親戚無一退言, 男三人, 長曰初, 恊律. 次曰彪, 其幼曰還, 適三歳. 女子九人.

銘曰

不贏其躬

以尚其後人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이 군(李君)은 이름이 허중(虛中)이고 자는 상용(常容)이다. 그의 11세 조 이충(李沖)은 탁발씨(拓拔氏)1)의 시대에 귀하고 현달하였다. 아버지 이운(李惲)은 하남 온현위(温縣尉)이니, 진류 태수(陳留太守) 설강동(薛江童)의 딸에게 장가들어 6아들을 낳았다. 군이 막내로 태어나 그의 부모에게 사랑을 받았다. 점점 장성하여 학문을 좋아하여 통달하지 않는 학문이 없었는데, 가장 오행서(五行書)에 깊게 공부하여 사람의 생년월일과 만난 일진의 간지, 상생상극과 쇠사(衰死) 왕상(王相)을 가지고 짐작하여 남의 수명과 요절 귀함과 천함, 이로움과 불리함을 미루어 문득 먼저 그 해와 시기를 살폈는데 백이라면 그 가운데 한둘도 실수하지 않았다. 그의 학설은 넓고 심오하여 관절(關節)을 분석하여 천가지 만가지 실마리가 섞여 나오고 거듭나오니, 학자들이 나아가 그 법을 전수받으면 처음에는 마치 취할 만한 듯하다가 끝내는 잃어버렸으니, 성관(星官)과 역옹(歴翁)이 능히 그와 더불어 득실을 따질 수 없었다. 진사로 급제하여 서판(書判)에 시험을 보아서 등급에 들어가 비서정자(袐書正字)에 보임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례를 마치고 태자교서(太子挍書)에 선발되어 보임되었다. 하남 윤(河南尹)이 주소(奏疏)하여 이궐위(伊闕尉)에 제수하여 수륙운사(水陸運事)에 제수되었다. 고(故) 재상 정공 여경(鄭公餘慶)이 이어서 하남 윤이 되었는데, 공을 처음처럼 전운사의 막좌로 삼았다. 재상 무공 원형(武公元衡)이 검남(劔南)으로 나가서 황제에게 아뢰어 빼앗아 관찰추관(觀察推官)으로 삼아 감찰어사에 제수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사대(御史臺)에서 상소하여 말과 행실이 능하고 고상하여 외부(外府)에 등용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니, 즉시 조서하여 참 어사(御史)로 삼았다. 반년에 동도대(東都臺)에서 근무하여 전중시어사로 승진하였다. 원화(元和) 8년 4월에 조서로 불렀는데 이미 이르자 재상이 아뢰어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1달 뒤에 등창이 발병하여 6월 을유일에 죽으니, 나이 52세였다. 그 해 10월 무신에 하남(河南) 낙양현(洛陽縣)에 장사지냈는데, 그 조부 민지령(澠池令) 부군(府君) 교(僑)의 묘지와 10리 거리이다. 군의 형제 6인인데 군보다 먼저 죽은 자가 4인이었고, 그 한 사람은 정주의 형택위(滎澤尉)가 되었는데, 도사의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설을 믿어서 관직을 떠나서는 전혀 인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네 집안의 과부와 어린아이, 형택의 처자가 의식주등 모든 필요한 물품은 모두 군에게서 나왔다. 처음 이궐위가 되어 하남 수륙운사의 막좌가 됨으로부터 두 전운사가 바뀌도록 7년 동안 떠나지 않은 것은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고 교육시키기 위한 까닭이었다. 촉주에서 오면 동배 어사들은 모두 조정에서 출세하는 것에 즐거움이 있었지만 군은 홀로 과부와 어린아이를 염려하여 분사(分司)를 구하여 동쪽으로 나갔다. 아, 인하구나. 군도 도사설을 좋아하여 촉주에서 비방(秘方)을 얻어 수은을 가지고 황금을 잘 만들었는데, 복용하여 죽지 않기를 바랬다. 장차 질병을 앓아 그 벗 위 중행 대수(衛中行大受)、한유 퇴지(韓愈退之)에게 말하기를, “내 꿈을 꾸었는데 큰 산이 갈라져 황금 같은 적황물(赤黄物)이 흘러나왔다.”라고 하니, 곁에 있는 사람이 이것은 이른 바 대환(大還)이라는 것이 지금 3년이 되었다. 근이 죽고 난 뒤에 한유가 뒤미쳐 그 꿈을 해몽하여 말하길, “산은 간(艮)이고 간(艮)은 배(背)가 된다. 찢어져서 황금이 나온 것은 등창의 형상이고 대환(大還)이라는 것은 죽는 것이다.[大歸]”라고 고한다. 처는 범양 노씨니 정활 절도사(鄭滑節度使)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군(羣)의 딸이다. 군과 덕이합치하여 친척이 한 번도 말을 물리지 않았다. 아들은 3인이니 장자는 초(初)이니 직위는 협진(恊律)이고, 차남은 표(彪)이고 어린 아이는 환(還)이니, 현재 3세이다. 딸은 9인이다.

명이 이르기를,

그 자신은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그 후손을 오래 살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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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탁발씨(拓拔氏) : 북위(北魏)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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