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용어정리

궐외각사 위치

황성 2012. 9. 5. 13:52

<궐외각사 위치> - <<漢京識略>> 의 내용-


* 기로소(耆老所) :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다. 태조는 춘추 60세, 숙종은 59세, 영조는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갔다. 왕이 친필로 제명(題名)한 어첩은 영수각(靈壽閣)에 봉안하며 조정 신하로서는 문관으로 2품 이상이고 70세가 되어야 기로소에 들어가게 된다.


* 종친부(宗親府) : 북부 관광방(觀光坊)에 있다.


* 의정부(議政府) : 북부 관광방에 있다.


* 충훈부(忠勳府) : 북부 관인방(寬仁防)에 있다. 모든 공신(功臣)들이 모이는 관청이다. 운대(雲臺), 인각(麟閣), 맹부(盟府)라고도 한다.


* 의빈부(儀賓府) : 북부 광화방에 있다. 예전에는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있던 것을 연산 10년에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중종 11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 돈녕부(敦寧府) : 중부 정선방에 있다.


* 비변사(備邊司) : 중부 정선방에 있다. 비국(備局) 또는 주사(籌司)라고도 한다. 창덕궁 밖 서편에 있고, 마루 현판을 비궁당(匪躬堂)이라 한다. 비변사 도제조는 즉 당시 원임대신이 겸임한다. 인조 2년에 유사 당상을 두었고, 숙종 39년에 처음으로 팔도 구관 당상 각 1원씩을 두기로 하였다. 비변사에는 무관 낭청 8명이 있어서 매일 공사문서를 커다란 기름 절인 큰 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병조의 역마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여러 비국 당상이 있는 곳에 가서 보이고 결재를 청하였다.


* 선혜청(宣惠廳) : 서부 양생방에 있다. 대동의 쌀, 목, 돈의 출납을 관장한다. 광해 초년에 처음 설치하였다. 선조 41년 좌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대동법을 만들어 고을마다 별도로 특산물을 내지 않고 조세의 부가세 명목 같은 것으로 쌀을 받아서 서울에서 공물을 사서 바치게 하였다. 경기도부터 시작하였고 선혜청을 두게 하며 강원도에도 시행하였다. 효종 때 우의정 김육이 건의하여 충청도와 전라도의 연해읍부터 시행하게 하고, 현종 때 형조 판서 김좌명이 계청해서 일반 고을까지 시행했고, 숙종 때는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경상도에 황해 감사 이언경이 황해도에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대동법이란 경기도와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남을 꼭같이 전답 1결(結 벼 백짐지기)에 쌀 12두씩을 거두었다. 강원도도 같았으나 토지를 측량하지 못한 곳에는 4두씩을 더 받고 함경도도 2두씩을 더 받고 함경도도 2두씩을 더받고 황해도에는 상정법(詳定法)이라 하여 15두씩 거두고 통틀어서 대동법이라 하였다. 옛날 각 고을에서 그 고을의 특산물을 나라에 진공하던 것을 모두 서울에서 사서 바치도록 하고, 경공주인(京貢主人)이란 것을 정해 두고 전에 바치던 물건을 사서 바치게 하고 쓰고 남는 것이 있으면 각기 그 고을에 쌓아 두고 저치미(儲置米)라 해서 공용(公用)에 보태 쓰도록 했다.


* 균역청(均役廳) : 남부 주자동(鑄字洞)에 있다. 즉 옛날 수어청(守禦廳)이었다. 영종 26년에 설치했다가 29년에 선혜청과 합쳤다. 균역청 설치한 것을 상고해 보면 어염선세(漁鹽船稅)와 선무군관(選武軍官)과 은여결(隱餘結 장부에 들지 않은 토지세)들을 받아들인 것이 합해서 십 수만 냥이 되었고, 또 함경과 평안 양도를 제외한 삼남 육도의 토지 1결마다 쌀 2두나  혹은 돈 5전을 거두어서 지출한 부족액을 충당해서 겨우 될락말락하였다. 영조 29년에는 또 상진청(常賑廳 재해가 있을 때 구휼하는 기관)과 합치고 이 소속으로 별하고(別下庫)를 두었다.


* 준천사(濬川司) : 중부 장통방(長通坊)에 있다. 도성 안에 있는 개천이나 도랑들이 막히고 찬 것을 준설(濬渫)하는 것을 관장했다. 영조 36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 의금부(義禁府) : 중부 견평방(堅平方)에 있다. 그 아문의 대청을 호두각(虎頭閣)이라 한다. 당직청이 창덕궁 금호문 밖에 있고, 도사(都事) 1원이 제일 하위로 와서 당직하는데 모든 수금(囚禁), 체포한 일이 있으면 꼭 당직도사를 불러서 명령을 시킨다.


* 이조(吏曹) :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다. 그 소속으로 문선사(文選司), 고훈사(考勳司), 고공사(考功司)의 세 관청이 있다.


* 호조(戶曹) : 중부 징청방에 있다. 그 소속으로 판적사, 회계사, 경비사의 세 관청이 있다. 경비사는 현재 별례방이라고 한다. 또 전례방이 있어 제향, 공상, 사행방물, 예장(禮葬) 등속을 관계하고, 판별방은 무시로 특별한 물건을 사 들이는 것을 관계하고, 별영색은 훈국의 군병들에게 내어 주는 식료(食料)를 관계하고, 별고색(別庫色)은 공물을 바치고 쓰는 것을 관계하고, 세폐색(歲幣色)은 절사(節使)의 폐백을 관계하고, 응판색은 오는 사신들의 지출과 결비를 관계하고, 금은색(金銀色)은 금과 은을 맡아 본다.


* 분호조(分戶曹) : 남부 회현방(會賢坊)에 있다. 광해 원년에 처음 설치하였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마다 호조가 여기에서 임시사무를 본다. 분호조는 남별영 옆에 있었는데 광해 때 국고와 조세가 날로 줄어 들어서 대소의 경비를 번번히 임시해서 시민(市民)에게 부담을 시켰다. 중국 사신 유태감(劉太監)이 올 때 상신 이항복, 이덕형이 처음으로 분호조를 설치하여 사신에게 지출하고 공급할 물건을 미리 준비해서 쓰도록 하니 시민들이 걱정을 덜어서 칭송했다.


* 예조(禮曹) : 서부 적선방에 있다. 그 소속으로 계제사(稽制司), 전향사(典享司), 전객사(典客司)의 세 관청이 있다. <<문헌비고>>를 보면 대비(大比 3년마다 보는 과거)의 과거를 예조와 성균관에서 시행하므로 예조를 일소(一所), 성균관을 이소(二所)라 한다.

* 병조(兵曹) : 서부 적선방에 있다. 무인들의 임명권과 뽑는 것이며, 문호(門戶)의 열고 닫는 정사를 관장한다. 그 소속으로 무선사, 승여사(乘輿司), 무비사 세 관청이 있다. 현재로 통행(通行)하기는 팔색(八色)이 있다. 정색(政色)은 무선사이며, 결속색은 즉 승여사인데 궐내에서나 왕의 행차 때 금훤(禁喧)을 맡았으며, 일군색은 즉 무비사인데 용호영과 호련대의 내취보의 보포(保布)를 거두어서 장교와 군병들의 매삭 지급하는 식료를 맡았으며, 군색는 개병과 보병들의 보포를 맡아서 궐 안팎의 각 관청 원역의 고립(雇立)하는 삭포(朔布)를 공급하며, 도안청은 기병들을 1년에 6차식 나누어서 신포(身布)를 거두어 제향, 군계(軍契), 공가(貢價)의 수용하는 경비를 맡았으며, 유청색은 여정색(餘丁色)이라고도 한다. 인조 5년에 정원 이외의 병정을 찾아서 군적에 보충하고 남은 군정은 병조에 소속시켰다. 그 뒤로 정액(定額)에서 줄인 병정과 무관으로 무강(武講)에 낙제된 남은 군정은 비변사에서 병조로 옮겨 보냈다. 보충대라는 것은 공천, 사천으로 면천(免賤)하고 이전의 병역(兵役)이 없는 자로 충당하고, 낙강군은 교생(敎生)이나 원생(院生)을 강의에 낙제 된 사람에게 포(布)를 거두어조 조예(皂隸)들의 매삭 경비로 충당한다.


* 형조(刑曹) : 서부 적선방에 있다. 그 소속에 상복사(詳覆司 사형 죄인에게 세 번이나 자세하게 조사하는 제도), 고율사(考律司 법률의 적부 심사하는 것), 장금사(掌禁司 죄수 처리에 위법 여부를 살피는 것), 장예사(掌隸司 노비 부로들의 명부를 맡는 것)의 네 관청이 있고 이 네 관청 안에 또 2방(旁)에 각색이 있어서 형방과 합하면 9방이 된다.


* 공조(工曹) : 서부 적선방에 있다. 산택, 공장, 영선, 도야의 정사를 관장한다. 그 소속으로 영조사(營造司), 공야사(公冶司), 산택사의 세 관청이 있다. -이상의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는 모두 경복궁 광화문 밖에 있었다.


* 한성부(漢城府) : 중부 징청방에 있다. 서울 도성의 호구(戶口)와 장부와 시전(市廛), 가사(家舍), 토지, 사산(四山), 도로, 교량, 구거(溝渠), 포흠, 부채, 투구(鬪毆), 주순(晝巡), 검시(檢屍), 차량, 고실우마, 낙계(烙契) 등 정사를 관장한다.


* 사헌부(司憲府) : 서부 적선방에 있다. 백부(栢府), 상대(霜臺)라고도 한다. 시정(時政)을 비판하고 백관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루고 억울한 일을 바루어 주며, 과람(過濫)한 일과 사기 등의 일을 금지하는 것을 관장한다. 사헌부의 조예(皂隸)와 각 소유(所由 일을 맡아 보는 하인)들이 합해서 33명이나 되었다. 검은 포목으로 만든 한쪽 소매옷을 입고 검은 베로 만든 뽀족한 건(巾)을 쓰고 전포(煎布)를 건의 양쪽에 달았다. 이것은 풍문(風聞)을 찾는다는 뜻이다. 사헌부의 감찰은 정원이 13인인데 문관[3명], 음관[5명], 무관[5명]으로 임명하였고, 모든 대소 조회 때에 문반과 무반이 동서로 나누어서 들어갈 때 감찰 각 1인씩 반원을 데리고 조회하는 의식을 규찰하게 되므로 압반감찰이라 하며 하인들은 별명을 묵자(墨子)라 한다. 묵자라는 것은 비위 사실을 쓰기 위하여 먹통을 가지고 따라다닌 까닭이다. 감찰들은 매일 다시(茶時가 있어서 이때 대사헌에게 보고해서 왕에게 주계할 것을 죽 늘어 쓴다. 그리고 그 밑에는 대사헌 이하의 대신들의 관직과 성명을 쓰고 재외(在外), 미서경(未署經), 패부진(牌不進) 등 사고도 써서 왕에게 돌린다.


* 사간원(司諫院) : 북부 관광방에 있다. 간쟁과 논박하는 정사를 관장한다. 사헌부와 사간원을 양사(兩司)라 하고, 이 양사 장관은 옥으로 만든 해치(獬豸 해태라는 신양)를 갓의 꼭지 앞에 붙이고 사간원의 조예는 갈도라 하고 정원이 15명이며 흙빛인 베로 만든 한쪽 소매 옷만 입고 검은 베로 만든 뽀족한 건을 쓰고 그 건에는 전포(煎布)를 혀같이 만들어서 양 옆에 붙였다. 이것은 간쟁한다는 뜻을 알리려는 것이다.


* 성균관(成均館) : 동부 숭교방에 있다. 유생들을 교회(敎誨)하는 소임을 맡았다. 그 소속으로 정록청(正錄廳 성균관 관원이 입직하는 곳)이 붙어 있고, 중학, 동학, 남학, 서학이 계속(系屬)되어 있다. 식당을 정록청 남쪽에 있다. 존경각(尊經閣)은 명륜당 북쪽에 있고 경서와 사기 등 서적을 보관한다. 향관청(享官廳)은 명륜당 북편에 있는데 소나무가 빽빽해서 벽송정(碧松亭)이라 이름하였다. 비천당(丕闡堂)은 명륜당 서편에 있다. 벽입재(闢入齋)와 일량재(一兩齋)는 비천당 서편에 있으며 모두 현종 9년에 세웠다. 대비과(大比科)는 비천당에 개설하고 이소(二所)라 하며 예조에서 보이는 것을 일소(一所)라 한다. 육일각(六一閣)은 향관청 서편에 있는데 영조 19년에 세웠으며 영조가 친사(親射)한 활쏘는 도구를 보관하므로 육일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양현고를 두고 유생들의 아침, 저녁 식사를 공급하였는데 이 두끼의 식사를 1점(點)이라 정하고 유생들이 50점 즉 50일을 거재 공부하여 50점이 찬 뒤에라야 절제(節製)를 보이며 원점유생(圓點儒生)이라 한다. 식당에서는 매일 유생들이 식사할 때 북을 치면 모든 유생들이 연치대로 쭉 늘어앉아서 식사를 하게 된다. 거재유생 가운데 장의(掌議) 2인을 뽑아서 성균관 중의 여러 논의를 맡아 보게 했고, 또 유생 중에 비위(非違) 사실이 있으면 벌칙을 시행하도록 했다. 그 벌칙은 죄 있는 사람의 성명을 북의 겉에 써가지고 동서재의 사동(使童)을 시켜서 그 북을 등에 지고 성균관 가운데 돌아다니면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하면서 북을 친다. 이것을 명고벌(鳴鼓罰)이라 한다.


* 현방(懸房) : 옛날 문성공 안유(安裕 안향)가 노비 백명을 성균관에 바쳤는데 그 뒤에 그 자손들이 수천 명이나 되어 지금 반촌(泮村 성균관이 있는 동리 이름)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그 자손들이라 한다. 매년 9월 20일 문성공 기제일에는 반촌 백성들이 각기 돈이나 목을 내어 제물을 융숭하게 장만해 가지고 성균관에서 제사를 올리면 성균관에서도 면포 5필을 내고 양현고에서도 쌀을 내어 제수를 보조하였다 한다. 반촌 백성들의 생계는, 우리 나라 제도에 서울에서 소 잡아서 파는 전방을 보통 현방이라 하는데 이것은 오로지 반촌 백성들만 하게 하고 그 외의 다른 사람은 사사로이 팔지 못하게 하여 이익을 보게 하며, 또 성균관에서 쓰는 아전들과 하인들도 모두 반촌 사람들로만 하게 한다.


* 승문원(承文院) : 북부 양덕방(陽德坊)에 있다. 괴원(槐院)이라고도 한다. 승문원에서 한림(翰林), 주서(注書)가 되어 가는 것을 서비(西飛)라 한다. 혹은 급제하고 처음 분관(分館)할 때 바로 승문원에 들어오는 것을 서비라 하기도 한다. 승문원의 자문지(咨文紙)는 매우 빳빳하고 두껍고 매끈매끈해서 왕엄주(王弇州)가 한없이 칭찬하였다 고 한다.


* 통례원(通禮院) : 중부 정선방에 있다. 예의, 조하(朝賀), 제사, 찬알(贊謁 의식에 홀기를 부르거나 안내역을 맡은 관원) 등의 일을 관장한다.


* 봉상시(奉常寺) : 서부 인달방에 있다. 동적전(東籍田)과 서적전(西籍田)이 봉상시 소속이다. 관원들이 거처하는 집에 세심당(洗心堂)이 있다. 동적전은 동교(東郊) 10리 되는 곳에 있다. 이름을 전농(典農)이라 하고 친경당(親耕堂)의 관청집이 있으며 필분각(苾芬閣)이라는데 창고가 있어 각색 곡식을 저장하고 있다. 서적전은 개성부에 있어서 적전에서 소출되는 각색 곡식으로 종묘 이하의 비상시 특별한 제사의 자성(粢盛)과 종묘의 6곡 천신에 공급한다. 제향일을 맡았으므로 음식을 만드는 숙수(熟手)가 소속되어 있다.


* 종부시(宗簿寺) : 북부 관광방에 있다. 선원보첩의 편찬과 종실등의 비위사실을 규찰하는 것을 관장한다.


* 교서관(校書館) : 중부 정선방에 있다. 경적을 박아내고 향축과 인장 새기는 소임을 맡아 보게 했다. 정조 원년에 내각 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차자를 올려 “내각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교서관의 직함을 예겸하게 하고, 시어소와 가까운 관청집과 바꾸게 하고 밖에 있는 관청에서 책을 박아내고 새기고 하는 일을 모두 내각에서 주관하게 하소서.”하여 정조가 교서관을 밖으로 옮기게 하고 내각에 소속된 관청으로 하여 ‘외각(外閣)’이라 이름하고 내각 제학, 직제학으로 제조를 겸하게 하며, 직각과 대교로 교리 박사 이하를 겸하게 하였다. 외각에는 동활자(銅活字) 3종류를 쌓아두게 하였다. 창준(唱準), 수장(守欌)이라는 이름들은 활자를 맡고 있는 원역들이면 균자장(均字匠), 책장(冊匠), 각수(刻手)가 모두 소속되어 있다.


* 장예원(掌隸院) : 서부 적선방에 있다. 노예의 부적(簿籍)과 결송(決訟)하는 일을 관장한다. 세조 13년에 세웠다가 영조 40년에 혁파해서 보민사(保民司)로 고쳤다가 51년에 영구히 폐지되었다.[뒤에 한성부에서 맡았다.]


* 사복시(司僕寺) : 중부 수진방(壽進坊)에 있다. 개국 초기에 고려 때 제도에 따라 설치하고 수레 끄는 말과 말 사육하는 것을 맡았다. 내사복시가 창경궁 안에 있으므로 수진방에 있는 것을 외사복시라 하였는데 집이 크고 뜰이 넓어서 말을 달릴 수 있었다.


* 군기시(軍器寺) :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 내자시(內資寺) : 서부 인달방에 있다. 궐내에 공급하는 쌀, 밀가루, 술, 장, 기름, 꿀, 소채, 과실이며 궐내에서 연회할 때 쓰는 직물 등속을 맡게 했다. 내자시에서 공급하던 2품 이상의 술과 왜인, 야인에게 공급하던 직물은 요새와서 폐지되었다.


* 사도시(司䆃寺) : 북부 광화방에 있다. 즉 창덕궁 금호문 밖이다. 왕실용 미곡과 궐내에서 쓰는 당 같은 것을 맡았다. 쌀은 귀 떨어지거나 부러진 것은 버리고 통 낱알만 골라서 바쳤다.


* 예빈시(禮賓寺) : 원래는 의정부 남쪽에 있던 것을 태조 원년에 고려 때 제도를 따라 설치하였다. 대신이나 외국 사신의 연회와 종실 재상들의 공궤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 사섬시(司贍寺) : 원래는 동부 숭교방에 있었다. 저화(楮貨)와 따로 나가있는 노비들의 공포(貢布)를 징수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숙종 31년 혁파해서 호조에 부속시키고 판적사에서 군자감을 겸해 보게 하였다. 그 관청은 용산방(龍山坊)에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군자감은 서부 여경방에 있고 분군자감은 숭례문에 있으며 강감(江監)은 용산강 북편에 있다.”고 하였다.


* 제용감(濟用監) : 중부 수진방에 있다. 궐내에 바치는 포목, 인삼과 왕이 대신이나 유공자에게 하사하는 의복이며, 사라(紗羅), 능단(綾緞), 포화(布貨)의 채색, 염색, 직조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 선공감(繕工監) : 서부 여경방에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북부 의통방(義通房)에 있으며 용산 강가에 있는 것을 강감(江監)이라 하고 창덕궁 금호문 밖에 있는 것을 자문감(紫門監)이라 한다.”고 하였다. 시어소의 궁전 내부와 각 관청의 수선이면 차비문(差備門) 안의 각종 쓰는 그릇의 준비와 내빙고의 공상을 맡았다. 선공감에 소속되는 압도(鴨島)가 고양군의 강 북쪽에 있는데 대갈대와 풀갈대를 생산한다. 대갈대는 속대가 길게 뻗어서 처마에 치는 발과 키, 삿자리를 만들고, 풀갈대는 줄기가 가늘어서 줄기와 잎대를 베어다가 울타리를 만든다.


* 사재감(司宰監) : 북부 순화방에 있다. 생선, 고기, 소금의 공급과 연료목, 수갑(手匣), 횃불을 관리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 장악원(掌樂院) : 남부 명례방에 있다. 아악(雅樂)은 장악원 좌방(左坊)에서 관리하고 속악(俗樂)은 우방에서 관리하며 매달 2일, 12일과 16일, 22일, 26일에 장악원에서 풍악을 강습한다. 악사는 전악공(典樂工)이라 하고 20인으로 고취할 때에 초록색 갑사 도포를 입고 박두를 쓰고 박자[拍子 치는것]를 갖고 따른다. 시작할 때나 쉴 때나 마칠 때에 박자를 친다. 또 관현악이 있고 장님 15명이 장악원에 소속된다.


* 관상감(觀象監) : 북부 광화방에 있다. 서운관(書雲觀)을 두었고 일영대(日影臺)와 흠경각(欽敬閣)이 있었다.


* 전의감(典醫監) : 중부 견평동에 있다. 의약 진공하는 일을 맡았다.


* 사역원(司譯院) : 서부 적선방에 있다. 여러 나라 언어의 통역과 번역을 맡았다.


* 광흥창(廣興倉) : 서강(西江)에 있다. 백관의 녹봉을 보관한다.


* 종학(宗學) : 북부 관광방에 있다. 종실들의 교회(敎誨)하는 소임을 맡았다. 세종 32년에 세웠다가 중종 때 혁파하였다.


* 내수사(內需司) : 서부 인달방에 있다. 궁내에서 수용하는 쌀, 목, 잡물과 노비를 관장한다. 호조에서 정당한 경상비(經常費) 이외에 쓰는 것은 따로 내수사를 두어 궁내에서 사용하는 것을 쓰게 하였으므로 그 전수 별좌(典需別坐)와 전회(典會), 전곡(典穀), 전화(典貨)의 관원은 모두 내관들로 겸직하게 한다.


* 사직서(社稷署) : 사직단 밖에 있다. 단유(壇壝)의 쇄소(灑掃)를 맡았다. 사직서에 구리쇠로 만든 시루 1좌가 있다. 풍년을 비는 제향 때 편을 찔 때에 시루 우는 소리가 우뢰 소리 같으면 풍년의 징조라 한다. 사직소에 수복(守僕) 8명이 있다.


* 종묘서(宗廟署) : 종묘 원장 안 동편에 있다. 침묘(寢廟) 수호하는 것을 맡았다. 수복 30명이 있다.


* 사온서(司醞署) : 서부 적선방에 있다. 술과 감주를 공급하였다. 지금은 혁파되었다.


* 평시서(平市署) :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다. 시전을 감독하여 도량형의 공정과 물가의 고저를 조절한다.


* 의영고(義盈庫) : 서부 적선방에 있다. 기름, 황납, 호초 등의 물건을 맡아 본다. 이 의영고는 소선(素膳)에 관한 물건만 전문으로 맡아 본다. 그러나 대내에서 밤에 켜는 납촉도 진공한다.


* 장흥고(長興庫) : 원래는 남부 회현방에 있었고, 뒤에 서부 인달방으로 옮겼다. 자리, 유둔, 종이 등의 물건을 맡아보게 하였다. 풍저창을 장흥고에 예속시키고 주부(主簿) 2원이 있는데 미색(米色), 면색(面色)이라 한다.


* 빙고(氷庫) : 동고는 두모포(豆毛浦 뒴개)에 있는데 제향의 얼음만 진공하고, 서고는 둔지산(鈍智山)에 있는데 어주(御廚)와 백관들에게 공급하는 얼음을 보관하고 공급하는 것을 맡았다. 동빙고에는 옥호루(玉壺樓)가 있는데 경치가 좋다고 한다. 매년 섣달에 낭관이 나가서 사한제(司寒祭)를 올리고 현명씨(玄冥氏)를 향사한 뒤에 한강의 얼음을 깨어다가 보관한다. 만일 겨울 일기가 따뜻해서 얼음이 얼지 않으면 산골의 얼음이라도 깨어다가 보관하고 춘분에 개빙제를 올리고 역시 현명씨를 향사한 뒤에 얼음을 진공한다. 또 내빙고가 있는데 어공만 전문으로 맡아 본다. 궐내에 각전의 전감(殿監)을 두고 얼음을 각색으로 물 들인다.


* 장원서(掌苑署) :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다. 원유(園囿)의 꽃과 과실을 맡아 본다. 서울의 원유는 용산, 한강 등에 있고, 외방의 원유는 강화, 남양, 송도 등에 있다. 장원서의 관노(官奴)로 원직을 시킨다. 과천, 고양, 양주, 부평에 있는 것은 가까이 있는 백성들로 원직을 정해서 과세(果稅)를 수납하게 한다. 장원서는 매년 9월 9일에 국화의 분재(盆栽)를 궐내와 내각에 진공하였다.


* 사포서(司圃署) : 중부 수진방에 있다. 제용감과 이웃에 있다. 원포(苑圃)의 소채를 맡아 본다.


 * 양현고(養賢庫) : 동부 숭교방의 성균관 북편에 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쌀, 콩 같은 물건을 공급한다. 양현고 뒤에 부군당(府君堂)이 있다. 고려 공민왕과 왕비, 최영장군의 영정을 봉안했다. 대개 각 아문에 모두 부군당이라는 것이 있어서 아전과 관노들이 기도하고 제사한다. 음사(淫祠)인 것이다. <<지봉유설>>에 “요새 풍속에 각 아문에서 예사로 빌고 제사하는 곳이 있어서 이름을 ‘부군당’이라 하고 새로 부임한 관원은 꼭 제사를 하고 복을 빈다 한다.” 고 하였다.


* 전생서(典牲暑) : 숭례문 밖 남부 둔지방(鈍智坊) 목멱산(木覓山) 남쪽에 있다. 제사에 쓸 희생의 사육을 맡았다. 정청의 현판을 간줄헌(看笜軒)이라 하고 곁에 연못이 있으며 정자 이름을 불구정(不垢亭)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양(羊)이 없으나 전생서에서만 양과 염소를 사육해서 제향에 공급한다. 그러나 요새는 염소만 있고 양은 없다 하며 생우(牲牛)는 종묘에서 검은 빛을 쓰고 문묘에는 붉은 빛을 쓴다.


* 사축서(司畜署) : 남부 회현방에 있다. 잡축(雜畜을 사육하던 것을 영조 48년에 혁파하고 호조에 합쳤다.


* 조지서(造紙署) : 창의문 밖 탕춘대(蕩春臺)에 있다. 고, 표, 전, 자문지와 여러 가지 종이를 만들게 했다. 탕춘대 앞에 시냇물과 반석이 있어서 종이 만드는데 적당하므로 조지서를 여기에 두게 하였다. 탕춘대 부근에 민가 수백 호가 있는데 제지업을 전문으로 생계를 하고 있다.


* 혜민서(惠民署) :남부 태평방에 있다.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의녀들을 교습시킨다. 혜민서에 의녀 70명이 있는데 각 읍에서 기생들로 뽑아 올려서 교습시키고 내국(內局)의 여의가 부족할 때에 보충한다.


* 도화서(圖畵署) :중부 견평방에 있다. 그림 그리는 일을 맡았다. 화원이 모두 30명이며 또 전자관(篆字官) 2명이 있다. 젊은이 중에 총민한 자를 골라서 예조의 당상관이 출제해서 고시하고 연말에 점수를 많이 받은 자를 병조에 추천하여 1년을 기한으로 녹봉을 주게 한다.


* 전옥서(典獄署) : 중부 서린방(瑞麟坊)의 금부 앞에 있다. 죄수 가두는 것을 맡아 보게 하였다. 이것은 형조에 소속되는 옥이다.


* 활인서(活人署) : 두 곳이 있다. 동활인서는 동소문 밖 연희방에 있었는데 지금은 퇴패해서 없어지고, 서활인서는 남대문 밖 용산강에 있다. 도성안 백성들의 중병을 구활하는 것을 맡았다.


* 와서(瓦署) : 남부 둔지방에 있다. 동서요(東序窯)를 두고 직(直)을 한 사람씩 두었다가 뒤에 와서로 고치고 기와와 벽돌(전석 塼石)을 만들게 했다. 개국 초기에는 와공(瓦工) 한 사람이 파란빛 유리와(琉璃瓦)를 만들었으므로 궁에 모두 푸른 기와를 덮었는데 그 와공이 혼자만의 기술로 이익을 독점하려고 그 기술을 전하지 않고 죽어서 지금에는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요새도 공장으로 기술을 비밀히하는 자를 청와공(靑瓦工)이라 한다.


* 귀후서(歸厚署) :남부 회현방에 있다. 관곽을 만들고 매매도 하며 예장(禮葬) 등 모든  일을 제공한다.


* 사학(四學) : 유생들 가르치는 것을 맡았다. 사학에는 모두 문관교수 1원씩 있고, 매월 시(詩), 부(賦)의 제술로 유생들을 시험 보여서 합제(合製 성균관시험)에 붙인다. 중학은 북부 관광방에, 동학은 동부 창선방(彰善坊에), 남학은 남부 성명방(誠明坊)에, 서학은 서부 여경방에 있다. 북학은 사학보다 조금 뒤에 창건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폐지했고 현종 2년에 다시 북학을 두었는데 곧 혁파하고 지금에는 북학이 없다.


* 오부(五部) : 방리(坊里) 백성들의 불법 사실을 다스리며, 교량, 도로, 반화(頒火), 금화(禁火), 이문경수(里門警守), 가대타량(家垈打量)과 검사하는 일을 맡았다. 중부는 징청방에 있고 8방을 관할, 동부는 연화방에 있고 12방을 관할, 남부는 훈도방에 있고 11방을 관할, 서부는 여경방에 있고 8방을 관할, 북부는 안국방에 있고 10방을 관할하였다. <<문헌비고>>에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4명을 두고 도성 사표(四標) 안에 있는 동, 서, 남, 북의 길을 맡아 보게 한다. 음관 초사로 시킨다. 영조 30년에는 사산 참군관으로 이름을 고친 다음 무관이 맡게 했으며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에 예속시켰다.


* 장생전(長生殿) : 북부 관광방에 있다. 궐내에서 쓸 관곽과 능소에 관계되는 것을 맡았으므로 현판을 동원문(東園門)이라 하였다. 공조에서 주관한다.


* 내시부(內侍府) : 북부 준수방(俊秀坊), 내의원의 북편에 있다. 환시(宦侍)들이 있는 집이다. 대내의 감선(監膳), 전명(傳命), 수문(守門), 소제하는 소임을 맡았다. 김종직(金宗直)의 내반원기(內班院記)에, “도성을 정하고부터 내시부를 두었으나 우리 성상께서(成宗) 내반원이라는 이름으로 고치게 하니, 송나라 시대의 옛 제도를 회복하며 외정(外庭)의 반열과 구븐하려는 것이다.”하였다.


* 훈련도감(訓鍊都監) : 서부 여경방에 있다. 선조 17년에 처음 세웠고,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도감을 설치하고 군정을 모집하여 포(砲) 쏘는 것과 창(槍) 쓰는 법을 교습시키고 군문을 만들었다. 예속되는 관청으로 북영(北營)은 창덕궁에, 서별영(西別營)은 마포에, 양향청(糧餉廳)은 남부 훈도방에 있으며 하도감(下都監)은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다. 군량창고 다락 이름을 읍청루(挹淸樓)라 하는데, 한강 언덕에 있어서 명승으로 일컬어졌다. 양향청은 개간되지 않은 토지를 절수(折受 문서로 급여하는 것)해서 둔전을 만들거나 혹은 적몰한 토지를 군량 토지로 결정하여 조세를 받아서 훈국 군병의 의복, 기계, 정기(旌旗), 금고(金鼓)의 소용과 각색 원역 급료로 주는 포의 값으로 쓴다.


* 금위영(禁衛營) : 중부 정선방에 있다. 숙종 8년에 처음 세웠다. 소속되는 남별영은 남산 밑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는데 영조 6년에 설치하였다. 금위영은 인조 때 연양부원군 이시백이 병조 판서가 되어 각번(各番)의 기병에서 재주가 있고 건장한 자 2개 초(哨)를 뽑아서 정초청(精抄廳)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3개 초로 불리고, 현종 9년에 병조 판서 홍준보가 기병 8개 번을 정초청으로 옮기고, 14년에 다음 병조 판서 김만기가 군정 자보(資保) 중에서 1200명을 덜어내서 10개 초로 만들었고 숙종 8년에는 또 판서 김석주가 훈국 군총(軍摠) 중에서 중부 별대를 뽑아내어 정초군과 합해서 13개 번으로 만들고 금위영이라 칭호하였다.


* 남창(南倉) : 남별영 밑 묵사동(墨寺洞)에 있다.


* 어영청(御營廳) : 동부 연화방에 있다. 소속되는 남소영은 남부 명철방에 있다. 훈국, 금위영, 어영청을 삼군문이라 하고 군졸을 분배해서 밤에 도성 안팎을 순찰하게 하였다. 자, 오, 묘, 유일에는 금위영이 맡아서 순찰하고 인, 신, 사, 해일에는 훈국에서, 진, 술, 축 미일에는 어영청이 맡아서 순찰하였다.


* 용호영(龍虎營) : 북부 양덕방에 있다. 영조 30년에 설치하였다. 경우궁(景祐宮)을 영건한 뒤에 용호영은 원동(苑洞)으로 옮겼다. 옛날 마군영(馬軍營)이다. 병조 판서가 으레 그 대장을 겸직하였다.


* 원동(苑洞) :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밖에 있다.


* 총융청(摠戎廳) : 북문인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에 있다. 인조 때 설치하였다. 영조 26년에는 북부 진장방에서 북부 소속인 경리청(經理廳)으로 옮겼고, 숙종 38년에 처음 설치했던 것을 영조 23년에 총융청과 합쳤다. 총융청에 소속되는 평창(平倉)은 연융대에 있고, 숙종 38년에 처음으로 군량 곡식을 평창에 저장하게 하였다.


* 수어청(守禦廳) : 북부 진장방에 있다. 뒤에 폐지되고 광주(廣州) 총융청 영문에 합쳤으므로 그 집들은 지금 호조에 소속되었다.


* 훈련원(訓練院) : 남부 명철방에 있다. 무과 시험과 무재(武才)의 연습하는 일을 맡았다. 훈련원 곁에 연자루(燕子樓)가 있는데 돌로 만든 주추가 굉장히 높다. 무과를 보일 때마다 훈련원이 일소(一所)가 되므로 훈련원 관원이 이 다락에 올라서 화살을 배부하면 무과를 보러 온 사람들이 다락 밑에 둘러서서 화살을 받는다.


* 좌포청(左捕廳) : 중부 정선방에 있고, 우포청은 중부 서린방에 있다. 도둑을 체포하고 순라도는 것을 맡았다. 좌우 포도청에 각각 대장 1원, 종사관 2원, 교속(校屬) 부장 4명과 급료가 없는 부장 26명과 가설 부장 12명이 있다. 그 중에 실부장은 어인(御印)이 찍힌 병부(兵符)를 차고 군병 64명이 허리에 붉은 오랏줄을 감추어 가지고 다니다가 도둑을 보면 잡아간다.


* 좌순청(左巡廳) : 중부 정선방에 있고 우순청은 중부 징청방에 있다. 밤에 순라도는 일을 맡았다. 좌순청과 우순청에 순장이 각각 1명씩 있는데 문관, 음관, 무관의 당상관으로 골라서 주계하여 돌려 가면서 임명되며, 패(牌)를 받는다. 밤에 성 안 순라를 도는 데는 좌, 우순청에 각각 군사 10명씩 있으며 이 군사를 감독하는 감군(監軍)은 선전관이나 병조, 도총부의 당상관 중에 삼망(三望)으로 임명하며, 야순패를 관리하는 이속(吏屬)들은 각각 15명이다.


* 군직청(軍職廳) : 중부 정선방에 있다. 문관이나 무관 중에서 단지 군함(軍銜 무관의 직첩)만 있는 사람들이 있는 관청이다.


* 위장소(衛將所) : 중부 정선방 돈화문 밖에 있다. 현판에 ‘오위남영(五衛南營)’이라 했다. 지금은 조사위장(曹司衛將)이 주관하고 위군이 있어서 붉은 건과 붉은 반팔 옷을 입고 왕이 친히 활쏘는 시험을 보일 때나 채색수레로 왕이 거둥할 때의 의장군(儀仗軍)이나 전어군(傳語軍)을 모두 이 위군으로 한다.


* 장용영(壯勇營) : 동부 연화방에 있다. 정조 11년 배고개(이현 梨峴)에 있는 별궁으로 장용영을 만들었는데 순조 원년 장용영이 혁파되자 그 집은 훈국에 소속되어 동별영이라 하였다. <<문헌비고>>에, “장용영에 제조 1인은 당상관 중에서 뽑고, 선기장(善騎將) 2명은 전에 장수를 지낸 사람으로 , 선기별장 1명은  전에 아장을 지낸 사람으로, 파총 1명은 전에 지방 장수나 방어사를 지낸 사람으로, 낭청 1명은 전에 지방 수령을 지낸 사람으로 임명하고, 초관이 15명인데 그 중 따로 봉급 주는 것이 2명이며, 감관이 4명, 지구관(知彀官)이 14명, 기패관이 13명, 장용위가 100명, 패장이 6명, 급료를 주는 무사가 10명이며, 급료을 주지 않은 무사가 77명이며, 각 차비가 6명이고, 표하군이 505명이다. 처음 설치할 때는 훈국 출신 중에 무예 출신 30명을 갈라내서 따라 한 청을 설치했다가 곧 20명을 증원하고 장용영이라 이름 짓고 병방, 호방, 파총, 초관 등의 직함을 두었다.


* 국출신청(局出身廳) :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안 영숙문(永肅門) 밖에 있다. 인조 정축년(1637)에 남한(南漢)에 따라갔던 군병 출신자 1천 3백 84명을 7국(局)으로 나누어 영숙문에 입직(入直)하게 하였는데, 무용청(武勇廳)이라고도 한다. 효종조에 수를 줄여서 3국을 만들었다가 또 4국을 만들었다. 현종 4년(1663)에 비로소 3국의 국마다 50명으로 정했다. 숙종 을축년(1685)에 3국에서 각각 10자리씩을 빼고 무예청(武藝廳) 출신자로 보충하여 소속시켰다. 정종 계묘년(1783)에 무예과(武藝窠) 30명을 제하여 장용영(壯勇營)을 옮겨 설치했다가 순조 임술년에 장용영을 폐지하고 무예과를 을축년 제도와 같이 3국에 다시 소속시켰다. ○ 별장(別將) 3원.


* 능마아청(能麽兒廳) :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있다. 인조조에 창설하여 여러 장관(將官)에게 병서(兵書)를 고강(考講)시키고 공부를 권장하는 일을 맡는다. 영종 을유년(1765)에 훈련원에 합쳤다. ○ 당상 3원, 낭청 4원이다.


* 전함사(典艦司) : 중부 진청방에 있다. 외사(外司)는 서강(西江)에 있다. 서울과 지방의 배와 군함을 관할한다. 그 소속으로 경기 좌우도의 수참(水站)이 있다. 지금은 폐지되어 공조에 소속되었다.


* 홍제원(弘濟院) : 사현(沙峴) 북편에 있다.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의 옷을 갈아 입히는 곳이다.


* 삼각산(三角山) : 세 봉우리가 각각 따로 이름이 있는데 그 중 백운대(白雲臺)는 제일 높아서 오르기 어렵고, 국망봉(國望峯)과 인수봉(仁壽峯)이다.


* 백악(白嶽) : 도성 북쪽에 있다. 평지에 솟아 있다. 경복궁이 그 밑에 있고 서울을 둘러싼 열 선 가운데 이 산이 정북을 가로 막았다.


* 인왕산(仁王山) : 백악산 서쪽에 있다. 도성을 산꼭대기 깍이지른 듯한 곳에 쌓은 것을 곡성(曲城)이라 이른다.


* 타락산(駝駱山): 도성 동편에 있다. 평평하고 구부러져서 높은 봉우리는 없다. 그런데 그 산 밑에 사는 인가들을 동촌(東村)이라고 한다. 응봉(鷹峯) 동쪽에서 뻗어 돌아 이 산이 되었는데 동쪽으로 안암(安巖)ㆍ고암(鼓巖)에 이른다.


* 무악(毋岳) : 도성 서편에 있는데 안현(鞍峴)이라고 한다. 봉수가 있어 동쪽 봉우리는 서편으로 고양군 소딸산[所叱達山]을 응하고, 남편(南便)으로는 목멱산 제 3봉을 응하며, 서편으로는 고양군의 봉현(蜂峴)을 응하고 남편으로 목멱산 제 4봉을 응한다.


* 모래재(沙峴) : 모화관 서북편에 있다. 추모현(追慕峴)이라고도 한다. 영종(英宗) 45년에 명릉(明陵)에 역사가 있으니 왕이 친히 이 고개에 와서 바라보고, 명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중국 사신 동월이 지은 조선부에 “ 여기에는 천 길의 험한 산세를 이루었으니 어찌 천명 군사만을 이기랴. 서쪽으로 하나의 관문 길을 바라보니 겨우 말 한 필만 지날 수 있다.” 하였고 그 주석에 보면 ‘홍제동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5리도 못되어 천작으로 만든 관문 하나가 북으로 삼각산에 잇대고 남으로 남산과 연결되어 그 가운데로 말 한 필만 통할 만하여 험준하기는 더할 수  없다.’ 하였다. 이 재는 양쪽 산 가운데  있고 심히 험준해서 의주로 가는 사람은 이 재를 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일컬은 것이 이러하였다.

* 녹반현(綠礬峴): 모래재 북쪽에 있다. 추모현 북쪽에 있다. 석벽(石壁)에서 자연동(自然銅)이 나는데, 뼈 부러진 이들이 많이 캐어다 사용한다. 당 나라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사람이 지키면 일만 사람이 이기지 못할 곳이다.” 하였다.


* 목멱산(木覓山) : 도성 남산이다. 원 이름은 인경산(引慶山)인데 보통 남산이라 한다. 마치 달리는 말이 안장을 벗은 형국이다. 산꼭대기에 봉수를 두고 동쪽과 서도까지 다섯 횃불(炬)을 켠다. 남산의 서편 등성이에 바윗돌이 깍아지른 듯한 것을 잠두(蠶頭)라 해서 올라서 조망하기에 제일 좋은 곳이다. 인왕산에서부터 낮게 평평해지며 남쪽으로 뻗어 오다가 동쪽으로 휘어지며 솟아올라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동쪽에서 대소(大小)ㆍ설마(雪馬)의 두 고개가 되고, 왕십리현(往十里峴)ㆍ동현(東峴)에 이른다


* 설마현(雪馬峴) : 두 곳이 있다. 하나는 목멱산 남쪽에 있는데 ‘큰설마’라 하고 남산 동쪽에 있는 것은 ‘작은설마’라 한다.


* 가산(假山) : 도성의 수구(水口) 안 훈련원 동북쪽에 있다. 하나는 수구의 남쪽에 있고 하나는 북쪽에 있는데 흙을 쌓아서 산을 만들어 서울 지기(地氣)의 수구가 허한 것을 막았다.


*잠두봉(蠶頭峯) :도성 밖 서쪽 10리,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는데, 민간에서 가을두(加乙頭)라고 부르며, 또 용두봉(龍頭峯)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 강희맹(姜希孟)이 서술한 기문이 있다.


* 와우산(臥牛山) : 서강에 있다. 형국이 누은 소와 같아서 이름한 것이다. 지금의 광흥창이 그 앞에 있다.


* 살꽂이벌(箭串坪) :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서울 도성의 동교(東郊)로 지세가 평평하고 수조(水草)가 무성하다. 둘레의 울타리를 돌리고 국마(國馬)를 목축한다. 넓이가 빙 돌아 34리나 된다.  이제신(李濟臣)이 지은 <<청강쇄어(淸江瑣語>>에 ‘살곶이 목책(木柵)을 경기 각 고을에 돌려가면서 배정하여 민간 조세로 부담하게 하되 해마다 수리해서 폐해가 적지 않던 것을 성안공 상진(尙震)이 사복 제조가 되어 포(布)를 주고 역군(役軍)을 모집하여 돌로 고쳐 쌓고 시냇물로 쌓을 수 없는 곳에는 철삭(鐵索)으로 문을 만들어서 여닫게 하여 그 폐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 연조는 명종 10년이다.’하였다.  정조 때 배봉진 별장을 여기에 두었다가 순조 초에 장용영이 혁파되고 뒤에 곧 배봉진도 폐지하고 다시 목장을 두게 하고 배봉 감목관을 두었다 한다.  그 돌 울타리는 지금도 그대로 있다.


* 개천(開川) :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백악산(白岳山)ㆍ인왕산(仁王山)ㆍ목멱산(木覓山)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쳐서 동쪽으로 흘러 도성 복판을 가로 질러서 세 곳의 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하였다. 우리나라 강물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서울의 개천만은 동쪽으로 흘러 나가므로 수세가 정도를 얻었다 한다.<승/영/35/10/29) 啓禧進讀濬渠議議曰, 我國都之川, 自西而東, 環都皆山, 山皆有溪而竝注于是, 出五間水門, 度永渡橋·箭串橋, 與楊津下流, 合於兩項浦, 而爲漢江川之在城內者, 名曰, 開川, 卽我英廟朝所命開也。


* 한강(漢江) : 열수(列水), 열수(洌水), 한수(漢水), 열양(列陽)이라고도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목멱산 남쪽에 있는데,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하였다. 신라 때에는 북독(北瀆)이라 하여 사전(祀典)에서 중사(中祀)에 실려 있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사평도(沙平渡)라 칭하고,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昌水)와 합하며,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한다. 광주(廣州) 땅에 이르러 도미진(度迷津)이 되고, 광나루[廣津]가 되며, 삼전도(三田渡)가 되고, 두모포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 나루가 된다. 여기서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露梁 노돌)이 되고, 용산강(龍山江)이 되며, 또 서쪽으로 나가 서강(西江)이 되고,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陽川)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고,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서는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通津)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도승(渡丞) 한 명을 두어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게 하였다.”하였다. 또 상고해 보면 “삼남의 조선(漕船)이 바닷길을 지나서 조강(祖江)에 이르러 한강으로 오고, 오직 충청도의 좌수참 조선은 충주, 음성, 진천, 연풍, 청안, 괴산 여섯 고을의 세곡은 충주 달천에서 경강(京江 한강)에 이른다.” 하였다.


* 중량포(中梁浦) : 도성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양주에서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 입석포(立石浦) : 두모포(豆毛浦 뒴개))의 상류에 있다.


* 두모포(豆毛浦 뒴개) : 도성의 동남방 1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즉 한강의 상류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도성 동남쪽 5리쯤에 있다.”고 하였다.


* 노량(露梁) : 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강을 건너면 과천현 경계이다. 정조가 수원에 있는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에 여기에 배다리를 설치하였다. 8도의 큰 배는 모두 모아서 강물에 가로로 띄우고 배 위에 긴 목판을 펴고 좌우에 난간을 설치하고 기치(旗幟)를 쭉 늘어 꽂았다. 또 양쪽 나루 머리에는 홍살문을 세우고 주사대장(舟師大將)이 깃대를 잡고 북을 치고 영접하면서 강을 건넜다. 남쪽 언덕에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 있는데 정조 때 세운 정자이다. 또 서울 영문의 연습장이 노량 북쪽 나루 머리에 있었다. 요즘 와서 깃 올린 대를 세운 곳이 이것이다. 훈련장은 사방이 1200보나 된다.


* 용산강(龍山江) : 도성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곧 고양(高陽)의 부원현(富源縣) 땅이다. 경상ㆍ강원ㆍ충청ㆍ경기 상류(上流) 지방의 세곡(稅穀) 수송선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지금 국가 법전으로 두 번째의 기우제를 이 용산강에서 시행한다.


* 마포(麻浦) : 원 이름은 삼개이다. 도성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즉 용산강의 하류이다.


* 서강(西江) : 도성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황해, 전라, 충청, 경기도의 하류 세곡배가 모두 이 서강에 모인다.


* 양화도(楊花渡) : 도성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즉 서강의 하류이다. 양천, 강화로 가는 사람은 꼭 이 나루를 건너게 된다.


* 삼전도(三田渡) : 광주(廣州) 경계에 있다. 도성과 서로 거리가 30리나 된다. 한강, 노량, 양화도, 삼전도에 모두 진도별장(津渡別將)이 있다.


* 저자도(楮子島) :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는데, 고려의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이곳에 두었다. 세종왕이 이 섬을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는데,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전해서 소유하고 있다. 지금 국전(國典)에 두 번째의 기우제는 꼭 이 섬에서 거행한다.


* 잉화도(仍火島) : 서강(西江) 남쪽에 있으며 목축장이 있는데, 사축서(司畜署)와 전생서(典牲署)의 관원 각각 1명씩을 보내어 목축(牧畜)을 감독하였다. [지금의 여의도인 듯함]


* 율도(栗島 밤섬) :  마포(麻浦) 남쪽에 있다. 약초를 심고 뽕나무를 심는다. [한강을 소통하기 위해 1971년에 폭파하고 파내어 없어졌다.]


* 서지(西池) : 돈의문 밖 모화관 옆에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하였다.


* 동지(東池) : 창경궁 동편 연동(蓮洞)에 있다.


* 남지(南池) : 숭례문 밖에 있다. 서울의 연못은 모두 장원서에 소속되어 있다. 여기서 생산되는 연밥을 수확해서 어공(御供)으로 쓴다. 그 중에 서지가 제일 크고 넓어서 연꽃이 무성하다. 못가에 천연정(天然亭)이 있다.


* 필운대(弼雲臺) :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소시에 대 아래 원수(元帥) 권율(權慄)의 집에 처가살이[贅寓]하였으므로 필운이라 불렀는데, 석벽에 새긴 필운대(弼雲臺) 세 글자는 곧 이백사의 글씨이다. 필운대 옆에 있는 인가에서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의 봄철 꽃구경은 반드시 먼저 이곳을 손꼽게 되었다.


* 도화동(桃花洞) : 북악(北岳) 아래에 있는데 복사꽃이 많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 세심대(洗心臺) : 인왕산 아래 육상궁(毓祥宮) 뒤에 있다. 석벽에 세심대(洗心臺)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꽃나무가 많아서 봄철에는 구경하기에 적당하다. 영조 11년 을묘년에 장헌세자가 탄생하였는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그대는 노래하고 나는 웃으며 동대(東臺)에 올라가니, 오얏꽃 희고 복사꽃 붉게 일만 나무 피었네. 이런 풍광 이런 즐거움에, 해마다 태평 술잔에 크게 취한다네.” 하였다. ○ 정조 19년에 임어(臨御)하였는데, 그 후에 순조(純祖)ㆍ익종(翼宗) 열성조(列聖朝)도 많이 거둥하였다. 사정(射亭)이 있다.


* 북사동(北寺洞) : 혜화문 밖에 있다. 옛날 묵사(墨史)가 있었으므로  묵사동이라고도 한다. 어영청의 북쪽 창고가 여기에 있었으므로 또 북둔(北屯)이라고도 한다. 맑은 시내의 언덕을 따라 주민들이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한다. 늦은 봄철마다 노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가득 찬다.


*세검정(洗劍亭) :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 옆에 있다. 바위 위에 정자가 있고 폭포가 앞에 있다.  정자 앞 반석이 물에 닳아서 반들반들하고 깨끗하다. 어염집 아이들이 붓을 가지고 그 바위 위에서 글씨 쓰는 것을 연습하므로 돌 위에 언제나 먹물 밴 흔적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차일암(遮日巖)이 있다. ○ 열조(列朝)의 실록(實錄)이 이루어진 후에, 반드시 여기서 세초(洗草 원고 정리)하였다. ○ 정자가 돌 위에 있는데, 폭포수가 그 앞을 지난다. 매년 장마 때 도성 사람들이 나가서 넘쳐흐르는 물을 구경한다.” 하였다.


* 이문동(里門洞) : 이문안이라고도 한다.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있던 곳으로 연못이 있는데 잠룡지(潛龍池)라 한다. 집안에 영조의 어필로 <잠룡지>라 쓴 것을 걸어 놓았다.


* 향교동(鄕校洞) : 정암 조광조의 옛집이 있었다. 고려 때 한양 향교가 여기에 있었다.


* 어의동(於義洞) : 효종의 잠저가 있다. 궁을 용흥궁(龍興宮)이라 하고, 다락 이름을 조양루(朝陽樓)라 한다. 우리나라 가례(嘉禮)를 항상 이 궁에서 거행한다. 또 동편 맞은편에 석양루가 있었다.


* 송동(松洞) :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성균관(成均館) 서쪽 산기슭에 있는데, 우암(尤菴)이 예전에 기거하였기 때문에 동명(洞名)을 송동(宋洞)이라고 한다. 동리의 골이 깊으며 석벽에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새겼는데, 우암의 글씨이다. 동리 가운데 꽃나무가 많아서 봄놀이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하였다.


* 관동(館洞) : 성균관이 있다고 해서 관동이라 한다.


* 고마청동(雇馬廳洞) :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밖 경기 감영 곁에 있다.


<漢京識略 부록 1973년 당시 지명>

* 감고당(感古堂) : 덕성여자중고등하교 본관 서북편

* 경기 감영(京畿監營) : 서대문 네거리에 있는 적십자 병원 자리

* 경모궁(景慕宮)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構內)

* 경우궁(景祐宮) : 휘문중고등학교 터.

* 관상감(觀象監) : 종로구 원서동 휘문중고등학교 교정내 일부

* 광흥창지(廣興倉址) : 와우산 앞 서강국민학교 앞

* 국사당(國祠堂) : 지금 팔각정 터

* 군기시(軍器寺) :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 자리

* 균역청(均役廳) : 중구에 있던 일신국민하교 터.

* 남관왕묘(南關王廟) : 중구 도동(桃洞) 1가 68번지. 6. 25때 소실하였음

* 남별영(南別營) : 중구 필동 2가. 헌병사령부 터

* 동빙고(東氷庫) : 성동구 옥수동

* 동적전(東籍田) : 동대문구 제기동 일대

* 입암(立岩 선바위) : 서대문구 행촌동 일번지.

* 와서지(瓦署址) : 용산 철도병원 자리

* 남소영(南小營) : 중구 장충단(獎忠壇) 내

* 동학구지(東學舊址) : 동대문 이화여대부속병원 부근

*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 : 성동구 옥수동 살곶이 다리 북쪽 기슭

* 두모포(豆毛浦 뒴개) : 성동구 옥수동 앞

* 명례궁(明禮宮) : 중구 태평로 뉴 코리아 호텔 자리

* 태상시(太常寺) : 종로구 서주동 128번지

* 북관왕묘(北關王廟) : 종로구 명륜동 1가 2번지

* 사복시(司僕寺) : 종로구 수송국민하교 터

* 사한단(司寒壇) : 성동구 옥수동

* 서학구지(西學舊址) : 중구 태평로 1가 60번지

* 서활인서(西活人署) : 마포구 경기공전 자리

* 선농단(先農壇) : 동대문구 서울사대부속중학교

* 선잠단(先蠶壇) : 성북구 성북동 64번지

* 선혜청(宣惠廳) :중구 남창동 시장 일부

* 선희궁(宣禧宮) : 종로구 신교동 맹아학교터

* 수진궁(壽進宮), 용동궁(龍洞宮) : 종로구 숙명여자중고등학교 터

* 안동별궁(安洞別宮) : 안국동 풍문여자중고등학교 터

* 저경궁(儲慶宮) : 한국은행 본점 뒤 전 서울대 치과대학

* 전생서지(典牲暑址) :용산구 후암동 307번지 근방

* 종현(鍾峴) : 명동성당

* 창의궁지(彰義宮址) :종로구 통의동 35번지 일대. 백송(白松)이 있음.

* 탕춘대(蕩春臺) : 세검정초등학교

* 태평관(太平館) :중구 남대문국민학교 부근

* 필운대(弼雲臺) : 배화여자중고등학교의 교장사택

* 혜민서(惠民署) : 중구 을지로 2가 192번지

* 원구단(圜丘壇) : 조선호텔 안

* 훈련원(訓練院) :서울 운동장 제 2운동장.

* 홍제원(弘濟院) : 서대문구 홍제동 30번지



<英祖代 漢城의 부(部) · 방(坊) · 계(契) >-인터넷자료-


○ 북부(北部)

광화방(廣化坊):광화방계(廣化坊契, 원서동)

양덕방(陽德坊):양덕방계(陽德坊契, 계동)

가회방(嘉會坊):가회방계(嘉會坊契, 가회동)

안국방(安國坊):안국방계(安國坊契, 안국동)

순화방(順化坊):사재감계(司宰監契, 통의동)

의통방(義通坊):

왕정리계(王井里契, 효자동),

후동계(後洞契, 통의동)

진장방(鎭長坊):

진장방계(鎭長坊契, 삼청동 · 가회동)

관광방(觀光坊):

중학내계(中學內契, 중학동 · 수송동),

의정부내계(議政府內契, 세종로)

연희방(延禧坊):

아현계(阿峴契, 아현동),

연희궁계(延禧宮契, 연희동),

합정리계(合正里契, 합정동 · 성산동),

망원정1계(望遠亭1契, 합정동 · 성산동),

망원정2계(望遠亭2契, 합정동 · 성산동),

여의도계(汝矣島契, 여의도),

세교리계(細橋里契, 동교동 · 서교동)

성산리계(城山里契, 성산동),

가좌동계(加佐洞契, 남가좌동),

증산리계(甑山里契, 북가좌동)

상평방(常平坊):

조지서계(造紙署契, 신영동),

경리청계(經理廳契, 신영동),

선혜청계(宣惠廳契, 평창동),

양철리계(梁哲里契, 대조동 · 녹번동 · 불광동),

구리계(舊里契, 대조동 · 녹번동 · 불광동)

연은방(延恩坊):

신사동계(新寺洞契, 남가좌동),

미흘산계(未屹山契, 수색동),

홍제원계(弘濟院契, 홍제동),

갈고개계(葛古介契, 갈현동),

역계(驛契, 역촌동),

사계(私契, 역촌동),

불광리계(佛光里契, 불광동),

수암리계(水岩里契, 불광동),

수생리계(水生里契, 성산동)


○ 중부(中部)

정선방(貞善坊):

비로전계(非老廛契, 돈의동 · 봉익동),

임기손계(林己孫契, 봉익동),

김만년계(金萬年契, 권농동 · 운니동 · 익선동),

수문동계(水門洞契, 권농동 · 운니동 · 와룡동),

고병조계(古兵曹契, 운니동),

돈녕부상계(敦寧府上契, 익선동 · 돈의동 · 묘동),

돈녕부하계(敦寧府下契, 익선동 · 돈의동 · 묘동),

파자전계(把子廛契, 종로3가),

하미전계(下米廛契, 종로3가)

대묘동계(大廟洞契, 종로3가),

의전일계(衣廛一契, 종로3가),

의전의계(衣廛二契, 종로3가)

징청방(澄淸坊):

이조내계(吏曹內契, 세종로),

한성부내계(漢城府內契, 세종로),

후동계(後洞契, 세종로 · 수송동 · 청진동),

호조내계(戶曹內契, 세종로),

호조후문계(戶曹後門契, 세종로),

고예조계(古禮曹契, 세종로),

판정동계(板井洞契, 청진동),

변종견계(卞宗堅契, 청진동),

두석동계(豆錫洞契, 청진동),

전함사계(典艦司契, 청진동),

비변사계(備邊司契, 청진동 · 종로1가)

수진방(壽進坊):

수진궁내계(壽進宮內契, 인사동 · 공평동),

수진궁행랑계(壽進宮行廊契, 인사동 · 공평동),

간동계(磵洞契, 견지동 · 관훈동),

송현계(松峴契, 관훈동 · 송현동),

제용하계(濟用下契, 견지동 · 관훈동),

사복전계(司僕前契, 청진동 · 공평동),

사복시천변계(司僕寺川邊契, 청진동),

개정동계(盖井洞契, 청진동),

상사동계(相思洞契, 청진동),

청성군계(淸城君契, 청진동),

종현병문계(鍾懸屛門契, 종로1가),

상어물전계(上魚物廛契, 종로1 · 2가)

상미전계(上米廛契, 종로1가)

장통방(長通坊):

수표동변계(水標東邊契, 수표동),

비파동계(琵琶洞契, 장사동 · 입정동),

함평주인계(咸平主人契, 관수동 · 장사동),

석정동계(石井洞契, 장사동),

조세홍계(曹世弘契, 관수동 · 장사동),

박계손계(朴戒孫契, 장사동),

방종계(方宗契, 장사동),

입전계(笠廛契, 장사동),

창전행랑계(昌廛行廊契, 장사동),

중로계(中路契, 장사동),

의성정계(義城正契, 장사동 · 예지동),

하순원계(河順元契, 예지동),

박내종계(朴乃宗契, 관수동),

이전계(履廛契, 관수동),

광주주인계(廣州主人契, 관수동 · 장사동),

분전중로계(粉廛中路契, 예지동)

백립전계(白笠廛契, 종로2가),

정만석계(丁萬石契, 종로2가),

지전계(紙廛契, 종로2가),

장만호계(張萬戶契, 관수동 · 관철동),

장구담계(張仇淡契, 종로2가 · 관철동),

청주주인계(淸州主人契, 관수동 · 관철동),

서천수계(徐千守契, 종로2가),

염전계(鹽廛契, 종로2가),

신향손계(辛享孫契, 종로2가),

박기수계(朴己守契, 종로2가),

관자동계(貫子洞契, 종로2가 · 관철동),

원주주인계(原州主人契, 종로2가),

흑립전계(黑笠廛契, 종로2가),

유사익계(兪士益契, 종로2가 · 관철동)

견평방(堅平坊):

금부내계(禁府內契, 종로2가),

전의감동계(典醫監洞契, 낙원동),

후동계(後洞契, 인사동)

서린방(瑞麟坊):

포도청계(捕盜廳契, 무교동 · 서린동),

일영대계(日影臺契, 무교동 · 서린동),

고삭정계(古索井契, 무교동 · 서린동),

계아전계(鷄兒廛契, 서린동 · 관철동 · 종로1가),

사기전계(沙器廛契, 서린동 · 관철동 · 종로1가),

박정계(朴井契, 서린동 · 종로2가),

후동계(後洞契, 관철동 · 종로2가),

전옥내계(典獄內契, 관철동),

종루서변계(鐘樓西邊契, 종로2가 · 관철동) 

견평방(堅平坊):

중어물전일패계(中魚物廛一牌契, 종로2가),

중어물전이패계(中魚物廛二牌契, 종로2가)

관인방(寬仁坊):

대사동일패계(大寺洞一牌契, 관훈동),

대사동이패계(大寺洞二牌契, 관훈동 · 경운동),

대사동삼패계(大寺洞三牌契, 인사동 · 낙원동),

대사동사패계(大寺洞四牌契, 인사동 · 낙원동),

충훈부내계(忠勳府內契, 안국동 · 관훈동 · 경운동)

경행방(慶幸坊):

포전계(布廛契, 종로2가),

한원서변계(漢源西邊契, 낙원동),

한원동변계(漢源東邊契, 낙원동),

궁내계(宮內契, 인사동),

오순덕계(吳順德契, 낙원동 · 익선동 · 돈의동),

사거리계(四巨里契, 운니동 · 경운동)


○ 남부(南部)

호현방(好賢坊):

호현방계(好賢坊契, 회현동 · 남산동),

이간병문계(二間屛門契, 을지로2가 · 명동)

장흥동계(長興洞契, 회현동 · 남산동),

송현계(松峴契, 회현동 · 남산동),

의산위계(宜山尉契, 남대문로3,4가 · 북창동),

본궁내계(本宮內契, 북창동),

소공동계(小公洞契, 소공동),

부월변계(部越邊契, 소공동 · 남대문로)

명례방(明禮坊):

명례동계(明禮洞契, 남산동 · 회현동),

부계(部契, 남산동 · 회현동)

서소문월변계(西小門越邊契, 태평로1가)

장악내계(掌樂內契, 을지로2가)

광통방(廣通坊):

군기시월변계(軍器寺越邊契, 명동)

모전계(毛廛契, 을지로1가 · 다동),

손복동계(孫福洞契, 을지로1 · 2가),

대다방북변계(大多坊北邊契, 을지로1 · 2가),

소다방남변계(小多坊南邊契, 을지로1 · 2가),

북변계(北邊契, 을지로1 · 2가),

옹대리문계(瓮垈里門契, 을지로1 · 2가),

성천계(成川契, 을지로1 · 2가),

서행랑상계(西行廊上契, 을지로1 · 2가),

서행랑하계(西行廊下契, 을지로1 · 2가),

소천변계(小川邊契, 을지로1 · 2가)

동행랑계(東行廊契, 을지로2가)

낙선방(樂善坊):

금위영창계(禁衛營倉契, 장충동)

정소리계(貞梳里契, 을지로3 · 4가),

왜관동계(倭館洞契, 충무로3 · 4가)

와유두아계(瓦有豆兒契, 을지로3가 · 초동 · 저동)

성명방(誠明坊):

석교상계(石橋上契, 장충동 · 예장동),

석교하계(石橋下契, 예장동)

연성위계(蓮城尉契, 을지로3가)

훈도방(薰陶坊):

주자동계(鑄字洞契, 예장동 · 남산동),

정승계(政丞契, 충정로2,3가 · 주자동 · 남학동),

박정계(朴井契, 충정로2, 3가 · 주자동 · 남학동)

둔지방(屯之坊):

서빙고1계(西氷庫1契, 서빙고동),

서빙고2계(西氷庫2契, 서빙고동),

지어둔계(之於屯契, 서빙고동 · 한강로2가),

와서계(瓦署契, 서빙고동 · 한강로2가),

이태원계(利泰院契, 이태원동),

청파계(靑坡契, 남영동 · 한강로)

두모방(豆毛坊):

신촌리계(新村里契, 응봉동 · 금호동),

수철리계(水鐵里契, 금호동 · 옥수동),

두모포계(豆毛浦契, 옥수동)

전관일계(箭串一契, 성수동),

전관이계(箭串二契, 성수동)

중촌리계(中村里契, 성수동 · 화양동),

보당리계(補堂里契, 사근동)

훈도방(薰陶坊):

죽전동계(竹廛洞契, 을지로3가 · 초동 · 명동),

혜민서계(惠民署契, 을지로2가),

하석지방계(下動之坊契, 을지로2 · 3가),

묵정동계(墨井洞契, 수표동),

니현계(泥峴契, 수표동),

저전동계(苧廛洞契, 남산동)

대평방(大平坊):

한수견계(韓守堅契, 수하동 · 장교동),

보십내계(甫十內契, 수하동 · 장교동),

외계(外契, 수하동 · 장교동),

구리현계(仇里峴契, 을지로2가),

선산계(善山契, 을지로2가),

하홍문계(下紅門契, 수하동 · 장교동),

수하동계(水下洞契, 수하동 · 을지로2가),

허병문계(虛屛門契, 을지로2가)

둔지방(屯芝坊):

전생내계(典牲內契, 후암동),

전생외계(典牲外契, 후암동)

명철방(明哲坊):

남소문계(南小門契, 장충동),

쌍이문동계(雙里門洞契, 필동 · 장충동),

청녕위계(靑寧尉契, 을지로4 · 5가)

수구문내계(水口門內契, 광희동),

어영청창계(御營廳倉契, 장충동)  

한강방(漢江坊):

몽뢰정계(夢賚亭契, 한남동 · 이태원동),

한강계(漢江契, 보광동),

주성리계(鑄城里契, 보광동 · 동빙고동)」


○ 동부(東部)

숭교방(崇敎坊):

성균관계(成均館契, 명륜동),

숭교1계(崇敎1契, 명륜동)

연화방(蓮花坊):

종묘동계(宗廟洞契, 종로3가 · 훈정동),

연일계(連一契, 종로3가),

연삼계(連三契, 종로3가),

김중계(金衆契, 종로4 · 5가),

중로계(中路契, 종로4, 5가 · 예지동)

창선방(彰善坊):

연지동계(蓮池洞契, 종로4가 · 연지동),

벌이계(伐二契, 종로4가, 연지동)

창선방계(彰善坊契, 종로4 · 5가),

창선이리계(彰善二里契, 종로4 · 5가),

동학동계(東學洞契, 종로6가),

동학내계(東學內契, 종로6가),

분육계(分六契, 종로3가 · 예지동),

연이계(連二契, 종로3가 · 예지동)

천변계(川邊契, 예지동),

소천변계(小川邊契, 종로5 · 6가)

왕십리역계(往十里驛契, 왕십리동 · 도선동 · 행당동)

왕십리계(往十里契, 왕십리동)

인창방(仁昌坊):

안암계(安岩契, 안암동),

벌리계(伐里契, 미아동),

우이계(牛耳契, 우이동 · 수유동),

사아리계(沙阿里契, 미아동 · 수유동),

청량리계(淸凉里契, 청량리동),

수유촌계(水踰村契, 수유리)

가오리계(加五里契, 우이동 · 수유동),

능동계(陵洞契, 수유동), 

인창방계(仁昌坊契, 숭인동),

신설계(新設契, 신설동),

답십리계(踏十里契, 답십리동),

마장리계(馬場里契, 마장동)

제기리계(祭基里契, 제기동),

전농리계(典農里契, 전농동),

중량포계(中梁捕契, 휘경동 · 이문동),

장위리계(長位里契, 장위동),

건덕방(建德坊):

어의동계(於義洞契, 종로5가 · 충신동 · 효제동 · 이화동),

건덕방계(建德坊契, 동숭동)

숭신방(崇信坊):

숭신방계(崇信坊契, 창신동 · 숭인동)


○ 서부(西部)

적선방(績善坊):

월변계(越邊契, 내자동 · 내수동),

사온동계(司彖洞契, 적선동),

중추부내계(中樞府內契, 세종로),

예조내계(禮曹內契, 세종로),

종각계(鐘閣契, 세종로),

십자각계(十字閣契, 통의동 · 적선동)

준수방(俊秀坊):준수방계(俊秀坊契, 통인동 · 누상동)

의통방(義通坊):연추문계(延秋門契, 효자동)

관광방(觀光坊):관광방계(觀光坊契, 사간동 · 소격동)


인달방(仁達坊):

수성궁내계(壽城宮內契, 사직동)

분선공내계(分繕工內契, 누상동 · 누하동),

사직동게(社稷洞契, 사직동),

내수사계(內需司契, 사직동 · 내수동),

내섬내계(內贍內契, 신문로),

봉상시계(奉常寺契, 신문로),

내행랑계(內行廊契, 사직동 · 내수동)

양생방(養生坊):

태평관계(太平館契, 남대문로4가)

창동계(倉洞契, 남창동),

송현계(松峴契, 남창동)

여경방(餘慶坊):신문내계(新門內契, 신문로)

반송방(盤松坊):

인장리계(茵匠里契 의주로 · 합동 · 충정로)

지하계(地下契, 영천동 · 천연동),

경영고계(京營庫契, 충정로)

조판부사계(曹判府事契, 북아현동),

수근전계(水芹田契, 아현동 · 충정로),

청성군계(靑城君契, 충정로)

노첨정계(盧僉正契, 충정로),

차자리계(車子里契, 아현동) ·

아현계(阿峴契, 아현동)

권정승계(權政丞契, 북아현동),

용산방(龍山坊):

야주현계(夜珠峴契, 당주동),

당피동계(唐皮洞契, 당주동 · 신문로),

공조후동계(工曹後洞契, 도렴동 · 세종로),

율학청계(律學廳契, 도렴동),

도렴동계(都染洞契, 도렴동),

사헌부내계(司憲府內契, 세종로 · 도렴동),

병조내계(兵曹內契, 세종로 · 도렴동),

형조내계(刑曹內契, 세종로 · 도렴동),

사역원계(司譯院契, 도렴동)

옹리상계(瓮里上契, 공덕동 · 염리동),

옹리하계(瓮里下契, 공덕동 · 염리동)

공덕리계(孔德里契, 공덕동),

만리창계(萬里倉契, 용산동 · 신공덕동),

동문외계(東門外契, 원효로4가),

어영청창계(御營廳倉契, 원효로4가),

진휼청계(賑恤廳契, 원효로4가),

신창계(新倉契, 원효로4가 · 용문동 · 도화동),

형제정계(兄弟井契, 도화동 · 용강동),

탄항계(灘項契, 도화동 · 용강동),

곽계(槨契, 도화동 · 용강동),

도화동계(桃花洞契, 도화동)

신촌리계(新村里契, 원효로 · 용문동 · 한강로),

사촌리계(沙村里契, 원효로 · 용문동 · 한강로)

토정리계(土亭里契, 용강동)

마포계(麻浦契, 서교동)

서강방(西江坊):

흑석리계(黑石里契, 공덕동 · 염리동),

율도계(栗島契, 상수동 · 창전동),

신정리계(新井里契, 공덕동 · 염리동) 

여경방(餘慶坊):

장생동계(長生洞契, 신문로2가 · 정동),

두석계(豆錫契, 신문로2가 · 정동),

선공내계(繕工內契, 정동),

해풍군계(海豊君契, 정동),

동령동계(東嶺洞契, 정동),

서학동계(西學洞契, 태평로 · 정동),

내계(內契, 정동 · 태평로),

모전계(毛廛契, 을지로1가),

내자동계(乃子洞契, 을지로1가)

반석방(盤石坊):

미전상계(米廛上契, 합동 · 충정로3가),

미전하계(米廛下契, 합동 · 중림동),

성삭주계(成朔州契, 합동),

유판부사계(兪判府事契, 합동)

사거리계(四巨里契, 동자동 · 갈월동),

도저동계(桃楮洞契, 도동 · 후암동),

석교계(石橋契, 동자동 · 갈월동),

조전계(租廛契, 만리동 · 청파동)

연지계(蓮池契, 봉래동),

약전계(藥田契, 만리동) 

용산방(龍山坊):청파1계(靑坡1契, 청파동),

청파2계(靑坡2契, 청파동),

청파3계(靑坡3契, 청파동 · 효창동),

청파4계(靑坡4契, 원효로 · 용문동),

청파5계(靑坡5契, 원효로 · 용문동)

고순청계(古巡廳契, 의주로 · 합동), 서소문외계(西小門外契, 의주로 · 합동)  

황화방(皇華坊):

서소문내계(西小門內契, 서소문동),

취현동계(聚賢洞契, 서소문동),

소정동계(小貞洞契, 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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