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문초/한문공문초 권지6

권6

황성 2008. 12. 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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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鈔巻六

明茅坤撰

昌黎文鈔六

送楊支使序

楊憑 為御史中丞 奏辟儀之 為觀察支使 文有興致

양빙이 어사중승이 되어 의지를 천거하여 관찰지사를 삼았다. 문장은 흥치가 있다.

愈在京師時 嘗聞當今藩翰之賓客 惟宣州為多賢 與之游者 二人 隴西李博 清河崔羣 羣與博之為人 吾知之 道不行於主人 與之處者 非其類 雖有享之以季氏之富 不一日留也 以羣博論之 凡在宣州之幕下者 雖不盡與之游 皆可信而得其為人矣 愈未嘗至宣州而樂頌其主人之賢者 以其取人信之也 今中丞之在朝 愈日侍言於門下 其來而鎮兹土也 有問湖南之賓客者 愈曰知其客 可以信其主者 宣州也 知其主 可以信其客者 湖南也 去年冬 奉詔為邑於陽山然後 得謁湖南之賓客於幕下 於是 知前之信之也不失矣 及儀之之來也 聞其言而見其行 則向之所謂羣與博者 吾何先後焉 儀之 智足以造謀 材足以立事 忠足以勤上 惠足以存下 而又侈之以詩書六藝之學 先聖賢之徳音 以成其文 以輔其質 宜乎從事於是府 而流聲實於天朝也 夫樂道人之善 以勤其歸者 乃吾之心也 謂我為邑長於斯 而媚夫人云者 不知言者也 工乎詩者 歌以繫之

한유가 경사에 있을 때에 일찍이 듣건대, 지금 번한의 빈객 가운데 오직 선주가 어진이가 많은데, 더불어 노니는 사람은 2사람으로 농주의 이박과 청하의 최군이다. 이박과 청하의 사람됨은 내 아니, 도가 주인에게 행해지지 않고, 더불어 거처하는 사람이 그 동류가 아니라면 비록 계씨의 부귀로 흠향하더라도 하루도 머물지 않는다. 이박과 최군으로 논한다면, 무릇 선주의 막하에 있는 사람을 비록 모두 대면하지 않더라도 모두 믿을 수 있고 그 사람됨을 얻었을 것이다.

한유가 일찍이 선주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그 주인의 어짊을 암송함을 좋아함은 그가 사람을 취함에 미덥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중승이 조정에 있어서 한유가 날마다 문하에서 말을 모셨는데, 그가 와서 이 지역을 다스림에 호남의 빈객을 묻는 사람이 있다면 한유는 ‘그 빈객을 알아 그 주인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선주이고, 그 주인을 알아 그 빈객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호남이다.’고 말한다.

지난해 겨울에 조서를 받들어 양산에서 읍장이 된 이후에 호남의 빈객을 막하에서 볼 수 있었다. 이에 앞서의 믿음이 실추되지 않음을 알았다. 의지가 옮에 미쳐서 그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보니, 지난번에 이른 바 최군과 이박이라는 것을 내 어찌 우열을 가리겠는가? 의지는 지혜는 도모함에 나아갈 수 있고, 재주는 일을 세울 수 있으며, 충성은 군주를 권면하게 할 수 있고 은혜는 아래에 보존할 수 있으며, 또 시서 6예의 학문과 앞 성현의 덕음으로 꾸며 그 문장을 이루고 그 바탕을 도우니, 마땅하도다 이 공르에 종사관이 되어 흐르는 명성이 조정에 가득함이여. 대저 남의 선함을 말하기를 좋아하여 그 돌아감을 부지런히 함은 곧 나의 마음이다. 내 이 곳에서 읍장이 되어 사람에게 아침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시에 능숙한 사람은 시로서 이을지어다.

送鄭尚書序

予獨按昌黎序事 絶不類史遷 亦不學史遷 自勒一家矣

내개 홀로 창려가 일을 서술한 것을 살펴보니 절대로 사마천과 같은 것이 없었고, 또한 사마천을 배우지 않고 스스로 일가를 힘썼다.

嶺之南 其州七十 其二十二 隸嶺南節度府 其四十餘 分四府 府各置帥 然獨嶺南節度 為大府 大府始至 四府必使其佐 啓問起居 謝守地不得 即賀以為禮 歲時 必遣賀問 致水土物 大府帥 或道過其府 府帥必戎服 左握刀 右屬弓矢 帕首袴鞾 迎郊 及既至 大府帥先入據館 帥守屏 若將趨入拜庭之為者 大府與之為讓 至一再 乃敢改服 以賓主見 適位執爵 皆興拜 不許乃止 䖍若小侯之事大國 有大事 諮而後行 隸府之州離府逺者 至三千里 懸隔山海 使必數月而後能至 蠻夷悍輕 易怨以變 其南州 皆岸大海 多洲島 颿風一日踔數千里 漫瀾不見蹤跡 控御失所 依險阻 結黨仇 機毒矢以待將吏 撞搪呼號 以相和應 蜂屯蟻雜 不可爬梳 好則人 怒則獸 故常薄其征入 簡節而疎目 時有所遺漏 不究切之 長養以兒子 至紛不可治 乃草薙而禽獮之 盡根株 痛斷乃止 其海外雜國 若躭浮羅 流求 毛人 夷亶之州 林邑 扶南 真臘 于陀利之屬 東南際天地 以萬數 或時候風潮朝貢 蠻胡賈人舶交海中 若嶺南帥 得其人則一邊盡治 不相冦盗賊殺 無風魚之災 水旱癘毒之患 外國之貨 日至 珠香象犀玳瑁奇物 溢於中國 不可勝用 故選帥 常重於他鎮 非有文武威風 知大體可畏信者 則不幸往往有事 長慶三年四月 以工部尚書鄭公 為刑部尚書 兼御史大夫 往踐其任 鄭公 嘗以節鎮襄陽 又帥滄景徳棣 歴河南尹華州刺史 皆有功徳可稱道 入朝 為金吾將軍 散騎常侍 工部侍郎 尙書 家屬百人 無數畝之宅 僦屋以居 可謂貴而能貧 為仁者 不富之效也 及是命 朝廷莫不悅 將行 公卿大夫士 茍能詩者 咸相率為詩 以美朝政 以慰公南行之思 韻必以來字者 所以祝公成政而來歸疾也

영남은 그 고을이 70주이니, 그 22주는 영남 절대부에 예속되고, 그 나머지 40여 주는 4부에 나누어 두고 부에는 각각 장수를 둔다. 그러나 유독 영남 절대는 대부가 된다. 대부가 처음 이름에 4부에서는 반드시 그 부장으로 하여금 기거를 묻고 영토를 다스림이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사죄하고 곧 하례함으로 예를 표한다. 세시로 반드시 하문(賀問)하게 하고 토산물을 바친다. 대부의 장수가 혹 길이 그 부를 지나면 부의 장수는 반드시 융복을 입고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에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머리를 싸매고 바지를 입고 신을 신고 교외에서 맞이한다. 이미 이름에 대부의 장수가 먼저 들어가 관아에 의거하면 장수는 문병을 지킴이 마치 장차 쫓아 들어가 뜰에서 절하려는 사람처럼 한다. 대부가 더불어 사양을 하고 한두 번 이름에 곧 감히 복장을 바꾸어 빈주로써 본다. 자리에 나아가 술잔을 잡고 모두 일어나 절을 하여 허락하지 않아야 곧 그치니 공경스러움이 마치 소후가 대국을 섬기는 듯하다. 큰 일이 있으면 물은 이후에 시행하니, 부에 예속된 고을이 부와의 거리가 먼 곳은 3천리에 이르니 산과 바다로 막혀 사신이 반드시 몇 개월 이후에 능히 이른다. 만이(蠻夷)는 사납고 가벼워 원망하고 돌변함이 쉽다. 그 남주는 모두 큰 바다에 싸여 섬이 많으니 돛에 바람이 불어 하루에 수 천 리를 넘어 질펀하게 자취를 보지 못하니 다스림이 알맞은 곳을 잃고 험함에 의지하여 원수를 맺어 독화살을 설치하여 관리를 기다리며 부딪히고 막으며 부르며 서로 호응하고 벌이 주둔하고 개미가 섞여서 끌을 수 없으니, 좋으면 사람이요 성내면 짐승이다. 그러므로 항상 그 세금을 감면하여 절목을 간소하게 하고 때로 빠뜨리더라도 채우기를 궁구하지 않고//, 기르기를 아아와 같이하니, 어지럽게 다스릴 수 없으면 곧 풀을 베고 짐승을 사냥하듯이 하여 뿌리와 나무를 모두 베어 통열하게 끊으면 곧 그친다. 그 해외의 여러 나라, 탐부라(躭浮羅) 유구(流求) 모인(毛人) 이(夷) 전(亶)의 고을과 임읍(林邑) 부남(扶南) 진랍(真臘) 우타리(于陀利)의 등속과 같은 나라는 동남으로 천지와 가까워 수 만이나 된다. 혹 시로 조수를 기다려 조공을 바치고 만호 상인의 배는 바다 가운데에서 교역을 하니, 만일 영남의 장수가 그 적당한 사람을 얻는다면 한 변방이 모두 다스려져 서로 도적질하고 죽이지 않고 바람과 고기의 재앙 홍수와 가뭄 풍토병의 근심이 없다. 외국의 재화가 날마다 이르러서 주향(珠香) 상서(象犀) 대모(玳瑁)의 기이한 물건이 중국에 넘쳐 다 사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장수를 선발함에 항사 다른 군진보다 중요하게 하니 문무와 위풍이 있어 대체를 알아 두렵고 미덥게 할 사람이 아니라면 불행하게 이따금 일이 생긴다.

장경(長慶) 3년 4월에 공부상서(工部尚書) 정공(鄭公)이 형부상서(刑部尚書) 겸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아 가서 그 직임을 맡게 하였다. 정공이 일찍이 절도사로 양주와 양주를 진부하고, 또 창경(滄景)과 덕체(徳棣)에서 장수가 되었으며 하남윤(河南尹)과 화주자사(華州刺史)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공덕이 칭찬할 만한 것이 있었다. 조정에 들어가 금오장군(金吾將軍) 산가상시(散騎常侍) 공부시랑상서(工部侍郎尙書)가 되었다. 가속이 백여 명이었지만 몇 평되는 집이 없어 집을 빌려서 거처하였으니, 귀하면서 능히 가난하니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부귀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명령이 있음에 조정에서는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장차 행차하려 함에 공경과 대부들이 진실로 시에 능한 사람은 모두 서로 따라서 시를 지어 조정의 정사를 찬미하고 공의 남행의 염려를 위로함에 운은 반드시 래(來)자로 한 것은 공의 정사를 이루고 빨리 돌아오기를 축원한 것이다.

送許郢州序

按唐書于公多刻 退之文多托之以諷

당서를 살피건대, 우공은 각박함이 많아 퇴지의 문장이 풍자로써 의탁하였다.//

愈嘗以書自通於于公累數百言 其大要言先達之士 得人而託之 則道徳彰 而名聞流 後進之士 得人而託之 則事業顯 而爵位通 下有矜乎能 上有矜乎位 雖恒相求而喜不相遇 于公不以其言為不可 復書曰足下之言是也 于公身居方伯之尊 蓄不世之材 而能與卑鄙庸陋 相應答 如影響 是非忠乎君而樂乎善 以國家之務為巳任者乎 愈雖不敢私其大恩 抑不可不謂之知巳 恒矜而誦之 情已至而事不從 小人之所不為也 故於使君之行 道刺史之事 以為于公贈 凡天下之事 成於自同 而敗於自異 為刺史者 恒私于其民 不以實應乎府 為觀察使者 恒急於其賦 不以情信乎州 繇是 刺史不安其官 觀察使不得其政 財巳竭而斂不休 人巳窮而賦愈急 其不去為盜也 亦幸矣 誠使刺史不私於其民 觀察使不急於其賦 刺史曰吾州之民 天下之民也 惠不可以獨厚 觀察使 亦曰某州之民 天下之民也 歛不可以獨急 如是而政不均令不行者 未之有也 其前之言者 于公既已信而行之矣 今之言者 其有不信乎 縣之於州 猶州之於府也 有以事乎上 有以臨乎下 同則成 異則敗者 皆然也 非使君之賢 其誰能信之 愈於使君 非燕游一朝之好也 故其贈行不以頌而以規

내가 일찍이 편지로 스스로 우공과 통신함이 수 백 언이었는데, 그 큰 요점은 말하자면 먼저 영달한 선비는 사람을 얻어서 의탁하면 도덕이 드러나고 명성이 유파되며, 뒤에 나아오는 선비는 사람을 얻어서 의탁하면 사업이 드러나고 작위가 통달하지만 아래가 능력에 자만함이 있고 위가 지위에 자만함이 있다면 비록 항상 서로 원하지만 서로 만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니, 우공이 그 말을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아니하여, 답서에 “족하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우공은 신분이 수령의 존위에 거처하고 세상에 없는 재주를 축적하여 능히 비루하고 용렬한 사람과 서러 응답하기를 그림자와 메아리 같이 하였으니, 이것은 군주에게 충성하고 선을 즐거워하여 국가의 일로 자신의 임무로 여기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내가 비록 감히 그 큰 은혜를 사사롭게 여기지 않지만, 또한 지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항상 자랑하고 칭송하니 정이 이미 지극하나 일이 따르지 않음은 내가 하지 않는 바이다. 그러므로 사군(使君)의 행차에 자사의 일을 말하여 우공을 위하여 준다.

무릇 천하의 일은 스스로 함께함에서 이루어지고 스스로 달리함에서 낭패를 보니, 자사 된 사람이 항상 그 백성을 사사롭게 여겨 성실로 고을에 호응을 하지 않고, 관찰사 된 사람이 항상 그 부세에 급하게 여겨 실정으로 고을에 미덥게 하지 않으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자사가 그 관직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고 관찰사가 그 정사를 얻지 못하여 사람이 이미 궁핍하나 조세는 더욱 급하니 그 떠나서 도적이 되지 않음이 또한 다행일 것이다. 진실로 가령 자사가 그 백성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고 관찰사가 그 조세를 위급하게 여기지 않고, 자사가 말하기를, 우리 고을의 백성은 천하의 백성이니 은혜로움이 유독 두터울 수 없다고 하고, 관찰사가 또 우리 고을의 백성은 천하의 백성이니 수렴함을 유독 위급하게 할 수 없다고 하면 이와 같이하여 정사가 균등하지 않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음은 없을 것이다. 그 앞에 말한 것을 우공이 이미 믿고서 실천하였거늘 지금 말한 것을 그 믿지 않겠는가? 현(縣)이 주(州)에 대해서는 주가 부(府)에 대해서와 같으니 위로 섬김이 있고 아래로 임함이 있어 함께 하면 이루어지고 달리하면 낭패를 보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사군의 어짊이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믿겠는가? 한유는 사군에 대해서 하루아침의 우호가 아니다. 그러므로 행차에 앞서 증정함에 칭송하지 않고 경계한다.

唐荆川曰此文作二段後總收

당형천이 말하기를 이 문장은 두 단락으로 구분한 이후에 모두 수습된다.//

贈崔復州序

此與送許郢州序同意而規諷于公處 最含蓄

이것은 송허령주서(送許郢州序)와 뜻이 같고 우공을 풍자한 곳이 가장 함축적이다.

有地數百里 趨走之吏 自長史司馬巳下數十人 其禄足以仁其三族 及其朋友故舊 樂乎心 則一境之人喜 不樂乎心則一境之人懼 丈夫官至刺史 亦榮矣 雖然 幽逺之小民 其足跡 未嘗至城邑 茍有不得其所 能自直於鄉里之吏者 鮮矣 況能自辨於縣吏乎 能自辨於縣吏者 鮮矣 況能自辨於刺史之庭乎 由是 刺史有所不聞 小民有所不宣 賦有常而民產無恒 水旱癘疫之不期 民之豐約 懸於州 縣令不以言 連帥不以信 民就窮而歛愈急 吾見刺史之難為也 崔君為復州 其連帥則于公 崔君之仁 足以蘇復人 于公之賢 足以庸崔君 有刺史之榮而無其難為者 將在於此乎 愈嘗辱于公之知而舊游於崔君 慶復人之將䝉其休澤也 於是乎言

땅 수 백리에 일하는 관리는 장사와 사마 이하로 수 십명이요, 그 봉록은 그의 삼족을 어질게 할 수 있고 그 붕우과 친구에게 미치니, 마음에 즐거워하면 한 지경의 사람이 즐거워하고 마음에 즐겁지 않다면 한 지경의 사람이 두려워하니, 장부의 관직이 자사에 이르면 또한 영광스러울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먼 곳에 사는 백성들은 그 발자취가 일찍이 성읍에 이르지 않으니 진실로 알맞은 곳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거든 스스로 향리의 관리에게 바르게 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인데, 하물며 능히 스스로 현리에게 변론함에 있어서랴? 능히 스스로 현리에게 변론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자사의 뜰에서 변론함에랴? 이 때문에 자사가 듣지 못하는 것이 있고 백성은 말하지 못함이 있어 조세는 항상 있고 백성의 생산에는 일정함이 없고 홍수 가뭄 질병이 기약하지 못함에 백성의 풍요와 굶주림은 주(州)에 매달려 있지만 현령이 말하지 않고 연수(連帥)가 믿지 않아서 백성이 궁핍한데 수렴함이 더욱 조급하니 내 자사 됨의 어려움을 알겠다. 최군이 복주를 다스리고 그 연수는 우공이니, 최군의 어짊은 복주의 사람을 소생시킬 수 있고 우공의 어짊은 최군을 쓸 수 있으니 자사의 영광이 있고 그 다스림에 어려움이 없음은 장차 여기에서 있구나. 내가 우공의 알아줌을 입었고 옛적 최군과 노닐었으니 복주의 사람이 장차 그 아름다운 은택을 입음을 경축한다. 이에 말하노라.

送幽州李端公序

命意髙 結體奇 轉掣從天降

명의가 높고 결체가 기이하니 전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元年 今相國李公為吏部員外郎 愈嘗與偕朝 道語幽州司徒公之賢 曰某前年 被詔告禮幽州 入其地 迓勞之使 里至 每進益恭 及郊 司徒公紅帓首 鞾袴 握刀 左右雜佩 弓韔服 矢揷房 俯立迎道左 某禮辭曰公 天子之宰 禮不可如是 及府 又以其服即事 某又曰公 三公 不可以將服承命 卒不得辭 上堂即客階 坐必東向 愈曰國家失太平 於今六十年 夫十日十二子相配 數窮六十 其將復平 平必自幽州始 亂之所出也 今天子大聖 司徒公勤於禮 庶幾帥先河南北之將 來覲奉職 如開元時乎 李公曰然 今李公既朝夕左右 必數數焉為上言 元年之言殆合矣 端公 歳時來壽其親東都 東都之大夫士 莫不拜於門 其為人佐甚忠 意欲司徒公功名流千萬歳 請以愈言為使歸之獻

원년에 지금 상국 이공이 이부원외랑이 되었는데, 한유가 일찍이 더불어 조정에서 함께하였더니 유주 사도공의 어짊에 대해서 말하기를, “모가 전년에 조서를 받고 예를 유주에 고하려 할 때, 그 영토에 들어가니 맞이하는 사신이 매 리마다 이르러 매번 나아옴이 더둑 공손하였다. 교외에 이르니 사도공이 붉은 띠를 두르고 가죽신에 바지를 입고 칼을 잡고 좌우에 섞어 차고 활과 활집을 가지고 화살을 방에 꽂고 허리를 굽혀 서서 길 왼편에서 맞이하니, 모가 예로 사양하여 말하기를, ‘공은 천자의 재상이니 예에 이와 같을 수 없다.’하였다. 부에 미쳐서 또 그 복장으로 일에 나아가니, 모가 또 말하기를, ‘공은 삼공이니 장수의 복장으로 명령을 받들 수 없다.’하였으나 끝내 말을 얻지 못했다. 당상에 오름에는 손의 섬돌로 나아가고 앉음에는 반드시 동쪽으로 향하였다.”하였다. 한유가 말하기를, “국가가 태평을 실추함이 지금 60년이다. 대저 10간과 12지가 서로 배합하니 수가 60에 다하니, 그 장차 다시 태평하려는가? 태평은 반드시 유주로부터 시작되니, 난리가 나온 바이다. 지금 천자는 크게 성스럽고 사도공이 예에 부지런하니 거의 하수 남북의 장수를 솔선수범하여 와서 뵙고 직분을 받들기를 개원 연간과 같아질 것이로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렇다”고 하였다. 지금 이공이 이미 아침저녁으로 와우에서 보좌하여 반드시 자주 주상을 위해 말하니, 원년의 말이 거의 합치할 것이다. 단공은 세시에 와서 그 어버이를 동도에서 축수를 하니, 동도의 사대부들이 문에 절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다른 사람을 위하여 도움이 매우 충성스러우니, 생각건대, 사도공의 공명이 천만년에 흐르고자 하니, 청컨대, 나의 말로 사신으로 돌아가는 바침으로 삼기를 바란다.

送殷員外序

學班掾之文 其嚴緊 如程不識李光弼之治兵

반고의 문학을 배워 그 엄정하고 긴밀함이 마치 정불식과 이광필이 병사를 조련하는 것과 같다.

唐受天命為天子 凡四方萬國 不問海内外 無小大 咸臣順於朝 時節 貢水土百物 大者特來 小者附集 元和睿聖文武皇帝 既嗣位 悉治方内 就法度十二年 詔曰四方萬國 惟回鶻 於唐最親 奉職尤謹 丞相其選宗室四品一人 持節往賜君長 告之朕意 又選學有經法通知時事者一人 與之為貳 由是 殷侯侑 自太常博士遷尚書虞部員外郎兼侍御史 朱衣象笏 承命以行 朝之大夫 莫不出餞 酒半 右庶子韓愈執盞言 曰殷大夫 今人適數百里 出門惘惘 有離別可憐之色 持被入直三省 丁寧顧婢子 語刺刺不能休 今子使萬里外國 獨無幾微出於言面 豈不真知輕重大丈夫哉 丞相以子應詔 真誠知人 士不通經 果不足用 於是 相屬為詩 以道其行云

당나라가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되니 무릇 사방의 온갖 나라가 해내와 해외를 묻지 않고, 큰 나라 작은 나라가 없이 모두 조정에 신하로 순종하고, 시절에 수산물과 토산물 등 많은 산물을 조공으로 바치니, 큰 나라는 홀로 오고 작은 나라는 모여 온다. 원화 연간에 예성하사고 문무하신 황제께서 이미 황위에 올라 기내의 땅을 모두 다스리고 법도를 이룬지 20년 만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오직 회골만이 당나라에 대해서 가장 친밀하고 직분을 받들기를 더욱 삼가니 승상이 종실 가운데 품계가 4품인 1사람을 선발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서 군장에게 주어서 나의 뜻을 말하라. 하고, 또 학문이 경법이 있고 시상에 통달한 1사람을 선발하여 더불어 돕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은후인 유가 대상박사로부터 상서우부 원외랑 겸 시어사에 옮겨 붉은 옷을 입고 상아홀을 가지고 명령을 받들어 가니 조정의 대부들이 나와서 전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술이 반순배 돎에 우서자 한유가 술잔을 잡고 말하기를, 은대부야 지금 사람이 수 백리를 감에 문을 나서며 머뭇거리고 이별함에 가련한 안색이 있고, 이불을 잡고 들어가 3성에서 숙직함에 간곡히 처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시끄럽게 하여 그치지 않거늘, 지금 그대가 만리 외국에 사신을 가며 유독 기미가 말에 묻어 나오지 않으니, 어쩌면 진실로 경중을 아는 대장부가 아니랴? 승상이 그대로 조서에 응하게 하니 진실로 사람을 아는 것이도다. 선비가 경전에 통달하지 않으면 과연 족히 등용하지 못한다. 이에 서로 이어서 시를 지어 그 행차를 말한다.

送楊少尹序

以二疏美少尹而專於虚景簸弄 故出没變化不可捉摸

두 소씨로 소윤을 찬미함에 보지 못한 상황에서 글을 지었기 때문에 출몰하고 변화함을 포착할 수 없다.

昔疏廣受二子 以年老一朝辭位而去 于時公卿 設供張 祖道都門外 車數百兩 道傍觀者 多歎息泣下 共言其賢 漢史既傳其事 而後世工畫者 又圖其迹 至今照人耳目 赫赫若前日事 國子司業楊君巨源 方以能詩訓後進 一旦以年滿七十 亦白丞相 去歸其鄉 世常說 古今人不相及 今楊與二疏其意豈異也 予忝在公卿後 遇病不能出 不知楊侯去時 城門外送者幾人 車幾兩 馬幾疋 道傍觀者 亦有歎息知其為賢與否 而太史氏又能張大其事為傳 繼二疏蹤跡否 不落莫否 見今世無工畫者而畫與不畫 固不論也 然吾聞楊侯之去 丞相有愛而惜之者 白以為其都少尹 不絕其禄 又為歌詩以勸之 京師之長於詩者 亦屬而和之 又不知當時二疏之去 有是事否 古今人同不同未可知也 中世士大夫以官為家 罷則無所於歸 楊侯始冠 舉於其鄉 歌鹿鳴而來也 今之歸 指其樹 曰某樹吾先人之所種也 某水某丘 吾童子時所釣遊也 鄉人莫不加敬 誡子孫 以楊侯不去其鄉為法 古之所謂鄉先生没而可祭於社者 其在斯人歟 其在斯人歟

옛적 소광과 소수 두 사람이 나이가 많음으로 하루아침에 지위를 사직하고 떠나니, 이에 공경의 벼슬에 있는 사람들이 장막을 설치하고 도성 문 밖에서 조신에게 제사지내니, 수백 대의 수레요. 길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많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그의 어짊을 말하였고, 한나라 역사에 이미 그 일을 기록하였고, 후세에 훌륭한 화공이 또 그 자취를 그림으로 그려서 지금에 사람들의 눈과 귀에 드러남이 환하게 마치 전일의 일과 같다. 국자사업인 양거원이 바야흐로 시에 능함으로 후진을 가르쳤더니 하루아침에 나이가 만 70으로 또한 제상에게 알리고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니, 세상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고금의 사람은 서로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거늘, 지금 양거원과 두 소씨는 그 뜻이 어찌 다르겠는가? 내가 외람되게도 공경의 아래에서 벼슬하였는데, 병이 들어 나가지 못하였다. 알지 못하겠다. 양후가 떠날 때 도성문 밖에 송별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며, 수레는 몇 대이며, 말은 몇 필인지? 길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또한 탄식하며 그가 어진 사람이 됨을 아는 사람이 있었는가? 태사씨가 또 능히 그 일을 장대하게 서술하여 전을 지어 두 소씨의 발자취를 이었는지? 적막하지는 않았는지를, 지금 세상에 훌륭한 화공이 없으니 그림을 그리고 그리지 않음을 진실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들으니, 양후가 떠남에 승상 가운데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 군왕에게 아뢰어 그 도읍의 소윤이 되게하여 그의 봉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고, 또 시가를 지어 권면하며 경성에 시에 능한 사람이 또한 이어서 화답하니, 또 알지 못하겠다. 당시 두 소씨가 떠남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를. 고금의 사람이 같고 같지 않음은 알지 못하겠다. 중세에 사대부가 관직으로 집을 삼다가 파직되면 돌아갈 곳이 없었지만 양후는 처음 관례를 하고 그 고을의 향시에 합격하여 녹명편을 부르며 경성에 왔더니, 지금 낙향함에 그 나무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 나무는 나의 선조가 심은 것이요. 이 물과 이 언덕은 내가 어릴 때 낚시하며 놀던 곳이라고 하니, 고을 사람들이 공경을 더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자손을 훈계함에 양후가 그 고향을 떠나지 않음으로 모범을 삼았다. 옛적 이른 바 “고을 선생이 죽음에 향사(鄕社)에서 제사지낸다.”는 것이 이 사람에게 있지 않는가? 이 사람에게 있지 않는가?

唐荆川 曰前後照應而錯綜變化不可言 此等文字 蘇曾王集内無之

당형천이 말하기를, 앞뒤가 조응하고 착종 변화함을 말할 수 없으니, 이러한 문장은 소식 증공 왕안석집에서는 볼 수 없다.

送湖南李正字序

以交㳺離合之情為文 又一種風調

교유하고 이별하고 만나는 정리로 문장을 지었으니, 또 일종의 문학 풍조이다.

貞元中 愈從太傅隴西公平汴州 李生之尊府 以侍御史管汴之鹽鐵 日為酒殺羊 享賓客 李生則尚與其弟 學讀書 習文辭 以舉進士為業 愈於太傅府 年最少 故得交李生父子間 公薨軍亂 軍司馬從事皆死 侍御亦被讒為民日南 其後五年 愈又貶陽山令 今愈以都官郎 守東都省 侍御 自衡州刺史 為親王長史 亦留此 掌其府事 李生自湖南從事 請告來覲 於時太傅府之士 惟愈與河南司録周君 獨存 其外則李氏父子相與為四人 離十三年 幸而集處 得燕而舉一觴相屬 此天也非人力也 侍御與周君 於今為先輩成徳 李生温然為君子 有詩八百篇 傳詠於時 惟愈也 業不益進 行不加修 顧惟未死耳 往拜侍御 謁周君 抵李生退 未嘗不發媿也 往時侍御 有無盡費於朋友 及今則又不忍其三族之寒饑 聚而館之 疏逺畢至 禄不足以養 李生 雖欲不從事於外 其勢不可得巳也 重李生之還者 皆為詩 愈最故 故又為序云

정원 연간에 한유가 태부 농서공을 따라 변주를 평정하였다. 이생의 아버지가 시어사로 변주의 염전과 철을 관장하여 날마다 술을 빚고 양을 잡아 빈객을 대접하였고, 이생은 그 아우와 독서하고 문장을 익혀 진사시에 합격함으로 사업을 삼았다. 한유는 태부부에 있어서 나이가 가장 작았기 때문에 이생의 부자 사이에서 교유하였다. 농서공은 군란에 죽고 군사마와 종사관은 모두 죽었으며, 시어사도 또한 참소를 입어 일남 땅에서 평민이 되었다.

5년 뒤에 한유가 또 양산의 수령으로 폄직되었더니, 지금 한유가 도관랑으로 동도성에 수령이 되었고, 시어사가 형주 자사로 있다가 친왕부의 장사 벼슬에 임명되어 또한 이곳에 머물며 그 친왕부의 일을 관장하였다. 이생은 호남의 종사관으로 휴가를 청하여 와서 어버이를 뵈었다. 이때 태부부의 선비는 오직 한유와 하남 사록인 주군이 유독 살아 있었고, 그 밖에 이씨 부자를 합하면 4인으로, 이별한 지 13년 만아 다행히 한 곳에 모여 잔치를 열어 한 술 잔을 들어 서로 이어니, 이것은 하늘의 일이요.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어사와 주군은 지금 선배로 덕을 이룬 군자이고, 이생은 온화하게 군자가 되어 시 800수가 당시에 전해져 사람들이 읊었다. 오직 한유만이 사업은 더욱 진전이 없고 행실은 더욱 닦여지지 않아 다만 오직 아직 죽지 않았을 따름이다. 가서 시어사에게 절하고 주군을 배알하고 이생에게 이른 이후 물러나 일찍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때가 없었다. 옛적 시어사는 다함이 없는 비용을 붕우에게 주었고, 지금 또 그 3족이 추위에 떨고 굶주림을 차마 보지 못하여 모여 살게 하니 소원하고 먼 곳의 사람이 다 이르러 봉록으로 봉양할 수 없었다. 비록 외직에 종사하지 않고자 하지만 그 형편이 그렇지 못하였다. 이생이 돌아감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모두 시를 지었는데, 한유가 가장 친하기 때문에 또 서문을 쓴다.

送水陸運使韓侍御歸所治序

覽此文與歐陽公食貨誌相叅看始得肯綮

이 문장을 열람함에 구양수의 식화지와 서로 참고하여 보면 비로소 요점을 얻는다.

六年冬 振武軍吏 走驛馬詣闕告饑 公卿廷議以轉運使不得其人 宜選才幹之士 往換之 吾族子重華 適當其任 至則出贓罪吏九百餘人 脫其桎梏 給耒耜與牛 使耕其旁便近地 以償所負 釋其粟之在吏者四十萬斛不徵 吏得去罪死 假種糧 齒平人 有以自效 莫不涕泣感奮 相率盡力 以奉其令 而又為之奔走經營 相原隰之宜 指授方法 故連二歳大熟 吏得盡償其所亡失四十萬斛者 而私其贏餘 得以蘇息 軍不復饑 君曰此未足為天子言 請益募人為十五屯 屯置百三十人 而種百頃 令各就髙為堡 東起振武 轉而西過雲州界 極於中受降城 出入河山之際 六百餘里 屯堡相望 冦來不能為暴 人得肆耕其中 少可以罷漕輓之費 朝廷從其議 秋果倍收 歳省度支錢千三百萬 八年 詔拜殿中侍御史 錫服朱金銀緋 其冬 來朝奏曰得益開田四千頃 則盡可以給塞下五城矣 田五千頃 法當用人七千 臣令吏於無事時 督習弓矢 為戰守備 因可以靖邊 庶幾所謂兵農兼事 務一而兩得者也 大臣方持其議 吾以為邊軍 皆不知耕作 開口望哺 有司 常僦人以車船 自他郡往輸 乗沙逆河 遠者數千里 人畜死 蹄踵交道 費不可勝計 中國坐耗而邊吏恒苦食不繼 今君所請田 皆故秦漢時郡縣地 其課績 又巳驗白 若從其言 其利未可遽以一二數也 今天子方舉羣䇿 以收太平之功 寧使士有不盡用之歎 懷奇見而不得施設也 君又何憂而中臺士大夫亦同言 侍御韓君 前領三縣 紀綱三州 奏課常為天下第一 行其計於邊 其功烈又赫赫如此 使盡用其䇿 西北邊故所没地 可指期而有也 聞其歸 皆相勉為詩 以推大之 而屬予為序

6년 겨울에 진무군의 관리가 말을 타고 대궐에 이르러 기근을 알리니, 공경들이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전운사에 알맞은 사람이 없으니 마땅히 재주 있는 선비를 선발하여 가서 교체하게 하라고 하였다. 나의 족친인 중화가 마침 그 임무를 맡았다. 그가 이르러서는 뇌물을 받아 죄인이 된 관리 9백여 명을 내어서 그들의 형틀을 풀어 주고 농기구와 소를 공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편리하고 가까운 땅을 경작하여 진 빚을 갚게 하고, 그 곡식이 관리에게 있는 것 4만 곡을 면제하여 징발하지 않으니 관리들이 죄를 받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종자를 빌려주고 평민과 나란하게 만들어 주어 스스로 힘쓸 것이 있으니, 눈물 흘리며 감격하여 분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서로 따라서 힘을 다하여 그 명령을 받들고, 또 위하여 분주히 경영하여 평야 습지 가운데 마땅한 곳을 보고서 방법을 가리켜 주었다. 그러므로 두 해를 연이어 풍년이 드니 관리들이 그들이 망실한 4만 곡을 모두 갚고 남은 것을 개인 가져서 살 수 있게 하니, 고을이 다시는 기근이 없었다. 군이 말하기를, “이것은 천자를 위하여 말할 것이 못된다. 청컨대, 더욱 사람을 모집하여 15둔을 만들고 둔에는 130명을 두어 100경의 땅에 파종하여 각각 높은 곳에 올라가 보루를 만들되, 동쪽으로 진무(振武)에서 시작하여 돌아 서쪽으로 운주의 경계를 지나 중수와 항성에서 다하여 산하를 출입하는 즈음 6백여 리에 둔과 보루가 서로 바라보게 하면 도적이 와도 능히 포악한 짓을 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그 가운데에서 마음대로 경작하여 조금이라도 운송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의논을 따라서 가을에 과연 두 배의 수확을 얻어 해마다 탁지전(度支錢) 1300만의 돈을 줄였다.

8년에 조서를 내려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하고 복과 주 금은 비단을 하사하였다. 그 해 겨울에 와서 조회하고 아뢰기를, “더욱 밭 4천 경의 땅을 개간할 수 있다면 모두 변방 아래의 5성에게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밭 5백 경은 국법에 마땅히 7천 명을 써야하니, 신이 관리에게 일이 없는 때에 명령하여 활과 화살을 감독하여 익히며 전쟁의 수비를 하여 인하여 변방을 안정시킬 수 있다면 거의 이른 바 ‘병무와 농업이 같은 일이니 한 가지를 힘써 두 가지를 얻는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대신들이 그의 의논을 견지하노니, 내가 생각하건대, 변방의 군대는 모두 경작함을 알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음식을 바라니, 담당관리가 사람에게 수레와 선박을 빌려주어 다른 고을로부터 가서 수입하게 하되, 사막을 넘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먼 곳은 수천 리에 이르니 사람과 가축이 죽고 우마가 길에서 교차하여 비용을 모두 헤아릴 수 없으니, 중국이 앉아서 소모하고 변방의 관리들은 항상 양식이 공급되지 않음을 괴롭게 여겼다. 지금 그대가 간청한 땅은 모두 진과 한나라 시기 군현이요, 그 공적이 또 이미 징험되고 명백하니 만약 그의 말을 따를 것 같으면 그 이로움을 갑자기 하나 둘로 헤아릴 수 없다. 지금 천자가 바야흐로 여러 계책을 사용하여 태평을 공로를 거두려는데 어찌 선비로 하여금 다 쓰지 못하는 탄식을 두어 기한 견해를 품고서 활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또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중대(中臺)의 사대부가 함께 시어사 한군은 앞전에 3현을 다스리고 3주의 기강을 다스려 과세를 아룁이 항상 천하에 으뜸이 되니, 그 계책을 변방에 시행하면 공렬이 또 빛남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니, 가령 그의 계책을 모두 사용한다면 서북쪽 변방에서 지난날에 빼앗긴 땅은 기일을 손꼽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서로 노력하여 시를 지어 추대하고 나에게 서문을 쓸 것을 부탁하였다.

贈張童子序

張本與昌黎同舉進士 而其贈文特呼之為童子 其以唐有童子科乎 言莊而嚴 其序事處 錯雜而煞有條貫

장동자는 본디 창려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였는데, 그에게 주는 증문에서 특별히 동자라고 불렀으니, 당나라에 동자과가 있었는가? 말이 장엄하고 일을 서술하는 곳에 섞어 두어 쇄연히 조리가 있다.

天下之以明二經舉於禮部者 歲至三千人 始自縣考試 定其可舉者 然後升於州若府 其不能中科者 不與是數焉 州若府總其屬之所升 又考試之如縣 加察詳焉 定其可舉者 然後貢於天子 而升之有司 其不能中科者 不與是數焉 謂之鄉貢 有司者 總府州之所升 而考試之 加察詳焉 第其可進者 以名上於天子而藏之 屬之吏部 歲不及二百人 謂之出身 能在是選者 厥惟艱哉 二經章句 僅數十萬言 其傳注在外 皆誦之 又約知其大説 繇是 舉者或遠至十餘年 然後與乎三千之數 而升於禮部矣 又或逺至十餘年 然後與乎二百之數 而進於吏部矣 班白之老半焉 昏塞不能及者 皆不在是限 有終身不得與者焉 張童子生九年 自州縣達禮部 一舉而進 立於二百之列 又二年益通二經 有司復上其事 繇是 拜衛兵曹之命 人皆謂童子耳目明達 神氣以靈 余亦偉童子之獨出於等夷也 童子請於其官之長 隨父而寧母 歲八月 自京師道陜 南至虢 東及洛師 北過大河之陽 九月始來及鄭 自朝之聞人 以及五都之伯長羣吏 皆厚其餼賂 或作謌詩 以嘉童子 童子亦榮矣 雖然 愈將進童子於道 使人謂童子求益者 非欲速成者 夫少之與長也異觀 少之時 人惟童子之異 及其長也 將責成人之禮焉 成人之禮 非盡於童子所能而巳也 然則童子宜暫息乎其已學者 而勤乎其未學者可也 愈與童子俱陸公之門人也 慕囘路二子之相請贈與處也 故有以贈童子

천하의 이경(二經)에 밝아서 예부의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이 해마다 3천 명이다. 처음 현에서 시험 쳐 합격할 만한 사람을 판단한 이후에 주와 부에 올리니 그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주와 부에서 그 부서에서 올린 것을 총괄하고, 또 시험을 현과 같이 본아 더욱 자세하게 살펴 합격할 만한 사람을 판단한 이후에 천자에게 바치고 담당관리에게 올리니 능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으니 향공이라고 한다.

담당관리가 부와 주에서 올린 명단을 총괄하여 시험하여 더욱 자세히 살펴 그 선발할 만한 사람을 등수를 매겨 명단을 천자에게 올려 소장하게 하고 이부에 소속되게 하니 해마다 2백 명에 미치지 못하니, 출신이라고 한다. 능히 여기에 선발됨은 매우 어렵다. 2경의 장구는 겨우 수 만 글자이고, 그 전과 주석 등 경서 이외에 것을 모두 외우고 또 그 큰 뜻을 요약하여 아니, 이 때문에 합격하는 사람은 혹 멀게는 10년 뒤에 3천 명의 명단에 포함되어 예부에 올린다. 또 멀게는 10년 뒤에 2백 명의 명단에 포함되어 이부에 나아가니 머리카락이 흰 늙은이가 반이 넘고 어둡고 막혀 능히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이러한 한계가 없어 평생동안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장동자는 9세에 주현에서 예부에 이르러 한 번 만에 합격하여 2백 명의 반열에 있었고, 또 더욱 2경에 통달하니 담당관리가 다시 그 일을 올렸다. 이 때문에 병조에 제수되니, 사람들이 모두 동자는 귀와 눈이 총명하고 정신과 기운이 신비롭다고 말하고, 나도 또한 동자가 동배들 가운데 특출함을 훌륭하게 생각하였다.

동자가 관원의 수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를 따라서 어머니를 뵈러가니, 8월에 경사로부터 섬주를 따라 남쪽으로 괵 땅, 동쪽으로 낙사에 이르고, 북쪽으로 대하의 북쪽을 지나 9월에 비로소 정 땅에 도착하였다. 조정에서 소문을 들은 사람으로부터 5부의 수장과 여러 관원들이 모두 그에게 연회와 선물을 두터이 하고, 혹은 송별시를 지어 동자를 가상하게 생각하니, 동자도 또한 영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한유가 장차 동자를 도로에 나아가 사람으로 하여금 동자는 유익함을 바라는 사람이요, 빨리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게 하였다. 대저 젊음은 장성할 때와는 보는 것이 다르니 어렸을 적에 사람들은 동자의 특이함을 생각하고 그가 장성함에 장차 성인의 예를 요구하니, 성인의 예는 동자가 능한 것에 다할 뿐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동자는 마땅히 이미 배운 것은 잠시 그치고 아직 배우지 않은 것을 부지런히 노력함이 좋겠다.

나는 동자와 함께 육공의 문인이니, 안회와 자로가 서로 청하여 바라고 처신함을 사모한다. 그러므로 동자에게 준다.

唐荆川曰只是科舉常事 而敘得何等頓挫

당형천이 말하기를, 다만 과거는 일반적인 일인데 서술함이 어떻게 둔좌(頓挫)할 수 있는가?

送牛堪序

此必牛堪不謝舉主 故昌黎為文云云

이것은 반드시 우감이 과거를 주관한 사람에게 사례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려가 문장을 지었을 것이다.

以明經舉者 誦數十萬言 又約通大義 徴辭引類 旁出入他經者 又誦數十萬言 其為業也 勤矣 登第於有司者 去民畝而就吏禄 由是 進而累為卿相者 常常有之 其為獲也亦大矣 然吾未嘗聞有登第於有司 而進謝於其門者 豈有司之待之也 抑以公不以情 舉者之望於有司也 亦將然乎 其進而謝於其門也 則為私乎 抑無乃人事之未思或者不能舉其禮乎 若牛堪者 思慮足以及之 材質足以行之 而又不聞其往者 其將有以哉 違衆而求識 立奇而取名 非堪心之所存也 由是而觀之 若堪之用心 其至於大官也 不為幸矣 堪太學生也 余博士也 博士師屬也 於其登第而歸 將榮於其鄉也 能無說乎

경전에 능통함으로 합격한 사람은 수 십만 말을 외우고 또 큰 뜻을 요약하여 알아서 말에 징험하고 종류를 인용하여 널리 다른 경전에 출입하는 것을 또 수 십만 글을 외우니, 그 학업이 부지런하다. 담당관리에게 뽑힌 사람은 민간의 농토를 버리고 관리의 봉급을 받는다. 이 때문에 나아가 여러 번 정승이 된 사람이 자주 있으니, 그가 얻은 것은 또한 많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담당관리에게 뽑혔으나 그의 대문에서 사례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어찌 담당관리를 대우함이 또한 공변되고 사사로운 정으로 하지 않아서가 아니랴? 합격한 사람이 담당관리에게 바라는 것도 또한 장차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가서 그의 대문에서 사례하면 사사로움이 되는가? 아니면 살면서 미쳐 생각하지 못하여 혹 그 예를 거행하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우감은 생각할 수 있고 실천할 자질이 있는데, 사례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그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리를 떠나 알려지고 특별한 행동으로 명성이 나는 것은 우감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 관찰한다면 우감의 마음은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감은 태학의 생동이고 나는 박사이다. 박사는 스승이 되니 그가 합격하여 귀향함에 장차 그 고을에 영광이 있을 것이니 능히 말하지 않겠는가?

唐荆川曰此篇文字意格異常

당형천이 말하기를, 이 편은 문자와 격식이 특별하다.

送竇從事序

奇崛

踰甄閩而南 皆百越之地 於天文 其次星紀 其星牽牛 連山隔其隂 鉅海敵其陽 是維島居卉服之民 風氣之殊 著自古昔 唐之有天下 號令之所加 無異於逺近 民俗既遷 風氣亦隨 霜雪時降 癘疫不興 瀕海之饒 固加於初 是以 人之之南海者 若東西州焉 皇帝臨天下二十有二年 詔工部侍郎趙植 為廣州刺史 盡牧南海之民 署從事扶風竇平 平以文辭進 於其行也 其族人殿中侍御史牟 合東都交游之能文者二十有八人 賦詩以贈之 於是 昌黎韓愈嘉趙南海之能得人 壯從事之答於知我 不憚行之遠也 又樂貽周之 愛其族叔父能合文辭 以寵榮之 作送竇從事少府平序

견과 민 땅의 남쪽은 모두 백월의 땅이다. 천문에 그 차서는 성기요, 기 별은 견우이다. 이어진 산이 그 북쪽을 막았고, 큰 바다가 그 남쪽을 막았으니, 이것은 오직 섬에서 살며 풀로 만든 옷을 입는 백성이다. 풍기가 다름이 드러난 것이 예로부터이다. 당나라가 천하를 소유하여 명령이 더해지는 곳은 멀고 가까움이 없어 민간의 풍속이 이미 아름다운 곳으로 옮기고 풍기도 또한 따라 서리와 눈이 때때로 내리고 전염병이 발병하지 않으니 강과 바다의 넉넉함이 진실로 처음보다 많았다. 이 때문에 남해로 가는 사람은 동과 서쪽에 있는 주와 같이 여겼다.

황제가 제위에 오른지 22년에 공부시랑 조식에게 조서를 내려 광주자사에 임명하여 남해의 백성들을 모두 통치하게 하니 고향이 부풍인 두평을 종사관에 임명하니, 두평이 문사로 나아갔다.

그가 행차함에 그의 친족인 전중시어사 두모가 동도에서 교유한 문장에 능한 28명을 합하여 시를 지어 증별하였다. 이에 창려 한유가 조남해가 능히 사람을 얻음을 가상하게 생각하고 종사가 자신을 알아줌에 보답하여 먼 행차를 싫어하지 않음을 장대하게 생각하고, 또 구휼함을 즐거워하고 그 친척 숙부가 능히 문사를 합하여 총애함을 사랑하여 송두종사소부평서를 짓노라.

送石處士序

以議論行叙事 當是韓之變調 然予獨不甚喜此文

의론으로 서사를 행하니 마땅히 이것은 한유의 변조이다. 그러나 나는 유독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河陽軍節度御史大夫烏公 為節度之三月 求士於從事之賢者 有薦石先生者 公曰先生何如 曰先生居嵩邙瀍榖之間 冬一裘 夏一葛 食朝夕 飯一盂 蔬一盤 人與之錢 則辭 請與出游 未嘗以事辭 勸之仕不應 坐一室 左右圖書 與之語道理 辯古今事當否 論人髙下 事後當成敗 若河決 下流而東注 若駟馬 駕輕車就熟路 而王良造父為之先後也 若燭照數計而龜卜也 大夫曰先生有以自老 無求於人 其肯為某來耶 從事曰大夫 文武忠孝 求士為國 不私於家 方今寇聚於恒 師環其疆 農不耕收 財粟殫亡 吾所處地 歸輸之塗 治法征謀 宜有所出 先生仁且勇 若以義請而彊委重焉 其何説之辭 於是 譔書詞 具馬幣 卜日以授使者 求先生之廬而請焉 先生不告於妻子 不謀於朋友 冠帶出見客 拜受書 禮於門内 宵則沐浴 戒行李 載書册 問道所由 告行於常所來往 晨則畢至 張上東門外 酒三行且起 有執爵而言者 曰大夫真能以義取人 先生真能以道自任 決去就 為先生別 又酌而祝 曰凡去就出處何常惟義之歸 遂以為先生夀 又酌而祝 曰使大夫恒無變其初 無務富其家而饑其師 無甘受佞人而外敬正士 無味於諂言 惟先生是聽 以能有成功 保天子之寵命 又祝曰使先生 無圖利於大夫而私便其身圖 先生起 拜祝辭曰敢不敬蚤夜以求從祝規 於是 東都之人士 咸知大夫與先生果能相與以有成也 遂各為歌詩六韻 遣愈為之序云

하양군절도사 어사대부(河陽軍節度御史大夫) 오공(烏公)이 절도사가 된 지 3개 월만에 종사관의 어진 자에게 선비를 구하니, 석선생을 천거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공이 “선생은 어떤 분인가?”물으니, 종사관은 말하였다. “선생은 숭산과 망산, 전수와 곡수의 사이에 거주하여 겨울에는 한 벌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한 벌 갈포옷을 입으며 아침과 저녁에 밥 한 그릇과 채소 한 그릇을 먹습니다. 사람이 돈을 주면 사양하고 더불어 나가 놀기를 청한다면 일찍이 일이 있다고 하여 피하지 않으며, 벼슬하기를 권유하면 응하지 않습니다. 한 방에 앉아 좌우에는 도서가 쌓여 있으며, 더불어 도리를 말하고 고금의 일에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분변하거나 또는 인품의 고하와 일이 뒤에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를 논하게 되면, 마치 황하가 터져서 아래로 흘러 동쪽으로 달리는 것과 같으며, 사마가 가벼운 수레를 멍에하고 익숙한 길로 달리는데 왕량과 조보가 앞뒤에서 모는 것과 같으며, 촛불을 비춰 시초점을 치고 거북점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대부가 말하기를, “선생은 스스로 늙으려 하여 남에게 구함이 없으니, 기꺼이 나를 위하여 와 주겠는가?”하니, 종사관이 말하기를, “대부께서는 문무와 충효를 겸비하니, 선비를 구함은 국가를 위해서요, 자기 집을 사사로이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도적이 항주에 모여 군대가 그 경내를 포위하여 농부들은 발을 갈지 못하고 재물과 곡식이 모두 탕진되었으니, 우리가 처한 지역은 군량을 공급하고 실어가는 길목되었습니다. 다스리는 법과 정벌하는 계책이 마땅히 나와야 할 것인데, 선생께서 인하고 용맹하시니, 만일 의리로 간청하고 억지로 중임을 맡긴다면 무슨 말로 상양하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글을 짓고 말과 폐백을 갖추어 날짜를 정하여 사자에게 주어서 선생의 집을 찾아 간청하게 하였다. 선생은 처자에게 말하지 않고 붕우들과 상의하지 않고 관대를 하고 나와 객을 보고 절하고 문서를 바고 문안서 예를 행하였다. 그리고 밤이 되자 목욕하여 행장을 꾸리고 서책을 싣고 길이 경유하는 바를 묻고 평소 왕래하던 사람들에게 길을 떠남을 알리니, 새벽에 모두 이르렀다. 그리하여 상동문 밖에서 전별 잔칙를 펼쳤는데, 술이 세 순배가 돌아 장차 일어날 때에 술잔을 잡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대부께서는 참으로 의로써 사람을 취하고 선생은 참으로 도로써 잡임하여 거취를 결단하니, 선생을 위하여 작별합니다.” 다시 술잔을 들면서 축원하였다. “므릇 출처와 거취는 어찌 일정하겠는가? 오직 의로 돌아갈 뿐이니, 마침내 이것으로 선생의 장수를 축원합니다.” 다시 술잔을 올리고 축원하였다. “대부로 하여금 마음이 떳떳하여 그 처음을 변치 말아서 자기 집안을 부유하게 하기를 힘써 그 군대를 굶주리게 하지 말며, 아첨하는 사람을 달게 받아들여 외면으로만 정사를 거두어 공경하지 말며, 아첨하는 말에 맛을 들이지 말고 오직 선생 말을 들어서 능히 성공을 거두어 천자의 영광스런 명령을 보존하라.” 또 축원하기를, “선생으로 하여금 대부에게 이익을 도모하여 사사로이 그 몸을 편하게 하지 몰지어다.”

선생이 일어나 축사에 절하고 말하기를, “감히 이른 아침과 밤늦도록 공경하여 축원과 타이름을 따르지 않으랴?” 하였다. 이에 동동의 사람들은 모두 대부와 선생이 서로 도와서 성공이 있을 줄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각기 가시 6운을 짓고 한유에게 서문을 짓게 하였다.

送溫處士赴河陽軍序

以烏公得士為文而温生之賢自見

오공이 훌륭한 선비를 선발함으로 문장을 지었으니 온생의 어짊이 절로 드러난다.

伯樂一過冀北之野 而馬羣遂空 夫冀北馬多天下 伯樂雖善知馬 安能空其羣耶 解之者 曰吾所謂空 非無馬也 無良馬也 伯樂知馬 遇其良 輒取之 羣無留良焉 茍無良 雖謂無馬 不為虚語矣 東都 固士大夫之冀北也 恃才能 深藏而不市者 洛之北涯 曰石生 其南涯曰溫生 大夫烏公 以鈇鉞鎮河陽之三月 以石生為才 以禮為羅 羅而致之幕下 未數月也 以溫生為才 於是 以石生為媒 以禮為羅 又羅而致之幕下 東都雖信多才士 朝取一人焉 㧞其尤 暮取一人焉 㧞其尤 自居守河南尹 以及百司之執事與吾輩二縣之大夫 政有所不通 事有所可疑 奚所諮而處焉 士大夫之去位而巷處者 誰與嬉遊 小子後生 於何考徳而問業焉 搢紳之東西行 過是都者 無所禮於其廬 若是而稱曰大夫烏公一鎮河陽而東都處士之廬 虛無人焉 豈不可也 夫南面而聽天下 其所託重而恃力者 惟相與將耳 相為天子 得人於朝廷 將為天子 得文武士於幕下 求内外無治 不可得也 愈縻於兹 不能自引去 資二生以待老 今皆為有力者奪之 其何能無介然於懷耶 生既至 拜公於軍門 其為吾 以前所稱 為天下賀 以後所稱 為吾致私怨於盡取也 留守相公首為四韻詩 歌其事 愈因推其意而序之

백락이 한 번 기북의 들판을 지남에 말떼가 마침내 텅비게 되었다. 기북은 천하에 말이 가장 많은 곳이니, 백락이 비록 말을 잘 알아보았으나 어찌 그 무리를 비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말하는 말떼가 비었다는 것은 말이 없다는 것이 아니요, 좋은 말이 없다는 것이다. 백락은 말을 잘 알아보아 좋은 말을 만나면 곧 취하여 말떼 중에 좋은 말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 만일 좋은 말이 남아있지 않다면 비록 말이 없다고 이르더라도 빈 말이 아닐 것이다.”

동도는 진실로 사대부의 기북인 셈이다. 재능을 자부하고 깊이 은둔하여 재능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낙수의 북쪽은 석생이요, 그 남쪽은 온생이다. 대부 오공이 부월을 잡고 하양을 진무한 지 3개 월 만에 석생을 인재라 하여 예로 그물질하여 막하로 데려갔고, 몇 달이 못되어 온생을 인재라 하여 이에 석생을 중매로 삼고 예로써 그물을 삼아 또다시 그물질하여 막하로 데려가니, 동도가 비록 진실로 재사가 많으나 아침에 한 사람을 취함에 그 뛰어난 사람을 뽑고 저녁에 한 사람을 취함에 그 뛰어난 사람을 뽑으니, 유수와 하남군으로부터 백사의 집사와 우리 두 고을의 대부에 이르기까지 정사에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고 일에 의심스러운 바를 어디에서 자문하여 처리하며, 사대부로서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거처하는 사람들이 누구와 더불어 교유할 것이며, 후배들이 어디에 가서 덕을 상고하고 학업을 물을 것이며, 진신 사대부로 동쪽과 서쪽으로 다니다가 이 도읍을 지나는 사람들이 그 마을에 경례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이와 같은데 대부 오공이 한 번 하양군에 진무함에 동도 처사의 마을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

남면하여 천하를 다스림에 중임을 맡겨 힘을 믿음은 정승과 장수 뿐이다. 정승은 천자를 위하여 인물을 조정에 얻고 장수는 천자를 위하여 문무의 인사를 막하에 얻는다면, 내외가 다스려지지 않기를 구하더라도 될 수 없다. 나는 이곳에 매여 스스로 몸을 이끌어 떠나지 못하고 석생과 온생 두 사람에게 의지하여 늙기를 기다렸더니, 이제 모두 권력자에게 빼앗겼으니, 어찌 마음속에 서운함이 없겠는가? 생이 이미 도착하여 공을 군문에서 배알하거든 나를 위하여 앞에 말한 것으로 천하를 위해 축하하고, 뒤에서 말한 것으로 나를 위해 인물을 모두 취해가는 것에 대한 사사로운 원망을 두고 있다고 전하라. 유수 상공이 먼저 사운시를 지어 그 일을 노래하니, 한유는 인하여 그 뜻을 미루어 서문을 짓노라.

送陸歙州詩序

貞元十八年二月十八日 祠部員外郎陸君 出刺歙州 朝廷夙夜之賢 都邑游居之良 齎咨涕洟 咸以為不當去 歙大州也 刺史尊官也 由郎官而往者 前後相望也 當今賦出於天下 江南居十九 宣使之所察 歙為富州 宰臣之所薦聞 天子之所選用 其不輕而重也 較然矣 如是而齎咨涕洟以為不當去者 陸君之道行乎朝廷 則天下望其賜 刺一州 則專而不能咸 先一州而後天下 豈吾君與吾相之心哉 於是 昌黎韓愈 道願留者之心 而泄其思 作詩曰我衣之華兮 我佩之光 陸君之去兮 誰與翺翔 斂此大惠兮 施于一州 今其去矣 胡不為留 我作此詩 歌于逵道 無疾其驅 天子有詔

정원 18년(786) 2월 18일에 사부원외랑(祠部員外郎) 육군이 나가 흡주를 다스리니, 조정에서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봉직하는 어진 분과 도읍에 거주하고 노는 어진이들이 탄식하고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모두 떠나가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흡주는 큰 고을이요, 자사는 높은 벼슬이다. 낭관으로 자사로 나가는 사람이 전후로 이어졌고, 당금에 부세가 천하에서 나옴이 강남이 9할을 차지하며, 관찰사가 살피는 곳은 흡주가 부유한 고을이다. 재신들이 천거하여 아뢰는 바요, 천자가 등용하는 바이니, 그 지위가 가볍지 않고 중함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데도 탄식하고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 떠나감을 만류함은 육군의 도가 조정에 실행되면 천하가 그 은혜를 입고, 한 고을을 맡으면 한 고을만 오로지하여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고을을 먼저 다스리고 천하를 뒤에 다스림이 어찌 우리 군주와 재상의 마음이겠는가?

이에 창려 한유는 육군이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을 말하여 그들의 생각을 펴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짓는다.

我衣之華兮 내 옷의 빛남이여

我佩之光 내 패옥이 빛나도다

陸君之去兮 육군의 떠남이여

誰與翺翔 누구와 더불어 고상하랴

斂此大惠兮 큰 은혜를 거두어

施于一州 한 고을에 베풀도다

今其去矣 이제 떠나가니

胡不為留 어찌 만류하지 않을까

我作此詩 내 이 시를 지어

歌于逵道 길거리에서 노래하니

無疾其驅 그 수레 빨리 몰지 말지어다

天子有詔 천자께서 다시 부르는 조서가 있으리라

送鄭十為校理序

古人古直朴渾之文有如是者今人類不為也

秘書御府也 天子猶以為外且逺 不得朝夕視 始更聚書集賢殿 別置校讐官 曰學士 曰校理 常以寵丞相為大學士 其他學士 皆達官也 校理則用天下之名能文學者 茍在選 不計其秩次 惟所用之 由是 集賢之書盛積 盡秘書所有 不能處其半 書日益多 官日益重 四年鄭生涵 始以長安尉選為校理 人皆曰是宰相子 能恭儉 守教訓好古義 施於文辭者 如是而在選 公卿大夫家之子弟 其勸耳矣 愈為博士也 始事相公於祭酒 分教東都生也 事相公於東太學 今為郎於都官也 又事相公於居守 三為屬吏 經時五年 觀道徳於前後 聽教誨於左右 可謂親薫而炙之矣 其髙大逺宻者 不敢隱度論也 其勤巳而務博施 以已之有 欲人之能 不知古君子何如耳 今生始進仕 獲重語於天下 而慊慊若不足 真能守其家法矣 其在門者 可進賀也 求告來寧 朝夕侍側 東都士大失不得見其面 於其行日 分司吏與留守之從事 竊載酒肴 席定鼎門外 盛賓客以餞之 既醉 各為詩五韻 且屬愈為序

비서는 어전에 소속된 부서이다. 천자가 오히려 궁외고 또 멀어서 아침저녁으로 볼 수 없다고 여겨서 비로소 다시 집현전에 책을 모아 별도로 교정하는 관료를 두었으니 학사와 교리이니, 항상 총애하는 승상으로 대학사를 삼고 기타 학사는 모두 높은 관직의 사림이요, 교리는 천하의 사람 가운데 문학에 능하다고 이름난 사람을 등용하니 진실로 선발함에 그 관직의 높고 낮음은 묻지 않고 오직 등용하는 바이니, 이로말미암아 집현전의 책이 많이 쌓여 비서에서 소유한 것을 다하지만 그 반을 처리할 수 없으니// 책이 날마다 더욱 많고 관직도 날마다 더욱 무거웠다.

4년에 정함이 비로소 장안위로 선발되어 교리가 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재상의 아들이로되 능히 공손하며 검소하여 교훈을 지키며 고의를 좋아하여 문장에 베풂이 이와 같으니 선발함에 공경 대부의 자제가 그 권면할 따름일 것이다.”하였다.

한유는 박사가 되어 처음 상공을(정함의 아버지) 제주에서 섬기겨 동도의 생도들을 나누어 가르치고, 동태학에서 상공을 섬겼고, 지금 도관에서 낭관이 됨에 또 상공을 현직에서 섬기니, 세 번 소속된 관리가 되어 5년을 지내면서 도덕을 전후에서 관찰하고 가르침을 좌우에서 들었으니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높고 크며 고원하고 치밀함은 감히 헤아려 의논하지 않으니//, 그 자신에게 부지런하여 널리 베풂을 힘쓰고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다른 사람을 능하게 하고자 하니, 옛 군자가 어떠했는지 알지 못하겠다.

지금 정생이 처음 진사로 중어(重語)를 천하에 얻었지만 안절부절 하며 부족한 듯 생각하였으니, 진실로 능히 그 가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니,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나아가 축하할 만하다. 휴가를 청하여 와서 문안하여 아침저녁으로 모시니 동도의 사대부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떠나는 날 분사리와 유수의 종사관이 가만히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정정문 밖에 자리를 펴서 손을 불러 전별하였다. 이미 취함에 각각 5언 시를 짓고, 또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唐宋八大家文鈔巻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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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0) 2008.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