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서발/발해고서

발해고서

황성 2008. 5. 26. 14:36

 

발해고서(渤海考序)

고려에서 발해사를 편수하지 않아서 고려가 떨치지 못했음을 알겠다. 옛날 고(高)씨가 북쪽에 터를 잡고 고구려(高句麗)라 하였고, 부여(扶餘)씨가 서남쪽에 터를 잡고 백제(百濟)라 했으며, 박(朴)․석(昔)․김(金)씨가 동남쪽에 터를 잡고 신라(新羅)라 하였으니 이를 삼국(三國)이라 하여 마땅히 그 삼국사(三國史)가 있고 고려가 편수한 것은 옳다. 부여씨와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그 남쪽을 소유하고 대(大)씨가 그 북쪽을 소유하여 발해(渤海)라 하였다. 이를 남북국(南北國)이라 하니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편수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씨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며 그 소유한 땅은 어디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니 그 동․서․북쪽을 개척하여 넓혔을 뿐이다. 저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함에 미쳐서는 왕씨가 통일하여 소유하고 고려(高麗)라 하였다. 그 남쪽 김씨의 땅을 소유한 것은 완전하게 했지만 그 북쪽 대씨의 땅을 소유한 것은 완전하지 않아서 여진(女眞)에 편입되거나 거란(契丹)에 편입되었다. 이 당시 고려를 위해 도모한 자가 마땅히 급히 발해사를 편수하고, 쥐고서 여진을 꾸짖기를 ‘어찌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느냐?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라 하고 한 장군으로 가서 거두어들이게 했다면 토문강(土門江) 북쪽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며, 쥐고서 거란을 꾸짖기를 ‘어찌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느냐?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라 하고 한 장군으로 가서 거두어들이게 했다면 압록강(鴨綠江) 서쪽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끝내 발해사(渤海史)를 편수하지 않아서 토문 북쪽과 압록 서쪽을 누구의 땅이 되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여진을 꾸짖고자 하나 그 말이 없고 거란을 꾸짖고자 하나 그 말이 없어서 고려가 끝내 약국(弱國)이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니 매우 한탄할 만한 일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발해는 요동에 멸망당했으니 고려가 무엇으로 그 사(史)를 편수 하겠는가?’라고 하니, 이는 그렇지 않다. 발해의 법제는 중국을 본받아 반드시 사관(史官)을 두었을 것이다. 그 홀한성(忽汗城)이 격파됨에 세자 이하 고려로 달아난 자가 10여만 명 이었다. 그 관직이 없었다면 반드시 그 책이 있었을 것이고 그 관직과 책이 없었더라도 세자에게 물었다면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대부 은계종(隱繼宗)에게 물었다면 그 예(禮)를 알 수 있었을 것이며 10여만 명에게 물었다면 알 수 없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張建章)은 당나라 사람이지만 오히려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으로서 유독 발해의 역사를 편수할 수 없었겠는가? 아! 문헌이 흩어져 사라진 지 몇 백 년 뒤에 비록 편수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으니. 내가 내각(內閣)에 있으면서 나라의 비서(秘書)를 많이 읽고 마침내 발해의 사실(事實)을 편찬하여 군(君)․신(臣)․지리(地理)․직관(職官)․의장(儀章)․물산(物産)․국어(國語)․국서(國書)․속국(屬國) 9고(考)를 만들었다. 세가(世家)․전(傳)․지(志)라고 하지 않고 고(考)라고 한 것은 사를 이루지 못하고 또 감히 역사로 자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