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열전/장식

장식

황성 2008. 5. 24. 12:23
 

張栻


 장식의 자는 敬夫니 승상 張浚의 아들이다. 영특하고 일찍 이루어 장준이 사랑하였다. 어릴 때의 배움으로부터 가르친 것이 인의충효의 실재가 아님이 없었다. 자라서 胡宏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호굉이 한 번 보고 곧 공자의 문하에서 인을 논한 친절한 뜻으로 알려주니, 장식이 물러나 생각하여 얻음이 있는 듯 하거늘 호굉이 일컬어 말하길 “성문에 사람이 있네.”라고 하였다. 장식이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옛 성현으로 스스로 기약하여 希顔錄을 지었다. 蔭補官으로 宣撫司都督府書寫機宜文字에 불리어 直秘閣에 제수 되었다. 당시에 효종이 새로 즉위하여 준이 謫所에서 일어나 막부를 열고 병정을 다스리니 모두 한 때의 선발을 지극히 하였다. 장식이 당시에 소년으로 안으로 密謀를 돕고 밖으로 여러 일을 도우니 그가 綜畫한 것이 막부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사이에 군무의 일을 가지고 들어가 아뢰고 인하여 진언하여 말하길 “폐하께서는 위로 종묘사직의 수치를 생각하고 아래로 중원의 도탄을 근심하여 마음에 근심하여 떨칠 것을 생각하니, 신이 생각하기를 이 마음이 드러남은 곧 천리가 보존된 바입니다. 원하건대, 더욱 성찰하여 옛 것을 상고하고 어진이와 친하여 스스로 도와 하여금 그 혹 조금이라도 쉼이 없게 한다면 금일의 공을 반드시 이룰 수 있고 인순의 폐단을 개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효종이 그 말을 기특하게 여겼다. 이에 드디어 군신의 계약을 정하였다. 장준이 지위에서 물러나니, 湯思退가 用事하여 마침내 병무를 파하고 화친을 강구하니 金人이 틈을 타고 淮甸에 들어오니 안과 밖이 크게 어지러웠는데, 廟堂에서는 오히려 화친의 의논을 주장하여 여러 장수에게 칙서를 내려 문득 병무를 말하지 말게 함에 이르렀다. 당시에 장준이 이미 죽으니 장식이 장사를 치르고 겨우 마침에 곧 배수되어 상소하여 말하길, “나는 金人과 더불어 함께 하늘을 이지 못하는 원수가 있다. 다른 때에 조정이 비록 일찍이 항복하는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러나 돌아서면 폐백을 가진 사신을 보내었다. 이 때문에 강화의 생각이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았으니, 지극한 정성과 측달한 마음이 하늘과 사람의 즈음에 감격할 수 없었다. 이것은 일이 자주 패하고 공이 이루어지지 않는 바이다. 지금 비록 거듭 여러 간사한 이에게 잘못되어서 국가를 비탄스럽게 하여 도적을 불렀으나, 그러나 또한 어찌 하늘이 이것으로 성심을 열고자 하지 않음을 알겠는가? 생각건대, 마땅히 깊게 이 이치를 살펴 나의 마음에 또렷하게 纖介의 의혹이 없게 한 연후에 안과 밖에 밝게 조서를 내려 공변되게 상벌을 행하여 군민의 성난 마음을 쾌청하게 한다면 인심이 기뻐하고 상기가 가득 차서 적이 물러남을 어렵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이후로 더욱 이 뜻을 견고하게 하여 화친을 말하지 않음을 맹세하고 오로지 힘써 스스로 강하여 비록 꺾이나 요란하지 하고 이 마음이 순일 상하를 관통하게 한다면 세월로 기다리면 또한 어찌 공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대답이 없었다. 오래됨에 劉珙이 상에게 천거하여 知撫州에 제수 되었더니 길에 오르지 못하고 嚴州로 옮겼다.

 당시에 재상인 虞允文이 恢復으로 자임하였으나, 그러나 구하는 것은 대체로 그 도리가 아니었다. 생각하기를 장식의 평소 의논이 마땅히 자기와 더불어 합한다고 하여 은근한 정을 전하였으나, 장식이 대답하지 않았다. 들어가 아룀에 먼저 말하길 선왕이 일을 일으키고 공을 세움에 뜻과 같지 않음이 없는 것은 그 마음의 정성이 천인의 마음을 감격시켜 더불어 사이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계획이 비록 수고로우나 일의 공이 성립되지 않으니, 폐하께서는 진실로 깊이 살펴서 일용의 사이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즈음에 또한 사사로운 마음이 드러남이 우리의 정성을 해치는 것이 있습니까? 있으면 극복하여 제거하여 우리 마음으로 하여금 통연히 사이하거나 섞이는 바가 없다면 의리를 봄이 반드시 정밀하고 의리를 지킴이 반드시 굳건하여 천인의 응함이 장차 구함을 기다리지 않고 얻을 것입니다. 대저 중원의 땅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먼저 중원의 마음을 얻음이 있어야 하고 중원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니 우리 백성의 마음을 얻음을 구함은 어찌 다른 것에 있겠습니까. 그들의 힘을 다하지 않고 그들의 재물을 상하게 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진실로 마땅히 대의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나, 그러나 베푸는 바에 선후가 있으니 그 완급을 자세하게 하지 않을 수 없고 힘쓰는 바에 명분과 실상이 있으니 그 취사를 자세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또 명주가 마땅히 깊게 살펴야 할 바입니다.“하였다. 다음해에 불러서 吏部侍郞 兼權起居郞侍立官으로 삼았다.   당시의 재상이 바야흐로 말하길, “적의 형세가 쇠약하여 도모할 수 있다.”고 하여 건의 하여 범사를 보내어 가서 능침의 까닭을 꾸짖게 하니 사대부들 가운데 그 대비가 없이 병력을 부름을 근심하는 자가 있어 문득 물리쳤다.

 장식이 상을 보았는데, 상이 말하길 “경은 적국의 일을 아는가?” 장식이 대답하여 말하길, “알지 못합니다.” 상이 말하길, “금나라는 기근이 해를 이어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난다.” 장식이 말하길 “금인의 일은 신이 비록 알지 못하나 국내의 일은 압니다.”하니, 상이 말하길, “무엇인가?” 자식이 말하길 “신이 간절히 보건대 근년에 諸道에 水旱이 많아 백성의 가난이 날로 성하고 국가의 병력이 약하며 재물이 다하여 관리가 誕謾하니 족히 의뢰하지 못하니 정히 저들로 하여금 실로 도모하게 할 수 있으니, 신은 우리가 족히 저들을 도모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니, 상이 위하여 침묵하였다. 오래됨에 장식이 인하여 아뢸 상소를 내어서 얽었다. “신은 가만히 생각건대, 능침이 隔絶함은 신하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지극한 아픔입니다. 그러나 지금 능히 말을 받들어 토벌하지 못하고 또 명분을 바르게 하여 끊지 못하거늘 곧 말을 낮추고 예를 두터이 하고자 한다면 대의에 있어서 이미 다하지 않고 논의를 달리하는 사람이 오히려 근심한다면 그 비루하고 두려워함이 진실로 더욱 심합니다. 그러나 신은 가만히 그 심의를 헤아리니 혹 또한 우리가 필승의 형세가 있지 않을 것을 보고 근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인저, 대개 필승의 형세는 마땅히 일찍 바르게 평소 정하는 때에 있고 두 진영이 기미를 결정하는 날에 있지 않습니다.”하니, 상이 위하여 귀를 세우고 용모를 고쳤다. 장식이 다시 읽어 “오늘 다만 마땅히 애통의 조서를 내어서 복수의 의리를 밝혀 금인을 드러내어 끊어 더불어 사신을 통하지 않은 연후에 덕과 정사를 수립하고 어진이를 등용하고 백성을 길러서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안으로 닦고 밖으로 떨쳐서 나아가 전쟁하고 물러나 지킴을 통틀어 한 일로 삼고, 또 반드시 그 실상을 다스려 허문을 만들지 않는다면 필승의 형세를 은연히 볼 수가 있으니, 비록 비루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도 또한 짐짓 분려하여 앞서기를 다툴 것입니다.”하니, 상이 위하여 탄식하고 칭찬하고 깨우쳐서 “앞전에 이러한 논의를 듣지 못하였다.”하였다. 그 후에 賜對로 인하여 앞의 말을 반복하니, 상이 더욱 가상하게 여기고 탄식하여 면전에서 깨우쳐 "마땅히 경으로 강관을 삼을 것이다,"하니, 때마다 마주 대하여 말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었다. 마침 史正志가 발운사가 되어 명분은 均輸法인데, 실상은 주현의 財賦 모두 빼앗으니 원근이 시끄러워 사대부가 다투어 그 해로움을 말하였다. 장식도 또한 말을 하니, 상이 말하길 “‘정지가 이르기를, 다만 군에서 취하고 백성에게 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하니, 장식이 말하길, 오늘날 주군의 재부는 대저 남음이 없으니 만약 취함을 그치지 않을 것 같으면 경상의 용도가 부족함이 있으니, 공교롭게 명색을 하여 백성에게 취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하니, 상이 놀라면서 말하길, ”경의 말과 같으면 이것은 짐이 발운사에게 손을 빌려주어 우리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다.“하고 문득 그 실상을 조사하게 하니 과연 식의 말과 같으니 곧 조서를 내려 그치게 하였다. 侍講을 겸하고 左司員外郞에 제수되어 시경의 葛覃장을 강의하여 진설하기를 “다스림은 경외함에서 생기고 난리는 교만에서 생기니 위정자로 하여금 매번 가색의 수고로움을 생각하게 하고 그 후비로 하여금 織紝의 일을 잊지 않게 한다면 마음이 보존되지 않는 이 드물 것입니다. 인하여 위로는 조종이 집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아름다움을 진설하고 아래로 오늘날 이로움을 일으켜 백성을 요란케 하는 해로움을 물리치소서.”하였다. 상이 탄식하여 말하길 이것은 왕안석이 이른바 ‘사람의 말은 족히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국가를 잘못하게 하는 바이다.“하였다. 知閤門事 張說이 簽書樞密院事에 제수하니, 장식이 밤에 상소를 만들어 그 불가함을 지극히 간언하고, 아침에 조당에 이르러 재상 虞允文을 질책하여 말하길, ”환관이 정치에 간여함은 京黼로부터 시작되었고 近習의 이들이 정사에 간여함은 상공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하니, 우윤문이 부끄러워하고 성을 내어서 견디지 못하였다. 장식이 다시 아뢰기를, “문무는 진실로 치우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무를 숭상하여 문무의 자루를 고르게 하고자 하나 등용한 바는 곧 이와 같은 사람이니 오직 족히 문리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정히 도리어 무신의 노여움을 격앙시킬까 두렵습니다.”하니, 효종이 느끼고 깨달아 명이 중간에 잠잠해졌으나 그러나 재상이 실재로는 몰래 장설에게 붙었다. 명년에 식을 내쳐서 원주를 맡게 하니, 앞의 명을 거듭 말하였다. 중외가 시끄러워 장열이 끝내 귀양가서 죽었다. 장식이 조정에 있으면서 한 해가 되지 않았는데 불러서 마주 대함이 6,7번에 이르렀는데, 말한 것은 대저 모두 수신하고 학문에 힘쓰고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구휼하며 요행의 무리를 억제시키고 아첨하는 이를 막는 것이었다. 이에 재상이 더욱 꺼렸고 근습의 무리들이 더욱 좋아하지 않으니 물러나 집에 거처한지 몇 해에 효종이 생각하여 조서를 내려 옛 관직을 제수하여 知靜江府經略 安撫廣南西路를 맡았는데, 거느리는 바에 황잔하여 도적이 많았다. 장식이 이름에 州兵을 간략하게 하여 쓸데없는 것은 도태시키고 빠진 것을 보충하여 여러 고을의 黥卒 伉健자를 기록하여 효용으로 삼아 날로 익히고 달로 살펴 거듭 保伍法을 엄중하게 하였다. 溪峒의 추장을 효유하여 원망을 그치고 이웃과 화목하여 서로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오랑캐들이 복종하였다. 조정에서 횡산에서 말을 구입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폐단이 더욱 심하여 변방의 백성이 고통을 고하였으나 말은 때에 이르지 않았다. 장식이 그 이로움에 해로움을 살펴서 60여 조목을 말들어 아뢰어 개혁하여 여러 만이가 감동하고 기뻐하여 다투어 좋은 말을 가지고 이르렀다. 효종이 장식의 다스림을 듣고 조서로 특별히 진급시켜 보문각 직각을 삼았다. 직분으로 인하여, 이윽고 秘閣修撰 荊湖北路轉運副使에 제수되었고, 다시 知江陵府 按撫本路가 되어 하루만에 14명의 탐리를 제거하였따. 호북 지방에 도적이 많았는데, 부현에서 왕왕 마음대로 불어주어 일반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니, 장식이 먼저 큰 관리로 적을 풀어준 자와 간악한 백성이 적을 숨겨준 자를 탄핵하여 그 무리로 하여금 서로 사로잡고 밀고하여 죄를 감면하게 하니 도적떼가 모두 달아났다. 군이 변방의 부대와 가까워 主將이 帥守와 더불어 매번 서로 낮추지 않으니, 장식이 예로 여러 장수를 대우하여 환심을 얻었고, 또 더욱 士伍를 구휼하여 충의로 면려하여 부대의 수장이 공적이 있으면 문득 관리로 보임하여 군사가 모두 감격하고 분발하였다. 並淮의 간악한 백성이 변방으로 나가 도적이 된자를 사로잡아 여러 사람을 얻었다. 북방의 도망한 노비가 또한 도적의 무리가운데에 있었는데, 장식이 말하길 조정이 능히 명분을 바르게 하여 적을 토벌하지 못하니 疆埸의 일로 그 굽음을 나에게 있게 해서는 안된다 하고 참수하기를 명령하고 경내를 순찰하여 도망한 노비를 묶어서 돌아가게 하니, 북방의 사람들이 탄식하여 말하길 “남조에 사람이 있네.”라고 하였다. 신영의 태수 劉大辨이 힘을 믿고 상을 바래서 널리 유민을 불러모아 현재의 호구에 익은 밭을 빼앗아 유민에게 주었는데, 장식이 유대변이 속이니 불러모은 유민이 백 명도 되지 않는데 허되게 그 수를 열 배로 증가하였으니, 청컨대, 그 죄를 논하십시오. 하여 소장이 여러 번 올렸으나 대변이 다른 군으로 옮기는 것에 그쳤다. 장식이 스스로 그 직분을 얻지 않하는 것으로 떠나기를 구하니 조서를 내려 문우전수찬 무이산충우관 提擧에 제수하였다. 병으로 짐짓 죽으로 함에 오히려 손수 상소를 만들어 상을 권면하여 군자와 친하고 소인을 멀리하여 신임은 한 자기의 치우침을 막고 호악은 천하의 이치를 공변되게 하십시오 하였다. 천하의 사람들이 전하여 외우니 장식이 태공 여망의 바람이 있었다. 죽을 때의 나이는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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