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권
편지(친구․제자들과의 문답) 書(知舊門人問答)
유공도(맹용)에게 답함 答劉公度(孟容)
【해제】이 편지는 순희 12년(을사; 1185, 56세)에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유공도의 학문하는 태도가 높은 것을 숭상하고 속히 하려는 폐단이 있음을 지적하고, 아울러 책을 덮고 강론하지 않으며 도리어 지수하는 일을 강설의 바탕으로 삼는 것은 학문을 하는데 마땅함을 잃은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유계장을 지나치게 인정함에 있어서도 비판하고 있다.
示喩爲學之意 終覺有好高欲速之弊 其說亦已見令叔書中矣 願更詳之 講學不厭其詳 凡天下事物之理 方冊聖賢之言 皆須子細反覆究竟 至於持守 却無許多事 若覺得未穩 只有黙黙加功 著力向前耳 今聞廢書不講 而反以持守之事爲講說之資 是乃兩失其宜 下梢弄得無收殺 只成得杜撰捏合而已 至謂彼中朋友只有季章一人可望 此未論其許與之當否 然其言之發亦太輕矣 舊見公度不如此 只此便是新學效驗 向見伯恭說孔子順答魏王問天下之高士 而曰世無其人 此一句似全不是孔子家法 此言有味 願試思之 如何
편지를 통해 학문하는 뜻을 말해주었는데, 결국 높은 것을 숭상하고 속히 하려는 폐단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에 대한 설명은 또한 이미 영숙(令叔)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드러나 있으니 다시 상세하게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학문을 강론할 때에는 상세하게 살피기를 싫어하지 않아야 하니 천하 사물의 이치(理)와 서책에 나온 성현(聖賢)의 말씀을 모두 자세하게 반복하여 끝까지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지수(持守)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허다한 일은 없습니다. 만약 온당하지 못하다고 여긴다면 다만 묵묵히 공부를 더하여 힘껏 앞을 향해갈 따름입니다. 지금 듣건대, 책을 덮고 강론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지수하는 일을 강설의 바탕으로 삼는다고 하니, 이는 둘 다 적절함을 잃게되고 결국에는 희롱만 하다가 아무런 수확도 없이 다만 두찬(杜撰)과 날조(捏造)를 하게 될 뿐입니다.
심지어 “그곳의 벗들 가운데 계장(季章) 한 사람만이 희망이 있다”고 말하니, 이는 그를 인정함이 정당한가, 부당한가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나 그 발언도 또한 너무 가볍습니다. 예전에 공도(公度)를 뵈었을 땐 이와 같지는 않았더니, 다만 이는 신학(新學)의 영향인 듯합니다. 전에 백공(伯恭)을 만났더니 “공자순(孔子順)이 ‘천하의 고결한 선비는 누구인가?’라는 위왕(魏王)의 물음에,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답했는데, 이 한 구절은 전혀 공자(孔子)의 가법(家法)이 아닌 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의미가 있으니, 원컨대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공도에게 답함 答劉公度
【해제】이 편지는 순희 15년(무신; 1188, 59세)에 쓴 편지이다. 왕안석(王安石)이 처음에 형국공(荊國公)에 봉해졌다가, 휘종(徽宗) 정화(政和) 중에 서왕(舒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그러자 육구연이 형국왕문공사당기(荊國王文公祠堂記)를 지어 왕안석의 공을 극찬하였는데, 이로 인해 주․륙 간의 모순이 격화되었다. 이에 유공도에게 편지를 보내 사당기를 배척한 것이다. 또한 이 편지에서는 유공도가 “세상에 어떻게 사람마다 나와 같고 사람들에게 나를 알도록 하겠는가. 나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여 흠이 없으면 이익되는 바가 많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특히 성현의 뜻과는 같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所喩世豈能人人同己 人人知己 在我者明瑩無瑕 所益多矣 此等言語殊不似聖賢意思 無乃近日亦爲異論漸染 自私自利 作此見解耶 不知聖賢辨異論闢邪說如此之嚴者 是爲欲人人同己人人知己而發耶 抑亦在我未能無瑕 而猶有待於言語辨說耶 今者紛紛 正爲論易西銘而發 雖未免爲失言之過 然末嘗以此爲悔也 臨川近說愈肆 荊舒祠記曾見之否 此等議論皆學問偏枯見識昏昧之故 而私意又從而激之 若公度之說行 則此等事都無人管 恣意橫流矣 試思之 如何 衡州之去爲有邂逅 政不須深自懲創 便相學不說話也
편지를 통해 “세상에 어떻게 사람마다 나와 같고 사람들에게 나를 알도록 하겠는가. 나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여 흠이 없으면 이익되는 바가 많을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는데, 이런 말은 성현의 뜻과는 너무나 같지 않습니다. 요사이 이론(異論)에 점차 물들어 스스로 사리(私利)에 빠져 이런 견해를 낸 것이 아닙니까? 모르겠습다만, 성현께서 이처럼 엄중하게 이론(異論)을 분변(分辨)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친 것은 사람마다 자기와 같게 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게 하려고 발한 것입니까? 아니면 또한 나에게 있는 것이 흠이 없을 수 없어 오히려 언어와 변설(辨說)을 기대한 것입니까? 지금 분분한 것은 바로 역(易)과 서명(西銘)을 논하기 위하여 발한 것이니, 비록 실언(失言)했다는 허물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이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임천(臨川)의 근래의 설은 더욱 제멋대로이니 형서사기(荊舒祠記)를 일찍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의논은 모두 학문이 치우치고 식견이 어둡기 때문인데 사의(私意)가 또한 이에 따라 격동하고 있습니다. 만약 공도(公度)의 설이 행해진다면 이런 일을 아무도 물리칠 사람이 없어서 방자한 뜻이 넘쳐 흐를 것입니다. 이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형주(衡州)가 떠난 것은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당한 일이니, 바로 깊이 스스로를 징창(懲創)하여 문득 서로 배워 말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유공도에게 답함 答劉公度
【해제】이 편지는 순희 15년(무신; 1188, 59세)에 위의 편지에 이어서 보낸 편지이다. 건창은 남강(南康)의 속현이다. 그런데 현의 사람들 중에 포현도(包顯道)의 무리들은 모두 육학(陸學)을 하였는데, 근래에는 그로인해 건창의 선비들 중엔 임천보다 지나친 자가 많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건창의 선비들 가운데에서 도리를 탐구보면 이단(異端)으로 사람을 오도한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建昌士子過此者多 方究得彼中道理 端的是異端誤人不少 向見賢者亦頗好之 近亦覺其非否 書中所喩衡州數句 爲已之意雖切 然恐未免有迫切之病也
건창(建昌)의 선비 중에는 이보다 지나친 사람이 많으니, 바야흐로 그들 가운데의 도리를 탐구해 보면 분명 이단(異端)으로 사람을 오도한 경우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 보니 그대도 그것을 매우 좋아했었는데 근래에는 또한 그 잘못을 깨닫지는 않았는지요? 편지에서 깨우쳐주신 형주(衡州) 등의 몇 구절은 자신을 위하는(爲己) 뜻이 비록 절실하지만 아무래도 박절한 병통은 면하지 못한 듯싶습니다.
유공도에게 답함 答劉公度
【해제】학문을 함에 의리로 흠뻑 적시고 함양하는 태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奮發猛舍之喩甚善 然亦須以義理浸灌涵養 庶幾可以深固久遠 不然一時意氣 恐未可恃也 如何便敢自保不復變耶
“분발하여 과감하게 버린다”는 말은 아주 좋지만, 반드시 의리로 흠뻑 적시고 함양해야만 거의 깊고 견고하게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 때의 의기기로 말한다면 아마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다시 감히 변하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유공도에게 답함 答劉公度
【해제】이 편지는 소희 2년(신해; 1191, 62세)에 쓴 편지이다. 유공도가 주자에게 편지를 보내 예전의 견해를 버리고 별도로 신법을 구하는 것이 공력을 씀에 법도가 된다고 하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주자는 마음을 비우고 익숙하게 완미하면 오래됨에 저절로 실처(實處)를 보고 스스로 이반(離叛)함을 용납하지 않게 될 것이지만, 만약 별도로 견해를 구하려고 한다면, 곧 이는 사설(邪說)이니 이단(異端)으로 흐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주자는 일찍이 진군거(陳君擧)가 저술한 시설(詩說) 에 대하여 편지로 묻자, 신해년(1191) 9월에 이에 대해 군거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이 도무지 실리(實理)를 보지 못하고 다만 잡박(雜博)한 것만을 구한 것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見喩舊見不甚分明 更欲別作家計 未知底裏果是如何 但此事別無奇妙 只是見成說底便是道理 只要虛心熟玩 久之自然見得實處 自是不容離叛 便是到頭 若更欲別求見解 卽是邪說 鮮不流於異端矣 君擧春間得書 殊不可曉 似都不曾見得實理 只是要得雜博 又不肯分明如此說破 却欲包羅和會衆說 不令相傷 其實都曉不得衆說之是非得失 自有合不得處也 葉正則亦是如此 可歎可歎
보내 주신 편지에서 “예전의 견해가 매우 분명하지 않기에 다시 별도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고 하니, 이것이 과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일은 별로 기묘한 것이 없고 말한 것이 곧 도리일 뿐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익숙하게 완미(玩味)하면 오래됨에 저절로 실처(實處)를 보고 스스로 이반(離叛)함을 용납하지 않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지극한 곳에 도달한 것입니다. 만약 별도로 견해를 구하려고 한다면, 곧 이는 사설(邪說)이니 이단(異端)으로 흐르지 않는 경우가 드물 것입니다. 봄 사이에 군거(君擧)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도무지 실리(實理)를 보지 못하고 다만 잡박(雜博)한 것만을 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분명하게 설파(說破)하지 못하고 도리어 여러 학설(衆說)을 끌어 모아 조합하여 서로 손상되지 않게 하니, 실은 모두 여러 학설의 시비와 득실을 전혀 알지 못하여 자연히 합당하지 못한 곳이 있게 되었습니다. 섭정칙(葉正則)도 이와 같으니 탄식할 일입니다.
유공도에게 답함 答劉公度
【해제】이 편지 역시 소희 2년(신해; 1191, 62세)에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학문하는 태도에 대해 단지 지수(持守)하고 성찰(省察)하여 점차로 오래되고 익숙하면 자연히 관통(貫通)되어 곧 저절로 편안하게 수용할 곳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 편지에서는 불교를 믿는 사람은 이미 한편으로 빠져 구제할 수가 없고 믿지 않는 사람은 나아갈 방향 바로 정하지 못하여 그 사이에 들떠 있으므로 이 또한 어떻게 없어지게 할 수 없음을 안타가워하고 있다.
所論爲學之意甚善 初蓋不能不以爲疑 今得如此 甚慰意也 究觀聖門敎學循循有序 無有合下先求頓悟之理 但要持守省察 漸久漸熟 自然貫通 卽自有安穩受用處耳 千岐萬徑 雜物並出 皆足以惑世誣民 其信之者旣陷於一偏而不可救 其不信者又無正定趣向而泛濫於其間 是亦何能爲有亡耶 平父相處覺得如何 似亦未有箇立脚處也 因書更勸勉之
학문을 하는 것에 대하여 논한 뜻은 매우 좋습니다. 처음에는 대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금 이와 같으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성문(聖門)의 교학(敎學)을 살펴보면 순서가 정연하여 본래 돈오(頓悟)를 먼저 구할 이치가 없습니다. 다만 지수(持守)하고 성찰(省察)하여 점차로 오래되고 익숙하면 자연히 관통(貫通)되어 곧 저절로 안온(安穩)하게 수용할 곳이 있을 뿐입니다. 천만 갈래로 길이 나뉘어 잡다한 학설이 쏟아져 나와 모두 세상과 백성을 속이고 있는데 이를 믿는 사람은 이미 한 쪽에 빠져 구제할 수가 없고 믿지 않는 사람은 나아갈 방향(趣向)을 바로 정하지 못하여 그 사이에 떠돌고 있으니 이 또한 어떻게 없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평보(平父)와 같이 지내면서 어떤 것을 느꼈습니까? 아직 기초를 세우지 못한 듯하니, 편지로 다시 권면해 주십시오.
유중승에게 답함 答劉仲升
【해제】이 편지는 경원 원년(을묘; 1195, 66세)에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학문함에 있어 오로지 문자(文字)만 지키고 단지 존양(存養)에만 힘쓰는 사람은 곧 지리하고 혼타(昏惰)한 병통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고, 또 이런 잘못을 제거하려고 하면 망령된 뜻으로 단계를 뛰어 넘든지 공허하게 두찬(杜撰)하는 과실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에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주자는 이 편지에서 격물(格物)이란 단지 동(動)과 부동(不動)을 분별할 뿐이지 동(動)함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것은 도(道)를 체득하는 요점과 덕(德)에 들어가는 문에 있어서 모두 방해만 될 뿐이므로 이것을 따지지 말아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염려(念慮)와 하나의 동작도 착실하게 체인(體認)하여 이것이 천리(天理)인가, 이것이 인욕(人欲)인가를 자세히 변별하고 과감하게 판단하여 잘못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別紙所示季章議論 殊不可曉 恐不至如此之謬 却是仲升聽得不分明 記得不子細 語脈間轉却他本意 不然 則眞非吾之所敢知矣 大抵學問專守文字但務存養者卽不免有支離昏惰之病 欲去此病 則又不免有妄意獵等懸空杜撰之失 而平日不曾子細玩索義理 不識文字血脈 別無證佐考驗 但據一時自己偏見 便自主張 以爲只有此理 更無別法 只有自己 更無他人 只有剛猛剖決 更無溫厚和平 一向自以爲是 更不聽人說話 此固未論其所說之是非 而其粗厲激發 已全不似聖賢氣象矣 季章意思正是如此 若只解義有差 下字不穩 猶未爲深害 却是人心道心思理思事等說大段害事 若如其言 卽是四端之發皆屬人心 而頑然不動者方是道心 所謂格物者只是分別動與不動 而不復計其動之是否矣 此於體道之要入德之門皆有所妨 決然不是道理無疑
但如仲升 則又墮在支離昏惰之域 而所以攻彼者未必皆當於理 彼等斫以不服 亦不可不自警省 更就自己身心上做功夫 凡一念慮一動作 便須著實體認此是天理耶 是人欲耶 子細辨別 勇猛斷疊 勿令差誤 觀書論理 亦當如此剖判 自然不至似前悠悠度日矣 所論語孟兩絛亦似未安 此等處且玩索見在意趣 不須如此立說 枉費心力也
별지에 보여주신 계장의 의론은 특히 알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잘못에 이르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중승이 들은 것이 분명하지 않았다거나 기록한 것이 자세하지 않아서 문맥 사이에서 도리어 그의 본의를 바꾼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참으로 제가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저 학문은 오로지 문자(文字)만 지키고 단지 존양(存養)에만 힘쓰는 사람은 곧 지리(支離)하고 혼타(昏惰)한 병통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니, 이런 병통을 제거하려고 하면 또 망령된 뜻으로 단계를 뛰어 넘든지 공허하게 두찬(杜撰)하는 과실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자세하게 의리를 완색(玩索)하지 못하고 문자의 혈맥(血脈)도 알지 못하여 따로 고증하는 것도 없이 단지 한때 자기의 편견에 근거하여 문득 자기 주장을 하여 이런 이치만 있고 다시 별도의 법이 없으며, 다만 자기만 있고 다시 다른 사람은 없으며, 다만 강경하고 맹렬하게 분석하여 판단함만 있고 다시 온화하고 화평함은 없이 한결 같이 자기를 옳다고 여겨 다시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합니다. 이는 진실로 그가 논한 바의 시비를 논하기도 전에 거칠게 격발(激發)하는 것이니 전혀 성현의 기상(氣象)과 같지 않습니다. 계장(季章)의 의사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만약 뜻을 해석함에도 차이가 있거나 글자를 쓰는 것은 온당치 않은 정도뿐이라면 오히려 심각한 해는 아니겠지만, 도리어 인심(人心)․도심(道心)․사리(思理)․사사(思事) 등의 설은 크게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만약 그의 말과 같다면 이 사단(四端)의 발현은 모두 인심(人心)에 속하고 완고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야 비로소 도심(道心)인 것입니다. 이른바 격물(格物)이란 단지 동(動)과 부동(不動)을 분별할 뿐 다시는 그 동(動)함이 옳은지 그른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道)를 체득하는 요점과 덕(德)에 들어가는 문에 있어서 모두 방해만 될 뿐 결코 의심할 것이 없는 도리는 아닙니다.
다만 중승(仲升)과 같은 경우는 또 지리하고 혼타한 구역에 떨어져 있어서 저들을 공격하는 이유들이 반드시 모두 이치에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복종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또한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여 다시 자기의 신심(身心)상에 나아가 공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한 가지 염려(念慮)와 하나의 동작도 곧 착실하게 체인(體認)하여 이것이 천리(天理)인가, 이것이 인욕(人欲)인가를 자세히 변별하고 과감하게 판단하여 잘못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글을 읽고 이치를 논함에도 이와 같이 분석하고 판단한다면 자연히 이전처럼 헛되게 시일을 보내는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논어, 맹자를 논한 두 조목도 또한 옳지 않은 것 같으니, 이곳은 우선 드러난 의취(意趣)를 탐색하여 반드시 이와같이 학설을 세요 마음과 힘을 헛되이 소비해서는 안됩니다.
유중승에게 답함 答劉仲升
【해제】이 편지는 아마도 유증승이 논어헌문의 “이기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며, 원망하고 탐욕함”에 대해 정자(程子)의 이른바 극벌원욕(克伐怨欲)이 없다는 말을 가지고 질문한 것 에 대한 답장이다. 주자는 거기에 대한 답으로 보는 곳마다 관통하고 투철하여 막힘이 없고 행하는 곳마다 순수하고 익숙하여 어긋남이 없어야 문득 자연히 쾌활하여 저절로 극벌원욕(克伐怨慾)의 뿌리가 없어질 것이니, 따로 한 조항의 공부가 있어서 이런 일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하고 있다.
所諭玩味見成義理甚善 然亦須就自己分上體當 方見眞實意味也 顔子之樂 原憲之問 此等處說時各是一義 其實却只是平日許多功夫到此成就 見處通透無隔礙 行處純塾無齟齬 便自然快活 自無克伐怨欲之根 不是別有一項功夫理會此事也 但未知仲升平日所用功夫如何耳 此不可不勉也
“이전의 학자들이 이루어놓은 의리를 음미한다”고 한 말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자기의 몸에서 체득(體得)을 해야 바야흐로 진실한 의미를 볼 수가 있습니다. 안자(顔子)의 즐거움과 원헌(原憲)의 물음,과 같은 곳은 말할 때마다 각각 하나의 의리입니다. 다만 사실은 도리어 평소의 허다한 공부가 여기에 이르러 성취될 뿐이니 통찰하는 곳마다 통투(通透)하여 막힘이 없고 실행하는 곳마다 순수하고 익숙하여 어긋남이 없어야 곧 자연히 쾌활하여 저절로 극벌원욕(克伐怨欲)의 뿌리가 없어질 것이요, 따로 한 조항의 공부가 있어서 이런 일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승(仲升)의 평소 공부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 점을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언제 쓴 편지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유원주가 소희 원년(경술; 1190)에 세상을 뜬 것 보면 아마도 이 전에 쓴 편지인 것 같다.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유계장이 유원주와 함께 일을 행함에 뜻이 합하지 않음이 있으므로 이것을 주자에게 편지로 말한 것 같다. 그러므로 주자는 이에 대해 유원주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 교제 방법이 오염되지 않았다고 답해주고 있다. 그리고 함께 있는 벗들에게 하나의 책을 읽게하고, 토론하여 헛된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탁월한 인물이 없음을 탄식하고 있다.
劉袁州不謂遂止於此 令人心折 細讀來書 知所以經紀其家者 不以生死從違二其心 不勝嘆服 益見袁州之知人 交道之不汚也 更望始終此志 使其後人有以承繼前人之志 千萬之幸也 文會規模只如舊耶 或有小改易也 此間朋友只令專一自看一書 有疑問處却與商量 似却不枉費功夫 然亦未見卓然可望者 殊可慮也
유원주(劉袁州)는 “마침내 여기에서 그치면 사람의 마음을 끊어지게 한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자세히 읽고 그 집안을 다스리는 방법을 아는 자는 삶을 좇고 죽음을 피하는 것을 가지고 마음을 둘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탄복(歎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원주의 사람을 알아보고 교제 방법이 오염되지 않았음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시종 이 뜻을 지켜 후인들로 하여금 전인의 뜻을 계승하게한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문회(文會)의 규모는 여전 합니까? 혹시 조금이라도 바뀐 것이 있는지요? 이곳의 벗들은 전일하게 스스로 하나의 책만을 읽게하는데 의심난 곳이 있으면 함께 토론하니 그래도 헛된 공부를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기대할 만한 탁월한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참으로 걱정됩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이 편지는 소희 3년(임자; 1192, 63세)에 쓴 편지이다. 주자는 광종(光宗) 소희(紹熙) 임자년(1192)에 지정강부 광서경략(知靜江府廣西經略)으로 제수되었는데 사임했다. 당시 유계장이 주자에게 편지를 보내 왔는데, 주자는 그의 학문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힘쓰고 이치가 밝지 못하여 스스로 괴로워하면서도 소득은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주자는 또 관직을 사임하고 나서 마침 몇몇의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강학(講學)에 첫 발을 내 디뎠으므로 관직을 면하고 다만 한 두 학자라도 성취시킬 수 있다면 학문에 유익함이 있게 되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賢者比來爲學如何 雖未相見 然覺得多是不曾寬著心胸 細玩義理 便要扭捏造作 務爲切己 所以心意急迫而理未大明 空自苦而無所得也 熹桂林之行辭免未報 未知竟如何 此間有數士友講學方就緖 從官未必有益 若得免行 成就得一二學者 非小事也
요즘 그대의 학문은 어떻습니까? 비록 아직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대부분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의리를 자세히 완미하지 못하고, 문득 날조(捏造)하여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힘쓰니, 심의(心意)가 급박하고 이치가 크게 밝지 못하여 공연히 스스로 괴로워하면서도 소득은 없다는 것을 느끼겠습니다.
저(熹)는 계림(桂林)에 임명된 관직을 사면(辭免)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으니 결국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몇 사우(士友)들은 이제 막 강학(講學)에 첫 발을 내 디뎠으니 벼슬살이는 보탬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벼슬을 면할 수 있어서 한 두 학자를 성취시킬 수 있다면 그것도 작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위의 편지에 이어서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유계장이 생각이 급박하여 관대하고 평화롭지 못하고 높은 것만 힘쓰고 절실한 것에 힘쓰지 않으며 평심으로 도리를 성실히 보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니, 이런 태도는 남의 지견(知見)을 막을 뿐임을 지적하였다.
講會想仍舊 專看何書 此書附廬陵葉尉 渠此中人 時有往來之便 有疑可講 不待面諭 但覺得季章意思急迫不寬平 務高不務切 而不肯平心實看道理 只此意思 亦殊礙人知見也
강회(講會)는 여전하리라 생각됩니다. 무슨 책을 전념하여 보고 있습니까? 이 편지를 여릉(廬陵) 섭위(葉尉)에게 보내니, 그는 이 곳 사람입니다. 때로 왕래하는 인편이 있으니 의문이 있으면 강론할 수 있을 것이고 대면하여 논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단지 계장(季章)은 생각이 급박하여 관대하고 평화롭지 못하여 높은 것만 힘쓰고 절실한 것에 힘쓰지 않으며 평심으로 도리를 성실히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음을 느끼겠습니다. 하지만 단지 이런 생각은 특히 남의 지견(知見)을 막을 뿐입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주자는 영종(寧宗) 소희 5년(갑인; 1194, 65세) 10월 기축(己丑)일에 궁궐에 들어갔다가 윤달 병술(丙戌)일에 파직되었는데, 다음 해인 경원 원년(을묘; 1195, 66세) 12월에 남경홍경관(南京鴻慶官)을 관리하였으니, 이 편지는 을묘년 말이나 병진(1196)년 초에 스여진 것 같다. 이 편지에서는 숭도관을 얻게 되었지만 병이 심해져서 더 이상 장래를 기약하기 힘들 것 같다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熹去歲入都 不能兩月 略無報效 罷遣而歸 深以自愧 今幸復得祠祿 杜門養痾 足以待盡 無足言者 但衰病愈甚 左目己盲 其右亦昏 此數日來 幾全不見物矣 深欲整頓舊書 而病愈如此 則所謂有補於將來者 亦不復可期矣
제가 지난해 도성에 들어갔으나 두 달이 채 못되어 조금도 은총을 갚지 못하고 파직되어 되돌아 오고 나니 깊이 스스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다행히 다시 사록(숭도관)을 얻어 문을 닫고 병이나 치료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쇠약하고 병듦이 더욱 심하여져서 왼쪽 눈은 이미 맹인이 되었고 그 오른 쪽도 어두워졌습니다. 요 몇일 내로 거의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옛 서책들을 잘 정돈하고자 하지만 병이 더욱 이와 같으니 이른바 장래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말도 다시는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이 편지는 경원 원년(을묘; 1195, 66세)에 쓴 편지이다. 이 해 여름에 여자약(呂子約)은 조승상(趙丞相)을 변론하여 구하고 소주(韶州)에 숨어살다가 길주(吉州)로 떠나갔는데, 길주가 바로 여릉(廬陵)이니 계장(季章)이 거주하던 곳이다. 이 편지에서는 유계장의 학문 태도가 사사롭게 조리를 세우는 것이 너무 많고, 지적하여 안배하려는 마음이 너무 무거운 것이 병통임을 지적하였으며, 본원을 친절하게 들어 곧바로 앞을 향하여 착실하게 진보하면 저절로 평온하게 행하고 곧바로 도달하여 점차 향상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所喩爲學之意甚善 但覺如此私下創立條貫太多 指擬安排之心太重 亦是大病 子約自有此病 賢者從來亦未免此 今又相合 打成一片 恐非所以矯偏補敝而趨於顯明正大之塗也 聖賢敎人自有成法 其間又自有至簡約極明白處 但於本原親切提撕 宜便向前 著實進步 自可平行直達 迤邐向上 何必如此迂曲繚繞 百種安排 反令此心不虛 轉見昏滯耶
학문을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신 뜻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이처럼 사사롭게 너무 많은 조목을 만들어 세우고, 지적하여 안배(安排)하려는 마음이 너무 무거운 것도 큰 병통입니다. 자약(子約)이 스스로 이런 병통을 지니고 있는데 그대도 종래에 이런 점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서로 부합한 곳을 모아서 하나로 만드니, 아마 편중(偏重)된 것을 바로잡고 폐단을 보충하여 공명정대(正大)한 길로 나가는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성현이 사람을 교육하는 데에는 저절로 완성된 방법이 있으니, 그 사이에 지극히 간약(簡約)하고 매우 명백한 곳이 있습니다. 다만 본원에서 친절하게 인도되어 곧바로 앞을 향하여 착실하게 진보하면 저절로 평온하게 행하고 곧바로 도달하여 점차 향상될 것이니, 하필 이처럼 우회하고 여러 모로 안배하여 도리어 이 마음을 비우지 못해 더욱 혼미하고 침체(沈滯)하게 하겠습니까?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어느 때 쓰여진 편지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아마도 위학의 금지가 한창인 때 쓰여진 편지인 듯하다. 당시 유계장도 병을 앓고 있었던 것같다. 주자는 이 편지에서 정신이 혼몽하고 피곤함이 이전보다 더욱 심하여 비록 감히 책을 덮지는 못하고 있으나 다시 크게 진보하지 못할 것같은 아타까움과 위학에 대한 금지가 한창이므로 동지들이 입각하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辱書 知所苦向安 已可行坐 深以爲慰 比來想彊健勝前矣 然計亦不能無廢書冊之功 但齋居謹疾 當亦自有用心處也 憙衰朽杜門 無足言者 但精神昏憊 益甚於前 雖不敢廢書 然度不復能有長進矣 外事絶不敢掛口 但見朋友當此風頭多是立脚不住 况欲望其負荷此道 傳之方來 應是難準擬也 可盧可慮
편지를 받고서 고통이 점차 진정되어서 벌써 걷거나 앉을 수 있음을 알게 되어 깊이 위로가 됩니다. 요즘은 이전보다 강건해 졌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글을 읽는 공부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봅니다. 단지 재계하여 거처하고 병을 삼가여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저(熹)는 늙어서 두문불출하니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정신이 혼몽하고 피곤함이 이전보다 더욱 심하여 비록 감히 책을 덮지는 못하고 있으나 다시 크게 진보하지 못할 것이라 짐작됩니다.
바깥일은 절대로 입에 담지 않지만 단지 벗들이 이런 상황을 당해 대부분 입각(立脚)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이 도를 짊어지고 다음에 전해 주는 일을 바라겠습니까? 분명 비교하여 견주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이 편지는 경원 2년(병진; 1196, 67세)에 쓰여진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힘써 성취하여 안으로 착실하게 공부하는 것이 좋다는 것에 대해 말하였으며, 또한 복주(福州)에서 황직경(黃直卿)을 얻고 남강에서 이경자(李敬子)를 얻어 설득하고 유도하여 후생들 중에 나아갈 방향을 아는 사람이 많이 있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주자는 또 이 편지에서 병이 심해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야 항상된 이치이므로 깊이 따질 것은 없지만 학문이 초심에 부응하지 못해 눈앞의 문자로 분수에 따라 성현의 유의(遺意)를 발명하여 후학에게 전해주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가워하고 있다.
曾再到晉輔處否 後生知所趣向 亦不易得 且勉與成就之 令靠裏著實做工夫爲佳 季章近讀何書 作何事業 功夫意思比舊如何 無疑亦久不得信 不知後來於鄙說能信得及否 近來福洲得黃直卿南康得李敬子說誘得後生多有知趣鄕者 雖未見得久遠如何 然便覺得此箇氣脈末至斷絶 將來萬一有可望者 却是近上一種老成朋友 若得回頭 便可倚賴 乃後安於舊習 不肯放下 深可歎惜耳 益公聞甚康健 終日應接不倦 深爲可喜 憙則衰病日益沈痼 死生常理 無足深計 但恨爲學未副夙心 目前文字可以隨分發明聖賢遺意 垂示後來者 筆削未定 纂集未成 不能不耿耿耳
다시 진보(晉輔)가 있는 곳에 가보았습니까? 후생(後生)이 나아갈 방향을 아는 것이 도한 쉽지 않으니, 힘써 그와 함께 성취하여 안으로 착실하게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계장(季章)은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으며 무슨 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공부하는 생각이 이전에 비하여 어떻습니까? 무의(無疑)에게서도 오랫동안 편지를 받지 못했으니, 그 뒤로 나의 학설을 믿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래 복주(福州)에서 황직경(黃直卿)을 얻고 남강에서 이경자(李敬子)를 얻어 설득하고 유도함으로써 후생들 중에 나아갈 방향을 아는 사람이 많이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오랫동안 어떤지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기맥(氣脈)이 아직은 단절되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장래에 만에 하나라도 기대할 만한 사람이 있어서 도리어 뛰어난 일종의 노성(老成)한 벗이라면 만약 그의 마음을 돌리게만 하면 문득 의뢰(依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구습(舊習)에 안주하여서 놓아 버리려고 하지 않으니 깊이 탄식하면 안타까워 할 뿐입니다. 익공(益公)은 듣자하니 매우 강건하여 종일토록 응접해도 피곤해하지 않으신다니 참으로 기뻐할만 합니다.
저(熹)는 쇠하고 병든 몸이(衰病) 날로 더욱 고질화 하지만 죽고 사는 것이야 항상된 이치이니 깊이 따질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학문이 초심에 부응하지 못해 눈앞의 문자로 분수에 따라 성현의 유의(遺意)를 발명하여 후학에게 내려주어야 하는데, 이것마저 필삭(筆削)을 정하지 못하고 찬집(纂輯)을 완성하지 못했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이 편지는 경원 4년(무오; 1198, 69세)에 쓴 편지이다. 이해 11월에 왕진보가 주자의 문집을 편집하고 광남(廣南)에서 간행하려고 하자 이에 주자는 왕진보에게 편지를 보내 이 일을 저지 시킨 일이 있다. 당시는 아직 위학을 심하게 금지하고 있던 때인지라 주자의 생각으로는 다만 문을 닫고 글을 읽고 형적(形迹)을 숨길 수 있을 뿐이니, 문집을 간행하여 시끌벅적하게 소란을 피우며 스스로 화를 취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 더 낳다고 생각 하였다. 그리하여 주자는 왕진보에게 편지를 보내 다만 지금 제발(題跋)한 글과 같은 것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도록 해서는 안될 것이며, 책으로 간행하는 일 또한 모두 통렬하게 저지할 것을 당부하였다.
王晉輔來 求其尊人銘文 久已齰舌 何敢爲此 以其再來 不免題其行狀之後 少答其意 又慮其便欲刊刻流布 則大不便 已作書力戒之矣 渠又說欲得鄙文編次鋟木 此雖未必果 然亦不可有此聲 恐渠後生未更事 不識時勢 不知此是大禍之機 或致脫疏 書中又不敢深說 恐欲蓋而愈章 敢煩爲痛說此利害 當此時節 只得杜門讀書 潛形匿迹 豈可爲此喧譁以自取禍耶 况如老拙踪跡 又比仁里諸賢事體不同 彼或可言 而此但當黙 其理勢不難曉也 只如今所題跋 亦切不可便將出與人看 又刻石鏤板二事 幷望痛爲止之 千萬至懇至懇此杜元凱所謂旣作之後 又復隱諱以避患者 固爲可笑 然亦以子約之故 無以答其意而浸淫至此 全藉賢者相與致力 遏其橫流 千萬幸也
왕진보(王晉輔)가 찾아와서 그 존인(尊人)의 명문(銘文)을 지어달라고 했으나, 오래 전에 글을 짓지 않겠다고 혀를 깨물었으니 어떻게 감히 글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거듭 왔기 때문에 그 행장(行狀)의 뒤에 적어서 조금이나마 그의 뜻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그가 문득 간행하여 유포하려 하니 매우 불편할 것을 걱정하여 이미 편지를 보내 힘써 경계했습니다. 그는 또 나의 글을 받아 편차하여 간행하려 한다고 하니, 이는 비록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런 소리가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가 후생으로 일을 고치지 않아 시세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큰 화의 기틀임을 모르고 혹시 경솔(輕率)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편지로는 또 감히 깊이 말하지도 못하겠고, 아마 덮으려하면 할수록 더욱 드러날 까 두렵습니다. 감히 번거롭게 이처럼 이해(利害)를 통렬하게 말합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다만 문을 닫고 글을 읽고 형적(形迹)을 숨길 수 있을 뿐이니, 어찌 이처럼 시끌벅적하게 하여 스스로 화를 취하겠습니까? 하물며 나처럼 늙고 옹졸한 사람의 종적(蹤迹)은 또 그대 고향(仁里)의 여러 현인들과 견주어 사체(事體)가 같지 않으니, 저들은 혹시 말을 할 수 있으나 나는 단지 묵묵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치와 형편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제발(題跋)한 글과 같은 것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주어 보도록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돌과 목판에 새기는 두 가지 일은 모두 통렬하게 저지하기를 부디 간절하게 바랍니다. 이는 두원개(杜元凱)가 이른바 “이미 짓고 난 뒤에 다시 숨기고 꺼려하여 근심을 피하려 한다”고 한 것이니,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그러나 자약(子約) 때문에 그의 뜻에 응답하지 못하고 지나쳐 여기에 이르렀으니 전적으로 그대의 도움을 받아 서로 힘을 다하여 그 횡류(橫流)를 막아낸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교제를 지내고 난 후 위적에 올랐던 사람들이 얼마나 사면을 당할 수 있는지를 묻고 맹자의 호연지기에 대해 의리를 많이 축적하여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郊霈已行 不知黨錮諸人果得及雞竿下坐否 所論配義與道 其說甚當 所以孟子下文便言是集義所生者 此正如來喩之意也 但子約終看不透 殊不可曉 前日已爲極力言之 不知其信得及否也
교제(郊祭)를 지내고 난 후 사면이 이미 행해짐에 당고(黨錮)에 연루된 여러 사람들이 과연 석방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의(義)와 도(道)를 짝한다”는 구절을 논한 설명은 매우 합당니다. 그러므로 맹자 아래 문장에서 곧장 “의(義)를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고 말했으니, 이는 바로 그대의 뜻과 같습니다. 다만 자약(子約)은 끝내 투철하게 보지 못하였으므로 거의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날 이미 극력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가 믿어 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성위(省闈)란 성시(省試)인데 성시(省試)는 중국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때에 시행하던 문관 시험이었다. 향시(鄕試)에서 선발한 이들을 예부성(禮部省)에서 시험하였고 그 합격자를 공사(貢士)라고 하였다. 이 편지를 쓸 당시 유계장은 성시에 합당하지 않은 점이 있어 호연히 서쪽으로 돌아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다고 주자에게 편지를 하였다. 이에 주자는 이를 축하하며 답한 것이다. 또한 당시 공도가 관차에 있으면서 지연하여 결연히 떠나지 못하다가 파직을 당하였는데, 이 일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으며, 독서는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편안하게 하여 그 문의에 따라 마땅함을 체득해야 하고, 먼저 자기의 의견을 세워 기세를 부리고 생소한 말을 만들어 단지 두찬(杜撰)만을 이루고 성현의 본의(本意)를 보지 못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省闈不合 浩然西歸 無愧於心 所得多矣 甚賀甚賀 公度近亦得書 自是不肯求去 致得如此 如近日王興之(龜齡之子)雷季仲陳和父 皆以力請得去 又何嘗有人苦留之也 潘友囗考近亦遭逐 正與公度事體一般 此輩進不能爲君子 退不能爲小人 不與人出氣 令人憤悶也 子約想時相聚 渠近書來 頗能向裏用力 然亦有小未善 已爲詳說 久之必自見得也 景陽前此已嘗附書 今不暇再作 煩爲致意 近日目昏 今日又加手痛 作字頗費力也 承欲就文義事物上做功夫 甚善 然讀書且要虛心平氣隨他文義體當 不可先立己意 作勢硬說 只成杜撰 不見聖賢本意也
성위(省闈)가 합당하지 못하여 호연(浩然)히 서쪽으로 돌아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니 얻은 것이 많습니다. 매우 축하합니다.
근래 공도(公度)의 편지를 받으니 기꺼이 떠나기를 구하지 않아 이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근일 왕흥지(王興之) ― 귀령(龜齡)의 아들이다. ― 뇌계중(雷季仲), 진화보(陳和父)와 같은 사람들이 모두 힘써 청하여 떠났으니 또 어찌 힘들게 만류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반우□(潘友□)가 또 근래 쫓겨났다 하니 바로 공도(公度)와 사체(事體)가 한 가지입니다. 이런 무리는 벼슬에 나아가서도 군자가 되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소인도 되지 못하여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니 저를 분하고 답답하게 합니다.
자약(子約)과 때때로 모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가 요즘 편지를 보냈는데 제법 내면을 향하여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좋지 못한 곳이 있기에 이미 상세하게 말해주었으니, 오래 되면 반드시 스스로 터득할 것입니다. 경양(景陽)에게 이보다 앞서 이미 편지를 부쳤으니 지금은 다시 써서 번거롭게 제 생각을 전달할 겨를이 없습니다. 요사이에는 눈이 침침해지더니 오늘은 또 수통(手痛)이 더해져 글자 쓰는데도 퍽 힘이 듭니다.
“문의(文義)와 사물(事物) 상에 나아가 공부를 하려 한다”고 말하니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독서에는 우선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편안하게 하여 그 문의에 따라 마땅함을 체득해야 하고, 먼저 자기의 의견을 세워 기세를 부리고 생소한 말을 만들어 단지 두찬(杜撰)만을 이루고 성현의 본의(本意)를 보지 못해서는 안됩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소희 5년(갑인; 1194, 65세) 영종(寧宗)이 즉위할 때 승상 조여우(趙汝愚)가 주자를 불러 머물게 하면서 시론을 바로잡은 경우가 있고, 또 편지의 내용 중에 “덤불속의 뱀이 꿈틀꿈틀하며 조금씩 끌어가고 있다”고 했는데, 익증에 이것은, 갑인년(1190)에 한탁주(韓侂冑)를 여주방어사(汝州防御使)로 삼았는데, 내시(內侍) 양순경(楊舜卿)․임억년(林億年)․진원(陳源)을 외방(外方)으로 폄하(貶下)했다 하니, 아마 이를 가리키는 듯하다고 하였으니 이 편지는 갑인년(1194)에 쓴 편지인 것 같다.
晉輔亦開敏有志趣 不易得 但涉學尙淺 志氣輕率 須痛與切磨爲佳耳 大學中庸看得如何 大學近修改一兩處 旦夕須就板改定 斷手却奉寄也 比閱邸狀 時論似寖平 榛中蜿蜒稍稍引去 但恐主人意不堅牢 或有反覆 卽其禍愈甚耳
진보(晉輔)도 명민(明敏)한데다가 지취(志趣)까지 있으니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섭렵한 학문이 아직 얕아 지기(志氣)가 경솔하니, 함께 통렬하게 절차탁마해야만 좋을 것입니다. 대학․중용을 보심이 어떠하신지요? 대학은 근래에 한 두 군데 수정할 곳이 있어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판본을 가져다 개정하고 마무리하여 보내 드립니다. 근래 저장(邸狀)을 보니 시론(時論)이 점차 평온해지는 것 같습니다. 덤불 속에 뱀이 꿈틀꿈틀하며 조금씩 끌고 가고 있만, 주인의 뜻이 견고하지 못하여 혹시 번복(飜覆)함이 있게되면 바로 그 화가 더욱 깊어질까 두려울 뿐입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이 편지는 경원 2년 (병진; 1196, 67세)에 쓰여진 편지이다. 편지에서 주자는 공부가 앞으로 전전될 여유가 있지만 점차 병이 깊어감에 따라 정신이 혼몽하고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어진 벗들과 서로 모여 함께 절차탁마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이어서 국정의 방침을 바로 잡는 방향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熹今年之病發作雖輕 而日月甚久 又氣體衰乏 精神昏耗 大與常年不同 亦是年紀催促 理應如此 不足爲怪 但恨平生功夫只到此地頭 前面地步有餘而日月有限 又不得與朋友之賢者相聚 曰夕切磋 恐此意思一旦斷絶 更爲後賢之憂耳 劉五十哥且得如此攛掇結裹 向後事不可知 但願前人遺德有以誘其衷者 庶幾可望於後耳 言之令人於邑短氣也 時論靜作不常 子壽事後又有舊爭之激 其黨稍違忤者已不能容 旦夕必更有一番聳動觀聽底事 以扶國是 覺得懍懍 未知所稅駕處 但朋友來者無可拒之理 得早行遣了 亦是一事收毅也 子約幸逢寬恩 且得有北歸之漸 其實高安窮僻 無朋友過從之益書疏往來之便 却未必得如廬陵也 益公寄六一集 纂次讎正之功勤亦至矣 古人所謂後世子雲者 信非虛語 然亦正自難遇耳
저(熹)는 금년에 병이 비록 가볍게 발작했으나 시일이 매우 오래 되었고, 또 기체(氣體)가 쇠약하고 정신이 혼모(昏耗)하여 평년(平年)과는 아주 다릅니다. 이는 나이가 갑자기 들어 이치가 응당 이런 것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은 아닙니다. 다만 평생 공부가 여기에 이르러 앞으로도 넉넉히 학문이 진보할 수 있으나 세월이 유한(有限)하고, 또 어진 벗들과 서로 모여 주야로 절차탁마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이런 생각이 하루아침에 단절되어 다시 후현(後賢)의 근심이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유오십가(劉五十哥)가 또 이와 같이 관직 얻는 일을 부축이지만, 뒷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앞사람이 끼친 덕으로 그의 본성을 이끌어 준다면 아마도 훗날을 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를 말하는 저는 슬퍼서 숨이 끊어지려 합니다.
시론(時論)은 상황(靜作)이 범상하지 않은데 자수(子壽)의 일 뒤에 또 해묵은 논쟁이 격화되고 있어 그 당(黨)에서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자들은 이미 용납하지 않고 있으니, 조석간에 반드시 한 번은 보고 들은 것을 떨쳐서 국정의 방침을 잡아야 합니다. 두려운 느낌이 들어서 머무를 곳을 모르겠습니다. 단지 찾아오는 벗을 거절할 이치가 없으니, 서둘러 떠날 수 있다면 또한 한 가지 일을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약(子約)은 다행스럽게도 너그러운 은혜를 받았으니 또한 점차 북(北)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고안(高安)은 궁벽(窮僻)해서 벗이 서로 왕래하는 이익과 서신이나 소식이 왕래하는 편의가 없으니 도리어 여릉(廬陵)과 같기를 바랄 수도 없습니다.
익공(益公)이 육일집(六一集)을 보내 주니, 편차하고 수정한 공력이 또한 지극했습니다. 고인(古人)이 이른바 “후세의 자운(子雲)”이라 한 것이 참으로 헛말이 아니지만, 또한 익공과 같은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울 따름입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독서의 태도에 대해 언급한 편지이다. 독서는 다만 문장의 훈석에 따라 완미하면 의미심장해지는 것이니 경문을 물리치고 함부로 다른 설을 내어서는 안되고, 또 보는 것에 따라 시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됨을 말하였다.
讀書只隨書文訓釋玩味 意自深長 今人却是背却經文 橫生它說 所以抂費工夫 不見長進 來喩似已覺此病者 更望勉旃 干萬之望 然又當以草略苟且爲戒 所謂隨看便起是非之心 此句最說著讀書之病 蓋理無不具一 事必有兩途 今纔見彼說晝 自家便尋夜底道理反之 各說一邊 互相逃閃 更無了期 今人問難往往類此 甚可笑也
독서에 다만 문장의 훈석(訓釋)에 따라 완미하면 의미가 저절로 심장(深長)하거늘 지금 사람들은 도리어 경문(經文)을 물리치고 함부로 다른 설을 내곤합니다. 그러므로 헛되이 공부하여 장족의 진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내준 편지를 보면 이런 병통을 깨달은 듯하니, 다시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부디 바랍니다. 그러나 또 마땅히 초략(草略)하고 구차한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보는 것에 따라 곧 시비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는 이 구절은 독서의 병을 가장 잘 말한 것입니다. 대개 이(理)에는 하나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고 일에는 반드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지금 저사람이 낮을 말하는 것을 보자마자 자기는 밤의 도리를 찾아 반대하여 각각 한쪽만 말하면서 서로 숨바꼭질을 하니 끝날 때가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의 질문하고 논란하는 것이 흔히 이와 비슷하니 매우 가소롭습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이 편지는 유계장이 논어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주자에게 편지로 보낸 것에 대한 답이다. 주자는 이 편지에서 유계장의 문제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여 친절한 설명을 하였다. 먼저 순임금과 무왕의 성(性)대로 한 것과 성을 반대로 한 것에 대해 무왕이 성을 반대로 한 것이 비록 성대로 한 것과 다르지만 지극한 면에서는 한가지일 뿐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영윤(令尹)인 자문(子文)의 충성과 진문자(陳文子)의 청령함은 진실로 인(仁)하지 아니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공자가 특별히 그들의 충성과 청렴함을 인정해 주어지만 그 인(仁)을 인정하지는 않은 까닭에 대해 마땅한 이치에는 미진했기 때문에 단지 충성스럽고 청렴할 뿐 인(仁)이 될 수는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외에도 논어에서 공자가 “싫어하지 않고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또한 모름지기 뭇 사람들과는 같지 않음을 설명하였으며, 맹자의 권도에 대해서도 ‘권도(權道)와 경도(經道)는 분별이 없을 수 없으니, 만약 다만 권도(權道)가 곧 경도(經道)라고 말한다면 도무지 분별이 없어 오히려 그 폐단은 아마도 하나의 길을 여는데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계하고 있다.
熹不免果如所料 餘年無幾 區區舊學足以自娛 不能深以爲念也 若後段 則安能保其必無耶 所示五條 各已附以己意 大抵來喩於事理情實多是不曾究竟 而專以輕重深淺爲言 故不親切 更以此意推類求之 則可見矣 未盡善也注云 舜之德性之也 武王之德反之也 故其實有不同者 某竊謂反之雖異於性之 然其至焉則一而已 使武王於反之之後猶有未盡査滓 至於感格發露 著于樂聲 則其所反之工夫必有未盡之處矣 若曰聖人垂象終是微有不同 則當別論 儻樂以觀之 則似太重矣 如何
樂觀其深矣 若不見得性之反之之不同處 又豈所謂聞其樂而知其德乎 舜與武王固不待論 今且論湯․武 則其反之至與未至恐須有別 此等處雖非後學所敢輕議 然今但細讀其書 恐亦不待聞其樂而後知之也
今尹子文之忠 陳文子之淸 固非不仁者之所能爲 聖人特許其忠淸而不許其仁 今因夫子之不許其仁而遂疑二子之忠淸末必皆出於理之所當然 而猶末免乎怨悔之私 則聖人之所以許之者 亦有不盡之意矣 竊詳本文之意似不如此 恐是看得仁字與忠淸事俱重 不曾分別求之 遂至疑於太過 如何
二子忠淸而末盡當理 故但可謂之忠淸而未得爲仁 此是就其事上著實硏究出來 若不如此看 卽不知忠淸與仁有何分別 此須做箇題目入思議始得 未易如此草草說過也
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注云 三者已非聖人之極至 而猶不敢當 然則彼所謂夫子旣聖之論 豈非極至歟 詳本文之意 說得雖輕 然如此解得 又似太過 如何
正爲合 若聖與仁 一段看 見得不厭․不倦非極至處 然夫子之不厭不倦 又須與衆人不同 故子貢公西菙皆有云云之說 可更詳之
未可與權 集註之末有云 然以孟子搜溺援之以手之義推之 則權與經亦當有辨 某竊謂天下之事只有一箇理 所重在此 則其理不外乎此 當嫂溺之時 只合援之以手 雖出於急遽不得已之爲 乃天理人事之不容已者也 今云有辨 開此一線路 恐學者因以藉口而小小走作 不暇自顧矣 如何
旣云急遽不得已之爲 卽是權不可常而經可常 自有不容無辨處 若只說權便是經 都無分別 却恐其弊不止開一線路而已
膚受之愬不行焉 注云 愬冤者急迫而切身 則聽者不及致詳而發之暴矣 某竊恐解得言詞太峻 人非昏暴之甚 亦未遽至此 而乃云因子張之失而告之 不惟形容得子張太過 且言外求意 亦非解經之體 如何
且論事理還是如此與否 不須疑怕觸忤子張也
저(熹)는 과연 생각한 것처럼 살 날이 얼마 되지 않으니, 하찮은 구학(舊學)으로나 족히 스스로 즐길 뿐, 깊이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후단(後段)과 같은 것은 어떻게 반드시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보여주신 다섯가지 조목은 각각 이미 자기 생각대로 붙였습니다. 대개 보내준 편지를 보면 사리(事理)의 정실(情實)에 대해 대부분 끝까지 궁구하지 못하고 오직 경중(輕重)과 깊고 얕음을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친절하지가 못합니다. 다시 이 뜻을 가지고 유추해 보면 알 수 있겠습니다.
“선(善)을 다한 것이 아니다”고 한 것의 주(註)에서 “순임금의 덕은 성(性)대로 한 것이고, 무왕의 덕은 그것(性)을 반대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같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제가 생각해보니 반대로 한 것이 비록 성(性)대로 한 것과 다르지만 도달한 것은 한가지일 뿐입니다. 만일 무왕이 반대로 한 후에 오히려 미진한 찌꺼기가 있어서 느낌을 표현하여 음악 소리로 드러냈다면 그 반대로 한 공부는 반드시 미진한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성인(聖人)이 상(象)을 드리움에 끝내 같지 않음이 없다”고 말했다면 마땅히 별도로 논해야 합니다. 만약 음악을 가지고 본다면 지나치게 무거울 것 같습니다. 어떠하신지요?
“음악으로 보는 것은 그 의미가 깊다”고 했으나, 그러나 본성대로 한 것과 본성을 반대로 한 것의 다른 점을 볼 수 없다면, 이른바 ‘그 음악을 듣고 그 덕을 안다’는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순임금과 무왕은 굳이 논할 것도 없고 우선 탕(湯)임금과 무왕을 논하더라도 반대로 한 것의 지극함과 지극하지 않음은 아마도 반드시 구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 등은 비록 후학이 감히 가볍게 논할 것이 아니지만 지금 그 책을 자세히 읽기만 해도 그 음악을 듣기를 기다린 후에 그것을 아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영윤(令尹)인 자문(子文)의 충성과 진문자(陳文子)의 청렴함은 진실로 인(仁)하지 않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은 특별히 그들의 충성과 청렴함을 인정해 주셨지만 그 인(仁)을 인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제 공자가 그 인(仁)을 인정하지 않고 마침내 두 사람의 충성과 청렴함이 반드시 모두 이(理)의 당연한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원망하고 후회하는 사사로움을 면하지 못한다고 의심했다면 성인(聖人)께서 인정하신 것 또한 부진(不盡)한 뜻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같지는 않은 것 같으니 아마도 인(仁)자를 봄에 충성(忠)과 청렴함(淸)의 일과 함께 중한 것으로 여겨 일찍이 분별하여 구하지 않아 마침내 너무 지나침을 의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떠하신지요?
두 사람은 충성스럽고 청렴했지만 마땅한 이치에는 미진했기 때문에 단지 충성스럽고 청렴할 뿐 인(仁)이 될 수는 없다고 했으니 이는 그 일에 나아가 착실하게 연구해낸 것입니다. 만약 이와같이 보지 않는다면 충성과 청렴함이 인(仁)과 어떤 분별이 있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이것은 반드시 제목(題目)을 만들어 생각하고 의론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이처럼 허둥지둥 설명하고 지나갈 것은 아닙니다.
“묵묵히 기억하며”, “배우고 싫어하지 않으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주(註)에서 “이 세 가지는 이미 성인(聖人)의 지극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공자께서는 이미 성인(聖人)이시다”는 논리가 어찌 지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말한 것이 비록 가볍지만 이와 같이 이해를 하면 또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어떠하신지요?
바로 “성(誠)과 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이라고 하는 한 단락과 합해서 보면 ‘싫어하지 않는다’․‘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싫어하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또한 모름지기 뭇 사람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공(子貢)․공서화(公西華)가 모두 이런저런 말을 남겼으니, 다시 자세히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없다”는 구절에 대해 집주(集註) 끝에서 “맹자(孟子)의 형수가 물에 빠졌을 경우에는 손을 잡아서라도 구원해준다는 뜻으로 미루어 본다면 권도(權道)와 경도(經道)는 또한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보니 천하의 일엔 단지 하나의 이(理)만 있으니 중(重)한 것이 여기에 있으면 그 이(理)는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에는 마땅히 손을 잡고 구원해야만 하니 비록 급박하여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행위라 하더라도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에 있어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분별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하나의 길을 열어 놓으면 학자들은 이를 구실로 삼아 조금씩 침착하지 못하고 덜렁되면서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떠한지요?
이미 “급박해서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행위”라고 말했다면 이는 곧 권도(權道)는 상도(常道)가 될 수 없고 경도(經道)가 상도가 될 수 있으니 본래 분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만약 다만 권도(權道)가 곧 경도(經道)라고 말한다면 도무지 분별이 없어 오히려 그 폐단은 아마도 하나의 길을 여는데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피부로 받는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는다”고 한 부분의 주(注)에서 “자기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자가 급박히 하여 몸에 간절하게 하면 듣는 자가 미처 상세함을 살피지 못하여 갑자기 성낼 것이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말을 이해함이 너무 높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어둡고 포악함이 심하지 않으면 갑자기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진 않습니다. 그리고 “자장(子張)의 결함을 인하여 말씀하였을 것이다”고 하셨는데, 자장을 형용한 것이 너무 지나칠 뿐만이 아니고, 또 말 밖에서 뜻을 구하는 것 역시 경전을 해석하는 바탕(體)이 아닙니다. 어떠하신지요?
우선 사리(事理)가 이와 같은지의 여부를 논한 것이니, 자장을 거슬러 성내게 했다고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이 편지는 경원 2년(병진; 1196, 67세)에 쓴 편지이다. 당시 증무의(曾無疑)의 형은 세 번 위학(僞學)의 적중(籍中)에 초빙되어 들어갔다. 또 채련(蔡璉)의 무고 때문에 팽구년․심유개․섭적․항안세 등과 함께 대리(大理)에 들었는데, 이 때 무의가 계장에게 스스로 처하는 의리를 논했는데 유계장은 동중서의 공리설을 논하고 증무의(曾無疑)를 위해 일을 논했지만 직절하게 분석하여 그의 기색을 돌이키도록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주자가 이와 관련하여 유계장이 증무의의 기색을 돌이키지 못한 까닭에 대해 자기가 도의를 보는 것이 스스로 확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비를 분변할 줄 몰라 이처럼 잘못된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昨已具前幅 而細看來書 方論董子功利之語 而下句所說曾無疑事 卽依舊是功利之見 蓋天下只有一理 此是卽彼非 此非卽彼是 不容竝立 故古之聖賢心存目見 只有義理 都不見有利害可計較 日用之間應事接物 直是判斷得直截分明 而推以及人 吐心吐膽 亦只如此 更無回互 若信得及 卽相與俱人聖賢之域 若信不及 卽在我亦無爲人諜而不盡底心 而此理是非昭著明白 今日此人雖信不及 向後他人須有信得及底 非但一時之計也 若如此所論 則在我者末免視人顔色之可否以爲語黙 只此意思 何由能使彼信得及乎 然此亦無他 只是自
家看得道義自不曾端的 故不能眞知是非之辨而爲此回枉 不是說時病痛 乃是見處病痛也 試思之 如何
어제 이미 지난 번의 편지를 갖추어 놓고 자세히 보니 바야흐로 동자(董子)의 공리(功利)의 말을 논했는데 아래 구절에서 말한 증무의(曾無疑)의 일은 곧 여전히 공리의 견해입니다. 대개 천하에 단지 하나의 이(理)만 있으니, 이것이 옳으면 곧 저것은 그르고 이것이 그르면 곧 저것이 옳아 두 가지가 병립(竝立)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옛날의 성현이 마음에 보존하고 눈으로 보는 것이 다만 의리만 있었고, 이해를 따지는 경우를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사물을 응접함에 곧바로 판단하여 직절(直截)하고 분명하였습니다. 이를 남에게 미루어 마음을 토로함도 이와 같아 다시 왜곡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줄 수 있다면 곧 함께 성현의 영역에 들어갈 것이고, 만약 믿음을 주지 못하더라도 곧 나에게는 남을 위하여 도모함에 철저하지 못하였다는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이(理)의 시비가 명백하여 환히 드러났던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이 비록 믿음을 주지 못하더라도 뒤에 다른 사람이 반드시 믿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니, 단지 한 때의 계획만은 아닙니다.
만약 이와 같이 논한다면 나에게 있는 것은 남의 안색의 가부를 살펴 말하거나 침묵하게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하면 저들로 하여금 믿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또한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가 도의를 보는 것이 스스로 확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으로 시비를 분변할 줄 몰라 이처럼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말할 때의 병통이 아니라 바로 견처(見處)의 병통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이 편지에서는 ‘인의가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맹자의 말이 비록 이치의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명백하게 변별(辨別)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의를 바로잡고 이를 도모하지 않으며 도를 밝히고 공을 따지지 않는다’는 동중서의 말이 오히려 낳음을 말하고 있다.
孟子說未有仁而遺其親 末有義而後其君 便是仁義末嘗不利 然董生却說正其義不謀其利 明其道不計其功 又是仁義未必皆利 則自不免去彼而取此 蓋孟子之言 雖是理之自然 然到直截剖判處 却不若董生之有力也 向聞餘論 似多以利隨義而言 今細思之 恐意脈中帶得偏僻病患 試更思之 如何
맹자(孟子)는 “인하고 그 어버이를 버린 사람은 없으며, 의롭고 그 임금을 뒤로 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으니, 곧 인의가 이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생(董生)은 도리어 “의(義)를 바로잡고 이(利)를 도모하지 않으며, 도(道)를 밝히고 공(功)을 따지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인의가 반드시 모두 이로운 것은 아니라면 스스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함을 면하지 못하게 됩니다. 대개 맹자의 말은 비록 이치의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명백하게 변별(辨別)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동생만큼 강력하지 못합니다. 전에 나머지 의논을 들어보니 대부분 이(利)로써 의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 것 같았는데, 지금 자세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의미의 맥락 속에서 편벽(偏僻)된 병환을 띠고 있는 듯 합니다. 한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이 편지는 경원 4년 (무오; 1198, 69세)에 쓴 편지이다. 이 당시 왕진보가 주자의 문집(文集)을 간행하고자 하였으므로 문집에 관한 의논을 그만 두었어야 마땅하다고 하고 그 이유에 대해 문집을 간행하는 것은 주․륙 두 학파에 모두 무익하고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위의 여섯 번 편지에서와 같이 문집을 간행하는 일을 힘써 저지하고 다만 착실하게 공부하여 이처럼 이름을 사모하고 외면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학자들의 기상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주자는 이 편지에서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글을 읽을 때에 위로부터 아래로 글자를 따라 읽으려 하지 않고 다만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한번에 지나치며 횡설(橫說)하려고 하는 것은 언듯 보기에는 비록 새롭고 교묘하여 사람들을 압도한 것 같지만 함부로 고집을 부려 거칠고 생소하여 의리를 이루지 못하므로 이것은 전혀 성현이 당초에 말한 본뜻이 아니라고 하였다.
近得益公書 聞且寓晉輔家 甚善 所欲改字 已別報去 前書竟未得下落也 文集之議 當已罷止 此實於彼無益而於此不便 衰老扶病如此 又豈能更去廣南行脚耶 千萬力爲止之 更勉其著實爲學 勿爲此等慕名狥外之事 方是吾人氣象也
來喩所云 書能益人與否 只在此心 等說 此又是病根不曾除得 以鄙見觀之 都無許多閑說 只著實依文句玩味 意趣自深長 不須如此 又只是立說取勝也 前與無疑書亦有少講論 曾見之否 敬子諸人却甚進 此亦無他 只是渠肯聽人說話 依本分循次序平心看文字 不敢如此走作閑說耳 大率江西人尙氣 不肯隨人後 凡事要自我出 自由自在 故不耐煩如此逐些理會 須要立箇高論 籠罩將去 譬如讀書 不肯從上至下逐字讀去 只要從東至西一抹橫說 乍看雖似新巧 壓得人過 然橫拗粗疏 不成義理 全然不是聖賢當來本說之意 則於己分究竟成得何事 只如臨川前後一二公 巨細雖有不同 然原其所出 則同是此一種見識 可以爲戒而不可學也 因見無疑 可出此紙 大家評量 趁此光陰未至晩暮之時 做些著實基址 積累將去 只將排比章句玩索文理底工夫挽了許多杜撰計較別尋路脈底心力 須是實有用力處 久之自然心地平夷 見理明徹 庶幾此學有傳 不至虛負平生也 如於雅意尙未有契 可更因書極論 勿遽罷休 乃所望也
근래에 익공(益公)의 편지를 받고 그대가 진보(晉輔)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좋았습니다. 글자를 고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별지로 보냈는데, 전의 편지는 끝내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문집(文集)에 관한 의논은 이미 그만 두었어야 마땅합니다. 이는 실로 저들에게도 무익하고 여기에도 불편합니다. 노쇠하여 병든 몸을 부지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 어떻게 다시 광남(廣南)으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애써 그만두고 다시 착실하게 공부하기에 힘써 이처럼 명성을 탐하여 외면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기상일 것입니다.
보내 준 편지에서 말한 “글이 사람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다만 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는 따위의 설명은 병의 뿌리를 일찍이 제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의 의견으로 본다면 결코 많은 한가한 설이 필요없고, 다만 착실하게 문구에 따라 완미하면 의취(意趣)가 저절로 심장(深長)해질 것이니, 반드시 이와 같이 입론하여 남을 이기려고 하지 말아야 됩니다. 전에 무의(無疑)에게 보낸 편지에 조금 강론한 것이 있는데 살펴본 적이 있습니까? 경자(敬子)의 여러 사람들은 도리어 매우 진보했는데 이는 다른 것이 없고 다만 그들이 남의 말을 기꺼이 듣고 본분에 의거해서 차례를 따라 평온한 마음으로 문자를 보고, 감히 이와 같이 한가로운 말을 내뱉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강서(江西) 사람들은 기(氣)를 숭상하여 남의 뒤를 따르려 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기로부터 내어 자유자재로 처리하려 합니다. 따라서 번거로움을 견디면서 이와 같이 하나 하나 이해하지 않고 반드시 고론(高論)을 세워 덮어씌우려고 합니다. 비유컨대 글을 읽을 때에 위로부터 아래로 글자를 따라 읽으려 하지 않고 다만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한번에 지나치며 횡설(橫說)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얼핏보면 비록 새롭고 교묘하여 사람들을 압도한 것 같지만 함부로 고집을 부려 거칠고 생소하여 의리를 이루지 못하니 성현이 당초에 말한 본뜻이 전혀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곧 자기에게서 결국 무슨 일을 이루겠습니까? 다만 임천(臨川) 전후의 한 두 사람과 같이 크고 세밀함이 비록 차이는 있으나 그 나온 곳을 따져 보면 같은 한 종류의 견식이니 경계로 삼을 만한 것이지 배워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의(無疑)를 만남으로 인하여 이 편지를 부칠 수 있게 되었으니 여러분들이 평량(評量)하십시오. 이처럼 시간이 늦은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 착실하게 기반을 다지고 누적하여 가며 다만 장구(章句)를 늘어놓고 문리(文理)를 완색하는 공부로 허다한 두찬(杜撰)과 계교(計較), 별도로 노맥(路脈)을 찾는 심력을 대체하여 반드시 실제를 힘을 쓰게 되면 오래 지남에 자연 심지(心地)가 평이(平夷)하고 이(理)를 보는 것이 명철하여 거의 이 학문이 전해져 평생 공부를 헛되게 등지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대의 뜻에 아직도 계합(契合)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다시 편지를 통해 극론(極論)해 주어, 갑자기 그만두지 말기를 바랍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이 편지도 역시 경원 4년 (무오; 1198, 69세)에 쓴 편지이다. 당시 유계장이 왕진보와 가까이 교류하고 있었는데, 이 편지에서는 유계장의 병통과 왕진보의 병통에 대해 충고하고 있다. 유계장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태함 이외엔 없애기 어려운 병이 없었다고 여겼으므로 ‘병은 다만 나태함에 있다’고 하였는데, 주자는 이에 대해 사람이 나태한 것은 다만 이런 도리를 투철하게 보지 못함으로 인하여 한결 같이 이끌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니, 만약 도리를 분명하게 본다면 다시는 나태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왕진보(王晉輔)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장단, 시비, 득실에 관여하지 말고 자기의 도리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急先務)임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憙再啓 熹病愈甚 遇寒尤劇 如今日則全然轉動不得 藥餌雖不敢廢 然未必能取效 姑復任之 無計可爲也 所喩已悉 但所謂語句偶爾而實却不然者 只此分疏 便是舊病未除 所謂誠於中 形於外 此又何可諱耶 無疑之病亦是如此 適答其書說得頗痛快 可試取觀 可見鄙意 此不復縷縷也 又謂病只在懶惰者 亦只消得此一病 便是無藥可醫 人之所以懶惰 只綠見此道理不透 所以一向提掇不起 若見得道理分明 自住不得 豈容更有懶惰時節耶 所謂此外無難除之病者 亦信未及 况自以爲無 則其有者將至矣 便敢如此斷置 竊恐所以自省者亦太疏耳 又謂海內善類消磨摧落之後 所存無幾 此誠可歎 若鄙意則謂纔見消磨得去 此等人便不濟事 若使眞有所見 實有下工夫處 則便有鐵輪頂上轉旋 亦如何動得他
大學定本修晩未畢 俟得之卽寄去 王晉輔好且勸它莫管他人是非長短得失 且理會敎自家道理分明 是爲急務 此事之外 不可使有毫髮雜用心處也 然人要閑管 亦只是見理不透 無頓自己身心處 所以如此 願更察此 有以深矯揉之 乃爲佳耳 年來頓覺衰憊殊甚 死期將至 而朋友間未有大可望者 令人憂懼 不知所以爲懷 季章千萬勉旃 乃所深望
제(熹)가 다시 아룁니다. 제 병은 갈수록 심해지는데 추위가 닥치니 더욱 더 극심하여 요즘 같아서는 전연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약먹는 일을 감히 폐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반드시 효과를 얻는 것도 아니고 우선 다시 약에 맡겨 볼 뿐 달리 어찌 해볼 계책이 없습니다.
보내 준 편지를 다 보았습니다. 이른바 “어구(語句)가 우연히 그랬으나 실제는 도리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를 변명한 것일 뿐 예전의 병폐는 아직도 제거되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마음속이 정성스러우면 밖으로 드러난다”는 것, 이 또한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무의(無疑)의 병이 역시 이와 같은데 마침 그의 편지에 답장할 때 매우 통렬하게 말했습니다. 한번 취해 살펴 보면 나의 뜻을 볼 수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시 자세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또 ‘병은 다만 나태함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한 가지 병은 없애버려야 할 뿐 어떤 약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나태한 것은 다만 이런 도리를 투철하게 보지 못함으로 인하여 한결같이 이끌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도리를 분명하게 본다면 스스로 멈추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다시 나태한 시절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이밖에 제거하기 어려운 병은 없다’는 것도 믿지 못하겠는데, 하물며 스스로 없다고 여긴다면 있는 것이 장치 이를 것입니다. 문득 감히 이처럼 판단하여 버려둔다면 아마도 스스로 반성해야 하는 이유도 너무 소략할 듯 싶습니다.
또 ‘온 나라의 선한 선비가 박해를 당해 좌절한 뒤에 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니, 이는 참으로 탄식할 만합니다. 내 견해로 말할 것 같으면 없어져감을 보게 되었니 이런 사람은 일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에게 참으로 견해를 지녀 실제로 공부한 곳이 있게 한다면, 문득 철륜(鐵輪)의 꼭대기에서 돌리는 일이 있더라도 어떻게 그의 뜻을 움직이겠습니까?
대학(大學) 정본(定本)은 아직 다 수정하여 바꾸지를 못했으니 완성하기를 기다려 곧 보내겠습니다. 왕진보(王晉輔)에게 다른 사람의 장단, 시비, 득실에 관여하지 말고 자기의 도리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急先務)임을 이해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일 이외에 조금이라도 번잡하게 마음을 쓰는 곳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한가롭게 관여하려는 것도 다만 이(理)를 투철하게 보지 못하여 자기 신심을 정돈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원컨대 이를 다시 살펴 깊이 바로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연래(年來)에 갑자기 아주 쇠약하고 피곤하여 죽을 때가 닥쳐옴을 느끼겠습니다. 그런데 벗 사이에 크게 기대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저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계장(季章)은 부디 힘쓰기를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오백풍이 사망한 년도가 경원 3년(정사; 1197, 68세)이나, 경원 4년(무오; 1198, 69세) 으로 주정 됨으로 이 편지 역시 이 때쯤 쓰여진 것 같다. 오백풍의 부고를 받고는 다시 얻기 어려운 사람을 잃은 슬픔을 이야기하고 아울러 유계장과 무의가 그의 장례에 대해 주관하고 있음 충분히 친구의 의를 볼 수 있다고 하면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다.
憙歲前得益公書 報吳伯豐病瘡甚危 適得子約書 乃聞其訃 深爲傷痛 近年朋友讀書講學如此君者絶不易得 此爲可惜 不但交遊之私情也 聞後事深荷老兄與無疑周全之 足見朋友之義
제(熹)가 몇해 전에 익공(益公)의 편지를 받으니 오백풍(吳伯豐)의 병창(病瘡)이 심히 위독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마침 자약(子約)의 편지를 받고 보니 바로 그의 부고인지라 매우 슬프고 가슴 아팠습니다. 요즘 벗들 중에서 이 사람 같이 독서하고 강학한 자를 참으로 얻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되고보니 매우 애석합니다. 이는 교유(交遊)의 사사로운 정 때문만은 아닙니다. 듣자하니 뒷일은 노형과 무의(無疑)가 두루 보살핌에 힘입고 있다 하니 친구간의 의리를 볼 수 있습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주자는 처음에 풍백이 항상 소인을 가까이 한다고 의심하였다. 그러므로 주자는 백풍(伯豊)은 스스로 정립(定立)할 줄 몰랐고, 단지 그의 강론에 공을 들여 분석하고 관통한 것이 한 때 여러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라고 보아서 마음으로 원대한 곳에 이를 것이라 기대했는데, 죽고 나서 유계장의 편지를 통해 그가 뒤에 지수(持守)한 바가 견고하다는 것을 듣고는 그가 정립(定立)하였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오백풍의 죽음에 대해 유학이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사람을 잃게 되었다고 애석해 했다.
熹今春大病 幾不能起 今幸小康 然亦尙未能平步也 初意若得未死 且當屛棄書冊 虛心待盡 今又覺不能頓爾捐去 亦苦頭緖太多 不是老年活計 徐當以漸節減也 益公淸健可喜 近答其書論范文正公墓碑事 以病草草 今始能究其說 然自覺語言有過當處 不知能不相怪否也 伯豐初亦不知其能自植立如此 但見其於講論辨得下功 剖析通貫 非一時諸人所及 心固期以遠到 不謂乃止於此 殊可痛惜 今承來喩 又得聞其後來所守之堅 此尤不易 吾道不幸遽矢此人 餘子紛紛 纔有毛髮利害 便章皇失措 進退無門 亦何足爲軒輊耶疾少間 亦可慚理舊聞 向前進步否 博文約禮 不可偏廢 雖孔子之敎 顔氏之學 不過是此二事 更惟勉旃 乃所深望也
저(熹)는 이번 봄에 큰 병으로 거의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다행히 조금 편안해 졌지만 아직도 평소처럼 걷지는 못합니다. 처음엔 만약 죽지 않으면 서책(書冊)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또 갑자기 버리지 못해 괴로운 상황이 너무 많아 늘그막의 생활 태도가 아니니, 점차 서서히 줄여야 할 것입니다. 익공(益公)은 청수(淸秀)하고 건실(健實)하니 매우 기쁩니다. 근래 그의 편지에 답장을 했는데, 범문정공(范文正公)의 묘비(墓碑)에 대한 일을 논하다가 병으로 소략하게 말하는데 그쳤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그의 설을 따져 볼 수 있었으나 말이 너무 지나친 곳이 있음을 느끼겠는데, 서로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백풍(伯豊)은 당초에 스스로 이처럼 정립(定立)할 줄 몰랐고, 단지 그의 강론에 공을 들여 분석하고 관통한 것이 한 때 여러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라고 보아서 마음으로 원대한 곳에 이를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여기에서 그치니 매우 애석합니다. 보내 준 편지를 받고 또 그 뒤에 지수(持守)한 바가 견고하다는 것을 들으니, 이는 더욱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도(吾道:儒學)가 불행하게도 갑자기 이 사람을 잃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분분하여 겨우 털끝같은 이해(利害)만 있어도 곧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나아가고 물러남에 일정한 방법이 없으니 어찌 족히 헌지(軒輊)하겠습니까? 병이 조금 나으면 점차 과거에 들은 것을 정리하여 앞을 향하여 진보할 수 있을지요? 박문약례(博文約禮)의 공부는 치우치거나 그만 둘 수 없으니, 비록 공자의 가르침과 안(顔)씨의 학문일지라도 이 두 가지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힘쓰기를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병이 들어 낭패를 보고 있지만 강론 연구(講貫)하는 즐거움과 후손들을 가르치고, 때대로 옛 책들을 정돈하면서 간혹 차이가 있는 것을 훈고(訓詁)하는 즐거움이 있음을 말했다.
熹今年一病狼狽 入夏方粗可支吾 但衰憊殊甚 講貫之樂 只一二朋友在此 訓導諸孫 時時整頓得舊書訓詁間有差誤而己 禮書四散 未得會聚參校 其它亦更有合料理文字 覺得精力不逮 皆不復敢萌意矣 賢者作何功夫 因書幸及一二
저(熹)는 올해 한 가지 병으로 낭패를 보았습니다만 여름에 들면서 비로서 조금이나마 버틸만 한데, 단지 몸이 쇠하여 고달픈 것이 특히 심할 뿐입니다. 강론하고 연구하는 즐거움은 한 두 벗이 여기에 있으면 여러 후손들을 가르치고, 때때로 옛 서적에서 훈고하는 사이에 간혹 차이가 있는 것을 정돈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서(禮書)가 사방으로 흩어져있어 모아서 참고하여 고칠 수 없습니다. 그 외에도 마땅히 처리해야할 문자들이 더 있는데 정력이 미치지 못해 전혀 다시는 감히 생각을 꺼내지도 못합니다. 그대는 무슨 공부를 하는지요? 편지가 왔기에 다행히 한 두 가지만 언급해 봅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예서를 정돈하였지만 이것을 베껴 적을 사람과 비용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다.
禮書此數日來方得下手 已整頓得十餘篇 但無人抄寫爲撓 蓋可借人處 皆畏僞學之汚染 而不肯借 其力可以相助者 又皆在遠而不副近急 不免雇人寫 但資用不饒 無以奉此費耳
예서(禮書)는 요 며칠 사이에 이제 손을 대어 이미 십여 편을 정돈했습니다만, 베껴 적을 사람이 없어서 야단입니다. 대개 힘을 빌릴 만한 사람은 모두 위학(僞學)에 오염될까 두려워하며 힘을 빌려 주려하지 않고, 힘이 서로 도울 만한 사람은 또 멀리 있어서 근처의 급한 일에 부응하지 못합니다. 사람을 고용하여 베낄 수밖에 없는데 비용이 넉넉하지 못하여 이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유계장에게 답함 答劉季章
【해제】계장이 묘비에 대해 관심을 가져준 것에 감사하고, 행장은 남의 눈에 미리 띄지 않게할 것과, 자신의 글에 대해 질정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益公處所懇是先人墓碑 幸垂念 但行狀它人未見之 更告爲言及 得不示外人爲幸也 又前書求精舍大字及呈一二文字 語次幸幷扣之 大字願早拜賜 鄙文幸痛掊擊也
익공(益公)이 간청한 것은 선인의 묘비인데, 관심을 가져주시니 다행입니다. 다만 행장이란 다른 사람이 아직 보지 못했으니 다시 말로 타일러 외부인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또 전의 편지에서 정사(精舍)의 큰 글자를 구한 것과 올린 한 두 문자는 말하던 차에 다행이도 함께 알리게 되었습니다. 큰 글자는 빨리 받을 수 있기를 원하오나 제 글은 통렬히 공격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허경양에게 답함 答許景陽
【해제】허경양이 일찍이 주자에게 ‘미발의 중(未發之中)’과 관련하여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 주자의 견해와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주자는 다만 이 이치는 악(惡)에 상대해서 말하면 선(善)이라 하고, 탁(濁)에 상대해서 말하면 청(淸)이라 하고 사방(四旁)에 상대해서 말하면 중(中)이라 할 뿐이니 처음부터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대개 맹자의 성선(性善)은 계선(繼善)의 설에 근본하고, 자사(子思)의 미발지중(未發之中)은 강리(降裏)의 설에 근본하며 대학(大學)의 명덕은 명명(明命)의 설에 근본한다. 말로써 맑게 하고 이(理) 전에는 말이 없다. 선생은 이에 대해 비록 한마디 말을 했지만 후에 다시 보지 않으면 혹 한 때 나온 우연한 말과 같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시에 명도(明道)의 설을 논함으로 인해 한 말일 뿐이다. 이 글은 중인(衆人) 역시 미발(未發)의 중(中)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호광중(胡廣仲), 서언장(徐彦章)의 글과 같다.
一別十年 彼此皆非復往時矣 近見槐陰問答 覺得所論皆太寬緩 此非言語之病 乃是用功處不緊切耳 來書所論未發之中 恐不如此 似看得太過了 只是此理 對惡而言則謂之善 對濁而言則謂之淸 對四旁而言則謂之中 初非有二物 但唯聖人爲能全之 以致其用 衆人則雖有而不能自知 是以汨於物欲而亂之耳 曾子之說似亦未然 嘗謂夫子此機 如決積水於千仞之壑 故當時曾子一聞便透 更無疑滯 若如所論 則夫子方是敎它曾子漸次消磨 曾子元未及下功夫 如何便應得箇唯字也此等處且宜虛心玩味 不可輕易立說也
한 번 헤어진지 10년이 지났건만 피차간에 모두 옛 시절의 모습은 아닙니다. 근래에 괴음(槐陰)의 문답을 보고 논한 것들이 모두 지나치게 관대함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언어의 병통이 아니라 바로 공부할 곳에서 긴요하고 절실하지 않은 것 때문일 뿐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논한 “미발(未發)의 중(中)”이란 아무래도 이와 같지는 않으니 보신 것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이치는 악(惡)에 상대해서 말하면 선(善)이라 하고, 탁(濁)에 상대해서 말하면 청(淸)이라 하고 사방(四旁)에 상대해서 말하면 중(中)이라 할 뿐이니 처음부터 두 가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인만이 능히 그것을 온전히 해서 그 작용을 이룰 수 있을 뿐, 뭇 사람들은 비록 그것이 있어도 능히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물욕에 골몰해서 어지러울 뿐입니다. 증자(曾子)의 설(說)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일찍이 “공자의 이러한 기틀은 마치 천길 계곡에 막아놓았던 물을 트는 것 같다” 말했기 대문에 당시에 증자(曾子)는 한 번 들으면 곧바로 통하였고 다시는 의심이나 막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논한 바와 같다면 공자는 아마도 저 증자를 점차 약화시켰을 것이며, 증자는 원래 공부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곧바로 “네(唯)”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곳은 또한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완미해야지 가볍고 쉽게 입설(立說)해서는 아니 됩니다.
진백견에게 보냄 與陳伯堅
【해제】학자는 단지 성인의 경전을 깊이 궁구하여 마음에 돌이켜 편안하도록 하고, 경전에 고증하여 합하며 외면에 체험하여 행할 수 있도록 하고 곧 이단의 망언을 한 번 들으면 바로 논파할 수 있도록 해야 하니, 만약 그렇지 못하고 갑자기 궁구하려 하면 도리어 불교도가 될 것이라는 것을 경계하는 편지이다.
沙縣寄到新刻責沈文 字畫精神 非桂本之比 此書流傳 足使世之聾盲者 有所警覺 稍知觸淨 非小補也 但恐木本或不耐久耳 瓊學記文鄙拙 不足有所發明 亦緣韓兄將滿 方遣人來 恐其代去 匆匆草成 不能滿意耳 垂喩舊書云云 深愧率爾 當時之言 蓋亦有爲而發 以今觀之 學者但當深窮聖經 使其反之於心而安 考之於經而合 驗之於外而可行 卽彼之妄言一覽便破矣 若未到此 遽欲窮之 恐如河南夫子所謂末必能窮而已化爲釋氏矣 愚見如此 不審尊意以爲如何 胡季隨近到此數日 明敏有志 甚可喜也
사현(沙縣)에서 새로 새긴 책침문(責沈文)을 붙여 왔는데 자획에 담긴 정신이 계림(桂林)본에 비유할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이 유포되어 전해지면 족히 세상의 귀머거리나 소경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조금씩 깨끗함을 느낄 줄 알게 할 것이니 보탬이 작지 않습니다. 다만 나무로 된 판본인지라 내구성(耐久性)이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경주학기(瓊州學記)의 문장은 비루하고 졸렬해서 드러내 밝히기엔 부족합니다. 또한 장차 한형(韓兄)의 임기가 만료되기 때문에 바야흐로 사람을 보내오니 그가 교체되어 떠날 듯 싶어 바쁘고 급하게 완성함하느라 만족스럽지 못할 뿐입니다.
구서(舊書)에 운운(云云)이라 하신 것은 매우 부끄럽습니다. 당시의 말이 아마 무언가를 위하여 말한 것 같은데, 지금 보면 학자들이 단지 성인의 경전을 깊이 궁구하여 마음에 돌이켜 편안하도록 하고, 경전에 고증하여 합하며 외면에 체험하여 행할 수 있도록 한다면 곧 저들의 망언(妄言)은 한 번 보면 곧 논파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갑자기 궁구하려 하면 아마 하남부자(河南夫子)가 말한 것처럼 “반드시 능히 궁구하지도 못하고 이미 석(釋)씨로 변화될 것이다”는 말과 같이 될까 두렵습니다. 저의 견해는 이와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호계수(胡季隨)가 근래 이곳에 온지 며칠이 되었는데 명민하고 뜻이 있으니 매우 기뻐할만한 일입니다.
호계리(대장)에게 답함 答胡季履(大壯)
【해제】계수가 주자에게 와서 배우고 돌아감에 그 편에 계리에게 이 편지를 주어 답하면서 주자는 매번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미하여 선비들이 학문을 알지 못하니, 비루한 데에 빠진 사람은 굳이 말할 것이 없고 고원한 곳에 뜻을 둔 사람들도 간혹 헛된 이름에 치달려 고인의 위기(爲己)의 실상을 구하지 않아서 남들에게 구하는 것은 매우 무거우나 자임(自任)하는 것은 매우 가벼움을 근심한다고 하였다.
向來雖幸一見 然忽忽於今 已二十餘年矣 時於朋友間得窺佳句 足以見所存之一二 顧未得會面爲歉耳 今承惠問 荷意良勤 區區每患世衰道微 士不知學 其溺於卑陋者固無足言 其有志於高遠者又或騖於虛名而不求古人爲己之實 是以所求於人者甚重而所以自任者甚輕 每念聖人樂取諸人以爲善之意 意其必有非苟然者 恨不得與賢者共詳之也 季隨明敏 朋友中少見其比 自限衰墮 豈足以副其遠來之意 然亦不敢虛也 歸日當相與講之 有所末安 却望見告 得以反復爲幸 昆仲家學門庭非他人比 而區區所望又特在於其實而不在於名 願有以深察此意也
지난 번에 비록 다행히 한 번 보았지만 벌서 어언 20여년이 흘렀습니다. 당시엔 벗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시구를 보고, 그대가 간직한 한 두 가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직접 뵐 수 없음이 뜻에 차지 않을 따름입니다.
지금 보내 준 질문을 받으니 생각해 준 뜻이 참으로 성실합니다. 보잘 것 없는 나는 매번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미하여 선비들이 학문을 알지 못하니, 비루한 데에 빠진 사람은굳이 말할 것이 없고 고원한 곳에 뜻을 둔 사람들도 간혹 헛된 이름에 치달려 고인의 위기(爲己)의 실상을 구하지 않아서 남들에게 구하는 것은 매우 무거우나 자임(自任)하는 것은 매우 가벼움을 늘 항상 걱정하고 있습. 매번 성인이 남에게서 취하여 선을 행함을 즐거워한다는 뜻을 생각할 때마다 반드시 구차하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대와 함께 상세하게 토론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계수(季髓)는 명민하여 벗들 가운데에는 그와 비길만한 사람이 적습니다. 나는 스스로 쇠하여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어찌 찾아 그 먼 곳까지 온 뜻에 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감히 헛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돌아가는 날 마땅히 서로 더불어 강학을 할 것이니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도리어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반복 토론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대 형제의 가학(家學)과 문정(門庭)은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나, 보잘 것 없는 내가 바라는 바는 다만 그 실상에 있고 이름에 있지 않습니다. 원컨대 깊이 이런 뜻을 살피기 바랍니다.
호계수(대시)에게 답함 答胡季隨 (大時)
【해제】이 편지는 순희 13년(병오; 1186, 57세)에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강학함에 반드시 하나의 입문하는 곳이 있어야 비로소 공부하기에 좋음을 말하고, 또한 도리는 형체와 그림자가 없으니 오직 사물과 언어로 인하여 시비를 볼 수 있으니 고인의 이른바 물격(物格)과 지지(知至)는 이에 나아가 공부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또한 편지 말미에서는 당시의 학자들이 너무 고원(高遠)하여 의사가 확실하지 않아 한 가지 책이나 한 가지 일도 철두철미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병폐를 지적하고 이를 경계하였다.
易傳平淡縝密 極好看 然亦極難看 大抵講學須先有一入頭處 方好下工夫 昨見文叔處所錄近文 恐看得文字未子細 無意味也 不必遠求 但看知言是下多少工夫 不如此散漫泛說 無歸宿也 龜山易舊亦有寫本 此便不甚的 未暇檢尋奉寄 不知詹丈所擧不同者何事 因風詳諭 此等處正好商榷也 道理無形影 唯因事物言語乃可見得是非 理曾極子細 卽道理極精微 古人所謂物格知至者 不過是就此下功夫 近曰學者說得太高了 意思都不確實 不曾見理會得一書一事徹頭徹尾 東邊綽得幾句 西邊綽得幾句 都不曾貫穿浹洽 此是大病 有志之士尤不可以不深戒也
역전(易傳)은 평이하면서도 치밀하여 매우 보기가 좋습니다만 역시 지극히 보기 어려운 곳도 있습니다. 대체로 강학은 반드시 먼저 하나의 입문하는 곳이 있어야 비로소 공부하기에 좋습니다. 어제 문숙(文叔)이 기록한 근래의 문장을 보니 아마도 문자를 자세히 보지 않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멀리서 구하지 않고 지언(知言)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 공부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산만하고 범범하게 말해서 귀결이 없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구산(龜山)의 역(易)은 옛날에 또한 사본이 있었으나 이는 곧 매우 적확하지 않은 것이어서 검토하여 보낼 겨를이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첨장(詹丈)이 거론한 같지 않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요? 사람을 통해 자세히 알려주신다면 이러한 곳은 토론해 볼 것입니다.
도리는 형체와 그림자가 없으니 오직 사물과 언어로 인하여 시비를 볼 수 있습니다. 매우 자세하게 이해해보면 곧 도리가 아주 정미해지니, 고인이 이른바 물격(物格), 지지(知至)는 이에 나아가 공부한 것에 불과합니다. 근일에 학자들은 말이 너무 고원(高遠)하여 의사가 도무지 확실하지 않아 한 가지 책이나 한 가지 일도 철두철미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동쪽에서 대충 몇 구절을 보고 서쪽에서 대충 몇 구절을 보느라 도대체 관통하여 협흡(浹洽)하지 못하니 이는 큰 병통입니다. 뜻을 품은 선비는 더욱 깊이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이 편지에서는 우선 역전(易傳)을 읽음에 있어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은 본의를 논하기 보다는 정전(程傳)을 보고 도리가 섞이지 않게 하는 것 유익함을 말하였고, 역(易)의 문의(文義)에 대해 대체로 강령(綱領)을 이해하지 못하면 많이 보았다 하더라도 또한 유익함이 없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춘추는 철두철미하게 읽어 득력(得力)한 곳이 있어야 비로소 여러 책들을 읽어도 귀숙(歸宿)할 곳이 있다고 하였으며, 남헌(南軒)의 문집이 이루어 졌는데, 가장 좋은 부분은 주의(奏議)의 문자 및 왕복한 서신 중에 시사(時事)를 논한 곳이므로 세속의 호오(好惡)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져 출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적고 있다.
熹杜門衰病如昔 但覺曰前用力泛濫 不甚切己 方與一二學者力加鞭約 爲克己求仁之功 亦粗有得力處也 易傳且熟讀 未論前聖作易本指 且看得程先生意思 亦大有益 不必更雜看 大抵先儒於易之文義 多不得其綱領 雖多看亦無益 然此一事卒難盡說 不若且看程傳 道理却不錯也
所諭文定專治春秋 而於諸書循環誦讀 以爲學者讀書不必徹頭徹尾 此殊不可曉 旣曰文定讀春秋徹頭徹尾 則吾人亦豈可不然 且又安知其於他書少日已嘗反復硏究 得其指歸 至於老年 然後循環泛讀耶 若其不能 亦是讀得春秋徹頭徹尾 有得力處 方始汎讀諸書 有歸宿處 不然 前輩用心篤實 決不如今時後生貪多務得 涉獵無根也 前書鄙論 更望熟究 其說雖陋 然却是三四十年身所親歷今日粗於文義不至大段差錯之效 恐非一旦卒然立論所可破也 若如來諭 不能俟其徹頭徹尾 乃是欲速好徑之尤 此不可不深省而痛革之也 憙於論孟大學中庸一生用功 粗有成說 然近日讀之 一二大節目處猶有謬誤 不住修削 有時隨手又覺病生 以此觀之 此豈易事 若只侍一時聰明才氣 略看一過 便謂事了 豈不輕脫自誤之甚耶 呂伯恭嘗言 道理無窮 學者先要不得有自足心 此至論也 幸試思之
南軒文集方編得略就 便可刊行 最好是奏議文字及往還書中論時事處 確實痛切 今却未敢編入 異時當以奏議自作一書 而附論事書尺於其後 勿令廣傳 或世俗好惡稍衰 乃可出之耳
저(熹)는 문을 닫고 지내며 노쇠하고 병든 것이 예전 같습니다. 단지 일전에는 공부가 들뜨고 넘쳐서 자기를 절실히 하는 공부를 깊이 있게 하지 못했음을 느낍니다. 이제 한 두 학자와 힘써 채찍을 더하여 극기(克己)와 구인(求仁)의 공부를 하니 조금 득력(得力)한 곳이 있습니다. 역전(易傳)을 우선 익숙히 읽되 이전의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은 본의를 논하지 말고 우선 정선생(程先生)의 뜻을 본다면 또한 크게 유익함이 있을 것이니 다시 이것 저것을 섞어서 볼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선유(先儒)들은 역(易)의 문의(文義)에 대해 대체로 강령(綱領)을 이해하지 못하니 비록 많이 보았다 하더라도 또한 유익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일은 끝내 말로 다하기 어려우니 우선 정전(程傳)을 봄에 도리가 섞이지 않게 하는 것만 같지 않습니다.
보내준 편지에서 문정(文定)이 춘추(春秋)를 깊이 연구하면서 여러 서적을 돌려가며 송독(誦讀)하고, 학자는 독서에 철두철미할 필요는 없다고 하니 이는 무슨 뜻인지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이미 “문정이 춘추를 철두철미하게 읽었다”고 했으면 우리도 어떻게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가 다른 책에대해서 젊은 날에 반복 연구하여 그 귀결을 얻었고, 노년에 이르러 돌려가며 널리 읽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했더라도 역시 춘추는 철두철미하게 읽어 득력(得力)한 곳이 있어야 이제 비로소 널리 여러 책들을 읽어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배(前輩)들의 용심(用心)이 독실하여 결코 지금의 후생(後生)들이 많은 책을 탐하는데 힘쓰느라 섭렵(涉獵)하기만 하여 근원이 없는 것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앞 편지에서 내가 논한 것을 다시 익숙하게 궁구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 설이 비록 비루하나 그래도 340년 동안 몸소 겪은 것입니다. 금일 문의(文義)에 거칠지만 크게 잘못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니, 아마 하루 아침에 갑자기 입론(立論)하여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보낸 편지처럼 철두철미하게 공부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이내 빨리 이루고자 지름길을 좋아하는 허물을 범할 것이니, 이는 깊이 반성하여 통렬하게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희(熹)는 논어와 맹자, 대학, 중용에 일생토록 공을 들여 대략 학설을 완성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일에 읽어 보면 한두 군데 큰 절목(節目)이 아직도 잘못된 곳도 있어 수정하고 삭제(削除)함을 그치지 안아 때로 손을 대면 또 병통이 생기는 것을 느낍니다. 이로써 보건대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다만 한 때의 총명과 재기(才氣)를 믿고 대략 보고 한번 지나치면서 곧 일을 마쳤다고 한다면, 어찌 가볍게 일을 마치려다 자신을 매우 그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백공은 “도리가 무궁하니 학자는 먼저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지론(至論)이니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남헌(南軒)의 문집이 비로소 편집되어 대략 이루어 졌으니 곧 간행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부분은 주의(奏議)의 문자 및 왕복한 서신 중에 시사(時事)를 논한 곳인데 확실하고도 통절하여 지금 도리어 편입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훗날 마땅히 주의(奏議)로 하나의 책을 만들고 그 뒤에 시사를 논한 편지를 덧붙일 것이니 널리 유포되지 않게 하십시오. 혹시라도 세속의 호오(好惡)가 조금 누그러진다면 출간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주자의 입장에서 보면 주역은 본래 점서(占書)인데, 정이천은 의리(義理)로써 주역을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주자는 일찍이 정전이 점서(占筮)를 주로하지 않음을 병통으로 여겼는데 이제 정전을 주로 말을 하므로 역을 점서로 간주해서 보면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자는 반드시 일에 나아가 보아야 비로소 유용한 곳이 있을 뿐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주자는 시경에 대해서도 시경(詩經) 육의(六義)는 본문이 지극히 명백한데 주석을 단 이래로 거기에 골몰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미 잘 정리된 실타래를 흐트러놓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易傳明白 無難看處 但此是先生以天下許多道理散入六十四卦三百八十四爻之中 將作易看 卽無意味 須將來作事看 卽句句字字有用處耳 詩六義 本文極明白 而自注疏以來汨之 如將已理之絲重加棼亂 近世諸老先生亦殊不覺 不知何故如此 中間有答潘恭叔問說此甚詳 可更扣之 當見曲折 蓋不如此 卽六義之名無所用之 當時自不必分別 祗益紛拏 無補於事也 近修詩說 別有一段 今錄去 大槩亦與前說相似 恐或可參照耳 學問大頭緖固要商量 而似此枝節合理會者亦不少 未得面論 徒增耿耿
역전(易傳)은 명백하여 보기 어려운 곳이 없습니다. 다만 이는 선생이 천하의 수많은 도리를 64괘, 384효 가운데 분산하여 넣었으니, 점치는 역(易)으로 생각하여 보면 곧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일에 적용시켜 보아야 곧 모든 글귀나 글자마다 쓸 곳이 있을 것입니다. 시경(詩經) 육의(六義)는 본문이 지극히 명백한데 주석을 단 이래로 거기에 골몰하니 마치 이미 잘 정리된 실타래를 거듭 흐트러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근세의 여러 노선생들 역시 너무나 이 점을 깨닫지 못했는데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반공숙(潘恭叔)의 질문에 답한 것이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매우 상세하니 다시 물어본다면, 마땅히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이와 같지 않았다면 육의(六義)의 이름은 쓸데가 없을 것입니다. 당시엔 굳이 분별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결국 더욱 어지러워져서 일에 아무런 보탬이 없게 되었습니다. 요사이 시경(詩經)의 설들을 수정하여 별도로 한 단락을 만들고 지금 적어 보냅니다. 대개는 또한 전에 말한 것과 서로 같으니 혹시라도 참조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학문의 큰 두서(頭緖)는 참으로 헤아려 모아야 하지만 이같은 지절(枝節)을 마땅히 이해하는 것도 적은 일이 아닙니다. 직접 뵙고 논하지 못하기에 불안한 마음만 더해갑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호계수가 보낸 편지 중에서 중용의 여러 설에 대해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올바른 독서 방법을 제시해 주는 편지이다. 우선 주자는 중용을 읽음에 본문에 나아가 자세히 보아 장(章)과 구(句)가 끊어진 곳에서 문리가 분명함을 깨닫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고 하였다. 또 주자는 중용의 본의는 사람들에게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천리의 실상을 보존하도록 하려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형상을 상상(想象)하여 이 이치의 그림자를 구해 보도록 하려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계수는 공부의 지극한 곳은 끝까지 고원(高遠)함을 추구해가도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말했으니, 이는 곧 자기혼자만 이치를 알고 타인은 모른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런, 병통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마 모든 일이 전도되어 학문의 궁극처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所示諸說 似於中庸本文不曾虛心反覆詳玩 章句之所絶文義之所指尙多未了 而便欲任意立說 展轉相高 故其說支蔓纏繞 了無歸宿 莫若且就本文細看 覺得章斷句絶 文理分明 卽聖人指意所在與今日用力之方 不待如此紛拏辨說而思已過半矣
恭叔所論 似是見得熹舊說而有此疑 疑得大槪有理 但曲折處有未盡耳 當時舊說誠爲有病 後來多已改定矣 大抵其言 道不可離 可離非道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乃是徹頭徹尾 無時無處不下工夫 欲其無須臾而離乎道也 (不睹不聞與 獨 字不同 乃是言其戒懼慍之至 無適不然 雖是此等耳目不及無要緊處 亦加照管 如云聽於無馨 視於無形 非謂所有聞見處却可闊略 而特然於此加功也)
又言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謹其獨 乃是上文全體工夫之中 見得此處是一念起處 萬事根原 又更緊切 故當於此加意省察 欲其自隱而見 自微而顯 皆無人欲之私也 (觀兩莫字 卽見此處是念廬欲萌而天理人欲之幾 最是緊切 尤不可不下工處 故於全體工夫之中 就此更加省察 然亦非必待其思慮己萌而後別以一心察之 蓋全體工夫旣無間斷 卽就此處略加提撕 便自無透漏也) 此是兩節 文義不同 詳略亦異 前段中間著是故字 後段中間又著故字 各接上文以起下意
前段卽卒章所謂不動而敬 不言而信 後段卽卒章所謂內省不疚 無惡於志 文義條理大小甚明 從來說者多是不察 將此兩段只作一段相纏繞說了 便以戒愼恐懼不睹不聞爲謹獨 所以雜亂重複 更說不行 前後只是粗瞞過了 子細理會 便分疏不下也
又季隨云 純熟未易言也 此語恐有病 蓋季隨意間常說工夫極至之地窮高極遠 決然是不可到 如中間熹說讀書須是精熟 季隨便云須如文定之於春秋方是精熟 今豈易及 亦是此意 夫謂功夫極至之地如此之高 如此之妙則是矜己之獨能知此而以它人爲不知也 以爲人不可到 則是己亦甘自處於不能也 如此則凡講論皆是且做好話說過 其與自謂 吾身不能居仁由義 者雖若有間 然其實亦無以大相遠矣 不除此病 竊恐百事放倒 都不到頭 非是小失 幸深省而痛矯之也
又云 方其未至純熟 天理何嘗不可見乎 此又不看本文本意而逞快鬪高隨語生說之過 夫中庸本意欲人戒謹恐懼 以存夫理之實而已 非是敎人揣摩想象 以求見此理之影也 伯壽下一見字 已是有病 季隨又更節上生枝 更不復以純熟自期 只要就此未純熟處便見夫理 不知見得要作何用 爲說至此 去本日遠 以言平經 則非聖賢之本意 以言乎學 則無可用之實功 如此講論 恐徒紛擾 無所補於聞道入德之效也 其他小節 各具於所示本條之下 幸更與諸君詳評之也
보내 주신 여러 설은 중용 본문(本文)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반복하고 상세하게 완미하지 않아, 장구(章句)가 끊어진 것과 문의(文義)가 가리키는 바에 아직도 명료하지 않은 것이 많은데도, 문득 임의로 입설(立說)하여 점점 더 한 곳으로 치닫고자 했으므로 그 설이 지리하게 얽혀서 마침내 귀착함이 없습니다. 우선 본문에 나아가 자세히 보아 장(章)과 구(句)가 끊어진 곳에서 문리가 분명해짐을 깨닫는 것만 같지 않으니, 곧 성인이 가리키는 뜻이 있는 곳과 금일 힘을 쓰는 방도는 이와 같이 어지럽게 논변하며 설명하지 않아도 생각하여 얻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공숙(恭叔)이 논한 것은 저(熹)의 구설(舊說)을 보고 이런 의심이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의심한 것에는 대개 일리가 있지만 자세한 내용에는 미진함이 있을 뿐입니다. 당시의 구설(舊說)들은 진실로 병통이 있었는데 후에 대부분 이미 개정했습니다. 대저 “도(道)는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바에 경계하고 삼가며 듣지 못하는 바에 두려워한다”고 한 것은 바로 철두철미하게 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공부하지 않음이 없고, 잠깐이라도 도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는 것은 독(獨) 자와 같지 않으니, 바로 매우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어디를 가나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비록 이처럼 이목(耳目)이 미치지 못하여 요긴하지 않는 곳이라도 더욱 밝게 비추는 것이니, 마치 “소리가 없는 데에서 들으며 모양이 없는 데서 본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는 듣고 본 곳은 도리어 소략하게 하여 특별히 여기에 공부를 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숨겨진 것보다 드러난 것이 없고, 미세한 것보다 드러남이 없는 까닭으로 군자는 혼자 있을 때를 삼간다”고 한 것은 바로 윗 문장의 전체 공부 가운데 이곳이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으로 만사의 근원이며 또 더욱 긴절하다는 것을 본 까닭으로 마땅히 여기에 뜻을 더하여 성찰하여서 숨은 것도 드러나고 미세해도 드러나도록 하여, 모두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 두 막(莫) 자를 보면 곧 이곳은 염려(念慮)가 싹이 트니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기미(幾微)가 가장 긴절하여 더욱더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전체(全體) 공부 가운데 여기에 나아가 더욱 성찰을 더 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사려(思慮)가 싹이 트기를 기다린 뒤에 따로 일심(一心)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다. 대개 전에 전체 공부에 간단(間斷)이 없다면 곧 이곳에 나아가 조금 진작(振作)하면 문득 저절로 새어나감이 없는 것이다. 이 두 구절은 문의(文義)가 같지 않고 자세함과 생략됨 또한 다르며, 앞 단락 중간에 있는 ‘시고(是故)’자와 후단 중간에 있는 ‘고(故)’자는 각각 위 문장에 붙여서 아래 의미를 일으켜야 합니다.
앞 단락은 곧 마지막 장에서 이른바 “움직이지 않아도 공경하고 말하지 않아도 미덥다”고 한 것이고, 뒷 단락은 곧 마지막 장에서 이른바 “안으로 반성하여 병통이 없고 뜻에 미워함이 없다”는 것이니 문의(文義)와 조리, 대소가 매우 분명합니다. 종래에 설명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를 살피지 못하고 이 두 단락을 다만 한 단락으로 여겨 얽어서 말하여 곧 계신공구(戒愼恐懼)․부도불문(不睹不聞)을 근독(謹獨)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뒤섞여 어지럽고 중복되어 다시 말이 행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뒤는 다만 대충 보고 지나쳤는데 자세하게 이해하면 곧 나누어 설명하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또 계수(季隨)는 “순전하고 익숙함은 쉽게 말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병통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개 계수(季隨)는 의식적으로 공부의 지극한 곳은 끝까지 고원(高遠)함을 추구해 가도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항상 말했습니다. 중간에 내가 “독서는 반드시 정밀하고 익숙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계수는 곧 “반드시 문정(文定)이 춘추를 읽은 것과 같이 해야 바야흐로 정밀하고 익숙해질 것이니, 지금 어떻게 쉽게 도달하겠는가” 하니, 역시 이런 뜻입니다. 대저 “공부의 지극한 곳은 이처럼 높고 오묘하다”고 한 것은 자기만 홀로 이를 안다고 자랑하고 타인은 모른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남들이 도달하지 못한다고 여긴다면 이는 자기도 기꺼이 능치 못하다고 자처하는 것이니, 이와 같다면 강론은 모두 좋은 말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스스로 “나는 인(仁)에 거하고 의(義)를 행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과 비록 간격이 있는 듯하나 그 실제는 또한 크게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병통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마 모든 일이 전도되어 도무지 꼭대기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작은 손실이 아닐 것이니, 깊이 반성하여 통렬하게 바로잡기 바랍니다.
또, “바야흐로 순전하고 익숙한 데에 이르지 못했을 때에도 천리를 어찌 볼 수 없겠는가?” 하니, 이는 또 본문의 본의를 보지 못하고 멋대로 고원함을 다투어 말에 따라 설(說)을 만들어내는 허물입니다. 대저 중용의 본의는 사람들에게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천리의 실상을 보존하도록 하려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형상을 상상(想象)하여 이 이치의 그림자를 구해 보도록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백수(伯壽)가 하나의 견(見) 자를 쓴 것에 이미 병통이 있거늘 계수(季隨)가 또다시 마디 위에 가지를 내어 다시는 순전하고 익숙함으로 스스로 기약하지 않고, 다만 이 순수하고 익숙하지 못한 곳에 입각하여 문득 천리를 보고자 하니, 본 것을 어디에 쓰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을 주장함이 이에 이르면 본원(本源)과 날로 멀어져, 경전을 말하면 성현의 본의가 아니고 학문을 말하면 쓸만한 실제 공이 없습니다. 이같이 강론하면 한갓 시끄럽고 소란하여 도를 듣고 덕에 들어가는 공효(功效)에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그 외의 작은 구절들은 각각 제시한 본래조목의 아래에 갖추어져 있으니 다시 제군들과 자세하게 평론해보기를 바랍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앞의 편지에 이어 계구와 신독, 치중화와 성찰 등에 대해 문인들과 문답한 것을 가지고 답한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호계수는 계구(戒懼)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하기 전에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신독(愼獨)은 희노애락이 발한 뒤에 성찰(省察)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자는 이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호계수는 함양 공부는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데 아직 발하기 전에는 다만 함양해야 할 뿐이니 발한 곳에서는 바로 성찰 공부를 해야 하며, 함양이 더욱 익숙한 곳에 이르면 성찰이 더욱 정밀해질 것이라고 하였데, 역시 이에 대해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주자는 중(中)과 화(和)를 이룸에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는 것은 항상된 도리라고 말하였다.
戒懼者 所以涵養於喜怒哀樂未發之前 (當此之時 寂然不動 只下得涵養功夫 涵養者 所以存天理也) 愼獨者 所以省察於喜怒哀樂已發之後 (當此之時 一毫放過 則流於欲矣 判別義利 全在此時 省察者 所以遏人欲也 已發之後 蓋指已發之時 對未發而言 故云已發之後) 不知經意與日用之工是如此否 (友恭字恭叔)
문 : 계구(戒懼)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하기 전에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 이때를 당해 고요히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만 함양(涵養) 공부만 할 것이니, 함양(涵養)한다는 것은 천리를 보존하는 것이다. ― 신독(愼獨)은 희노애락이 발한 뒤에 성찰(省察)하는 것입니다. ― 이때를 당해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욕심으로 흐른다. 의리를 판별하는 것이 모두 이때에 있으니, 성찰은 인욕(人欲)을 막는 것이다. 이미 발한 후란 이미 발한 때를 가리키니 미발(未發)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발한 후라고 한 것이다. ― 경전의 뜻이 일용의 공부와 이와 같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 우공(友恭) : 자는 공숙(恭叔)이다.
此說甚善
답 : 이 설이 매우 좋습니다.
惟能加涵養之功 則自然有省察之實 (周椿伯壽)
문 : 오직 함양 공부를 더할 수 있으면 자연히 성찰의 내실이 있게 됩니다. -주용백수(周椿伯壽)
此說好 然說未透.
답 : 이 설이 좋지만 말이 투철하지는 못합니다.
戒懼乃所以愼獨也 涵養省察之際 皆所當然 未發之前 不容著力 只當下涵養工夫 來敎得之 省察於已發之時 此句之病恭叔已言之矣 正所以存天理遏人欲也 恐不可分 (一之)
문 : 계구(戒懼)는 바로 신독하는 것입니다. 함양하고 성찰할 즈음 모두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발하기 전에는 힘을 써서는 안되고 단지 함양 공부만 해야 할 것이니, 보내 준 편지에서 한 말이 맞습니다. “이미 발한 때에 성찰한다”고 한 이 구절의 병통을 공숙(恭叔)이 말했으니, 바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는 것입니다. 아마 나눌 수는 없을 듯합니다. ― 일지(一之)
作兩事說則不害於相通 作一事說則重複矣 不可分中却要見得不可不分處 若是全不可分 中庸何故重複說作兩節
답 : 두 가지 일로 여겨서 말하면 서로 통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고, 한 가지 일로 여겨서 말하면 중복됩니다. 나눌 수 없는 가운데 도리어 나누지 않을 수 없는 곳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완전히 나눌 수 없다면 중용에서 무슨 까닭으로 중복되게 말하여 두 구절로 했겠습니까?
已發之後 立語自覺未穩 今欲改作 欲發之時 然欲發卽不屬靜 不屬動 又欲改作已發之初 (友恭)
문 : ‘이미 발한 뒤[已發之後]’라고 말한 것이 스스로 온당하지 못함을 느껴 지금 ‘발하려는 때[欲發之時]’로 고치려 합니다. 그러나 발하려고 하면 정(靜)에도 속하지 않고 동(動)에도 속하지 않아 또 이미 발한 처음(已發之初)로 바꾸려고 합니다. ― 우공(友恭)
作欲發是 但亦不是欲發時節別換一心來省察他 只是此箇全體戒懼底畧更開眼耳
답 : 발하려 한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단지 발하려는 때에 따로 한 마음을 바꾸어 그것을 성찰(省察)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계구(戒懼)하는 전체 과정에서 조금 다시 살펴볼 따름입니다.
戒謹恐懼愼獨統而言之 雖只是道都是涵看工夫 分而言之 則各有所指 獨云者 它人不知 己所獨知之時 正友恭所謂已發之初者 不睹不聞 卽是未發之前 未發之前 無一毫私意之雜 此處無走作 只是存天理而已 未說到遏人欲處 已發之初 天理人欲由是而分 此處不放過 卽是遏人欲 天理之存有不待言者 如此分說自見端的
문 : 계근(戒謹), 공구(恐懼), 신독(愼獨)을 통틀어 말하면 비록 모두 함양 공부라 말하지만, 나누어 말하면 각기 가리키는 바가 있습니다. ‘독(獨)’이라 하는 것은 남은 모르는데 자기만 아는 때이니, 바로 우공(友恭)이 이른바 “이미 발한 처음”입니다.
‘부도불문(不覩不聞 :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하는 것은 곧 아직 발하기 전입니다. 아직 발하기 전에는 조금의 사사로운 뜻도 혼잡됨이 없습니다. 이곳은 일탈함이 없으니 다만 천리를 보존할 뿐이요, 인욕을 막는곳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발한 처음은 천리와 인욕이 이로 말미암아 나누어지니,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 곧 인욕을 막는 것이고, 천리가 보존되는 것도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와 같이 나누어 말하면 저절로 분명해짐을 볼 것입니다.
此說分得好 然又須見不可分處 如兵家攻守相似 各是一事而實相爲用也
답 : 여기에서 나누어 말한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또 반드시 나눌 수 없는 곳을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병법가들의 공격하고 수비하는 것과 유사하여 각각 하나의 일이지만 실은 서로 운용(用)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涵善工夫實貫初終 而未發之前 只須涵養養 纔發處便須用省察工夫 至於涵養愈熟 則省察愈精矣
문 : 함양 공부는 실로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데 아직 발하기 전에는 다만 함양해야 할 뿐이고, 겨우 발한 곳에서는 바로 성찰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함양이 더욱 익숙한 곳에 이르면 성찰이 더욱 정밀해질 것입니다.
此數句是
답 : 이 몇 구절은 옳습니다.
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若就聖人言之 聖人能致中和 則天高地下 萬物莫不得其所如風雨不時 山夷谷埋 皆天地不位 萌者折 胎者閼 皆萬物不育 就吾身言之 若能於致字用工 則俯仰無愧 一身之間 自然和暢矣
문 : ‘중(中)과 화(和)를 이룬다’, ‘천지가 제자리에 선다’,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는 것을 만약 성인(聖人)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성인은 능히 중(中)과 화(和)를 이룰 수 있으니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만물은 자기의 자리를 얻지 못함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불시에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고, 산이 평평해지고 계곡이 묻히는 것은 모두 천지가 제자리에 서지 못한 것입니다. 싹이 꺽이고 태아가 나오지 못하는 것은 모두 만물이 제대로 길러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면 만약 ‘이룬다(致)’는 글자에 공부를 할 수 있다면 굽어보거나 우러러봄에 부끄러움이 없어서 일신(一身) 사이에 자연 화창해질 것입니다.
此說甚實
답 : 이 설명은 매우 알찹입니다.
極其中 則大經正大本立而上下位矣 極其和 則事事物物各得其宜而萬物育矣 (一之)
문 : 그 중(中)을 지극히 하면 큰 법이 바루어지고, 큰 근본이 세워져서 위 아래가 제자리에 서게 됩니다. 화(和)를 지극히 하면 사사물물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어 만물이 제대로 길러지게 됩니다. -일지(一之)
此只說得前一截 若聖人不得位 便只得如此 其理亦無虧欠 但事上有不足爾
답 : 이것은 단지 앞의 한 구절을 말했을 뿐입니다. 만약 성인이 제자리에 서지 못한다면 곧 다만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 이치는 또한 이지러지거나 흠이 없지만 일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을 뿐입니다.
如堯湯 不可謂不能致中和 而亦有水旱之災 (恭叔)
문 : 요(堯)임금이나 탕(湯)왕 같은 분들은 중(中)과 화(和)를 이루지 못해 또한 홍수나 가뭄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致中和而天地位萬物育者 常也 堯湯之事 非常之變也 大抵致中和自吾一念之間培植推廣 以至於裁成輔相 匡直輔翼 無一事之不盡 方是至處 自一事物之得所區處之合宜 以至三光全 寒暑平 山不童 澤不涸 飛潛動植各得其性 方是天地位萬物育之實效 蓋致者 推致極處之名 須從頭到尾看 方見得極處 若不說到天地萬物眞實效驗 便是只說得前一截 却要凖折了後一截 元不是實推得到極處也
답 : 중(中)과 화(和)를 이룸에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는 것은 항상된 도리입니다. 요임금이나 탕왕의 일은 항상된 도리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중(中)과 화(和)를 이루는 것은 나의 한 생각 사이로부터 배양하고 미루어 넓혀, 재량하여 성취하고 도와서 바로 잡고 바루어 곧게 하며 보좌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지극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사물이 마땅하게 처리되는 것으로부터 삼광(三光)이 온전하고 추위와 더위가 화평하며, 산이 벗겨지지 않고 못이 마르지 않으며 날짐승 물짐승 동식물이 각각 그 성(性)을 얻는 지경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것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지는 실제적인 효험인 것입니다. 치(致)자는 극처(極處)까지 미루어 이른다는 이름이니 반드시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보아야 비로서 극처(極處)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천지만물의 진실한 효험을 말하지 않고 곧 단지 앞의 한 부분을 말한 것은 도리어 뒤의 한 부분을 의거해서 절충해야하니 원래부터 실제로 미루어 극처(極處)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省察於欲發之時 平曰工夫不至而欲臨時下手 不亦晩乎 (大時)
문 : “발하려는 때에 성찰해야 한다”고 하니, 평소의 공부가 지극하지 않은데 때가 되어 손을 대려고 한다면 너무 늦지 않습니까? ― 대시(大時)
若如此說 則是臨時都不照管 不知平日又如何做工夫也
답 :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때를 만나서도 모두 밝게 살피지 못한다는 것이니, 평일에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 습니다.
竊謂操存涵養乃脩身之根本 學者操存涵善 便是未發之前工夫在其中矣 凡省察於已發 正所以求不失其操存涵養者也 學者於是二者不可缺一 然操存涵畚乃其本也 諸友互相點檢 多得之 然却不曾推出所謂根本 故論未發之前者 竟歸於茫然無著力處 或欲惟於欲發之初省察 則又似略平日之索 或兼涵養省察言之者 又似鶻突包籠
문 : 조존(操存)하고 함양(涵養)함은 바로 수신의 근본이니 학자가 조존하고 함양하면 아직 발하기 전의 공부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무릇 이미 발하고 성찰하는 것은 바로 조존 함양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학자는 이 두 가지에서 하나라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존과 함양이 바로 그 근본입니다. 여러 벗들이 서로 점검한 내용은 대부분 타당합니다. 그러나 도리어 이른바 ‘근본’을 미루어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발하기 전을 논한 것이 마침내 아득하여 힘을 쏟을 수 없는 데로 귀결됩니다. 간혹 발하려는 시초에만 성찰하고자 한다면 또 대략 평소와 같을 것이고 간혹 함양과 성찰을 겸하여 말한다면 애매모호하게 감싸는 듯합니다.
此一段差勝 然亦末有的當見處
답 : 이 한 단락은 조금 낫습니다. 그러나 또한 적절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卽天命之謂性也 發而皆中節謂之和 卽率性之謂道也 (定)
문 :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른다”는 것은 “천명을 일러 성이라 한다”는 것이고, “발(發)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른다”는 것은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이른다”는 말입니다. -정(定)
詳程先生說率性文義 恐不如此
답 : 정선생(程先生)이 말한 ‘솔성(率性)’의 문의(文義)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未發之時能體所謂中 已發之後能得所謂和 則發而中節始可言矣 而中和未易識也
문 : 아직 발(發)하지 아니한 때에 이른바 중(中)을 체득할 수 있고, 이미 발(發)한 후에 이른바 화(和)를 체득할 수 있다면, 발하여 절도에 맞았다고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中)과 화(和)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未發之前 纔要體所謂中 則已是發矣 此說已差 又發而中節方謂之和 今曰得所謂和然後發而中節 亦似顚倒說了 記得龜山似有此意 恐亦誤矣 中和未易識 亦是嚇人 此論著實做處 不論難識易識也
답 : 아직 발하기 전에 겨우 이른바 중(中)을 체득하려고 한다면 이미 발한 것이니 이 말은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또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비로소 화(和)라 하니 지금 “이른바 화(和)한 연후에 발하여 절도에 맞는다”는 것도 전도(顚倒)된 말인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구산(龜山)이 이런 생각을 두었던 것 같은데 역시 잘못인 듯합니다. 중(中)과 화(和)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 역시 사람을 협박하는 말입니다. 이는 착실하게 공부해야되는 곳을 논한 것이지, 알기 어렵다느니 알기 쉽다느니 하는 것을 논하지 않았습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위의 문답에 이어서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주로 함양과 성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우선 주자는 ‘함양’에 대해서는 본래 아무 일이 없는 때에 항상 주재자를 보존해야 함을 말한 것이라고 하였고, ‘성찰’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장차 발하려는 무렵에 성찰해야 한다’고 한 것은 생각이 비로소 싹트려 할 때에 삼가야 함을 말한 것이고, ‘이미 발한 뒤에 성찰해야 한다’고 한 것은 말과 행동으로 이미 드러난 뒤에 살펴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所示問答皆極詳矣 然似皆未嘗精思實踐而多出於一時率然之言 故紛紜繳繞而卒無定說也 夫謂未發之前不可著力者 本謂不可於此探討尋求也 則固無害於涵養之說 謂當涵養者 本謂無事之時常有存主也 則固無害於平曰涵養之說 謂省察於將發之際者 謂謹之於念慮之始萌也 謂省察於已發之後者 謂審之於言動已見之後也 念慮之萌固不可以不謹 言行之著亦安得而不察 以熹觀之 凡此數條本無甚異 善學者觀之 自有以見其不可偏廢 不至如此紛紜競辨也 細看其間却有一段(名一之者)說得平正的確 頗中諸說之病 不知曾細考之否
보내 준 문답(問答)이 모두 매우 상세합니다. 그러나 모두 정밀하게 생각하고 실천하지 못하여 대부분 한 때의 경솔한 말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지럽게 얽혀서 끝내 정설(定說)이 없습니다.
대체로 ‘아직 발하기 전에는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본래 여기에서는 탐구하여 이치를 구할 수 없음을 말하니, 함양의 설에 진실로 해로움은 없습니다. 또, ‘마땅히 함양해야 한다’는 것은 본래 일이 없는 때에 항상 주(主)를 보존해야 함을 말한 것이니, 진실로 평소의 함양의 설에 해로움이 없습니다. ‘장차 발하려는 무렵에 성찰해야 한다’고 한 것은 염려가 비로소 싹트려 할 때에 삼가야 함을 말한 것이고, ‘이미 발한 뒤에 성찰해야 한다’고 한 것은 말과 행동으로 이미 드러난 뒤에 살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생각이 싹이 틀 때에 진실로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말과 행동으로 드러날 때에도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입장에서 보건대, 이 몇 조목은 본래 심한 차이가 없으니, 훌륭한 학자가 이를 보면 저절로 어느 하나에 치우쳐 그만 둘 수 없음을 알게 되어, 이처럼 분분하게 다투며 논변하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세히 그 사이를 살펴보면 도리어 평이하면서 정확하게 말한 한 단락이 ― 일지(一之)라고 이름하는 자이다. ― 여러 설의 병폐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학문함에 착실하게 본문에 따르고 순서에 따라 공부하여 오래되면 저절로 고원하고 번거로운 병통이 제거될 것이라고 하였다.
彼中議論大略有三種病 一是高 二是遠 三是煩碎 以此之故 都離却本文 說來說去 都不記得元是說甚底 但能放低 著實依本分依次序做工夫 久久自當去此病也
저 곳의 의논에는 대략 세 종류의 병폐이 있으니 첫째는 고(高)이고, 둘째는 원(遠)이며, 셋째는 번쇄(煩碎)함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모두 본문과 이탈되어 설왕설래(說往說來)하여 도무지 무엇을 말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집착을 놓아버리고 착실하게 겸허한 마음으로 본문과 순서에 따라 공부할 수 있다면 오래된 뒤에 저절로 이런 병폐를 제거하게 될 것입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남헌집의 교정을 마치고 보내면서 부친 편지이다. 남헌집(南軒集)과 주자의 편지에 빈 글자가 8-9군데 있는데, 예를 들면 “보내주신 편지에 □□의 병”이라고 되어 있는데, 가만히 그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보내주신 편지에 운운”한 것은 모두 동래(東萊)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외는 또한 모두 당시 선생이 문집을 편찬하던 때를 가리키니 처음부터 원본에 따라 곧바로 그 이름자를 썼지만 후에 우연지의 말에 따라 삭제했다. 동래(東萊)와 남헌(南軒)은 도의(道義)가 지극한 사이였기 때문에 반드시 이것 때문에 서로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나 그의 문인들은 반드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울러서 피한 것이다. 또 남헌집 서문 후단에 “혹자들은 이미 별도의 사본을 사용하고 있으니 대개는 앞서 강론한 것이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론이었다”고 하였고, 또 “가령 그의 설이 앞에 나왔지만 뒤에 버려진 것들은 오히려 책 사이에 섞어 놓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왕왕 탈고하지 않았을 때 학자들이 사사로이 전한 기록인데 경부(敬夫)는 옳지 않다고 여겼다”하였다. 선생의 뜻은 이것 등을 아울러 모두 간행하면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남헌의 누가 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모두 삭제하고 서문에서 삭제한 뜻을 편지에서 자세히 말했다. 남헌의 문인들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깨우쳐 준 것이다. 계수 역시 남헌의 문인이다.
南軒集誤字已爲檢勘 今却附還 其間空字向來固已直書 尤延之見之 以爲無益而賈怨 不若刊去 今亦不必補 後人讀之自當黙喩也 但序文後段若欲刪去 卽不成文字 兼此書誤本之傳不但書坊而已 黃州印本亦多有舊來文字 不唯無益 而反爲累 若不如此說破 將來必起學者之疑 故區區特詳言之 其意極爲懇到 不知何所惡而欲去之耶 且世之所貴乎南軒之文者 以其發明義理之精 而非以其文詞之富也 今乃不問其得失是非而唯務多取 又欲刪去序文緊切意思 竊恐未免乎世俗之見 而非南軒所以望乎後學之意 試更思之 若必欲盡收其文 則此序意不相當 自不必用 須別作一序 以破此序之說乃可耳 若改而用之 非惟憙以爲不然 南軒有靈 亦必憤歎於泉下也 久不聞講論之益 深以懷想 前日諸賢相繼逝去 後來末有接續 所望於季隨 實不勝其難懇 今觀此事 竊疑其用力之不篤也 更願勉旃 以副所望 千萬千萬至和至扣
남헌집(南軒集)의 오자(誤字)는 이미 검토하여 교감했으니 이제 돌려보냅니다. 문집 가운데 빈 글자는 여태까지 이미 성명을 숨기지 않고 곧바로 써 놓았는데, 우연지(尤延之)가 그것을 보고 무익하고 원망만 살 것이니 삭제하는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지금도 저는 보충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니 뒷 사람들이 보고 스스로 묵묵히 알아야할 것입니다. 다만 서문의 뒷단락을 삭제하려고 하면 곧 글이 되지 않습니다. 아울러 이 책의 오본(誤本)의 유포는 다만 책방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황주(黃州)에서 인쇄한 판본도 옛 문자가 많으니 무익할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누(累)가 됩니다. 만약 이와 같이 설파하지 않는다면 장래에 반드시 학자의 의심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변치 못한 제가 특별히 자세히 말한 것입니다. 그 의리가 매우 간절하건만 왜 싫어하여 삭제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남헌(南軒)의 글은 의리(義理)의 정밀함을 드러내 밝혔기 때문이지 문사(文詞)가 풍부한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 그 득실과 시비를 묻지 않은 채 오직 많이 취할 것만 힘쓰고, 또 서문의 긴요하고 절실한 뜻과 생각을 깍아 내려하니 세속의 견해라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남헌(南軒)이 후학에게 바라던 뜻이 아닙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반드시 그 글을 다 수록하려 한다면 이 서문과의 뜻이 서로 부합하지 않을 것이니 이 서문을 써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드시 별도로 하나의 서문을 지어 이 서문의 설을 깨야 옳을 뿐입니다. 만약 고쳐서 쓴다면 저(熹)만 옳지 않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남헌의 혼령도 반드시 황천에서 분개하고 탄식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강론의 유익함을 듣지 못한 터라 깊이 남헌과 같은 벗을 생각해 봅니다. 전날 여러 현자들이 서로 이어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름을 잇는 후학들이 아직 없습니다. 계수(季隨)에게 바라는 것은 실로 간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일을 보니 힘을 씀이 독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부지런히 힘써 저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랍니다. 간곡히 아룁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明季隨
【해제】이 편지는 순희 12년(을사; 1185, 56세)에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학문을 속히 이루려 하고 지름길을 좋아하는 것이 학자들의 큰 병통임을 지적하였으며, 망령된 뜻으로 갑자기 깨달아 특 끊어진 곳을 생각해서,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미치고 거칠게 하여 일상생활에서 도리어 편안한 곳을 얻지 못하게 해서는 안됨을 말하였다.
元善書說與子靜相見甚款 不知其說如何 大抵欲速好徑是今日學者大病 向來所講 近覺亦未免此 以身驗之 乃知伊洛拈出敬字 眞是學問始終日用親切之妙 近與朋友商量 不若只於此處用力 而讀書窮理以發揮之 眞到聖賢究竟地位 亦不出此 坦然平白 不須妄意思想頓悟懸絶處 徒使人顚狂粗率 而於日用常行之處反不得其所安也 不審別後所見如何 幸試以此思之 似差平易悠久也
원선(元善)이 편지를 보내 자정(子靜)과 만나 매우 친근했다고 말하였는데, 그 설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속히 이루려 하고 지름길을 좋아하는 것이 금일 학자들의 큰 병통입니다. 여태까지 강론한 바가 이를 면하지 못함을 요사이 알았습니다. 몸소 체득해 보고서야 바로 이락(伊洛)이 경(敬)자를 잡아낸 것이 참으로 학문의 시종(始終)과 일용의 친절한 묘(妙)임을 알았습니다. 근래 벗들과 의논해 보니, 다만 이곳에 힘을 써서 독서하고 궁리하여 발휘(發揮)하는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성현의 구경(究竟)의 경지에 도달한 것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아 평탄하고 명백해서 모름지기 망령된 뜻으로 갑자기 깨달아 툭 귾어진 곳을 상상해서, 한갓 사람들로 하여금 미치고 거칠게 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도리어 편안한 곳을 얻지 못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작별한 뒤에 소견(所見)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한 번 이점을 생각하면 조금 평이하고 느긋해질 것입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주자는 순히 14년(정미; 1187, 58세)에 강서제형(江西提刑)에 제수되었는데, 편지 내용 중에 ‘외람되게도 성은을 잘못입어 저같은 폐인을 등용해주니’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이 편지는 아마도 정미년 간에 쓰여진 편지인 것 같다. 또한 편지 “중의 딸의 죽음을 곡한다”는 부분이 있는데, 誌文에 보면 주자의 딸인 여사는 순희 14년 정미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에서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공부와 같은 것은 절실한 부분이 역시“인(仁)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는다”는 한 구절에 있다고 강조하였으며, 학문은 비근(卑近)한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비근하게 공부하면 할수록 공부가 더욱 진실하고 소득(所得)이 더욱 고원(高遠)해 질 것이니, 이 점에 유의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憙衰病之餘 幸安祠祿 誤恩起廢 非所克堪 已力懇辭 未知可得與否 自度尫殘 決是不堪繁劇 又况蹤跡孤危 恐亦無以行其職業 後日別致紛粉 又如衡陽轉動不得 出門一步 更須審處也 但今年病軀衰瘁殊甚 秋中又有哭女之悲 轉覺不可支吾矣
目昏 不能多看文字 閑中却覺看得道理分明 向來諸書隨時修改 似亦有長進處 恨相去遠 不得朝夕討論也 易書刊行者 只是編出象數大略 向亦以一本浼叔綱 計必見之 今乃聞其有亡奴之厄 計此必亦已失去矣 別往一本 幷南軒集 幸收之也
所喩克己之學 此意甚佳 但云藉此排之 似是末得用工要領處 近讀知言 有問以放心求心者 嘗欲別下一語云 放而知求 則此心不爲放矣 此處間不容息 如夫子所言克已復禮功夫 要切處亦在爲仁由己一句也 豈藉外以求之哉 性其情 乃王輔嗣語 而伊洛用之 亦曰以性之理節其情 而不一之於流動之域耳 以意逆志 而不以詞害焉 似亦無甚害也 不遷怒 當如二先生說 無可疑者 不貳過 亦唯程張得之 而橫渠所謂歉於己者不使萌於再 語尤精約也
宋漕所委記文 屢欲爲之 而夏秋以來 一向爲女子病勢驚人 不得措詞 兼觀其所喩爲敎者 不過擧子事業 亦有難措詞者 故因循至此 今病方小愈 未堪思慮 勢當小須後也 因邵武便 草草布此 復託象之致之 目昏 未能他及 惟以時進德自愛爲檮
大抵爲學不厭卑近 愈卑愈近 則功夫愈實而所得愈高遠 其直爲高遠者則反是 此不可不察也
저(熹)는 쇠약하고 병든 나머지 사록(祠祿-숭도관)을 제수받아 편히 지내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성은을 잘못입어 저같은 폐인을 등용해 주시니 능히 감당할 수 있는바가 아닙니다. 힘을 다해 간절히 사양하고 있으나 그렇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병들어 쇠잔한 몸을 헤아려 보니 결코 번거로움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 더욱이 저의 처지가 외롭고 위태로우니 그 직업을 행할 수 없어 후일 별도로 분분한 말거리를 만들 것 같고, 또 형양(衡陽)으로 가더라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문을 나서 한 걸음을 걷는데도 다시 처할 곳을 찾아야만 합니다. 다만 금년의 병든 몸이 쇠하고 초췌함이 자못 심했는데 가을 중에 또 딸의 죽음을 곧하다보니 점차 내 몸을 지탱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눈이 어두워 글도 많이 볼 수 없으니 한가한 가운데 도리어 도리를 봄이 분명함을 알게되었습니다. 여태까지 여러 책들을 수시로 수정하고 고쳤는데 역시 크게 진전된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 거리가 멀어 아침 저녘으로 토론할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간행한 주역책은 상(象)과 수(數)의 대략만을 편찬해 내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또 책 한 권을 가지고 숙강(叔岡)에게 부탁했는데 반드시 잘 봐줄 것이라 생각 합니다. 지금 듣건데 그사람의 노비가 도망친 재앙이 있다 주역책도 이미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별도로 한 권을 보내니 남헌집(南軒集)과 함께 받아보시길 바랍니다.
극기(克己)하는 공부에 대해 말해 주었는데, 이 의미가 매우 훌륭합니다. 다만 ‘이것을 바탕으로 물리친다’고 한 것은 아직 공부하는 요령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요사이 지언(知言)을 읽어보니 방심(放心)과 구심(求心)을 가지고 질문하는 자가 있기에 일찍이 별도로 다음과 같이 한마디 하고자 하였습니다. “놓았다가 구할 줄 알면 이 마음은 놓이지 않게 된다” 이곳은 한 순간도 그칠 수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 공부와 같은 것은 절실한 부분이 역시 ‘인(仁)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는다’는 한 구절에 있습니다. 어찌 외면에 의지하여 이를 구하겠습니까? ‘그 정(情)을 성(性)으로 삼는다’는 말은 바로 왕보사(王輔嗣)의 말인데 이락(伊洛)이 인용하여 역시 “성(性)의 이(理)로써 그 정(情)을 절제하지만 유동(流動)하는 영역에서 하나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의미를 가지고 뜻을 거슬러 보아도 말 때문에 해가 되지 않으니 역시 심한 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는 말은 마땅히 두 선생의 말과 같이 해야 의심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허물을 두 번 짓지 않는다”는 말 역시 오직 정자(程子)와 장자(張子)만이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횡거(橫渠)의 이른바 ‘자기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것을 다시 싹트지 않게 한다’는 것은 말이 더욱 정밀하고 요약되어 있습니다.
송조(宋漕)가 맡긴 기문(記文)은 여러 번 지으려고 했으나, 여름 가을 이래로 한결같이 딸의 죽음으로 병세가 놀라울 정도여서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아울러 보내준 편지의 교육에 관한 내용을 보건대 가르쳐주신 것을 보니 과거공부하는 사람의 일에 지나지 않으니 역시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럭저럭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병이 조금 낳아졌지만 사고와 염려를 아직 감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뒷날을 조금 기다려야할 형편입니다. 소무(邵武)로 가는 인편이 있어 이 편지를 써 가지고 다시 상지(象之)에게 부탁해서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눈이 어두워 다른 것은 언급할 수 없고 오직 때때로 덕(德)을 진작시켜 자신을 아끼기를 빌 뿐입니다.
대저 학문을 할 때 비근(卑近)함을 싫어하지 않아야 하니, 비근하면 할수록 공부가 더욱 진실하고 소득(所得)이 더욱 고원(高遠)할 것입니다. 곧바로 고원하게 하려는 사람들은 이와 반대되니, 이 점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진군거와 이 전에는 면식이 없었는데, 다시 그의 편지를 받고 또 그의 문인이 주자가 있는 곳에 찾아옴에 그의 의론을 들어보니 온당치 못한 곳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주역 간괘에 대한 정자의 설이란 정자가 “사람들은 ‘복(復)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니다. 복괘의 아래 면 한 획은 곧 동(動)이다. 어찌 정(靜)이라 할 수 있겠는가? 혹자가 말하였다. ‘동(動)에서 정(靜)을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옳다. 역 간괘에서 지(止)자의 뜻에 대해 그칠 곳에 그침은 제자리에 멈추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대체로 그칠 줄 모른다’”고 한 것을 이른다.
閑中時有朋友遠來講學 其間亦有一二可告語者 此道之傳 庶幾未至斷絶 獨恨相望之遠 不得聚首盡情極論 以求眞是之歸 尙此悢悢耳 君擧先未相織 近復得書 其徒亦有來此者 扣其議論 多所未安 最是不務切己 惡行直道 尤爲大害 不知講論之間頗亦及此否 王氏中說 最是渠輩所尊信依倣以爲眼目者 不知所論者云何 復艮之說 則程子已盡之 不知別有何疑 因書須詳及之 乃可下語也
한가한 가운데 때로 벗이 먼 곳에서 찾아와 강학(講學)하고 그 사이에 또 고(告)해 줄 만한 말이 한두 가지 있으니, 이 도를 전함이 거의 단절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서로 멀리 바라만 보고 머리를 모아 온 마음으로 다하여 극론(極論)하여 참되고 옳은 귀결(歸結)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우니, 오히려 이것이 슬플 뿐입니다.
군거(君擧)는 먼저는 서로 몰랐는데 근래 다시 편지를 받았고, 그 무리가 이곳에 온 사람이 있어 그의 의론을 들어 보니 온당하지 못한 곳이 많았습니다. 자기를 절실하게 하는 공부[切己]에 힘쓰지 않고 직도(直道)를 행하는 것을 미워하니 더욱 큰 해가 됩니다. 강론하는 사이에 이런 점을 잘 언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씨(王氏)의 중설(中說)은 그 무리들이 가장 존중하여 믿고 의존 본떠 안목으로 삼은 것인데, 논한 것이 무얼 말하는지. 복괘(復卦)와 간괘(艮卦)에 대한 설명은 정자(程子)가 이미 다 밝혔는데 별도로 무슨 의심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로나마 반드시 자세히 언급해줘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이 편지는 소희 3년(임자; 1192, 63세) 1월에 쓴 편지이다. 이해 1월 13일 육구연이 형문에 있으면서 홍범 오황극(五皇極) 1장을 강론하였는데 주로 주자의 황극변(皇極辨)을 비판하고 자주 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것을 비평하게 하였다. 또한 이 편지는 마땅히 앞의 편지와 함께 참고해서 보아야 한다. 복(復)과 간(艮) 두 글자에 대한 이론을 살펴보면 분명히 앞뒤로 왕복되니 이것은 대개 계수가 군거와 강론하면서 유순(流徇)하게 이 의론을 지은 것임을 알지 못했음을 이른다. 또한 주자는 호계수가 보내온 편지에서 항평보(項平父)를 나무라면서도 스스로 스승과 친구들에게 출입하면서 얻는 것이 없으니 평보와 다를 것이 없음을 알지 못한다고 은근히 꾸짖고 있다.
前書諸愉 讀之惘然 季隨學有家傳 又從南軒之久 何故於此等處尙更有疑 向見意思大段寬緩 而讀書不務精熟 常疑久遠無入頭處 必爲浮說所動 今乃果然 良․復之義正當思惟 方見親切 別紙諸疑正當解釋 方得分明 今乃曰 才涉思惟 便不親切 又云 非不能以意解釋 但不欲杜撰耳 不知却要如何下工夫耶 夫子言 學而不思則罔 中庸說博學審問謹思明辨 聖賢遺訓明白如此 豈可舍之而狥彼自欺之浮說耶 來書譏項平父出入師友之間不爲不久 而無所得 愚亦恐賢者之不見其睫也 日月逝矣 歲不我與 願深省察 且將大學 論語 孟子 中庸 近思等書子細玩味 逐句逐字不可放過 久之須見頭緖 不可爲人所誑 虛度光陰也 荊門皇極說曾見之否 試更熟讀洪範此一條詳解 釋其文義 看是如此否 君擧奏對 上問以讀書之法 不知其對云何也
앞 편지에서 말한 모든 것을 읽고 망연(惘然)했습니다. 계수(季隨)의 학문은 가학(家學)을 전수해 온 것이 있고, 또 남헌(南軒)을 오랫 동안 종유(從遊)했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런 곳에 아직도 다시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전에 의사(意思)가 대단히 느긋하고 독서에 정밀함을 힘쓰지 않는 것을 보고 항상 오래 되어도 머리를 들이밀 곳이 없어 반드시 부설(浮說)에 동요될 것이라고 의심했더니, 지금 바로 과연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간(艮)과 복(復)의 의미는 잘 생각해 보아야 비로소 친절함을 볼 것입니다. 별지(別紙)의 모든 의문(疑問)은 잘 해석을 해야 비로소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말하기를, “겨우 생각하니 문득 친절하지 않다” 하고, 또, “뜻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두찬(杜撰)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하니, 도리어 어떻게 공부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공자(孔子)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다”라 하고, 중용에서 “박학(博學), 심문(審問), 근사(謹思), 명변(明辯)”을 말했으니, 성현의 유훈(遺訓)이 이와 같이 명백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를 버리고 자기를 속이는 저런 부설(浮說)을 따르겠습니까?
보내 준 편지에 “항평보(項平父)가 사우(師友)의 사이에 출입한 것이 오래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소득이 없다”고 나무랐는데, 나 또한 그대 눈썹을 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해와 달이 흘러가니, 세월은 나를 위하여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고 하니 원컨대 깊이 성찰하고, 또 대학․논어․맹자․중용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을 자세하게 완미하여 자구(字句)를 따라 함부로 지나치지 말아야 오랜 뒤에 두서(頭緖)를 볼 것입니다. 남들에게 속임을 당하여 헛되이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형문(荊門)의 황극설(皇極說)을 일찍이 보지 않으셨는지요? 다시 홍범(洪範)에서 이 한 조목에 대해 상세히 해석한 것을 익숙히 읽어 보시고 그 문의를 해석하여 이와 같은지 아닌지 보십시오. 군거(君擧)가 상주할 때에 임금이 독서의 방법을 질문하였는데 그 대답을 무어라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이 편지는 소희 5년(갑인; 1194, 65세)에 쓴 편지이다. 이 편지는 연평선생과의 문답의 내용을 가지고 편지로 보낸 것인데 이 편지에 나오는 여러 조목들은 연평문답에 함께 보인다. 이 편지를 조목별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호계수는 학자들의 질문에, ‘쇄연(灑然)히 얼음이 풀리고 언 땅이 녹는다’는 말은 다만 통투(通透)하여 쇄락(灑落)하다는 뜻이다고 생각하고, 학자가 항상 가슴속을 통투하고 쇄락하게 한다면 글을 읽고 학문을 하는 것이 모두 통투하고 쇄락하여 도리가 쉽게 진전하고 지수(持守)도 맛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이에 대해 호계수의 말이 이연평의 본의가 아닐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자는 이런 경지는 바로 견식이 분명하고 함양이 순숙(純熟)한 공효(功效)이니, 진실하게 누적한 공용(功用)에서 나오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억지로 힘을 들여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특히 주자는 지수공부에 대해 궁리(窮理) 공부가 결여되어 있다고 여긴다. 또 주자는 대시가 경(敬)에 대해 ‘경(敬)은 병의 약이고, 긍지는 병의 방증이다’고 한 이 두 구절은 문의(文義)가 어긋나 서로 조응(照應)되지 않는다 하고, 경(敬)이 다만 자기 마음을 스스로 살펴 체득하는 것임을 안다면 저절로 이런 병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경공부와 관련하여 불교와의 차이를 말하고 있으며, 존심(存心)․양성(養性) 및 진심(盡心)․지성(知性)과 관련해서도 불교와의 차이 점을 이야기 하고 있다. 또 주자는 이 편지에서 성(誠)과 경(敬)의 차이에 대해서도 ‘경은 송연(悚然)히 두려워하는 바가 있다는 뜻과 같고, 성(誠)은 진실무망(眞實無妄)함을 이름한 것이니, 의미가 같지 않다’고 하였으며, 또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에 있어서 성인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같다지만 뭇 사람들은 천성에 어둡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흐르고 현인은 천성을 알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절제되는 것이며, 성인은 천성을 다하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절제를 일삼을 것도 없이 저절로 마땅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學者問曰 延平先生語錄有曰 大抵學者多爲私欲所分 故用力不精 不見其效 若欲進步 須打斷諸路頭 靜坐黙識 使其泥滓漸漸消去 又云 靜坐時收拾將來 看是如何 便如此就偏處著理會 又云 學者未祛處 只求諸心 思索有窒礙處 及於日用動靜之間有咈戾處 便於此致思 求其所以然者 又云 大凡只於微處充擴之 方見礙者大爾 又引上蔡語云 凡事必有根 必須有用處尋討 要用處將來斬斷 便沒事 此語可時時經心 又云 靜中看喜怒哀樂未發時作何氣象 不惟於進學有功 兼亦是養心之要 觀此數說 眞得聖賢用工緊要處 但其間有一段云 學者之病 在於未有灑然冰釋凍解處 縱有力持守不過只是苟免顯然尤悔而已 恐不足道也 竊恐所謂灑然冰釋凍解處 必於理皆透徹而所知極其精妙 方能爾也 學者旣未能爾 又不可以急迫求之 只得且持守 優柔厭飫 以俟其自得 如能顯然免於尤悔 其工力亦可進矣 若直以爲不足道 恐太甚也 大時答曰 所謂灑然冰釋凍解 只是通透灑落之意 學者須常令胸中通透灑落 則讀書爲學皆通透灑落而道理易進 持守亦有味矣 若但能苟免顯然悔尤 則途之人亦能之 誠不足爲學者道也 且其能苟免顯然侮尤 則胸中之所潛藏隱伏者固不爲少 而亦不足以言學矣
문 : 학자가 묻기를 “연평선생어록(延平先生語錄)에 ‘학자들은 대체로 사사로운 욕심에 의해 구분이 된다. 그러므로 힘을 씀이 정밀하지 않으면 그 효험이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진보하고자 하면 반드시 모든 사욕의 길을 끊고 정좌(靜坐)하여 묵묵히 알아 더러운 찌꺼기가 점차 사라지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정좌할 때에 몸과 마음을 추스려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곧 이와 같이 치우친 곳에 나아가 이해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학자들은 아직 사욕이 제거되지 못한 곳에서 다만 마음을 구해야 한다. 사색에 막히는 곳이 있거나 일상생활의 움직임과 고요함 속에서 어그러지는 곳이 있으면 바로 여기에 생각을 다하여 그 까닭을 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무릇 은미한 곳에서 확충해야 비로소 막힌 것이 큼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상채(上蔡)의 말을 인용하여 ‘모든 일은 반드시 뿌리가 있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는 곳에서 찾고 검토해야 한다. 쓰이는 곳에서 요구하여 장차 베고 끊어버리면 곧 무사해진다고 했는데, 이 말이 항상 유의할만하다’고 했습니다. 또 ‘고요한 가운데 희노애락이 아직 발하지 아니한 때에 어떤 기상인지를 보아야한다. 그래야만 진학에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또한 마음을 기르는 요체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몇 가지 말을 살펴보면 참으로 성현이 노력한 긴요한 곳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이의 한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학자의 병이 쇄연(灑然)히 얼음이 풀리고 언 땅이 녹지 못한 곳이 있다면 비록 힘써 지수(持守)하려 하나 다만 뚜렸이 허물을 짓거나 뉘우치는 것을 구차하게 면함에 불과할 뿐이니, 아마 말할 것도 없을 것 같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른바 ‘쇄연(灑然)히 얼음이 풀리고 언 땅이 녹는 곳’은 반드시 이(理)가 모두 투철하여 아는 바가 매우 정묘(精妙)한 데에서 비로소 이와 같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미 그러하지 못하고 또 급박하게 그것을 구하지도 못하여 다만 우선 지수(持守)하여 넉넉하고 풍족해져서 자득하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만일 허물을 짓거나 뉘우치는 것에서 분명히 벗어날 수 있다면 그 공부의 힘도 역시 진취할만 합니다. 만약 다만 족히 말할 것도 못된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심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대시(大時)가 답하기를, “이른바 ‘쇄연(灑然)히 얼음이 풀리고 언 땅이 녹는다’는 말은 다만 통투(通透)하여 쇄락(灑落)하다는 뜻입니다. 학자가 반드시 항상 가슴속을 통투하고 쇄락하게 한다면 글을 읽고 학문을 하는 것이 모두 통투하고 쇄락하여 도리가 쉽게 진전하고 지수(持守)도 맛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만 뚜렷한 뉘우침과 허물을 구차히 할 수 있다면 길가던 행인들 역시 그럴 수 있으니 진실로 학문을 하는 사람의 도가 아닙니다. 또 뚜렷한 뉘우침과 허물을 구차하게 벗어날 수 있다면 가슴 속에 담아 보관하고 숨겨놓은 것이 진실로 적다고 하지 못하겠지만 역시 학문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此一條嘗以示諸朋友 有輔漢卿者下諸云 灑然冰解凍釋 是功夫到後疑情剝落 知無不至處 知至則意誠而自無私欲之萌 不但無形顯之過而已 若只是用意持守 著力遏捺 苟免顯然悔尤 則隱微之中 何事不有 然亦豈能持久哉 意懈力弛 則橫放四出矣 今曰學者須常令胸中通透灑落 恐非延平先生本意 此說甚善 大抵此箇地位乃是見識分明涵養純熟之效 須從眞實積累功用中來 不是一旦牽彊著力做得 今湖南學者所云 不可以急迫求之 只得且持守 優柔厭飫 而俟其自得 未爲不是 但欠窮理一節工夫耳 答者乃云 ‘學者須常令胸中通透灑落 却是不原其本而彊欲做此模樣 殊不知通透灑落如何令得 纔有一亳令之之心 則終身只是作意助長 欺己欺人 永不能到得灑然地位矣
답 : 이 한 조목을 여러 벗들에게 보여 주였더니 보한경(輔漢卿)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쇄연(灑然)히 얼음이 풀리고 언 당이 녹는 곳’은 공부가 도달한 뒤에 의심스러운 마음이 떨어져 앎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것입니다. 앎이 이르면 뜻이 성실하여 저절로 사욕(私欲)이 싹틈이 없으니, 단지 분명히 드러나는 허물이 없을 뿐만이 아닙니다. 만약 뜻을 써서 지수(持守)하고 힘을 써서 막아내어, ‘뚜렸한 허물이나 뉘우침을 구차하게 면한다’는 것 뿐이라면 은미한 가운데 무슨 일인들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또한 어찌 능히 오래도록 지수하겠습니까? 뜻과 힘이 해이해지면 아무렇게나 사방에서 나올 것입니다. 지금 ‘학자들이 반드시 항상 가슴속을 통투하고 쇄락하게 한다’고 하는데, 아마 연평(延平) 선생의 본의(本意)가 아닐 듯합니다” 하니, 이 설이 매우 좋습니다.
대저 이런 경지는 바로 견식이 분명하고 함양이 순숙(純熟)한 공효(功效)이니, 반드시 진실하게 누적한 공용(功用)에서 나오는 것이지, 하루 아침에 억지로 힘을 들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호남(湖南)의 학자가 이른바 “급박(急迫)하게 그것을 구하지도 못하고 다만 우선 지수하여 넉넉하고 풍족해져서 자득(自得)을 기다릴 뿐이다”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궁리(窮理)라는 일절(一節)의 공부가 결여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답하는 사람이 바로 “학자는 항상 가슴속을 통투하고 쇄락하게 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도리어 그 근본을 따지지 않고 억지로 이런 모양만 지으려고 하니, 자못 통투하게 쇄락함을 어떻게 지금 얻도록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억지로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종신토록 다만 뜻을 지어 조장하여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여 길이 쇄연(灑然)한 지위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學者問曰 遺書曰須是大其心使開闊 譬如爲九層之臺 須大做根脚方得 恐大其心胸時却無收歛縝密底意思 則如何 大時答曰 心自不可不開闊 工夫不可不縝密
문 : 학자들이 질문하기를 “유서(遺書)에 ‘반드시 그 마음을 크게 하여 열어 트이게 해야하니 비유하면 마치 9층의 누대를 만들 때에 반드시 뿌리와 기초를 크게 만들어야 이룰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그 마음을 크게할 때에 도리어 추슬러 치밀히 하려는 의사(意思)가 없을 듯한데, 그렇게 되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대시(大時)가 답하여 말하기를 “마음은 스스로 열어 트이게 하지 않을 수 없고 공부는 치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答語無病 然不知如何地得開闊
답 : 대답한 말에 병통은 없지만 어떻게 열어 트이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學者問曰 遺書曰 執事須是敬 又不可矜持太過 竊謂學者之於敬 常懼其放倒 旣未能從容到自然處 恐寧過於矜持 亦不妨也 大時答曰 頃年劉仲本亦曾擧此條以爲問 蓋嘗答之曰敬是治病之大藥 矜持是病之旁證 藥力旣到 病勢旣退 則旁證亦除矣
문 : 학자가 질문하기를, “유서(遺書)에 ‘일을 할 때는 모름지기 공경스럽게 해야 하지만 또 긍지(矜持)가 너무 지나쳐도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라고 합니다. 학자들이 경(敬)에대해 항상 방심하다 전도될까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로 생각되나, 이미 조용히 자연스러운 곳에 도달하지도 못했다면 차라리 긍지에 지나쳐도 무방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시(大時)는 답하기를 “근래에 유중본(劉仲本) 역시 일찍이 이 조목을 들어서 질문을 하였는데 일찍이 대답하기를 ‘경(敬)은 병을 고치는 대약(大藥)이고, 긍지는 병의 방증(傍證)이니, 약의 효력이 발하여 병세(病勢)가 물러가면 방증도 제거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敬是病之藥 矜持是病之旁證此兩句文意齟齬 不相照應 若以敬喩藥 則矜持乃是服藥過劑 反生他病之證 原其所因 蓋爲將此敬字別作一物 而又以一心守之 故有此病 若知敬字只是自心自省 當體便是 則自無此病矣
답 : ‘경(敬)은 병의 약이고, 긍지는 병의 방증이다’고 한 이 두 구절은 문의(文義)가 어긋나 서로 조응(照應)되지 않습니다. 만약 경(敬)을 약(藥)에 비유하면 긍지는 바로 약제(藥劑)를 지나치게 복용하고 나서 도리어 다른 그 병이 생긴 증세이니, 그 원인을 따지면 대개 이 경(敬) 자를 가지고 따로 하나의 물건으로 여기고, 또 일심(一心)으로 지킨 까닭에 이런 병이 났던 것입니다. 만약 경(敬) 자가 다만 자기 마음을 스스로 살펴 체득하는 것임을 안다면 저절로 이런 병이 없을 것입니다.
學者問曰: 遺書曰 有諸中必形諸外 惟恐不直內, 直內則外必方 至論釋氏之學 則謂於敬以直內則有之, 義以方外則未之有也 又似以敬義內外爲兩事矣 竊謂釋氏之學亦未有能敬以直內 若有此 則吾儒之所謂必有事焉者自不容去之也 大時答曰 前一段其意之所重在有諸中必形諸外上 後一段其意之所重在義以方外上 且謂其敬以直內 上則有之, 味有之二字 則非遽許之 以爲與吾懦之學所謂敬者便可同日而語矣
문 : 학자들이 질문하기를 “유서(遺書)에 ‘마음 속에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드러난다. 오직 마음을 곧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하니 마음을 곧게 하면 밖은 반드시 방정해진다’고 하였고, 석씨(釋氏)의 학문을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경(敬)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은 있지만 의(義)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는 것은 있지 않다’고 하였으니, 또한 경(敬)과 의(義), 안과 밖을 두가지 일로 여긴 것 같습니다. 석씨(釋氏)의 학문은 또한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할 수도 없으니 만약 이것이 있다면 우리 유학의 이른바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것을 제거할 수 없게 됩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시(大時)는 답하기를 “앞의 한 단락은 그 의미의 중요함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드러난다’에 있고, 뒤의 한 단락은 그 의미의 중요함이 ‘의(義)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에 있다. 또 그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함은 상달(上達)하면 있다’고 하였는데 ‘있다(有之)’는 두 글자를 음미해보면 갑자기 그것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유학의 이른바 ‘경(敬)’이라는 것과 더불어 곧 같은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고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遺書說繹氏有直內無方外者 是游定夫所記 恐有差誤 東見錄中別有一段說 旣無方外 則其直內者豈有是也 語意始圓 可細考之 未可如此逞快 率然批判也
답 : 유서(遺書)에 ‘석씨(釋氏)는 마음을 곧게함은 있지만 밖을 방정하게 함은 없다’고 한 것은 유정부(游定夫)가 기록한 것인데 착오가 있는 듯 합니다. 동견록(東見錄) 중에 별도로 한 단락을 두어 ‘이미 밖을 방정하게 함이 없으면, 마음을 곧게 하는 것이 어찌 있겠는가?’라고 했으니 말의 의미가 비로소 원만해집니다. 자세히 상고하는 것은 옳겠지만 이와같이 멋대로 경솔하게 갑자기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學者問曰 遺書曰 釋氏只曰止 安知止乎 釋氏無實 譬之以管窺天 只務直上去 惟見一偏 又却有曰 釋氏只到止處 無用處 無禮義 竊謂旣無實 惟見一偏 則其學皆憑虛鑿空 無依據矣 安可謂其到止處 而責之以有用有禮義乎 大時答曰 釋氏曰止 安知止乎 此以吾學之所謂止而論之也 襌學只到止處 無用處 無體義 此止字就其學之所謂止而論之也
문 : 학자가 질문하기를 “유서(遺書)에 ‘석씨(釋氏)는 다만 그친다(止)고만 했는데, 어찌 그침(止)을 알겠는가? 석씨(釋氏)는 내실이 없으니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에 비유하면 다만 곧바로 올라가 오직 한 쪽을 보는 것만 힘쓸 뿐이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석씨(釋氏)는 다만 그치는 곳에 도달할 뿐이니 운용하는 곳이 없으며 예의(禮義)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내실이 없고 오직 한 쪽만 볼 뿐이라면 그 학문은 모두 빈 것에 의지해서 쓸데없이 헛된 공론만 할 뿐 의거할 것이 없으니 어찌 그칠 곳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으며 운용(用)이 있고 예의가 있다고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시(大時)가 답하기를 “‘석씨(釋氏)는 그친다고 하지만 어찌 그침을 알겠는가?’라는 말은 우리 학문의 이른바 그친다는 것을 가지고 논한 것이다. ‘선학(禪學)은 다만 그치는 곳에 이를 뿐 운용하는 곳이 없고 예의(禮義)가 없다’는 말에서 이 그친다는 글자는 그 학문의 이른바 그친다는 것에 나아가 논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答語甚善 (論程子說釋氏不知止 是以吾學所謂止者而言 又云 釋氏到止處 是以彼所謂止者而言)
답 : 답한 말이 매우 좋습니다. (정자(程子)가 ‘석씨는 그칠 줄을 몰랐다’고 말한 것을 논했으니, 이는 우리 학문의 이른바 그친다는 것으로 말했으며, 또 석씨는 ‘그칠 곳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이는 저들의 이른바 ‘그친다’는 것으로 말한 것이다.)
學者問曰 遺書曰孟子曰盡其心者 知其性也 彼所謂識心見性是巳 若存心養性一段事則無矣 竊謂此一段事釋氏固無之 然所謂識心見性 恐亦與孟子盡心知性不同 盡心者 物格知至 積習貫通 盡得此生生無窮之體 故知性之禀於天者蓋無不具也 釋氏不立文字 一超直入 恐未能盡其心而知其性之全也 大時答曰 釋氏云識心見性 與孟子之盡心知性固是不同 彼所謂識心見性之云 蓋亦就其學而言之爾 若存心養性一段則無矣之云 所以甚言吾學與釋氏不同也
문 : 학자가 질문하기를 “유서(遺書)에 ‘맹자는 ‘그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그 성품을 안다’고 말했으니, 저들이 이른바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본다[識心見性]’는 것이 이것이고,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른다[存心養性]’와 같은 일단의 일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러한 일단의 일은 석씨(釋氏)에게는 진실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본다는 것은 또한 맹자의 진심(盡心)․지성(知性)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마음을 다 한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이르고 앎이 지극해지는 것이며 학습이 싸하여 관통함으로써 이 낳고 낳아 다함이 없는 체(體)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부여받은 성(性)을 아는 사람은 갖추지 않음이 없습니다. 석씨(釋氏)의 문자를 세우지 않고 한달음에 곧바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마음을 다하여 그 성(性)의 전체를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시(大時) 답하기를 “석씨(釋氏)는 ‘마음을 알고 성을 본다’고 하지만 맹자의 진심(盡心)․지성(知性)과는 진실로 같지 않다. 저들의 이른바 ‘마음을 알고 성을 본다’고 하는 말은 대개는 또한 그들의 학문에 나아가 말한 것일 뿐이다.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르는 일단은 없다’라고 하는 말 같은 것이 우리 학문과 석씨(釋氏)가 같지 않음을 잘 말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遺書所云釋氏有盡心知性 無存心養性 亦恐記錄者有誤 要之釋氏只是恍惚之間見得些心性影子 却不曾子細見得眞實心性 所以都不見裏面許多道理 政使有存養之功 亦只是存養得他所見底影子 固不可謂之無所見 亦不可謂之不能養 但所見所養非心性之眞耳
답 : 유서(遺書)에서 “석(釋)씨에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안다[盡心知性]는 것은 있지만,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른다는 것은 없다”고 한 것은 아마 기록한 사람에게 잘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컨대, 석씨는 다만 황홀한 사이에 사소한 심성(心性)의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지, 도리어 자세하게 진실한 심성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내면의 허다한 도리를 보지 못했으니, 가령 존양(存養)의 공이 있다하더라도 다만 그가 보았던 그림자만 존양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본 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고, 또 기르지 못한다고 할 수도 없지만, 본 바와 기른 바가 심성의 참됨이 아닐 뿐입니다.
學者間曰 遺書曰 學者所貴聞道 若執經而問 但廣聞見而巳 竊謂執經而問雖止於廣聞見而已 須精深究此 而後道由是而可得也 不然 恐未免於說空說悟之弊矣 大時答曰 所謂學者所貴聞道 若執經而問 但廣聞見而已 蓋爲尋行數墨而無所發明者設 而來喩之云謂必須深究乎此然後可以聞道 則亦俱墮於一偏矣
문 : 학자가 질문하기를 “유서(遺書)에 ‘학자가 도(道)를 들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경전(經典)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것과 같지만 단지 듣고 보는 것을 넓힐 뿐이다’고 하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경전을 가지고 질문을 하면 비록 듣고 본 것을 넓히는데 그칠 뿐이라도 반드시 정밀하고 깊게 이것을 궁구한 뒤라야 도(道)는 이를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공(空)을 설하고 깨달음(悟)을 설하는 폐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시(大時)가 답하기를 “이른바 ‘학자가 도(道)를 들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경전(經典)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것과 같지만 단지 듣고 보는 것을 넓힐 뿐이다’는 말은 심행수묵(尋行數墨)하여 발명할 것이 없는 자를 위하여 베푼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내주신 편지에서 ‘반드시 이것을 깊이 궁구한 연후에 도를 들을 수 있음을 이른다’고 하였으니 역시 모두 한 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執經而問者知爲己 則所以聞道者不外乎此 不然 則雖六經皆通 亦但爲廣聞見而已 問者似有此意 然見得未分明 故說不出 答者之云却似無干涉也
답 : 경전을 가지고 질문하는 자는 자기를 위할 줄 아니 도(道)를 듣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육경(六經)에 모두 통한다 하더라도 또한 보고 듣는 것만 넓힐 뿐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은 이 뜻을 가지고 있지만 본 것이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듯합니다. 답한 사람의 말은 오히려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學者問曰 遺書曰 根本須先培壅 然後可立趨嚮 竊謂學者必須先審其趨嚮 而後根本可培壅 不然 恐無入頭處 大時答曰 必先培其根本 然後審其趨嚮 猶作室焉 亦必先有基址 然後可定所向也
문 : 학자가 질문하기를 “유서(遺書)에 ‘근본을 반드시 먼저 북돋은 후에 나아갈 곳을 세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학자는 반드시 먼저 나아갈 곳을 살펴본 후에 근본을 북돋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갈 길이 없을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시(大時)가 답하기를 “반드시 먼저 그 근본을 북돋은 후에 그 나아갈 곳을 살피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기초가 있은 후에 향할 곳을 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先立根本 後立趨嚮 卽所謂未有致知而不在敬者 又云 收得放心後 然後自能尋向上去 亦此意也
답 : 먼저 근본을 세운 후에 나아갈 곳을 세우는 것은 바로 이른바 ‘앎을 이루지 아니하여 경(敬)에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방심(放心)을 추스린 후에 스스로 향하여 올라갈 곳을 찾을 수 있다’고 했으니 역시 이런 의미입니다.
學者問曰 遺書曰 誠然後能敬 未及誠時須敬 而後能誠 學者如何便能誠 恐不若專主於敬而後能誠也 大時答曰 誠者天之道也 而實然之理亦可以言誠 敬道之成 則聖人矣 而整齊嚴肅 亦可以言敬 此兩事者 皆學者所當用力也’
문 : 학자가 질문하기를 “유서에 ‘성(誠)한 뒤에 경(敬)할 수 있는데, 성에 미치지 못했을 때에는 반드시 경한 뒤에 성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 학자가 어떻게 곧바로 성할 수 있습니까? 아마 오로지 경을 주로한 뒤에 성할 수 있다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니, 대시(大時)가 답하기를, “‘성(誠)이란 하늘의 도(道)이다’고 하는데 실제 그러한 이치도 또한 성이라 말할 수 있다. 경(敬)의 도(道)가 이루어지면 성인(聖人)인데 정제(整齊)하고 엄숙(嚴肅)함도 경(敬)이라 말할 수 있으니 이 두가지 일은 모두 학자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敬是竦然如有所畏之意 誠是眞實無妄之名 意思不同 誠而後能敬者 意誠而後心正也 敬而後能誠者 意雖未誠 而能常若有畏 則當不敢自欺而進於誠矣 此程子之意也 問者略見此意而不能達之於言 答者却答不著
답 : 경은 송연(竦然)히 두려워하는 바가 있다는 뜻과 같고, 성(誠)은 진실무망(眞實無妄)함을 이름한 것이니, 의미가 같지 않습니다. 성한 뒤에 경할 수 있다는 것은 뜻이 성실해진 뒤에 마음이 바로 잡힌다는 것이고, 경한 뒤에 성할 수 있다는 것은 뜻은 비록 성하지 않으나 항상 두려움이 있는 것같이 하면 감히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여 성에 나아간다는 것이니, 이것이 정자의 뜻입니다. 질문한 자는 대략 이러한 뜻은 알았지만 말에 통달하지 못했고, 대답한 자는 오히려 답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學者間曰 遺書曰 只外面有些罅隙 便走了 學者能日用間常切操存 則可漸無此患矣 大時答曰 其中充實則其外無罅隙矣
문 : 학자가 질문하기를 “유서에 ‘다만 외면(外面)에 사소한 틈이 있으면 문득 달려간다’ 하였습니다. 학자가 평소에 항상 절실하게 조존(操存)하면 점차 이런 근심은 없을 것”이라 하니, 대시(大時)가 답하기를, “그 가운데가 충실하면 그 외면에 틈이 없을 것이다”고 답하였습니다.
外面只有些罅隙便走了 此語分明 不須注解 只要時時將來提撕 便喚得主人公常在常覺也
답 : “외면에 다만 사소한 틈이 있으면 문득 달린다”고 하니 이 말은 분명하여, 주해(注解)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때때로 끌어와 곧 주인공(主人公)을 불러 항상 존재하고 항상 깨어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學者曰 樂記曰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 五峰有曰 昧天性 感物而動者 凡愚也 向來朋友中有疑此說 謂靜必有動 然其動未有不感於物 所謂性之欲者 恐指已發而不可無者爲言 若以爲人欲 則性中無此 五峰乃專以感物而動爲言眛天性而歸於凡愚 何也
大時答曰 按本語云 知天性 感物而通者 聖人也 察天性 感物而節者 君子也 昧天性 感物而動者 凡愚也 曰知 曰察 曰昧 其辨了然矣 今旣不察乎此 而反其語而言乃以感物而動爲昧天性者 失其旨矣 學者又曰 曰知 曰察 曰味 其辨固了然 但鄙意猶有未安者 感物而動爾 樂記曰 止云感物而動 性之欲也 初未嘗有聖人君子凡愚之分 通與節之說 今五峰乃云知天性 感物而通者 聖人也 察天性 感物而節者 君子也 昧天性 感物而動者 凡愚也 是不以感物而動爲得也 更望垂誨
大時答曰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 物格知至 然後好惡形焉 好惡無節於內 知誘於外 不能反躬 天理滅矣 夫物之感人無窮 而人之好惡無節 則是物至而人化於物也 人化於物者 滅天理而窮人欲者也 觀其下文明白如此 則知先賢之言爲不可易矣 且味感於物而動 性之欲也兩句 亦有何好 而必欲舍其正意而曲爲之說以主張之乎 程子云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者 天理具備 元無少欠 不爲堯存 不爲桀亡 父子君臣常理不易 何曾動來 因不動 故言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 便感非自外來也 又曰寂然不動 萬象森然已具 感而遂通 感則只是自內感 不是外面將一箇物來感於此也 又曰寂然不動 感而遂通 此言人分上事 若論道 則萬理皆具 更不說感與未感 又曰蓋人萬物皆備 遇事時各因其心之所重者更互而出 纔見得這事重 便有這事出 若能物各付物 則便自不出來也以此四條之所論者而推之 益知先賢之言不可易 而所謂感物而動 性之欲者 不必曲爲之說以主張之矣 湘山詩云 聖人感物靜 所發無不正 衆人感物動 動與物欲競 殆亦與先賢之意相爲表裏云爾
문 : 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악기(樂記)에 ‘사람이 태어나 고요할 때는 하늘의 성(性)이고,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性)의 욕(欲)이다’고 했는데, 오봉(五峰)은 ‘천성(天性)에 어두워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지난번 친구들 가운데 이 말에 의심을 하는 사람이 있어 ‘고요함은 반드시 움직임이 있지만 그 움직임은 아직 사물에 감응하지 않은 것이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른바 성(性)의 욕(欲)이라는 것은 이미 발(發)하여 없을 수 없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 같습니다. 만약 인욕(人欲)이라고 여긴다면 성(性) 가운데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오봉(五峰)이 이에 오로지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을 천성(天性)에 어둡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모든 어리석음에 귀결시킨 것은 어째서 입니까?”
대시(大時)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본문의 말을 살펴보니 ‘천성(天性)을 알고 사물에 감응하여 통하는 자는 성인이다. 천성을 살피고 사물에 감응하여 절제하는 자는 군자이다. 천성에 어두워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자는 모두 어리석은 자이다’고 합니다. 지(知)이니 찰(察)이니 매(昧)니 하는 것은 분별이 확연한 것입니다. 이제 이미 이것을 살피지 않고 그 말을 반대로하여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천성에 어둡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것은 그 뜻을 잃은 것입니다”
학자가 또 말했습니다. “지(知)이니 찰(察)이나 매(昧)니 하는 것은 그 분별이 참으로 확연하지만 다만 제 생각에는 오히려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일 뿐입니다. 악기(樂記)에서 말한 것은 다만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性)의 욕(欲)이다’는 것이니 처음부터 일찍이 성인(聖人)․군자(君子)․어리석은 사람의 구분이나 통함과 절제함의 설은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오봉(五峰)은 ‘천성을 알고 사물에 감응하여 통하는 것은 성인이다. 천성을 살펴 사물에 감응하여 절제하는 자는 자이다. 천성에 어두워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이다’고 했는데 이는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가르쳐 주기를 바랍니다”
대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한 것은 하늘의 성이다.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性)의 욕(欲)이다. 사물이 다다르고 앎이 지극해진 연후에 좋아함과 싫어함이 나타난다. 좋아함과 싫어함을 안에서 절제함이 없고 앎이 밖에서 유혹되는 데에도 자기에게로 돌이키지 못하면 천리(天理)가 사라진다. 대체로 사물이 사람에게 감응하는 것이 무궁한데 사람의 호오(好惡)를 절제함이 없으면 이는 사물이 이름에 사람이 사물에 동화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물에 동화되는 것은 천리를 멸하고 인욕을 다하는 것이다. 그 아래 문장을 보면 이와 같이 명백하니 선현의 말을 바꿀 수 없는 까닭을 알 수 있다. 또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性)의 욕(欲)이다’는 두 구절은 또한 무엇이 좋아서 반드시 그 바른 뜻을 버리고 왜곡된 말을 하여 주장했는지를 음미해 보아야 한다. 정자(程子)는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여 마침내 천하(天下)의 일에 통한다는 것은 천리(天理)가 구비되어 원래 작은 흠도 없어서 요(堯)에 의해서 보존되는 것도 아니고 걸(桀)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부자와 군신의 떳떳한 이치는 바뀌지 않으니 어찌 일찍이 동(動)하였겠는가? 동(動)하지 않으므로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여 천하의 일에 통한다고 했으니 감응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고, 또 ‘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만상(萬象)이 빽빽하게 이미 구비 되었고,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니 감응은 다만 내면으로부터 감응하는 것이지 외면으로부터 하나의 사물이 와서 여기에서 감응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으며, 또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여 마침내 통한다하니 이것은 사람의 일에 대해 말한 것이다. 만약 도(道)를 논할 것 같으면 만 가지 이치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므로 감응함과 감응하지 아니함은 다시 말하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대개 사람은 만물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일을 만났을 때 각각 그 마음이 중히 여기는 것에 따라 다시 번갈아 가며 나오니 이 일이 중하다고 보기만 하면 바로 이 일이 나온다. 만약 사물을 각각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 여길 수 있다면 곧 저절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고 했는데, 이 네 조목에서 논한 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더욱 선현의 말을 바꿀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性)의 욕(欲)이다’는 말은 반드시 왜곡된 설로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상산시(湘山詩)에 ‘성인(聖人)은 사물에 감응해도 고요하니 발(發)하는 것이 부정(不正)이 없어라. 뭇 사람들은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니 움직여 만물과 다투고자 한다네’라고 하였으니 선현의 뜻과 서로 표리가 됨을 말했을 뿐이다”고 했습니다.
此兩條問者知其可疑 不易見得如此 但見得未明 不能發之於言耳 答者乃是不得其說而彊言之 故其言粗橫而無理 想見於心亦必有自瞞不過處 只得如此撑拄將去也-五峰云 昧天性 感物而動 故問者云 五峰乃專以感物而動爲昧天性 於五峰本說未見其異 答者乃責以反其語而失其旨 問者又疑樂記本文 惑物而動 初無聖愚之別 與五峰語意不同 而答者但云觀其下文明白如此 則知先賢之言不可易 而不言其所以明白而不可易者爲如何 又謂樂記兩句亦有何好 而不言其所以不好之故 及引程子四條 則又與問者所疑了無干涉 但欲以虛眩恐喝而下之 安得不謂之粗橫無理而撑拄彊說乎 今且無論其他 而但以胡氏之書言之 則春秋傳 獲麟 章明有 聖人之心 感物而動 之語 頃時與廣仲書常論之矣 不知今當以文定爲是乎 五峰爲是乎 要之此等處在季隨誠有難言者 與其曲爲辨說而益顯其誤 不若付其是非於公論而我無與焉爲愈也-須知感物而動者 聖愚之所同 但衆人眛天性 故其動也流 賢人知天性 故其動也節 聖人盡天性 故其動也無事於節而自無不當耳 文義之失 猶是小病 却是自欺彊說 乃心腹膏肓之疾 他人鍼藥所不能及 須是早自覺倍醫治 不可因循揜諱而忌扁鵲之言也
답 : 이 두 조목을 질문한 사람은 의심할 만한 것을 알았으니 이와 같은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본 것이 밝지 않았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답한 사람은 그 설을 이해하지 못해 억지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이 조잡하고 멋대로여서 조리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마음에서 또한 반드시 스스로 속일 수 없는 곳이 있음을 보아 이와 같이 버텨나갈 수 있었을 뿐입니다. -오봉은. “천성에 어두워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질문하는 사람이 “오봉은 오로지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천성에 어둡기 때문이다”고 여겼으니, 오봉의 본설에서는 그 차이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답자는 이에 꾸짓고 그 말을 바꾸었으나 그 뜻을 잃었습니다. 질문하는 사람은 또 악기(樂記) 본문의 ‘사물에 감응한다’는 것은 애초에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의 구별이 없다고 생각했으니 오봉의 말뜻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답하는 사람은 다만 ‘그 아래 문장을 보면 이와 같이 명백하니 선현의 말을 바꿀 수 없다’고 했을 뿐, 명백하여 바꿀 수 없는 까닭이 무엇때문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악기(樂記)의 두 구절에서는 무엇이 좋은가는 있다’고 하고 좋지 않은 까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자(程子)의 네 조목을 인용한데 미쳐서는 또 질문한 사람이 의심한 것과 간섭이 없고, 다만 허현(虛眩)한 공갈로 처리하려고 했으니 어찌 조잡하고 멋대로여서 조리가 없고 억지로 버티고 떠받친다고 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그 외의 것은 논하지 않고 다만 호씨(胡氏)의 글만 가지고 말하면 춘추전(春秋傳) 획린장(獲麟章)에는 분명 ‘성인의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였다’는 말이 있으니 지나 번 광중(廣仲)의 편지와 함께 항상 논의하던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문정(文定)을 옳다고 여겨야 하는지 오봉(五峰)을 옳다고 여겨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이런 곳은 계수(季隨)에게는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왜곡되게 변론하여 말해 그 잘못을 더욱 드러내기 보다는 차라리 그 시비를 공론에 붙여 내가 거기에 관여하지 않음이 더욱 낳은 것만 같지 않습니다.-반드시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인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뭇 사람들은 천성에 어둡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흘러버리고 현인은 천성을 알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절제되며, 성인은 천성을 다하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절제를 일삼을 것도 없이 저절로 마땅하지 않음이 없을 뿐입니다. 문의(文義)의 잘못은 오히려 작은 병통이지만 스스로를 속이고 억지로 말하는 것은 잘 낳지 않는 고질적인 병이니 다른 사람의 침이나 약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빨리 스스로 깨달아 치료를 해야지 머뭇거리고 숨기면서 피해 편작(扁鵲)의 말을 꺼려서는 안됩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이 편지는 경원 원년(을묘; 1195, 66세)에 쓴 편지이다. 호계수가 앞의 편지를 받고 다시 주자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호계수가 여전히 쇄락(灑落)를 학문을 시작하는 일로 삼아 힘을 다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주자는 호계수가 전혀 앞의 편지에서 말한 문리(文理)를 보지 못한 것 같다고 하면서, 문자를 강론함에는 반드시 사심(私心)을 물리친 뒤에야 문의(文義)를 상고(詳考)하여 그 이치의 소재(所在)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자는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다만 말로만 이기려고 한다면 비록 수천만의 말로 종신토록 다투어 논변하더라도 어디에 연유하여 귀결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은 곧 쓸데없이 많은 일을 하여 성인에게 죄를 짖는 것이므로 강학이라 이름 붙일 수 없다고 한다. 또 악기(樂記)와 지언(知言)의 구별 역시 앞의 편지에서 이미 다 말했는데에도 사사로운 뜻을 기꺼이 놓아 버리려 하지 않으니, 이렇다면 다시 강학을 말할 것도 없다고 꾸짖었다.
所喩兩條 前書奉報已極詳悉 若能平心定氣 熟復再三 必自曉然 今乃復有來書之愉 其言欲以灑落爲始學之事而可以力致 皆不過如前書之說 至引延平先生之言 則又析爲兩段 而謂前段可以著力 令其如此 則似全不曾看其所言之文理所謂 反覆推究 待其融釋者 待字之意是如何 而自以己意橫爲之說也 大率講論文字須且屛去私心 然後可以詳考文義 以求其理之所在 若不如此 而只欲以言語取勝 則雖累千萬言 終身競辨 亦無由有歸著矣 是乃徒爲多事而重得罪於聖人 何名爲講學哉 故憙不敢復爲論說 以增前言之贅 但願且取前書子細反復 其間所云 才有令之之心 卽便終身不能得灑落者 此尤切至之論 蓋纔有此意 便不自然 其自謂灑落者 乃是疏略放肆之異名耳 疊此兩三重病痛 如何能到眞實灑落地位耶 古語云 反者道之動 謙者德之柄 濁者淸之路 昏久則昭明 願察此語 不要思想準擬融釋灑落底功效 判著且做三五年辛苦不快活底功夫 久遠須自有得力處 所謂先難而後獲也
灑落 兩字 本是黃太史語 後來延平先生拈出 亦是且要學者識箇深造自得底氣象 以自考其所得之淺深 不謂不一再傳 而其弊乃至於此 此古之聖賢所以只敎人於下學處用力 至於此等則未之嘗言也 顔曾以上都無此等語 子思孟子以下乃頗有之 亦有所不得已也
樂記知言之辨 前書亦已盡之 細看來書 似已無可得說 但夫肯放下此一團私意耳 如此則更說甚講學 不如同流合汚 著衣喫飯 無所用心之省事也 其餘諸說未暇悉報 願且於此兩段反復 自見得從前錯處 然後徐而議之 則彼亦無難語者 幸早報及也
보내 주신 두 조목은 앞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이 매우 상세하니, 만약 마음을 평온히 하고 기운을 안정시켜 재삼 익숙하게 반복 하면, 반드시 저절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다시 편지를 보내와 쇄락(灑落)을 학문을 시작하는 일로 삼아 힘을 다할 수 있다고 하니 모두 지난 편지의 말과 같을 뿐입니다. 심지어 연평선생의 말을 인용한 것은 또 양단으로 분석해서 ‘앞 단락은 힘쓸 수 있다’고 하니, 만약 이와 같다면 전혀 그 말한 바의 문리(文理)를 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이른바 ‘반복하고 추구(推究)해서 융석(融釋)해 지기를 기다린다’고 할 때의 기다린다(待)는 글자의 뜻이 어떠하기에 자기 뜻을 멋대로해서 말하는 것입니까? 대개 문자를 강론함에 반드시 사심(私心)을 물리친 뒤에야 문의(文義)를 상고(詳考)하여 그 이치의 소재(所在)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다만 언어(言語)로만 이기려고 한다면 비록 수천만의 말로 종신토록 다투어 논변하더라도 귀착(歸着)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곧 쓸데없이 많은 일을 하여 성인에게 거듭 죄를 짓는 것이니 무엇을 강학이라 이름 붙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저(熹)는 감히 다시 논설하지 못하고 앞서 말한 군더더기를 붙입니다. 다만 앞 편지를 가지고 자세하게 반복하기를 바랍니다. 그 사이에 이른바 “만일 조금이라도 억지로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곧바로 종신토록 쇄연(灑然)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더욱 절실한 지론(至論)입니다. 대개 이런 뜻을 지니기만 하면 바로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스스로 쇄락이라고 이르는 것은 바로 소략(疏略)하고 방사(放肆)함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이 두세 가지 무거운 병통이 거듭된다면 어떻게 진실로 쇄락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돌이킴은 도(道)의 움직임이고, 겸손함은 덕의 자루이며, 혼탁함은 맑아지는 길이다. 어둠이 오래되면 환히 밝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원컨대 이 말을 살펴 융석(融釋)하고 쇄락(灑落)한 공효(功效)를 모방할 생각을 두지 말고 35년간 고달프고 힘든 공부를 한다면 오래지나 반드시 저절로 득력(得力)한 곳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어려움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한다’는 것입니다.
‘쇄락(灑落)’이라는 두 글자는 본래 황태사(黃太史)의 말인데, 뒤에 연평(延平) 선생이 끄집어냈던 것이니, 역시 학자들에게 자득(自得)하는 기상을 깊이 나아갈 줄 알게하여 스스로 얻은 바의 얕고 깊음을 돌아보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두 번도 전하지 않아 그 폐단이 바로 이런 데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옛날의 성현이 사람을 가르칠 때에 다만 하학(下學)할 곳에 힘을 쓰도록 하고, 이런 곳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자(顔子)와 증자(曾子) 이상은 모두 이런 말이 없고 자사(子思)나 맹자(孟子) 이하는 이런 말이 제법 있으니 역시 부득이한 바기 있었던 것입니다.
악기(樂記)와 지언(知言)의 구별은 앞의 편지에서 이미 다 말씀 드렸습니다. 보내온 편지를 자세하게 보니 말할 만한 것이 없는 듯합니다. 다만 이런 한 무리의 사사로운 뜻을 기꺼이 놓아 버리려 하지 않으니, 이렇다면 다시 무슨 강학을 말하겠습니까? 유속(流俗)과 동화(同和)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마음 쓰는 바 없이 일을 줄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그 나머지 여러 설들은 다 답장을 보낼 겨를이 없으니 원컨대 우선 이 두 단락을 거듭 살펴서 스스로 종전의 잘못된 부분을 알아본 연후에 천천히 의론을 하면 저것 역시 말하기 어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빨리 답장이 오기를 바랍니다.
호계수에게 답함 答胡季隨
【해제】 이 편지에서 ‘성(性)의 유무(有無)와 선악(善惡)은 이(理)를 버리고 별도로 논해야만 곧 숨기거나 피한다는 혐의가 없이 그 시비의 실상을 다 발휘할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는데, 주자는 일찍이 지언(知言)의 잘못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선악(善惡)의 의(義)가 없다. 만약 이와 같다면 성(性)은 다만 좋아하고 싫어함만 있고 선악(善惡)의 법칙이 없다” 이 외에도 또 주자는 “하늘이 여러 백성을 내시니 사물이 있음에 법(法)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이르는 것인가?”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의거해 보면 여기서의 이른바 유무(有無)와 선악(善惡)은 선악이 있다던가 선악이 없다는 뜻이다.
憙憂患侵凌 來日無幾 思與海內知友痛相切磨 以求理義全體之至極 垂之來世 以繼聖賢傳付之重 而離羣索居 無由會合 如季隨者 尤所期望 而相去甚遠 再見恐不可期 此可爲深歎恨也 先訓之嚴 後人自不當置議論於其間 但性之有無善惡 則當舍此而別論之 乃無隱避之嫌而得盡其是非之實耳 善惡二字 便是天理人欲之實體 今謂性非人欲可矣 由是而幷謂性非天理 可乎 必曰極言乎性之善而不可名 又曷若直謂之善而可名之爲甚易而實是也 比來得書 似覺賢者於此未有實地之可據 日月易得 深可憂懼 幸加精進之力 入細著實子細推硏 庶幾有以自信 益光前烈 千萬至望
희(熹)는 우환(憂患)이 닥쳐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합니다. 해내(海內)의 지우(知友)들과 통렬하게 서로 절차탁마하여 이의(理義)의 전체의 지극함을 구하여 후세에 내려 주어 성현이 전해 준 희망을 계승하려고 생각하지만, 무리와 떨어져 쓸슬히 살고 있으니 회합할 길이 없습니다. 계수와 같은 사람은 더욱 기대하는 바가 무거운데 서로 거리가 아주 멀어 다시 만남을 기약하기 어려울 듯하니, 깊이 한탄할 만합니다.
선현의 엄중한 훈계에 대해 후인은 스스로 그 사이에 의논을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단지 성(性)의 유무(有無)와 선악(善惡)은 이를 버리고 별도로 논해야만 곧 숨기거나 피한다는 혐의가 없이 그 시비의 실상을 다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악(善惡) 두 글자는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실체(實體)입니다. 이제 “성은 인욕(人欲)이 아니다”고 하는 것은 괜찮겠지만, 이로 말미암아 “성은 천리가 아니다”라고 합쳐서 말한다면 옳겠습니까? 반드시 “성의 선함을 지극히 말하면서 이름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또 어찌 곧장 선이라고 하면서 이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매우 쉽고 실제 옳은 것과 같겠습니까? 요사이 편지를 받으니 그대가 여기에 근거할 만한 실지(實地)가 없음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세월은 쉽게 흘러가니 깊이 우려할 만합니다. 정진하는 노력을 더하여 세밀한 곳에 들어가 착실하고 자세하게 추리하고 연구하면 거의 자신(自信)을 가지고 선열을 더욱 빛나게 하십시오. 부디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심유개에게 답함 答沈有開
【해제】과거에는 하학상달(下學上達)의 공부가 순순하게 순서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종사하는 자들이 넓으면서도 요약 되어 있고, 요약되어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아 망령된 뜻이 능가하고 뛰어넘는 폐단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학문을 말하는 자들은 이와 반대가 되어,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공환(空幻)에 빠지고 낮은 사람들은 보고 듣는 것을 탐닉해 미친 듯이 갈팡질팡하여 장차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를 모르게된 상태를 안타가워하는 편지이다.
垂諭所以爲學之意與其所聞於師友間者 甚悉 旣荷不鄙 又幸其警益之深也 嘗竊妄謂聖賢敎人下學上達 循循有序 故從事其間者博而有要 約而不孤 無妄意凌蠟之弊 今之言學者類多反此 故其高者淪於空幻 卑者溺於見聞 倀倀然未知其將安所歸宿也 竊窺賢者之所志與其所聞 計其同異之間 其必有所處矣 恨未得相與往還 上下其說以卒究其所窮也 因來更望時有以警告之 實孤陋之深望 至於慨念吾黨之凋零 而欲以進爲撫世爲不肖者之責 此則賢者之失言 而非區區之所敢承也
보내온 편지에서 학문하는 뜻과 사우(師友)들 사이에서 들은 것을 매우 자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미 저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았으니 또 깊이 일깨워 도움을 주길 바랍니다. 일찍이 외람하게도 성현이 사람에게 하학상달(下學上達)을 가르칠 때 순서가 정연했으므로 그 사이에 종사하는 자들이 넓으면서도 요약 되어 있고, 요약되어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아 헛된 생각으로 단계를 뛰어넘는 폐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학문을 말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이와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공환(空幻)에 빠지고 낮은 사람들은 보고 듣는 것을 탐닉해 미친 듯이 갈팡질팡하여 장차 어디도 돌아가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대가 뜻으로 삼는 것과 들어본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같고 다른 것을 따지는 사이에 반드시 처할 바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왕래하면서 그 설을 주고받고 하여 마침내 그 끝까지 궁구할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서신을 통해 다시 때때로 저를 깨우쳐 주기를 바랍니다. 이는 실로 제가 깊이 기대하는 바입니다. 심지어 우리 당의 학자들이 시들어 죽어감을 개탄하고 염려하여 나아가 세상을 어루만지고 저같이 불초한 자들을 꾸짖고자 하시니 이것은 현자의 실언(失言)으로서 제가 감히 받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응조에게 답함 答高應朝
【해제】이 편지는 순희 12년(을사; 1185, 56세)에 쓴 편지이다. 고응조는 일찍이 의흥현(宜興縣)에서 학문을 닦고 강학하였는데, 이 편지는 그가 강학한 것을 가지고 선생에게 질정을 구함에 주자가 답한 것이다. 주자는 이 답장에서 다만 말만하고 일상의 평이한 뜻으로 함양하고 완색하는 공부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곧 학자들이 날로 황망(荒忙)하게 되고 속히 이루려고 조장(助長)하며, 경솔하게 자신을 속이는 병에 빠져 오래 되어 망연(茫然)히 근거할 만한 실상이 없게되면, 다만 한바탕의 큰 얘기거리만 배워 서로 위협하기만 하지 끝내는 위기(爲己)의 실상에 보탬이 없을 것이라고 경계하고 있다.
所示講義發明深切 遠方學者得所未聞 計必有感動而興起者 然此恐但可爲初學一時之計 若一向只如此說而不敎以日用平常意思 涵養玩索功夫 卽恐學者將此家常茶飯做箇怪異奇特底事看了 曰逐荒忙 陷於欲速助長躁率自欺之病 久之茫然 無實可據 則又只學得一場大話 互相恐嚇而終無補於爲己之實也 只如三段所擧諸書大指雖同 然恐亦須更令子細看得逐段各有下落 方能浹洽通貫 有得力處 若只如此儱侗看了便休 却恐只是粗謾 政使便做得成 亦是捺生做熟 久遠畢竟無意味也
보내온 편지에서 강의(講義)여 발명(發明)한 것이 깊고 절실하니, 먼 곳의 학자들이 듣지 못했던 바를 얻고서 반드시 감동하여 흥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는 초학자의 한 때의 계책이 될 수 있을 뿐이니, 만약 한결같이 이처럼 말만하고 일상의 켱이한 뜻으로 함양하고 사색하는 공부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곧 학자들이 일상의 다반사(茶飯事)를 괴이하고 기특한 일로 보아 날로 황망(荒忙)하게 되고 속히 이루려고 조장(助長)하며 경솔하게 자신을 속이는 병에 빠질까 두렵습니다. 오래 되어 망연(茫然)히 근거할 만한 실상이 없게되면 또 한바탕 큰 얘기거리만 배워 서로 으르다가 끝내 위기(爲己)의 실상에는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세 번째 단락에서 열거한 여러 책들 같은 것은 큰 뜻이 비록 같으나 반드시 다시 자세하게 보아 단락마다 각기 결론을 맺어야 비로소 협흡(浹洽)하고 관통하여 득력(得力)한 곳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처럼 흐리멍덩하게 보고 곧 그만 두면 도리어 거칠고 산만해 질 것이니 설령 이루었다 해도 날 것을 익히려는 격이니, 오래 되어도 마침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석천민에게 답함 答石天民
【해제】선생이 절동제거(浙東提擧)가 되었을 때 그곳의 선비들이 외면으로만 치달리는데 익숙한 것을 보고 깊이 그 잘못을 배척하고 여조검(呂祖儉), 반경유(潘景愈) 손응시(孫應時) 등에게 거기에 대해 말하였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보면 주자는 “제갈성지(諸葛誠之)는 도리어 ‘동자(董子)의 의(誼)를 바로잡고 그 이(利)를 도모하지 않으며, 도(道)를 밝히고 그 공(功)을 따지지 않는다는 설은 옳지 않다’고 한다. 그는 ‘만약 이(利)가 이루어지면 의(誼)는 저절로 그 가운데 있고, 공(功)이 이루어지면 도(道)는 저절로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고 했는데, 이 편지에서 ‘의리와 이해가 다만 한 가지여서 분별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변론 했지만 자못 서로 이해 하지 못했다’는 말은, 성지(誠之)가 이해할 수 없었음을 이른다.
平生爲學 見得孟子論枉尺直尋意思稍分明 自到浙中 覺得朋友間却別是一種議論 與此不相似 心竊怪之 昨在丹丘 見誠之直說義理與利害只是一事 不可分別 此大可駭 當時亦曾辨論 覺得殊未相領 至與孟子董子之言例遭排擯 不審尊兄平日於此見得如何 幸更與諸公講論見敎 熹竊以爲今日之病唯此爲大 其餘世俗一等近下見識 未足爲吾患也
평생 학문을 닦아 맹자가 논한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편다[枉尺直尋]”는 뜻이 조금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절중(浙中)에 도착한 뒤로 벗들 사이어 별도로 유행하는 일종의 의논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음을 느껴 마음속으로 가만히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어제 단구(丹丘)에서 성지(誠之)를 만났는데 곧바로 ‘의리와 이해가 다만 한 가지여서 분별할 수 없다’고 말하니 이는 매우 놀랍습니다. 당시에도 변론한 적이 있지만 자못 서로 이해하지 못함을 느끼고 맹자와 동자(董子)의 말을 예로 들어 배척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존형(尊兄)은 평소 이런 것을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여러 학자들과 강론하여 가르쳐주기 바랍니다. 나는 오늘날의 병폐는 오직 이 점이 크다고 여깁니다. 그 나머지 세속의 한 단계 낮은 견식은 우리가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심숙회에게 답함 答沈叔晦
【해제】심숙회(沈叔晦)는 이름이 환(煥)이고 절동(折東) 정해(定海) 사람이다. 태학(太學)에 있으면서 육구령(陸九齡)을 따라 학문을 하였다. 건도중(乾道中)에 진사에 나아갔다가 갑자기 서천(舒川)에서 죽었다. 숙회가 관심을 보여 주었다는 이도(二圖)는 태극도(太極圖)와 선천도(先天圖) 두 그림의 주설(註說)인 것 같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심숙회에게 평생에 말한 것이 모두 몸소 미치지 못하고 실재가 없는 담론이라고 겸손하게 말한 것인데, 심숙회는 두 그림의 주가 지엽적인 것이 많아 그 성실을 다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또한 주자는 이 편지에서 책방에서는 책 파는 이익을 좋아하여 그 진위를 가리지 않고 어지럽게 책을 찍어내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금지키킬 수 있는데에도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므로 금지시키자는 의도로 말해주기 어려움을 말했다. 한편 대사기를 유전시킨 것은 실로 학자와 세상의 교육을 위한 계책이지만 역시, 백공(伯恭)을 위한 계책은 아니다. 그러니 밖에서 어지럽게 판매하는 사람을 위핸 계책은 더더욱 아니다. 따라서 숙회는 이 책을 유전시켜 책방의 자료로 삼는 것이 선생의 허물이 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선생이 이것을 가지고 답한 것이다.
衰病如昨 無足言者 二圖之妄 深荷留念 言多枝葉而不旣其實 尤佩警切之戒 但區區平日躬所不逮之言 與此殊不相似 識者當自無疑 惟是尋常實有似是而非之諭 不幸爲人傳出 異日或能亂道誤人爲可懼耳 麻沙所刻呂兄文字眞僞相半 書坊嗜利 非閑人所能禁 在位者恬然不可告語 但能爲之太息而已 若大事記 則雖非全書 而實有益於學者 有補於世敎 區區流傳之意本不爲伯恭計 况門外之紛紛者乎
노쇠한 병이 어제와 같으니 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즈의 태극도와 선천도에 대해 관심을 보여주어 깊이 감사 드립니다. 말이 대체로 지엽적이고 내용도 알차지 않으니 더욱 경계하는 마음이 절실합니다. 다만 저의 평소 몸이 미치지 못하는 말은 이것과는 자못 서로 같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은 마땅히 스스로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평소에 실제로 옳은 듯하지만 그른 의론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남들이 베껴서 유출하니 훗 날에 혹시라도 도(道)를 어지럽히고 남을 그르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마사(麻沙)에 새긴 여형(呂兄)의 문자는 진위가 서로 반반이지만 책방에서는 이익을 좋아하니 한직에 있는 사람이 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태평하니 말해 줄 수도 없어 탄식만 할 뿐입니다. 대사기(大事記)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전서(全書)는 아니지만 실제로 학자들에게 유익하고 세상의 가르침에 보탬이 됩니다. 제가 유포하는 의도는 본래 백공(伯恭)을 위한 계책이 아니니 하물며 문 밖의 어지러운 자들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심숙회에게 답함 答沈叔晦
【해제】송사(宋史)심환(沈煥)전에 의하면 숙회는 태학록(太學錄)으로 있다가 고우군교수(高郵軍敎授)으로 물러났으며 후에 충간판절동안무공사(充幹辦浙東安撫公事也)가 되었다. 편지에서 ‘숙막은 현자가 처할 곳이 아니다’고 한 말은 숙회가 수막(帥幕)의 하관(下官)이 되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숙회는 처음엔 상산의 제자였으므로 학문을 하면서도 책을 보지 않았다고 하였고, ‘경전을 그만 두고 역사를 전공한다’는 것은 그가 절중(浙中)의 학문의 영향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고, 왕도를 소략하게 여기고 패술을 숭상한다는 그가 것은 영강(永康)의 공리(公利)설에 영향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또 범범히 보면서 널리 취하기 보다는 익숙히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한 자를 얻어도 내가 얻고 한 치를 얻어도 내가 얻어야 비로소 공력(功力)을 잘못 쓰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帥幕非所以處賢者 然自我言之 亦何適而不可安耶 前日務爲學而不觀書 此固一編之論 然近日又有一般學問 廢經而治史 略王道而尊覇術 極論古今興亡之變 而不察此心存亡之端 若只如此讀書 則又不若不讀之爲愈也 况又中年 精力有限 與其汎觀而博取 不若熟讀而精思 得尺吾尺 得寸吾寸 始爲不枉用功力耳 鄙見如此 不審明者以爲如何
수막(帥幕)은 가가 처할 곳이 아니지만, 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역시 어디로 가나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전날 힘써 학문하면서도 책을 보지 않은 것은 진실로 한쪽으로 치우친 의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사이 또 일반 학문이 경전을 그만 두고 역사를 전공하거나 왕도(王道)를 소홀히 여기고 패술(覇術)을 숭상하여 고금 흥망의 변화를 지극하게 논하면서도 이 마음이 존망(存亡)하는 단서는 살피지 않습니다. 만약 다만 이와 같이 글을 읽는다면 읽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또 중년에 정력이 한도가 있으니, 이것저것 보면서 널리 취하기 보다는 익숙히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한 자를 얻어도 내가 얻고 한 치를 얻어도 내가 얻어 비로소 공력(功力)을 잘못 들이지 않게 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제 견해가 이와 같은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심숙회에게 답함 答沈叔晦
【해제】아마도 숙회가 스스로 자기의 병을 이야기 하고 문도(聞道)와 독서 두 가지 길 중에서 좇을 바를 몰라 질문한 것 같다. 그러므로 선생이 문도(聞道)와 독서 두 가지는 모두 병을 구제하는 좋은 약(良藥)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만 숙회의 이른바 도(道)란 어떤 도이며 책(書)이란 어떤 책인지를 아직 모른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이 편지를 보내어 다시 찾아 연구하기를 바란 것이다.
示喩兩塗之疑 足見省身求善 不自滿足之意 警發多矣 自惟婾惰 何以及此 况又未得面承 事理之間 亦有難隃度者 何敢容易下語 顧以不鄙見屬之厚 竊以所喩思之 恐所謂聞道調書者 皆救病之良藥也 但未知其所謂道者何道 所謂書者何書 而所以聞之讀之又如何用其力爾 區區更願審扣其人 以究其說而決其是非 政使其說未必盡是 而因此講求同異之間 便自可以見眞是之所在 向後用力 則以前日躬行之實充之 且不患其不勇也 大抵近年學者求道太迫 立論太高 往往嗜簡易而憚精詳 樂渾全而畏剖析 以此不見天埋之本然 各墮一偏之私見 別立門庭 互分彼我 使道體分裂 不合不公 此今日之大患也 不識明者以爲如何 子約爲人固無可疑 但其門庭近日少有變異 而流傳已遠 大爲學者心術之害 故不得不苦口耳 近日一派流入江西 蹴踏董仲舒而推尊管仲王猛 又聞有非陸贄而是德宗者 尤可駭異 所欲言者 甚衆甚衆
보내 주신 양도(兩塗)의 의문에서 몸을 살펴 선을 구하여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뜻을 족히 볼 수 있었으니 일깨워줌이 많았습니다. 제스스로 안락함을 탐해 일에 게으르다고 생각하니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까? 하물며 직접 뵙고 뜻을 받들 수도 없어 사리(事理)의 사이에 또한 멀리 헤아리기 어려운 것도 있으니 어찌 감히 쉽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를 비루하지 않게 봐준 후의(厚意)를 뒤돌아보고 보내준 편지의 내용을 생각을 해보니 이른바 도(道)를 듣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모두 병을 구제하는 좋은 약인 듯 싶습니다. 다만 그 이른바 도(道)란 어떤 도(道)이며 책이란 어떤 책인지, 그리고 듣고 읽는데 어떻게 힘을 써야 할지를 아직 모릅니다. 저는 다시 그러한 사람을 찾아 그 설을 연구하고 그 시비를 결론내릴 것을 바랍니다. 만약 그 설이 반드시 다 옳은 것이 아니라면 이로 인해 같고 다른 것의 사이를 강구한다면 곧 저절로 진짜 옳은 것의 소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공부할 때 전날 몸소 행한 사실로 채워나간다면 또 용맹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대저 근래의 학자는 구도(求道)가 너무 급박(急迫)하고 입론(立論)이 너무 고원하여 흔히 간편하고 평이함을 좋아하고 정밀하고 자세함함을 꺼리며, 종합을 즐기고 분석을 두려워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천리의 본연(本然)을 보지 못하고 각각 한 쪽의 사견(私見)에 빠져서 별도로 문정(門庭)을 세우고 서로 피아(彼我)를 구분하여 도체(道體)를 분열시키며 합치되지도 않고 공변되지도 않으니, 이것이 금일의 큰 근심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약(子約)의 사람됨은 진실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그의 문정(門庭)에 근래 조금 이변(異變)이 있어서 유전(流傳)한 지 오래 되어 학자들의 심술(心術)에 아주 해가 되는 까닭으로 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입니다. 요사이 일파(一派)가 강서(江西)로 유입(流入)되어 동중서(董仲舒)를 차 버리고 관중(管仲)과 왕맹(王猛)을 떠받들며, 또 들리는 소문에 육지(陸贄)를 비난하고 덕종(德宗)을 옳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니, 더욱 놀랍고 괴이합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
심숙회에게 답함 與沈叔晦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장주(漳州)에 있을 때의 편지이다. 이 때 군에서는 스스로 그 군의 이익과 폐단을 서열 지웠는데, 주자는 본주(本州)에서 갖가지 물품의 상공 및 경총제전(經總制錢)과 무액전(無額錢)의 명목을 견감해 달라고 아뢰었는데, 소식이 없었다.
憙衰病之餘 扶曳至此 少時爲吏於此接壤 頗聞其民俗利病 謂或可以少效區區 旣至 乃殊無下手處 頃來豐丈過此 亦以一二事爲寄 亦其俗之所甚病 今亦未有以報 朝廷向來蠲減 僅有其名 而今乃欲責其實 且許郡守自列 因得條上一二 未知得見從否 亦知今日上下艱窘 不敢究言 然度已是難施行矣 欲行經界 半年議尙未定 若得遂行 却須救得分數 然病久證壞 要非一藥所能支也 奈何奈何因便附此問訊 有以見敎 願悉聞之 正遠 唯冀以時加衛 以慰吾黨之望 不宣
저(熹)는 늙고 병든 나머지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이 접경지역에 관리가 되어 그 민속의 이익과 폐단을 두루 들어보고 혹 내 뜻을 조금이라도 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합니다만 이미 당도하고 보니 손을 쓸 곳이 거의 없습니다. 근래에 풍장(豐丈)이 이곳을 지나면서 역시 한 두 가지 일을 맡겼는데 역시 그 풍속에서 심한 폐단으로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아직 회답이 없군요. 조정은 지난 번부터 경감하여 겨우 그 이름만 있었는데, 이제 그 사실을 꾸짖고 또 군수가 스스로 서열 매기는 것을 허락하려고 합니다. 위의 한 두 조목을 얻음으로 인해 추종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또 지금 위 아래가 어렵고 옹색하여 감히 말로 다할 수 없음도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행하기 어렵다는 것은 헤아려 보았습니다. 경계법(經界法)을 시행하고자 하여 반 년 동안 의론을 하였지만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마침내 행할 수 있다면 오히려 반드시 분량과 수효를 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병이 오래되어 썩어 들어가 요컨대 하나의 약으로 지탱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어찌해야 좋을 까요? 사람 편에 이 편지를 붙이니 가르침을 받아 다 듣기를 원합니다. 부디 항상 보중하여 우리 당의 기대를 위무해 주기를 바라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심숙회에게 답함 答沈叔晦
【해제】이 편지에서는 논어․맹자․역 의 본의를 분명하게 보는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주자는 맹자의 본의를 분명히 보기 위해서는 여러 선생의 설 가운데 통한 것을 취하여 그 사이에 착종(錯綜)하여야 비로소 훌륭함을 다할 수 있고, 만약 당장에 여러 설들을 혼잡(混雜)하여 보면 도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주자에 따르면 당시 경전을 설하는 것이 대부분 이런 폐단이 있는데, 그 까닭은 대개 본지(本指)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또 한결 같이 선배유학자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어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모든 것이 막혀 다만 뜻을 굽혀 맴돌 뿐이고 의리와 시비, 문의(文意)가 합당한지 아닌지는 이해하려 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또 주자는 주역에 대해서 시초로 점친 괘는 물으면 곧 응답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신(神)이 될 뿐이지 별도로 시초로 점친 괘 이외에 지극한 신(神)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으며, 증자(曾子)가 맹경자(孟敬子)에게 한 말은 평상시에 공부하는 효과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숙회는 “의가 엄습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에 대해 외면에서 의리를 찾는 것으로 여긴 까닭에 다시 상고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 논어의 본의에 대해서는 공자(孔子)가 자로(子路)가 인(仁)한지 몰랐음을 이르는 것인데, 숙회는 이것을 잘못 보고 공자는 자로가 이(理)의 소이연(所以然)을 모르기 때문에 인(仁)할 수 없다 했다고 여겼다. 그리고 숙회의 생각으로는 자로와 같은 여러 사람들이 하는 것은 모두 옳지만 다만 그 이(理)의 소이연(所以然)만 살필 수 없다고 운운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주자는 ‘자로와 같은 여러 사람들이 하는 것은 아마도 모두 옳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어찌 갑자기 그 이(理)의 소이연(所以然)을 살피는 것을 가지고 책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克己復禮 前說已得之 却是看得不子細 誤答了 今承再喩 愈詳密無疑矣
극기복례는 지난 번 말에서 이미 알았습니다만 오히려 본 것이 자세하지 않아 답이 틀렸습니다. 이제 다시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더욱 상세하고 치밀하여 의심이 없습니다.
浩然之氣一章 恐須先且虛心熟讀孟子本文 未可遽雜它說 俟看得孟子本意分明 却取諸先生說之通者錯綜於其間 方爲盡善 若合下便雜諸說輥看 則下梢只得周旋人情 不成理會道理矣 近日說經多有此弊 蓋已是看得本指不曾分明 又著一尊畏前輩 不敢違異之心 便覺左右顧膽 動皆窒礙 只得曲意周旋 更不復敢著實理會義理是非․文意當否矣 夫尊畏前輩 謙遜長厚 豈非美事 然此處才有偏重 便成病痛 學者不可不知也 又非義襲而取之句內 亦未見外面尋義理之意 請更詳之 橫渠先生言觀書有疑 當且濯去舊見 以來新意 此法最妙
凡言易者 多只是指蓍卦而言 蓍卦何嘗有思有爲 但只是扣著便應 無所不通 所以爲神耳 非是別有至神在蓍卦之外也
曾子告孟敬子三句 不是說今日用功之法 乃言平日用功之效 如此有得 文義方通 來喩糾紛 殊不可曉也
不知其仁之說恐未安 且未論義理 只看文勢已自不通 若更以義理推之 尤見乖戾矣 蓋智自是智 仁自是仁 孔門敎人 先要學者知此道理 便就身上著實踐履 到得全無私心 渾是天理處 方喚作仁 如子路諸人 正爲未到此地 故夫子不以許之 非但欲其知理而已也 若謂未知者做得皆是而未能察其理之所以然 則諸人者又恐未能所爲皆是 固未暇責其察夫理之所以然也
호연지기(浩然之氣) 한 장(章)은 반드시 먼저 마음을 비우고 익숙하게 맹자 본문을 읽고 갑자기 다른 설을 뒤섞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맹자 본의를 분명하게 보는 것을 기다려 도리어 여러 선생의 설 가운데 통한 것을 취하여 그 사이에 착종(錯綜)하여야 비로소 훌륭함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장에 문득 제설을 혼잡(混雜)하여 보면 결국(下稍)에 다만 인정을 주선(周旋)할 수 있을 뿐 도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사이 경전을 설하는데 대부분 이런 폐단이 있습니다. 대개 이미 본지(本指)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또 한결 같이 전배(前輩)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어기지 못하겠다는 마음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문득 좌우를 돌아 봄에 걸핏하면 모두 막혀 다만 뜻을 굽혀 맴돌 뿐이고 다시 감히 착실하게 의리의 시비, 문의(文意)가 합당한지 아닌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저 선배 유학자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후덕한 어른을 겸손하게 대하는 것은 장후(長厚)하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에 너무 지나치게 치우치기만 하면 바로 병통이 되니, 학자가 몰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의(義)가 엄습(掩襲)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 안에서 또한 외면(外面)에 의리를 찾는 뜻을 보지 못했으니, 청컨대 다시 상고하십시오. 횡거(橫渠) 선생은 “글을 읽을 때에 의심이 있으면 마땅히 예전 견해를 씻어 버리고 새로운 의견을 가지도록 하라”고 말했는데 이 법이 가장 오묘합니다.
역(易)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대체로 시초(蓍草)로 점친 괘를 가지고 말을 합니다. 시초로 점친 괘가 어찌 일찍이 생각이 있으며 뭔가를 함이 있겠습니까? 다만 물으면 곧 응답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을 뿐입니다. 그 때문에 신(神)이 되는데, 이는 별도로 시초로 점친 괘 이외에 지극한 신(神)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증자(曾子)가 맹경자(孟敬子)에게 일러준 세 구절은 오늘 공부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 아니라 바로 평상시에 공부하는 효과에 대해 말한 것이니 이와같이 해야 얻음이 있고 문의(文義)가 비로소 통하는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는 어지럽게 꼬여 있어 거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그 인(仁)에 대한 설명은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또 의리(義理)를 아직 논하지 않고 다만 문세(文勢)가 이미 스스로 통하지 않음을 보았을 뿐입니다. 만약 다시 의리(義理)를 가지고 추구한다면 더욱 어그러졌음을 볼 것입니다. 대개 지혜란 스스로 지혜이고 인(仁)은 스스로 인(仁)입니다.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사람을 가르침에 먼저 학자들이 이 도리(道理)를 알아서 곧 몸소 착실하게 실천하게 하였습니다. 완전히 사심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 혼연(渾然)한 천리처(天理處)가 있어야 비로소 인(仁)이라 부릅니다. 자로(子路)와 같은 여러 사람들은 바로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공자가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理)를 알게 하려고 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한 것이 옳더라도 능히 그 이(理)의 소이연(所以然)을 살피지 못한다면 여러 사람들은 또 아마 하는 것이 모두 옳다는 것도 몰라 진실로 이(理)의 소이연(所以然)을 살피도록 책망할 겨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말 주자대전 54권
편지 친구․제자들과의 문답 書 知舊門人問答
손계화(응시)에게 답함 答孫季和(應時)
【해제】이 글은 순희 16년(무신; 1189, 60세) 4월 손계화가 편지를 보내와 학문에 질문함에 편지를 써서 답한 것이다. 주자는 이 편지에서 먼저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의 공부가 서로 표리가 되도록 해야 함을 말하고 이어서 독서와 수기(修己)를 이해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또 주자는 중용장구와 태극해의의 이면에 들어 있는 도리와 정미한 곡절을 논한다면 거기에서 다시 무엇을 궁진(窮盡)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태극의 설은 역․계사와 그 자세함과 소략함이 같지 않으므로 서로 간에 발명하여 정미함이 쌓인 것을 다 해야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의론이 종합적이고 모호한 것만을 즐기고 분리하고 분석하는 것을 꺼리는 것에 대해 걱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자는 이 편지에서 명도와 이천, 명도의 횡거의 학문에 대해서도 논하였으며, 봉건제도에 대한 이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所喩平生大病最在輕弱 人患不自知耳 旣自知得如此 便合痛下功夫 勇猛舍棄 不要思前算後 庶能矯革 所謂藥不暝眩 厥疾不瘳者也 明善誠身 正當表裏相助 不可彼此相推 若行之不力而歸咎於知之不明 知之不明而歸咎於行之不力 卽因循檐閣 無有進步之期矣 它論數條 亦所當講 別紙奉報 幸倂詳之 檃括程書 豈所敢當 當時諸先達蓋嘗有欲爲之而未果者 然自今觀之 却似未爲不幸 况後學淺陋 又安敢議此乎
평생의 큰 병이 가장 경약(輕弱)한 것에 있다고 하셨는데, 남들은 스스로 알지 못함을 근심할 따름입니다. 이미 스스로 이와 같음을 알았다면 문득 통렬(痛烈)하게 공부하고 용맹(勇猛)하게 버려 앞을 생각함도 뒤를 계산함도 없어야 거의 바로잡아 혁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약이 독하여 정신이 어찔하지 않으면 그 병이 낫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은 바로 표리(表裏)가 서로 돕도록 해야 하고, 피차 서로 미루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힘써 행하지도 않고 앎이 분명하게 못하다고 허물을 돌리고, 앎이 분명하지 못하므로 힘써 행하지 못한다고 허물을 돌린다면, 곧 구습(舊習)에 따라 미적거려 진보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저들이 논하는 몇 가지 조목은 역시 마땅히 강론해야 하는 것입니다. 별지에 부쳐드리니 아울러 자세히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정자(程子)의 글을 바로잡는 것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의 여러 선달(先達) 중에 대개 일찍이 그것을 하려고 하였다가 결실을 맺지 못한 자들이 있었는데, 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보니 오히려 불행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물며 천박하고 고루한 후학이 또 어찌 감히 이것을 의론할 수 있겠습니까?
(5-2688)子約漢唐之論 在渠非有私心 然亦末免程子所謂乃邪心者 却是敎壞後生 此甚不便 近年以來 彼中學者末曾理會讀書修己 便先懷取一副當功利之心 未曾出門踏著正路 便先做取落草由徑之計 相引去無人處 私語密傳 以爲奇特 直是不成模樣 故不得不痛排斥之 不知子約還知外面氣象如此否耳
자약(子約)이 한(漢)․당(唐)을 논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사심(私心)을 품은 것은 아니라고 하겠으나 정자(程子)의 이른바, ‘바로 사심(私心)이다’ 한 경우를 면하지 못하여 도리어 후생(後生)을 허물어뜨리니 이는 매우 불편합니다. 근년 이래로 저 가운데의 학자는 독서(讀書)와 수기(修己)를 이해(理會)하지 못하고 문득 먼저 한 건의 공리심(功利心)을 품으며, 문을 나서 바른 길을 밟지 않고 문득 먼저 풀을 베고 지름길로 가려는 계책부터 만들어 서로 끌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사사로이 말하며 비밀리 전해 주는 것을 기특(奇特)하게 여겨 곧바른 모양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약(子約)도 외면(外面)의 기상(氣象)이 이와 같음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 [사심(私心)] : 주역 무망(无妄)의 전(傳)에 말하기를, “비록 사심은 없으나 진실로 바른 이치에 합치(合致)되지 않으면 곧 망령된 것이니, 바로 사심(邪心)이다” 하였다.
中庸章句太極解義方是略說大槪 若論裏面道理 精微曲折 知它是更有何窮何盡 未須便慮說得太詳 且當以玩味未熟分晝未明爲憂 蓋自頃年妄作此書 至今未見有人眞實下功 理會到究竟處也 大事記數條 其間誠有可疑者 如韓信事 向來伯恭面論 蓋嘗曰 其不反 不知後來看得如何 須是別看出情節來 不然不應如此失入也 此可更問子約 看如何 然渠此書却實自成一家之言 亦不爲無益於世 鄙意所疑 却恐其間注脚有太纖巧處 如論張湯․公孫弘之姦 步步掇拾 氣象不好 却似與渠輩以私智角勝負 非聖賢垂世立敎之法也 諸詩語意淸遠 讀之令人想見湖山之勝 但亦不無前幅所論兩字之病(謂輕弱)耳 子陵仲弓二絶則甚佳 嘗觀荀淑能譏刺梁氏而爽已不敢忤董卓 至彧 遂爲唐衡之壻․曹操之臣 人家父祖壁立千仞 子孫猶自倒東來西 况太丘制行如此 其末流之弊爲賊佐命 亦何足怪哉
중용장구와 태극해의에서 비로소 대략이나마 개요를 말하였으니 만약 이면(裏面)의 도리와 정미(精微)한 곡절(曲折)을 논한다면 거기에 다시 무엇을 궁진(窮盡)해야 할지를 알게될 것입니다. 반드시 말한 것이 매우 자세하기를 고려하지 말고 우선은 마땅히 완미함이 미숙하고 획을 긋는 것이 분명하지 않음을 걱정해야 합니다. 몇 해 전부터 망령되이 이 책을 지었는데 지금까지 그 누구도 진실하게 공부해서 끝까지 이해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사기의 여러 조목들은 그 사이에 진실로 의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한신(韓信)의 일과 같은 것은 전부터 백공(伯恭)과 마주보며 논했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그가 배반하지 않은 것을 후에 어떻게 보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별도로 정절(情節)을 보아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이처럼 잘못 들어감에 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자약이 어떻게 보았는가?”고 물을 수 있지만 그의 이 편지는 도리어 진실로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룬 말이니 또한 세상에 무익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의심스러운 것은 도리어 그 사이에 각주를 단 것이 지나치게 섬새하고 교묘한 곳이 있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장탕(張湯)과 공손홍(公孫弘)의 간교함을 논하면서 거론하는 곳 마다 거두고 주워모아 기상이 좋지 않으니, 도리어 그들의 무리와 사사로운 지혜를 가지고 승부를 다투는 것 같으니 이는 성현이 세상에 드리운 입교(立敎)의 법이 아닙니다. 여러 시어(詩語)의 뜻이 맑고 고원하여 읽음에 사람들로 하여금 호산(湖山)이 이긴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또한 앞 쪽에서 논한 두 글자의 병(輕弱을 이른다)이 없지 않을 따름입니다. 자릉(子陵)과 중궁(仲弓) 두 절구(二絶)는 매우 훌륭합니다. 일찍이 순숙(荀淑)이 양(梁)씨를 나무라고 비꼬는 것을 보고도 상(爽)은 결국 감히 동탁(董卓)을 거스르지 못했습니다. 욱(彧)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당형(唐衡)의 사위가 되었으며 조조(曹操)의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집안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천길 높이로 벽립(壁立)해 있으면 자손들은 오히려 스스로 동(東)으로 거슬러 가면서 서로 오는 꼴이 되는데, 하물며 태구(太丘)의 제도가 행해짐이 이와 같아 그 말류의 폐단이 도적들의 좌명(佐命)이 됨이 또한 어찌 족히 괴이할 것이 있겠습니까?
(5-2689)太極之說與繫辭詳略不同 乃是互相發明 以盡精微之蘊 最爲有功 若只依本分模榻 則亦何用增此贅語 而學者又何由知得其中有許多曲折耶 大抵近日議論喜合惡離 樂含胡而畏剖析 所以凡事都不曾理會到底 此一世之通患也
태극(太極)의 설은 계사(繫辭)와는 자세함과 소략함이 같지 않으니 서로간에 발명하여 정미함이 쌓인 것을 다 해야 가장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만약 본분의 모습에만 의존하면 또한 이 군더더기의 말을 늘리는 것을 어디에 쓰겠으며 학자들은 또 무엇을 말미암아 그 가운데 있는 허다한 곡절들을 알 수 있겠습니가? 대개 요즘의 의론들은 합하는 것만 좋아하고 분리하는 것은 싫어하며 모호한 것만 즐기고 분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든 일이 다 이해다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온 세상의 공통된 근심거리입니다.
明道答橫渠書誠似太快 然其間理致血脈精密貫通 儘須玩索 如大公順應 自私用智 忘怒觀理 便與主敬窮理互相涉入 不可草草看過 如上文旣云以其情順萬事 卽其下云而無情亦自不妨
명도(明道)가 횡거(橫渠)에게 답한 편지는 진실로 매우 명쾌한 것 같습니다만 그 사이의 이치와 혈맥이 정밀하게 관통하니 반드시 다 완미하고 찾아야 합니다. 크게 공적으로 따르고 응해야지 스스로 사사롭게 지혜를 쓴다면 망령되이 떨쳐 일어나 이(理)를 보게 되니 곧 주경(主敬)과 궁리(窮理)가 서로 간섭하고 개입하여 자세히 보고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위의 문장에서 이미 ‘그 정(情)을 가지고 모든 일에 순응한다.’고 했으면 곧 그 아래에서 ‘무정(無情) 역시 스스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明道伊川論性疏密固不同 然其氣象亦各有極至處 朋道直是渾然天成 伊川直是精細平實 正似文王治岐周公制禮之不同 又似馬援論漢二祖也
명도(明道)와 이천(伊川)이 성(性)을 논한 소략함과 정밀함은 진실로 같지 않습니만, 그 기상은 역시 각각 지극한 곳이 있습니다. 명도는 바로 혼연(渾然)한 천성(天成)이며 이천(伊川)은 바로 정밀하고 세밀하면서도 평이하고 실재적이니 바로 문왕(文王)이 기(岐)를 다스리고 주공(周公)이 예를 제정한 것이 다른 것과 같고 또 마원이 한(漢)의 이조(二祖)를 논한 것과 같습니다.
封建之論甚佳 范公之說大抵切於時務 近而易行 但於制度規模久遠意思大段欠闕 如論租庸兩稅等處 亦甚疏略也 封建一事 向見胡丈明仲所論 大抵與來喩相似 不知曾見之否 要之此論須以聖人不以天下爲一家之私作主意 而兼論六國形勢 以見其利害未嘗不隨義理之是非則可耳 以上諸說有未安處 却幸反復
봉건제도에 대한 이론은 매우 훌륭합니다. 범공(范公)의 설은 대게 시무(時務)에 절실하니 가까우면서도 행하기 쉽습니다. 다만 제도와 규모․오래된 의사에 큰 결함이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조세(租稅)와 용세(庸稅) 등 두 가지 세법을 논한 곳에서는 또한 매우 소략합니다. 봉건(封建) 한 가지 일은 예전에 호장명중(胡丈明仲)이 논한 것을 보았는데 대개 보내주신 편지의 내용과 서로 같았습니다.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이 논의는 반드시 성인(聖人)은 천하를 일가(一家)의 사사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주된 뜻으로 삼아 육국(六國)의 형세를 아울러 논하여 그 이해가 일찍이 의리의 시비를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는 것을 본다면 가능할 뿐입니다. 이상의 설들이 온당치 않은 부분이 있겠지만 그래도 반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손계화에게 답함 答孫季和
【해제】이 편지는 소희 원년(경술; 1190, 61세) 손계화가 편지를 보내와 정치에 대해 질문을 하였은데 이에 답해준 편지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학문을 함에 있어 과거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성학(聖學)을 공부함으로써 선비들로 하여금 수기치인의 내용을 알게 하여야 중도(中道)를 흥기하고 장래의 종자가 되게 할 수 있음을 일러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읽고 이치를 완미하는 것 외에 고증하는 것 또한 일종의 공부이지만 얻는 것은 거의 없고 정력을 낭비하는 일임을 지적하고 있다.
縣事想日有倫理 學校固不免爲擧子文 然亦須告以聖學門庭 令士子略知修己治人之實 庶幾於中或有興起 作將來種子 浙間學問一向外馳 百怪俱出 不知亦頗覺其弊否 寧海僧極令人念之 亦可屬之端叔兄弟否 若救得此人出彼陷穽 足使聞者悚動 所係實不輕也 所疑三條 皆恐未然 試深味之 當自見得 古今書文雜見先秦古記 各有證驗 豈容廢絀 不能無可疑處 只當玩其所可知而闕其所不可知耳 小序決非孔門之舊 安國序亦決非西漢文章 向來語人 人多不解 惟陳同父聞之不疑 要是渠識得文字體製意度耳 讀書玩理外 考證又是一種工夫 所得無幾而費力不少 向來偶自好之 固是一病 然亦不可謂無助也 孔氏書序與孔叢子․文中子大略相似 所書孔臧不爲宰相而禮賜如三公等事 皆無其實 而通鑑亦誤信之 則考之不精甚矣
현의 일은 날마다 윤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는 진실로 과거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을 면할 수 없지만, 그러나 또한 반드시 성학(聖學)의 문정(門庭)을 말해주어 선비들로 하여금 대략이나마 수기치인의 내용을 알게 하여야 거의 중도(中道)에 대해 흥기함이 있고 장래의 종자가 되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간(浙間)의 학문은 한결같이 밖으로만 치달려 온갖 괴이한 것들이 다 나오고 또한 자못 그 폐단을 깨달았는지 어떤지도 모릅니다. 영해(寧海)라는 승려는 매우 사람들에게 염려를 끼치니 또한 단숙(端叔)형제에게 혹하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 사람이 저 함정을 나올 수 있도록 구제한다면 족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연계된 것이 실로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의심하는 세 가지 조목은 모두 그렇지 않은 것 같으니 자세히 음미해 보시면 마당히 스스로 알게될 것입니다. 고문상서나 금문상서의 글은 선진(先秦)의 옛 기록에 섞여 나와 각각 증거가 있으니 어찌 폐하여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의심할 만한 곳이 없을 수 없으니 다만 마땅히 알 수 있는 것을 완미하고 알 수 없는 것은 빼버릴 뿐입니다. 소서(小序)는 결코 공자 문하의 구풍이 아니요, 안국의 서문 역시 결코 서한(西漢)의 문장이 아닙니다. 지난 번에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사람들이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진동보만 듣고 의심하지 않았으니, 요컨대 그의 학식이 문자의 체제(體製)와 의도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글을 읽고 이치를 완미하는 것 외에 고증하는 것 또한 일종의 공부이지만 얻는 것은 거의 없고 정력을 낭비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예전엔 우연히 스스로 그것을 좋아하여 진실로 하나의 병이었지만 또한 도움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공씨의 상서서(尙書序)와 공총자(孔叢子)․문중자(文中子)가 대강은 서로 비슷하니 거기에 실린 “공장(孔臧)이 재상이 되지 않았는데 예로서 삼공과 같이 하사했다”는 등의 일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통감에서도 도한 잘못 그것을 믿고 있으니 고증에 정밀하지 않음이 심합니다.
석응지에게 답함 答石應之
【해제】소희 2년(신해; 1191, 62세)에 황간(黃幹)이 삼산(三山)으로 돌아가 편지로 정사에 대해 알려 왔는데 면재선생황문숙공문집(勉齋先生黃文肅公文集) 권2의 회암주선생께보내는 편지3에 보면 석응지가 좇겨난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 편지에서 “보여 준 문자(文字)는 깊고 절실하며 자세하여 사정을 다 말했으니, 당시에 대면하여 진달(陳達)했다면 또 여기에 그치지 않았으리라 생각되지만 조금도 임금의 뜻을 돌리지 못했다.”고 한 부분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이때 쯤 쓰여진 편지인 것 같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건강이 악화되어 공부에 진전이 없지만 그래도 성현이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는 것과, 근래 이른바 시끄럽게 다투며 울어대는 자들이 도(道)를 어지럽히고 사람을 그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所示文字深切詳審 說盡事情 想當時面陳又不止此 而未足以少回天意 此亦時運所繫 非人力所能與也 更願益加涵養講學之功而安以俟之 事會之來 豈有終極 安知其不愈鈍而後利耶 憙衰朽殊甚 春間一病狼狽 公謹見之 繼此將理一兩月 方稍能自支 然竟不能復舊 幸且復得祠祿休養 而幼累疾病相仍 殊無好况 心昏目倦 不能觀書 然日用功夫不敢不勉 間亦紬繹舊聞之一二 雖無新得 然亦愈覺聖賢之不我欺 而近時所謂喙喙爭鳴者之亂道而誤人也 無由面論 臨風耿耿 公謹想巳到彼矣 渠趣向意味朋友間少得 但意緖頗多支離 更與鑴切 令稍直截 當益長進耳
보여 준 문자(文字)는 깊고 절실하며 자세하여 사정을 다 말했으니, 당시에 대면하여 진달(陳達)했다면 또 여기에 그치지 않았으리라 생각되지만 조금도 임금의 뜻을 돌리지 못했으니, 이 또한 시운(時運)이 연계된 바이고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 함양(涵養)과 강학(講學)의 공을 더하여 편안히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일과 기회가 옴에 어찌 끝내 궁극(窮極)함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더욱 둔(鈍)해진 뒤가 아니고서 예리함을 알겠습니까?
희(熹)는 노쇠함이 자못 심하더니 봄사이엔 한 병으로 낭패를 격었는데 공근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장치 한 두달 다스려야 비로소 능히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결국은 예전처럼 회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 다시 사록의 휴양을 얻었지만 젊어서부터 합병증에 누가 되다보니 자못 좋은 상황이 없을 뿐입니다. 마음은 어둡고 눈도 피곤하여 책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평소 공부는 감히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간간이 예전에 들었던 한 두 가지를 연역(演繹)하니 비록 새로 터득한 것은 없으나 더욱 성현이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것과, 근래 이른바 시끄럽게 다투며 울어대는 자들이 도(道)를 어지럽히고 사람을 그르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면하고 논할 길이 없어 불안한 마음을 바람에 맡겨 봅니다. 공근(公謹)은 이미 그곳에 도착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의 취향(趣向)과 의미(意味)는 벗들 사이에서 조금 얻었으나, 단지 의서(意緖)가 파다(頗多)하고 지리(支離)하니 더욱 갈고 닦아서 조금씩 간명(簡明)하게 하여 더욱 진전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석응지에게 답함 答石應之
【해제】위의 편지와 같은 시기에 보낸 편지인 것 같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병이 더하여져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당고(黨錮)의 화(禍)로 인해 온 나라에 제멋대로 흐르는데 석응지가 그 사이에 조용히 지내며 홀로 자신의 뜻을 밝히지 못함을 안타가워하고 “부귀(富貴)는 얻기 쉽고 명절(名節)은 보존하기 어렵다”는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聞新阡尙未得卜 想今已有定 鄕見說大門上世宅兆之勝 今日求之 未易可(5-2692)得 蓋地有盡而求者無已 若欲立定等則 必求如此之地而後用之 則恐無時而已耳 熹衰病日益沈痼 數日來又加寒熱之證 愈覺不可支吾 相見無期 亦勢應爾 不足深念 猶恨黨錮之禍四海橫流 而賢者從容其間 獨末有以自明者 此則拙者他日視而不瞑之深憂也 富貴易得 名節難保 此雖淺近之言 然亦豈可忽哉 便中寓此 以代面訣
듣자하니 새 무덤자리는 아직 점칠 수 없다하니 이제 이미 정할 곳이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고을에서 대문(大門) 상세(上世)의 택조(宅兆)가 승하다는 말을 듣고 이제 그것을 구했지만 아직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대개 땅이란 지력이 다하더라도 구하는 자가 끝이 없습니다. 만약 등칙(等則)을 세워 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와 같은 땅을 구한 후에 사용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희(憙)는 병으로 쇠약해져서 날마다 더욱 침고(沈痼)해지는데, 요즘엔 또 한열이 더해질 기미가 있으니 더욱 제 자신을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로 볼 날은 기약도 없고 또 형세가 응당 그러하니 깊이 심려할 것은 없습니다.
당고(黨錮)의 화(禍)가 온 나라에 제멋대로 흐르는데 현자께서는 그 사이에 조용히 지내며 홀로 자신의 뜻을 밝히지 못함이 있으니, 이는 졸렬(拙劣)한 내가 다른 날에 눈을 감지 못할 깊은 근심입니다. “부귀(富貴)는 얻기 쉽고 명절(名節)은 보존하기 어렵다” 하니, 이는 비록 천근(淺近)한 말이지만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인편 가운데 이 글을 부쳐 얼굴을 마주하고 작별하는 것을 대신합니다.
제갈성지에게 답함 答諸葛誠之
【해제】이 편지는 순희 16년(기유; 1189, 60세) 8월 하순에 보낸 편지이다. 이 당시는 이미 주자와 육상산은 태극에 대해 다시 논변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문인들 사이에서는 계속해서 논란이 있었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동지들에게 주․륙 양가의 장점을 아울러 취하고 가벼이 서로 헐뜯지 말 것이며, 비록 서로의 견해가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성급히 논쟁하지 말고, 우선 자신의 급한 곳부터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示喩競辯之端 三復惘然 愚意比來深欲勸同志者兼取兩家之長 不可輕相詆訾 就有未合 亦且置勿論 而姑勉力於吾之所急 不謂乃以曹表之故 反有所激 如來喩之云也 不敏之故 深以自咎 然吾人所學 喫緊著力處正在天理人欲二者相去之間耳 如今所論 則彼之因激而起者 於二者之間果何處也 子靜平日所以自任 正欲身率學者一於天理 而不以一毫人欲雜於其間 恐決不至如賢者之所疑也 義理 天下之公 而人之所見有未能盡同者 正當虛心平氣 相與熟講而徐究之 以歸於是 乃是吾黨之責 而向來講論之際 見諸賢往往皆有立我自是之(5-2693)意 厲色忿訶 如對仇敵 無復長少之節․禮遜之容 蓋嘗竊笑 以爲正使眞是仇敵 亦何至此? 但觀諸賢之氣方盛 末可遽以片辭取信 因黙不言 至今常不滿也 今因來喩輒復陳之 不蕃明者以爲如何耳
다투며 논변(論辨)한 단서에 대하여 보내 주신 편지는 세 번 반복해 읽어 보고 망연자실(茫然自失)했습니다. 나의 뜻은 요즈음 깊이 동지(同志)들을 권면하여 양가(兩家)의 장점을 겸취(兼取)하여 가벼이 서로 헐뜯지 말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가령 서로 견해가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잠시 접어 두고 논쟁하지 말고, 우선 자신의 급한 곳부터 힘쓰기를 바라는데, 뜻밖에도 조립(曺立)의 묘표(墓表)로 인하여 도리어 보내온 편지에서 말한 것 같은 서로의 격돌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불민(不敏)한 연고를 깊이 스스로를 허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바 긴요하게 힘을 써야 할 곳은 바로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두 가지가 서로 판별되는 사이에 있습니다. 지금 논하는 바와 같다면 저들이 격분해 일어나는 것이 두 가지 사이에서 과연 어느 것 때문이겠습니까?
자정(子靜)이 평일에 자임(自任)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학자들을 한결같이 천리(天理)로 인솔하여 한 털끝만한 인욕도 그 사이에 섞이지 못하게 하려함이었으니, 아마 결코 그대가 의심하는 바와 같은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기(公器)이지만 사람의 소견(所見)이 다 같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기(氣)를 편안하게 하여 서로 익히 강론하고 천천히 연구하여 이에 귀숙(歸宿)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강론할 무렵에 제현(諸賢)들이 이따금 모두 내 자신이 옳다는 뜻을 세워 가지고 낯빛을 사납게 하고 말에 노기(怒氣)를 띠며 마치 원수를 대하듯 하여 다시는 어른과 젊은이의 절도와 예의, 겸손의 모습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일찍이 혼자 웃으며 참으로 원수라도 어떻게 이런 지경에 이를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제현의 기(氣)가 왕성하여 갑자기 몇 마디만 듣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묵묵히 말하지 않아 지금까지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보내 준 편지로 인하여 문득 다시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조표(曺表)] : 조립(曺立)의 묘표(墓表)이니, 대전(大全)90권에 보인다. 표(表)에 말하기를, “조립이 육자정에게 수학(修學)했으나 만족하지 못하여, 뒤에 남강(南康)에 이르러 장경부(張敬夫)의 유문(遺文)을 보고 이에 정론(定論)이 있음을 알았다” 하였다.
제갈성지에게 답함 答諸葛誠之
【해제】위의 편지에 이어서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대가들이 헤아려야할 것이고, 이것을 찾는 것은 애초에 피차의 틈이 없고 다시 세속과 같이 가리고 엄호할 수 도 없어서 애석하게도 인정(人情)은 같거나 다른 점이 있기만하면 곧 서로 꺼리고 싫어하는 틈이 생기게 된다”고 함으로써,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을 진행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
所喩子靜不至深諱者 不知所諱何事 又云銷融其隙者 不知隙從何生 愚意講論義理 只是大家商量 尋箇是處 初無彼此之間 不容更似世俗遮掩回護 愛惜人情 纔有異同 便成嫌隙也 如何如何 所云粗心害道自知明審 深所歎服 然不知此心何故粗了 恐不可不究其所自來也
보내준 편지에서 “자정이 깊이 피하는 데 까지는 이르지는 않았다.”고 하셨는데, 피한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 틈을 녹여서 융화시켰다.”고 하셨는데, 틈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다만 대가들이 헤아려야할 것이고, 이것을 찾는 것은 애초에 피차의 틈이 없고 다시 세속과 같이 가리고 엄호할 수 도 없어서 애석하게도 인정(人情)은 같거나 다른 점이 있기만하면 곧 서로 꺼리고 싫어하는 틈이 생기게 됩니다. 어떠신지요? 마음을 거칠게 하고 도를 해침을 스스로 알고 밝게 살핀다는 말씀은 매우 탄복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어째서 거친지를 모르겠습니다. 그 유래한 바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항평보(안세)에게 답함 答項平父(安世)
【해제】이 편지는 순희 9년(임인; 1182, 53세)에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마음공부를 함에 있어 경(敬)과 의(義)의 중요성에 대해 어느 것 하나라도 비거나 빠뜨려 도달하지 못한 곳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학문을 잘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 마음은 본디 성현의 본령(本領)이지만, 학문을 강하지 않고 이치를 밝히지 않는다면 인욕(人欲)을 천리(天理)로 착오하여 인식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示喩此心元是聖賢 只要於未發時常常識得 已發時常常記得 此固持守之要 但聖人指示爲學之方周遍詳密 不靠一邊 故曰敬義立而德不孤 若如今說 (5-2694)則只恃一箇敬字 更不做集義工夫 其德亦孤立而易窮矣 須是精粗本末隨處照管 不令工夫少有空闕不到之處 乃爲善學也 此心固是聖賢本領 然學未講 理未明 亦有錯認人欲作天理處 不可不察 識得記得 不知所識所記指何物而言? 若指此心 則識者記者復是何物 心有二主 自相攫拏 聖賢之敎恐無此法也 持守之要 大抵只要得此心常自整頓 惺惺了了 卽未發時不昏眛 已發時不放縱耳 愚見如此 不知子靜相報如何 因風錄示 或可以警所不逮也 伊川先生云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 此兩句與從上聖賢相傳指訣如合符契 但講學更須寬平其心 深況詳細 以究義理要歸處 乃爲有補 若只草草領略 就名數訓詁上著到 則不成次第耳
보내 준 편지에서, “이 마음은 원래 성현이니, 다만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에 항상 알도록 하고, 이미 발한 때에는 항상 기억하게 한다”고 했으니, 이는 진실로 지수(持守)의 요체입니다. 단지 성현이 학문을 하는 방도를 지시하신 것이 두루 상세하고 면밀하여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경(敬)과 의(義)가 확립되면 덕(德)이 외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지금 말한 것과 같은 것은 다만 하나의 경(敬) 자만 믿고 다시는 의(義)를 모으는 공부를 하지 않으니, 그 덕이 외로이 서서 쉽게 다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정추(精粗)와 본말(本末)을 곳에 따라 잘 살펴 공부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비거나 빠뜨려 도달하지 못한 곳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학문을 잘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본디 성현의 본령(本領)이지만, 학문을 강하지 않고 이치를 밝히지 않는다면 인욕(人欲)을 천리(天理)로 착오하여 인식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식하고 기억한다는 것은 인식하고 기억하는 바가 무슨 물건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 마음을 가리켰다면 인식하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시 무슨 물건입니까? 마음에 주(主)가 둘이면 저절로 서로 잡고 끌어당기니 성현의 가르침에 아마 이런 법은 없을 듯합니다. 지수의 요체는 대저 다만 이 마음을 항상 정돈하여 깨어있고 또렷하여 곧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에 혼매(昏昧)하지 않고, 이미 발한 때에도 방종(放縱)하지 않게 할 따름입니다. 어리석은 나의 견해는 이와 같으니 자정(子靜)과는 서로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회를 빌어 적어 보여 주시면 혹시 미치지 못하는 바에 경계가 될 것입니다.
이천(伊川) 선생이 이르기를, “함양(涵養)은 모름지기 경(敬)을 해야 하고, 진학(進學)은 치지(致知)에 있다”고 하니, 이 두 구절이 위의 성현이 서로 전수한 지결(指訣)과 마치 부절과 같이 합치됩니다. 다만 강학은 더욱 그 마음을 관대하고 평안하게 하여 깊이 침잠하고 상세하게 하여 의리의 요귀처를 궁구(窮究)해야 바로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대략 이해하고 명수(名數)와 훈고(訓詁)에 나아가 힘을 쓴다면 차례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항평보에게 답함 答項平父
【해제】이 편지는 순희 10년(계묘; 1183, 54세) 2월에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덕성을 높이는 공부에만 치중하면 지수(持守)는 볼 만한 것이 많지만 의리를 본 것이 자세하지 않고, 또 따로 일종의 그릇된 도리를 말하며 막고 덮어 기꺼이 놓으려 하지 않는 폐단이 있게됨을 경계하고 있다.
所喩曲折及陸國正語 三復爽然 所警於昏惰者爲厚矣 大抵子思以來敎人之法 惟以尊德性․道問學兩事爲用力之要 今子靜所說 專是尊德性事 而熹平日所論 却是問學上多了 所以爲彼學者多持守可觀 而看得義理全不子細 又別說一(5-2695)種杜撰道理遮蓋 不肯放下 而憙自覺雖於義理上不敢亂說 却於緊要爲己爲人上多不得力 今當反身用力 去短集長 庶幾不墮一邊耳
보내 준 곡절(曲折)과 육국정(陸國正)의 말은 세 번 반복하여 읽어 보니 상쾌하여 혼타(昏惰)한 사람에게 경계되는 바가 두터웠습니다. 대저 자사(子思) 이래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오직 덕성(德性)을 높이고 문학(問學 : 학문)으로 말미암는 두 가지 일로 힘을 쓰는 요체로 삼았습니다.
지금 자정이 말한 바는 오로지 덕성(德性)을 높이는 일인데, 내가 평일 논한 바는 도리어 문학(問學)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저 학문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지수(持守)는 볼 만한 것이 많지만 의리를 본 것이 자세하지 않고, 또 따로 일종의 그릇된 도리를 말하며 막고 덮어 기꺼이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비록 의리상에 감히 어지럽게 말하지는 않으나 도리어 긴요한 위기(爲己)와 위인(爲人)상에 득력하지 못함을 자각(自覺)하겠으니, 지금 마땅히 몸을 반성하고 힘을 써 단점을 제거하고 장점을 모으면 거의 한쪽 편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 [육국정(陸國正)] : 육자정(陸子靜)이 국자학정(國子學正)이 됨.
항평보에게 답함 答項平父
【해제】주차집보에 의하면 종경과 자정의 종적에 대해 “병오년에 자정이 래국(勑局)에서 장작감승으로 천거되어 급사중이 되었다가 왕신과 어긋나게 되어 맡은 일을 사양하고 돌아갔는데 이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편지는 순희 13년(병오; 1186, 57세 때 쓴 편지인 것 같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우학문을 하는 것은 별도의 교묘함이 없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이기는 것을 요체로 삼는데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官期遽滿 當復西歸 自此益相遠 令人作惡也 罵坐之說 何乃至是 吾人爲學別無巧妙 不過平心克己爲要耳 天民聞又領鄕邑賑貸之役 不以世俗好惡少改其度 深可敬服 朋友論議不同 不能下氣虛心以求實是 此深可憂 誠之書來言之甚詳 已略報之 可取一觀 此不復云也 聞宗聊子靜蹤跡 令人太息 然世道廢興 亦是運數 吾人正當勉其在己者以俟之耳 不必深憤歎欺 徒傷和氣 損學力 無益於事也
관직에 몸담고 있을 기한이 갑자기 다 참에 마땅히 다시 서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로부터 유익함이 서로 멀어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짓게 합니다.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욕하는 말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요? 우리가 학문을 하는 것은 별도의 교묘함이 없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이기는 것을 요체로 삼는데 불과할 뿐입니다. 천민(天民)은 들으니 또 향읍(鄕邑)의 진대(賑貸)의 역(役)을 다스리는 일은 세속의 호오(好惡)로 조금이라도 그 제도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경복할만 합니다. 벗들의 논의가 같지 않으니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마음을 비워 실제로 이것을 구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참으로 근심할만 합니다. 성지(誠之)의 편지가 옴에 매우 자세히 이야기 하고 이미 대충 답장을 보냈습니다. 가져다 한 번 보시면 되니 이것은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종경(宗卿)과 자정(子靜)의 종적을 들어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탄식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세도(世道)의 흥폐(興廢)가 또한 운수(運數)이니, 우리는 마땅히 자기에게 있는 것을 힘써서 기다릴 뿐입니다. 깊이 격분하고 한탄하여 한갓 화기(和氣)와 학력(學力)을 손상(損傷)함으로써 일에 무익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항평보에게 답함 答項平父
【해제】어느 때 쓴 편지인지 확실치 않다. 항평보가 주자에게 독서의 차제에 대해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대한 주자의 답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학자의 병통에 대해 “반구(反求)에 힘쓰는 사람은 문득 박관(博觀)을 바깥으로 달리는 것이라 여기고, 박관에 힘쓰는 사람은 또 내성(內省)을 좁다고 여겨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입장을 주장하기 때문에, 도술(道術)이 분열하여 다시 합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아울러 텅 비운 의사와 성찰(省察)의 공부가 있어야만 혈기(血氣)를 편안히 하고 분욕(忿欲)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所諭讀書次第甚善 但近世學者 務反求者 便以博觀爲外馳 務博觀者 又以內省(5-2696)爲隘狹 左右佩劍 各主一偏 而道術分裂 不可復合 此學者之大病也 若謂堯舜以來所謂兢兢業業 便只是讀書程課 竊恐有一向外馳之病也 如此用力 略無虛間意思 省察工夫 血氣何由可平 忿欲何由可弭耶 無由面論 徒增耿耿耳
독서의 차제(次第)에 대하여 말씀한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단지 근세의 학자로서 반구(反求)에 힘쓰는 사람은 문득 박관(博觀)을 바깥으로 달리는 것이라 여기고, 박관에 힘쓰는 사람은 또 내성(內省)을 좁다고 여겨 좌우에 칼을 차고 각각 한편을 주장하니, 도술(道術)이 분열하여 다시 합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학자의 큰 병통입니다. 만약, “요순(堯舜)이래로 이른바 삼가고 두려워한 것이 다만 과정(課程)대로 독서하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아마 한결같이 외면으로 달리는 병통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힘을 쓰는데도 텅 비운 의사와 성찰(省察)의 공부가 빠지고 없으면, 혈기(血氣)를 어떻게 평안하게 하며 분욕(忿欲)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대면하고 논할 길이 없어 다만 불안함만 더할 뿐입니다.
항평보에게 답함 答項平父
【해제】위의 편지에 이어서 답한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마음 공부를 함에 있어 사람의 마음은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있으므로, 이 이치를 보존하면 누구나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주자는 성현이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여러 가지 방법과 절차상의 차이가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단지 이 마음만을 지키게하지 않은 까닭은 마음과 이치(理)가 비록 본래 완전히 구비되어 있지만 부여받은 기질(氣質)의 치우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따라서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비록 공경(恭敬)과 지수(持守)를 우선으로 삼지만 그 가운데 또 반드시 사물(事物)에 나아가 고금(古今)을 상고(詳考)하고 징험(徵驗)하여 몸소 이해하고 미루어 찾아 내외(內外)가 참고하고 합치되도록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錄寄啓書 尤以愧荷 稱許之過 皆不敢當 但覺 ‘難用’ 兩字著題耳 至論爲學次第 則更儘有商量 大抵人之一心萬理具備 若能存得 便是聖賢 更有何事 然聖賢敎人 所以有許多門路節次而未嘗敎人只守此心者 蓋爲此心此理雖本完具 却爲氣質之禀不能無偏 若不講明體察 極精極密 往往隨其所偏 墮於物欲之私而不自知 (近世爲此說者 觀其言語動作 略無毫髮近似聖賢氣象 正坐此耳) 是以聖賢敎人雖以恭敬持守爲先 而於其中又必使之卽事卽物 考古驗今 體會推尋 內外參合 蓋必如此 然後見得此心之眞 此理之正 而於世間萬事․一切言語無不洞然了其白黑 大學所謂知至意誠 孟子所謂知言養氣 正謂此也
적어보내신 편지를 열어보고 더욱 부끄러움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지나치게 칭찬해 주시고 허락해 주시니 모두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난용(難用)’이라는 두 글자가 글과 제목이 잘 부합됨을 알았을 뿐입니다. 학문하는 순서를 논한데 이르러서는 다시 생각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사람의 한 마음은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있으니, 만약 이를 보존하면 문득 성현인데, 다시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허다한 문로(門路)와 절차가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단지 이 마음만을 지키게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 이 마음과 이 이(理)가 비록 본래 완전히 구비되어 있지만 도리어 부여받은 기질(氣質)이 치우침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강론하여 밝히고 몸소 살펴 지극히 정밀하게 하지 않으면 왕왕 그 치우친 것을 따라 물욕의 사사로움에 떨어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요즘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와 동작을 살펴보면 대략이나마 털끝만큼이라도 성현과 근사한 기상이 없으니 바로 여기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일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비록 공경(恭敬)과 지수(持守)를 우선으로 삼지만 그 가운데 또 반드시 사물(事物)에 나아가 고금(古今)을 상고(詳考)하고 징험(徵驗)하여 몸소 이해하고 미루어 찾아 내외(內外)가 참고하고 합치되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이 마음이 참되고 이 이가 바름을 보아 세간(世間)의 모든 일과 일체의 언어에있어 그 흑백(黑白)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대학의 이른바, “지지(知至), 의성(意誠)”과 맹자의 이른바, “지언(知言), 양기(養氣)”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5-2697)若如來喩 乃是合下只守此心 全不窮理 故此心雖似明白 然却不能應事 此固已失之矣 後來知此是病 雖欲窮理 然又不曾將聖賢細密言語向自己分上精思熟察 而便務爲涉獵書史․通曉世故之學 故於理之精微旣不能及 又幷與向來所守而矢之 所以倀倀無所依據 雖於尋常淺近之說亦不能辨 而坐爲所惑也
만약 보내 준 편지와 같다면 그것은 곧 다만 이 마음만 지키고 전혀 이(理)를 궁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비록 명백한 듯하나 도리어 사물에 대응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진실로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뒤에 이것이 병통임을 알아 비록 이(理)를 궁구하려 할지라도 또한 성현의 세밀한 언어를 가지고 자기의 몸으로 향하여 정밀하게 생각하고 익숙하게 살피지 않아 문득 서사(書史)를 섭렵(涉獵)하고 세상의 연고를 아는 학문에 밝게 통하는 것을 힘쓰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理)의 정미함에 미치지 못하고 게다가 전에 지키던 것을 아울러 잃어버리니, 길을 잃고 헤매는 듯이 의거(依據)할 바가 없어 비록 예사롭고 천근(淺近)한 말에도 분변하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의혹되어 버릴 것입니다.
夫謂不必先分儒釋者 此非實見彼此皆有所當取而不可偏廢也 乃是不曾實做自家本分功夫 故亦不能知異端詖淫邪遁之害 茫然兩無所見 而爲是依違籠罩之說以自欺而欺人耳 若使自家日前曾做得窮理功夫 此豈難曉之病耶
대저, “먼저 유석(儒釋)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실로 피차에 다 마땅히 취할 바가 있어서 어느 한쪽을 그만 두어서는 안 됨을 본 것은 아닙니다. 바로 실제 자기의 본분상에서 공부를 하지 않은 까닭으로 이단(異端)의 편벽되고 방탕하며 부정(不正)하고 도피하는[詖淫邪遁] 해를 알지 못하고 망연히 둘 다 본 바가 없어서, 이처럼 의지하고 꺼리며 감싸는 말을 하여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일 뿐입니다. 만약 자기가 이전에 궁리(窮理) 공부를 했다면, 이것이 어찌 알기 어려운 병통이겠습니까?
然今所謂心無不體之物 物無不至之心 又似只是移出向來所守之心 便就日間所接事物上比較耳 其於古今聖賢指示剖析細密精微之蘊 又未嘗入思議也 其所是非取舍 亦據己見爲定耳 又何以察夫氣禀之偏․物欲之蔽 而得其本心正理之全耶 便謂存誠愈固 養氣愈充 吾恐其察之未審而自許過高 異日忽逢一夫之說 又將爲所遷惑而不能自安也
그러나 지금 이른바, “마음에 체득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고, 물건에 이르지 못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또한 다만 전에 지키던 마음을 옮겨 문득 평소 접하는 사물에 나아가 비교하는 것 같을 따름입니다. 고금의 성현이 지시하고 부석(剖析)한 세밀하고 정미로운 이치는 일찍이 의논할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의 시비(是非)와 취사(取捨)도 자기의 소견(所見)에 근거하여 정할 뿐입니다. 게다가 어떻게 기품(氣稟)의 치우침과 물욕(物欲)의 가림을 살펴 온전한 본래 마음과 바른 이(理)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곧 “성(誠)을 보존함이 더욱 견고할수록 기(氣)를 기름이 더욱 확충된다”하니, 나는 살핌이 자세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허여함이 지나치고 높아 다른 날에 갑자기 일부(一夫)의 설을 만나면 또 장차 옮겨가 의혹되어 스스로 안주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中間得葉正則書 亦方似此依違籠罩而自處甚高 不自知其淺陋 殊可憐憫 以書告之 久不得報 恐未必能堪此苦口也 大學章句一本謾往 其言雖淺 然路脈不差 節序明審 便可行用 幸試詳之
중간에 섭정칙(葉正則)의 편지를 받아 보니 역시 바야흐로 이처럼 의지하고 꺼리며 감싸 자처(自處)함이 매우 높은데에도 스스로 천루(淺陋)함을 모르는 것 같으니 자못 가련(可憐)합니다. 편지로 알려주었으나 오래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으니, 아마 이 쓴 말을 감내(堪耐)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대학장구의 어떤 판본은 왕왕 잘못된 것도 있고 그 말이 비록 천하지만 노맥(路脈)은 차이가 나지 않으니 순서를 잘 다듬고 밝게 살피면 두루 쓸 수 있으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항평보에게 답함 答項平父
【해제】이 편지는 소희 3년(임자; 1192, 63세) 1월에 쓴 편지이다. 이해 1월 13일 육구연이 형문에 있으면서 홍범 오황극(五皇極) 1장을 강론하였는데 주로 주자의 황극변(皇極辨)을 침대(針對)함에 주자는 여러 번 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것을 비평하게 하였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이미 성현의 글을 읽었다면 반드시 막히는 곳이 없어야 비로소 성현이 입언한 취지를 이해할 수 있고, 지금과 같이 배우고 공부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진실로 공중에 걸치고 조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또, 경(敬)은 학문의 근본이고 궁리는 바로 그 일이므로, 경공부와 궁리 공부를 둘로 나누어 보아서는 안됨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에서 홍범의 황극 일장(一章)은 바로 구주(九疇)의 근본이라고 하면서 구절에 따라 자세히 말하여 마치 주소(注疏)를 단 것과 같이 한 연후라야 비로소 논한 것의 득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所論義襲 猶未離乎舊見 大抵旣爲聖賢之學 須讀聖賢之書 旣讀聖賢之書 須看得他所說本文上下意義字字融釋 無窒礙處 方是會得聖賢立言指趣 識得如今爲學功夫 固非可以懸空白撰而得之也 如孟子答公孫丑問氣一節 專以浩然之氣爲主 其曰 是集義所生者 言此氣是積累行義之功而自生於內也 其曰 非義襲而取之也 言此氣非是所行之義潛往掩襲而取之於外也 其曰 行有不慊於心則餒矣者 言心有不慊 卽是不合於義而此氣不生也 是豈可得而掩取哉 告子乃不知此 而以義爲外 則其不動心也 直彊制之而頑然不動耳 非有此氣而自然不動也 故又曰 我故曰告子未嘗知義 以其外之也 然告子之病 蓋不知心之慊處 卽是義之所安 其不慊處 卽是不合於義 故直以義爲外而不求 今人因孟子之言 却有見得此意 而識義之在內者 然又不知心之慊與不慊 亦有必待講學省察而後能察其精微者 故於學聚問辨之所得皆指爲外而以爲非義之所在 遂一切棄置而不爲 此與告子之言雖若小異 然其實則百步五十步之間耳 以此相笑 是同浴(5-2699)而譏裸裎也 由其所見之偏如此 故於義理之精微․氣質之偏蔽皆所不察 而其發之暴悍狂率 無所不至 其所慨然自任 以爲義之所在者 或末必不出於人欲之私也 來喩敬義二字功夫不同 固是如此 然敬卽學之本 而窮理乃其事 亦不可全作兩截看也 洪範 皇極 一章 乃九疇之本 不知曾子細看否 先儒訓皇極爲大中 近聞 又有說保極爲存心者 其說如何 幸推詳之 復以見告 逐句詳說 如注疏然 方見所論之得矢 大抵爲學 但能於此等節目處 看得十數條 通透縝密 卽見讀書凡例 而聖賢傳付不言之妙 皆可以漸得之言語之中矣
의논했던 ‘의가 엄습한다’는 것은 아직 구견(瞿見)을 떠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개 이미 성현의 학문을 했다면 반드시 성현의 글을 읽었을 것입니다. 이미 성현의 글을 읽었다면 반드시 그가 말한 본문 위 아래의 의의와 글자 글자가 융석(融釋)됨을 보았을 것이니, 막히는 곳이 없어야 비로소 성현이 입언한 취지를 이해할 수 있고, 지금과 같이 배우고 공부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진실로 공중에 걸치고 조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맹자께서 공손추가 기(氣)를 물은 것에 답하신 한 구절은 오로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위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것은 의리(義)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고 했는데, 이 말은 호연지기는 의로운 행위의 공을 쌓음에 안에서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또 “의가 엄습해서 취해지는 것은 아니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이 기는 행하는 의가 몰래 가고 엄습해서 밖에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행하고서 마음에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으면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굶주리게 된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마음에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곧 의에 합하지 않아 이 기가 생겨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엄습해서 취해질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고자는 결국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의를 밖으로 여겼으니 그의 부동은 억지로 제어해서 완고하게 동(動)하지 않은 것일 뿐이지, 이 기가 있어서 자연히 동(動)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또 “내 그러므로 ‘고자(告子)가 일찍이 의(義)를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이니 이는 의(義)를 밖이라고 하기 때문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자(告子)의 병은 대개 마음이 쾌(快)한 곳은 곧 의(義)가 편안한 곳이고, 쾌하지 못한 곳은 곧 의에 합하지 못한 곳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곧바로 의를 밖이라 하며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맹자의 말로 인하여 도리어 이 뜻을 보고 의가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또 마음이 쾌하고 쾌하지 않음은 또한 반드시 강학(講學)과 성찰(省察)을 기다린 뒤에 그 정미(精微)함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을 모르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모으며 묻고 분변하여 얻은 것을 모두 가리켜 밖이라 하여 의(義)의 소재가 아니고 여기고는 마침내 모든 것을 버려두고 하지 않으니, 이는 고자(告子)의 말과 비록 조금 다르나 그 실제는 오십보 백보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서로 비웃는 것은 함께 목욕하면서 벌거숭이임을 기롱(譏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소견(所見)이 이처럼 치우침으로 말미암아 의리의 정미와 기질(氣質)의 편폐(偏蔽)에 모두 살피지 못함이 있고 발하는 것이 사납고 경솔하여 이르지 못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가 개연(慨然)히 자임(自任)하여 의의 소재라고 여기는 것이 혹 반드시 인욕(人欲)이 사사로움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보내 준 편지에서 경의(敬義) 두 글자의 공부가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경(敬)은 학문의 근본이고 궁리는 바로 그 일이니, 또한 완전히 둘로 잘라 볼 수는 없습니다.홍범의 황극 일장(一章)은 바로 구주(九疇)의 근본으로서 증자가 자세히 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선유들은 ‘황극’을 해석해서 ‘대중(大中)’이라고 했는데, 요사이 들어보니 또 ‘보극(保極)’을 말하면서 존심(存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 설이 어떠한지요? 미루어 자세히 살피시고 다시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구절에 따라 자세히 말하여 마치 주소(注疏)를 단 것과 같이 한 연후라야 비로소 논한 것의 득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다만 능히 이러한 등의 절목처에서 십 수개의 조목을 통열하고 투철하며 치밀하게 보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 바로 독서의 범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허게 되면 성현이 전해주면서 말하지 않은 오묘한 것들은 모두 언어 가운데에서 잠차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答項平父 항평보에게 답함
【해제】어느 때 쓰여진 편지인지 자세하진 않으나 내용에서 호연지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위의 편지에 이어서 쓴 편지인 것 같다. 주자는 이 편지에서 평보고 스스로 자기의 제주를 믿고 성현의 글에 깊이 침잠하여 세밀하게 살펴 반복하여 완미(玩味)하지 못하고, 다만 대략 보고 지나치면서도 이치를 깨달은 것으로 여기므로 남에게 의혹되어 헛되이 세월만 보내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호연지기에 대해서도 의(義)를 많이 축적함에 저절로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의(義)를 행함에 밖에서 갑자기 엄습하여 취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所喩已悉 以平父之明敏 於此自不應有疑 所以未免紛紜 却是明敏太過 不能深潛密察 反復玩味 只略見一線路可通 便謂理只如此 所以爲人所惑 虛度光陰也 孟子之意 須從上文看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此上三句本是說氣 下兩句是字與非字爲對 (5-2700)襲字與生字爲對 其意蓋曰 此氣乃集義而自生於中 非行義而襲取之於外 云爾 非謂義不是外襲也 今人讀書不子細 將聖賢言語都錯看了 又復將此草本立一切法 橫說竪說 誑罅衆生 恐其罪不止如范寧之議王弼而已也
보내 준 편지는 모두 보았습니다. 평보(平父)의 명민(明敏)함으로 여기에 응당 스스로 의심이 없어야 할 것이나 어지러움을 면하지 못하는 까닭은 도리어 명민이 너무 지나쳐 깊이 침잠하여 세밀하게 살펴 반복하여 완미(玩味)하지 못하고, 다만 대략 보고 한 선로(線路)가 통할만 하면 문득, ‘이치는 다만 이와 같다’고 하게 되므로 남에게 의혹되어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 것입니다. 맹자의 뜻은 반드시 위 문장부터 보아야 합니다. “그 기(氣)됨이 의(義)와 도(道)에 배합되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이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의리(義理)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의(義)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엄습하여 취해지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위의 세 구절은 본래 기(氣)를 말한 것이고 아래의 두 구절의 ‘시(是)’자는 ‘비(非)’자와 서로 대가 되고, ‘습(襲)’자는 ‘생(生)’자와 서로 대가 되니 그 뜻은 대개 “이 기는 바로 의(義)를 많이 축적함에 저절로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의(義)를 행함에 밖에서 갑자기 엄습하여 취해지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일 뿐이지, 의가 밖에서 엄습한 것이 아님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람들은 자세하게 독서하지 않아 성현의 언어를 모두 잘못 보고, 게다가 다시 이 초본(初本)을 가지고 일체법(一切法)을 세워 횡설수설(橫說竪說)하며 중생(衆生)을 속이니, 그 죄는 범영(范甯)이 왕필(王弼)을 의논한 것과 같은 데에 지날 뿐만이 아닙니다. ― [호(謼)] : 황(荒)과 고(故) 반절이니, 부른다는 뜻이다. 곧 맹자의 ‘혀를 차고 꾸짖다[嘑爾]’는 호(嘑)와 같다.
答項平父 항평보에게 답함
【해제】이 편지는 경원 원년(을묘; 1195, 66세)에 쓰여진 편지이다. 여러 날 동안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일생동안 공부한 것을 헤아리고 추측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하나도 빠짐 없이 알게된 것이 다행이라는 것을 말하고, 또 학자가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여 공부하면 스스로 덕으로 들어가는 문호를 보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熹一病四五十日 危死者數矣 今幸粗有生意 然不能飮食 其勢亦難扶理 杜門屛息 聽天所命 餘無可言者 所幸一生辛苦讀書 微細揣摩 零碎括剔 及此暮年 略見從上聖賢所以垂世立敎之意 枝枝相對 葉葉相當 無一字無下落處 若學者能虛心遜志 游泳其間 自不患不見入德門尸 但相見無期 不得面講 使平父尙不熊無疑於當世諸儒之論 此爲恨恨耳
희(熹)는 한 때 45십일 동안 병이 들어 위태로워 죽을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지금 다행히 대략 생기가 있으나 마시거나 먹지도 못하니, 그 형세는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문을 닫고 숨을 죽이고 하늘이 명하는 바를 듣고, 나머지는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일생동안 고생하며 글을 읽어 미세하게 추측하고 자잘하게 도려내어 이 모년(暮年)에 미쳐서도 대략 이전에 성현이 세상에 교화를 세운 뜻이 가지마다 상대(相對)하고 잎마다 상당(相當)하여 한 글자도 떨어짐이 없음을 안 것입니다. 만약 학자가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여 그 사이에 유영(遊泳)한다면 스스로 덕으로 들어가는 문호(門戶)를 보지 못할 것을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서로 만날 기약이 없어 대면하고 강론하여 평보로 하여금 당세(當世) 제유(諸儒)의 논(論)에 의심이 없도록 하지 못하니, 이것이 슬플 따름입니다. ― [괄(括)] : 마땅히 괄(刮)로 써야 한다. [낭(悢)] : 음은 량(諒)이니, 슬프다는 뜻이다. 또 돌아보다는 뜻이다.
진억지(겸)에게 답함 答陳抑之(謙)
【해제】어느 때 쓰여진 편지인지 확실하지 않다. 진억지에 대해서 이름만 듣고 만나본 적은 없었는데, 먼저 편지를 보내 옴에 답한 것이다. 진억지가 보낸 편지에서 의(義)에 대해 논하였는데, 이에 대해 답한 편지인 것 같다. 이 편지에서는 명달(明達)하고 빼어난 선비를 얻어 서로 강론하여 이단의 허물을 억누르고 스스로 미치지 못하는 점에 대해 힘쓴다면 유학의 미래가 밝아지고 유도(儒道)가 세상에 행해질 것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熹從士友間 得足下之名而願交焉 爲日久矣 衰病屛伏 無從際會 每以爲恨 而聽於往來之言 亦知足下之不鄙我 而將有以辱况之也 年歲以來 私家多故 不獲以聲問先自通於隸人 玆承枉書 感愧亡量 顧陳義高遠 雖古之賢人君子 懼不足以堪足下之意 而熹之愚 何敢當之以自取戾耶 然曩亦嘗有聞於先生長者矣 勤勞半世 汨沒於章句訓詁之間 黽勉於規矩繩約之內 卒無高奇深眇之見可以驚世而駭俗者 獨幸年來於聖賢遺訓粗若見其坦易明白之不妄而必可行者 私竊以爲儻得當世明達秀穎之士 相與講之 抑彼之過 彊此之不及 吾道庶其明且行乎 三復來書 果若有意於此 幸甚幸甚 伏窮山 未知見日 繼此書疏之往來 猶足以見區區也 餘惟藏器勉學 慰此遐想
희(熹)는 사우(師友)들을 따라 족하(足下)의 이름을 듣고 교류하기를 원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쇠약하고 병이 들어 물러나 엎드리고 있어서 만날 기회가 없음을 늘 한스러워 했는데, 오가는 말을 들으니 족하께서 나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심에 장차 편지를 보낼 것을 알았습니다. 몇 해 이래로 사가(私家)에 연고가 많아 성문(聲問)으로 먼저 예인(隸人)에게 통하지 못했더니, 이에 보내 주신 편지를 받으니 감사와 부끄러움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살펴보건대, 의(義)를 말씀한 것이 고원(高遠)하니 비록 옛날의 현인과 군자라도 족히 족하의 뜻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희(熹)의 어리석음으로 어찌 감당하여 스스로 허물을 취하겠습니까? 그러나 전에 선생 장자(先生長子)에게 들은 것이 있습니다. 반세(半世)동안 부지런히 힘써 장구(章句)와 훈고(訓詁)의 사이에서 골몰(汨沒)하고, 규구(規矩)와 승약(繩約)의 안에서 힘쓰고 근면하여 마침내 고기(高奇)하고 심묘(深眇)한 식견으로 세속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홀로 연래에 성현의 유훈(遺訓)에 조금이나마 평탄하고 명백하여 망녕되지 않아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혹시라도 당세의 명달(明達)하고 빼어난 선비를 얻어 서로 강론하여 저들의 허물을 억누르고 우리가 미치지 못함을 힘쓴다면 우리의 도(吾道:유학)가 거의 밝아지고 행해질 것입니다. 보내 온 편지를 세 번 반복해서 읽어 보니 과연 여기에 뜻이 있는 것 같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궁벽한 산에 엎드려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으니, 계속해서 이러한 서소(書疏)가 오가면 오히려 족히 구구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기구(器具)를 감추고 학문에 힘써 멀리서 이처럼 생각하는 마음을 위로해 주기 바랍니다.
유수옹에게 답함 答兪壽翁
【해제】유수옹과 태극에 대해 논의를 주고 받은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태극에 대한 견해가 유수옹과 같지 않지만, 당시에 다른 학파에서 극을 중(中)이라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유수옹은 그렇지 않음을 인정해 주고, 공부함에 있어 억지로 부화뇌동함을 버리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고 가까운 데 나아가 착실하게 공을 들인다면, 오래 동안 쌓여 사리에 관통하는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太極之書 度所見不同 論未易合 故久不報 又思理之所在 終不可以不辨 近方以書復之 其說甚詳 未知彼復以爲如何也 極不訓中 此義甚的 然自先儒失之久矣 未必今人之失也 德功渾象之說 誠如所喩 此公好學而病多 蓋不專在言語文字之間也 來喩有志未勉 有見未徹 此見賢者自知之明 見子靜曾扣之否 愚意則以爲且當捐去浮華 還就自己分上切近著實處用功 庶幾自有欲罷不能․積累貫通之效 若未得下手處 恐未免於臆度虛談之弊也
태극에 대한 편지에서 소견이 같지 않은 것을 헤아려 보니 의론이 쉽게 합하지는 않기에 오래동안 답장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또 사리의 소재는 끝내 구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근일에야 비로소 편지를 반복해 읽어 봅니다. 그 말씀이 매우 자세하긴 하지만 그 반복을 어떠하다고 여기시는지를 아직 모르겠습니다. 극(極)을 중(中)이라 해석하지 않았는데, 이 의(義)는 매우 적확합니다. 그러나 선유들로부터 그것을 잘못한지 오래 되었으니 구지 지금 사람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덕공(德功)의 혼상(渾象)의 설은 진실로 가르쳐 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 공이 학문을 좋아하시면서도 병이 많은 것은 대개 오로지 언어나 문자의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내 온 편지에, “뜻은 있으나 힘쓰지 않고, 본 것은 있으나 투철하지 못하다” 하니, 여기에서 현자(賢者)가 자신을 아는 것이 분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자정(子靜)을 만나 여쭈어 보았습니까? 내 생각은 우선 마땅히 부화(浮華)함을 덜어 버리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고 가까운 데 나아가 착실하게 공을 들인다면, 거의 그만 두려해도 그럴 수 없어서 누적하여 관통하는 공효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만약 아직 손을 댈 곳을 얻지 못했다면 아마 억지로 헤아리고 헛된 말을 하는 폐단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答應仁仲 응인중에게 답함
【해제】다음 편지가 무신(1188)년에 쓰인 편지이 것을 보면 이 편지 역시 무신 년간에 쓰여진 편지인 것 같다. 이 편지에서는 글을 쓴다는 것이 어렵고 또한 편지글만으로는 성현의 마음을 철저하게 볼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大學․中庸屢改 終未能到得無可改處 大學近方稍似少病 道理最是講論時說得透 纔涉紙墨 便覺不能及其一二 縱說得出 亦無精彩 以此見聖賢心事 今只於紙上看 如何見得到底? 每一念此 未嘗不撫卷慨然也
대학, 중용은 여러 차례 고쳤으나 마침내 고칠 만한 것이 없는 곳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대학은 근래야 비로소 조금 병통이 적어진 듯합니다.
도리(道理)는 강론할 때에 말이 가장 통투(通透)했다가 종이와 먹으로 적기만 하면 문득 하나, 둘도 미치지 못하고, 멋대로 말이 나와 정채(精彩)가 없음을 알겠습니다. 이로써 성현의 심사를 보건대, 지금 다만 지상(紙上)에서 보아 어떻게 철저하게 볼 수 있겠습니까? 매양 이를 한 번 생각하면 책을 어루만지며 슬픈 마음이 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答應仁仲 응인중에게 답함
【해제】이 편지는 순희 15년(무신; 1188, 59세)에 쓰여진 편지이다. 이해 8월 주자는 발에 병이 남에 직보문각에 제수되어 서경의 숭복궁을 주관하던 것을 사면해 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이 편지는 이 때를 즈음해서 쓰여진 편지인 것 같다.
自幾道來 聞欲相訪 日佇來音 比歸不至 深以惘然 後得呂子約書 乃知已嘗經婺女 竟爾相失 尤以爲恨 歸來乃領向來(三月)所惠書 雖已遠 猶足慰意也 比日秋泠 遠惟德履佳勝
熹一出狼狽不可言 幾道必已詳言之矣 歸來已決杜門之計 讀書益有味 但祠請專人愆期未返 未知此事定復何如 度亦不出三五日 當見果決也 甚久欲一見賢者 今旣不遂 因書有以見告者 切幸不外 啓蒙․小學二書偶未有本 後便續寄去 中庸等書未敢刻 方此追究未定 甚以爲撓也 因便布此 未能盡所欲言 正遠 珍重
기도(幾道)로부터 와서 서로 찾아 뵙기를 원한다 하기에 날마다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함께 돌아갔지만 이르지 못함에 깊히 망연자실 했었습니다. 후에 여자약의 편지를 받고서야 이미 일찍이 무녀를 지남에 이미 서로 만나볼수 없음을 알게 되었으니 더욱 한스럽습니다. 돌아와서야 이에 지난번(3월) 보내주신 편지를 받았는데 비록 이미 멀어졌지만 그래도 충분히 뜻을 위로할만 합니다. 요사이 가을이라 쌀살하지만 먼 곳에서도 오직 덕을 실천함이 한층 가상합니다. 저는 한 번 말할 수 없는 낭패를 격었는데 기도가 반드시 이미 그것을 자세히 말했을 것입니다. 돌아 옴에 이미 두문불출할 계획을 결정 짓고 나니 글을 익는 것이 더욱 맛이 있습니다. 다만 사면해줄 것을 청하였지만 사람들을 제 멋대로 부려 기한을 어기고 돌아오지 못하게할 뿐이니 이 일이 어떻게 정해지고 회복될지 모르겠습니다. 헤아려 보니 또한 3~5일을 지나지않아서 마땅히 결과를 보게될 것입니다. 매우 오래 동안 한변이라도 현자를 보기를 원했었는데 이제 이미 이룰 수 없고 글로 인해 알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몽과 소학 두 책은 둘 다 판본이 없으므로 후에 곧 이어서 붙여 보냈겠습니다. 중용 등의 책은 아직 감히 판각을 하지 못했으므로 바야흐로 이것을 추구 했지만 아직 정하지 못해 매우 편칠 안습니다. 편지로 이것을 말씀 드리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습니다. 부디 진중하시길 바랍니다.
答應仁仲 응인중에게 답함
【해제】이 편지는 순희 15년(무신; 1188, 59세)에 쓰여진 편지이다. 무신년에 주자의 딸이 조씨와 정혼을 하고 납폐를 한 후 죽었는데, “조씨의 빙폐를 보관할 만한 장소가 없어 돌려 보낸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때 쓰여진 편지인 것 같다. 또 절보에서는 주자가 순히 14년(정미; 1187) 칠월에 강서제형에 제수되었다가 무신년 정월에 주사의 소임을 위촉 받고 3월에 부름에 달려갔으므로, 이 편지는 아마도 정미년 말이나 혹은 무신년 초에 쓴 것 같다고 하였다.
熹衰病之餘 災患復不可堪 超氏聘幣 無置之之所 故遣歸之 今旣不受 未有以處 欲如來喩納之於壙 則今已葬 且此間之葬例薄 然亦時有意外之患 欲置少田以給墓戶 則亦不必如此之多 欲以施諸鄕人之爲橋道者 則似於義亦無所當 反復思之 唯有別以他女再結姻好之爲善 而家間諸女及孫雖多 而年歲無相當者 其最長者才十有二耳 似此再三籌度 皆未有計 不知賢者何以敎之 使於義稍安而無所疑也 聞幾道太夫人至爲悲慟變食 此意尤不敢忘耳 熹出處之計未知所定 亦復類此 浙中士友亦頗有知其曲折者 要是杜門藏拙爲上計耳
저는 노쇠하고 병든 나머지 재환(災患)을 다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조씨의 빙폐는 보관할 만한 장소가 없어 돌려 보냅니다. 이제 이미 받지도 않았으니 처리할 것도 없습니다. 가르쳐 주신 것처럼 널 속에다 넣으려고 한다면 지금은 이미 장례를 치렀을 것입니다. 또 이 곳의 장례의 형식이 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때로는 뜻밖의 근심이 있습니다. 작은 밭을 설치해서 묘호(墓戶)에 공급하고자 한다면 또한 구지 이같이 많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향인들이 다리나 길을 만드는데 베풀고자 하는 것이라면 의(義)에 또한 마땅한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반복해서 생각하시어 오직 다른 여자가 재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선(善)으로 여기는 것과는 구별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안에 여성과 자손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나이가 상당한 사람이 없으니 가장 연장자는 겨우 열에 둘일 뿐입니다. 이같은 것은 재삼 헤아려 보아도 모두 계획이 없으니, 모르겠습니다만 현자가 무엇을 가지고 가르쳐야 사람들로 하여금 의(義)에 조금씩 편안해 져서 의심할 것이 없겠는지요. 듣자하니 기도의 태부인께서 지극히 비통해 하시어 잡수시는 것 조차 변하셨다하니 이 뜻을 더욱 감히 잊을 수 없을 뿐입니다. 저의 출처의 계획은 아직 정할 바를 모르겠으니 또한 다시 이와 같습니다. 절(浙) 중의 사우들 역시 자못 그 곡절을 아는 자가 있으니 요컨대 문을 걸어닫고 졸(拙)함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을 최고의 계획으로 삼고자 할 따름입니다.
응인중에게 답함 答應仁仲
【해제】주자는 소희 원년(경술; 1190, 61세)12월 예기해를 편찬하여 임장(臨漳)에서 간행하였는데, 이 편지는 이 때를 즈음해서 쓰여진 것 같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빙례․근례에 대한 해설을 마쳤다고 적고 있으며, 또한 의례에 대해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경(經)은 장구를 나누지 않고, 기(記)는 경을 따르지 않아 주소(注疏)가 각각 하나의 책이 되었기 때문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번에 깨달을 수 없게 할 뿐”이라고 말하고 이와 같은 폐단을 다 제거하다고 밝히고 있다.
久不聞問 小兒歸被告 乃知向來體中嘗不佳 證亦不輕 又喜只今已漸平復 竊計比日起居益快健 氣體愈淸實也 但累年命駕之約 未知能復踐言否 熹亦益衰 精神筋力皆已非復昔時 勢亦不能遠適 何由一承晤語 以遂心期 念之令人恨恨 不能爲懷也
禮書方了得聘禮已前 已送致道 令與四明一二朋友抄節疏義附入 計必轉呈 有未安者 幸早見敎 尙及改也 覲禮以後 黃婿携去廬陵 與江右一二朋友成之 尙未送來 計亦就草稿矣 前賢常患儀禮難讀 以今觀之 只是經不分章 記不隨經 而注疏各爲一書 故使讀者不能遽曉 今定此本 盡去此諸弊 恨不得令韓文公見之也
易本義不謂遂達几下 舊讀此書 每於先儒之說有所不快 因以妄意管窺一二 亦不自意推尋至此 尙恨古書放失 聞見單淺 今又衰惰 不能卒業 不知明者何以敎之 更望詳賜誨諭 毋使有待於後世之子雲也 正遠 切祈以道自重 益緩壽祉 千萬至望
오래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작은 아이가 돌아옴에 소식을 듣고 이에 전부터 몸상태가 일찍이 좋지 못하고 증세 또한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데, 또 단지 지금은 이미 점차 평소처럼 회복되고 있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니 요사이 기거함에 더욱 병세가 좋아지고 건강하며 기체(氣體)도 더욱 맑고 튼실해 지셨으리라 생각 됩니다. 다만 몇 해 동안 수래에 멍애를 준비시키겠다던 약속은 능히 다시 말을 실천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더욱 쇠약해져서 정신이나 근력이 이미 옛날고 같지 않고 힘 또한 멀리 갈 수도 없습니다. 어찌 해야 한 번 마주 대하여 터놓고 얘기할 구 있는 기회를 얻어 마음의 기약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사람으로하여금 한스럽게 하니 마음에 둘 수도 없습니다.
예서(禮書)는 비로소 빙례(聘禮) 이전에 이해를 하였으므로 이미 치도에게 보내 사명과 한 두 친구들로 하여금 소의(疏義)를 초절(抄節)하여 붙여 넣고 반드시 두루 베포할 것을 계획하게 하였습니다. 합당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이니 일찍 가르침을 받아 그래도 고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근례(覲禮) 이후는 황서(黃婿)가 여릉(廬陵)과 강우(江右) 등 한 두 친구들을 이끌어 완성시켰습니다. 지난 번에 붙여 옴에 역시 초고(草稿)를 이룰 것을 계획했습니다. 이전의 현인들은 항상 의례(儀禮)가 읽기 어렵다고 근심하였는데, 이제 그것을 보니 다만 경(經)은 장구를 나누지 않고, 기(記)는 경을 따르지 않아 주소(注疏)가 각각 하나의 책이 되었기 때문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번에 깨달을 수 없게 할 뿐입니다. 이제 이 본을 정하여 이 여러 가지 폐단을 다 제거하였는데, 한문공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할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역본의에서는 그 자리에서 세상의 이치를 이루고 통달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이 책을 읽음에 항상 선유들의 설에 불쾌함이 있어 그로 인해 망녕된 뜻으로 한 두 개를 대충 보니 역시 자신의 뜻으로 추심하여 여기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고서가 방실(放失)되고 견문이 천하기만 할 뿐임을 한하였습니다. 이제 또 쇠약해져서 게을러지고 업도 마칠 수도 없으니 밝은 모르겠습니다만 밝은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가르치시는지요? 다시 자세히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라니 후세의 자운(子雲)을 기다림이 있게하지 마십시오. 부디 도로써 자중하시고 더욱 수복을 늘이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부디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응인중에게 답함 答應仁仲
【해제】어느 때 쓴 편지인지 자세하지 않다. 서로 간의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久不聞問 辱書爲慰 信後淸和 恭惟求志從容 尊履多福 如聞亦苦目疾 莫不至甚妨事否 憙則左目全盲 右亦漸不見物矣 來日幾何 學不加益而罪戾日聞 未知明者何以警策之也 惠許來訪 固所幸願 顧見屬之意有所不敢承耳 何時披晤 訟此堙鬱 更祈珍衛 副此眞禱
오래 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욕되게도 편지를 보내주시니 위로가 됩니다. 서신을 받고난 후 마음이 맑고 온화해지니 삼가 뜻이 조용해지고 가는 곳마다 다복하기를 구할 뿐입니다. 들은 대로라면 또한 눈병으로 고생 하고 있다하니 매우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지요? 저는 왼쪽눈은 완전히 멀었고 오른쪽 역시 점차 사물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거의 어떨지 학문은 더 보테지지도 않는데 허물과 어그러짐만이 날로 소문이 나니 그대는 어떻게 경책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롭게도 방문해 주신다면 진실로 바라는 바입니다. 귀속되려는 뜻을 돌아보니 감히 계승할 수 없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어느 때나 밝게 열려져 이 답답함을 하소연하겠습니까? 다시한번 몸을 잘 보중하시어 이 진실한 기도에 도움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응인중에게 답함 答應仁仲
【해제】이 편지는 소희 5년(갑인; 1194, 65세)에 쓰여진 편지이다. 주자는 이해 윤 10월에 시강의 직분에서 파면당하고 궁관에 제수 되었다가, 11월에 집으로 돌아갔다. 주자는 이 편지에서 응인중의 편지 가운데 춘추를 편집한 의의를 언급하였는데, 예기역시 춘추를 편집한 예와 같이 하고자 함을 말하고 있다.
憙勸講亡狀 竟煩罷斥 杜門念咎 畢此餘生 爲幸甚矣 比來衰悴 愈覺支離 加以耳重目盲 殊費醫治 良以爲撓 然亦老態之常 不足怪也 因便草草 (向見朋友編春秋例 鄙意亦欲如此 正如來喩所云也)
憙目盲 不能親書 所喩編禮如此固佳 然却太移動本文 恐亦未便耳 老病益侵 而友朋相望 皆在千百里外 恐此事不能成 爲終身之恨矣 向在長沙․臨安 皆嘗有意 欲籍官司之力爲之 亦末及開口而罷 天於此學如此其厄之 何邪 可歎可歎
저는 시강의 직분을 맡고 있으면서 제 자신도 잊고 있었는데 결국은 파면당하고 내쳐짐에 괴로워하게 되었습니다. 문을 닫아 걸고 허물을 생각해보니 여기에서 여생을 마칠 수 있다면 매우 다행일 것 같습니다. 요사인 쇠약하고 초췌해져서 더욱 지리함을 느끼고, 게다가 귀가 멀고 눈이 어두워져 자못 의원의 치료만 허비하니 참으로 마음이 불안한 생각만 듭니다. 하지만 또한 떳떳하게 늙은 모습이니 족히 부끄러울 것은 없습니다. 편지인지라 대강 줄이겠습니다. (지난번에 벗이 편찬한 춘추의 예를 보니 제 생각 역시 이와 같고자 하니, 바로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것과 같습니다.)
저는 눈이 어두워 친히 편지를 쓰수도 없습니다. 가르쳐주신 편례(編禮)는 이처럼 진실로 훌륭하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본문을 이동시켰으므로 또한 편하지 않은 것 같을 뿐입니다. 늙은이의 병은 더욱 더해가는데 벗과 서로 바라봄에 모두 천백리 밖에나 있으니 아무래도 이 일은 이루지 못해 종신의 한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 번에 장사와 임안에 있을 때 모두 일찍이 뜻이 있어 관사(官司)의 힘을 빌어 그것을 하려고 했었는데 또한 입을 여는데 미치지도 못해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이 학문에 이처럼 재앙을 내리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너무도 탄식스럽습니다.
주숙근에게 답함(섭공근이 성자를 바꿨다) 答周叔謹(葉公謹改姓字)
【해제】어느 때 쓴 편지인지 자세하지 않다. 이 편지에서는 여동래(呂東萊)와 육상산(陸象山)의 문인이 서로 배척하는 이유가 각각 치우친 소견만을 주창하고 마음을 공평하게 하여 천하의 이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남의 뜻을 만족스럽게 여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주자는 이 편지에서 학자들에게 맹자의, “성품이 선(善)함을 말했다”와 “방심(放心)을 구한다”는 두 장을 읽게하고 착실하게 체찰(體察)하여 수습(收拾)하는 것을 요체로 삼도록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應之甚恨未得相見 其爲學規模次第如何 近來呂․陸門人互相排斥 此由各狥所見之偏 而不能公天下之心以觀天下之理 甚覺不滿人意 應之蓋嘗學於兩家 不知其於此看得果如何 因話和之 因書喩及爲幸也 熹近日亦覺向來說話有太支離處 反身以求 正坐自己用功亦未切耳 因此減去文字功夫 覺得閑中氣象甚適 每勸學者亦且看孟子道性善․求放心兩章 著實體察收拾爲要 其餘文字且大槪諷誦涵養 未須大段著力考索也
응지는 서로 만나보지 못함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 하는데 그의 학문하는 규모와 차제가 어떠한지요?
근래 여동래(呂東萊)와 육상산(陸象山)의 문인이 서로 배척하니, 이는 각각 치우친 소견을 주창하고 천하의 마음을 공평하게 하여 천하의 이치를 보지 못함을 말미암은 것이니 남의 뜻을 만족스럽게 여지지 않음을 매우 느낍니다. 응지(應之)는 아마 양가(兩家)에서 배웠으니, 그가 이런 점에 대하여 과연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건내어 보고 편지로 알려 주기 바랍니다.
저는 요즈음 전날의 말이 너무 지리한 곳이 있음을 느낍니다. 몸에 돌이켜 구하니 바로 자기가 공을 들이는 것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이로 인하여 문자의 공부를 줄이니 한가한 가운데 기상이 매우 적절함을 느낍니다. 매번 학자들에게 권하는 것도 또한 맹자의, “성품이 선(善)함을 말했다”와 “방심(放心)을 구한다”는 두 장을 읽게하는 것이고 착실하게 체찰(體察)하여 수습(收拾)하는 것을 요체로 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 문자는 대개 외고 함양하는 것이니 반드시 대단히 힘을 들여 상고하고 완색(玩索)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숙근에게 답함 答周叔謹
【해제】문자를 보는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자는 이 편지에서 문자는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보아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지, 고생스럽게 찾고 이리 저리 어지럽게 해서 의리의 정맥(正脈)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叔謹想且留彼 應之相聚 所講何事 文字且虛心平看 自有意味 勿苦尋支蔓 旁生孔穴 以汨亂義理之正脈 中庸謹思之戒 蓋爲此也 子約書來 說得大段支離 要是義理太多 信口信筆縱橫去得 說得轉闊 病痛轉深也 如所論功體二字太露之類 亦是此樣 所云須如顔子 方無一毫之非禮 此說却是 但未知其意向在甚處 若云人須以顔子自期 不可便謂已至則可 若謂顔子方能至此 常人不可學他 卽大不可 想渠必不至此誤 但亦只是每事須著一句纏繞 令不直裁耳 公謹來書依舊說得太多 更宜省約爲佳也 祝汀州已成見次 不知赴官能入山否 朝廷方遣使命 行經界 議鹽法 此亦振民革弊之秋 但恐不免少勞心力耳 彦章書來 云欲見訪 却不見到 不知何故 所論二人外內之偏信然 此等處只是容易窄狹 自主張太早了 便生出無限病痛耳 彼旣相信不及 勢亦無如之何 莫若且就己分上著力之爲急也
숙근(叔謹)은 저기에 머무르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응지(應之)와 서로 모여 무슨 일을 강론했습니까? 문자는 우선 마음을 비우고 평안하게 보면 저절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고생스럽게 찾고 지만(支蔓)하여 곁으로 구멍을 내어 의리의 정맥(正脈)을 어지럽히지 마십시오. 중용의, ‘삼가 생각한다[謹思]’는 경계는 대개 이를 위한 것입니다.
자약이 보내온 편지는 말이 대단히 지리합니다. 요컨대 의리가 지나치게 많고 신구신필(信口信筆)이 멋대로 난무하여 말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병통은 더욱 깊어집니다. 예를 들면 논의했던 공체(功體) 두글자와, 지나치게 드러냈다는 유가 또한 이런 모양입니다. 말하는 것이 반드시 안자와 같아야 비로서 한 털끝만금의 비례(非禮)가 없을 것이니 이 설이 그래도 옳은 것입니다. 다만 그의 의향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만약 “사람들은 반드시 안자로서 스스로를 기약해야 해야하니 곧 이미 이르렀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옳습니다. 그러나 만약 “안자라야 여기에 이를 수 있고 평범한 사람들은 그를 배울 수 없다.”고 한다면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이러한 잘못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다만 매사에 반드시 한 글귀에 얽혀 곧게 마름질하지 못하게 할뿐입니다.
공근(公謹)이 보내 온 편지는 여전히 말이 너무 많으니 더욱 줄여 간약(簡約)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축정주가 이미 이루어짐에 차서를 보았지만 벼슬에 나아가 산에 들어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조정에서는 비로소 사명을 보내 경계(經界)를 행하고 염법을 의론하니 이 또한 백성을 진작시키고 폐단을 혁신한 결과이니 다만 심력을 조금 수고롭게 함을 면치 못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언장(彦章)은 편지를 보내와 보고 방문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도리어 오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내외(內外)로 치우쳤다고 논한 바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곳은 다만 쉽게 좁아져 스스로의 주장이 너무 일러 곧 한없는 병통을 낳을 따름입니다. 저들은 이미 서로를 믿음이 미치지 못하고 형세도 또한 어쩔 수 없으니 우선 자기의 분수에 나아가 급히 힘을 들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주숙근에게 답함 答周叔謹
【해제】예기해를 편찬하던 당시의 편지인 것 같다. 이 편지에서는 상복의 제도 중에서 질(絰)과 대(帶)에 대해 논하고 있다. 질에는 머리에 띠는 수질(首絰)과 허리에 두르는 요질(要絰)이 있는데 이것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요질 아래에는 또 띠가 있는데 참최복에 두르는 교대(絞帶)와 자최(薺衰)복에 두르는 포대(布帶)가 그것인데, 이 편지에서는 질과 대의 제작 방법과 착용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벽령과 벽적의 차이, 그리고 상 중에 신는 신발에 대해서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喪禮前書已報大槪 適再考儀禮 絰五服皆有之 一在首 一在要 大小有差 斬衰條下傳中已言之 故不復言耳 要絰之下又有帶 斬衰絞帶․薺衰布帶是也 蓋絰帶以象吉服之大帶 此帶則象吉服之革帶 屈其一端立貫之 還以揷於要間 非齊衰則止用布帶而無要絰也 右本在上者 齊衰絰之制 以麻根處著頭右邊 而從額前向左圍向頭後 却就右邊元麻根處相接 卽以麻尾藏在麻根之下 麻根搭在麻尾之上綴殺之 有纓者 以其加於冠外 故須著纓 方不脫落也 辟領 儀禮注云 辟領廣四寸 則與闊中八寸也 兩之爲尺六寸 與來書所言不同 不知何故 詳此辟領是有辟積之義 雖廣四寸 須用布闊四寸․長八寸者摺其兩頭 今就中相接 卽方四寸 而綴定上邊於領之旁 以所摺向裏 平面向外 如今裙之有摺 卽所謂辟積也 溫公所謂裳每幅作三■者是也 如此卽是一旁用八寸 兩旁共尺六寸矣 管屨․疏屨 今不可考 今略以輕重推之 斬衰用今草鞋 齊衰用麻鞋可也 麻鞋 卒伍所著者
상례 전의 글은 이미 대강 답장을 받았습니다. 마침 의례를 재고하고 있었는데, 질(絰)과 오복(五服)에 대한 것들이 모두 있으니, 하나는 수질(首絰)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요질(要絰)에 관한 것으로 크고 작은 것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참최(斬衰)조 이하는 전 중에 이미 말했으므로 다시 말하지 않을 뿐입니다. 요질 아래엔 또 띠가 있는데, 참최복에 두르는 교대(絞帶)와 자최(薺衰)복에 두르는 포대(布帶)가 이것입니다. 질과 띠는 길복(吉卜)의 대대(大帶)를 표시하니 이 띠는 길복의 혁대를 표시하니 한쪽 끝을 접어 선 체로 꿰고 다시 허리 사이에 꼽습니다. 자최복이 아니면 다만 포대(布帶)만 사용하고 요질은 없습니다. 오른쪽은 본래 위에 있는 것이니 자최복과 질(絰)에대한 제도는 삼 뿌리부분을 머리 오른쪽 가에 붙이고 이마 앞에서부터 왼쪽으로 향하며 머리 뒤쪽을 향하여 감싸는데 다시 오른쪽 가의 원래 삼의 뿌리부분까지 가서 잡하면 삼의 꼬리를 삼 뿌리 아래에 감추고, 삼 뿌리는 삼 꼬리 위에 얹어서 줄여서 꿰맵니다. 갖끈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관 밖에 더하므로 반드시 갖끈을 고정시켜야 비로소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벽령(辟領)은 의례 주에 “벽령은 넓이가 네 촌(四寸)인데 넓은 것은 가운데가 여덟 치인데, 한 자 여섯 촌(尺六寸)이 되도록 둘로 나눈다.”고 하니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한 것과는 다르니 무엇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벽령이 벽적(辟積)의 의미가 있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록 넓이가 네 촌이지만 반드시 넓이가 네 촌, 길이가 여덟촌이되는 베를 사용해서 그 양 끝을 접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은 가운데에 나아가 서로 접하게하고 사방 네 촌에다 상변을 옷깃 가에다 꿰메어 고정시켜 접은 곳은 안을 향하게 하고 평면은 밖을 항하게 하니, 마치 지금의 치마에 접힌 곳이 있는것과 같은 것이 이른바 벽적입니다. 온공의 이른바 치마는 매 폭마다 세 개의 첩(■)을 만든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쪽 곁으로는 여덟 촌을 쓰고 두 쪽 곁으로는 한 치 여섯 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관구(菅屨)와 소구(疏屨)는 지금은 고증할 수 없습니다. 이제 대략 경중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참최는 오늘날의 초혜(草鞋)를 사용하고, 자최는 마혜(麻鞋)를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마혜(麻鞋)는 병졸들이 착용했던 것입니다.
答周叔謹 주숙근에게 답함
【해제】이 편지에서 주자는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사사로운 뜻이 생겨나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근심거리이므로 경(敬)공부를 주로 하여 사사로운 뜻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징계하고 막아야 학문의 효과가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示喩靜中私意橫生 此學者之通患 能自省察至此 甚不易得 此當以敬爲主 而深察私意之萌多爲何事 就其重處痛加懲窒 久之純熟 自當見效 不可計功於旦暮 而多爲說以亂之也 論語別本未曾改定 俟便寄去 然且專意就日用處做涵養省察工夫 未必不勝讀書也
보내주신 편지에서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생겨나니 이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근심거리이다고 하셨는데 능히 스스로 성찰하여 이 경지까지 이르기란 참으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는 마땅히 경(敬)공부를 주로 삼아 사사로운 뜻이 싹트는 것이 대체로 무슨 일 때문인지를 깊이 살피고 그 중요한 곳에 나아가 통열히 징계하고 막아야 오래됨에 완전히 익어 스스로 효과를 보게 됩니다. 아침 저녘 사이에 공을 헤아려 말을 많이해서 어지럽혀서는 안됩니다. 논어 별본은 아직 개정하지 못했으니 기다렸다가 인편에 붙여 보내겠습니다. 그러나 또한 뜻을 오로지하여 일상생활하는 곳에 나아가 함양과 성찰의 공부를 한다면 반드시 글 읽는 것을 이기지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숙근에게 답함 答周叔謹
【해제】강학에 대해 언급한 편지이다. 강학은 다만 방심을 수습하는데 전일하게 공을 들여 하며 전후를 생각하거나 득실을 따지지 말 것이며, 또한 직절하고 명백한 곳을 보아야지 지만(支蔓)하려고 해서는 안됨을 말하고 있다.
所示仁說差勝往時 但所引熹說亦有誤字處 恐又錯認了 更略契勘爲佳 然書中所說收洽放心 乃是緊切下功夫處 講學乃其中之一事 今但專一於此下功 不須思前算後 計較得失 講學亦且看直截明白處 不要支蔓 來書所謂雖若小異 然亦不甚相遠者 全是子約舊時句法也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인(仁)에 대한 설이 지난번 보다 조금 나아진 것 같습니다만 단지 인용한 제 말은 또한 글자를 잘못 둔 곳이 있으니 아마도 또한 잘못 안 것 같으니 다시 대략이나마 헤아려 보심이 낳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편지 가운데에서 말한 “방심(放心)을 수습하는 것이 바로 긴절(緊切)하게 공부할 곳이다.”라는 말은, 강학(講學)은 그 가운데 한 가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만 여기에만 전일하게 공을 들여야지 모름지기 전후를 생각하거나 득실을 계교(計較)하지 말아야 합니다. 강학은 또한 우선 직절하고 명백한 곳을 보아야지 지만(支蔓)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비록 조금 다른 것 같으나 아주 멀지는 않다”고 한 것은 완전히 자약(子約)의 예전 구법(句法)입니다.
答王季和(鉛) 왕계화(연)에게 답함
【해제】이 편지는 어느 때 쓰여진 것인지 자세하지는 않은데 주자연보에 따르면 건도 9년(계사; 1173, 44세)에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 편지에서는 독서란 많이 읽을 것을 탐 낼 것이 아니라 우선은 대학을 단락에 따라 익숙히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모름지기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여야, 비로소 뒷 단락을 읽을 수 있으니, 이와 같이 하면 거의 쉽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別幅之喩 具悉至意 嘗謂道之在人 初非外鑠 而聖賢垂訓又皆懇切明白 但能虛心熟讀 深味其旨而反之於身 必有以信其在我而不容自已 則下學上達 自當有所至矣 但讀書不可貪多 今當且以大學爲先 逐段熟讀精思 須令了了分明 方可改讀後段 如此庶易見功 久久浹洽通貫 則無書不可讀矣
별지에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지극한 뜻입니다. 일찍이, “도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당초에 외면에서 녹이는 것이 아니고, 성현이 훈계를 내린 것이 또한 모두 간절하고 명백하니, 단지 마음을 비우고 숙독하여 깊이 그 뜻을 음미하고 몸에 돌이켜 반드시 나에게 있는 것을 믿어 스스로 그치지 않으면 하학(下學)과 상달(上達)에 마땅히 이를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단지 독서에는 많은 것을 탐내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은 마땅히 대학을 우선으로 삼아 단락에 따라 익숙히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모름지기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여야, 비로소 뒷 단락을 읽을 수 있으니, 이와 같이 하면 거의 쉽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지나 스며들어 관통하면 읽지 못할 책이 없을 것입니다.
왕계화에게 답함 答王季和
【해제】이 편지 역시 어느 때 쓰여진 편지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순희 8년(신축, 1181, 52세) 12월에 서린(舒璘), 서기(舒琪) 형제가 사명(四明)에서 와서 뵙고 학문을 논한 적이 있는데, 편지의 내용 중에 ‘서대부는 지난번에 일찍이 회계(會稽)에서 서로 만나보았다’고 한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신축 년간에 쓴 편지인 것 같다. 이 편지에서는 도(道)의 전체는 비록 높고 크나 실은 일용의 미세하고 절근(切近)한 것이므로 만약 그 고원한 것을 기뻐하여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며, 큰 것을 사모하여 작은 것을 소략하게 한다면, 점차 경유(經由)하는 실상은 없고 한갓 현상(縣想)과 기망(跂望)의 수고로움만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주자는 이 편지에서 성인의 가르침은 차례가 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돌이켜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작은 가운데 구하고, 문(文)으로써 견문을 넓혀 강학의 단서를 열고, 예(禮)로써 행실을 요약하여 그 실천하는 실상을 엄정하게 하여 한 치를 얻으면 그 한 치를 지키고 한 자를 얻으면 그 한 자를 지키게 하는 것일 뿐이며 성인의 가르침과 같이 하여야 도의 전체를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來示備悉 學者之志固不可不以遠大自期 然觀孔門之敎 則其所從言之者至爲卑近 不過孝弟忠信․持守誦習之間 而於所謂學問之全體初不察察言之也 若其高弟弟子 多亦僅得其一體 夫以夫子之聖 諸子之賢 其於道之全體豈不能一言盡之以相授納 而顧爲是拘拘者以狹道之傳․畫人之志 何哉 蓋所謂道之全體雖高且大 而其實末嘗不貫乎日用細微切近之間 苟悅其高而忽於近 慕於大而略細 則無漸次經由之實而徒有懸想跛望之勞 亦終不能以自達矣 故聖人之敎循循有序 不過使人反而求之至近至小之中 博之以文 以開其講學之端; 約之以禮 以嚴其踐履之實 使之得寸則守其寸 得尺則守其尺 如是久之 日滋月益 然後道之全體乃有所鄕望而漸可識 有所循習而漸可能 自是而往 俛焉孶孶 斃而後已 而其所造之淺深 所就之廣狹 亦非可以必詣而預期也 故夫子嘗謂先難後獲爲仁 又以先事後得爲崇德 蓋於此小差 則心矢其正 雖有鑽堅仰高之志 而反爲謀利計功之私矣 仁何自而得 德何自而崇哉 聊誦所聞 以答下問之意 至於菴記大字之需 則非學之急 亦老懶之所不暇也 舒大夫向嘗相見於會稽 所論未合 今想其學益有成矣 聞其政亦甚佳 有本者固如是也 不及爲書 因見幸略道意
보내 온 편지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지만, 학자(學者)의 뜻은 진실로 원대(遠大)한 것을 스스로 기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문(孔門)의 가르침을 보건대 좇아서 말하는 것이 지극히 비근하여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지수송습(持守誦習)의 사이에 지나지 않고, 이른바 학문 전체라는 것에는 처음부터 자세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제자들로 말할 것 같으면 대부분 또한 겨우 하나의 체단(體段)을 터득한 정도입니다. 대저 공자의 성스러움과 제자의 어짊으로써 도(道)의 전체에 관하여 어찌 한 말로 다하여 서로 주고받지 못하고, 도리어 이것에 구애되어 도의 전수(傳授)를 좁게 하고 사람의 뜻을 한정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대개 이른바 도(道)의 전체는 비록 높고 크나 실은 일용의 미세하고 절근(切近)한 사이에 관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약 그 고원한 것을 기뻐하여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며, 큰 것을 사모하여 작은 것을 소략하게 한다면, 점차 경유(經由)하는 실상은 없고 한갓 현상(縣想)과 기망(跂望)의 수고로움만 있을 것이니, 또한 끝내 스스로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순순(徇徇)히 차례가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돌이켜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작은 가운데 구하고, 문(文)으로써 견문을 넓혀 강학의 단서를 열고, 예(禮)로써 행실을 요약하여 그 실천하는 실상을 엄정하게 하여 한 치를 얻으면 그 한 치를 지키고 한 자를 얻으면 그 한 자를 지키게 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하기를 오래 하여 날로 불어나고 달로 더한 뒤에 도의 전체는 곧 향하여 바라봄이 있어 점차 알 수 있고, 차례대로 익혀 점차 능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나아가 부지런히 힘써 죽은 뒤에야 그칠 것이니, 조예(造詣)의 천심(淺深)과 성취(成就)의 광협(廣狹)은 또한 반드시 지적하여 미리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일찍이, “어려운 것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이 인(仁)이 된다” 하고, 또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이 덕(德)을 높임이 된다” 했습니다. 대개 여기에서 조금만 어긋나면 마음은 그 바름을 잃어 비록 뚫을수록 더욱 견고해지며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아지는 뜻이 있다 하더라도, 도리어 이익을 도모하고 공효를 계산하는 사욕(私欲)이 될 것이니, 인(仁)을 어떻게 얻으며 덕을 어떻게 높이겠습니까? 그런대로 들은 것을 암송하여 질문한 뜻에 답합니다. 기록을 많게 하고 글자를 크게 해 다라는 부탁은 학자(學者)의 급한 일이 아니고, 늙고 게으른 몸이 겨를도 내지 못합니다. 서대부는 지난번에 일찍이 회계(會稽)에서 서로 만나보았는데 논의한 것이 합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 학문이 더욱 완성됬으리라 생각됩니다. 그의 정치에 대해서도 들으니 역시 매우 훌륭하군요. 근본이 있는 사람은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편지로 쓰기 전에 보고 대략이나마 뜻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자연(농몽천)에게 답함 答傳子淵(膿夢泉)
【해제】편지 가운데 “청전 교수인 육형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편지는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에 쓴 편지인 것 같다. 천천의 교수인 육형이란 육자수를 가리키는데, 육자수는 경자년 9월에 죽었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현자(賢者)가 도를 전진시키는 데에 용맹하고 자신을 믿는데에 과감하여 마음을 비우고 성현과 사우(師友)의 말을 들어 한결같이 가슴에 취하지 않음과, 기상과 언어를 불교에서 장황하게 다투고 노하는 것처럼 해서 관평(寬平)하고 정대(正大)하게 침잠(沈潛)하고 무르익는 뜻이 없음을 탄식하고 있다.
荊州云亡 忽忽歲晩 比又得靑田敎授陸兄之訃 吾道不幸 乃至於此 每一念之 痛恨無窮 想平生師資之義 尤不能爲懷也 所示江陵問答讀之 敬夫之聲容恍若相接 悲愴之餘 警策多矣 但其間尙有鄙意所未安者 更容熟復 續奉報歸納也 大抵賢者勇於進道而果於自信 未嘗虛心以觀聖賢師友之言 而壹取決於胸臆 氣象言語 只似襌家 張皇開怒 殊無寬平正大况浸醵郁之意 荊州所謂有拈槌竪拂意思者 可謂一言盡之 然左右初不領略 而渠亦無後語 此愚所深恨也 德起得資友益 書來甚激昂 巳報之云 更須講學封殖 不可專恃此矣
형주가 “죽을 때가 되었는지 어느새 나이도 저물었다.”고 했는데, 근래에 또 청전 교수인 육형의 부고를 받게 되니 우리 도(道)의 불행이 이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드는 생각입니다만 애통하고 한스러움이 끝이 없습니다. 평생 사자(師資)의 의(義)를 생각해 보니 더욱 슬퍼할 수가 없습니다. 보내주신 강릉의 문답을 읽어보니 경부의 목소리와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접하는 것 같아 너무도 슬픈 나머지 많이도 경책(警策)하였습니다. 다만 그 사이 오히려 제 뜻이 편치 못함이 있으니 다시 익히 반복하고 이어서 답장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대저 현자(賢者)가 도를 전진시키는 데에 용맹하고 자신을 믿는데에 과감하여 일찍이 마음을 비우고 성현과 사우(師友)의 말을 들어 한결같이 가슴에 취하지 않고, 기상과 언어를 다만 선가(禪家)에서 장황하게 다투고 노하는 것처럼 해서 자못 관평(寬平)하고 정대(正大)하게 침잠(沈潛)하고 무르익는 뜻이 없으니, 형주(荊州)의 이른바, “몽둥이를 잡고 불자(拂子)를 세우는 뜻이 있다”고 한 말은 한 마디로 다 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우(左右)가 당초 대강을 짐작하여 알지도 못했고 그 또한 뒷말이 없었으니, 이것이 내가 깊이 한탄하는 바입니다.
덕기(德起)가 벗들의 도움을 받아 편지가 왔는데 매우 격앙(激昻)되었습니다. 회답을 했다고 하지만 다시 모름지기 강학하여 봉식(封殖)해야 하니, 오로지 이것만을 믿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전자연에게 답함 答傳子淵
【해제】이 편지 역시 어느 때 쓰여진 편지인지 명확하지 않다. 논어팔일에 보면“애공(哀公)이 재아(宰我)에게 사(社)에 대하여 물으니, 재아(宰我)가 대답하기를 “하후씨(夏后氏)는 소나무를 사용하였고, 은(殷)나라 사람들은 잣나무를 사용하였고, 주(周)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사용하였으니, 밤나무를 사용한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戰栗)을 느끼게 하려고 해서였습니다.”고 한 내용이 있는데, 전자연이 이 부분에 대해 지리하게 주를 달아 주자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에 대해 주자가 지적하면서 답장을 본낸 것이다.
示喩戰栗之義 反復思之 終未能曉 豈以宰我如此注解便涉支離 不能簡易故耶 憙看此章只是宰我錯解了 故聖人深責之 不謂其纔下注解 便成支離 如來喩之云也 細詳來喩 是意外生說 附會穿鑿 有不勝其支離者 擧此一端 恐區區所見與賢者不同 不但此一事也 示及得朋進學之盛 深慰鄙懷 然二包定夫書來 皆躐等好高之論 殊不可曉 顯道本領只是舊聞 正苦其未能猛舍 不謂已見絶於旦評也
보내주신 전율의 의(義)를 반복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끝내 알 수가 없습니다. 어찌 재아에대해 이처럼 주해를 달아 지리(支離)하게도 했는지 간략하고 평이하게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요? 제가 보니 이 장은 다만 재아가 오해를 했기 때문에 성인이 깊이 꾸짖으신 것일 뿐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해를 달기만하면 곧 지리해진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니 이것은 뜻밖에 생겨난 말로서 견강부회하고 천착하여 그 지리함을 이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일단(一端)만 들어보아도 구구한 견해가 현자와는 같지 않음이 이 한 가지 일 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벗을 얻어 학문이 아주 진전되었다는 편지를 보니, 제 마음이 아주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이포(二包)와 정부(定夫)의 편지가 왔는데 모두 등급을 뛰어넘어 고상한 것만 좋아하는 논조(論調)였으므로 자못 모르겠습니다. 현도(顯道)는 본령(本領)이 다만 예전에 들었던 것인데 용맹스럽게 버리지 못하여 괴로워하니, 이미 단평(旦評)에서 절교(絶交)를 당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포(二包)] : 현도(顯道)의 형제이다. [정부(定夫)] : 유정부(劉定夫)이다.
答傳子淵 전자연에게 답함
【해제】도체의 규모와 공부의 절목은 다만 하나의 이(理)일 뿐이므로 두 가지로 간주해서 어느 것은 버리고 어느 것은 취하여서는 안됨을 말하였다.
示喩所以取舍於前日之諭者甚悉. 率爾之言, 固不能保其無病, 然道體規模․功夫節目只是一理, 是則俱是, 非則俱非, 不容作兩種商量, 去彼取此也. 暇日平心定氣, 試一思之, 或有以變化氣質而救一偏之弊, 則於成己成物之際未必無小補耳.
전날의 가르침을 취하고 버림에대해 보내주신 편지 매우 자세하더군요. 경솔한 말은 진실로 그 병통이 없음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체의 규모와 공부의 절목은 다만 하나의 이(理)일 뿐이니 옳으면 모두 옳은 것이고 그르면 모두 그른 것이어서 두 가지로 간주해서 헤아려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여서는 안됩니다. 한가한날 마음을 평안히 하고 기운을 정하여 한 번 생각해서 혹시라도 기질을 변화시켜 한 쪽으로 치우친 폐단을 구제할 수 있다면 자기를 이루고 남을 이루는 사이에 반드시 작은 보탬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자연에게 답함 答傳子淵
【해제】이 편지에서 보면 전자연은 마음 공부에 힘쓰긴 했지만 궁리를 몰라 간략함에 지나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초종의 학문이 외면을 향하여 들떠서 가까운 곳을 향하여 착실한 곳에 힘쓸 줄 몰랐지만 자연의 처지에 나아가 헤아려 보면, 비록 조금 지나치게 간약(簡約)하나 해로움은 없음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示喩所得日益高妙 非復愚昧所能窺測 但願更於小心密察處稍加意焉 則所謂主敬窮理者 殆亦緝熙光明之所不可已者 而初亦不在渙然心喩者之外也 包黃諸君各精進 捐去舊習 甚善 但恐似此一向掠虛 則又只是改換名目也 超宗遠來 殊末有以副其意者 却似於己分著實處未知用力 又與諸兄大相反也 已喩其就彼商量 雖稍過於簡約 亦無害耳
보내 준 편지에서, “소득이 날로 더욱 높고 묘하다” 하니, 우매한 내가 엿보아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단지 바라건대, 더욱 조심하고 엄밀하게 살필 곳에 조금 뜻을 더하면, 이른바, “주경궁리(主敬窮理)”는 자못 계속해서 밝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애당초 또한 환히 마음으로 깨닫는 것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포황(包黃)의 제군(諸君)은 각기 정진(精進)하여 구습(舊習)을 덜어 버렸으니 매우 좋습니다. 단지 이처럼 한결같이 허무(虛)만을 취하면 명목(名目)만 바꾼 것일까 두려울 뿐입니다. 초종(超宗)이 멀리서 왔는데 유달리 그의 뜻에 부응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자기에게 착실한 곳에 힘을 쓸 줄 모르는 것 같았으니, 제형(諸兄)들과 상반됩니다. 이미 저기에 나아가 헤아려 보라고 했으니, 비록 조금 지나치게 간약(簡約)하나 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기(강)에게 답함 答陳正己(剛)
【해제】이 편지에서는 우선 학문을 함에 있어 박학(博學), 독지(篤志)와 절문(切問), 근사(近思)의 실제에 종사하지 못하고, 준걸(俊傑)의 호기(豪氣)에 동요되어 격물(格物), 치지(致知)와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근본에 힘을 쓰지 못하면 평실(平實)한 것을 싫어하고 고묘(高妙)한 것을 추구하며, 도의를 가볍게 여기고 공명을 기뻐하는 마음을 갖게 되므로 결코 성문(聖門)의 학자들의 기상과 같아질 수 없음을 논하였다. 또한 이 편지에서는 당시 학문함에 있어서의 병통은 도의와 공리의 한 중요한 관계를 투철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往歲得呂東萊書 盛稱賢者之爲人 以爲十數年來朋友中未始有也 以此心願一見 而無從得 中間聞欲來訪 甚以爲喜 不久 乃聞遽遭閔凶 深爲傷怛 顧以未嘗通問 不欲遽脩慰禮 今者辱書 荷意良厚 且審秋辰殘暑 孝履支福 又以爲慰
示喩爲學大致及別紙數條 皆已深悉 但區區於此有不能無疑者 蓋上爲靈明之空見所持 而不得從事於博學篤志․切問近思之實 下爲俊傑之豪氣所動 而不暇用力於格物致知․誠意正心之本 是以所論嘗有厭平實而趨高妙․輕道義而喜功名之心 其浮陽動俠之意 往往發於詞氣之間 絶不類聖門學者氣象 不知向來伯恭亦嘗以是相規否也 熹自年十四五時 卽嘗有志於此 中間非不用力 而所見終未端的 其言雖或誤中 要是想像臆度 所幸內無空寂之誘 外無功利之貪 全此純愚 以至今日 反復舊聞而有得焉 乃知明道先生所謂天理二字 却是自家帖體出來者眞不妄也
冲漠無朕一段 恐未可輕議 若當此時萬象未具 卽是上面一截無形無兆 後來被人引入塗轍矣 賢者正作此見 何乃遽謂古今無人作此語耶 敬以直內 近思錄注中別有一語 先生指意甚明 蓋雖不以爲無 然未嘗以爲卽與吾之所謂敬以直內者無毫髮之差也
許渤爲人不可知其詳 語錄中又有一處說其人晨起 問人寒暖 加減衣服 加減一定 終日不易 卽是夫資篤厚之人 容有不聞隔窗事者 非必有寄寂之意而欲其不聞也 况此條之下一本注云 曷嘗有如此聖人 則是先生蓋亦未之許也 但歎美其純德 與世間一種便儇皎厲之人氣象懸隔 亦可尙耳 此等皆未可輕易立說 訕薄前賢也
注疏之學 却不須如此主張 蘇子由議論自是一偏之說 亦何足爲準的也哉 董仲舒所立甚高 恐未易以世儒詆之 今日病痛 正爲不曾透得道義功利一重關耳 若處置匈奴一節 便使從來才智之士 如婁敬․買誼亦未免此 來諭於此予奪之間不能無高下其手者 豈立意之偏而不自覺歟? 近來浙中怪論鯖蜂起 令人憂歎 不知伯恭若不死 見此以爲如何也
지난해 여동래의 편지를 받으니 현자의 사람 됨됨이를 대단히 칭찬하기에 십수년 동안의 친구 중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마음으로 한 번 보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가 없군요. 중간에 들어보니 방문하고자 하신다니 매우 기쁩니다. 오래지 않아 갑자기 근심스럽고 흉한 일을 만났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슬픕니다. 우선은 일찍이 통문(通問)하지 않았기에 갑자기 위로하는 예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제 편지를 보내주시니 생각해주시는 뜻이 참으로 두터우십니다. 또 가을 입새 늦 여름의 한풀 꺽인 더위를 살피면서 졸지에 상을 당해 망극하실 터인데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학문을 하는 대치(大致)와 별지(別紙) 몇 조목을 보내 준 편지는 모두 깊이 보았습니다. 단지 구구한 내가 여기에 의심이 없지 않으니, 대개 위로는 영명(靈明)의 공견(空見)으로 부지하면서 박학(博學), 독지(篤志)와 절문(切問), 근사(近思)의 실제에 종사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준걸(俊傑)의 호기(豪氣)에 동요되어 격물(格物), 치지(致知)와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근본에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논한 바가 평실(平實)한 것을 싫어하고 고묘(高妙)한 것을 추구하며, 도의를 가볍게 여기고 공명을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 들떠서 격동하는 뜻이 때때로 사기(詞氣)의 사이에 드러나 결코 성문(聖門)의 학자들의 기상과 비슷하지 않으니, 전에 백공(伯恭)도 이것을 규계(規戒)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희(熹)는 나이 14, 5세 때부터 곧 여기에 뜻을 두었더니, 중간에 힘을 쓰지 않음이 아니었으나 소견(所見)이 마침내 확실하지 못합니다. 그 말이 비록 잘못 적중했으나 요컨대, 상상(想像)이고 억탁(臆度)이었으니, 그나마 안으로 공적(空寂)한 유혹이 없었고 밖으로 공리(功利)를 탐함이 없었던 것이 다행입니다. 완전히 이처럼 순진하고 어리석게 금일에 이르도록 예전에 들었던 것을 반복하여서 터득한 것이 있으니, 바로 명도(明道) 선생이 말한, “천리(天理)라는 두 글자는 자신이 체득해 내는 것이다”는 말이 참으로 망령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충막무짐 한 단락은 가볍게 논의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만약 이 때를 당하여 만상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이 위의 모든 형체도 없고 조짐도 없는 것들은 후에 사람에 의해 도리로 인입된 것입니다. 현자께서 정말로 이렇게 간주하여 보셨다면 어찌하여 갑자기 옛 사람 중엔 이러한 말을 한 사람이 없다고 여기시는지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한다(敬以直內)는 말은 근사록 주 가운데 별도로 한 마디가 있으니 선생의 뜻이 매우 분명합니다. 비록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찍이 우리의 이른바 경이직내(敬以直內)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고 여긴 적은 없습니다.
허발(許渤)의 사람됨은 상세하게 모르겠으나 어록(語錄)에 또 말하기를, “그 사람이 새벽에 일어나 사람에게 추운지 따뜻한지를 물어 의복을 가감(加減)하되 일정하게 가감하여 종일토록 바꾸지 않았다” 하니, 곧 천부적인 자질이 돈후(敦厚)한 사람입니다. 혹 창 건너의 일을 듣지 못한 것도 있으나 적막한데 기대려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듣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이 조목 아래 한 판본의 주에 이르기를, “어찌 이같은 성인이 있으리오” 하니, 이는 선생께서 아마 허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지 그의 순수한 덕이 세간의 일종의 경솔하고 자긍(自矜)하는 사람들과 기상이 현격(懸隔)하여 높힐만 함을 탄미(歎美)했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따위는 모두 가볍게 입설(入說)하여 전현(前賢)을 비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소(注疏)의 학문은 도리어 모름지기 이와 같이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소자유의 의론은 스스로 한 쪽으로 치우친 설이니 또한 어찌 족히 표준으로 삼을 것이 있겠습니까? 동중서가 세운 것은 매우 높으니 아마도 세유(世儒)가 쉽게 비방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병통은 바로 도의와 공리의 한 중요한 관계를 투철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흉노 한 구절을 처치한다면 가령 종래의 재주있고 지해로운 선비라 하더라도, 예를들면 누경이나 가의 같은 이도 또한 이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이것을 주거나 빼앗는 사이에 그 손을 높이거나 낮추는 사람이 없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어찌 뜻을 치우치게 세우고서도 스스로 깨닫지를 못하시는지요? 근래엔 절(浙) 중에 괴이한 이론이 벌때처럼 일어나서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하고 탄식하게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백공이 만약 죽지 않았다면 이것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진정기에게 답함 答陳正己
【해제】진정기가 한 책자를 지어 성현의 대업을 논하였는데, 여기서 논의한 것 중에 내외(內外)와 본말(本末)을 두 가지 일로 간주함에 경중(輕重)과 완급이 또한 본말이 전도되고 거스르는 잘못이 있음을 지적한 편지이다.
示喩縷縷, 皆聖賢大業, 熹何足以知之 然亦未得一觀, 卽爲朋友傳玩, 遂失所在. 今不復能盡記, 但覺所論不免將內外本末作兩段事, 而其輕重緩急又有顚倒舛逆之病. 究觀底裏, 恐只是後世一種智力功名之心, 雖强以聖賢經世之說文之, 而規模氣象與其所謂存神過化․上下同流者大不侔矣. 若戊子年間所見果與聖賢不異, 卽其所發不應如此. 以故鄙意於此尤有不能無疑者. 未得面論, 徒增耿耿耳.
보내주신 편지에서 여러 번 반복하신 것은 모두 성현의 대업이니, 제가 어찌 족히 그것을 알겠습니가? 그러나 또한 아직 한 번도 볼 수 없었으니 벗들이 서로 전해가며 완미하다가 마침내 둘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다시는 모두 기억할 수 없고, 다만 논의한 것이 내외(內外)와 본말(本末)을 두 가지 일로 간주함에 경중(輕重)과 완급이 또한 본말이 전도되고 거스르는 병통이 있게됨을 면하지 못함을 알았을 뿐입니다. 연구하고 살펴보는 가운데 아마도 단지 후세의 일종의 지력과 공명의 마음일 뿐이니, 비록 강력하게 성현께서 나라를 경영하던 설로 글을 쓰더라도 규모나 기상이 이른바 존신과화(存神過化)나 상하동류(上下同流)와는 크게 같지 않습니다. 만약 무자(戊子)년 연간에 본 것이 과연 성현과 다르지 않다면 그 발한 것이 응당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 뜻은 여기에 대해 더욱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직접 뵙고 논할 수 없어 다만 불안함만 더할 뿐입니다.
주자역에게 답함 答朱子繹
편지를 통해 그대가 대학을 읽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매우 좋은 일입니다. 대체로 대학에 대한 해설이 많기는 하지만 대부분 학문의 제목과 차례에 대한 것이고, 가장 긴요한 부분은 ‘격물(格物)’ 두 글자인데, 도리어 공부에 착수한 곳을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 요체를 얻지 못하는 것은 마치 버려진 물건을 주워 셈을 하면서 부를 얻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부류이니, 또한 영원히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정신을 모아 대체(大體)와 규모를 이해하여 적절하게 착수할 곳을 찾아 실제로 공부해야 비로소 대학을 읽을 수 있습니다.
知讀大學, 甚善. 大抵其說雖多, 多是爲學之題目次第, 緊要是 ‘格物’ 兩字, 却末曾說著下手處. 故學者之讀此而不得其要者, 類如數遺棄之齒而求有獲, 亦沒世窮年而無得矣. 須著積神領略箇大體規模, 便尋箇的當下手處, 著實用功, 始是會讀大學也.
노덕장에게 답함 答路德章
【해제】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 56세)에 노덕장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여자약에게 보낸 편지는 매우 좋습니다. 단지, “동래(東萊)가 남긴 말 가운데 경제유지(經濟維持)와 관련된 내용은 별도의 한 가지 일로서 평소 도학(道學)의 뜻과 다르다”고 한 말은 아마 동래에게 누가 될 것 같습니다. 구산(龜山)이 “왕씨(王氏: 王安石)의 학문은 안팎을 분리시키고 마음[心]과 마음의 자취[迹]을 구별하여, 도(道)라는 것을 언제나 이 세상에서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고, 세상을 경영하는 일도 모두 이기적인 지혜[私智]로 천착(穿鑿)하게 만든다”고 꾸짖은 것도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또, “혹시 한나라 고조[漢朝]와 당나타 태종[唐宗]을 만났더라면 다투고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이 있었을 겁니다”라고도 했는데, 이 또한 예전의 생각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이런 식견을 가지고 있으면 ‘한 자를 굽혀 한 길을 펴려는[枉尺直尋]’ 마음가짐의 그루터기가 됩니다. 다만 정당한 도리를 분명하게 보고 조금이라고 함부로 내달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저절로 이런 생각이 사라질 것입니다. 비록 완곡하게 에둘러가며 돌이키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옛날의 성현은 한 자를 굽혀 한 길을 펴는 것을 커다란 병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의론은 바로 한 길을 굽혀 한 길을 펴는 것을 근본이라고 여기니, 만일 정말로 이런 것이라면 맹자는 실제로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었고,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야말로 진정한 대장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장(德章)은 이미 대의(大意)를 알 것이니 이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붓을 든 김에 여기까지 말하게 되었고 또 풀리지 않은 남은 것이 있을까 걱정되어 다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례를 편집한 것은 이미 받았습니다. 이 곳에 있는 벗들 가운데는 여기에 힘쓸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춘추도 생각해보면 쉬지 않고 노력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 글들은 일신에 절실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도 애석한 일입니다. 다만 조금씩 정해진 과업을 줄여가면 날마다 힘쓰는데 여유를 두어 잊어버리거나 쫓기지도 않게만 한다면 음미하면서 살피고 푹빠져서 함양하는 노력이 부족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所與子約書甚善, 但謂東萊遺言有涉於經濟維持者別爲一事而異於平日道學之意, 則恐亦未免有累於東萊也. 龜山嘗譏王氏之學離內外․判心迹, 使道常無用於天下而經世之務皆私智之鑿, 正謂此耳. 又謂儻遇漢祖․唐宗, 亦須有爭不得․且放過處, 亦是舊時意思尙在. 方寸之地只有一毫此等見識, 便是枉尺直尋底根株. 直須見得正當道理分明, 不容些兒走作, 卽自然無復此等意思. 雖欲宛轉回護, 亦有所不可得矣. 古之聖賢以枉尺直尋爲大病, 今日議論乃以枉尺直尋爲根本, 若果如此, 卽孟子果然迂闊而公孫衍․張儀眞可謂大丈夫矣. 德章已見大意, 自不必如此說. 因筆及之, 亦恐餘證未解, 聊復云云耳.
儀禮編已收, 此間朋友未有能辨此者. 春秋想亦不輟用工. 此文字未爲切己, 然亦可惜中廢. 但稍減課程, 令日力有餘, 不至忙迫, 卽玩索涵養之功不至欠闕矣.
노덕장에게 답함 答路德章
【해제】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 56세)에 노덕장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물이 흐르는 곳에 도랑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은 결국 생각이 도랑[渠] 위에 있는 것이니, 물을 채 동쪽으로 흐르게 하기도 전에 먼저 굴곡을 만들어 준비한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의 조그만 차이가 결과적으로 천 리나 잘못되는 격입니다. 맹자(孟子)와 정자(程子)가 천리(天理)라는 측면에서 공을 세웠고, 우리의 학문[聖門]에 힘이 되었으며, 후학들에게까지 덕을 끼쳤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예전에는 이렇게 거꾸로만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에서야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만 오히려 예전의 습관에 이끌리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所喩水到渠成之說. 意思畢竟在渠上, 未放水東流時, 已先作屈曲準備了矣. 毫釐之差, 千里之繆. 孟子․程子所以爲有功於天理, 有力於聖門, 有德於後學者, 正在此處. 不知何故前日直如此看倒了? 今日雖欲回頭, 而尙爲舊習所牽, 不得自由也.
노덕장에게 답함 答路德章
【해제】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 56세)에 노덕장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초하루에 보낸 편지를 받고 평안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됩니다. 단지 빈궁함을 참아내기는 하지만 해를 넘길 계획도 없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내 준 편지를 자세히 살펴 보니 당신의 대처도 전적으로 좋았다고는 할 수 없는 듯 합니다. 만약 드나드는 처신이 부끄러웠다면 지난 겨울에는 깨닫지 못했다가 이번 여름에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 청탁(請託)이 싫었다면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서 의리로 판단을 내려 일체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남들이 저절로 넘보지 못했을 것이니다. 수입이 먹고 살기에 부족해서 이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구하더라도 관직을 얻고 못었는 것은 미리 기대할 수 없는 일이고, 녹봉의 많고 적음도 미리 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결연한 태도로 거취를 결정하는 실상은 못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소의 뜻과 기운이 세상과 더불어 부앙(俯仰)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격동되어 마침내 분연히 이렇게 하면서 다른 계획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덕장은 평소에 학문을 하면서 문자를 의논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였을 뿐 성정(性情)과 의리에 들인 공은 적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울분(鬱憤)과 불평이 사기 글과 용모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향(志向)하는 것도 기구(崎嶇)하고 핍측(偪仄)해서 자신의 한 몸조차 용납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세속의 구차하고 시속을 따르는 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진실로 고상하다고 하겠으니, 우리 학문의 의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한시바삐 치료해야 할 고황(膏肓)에 깊이 뿌리박인 고질병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를 버려둔 채 논하지 않고 편지에서 말한 논어와 맹자를 읽는다는 것으로 말한다면, “입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감히 묻지 않아 견문이 좁고 고루하게 되었다”고 한 것도 어쩌면 울분과 불평한 심기(心氣)에서 발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학자들은 글을 읽다가 의심이 있으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마지 못하여 묻지 않을 수가 없는데, 지금 사람들은 의심이 없으면서도 가식(假飾)으로 질문하여 대화의 자료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못됩니다. 그러나 이를 징계하여 묻지 않으면 과연 이미 환히 의심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의심이 있으면서도 가식으로 질문하는 사람과 같아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침묵하며 자신을 우롱하는 것입니까? 장차 의심이 있는 데에 이르지 못하여 묻지도 못하고 드디어 울분과 고민을 발하고 꺼리던 마음을 함부로 하여 묻지 않는다고 칭탁(稱託)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까? 만약 환히 의심이 없다면 좋겠으나 상지(上智)의 자질이 아니면 미치지 못하고, 만약 불행하게 뒤의 두 사람이 말한 바에서 방황한다면 나는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에 깊이 방해되고 마음을 기르는 데에도 해로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어제 (당신께서) 춘추(春秋)를 편집한 것을 보았습니다. 대개 일찍이 이런 따위를 여가가 있으면 해보라고 권했던 것이고, 이로써 나의 함양하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단지 당시에 편집한 것을 보니 공로가 이미 완성되어 정밀함이 사랑할 만하고 다른 사람은 결코 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또한 드디어 마음속으로 그것을 완성시키고 싶어서 한결같이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른바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이에 비로소 척연(惕然)히 스스로 뉘우치고 허물하니, 대개 다만 현자를 위하여 애석할 뿐만이 아닙니다. 글을 읽고 학문을 하는 것은 마음 다스리는 것을 근본으로 삼거늘, 지금 다만 다스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외면으로 향하여 치달려서 쉬지도 못하게 하여 도리어 해를 끼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매우 미혹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덕장(德章)은 기절(氣節)이 우뚝하여 속류(俗流)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항상 아끼고 공경했는데 구구한 회포를 다할 수가 없어서 매양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겼더니, 풍문으로 인하여 문득 모두 말했으니, 즐겁게 들어 주시고 죄로 여기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奉一日告, 獲聞安勝爲慰. 但聞忍窮益堅, 未有卒歲之計, 則未能不相爲動心也. 然詳來喩, 似所以處者亦有未盡善. 蓋若謂蓋羞於出人, 則不應去冬未覺而今夏方覺. 謂厭請託, 則此等以義裁之, 一切不與, 人自不能相干. 謂所入不足自資, 則又將去此而有求, 其得失旣未可期, 而豐釣亦未可料. 此恐皆非所以決爲去就之實. 或者但以平日意氣不能俯仰, 而忽然有所激觸, 遂憤然爲此而不暇顧計耳.
大抵德章平日爲學於文字議論上用功多, 於性情義理上用功少, 所以常有憤鬱不平之意見於詞氣容貌之間. 而所向者無非崎嘔偪仄․不可容身之地. 此在世俗苟且流狥之中觀之, 固亦足爲高; 然在吾輩學問義理上看, 則豈非膏肓深錮之疾而不可以不早治者耶?
卽今且置此勿論, 而以所喩讀論․孟者言之, 則所謂 ‘不愛把來作囗頭說話, 故不敢作問而墮於寡陋’ 者, 豈亦不爲憤鬱不平之氣所發耶? 夫學者讀書有疑而不能自決, 故不得巳而不能不問. 今人無疑而飾間以資談聽者固不足道, 然遂懲此而不問, 則禾知其果已洞然而無疑耶? 抑有疑而耻自同於飾問, 遂飮黙以自愚? 將末至乎有疑而不能問, 遂發其憤悶, 肆其忌克而託於不問以自欺也? 若已洞然而無疑, 則善矣, 然非上智之資不能及. 若不聿而彷彿於後兩者之所謂, 則吾恐其深有妨於進學而大有害於養心也.
昨見編集春秋, 蓋嘗奉勸此等得暇爲之, 不可以此而妨吾涵蕃之務, 正爲此爾. 但當時又見所編功緖已成, 精密可愛, 他人決做不得, 遂亦心利其成, 不欲一向說殺. 以今觀之, 則所謂爲人謀而不忠者, 無大於此. 乃始惕然自悔自咎, 蓋不獨爲賢者惜之也. 讀書爲學, 本以治心, 今乃不唯不能洽之, 而乃使向外奔馳, 不得休息, 以至於反爲之害, 是豈不爲迷惑之甚乎? 德章氣節偉然, 非流輩所可及, 私心常斫愛敬. 而區區之懷猶有未得盡者, 每竊以爲愧且恨也. 因風布問, 輒盡言之. 想所樂聞, 不至以爲罪也.
노덕장에게 답함 答路德章
【해제】이 글은 순희 13년(병오, 1186, 57세)에 노덕장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자세하고 길게 보내 온 편지는 모두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모두 자신을 용서하는 말이었으니, 이같은 마음으로 마음을 보존하면 덕(德)이 나아가지 못하고 업(業)이 닦여지지 못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을 위해서는 다만 출사(出仕)하는 한 가지 길만이 살길이고, 또 의리(義理)를 해치는 일도 없습니다. 그대가 살고 있는 곳이 임안(臨安)과 멀지 않으니, 어찌 한번 과거에 응시할 계획도 하지 않고 오래도록 떠돌고 있습니까? 이것은 의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해(利害)로 따지더라도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저 이전에 학문을 한 것은 다만 역사 전기(傳記)를 읽고 세태의 변화를 논하는 정도였고, 경서(經書)의 공부는 몇 편을 외우는 정도에 지나지 못했습니다. 또 밖으로 향하는 뜻은 많고 자신에 돌이켜 내면을 반성하여 의리의 귀숙처(歸宿處)를 탐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이 방종하고 사려가 깊지 못하여 자신의 본분에는 조금도 힘을 얻은 곳이라곤 없으니, 이는 이전의 스승과 친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병을 받은 것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무겁고 해로우니, 이는 또 자품(資品)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데다 깨끗이 씻어 변화시키지 못한 죄 때문입니다. 지금 통렬히 자신을 반성하여 내면을 깨끗이 연마하면 늦게나마 조금 구제할 수 있겠지만, 한결같이 이처럼 구차하게 자신을 용서하여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허물할 것이니, 내가 평소에 덕장(德章)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보내 온 편지에서 매번, “내[熹]가 그대를 버리는 뜻이 있다”고 하니, 이 또한 남을 원망하는 말입니다. 구구한 내가 입이 아프도록 말하는 까닭은 차마 그대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대를 버렸다면 문득 강이나 호수에 사는 물고기처럼 잊어버렸을 터이니, 어찌 이같이 마음 아파하면서 그대의 분하고 불평한 심기를 더하겠습니까?
지금 그대는 신심(信心)을 억누르고 쓸데없는 말들을 버리고 여러모로 꾀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합당한 벼슬자리를 얻어 돌아가 편히 쉴 곳을 찾기 바랍니다. 그 뒤에 단정히 앉아 논어, 맹자의 정문(正文)을 숙독(熟讀)하고 입으로 외우며 마음으로 사색하여 비록 이미 글 뜻은 알았더라도 한 글자 한 글자 검토(檢討)하여 마음속의 허다한 분함과 원망의 기운을 씻어 내어 뒷날에 진보함이 있을 곳을 기다린다면, 단지 오늘의 노덕장(路德章)이 아닐 따름입니다.
전에 백공(伯恭)의 말을 들어 보니, “어렸을 때에 성품이 거칠어 음식이 마음에 맞지 않을 경우에 문득 집안의 기물(器物)을 부수었는데, 뒤에 오랫 동안 병이 들어 논어 한 책만 들고 아침 저녁으로 조용히 읽다가 갑자기 마음이 일시에 평안해지는 것을 느껴 드디어 죽을 때까지 불쑥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고 하니, 이것은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라 할 것입니다. 평시에 벗들과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해 본 적이 있습니까? 덕장(德章)은 백공(伯恭)을 따라 배운 지 오래되었으니, 응당 이 말을 들었을 것인데도 어찌하여 전혀 이를 배우지 않았습니까? 이는 잘 배우지 못했다고 하겠습니다.
示喩縷縷備悉, 然其大槪皆自恕之詞, 以此存心, 亦無惑乎德之不進而業之不脩也. 吾人爲貧, 只有祿仕一途可以苟括, 無害於義. 彼中距臨安不還, 豈不能一爲參選計而長此羈旅乎? 此則未論義理, 而只以利害計之, 亦未得爲是也. 大抵是曰前爲學只是讀史傳․說世變, 其洽經亦不過是記誦編節, 向外意多, 而未嘗反弱內省, 以究義理之歸, 故其身心放縱, 念慮粗淺, 於自己分上無毫髮得力處. 此亦從前師友與有責焉. 而自家受病比之它人尤更重害, 此又姿禀不美而無以洗滌變化之罪也. 今日正當痛自循省, 向裏消磨, 庶幾晩節救得一半. 而一向如此苟簡自恕, 若不怨夫, 卽是尤人, 殊非平日所望於德章者也.
來諭每謂熹有相棄之意, 此亦允人之論. 區區所以苦口相告, 正爲不忍相棄耳. 若已相棄, 便可相忘於江湖, 何至如此忉但, 愈增賢者忿懟不平之氣耶? 只今可且捺下身心, 除了許多閑說話, 多方擘晝, 去參了部, 授一本等合人差遣歸來, 討一歇泊處, 將論語․孟子正文端坐熟讀, 口誦心惟; 雖已曉得文義, 亦須逐字忖過, 洗滌了心肝五臟裏許多忿憾怨毒之氣, 管取後日須有進步處, 不但爲今日之路德章而已也.
向見伯恭說少時性氣粗暴, 嫌飮食不如意, 便敢打破家事. 後因久病, 只將一冊論語早晩閑看, 忽然覺得意思一時平了, 遂終身無暴怒. 此可爲變化氣質之法. 不知平時曾與朋友說及此事否? 德章從學之久, 不應不聞. 如何全不學得些子? 是可謂不善學矣.
노덕장에게 답함 答路德章
【해제】이 글은 순희 13년(병오, 1186, 57세) 혹은그 이후에 노덕장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전관(前官)이 떠나갈 기한이 멀지 않았으니 바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양양(襄陽)은 오래된 군인지라 과거 현자들의 유적이 많습니다. 벼슬하는 와중에 이 유적들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闕期不遠, 便可得祿. 襄陽古郡, 多前賢遺迹, 宦游得此, 亦正自不惡也.
편지에서 말한 학문을 하는 공부는 과연 이 말대로 충실하게 하면, 어찌 나아가지 못함을 근심하겠습니까? 단지 독서할 때에도 장구(章句)를 따라 자세하게 연구하고 궁리해야 의미를 볼 수 있으니, 만약 다만 거친 마음으로 상쾌한 뜻만 구하면 아마 끝내 먼지와 티끌을 씼어내고 사나운 마음가짐[鱗甲]을 떨쳐낼 수 없을 것입니다. 직경(直卿)이 이곳에 있어서 보내온 편지에서 말한 것을 물어 보았더니, 그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허물을 듣고는 기뻐했습니다. 우리들이 응당 권장하고 힘을 써야지 불평하는 뜻을 품고서 꼭 자기의 주장을 펴서 남을 굴복시키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눈을 밟으러 놀러가자는 약속이 지켜질 수 있다면 아주 좋겠습니다.
示喩爲學功夫, 果充此言, 何患不進? 但讀書亦須隨章逐句子細硏窮, 方見意味. 若只用粗心, 但求快意, 恐終無以滌蕩塵埃, 剗除麟甲也. 直卿在此, 間以來書所云, 渠殊不省. 然聞過則喜, 吾人正當勉力, 不須便懷不平之意, 必求伸己而屈人也. 踏雪之遊, 果能踐約, 幸甚
강병도에게 답함 答康炳道
【해제】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 52세)에 강병도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학자의 잘못이 치지(致知)만을 일삼는데서 말미암아 결국 빠지는 데에 이른다고 논한 것은 정말이지 오늘날의 폐단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치지란 바로 사물에 나아가 본래 그대로의 도리를 알자는 것이니, 오늘날 제도(制度)나 토론하고, 권모술수를 계획하고 비교하는 것과는 그 뜻도 공부도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내 마음의 본래 그러한 앎[知]을 철저하게 추구한다면 어떻게 다시 빠질 곳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일을 논하면서 이치[理]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드디어 이런 병폐가 생겨났을 뿐입니다.
제가 여기에 대해 감히 (어떤 종류의 치지는) 인정하고 (다른 종류의 치지는) 부정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잘못된 주장[邪說]이 제멋대로 훌러다니는 것을 보고서 우리의 학문[吾道]에 해가 될까 두려워 어쩔수 없이 극단적으로 말했을 뿐입니다. 제 말을 믿어야 할지 어쩔지의 여부는 듣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약 이미 (잘못된 주장을) 배척하고 나서 다시 (그들의 주장을) 빌어온다면 아마 그 폐단은 호랑이를 기르면서 우환을 버려두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문제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은 적도 없었고, 그가 나아가는 것을 허여하지 앟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가 만약 크게 깨달아 사(邪)를 버리고 정(正)으로 돌아오면 또 어떻게 제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동래의 글은 반드시 자세하게 정돈해서 편집이 완성되어야 검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일 역시 지나치게 늦추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그리 견고한 것이 아니라서 눈 앞에 있는 여러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이 일을 맡길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所論學者之失由其但以致知爲事, 遂至陷溺, 此於今日之弊誠若近之. 然恐折謂致知者, 正是要就事物上見得本來道理, 卽與今日討論制度․較計權術者意思功夫逈然不同. 若致得吾心本然之知, 豈復有所陷溺耶? 正坐論事而不求理, 遂至生此病痛耳. 憙於此非敢有所與奪, 但見邪說橫流, 恐爲吾道之害, 故不得不極言之. 信之輿否, 則在乎人焉. 若旣排闕之, 又假借之, 則恐其弊將有至於養虎而遺患者矣. 然區區於此, 亦固未嘗有所絶於人而不與其進也. 彼若幡然覺悟, 去邪嚴正, 又豈憙之所能拒哉? 東萊文字須子細整頓成編, 乃可商量. 但此事亦不宜甚緩, 蓋人生不堅固, 若過却眼前諸人, 卽此事無分付處矣.
곽휘려(진)에게 답함 答郭希呂(津)
【해제】이 글은 소희 2년(신해, 1191, 62세)에 곽진에게 보내는 편지로 추정된다.
편지에서 말한 묘명의 서[銘叙]는 아낄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늙고 병들어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서 이곳저곳에서 요구하는 것에 다 응해 줄 수 없어서 부득불 스스로 성명(性命)을 위한 계획만을 세우고 있을 뿐입니다. 제 성격이 못나고 직선적인지라, 지난 번에 할 만했으며 그 즉시 이미 글을 지었지 또 무엇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서 번거롭게 두 번이나 해주마고 승낙한 다음에야 글을 짓겠습니까? 게다가 지금은 또 한 번 비통한 슬픔[悲惱]을 당해서 더욱 고달픈 지경이니 결코 이 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또 묘명[銘]은 서(敍)보다 중요합니다. 제가 이미 묘명을 지었는데, 남은 힘이 있다고 한 들 무엇이 애석해서 서(敍)에다 많은 글을 써가며 변명하겠습니까? 성지(誠之)가 만약 마땅히 승낙해서는 안 될이라고 여겼다면 희려를 위해 (제게) 편지를 보내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베풀고자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짓지 않으려는 것이라면 제가 이미 그 중책을 맡았으니 그가 오늘 다시 (사양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꼭 성지(誠之)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희려(希呂)가 분명하게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제 스스로 그 글을 짓게 만들려고 일부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안다는 것은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옛 군자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끝까지 채워주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의 충심을 전부 바닥내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남과의 교제가 완전할 수 있었습니다. 천 번 만 번 이 말을 깊이 통찰하시고 늙고 쇠약한 저를 가엾게 여겨 이미 이루어진 사례를 깨트려서 (저를) 사지(死地)로 내몰지 말아주십시오.
示喩銘敍, 此非有所愛, 但老病心力衰耗, 不能盡給四方之求, 不得不自爲性命計耳. 鄙性拙頁, 向使可爲, 卽已爲之, 何至今日更煩再愉然後作耶? 况今又經一番悲惱, 允覺昏憊, 決不能辨此. 且銘重於敍, 旣已作銘, 若有餘力, 何惜於敍而費許多詞說分疏耶? 誠之若是合下不肯承當, 卽不應爲希呂移書, 以其所不欲者施於人. 若以其重而不敢爲, 則憙已任其重者矣, 渠在今日必不容復有詞也. 恐此未必誠之之意, 只是希呂不相亮, 必欲熹自爲之而故爲此說耳. 人之相知, 貴相知心. 而古之君子不盡人之歡, 不竭人之忠, 所以全交. 千萬燦察乎此言, 憐其衰老, 勿破已成之例, 以速其就於死地. 幸甚幸甚
곽희려에게 답함 答郭希呂
【해제】이 글은 소희 2년(신해, 1191, 62세) 후반기 혹은 그 이후에 곽진에게 보내는 편지로 추정된다. 논어와 맹자를 읽어야 하는 중요성과 방법을 말하고 있다.
논어와 맹자를 쉼없이 읽어야 하는 줄 아신다니 매우 좋습니다. 또 먼저 정문(正文)을 익숙하게 읽은 다음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살펴보고, 다시 여러 선생들이 발명한 내용을 상고해서 널리 보고 살펴가며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말 한 마디 한 구절이 자기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면 모두 완미하는 것이 마땅하지, 도달하는 길이 지리하는 것을 싫어해서 ‘꼭 강론할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묘명(墓銘)의 액(額)은 다시 ‘송(宋)’자를 드러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백모(伯謨)가 반드시 이미 회답을 했을 겁니다. 대개 돌이 길면 열 글자를 두 행씩 쓰고, 돌이 짧으면 아홉 자를 세 행으로 써서 편리한 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知讀論․孟不廢, 甚善. 且先將正文熟讀, 就自己分上看, 更考諸先生說有發明處者, 博觀而審取之. 凡一言一句, 有益於己者皆當玩味, 未可便恐路徑支離而謂所有不必講也. 墓銘之額, 更著 ‘宋’ 字亦佳, 伯謨必已報去矣. 大抵石長卽以十字爲兩行, 石短則以九字爲三行, 隨事之宜可也.
곽희려에게 답함 答郭希呂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 59세) 혹은 그 직후에 곽진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서 집에 있으면서 어른을 섬기는 뜻을 말씀하신 것은 매우 좋습니다.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힘 쓸 곳이 아니요, 오직 자신만이 힘쓸 따름입니다. 단지, “학문의 큰 단서는 감히 순서를 뛰어넘어 말할 수 없다”고 했는데, 제 생각에는 분명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학문이 어찌 다른 것을 추구하겠습니까? 이 이치를 밝혀 힘써 실천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공부를 하는 데는 차서가 있어서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 학문이 그 자체로 별도의 일이어서, 곁에 제쳐두고 우선 효우(孝友)라는 실질적인 일에 종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가만히 형제 간에 서로 함께 이 뜻을 깊이 살피고, ‘학문의 큰 단서’를 강론하여서 효제의 실상을추구한다면, 집안에 윤리가 더욱 바르게 되고 은의(恩意)가 더욱 돈독해져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않았도 그렇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만약 학문을 하나의 큰 일로 여겨 미칠 수 없다고 여기며 허둥지둥 한갓 과거를 위한 공부에 정신이 가리워져서 가정을 오래도록 화목하게 할 수 있는 별도의 한 가지 방법을 찾으려 한다면, 천리는 밝아짖 않고, 인욕은 제멋대로 생겨나 말단의 폐단은 이루 다 생각할 수 조차 없고, 이루 다 막아내지도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示喩所以居家事長之意, 甚善甚善. 此事他人無致力處, 正唯自勉而已. 但謂學問大端不敢躐等言之, 則鄙意有所未曉者. 夫學問豈以他求? 不過欲明此理而力行之耳. 但其功夫所施有序, 而莫不以愛親敬長爲先, 非謂學間自是一事, 可以疊之度外而姑從事於孝友之實也. 故熹竊願昆仲相與深察此意, 而講於所謂學間之大端者, 以求孝弟之實, 則閨門之內倫理益正, 恩義益篤, 將有不期然而然者矣. 若以學問爲一大事, 不可幾及, 而汲汲然徒弊精神於科擧文字之間, 乃欲別求一術以爲家庭雍睡悠久之計, 竊恐夫理不明, 人慾橫生, 其末流之弊將有不可勝慮․不可勝防者. 不蕃賢者以爲如何?
곽희려에게 답함 答郭希呂
보내신 편지의 가르침이 자세하지만 전후로 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는 듯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전체(全體)적인 운용(運用)이 있기 때문에 학문에도 전체(全體)적인 공부가 있는 것입니다. 효제(孝悌)라는 것은 바로 전체(全體) 가운데 한 가지 일이지만, 다른 일과 비교하면 지극히 크고 가장 급한 것일 뿐입니다. 학문하는 사람은 이 한 가지 일을 마쳤다고 그 나머지 일을 다 버려 두고 묻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현은 사람을 가르칠 때 반드시 이치의 탐구[窮理]를 앞세웠고, 역행(力行)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 마음의 전체를 밝힐 수 있으면 효제는 본래 그 가운데 있고 다른 일도 그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효제는 진실로 힘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다른 일의 완급과 본말도 자연스러운 차례가 있습니다. 만일 여기에 밝지 못하면 효제도 의도적인 것[有意]이 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 이치를 극진히 발휘해서 다른 모든 일들의 근본이 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육경(六經)․대학․논어․중용․맹자등 여러 가지 책으로 상고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來喩縷縷, 似夫悉前後鄙意者. 蓋人心有全體運用, 故學問有全體工夫. 所謂孝弟, 乃全體中之一事, 但比他事爲至大而最急耳. 固不可謂學者止此一事便了, 而其餘事可一切棄置而不聞也. 故聖賢敎人必以窮理爲先, 而力行以終之, 蓋有以明乎此心之全體, 則孝弟固在其中而他事不在其外. 孝弟固不容於不勉, 而他事之緩急本末亦莫不有自然之序. 苟不明此, 則爲孝弟者未免出於有意, 且又未必能盡其理而爲衆事之本根也. 今以六經․大學․論語․中庸․孟子諸書考之可見矣.
희려(希呂)가 스스로 ‘병이 많은 까닭에 능히 정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널리 배우지도 못하고 우선 그 손닿는 곳[所及]에서 힘쓴 것이라’고 말하면, 이미 스스로를 포기한 것인데도 오히려 ‘근본에 가깝다[近本]’고 핑계를 대십니까. 효제(孝悌) 밖에 다시 학문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견해가 너무 잘못된 것입니다. 또 정알로 병이 많아 정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널리 배우지도 못햇다면, 또 어찌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힘을 다하여 과거(科擧)의 공부에만 종사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지 않으면서 저것은 저토록 오래 했으니 비록 ‘이(利)를 소중히 여기지도, 의(義)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는다’고 할지라도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희려(希呂)는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希呂自謂多病, 故不能精思博學, 而姑用力於其所及, 則固已爲自棄, 而猶可諉曰近本. 若遂以爲孝弟之外更無學間, 則其繆見甚矣. 且誠多病而不能精思博學矣, 則又曷爲而苦心竭力以從事於科擧之文耶? 此之不爲而彼之久爲, 雖曰不厚於利而薄於義, 吾不信也. 希呂其更思之.
서원의 규모는 또 일과 힘에 따라 진행하면서 사실에 나아가 고찰하고 정리해야 순서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니, 이처럼 앞서서 미리 안배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문(記文)과 편방(扁牓) 등은 더욱 부차적인 일[外事]입니다. 이런 종류의 생각들은 사고가 얕고 이리저리 떠돌며 (마음이) 바깥으로 내달리는 증거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만약 학문의 전체라는 측면에서 자신에게 절실한 곳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 기상(氣象)은 저절로 깊고 두터워지며, 넓디 넓어질 것입니다. 태극도(太極)․서명(西銘)․통서(通書)를 각 한 부씩 보내드립니다. 시험 삼아 읽고 생각해 보시면 이치의 한 가지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학문하는 사람은 보고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다면 비록 긴요한 공부는 없을지라도 힘을 얻는 곳이 있을 겁니다.
書院規模, 且隨事隨力爲之, 却就事實上考察整理, 方見次第, 不須如此預先安排. 記文扁牓, 尢是外事, 但此等意思卽見浮淺外馳之驗. 若於學問全體上切己處用得功夫, 卽氣象自當深厚宏闊矣. 太極․西銘․通書各往一本, 試熟讀而思之, 亦求理之一端也. 大抵學者不可有放過底事, 久之不已, 雖無緊要功夫, 亦有得力處也.
곽희려에게 답함 答郭希呂
자세하고 길게 보내온 편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거두고 마음을 바로 잡는다[收心正心]’는 것은 막연히 사념(思念)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언제나 깨어있는 채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해서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별지(別紙)에서 말한 것은 내용이 전혀 자세하지 않으니 더 공부해야겠습니다. 오로지 대학만을 보아 처음과 끝이 관통되어 모든 의심이 사라진 다음에 논어․맹자를 읽고, 논어․맹자에서 의심이 사라진 다음에 중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금 대학에 대해서도 모두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용를 겸하여 보시, 마음씀씀이가 이렇게 복잡해서야 무엇으로 말미암아 상세하게 볼 수 있겠습니까? 다시 번잡스러우을 견뎌내면서 오로지 한 책만을 자세하게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내고 전일하게 자세히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월은 쉬이 흐르고 큰 일[大事]은 밝히지 못했으니 매우 두렵습니다.
示喩緩錢備悉. 然所謂收心正心, 不是要得漠然無思念, 只是要得常自惺覺, 思所當思而不悖於義理耳. 別紙所示看得全未子細, 更宜加功. 專看大學, 首尾通貫, 都無所疑, 然後可讀語․孟. 語․孟又無所疑, 然後可讀中庸. 今大學全未曉了, 而便兼看中庸, 用心叢雜如此, 何由見得詳細耶? 且更耐煩, 專一細看爲佳. 日月易得, 大事未明, 甚可懼也.
시자운에게 답함 答時子雲
【해제】이 글은 순희 10년(계묘, 1183, 54세)에 시운(時澐)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종이를 가득 채운 편지에 미처 말하지 못한 깊은 사연들이 있으니 이는 반드시 당시에 여기에서 지나치게 무거운 것을 본 듯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붙잡고서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갑자기 버릴 수도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날마다 3050% 정도를 공부에 할당하여 고금의 성현들의 말이 의리(義利)를 분석한 곳을 가지고 반복하여 익숙하게 읽으십시오. 때때로 의리(義理)가 어디에서 왔고 이욕(利慾)이 어디로부터 생겨났는지 생각하십시오. 또 이 두 가지가 사람에게 어느 것이 친하고 어느 것이 소원한 것이며,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거우며, 반드시 어쩔 수 없다면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릴 것이며, 어느 것을 늦추고 어느 것을 급하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고 살펴보시기를 청합니다. 처음 볼 때 맛이 없는 듯 하더라도 오래되면 저절로 응당 판단을 내려야 할 곳을 알게 될 것이니, 그러면 자연스럽게 놓아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버려 두고 힘쓰지 않으면 어지러이 말이 많아지고, 앞뒤로 재고 계산하면서 이리저리 얽매여 평생토록 헤어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작은 득실은 논할 것도 없이 어느날 과거에 합격해서 저명한 관직에 오르더라도 반드시 다른 생각과 다른 계획이 있게 되여, 결국 이 길을 향할 겨를은 없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지난 번에 근사록을 편찬할 때 몇 단락을 넣어 과거가 사람의 심술(心術)을 허물어뜨리는 곳을 말하려고 했는데, 백공(伯恭)이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바로 이러한 병폐의 근원이 그 당시부터 이미 심겨져서 마음 속에서 배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보니 사람을 통렬히 한탄하도록 만듭니다.
來喩滿紙, 深所未喩. 必是當時於此見得太重, 所以如此執著, 放捨不下. 今想夫能遮然割棄, 但讚逐日那三五分功夫, 將古今聖賢之言剖析義利處反復熟讀, 時時思省義理何自而來, 利欲何從而有, 二者於人孰親孰疏, 孰輕孰重, 必不得已, 執取執舍, 孰緩孰急. 初看時似無滋味, 久之須自見得合剖判處, 則自然放得下矣. 捨此不務, 紛紛多言, 思前算後, 展轉纏縛, 一生出不得. 未論小小得失, 政使一旦便登高科․躋願官, 又須別有思量檗晝, 終不暇向此途矣. 試思之, 如何? 向編近思錄, 欲人敷段說科擧壞人心術處, 而伯恭不肯. 今日乃知此箇病根從彼時便已栽種培養得在心田裏了, 今人痛恨也.
모순경에게 답함 答毛舜卿
【해제】이 글은 순희 10년(계묘, 1183, 54세)에 모순경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편지에서 말한 공부의 차례는 두서가 너무 많다고 느껴질 것 같습니다. 지금 또 경의(敬義) 두 글자로 처하는 곳에 따라 노력을 더하면, 오래 되면 저절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의리와 이익의 사이에서는 힘을 들여 분별해 낼 뿐 미리 분별하기 어렵다고 근심해서는 안 됩니다. 성인의 문하에 단지 이것만이 평생의 사업입니다. 또 다른 위를 향한 길[向上一路]을 망령되이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示喩功夫次第, 似覺頭緖太多. 今且以敬義二字隨處加功, 久久自當得力. 義利之間, 只得著力分別, 不當預以難辨爲憂. 聖門只此便是終身事業, 亦不須別妄想向上一路也.
왕백례(흡)에게 답함 答王伯禮(洽)
참(參)은 셋으로 셈하는 것이고, 오(伍)는 다섯으로 셈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백성을 10명씩 혹은 5명씩 편제한다[什伍其民]’거나 ‘혹은 서로 10배가 차이나고, 100배도 차이가 난다[或相什伯]’고 한 것처럼 삼과 오로만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를 헤아리는 방법은 삼으로 셈하여 오를 만나면 같아지고[齊], 오로 셈하여 삼을 만나면 모이게[會] 됩니다. 순자(荀子)에 ‘적을 엿보고 변화의 허실을 제어하기 위해, 다섯 사람[伍]으로 묶기도 하고 세 사람[參]으로 묶기도 한다’는 것에 대해, 주(注)에서 한비자(韓非子)의 말을 인용해서 ‘말이 같은 지 다른 지를 살펴 붕당(朋黨)의 나뉨을 알아차리고, 세 사람[參]과 다섯 사람[伍]의 말을 비교 검토하여, 진술한 말[陳言]의 실상[實]을 따진다’고 했습니다. 또 ‘세 가지로 사물을 비교하고, 다섯으로 종합한다’고 하고, 한서(漢書)의 조광한전(趙廣漢傳)에서 ‘그 값을 셋 혹은 다섯으로 나누어 종류별로 서로 비교한다 ’고 하니, 모두 그 의미입니다. 주역에서 말한 “셋으로 혹은 다섯으로 변화한다[參伍以變]”는 것은 대개 혹 삼(三)의 수로서 변하고, 혹 오(伍)의 수로서 변하여, 앞 뒤에 많고 적은 것이 다시 서로 반복시켜 가지런하지 않은 것[不齊]을 가지런하게[齊]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대연의 수[大衍之數], 복희(伏羲)와 문왕(文王)의 괘(卦), 역법[曆象]의 해와 달과 별과, 장부(章蔀)와 기원(紀元) 등이 모두 각각 그 나름의 방식이 있어 서로 구애 받지도 않고, 서로 통하는 데도 지장이 없습니다. ‘종(綜)’자의 의미는 사수(沙隨) 정씨가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착(錯)과 종(綜)은 두 가지 일입니다. ‘착(錯)’이란 섞어서 서로 교차시키는 것이고, ‘종(綜)’이란 가닥을 쳐서 결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오착종(參伍錯綜)은 각각 독립된 일입니다. 참오(參伍)는 통하게 하는 것이므로 결과가 간단하고 성글어 지지만[簡而疏], 착종(錯綜)은 (종횡으로 교직t시킨 직물의) 극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번잡하고 조밀해지는 것입니다[繁而密].
參, 以三數之也; 伍, 以五數之也. 如云什伍其民, 如云或相什伯, 非直爲三與五而已也. 蓋紀數之法, 以三數之則遇五而齊, 以五數之則遇三而會. 故荀子曰: ‘窺敵制變, 欲伍以參’, 注引韓子曰: ‘省同異之言, 以知朋黨之分. 偶三五之驗, 以責陳言之實.’ 又曰: ‘參之以比物, 五之以合參.’ 而漢書趙廣漢傳亦云: ‘參伍其賈, 以類相準’, 皆其義也. 易所謂參伍以變者, 蓋言或以三數而變之, 或以伍數而變之, 前後多寡, 更相反覆, 以不齊而要其齊. 如河圖․洛書大衍之數, 伏羲․文王之卦, 曆象之日月五星, 章蔀紀元, 是皆各爲一法, 不相依附而不害其相通也. ‘綜’ 字之義, 沙隨得之. 然錯綜自是兩事. 錯者, 雜而互之也. 綜者, 條而理之也. 參伍錯綜, 又各是一事. 參伍所以通之, 其治之也簡而疏; 錯綜所以極之, 其治之也繁而密.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팔괘(八卦)는 복희가 괘를 그은 방법입다. 설괘전의 ‘천지정위(天地定位)’부터 ‘곤이장지(坤以藏之)’ 이전 까지는 복희가 그은 팔괘의 위치입니다. ‘제출호진(帝出乎震)’이하는 문왕(文王)이 복희가 이미 완성한 괘(卦)에 대해 의미와 종류를 유추해서 덧붙힌 말입니다. 예를 들어 괘변도(卦變圖)에서 ‘강래유진(剛來柔進)’과 같은 것 또한 괘(卦)가 이미 완성된 후에 유추해서 이 괘(卦)가 저 괘(卦)로부터 왔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지, 참으로 먼저 특정한 괘(卦)가 있은 다음에 바야흐로 어떤 괘(卦)가 있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옛 주에서 ‘비괘(賁卦)는 태괘(泰卦)에서 왔다’고 했는데, 선유가 틀렸다고 하면서 ‘건곤(乾坤)이 합해져서 태괘(泰卦)가 되었는데, 어찌 태괘가 다시 변해서 비괘(賁卦)가 되는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자못 모르겠거니와 만약 복희가 괘를 그은 것을 논하면서 64괘가 동시에 갖추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비록 건곤이라 할지라도 다른 여러 괘들을 생성할 수 있는 이치란 없게 됩니다. 문왕 공자의 설명과 같이 이리저리 위아래로 (관계를 맺고) 반복해서 서로 생성한다고 해야 옳은 설명일 것입니다. 요점은 살아있는 맥락을 간파하고 걸리적 거리는 곳이 없어야 어느 곳에나 통할 수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太極․兩儀․四象․人卦者, 伏義畫卦之法也. 說卦 ‘天地定位’ 至 ‘坤以藏之’ 以前, 伏義所晝八卦之位也. ‘帝出乎震’ 以下, 文王卽伏義已成之卦而推其(5-2731)義類之詞也. 如卦變圖剛來柔進之類, 亦是就卦已成後用意推說, 以此爲自彼卦而來耳, 非眞先有彼卦而後方有此卦也. 古注說賁卦自泰卦而來, 先濡非之, 以爲乾坤合而爲泰, 豈有泰復變爲賁之理? 殊不知若論伏義畫卦, 則六十四卦一時俱了, 雖乾坤亦無能生諸卦之理. 若如文王․孔子之說, 則縱橫曲直, 反覆相生, 無所不可. 要在看得活絡, 無所拘泥, 則無不通耳.
주역에서 선유(先儒)의 구법(舊法)은 모두 폐기할 수 없지만, 다만 호체(互體)․오행(五行)․납갑(納甲)․비복(飛伏) 같은 것은 자세하게 생각해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괘변(卦變)은 오직 단전(彖傳)의 말에 용례가 있습니다만, 옛 그림[舊圖]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수정을 해서 지금은 다 그렸으니 빈 곳에 괘와 효를 그려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전(彖傳)으로 살펴보면 괘(卦)가 어디에서 왔는 지를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한 괘가 여러 괘에서 유래한 것도 있으니 자세하게 고찰하면 주역 속의 상(象)과 수(數)가 통하지 않는 데가 없어서 오늘날 사람들이 얽메여 있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易中先儒舊法皆不可廢, 但互體五行․納甲飛伏之類未及致思耳. 卦變獨於彖傳之詞有用, 然奮圖亦未備. 頃嘗修定, 今寫去, 可就空處塡晝卦爻, 而以彖傳考之, 則卦所從來皆可見矣. 然其間亦有一卦從數卦而來者, 須細考之, 可以見易中象數無所不通, 不當如今人之拘滯也.
右: ●扐●掛 左: ●● 今於圖中如此添修, 當已明白矣.
오른쪽: ●扐●掛 왼쪽: ●● 지금 그림 속에 이렇게 첨가해서 수정해 넣으면 저절로 명백할 것입니다.
양심보에게 답함 答楊深父
보내 준 편지에 스스로 부드럽고 나약(懦弱)하여 자신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관대하게 포용하는 데에 힘쓰고자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물로 물 맛을 내려는 격입니다. 이전에 아뢴 것은 당신께서 일상 생활에서 이 마음을 어둡게 하지 않고 다시 사물을 응접하는 곳에서 각각 그 이치가 있는 곳을 추구하신다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자연히 치우침 없이 모두 절도에 맞게 될 것이라는 바램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示喩自患柔懦不立, 而欲務於寬大含容, 此正以水濟水之謂也. 前此所以奉告, 但欲賢者日用之間不昧此心, 更於應接事物處各求其理之所在, 則喜怒哀樂自無偏倚而皆中節矣. 不審賢者以爲如何?
양심보에게 답함 答楊深父
편지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의문은 본래 예전에 만나서 의논했던 것입니다. 만일 분명히 이해되지[判然] 않거든 의심남 것을 조목별로 적고, 장으로 해석하고 구절로 분별해보면 당연히 결정이 날 것이니, 단지 이렇게 평범하게 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간략한 곳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아무개 장(章)의 어떤 설명[某說]과 구절[某句] 가운데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묻고 틀렸거나[過處]․온당치 않거나[未安]․ 너무 지나친[太甚] 세 가지 말에 대해서도 또한 이렇게 해야지 의심스러운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所喩諸疑固嘗面論, 若未能判然, 莫若條陳所疑, 章解而句辨之, 當有所決, 不可只如此泛論也. (略處如某章某說某句, 如何當取而不取, 過處․未安․太甚三說亦然, 乃見所疑之實.)
예약형정(禮樂刑政)으로 교화하는 것이 한서생살(寒暑生殺)이 한 해를 이루는 것과 같다는 말이 어떻게 의심의 대상이겠습니까? 만약 보내온 편지와 같다면 도(道) 밖에 물건이 있고 형정이 오로지 치우(蚩尤)․신불해(申不害)․상앙(商鞅)에게서 나왔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종류에 다시 마땅히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자세하게 유추하고 징험해야지, 그저 그런 소소한 의견으로 헤아려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횡거(橫渠) 선생이 주례 천관(天官)을 논한 곳을 살펴 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禮樂刑政之爲敎, 如寒暑生殺之爲歲, 此何所疑? 若如來意, 則道外有物而刑政專出於蚩尤․申․商矣. 此類更宜寬著心胸子細推驗, 不可只將尋常小小意見窺測也. 觀橫渠先生論周禮天官處, 亦可見矣.
왕자경에게 답함 答汪子卿
헤어진 후 몇 년이 지났습니다. 질병에다 다른 많은 일로 인해 때때로 문안도 여쭙지 못해서 우러르는 마음이 쌓여갑니다. 정사(正思)가 오면서 편지 두 통을 가져왔는데, 뜻은 두텁고 예의는 부지런하여 보잘 것 없는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독실하게 학문을 좋아하시는 뜻을 늙어서도 잊지 않으신 줄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소식을 주신 후에 겨울이 깊어가고 날씨도 추웠다 더웠다 일정치가 않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지내시는 데 만복이 깃드시기를 빕니다.
一別累年, 疾病多故, 不獲以時致問訊, 第積馳仰. 正思之來, 辱手書兩通, 意厚禮勤, 有非區區淺陋所敢當者. 然足以見好學之篤, 雖老而不忘也. 信後冬深, 寒瞹不常, 不審尊候何如? 伏惟起處萬福.
제 나이가 비록 당신보다는 작습니다만 지금은 저 역시 늙었습니다. 평생토록 학문에 마음을 쏟지 않은 것은 아닌데도 아직도 크게 힘을 얻은 곳은 없습니다. 보내 온 편지를 세 번이나 반복해 읽어 보니 모두 제 힘이 미칠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당신께 작은 보탬이라도 되겠습니까? 다만 부지런한 뜻에 감사드리는 마음에 또한 제 고루한 생각을 감출 수도 없습니다.
가만히 보내 온 편지를 음미해 보니 논어를 인용한 몇 조항에서 인(仁)을 말한 것이 매우 자세하고, 반복하여 논한 것이 또한 자세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仁)이라는 한 글자에 대한 의리와 의미, 그 힘써야 할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여기에 대해 본래 말없이 계합(契合)한 것이 있다고 해서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인(仁)이 인(仁)이 될 수 있는 이유도 애초에 환하게 마음 속에서 이해하지 못했고, 정확하게 자신의 몸에 터득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저는 어기지 않고 해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멍하니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매는 것처럼 손 쓸 곳이 없게 되어, 궁핍함과 통함 얻고 잃는 즈음에 태연하게 마음 속이 동요하지 않는 경지에 가지 못한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현명한 당신께서 이런 데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당신께서 말씀하신 변통하려는 방법[變通之術]으로 살펴 보면 저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것을 가볍게 여기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자공(子貢)은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으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은 스스로 자신을 지극하게 여겨셔였느데, 공자께서는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자만 못하다’고 하신 것은 무엇때문이겠습니까? 아첨하지도 교만하지도 않는 것은 여전히 빈부에 얽매인 것이요, ‘가난 속에서도 즐거워하고 예를 좋아하는 것’은 이미 빈부의 바깥에 초연하게 벗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된 원인은 반드시 과거에 힘써 노력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지,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이리저리 살펴가며, 비교하고 계산해서 막고 얼누르고서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하물며 스스로 헤아려보았는데 반드시 편치 못한 점이 있어서 미리 변통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라면 아마도 그렇게 세운 계획은 또 아첨하지도 교만하지도 않는 것 보다 더 낮은 곳에서 나왔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못난 제 생각으로는 당신께서 일단 다른 것을 돌아다보지 마시고, 여기에 대한 성현들의 말을 깊이 찾아서 인이 어째서 인이 될 수 있는 지를 찾아보시고, 자신의 몸에 돌이켜 진실하게 힘을 쓰신다면 어기지도 해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모두 가리킬 수 있는 물건처럼 될 것이요, 궁핍함과 통함 얻고 잃음의 변화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탈연( 脫然)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熹犬馬之齒雖在賢者之後, 然今亦是老境. 平生爲學非不究心, 然未有大得力處. 三復來誨, 皆其力之所未能及者, 而何足以少助於高明? 但荷意之勤, 亦不敢隱其固陋耳.
竊味來書所引論語數條言仁甚悉, 而所論反復亦不爲不詳, 獨於仁之一字義理意味與其所以用力之方皆未之及. 豈其於此固有以黙契而忘言也耶? 不然, 則仁之所以爲仁者初未嘗曉然有見於心而的然有得於己, 吾恐所謂不違不筈者之茫然如捕風繫影之無所措, 而所以處夫窮通得喪之際者或未能泰然無所動於其中也. 長者之明, 雖不至此, 然以所謂變通之術者觀之, 則有以見其未免於彼之重而此之輕也.
昔子貢無諂無驕之問, 蓋自以爲至矣 而夫子以未若樂與好禮, 何哉? 無諂無驕, 則尙局於貧富之中; 樂且好禮, 則已超然乎貧富之外也. 然其所以至此, 則必嘗有所用其力矣, 非規規於兩者之間, 有所較計抑遏而求出於此也. 又况於自料其必有所不安而預爲變通之計, 則恐其所立又將出於無諂無驕之下也無疑矣.
區區鄙意竊願長者於此姑無恤其他, 而深探聖賢之言, 以求仁之所以爲仁者, 反諸身而實用其力焉, 則於所以不違不害者皆如有物之可指, 而窮通得失之變脫然其無與於我矣. 不識高明以爲如何? 若有未安, 幸復見敎也.
조기도(사연)에게 답함 答趙幾道(師淵)
요즘 학문의 폐단에 대해서 논한 것은 매우 좋습니다만 ‘냉담(冷淡)한 생활’이라고 하신 것은 반작용이 늦게 나타나기는 하겠지만, 그 피해는 클 것입니다. 맹자가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을 버리고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난 날 바로 우리 당[吾黨]은 외롭고 약했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스스로 모순을 만들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성내면서 어지럽게 다투어 변론하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처럼 싫어해서 다 참고 받아들이고 극단적으로 논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깊이 그 폐단을 깨달았습니다. 천리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채 한 가지 맛[一味]에 빠져 개인적인 생각[私意]으로 동쪽에서 만들고 서쪽에서 날조하면서, 많은편벽되고 방탕하며 부정하고 도피하는[詖淫邪遁] 주장들을 만들어 내고, 게다가 배는 텅텅 비우면서 마음만 고상하면 된다고 하면서, 망령되게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성현조차 아래로 굽어보고, 예법을 멸시합니다. 단지 이 한 가지 절목만으로도 학자들의 심술(心術)에 더욱 해를 끼칩니다. 그러므로 끊어버리 듯이 논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미 일가를 이루어버리면 결코 버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미 명백한 것으로 후학자들이 사견(邪見)의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면할 것이니 이 또한 한 가지 일입니다.
所論時學之弊甚善, 但所謂浴淡生活者, 亦恐反遲而禍大耳. 孟子所以舍申․商而距楊․墨者, 正爲此也. 向來正以吾黨孤弱, 不欲於中自爲矛盾, 亦厭徽紛競辯若可差者, 故一切容忍, 不能極論. 近乃深覺其弊, 全然不曾略見天理彷彿, 一味只將私意東作西捺, 做出許多詖淫邪遁之說, 又且空腹高心, 妄自尊大, 俯視聖賢, 蔑棄禮法, 只此一節, 尤爲學者心術之害. 故不免直截與之說破. 渠輩家計已成, 決不肯舍. 然此說旣明, 庶幾後來者免墮邪見坑中, 亦是一事耳.
조기도에게 답함 答趙幾道
옛날에 사서(史書)를 읽는 사람은 그 사실을 기록하고 그 문장을 발췌하여 문장을 짓는 자료로 활용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근세의 학자들은 그 비루함을 깨닫고서 곧 방법을 바꿔 그 형세의 이해(利害) 관계와 사정의 득실(得失)을 고찰하는데 힘을 쓰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마천(史馬遷)의 사기(史記)를 더욱 좋아해서, 이 책을 강론하고 추존하여 거의 부자(夫子: 공자)보다 훌륭하다고 여기며, 논어, 맹자 따위를 버리더라도 사기는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한 두 가지 주장을 들어 보면 다만 전국(戰國) 시대 이후의 식견에 불과했습니다. 그 정당한 곳도 공씨(孔氏)를 추존(推尊)할 줄 알기는 하지만 한갓 그 겉만 보고 그 밖으로 나타난 문장만 좋아하는 데 불과합니다. 그가 “부자(夫子)에게서 절충(折衷)했다”는 것도 실제로는 무엇을 절충한 것인지 알 지 못한 것입니다. 후세에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사마천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사서(史書)를 읽는 선비가 대부분 생각과 뜻이 거칠고 얕아 정치하고 은미한 의리를 대부분 알 수 없었고, 세속의 진부한 견해에 빠져서 비록 옛 성현이라 하더라도 이해(利害)를 따지는데 불과했을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오직 소황문(蘇黃門: 蘇轍)이 고사(古史)의 서문[序]을 짓고 첫머리에서 “옛 성인들은 반드시 선(善)을 행하셨는데, 마치 불이 언제나 뜨겁고 물은 언제나 찬 것과 같이 꼭 실천하셨으며, 불선(不善)한 짓을 하지는 않으셨는데 추우(騶虞)가 생물을 죽이지 아니하고 절지(竊脂)가 곡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소철은) 의리(義理)의 큰 강령(綱領)을 매우 분명하게 알았고, 아주 친절하게 제시했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그 아래 문장이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 몇 구절은 근세의 여러 유자들이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그가 학문을 공부하던 처음부터 본래 차례를 잃어버렸고 널리 많은 것을 편렵하지 못해서 근본과 말단에 대해 일일이 핵심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의 자질은 평온하고 조용하여 달리 외적인 측면을 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런 큰 강령에 대해 비슷한 모습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러한 지경에 도달하려고 무척 노력하였지만, 도리어 불교와 도가의 가르침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성현이 가르쳐 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위한 올바르고 타당한 규모(規模)를 확립하지도 못했고, 사업(事業)에서 드러내지도 못했으며, 학자에게 전달하지도 못했습니다. 헛되이 이런 생각만 말했을 뿐이어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뜻도 결국 문자와 언어의 사이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의 문도(門徒)들이 비록 극력 추존했지만 끝내 누구도 그의 이 말을 뽑아내어 으뜸가는 가르침이라고 천명한 사람은 없었으니 또한 안타깝습니다.
그가 사마천의 잘못을 논한 두 구절은 사마천의 고질적인 병폐[膏肓]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요즘에 사기를 추존한다는 자들 가운데 여기에 대해 대충이라도 분석하고 풀이한 자들이 있는지 어쩐지 알 수 없을 따름입니다. 오늘 이미 편지를 썼는데, 우연히 이 말을 보게 되어 애오라지 다시 아뢰는 것입니다만, 어떻게 여기실지는 모르겠습니다.
昔時讀史者不過記其事實, 摭其詞釆, 以供文字之用而已. 近世學者頗知其陋, 則變其法, 務以考其形勢之利害․事情之得失. 而尤喜稱史遷之書, 讀說推尊, 幾以爲賢於夫子, 寧舍論․孟之屬而讚讀書. 然嘗聞其說之一二, 不過只是戰國以下見識. 其正當處, 不過知尊孔氏, 而亦徒見其表, 悅其外之文而已. 其日折衷於夫子者, 實未知所折衷也. 後之爲史者又不及此, 以故讀史之士多是意思粗淺, 於義理之精微多不能識, 而墮於世俗尋常之見, 以爲雖古聖賢, 亦不過審於利害之算而已. 唯蘇黃門作古史序, 篇首便言古之聖人其必爲善, 如火之必熱, 水之必寒; 不爲不善, 如騶虞之不殺, 竊脂之不穀, 於義理大綱領處見得極分明, 提得極親切. 雖其下文未能盡善, 然只此數句, 已非近世諸儒所能及矣. 惜其從初爲學功夫本無次序, 不曾經歷, 不能見得本末一一諦當, 只其資質恬靜, 無他外纂, 故於此大頭段處窺測得箇影響. 到此地位, 正好著力, 却便墮落釋老門尸中去, 不能就聖賢指示處立得修己治人正當規模, 以見諸事業, 傳之學者, 徒然說得此箇意思, 而其意之所重終止在文字言語之間. 其徒雖極力推尊之, 然竟不曾有人能爲拈出此箇話頭以建立宗旨者, 亦可恨也.
不知近日推尊史記者曾爲略分解否耳. 今日已作書, 偶思得此語, 聊復奉告, 不審以爲如何也.
유중칙(구)에게 답함 答劉仲則(榘)
【해제】이 글은 순희 16년(기유, 1189, 60세) 혹은 그 이후에 유구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서 학문의 도는 서책(書冊)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을 유지하고 사물을 접하는 사이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치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서책을 버리고 다시는 강학(講學)하고 묻고 따지지 않으신다면, 아마 몸을 유지하고 사물을 접하는 즈음에 반드시 모두 그 본원을 알아 그 요체[幾會]에 들어맞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공자가 “백성과 사직(社稷)이 있으니 하필 글을 읽은 뒤에야 학문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라고 논한 자로를 미워한 까닭입니다.
대학장구 한 통을 뒤늦게 보내니 생각할 꺼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독서는 오직 마음을 비우고 뜻을 전일하게 하여 차례대로 점차 나아가야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백뢰(百牢)와 구정(九鼎)과 같은 것을 한 입에 그 맛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示喩學間之道不專在書冊, 而在持身接物之間, 理固如此. 然便全舍去書冊, 不復以講學問辨爲事, 則恐所以持身接物之際未必皆能識其本源而中於幾會. 此子路人民社稷何必讀書之論所以見惡於聖人也. 試以洽民理事之餘力益取聖賢之言而讀之, 而思之, 當自覺有進步處, 然後知此言之不妄也. 大學章句一通, 謾奉致思之地. 大抵讀書唯虛心專意, 循次漸進爲可得之. 如百牢九鼎, 非可以一撮而盡其味也.
황문숙에게 답함 答黃文叔
학문을 하는 공부에 대해서 논한 것은 매우 좋습니다만 만약 일상 생활의 일처리[日用周旋]가 지극한 선[至善]이라는 것을 안다면, 또한 크게 힘을 들여가며 붙잡을 필요가 없으니, 그렇게 하면 도리어 너무 다구치는 격이어서 거꾸로 놓치게 될까 걱정됩니다. 단지 여유있게 지향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곧 붙잡아 지키는 것[持守]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순수하고 익숙하게 되면 저절로 순서를 알게 될 것입니다. 독서는 또 분명한 곳에 나아가서 거칠게 보았던 것에 푹 젖어들어야지[涵泳], 꼭 지나치게 상고하거나 사색할 필요는 없으니, 오래되면 물이 젓듯이 스며들어 저절로 의미가 투명하게 통할 것입니다.
지난 번에 작은 선[小善]은 경중(輕重)을 논할 것이 못 된다고 한 것은 작은 선을 굳이 실천할 것이 못 된다고 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커다란 본체[大體]를 이해해서 노력하는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오직 이것만을 본령을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이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좇아야 하는 것이지 작다고 해서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所論爲學功夫甚善, 但若果是見得日用周旋無非至善, 則亦不必大段著力把捉, 却恐迫切而反失之. 但且悠悠隨其所向, 便是持守. 久之純熟, 自見次第矣. 讀書且就分明處看覰涵泳, 不必過爲考索, 久之浹洽, 自然通透也. 向說小善不足爲重輕, 非是以小善爲不足爲, 但謂要識得大體, 有用功處, 不專恃此爲本領耳. 善之所在, 卽當從之, 固不可以其小而忽之也.
사현(沙縣)의 재(宰) 송남강에게 답합答沙縣宋宰 南强
산간에 엎드려 지내는 몸인지라 길에서 친구들의 말을 듣고, 선정이 쌓인다는 좋은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늘날 벼슬하는 자는 눈 앞에 닥친 잘못만을 구제하려 할 뿐 한결같은 뜻으로 백성을 돌보고 어루만지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당신같은 사람이 그 중간에 나타나 백성들은 고생하지 않고, 관청에서는 일을 폐(廢)하는 일이 없으니 가상(可尙)한 일입니다. 듣기로는 조정의 높은 관리들도 이미 알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원하건데 나에게 있는 것을 더욱 닦아, 그 결실[實]이 이미 커지면, 명성은 더욱 높아져 가릴 수 없게 될 것이니, 이런 데에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跧伏山間, 聽於道塗與凡士友之言, 具知政績之美. 竊謂今之爲吏者救過目前, 不得一意於撫摩之政久矣. 乃如執事者出乎其間, 民不告勞而官無廢事, 是可尙已 如聞當路頗已相知, 更願益修其在我者, 其實旣大, 則其聲愈閎闍, 將不可携揜, 政不必有意於其間也.
양간경(적)에게 답함 答楊簡卿(迪)
오래도록 소식을 듣지 못하다, 편지를 받았습니다. 신정(新正) 이후로 뫼시고 봉양하는 일도 좋다고 하니 위안이 됩니다. 또 이미 고과 평가[書考]도 마쳤고, 사군(史君)의 추천(推薦)도 받았다고 하니, 더욱 기쁩니다. 다만 조수(趙帥)에게 보낸 편지는 당신께서는 나이도 어린데 어재서 이렇게 급하게 구시는 것입니까? 가령 이전의 과거에서 등과(登科)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처럼 천거장[擧狀]으로 관승(關陞)을 요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생토록 이렇게 하지 않았던 까닭에 이를 남에게 베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신을) 남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편지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부탁에 응할 수는 없고, 다만 한 마디 해줄 말만 있습니다. 바라건대 당신께서는 꼿꼿한 의지[抗志]를 분명하게 느높여 세속의 풍조[流俗]에서 자신을 우뚝 건져내시라는 것이 저의 소망일 뿐입니다. 정백(井伯: 林成季)이 비록 서로 아낀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서로간에 어떻게 아껴야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久不聞間, 辱書, 審聞新正以來, 侍奉吉慶, 爲慰. 又知已遂書考, 又得史君薦削, 尤以爲喜. 但所諭趙帥書, 在吾友妙年, 何遽汲汲如此? 向使前擧未登科, 不成如今亦要擧狀關陞也? 平生不敢爲此, 故亦不欲以此施之於人. 不喜人宛轉爲人求知, 故亦不欲作此等書. 反復思之, 無以應命, 但有一言爲贈, 冀賢者抗志高明, 有以自拔於流俗, 乃所望耳. 井伯雖實相愛, 然似未知所以相愛也.
강몽량(사)에게 답함 答江夢良(史)
보내주신 학교(學校)에 얽힌 내용은 훌륭한 뜻을 다 알겠습니다. 오늘날 교관(敎官)으로서 이와 같은 데에 뜻을 두는 사람은 정말이지 쉽사리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학업(學業)에 힘쓰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의리(義理)를 깊히 해석하지 못하더라도, 또 경사(經史)를 많이 읽고 고금(古今)의 일에 널리 통하는 것도 한 가지 일입니다. 단지 이 시대의 문장[時文]만을 읽는 것은 눈 앞의 일을 위한 구차스런 계획일 뿐입니다.
示喩學校曲折, 具悉雅志. 今時敎官能留意如此者誠不易得, 然更在勉其學業. 雖未能深解義理, 且得多讀經史, 博通古今, 亦是一事. 不可只念時文, 爲目前苟簡之計也.
오의지(남)에게 답함 答吳宜之(南)
【해제】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 52세)에 오남(吳南)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학문하는 공부가 말한 것과 같다면, 이는 대단히 용맹 정진하신 것이니 이제는 예전의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앞뒤로 여러 차례 이런 말을 들었으나 서로 만나 보면 성정(性情)과 태도가 완연히 예전 사람 그대로일 뿐, 원래부터 조금치도 고친 것이라곤 없으니 오늘 하는 말도 못난 저로서는 감히 믿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말씀하신 병폐가 제거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반성하는 것이 조악하고 엉성하며, 경솔하게 말하는 병폐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렇게 학문을 하는 것은 ‘뒤로 물러나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격입니다.
所論爲學之功若如所言, 則是大段勇猛精進, 非復昔人矣. 然前後屢聞此言, 而及至相見, 則性情態度宛然只是舊人, 元未有毫髮改變. 則今日之云, 鄙意固有所未敢信也. 且不唯所說之病不曾去, 而省己粗疏․發言輕易之病又更增, 長. 以此爲學, 所謂却行而求前也.
오의지에게 답함 答吳宜之
【해제】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 52세)에 오남(吳南)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다른 설명이 어지러운 것은 모두 의(義)와 명(命)에 기꺼이 안주하지 않으려는 뜻 때문입니다. 의지(宜之: 吳南)의 재기(才氣)로 조금만 더 고요하고 무겁게 처신하면서 학문하는 데 마음을 깊이 담그신다면 어느 경지인들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지금 바로 한결같이 부화(浮華)하고 조급하여 스스로 일종의 구차스러운 스스로 용서하는 의론을 세웠으니, 읽어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번거롭게 만듭니다. “세상 사람들의 습속(習俗)이 각박하고 추악하여 함께 말하기조차 어려워 위곡(委曲)하게 깨우쳐 인도하려고 한다”고 하니, 가만히 이 뜻을 상고해 보면 아마 스스로가 각박하고 추악하여 함께 말하기 어려운 지경을 벗어나지 못한 듯 합니다.
“금일 뜻을 결정하여 배에 올랐다”고 하신 것은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고 통렬하게 자신을 수렴하면 오히려 절반이라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예전의 생각과 같을 뿐이라면 훗날 당할 곤란은 오늘보다 더욱 심할 것입니다. 비록 뉘우치더라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학자(學者)는 과거를 위한 공부를 버리고 나면 종사할 다른 일이 없다고 하셨는데, 모르겠습니다만 도대체 이 이 말은 어떻게 해서 나온 것입니까? 제 생각으로는 과거를 위한 공부 이외에 모든 학자들이 당연히 힘써야 할 곳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께서도 깊이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他說紛紜, 皆是不肯安於義命之意. 以宜之才氣, 若硝加靜重, 潛心向學, 何所不至? 今乃一味浮躁, 自立一種苟簡自恕議論, 讀之今人腹煩. 如謂世人習俗薄惡, 難卒與諸, 而欲委曲開導之, 竊詳此意, 恐自未免於薄惡而難與語也. 今日決意登舟, 無可言者. 但願更思此言, 痛自收歛, 猶可救得一半. 若只如前日意思, 他時之困當有甚於今日者. 雖欲悔之, 不能及也. 所謂學者舍科擧文字未有可從事者, 不知此語何爲而發? 若如鄙意, 則科擧文字之外, 學者儘有合用力處. 此賢者所當深念也.
오의지에게 답함 答吳宜之
【해제】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 52세)에 오남(吳南)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보내 온 편지에서 다른 사람의 장단과 득실은 논한 것은 정밀하고 타당합니다. 다만 평소에 독서와 학문을 하는 뜻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견해와, 자신과 외물을 접하는 태도[處己接物]에 대한 견해는 서로 엇비슷하지가 않은 것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째서 외적인 데에는 힘쓴 것이 많고 자신의 몸을 반성하는 것은 간혹 누락된 것입니까? “자공(子貢)이 인물을 비교하였더니, 공자께서 ‘사(賜)는 어진가, 나는 겨를이 없다’고 하셨읍니다. 의지(宜之)는 항상 이 구절을 생각하여 생각이 내면을 향하여 자기에게 절실한 곳에 나아가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장단과 득실을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진공(陳公)은 현명하시니 본래 즐겨 들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사에 걸쳐 일이 많은데 어떻게 여기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시에는 본래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만 이 역시 급한 일은 아닙니다. 하물며 (남에게) 바쳐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경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 중에서도 더욱 정도가 심한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에 대한 의론[史論]도 갑자기 글을 써서는 안 됩니다. 또한 경전을 궁구하고 이치를 관찰하는 데 힘써 깊이 스스로 함양(涵養)해서 자기 자신과 관련된 일에서 (의론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觀夾書所論它人長短得失, 無不精當, 但平日所見所以讀書爲學之意, 處己接物之方, 則甚有不相似者. 豈其務外者多而反身或闕耶? 子貢方人, 子曰: ‘賜也, 賢乎哉夫我則不暇.’ 願宜之常思此句, 念念向裏, 就切己處做功夫, 他人之長短得失, 非吾之所當知也. 陳公之賢固樂聞之, 然公私多事, 何能及此? 新詩固有佳句, 然亦非事之急. 况欲技獻, 求知於人, 此騖外之尤者, 不可以不戒. 史論正亦未須遽作, 且務窮經觀理, 深自涵養, 了取自家身分上事爲佳.
오의지에게 답함 答吳宜之
【해제】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 52세)에 오남(吳南)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편지를 받고 이미 도성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운 줄 알았는데, 지금 이미 도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한적하고 먼 곳에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이리저리 관시(館客)과 참시(參試)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할 수 있었더라면 친척 중에 황직경(黃直卿)과 같은 이는 응당 먼저 부탁해서 (관직을) 얻게했을 것입니다. 겸하여 평생의 학문도 다만 궁핍함을 버티며 도를 지키는 한 가지일 뿐이어서, 벗들이 멀리서 와서 서로간에 묻는 것고 바로 이것을 위해서일 뿐입니다. 지금 제 뜻을 굽혀 의지(宜之)의 뜻을 따르면서 서로 경영한다면 학생과 스승 사이에 인의를 저버리고 이끗[利]을 품고서 서로를 대접하는 것이니 어떻게 학문의 본의를 찾겠습니까?
承書, 知已爲入都計, 今想已到矣. 但憙身在閑遠, 豈能爲人宛轉求館求試? 若能如此, 則親戚間如黃直卿輩當先爲圖得矣. 兼平生爲學只學固窮守道一事, 朋友所以遠來相問, 亦正爲此. 今若曲狥宜之之意, 相爲經營, 則是生師之間去仁義而懷利以相接矣, 豈相尋問學之本意耶
오의지에게 답함 答吳宜之
【해제】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 52세)에 오남(吳南)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편지에서 역설(易說)이 지나치게 간단하다고 하셨습니다만, 이 책의 전체적인 면모[體面]는 다른 경전과 달라서, 이와같이 문장의 자구나 손보면서 설명하고 지나가야지[點掇說過] 말을 많이 하게 되면 곧 설명에 매몰되는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선유(先儒)의 주해(注解)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두 이 병통에 빠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중간(中間)에 조금 경(經) 아래의 주석문을 전(傳) 속으로 옮겨서 경문(經文)의 의미가 다시 너그러워졌을 뿐 공부(功夫)를 통해 얻은 것은 없습니다. 지금은 이처럼 병으로 쇠약하니 끝내지 못한 수많은 문자들이 있어서 종신토록 여한이 될까 두렵습니다.
所喩易說誠是太略, 然此書體面與他經不同, 只得如此點綴說過, 多著言語便說毅了. 先儒注解非是不好, 只爲皆墮此病, 故不滿人意. 中間便欲稍移經下注文入傳中, 庶得經文意思更寬, 而未有功夫到得. 今病衰如此, 更有無限未了底文字, 恐爲沒身之恨矣.
서사원(문경)에게 답함 答徐斯遠(文卿)
문숙(文叔)이 현(縣)을 맡고서 공부가 착실치 못해 이처럼 낭패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힘을 썼던 것일까요? 벽치(辟置)의 주장은 어려움을 당해 구차하게 벗어나려는 것이니 더욱 의리에 어긋나는 일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단 말입니까? 게다가 부탁할만한 곳조차 없는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자경(子耕)에게서 요즘 연락을 받았습니까? 괴로운 일은 어떻다고 하던가요? 생각해보면 이미 편해지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후생(後生)들 가운데 재능이 못난 자들은 시사를 구제하지도 못하고, 재능이 뛰어난 자들은 대부분 이 문장으로만 내달리고 있습니다. 자경(子耕)이 근래에 내면으로 향할 것을 깨달았다니 매우 기쁨니다.
文叔作縣, 不作著實工夫, 狼狽至如此, 如何著力? 辟置之說, 臨難苟免, 尤爲非義, 如何可萌此意? 况未有可求處耶. 子耕得近信杏? 所苦如何? 想已向安. 如今後生遲鈍者不濟事, 其開爽者又多騖於文釆. 子耕近來覺向裏, 甚可喜也.
서사원에게 답함 答徐斯遠
언장(彦章)이 예전의 주장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바로 자기 견해를 지키려는 것이니, 나중에도 독한 수단으로 탄핵(彈劾)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가짜 금을 얻고서는 감히 불 속에 집어넣고 단련하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다면 어떻게 장족의 발전을 하겠습니까? 승가(僧家)에 유리병자선(琉璃甁子禪)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彦章守舊說甚固, 乃是護惜己見, 不肯自將來下毒手彈駁. 如人收得假金, 不敢試將火燬. 如此如何得長進? 僧家有琉璃甁子禪之說, 正謂此耳.
서사원에게 답함 答徐斯遠
창보(昌父: 趙藩)의 지조(志操)와 문장[文詞]은 모두 떠돌아다니는 무리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지금 슬픈 일을 당해서 품은 생각을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이미 말했으니, 지엽적인 것은 잘라내어 버리고 일상생활에 나아가 의리의 본래 그러한 것을 깊이 살피신다면 의거할 곳이 생겨 실질적인 곳[實地]으로 나아가데 되고, 떠들썩한 사람[騷人]이나 묵객(墨客)이 되는 데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일 뿐입니다. 지금 그가 품은 뜻이 여기에 그치지는 않는다지만 오히려 편중된 뜻이 있게 되면 자기에게 절실한 곳에 편안함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원(斯遠) 또한 이 뜻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 다행히 서로 경계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언장(彦章)의 의논이 비록 치우치고 막혀 통하지 않는다는 병통이 있으나 그의 뜻과 생각은 내실이 있고 사실에 가까운 것이어서 받아들일만한 점이 있습니다.
昌父志操文詞皆非流輩所及, 至此適値悲撓, 未能罄竭所懷. 然大槪亦已言之, 不過欲其刊落枝葉, 就日用間深察義理之本然, 庶幾有所據依, 以造實地, 不但爲騷人墨客而已. 今渠所志雖不止此, 然猶覺有偏重之意, 切己處却全未有所安也. 斯遠亦不可不知此意, 故此具報, 幸有以交相警切爲佳耳. 彦章議論雖有偏滯不通之病, 然其意思終是靠裏近實, 有受用處也.
조창보(번)에게 답함 答趙昌甫(蕃)
사원(斯遠)이 자못 염려스럽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되면 ‘고궁(固窮)’이란 두 글자만이 힘을 쓸 곳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바로 구덩이에 떨어져 이렇게 (힘쓸 곳이) 없게 됩니다. 더우기 문사(文士)는 말을 교묘하게 쓰기 때문에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 쉽사이 잘못된 길로 빠져 들어갑니다. 근세 진무기(陳無己: 陳師道)가 장뇌주(章雷州: 章惇)를 만나지 않았던 것과 여거인(呂居仁: 呂本中)이 양사성(梁師成)에게 답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은 (이런 사람이) 전혀 없다가 겨우 (이 두 사람 정도나) 있는 것이니 귀하게 여길만 합니다.
斯遠殊可念, 吾人當此境界, 只有固窮兩字是著力處. 如其不然, 卽墮坑落塹, 無有是處矣. 允是文士巧於言語, 爲人所說, 易入邪徑. 如近世陳無己之不見章雷州, 呂居仁之不答染師成, 蓋絶無而僅有之, 爲可貴也.
서언장에게 답함 答徐彦章
편지를 받고 반복하여 읽고서 더욱 정밀한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직 발하기 전이라도 진실로 물(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성(性)과 정(情)은 두 가지가 아니어서 텅비고 고요하기만 한[虛靜] 때는 없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개 아직 발하기 전에는 모든 이치가 모두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텅 빈[虛] 가운데 가득찬[實] 것이요, 고요함[靜] 속의 움직임[動]인지라, 혼연하여 잡을 수 있는 형체나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중(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발한 다음에는 갖추어진 진실한 이치[理]가 바로 움직임[動] 속에서 운행할 뿐입니다.
보내 온 편지는 본래 스스로 이단(異端)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지만 도리어 경계를 침범한 곳이 있습니다. 게다가 주장(主張)이 너무 지나치고 기상(氣象)이 급박하여 침잠(沈潛)하고 무르익은 맛이 없으니 더욱 작은 잘못이 아닙니다. 원컨대 장차 마음을 너그럽고 평온하게 하여 이 이치[理] 속에 깊이 잠겨들어 천천히 작은 틈새를 분석한 뒤에야 진실로 유학과 불교의 옮고 그름을 알게 될 것이니, 반드시 이처럼 박절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 날 논어에 대한 설명 가운데서 이천선생(伊川先生)이 효제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 된다고 주장한 것을 논파했는데, 이것은 바로 성(性)과 정(情)의 사이에서 분별하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더 완미해야지 경솔하게 이론을 만들어 전현(前賢)을 가볍게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치중화(致中和) 한 구절에 대해서는 깊이 심사숙고해 보시고, 선입견을 주장하시 않으신다면 아주 다행이겠습니다.
承愉諄複, 益見精詣. 鄙意竊謂未發之前固不可謂之無物, 但便謂情性無二, 更無虛靜時節, 則不可耳. 蓋未發之前萬理皆具, 然乃虛中之實, 靜中之動, 渾然末有形影著莫, 故謂之中. 及其已發, 然後所具之實理乃行乎動者之中耳. 來喩本欲自拔於異端, 然却有侵過界分處. 而王張太過, 氣象急迫, 無沈浸醲郁之味, 尤非小失. 願且寬平其心, 涵泳此理而徐剖析於毫釐之際, 然後乃爲眞知儒佛之邪正, 不必如是之迫切也. 前日見論語說中破伊川先生孝悌爲仁之本之說, 此正是於情性之際未能分別, 恐當更加玩味, 未可率然立論, 輕詆前賢也. 致中和一節, 亦告深思, 毋以先入之說爲主. 甚幸甚幸!
서언장에게 답함 答徐彦章
보내 온 편지에서 선(善)을 주로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선 가운데 動과 정(靜) 두 가지가 있으니, 상대적으로 말하면 정(靜)이 주체가 되고 동(動)이 객체가 됩니다. 이것은 천지 음양의 자연스러운 이치이니 적멸(寂滅)의 혐의 때문에 그만 두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평온히 하여 서서히 생각해 보십시오. 오래되면 반드시 합치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예전에 들었던 것을 고집하여 하나를 들어 백 가지를 폐한다면, 날로 새로워지는 데 나아가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示喩主善之云甚佳, 但善中有動靜二者, 相對而言, 則靜者爲主而動者爲客, 此天地陰陽自然之理, 不可以寂滅之嫌而廢也. 更望虛心平氣, 徐以思之, 久必有合矣. 若固執舊聞, 擧一廢百, 懼非所以進於日新也.
서언장에게 답함 答徐彦章
제가 전일에 그대의 편지를 받고 돌아가는 인편이 벌써 떠나가는데도 결국 답장을 본내지 못했으니, 저의 불민한 부끄러움을 깊이 느꼈습니다. 이틀 간에 우연히 그대의 경전에 대한 설명을 보다가 의심스런 뜻이 여러 조목이 있어 별지(別紙)를 보내 물었습니다. 전서(前書)와 함께 그대 아들의 거처로 부쳐 인편을 찾아 전달해 드리도록 했습니다. 반복해서 깊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설명 가운데 중화(中和)와 동정(動靜)은 더욱 큰 뜻이 있으니, 이 곳이 한 번 어긋나면 경전의 뜻을 잘못 이해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도체(道體)도 곧 분명하지 못하여 일상의 공부에 항상 급박한 뜻이 있어 깊이 침잠하여 편안하고 고요한 기상이 없을 것이니, 허둥지둥 지나쳐서서는 안될 듯합니다.
熹前日拜狀, 而還信已行, 遂不得附, 深負不敏之愧. 兩日偶看經說, 有疑義數條, 別紙奉扣. 幷前書送令郞處, 尋便附致. 幸反復之, 使得以致思爲望. 說中中和動靜尤是大義, 此處一差, 非唯錯會經旨, 且於道體便不分明, 而日用工夫常有急迫之意, 無深沈安靜氣象, 恐不可草草放過也.
서언장에게 답함(경설에 대한 의문을 논함)答徐彦章(論經說所疑)
“선(善)에 독실하여 틈새나 끊어짐이 없는 것을 일(一)이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노자와 석가의 병폐와 체용(體用)의 설을 논한 것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대개 노자와 석가의 병폐는 동(動)을 싫어하고 정(靜)을 구하며 체(體)만 있고 용(用)은 없는 데 있습니다. “체용을 분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데 대해서는 사물의 이치가 본래 그러한 것이니, 저들의 사사로운 말이 아닙니다. 나의 편지에서 구하더라도 비록 체용에 대해서 말한 것이 없지만, “고요하여 아직 발현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체(體)를 이른 것이고, “감통(感通)하여 비로소 발현한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용(用)을 이른 것입니다. 또 지금 이른바 ‘일(一)’이라는 것은 그 사이에 진실로 동정의 차이가 있으니, 또한 어찌 체용의 구분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선에 독실하여 틈새나 끊어짐이 없다”고 해서 드디어 주야(晝夜)로 헤아리고 생각하여 한 순간도 잠시 정지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바깥의 사물에 접하지 않고 마음 속의 욕망이 싹트지 않을 무렵에는 마음의 본체가 깊은 연못처럼 고요하여 만 가지 이치가 모두 구비되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선에 독실하여 틈새와 끊어짐이 없는 근본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살피지 않고, 게다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설을 폐하지 않고 도리어 홀로 노자와 석가가 고요함을 종지로 삼았다고 비난하니, 스스로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대저 노자와 석가는 정(靜)을 좋아하여 천하의 동(動)을 없애고자 하니, 이는 항상 잠자기만 하고 깨지 않아 유용(有用)을 무용(無用)에 버리는 것과 같은데, 성현은 진실로 이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지금 동(動)을 좋아하여 천하의 정(靜)을 없애고자 하니, 이는 항상 가기만 하고 그치지 않아 비록 힘들더라도 쉬지 못하는 것과 같은데, 성현은 또한 이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대개 그 과실이 비록 피차의 차이는 있으나, 한쪽으로 치우쳐 천하의 바른 이치가 아님은 마찬가지일 따름입니다.
아! 학자가 일음일양(一陰一陽)과 일동일정(一動一靜)이 서로 이길 수 있어 서로 없을 수 없음을 알 수 있고, 또 정(靜)이 주체가 되고 동(動)이 객체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거의 도체(道體)에 어둡지 않아 일상 생활에 그 힘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純於善而無間斷之謂一, 此語甚善. 但所論老釋之病․體用之說, 則恐末然. 蓋老釋之病在於厭動而求靜, 有體而無用耳. 至於分別體用, 乃物理之固然, 非彼之私言也. 求之吾書, 雖無體用之云, 然其日寂然而未發者, 固體之謂也; 其曰感通而方發者, 固用之謂也. 且今之所謂一者, 其間固有動靜之殊, 則亦豈能無體用之分哉? 非曰純於善而無間斷, 則遂晝度夜思, 無一息之暫停也. 彼其外物不援․內欲不萌之際, 心體湛然, 萬理皆備, 是乃所以爲純於善而無間斷之本也. 今不察此, 而又不能廢夫寂然不動之說, 顧濁詣老釋以寂然爲宗, 無乃自相矛盾邪? 大抵老釋說於靜而欲無天下之動, 是猶常寐不覺而棄有用於無用, 聖賢固弗爲也. 今說於動而欲無天下之靜, 是猶常行不止, 雖勞而不得息, 聖賢亦弗能也. 蓋其失雖有彼此之殊, 其倚於一偏而非天下之正理則一而已. 鳴呼學者能知一陰一陽․一動一靜之可以相勝而不能相無, 又知靜者爲王而動者爲客焉, 則庶乎其不昧於道體, 而曰用之間有以用其力耳.
“상(上)이 되고 덕(德)이 되고, 하(下)가 되고 민(民)이 된다”와 “칠세(七世)의 사당과 만부(萬夫)의 장(長)이다”라고 했는데, 이 설명은 모두 온당하지 못합니다.
‘爲上爲德, 爲下爲民’, ‘七世之廟, 萬夫之長’, 說皆未安.
“단전에서 그 도(道)로 되돌아간다고 했다”는 대목은 마땅히 아래 구절에 연결해야 할 것이다.
‘彖曰反復其道’當連下句.
해와 달, 추위와 더위, 어둠과 밝음은 반복(反復)하지 죽어서 다시 사는 이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한 가지 실례로 추론하여 설명하니, 석씨(釋氏)의 윤회설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日月․寒暑․晦明可言反復, 死無復生之理. 今作一例推說, 恐墮於釋氏輪廻之論.
천지(天地)의 마음과 적자(赤子)의 마음은 다시 헤아려 보아야 할 듯합니다. (정자(程子)와 여여숙(呂與叔: 呂大臨)의 문답에서 볼 수 있으니, 시험삼아 상고해 보십시오.)
天地之心與赤子之心, 恐更有商量.(程子與呂與叔問答可見, 請試詳之.)
“‘중행독복(中行獨復)은 내외(內外)를 합하는 도(道)이다” 이하는 그 설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필기를 잘못한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너무 고원하여 효(爻)의 시의(時義)와 학(學)의 등급(等級)은 모두 계합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中行濁復合內外之道’ 以下未曉其說, 恐是筆誤. 不然, 則爲說太高, 爻之時義, 學之等級, 似皆未契.
“일양(一陽)이 되돌아 옴” 과 “우레가 땅 속에 있다”는 하나의 뜻일 뿐이니, 대개 양(陽)이 닫혀 감춰진 가운데서 생겨나 지극히 미세하여 뭔가 작용하지 못할 때입니다.. 이제 하나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하면, 둘로 각각 하나의 뜻을 삼는 것이니, 온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一陽來復’與‘雷在地中’只是一義, 蓋陽生於閉藏之中, 至微而未可有爲之時也. 今日不拘乎一, 則以二者各爲一義矣, 恐末安也.
“반드시 종사하는 일을 둔다”고 했는데 이 구절은 알 수 없습니다. 시습(時習)과 근독(謹獨)이 곧 “종사하는 일을 둔다”는 것입니다. 이제 중간에다 아래의 하나의 ‘연(然)’자를 쓰니 곧 ‘사(事’)’자로 공부의 조목을 삼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맹자(孟子)의 주 속에서 이미 별도로 논의하였습니다.
‘然必有事焉’’, 此句未曉. 時習謹獨, 卽所謂有事. 今乃中間下一‘然’字, 則似以‘事’字爲工夫之條目矣, 恐或未然. 孟子說中已別論矣.
“힘쓰지 않아도 중에 맞다”는 중(中)을 미발(未發)로 말하니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이 중(中)자는 도리어 발현하여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이 없는 중(中)이니, 성인(聖人)의 마음은 발현할 때를 당하여 발현하므로 힘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의 차이가 없으니, 힘을 기울이지 않고 항상 발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로 동(動)으로 말미암아 말하는 것도 또한 온당하지 못하니, 아직 발동하지 못했을 때에 일찍이 성(誠)이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不勉而中’之‘中’以未發言恐未安. 此‘中’字却是發而無過不及之中. 聖人之心當發而發, 不待著力而自無過與不及之差, 非謂不待著力而常不發也. 誠由動言亦未安, 謂末動之時未嘗有誠, 可乎?
“중(中)이란 과(過)와 불급(不及)이 없는 것을 말한다” 하고, 또 “화(和)란 중(中)의 다른 이름이다”고 하니, 만일 이발(已發)의 측면에서 말하면 옳을 것이니, 대개 이른바 시중(時中)입니다. 만일 미발(未發)의 측면에 말하면 중(中)은 단지 치우치고 기우는 뜻이 있지 않으니, 또한 ‘화(和)’자의 지위와 같지 않습니다. 미발(未發)은 단지 사물에 응접하지 못했을 때에 비록 시정(市井)의 장사꾼이나 땔나무하는 천한 종도 또한 이 같은 시절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숨기겠는가? 이 때를 당해 진실로 물욕이나 진흙이 섞이지 않겠지만, 발현하여 절도에 맞으면 비록 사물에 응할지라도 또한 일찍이 섞인 바가 있지 않을 것이니, 곧 발현하되 절도에 맞지 않아야 바야흐로 섞인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아직 섞이지 않았을 때에는 전혀 발현하지 않고, 이미 섞인 후에 곧 이미 발현한 것이라고 말하면, 곧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발현은 영영 절도에 맞을 때가 없을 것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근본에 대해 함양하고 조절하여 붙잡는 공부가 있으면, 곧 이것은 정(靜) 속의 공부입니다. 이른바 정(靜)에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다면 참으로 동(動)한 바가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동(動)할 때 당해 동(動)하고 동(動)하면 반드시 절도에 맞으니, 석씨(釋氏)가 항상 정적(靜寂)에 힘쓰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中者無過不及之謂’, 又曰 ‘和者中之異名’, 若就已發處言之則可, 蓋所謂(5-2749)時中也. 若就未發處言之, 則中只是末有偏倚之意, 亦與 ‘和’ 字地位不同矣. 未發只是未應物時, 雖市井販夫․厮役賤隷亦不無此等時節, 如何諱得? 方此之時, 固未有物欲泥沙之汨, 然發而中節, 則雖應於物, 亦未嘗有所汨. 直是發不中節, 方有所汨. 若謂未汨時全是未發, 已汨後便是已發, 卽喜怒哀樂之發永無中節之時矣, 恐不然也. 於本有涵養操持之功, 便是靜中工夫. 所謂靜必有所事者, 固未嘗有所動也. 但當動而動, 動必中節, 非如釋氏之務於常寂耳.
“덕성을 높인다[尊德性]” 이하는 모두 지극한 덕의 방향이라고 말했는데, 말이 명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저 “발육준극(發育峻極)”과 “삼천삼백(三千三百)”은 모두 지극한 도리이고 그 사람은 지극한 덕을 갖춘 사람이니, 이 다섯 구절은 모두 지극한 덕을 닦아 지극한 도리를 응집하는 것입니다. 덕성을 높이는 것은 그 발육준극(發育峻極)의 위대함을 채우는 것이요, 문학을 따르는 것은 그 삼천삼백(三千三百)의 작은 것을 다 발휘하는 것이니, 아래 구절도 이를 따릅니다. 그 크고 작음을 모두 갖추고 정밀함과 거침이 둘이 아니므로 위에 거하든 아래에 거하든, 도(道)가 있든 도(道)가 없든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다만 예를 아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尊德性’以下皆至德之方, 語似未瑩. 大抵‘發育峻極’, ‘三千三百’皆至道, 其人則至德之人也, 此五句苟旬皆所以修至德而凝至道也. 尊德性所以充其發育峻極之大, 道問學所以盡其三千三百之小, 下句放此. 以其大小兼該, 精粗不二, 故居上居下․有道無道無所不宜, 非止爲知禮也.
‘중용(中庸)’ 두 글자는 각각 주장하는 것이 있어 다른 명칭으로 삼는다고 말했는데 또한 온당하지 못합니다.
‘中庸’二字各有所主, 以爲異名亦末安也.
정명도(程明道)의 중용(中庸) 해설을 선배들에게 물으니, 이는 곧 여여숙(呂與叔) 이후로 전한 자의 잘못입니다.
明道中庸說問之前輩, 乃呂與叔後來傳者之誤也.
“천지(天地)의 큼” 이하에서 설명한 것은 윗 문장과 통하지 않습니다. 찰(察)은 드러난다는 뜻이니, “인륜(人倫)에서 찰(察)한다”의 ‘찰(察)’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온당치 않습니다.
‘天地之大’以下, 所說與上文不連貫. 察, 著也, 謂與‘察於人倫’之‘察’同 亦未安.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것은 모두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누구를 시켜서 드러냈겠습니까? 드러내는 자가 있다면, 곧 활발하게 생동하는 경지가 아닙니다.
鳶飛魚躍, 咸其自爾, 將誰使察之耶? 有察之者, 便不活括潑潑地矣.
(주용 13장의) “자식에게 구하는 것으로(구절), 부모를 섬기는 것을 나는 능치 못하다(구절)”는 대목은 주된 뜻과 문장의 구조가 모두 대학(大學)의 혈구(絜矩) 한 절과 서로 같은데, 사람들이 대부분 잘못 읽습니다. 이제 그대의 설명을 상고해보면 또한 의심스런 점이 있는 듯합니다.
‘所求乎子(句), 以事父未能也’ (句), 主意立文, 皆與大學絜矩一節相似, 人多誤讀. 今詳來說, 似亦可疑.
(중용 23장에서) “밝으면 움직인다”고 했는데 ‘움직인다[動]’ 이하는 마땅히 정자(程子)의 이론을 좇아야 하는데, 정자는 모두 타인(他人)으로서 말했습니다. 맹자(孟子)(이루 상 제12장)의 ‘재하위(在下位)’란 한 장은 온통 중용(中庸)의 말을 쓴 것이니, 그 “지극히 성실하여 움직이지 않는 자는 없다”고 말한 것이 곧 이것입니다.
‘明則動’, ‘動’以下當從程子說, 皆以他人而言. 孟子‘在下位’一章, 全用中庸語. 其曰‘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 卽謂此也.
(중용 26장의) “위대하구나! 성인의 도여” 이하에서 “이를 말한 것이겠지”까지는 따로 한 장입니다.
‘大哉聖人之道’以下至 ‘其此之謂歟’別是一章.
(중용 32장의) “(천지의) 화육(化育)을 주관한다”는 것은 “건이 태시를 주관한다”의 ‘지(知)’와 같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知化育’不必言如‘乾知太始’之‘知’.
(중용 28장의) “옛날의 도로 돌아간다” 이하의 글로 상고해보면, 옛 것을 스승으로 삼는 것을 이르지 않음이 없습니다. (29장에서 말하는) ‘삼중(三重)’은 마땅히 여씨(呂氏: 呂大臨)의 설을 따라야 합니다. ‘하언(下焉)’이란 주(周)나라가 쇠퇴한 이후를 말한 것과 같으니, 아마도 ‘선(善)’자를 얻지 못함이 마땅할 듯하니, 반드시 따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反古之道’, 以下文考之, 非不師古之謂也. ‘三重’當從呂氏說. ‘下焉’者, 若謂衰周以下寅, 恐當‘善’字不得, 須別有說矣.
맹자(孟子)의 부동심(不動心)은 마땅히 정자(程子)의 “능히 곤란함을 두려워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함이 없겠는가?”라는 설명을 좇는다면, 한 장의 뜻이 수미(首尾)가 관통할 것입니다. 공손추가 맹자(孟子)가 지위[位]를 얻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그 마음을 움직인 것을 의심한 것이 아니므로 맹자(孟子)가 답한 바의 뜻이 또한 이렇게 하지 않았으니, 상세하게 음미하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孟子之不動心, 當從程子‘能無畏難而動其心乎’之說, 則一章之指首尾貫通矣. 丑非疑孟子以得位爲樂而動其心, 故孟子所答之意亦不爲此, 詳味可見矣.
(맹자 공손추 상 2장에 나오는) 적을 헤아려 이길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맹시사(孟施舍)가 타인(他人)들이 능히 두려움이 없을 수 없음을 기롱하여 하는 말입니다.
量敵盧勝, 是孟施舍譏他人不能無懼之言.
(맹자 공손추 상 2장에 나오는) 축(縮)은 직(直)이니, 의례(儀禮)나 예기(禮記)에 이 글자가 많이 있어, 항상 ‘형(衡)’이란 글자와 짝을 이룹니다. 아래 문장에서 ‘곧게 기른다[(直養]’는 설은 대개 이것에 근본합니다. 곧 한 장의 큰 뜻이 관계되어 있으니 그 뜻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縮, 直也, 儀禮․禮記多有此字, 每與‘衡’字作對. 下文直養之說, 蓋本於此. 乃一章大指所繫, 不可失也.
(맹자 공손추 상 2장에 나오는) “필유사언(必有事焉)”은 “상제에게 일을 둔다”거나 “전유에게 일을 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부류이니, 힘을 기울여야 할 곳이 아니라 곧 반드시 힘을 기울여야할 곳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正)’이란 기다림[等待]과 기대[期望]의 뜻이니, 춘추전(春秋傳)의 “군사를 출정하면 돌아올 것을 미리 예정하지 않는다”거나 “싸우면 이길 것을 미리 예정하지 않는다”는 ‘정(正)과 같습니다. 고주(古注)에 ‘망(望)’으로 해석한 것이 이것입니다. ‘망(忘)’이란 일삼아야 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조장(助長)’이란 바라는 것이 이르지도 않았는데 빨리 추진하여 더하거나 보태는 것입니다.
‘必有事焉’, 如言有事于上帝, 有事於顓臾之類, 非是用力之地, 乃言須當用力也. ‘正’者, 等待․期望之意, 與春秋傳‘師出不正反’․‘戰不正勝’之‘正’. 同. 古注以‘望’字釋之, 是也. ‘忘’者, 失其所有事. ‘助長’者, 望之不至, 而作爲奮迅, 以增益之也.
고자(告子)가 성(性)을 논한 다섯 가지 설 중에서 “이것은 같고 이것은 구별된다”거나 “‘생하는 것을 성이라 이른다”고 했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告子論性, 五說‘是同是別’․‘生之謂性’, 其義如何?
칠월 한 편의 시(詩)에 삼체(三體)가 갖춰졌다고 했는데, 곧 정씨(鄭氏)가 주례(周禮) 약장(籥章)의 뜻을 알지 못하고 천착한 말을 발설하니, 증거로 삼아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이제 주례(周禮)를 상고해 보는데 온힘을 쏟고도 도리어 이를 믿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七月一詩而備三體, 乃鄭氏不達周禮籥章之義而生此鑿說, 不足據信. 今考周禮不遺餘力而反信此, 何耶?
관저(關雎)의 숙녀는 빈어(嬪御)를 가리키는 것 같다고 했는데, 시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關雎之淑女似指嬪御, 恐非詩意
중(中)은 곧 화(和)이고 화(和)는 곧 중(中)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이미 앞에서 분변하였습니다.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아야지 이처럼 경솔하게 말해서는 안될 듯합니다. 체용(體用)을 나누는 것이 반드시 학자를 그릇되게 하지는 않지만, 도리어 이렇게 설명하는 자들이 자신을 그르칠까 두려울 뿐입니다.
中卽和也, 和卽中也, 此語已辨於前. 恐更須子細, 不可如此草略說過. 分體用者末必誤學者, 却恐爲此說者能自誤耳.
황극(皇極)을 여기에 세우면 사방에서 올바름을 취할 것이라고 말하니, 이 설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이른바 혈구(絜矩)라는 것은 그 뜻이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이 황극에 근거를 두는 것은 (대학에서 말하는) “위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아래 사람을 부리지 말라”는 한 구절의 의미와는 아마도 다른 것 간습니다.
皇極立之於此, 四方之所取正, 此說甚善. 但不知所謂絜矩者其義云何? 據此皇極與‘所惡於上, 無以使下’一節之意似不同也.
포정지에게 답함 答包定之
요사이 들으니 영가(永嘉)에 화재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대의 집은 놀라고 두려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지요? 가정에서 강습하여 효공(孝恭)과 우제(友弟)의 실제에 종사할 수 있다면, 가면서 생각하고 앉아서 외우며 헛되이 말하는 것과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치를 탐색하여 함양하는 일을 또 그만 둘 수 없으니,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논어를 복습하고 아울러 맹자와 상서 따위를 살펴보아 반복해서 외우되, 명백하고 알기 쉬운 곳에서 똑 부러지게 이해하는 것이 좋고, 한 곳에 천착하여 뜻을 왜곡시키거나 얽어매는 짓은 깊이 삼가야 할 것입니다. 진국록(陳國錄)과 서태승(徐太丞) 제공(諸公)은 서로 만나본 적이 있는지요? 또 동지를 다수 얻어 서로 함께 학문을 갈고 닦는지요? 이곳은 금년에 벗들이 왕래하지 않아 강학이 매우 두서가 없어서, 그대처럼 용의(用意)가 주도면밀한 사람을 자주 생각해보지만,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디 힘써 멀리서 생각하는 제 마음을 위로해주기 바랍니다.
近聞永嘉有回祿之災, 高居不至驚恐否? 講習家庭, 得以從事於孝恭友弟之實, 非行思坐誦空言之比也. 然深索涵泳, 又不可廢. 不蕃所讀何書? 更能溫習論語, 幷觀孟子․尙書之屬, 反復諷誦, 於明白易曉處直截理會爲佳, 切忌穿鑿, 屈曲纏繞也. 陳圜錄․徐太丞諸公曾相見否? 亦頗得同志相與切磋否? 此間今年朋友往來不定, 講學殊無頭緖, 甚思定之用意精密, 不易得也. 千萬勉旃, 以慰遠懷.
포정지에게 답함 答包定之
중용은 진실로 쉽게 읽을 수 없으므로 다시 마음을 비우고 의미를 탐구해야만 오랜 후에 스스로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중용의 말은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힘써야 할 단서는 단지 선을 밝히고[明善]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謹獨] 데에 있을 뿐입니다. 선을 밝힌다는 것은 또 사려하고 응접할 즈음에 어떤 것이 공정하고 사사로운지, 어떤 것이 사특하고 올바른지를 변별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이것이 이치를 탐구하는 내용입니다. 만일 이곳을 허둥지둥 놓치고 지나가면 보존하고 기르는 노력도 쓸 곳이 없게 됩니다. 다시 이와 같이 노력한다면 반드시 스스로 깨달을 것입니다. 그 나머지 문장의 의미와 가리키는 뜻 가운데 마땅히 헤아려 보아야할 곳이 있으면 인편을 통해 알려주면 되겠습니다.
中庸實未易讀, 更宜虛心玩味, 久當自得. 大抵其說雖無所不包, 然其用力之端只在明善謹獨. 所謂明善, 又不過思慮應接之間辨其孰爲公私邪正而已. 此窮理之實也. 若於此草草放過, 則亦無所用其存養之力矣. 且更如此用力. 必自見得. 其他文義意指有合商量處, 便中却可垂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