伏羲氏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周易》은 十三經 중에서 가장 오래된 經으로서, 宋代에 十三經注疏를 편찬할 때에도 《周易》을 가장 앞에 배치하였다. 또 秦나라가 焚書했을 때에 모든 經이 焚書의 대상이 되었으나, 《周易》은 占筮하는 책이라 하여 금지되지 않았기에 다른 經들과 달리 그 전승과 연구가 끊긴 적이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周易》에 대한 연구는 그 양이 매우 방대하다. 비단 연구의 분량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연구의 방향과 관점도 다양하다. 연구의 양상을 그 내용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바로 象數派와 義理派이다. 象數派가 《周易》의 象과 數를 통해 그 뜻을 구명하려 하였다면, 義理派는 《周易》의 글을 통해 그 철학의 大義를 밝히려 노력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으로는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는 先秦 시기로 易學의 기초가 세워진 시기이다. 《春秋左氏傳》‧《國語》 등에서는 《周易》이 占書로 이용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十翼은 곧 先秦 易學의 집대성이자 義理派 易學의 토대이다. 둘째는 漢나라 시기로, 象數學으로서의 易學이 발전한 시기이다. 漢易의 대표 인물은 孟喜와 京房으로, 이들은 卦氣說을 중심으로 하는 象數學 체계를 형성하였다. 東漢 시기의 鄭玄, 荀爽, 虞翻 또한 이러한 象數學에 영향을 받아 爻辰說, 五行說, 卦變說, 互體說 등의 다양한 象數學을 전개시켰다. 세 번째 시기는 魏‧晉‧隋‧唐 시기이다. 이때의 易學은 象數學에서 義理學으로 그 방향을 전회하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대표 학자는 王弼과 孔穎達이다. 魏나라 王弼은 漢代의 象數學을 계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義理易學을 제창하였는데, 특히 老莊의 사상을 易學에 적용시킴으로써 玄學의 길로 易學을 인도하였다. 당시에는 老莊思想이 성행하였기 때문에 王弼의 易學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唐代의 孔穎達은 《五經正義》의 하나인 《周易正義》를 撰하면서 王弼의 注를 채용하여 王弼의 玄學易을 계승하였고, 《周易正義》가 明經考試의 표준과 근거가 됨으로써 王弼의 義理學은 易學의 主流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네 번째 시기는 宋‧元 시기인데, 易學의 연구는 宋代로 오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이때에는 易學과 理學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理學易의 체계가 공고해진다. 易學이 理學的 관점으로 해석됨으로써 《周易》에 대한 윤리도덕적 해석체계가 정립된 것이다. 이 철학의 대표자가 바로 程伊川(程頤)이다. 그러나 易學과 理學의 융합이 단지 義理易의 발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象數學적 접근을 통하여 易理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宋代 象數學의 대표자는 康節 邵雍인데 특히 그는 數에 특기가 있어 수리학 방면을 더욱 심화시켰다. 宋代에는 다른 시기와 달리 易理를 설명하는 여러 象數圖式이 제출되었는데 이것을 일러 圖書之學이라 한다. 南宋의 朱子에 이르러 理易學의 두 길이 비로소 만나게 된다. 朱子는 程伊川의 義理易學을 계승하면서도 象數派의 학문적 성과를 수용함으로써 易學의 체계를 더욱 풍부하고 방대한 것으로 만들었다. 사실 《周易》 안에 象과 數와 文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周易》을 해석함에 있어서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해석의 경향에 따라 《周易》 연구의 관점이 크게 象數와 義理로 구분되지만 한쪽만을 강조하는 《周易》 연구는 절름발이 연구가 될 수밖에 없다. 文은 象數를 통해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고, 象數는 文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周易》 연구에 있어서 象數와 文은 相補的 관계이므로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모두 수용한 朱子의 易學이 《周易》 연구의 집대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시기는 明淸 시기인데, 이 시기의 특징적 易學은 樸學易이다. 樸學易은 漢魏 시대의 易學 문헌을 고증하고 정리하는 것이 특징으로, 淸初에 시작되어 淸末까지 계속되었다. 易哲學 연구 자체로서는 宋易을 뛰어넘을 수 없지만, 옛사람들의 易學을 연구한 공적은 전에 없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周易正義》의 編著 과정
經學史에서 손꼽히는 큰 사건 중의 하나는 唐代에 《五經正義》를 撰定한 일이다. 이를 《舊唐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太宗이 ‘經籍이 聖人의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文字에 오류가 많다.’ 하여, 前 中書侍郎 顔師古에게 詔勅을 내려 五經을 考定하게 하고, 이를 天下에 반포하여 學者들에게 익히게 하였다. 또 ‘儒學에 학파가 많아 章句가 번잡하다.’ 하여, 國子監祭酒 孔頴達과 여러 학자들에게 詔勅을 내려 《五經義疏》를 撰定하게 하니, 모두 170권이었다. 이를 《五經正義》라 이름하고 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익히게 하였다.
(注1)
《五經正義》는 삼국시대 이후의 義疏學을 집대성한 것으로, 東漢‧魏‧晉‧南北朝의 주석을 처음으로 총집결하여 각 학파의 說을 통일함으로써 후세의 경학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五經正義》에 채용된 경서와 주석의 종류는, 《周易》은 王弼과 韓康伯의 注, 《尙書》는 孔安國의 傳, 《毛詩》는 毛亨‧毛萇의 傳과 鄭玄의 箋, 《禮記》는 鄭玄의 注, 《春秋左氏傳》은 杜預의 注이다. 《周易正義》는 이처럼 《五經正義》의 하나로, 孔穎達이 王弼과 韓康伯의 注를 채용하여 疏를 만들었는데, 孔穎達이 〈周易正義序〉에서 밝혔듯이 疏는 孔穎達 단독 저작은 아니다. 〈周易正義序〉에서 밝힌 編著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제 이미 勅命을 받들어 刪定하면서, 일을 고찰함은 반드시 仲尼를 宗主로 삼고 義理를 밝힘은 먼저 王輔嗣(王弼)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는 화려함을 제거하고 실제를 취해서 진실하여 증거를 갖추고자 해서이다. 문장이 간략하고 이치가 요약되니, 적으면서도 많은 것을 制裁하고, 변하여 능히 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의 재주가 비루하고 식견이 짧아서 뜻을 두루 다하지 못할까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朝散大夫 行大學博士 臣 馬嘉運과 守大學助敎 臣 趙乾叶 등과 마주 대하여 함께 의논해서 可否를 자세히 살폈으며, 貞觀 16년(642)에 이르러 또다시 勅命을 받들어서 예전에 疏를 만들었던 사람과 給事郞 守四門博士 上騎都尉 臣 蘇德融 등과 함께 勅使인 趙弘智를 마주 대하여 다시 자세히 살펴서 《正義》를 만드니, 모두 14권이다.
(注2)
이 과정을 《新唐書》 〈孔穎達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孔穎達이 顔師古, 司馬才章, 王恭, 王琰 등과 詔勅을 받들어 《五經義訓》을 편찬하니, 모두 100여 편이었다. 이를 ‘義贊’이라 이름하였는데, 詔勅에 의해 ‘正義’라고 고쳤다. 이 책이 비록 다른 학파의 說을 포괄하여 상세하고 넓었으나 이 가운데에 잘못과 군더더기가 없지 못하였다. 이에 博士 馬嘉運이 그 잘못을 駮正하여 서로 비방하기에 이르자, 太宗이 詔勅을 내려 다시 裁定할 것을 명하였는데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永徽 2년(651)에 中書‧門下‧國子 三館의 博士와 弘文館의 學士에게 詔勅을 내려 考正하게 하니, 이때에 尙書左僕射 于志寧, 右僕射 張行成, 侍中 高季輔가 이를 增補하고 刪削하여 책이 비로소 반포되었다.
(注3)
孔穎達의 沒年이 648년인 것을 고려하면 《周易正義》는 孔穎達의 생전에 편찬 작업이 완수되지 못한 것이다. 위의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周易正義》는 孔穎達 외에도 당시 여러 학자들의 손을 거쳐 완성된 책이다. 다만 孔穎達이 제1의 撰定者이고 일을 주관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이름을 대표로 하여 《周易正義》의 疏를 孔穎達의 저작으로 삼은 것이다.
(3)《周易正義》의 체제와 내용적 특징
◊《周易正義》의 체제
《周易》의 체제는 크게 古易과 今易으로 구분된다. 《周易》은 본래 64卦와 卦辭 및 爻辭로 구성된 것이고, 十翼은 이에 대한 傳으로서 후대에 지어진 것이므로, 애초에 《周易》과 十翼은 각각의 책으로 통용되었다.
(注4)
이렇게 經과 傳이 분리되어 있는 편집 체제를 古易이라 한다. 明나라 永樂年間(1403~1424)에 찬술된 《周易大全》의 凡例에 따르면, 《周易》의 이러한 편집 체제는 西漢의 費直에 의해 처음으로 바뀌었다. 費直은 〈彖傳〉과 〈象傳〉으로 經文을 해석하여 처음으로 두 傳을 經文 뒤에 붙였고, 이후 鄭玄과 王弼이 이를 따라 아예 卦辭와 爻辭 아래에 〈彖傳〉과 〈象傳〉을 잘라 붙이고 乾‧坤卦의 〈文言傳〉도 각각의 卦 밑에 붙이고서 ‘彖曰’, ‘象曰’, ‘文言曰’을 덧붙여 經文과 傳文을 구별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편집본을 今易이라 하는데, 《周易正義》가 王弼의 注를 채용하여 이러한 편집 방식을 따름으로써 이후로는 今易의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今易과 古易이 보이는 차이는 단순한 편집의 차이가 아니다. 《周易》의 기본 성격 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편집 체제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周易》과 十翼을 분리하여 편집하면 十翼을 가지고 《周易》을 해석하지 않고 《周易》을 占書로서 대하게 된다. 따라서 占書로서의 《周易》의 면모를 드러내고자 할 때에는 經文과 傳文을 별개로 편집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朱子는 卦辭‧爻辭를 지은 文王‧周公의 뜻과 十翼을 지은 孔子의 뜻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經文을 해석할 때 十翼의 내용을 따르게 되면, 文王과 周公의 본뜻을 그르치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朱子에 따르면, 文王과 孔子의 말씀이 양립 가능하기는 하지만, 즉 둘 다 옳은 것이지만, 서로 다른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혼동하거나 호환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판단 하에 朱子는 《周易本義》를 저술할 때에 古易의 편집방식을 채택하였다. 반면 傳文을 經文과 함께 수록하는 今易의 편집방식은 經文을 해석할 때에 傳文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한다. 이러한 해석은 經文에 대한 도덕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周易》의 義理書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일이다. 義理易學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王弼이 費直의 易을 채택한 것은 費直이 古文을 이용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費直의 ‘傳을 가지고 經을 해석[以傳解經]’하는 방식이 《周易》 안에 담겨 있는 철학적 의미를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약술하였듯이, 《周易正義》는 王弼‧韓康伯의 注와 孔穎達의 疏로 이루어져 있다. 王弼이 〈繫辭傳〉, 〈說卦傳〉, 〈序卦傳〉, 〈雜卦傳〉에는 注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네 傳에 있어서는 韓康伯의 注를 채용한 것이다. 현재 통용되는 《周易正義》는 모두 10권인데, 孔穎達의 〈周易正義序〉에는 14권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孔穎達의 序文에는 14권이라고 칭하였으나 《舊唐書》 〈經籍志〉에는 18권이라 하였고, 《直齋書錄解題》에는 13권이라 하였는데, 이 板本은 10권으로 王輔嗣(王弼)와 韓康伯의 注本과 같으니, 아마도 後人이 注本을 따라 합병한 것인 듯하다.
(注5)
◊王弼 注의 내용적 특징
王弼은 字가 輔嗣이며, 삼국시대 魏나라 山陽 高平 사람이다. 魏 文帝 黃初 7년(226)에 태어나서 齊王 嘉平 원년(249)에 죽었다. 王弼의 부친 王業은 尙書郞을 역임하였고, 조부 王凱는 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王粲과 친형제였다. 何劭의 〈王弼傳〉
(注6)
에 따르면, 王弼은 어려서부터 지혜로웠고 10여 세에 《老子》를 좋아하였으며 言辯에 능통하였다. 裴徽와 何晏 등에게 깊은 인정을 받아 尙書郞에 등용되기도 하였으나 曹爽이 司馬懿에게 패함으로써 그도 면직되었다. 24세에 병으로 早死하였으며 後嗣가 없다. 저작에는 《老子注》, 《周易注》, 《周易略例》, 《論語釋義》가 있었다. 그중 《論語釋義》는 전하지 않고 皇侃의 《論語義疏》 및 邢昺의 《論語注疏》에 단편적으로 보일 뿐이다. 王弼은 何晏과 함께 魏‧晉 玄學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老子》와 《莊子》의 철학을 연구하여 玄理를 중심으로 하는 사변적이고 분석적 학풍을 일으켰는데, 《周易》도 이러한 관점으로 해석하여 義理易의 전통을 창시하였다. 王弼 이전의 易學은 取象, 卦氣, 卦變, 爻變, 互體, 納甲 등을 사용하여 《周易》을 해석하는 象數易이었다. 取象, 卦變 등의 이론적 장치를 《周易》의 해석에 적용하면,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 때문에 漢代의 象數易은 《周易》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이론적 장치들이 《周易》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밖에서 끌어들인 것이라는 점이다. 또 이 장치들을 적용함에 있어 어떤 규칙이나 엄밀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는 互體說을 적용하고 어떤 경우에는 卦變說을 적용하였는데, 이 적용은 어떤 규칙도 없이 주석자가 임의로 행하는 것일 뿐이었다. 王弼은 기존 象數易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漢代 象數易의 방법을 일소하고 義理를 중심으로 《周易》을 해석하였다. 이를 《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易은 본래 卜筮하던 책이다. 그러므로 末流가 점점 讖緯說(圖讖說)로 흘렀는데, 王弼이 이에 따른 지극한 병폐를 공격해서 마침내 漢나라 학자들을 배격하고 스스로 새로운 학문을 표출해내었다.
(注7)
義理를 중시하고 象數를 경시한 王弼의 견해는 《周易略例》 〈明象〉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象이란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말은 象을 밝히는 것이다. 뜻을 다하는 데에는 象만 한 것이 없고, 象을 다하는 데에는 말만 한 것이 없다. 말은 象에서 생기므로 말을 연구해서 象을 관찰할 수 있고, 象은 뜻에서 생기므로 象을 연구해서 뜻을 관찰할 수 있다. 뜻은 象으로 다하고 象은 말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말이란 象을 밝히는 것이니 象을 얻으면 말을 잊고, 象이란 뜻을 보존하는 것이니 뜻을 얻으면 象을 잊는다. 이는 마치 올가미는 토끼를 잡는 것이니 토끼를 얻으면 올가미를 잊고, 통발은 물고기를 잡는 것이니 물고기를 얻으면 통발을 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말은 象의 올가미이고, 象은 뜻의 통발이다. 이 때문에 말을 보존한 자는 象을 얻은 자가 아니고, 象을 보존한 자는 뜻을 얻은 자가 아닌 것이다.
(注8)
위의 비유는 《莊子》 〈外物篇〉의 ‘得意而忘言’의 비유를 차용한 것이다. 王弼은 義理를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말이나 象은 이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보았다. 따라서 본질을 얻으면 도구는 버릴 수 있다는 의미로 ‘得意忘象’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王弼이 象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다만 象에 집착하면 本末이 전도되어 뜻을 얻는 데에 장애가 될 수 있으므로 象에 구애되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는 象을 중시하는 象數易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象數家들은 번쇄한 象에 구애되어 근본을 잃었다는 것이다. 王弼의 《周易注》에는 이러한 得意忘象의 철학이 투철하게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震卦䷲의 卦辭 “震來虩虩”에 대하여 注를 내기를, “震의 뜻은 위엄이 지극한 후에 비로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震來’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여 우레[雷]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 渙卦䷺의 〈彖傳〉 “大川을 건넘이 이로움은 나무를 타서 功이 있는 것이다.[利涉大川 乘木 有功也]”에 대하여 注를 내기를, “乘木은 바로 어려움을 건너는 것이다. 나무는 오직 물을 건너는 수단이다. 어려움을 건너면서 항상 渙의 방도를 사용하면 반드시 功이 있는 것이다.[乘木卽涉難也 木者 專所以涉川也 涉難而常用渙道 必有功也]”라고 하여, ‘乘木’을 나무배를 탄 象이 아닌 ‘어려움을 건넘’의 意로 해석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孔穎達이, 先儒들은 모두 이 卦가 坎이 아래이고 巽이 위여서 물 위에 나무를 타고 川을 건너는 象이 되므로 ‘乘木有功’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王輔嗣는 象을 쓰지 않고 오로지 비유의 뜻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말하여 기록한다.
(注9)
하여, 王弼이 象을 말하지 않은 것을 보충하였다. 王弼 《周易注》의 또 다른 특징은 簡易함을 추구한 점이다. 老莊을 중심으로 하는 玄學은 본래 無爲를 강조하고 簡易함을 숭상한다. 王弼의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周易》을 해석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가 번쇄한 象數를 배척하고 簡明한 義理를 추구한 것이 이러한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다. 《老子注》와 마찬가지로 《周易注》도 주석의 양이 적은데, 이 역시 簡易함을 추구하는 王弼의 학문적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王弼은 복잡한 象數로부터 벗어나 《周易》을 통해 사물의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기존의 易學이 象數에 얽매여 간이한 원리를 소홀히 했던 경향을 뒤집어 의리를 가지고 의리를 탐구하는 새로운 易學을 창시한 것이다. 王弼의 이러한 새로운 易學은 讖緯說과 미신에 빠져들던 易學을 보편적 학문으로 자리하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번쇄한 象數에 가려져 있던 易의 義理를 발양하였다는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의리만을 중시한 王弼의 易學 역시 비판을 면치 못하는 점이 있는데,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象을 단순히 비유나 도구 정도로 경시하였다는 점이다. 朱子는 王弼이 《周易略例》 〈明象〉에서 “爻가 만일 順이어야 한다면 하필 坤이어야 소가 되겠는가. 뜻이 만약 健이어야 한다면 하필 乾이어야 말이 되겠는가.”라고 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 뜻을 관찰하면, 또 다만 易에서 象을 취한 것을 다시는 유래한 바가 없어서 다만 詩의 比‧興과 孟子의 비유와 같이 여길 뿐인 듯하니, 이와 같다면 〈說卦傳〉을 지은 것이 易과 관계되는 바가 없고, 〈繫辭傳〉의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물건에서 취했다.’는 것도 쓸데없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그 말이 또한 미진함이 있는 듯하다.……진실로 굳이 그 象의 유래를 깊이 찾을 것이 없으나 또한 假設했다고 생각하여 대번에 잊고자 해서도 안 될 것이다.
(注10)
〈繫辭傳〉에 “聖人이 象을 세워 뜻을 다하였다.” 하였는바, 王弼의 말처럼 象이 뜻을 드러내는 것임은 맞다. 그러나 뜻을 얻었다 하여 象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易에 있어서 象은 詩의 비유처럼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유래가 있는 것이므로 경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王弼의 得意忘象說도 치우친 바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茶山은 그 자신이 推移(卦變), 爻變, 互體, 物象을 《周易》 해석의 4대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만큼, 이를 모두 사용하지 않은 王弼을 ‘孟浪하다’고 비판하였으며,
(注11)
玄學으로 《周易》을 해석한 것에 대해서도 “진실로 異端을 물리칠 생각을 가진 자는 반드시 王弼의 《周易注》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注12)
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韓康伯 注의 내용적 특징
韓康伯은 이름이 伯이고 字가 康伯인데, 字로 행세하였으며, 潁川 長社 사람이다. 《晉書》에 〈韓伯傳〉이 있으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 생몰년 또한 미상인데, 余嘉錫이 《建康實錄》을 가지고, 韓康伯이 東晉 成帝 咸和 7년(332)에 태어나서 孝武帝 太元 5년(380)에 죽었다고 고증한 바 있다.
(注13)
韓康伯은 王弼이 注解하지 않은 〈繫辭傳〉, 〈說卦傳〉, 〈序卦傳〉, 〈雜卦傳〉에 注를 내었고, 이것이 《周易正義》에 注로 채택되었다. 韓康伯의 注는 王弼의 易學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데, 이 때문인지 韓康伯이 王弼의 親傳弟子라고 주장한 이들이 많다. 이러한 주장은 아마도 孔穎達이 《周易正義》 疏에서 “韓氏는 王弼에게 직접 受業하여 王弼의 뜻을 계승하였다.[韓氏親受業於王弼 承王弼之旨]”라고 한 것에 기인한 듯하다. 그러나 생몰년의 차이로 볼 때, 韓康伯이 王弼에게 직접 수학했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韓康伯의 易學이 王弼을 충실히 계승한 것임은 분명하다. 韓康伯은 王弼과 마찬가지로 義理를 중심으로 《周易》을 해석하였다. 그가 義理를 표방하고 象數를 폐기한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예컨대 그는 取象說의 근거가 되는 〈說卦傳〉의 “乾은 말이 되고, 坤은 소가 된다…….”고 한 부분은 注를 내지 않았다. 반면 取意를 말한 〈序卦傳〉에는 빠짐없이 注를 내었다. 玄學의 논리를 가지고 《周易》을 해석하였다는 점도 韓康伯이 王弼을 계승한 점의 하나이다. 오히려 이 점에 있어서는 王弼보다 더욱 적극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坐忘이나 無欲以觀其妙 등 老莊의 원문을 차용하기도 하고 ‘老子曰’이라고 직접 인용하기까지 하였으며, 玄學의 有無本末論을 더욱 분명히 천명하였다. 이는 〈繫辭傳〉의 “一陰一陽之謂道”의 注에 분명히 드러나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道란 무엇인가? 无의 칭호이다.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를 비유하여 道라고 하는 것이다. 寂然히 形體가 없어 형용할 수 없다. 有의 작용이 極에 이르면 无의 공효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神은 일정한 方所가 없고 易은 정해진 體가 없음’에 이르러 道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궁구하여 神의 妙理를 다하고, 神의 妙理를 인하여 道를 밝히는 것이다. 陰과 陽이 비록 다르지만 无는 하나로서 陰과 陽을 상대하니, 陰에 있어서는 无陰이 되어 陰이 이것을 통해 생기고, 陽에 있어서는 无陽이 되어 陽이 이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一陰一陽’이라고 한 것이다.
(注14)
韓康伯은 ‘一陰一陽’을 ‘한 번 陰하고 한 번 陽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一陰과 一陽’으로 본 것이며, 이 一이 곧 无이고 道라고 주장한 것인바, 无를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玄學의 사유를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문제는, 과연 이러한 玄學의 형이상학이 《周易》의 본뜻과 세계관을 제대로 해설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周易》에서 존재의 근원으로 상정한 太極은 상대가 없는 一者이기는 하지만 无라고 칭할 수는 없다. 韓康伯의 易學이 王弼의 義理易을 계승하고 심화한 측면은 있으나, 과연 《周易》의 본뜻을 드러내는 해설서로서 적절한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王弼과 韓康伯은 象數學의 자의성을 제거하고 《周易》으로부터 보편적 법칙을 도출해내고자 義理를 중시하였으나, 《周易》을 해석하는 데에 적용한 玄學의 義理가 《周易》의 본뜻에 부합하는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王弼과 韓康伯 역시 해석의 자의성에 대한 지적을 면치 못하였다.
◊孔穎達 疏의 내용적 특징
孔穎達은 字가 沖遠으로, 冀州 衡水 사람이다. 孔子의 32대손으로, 北周 武帝 建德 3년(574)에 태어나서 唐 太宗 貞觀 22년(648)에 죽었다. 어린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고 劉灼에게서 수학하였으며, 특히 五經에 밝았다. 唐代에 國子司業‧國子祭酒 등을 역임하였고 죽은 뒤에 太常卿에 추증되었다. 唐代의 가장 저명한 經學家로서, 《五經正義》를 편찬하였으며 《隋史》의 修撰에 참여하였다. 《周易正義》의 疏는 철저히 ‘疏는 注를 깨뜨리지 않는다.[疏不破注]’는 원칙을 지켜 王弼과 韓康伯의 注를 疏通하고 해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漢代의 緯書나 《子夏易傳》의 말, 鄭玄 등 先儒의 說을 선택적으로 채용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王弼의 注를 기준으로 是非를 판단하였다. 孔穎達의 疏가 王弼과 韓康伯의 注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여기에 매몰되지도 않았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孔穎達은 注에서 충분히 발명하지 못한 뜻이 있으면 疏에서 그것을 보충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는 주로 注가 象을 홀시하여 象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충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渙卦의 〈彖傳〉이 그 예이다. 坤卦의 初六 爻辭에 대한 疏에서는 “무릇 易은 象이니, 物象을 가지고 사람의 일을 밝힌 것은 詩의 비유와 같다.……聖人의 뜻은 象을 취할 수 있는 것은 象을 취하고, 사람의 일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일을 취하였다.”라고 하여 取象도 경시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는 분명히 取意만을 중시한 王弼과 韓康伯을 뛰어넘는 견해이다. 孔穎達은 取意와 取象을 병행함으로써 새로운 易學의 길을 연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실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疏不破注’의 원칙을 따르다 보니 王弼과 韓康伯의 注가 가진 문제, 예컨대 《周易》의 본뜻을 살리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문제를 답습한 면이 있다. 또 ‘疏不破注’의 원칙을 따르면서도 取象說을 병용하여 전체적으로 논리가 통일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易學史의 측면에서 보면, 《周易正義》에 王弼의 注가 채택됨으로써 王弼 외의 주석은 대부분 폐기되고 말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鄭玄의 易學은 《周易正義》가 편찬되기 전에는 王弼의 易學과 대등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周易正義》 편찬 후에 힘을 잃고 그 책마저 逸失되었다. 唐의 학자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周易正義》를 표준으로 하여 공부해야 했기에 그 밖의 說이 폐해지게 된 것이니, 이를 孔穎達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唐 이전 易學家들의 글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 孔穎達이 《周易正義》에서 인용한 逸文들이 唐 이전의 易學을 연구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4)《周易正義》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와 끼친 영향
《周易正義》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정확한 경로나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唐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하던 삼국시대에 《周易正義》를 비롯한 《五經正義》가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太平廣記》에, 王弼의 《周易略例》에 注를 단 邢璹가 사신으로 신라에 다녀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고려 말부터는 성리학이 부동의 권위를 누리게 되었고, 易學 역시 程朱의 易學이 학계를 주도하였다. 《周易》의 주석서라면 당연히 程朱의 《周易傳義》를 칭하는 것이었고, 《周易》을 연구하거나 새로운 주석을 쓸 때에도 《周易傳義》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周易》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周易正義》를 참고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 자체가 연구의 대상이 되거나 학습의 교재가 되지는 못하였다. 숙종, 영조 때의 학자인 陶谷 李宜顯은 《周易正義》를 포함한 十三經注疏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朱子가 傳과 註를 지은 이후로 여러 說들이 모두 폐기되었다. 지금 보건대, 舊註(十三經注疏)가 비록 엉성하고 잘못되고 잡박한 부분이 많지만 옛날과의 거리가 가깝고 그 해석한 내용이 또한 자못 經에 근거한 것이 많으니, 전부 쓸어버려서는 안 된다. 나의 집에 이 책을 보관하고 있어 經書를 읽을 때에 간간이 가져다가 참고해보니, 朱子의 註說이 깨뜨려도 깨뜨려지지 않는 것임을 더욱 믿겠고, 또 多聞에 보탬이 되고 식견을 넓힐 수 있다.
(注15)
이 말이 조선 학자들이 《周易正義》를 대했던 일반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周易正義》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비판을 가한 사람은 茶山이다. 그는 漢代까지의 象數易學을 추존하여 《周易正義》가 담고 있는 義理易을 거세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은 《易學緖言》의 〈漢魏遺義論〉, 〈王輔嗣易注論〉, 〈韓康伯玄談考〉 세 편에서 볼 수 있다. 비판은 대체로 《周易》 해석에 象數를 사용하지 않은 점, 異端인 老莊 사상으로 《周易》을 해석한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字句의 오류와 訓詁의 자의성 등도 지적하고 있다. 《周易正義》에 대한 茶山의 평가는 다음의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斯文이 불행하여 王弼이란 자가 나와서, 사사로운 생각과 작은 지혜로 百家를 소탕해버렸다. 이에 商瞿 이래로 서로 계승하고 서로 전하던 학설이 모두 없어졌다. 卦變과 爻變, 互體와 物象, 交易과 變易, 反對와 牉合을 모두 없애 여러 갈래의 묘한 길을 막고, 탁한 원천을 열어 은밀히 玄虛沖漠의 학설을 세상에 퍼뜨리니, 온 세상이 혼탁해져서 이를 받들어 지극한 학설이라고 여긴다. 어찌 탄식하지 않겠는가.
(注16)
孔穎達의 깊은 학식은 王弼의 비루함을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 이제 이를 撰定하여 疏를 지은 까닭으로 王弼을 추존하여 “유독 고금에 으뜸이다.”
(注17)
라고까지 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잘못되었는가. 《周易集解》에 나열된 36家가 비록 서로 得失은 있겠지만 王弼의 易에 비교한다면 모두 높이 받들 만한 것들이다. 아, 어찌하여 이렇게 된 것인가.
‧變易‧不易 《周易》은 易經 혹은 易이라고도 한다. 易에는 簡易‧變易‧不易의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하는바, 이는 《乾鑿度》 등의 緯書와 鄭玄, 孔穎達 등의 경학가에 의해 천명되었다. 첫째, 簡易란 알기 쉽고 따르기 쉽다는 것이다. 〈繫辭傳〉에 “乾은 쉬움으로써 만물을 냄을 주관하고 坤은 간략함으로써 만물을 이룬다. 쉬우면 알기 쉽고 간략하면 따르기 쉽다.”
(注20)
하였다. 易의 중심이 되는 乾‧坤 두 卦는 자연으로 보면 하늘과 땅을 상징하고, 人事로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징하며, 추상적 성질로 보면 陽과 陰을 상징한다. 易은 이 두 축을 기본으로 하여 천지 만물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 설명이 이해하기 쉽고 또 실천하기 쉽다. 복잡한 세계를 乾‧坤 두 개의 범주로써 풀어낸 易 철학은 그 簡易함이 특징이자 장점이라 하겠다. 둘째, 變易이란 잠시도 변화를 멈추지 않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말한 것이다. 日月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운행하며 뭇 생명들도 쉼 없이 生死 두 점 사이를 유행한다. 우주의 모든 것이 잠시도 멈춰 있지 않은 것, 이것이 易이 담고 있는 우주의 象이다. 이를 〈繫辭傳〉에서는 “《周易》의 道는 자주 옮기니, 변동하여 머물지 않아 여섯 빈 자리에 두루 흐른다. 그리하여 오르내림이 無常하고 剛柔가 서로 交易하여 典要(일정한 법칙)로 삼을 수 없고 오직 변화하여 나아가는 바대로 한다.”
(注21)
라고 표현하였다. 셋째, 不易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眞理(太極)가 있다는 말이다. 日月이 운행하고 四時가 流行하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만상은 변화하지만 그 변화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易 속에 담겨 있는 不易의 이치이다.
◊易字의 뜻
易字의 구성과 뜻에 대해서 여러 가지 說이 있는데, 그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蜥蜴說(석척설)과 日月說이다.
《說文解字》에 “易은 蜥蜴, 蝘蜓(언전), 守宮으로, 상형자이다. 秘書에 ‘해와 달을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가 易이니 陰陽을 형상한 것이다.’ 했다.”
(注22)
하였다. 蜥蜴은 일명 蝘蜓, 守宮으로, 도마뱀이라 訓하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카멜레온이다. 易字의 윗부분 日은 카멜레온의 머리이고 口안의 점은 눈을 상징하며, 아랫부분 勿은 카멜레온의 몸체와 발을 상형한다는 것이다. 카멜레온이 주위환경에 따라 자신의 피부색깔을 수시로 변화시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日月說은 ‘易’字가 ‘日’자와 ‘月’자의 會意文字라고 본 것이다. 易은 陽을 상징하는 日과 陰을 상징하는 月이 상하로 결합한 會意文字라는 것인데, 易을 變易, 交易, 博易의 뜻으로 볼 때 日月說은 《周易》에서 理想으로 여기는 것을 가장 바르게 표명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2)《周易》의 명칭과 뜻
《周易》은 《易經》 또는 《易》이라 약칭하는데, 그 작자에 대해서는 여러 異說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周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周易》의 ‘周’ 역시 왕조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고대 중국에는 몇 종류의 易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周禮》 〈春官 太卜〉에 “太卜의 직책은 三易의 법을 주관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三易은 連山‧歸藏‧周易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連山은 夏나라의 易, 歸藏은 殷나라의 易이라 하는데 모두 전하지 않아서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그 명칭으로 보아 《周易》이 乾卦를 首卦로 함에 비하여, 連山은 산을 의미하는 艮卦를, 歸藏은 坤卦를 첫 번째로 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鄭玄은 “夏나라의 易을 連山이라 하고, 殷나라의 易을 歸藏이라 하고, 周나라의 易을 周易이라 한다. 連山은 山에서 구름이 나옴이 계속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음을 형상한 것이고, 歸藏은 萬物이 그 가운데로 돌아가 감추지 않음이 없는 것이고, 周易은 易의 道가 두루 넓어서 구비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注23)
하여, 《周易》을 周나라의 易이라고 하면서도 ‘周’를 왕조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周普(두루 함)의 의미로 보았다. 이에 대하여 孔穎達은 〈周易正義序〉에서, 살펴보건대, 《世譜》 등의 여러 책에 神農을 한편으로는 連山氏라 하고 또한 列山氏라 하였으며, 黃帝를 한편으로는 歸藏氏라 하였으니, 이미 連山과 歸藏이 모두 왕조의 칭호이면 《周易》에 周를 칭함은 周나라 岐陽(岐山의 남쪽)의 지명을 취한 것으로, 《毛詩》에 ‘周나라 언덕이 아름답다.’는 것이 이것이다.
(注24)
하여 반박하였다. 朱子 역시 “周는 왕조의 이름이고 易은 책의 이름이다.[周 代名也 易 書名也]” 하였다.
(3)《周易》의 구성 및 작자
◊經과 傳
《周易》은 卦‧卦辭‧爻辭 및 十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卦‧卦辭‧爻辭는 經에 해당하고, 十翼은 이것들을 부연설명한 해석서로서 傳에 해당한다. 卦에 나타나는 象을 따라 각각의 卦에는 卦名이 있는데, 卦辭는 이러한 卦象과 卦名을 해석하여 한 卦의 吉凶禍福을 단정한 것이다. 주로 陰陽의 消長과 剛柔의 德을 가지고 人事에 견주어 吉凶을 서술하였다. 卦辭는 彖辭라고도 하는데, 彖이라는 글자는 돼지가 돌진하는 형상을 나타낸 것으로 결정‧결단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春秋左氏傳》에서는 繇辭(주사)라 하기도 하였다. 卦를 구성하는 6개의 爻에는 각각 爻辭가 달려 있는데 爻辭는 각 爻가 갖는 剛柔의 才質뿐만 아니라 점유하고 있는 위치 및 시간적 개념, 다른 爻와의 상관성 등과 관련하여 한 爻의 吉凶을 서술하고 있다. 孔子의 저작으로 알려진 十翼은 《周易》의 經을 해설한 주석서이다. 漢代에는 《易傳》이라 칭하였는데, 다른 주석서와의 차이를 두기 위하여 十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十翼의 명칭은 漢代의 緯書인 《乾鑿度》로부터 비롯되었다. 翼은 羽翼한다는 뜻으로, 經의 내용을 부연설명함을 의미한다. 이때에 벌써 經文 上‧下篇과 十翼을 합하여 12篇으로 구성된 《易經》이 통행되었으니, 十翼이 經의 지위를 차지한 역사도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十翼
十翼은 〈彖傳〉 上‧下, 〈象傳〉 上‧下, 〈繫辭傳〉 上‧下 및 〈文言傳〉, 〈說卦傳〉, 〈序卦傳〉, 〈雜卦傳〉의 7종 1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彖傳〉은 卦象을 통해 卦名과 卦辭, 한 卦의 전체적 의의를 해석한 것으로 64卦 모두에 있다. 經文에 따라 上‧下篇으로 나뉘어져 있다. 〈象傳〉은 卦 전체의 의의를 해설한 大象과 爻辭를 해설한 小象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찬가지로 64卦 모두에 달려 있으며, 經文에 따라 上‧下篇으로 나뉘어져 있다. 大象은, 대체로, 먼저 그 卦를 이루고 있는 上卦와 下卦의 象을 설명하고 이것으로부터 도덕 정치상의 의리를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履卦䷉를 보면,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履卦이니, 君子가 이것을 보고서 上下를 분별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킨다.[上天下澤 履 君子以 辯上下 定民志]” 하였다. 여기에서도 먼저 乾卦와 兌卦로 이루어져 있는 卦象을 설명하고, 뒤에 이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도덕적 실천에 대하여 서술하였는바, 大象의 글은 대부분 이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小象은 爻辭가 성립하는 근거나 원인을 밝힌 것이 대부분이다. 〈文言傳〉은 오직 乾卦와 坤卦에만 있는데, 文言이란 문식하여 해설한다는 뜻이다. 乾‧坤 두 卦의 卦辭와 爻辭를 풀이하면서 도덕적인 실천의 의의를 강조하였는데, 특히 乾卦에 그 내용이 자세하다. 十翼 가운데 철학성이 가장 돋보이는 〈繫辭傳〉은 《易經》의 성립 근거와 그 기능, 經文의 해석법, 우주발생론, 존재론 등을 담고 있는바, 그 성격이 총론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孔穎達은 上篇을 12장, 下篇을 9장으로 나누었는데, 朱子는 上‧下篇 모두를 12장으로 나누었다. 〈說卦傳〉은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周易》의 구성 원리를 총론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八卦의 象 131종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전반부를 〈繫辭傳〉의 글로 보는 견해도 있다. 〈序卦傳〉은 64卦의 배열 순서를 설명한 글이다. 《周易》의 卦 배열은 일정한 법칙을 찾기가 어려운데, 〈序卦傳〉에서는 이를 만물의 생성과 인간의 삶에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雜卦傳〉의 雜卦는 64卦의 순서를 잡다하게 뒤섞어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64卦의 배열순서와 상관없이 의미상 상반되는 두 卦 혹은 세 卦씩을 짝지어 그 의미를 논하고 있다. 짝을 이루고 있는 구절은 같은 韻이어서 암송하기 편하게 되어 있다. 〈彖傳〉과 〈象傳〉도 대체로 韻이 맞다.
◊《周易》의 작자
모든 고전이 그렇듯, 《周易》의 작자에 대해서도 異說이 분분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伏羲氏의 畫易, 文王‧周公의 作易, 孔子의 贊易 단계, 즉 네 聖人의 세 단계를 거쳐 《周易》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伏羲氏가 八卦와 64卦를 긋고, 文王이 卦辭를 짓고, 周公이 爻辭를 짓고, 孔子가 十翼을 지었다는 것이다. 孔穎達은 《周易正義》 卷第一(首卷)의 〈論重卦之人〉, 〈論卦辭爻辭誰作〉, 〈論夫子十翼〉에서 《周易》의 작자에 대한 위와 같은 견해를 표명하였는바, 이는 程伊川‧朱子와도 일치한다.
《周易》의 작자에 대한 논쟁은 특히 十翼과 孔子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관점은 대략 네 가지이다. 첫째, 十翼을 모두 孔子의 저작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 대표자는 班固, 鄭玄, 孔穎達, 朱子 등이다. 孔穎達은 〈論夫子十翼〉에서 “〈彖傳〉과 〈象傳〉 등 十翼의 글은 孔子가 지은 것이라 하여 先儒들이 다시 異論이 없다.”
(注25)
라고 하였는바, 孔穎達 당시까지만 해도 十翼을 孔子의 저작으로 여기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둘째, 十翼 중 〈彖傳〉과 〈象傳〉만 孔子가 지었고 나머지는 제자나 후학들이 지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대표자로는 宋의 歐陽脩 등이 있다. 셋째, 十翼은 결코 孔子의 저작이 아니며 戰國 중기나 말기 혹은 西漢 昭帝‧宣帝 때, 심지어 그 뒤에 나왔다고 보는 견해이다. 넷째, 十翼이 기본적으로 孔子의 저작이기는 하나 이 가운데는 門人들이 孔子의 강술을 기록한 부분도 있고 후대 사람이 함부로 끼워놓은 부분도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근래의 학자들은 이 네 번째 說을 많이 취하고 있다.
3.《周易》의 원리와 용어
(1)卦의 생성과 太極
〈繫辭傳〉에 “易에는 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兩儀를 낳고 兩儀가 四象을 낳고 四象이 八卦를 낳았다.”
(注26)
하였다. 이는 우주 생성에 대한 설명이자 易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태초의 우주는 太極으로부터 발생하여 兩儀, 四象, 八卦로 분화되고 이러한 분화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만물이 생성된다. 太極 → 兩儀 → 四象 → 八卦로의 분화과정은 다음과 같다.
순서
1
2
3
4
5
6
7
8
八卦
乾
兌
離
震
巽
坎
艮
坤
☰
☱
☲
☳
☴
☵
☶
☷
四象
老陽
少陰
少陽
老陰
⚌
⚍
⚎
⚏
兩儀
陽
陰
⚊
⚋
太極
☯
太極은 철학적으로 매우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 용어이다. 우주 발생의 측면에서 보면 太極은 우주의 始原이며, 개별 존재들의 측면에서 보면 太極은 제1원리이다. 太極은 性理學의 理에 해당하는 개념으로서 만물의 本性이자 인간이 행하여야 할 도덕적 원리이다. 앞서 설명한 易의 변하지 않는 진리가 바로 이 太極이다.
(2)兩儀‧四象‧八卦‧64卦
◊兩儀
이 太極에서 분화된 것이 兩儀인데, 양의는 단적으로 말하면 陰과 陽이라 할 수 있다. 미분화상태였던 하나의 太極, 즉 一理가 陰과 陽의 두 氣로 나뉜 것이다. 陽과 陰은 待對관계를 이루고 있는 두 개의 성질 범주로서, 대표적으로 動과 靜, 明과 暗, 淸과 濁 등이 陽과 陰의 범주에 각각 배속된다. 이 陰과 陽을 기호화하면, 陽은 ‘−’, 陰은 ‘- -’가 되는데, 우주의 생성 순서에 하늘이 땅보다 먼저 형성되므로 하늘을 상징하는 陽이 한 획이 되고 땅을 상징하는 陰이 두 획이 된 것이다. 이 陽爻와 陰爻가 易의 여러 기호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다.
◊四象
이 陽爻와 陰爻에 각각 陽爻와 陰爻를 더하면 총 네 개의 象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四象이다. 陽에 陽을 더한 것을 陽中之陽이라 하여 老陽(太陽), 陽에 陰을 더한 것을 陽中之陰이라 하여 少陰, 陰에 陽을 더한 것을 陰中之陽이라 하여 少陽, 陰에 陰을 더한 것을 陰中之陰이라 하여 老陰(太陰)이라 하는데, 陰陽의 생성 순서에 따라 四象의 생성 순서도 老陽 → 少陰 → 少陽 → 老陰이 된다.
老陽⚌
少陰⚍
少陽⚎
老陰⚏
생성순서
1
2
3
4
고유숫자
9
8
7
6
두 爻로 이루어진 四象은 下爻가 體가 되고 上爻가 用이 된다. 따라서 그 이름은 겉으로 드러나는 用을 주로 하여 上爻를 따라 붙여진다. 때문에 陽爻 위에 陰爻가 있는 것은 少陰이 되고 陰爻 위에 陽爻가 있는 것은 少陽이 되는 것이다. 四象에 부여되는 고유숫자는 三天兩地法과 下爻의 중첩성을 말미암아 산출된다. 三天兩地法이란 하늘에서 3을 가져오고 땅에서 2를 가져오는 계산법이다. 둥근 하늘은 지름을 세 배하여 둘레의 값을 얻고, 모난 땅은 가로와 세로 두 길이를 통해 둘레의 값을 얻으므로, 하늘의 고유숫자를 3으로 땅의 고유숫자를 2로 보는 것이다. 三天兩地法에 따라 陽爻의 고유숫자는 3이 되고 陰爻의 고유숫자는 2가 된다. 四象의 고유숫자는 그것을 구성하는 두 爻의 고유숫자를 더하여 얻어지는데, 단 下爻는 중첩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하여 下爻의 숫자에는 2를 곱한 후 계산한다. 老陽은 3×2+3을 하여 9가 되고, 少陰은 3×2+2=8, 少陽은 2×2+3=7, 老陰은 2×2+2=6이 되는 것이다. 四象의 고유숫자와 생성번호를 더하면 항상 10이 된다. 그중에서도 老陽의 숫자 9는 陽을 대표하는 숫자가 되고 老陰의 숫자 6은 陰을 대표하는 숫자가 되는데, 이는 易이 변화를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陽의 수가 9가 되고 陰의 수가 6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명이 가능한데, 바로 五行의 生數 1‧2‧3‧4‧5 중 陽數에 해당하는 1‧3‧5를 더한 수가 陽數 9를 만들고, 陰數에 해당하는 2‧4를 더한 수가 陰數 6을 만든다는 설명이다.
◊八卦
乾
兌
離
震
巽
坎
艮
坤
순서 및 상징
一乾天
二兌澤
三離火
四震雷
五巽風
六坎水
七艮山
八坤地
卦
☰ 乾三連
☱ 兌上絶
☲ 離虛中
☳ 震下連
☴ 巽下絶
☵ 坎中連
☶ 艮上連
☷ 坤三絶
卦德
健 강건함
說 기쁨
麗 붙음
動 움직임
入 들어감
陷 빠짐
止 그침
順 순종함
人間
父
少女
中女
長男
長女
中男
少男
母
동물
馬 말
羊 양
雉 꿩
龍 용
鷄 닭
豕 돼지
狗 개
牛 소
신체
首 머리
口 입
目 눈
足 발
股 허벅지
耳 귀
手 손
腹 배
先天 방위
南
東南
東
東北
西南
西
西北
北
後天 방위
西北
西
南
東
東南
北
東北
西南
兩儀에서 四象을 만들어낸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四象에 각각 陽爻와 陰爻를 가하면 八卦가 만들어진다. 八卦는 세 개의 爻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三才, 즉 天‧地‧人을 상징한다. 맨 아래 初爻는 地位, 두 번째 中爻는 人位, 세 번째 上爻는 天位가 되는 것이다. 八卦의 순서와 상징은 다음 표와 같다. 八卦의 생성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乾卦와 坤卦이다. 이 두 卦는 자연물로는 하늘과 땅, 사람으로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해당된다. 象數學에서 제시된 卦變說은 卦가 다른 卦로부터 변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卦變說 중에는 모든 卦의 시작을 乾‧坤 두 卦로 상정하는 경우가 있는바, 이 說에 따르면 모든 卦는 乾卦와 坤卦가 변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兌卦☱는 乾卦☰가 坤卦☷의 上爻를 얻어서 이루어진 것이고, 震卦☳는 坤卦☷가 乾卦☰의 初爻를 얻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설명으로 볼 때, 乾卦와 坤卦를 제외한 나머지 卦에서 중심이 되는 爻는 卦 안에서 홀로 陰이거나 홀로 陽인 爻이다. 홀로 陰 혹은 홀로 陽인 爻가 바로 乾‧坤卦에서 변한 爻인데, 易은 변화를 위주로 하므로 변한 爻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兌卦☱의 중심은 上爻, 離卦☲의 중심은 中爻, 巽卦☴의 중심은 初爻가 된다. 이 세 卦의 중심은 모두 陰爻이므로 인간으로 따지면 여성이 되고, 爻의 생성은 아래로부터 시작되므로 初爻가 陰爻인 巽卦☴가 長女, 中爻가 陰爻인 離卦☲가 中女, 上爻가 陰爻인 兌卦☱가 少女가 되는 것이다. 震卦☳가 長男, 坎卦☵가 中男, 艮卦☶가 少男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64卦
八卦에 각각 八卦를 가하면 총 64개의 卦가 만들어진다. 이 卦는 6개의 爻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六畫卦라 하는데, 卦가 크게 이루어졌다 하여 大成卦라고도 하며, 八卦를 중첩하여 만들었다 하여 重卦라고도 한다. 三畫卦인 八卦는 小成卦라 한다. 八卦의 순서에 따라 乾卦로부터 각각의 八卦 위에 八卦를 순서대로 가하여 64卦를 만드는 방법을 一貞八悔法이라 하는데, 이때 下卦가 貞이 되고 上卦가 悔가 된다. 一貞八悔法으로 64卦를 그릴 때, 下卦는 고정해둔 채 上卦를 8번 바꾸어 그리기 때문에 下卦를 貞이라고 하는 것이다. 貞은 貞固不變의 뜻이 있고 悔는 후회한 후 잘못을 고치는 것이므로 變化의 뜻이 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처음 점을 쳐서 얻은 本卦를 貞이라 하고, 爻가 변하여 바뀐 之卦를 悔라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卦는 아래에서부터 긋기 때문에 下卦를 內卦, 上卦를 外卦라고도 한다.
一貞八悔法으로 그린 64卦
上卦下卦
☰ 天(乾)
☱ 澤(兌)
☲ 火(離)
☳ 雷(震)
☴ 風(巽)
☵ 水(坎)
☶ 山(艮)
☷ 地(坤)
☰ 天
䷀ 重天 乾
䷪ 澤天 夬
䷍ 火天 大有
䷡ 雷天 大壯
䷈ 風天 小畜
䷄ 水天 需
䷙ 山天 大畜
䷊ 地天 泰
☱ 澤
䷉ 天澤 履
䷹ 重澤 兌
䷥ 火澤 睽
䷵ 雷澤 歸妹
䷼ 風澤 中孚
䷻ 水澤 節
䷨ 山澤 損
䷒ 地澤 臨
☲ 火
䷌ 天火 同人
䷰ 澤火 革
䷝ 重火 離
䷶ 雷火 豐
䷤ 風火 家人
䷾ 水火 旣濟
䷕ 山火 賁
䷣ 地火 明夷
☳ 雷
䷘ 天雷 无妄
䷐ 澤雷 隨
䷔ 火雷 噬嗑
䷲ 重雷 震
䷩ 風雷 益
䷂ 水雷 屯
䷚ 山雷 頤
䷗ 地雷 復
☴ 風
䷫ 天風 姤
䷛ 澤風 大過
䷱ 火風 鼎
䷟ 雷風 恒
䷸ 重風 巽
䷯ 水風 井
䷑ 山風 蠱
䷭ 地風 升
☵ 水
䷅ 天水 訟
䷮ 澤水 困
䷿ 火水 未濟
䷧ 雷水 解
䷺ 風水 渙
䷜ 重水 坎
䷃ 山水 蒙
䷆ 地水 師
☶ 山
䷠ 天山 遯
䷞ 澤山 咸
䷷ 火山 旅
䷽ 雷山 小過
䷴ 風山 漸
䷦ 水山 蹇
䷳ 重山 艮
䷎ 地山 謙
☷ 地
䷋ 天地 否
䷬ 澤地 萃
䷢ 火地 晉
䷏ 雷地 豫
䷓ 風地 觀
䷇ 水地 比
䷖ 山地 剝
䷁ 重地 坤
(3) 《周易》의 용어
◊卦爻의 명칭
《周易》의 64卦에는 모두 卦名이 있는데, 卦를 읽을 때에는 卦名 앞에 그 卦를 이루고 있는 두 小成卦의 卦象을 붙여 읽는다. 예를 들어, 師卦䷆는 地水師, 小畜卦䷈는 風天小畜이라고 읽는다. 주의할 점은 卦를 그릴 때에는 아래부터 시작하지만, 卦를 읽을 때에는 위부터 읽는다는 점이다. 乾卦나 坤卦 같은 重疊卦들은 重天乾䷀, 重地坤䷁, 重澤兌䷹, 重火離䷝ 등의 방식으로 읽는다. 爻의 명칭은 그것의 才質과 위치에 따라 붙여진다. 먼저 위치에 따른 명칭은 아래로부터 初, 二, 三, 四, 五, 上이 되고, 才質에 따라서는 陽爻가 九, 陰爻가 六이 된다. 陽爻와 陰爻의 이름이 이렇게 매겨지는 것은 이 두 숫자가 陽과 陰의 대표숫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噬嗑卦를 보자. 噬嗑卦의 爻는 다음과 같이 읽는다.
初爻와 上爻를 제외한 二‧三‧四‧五爻는 재질→위치 순으로 읽고, 初爻와 上爻는 위치→재질 순으로 읽는다. 여섯 爻의 위치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크게는 먼저 陰의 자리와 陽의 자리로 나눌 수 있는데, 奇數(홀수)에 해당하는 初‧三‧五는 陽의 자리이고 偶數(짝수)에 해당하는 二‧四‧上은 陰의 자리이다. 다만 王弼의 경우, 初爻와 上爻는 陰과 陽의 정해진 자리가 없다고 하였으며, 이를 韓康伯과 孔穎達도 따랐다. 또 小成卦와 마찬가지로 六位를 三才로 나눌 수 있는데 初‧二는 地, 三‧四는 人, 五‧上은 天에 해당한다. 三才로의 분류가 공간적인 것이라면 시간적 분류도 가능한데, 다음은 六位를 시간과 尊卑貴賤 등의 관점으로 나누어 그 상징을 나타낸 표이다.
사건
개인
지위
上爻
결말
60대
은퇴한 군주
五爻
절정
50대
帝王
四爻
위기
40대
卿
三爻
위기
30대
大夫
二爻
전개
20대
士
初爻
발단
10대
庶人
◊剛柔와 中正
易에 있어서 陰은 柔이고 陽은 剛이다. 따라서 陰爻와 陰位(二‧四‧上)는 柔에 해당하고, 陽爻와 陽位(初‧三‧五)는 剛에 해당한다. 正은 陽爻가 陽位에, 陰爻가 陰位에 위치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初九, 六二, 九三, 六四, 九五, 上六爻가 正이 된다. 中은 卦의 가운데 자리를 의미하는데 六畫卦에는 二爻와 五爻, 두 개의 中이 있다. 二爻는 下卦의 中이고 五爻는 上卦의 中이기 때문이다. 六二爻와 九五爻는 中과 正을 겸하는 것으로 각각 柔順中正, 剛健中正이라 한다. 예컨대 旣濟卦䷾는 모든 爻가 正하고 그 가운데 六二爻와 九五爻는 中正을 겸하였으며, 未濟卦䷿는 모든 爻가 不正하다. 易에서 中과 正은 대체로 길함이 되지만 正보다는 中이 더 중시된다. 九三爻의 경우, 陽爻가 陽位에 있는 正이지만 이는 重剛으로서 너무 지나친 강함이 된다. 初九爻와 九五爻도 重剛이지만 初爻와 上爻는 지위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初九爻의 重剛은 문제가 되지 않고 九五爻는 中을 겸하기 때문에 지나침이 되지 않는다.
◊應‧比‧承(履)‧乘
應은 上卦의 初爻와 下卦의 初爻, 上卦의 中爻와 下卦의 中爻, 上卦의 上爻와 下卦의 上爻가 서로 응하는 것으로, 陰陽이 서로 다를 경우 應 또는 正應‧應與라 하고, 陰陽이 서로 같을 경우 敵應 또는 不應이라고 한다. 易은 陰陽의 호응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六二와 九五의 상응이 가장 좋은데, 二는 신하이고 五는 군주이며 모두 中正을 얻었기 때문이다. 益卦䷩, 泰卦䷊는 여섯 爻가 모두 正應이 있고, 巽卦䷸, 離卦䷝, 震卦䷲는 여섯 爻가 모두 不應이다. 比는 상하로 이웃하는 두 爻를 말한다. 즉 初와 二, 二와 三, 三과 四, 四와 五, 五와 上이 그것이다. 承‧履와 乘은 서로 접한 두 爻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 말인데, 서로 접한 爻의 陰과 陽이 다를 때만 성립한다. 承과 履는 陽爻가 陰爻 위에 있을 때, 乘은 陰爻가 陽爻 위에 있을 때를 말한다. 承이란 陰이 陽을 받들고 있다는 말이고 履는 陽이 陰을 밟고 있다는 말이며, 乘은 陰이 陽을 타고 있다는 말이다. 易에서 陰은 낮고 陽은 높은 것이어서 陰 위에 陽이 있는 承과 履는 좋은 것이 되지만 陰이 陽 위에 있는 乘은 불길한 것이 된다. 다음은 噬嗑卦를 통해 본 應‧比‧承(履)‧乘의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