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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성씨 영동 고택 비문

황성 2024. 8. 14. 10:44

通仕郎敬陵參奉德齋昌寧成公之墓

 

公諱世源, 初諱在源, 字允明, 姓成氏, 德齋其號. 系出昌寧, 高麗侍中諱松國.大提學, 諡文孝公, 諱士達, 卽遠祖也. 入本朝, 有諱彦忠, 進士, 以學問著, 屢除東部參奉義禁府都事, 皆不就, 世稱稼亭先生. 當龍蛇亂, 落南居沃川. 是生諱汝壽, 號緋巖, 晦跡林樊, 道義自樂. 四傳至諱沆, 以孝聞, 隱德不仕. 曾祖諱周烈, 號韓溪, 有文行, 負士友望. 生諱基敬, 生諱錫仁, 寔公祖若考也. 妣仁川李氏, 必耆女. 哲廟癸丑十一月二十六日, 生公于沃川馬浦里第. 幼而岐嶷異凡兒, 有大人氣. 九歲丁母夫人喪, 致哀如成人. 家勢素貧, 偏親年晩, 躬執樵採, 以供菽水, 竭其誠力. 公以次子分戶, 而伯氏早歿, 痛切割半, 親闈定省溫凊, 未嘗以室異而少懈. 間治産業, 頗不貧, 甘耎輕暖, 隨時所宜, 應對周旋, 惟志是順, 凡於爲親, 靡不用極. 及其侍疾也, 不交睫, 不解帶, 藥餌調護, 裙褕洗濯, 不使人代. 夜則汲井底水, 拜伏禱天, 請以身代. 如是三朔, 親癠乃瘳, 筋力康寧, 人謂孝感所致. 己亥遭故, 哀毁踰制, 殯殮葬祭, 遵禮無憾. 每當忌辰, 哀痛如始喪, 展墓攀栢, 雖寒暑不廢, 苟非根天之至孝, 安能如是乎? 丙午, 除敬陵參奉, 不就. 公氣槪, 有凌駕群衆之風, 及對人, 和氣藹然, 聰悟絶倫, 先輩之嘉言偉論, 小節細行, 一過耳不忘, 人服其記誦之才. 常曰家貧躬耕, 士之常也, 豈可惰其肢體, 罔念自濟之道? 或賴人而食之, 非丈夫事也, 寧不自愧? ” 由是鄕里感服, 誡其遊怠. 嘗有商人擔新白瓻, 過堂前. 公愛其製品, 沽其一, 還直, 擔忽自倒, 一擔瓻, 墮地糜粉. 商人駭且泣曰吾今餓死. ” 公曰勿慽也. ” 卽盡算其原本金以給之. 商人頓首拜謝曰公活我矣. ” 公慈善盖如此. 先立家廟, 次置祭田, 至於墓碣而俱備, 其奉先之誠至矣. 又曰家無貯書, 子孫何以博學? ” 每購書滿架. 世故陵夷, 俗尙浮薄, 甚憂之, 常以古道勉戒少輩. 朋舊來訪, 座上常滿, 輒挽留, 或至旬餘, 醑酒圍碁, 盡意爲樂. 人以昌大門戶爲賀, 則公愀然曰吾之絲身穀腹, 乃是祖先積蔭始發於今. ” 以范文正不忍獨享之說答之. 推此而觀之, 可知公孝思之無涯也. 嗚乎公挺生古家, 自手樹立, 如彼其優, 而之才之德, 若出而仕之, 措諸事爲, 則可以有裨於世, 而不求聞達, 官止齋郞, 終老邱園, 未展其所蘊, 識者惜之. 丁卯十二月十四日, 以疾考終于正寢, 享年七十五. 明年二月十三日, 葬于楊江面資風洞坐巽之原, 與夫人墓同岡, 從遺志也. 配慶州李氏, 錫一女, 有婦德, 先公三年歿. 有二男一女. 男大植萬植, 俱賢俊克家. 女適安東權永達. 大植娶延日鄭時溶女, 萬植娶恩津宋宗濂女. 大植三女申南浩李基周郭洪淵. 萬植二男伊煥佐煥. 伊煥出后伯父, 餘幼. 日公之胤子大植甫抱家狀, 諗于不佞曰此吾先君遺徽也, 將立石以表幽光, 惟公勉爲麗牲之鐫. ” 余聞之, 瞿然曰吾今老昏且不文, 何敢當是役? 子之欲闡先者, 不已傎乎? ” 辭益固而請益切, 義不可終辭, 遂櫽括狀誌所載, 系以銘曰

稼亭古宅, 有公挺生.

容儀粹偉, 志氣剛明.

自手起家, 大其門閎.

事親無違, 克殫孝誠.

廩分宗族, 座邀耆英.

晩霑一命, 匪公光榮.

旣就事業, 乃著聲名.

翛然觀化, 與物無爭.

資風一麓, 是爲佳城.

旣安旣固, 斲石刻銘.

 

庚午十月  

靈川后人進士申昇求謹撰

邵城后人外從李燦然謹書

 

恭人慶州李氏之墓

 

慶州李氏, 自麗朝著姓, 有諱謁平, 其鼻祖也. 至十八世諱世基, 諡文僖, 號松巖. 子諱世蒨, 諡文孝公, 號菊堂, 月城府院君. 至十二世諱吉安, 官參議. 至九世諱浣, 行郡守. 至諱錫一, 娶海平吉氏都正萬圭之女, 是生夫人. 年二十二, 歸于昌寧成氏, 卽古進士號稼亭諱彦忠之十世孫參奉在源之室. 孝舅姑, 仁親戚, 人無間言. 及其析産之日, 甁無儲粟, 室如磬懸, 不御鉛華, 躬執箕箒, 織絍惟勤, 家乃贍潤. 敎子以禮, 使婢以義, 雍雍和和, 一門賴化, 賙窮恤貧, 隣里賴生, 停鸞峙鵠, 宜其累仁之報矣. 與參奉公同居五十六年而終焉. 葬於楊江面資風前麓申坐之原. 有二男一女, 長大植, 次萬植, 女適權永達. 余於成公, 誼同師父, 情實舅甥. 夫人之沒后五祀, 其允大植屬余作銘, 不敢以不文爲辭, 遂感其意而敍其實. 乃作

養舅姑而極孝, 閨閫和而雍雍.

順君子而無違, 待如賓而相敬.

使婢僕兮以義, 臨下嚴而無傷.

恤貧窮兮以恩, 施不徹於平常.

幽宅崇兮四尺, 維資風之高崗.

 

庚午十月 日

外甥安東后人權永達謹誌

孫婿高靈后人申南浩謹書

 

成氏世德碑

 

君號易庵, 諡文孝公. 恭愍朝討平濟州, 勳一等. 子溥文科, 太宗同榜, 官奉常大夫刑部摠郞, 太祖累禮聘, 除授大司諫, 終不應, 後贈禮判, 參杜門洞七十二賢. 子孝源, 縣監. 子孝淵, 官司醞署直長, 後贈大司諫. 直長生子瓚, 官敦寧判官, 贈純忠積德補祚功臣領相昌原府院君. 子玩司馬, 官戶曹佐郞, 歷典牙山報恩, 成廟朝原從功臣, 贈吏參. 是生六子, 希騫武科, 官部長希仲文科, 官校理, 以文學德行, 功臣錄. 希哲文科, 官校理希赤司馬,王子師傅, 贈吏判希文官縣監, 贈刑判希周, 司馬文科, 官宗簿寺正承文判校, 贈禮參. 希仲子世溫, 通訓大夫光陵參奉, 至副正. 是生彦卿, 无后彦器, 公判, 以孝蒙旌彦良. 彦忠字謹叔, 號稼亭, 嘉靖癸巳生, 丁卯司馬, 以遺逸除東部參奉義禁府都事, 不就. 隱居沃川陽山之東村今永同郡龍化面鳳林里, 高尙其趣. 享沃川虎溪龜山兩院. 從子鶴泉公撰狀, 雙修堂金三樂撰墓碣文. 子汝壽, 字眉叟, 號緋巖, 將仕郞, 萬曆丙戌生. 自少有異姿, 與李芝峰睟光金南窓玄成沈竹西宗直爲道義交, 遺集. 子震翊, 字棐卿, 宣廟戊申生. 是生子虎臣, 字武伯, 號花山, 官副護軍, 享年八十, 嘯傲林泉, 讀書談道, 有遯世不見知而無憫之志. 次子虎斌, 字文伯, 官僉知. 虎臣子: 舜徵禹徵殷徵周徵達徵昌徵善徵仁徵義徵. 昌徵子沆. 沆子宇集, 濡染庭訓, 鄕隣化之. 次宇霖, 英廟戊辰生. 次宇極, 號老愚, 英廟辛未生. 子周烈, 字士彦, 號韓溪, 正廟己[], 享年七十四. 自幼少潛心究經, 不拘細務, 踵門受業者, 多有薰陶之澤焉. 次武烈, 字景承, 正廟壬寅生. 子基敬, 字直夫, 正廟庚申生, 享年七十, 號遯庵. 端莊恭儉, 有鷄群鶴立之儀表. 有三子, 長錫仁錫圭錫昌. 錫仁初諱錫文, 字子仁, 純廟戊寅生, 享年八十二. 克勤克儉, 一遵家範, 以淸白聞于世. 有二子, 百源字孝珍, 有學行. 子世源, 初諱在源, 字德明, 號德齋, []廟癸丑生, 官敬陵參奉. 公天姿特異, 有萬夫難奪之志, 百行具備, 平生所事, 無不可對人言者. 享年七十五. 進士申昇求撰墓道文. 子大植萬植. 大植子伊煥仲煥戊煥. 萬植子伊煥, 出系伯父后, 子佐煥伸煥仁煥, 餘不盡錄. 猗歟盛矣成氏之門, 承積德百年之餘, 日後將有長遠之望. 如不吾信, 試看陽江一帶水源, 源流不盡也.

          邵城李燦然謹撰

          永山金應淵謹書[幷篆]

    歲己卯之暮春下浣

 

永斯齋閣庭碑

 

附記義庄契名案

 

平生實踐躬行했었나니그德化鄕黨風靡했으므로資風洞一麓에그幽宅을마련하고墓碑를세워서그德義千秋하고자하나니冥福陰德永世에이어져가리라라고적었더라永斯齋閣大韓民國十九年丁丑西紀一九三七年陰九月九日重陽節建立되였었고當時義庄契組織해서契員들의鳩聚로써齋閣建立財源을마련하였나니崇祖慕賢誠力結晶일러라義庄契名案은다음과같다

첫째 義庄契節目은이러하다 契員正義롭게살아간다 基本金稱家有無出資한다 

契員相互親睦圖謀한다 契錢擴張後使用한다 契員哀慶相助한다 契集會外馬浦所在永斯齋에서한다 契集會日字陰十一月二十六日한다 契錢殖利隨時作定한다 契員不睦相爭하면出資金을주어逐出한다 契錢管理有司에게委任한다

둘째義庄契契員座目은이러하다  

成奎煥 成日煥 成伸煥 成仲煥 成仁煥 成弼權  成大植 成萬植 成景植 成奎植 成棋煥 成盛源 成福煥 成永植 成東植 成元植  成德煥 成海植 成汝植 成南植 成駿煥 成百用 成德植 成宇植 成慶煥 成寀源  成錫明 成錫虞 成奉煥 成來源 成一源 成江源 成泉源 成忠煥 成明源 成來植  成弼壽 成弼弘 成弼周 成弼俊 成元濟 成鳳煥 成佐煥 成伊煥 成弼鎬 成弼龜  

셋째 義庄契請助錄名案은이러하다 

李燦然 呂慶燮 李東周 李成基 呂運一 李彩然 李鍾甲 李鍾應 金滿洙 朴云用 李喜然 李應周 朴璡根 全泰天 金學辰

大韓民國七二年庚午西紀一九九 仲春

 羞烏堂主人 恩津 宋在忠 敬撰

 春堂 昌寧石人 成弼弘 謹書

 

永斯齋西紀一九八五年十二月二八日字忠淸北道에서地方有形文化財指定하였다

士人成萬植施惠碑

 

周窮恤貧, 在昔或有.

尙德斯人, 決意行之.

歲値壬荒, 捐廩賑施. 

惠先一區, 頌聲載碑.

 

 

통사랑 경릉참봉 덕재 창녕 성공지묘(通仕郎敬陵參奉德齋昌寧成公之墓)

 

공의 휘는 세원(世源)으로, 처음 휘는 재원(在源)이다. 자는 윤명(允明)이고, 성은 성씨(成氏)이며, 덕재(德齋)는 그의 호이다. 세계(世系)는 창녕(昌寧)에서 나왔으니,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송국(松國)의 후손이다. 대제학을 지냈고 시호가 문효공(文孝公)인 휘 사달(士達)이 바로 원조(遠祖)이다.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휘 언충(彦忠)이란 분이 계시니, 진사(進士)이고 학문으로 명성이 났다. 여러 번 동부 참봉(東部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정 선생(稼亭先生)이라 일컬었다. 임진왜란 때 남쪽으로 와서 옥천(沃川)에 살았다. 이분이 휘 여수(汝壽)를 낳았으니, 호는 비암(緋巖)이다.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도의(道義)를 닦으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4대를 전하여 휘 항()에 이르렀으니, 효행으로 알려졌으며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다. 증조의 휘는 주열(周烈)이니, 호는 한계(韓溪)이다. 문행(文行)이 있어 사우(士友)의 기대를 받았다. 이분이 휘 기경(基敬)를 낳고 휘 기경이 휘 석인(錫仁)을 낳았으니, 공의 조부와 선친이다. 선비(先妣)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필기(必耆)의 따님이다. 철묘(哲廟 철종) 계축년(1853, 철종4) 1126일에 공을 옥천(沃川) 마포리(馬浦里) 사제(私第)에서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와 달리 의젓하였으며 대인(大人)의 기상이 있었다. 9세에는 모부인(母夫人) 상을 당하여 어른처럼 슬픔을 극진히 표현하였다. 집안 형편이 평소 가난한 데다 홀아버지도 연세가 많았기에 직접 땔나무를 하여 변변치 못한 음식이라도 마련해 드리려고 자신의 정성과 힘을 다하였다.

공은 둘째 아들로서 분가하였는데,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몸의 반쪽을 베어내는 고통을 느낄 정도로 슬퍼하였으며, 아버지 곁에서 정성온정(定省溫凊)하는 정성을 다 바치되 분가하였다고 해서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간간이 가산을 늘려 그다지 가난하지 않게 되자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을 계절에 따라 알맞게 마련해 드렸고, 응대하고 주선할 적에는 오직 어버이의 뜻을 따랐다. 무릇 부모를 위하는 데에 극진히 힘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간호할 적에는 눈을 붙이지 않고 의대(衣帶)를 풀지 않은 채 약을 달여 올려 간호하였고 옷을 세탁하는 것도 남에게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밤에는 우물물을 길어 절하고 엎드려 하늘에 빌며 자신이 대신 아프기를 청하였다. 이처럼 석 달 동안 하자 아버지의 병환이 마침내 나아 근력이 강녕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리된 것이라고 하였다.

기해년(1899, 고종36)에 상을 당하여 슬퍼하기를 예제(禮制) 이상으로 하였고, 염습(殮襲)하고 장사 지내는 절차는 예법에 따라 유감이 없게 하였다. 매양 기일이 되면 애통함이 처음 상을 당했을 때와 같아 묘소를 살피고 잣나무를 붙잡고 울부짖었는데 비록 추위와 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진실로 타고난 지극한 효성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병오년(1906, 고종43)에 경릉 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의 기개는 일반 사람을 뛰어넘는 기풍이 있고, 사람을 상대할 적에는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기에 선배들의 훌륭한 말과 논의 및 사소한 일이나 행실까지도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공의 기억하고 외우는 재주에 탄복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집안이 가난하여 직접 밭을 갈아 농사짓는 것은 선비가 늘 겪는 일이니, 어찌 사지를 게을리 하여 스스로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 남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장부의 일이 아니니,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향리에서 감복하여 자신들의 태만함을 경계하였다.

일찍이 어떤 상인이 새 술단지를 지고 당 앞을 지나갔다. 공이 그 물건을 좋아하여 그 가운데 하나를 사고 다시 일으켜 세웠는데 짐이 갑자기 절로 넘어져 한 짐의 술단지가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상인이 놀라 짐짓 울면서 말하기를 저는 이제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공이 슬퍼하지 말라.”라고 하고서는 즉시 그 본전의 돈을 모두 계산하여 지불하였다. 상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여 말하기를 공께서 저를 살리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배려심이 대개 이와 같았다.

먼저 가묘(家廟)를 세우고 다음에 제전(祭田)을 두었으며 묘갈(墓碣)까지 모두 갖추었으니 선조를 받드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또 말하기를 집에 쌓아 둔 서책이 없으면 자손이 어떻게 널리 배우겠는가.”라고 하며 매번 책을 구입하여 서가를 가득 채웠다.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이 부박한 것을 매우 근심하여 항상 옛 도를 가지고 젊은이를 권면하고 경계하였다. 찾아오는 벗이 좌석에 늘 가득하였는데, 번번이 만류하여 어떤 때에는 10여 일을 머물기도 하였으며,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면서 실컷 즐겼다. 사람들이 집안을 창대하게 하였다고 하례하니, 공이 근심스럽게 말하기를 내가 몸에 옷을 걸치고 곡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은 바로 선대에서 쌓은 음덕이 비로소 오늘날에 드러난 것이다.”라고 하면서 범 문정공(范文正公 범중엄(范仲淹))차마 혼자 누리지 못한다는 말로 대답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공의 효성이 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공이 오래된 가문에 태어나 손수 수립한 것이 이처럼 넉넉하였으니, 공의 재주와 덕을 가지고 만약 나아가 벼슬하여 일에 시행하였다면 세상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은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아 관직이 재랑(齋郞)에 그쳤고, 끝내 초야에서 늙어 그 품은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정묘년(1927) 1214일에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니, 향년 75세였다. 다음 해 213일에 양강면(楊江面) 자풍동(資風洞)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夫人 어머니)의 묘소와 같은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공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배위(配位)는 경주 이씨(慶州李氏) 석일(錫一)의 따님이다. 부인의 덕이 있었다. 공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21녀를 두었다. 아들은 대식(大植), 만식(萬植)이니, 모두 어질고 훌륭하여 가업을 이었다. 딸은 안동(安東) 권영달(權永達)에게 시집갔다. 대식은 연일(延日) 정시용(鄭時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만식은 은진(恩津) 송종렴(宋宗濂)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대식은 3녀를 두었으니, 각각 신남호(申南浩), 이기주(李基周), 곽홍연(郭洪淵)에게 시집갔다. 만식은 2남을 두었으니, 이환(伊煥), 좌환(佐煥)이다. 이환은 백부의 양자로 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어느 날 공의 맏아들 대식 군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선군(先君)이 남긴 아름다운 덕이니, 장차 비석을 세워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덕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공은 이생지석(麗牲之石)을 만드는 데 힘써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듣고는 깜짝 놀라 말하기를 나는 지금 늙어 정신이 흐릿하고 문장 솜씨도 없으니,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선대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밝히고자 하는 그대의 뜻에 너무나 누를 끼치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사양하기를 더욱 굳게 하였지만 간청하는 것이 더욱 간절하여 의리상 끝까지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가장과 묘지에 실린 것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稼亭古宅 가정 선생의 고택에

有公挺生 공이 탄생하셨네

容儀粹偉 용모와 행동거지 순수하고 빼어났고

志氣剛明 뜻과 기개가 강명하였네

自手起家 손수 집안을 일으켜

大其門閎 그 가문을 크게 세웠네

事親無違 어버이를 섬기는 데 어김이 없어

克殫孝誠 효성을 다 하였네

廩分宗族 곳간을 열어 친족에게 나누어 주었고

座邀耆英 좌석에서 원로를 맞이하였네

晩霑一命 만년에 낮은 관직에 제수되었으니

匪公光榮 공에게는 영광된 것이 아니었네

旣就事業 이미 사업을 이루어

乃著聲名 마침내 명성이 드러났네

翛然觀化 느긋하게 변화를 살폈고

與物無爭 남과 다투지 않았네

資風一麓 자풍동 한 산기슭에

是爲佳城 묘소를 정하였네

旣安旣固 안온하고도 견고하니

斲石刻銘 돌을 깎아 명을 새기네

 

경오년(1930) 10월 일 

영천(靈川) 후인 진사(進士) 신승구(申昇求)가 삼가 찬하다

소성(邵城) 후인 외종(外從) 이찬연(李燦然)이 삼가 쓰다

 

공인 경주 이씨지묘(恭人慶州李氏之墓)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고려(高麗) 때부터 유명한 성씨였다. 휘 알평(謁平)이란 분이 계셨으니, 이분이 비조(鼻祖)이다. 18대조 휘 세기(世基)에 이르렀으니, 시호는 문희(文僖)이고, 호는 송암(松巖)이다. 이분의 아들은 휘 천()이니,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고, 호는 국당(菊堂)이며,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이다. 12대조 휘 길안(吉安)에 이르렀으니, 관직은 참의(參議)를 지냈다. 9대조 휘 완()에 이르렀으니, 행 군수(行郡守)를 지냈다. 휘 석일(錫一)에 이르러 해평 길씨(海平吉氏) 도정(都正) 만규(萬圭)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분이 부인을 낳으셨다. 나이 22세에 창녕 성씨(昌寧成氏)에게 시집왔으니, 바로 고 진사(進士) 호 가정(稼亭), 휘 언충(彦忠)10대손인 참봉 재원(在源)의 부인이다.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척에게 인후하였으니, 사람들이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분가할 때 쌀독에는 저장한 곡식이 없었고 방에는 마치 텅 빈 듯 아무것도 없었다. 화장하여 꾸미지 않았고, 직접 키와 빗자루를 들고 집안일을 하였으며, 부지런히 베를 짜니 집안이 마침내 넉넉하고 윤택해졌다. 자식을 예로써 가르치고 여종을 의()로써 부렸다. 화목하고 화합하니 온 집안이 그 덕분에 교화되었고, 곤궁하고 가난한 자를 구휼하니 이웃들이 그 덕분에 살 수 있었다. 난새와 고니와 같은 훌륭한 자손들이 가업을 지키니 인덕을 쌓은 보답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참봉공과 56년을 함께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양강면(楊江面)의 자풍동(資風洞) 앞 산기슭 신좌(申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21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대식(大植)이고, 차자는 만식(萬植)이다. 딸은 권영달(權永達)에게 시집갔다.

나는 성공(成公)에 대해서 사부(師父)와 같은 우의가 있고 구생(舅甥)과 같은 정이 있는데,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5년 뒤에 맏이 대식이 나에게 명()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감히 글솜씨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 뜻에 감동하여 그 사실을 서술하고서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養舅姑而極孝 시부모를 봉양하여 지극한 효성을 다하니

閨閫和而雍雍 규문 안이 화합하여 화목하였네

順君子而無違 남편에게 순종하되 어김이 없었으니

待如賓而相敬 손님을 대하듯 서로 공경하였네

使婢僕兮以義 하인들을 부리되 의로써 하였으니

臨下嚴而無傷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이 엄해도 의리에 손상이 없었네

恤貧窮兮以恩 가난하고 곤궁한 자를 구휼함에 은혜로써 하였으니

施不徹於平常 베풂이 평상시에도 그치지 않았네

幽宅崇兮四尺 묘소에 비석을 세웠으니

維資風之高崗 자풍동의 높은 언덕에 있네

 

경오년(1930) 10월 일

외생(外甥) 안동(安東) 후인 권영달(權永達)이 삼가 기록하다

손서(孫婿) 고령(高靈) 후인 신남호(申南浩)가 삼가 쓰다

 

성씨세덕비(成氏世德碑)

 

성사달(成士達) 군의 호는 역암(易庵),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제주(濟州)를 토벌하여 평정한 공로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훈되었다. 아들 부()는 문과에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과 동방(同榜)으로 급제하였고, 관직은 봉상시 대부(奉常寺大夫), 형부 총랑(刑部摠郞)을 지냈다. 태조(太祖)가 여러 차례 예를 갖추어 초빙하여 대사간에 제수하였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다. 나중에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두문동(杜門洞)72 현인(賢人)에 참여하였다. 아들 효원(孝源)은 현감에 제수되었다. 아들 효연(孝淵)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지냈고 나중에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직장(直長) 효연의 아들 찬()은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지냈고, 순충적덕보조 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영의정 창원부원군(昌原府院君)에 증직되었다.

()의 아들 완()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호조 좌랑을 지내고 아산 현감(牙山縣監),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역임했으며, 성묘(成廟 성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희건(希騫)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관직은 부장(部將)을 지냈다. 희중(希仲)은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교리(校理)를 지냈으며, 문학(文學)과 덕행(德行)공신록(功臣錄)에 드러났다. 희철(希哲)은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교리를 지냈다. 희적(希赤)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왕자 사부(王子師傅)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희문(希文)은 관직이 현감에 이르렀으며, 형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희주(希周)는 사마시와 문과에 합격하였고, 관직은 종부시 정(宗簿寺正)과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을 지냈으며,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희중의 아들 세온(世溫)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역임하고 부정(副正)에 이르렀다. 세온의 아들로 언경(彦卿), 언기(彦器), 언량(彦良), 언충(彦忠)이 있는데, 언경은 후사가 없었고, 언기는 공주 판관(公州判官)을 지내고 효로써 정표를 받았다. 언충의 자는 근숙(謹叔)이고 호는 가정(稼亭)이며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28)에 태어났다.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유일(遺逸)로 동부 참봉(東部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옥천(沃川) 양산(陽山)의 동촌(東村)인 지금 영동군(永化郡) 용화면(龍化面) 봉림리(鳳林里)에 은거하여 그 취지를 고상하게 하였다. 옥천(沃川)의 호계서원(虎溪書院)과 구산서원(龜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종자(從子) 학천공(鶴泉公)이 행장(行狀)을 짓고 쌍수당(雙修堂) 김삼락(金三樂)이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다.

언충의 아들 여수(汝壽)의 자는 미수(眉叟), 호는 비암(緋巖)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만력(萬曆) 병술년(1586, 선조19)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다른 자질이 있어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죽서(竹西) 심종직(沈宗直)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유집(遺集)이 있다.

여수의 아들 진익(震翊)의 자는 비경(棐卿)으로, 선묘(宣廟 선조) 무신년(1608, 선조41)에 태어났다. 그 아들 호신(虎臣)은 자가 무백(武伯)이고 호는 화산(花山)이다. 관직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냈고, 향년 80세이다. 임천(林泉)에서 소오(嘯傲)하고 글을 읽고 도를 담론하였는데, 세상을 피해 살면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근심하지 않겠다는 뜻이 있었다. 차자 호빈(虎斌)은 자가 문백(文伯)이고, 관직은 첨지(僉知)를 지냈다.

호신의 아들은 순징(舜徵), 우징(禹徵), 은징(殷徵), 주징(周徵), 달징(達徵), 창징(昌徵), 선징(善徵), 인징(仁徵), 의징(義徵)이다.

창징(昌徵)의 아들은 항(), ()이다. 항의 맏아들 우집(宇集)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실천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이 교화되었다. 차자(次子) 우림(宇霖)은 영묘(英廟 영조) 무진년(1748, 영조24)에 태어났다. 차자 우극(宇極)은 호가 노우(老愚)이고 영묘 신미년(1751, 영조27)에 태어났다.

우극의 맏아들 주열(周烈)은 자가 사언(士彦)이고 호는 한계(韓溪)이니, 정묘(正廟 정조) 기해년(1779, 정조3)에 태어났고 향년 74세이다. 어려서부터 잠심(潛心)하여 경서(經書)를 연구하여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니, 찾아와 수업을 받은 자는 훈도(薰陶)의 은택이 많았다. 차자 무열(武烈)은 자가 경승(景承)이고 정묘 임인년(1782, 정조6)에 태어났다.

무열의 아들 기경(基敬)은 자가 직부(直夫)이다. 정묘 경신년(1800, 정조24)에 태어났으며 향년 70세이다. 호는 둔암(遯庵)이다. 단정하고 공손하였으니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의표(儀表)가 있었다.

기경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석인(錫仁), 석규(錫圭), 석창(錫昌)이다. 석인은 처음 휘는 석문(錫文)이고, 자는 자인(子仁)이다. 순묘(純廟 순조) 무인년(1818, 순조18)에 태어났고 향년 82세이다.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한결같이 가범(家範)을 따라 청백리(淸白吏)로 세상에 알려졌다.

석인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백원(百源)의 자는 효진(孝珍)이고, 학행(學行)이 있었다. 둘째 아들 세원(世源)의 처음 휘는 재원(在源)이고, 자는 덕명(德明)이며, 호는 덕재(德齋)이다. 철묘(哲廟 철종) 계축년(1853, 철종4)에 태어났다. 관직은 경릉 참봉(敬陵參奉)을 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특이하여 만부(萬夫)라도 빼앗기 어려운 뜻이 있었다. 온갖 행실이 구비되어 평소에 일삼은 바는 남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 없었다. 향년 75세이다. 진사 신승구(申昇求)가 묘도문(墓道文)을 지었다.

세원의 아들은 대식(大植)과 만식(萬植)이다. 대식의 아들은 이환(伊煥), 중환(仲煥), 무환(戊煥)이다. 만식의 아들 이환(伊煥)은 백부(伯父)의 양자로 갔다. 아들 좌환(佐煥), 신환(伸煥), 인환(仁煥)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 성대하다. 성씨(成氏) 가문이여! 덕을 쌓은 지 100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장구할 가망이 있을 것이다. 만일 나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양강() 일대의 수원(水源)을 한번 살펴보라. 원류가 끊이지 않네.

 

소성(邵城) 이찬연(李燦然)이 삼가 찬하다

영산(永山) 김응연(金應淵)이 삼가 쓰다. [제자 전서도 함께 쓰다.]

기묘년(1939) 3월 하순

 

永斯齋閣庭碑

義庄契名案附記하다

 

平生實踐躬行했었나니 그 德化鄕黨風靡했으므로 資風洞一麓에 그 幽宅을 마련하고 墓碑를 세워서 그 德義千秋하고자 하나니 冥福陰德永世에 이어져 가리라라고 적었더라. 永斯齋閣大韓民國 十九年 丁丑 西紀一九三七年 陰九月九日 重陽節建立되였었고 當時義庄契組織해서 契員들의 鳩聚로써 齋閣建立財源을 마련하였나니 崇祖慕賢誠力結晶일러라. 義庄契名案은 다음과 같다.

첫째, 義庄契節目은 이러하다.

契員正義롭게 살아간다.

基本金稱家有無出資한다.

契員相互親睦圖謀한다.

契錢擴張後使用한다.

契員哀慶相助한다.

契集會外馬浦所在 永斯齋에서 한다.

契集會日字陰十一月二十六日한다.

契錢殖利隨時作定한다.

契員不睦相爭하면 出資金을 주어 逐出한다. 

契錢管理有司에게 委任한다.

 

둘째, 義庄契 契員 座目은 이러하다.  

成奎煥 成日煥 成伸煥 成仲煥 成仁煥 成弼權  成大植 成萬植 成景植 成奎植 成棋煥 成盛源 成福煥 成永植 成東植 成元植  成德煥 成海植 成汝植 成南植 成駿煥 成百用 成德植 成宇植 成慶煥 成寀源  成錫明 成錫虞 成奉煥 成來源 成一源 成江源 成泉源 成忠煥 成明源 成來植  成弼壽 成弼弘 成弼周 成弼俊 成元濟 成鳳煥 成佐煥 成伊煥 成弼鎬 成弼龜  

 

셋째, 義庄契 請助錄 名案은 이러하다. 

李燦然 呂慶燮 李東周 李成基 呂運一 李彩然 李鍾甲 李鍾應 金滿洙 朴云用 李喜然 李應周 朴璡根 全泰天 金學辰

大韓民國七二年庚午 西紀一九九 仲春

          羞烏堂主人 恩津 宋在忠 敬撰

          春堂 昌寧石人 成弼弘 謹書

永斯齋西紀一九八五年 十二月 二八日字忠淸北道에서 地方有形文化財指定하였다.

사인 성만식 시혜비(士人成萬植施惠碑)

 

周窮恤貧 가난한 사람을 두루 구휼하는 것은 

在昔或有 옛날에도 간혹 있었네

 

尙德斯人 덕을 숭상한 이분이여

決意行之 결단하여 실천하였네

 

歲値壬荒 임자년 흉년을 만나

捐廩賑施 곳간을 열어 도와주었네 

 

惠先一區 은혜를 고을에 먼저 베풀었으니

頌聲載碑 칭송하여 비를 세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