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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사 잡역 견감 완문

황성 2020. 7. 2. 09:48

驪州報恩寺雜役蠲減完文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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驪之報恩, 卽古之神勒寺. 臨大江有東臺巖石, 以絶景擅. 麗之季, 王師懶翁, 以是爲泥蓮河, 二隱常與翁善, 修大莊閣江月軒, 記事于石. 石面尙有文字可觀. 至我朝, 命爲陵寢願堂, 仍賜額, 亦國家之所重而恤者.

不幸數十年以來, 南漢起義僧之役, 紙署徵立役之軍. 而且有內寺節營之煩徭. 白衲緇髡, 困瘁而盡散, 瓊宮梵宇, 傾頹而將墟, 法界淸景, 非復舊時容矣. 察江上下往來而遊觀者之所, 嗟惜不已.

迺者李公, 適於是寺也遊乎, 愍名刹荒廢之久, 念園陵道場之重. 而亦有感於牧陶遺蹟之泯沒, 召老釋淳, 謀所以蠲役重修, 淳之對甚審. 仍力言於時宰, 減餘各司役.

及夕飮氷() 而似必率二僧徒, 而書賜募綠文於所過邑 以鳩財施將 使牛香再熱兼梵重宣. 倘非李公愛山水之心重園陵之誠, 有過於人乎, 何能於視釐/之地 盡身如是, 而又非淳老釋之言, 難乎詳於革弊之道矣.

嗟乎, 地有興廢, 必由人猗. 今二隱之後 累百餘歲 李公能重新之, 安知李公之後 復有如李公者出, 更修繕此寺否也? 淳老, 尊懶翁而老於寺者也. 以除役完文, 爲日後考 且志 不忘李公之德 書之卷 而請余言 故題之以爲蠲役錄序.

 

歲甲辰暮春之初 鶴皐居士書

 

여주(驪州) 보은사(報恩寺)의 잡역을 견감(蠲減)하는 완문(完文)의 서문(序文)

 

여주의 보은사는 곧 옛날의 신륵사(神勒寺)이다. 큰 강에 임하여 있고 동대(東臺)라는 암석이 있어 뛰어난 경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려 말기에 왕사(王師)인 나옹(懶翁)은 이를 니연하(泥蓮河)로 삼았다. 이은(二隱)이 늘 나옹과 가깝게 지냈는데, 대장각(大藏閣)과 강월헌(江月軒)을 세우고 그 일을 돌에 기록해 두었다. 지금도 돌의 표면에는 볼 만한 문장이 남아 있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는 능침(陵寢)의 원당(願堂)으로 삼도록 명하고 이어서 편액(扁額)을 내려 주었으니 또한 국가에서 중요하게 여기면서 돌보는 곳이다.

불행하게도 수십 년 이래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의승(義僧)을 동원한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조지서(造紙署)에서 입역(立役)할 군사를 징발하며, 또 내수사(內需司)에서 원당을 운영하는 데 비용을 절감하려는 요역이 번거로웠다. 이 때문에 백납(白衲)을 입은 승려들이 곤궁함과 고달픔에 모두 흩어지고 누대와 사찰은 무너지고 폐허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여(眞如)의 맑고 아름다운 경치가 더 이상 옛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강의 위아래를 오가며 유관(遊觀)하는 자들의 장소임을 헤아려보면 탄식과 안타까움이 그치지 않았다.

지난번에 이공(李公)이 마침 이 사찰에 유람을 와서 이처럼 명찰(名刹)이 오래도록 황폐된 채로 있는 것이 안타깝고 원릉(園陵) 도량(道場)의 중요성을 염려하였다. 또 목은과 도은의 자취나 흔적이 민멸되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겼다. 노석(老釋)인 영순(英淳)을 불러 부역을 덜고 사찰을 손질하여 고칠 방도를 의논하니 영순이 대답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어서 시임 재상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여 각 ()의 다른 요역을 경감하여 주었다. 그리고 중수(重修)의 명을 받들게 되었는데 반드시 승도(僧徒) 2명을 거느리고 편지로 지나는 고을에 모연문(募緣文)을 써 보내어 재물을 모아 역사(役事)를 펼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우향(牛香)을 사르고 설법을 펼치도록 해야 할 듯하였다. 만약 이공의 산수를 아끼는 마음과 원릉(園陵)을 중시하는 정성이 다른 사람보다 더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능히 문제를 찾고 바로잡는 일에 이처럼 온몸을 다 바칠 수 있겠는가. 또 노석(老釋) 순영의 말이 아니었다면 폐단을 혁파하는 방도가 치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어느 지역이 흥망성쇠를 겪자면 반드시 사람으로 말미암는다. 이제 이은(二隱, 목은과 도은)의 뒤로 수백 여년이 지나서 이공(李公)이 거듭 새롭게 할 수 있었으니, 이공의 뒤에 다시 이공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이 사찰을 다시 수리할 자가 있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노석(老釋) 영순은 나옹(懶翁)을 존경하여 이 사찰에서 늙도록 지낸 자이다. 잡역을 견감하는 완문(完文)을 훗날의 증거로 삼고 또 이공의 덕을 기록하여 잊지 않고자 하는 생각에 권책(卷冊)에 그 내용을 적고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그래서 내가 글을 지어 견역록(蠲役錄)의 서문으로 삼는다.

 

갑진년(1724, 경종4) 모춘(暮春) 초엽에 학고거사(鶴皐居士)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