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사호선생 대책

대책

황성 2012. 4. 2. 09:03

竹植物也 非草 非木 宜烟宜雨 而謂之有文武之用 禮樂之具者 何歟 或謂之似賢 或謂之比德 何歟 嶰谷之篴 柯亭之籥 可言其制耶 七賢之遊 六逸之隱 其所樂者 何歟 義竹之號 神竹之稱 其所取者 何歟 或染於帝妃之淚 或抽於孝子之泣 或龍化於葛陂 或鳳儀於虞庭 植物之感應變化者 何歟 丈夫甲刃 兒孫環立 所譬之不一 何歟 人俗之咏 勿栽之諫 所尙之不同 何歟 大禹之貢竹 夫子之知竹 亦可詳言其旨歟 樂天之養竹 寬夫之(果+刂)竹 亦有取比之意歟 古人之竹也 不惟愛玩吟詠而已 必有所取之意 今世之人封植愛惜 果無讓於古人 而亦得其取竹之意歟 如欲皆知所以取竹之意 而能養(果+刂)以致猗猗之盛 使自修者寄奧 養賢者取則 其由安在 諸生格物士也 嘗於竹牖之下 靑簡之上 必有所得 無曰玩物 必陳深趣

문.

죽(竹)은 식물이다. 풀도 아니요, 나무도 아니어서 안개 낄 때 운치가 있고 비내릴 때에도 운치가 있는데, 문무(文武)의 쓰임과 예악(禮樂)의 도구를 지녔다고 말하는 무엇 때문인가? 현자를 닮았다고 하거나 덕성에 비견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해곡(嶰谷)1)의 피리 가정(柯亭)2)의 젓대는 만든 경위를 말할 수 있는가? 칠현(七賢)3)이 노닐고 육일(六逸)4)이 은둔하며 무엇을 즐겼는가? 의죽(義竹)이라 부르고 신죽(神竹)이라 말하는 것은 어디에서 뜻을 취했는가? 왕비의 눈물에 물들거나5) 효자의 눈물에 피어났으며6), 용이 갈파(葛陂)7)에서 변하거나 봉황이 우정(虞庭)8)에 날아왔는데 식물이 감응하여 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장부의 갑인(甲刃)9) 아손(兒孫)이 빙 둘러섰다10) 등 여러 가지로 비유하였는데, 이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사람이 속물이 된다는 시11)와 심지 말라고 충고12)하는 등 숭상함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대우(大禹)가 죽을 바치고, 부자가 죽을 안다는 것도 자세하게 그 뜻을 말할 수 있는가? 낙천(樂天)13)이 죽을 기르고, 관부(寬夫)14)가 죽을 논평한 것도 비유한 뜻이 있는가? 옛 사람은 죽을 즐기고 노래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취한 뜻이 있었다. 오늘날 사람이 심고 사랑함이 과연 고인보다 못한데 그래도 죽을 취한 뜻을 얻었는가? 만일 모두 죽에서 취한 뜻을 알아 기르고 가꾸어 성대한 아름다움을 이루어 스스로 수양하는 자 오묘함을 터득하고 어짊을 수양하는 자 법칙을 취하게 하고자함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치를 탐구하는 선비들이여 대창 아래 역사책 위에서 반드시 터득한 것이 있을 것이니, 즐긴다 말하지 말고 반드시 깊은 뜻을 진술하라.


대.

陶潛有君子之節 故能愛菊 茂叔有君子之道 故能愛蓮 執事有君子之風 故能愛竹  愛而不已 取而問之 嗚呼 不有君子 斯焉取斯

도잠(陶潛)은 군자의 절개가 있었다. 그러므로 국화를 사랑했고, 무숙(茂叔)은 군자의 도가 있었다. 그러므로 연꽃을 사랑했습니다. 집사(執事)께서 군자의 풍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시니, 아, 군자가 아니고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愚請比而興之 天地之所養 雨露之所濡 芽者甲者 根者荄者 林林蔥蔥 厥類甚夥 而竹之爲物 拔乎其萃 謂草非草 謂木非木 淸標凛凛 特立亭亭 不受霜雪之侵 羞爲桃李之顔 而其用宜於文武 其具合於禮樂 則其得列於君子之林 而不與衆卉同其腐者 有由然矣 是以 詩人 詠歌其節操 墨客 摸寫其風韻 封植慇懃 會見拂雲之長 襟懷蕭灑 聊寄出塵之想 人之愛之 爲如何哉

제가 한번 비유를 들어 말해보겠습니다. 하늘과 땅이 길러주고 비와 이슬이 적셔주니, 싹, 껍질, 뿌리, 풀뿌리가 빽빽하고 촘촘하여 그 종류가 매우 많지만 죽이란 식물은 그 종류 가운데 빼어나니, 풀이라 말하지만 풀이 아니요, 나무라 말하지만 나무가 아니다. 의젓한 맑은 가지를 뻗어 우뚝이 서있으니, 서리와 눈의 침해을 받지 않아 겨울이면 말라버리는 복숭과 오얏 꼴이 될까 부끄러워하는데, 그 쓰임은 문무(文武)에 알맞고 그 용구는 예악에 알맞으니, 군자의 숲에 나열하여/ 여러 화초와 함게 시들지 않는 것은 까닭이 있어 그러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이 그 절조를 칭송하고 묵객(墨客)이 그 운치를 그려내어 흙을 북돋아 심기를 정성스럽게 하여 때론 구름을 흩는 운치를 보고 마음이 울적하면 애오라지 속진을 벗어날 생각을 붙이니, 사람의 아낌이 어떠하겠습니까.


雖然 其所以愛之者 爲其似乎賢也 其所以取之者 爲其似君子也 必也 能近取譬惟德 其物以爲自修之柯則 養賢之模範然後 斯可以不負於竹矣 不然而玩好而已 吟詠而已 則非吾所謂知竹者也

비록 그렇지만 사랑하는 까닭은 현자를 닮았기 때문이요, 취한 까닭은 군자를 닮았기 때문에 필연적 이치입니다. 가까운 곳에서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덕입니다. 이 덕은 스스로 닦는 법칙과 현자를 대우하는 모범이 된 뒤에 죽의 성질과 위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완상하고 노래하는 대상으로 여길 따름이라면 제가 말한 죽의 운치를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請因壎唱而箎和之 固直空貞 宜似乎賢 剛柔義忠 可比於德 嶰谷兩節 中於黃鍾 柯亭一籥 鳴於赤漢 典午末抄 林下有人 仙李中葉 溪上有逸 明皇友于 有義之號 寇公忠矣 得神之稱 斑血染枝 二妃遺寃 綠擇抽雪 至孝攸感 仙翁擲杖 神物蜿蜿 雲韶盡美 靈鳥蹌蹌 介士森刃 左賦攸撰 錦網環立 韓句善喩 蘇仙不俗 寧食無肉 趙相防微 恐其玩物 荊楊厥貢執壤惟正闕里多識 物無不格 樂天之養 以似賢也 寬夫之(果+刂) 爲去邪也 嗚呼 歷觀古人 不惟愛玩其所愛者有焉 不惟吟詠其所取者有焉 今人則不然 非不愛之而不知所以愛之 非不養之而不知所以養之 甚者 斬伐其根本 芟刈其枝葉 屈其正直之氣 折其貞固之操 而有無竹之心 可勝歎哉

청건대, 질나팔이 선창(先唱)하기에 젓대가 화답합니다./ 견고하고 곧으며 비고 바르니 현자를 닮았고, 강하고 부드러우며 의롭고 충성스러우니 덕성에 견줍니다. 해곡(嶰谷)의 육률(六律)과 육려(六呂) 두 음절은 황종(黃鍾)에 알맞고, 가정(柯亭) 한 젓대는 적한(赤漢)에서 울었습니다. 전오(典午)15) 말엽에 대숲 아래에 사람이 있었고, 선이(仙李) 중엽에 시냇가에 은자가 살았습니다. 명황(明皇)의 아들16)은 의(義)의 칭호가 있었고, 구공(寇公)은 충성스러워 신선의 칭호를 얻었고, 선혈이 가지를 물들인 것은 아황과 여영의 원망입니다. 푸른 순이 눈 속을 뚫고 나옴은 지극한 효성에 감응한 것이요, 선옹(仙翁)이 지팡이를 던지니 신물(神物)이 꿈틀거리고, 운소(雲韶)17)가 진선진미하니 영조(靈鳥)가 훨훨 날았다. 개사(介士)의 빽빽하게 칼을 줘고 있다는 것은18) 좌부(左賦)에서 뽑은 바이고,// 비단 거물 둘러서 있으니 한유가 시구에서 잘 비유한 것이다. 소선(蘇仙)19)이 속되지 않아 차라리 고기반찬이 없이 밥을 먹었네20) 조상(趙相)은 미연에 방지하여 사물에 빠져들까 두려워하였네. 형양(荊楊)에서 조공을 바치니// 집양(執壤)21)을 오직 바르게 하였으며, 공자는 식견이 많아 사물의 이치 모두 알았네. 낙천(樂天)이 가꾼 이유는 현자를 닮았기 때문이요. 관부(寬夫)22)는 가른 것은 사악함을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아. 고인을 일일이 관찰하면 사랑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바를 좋아하는 자 있었으며, 시로 읊을 뿐만 아니라 그 취한 바를 읊는 자가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키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이유를 알지 못하여, 심한 경우 그 뿌리를 잘라내고 그 가지를 베고, 곧고 바른 기운을 파내고 곧고 굳은 음률을 꺾어버려 대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으니, 탄식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愚聞苟得其養 物無不長 苟失其養 物無不消 誠使愛之者 不于物而于其德 不於彼而於其已 刪其薈蔚 去其茅塞 命靑陽以發敷 起朱融以條暢 戒昊收之來殺 肅玄冥以堅固 則垂垂其實 鳳凰來食 猗猗之盛 君子有斐矣 噫他山之石 尙且攻玉淇園之竹 豈不成德自修之工在此 養賢之道在此 格物之士 盍於此而勉焉

저는 듣자니, 기르는 방법을 얻으면 모든 식물이 잘 자라고 기르는 방법을 잃으면 모든 식물이 시든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사랑스럽게 여기도록 하는 것은 식물에 있지 않고 덕성에 있으며, 남에게 있지 않고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울창한 잎을 속아주고 그늘진 땅을 치워 청양(靑陽)에 명하여 뿌리를 펴주고 붉은 축융(祝融)을 일으켜 가지를 뻗게 하며, 하늘에 경계하여 거두어 두게 하고/, 현명(玄冥)23)을 엄숙히 하여 견고하게 하니, 드리운 그 열매는 봉황이 와서 먹고 무성한 그 숲은 군자가 아름답게 여깁니다.


噫他山之石 尙且攻玉 淇園之竹 豈不成德 自修之工在此 養賢之道在此 格物之士 盍於此而勉焉

아. 다른 산의 돌은 오히려 옥을 다듬으니, 기원(淇園)의 죽은 어찌 덕성을 이루지 않겠는가. 수양하는 공부는 여기에 있고 현자를 대우하는 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물의 이치는 찾는 선비는 아마 여기에 힘써야 합니다.


篇將終矣 抑有感焉 嗚呼竹似君子 人猶愛之 何况眞君子乎 然則異於衆草者竹也 異於衆人者君子也 竹不能自養而人養之 君子不能自用而用君子者用之 今日之竹 豈得盡其養 當世之士 豈得盡其用哉 執事托華池之根 聯玉筍之班 虛心則似卽官之筆 直節則凌御史之霜 故愚於竹之問 以君子對謹對

글이 끝나려하니 또 느낌이 있습니다. 아. 죽은 군자를 닮아 사람이 오히려 좋아하는데, 어찌 하물며 참 군자에 있어서랴. 그렇다면 일반 풀과 다른 것은 죽이요, 일반 사람과 다른 이는 군자입니다. 죽은 절로 자라지 못하니 사람이 기르고, 군자는 스스로 쓰이지 못하니 군자를 쓰는 자 등용합니다. 오늘날의 죽이 어찌 그 기름을 다 얻었겠습니까. 당시의 선비 어찌 그 쓰임을 다 얻었겠습니까. 집사는 화지(華池)의 뿌리에 의탁하고 옥순(玉筍)의 반열을 이어서 마음을 비우면 즉관(卽官)과 같으며, 절개를 세우면 어사(御史)의 서리를 능멸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죽에 대한 질문에 군자에 비유하여 삼가 대답합니다.


문.

장상(將相)의 도리.


대.

愚也 處子牟江湖之居 懷獻可過位之憂 而讀火風之鼎 則常惧公餗之覆 繹地水之師 則窃慕丈人之吉 而幸承願聞之問 適及於欲言之秋 今日風簷 不盡所蘊 則明日漆室 倚柱何益

저는 자모(子牟)24)의 강호에 거처하며 헌가(獻可)25)의 지나친 지위를 근심하고 <<주역>>의 화풍(火風) 정(鼎)괘를 읽고 늘 공속(公餗)의 전복26)을 두려워하고, <<주역>>의 지수(地水) 사(師)괘를 연구하고 가만히 장인(丈人)의 길함27)을 사모하였습니다. 다행히 바라던 질문을 받으니, 마침 말할 수 있는 때에 미쳤습니다. 오늘 쓸쓸한 시험장에서 쌓은 지식을 다 쏟지 않으면 내일 칠실(漆室)이 기둥에 기댄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竊謂將相之於爲國 其任重矣 宅百揆輔一人 而陶至化於爕理者 相之所以有其職也 司三軍憲萬邦 而制匪茹於屛翰者 將之所以有其任也 而非相則無以治其國 非將則無以衛其國

삼가 생각건대, 장상이 국가를 다스리는 임무는 막중합니다. 백규(百揆)28)에 있으면서 한 군왕을 도와 섭리에서 지극한 조화를 만드는 것은 재상이 그 직임을 맡은 이유이다. 삼군을 통솔하여 온 나라를 수비하여 비여(匪茹)29)를 병한(屛翰)에서 막으니, 장수가 그 임무를 맡은 까닭이다. 재상이 아니면 국가를 다스릴 수 없고, 장군이 아니면 국가를 지킬 수 없다.


是故 論道經邦 載於書傳 克壯厥獻 詠于詩雅 則古昔爲治之道 孰有大於此乎 人君必能爰立而得其人 分閫而有其人 然後 裁成輔相之道 得矣 而天下治 禦衛宣撫之方 盡矣 而社稷安

이 때문에 도를 논하고 국가를 경영하는 일을 <<서전(書傳)>>에 실었고, 능히 그 계책이 훌륭하다30)고 <<시경>> <소아>에서 읊었으니, 옛날 다스리는 방도가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인군은 반드시 서면 알맞은 사람은 얻고, 나누어 다스리면31) 알맞은 사람을 얻습니다. 이러게 한 뒤에 재성보상(裁成輔相)의 방법을 얻으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어위선무(禦衛宣撫)의 방법을 극진히 하면 사직이 편안합니다.


雖然 當海岳淸明之日 而獨用經幄之相 以守天保之治 則不可以常其治也 及邊激有事之秋 而始用介冑之將 而以收采薇之功 亦不可成其功也 故以安而無禦外之備者 非也 以亂而無治內之道者 亦非也 然則相不可一於相 將不可一於將 必也 文武之才 幷用於治亂之除 內外之治 交修於安危之時 則入以爲啓沃 出以爲張皇 而始得爲相爲將之道也

비록 그렇지만 사방이 청명한 날에 유독 군막을 지키는 재상을 등용하여 천보(天保)의 치세를 지킨다면 그 치세를 이어갈 수 없고, 변경에 침입이 있는 때 그제서야 갑옷을 입은 장수를 임용하여 채미(采薇)의 공32)을 이룸도 그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하다 하여 변방에 방비가 없다면 잘못되었고, 난리가 일어났다고 하여 내치에 힘쓰지 않는 것도 잘못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재상은 재상에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장군은 장군에서 만족해서는 안 됨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문무의 재주는 모두 평화와 전쟁에 쓰이고, 내외의 다스림은 서로 편안하고 위태로울 때 도움이 되니, 들어가서는 군왕을 잘 인도하고33)하고 나가서는 국가를 장대하게 하면 비로소 재상과 장군이 되는 방도를 얻습니다.


噫 爲相之道 雖在於相 而使之當軸者 君也 爲將之道 雖在於將  而命之杖鉞者 亦君也 相與將 雖有可相可將之才 爲人君者 顧無能相能將之道 則必不可以弘其化 壯其國矣 苟能有思道之心 而盡其禮於聘召 明簡賢之智 而盡其誠於任用 則盡其禮 而人亦盡其道 於輔台 盡其誠而人亦盡其忠於制閫 內而至治者 在是焉 外而惟揚者 亦在是焉 而唐虞之雍熙 啇周之威服者 可回於一擧措中矣

아. 재상이 되는 도리는 비록 재상에게 달려 있지만 중추적 역할을 하게 하는 자 군주이며, 장군이 되는 도리는 비록 장군에게 달려 있지만 지휘봉을 맡긴 자도 군주입니다. 재상과 장군은 아무리 재상과 장군이 될 만한 자질이 있더라도 군주가 도리어 재상과 장군을 잘 부리지 못하면 반드시 교화를 펴고 국가를 강성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실로 도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초빙함에 예우를 지극히 하고, 현자를 알아보는 지혜를 밝혀 임용함에 정성을 극진히 하니, 그 예우를 극진히 하면 신하도 보좌함에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 매우 정성스럽게 하면 신하도 국가를 지키는데 충성을 다하니, 안으로 다스림을 극진히 하는 도가 여기에 있고, 밖으로 선양함도 여기에 있니, 온화한 요임금․순임금과 위엄 있는 은나라․주나라를 단번에 맞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請因明問 而諄諄焉 夫治天下 必先其賁若之文 威天下 亦用其布昭之武 則理國家 固在於用相 而固國家 亦倚於任將 故文武爲竝施 而將相無異用矣 若任相於狃安 而不思所以制危之將 則是有賁若之文而廢布昭之武也 用將於當危 而不思所以治安之相 則是有固國之具 而去理國之本也 是以古之帝王 能安其國於幷用者 有之 旋/危其邦於獨任者 亦有之 則其故 豈外於竝用獨任之間也哉 三五一陟 能任善將之君 槩未見或盡其道者也 然創業之漢家 盛治之唐帝 稍有可稱而惟善於此也

청건대, 좋은 질문으로 인하여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저 천하를 다스림에 반드시 찬란한 문치를 먼저하고, 천하를 제압함에 또한 펴서 드러내는 무치에 힘쓴다면 국가를 다스림은 진실 어떤 재상을 등용하느냐에 달려있고, 국가를 굳건히 함도 어떤 장수를 임명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문치와 무치가 함께 베풀어져 장수와 재상이 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태평시절에 재상에게 맡겨 위기에 대처할 장수를 생각하지 않으면 찬란한 문치를 두고 펴서 드러내는 성무를 버리는 것이다. 위태로위 질 때 장수를 임용하고 태평시절을 다스릴 재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국가를 굳건히 하는 도구를 두고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을 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옛날 제왕은 두루 등용함에서 국가를 편안히 한 사례가 있으며, 편벽되게 등용함에서 국가를 위태롭게 한 사례도 있으니, 그 까닭이 어찌 두루 등용하고 편벽되게 임용하는 사이에서 벗어나겠는가. 삼황오제가 제위에 오름에 훌륭한 재상과 장수에게 맡겼고, 자신의 //도를 다한 것은 혹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창업한 한나라와 잘 다스린 요순이 차츰 칭송함은 오직 이것을 잘하였기 때문이다. 


至其優於相 而短於將者 有其人 長於將而短於相者 亦有其人 是雖出於資禀之有局而庸或非用之之所使耶 宇宙歸來 才兼德備者 世出其人 則蕭張之樹勳於漢 裵郭之光烈於唐 韓范之偉績於宋者 功高一世 輝映千古也 星隕營中 而三代之氣像已矣 魂飛大理而四字之背涅慘焉 則孔明之鴻功 武䅣之鷹揚 不得施於當世者 起千載愚生之長慟者也

심지어 재상의 자질은 넉넉하지만 장수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있으며, 장수의 자질은 넉넉하지만 재상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도 있다. 이는 비록 자질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지 어찌 쓰임이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宇宙歸來 재주와 덕성을 겸비한 자 보통사람보다 세상에서 훨씬 뛰어나니 소하(蕭何)와 장량(張良)이 한나라에 공훈을 세웠고, 배도(裴度)와 곽분양(郭汾陽)이 당나라에 공열을 밝혔고,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이 송나라에 위대한 공적을 쌓았으니, 공훈은 당대에 떨치고 천고에 빛났습니다. 장수별 영문(營門)에 떨어져 삼대의 기상이 멈추고, 魂飛大理而四字之背涅34)慘焉 則제갈공명의 큰 공과 무왕의 응양(鷹揚)35)이 당세에 베풀지 못한 것은 천 년 뒤에 어리석은 제가 길이 탄식을 일으킵니다.  


嗚呼 詳於往行 雖是君子之多識 略於時事 敢負執事之本意乎 恭惟我朝 丕烈丕謀 有聖祖聖孫之繼繼 乃文乃武 有永啚至治之凞凞 周獵已卜 空北海之磯 漢幣方勤 起南陽之龍 宜乎 隆內治於碩德之輔 固外禦於馮翼之功也 奈之何 黃扉有老 而不見百揆之時敍  戎關有備而未免四郊之多壘乎 爲上而不能盡其下之才歟 在下而不得副其上之用歟 時事觸目 賈生之揮淚 則有矣 俗獘入耳 姚崇之救時者 誰歟

아. 지난 역사를 잘 아는 것은 비록 식견이 많은 군자라 하더라도 시사에 소략하여 감히 집사의 본의를 저버리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정은 큰 공열과 큰 도모는 성스러운 조상과 자손이 계속 이어지고, 문치와 무치는 도모하고 잘 다스려 빛나네. 주나라 무왕이 사냥 가면서 점을 쳐 북해(北海)가를 텅 비게 하였고, 한나라 유방이 폐백을 융성하게 하여 남양(南陽)의 용을 일으켰네. 마땅하구나. 석덕(碩德)의 보필로 내치를 융성하게 하고, 빙익(馮翼)36)의 공으로 외곽의 수비를 굳건히 함이여. 어떻게 황비(黃扉)37)에 노인이 있지만 백규(百揆)가 때로 펴지을 보지 못하고, 융관(戎關)에 방비가 있지만 사방 교외에 보루가 많음을 면치 못하는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재주를 다 알지 못해서 인가? 아래에 있으면서 위 사람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해서인가? 시사를 목격하고 가생(賈生)이 눈물을 닦은 경우가 있고, 시속의 폐단이 귀에 들리니 요숭(姚崇)38)이 시속을 구제한 것은 무엇입니까./


請先陳起弊之本而後 及救弊之策 可乎 輔君贊化 而匹休於王家者 古有其人而彌綸天下之經 建立天下之務者 今未見其人 則可謂得其相乎 衛君藩國 而獻馘於魯泮者 古有其人 而臨事而懼 好謀而成者 今未見其人 則可謂得其將乎 相不得時敍之效 將不得制敵之功 而堯舜之君 雖勤於尸居龍見之時 而唐虞之治 未見夫都兪卛俾之慶 豈特在位之憤 亦不無草野之憂者也

먼저 폐단을 바로잡을 근본을 진술한 뒤에 폐단을 구제할 대책을 언급하겠습니다. 군주를 돕고 조화를 도와 왕가에 아름다움을 함께 한 자 상고에 그러한 사람이 있었지만 천하의 법을 두루 다스리고 천하의 일을 세우는 자 지금 시대에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하니, 좋은 재상을 등용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군주를 호위하고 국가의 울타리가 되어 노나라 반수(泮水)에서 헌괵(獻馘)39)한 자 상고시대에 그러한 사람이 있었지만 일에 앞서 두려워하고 계획을 치밀하게 하여 성공을 이룬 자 지금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하니, 좋은 장군을 임용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재상은 때로 펴지는 효험을 얻지 못하고,40) 장군은 적을 제압하는 공로를 이루지 못하는데, 요와 순임금이 아무리 짝하지 않으면서도 용이 나타나는 때41)에 부지런 하지만 요순의 다스림이 도유(都兪)42) 솔비(率俾)43)의 사이에서 드러나지 않으니, 어찌 다만 지위에 있는 자가 분개하겠습니까. 또한 재야에 있는 사람의 근심이 됩니다.


爲今日計者 人君知人材之不借異代 識賢佐之必致以誠 用其誠於側席之間 盡其禮於延攬之際 能修相業者 擢置調元之職 能有將才者 專寄閫外之事 而任之必以其誠 使之必以其禮 則擢禁中之頗牧 而卯申講論 莫非商宗之苦藥 留塞外之韓范 而冬夏講習 盡是周家之令式 則列侍經幄者 摠才兼之碩輔 專制戎開者 皆德備之良將 而同寅協恭 而一德之咸有 不獨專美於啇朝 革面宅心而九夷之通道 可以幷稱於周京矣 然後 在上者 無患於得其人 在下者 無患於遇其上 而得遇之難 非所講於今日也

오늘의 문제점에 대해 대책을 세우는 자 인군은 다른 시대에서 인재를 빌려오지 못함을 알고, 어진 재상은 반드시 정성으로 초치함을 알아 잠시라도 곁에 있으면 정성을 다하며 끌어당길 때에 그 예우를 극진히 하여 재상의 직임을 훌륭히 수행할 자 발탁하여 세상을 다스릴 직임을 맡기고 장수의 자질이 있는 자 도성 밖의 일을 전적으로 맡겨 임용할 적에는 반드시 정성으로 하고, 명령을 내릴 적에는 예를 다한다면 궁궐에 염파(廉頗)와 이목(李牧)44)을 발탁하여 아침저녁으로 강론하니 모두 상나라 고종의 고약(苦藥)//이요,45) 변방에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을 보내 봄가을로 군사를 조련하여 주가(周家)의 아름다운 격식을 다하면 경옥(經幄)에 나열하여 시위하는 자 모두 재예를 겸비한 석보(碩輔)요, 전적으로 융관(戎關)을 지키는 자 모두 덕성을 겸비한 훌륭한 장수여서 공경함을 함께 하고 공손함을 합하여 모두 일덕(一德)을 소유하면 비단 상나라 조정에서 아름다움을 누릴 뿐만이 아니요. 군자를 보고 얼굴을 엄숙히 하고 마음을 편안히 하여 사방 오랑캐가 도를 함께하면 주나라 서울과 같이 함께 칭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군주는 좋은 사람을 찾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고, 백성은 좋은 군주를 만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을 것이니, 인재를 얻고 군주를 만나기 어려움은 지금에 말할 것이 못됩니다.


 一篇將終 復有所獻 曰夫人君之用人也 有誠則雖可致之 有禮則雖可使之 而鑑之明然後 物之姸媸自別 衡之平然後物之輕重自分 一失鑑之明 衡之平 則天下之物 或混於姸媸 或雜於輕重矣 然則爲人君而明其心 如鑑之空 公其心 如衡之平然後 人之賢否 不能逃於公門之下 而知其賢 而致之以誠 接之以禮 知其惡而罰之以罪 罪之以刑 則善者彈冠而樂仕 不善者遁逃而自遠矣 夫如是 則樸棫之化 猶興而將相之材自至矣 嗚呼 對執事之問 而必以人君實用其力爲言者 此召公因周公達成王之意也 伏惟執事 將此意 以爲楓宸之入告 幸甚 謹對

말을 마치기 전에 다시 아뢸 말이 있습니다. 인군이 사람을 등용함에 정성스럽게 하면 초치할 수 있고 예우하면 부릴 수 있다지만 깨끗한 거울에 비춰본 뒤에 사물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저울질 한 뒤에 사물의 무게가 분명하게 판명된다. 한 번 거울에 비춰보지 않고 저울질 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사물이 아름다움과 흉측함이 뒤바뀌거나 무게가 판가름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군이 되어서는 마음을 밝히기를 깨끗한 거울처럼 공평한 마음은 저울추처럼 먹은 뒤에 사람의 어짊과 어질 지 않음은 공문(公門)의 아래에서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진 모습을 알아 성으로 초치하고 예를 대우하고, 악을 알아 죄를 주고 형벌을 내리면 선한 자 갓을 털고 와서 즐겁게 벼슬할 것이요, 불선한 자 달아나 멀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한다면 박역(樸棫)의 교화가 오히려 일어나서 장상의 재주를 가진 자 절로 이를 것입니다.

아. 집사의 질문 앞에서 굳이 인군이 실지에 힘을 기우리라고 말한 것은 이것은 소공(召公)이 주공(周公)을 통해 성왕(成王)에게 전한 뜻입니다. 삼가 아룁니다. 집사께서는 이 뜻을 가지고 풍신(楓宸)46)에 들어가 고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대책합니다.


문.

宋有天下 終始被夷狄侵軼之患 以底滅亡其國之勢 若何而然歟 彼侵軼之種 其類不一 倔强之酋 部落之號 建國之名 及其興替先後 可得詳歟 澶淵之役 欲使隻輪不返者 是果百年無事之策 蕭禧之爭 棄地七百里者 是實欲取姑與之術歟 平州不附 則宣和海上之盟 可保 三鎭不守則金人再來之患可免 趙葵不入洛陽 則新虜果無可乘之釁 郝經不拘眞州 則彼師果無可出之名耶 汴京之圍 鄂渚之急 李網吳潛 起而爲相 然而二帝竟就俘虜江南 終亦不支 若是乎 賢者之無益於國也 伯顔旣次臨安 端宗旣崩 海上文天祥 欲背城一戰陸秀夫望一旅中興 有是哉 二子之迂也 傳曰天王有道守在四夷 所謂道者 何道歟 諸生平日尙論 必有慷慨流涕 設以身處之而爲之畵者 其何道歟 其各悉著于篇

송나라가 건국된 뒤에 늘 오랑캐의 침입을 받다가 결국 멸망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 침입한 오랑캐는 여러 부족인데 강한 추장과 부족의 이름 나라의 이름과 교체한 시기에 대해서 상세하게 들을 수 있는가? 전연(澶淵)의 맹약47)에 한 수레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자 함, 이것이 백 년 동안 전쟁이 없는 계책이요, 거란의 사신 소희(蕭禧)48)와 강역을 다투다가 700리 땅을 버린 것49) 이것이 참으로 취하고자 하면 우선 내어주라는 술책인가? 평주(平州)가 따르지 않으니// 선화(宣和) 연간에 바닷가에서 한 맹약을 지킬 수 있는가? 삼진(三鎭)을 지키지 못하니,50) 금나라 군대가 다시 침입하는 근심을 피할 수 있는가? 조규(趙葵)가 낙양(洛陽)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신로(新虜)가 과연 기회를 탈만 한 틈이 없었겠는가. 학경(郝經)이 진주(眞州)에 잡아두지 않으면 저 몽고의 군사가 출병할 만한 명분이 없었겠는가. 변경(汴京)의 포위와 악저(鄂渚)에서의 위급함. 이강(李綱)51)과 오잠(吳潛)이 일어나서 재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흠종(欽宗)과 휘종(徽宗) 두 황제가 결국 강남(江南)에서 사로잡혀 결국 또한 지탱하지 못하였으니, 이와같구나. 현자가 국가에 아무런 보탬이 없음이여. 백안(伯顔)이 이미 임안(臨安)에 주둔했는데52), 단종(端宗)이 이미 해상(海上)에서 붕어하고, 문천상(文天祥)53)은 성을 등지고 일전하고자 하였고, 육수부(陸秀夫)가 한 부대로 중흥을 기대하였으니, 이와같구나. 두 군자의 우활함이여. <<춘추좌씨전>>에 “천왕이 도를 소유하여 지킴이 사방 오랑캐에 있다.”54) 하였는데, 이른 바 ‘도’라는 것이 어떤 도인가? 제생이 평소에 논의를 숭상하여 반드시 울분에 차 눈물 흘려 몸으로 처신하여 그림을 그리는 자가 있는// 것은 무슨 도리인가? 각각 자세히 글로 적어보아라.


愚也 迹一隅東南 目萬古緗素 而覽卛服之虞書 則知帝王有至治之道 詠是膺之魯頌 則慨末世無上策之言者 久矣 今執事先生 懷猾夏之憂 策尙論之士 今日風簷 不盡所蘊 則明日江湖 有憂何益

저는 동남 한 모퉁이에 살고 있지만 만고의 상소(緗素)55)를 보았습니다. 솔복(率服)의 우서(虞書)56)를 열람하면 제왕이 지극한 다스림의 도가 있음을 알고, 시응(是膺)57)의 노송(魯頌)을 읊조리면 말세에 상책을 말하는 자 없음을 탄식함이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집사 선생이 중국이 어지러워짐을 근심을 품고 논의를 좋아하는 선비에게 질책하시니, 오늘 쓸쓸한 시험장에서 쌓은 지식을 다 풀어놓지 않으면 내일 강호에서 근심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窃謂自有中國 卽有夷狄 而猶陽之有陰也 陽盛則陰衰 必然之理 則中國之尊者 夷狄之所以服其威也 夷狄之侵者 中國之所以失其道也 是以 內治旣修 則雖非外攘 而夷狄自不敢干其化 外攘是事 而未修內治 則夷狄不足以畏其威 然則中國必有常尊之道 而不使夷狄犯其尊 必有常盛之勢 而不使夷狄較其盛 然後 可與言禦戎之策矣 苟或常尊之道 先失於中國 而常盛之勢 反歸於夷狄 則南攻北掠 不能禦其侵軼之患 四出五裂 不能制其凌壓之心 則不可以信義交之而馬血空赤於城下之盟 不可以賄賂和之而金帛難充於溪壑之慾矣

삼가 말씀드립니다. 중국이 생긴 뒤로 이적(夷狄)이 나타난 것은 양기가 있으면 음기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양기가 왕성하면 음기가 미약함은 필연적인 이치이니, 중국이 존엄한 이유는 오랑캐가 그 위엄에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오랑캐가 침입하는 이유는 중국이 바른 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내치에 힘쓴다면 비록 밖으로 물리치지 않더라도 오랑캐는 스스로 감히 교화됨을 막지 못하고, 밖으로 물리침에 온힘을 기울이더라도 내치에 힘쓰지 않으면 오랑캐는 그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반드시 늘 숭상되는 방도를 두어 오랑캐로 하여금 그 존엄함을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반드시 늘 왕성한 형세를 두어 오랑캐로 하여금 그 성대함을 견주지 못하게 한 뒤에 함께 오랑캐는 막는 대책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늘 숭상되는 방도를 중국에서 먼저 잃어버리고 늘 왕성한 형세가 도리어 오랑캐에게 돌아간다면 남으로 공격하고 북으로 노략질하여도 그들이 침입하는 근심을 막지 못하고, 사방에서 출현하고 여러 갈래 찢어 놓는다 하더라도 능멸하는 마음을 제재할 수 없으니, 신의로 사귀지 못하여 말의 피가 공연히 성 아래에서 맹약으로 붉게 물들 것이요. 뇌물로 화친을 맺을 수 없어서 폐백이 구릉의 욕심을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祖宗之封疆纔割 而胡兵隨至 重媾之卑辭雖勤 而鐵馬已渡 則莫戢外夷之强 反示中國之弱而不底於滅亡者 幾希矣 然則立國者 必以內修爲本 外攘爲末 有仁厚有餘之德 無武略不競之弊然後 王靈益振於子孫 聲敎覃曁於遐裔 而服則懷之以恩 叛則加之以威 而蠢玆之屬 匪茹之類 咸入於闔闢鞭撻之下 則禦戎之本得矣 雖然 尊賢使能 而使中國有虎豹之勢 去讒遠佞 而使人主無疑沮之憂然後 惟楊之勢不窮 而克壯之猷可施 則德威者 固是爲國之大本 而用人者 亦云人君之先務也

조종이 겨우 강역을 분할하였지만 호병(胡兵)이 따라 이르고, 거듭 화친하여 말을 아무리 애써 낮추더라도 철마가 이미 강을 건너니, 외부 오랑캐의 강성함을 막지 못고 도리어 중국의 약점을 보여서 멸망에 이르지 않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렇다면 국가를 세운 자는 반드시 내치를 우선하고 밖으로 물리침을 뒤로 미루어 넉넉히 두텁고 인한 덕을 소유하고 무력으로 이기지 못하는 폐단이 없는 뒤에 왕령(王靈)이 더욱 자손에게 미치고 성교(聲敎)가 먼 후손에 미치니, 복종하면 은덕으로 회유하고 반란하면 힘으로 위협하여 무지한 이 유묘(有苗)와 비여(匪茹)58) 따위가 모두 합벽(闔闢)과 편달(鞭撻)의 아래에 들어오면 오랑캐를 막는 근본이 세워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어진 이를 존숭하고 능한 이를 부려 중국이 호랑이의 기상이 있게 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제거하여 주인이 의심하는 근심이 없게 한 뒤에 드날리는 형세가 끝이 없고 씩씩한 도모를 펼 수 있다면 덕성과 위엄은 실로 국가를 다스리는 큰 근본이요. 사람을 등용하는 자도 또한 인군의 급선무라고 합니다.


請因明問 而列白之 香孩御極 四海一春 而仁民之政有餘 制戎之武不競 則立國之勢 有所不備 而子孫之寢微 夷狄之憑陵 有由然矣 揮戈渤海之上 而始建國都 鳴弓黑山之下 而自立名號 則部落之名號 興替之先後 不難詳陳 而䌤縷支離 適足以煩執事之聽 則從春秋略戎狄之義 可乎 遼兵入寇 奉日親征者 寇準之雄圖也 虜使來求 始割關南者 安石之姦計也 玉輅遠臨 王威震疊 則萬騎胡馬 隻輪不返者 實百年無事之策 而饒舌一搖 忠謀遽沮 神州赤縣 祖宗封疆 則割而棄之 與賊爲界者 非欲取姑與之術 而元勳已逝 賤筭誰抑 海上之血未乾 遽納平州之附 皇叔之約纔成 不卽三鎭之割 而渝盟失信 反自于我 則攻燕之憂 再來之患自取者也

청하건대, 집사의 질문을 가지고 낱낱이 말해 보겠습니다. 향해(香孩)59)가 황극을 부려 사해의 백성이 좋은 시절을 맞이하여 백성을 교화시키는 정치가 훌륭하지만 오랑캐를 제압하는 무치에 힘쓰지 않았으니, 국가를 경영하는 형세에 대비하지 않고 점이 점이 있어 후손이 차츰 나약하고 오랑캐가 틈을 타 침입함은 까닭이 있습니다. 발해(渤海)에서 창끝을 휘둘러 처음 도읍을 세우고 흑산(黑山)에서 활을 당겨 스스로 이름을 떨쳤으니, 부락의 이름과 교체의 선후는 자세히 진술함에 어려울게 없지만 가늘게 늘어지는 지리한 말은 다만 집사의 귀를 거슬리게 할 수 있으니, <<춘추>>에서 오랑캐를 제압하는 의리를 따라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병(遼兵)이 들어와 노략질함에 임금을 모시고 직접 정벌한 것은 구준(寇準)60)의 훌륭한 도모입니다. 오랑캐 사신이 와서 요청하자 비로소 관남(關南)을 분할하여 떼어 준 것은 왕안석(王安石)의 간사한 계략입니다. 옥로(玉輅)61)가 멀리 행차하여 왕의 위엄이 크게 떨치니 1만 기병을 거느린 호마(胡馬)가 한 척의 수레도 돌아가지 못한 것은 실로 백 년 동안 전쟁이 없는 계책이나 넉넉한 입담으로 혀를 놀려 충성스런 도모를 막아버렸습니다. 신주(神州)와 적현(赤縣)은 조종이 봉한 강역이니 갈라서 줘버리고 적과 경계로 삼은 것이 쟁취하고자 하면 먼저 주는 방법이 아닙니다. 건국한 공신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얄팍한 꾀를 누가 막겠는가. 바닷가 맹약의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붙은 평주(平州)를 바치고, 황숙(皇叔)의 맹약이 겨우 이루어졌는데 얼마되지 않아 삼진(三鎭)을 분할하였으니, 얄팍한 맹약으로 신의로 잃버림은 도리어 스스로 시작하였으니, 연 땅을 공격하는 근심과 다시 처들어오는 근심은 스스로 불러들은 것입니다.


王師趙葵 初入洛陽 而蒙古伏兵 突起深蒿 虜使郝經 一幽眞州 而激怒彼師 有名可出  然而新虜驕詐 日肆狺然 則雖非趙葵 豈無可乘之釁 內無張皇 外多疎虞 則雖非郝經 豈無犯邊之路 鐵馬南牧 汴京受圍 元兵䦨入 鄂渚將急 而李綱之忠 吳潛之賢 竝爲時宰  則長謀雄筭 足以扶危而二帝狩北江南 失守者 何也 赤舄未久於黃閣 貝錦已成於萋斐 而嶺外天涯 空老大器 則賢者負國乎 國負賢者乎 中原盡入於胡地 而伯顔已次於臨安 萬乘終付於孤舟 而端宗旣崩於海上 則已矣 天下不可更爲而天祥背城之戰 秀夫中興之望 雖曰迂哉 一線未絶 尙爲宋臣 滿目胡戈 不忍坐視 則萬丈忠憤 千載激人 愚之痛哭流涕者 到此而不能禁也

왕사(王師) 조규(趙葵)가 처음 낙양(洛陽)에 들어갔는데 몽고의 복병이 갑작 우거진 숲에서 나타났고, 사로잡은 사신 학경(郝經)이 한 번 진주(眞州)에 억류되자 저 오랑캐의 군대를 격발시켜 군대를 출동시킬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로(新虜)는 교만하고 속임이 날로 방자하고 으르렁거리니, 비록 조규가 아니더라도 어찌 기회를 탈 만 한 틈이 없었겠습니까. 안으로는 장대함이 없고, 밖으로는 허술함이 많았으니, 비록 학경이 아니더라도 어찌 변경을 침입할 길이 없었겠습니까.

철마를 남쪽으로 몰아 변경(汴京)이 포위를 받아 원나라 군대가 난입하니, 악저( 鄂渚)가 위급해지려 하였는데, 충성스런 이강(李綱)과 어진 오잠(吳潛)이 모두 재상으로 삼았으니, 훌륭한 지략과 좋은 계책은 위태로운 나라를 부지할 수 있었지만 흠종(欽宗)과 휘종(徽宗) 두 황제가 북쪽으로 강남에서 사로잡혀 북쪽으로 갔으니, 실수한 자는 누구입니까? 붉은 신은 황각(黃閣)62)에서 오래하지 못하고, 패금(貝錦)63)은 이미 작은 광채에서 이루어지는데, 고개 넘어 하늘가에서 큰 기량을 썩히니 현자가 국가를 저버린 것입니까? 국가가 현자를 저버린 것입니까? 중원 땅이 모두 오랑캐에게 함락되었고, 백안이 이미 임안에 주둔하였지만 천자의 군대가 결국 외로운 배가 되었고, 단종(端宗)이 이미 바닷가에서 붕어하였으니, 그만이구나. 천하를 다시 다스릴 수 없음이여. 그러나 문천상은 성을 등지고 싸워 다시 일어설 희망을 일으켰으니, 비록 오활하다고 말하지만 한줄기 충성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송나라의 신하가 되어 오랑캐의 병기가 눈앞에 가득한 것을 차마 가만히 앉아서 보지 못하였으니, 만 장의 충성과 분개는 먼 후세 사람을 격동시킵니다. 저는 통곡하고 눈물 흘림이 이 지점에 이르자 금할 수 없습니다. 


嗚呼 夫夷狄者 懷梟獍之心 持山川之險 鳥驚魚散 而出沒無常 鼠竊狗偸 而貪得無厭  唐虞之時 三苗不恭 高宗之世 鬼方不道 則上古帝王 亦必有制禦之常道 而一自會戎之擧見於魯而夷狄始橫 伐胡之師慘於秦而中國始弊 則叔季侵軼之患 一何多也 屬猪天下 其禍益甚 而堂堂大宋 竟輸於胡羯之天地者 立國之失其勢 而禦戎之失其道也 禦戎之道 其本不在於威强 而在乎德業 其備不在於邊境 而在乎朝廷 其具不在於兵食 而在乎紀綱矣 必也

아. 저 오랑캐는 흑심을 품고 험한 지형을 믿으니, 새가 놀라고 물고기가 흩어지듯 어느 때 출몰할지 모른다. 쥐가 갈아먹고 개가 훔치듯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요순 시절 삼묘(三苗)가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고종(高宗) 때엔 귀방(鬼方)이 포악하였으니, 상고의 어진 제왕도 반드시 제압하는 떳떳한 도를 두었지만 한 번 오랑캐와 회동하는 일이 노나라에서 벌어지자 이적(夷狄)이 비로소 날뛰었으며, 오랑캐를 정벌하는 군대가 진나라에서 참람되자 중국이 비로소 피폐해졌으니, 말세 침입을 받는 근심이 어찌 그리 많았는가? 속저(屬猪)64)의 천하는 오랑캐의 침입이 더욱 많아 당당한 송나라가 결국 호갈(胡羯)의 천지를 준 것은 나라를 경영함에 국세를 잃고 오랑캐를 제압함에 바른 도리를 잃었으니, 근본은 무력에 있지 않고 덕업에 달려있으며, 방비는 변방에 있지 않고 조정에 달려있으며, 도구는 병사와 군량에 있지 않고 기강에 달려있음은 필연적 이치이다.


罷和親之計 息攻討之謀 發政施仁 而恩澤足以結天下之心 大明敎化 而文德足以感天下之心 然後 民心愛戴 而宗社有泰山之安 邦本不搖 而皇啚有盤石之固 殆見東夷西戎 仰治功之成者 罔不宅心 南蠻北狄 聞敎化之風者 莫不企踵 則不必七縱七擒而自爾咸賓  不必三表五餌而自爾率服 稽首稱臣而覬覦之心已消 畢獻方物而桀驁之念不作 禦戎之策 端在是矣 雖然 益之戒舜 曰任賢勿貳 去邪勿疑 而終之曰無怠無荒 四夷來王 舜之命臣曰惇德允元而難任人蠻夷卛服 則夫任賢去邪者 實禦戎之上策也 何則 雖有可勝之勢 而無賢人任其責 則不能成其勢 雖有可任之賢 而有小人間其君則不能成其功 回視大宋之時 勝勢不可謂無也 賢人不可謂無也 而奸臣滿朝 競售誤國之奸謀 忠臣在外 未施禦夷之忠啚 而一誤於欽若 再誤於安石 終誤於秦檜似道 而鴻圖雄略 精忠大節 齎志而就沒 則宋之滅亡 非夷狄也 乃小人也 然則 後之爲國者 其不以宋朝爲戒 而益舜爲法乎

화친의 계획을 없애며 토벌하는 도모를 멈추고 인정을 베풀어 은택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묶을 수 있고, 크게 교화를 밝혀 문덕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은 뒤에 민심이 사랑하고 추대하여 종묘와 사직이 태산과 같이 안정되고 국가의 근본이 굳건하여 황국의 국세가 반석 위에 굳건히 서면 동이(東夷)와 서융(西戎)이 다스리는 공이 이루어짐을 앙망하는 자 모두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며, 남만(南蠻)과 북적(北狄)이 교화의 소문을 들은 자 모두 다투어 이름을 본다면 굳이 칠종칠금(七縱七擒)65)할 필요 없이 그로부터 손님이 되며, 굳이 삼표오이(三表五餌)66)할 필요 없이 그로부터 와서 복종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로 자처하여 중원을 넘보는 마음이 사라져버리고, 모두 조공을 바쳐 오만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오랑캐를 제압하는 계책이 여기에 단서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익(益)이 순임금에게 경계의 말을 올려 “어진 자에게 맡기되 두 마음을 품지 마시고 사악한 자를 제거하되 의심하지 말라.” 하였고, 말을 마치면서 “게을리 하지 않고 황폐하지 않으면 사방의 오랑캐들도 와서 왕(王)으로 받들 것입니다.”67) 하였고, 순이 신하에게 명령하기를, “덕이 있는 자를 후대하고 어진 자를 믿으며 간사한 자를 막으면, 만이(蠻夷)도 거느리고 와서 복종할 것이다.”68) 하였으니, 현자를 등용하고 간신을 물리치는 것이 실로 오랑캐를 제압하는 상책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비록 이길 수 있는 형세가 있지만 현자가 그 책임을 맡지 않으면 그 형세를 이룰 수 없고, 비록 맡길 수 있는 현자가 있지만 소인이 그 군주를 이간하면 그 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송나라 때를 돌아보면 이길 만 한 힘이 없다고 말할 수 없고, 현인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결국 국가를 그르칠 간사한 꾀를 팔았고, 충신이 지방에 있어 오랑캐를 제압할 충성스러운 도모를 베풀지 못하였으니, 첫 번째는 왕흠약(王欽若)69)에서 그르쳤고, 두 번째는 왕안석에게서 그르쳤고, 끝에는 진회(秦檜)70)와 가사도(賈似道)71)에게서 그릇되었으니, 큰 지략과 웅대한 지략과 충성과 큰 절개는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으니, 송나라의 멸망은 오랑캐 때문이 아니요, 바로 소인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자 어찌 송나라를 경계로 삼고 익과 순을 본받지 않겠는가.


篇之將終 又有獻焉 執事之問 獨及於古 而不及於今者 堂堂我國 文武竝用 蕞爾小醜 不足致慮而然乎 抑又援古證今 以試諸生言外之旨乎 方今島夷南伺 野人北狺 而玉食旰御 訪文武並施之道 金鑾曉趨 講牖戶綢繆之策 則豈有漢塞之疎虞 不啻周宣之修攘矣 惟彼蠢玆 固不足憂而愚之眷眷 於今日者益愼 用舍之際 無使賢邪雜進而賢能在位 得以盡其心 不肖者遠 無以售其奸 而其所用人之道 禦戎之策 無若宋人然 則內焉而黼黻 外焉而張皇 九夷之通道 不獨專美於周家矣 愚見如是 伏惟執事進而敎之 謹對

글을 마치기 전에 또 드릴 말이 있습니다. 집사의 물음이 다만 옛 일을 언급하고 오늘날의 시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은 당당한 우리나라는 문치와 무치를 함께 사용하여 조그만 오랑캐는 족히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겨서 그런 것입니까?

또 고사를 인용하여 지금 상황에 적용하여 제생들이 말하지 못한 뜻을 말해 보겠습니다. 지금 섬나라 오랑캐가 남쪽에서 엿보고 저 무지한 놈들이 북쪽에서 호시탐탐 노리니, 해가 진 뒤에 늦게 저녁을 밥을 먹으며 문치와 무치가 함께 시행될 도를 묻고, 수레를 달려 환난이 닥치기 전에 미리 대비할 계책을 강론하면// 어찌 한나라 변방의 허술한 방비가 주선왕(周宣王)이 국내의 정치를 닦고서 외적을 물리치는 것보다72) 훨씬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 오랑캐는 실로 근심할 것이 못되지만 늘 근심하여 지금에 더욱 삼가여 등용하고 내치는 때 현인과 간신이 함께 조정에서 벼슬하지 못하게 하여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 지위에 있으면서 충심을 다 바치게 하고 간신이 떠나가서 그 간사함을 팔지 못하게 하여 신하를 등용하는 도와 오랑캐를 제압하는 계책이 송나라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내치는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외치는 장황(張皇)하여 사방 오랑캐가 길을 뚫어 주나라에만 아름다움을 누릴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저의 견해가 이와같습니다. 삼가 집사에게 올려 말합니다. 삼가 대답합니다.


1) 해곡(嶰谷) : 황제(黃帝)가 악관(樂官) 영륜(伶倫)에게 성률(聲律)을 제정하라고 명하자 영륜이 곤륜산(昆侖山) 북쪽 해계(嶰谿)의 골짜기에서 좋은 대나무를 베어서 성률을 제정하였으니, 육률(六律)과 육려(六呂)의 십이율(十二律)이다. 《呂氏春秋 仲夏紀 古樂》

2) 가정(柯亭) : 한 나라 채옹(蔡邕)이 일찍이 회계(會稽) 가정(柯亭)을 지나면서 집동쪽 십육연(十六椽)의 대를 보고서 취하여 젓대를 만들었는데 과연 기이한 소리가 났다. 그 뒤에 진(晉) 나라 환이(桓伊)가 얻어 항상 자신이 보존하고 불었다고 함. ������通考������

3) 칠현(七賢) : 죽림칠현(竹林七賢)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때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숭상하여 죽림(竹林)에서 술과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칠현은 완적(阮籍), 혜강(嵇康), 산도(山濤), 상수(尙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이다.

4) 육일(六逸) : 당(唐)나라의 죽계육일(竹溪六逸). 이백(李白) 공소보(孔巢父) 한준(韓準) 배정(裵政) 장숙명(張叔明) 도면(陶沔)이 조래산에 은거하여 날로 술에 취하여 지내면서 죽계육일이라고 하였음. 《당서(唐書)》 <이백전(李白傳)>

5) 왕비의……물들거나 : 소상강(瀟湘江) 가에 자라는 반죽(斑竹)을 이른다. 반죽은 아롱진 무늬가 있는 대나무로 전설상 옛날 순(舜)임금이 창오산(蒼梧山)에서 별세하자, 두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소상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통곡하면서 피눈물을 대나무에 뿌렸는데, 그후 대나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 반죽이 되었다 한다.

6) 맹종(孟宗) : 삼국시대 오(吳)나라 강하(江夏) 사람으로 자는 공무(恭武). 그의 어머니가 죽순을 좋아했는데 겨울철이라서 죽순이 아직 나지 않았을 때 대밭에 들어가 슬피 탄식하니 효성의 소치로 죽순이 돋아나 이를 어머니께 드렸다는 고사가 있다.

7) 갈파(葛陂) : 후한(後漢) 비장방(費長房)이 호공(壺公)에게서 신선술을 배운 뒤 죽장(竹杖)을 타고 집으로 날아와 갈파(葛陂) 호수 속에 죽장을 던지니, 그 정령이 청룡(靑龍)으로 화하여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神仙傳 壺公》

8) 우정(虞庭) : 순(舜) 임금이 다스리던 조정을 가리킨다. 인은 밝아지고 의는 확립되며, 덕은 널리 베풀어지고 교화는 광대하게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상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권면되었고, 벌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다스려졌다. 경성(景星)이 빛나며 감로가 내려며, 주초(朱草)가 자라며 봉황이 날아왔다 한다.


9) 갑인(甲刃) : 두목의 만청부(晩晴賦)에서 대숲을 가리켜 “대숲은 밖에서 둘러싸 십만의 장부와 같아라, 갑옷과 칼날 어지러이 뒤섞여 빽빽이 포진해 빙 둘러 시립하였네.[竹林外裹兮十萬丈夫 甲刃樅樅密陳而環侍]” 한 데 대하여, 소식(蘇軾)이 죽오(竹塢) 시에서 그를 풍자하여 “추재인 두목은 참으로 가소로워라, 대를 군중의 십만 장부라고 부르다니.[麤才杜牧眞堪笑 喚作軍中十萬夫]” 한 데서 온 말이다.


 

10) 아손……둘러섰다 :


 

11) 자첨(子瞻)은 소식(蘇軾)의 자(字)인데, 〈어잠승녹균헌(於潛僧綠筠軒)〉이라는 시에 “밥 먹을 때 고기반찬 없는 것은 괜찮지만, 사는 집에 대나무가 없어서야 될 말인가. 고기가 없으면 사람이 마를 뿐이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을 속물로 만든다오.[可使食無肉 不可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라는 구절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9》


 

12) 심지 말라고 충고 :


 

13) 낙천(樂天) : 당(唐) 백거이(白居易)의 자(字). 그가 지은 〈양죽기(養竹記)〉에 대나무를 어진 사람에게 비하였다.


 

14) 관부(寬夫) : 송 나라 채거후(蔡居厚)의 자인데, 그의《채관부시화(蔡寬夫詩話)》에 대나무에 대한 논평이 나온다.


 

15) 전오(典午) : 위진(魏晉) 시대의 진나라 별칭. 오(午)는 십이지(十二支)에서 말을 뜻하는데 사마씨(司馬氏)가 나라를 세웠던 것에서 그렇게 일컬다.


 

16) 명황(明皇) : 당 현종을 가리킨다. 그의 시호가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이니, 줄여서 명황이라 부른다. 현종(顯宗)의 세 아들이 형제 간에 왕위를 서로 전하여서 순종(順宗)에게 이르렀던 것이나,


 

17) 운소(雲韶) : 황제(黃帝)의 음악인 운문(雲門)과 순 임금의 음악인 대소(大韶)를 병칭한 것이다.


 

18) 十萬丈夫甲刃摐摐  두목의 <晩晴賦>


 

19) 소선(蘇仙) ; 송(宋)나라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20) 소식(蘇軾)의 녹균헌(綠筠軒)이란 시에, “밥에 고기가 없을 수는 있지만, 거처하매 대나무가 없어선 안 되지.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위게 하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네.[可使食無肉 不可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한 것을


 

21) 집양(執壤) : 《서경》에서 나온 말인데, 그 지방의 토지에 생산되는 진기한 물품을 가지고 온다는 말이다.


 

22) 관부(寬夫) : 송나라 채거후(蔡居厚)의 자이다. 그의 《채관부시화(蔡寬夫詩話)》에 대나무에 대한 논평이 나온다. 대나무를 통해 사정(邪正)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23) 현명(玄冥) : 겨울 귀신의 이름이다. 《예기》 월령(月令)에 “겨울철의 상제(上帝)는 전욱(顓頊)이요, 그 귀신은 현명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24) 자모(子牟)의 충성 : 전국시대 위(魏)나라 공자(公子)로 중산(中山에 봉해졌기 때문에 중산공자(中山公子)라고도 칭하는 바, 일찍이 “몸은 강호의 사이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대궐의 위에 있다.〔身在江湖之間 心存於魏闕之上〕” 하였으므로 ‘자모의 충성’이라 한 것이다.


 

25) 헌체(獻替) :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대신(大臣)이 군주의 면전에서 정사의 옳고 그름을 논변하여 좋은 계책은 올리고 좋지 않은 계책은 시행하지 못하게 함을 이른다.


 

26) 공속(公餗)의 전복 :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여 일을 그르칠까 염려된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정괘(鼎卦)〉에 “구사는 솥의 발이 부러져서 임금의 음식을 엎어 버린 것이라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짐이니, 흉하도다.[九四 鼎折足 覆公餗 其形渥 凶]” 하였다.


 

27) 장인(丈人)의 길함 :《주역(周易)》 〈사괘(師卦)〉에 “사(師)는 바르니, 장인(丈人)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으리라.[師 貞 丈人 吉 無咎]”라 하였다. 


 

28) 백규(百揆) : 백규(百揆)는 총재(冢宰)를 말하는데, 서정(庶政)을 총괄하여 처리하는 관원으로 요순시대에 있었던 직책이었음. 여기서는 사람이 밖으로 외물과 접하는 백사(百事)를 ‘의(義)’가 총괄하여 바르게 결단하는 것을 비유함.


 

29) 비여(匪茹) :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뜻인데, 전하여 도적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詩經)》 〈유월(六月)〉에, “험윤이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서, 초 땅과 호 땅에 정연하게 웅거하여, 호와 삭방을 침략하여, 경양에 이르렀다.〔玁狁匪茹 整居焦穫 侵鎬及方 至于涇陽〕” 하였다.


 

30) 그 계책이 훌륭하다 : 방숙(方叔)은 주 선왕(周宣王)의 현신(賢臣)인데, 《시경》 소아(小雅) 채기(采芑)에 “미련한 저 만형이 준동을 하여, 대국을 원수로 삼고 말았도다. 방숙이 나이는 비록 많으나, 그 계책은 갸륵하기만 하도다.〔蠢爾蠻荊 大邦爲讐 方叔元老 克壯其猶〕”라고 하였다.


 

31) 분곤(分閫) : 곤(閫)은 원래 도성(都城)의 문으로, 고대에 천자가 장군을 임명하면서 “곤 이내는 과인이 통제하고 곤 이외는 장군이 통제하라.”고 했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32) 채미(采薇)의 공 :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은(殷)나라 말기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인데,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르자, 백이와 숙제가 이를 부끄럽게 여기어 의리상 주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여 고사리만 캐어 먹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던 고사가 있다.


 

33) 계옥(啓沃) : 신하가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열어 임금의 마음을 윤택하게 인도하는 것을 말함. 은나라 고종(高宗)이 그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적셔라.[啓乃心 沃朕心]》고 한 말에서 유래함. 《書經》 <說命 上>.


 

34) 廬陽武穆背涅四字


 

35) 응양장(鷹揚) : 매가 하늘로 솟구치듯 무위(武威)를 자랑하는 말로 장수를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이때 태사(太師) 상보(尙父)가 마치 매가 날 듯하여, 저 무왕 도와서 상 나라를 정벌하니, 회전(會戰)한 그날 아침 청명했도다.[維師尙父 時維鷹揚 涼彼武王 肆伐大商 會朝淸明]” 하였는데, 여기에서 상보(尙父)는 바로 70세에 문왕(文王)을 따라 나선 여상(呂尙)을 가리킨다.


 

36) 의지할 만한 이도 있고 보익(輔翼)할 만한 이도 있으며 효도(孝道)하는 이도 있고 덕(德)이 있는 이도 있어 인도하고 보익(輔翼)하면 개제(豈弟)한 군자(君子)를 사방(四方)에서 법(法)으로 삼으리라[有馮有翼 有孝有德 以引以翼 豈弟君子 四方爲則]  시경 ; 대아 ; 생민지십 ; 권아


 

37) 황비(黃扉) : 황각(黃閣)이라 하기도 하는데, 재상이 정무를 보는 곳을 말한다. 문에 황색 칠을 했던 까닭으로 그렇게 일컫는다. 재상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38) 요숭(姚崇) : 당 나라 협주(硤州) 사람으로 자는 원지(元之). 학문을 좋아했고 기개가 드높아 기절(氣節)을 숭상하였음. 현종(玄宗) 때 재상에 임명되고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졌으며 기강을 정돈하고 제도를 닦아서 개원(開元)의 치세(治世)를 열었음. 후에 송경(宋璟)을 이끌어 자신의 뒤를 잇게 하니 송경 또한 어진 명성이 있어 세칭 현종 때의 어진 재상을 요송(姚宋)이라고 함. 《唐書》 一二四.


 

39) 헌괵(獻馘) : 적과 싸워 이긴 후에 적의 왼쪽 귀를 잘라 와서 임금에게 바치던 의식을 이른다. 《詩經 魯頌 泮水》


 

40) 《서경》〈우서(虞書) 순전(舜典)〉에, “오전(五典)을 삼가 아름답게 하라 하시니 오전(五典)이 능히 순하게 되었으며, 백규(百揆)에 앉히시니 백규가 때로 펴졌으며, 사문(四門)에서 손님을 맞이하게 하시니 사문이 화목하며, 큰 산기슭에 들어가게 하시니 열풍(烈風)과 뇌우(雷雨)에 혼미하지 않으셨다.[愼徽五典 五典克從 納于百揆 百揆時敍 賓于四門 四門穆穆 納于大麓 烈風雷雨弗迷]”라고 한 말이 보인다.


 

41) 《장자》 천운(天運)에서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만나고 와서 용을 만나 본 것과 같다고 감탄하자, 자공(子貢)이 “그렇다면 정말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용이 나타난 것과 같은 사람〔尸居而龍見〕이 있다는 말인가?” 하며 노자를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42) 도유(都兪) : 도유우불(都兪吁咈)의 준말.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합쳐서 서로 토론한다는 말.


 

43) 솔비(率俾) :《서경》 주서(周書) 군석(君奭)에, 주공(周公)이 소공(召公)에게 “우리 두 사람은 게을리하지 말고서 문왕의 공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크게 보살펴 주어 바다 모퉁이 해 뜨는 곳이면 모두 믿고 따르게 해야 한다.[我咸成文王功于不怠 丕冒 海隅出日 罔不率俾]”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44) 파목(頗牧) :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명장(名將)이었던 염파(廉頗), 이목(李牧)의 합칭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일찍이 풍당(馮唐)으로부터 염파, 이목의 장재(將才)가 같은 조나라의 장수 이제(李齊)보다 훨씬 훌륭했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여 무릎을 치면서 이르기를 “아, 나는 다만 염파, 이목의 당시에 나지 못해서 그들을 장수로 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을 장수로 삼는다면 어찌 흉노를 걱정하리오.〔嗟乎 吾獨不得廉頗李牧時爲吾將 吾豈憂匈奴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02 馮唐列傳》


 

45)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은 고종(殷高宗)의 재상인 부열(傅說)이 “임금이시여, 견문이 많은 사람을 구하는 건 사업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옛 가르침을 배워야 얻음이 있을 것이니, 옛일을 본받지 않고서 장구하게 하는 것은 제가 들은 바가 아닙니다.[王人求多聞 時惟建事 學于古訓 乃有獲 事不師古 以克永世 匪說攸聞]”라고 하였다.


 

46) 풍신(楓宸) : 임금의 궁전. 漢나라 때 궁성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었던 까닭으로 일컫는 말이다. 풍폐(楓陛)라 하기도 한다.


 

47) 전연(澶淵)의 전역(戰役) : 송(宋) 나라 진종(眞宗) 때 거란[契丹] 군대가 대거 침입해 오자, 명재상 구준(寇準)의 건의에 따라 진종이 친정(親征)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맹약(盟約)을 체결하고 돌아온 사건을 말한다. 《宋史 卷281 寇準傳》


 

48) 소희(蕭禧) : 거란(契丹)의 사신이다. 


 

49) 소희……버린 것 :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요동지방의 땅을 요구하자 한진(韓縝)을 보내어 땅을 갈라 준 일을 가리킨다. 왕안석이 왕에게 앞으로 얻으려고 하면 우선 주어라고 하였는데, 왕이 요동 땅을 갈라 준 일을 가리킨다. “요사(遼使)와 땅을 계속 다투자 황제가 왕안석에게 묻으니, 왕안석이 앞으로 얻으려고 하면 우선 줘버려라고 하니, 붓으로 지도를 그려 왕괴산(黃嵬山)산을 경계로 삼으로 소희가 바로 떠나갔다. [遼使爭疆事不已 帝問於王安石 安石曰將欲取之必固與之以筆畫其地圖依黃嵬山為界 蕭禧乃去]” 하였다. <<宋史>> <本紀15>


 

50) 삼진을 지키지 못하니 : 삼진(三鎭 : 태원(太元)ㆍ중산(中山)ㆍ하간(河間)임)이다. 정강(靖康, 宋欽宗의 연호) 1년(1126) 종망(宗望)이 요하(遼河)를 건너 활주(滑州)를 함락하고 도성(都城)에 육박하자, 흠종이 이체(李梲)를 보내어 화친을 제의했는데, 종망이 삼진(三鎭)의 땅을 떼어 줄 것과 세폐(歲幣)를 증가할 것과 백질(伯姪)이라고 일컬을 것을 요구하므로 강왕(康王)과 장방창(張邦昌)을 볼모로 보내었다, 찰방사(察訪使) 장호(張灝) 등이 모두 패전하므로 흠종이 왕운(王雲)을 보내어 삼진(三鎭) 땅과 세폐를 허락하고 군사를 후퇴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종한은 태원(太原)을 함락하고 경략사(經略使) 장효순(張孝純)을 잡아갔으며 드디어 승승장구하여 황하(黃河)를 건넜다.


 

51) 이강(李綱) : 금(金) 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한 주전론자(主戰論者)로서 약화된 송 나라의 국력을 신장시키고자 하였는데, 금 나라 군대를 공격하다가 화친 조약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했다. 이에 진동(陳東)이 당시 태학생(太學生)으로서 흠종(欽宗)에게 상소하여 육적을 죽여야 한다고 제청하는 한편, 태학생들을 인솔하고 복합(伏閤), 상소하여 다시 이강을 등용하게 하였다. 그 뒤 고종(高宗) 때에 이강이 황잠선(黃潛善)ㆍ왕백언(汪佰彦)ㆍ장준(張浚) 등 화친론자에게 밀려나자 이들을 배격하고 이강을 옹호하다가 연좌되어 참형을 당했다. 《宋史 卷455》


 

52) 백안(伯顔) : 백안이 원나라 세조(世祖)의 명을 받고 송나라를 공격하여 1276년 정월 경인일에 조수가 절강(浙江)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는 호주시(湖州市)에 주둔하였다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개선하였다. 《元史 卷138 伯顔列傳》


 

53) 문천상(文天祥) : 송(宋) 나라 길수(吉水) 사람. 자(字)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이다. 덕우(德祐) 초년에 원(元)의 군사가 침범해 들어오니, 천상(天祥)은 군내(郡內)의 호걸(豪傑) 및 산만(山蠻)을 발동하여, 조서에 응하여 근왕(勤王)하였다. 좌승상(左丞相)에 승진되어 강서(江西)를 도독(都督)하다가 원군(元軍)에게 패하여 순주(循州)로 달아났는데, 위왕(衛王)이 들어서자 신국공(信國公)을 봉했다. 나중에 원장(元將)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잡혀서 연옥(燕獄)에 3년 동안 구금되었으나 끝내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고 시시(柴市)에서 피살되었는데, 형(刑)에 임하자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뜻을 보였다.


 

54) 회남자(淮南子)》 태족훈(泰族訓)에 이르기를, “천자가 도를 얻으면 지킴이 사이에 있게 될 것이다.〔天子得道 守在四夷〕”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3년 조에 “옛날 밝은 천자의 시절에는 지키는 책임이 사방의 이적에게 있었는데, 천자의 위엄이 쇠해지자 지키는 책임이 제후에게 있게 되었다.〔古者天子 守在四夷 天子卑 守在諸侯〕”라는 말이 나온다.


 

55) 상소(緗素):역사책에 기록될 업적이라는 뜻이다. 상소는 고대에 종이 대신 사용하던 천황색(淺黃色)의 비단을 가리키는데, 훗날에는 서적의 의미로 쓰였다.

56) 咨十有二牧 曰 食哉惟時 柔遠能邇 惇德允元 而難任人 蠻夷 率服 <<서경 우서 순전 16장>>

57) “융적(戎狄)을 이에 막으며 형서(荊舒)를 이에 징계된다.[戎狄是膺 荊舒是懲]” 하였다. <<시경 송 노송 비궁>>

58) 비여(匪茹) :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뜻인데, 전하여 도적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시경(詩經)》 소아(小雅) 유월(六月)에, “험윤이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서, 초 땅과 호 땅에 정연하게 웅거하여, 호와 삭방을 침략하여, 경양에 이르렀다.〔玁狁匪茹 整居焦穫 侵鎬及方 至于涇陽〕” 하였다.

59) 향해(香孩)의……지극하니 : 향해는 향기로운 아이라는 뜻으로, 송(宋)나라를 건국한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을 가리킨다. 조광윤은 응천선원(應天禪院)의 진영에서 출생하였는데 3일동안 향기가 진영에 가득하였으므로 후세에는 응천선원을 향해아영(香孩兒營)이라고 칭하였다.

60) 구준(寇準) : 송나라 진종(眞宗) 때 거란(契丹)이 침입해 오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황제에게 남쪽으로 피해 가 있을 것을 청하였으나 구준만은 친정(親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진종이 친정을 결정하였으나 남성(南城)에 이르러서는 군사를 주둔한 채 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구준이 다시 강을 건너기를 고집하여 황제가 할 수 없이 강을 건넜는데, 이로 인해 사기가 고무되어 거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宋史 卷281 寇準傳》

61) 옥로(玉輅) : 옛날에 제왕이 타는 수레. 옥으로 장식했으므로 일컫는 말이다.

62) 황각(黃閣) : 정승이 집무하는 청사를 말한다. 한나라 때 승상의 청사 문을 황색으로 칠하여 궁궐과 구분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63) 패금(貝錦) : 《시경》 소아(小雅)에 처혜비혜 성시패금(萋兮斐兮成是貝錦)이란 말이 있는데, 처(萋)와 비(斐)는 작은 광채(光彩)이며, 패금(貝錦)은 큰 광채이다. 이 말은 작은 빛이라도 늘이면 큰 빛이 된다는 말다.

64) 속저(屬猪) : 송(宋)의 별칭.

65) 칠금 칠종(七擒七縱) : 삼국(三國)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남이(南夷)를 정벌하러 가서 그곳의 추장(酋長) 맹획(孟獲)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을 다시 놓아주어서 끝내 항복을 받아냈던 데서 온 말

66) 삼표 오이(三表五餌):한(漢) 나라 때 가의(賈誼)가 진헌(陳獻)한 흉노(匈奴)에 대한 회유책으로서, 삼표는 인도(仁道), 상의(常義), 연낙(然諾)의 세 가지를 신의 있게 하여 회유하는 것을 말하고, 오이는 이(耳), 목(目), 비(鼻), 복(腹), 심(心)의 다섯 가지 욕구를 충족시켜 회유하는 것을 말한다.

67) 익(益)이 말하였다. “아! 경계하소서. 헤아림이 없을 때에 경계하시어 법도를 잃지 마시고 편안함에 놀지 마시고 즐거움에 지나치지 마시며, 어진 자에게 맡기되 두 마음을 품지 마시고 사악한 자를 제거하되 의심하지 마소서. 의심스러운 계책을 이루지 마셔야 백 가지 생각이 넓어질 것입니다. 도(道)를 어기면서 백성들의 칭찬을 구하지 마시며 백성들을 거스르면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따르지 마소서. 게을리하지 않고 황폐하지 않으면 사방의 오랑캐들도 와서 왕(王)으로 받들 것입니다.” 益曰 吁 戒哉 儆戒無虞 罔失法度 罔遊于逸 罔淫于樂 任賢勿貳 去邪勿疑 疑謀勿成 百志惟熙 罔違道以干百姓之譽 罔咈百姓 以從己之欲 無怠無荒 四夷 來王  서경 우서 대우모 6장

68) 12목(牧)에게 물으시어 말씀하였다. “곡식은 때[농사철]를 잘 맞추어야 하니, 멀리 있는 자를 회유하고 가까이 있는 자를 길들이며 덕이 있는 자를 후대하고 어진 자를 믿으며 간사한 자를 막으면, 만이(蠻夷)도 거느리고 와서 복종할 것이다.” 咨十有二牧 曰 食哉惟時 柔遠能邇 惇德允元 而難任人 蠻夷率服 <<서경>> <우서>  순전 16장. 

69) 왕흠약(王欽若) : 왕흠약은 자가 정국(定國)이다. 구준(寇準)이 단연(澶淵)에서 세운 공을 자부하고 황제까지 그를 극진히 대우하자, 왕흠약이 이를 매우 시기하여 황제를 집요하게 설득하더니, 결국 황제의 마음에서 구준을 점점 멀어지게 하고 말았다. 《宋史 卷281 寇準列傳》

70) 진회는 남송으로 들어가서 나약한 강왕을 꼬여 전쟁은 위험한 일이니 현상대로 여진족과 강화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자, 황제는 진회를 정승으로 임명하고 강화하게 하였는데 실상은 여진족에게 항복하는 것이었다. 여진족은 송 나라 황제를 신하로 대접하여 너라는 말을 쓰고 송 나라 황제는 여진족에게 신(臣)이라는 말과 폐하라고 존칭하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반대하는 무장 악비(岳飛)를 죽이고 문신 장준(張浚)ㆍ조정(趙鼎)ㆍ이강(李綱) 등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여진족에게 항복하였으므로 후세까지 진회는 간신이라는 말을 들었다. 손근은 그때 부수상(副首相)으로 그 강화에 찬성한 자이고 왕륜은 그 강화의 사절로 갔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진회를 돕던 자로 낙인찍혔다.

71) 가사도(賈似道) : 남송(南宋) 말엽 그의 누이가 귀비(貴妃)가 됨으로써 우승상(右丞相)의 자리에 앉게 되어 국권을 장악하고 부정과 향락으로 날을 보냈다. 원군(元軍)이 건강(建康)을 위협하자 그는 단신만이 배를 타고 양주(揚州)로 도망쳤다. 진의중(陳宜中) 등의 탄핵을 받아 순주(循州)에 안치(安置)되었다가 정호신(鄭虎臣)에게 잡혀 죽었다.

72) 수양(修攘) :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준말로 국내의 정치를 닦고서 외적을 물리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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