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서발/서

주자서절요서

황성 2011. 9. 15. 16:40

 

朱子書節要序

 

晦菴朱夫子 挺亞聖之資 承河洛之統 道巍而德尊 業廣而功崇 其發揮經傳之旨 以幸敎天下後世者 旣皆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矣 夫子旣沒 二王氏及余氏 裒粹夫子平日所著詩文之類 爲一書 名之曰朱子大全 總若干卷 而其中所與公卿大夫門人知舊往還書札 多至四十有八卷 然此書之行於東 方 絶無而僅有 故士之得見者蓋寡 嘉靖癸卯中 我中宗大王 命書館印出頒行 臣滉於是 始知有是書而求得之 猶未知其爲何等書也 因病罷官 載歸溪上 得日閉門靜居而讀之 自是 漸覺其言之有味 其義之無窮 而於書札也 尤有所感焉 蓋就其全書而論之 如地負海涵 雖無所不有 而求之難得其要 至於書札 則各隨其人材稟之高下 學問之淺深 審證而用藥石 應物而施爐錘 或抑或揚 或導或救 或激而進之 或斥而警之 心術隱微之間 無所容其纖 惡 義理窮索之際 獨先照於毫差 規模廣大 心法嚴密 戰兢臨履 無時或息 懲窒遷改 如恐不及 剛健篤實輝光 日新其德 其所以勉勉循循而不已者 無間於人與己 故其告人也 能使人感發而興起焉 不獨於當時及門之士爲然 雖百世之遠 苟得聞敎者 無異於提耳而面命也 嗚呼至矣 顧其篇帙浩穰 未易究觀 兼所載弟子之問 或不免有得有失 滉之愚竊不自揆 就求其尤關於學問而切於受用者 表而出之 不拘篇章 惟務得要 乃屬諸友之善書者及子姪 輩 分卷寫訖 凡得十四卷爲七冊 蓋視其本書 所減者殆三之二 僭妄之罪 無所逃焉 雖然 嘗見宋學士集 有記魯齋王先生以其所選朱子書 求訂於北山何先生云 則古人曾已作此事矣 其選其訂 宜精密而可傳 然當時宋公 猶嘆其不得見 況今生於海東數百載之後 又安可蘄見於彼 而不爲之稍加損約 以爲用工之地也哉 或曰 聖經賢傳 誰非實學 又今集註諸說 家傳而人誦者 皆至敎也 子獨拳拳於夫子之書札 抑何所尙之偏而不弘耶 曰 子之言似矣 而猶未也 夫人之爲學 必有所發端興起之處 乃可因是而進也 且天下之英才 不爲不多 讀聖賢之書 誦夫子之說 不爲不勤 而卒無有用力於此學者 無他 未有以發其端而作其心也 今夫書札之言 其一時師友之間 講明旨訣 責勉工程 非同於泛論如彼 何莫非發人意而作人心也 昔聖人之敎 詩書禮樂皆在 而程朱稱述 乃以論語爲最切於學問者 其意亦猶是也 嗚呼 論語一書 旣足以入道矣 今人之於此 亦但務誦說 而不以求道爲心者 爲利所誘奪也 此書有論語之旨 而無誘奪之害 然則將使學者 感發興起 而從事於眞知實踐者 舍是書何以哉 夫子之言曰 學者之不進 由無入處而不知其味之可嗜 其無入處 由不肯虛心遜志 耐煩理會 使今之讀是書者 苟能虛心遜志 耐煩理會 如夫子之訓 則自然知其入處 得其入處 然後知其味之可嗜 不啻如芻豢之悅口 而所謂大規模嚴心法者 庶可以用力矣 由是而旁通直上 則泝伊洛而達洙泗 無往而不可 向之所云聖經賢傳 果皆爲吾之學矣 豈偏尙此一 書云乎哉 滉年薄桑楡 抱病窮山 悼前時之失學 慨餘韻之難理 然而區區發端 實有賴於此書 故不敢以人之指目而自隱 樂以告同志 且以俟後來於無窮云 嘉靖戊午夏四月日 後學眞城李滉 謹序

 

회암(晦菴) 주 부자(朱夫子)는 아성(亞聖)의 자질이 뛰어나 하락(河洛)의 도통을 이어 도덕이 높으며 공업(功業)이 크다. 경전(經傳)의 뜻을 밝혀 천하의 후세 사람에게 다행하게 가르친 것이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 대 뒤 성인이 나타나도 의혹함이 없을 것이다. 부자가 돌아가신 후 두 왕씨(王氏)와 여씨(余氏)는 부자가 평일에 지은 시문류(詩文類)를 전부 모아 《주자대전(朱子大全)》이라 하였으니, 모두 어느 정도의 분량이 되었다. 그 가운데 공경대부(公卿大夫)와 문인, 그리고 친구에 준 왕복 편지가 48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나 이 글이 우리나라에 유행된 것은 전혀 없거나 겨우 있었으므로 선비들이 구해서 본 자가 드물었다. 가정(嘉靖) 계묘년(1543, 중종38)에 우리 중종 대왕이 교서관(校書館)에 인쇄하여 반포하도록 하였으므로, 신(臣) 나도 비로소 이런 책이 있음을 알고 구하여 보았지만 어떠한 종류의 책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책을 싣고 시골에 돌아와서 날마다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서 이 글을 읽어 보니, 점점 그 말이 맛이 있고 그 뜻이 무궁(無窮)함을 깨달았으며, 더욱이 서찰에 느낀 바가 많았다.

대개 그 책 전체에 관해서 논한다면, 땅이 만물을 싣고 있고 바다가 온갖 만물을 포용한 것과 같아서 없는 것이 없으나, 그 요점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서찰만 각각 그 사람의 재주의 고하(高下)와 학문의 천심(淺深)을 따라 병을 살펴서 약재를 쓰며 물건에 따라 알맞게 담금질을 하는 것과 같아서, 혹은 눌리고 혹은 들추며, 혹은 인도하고 혹은 구원하며, 혹은 다그쳐 올리고 혹은 물리쳐 깨닫게 하여서, 심술(心術)의 은미한 사이에는 그 악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의리(義利)를 궁구하는 즈음에는 홀로 먼저 조그마한 착오도 비추어 보니, 그 규모가 넓고 크며 심법(心法)이 엄하고 정밀하다. 못에 다다르면 얼음을 밟는 것과 같아서 조심하고 조심하여 잠깐이라도 쉴 때가 없다. 분노(忿怒)를 징계하며 욕심을 막아 선에 옮기며, 악을 고쳐 미치지 못할 듯하였다. 강건하고 독실하여 빛이 나서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하니, 힘쓰고 힘쓰며 따르고 따르기를 마지않음이 남과 자기의 사이가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고한 것이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고 흥기하게 함이 당시 문하(門下)에 직접 배운 사람만 그럴 뿐 아니라, 비록 백대 후라도 진실로 이 글을 보는 자는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아아, 참 지극하도다.

그러나 그 책이 너무 많아서 연구하기가 쉽지 않고 겸하여 그 책에 실려 있는 제자(弟子)의 물음이 혹 득실(得失)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내 어리석은 것은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그중에 더욱 학문에 관계되고 수용에 간절한 것만을 뽑아내되, 편장(篇章)에 구애되지 않고 오직 그 요긴함을 얻기에만 힘쓰고, 이에 글씨를 잘 쓰는 벗과 아들과 조카들에게 주어 권(卷)을 나누어 쓰기를 마치니, 무릇 14권 일곱 책이 되었으니, 대개 그 본서에 비교하면 줄인 것이 거의 3분의 2이다. 참람한 죄는 피할 길 없다.

그러나 일찍이 송 학사(宋學士)의 문집을 보니 그기에 기록하기를, ‘노재(魯齋) 왕 선생(王先生)이 뽑은 주자서를 북산(北山) 하 선생(何先生)에게 교정하기를 청하였다.’ 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미 이런 일을 하였다. 그 뽑고 교정함이 응당 정밀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였을 것이지만 그 당시 송공(宋公)이 오히려 그 책을 얻어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는 해동(海東)에서 수백 년 후에 태어났으니, 또 어찌 그 책을 보기를 바라서 좀 더 간략하게 만들어 공부할 자료를 삼으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은 어느 것이나 다 실학(實學)이 아니겠는가. 또 지금 주자가 경전에 집주(集註)한 모든 말을 집집마다 전하고 사람마다 외우니, 모두가 다 지극한 가르침인데, 자네는 홀로 부자의 편지에만 관심을 가지니, 어찌 숭상함이 그리 편벽되고 넓지 못한가?” 하였다. 나는 대답하였다. “자네의 말이 근사하나 그렇지 않다. 대개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는 반드시 단서(端緖)를 열어 흥기할 곳이 있어야 성취하게 될 것이다. 또 천하의 영재가 적지 않으며, 성현의 글을 읽고 공자의 말을 외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는 것이 아니건만, 끝내 이 학문에 힘을 쓰는 자가 있지 않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그 단서를 열고 그 마음에 징험함이 있지 않는 까닭이다.” 지금 이 서찰의 말은 그 당시 사우(師友)들 사이에서 성현의 요결(要訣)을 강명하고, 공부를 권장한 것이었으니 저들과 같이 범범하게 논한 것과는 다르고 어느 것이나 사람의 뜻을 감동시키며 사람의 마음을 흥기시키지 않은 것이 없다. 옛 성인의 가르침에는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이 모두 있지만, 정주(程朱)가 칭송하여 기술할 때 《논어(論語)》를 가장 학문에 절실한 것으로 삼은 뜻도 이와 같다. 아아, 《논어》 한 책으로 너끈히 도에 들어갈 것인데, 지금 사람은 이 책에 대해 다만 읽고 말하기만을 힘쓰고 도를 구하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익에 유혹되어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논어》의 뜻은 있으나 유혹하여 빼앗는 해는 없다. 그러면 장차 배우는 자로 하여금 감발하고 흥기하여 참으로 알고 실제로 행하는 것을 일삼으려 하는 자는 이 글을 버리고 어찌하겠는가. 주자의 말에, “학자가 나아가지 못함은 도(道)의 문에 들어갈 곳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 맛을 즐거워할 줄 알지 못함이다. 그 들어갈 곳이 없음은 마음을 비우고 뜻이 겸손하여 번거로운 것을 견디고 다스리기를 즐기지 않는 까닭이다.” 하였으니, 지금 이 글을 읽는 자가 진실로 능히 마음을 비우고 뜻이 겸손하기를 부자의 훈계와 같이 하면, 자연히 그 들어갈 곳을 알게 되고 그 들어갈 곳을 얻은 후라야 그 맛을 즐길만 함이 음식이 입을 즐겁게 함과 같이 될 뿐만 아님을 알 것이요, 주자의 이른 바 ‘큰 규모[大規模]’와 ‘엄한 심법[嚴心法者]’도 거의 힘쓰게 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두루 통하여 바로 오르면 이락(伊洛)을 거슬러 수사(洙泗)에 달하여 가히 옳지 않음이 없으니, 앞에서 이른바,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은 과연 모두 나의 학문이 될 것이니, 어찌 편벽되게 이 한 글만 숭상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늙어 상유(桑楡 황혼)에 가깝고 궁벽한 산에서 병들어 전에 배우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전현이 남긴 자취를 깨닫기 어려움을 개탄하였다. 그러나 구구(區區)하게 단서를 연 것은 실로 이 글에 힘입음이 있다. 그러므로 감히 남들의 지목함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뽑아 모아서 동지에게 고하고, 또 뒤에 오는 자를 무궁(無窮)하게 기다리려고 함이다.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13) 여름 4월 모일에 후학(後學) 진성(眞城) 이황(李滉)은 삼가 서문에 쓴다.

 

 

[주D-001]두 왕씨(王氏)와 여씨(余氏) : 두 왕씨는 왕잠재(王潛齋)와 왕실재(王實齋)를 말하고 여씨는 여사로(余師魯)를 말한다.

[주D-002]노재(魯齋) 왕 선생(王先生) : 송(宋)나라 왕백(王柏 : 1197~1274)을 말한다. 자는 회지(會之)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에 《독역기(讀易記)》 등이 있다.

[주D-003]북산(北山) 하 선생(何先生) : 송나라 하기(何基 : 1188~1269)를 말한다. 자는 자공(子恭)이며 면재(勉齋) 황간(黃榦)을 통하여 주희의 학문을 전수받았는데, 왕백(王柏)을 가르친 적이 있다.

[주D-004]고기가 …… 될 : 추환(芻豢)은 꼴을 먹여 기르는 소나 염소의 고기를 말한다. 맹자의 말에 “이의(理義)가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함이, 추환의 고기가 나의 입을 즐겁게 함과 같다.”라고 하였다.

[주D-005]이락(伊洛)을 …… 달하여 : 정자(程子)를 거슬러 공자(孔子)의 학문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정자가 사는 낙양(洛陽)에는 이천(伊川)과 낙수(洛水)가 있고, 공자가 사는 노(魯)나라에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