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문/권무당기

권무당기

황성 2010. 8. 24. 09:48

 

勸武堂記[1].hwp

勸武堂記


古者 澤宮選士 必以射 盖射者 六藝之一 而君子之所觀德者也 鄕射禮廢 文武道殊 然摎諸古而其重如彼 則凡欲育人材而成其美者 其不可偏廢也明矣 矧玆濱海備虞之地 勸武之政 尤不可忽者哉 不侫典郡以來 首以勸學爲念 選才雋而實之黌舍 委長老而嚴其課督 檢稅入而豊其需供 三者之政 抑自謂不負於多士矣 乃以暇日閱視郡中武士 則才俱可就 而不能自力任其頹惰者 久矣 余用是愍焉 思有以獎勵之 而亦必有肄業之所然後 志立者 可以恒矣 有勸賞之道然後 才短者 可以激矣 於是 謀諸左右 鳩得二百緍銅 使之出付各面射契 存本殖利 每月一次 試射之日 取其子銭十緡 隨其等而上下其賞 俾爲永式 仍作會射之所於郡城之南 扁之曰勸武堂 堂可以百年不朽 錢可以逐月行賞 則庶幾因是而作一郡之趨上者耶 落之日 呼語諸武士 曰精其藝 而成其功 是諸君所當自勉而不必待勸者也 勸之而不知激 則是自暴者 吾復何誅 但事貴有終 今日吾能經始之而已 同乎我而毋隳其終 則深有望於後之人云爾

歲癸未季夏玉洞歸人識


 옛날 택궁(澤宮)1)에서 무사를 선발할 적에 반드시 활쏘기를 하였다. 대개 활쏘기는 육예2) 중에 하나이니, 군자(君子)의 덕행을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향사례(鄕射禮)3)가 쇠퇴하고 문무(文武)의 도(道)가 다르지만 옛 도에서 구해보면 그 중요함이 저와 같으니, 무릇 인재(人才)를 육성하여 그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자는 어느 한쪽을 폐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우리 고을 흥해(興海)는 바다를 끼어 예기치 못한 환란에 대비해야 할 곳이니, 권무(勸武)의 정사를 더욱 소홀히 못할 것이다. 불녕(不佞)이 이 고을을 맡은 이래로 먼저 권학(勸學)을 염두에 두고 인재를 뽑아 학교에서 수업하게 하고, 장노(長老)에게 맡겨 일과를 철저히 관리하게 하고, 세입을 감독하여 그 수요과 공급을 넉넉하게 하였으니, 이 세 가지의 정사는 또한 스스로 선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에 한가한 날에 관내의 무사들을 사열(査閱) 하니, 재주는 모두 성취 할 만하였다. 그러나 자력으로 나태하고 게으른 대로 방치할 수 없음이 오래 되었다. 내가 이를 근심하여 권장하게 할 방법을 생각하였으나, 또한 반드시 무술을 익히는 장소가 있은 뒤에 뜻이 확고한 사람들이 항심이 있고, 상을 권장할 방도가 있은 뒤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분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고을의 좌우 사람들과 모의하여 금전 이백 민동(緡銅)을 모아 각 면(面)의 사계(射契)4)에 내어주되, 원금은 그대로 두고 이자를 불려 매월 1차례, 활쏘기 하는 날에 그 이자 10민(緡)을 거두어 등급에 따라 상금을 차등 지급하여 영원한 법식으로 삼게 하였다. 이어서 모여 활쏘기할 수 있는 궁도장(弓道場)을 군성(郡城)의 남쪽에 세우고 편액을 권무당(勸武堂)이라고 하였다. 권무당은 앞으로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을 것이요, 비용은 이자(利子)로서 매월 시상(施賞)을 할 수 있으니, 아마 이로 인하여 이 고을의 추상(趨上)이 될 것이다. 낙성식을 하던 날 여러 무사를 불러 말하기를, “무술을 연마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은 제군들의 몫이니, 타인이 권장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권장해도 분발하지 않으면 이는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자이니, 내가 어찌 꾸짖을 수 있겠는가. 다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 소중하다. 나는 다만 이 건물을 세울 뿐이니, 나와 뜻을 함께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은 깊이 후세 사람들에게 바라노라. 

계미(癸未) 6월 어느 날 옥동(玉洞) 귀인(歸人)은 기록한다.


1) 택궁(澤宮) : 활 쏘는 기예를 시험하는 장소를 이름. 《周禮 夏官 司弓矢 注》 또 《예기(禮記)》 사의(射儀)에 “활쏘기를 통해 성대한 덕을 볼 수가 있다.[射者所以觀盛德也]”라고 하였다.


2) 육예(六藝) : 예(藝)․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이름.


3) 향사례(鄕射禮) : 고을 원이 봄과 가을에 백성을 모아 학궁(學宮)에서 활쏘기를 익히는 예(禮)임.


4) 사계(射契) : 활을 쏘려고 사정(射亭)에 든 활쏘기 회원들의 모임. 모임의 장[契長]은 고관 가운데 뽑고, 계원은 모임이 조직 안된 다른 사정 소속 사람들도 받아들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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