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서발/송은선생문집서

송은선생문집서

황성 2009. 3. 24. 08:55

松隱先生文集序

[洪命周] 


不佞嘗閱麗季逸史 有以知松隱朴公爲八隱之一 而年代緬邈 文獻散墜 固無以得其詳 矯仰高風 徒懷曠感 今因其裔孫世臣 始獲覩遺稿一卷 爲詩者十六編,箴誦二則,遺書三數行 咳唾珠玉之流落人間者 特不過丘山之毫芒 然而先生之立身大節 於此焉悉備 文豈求多乎哉 其人可敬則其言始重 其言無多則其傳愈貴 雖使先生之文傳於世者 充衍棟宇 百世之下 夷考先生之爲人者 要不外乎此而已 吁其盛矣 敬讀其詩 則所與酬和者卽圃,牧,冶,晩諸先生 而先天榮辱 歎心內之莫言 古道行裝 泣冤魂之已老 憂傷感憤之意 自現於言外之旨 而松溪喬木 血淚虛流 月落花殘 天地微茫 其貞忠苦心 矢死靡他之節 令人釀涕於滄桑百劫之後 嗚呼 先生之在勝國 官躋正卿 功著北藩 位望固已赫赫矣 麗政失紀 世運告訖 聖祖龍興 人神咸歸 高明賢智之士 識天而知時 其於興喪存亡之機 察之亦已審矣 深夜寒燈 風雨如晦 先生與圃牧諸公 把酒慷慨 其於死生進退之際 講之亦已熟矣 迺以七尺血肉之身 擔着萬世之綱常 罔僕之義冞堅 採薇之志不渝 超然嶺表 鷗鷺爲盟 黃閣恩綸 五微不起 則是豈與倉卒之間 捐生而取義者 同日論歟 麗朝五百年 無眞儒之學 至圃隱先生 始倡明斯道 開示後人 學者至今賴之 而今觀先生立志持身二箴 論人性之純善 指氣質之淸獨 言忠行篤 求之本源 九容九思 鑑于聖謨 儼然是程朱家法 蓋公之與圃隱先生 平居麗澤者 不但出處之義而已 凡於性命之極致 所與切磨而資益者 有可以想見 則卽此二箴 不弊於天壤之間 而嘉惠後學之功 於斯乎大矣 若其遺書之告誡四子也 勉之以先天後天 父子異時 旣爲人臣 忠則竭力 其辭甚正 其理甚順 苟非中行之君子 其能若是乎 然則先生之本末始終 一覽斯卷 可以盡得之矣 其敢以寥寥千載 殘稿剩馥而少之乎 先生四子 卽憂堂,忍堂,啞堂,拙堂 而受學於圃隱先生之門 今其詩文若干 亦皆附錄于玆 觀其官箴戒辭,愼官,愼心等篇 無非行己之大方 爲學之良矩 其得於門庭之勳襲者 尤不勝斂袵而起敬也 不佞之先祖郞將公 當革命之際 與從父子晩隱公 同時棄官 而晩隱公踰嶺之草溪 名其洞曰杜門 郞將公遯居于高陽之高峯 戒後人曰 吾子孫落席於王氏朝者 勿赴擧從官 晩隱先生亦八隱之一也 今於弁先生之文也 不勝私感 竝牽連而書以歸之 資憲大夫刑曹判書,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洪命周 謹序

 내가 일찍이 세상에 묻힌 고려 말기의 사적을 살펴보고서 송은 박공이 八隱의 한 사람임을 알았으나 세대가 멀어져 문헌이 흩어져서 진실로 그 자세함을 알 수가 없었다. 고상한 풍모를 우러러보며 년대가 너무 아득하다는(광세지감) 감정을 느꼈는데. 지금 그 후손 박세신을 인하여 비로소 유고 한 권을 얻어 보니 시를 지은 것이 16편이요, 잠송 2편이요 유서가 서너 줄이었다. 입에서 나온 주옥같은 문장들이 인간 세상에 유락된 것이 다만 구산의 터럭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생이 조정에 나가 행한 큰 절개들이 여기에 모두 갖춰져 있으니 문장이 어찌 많기를 구하겠는가. 그 사람이 공경 받을 만하면 그 문장은 비로소 소중해지고, 그 문장이 많지 않으면 그 전함은 더욱 귀해지니, 설사 세상에 전해지는 선생의 문장이 집에 가득하더라도 백세의 뒤에서 선생의 사람됨을 살펴보는 사람은 요컨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이니 아 훌륭하구나. 삼가 이 글을 읽어보니, 文章을 주고받은 사람은 포은 목은 야은 만은 여러 선생이었다. 영욕을 선천에 돌려 마음에 말할 수 없음을 탄식하고 옛 도를 행하면서 원혼이 이미 늙음을 흐느낀다. 하였으니 세상을 근심하고 슬퍼하며 감개한 마음이 말 밖의 뜻에 나타난다. 송계의 喬木에 피눈물은 부질없이 흐르고 달 지고 꽃이 떨어짐에 천지가 아득하구나 하였으니 곧은 충심과 고심과 죽어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절개가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뒤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다. 아~! 선생은 고려 때에 官職이 正卿에 오르고 功績이 북번에 드러나 지위와 명망이 본래 이미 赫赫하였다. 고려의 정사가 紀綱을 잃어 世運이 다함을 알렸다. 태조가 일어남에 사람과 귀신이 모두 귀의하였고, 고명하고 어질고 지혜로운 선비가 천시를 아니 興, 商, 存, 亡의 기미에 이를 살펴봄이 또한 分明하였으리라. 깊은 밤 싸늘한 등불 비바람에 어두운 데에 선생이 포은 목은 여러공과 술잔을 잡고 감개하니, 그 死生進退의 사이에 이를 강론함이 또한 이미 익숙하였으리라. 7척의 육신으로 만대의 기강을 담당하여 죽어도 종이 되지 않으려는 의리는 더욱 견고하고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지조는 변하지 않아 모든 것을 훌훌털고 영남으로 가서 새와 함께 벗이 되리라 맹세하고, 정부에서 은혜로운 윤허 5번 내려졌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이 어찌 잠간 사이에 삶을 버리고 의리에 나아간 사람들과 함께 말할 수 있으랴? 고려 오백년 역사에 참된 선비의 학문이 없었는데, 포은 선생이 태어나심에 우리 도를 앞장서서 밝혀 후배를 인도하니 학자들이 지금까지 힘입는다. 지금 입지잠과 지신잠을 살펴보면 人性의 선함을 議論하고 기질의 淸濁을 가리키며, 말은 충성스럽과 행실은 돈독함을 근본에서 찾고 구용과 구사를 성인의 법에서 귀감으로 삼았으니, 엄연히 정자와 주자의 집안 법도이다. 공이 포은 선생과 평소 학문을 연마한 것은 출처의 의리일 뿐만이 아니고, 성명의 지극한 이치에 대해서 함께 연구하여 도움을 준 것을 상상할 수 있으니, 이 두 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천지의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고 후학에게 아름답게 은혜를 끼친 공이 이렇듯이 크다. 남긴 글로 4명의 자식에게 가르침에 고려와 조선에서 부자가 시기를 달리하여 태어났으니, 신하가 되었다면 충성하면 힘을 다하라 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바르고 그 이치가 매우 순하니, 진실로 中道를 실천하는 군자가 아니라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선생의 본말 시종을 한 번 이 책에서 관찰한다면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찌 감히 아득히 천년 전 남은 원고라 하여 적게 여길 수 있으랴? 선생에게는 네 명의 자제가 있으니 우당과 인당과 아당과 졸당 이다. 포은 선생의 문화에서 수학했으니 지금 그 若干의 시문을 또한 모두 여기에 붙여서 기록하니, 그 관잠 계잠 신관 신심 등의 편을 읽어보면 행세하는 큰 방도요 학문하는 훌륭한 법이니 분정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라 더욱 옷깃을 여미고 공경을 일으키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나의 선조 양장공께서는 세상이 뒤바뀌던 때에 종부의 아들 만은공과 同時에 관직을 버렸으니 만은공은 대관령을 넘어 계초로 가서 그 동네 이름을 두문동이라 하였고, 양장공은 고양의 고봉에서 은둔하여 살았으니, 후손들에게 경계하시기를 “내 자손 중에 왕씨의 왕조에서 태어난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종사하지 말라.” 하였다. 만은 선생도 八隱의 한 분이다. 선생의 글에 서문을 씀에 사사로운 감정을 금치 못해 함께 이끌어서 기록하여 돌려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