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서발/야은일고서

야은일고서

황성 2009. 3. 23. 18:32

壄隱逸稿序

[李宜顯] 


蓋當麗氏之季 權臣李仁任議迎北元使 以背貳皇明 圃隱鄭先生與朴公尙衷 力爭其不可 壄隱田公率諫官李詹等 抗章請誅仁任 遂與朴公同被淫刑以死 由是 義理滅絶 喬木摧殘 而麗氏忽焉弗祀 嗚呼 覽玆行事 變亦備矣 後之君子 其必有累欷於斯焉 夫華夷逆順之辨 春秋之大義也 斯義也如日月之麗天 夫人能知之 然而降及衰末 人多爲私欲所汨 其能維持闡明以光世道者 絶未有聞 苟或有直犯虓怒之勢 確然守正 以扶彝則於國命將傾之會者 其爲忠曷可少哉 如圃翁 尙矣 所就有大焉 固不可以一事而蓋之 公與朴公 其亦可謂衆流之砥柱 昏衢之炯燭也歟 雖然 朴公則朝廷旣加追褒 遺文又已印布 而獨公事迹 汔玆沈泯 無有表章之者 寂寥篇什 未免零落於蠧簡中 身後顯晦之不同乃如是 可慨也已 今其遠裔攟拾散亡之餘 附以諸公贊述 將付剞劂 而請序於余曰 以子爲圃翁彌甥也 余正容謝曰 不佞何敢當玆役 第嘗紬閱勝國史 約略見公事 心知公與圃翁同志 欽仰誦服久矣 顧何可無一言 況今日世界 至於斯極 視公時又加遠矣 遡挹風烈 益有所感 遂書此以歸之 公諱祿生 字孟耕 潭陽人 登第官至門下評理 公有弟祖生 號耕隱 圃翁作記夢詩 有大材扶明堂之語 孫漢老 以孝行卓絶 棹楔門閭 十世孫有秋 號松潭 有儒行 今竝綴其逸蹟短韻於編末 亦可以見公友于挺拔 無愧陳家二方 而忠義之報 徵之子孫者 愈久不爽如此云 大明崇禎紀元後再庚戌四月上澣 龍仁李宜顯 序


蓋(발어사) 고려 말을 당하여 권신 이인임이 北元의 使臣을 맞이하여 皇明을 背反할 것을 議論하니, 포은 정몽주선생이 박공 상충과 不可함을 힘써 간하고 야은 전공은 諫官 이첨 등을 거느리고 疏章을 올려 이인임을 誅罰할 것을 청했다가 드디어(이상하다..선생님이 한 거라 드디어로 해둠) 박공과 함께 가혹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일반적인 말이므로 죽었다고 표현) 이로인해 義理가 滅絶되어 喬木(고국)이 꺾여 고려가 갑자기 망하여 종사가 끊겼다. 아~! 이 行事를 살펴보면 變故를 겪은 것이 또한 지극하다.(비상하다) 후세의 군자는 반드시 이 일에서 여러 번 한숨을 쉬리라. 중화냐 오랑케냐 역리의 무리냐 순리의 무리냐를 판단함은 春秋의 大義이니, 이 義는 일월이 하늘에 걸려있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이 이를 안다. 그러나 내려오면서 쇠퇴한 말기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사욕에 빠져 대의를 유지하고 천명하여 세도를 밝힌 사람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만약 왕의 노여운 기세를 곧바로 범하여 確固히 바름을 지켜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때에 떳떳한 道理를 扶植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충성됨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포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를 들면) 더할 수 없이 높아서 成就한 바가 이보다 더 큼이 있으니 진실로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그분을 평가할 수 없다. 야은공와 박공은 또한 中流의 砥柱요 어두운 거리의 촛불이라고 이를 수 있다. 비록 그러나 박공은 조정에서 追褒를 행하였고 遺文도 인쇄되어 유포되었는데, 유독 야은공의 사적은 지금까지도 묻혀있어 이를 드러내준 것이 없어 잔존하는 서적은 좀이 스는 책 사이에서 망가짐을 면하지 못하였다. 죽은 후에 드러나고 감추어짐의 같지 않음이 바로 이와 같으니 개탄할 만하도다. 지금 먼 후손이 흩어지고 없어진 뒤에서 수습하여 여러 공들의 찬양한 저술을 붙이고 기궐시에 맡기려 하여 나에게 서문을 청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포옹의 외손이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내가 외모를 바로잡고 감사해 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일찍이 고려사를 뽑아서 대략 공의 일을 살펴보았는데 마음으로 공이 포옹공과 同志임을 알아 恭敬하고 우러르며 그분의 글을 읽고 感服한지 오래되었으니, 어찌(도리어)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세계가 이지경에 이르러 공의 때와 비교해보면 또 더욱 쇠퇴된 정도가 머니 풍도와 공적을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면 더욱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하고 마침내 이를 기록하여 돌려주노라. 공의 휘는 녹생이요 자는 맹경이니 담양사람이다 과거에 올라 官職이 문하평리에 이르렀다. 공에게 조생이라는 아우가 있으니 호가 경은이다. 포옹이 지은 記夢시에 ‘큰 재주가 기울어져가는 朝廷을 扶植한다.’ 하였다 손자 한노는 효행이 뛰어남으로 문 옆에 정문을 세우고 10세손 유추는 호가 송담이니 유행이 있었다. 지금 그 일적과 단운을 篇末에 함께 철하니 또한 공의 형제의 뛰어남이 진원방 진계방에 부끄럽지 않음을 볼 수 있다. 忠義의 보답이 자손에게 드러난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시대가 더욱 멀어도 어긋나지 않음이 이와 같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