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문초/한문공문초 권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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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2009. 2. 12. 14:08

唐宋八大家文鈔巻八

 

明茅坤撰

昌黎文鈔八

記傳

 

新修滕王閣記

 

通篇不及滕王閣中情事 而止以生平感慨作 波瀾婉而宕

전체의 글이 등왕각의 정사에 미치지 않고 다만 평소 감개함으로 지었으니, 파란이 완곡/하고 질탕하다.

 

愈少時 則聞江南多臨觀之美 而滕王閣獨為第一 有瑰偉絶特之稱 及得三王所為序賦記等 壯其文辭 益欲往一觀而讀之 以忘吾憂 繫官于朝 願莫之遂 十四年以言事斥守掲陽 便道取疾以至海上 又不得過南昌而觀所謂滕王閣者 其冬以天子進大號加恩區内 移刺袁州 袁於南昌為属邑 私喜幸 自語以為當得躬詣大府 受約束於下執事 及其無事且還 儻得一至其處 竊寄目償所願焉 至州之七月 詔以中書舍人太原王公 為御史中丞觀察江南西道 洪江饒䖍吉信撫袁 悉属治所 八州之人 前所不便 及所願欲而不得者 公至之日皆罷行之 大者驛聞 小者立變 春生秋殺 陽開隂閉 令修於庭户數日之間而人自得於湖山千里之外 吾雖欲出意見 論利害 聴命於幕下而吾州乃無一事可假而行者 又安得捨巳所事以勤館人 則滕王閣 又無因而至焉矣 其嵗九月 人吏浃和 公與監軍使 燕于此閣 文武賔士 皆與在席 酒半合辭言曰此屋不修且壊 前公為從事此邦 適理新之 公所為文 實書在壁 今三十年而公来為邦伯 適及期月 公又来燕于此 公烏得無情哉 公應曰諾 於是 棟楹梁桷板檻之腐黑撓折者 盖瓦級甎之破缺者 赤白之漫漶不鮮者 治之 則已無侈前人 無廢後觀 工既訖功 公以衆飲 而以書命 愈曰子其為我記之 愈既以未得造觀為歎 竊喜載名其上 詞列三王之次 有榮耀焉 乃不辭而承公命 其江山之好 登望之樂 雖老矣 如獲從公遊 尚能為公 賦之

한유가 젊었을 때, 강남에는 임하여 보는 아름다움이 많은데, 등왕각이 유독 으뜸이어서 뛰어나고 빼어난 칭호가 있음을 듣고, 세 왕 씨가 지은 서,부,기 등을 얻음에 미쳐서 그 문장을 장대하게 여기고 더욱 가서 한 번 보고 그 문장을 읽어서 나의 근심을 잊고자 하였지만 조정에서 관직에 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14년에 언사(言事)로 배척되어 게양(掲陽)의 수령이 되었다. 편한 길에 빠름을 취하여 해상으로 이르니 또 남창을 지나서 이른 바 등왕각을 볼 수 없었다. 그 해 겨울 천자가 태호를 냄으로 은혜를 구내에 더하여 옮겨서 원주의 자사가 되니, 원주는 남창에 있어서 속읍이 된다. 개인적으로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겨 스스로 말하기를 마땅히 몸소 대부에 이르러서 하집사에게 약속을 받고 일 없고 또 돌아옴에 미쳐서 행여 한 번 그 곳에 이르러서 가만히 눈을 붙여 원하는 것을 감상하고자 하였더니, 원주에 이른 지 7월에 중서사인 태원왕공에게 조서를 내려서 어사중승으로 삼아 강남서도를 관찰하게 하였다. 홍주 강주 요주 건주 길주 신주 무주 원주는 무도 치소에 소속되었다. 8고을 사람들이 앞서 불편한 것과 원하였지만 이루지 못한 것을 공이 이르는 날에 혁파하여 시행하니, 큰 것은 역마로 보고하고 작은 것은 즉시 고쳐서 봄에 태어나 가을에 죽고 양이 열리고 음이 닫혀 하여금 가정에서 닦게한 지 며칠 사이에 사람이 절로 호산 천 리의 밖에서 얻었다. 내 비록 의견을 내어 이해를 논하여 막하에서 명령을 듣고자 하였지만 내 고을은 곧 한 가지 일이라도 빌려서 갈만 한 것이 없으니, 또 어찌 내가 종사하는 곳을 버려서 관부의 사람을 수고롭게 할 수 있겠는가? 등왕각은 또 인하여 이르지 못하였다.

그 해 9월에 백성과 관리가 화합하니, 공이 감군사와 더불어 이 누각에서 잔치를 여니 문무의 관원과 빈사가 모두 더불어 좌석에 있었다. 술자리가 반쯤 지났을 때 말을 모아서 말하기를 “이 누각이 수리하지 않고 또 무너졌다. 전에 공이 이 고을에 종사할세 마침 수리하여 새롭게 하였으니 공이 지은 문장이 진실로 벽에 적혀 있다. 지금 30년에 공이 와서 방백이 되니 마치 한 달에 미쳐서 공이 또 와서 여기에서 잔치하니 공이 어찌 정감을 없을 수 었겠는가?”하니, 공이 말하기를, “알았다.”고 하였다. 이에 동영 량각 판함의 썩어 흔들리고 부러진 것과 기와 벽돌이 파손된 것과 단청이 흐릿하여 선명하지 않는 것을 다스리니 이미 전인보다 사치함이 없고 뒤의 관경을 가리지 않았다. 장인이 이미 공사를 마치니, 공이 여러 사람과 술을 마시고 편지로 한유에게 명령하기를,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어라.”고 하였다. 한유가 이미 가서 보지 못함으로 탄식하였으나 가만히 이름을 그 위에 싣고 세 왕 씨의 다음에 말이 나열되어 빛남이 있음을 기뻐하여 곧 사양하지 않고 공의 명령을 받들었다.

그 강산의 좋음과 올라 바라보는 즐거움은 비록 늙더라도 만일 공을 따라 노닒을 얻는다면 오히려 공을 위하여 지을 것이다.

 

藍田縣丞㕔壁記

 

憤當世之丞 不得盡其職 故借壁記以㸃綴之 而詞氣多澹宕竒詭

 

丞之職 所以貳令 於一邑 無所不當問 其下主簿尉 主簿尉 乃有分職 丞位髙而偪 例以嫌 不可否事 文書行 吏抱成案詣丞 巻其前 鉗以左手 右手 摘紙尾 鴈鶩行以進 平立睨丞 曰當署丞渉筆占位 署惟謹 目吏問可不可 吏曰得 則退不敢略省 漫不知何事 官雖尊力勢反出主簿尉下 諺數慢 必曰丞 至以相訾謷 丞之設 豈端使然哉 博陵崔斯立 種學績文 以蓄其有 泓涵演迤 日大以肆 貞元初 挟其能 戰藝於京師 再進再屈於人 元和初以前大理評事 言得失 黜官再轉而為丞兹邑 始至喟曰官無卑 顧材不足塞職 既噤不得施用 又喟曰丞哉丞哉 余不負丞而丞負余 則盡枿去牙角 一躡故跡 破崖㟁而為之丞㕔 故有記 壊漏汚不可讀 斯立易桷與瓦 墁治壁 悉書前任人名氏 庭有老槐四行 南牆鉅竹千梃儼立若相持 水㶁㶁循除鳴 斯立痛掃漑 對樹二松 日哦其間 有問者 輙對曰余方有公事 子姑去 考功郎中知制誥韓愈記

승의 직책은 령은 보좌하는 것이니, 한 고을에 있어서 물어서는 안되는 것이 없고, 그 아래는 주부와 위인데 주부와 위는 나누어 맡은 직책이 있다. 승은 지위가 높아 령과 가까워서 으레히 혐의쩍다 하여 일을 가타부타 하지 않으니, 문서가 돌게 되면 관리가 성안을 안고 승에게 나아가 그 앞부분은 말아 왼손으로 누르고 오른손으로 종이 끝을 잡고 기러기 대오처럼 비스듬히 걸어나와 똑바로 서서 승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서명해야 됩니다.”하면 승은 붓을 움직여 자리를 정하여 성명하되 오직 삼살 뿐이요, 눈으로 아전에게 가 불가를 물으면 아전은 되습니다. 하고 물러간다. 그리하여 감히 조금도 살펴보지 못하여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직은 비록 높으나 힘과 세력은 도리어 주부와 위의 아래에 있다. 속담에 태만한 자를 꾸짖게 되면 반드시 승이라 하여 심지어는 이 말로써 서로 헐뜯기까지 하니, 승을 설치함이 어찌 단연코 이렇게 하려 한 것이겠는가?

박릉 최사립이 학문을 닦고 문장을 쌓아 그 소유를 쌓으니, 널리 포함하고 멀리 홀러가 날로 켜져서 퍼져갔다. 정원 초기에 그 재능을 믿고 경사에서 재주를 다투어 두 번 나아갔으나 두 번 모두 남에게 굴복당하였다. 원화 초기에 전 대리사평사로서 득실을 말하다가 관직에서 축출당하였고 다시 두 번 전직하여 이 골을의 승이 되었다. 처음 부임했을 때 탄식하여 말하기를 승이여 승이여 나는 승을 저버리지 않는데 승이 나를 저버린다. 하고는 이빨과 뿔을 모두 제거하고 한결같이 옛 자취를 따라 애안을 깨뜨리고 승을 따라 하였다.

승청에 옛날 기문이 있었는데, 무너지고 비가 새서 더러워져 읽을 수가 없었다. 최사립이 서까래와 기와를 갈고 벽을 흙손질하여 다스리고는 전임자들의 성명을 모두 기록하였다. 뜰에는 늙은 홰나무 네 행렬이 있고 남쪽 담장에는 큰 대나무 천 그루가 우뚝히 서서 서로 버티고 있는 듯하며 물이 졸졸 울리며 뜰을 따라 흘러갔다. 최사립은 깨끗이 청소 하고 물을 대주며 두 그루의 소나무를 마주 심어놓고는 날마다 그 사이에서 시를 읊으며, 묻는 자가 있으면 곧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공적인 일이 있으니, 그대는 우선 가라.”하였다. 고공랑중 지제고 한유는 쓰다.

 

唐荆川曰此但説斯立 不得盡職 更不説起記壁之意 亦變體也

당형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사립이 직분을 다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다시 기벽/을 일으킨 뜻을 말하지 않았으니, 또한 변체이다.

 

燕喜亭記

 

淋漓指畫之態 是得記文正體而結局處 特髙歐公文大畧有得於此

왕성하게 가리켜 그은 태도이니, 이것은 기문의 정체를 얻었는데, 판을 맺은 곳이 특별히 높다. 구공의 문이 대략 여기에서 얻었다.

 

太原王弘中 在連州 與學佛人景常元慧游 異日從二人者行于其居其後 丘荒之間 上髙而望得異處焉 斬茅而嘉樹列 發石而清泉激 輦糞壤 燔椔翳 却立而視之 出者突然成丘 陷者呀然成谷 窪者為池 而缺者為洞 若有鬼神異物隂来相之 自是弘中與二人者 晨往而夕忘歸焉 乃立屋以避風雨寒暑 既成 愈請名之 其丘曰竢徳之丘 蔽於古而顯於今 有竢之道也 其石谷曰謙受之谷 瀑曰振鷺之瀑 谷言徳 瀑言容也 其土谷曰黄金之谷 瀑曰秩秩之瀑 谷言容 瀑言徳也 洞曰寒居之洞 志其入時也 池曰君子之池 虚以鍾其美 盈以出其惡也 泉之源曰天澤之源 出髙而施下也 合而名之以屋曰燕喜之亭 取詩所謂魯侯燕喜者頌也 於是 州民之老聞而相與觀焉 曰吾州之山水 名天下 然而無與燕喜者比 經營於其側者相接也 而莫直其地 凡天作而地藏之以遺其人乎 弘中自吏部郎 貶秩而来 次其道途所經 自藍田 入商洛 渉淅湍 臨漢水 升峴首 以望方城 出荆門 下岷山/江 過洞庭 上湘水 行衡山之下 繇郴踰嶺 蝯狖所家 魚龍所宫 極幽遐瑰詭之觀 宜其於山水 飫聞而厭見也 今其意乃若不足 傳曰智者樂水 仁者樂山 弘中之徳 與其所好 可謂協矣 智以謀之 仁以居之 吾知其去是而羽儀於天朝也 不逺矣 遂刻石以記

태원(太原) 황홍중(王弘中)이 연주(連州)에 있을 때 불법을 배우는 사람 경상(景常) 원혜(元慧)와 더불어 놀았다. 다른 날 두 사람을 따라 그 거처의 뒤 구릉 사이에 가서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고 특별한 곳을 얻어 풀을 베니 아름다운 나무가 늘어서 있고 돌을 일으키니 맑은 샘이 흘렀다. 더러운 흙을 버리고 썩은 나무 가지를 불태우고 그쳐 서서 보니 나온 것은 돌연히 구릉을 이루고 빠진 것은 하연히 골짜기를 이루었으며 웅덩이는 못이 되고 이저러진 것은 동이 되니, 마치 귀신 이물이 와서 도운 듯 하였다. 이로부터 홍중이 두 사람과 더불어 새벽에 가서 저녁에 돌아옴을 잊었다. 곧 집을 지어 풍우 한서를 피하였다. 이미 이루어짐에 한유가 이름 짓기를 청하니, 그 언덕을 사덕구(竢徳丘)라고 하니 옛 것에 가렸다가 지금에 드러나니 기다림이 있는 도이다. 그 석곡을 겸수곡(謙受谷)이라고 하고, 폭포는 진로폭((振鷺瀑)이라고 하니 골짜기는 덕을 말하고, 폭포는 형용을 말함이다. 그 토곡을 황금곡(黄金谷)이라고 하고 폭포는 질질폭(秩秩瀑)이라고 하니, 계곡은 형용을 말한 것이고, 폭포는 덕을 말함이다. 동을 한거동(寒居洞)이라고 하니 들어온 때를 기록함이다. 연못은 군자지(君子池)라고 하니 비워 그 아름다움을 모으고 채워 그 악을 내침이다. 샘은 천택원(天澤源)아러고 하니 높은 곳에서 나와 아래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합하여 집으로 이름하기를 연희정(燕喜亭)이라고 하니, 시경에서 이른 바 노후(魯侯)가 잔치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을 칭송함을 취하였다. 이에 주민의 늙은 사람이 듣고 서로 더불어 구경하고 말하기를 우리 고을의 산수는 천하에 이름이 났으나, 그러나 연희정과 더불어 견줄 수 없으니 그 곁에서 경영한 사람이 서로 인접하였는데, 그 땅을 만나지 못하였다. 무릇 하늘이 만들고 땅이 소장하여 그 사람에게 준 것인가?

홍중이 이부랑(吏部郎)으로부터 폄직되어 왔으니, 그가 지나온 길을 차례지으면 남전(藍田)으로부터 상락(商洛)에 들어가 석단(淅湍)을 건너 한수(漢水)에 임하고 현수(峴首)에 올라 방성(方城)을 바라보고 형문(荆門)을 나가 민산(下山/江)을 내려와 동정(洞庭)을 지나 상수(湘水)에 올라 형산의 아래에 가서 침땅으로 고개를 넘어 원숭이가 집 짓고 어룡이 집을 지었다. 그윽하고 먼 괴궤한 관경을 다하여 마땅히 그 산수에 있어서 실컷 듣고 많이 보았지만 지금 그 뜻은 부족한 듯하였다. 전에 말하기를,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것이니, 홍중의 덕이 그 좋아하는 바와 더불어 알맞다고 말할 수 있다. 지혜로 도모하고 인으로 거처하니 내 그가 이곳을 떠나 조정에서 벼슬함이 멀지 않음을 알겠다. 마침내 돌에 새겨 기록한다.

 

河南府同官記

 

烟波感慨甚曲折

연파가 감개하여 매우 곡절하다.

 

永貞元年 愈自陽山 移江陵法曹參軍 獲事河東公 公嘗與其從事 言建中初 天子始紀年更元 命官司舉貞觀開元之烈 羣臣惕慄奉職 命材登良 不敢私違 當時自齒朝之士而上 以及下百職事 官闕一人 將補必取其良然 而河南同時 於天下稱多 獨得將相五人 故於府之參軍 則得我公 於河南主簿 則得故相國范陽盧公 於汜水主簿 則得故相國今太子賔客滎陽鄭公 於陸渾主簿 則得相國 今吏部侍郎天水趙公 於登封主簿 則得故吏部尚書 東都留守吴郡顧公 盧公去河南為右補闕 其後由尚書左丞 至宰相 鄭公去汜水 為監察御史 佐山南軍 其後由工部侍郎 至宰相 罷而又為 趙公去陸渾 為右拾遺 其後由給事中 為宰相 顧公去登封 為監察御史 其後由京兆尹 至吏部尚書 東都留守 我公 去府為長水尉 其後由膳部郎中 為荆南節度行軍司馬 遂為節度使 自工部尚書 至吏部尚書 三相國之勞 在史冊 顧吏部 慎職小心 于時有聲 我公愿潔而沈密 開亮而卓偉 行茂于宗 事修于官 嗣紹家烈 不違其先 作帥荆南 厥聞休顯 武志既揚 文教亦熙 登槐賛元 其慶且至 故好語故事者 以為五公之始迹也同 其後進而偕大也亦同 其稱名臣也又同 官職雖分而功徳有巨細 其有忠勞於國家也同 有若將同其後而先同其初也 有聞而問者 於是焉書 旣五年 始立石刻其語 河南府參軍舍庭中 於時河東公 為左僕射宰相 出藩大邦 開府漢南 鄭公以工部尚書 留守東都 趙公以吏部尚書 鎮江陵 漢南地連七州 戎士十萬 其官宰相也 留守之官 居禁省中 嵗時出旌旗 序留 司文武百官於宫城門外而衙之 江陵故楚都也 戎士五萬 三公同時千里相望 可謂盛矣 河東公名均 姓裴氏

영원(永貞) 원년에 한유가 양산(陽山)으로부터 강릉법조참군(江陵法曹參軍)으로 옮겨 獲事하동공(河東公)을 섬길 수 있었다. 공이 일찍이 그 종사관과 더불어 말하기를 건중(建中) 초에 천자가 처음 년을 기록하여 원년을 고치고 命관사(官司)에 명하여 정관(貞觀) 개원(開元)의 공열을 거행하게 하니, 군신이 두려워하여 직분을 받들어 재량이 있는 사람에게 명령하여 등용하니 감히 사사로이 어기지 못하였다. 당시 치조(齒朝)의 선비로부터 이상으로 아래 백집사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한 사람이 빠지면 장차 보충하려함에 반드시 그 어진 사람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하남 땅에서 동시에 천하에 많음을 일컬어 유독 장상을 얻은 것이 5인이었다. 그러므로 부의 참군(參軍)은 우리 공을 얻고 하남주부(河南主簿)에 있어서는 고(故) 상국 범양(范陽) 노공(盧公)을 얻고 사수 주부(汜水主簿) 則 고 상국 지금 태자 빈객(太子賔客) 영양(滎陽) 정공(鄭公)을 얻고 육혼 주부(陸渾主簿)는 則 상국 지금 이부시랑(吏部侍郎) 천수(天水) 조공(趙公)을 얻고 등봉주부(登封主簿)는 고 이부상서(吏部尚書) 동도 유수(東都留守) 오군(吴郡) 고공(顧公)을 얻었다. 노공이 하남을 떠나 우보궐(右補闕)이 되고, 그 후에 상서좌승(尚書左丞)을 경유하여 재상에 이르렀다. 정공은 사수를 떠나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산남군(山南軍)을 도왔다.// 그 후에 공부시랑(工部侍郎)을 거쳐 재상에 이르렀다가 파직되어 또 재상이 되었다. 조공(趙公)은 육군을 떠나 우습유(右拾遺)가 되고 그 후에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재상이 되었다. 고공은 등봉(登封)을 떠나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그 후에 경조윤(京兆尹)을 거쳐 이부상서(吏部尚書) 동도 유수(東都留守)에 이르렀다. 우리 공은 강릉부를 떠나 去府為장수위(長水尉)가 되고, 그 후에 선부랑중(膳部郎中)을 거쳐 형남절도행군사마(荆南節度行軍司馬)가 되어 마침내 절도사(節度使)가 되었고, 공부상서(工部尚書)로부터 이부상서에 이르렀으니, 3상국의 공로는 역사책에 기록되었다. 고 이부(顧吏部)는 직분을 삼가고 마음을 조심하여 당시에 명성이 있었다. 우리 공은 원결(愿潔)하고 침밀(沈密)하며 개량(開亮)하고 탁위(卓偉)하여 행실이 종사에 무성하고 사업이 관직에서 닦여졌으며, 집안의 공열을 계승하여 선조를 어기지 않았으며, 형남에서 장수가 되어 그 명성이 아름답게 드러나고, 무지(武志)가 이미 드러나며 문교가 또한 밝았다. 괴원에 올라 임금을 도우니 그 경사가 또 지극하였다. 그러므로 고사를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5공이 처음 시작함에 자취가 같으며, 그 후에 나아가 함께 크게 됨은 또한 같으며, 명신이라 불림이 또한 같으며 관직이 비록 나눠어 공덕이 크게 작음이 있으나 그 국가에 충성하고 수고로움은 같으니, 만약 장차 그 후를 같이함이 있을진대 먼저 그 처음을 같이해야 한다. 듣고서 묻는 사람이 있어 이에 기록한다. 이미 5년되어 비석을 세우고 그 말을 새기니 하남부(河南府) 참군사정(參軍舍庭) 가운데이다. 당시에 하동공은 좌복야(左僕射) 재상이되고 나가 큰 나라를 지켜 한남(漢南) 개부가 되고, 정공은 공부상서로 동도 유수가되고, 조공은 이부상서로 강릉을 지켰으니 한남은 땅이 7주를 이어니 군사가 10만이요, 그 관직은 재상의 반열이다. 유수의 관직은 궁궐에 거쳐하며 때때로 정기(旌旗)를 내어 차례로 머물러// 司문무 백관을 궁성문 밖에서 맡아서 관장하고, 강릉은 옛 초나라 도읍이니 군사 5만이다. 3공이 동시에 천리에서 서로 바라보니 성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동공의 이름은 균(均)이고 성은 배씨(裴氏)이다.

 

畫記

妙處在物數龎襍 而詮次特悉於其記 可以知其畫之絶世矣

묘처는 사물의 숫자가 어지럽게 섞어 차례로 기록하여 특별히 그 기록에 다하였으니 그 그림이 세상에 빼어남을 알 수 있다.//

雜古今人物小畫共一巻 騎而立者五人 騎而被甲載兵立者十人 一人 騎執大旗前立 騎而被甲載兵行且下牽者十人 騎且負者二人 騎執器者二人 騎擁田犬者一人 騎而牽者二人 騎而驅者三人 執羈靮立者二人 騎而下倚馬臂隼而立者一人 騎而驅渉者二人 徒而驅牧者二人 坐而指使者一人 甲胄手弓矢鈇鉞植者七人 甲胄執幟植者十人 負者七人 偃寢休者二人 甲胄坐睡者一人 方渉者一人 坐而脱足者一人 寒附火者一人 雜執器物役者八人 奉壺矢者一人 舍而具食者十有一人 挹且注者四人 牛牽者二人 驢驅者四人 一人杖而負者 婦人以孺子載而可見者六人 載而上下者三人 孺子戲者九人 凡人之事三十有二 為人大小百二十有三而莫有同者焉 馬大者九匹 於馬之中 又有上者 下者 行者 牽者 渉者 陸者 翹者 顧者 鳴者 寢者 訛者 立者 人立者 齕者 飲者 溲者 陟者 降者 痒磨樹者 嘘者 嗅者 喜相戲者 怒相踶齧者 秣者 騎者 驟者 走者 載服物者 載狐兎者 凡馬之事二十有七 為馬小大八十有三而莫有同者焉 牛大小十一頭 槖駝三頭 驢如槖駝之數而加其一焉 隼一犬 羊狐兎麋鹿共三十 旃車三兩 雜兵器弓矢旌旗刀劔矛楯弓服矢房甲胄之属 缾盂簦笠筐筥錡釡飲食服用之器 壺矢博奕之具 二百五十有一 皆曲極其妙 貞元甲戌年 余在京師 甚無事 同居有獨孤生申叔者 始得此畫而與予彈碁 余幸勝而獲焉 意甚惜之 以為非一工人之所能運 盖藂集衆工人之所長耳 雖百金不願易也 明年出京師 至河陽 與二三客論畫品格 因出而觀之 座有趙侍御者 君子人也 見之戚然 若有感然 少而進曰噫予之手摸也 亡之且二十年矣 余少時常有志乎兹事 得國本 絶人事而摸得之 遊閩中而喪焉 居閒處獨 時往来余懐也 以其始為之勞而夙好之䔍也 今雖遇之 力不能為己 且命工人 存其大都焉 余既甚愛之 又感趙君之事 因以贈之 而記其人物之形狀與數 而時觀之以自釋焉

 

고금 인물을 섞은 작은 그림이 함께 한 두루마리이니 말을 타고 서있는 사람이 5인이고, 말을 타고 갑옷을 입고 병장기를 실은 사람이 10인, 1인은 말을 타고 큰 깃발을 잡고 앞에 서있고, 말을 타고 갑옷을 입고 병장기를 싣고 가면서 또 내려서 끄는 사람이 10인, 말을 타고 업은 사람이 2인, 말을 타고 기물을 잡은 사람이 2인, 말을 타고 사냥개를 안은 사람이 1인, 말을 타고 끄는 사람이 2인, 말을 타고 모는 사람이 3인, 고삐를 잡은 사람이 2인, 말을 타고 아래로 말에 기댄어 매를 팔에 올려 서있는 사람이 1인, 말을 타고 몰면서 건너는 사람이 2인, 달리면서 몰며 목축하는 사람이 2인, 앉아서 지시하는 사람이 1인, 갑주를 입고 궁시와 부월을 손에 쥐고 꽂은 사람이 7인, 갑주를 입고 기를 잡고 꼳은 사람이 10인, 등진 사람이 7인, 쓰러져 누워 휴식하는 사람이 2인, 갑주를 하고 앉아 조는 사람이 1인, 바야흐로 건너는 사람이 1인, 앉아서 발을 벗은 사람이 1인, 추워 불에 가까이한 사람이 1인, 기물을 섞어 잡고 일하는 사람이 7인, 호시를 받든 사람이 1인, 머물러 음식을 갖추는 사람이 1인, 뜨고 붓는 사람이 4인, 소를 끄는 사람이 2인, 나귀를 끄는 사람이 4인, 한 사람은 지팡이를 짚고 업은 사람이요, 부인은 어린아이를 수레에 싣고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람이 6인, 수레에 싣고 오르내리는 사람이 3인, 어린아이가 장난하는 자 9인, 무릇 사람의 일은 32, 대인과 소인이 123인데 같은 그림이 없고, 큰 말이 9필, 말 가운데 오르는 놈, 내리는 놈, 가는 놈, 끄는 놈, 건너는 놈, 묻에 있는 놈, 고개를 드는 놈, 돌아보는 놈, 우는 놈, 자는 놈, 선 놈, 사람이 세우는 놈, 썹는 놈, 오줌 누는 놈, 오르는 놈, 내리는 놈, 종기를 나무에 비벼대는 놈, 소리내는 놈, 냄새 맡는 놈, 기뻐서 서로 장난치는 놈, 노하여 서로 밟고 무는 놈, 꼴을 먹는 놈, 말탄 놈, 사납게 달리는 놈, 달리는 놈, 물건을 실은 놈, 여우와 토끼를 실은 놈, 무릇 말의 일은 27가지이다. 말은 크고 작은 놈 83마리인데 같은 그림은 없다. 소의 크고 작은 놈은 11두, 낙타 3두, 나귀는 낙타의 마리 수와 같은데 1마리가 많다. 매 1, 견양호토미록 도합 30, 기수레 3량, 병기 궁시 정기 도검 모순 궁복 시방 갑주의 등속과 병, 우, 두, 립, 광, 거 기, 부, 음식, 복용의 기물과 호시 박혁을 섞은 도구 251이니, 모두 곡진히 그 오묘함을 극진하게 하였다.

정원 갑술년에 내가 서울에 있었는데 매우 일이 없어 함께 사는 독고 신숙 생이 처음 이 그림을 얻었는데 나와 더불어 바둑을 두어 내가 다행히 어겨 얻었다. 뜻이/ 매우 아껴 생각하기를, 한 장인이 능히 생각을 움직은 바가 아니요, 대개 여러 공인의 능한 것을 모았다. 비록 백 금이지만 바꾸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음해 서울을 나가 하양에 이르렀는데, 2,3객과 더불어 그림 품격을 말하다가 인하여 그림을 내어서 보여주니, 좌석에 조 시어(趙侍御)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군자이다. 보고서 슬프게 마치 느낌이 있는 듯 하였다. 조금 있다고 나와 말하기를, 아, 내가 손수 그린 것인데, 잃어버린 것인 12년이다. 내가 젊었을 적에 항사 이 일에 뜻을 두어 국본(國本)을 얻어 인사를 끊고 모사하여 얻었는데, 민중 땅을 유람하다가 잃어버렸다. 한가히 거처하고 홀로 있을 때 때때로 내 마음에 기억이 났는데, 그 처음 그림는 수고로움에 일찍 좋아한 독실함 때문이었다. 지금 비록 만났지만 힘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뿐이다. 또 장인에게 명령하여 그 대략을 보존할 것이다. 내 이미 매우 사랑하였더니, 또 조군의 일에 감응하여 인하여 주고 그 인물의 형상과 숫자를 기록하여 때때로 보아 스스로 마음을 풀려한다.

 

徐泗濠三州節度掌書記㕔石記

 

雅致

 

書記之任亦難矣 元戎整齊三軍之士 統理所部之甿 以鎮守邦國 賛天子施教化 而又外與賔客四隣交 其朝覲聘問慰薦祭祀祈祝之文 與所部之政 三軍之號令升黜 凡文辭之事 皆出書記 非閎辯通敏兼人之才 莫宜居之 然皆元戎自辟 然後命于天子 茍其帥之不文 則其所辟 或不當 亦其理宜也 南陽公 自御史大夫 豪夀廬三州觀察使 授節移鎮徐州 厯十一年 而掌書記者三人 其一人曰髙陽許孟容 入仕于王朝 今為尚書禮部郎中 其一人曰京兆杜兼 今為尚書禮部員外郎觀察判官 其一人隴西李博 自前鄉貢進士 授秘書省挍書郎 方為之 南陽公 文章稱天下 其所辟 實所謂閎辯通敏兼人之才者也 後之人 茍未知南陽公之文章 吾請觀於三君子 茍未知三君子之文章 吾請觀於南陽公 可知矣 蔚乎其相章 炳乎其相輝 志同而氣合 魚川泳而鳥雲飛也 愈樂是賔主之相得也 故請刻石以記之 而䧟置于壁中 俾来者得以覽觀焉

 

서기(書記)의 임무는 또한 어렵다. 원융(元戎)은 삼군의 병사를 정제하고 거느리는 바의 백성을 통솔하여 다스려 나라를 지키고 천자를 돕고 교화를 베풀며 또 밖으로는 빈객 사방의 이웃 나라와 교유하고, 그 조근 빙문 위천 제사 기축의 문장과 거느린 바의 정사 삼군의 호령과 등용하고 내침에 무릇 문사의 일은 모두 서기에서 나오니, 굉변 통민 겸인의 재주가 아니면 마땅히 거할 수 없다. 그러나 원융이 스스로 징벽한 이후에 천자에게 명령을 받으니 진실로 그 우두머리가 문장을 짓지 못한다면 그 징벽한 사람이 혹 합당하지 아니함은 또한 그 이치의 마땅함이다. 남양공(南陽公) 어사대부(御史大夫) 호주 수주 려주(豪·夀·廬) 3주 관찰사로 부절을 천자가 주어 옮겨 서주를 지키게 함이 지난 세월이 11년인데 서기를 담당한한 사람이 세 사람이었다. 그 한 사람은 고양(髙陽) 허맹용(許孟容)이니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지금 상서 예부랑중(尚書禮部郎中)이요, 그 한 사람은 경조(京兆) 두겸(杜兼)이니 지금 상서예부원외랑 관찰판관(尚書禮部員外郎觀察判官)이 되었고, 그 한 사람은 농서(隴西) 이박(李博)이니 전향공진사로 비서성교서랑을 제수받아 지금 맡고 있다. 남양공은 문장이 천하에 알려졌으니 그 징벽한 바는 진실로 이른 바 “굉변 통민 경인의 재주”라는 것이다. 후인이 진실로 남양공의 문장을 알지 못하면 내 청건대 세 군자에게 관찰하게 하고, 진실로 세 군자의 문장을 알지 못하면 내 청건대 남양공에게 관찰함에 알 수 있다. 우뚝하게 그 서로 빛남이여, 찬란하게 그 서로 빛나는구나. 뜻이 같고 기운이 합치하니 고기가 시내에서 노닐고 새가 구름에 낢이다. 내가 이 빈주가 서로 얻음을 즐거워하여 돌에 새겨 기록하여 벽 가운데에 집어넣기를 청하니//,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한다.

 

科斗書後記

典實

전실하다.

 

愈叔父當大厯世 文辭獨行中朝 天下之欲銘述其先人功行 取信来世者 咸歸韓氏 於時 李監陽氷 獨能篆書 而同姓叔父擇木善八分 不問可知其人 不如是者 不稱三服 故三家傳子弟往来 貞元中 愈事董丞相幕府 於汴州 識開封令服之者 陽氷子 授余以其家科斗孝經 漢衛宏官書 兩部合一巻 愈寳蓄之而不暇學 後来京師 為四門博士 識歸公 歸公好古書能通之 愈曰古書得其據依 盖可講 因進其所有書 属歸氏 元和来 愈亟不獲讓 嗣為銘文 薦道功徳 思凡為文辭 宜略識字 因從歸公乞觀二部書得之 留月餘 張籍令進士賀拔恕 寫以留愈 盖得其十四五 而歸其書歸氏 十一年六月四日 右庶子韓愈記

나의 숙부가 대력의 세대를 당하여 문사가 유독 조정에 알려져 천하에서 그 선조의 공열과 행적을 명을 지어 기술하여 후세에 믿음을 취하고자하는 사람은 모두 한씨에게 돌아왔다. 이때에 이감(李監) 양빙(陽氷)이 홀로 전서에 능하였고 동성인 숙부 한택목(擇木善)이 팔분(八分)에 능하였으니 묻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지 않다면 삼복(三服)이라고 말할 수 없기때문에 삼가가 자제에게 전하여 왕래하였다. 정원 연간에 한유가 동 승상(董丞相)을 막부에서 섬겼다가 변주에서 개봉령 탄복하는 사람(앞의 삼복을 이른다) 이양빙의 아들을 알았는데, 나에게 그 집의 과두(科斗)서로 된 효경(孝經)과 한나라 위굉(衛宏)의 관서(官書) 두 부를 합하여 한 권으로 만든 것을 주었다. 내가 보배롭게 여겨 소장하였는데 배울 겨를이 없었다. 뒤에 경사에 와서 사문박사가 되어 귀공을 알았다. 귀공은 고서를 좋아하고 능통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고서는 그 의거함을 얻어야 대개 강론할 수 있다.”라고 하고 인하여 소유한 책을 올려 귀씨에게 부탁하였다. 원화 이래로 내가 자가 사양함을 얻지 못하여 이어서 명문을 지어 공덕을 말하였으니, 생각건대, ‘문사를 지음에 마땅히 대략 글자를 알아야 한다.’하고, 인하여 귀공을 따라서 두 부의 글씨를 빌려 보고 얻어서 한 달 남짓 되어 장적(張籍)이 진사 하발서(賀拔恕)로 하여금 베껴 나에게 주었으니, 대개 그 열 가운데 네 다섯은 얻고 그 글씨를 귀씨에게 돌려주었다. 원화 11년 6월 4일 우서자(右庶子) 한유는 기문을 짓는다.

 

汴州東西水門記并序

 

語莊

말이 엄숙하다.//

 

貞元十四年正月戊子 隴西公命作東西水門 越三月辛巳朔水門成 三日癸未 大合樂設水嬉 㑹監軍軍司馬賔佐僚屬將挍熊羆之士 肅四方之賔客以落之 士女龢㑹 闐郭溢郭 既卒事 其從事昌黎韓愈 請紀成績其詞曰

정원(貞元) 14년 정월 무자일에 농서공이 동서 수문을 만들게 하고, 다음해 3월 신사 초하루에 수문이 이루어졌다. 3일 계미일에 크게 음악을 합주하고 수희(水嬉)를 베푸니, 감군(監軍) 군사마(軍司馬) 빈좌(賔佐) 요속(僚屬) 장교(將挍) 웅비(熊羆)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방의 빈객을 엄숙히 하여 낙성하니, 사녀들이 화락하게 모여 성곽을 메우고 넘쳤다. 이미 일을 마치고 그 종사관 창려 한유가 공적을 이룬 것을 기록하기를 청하였다.

그 사에 말하기를,

 

維汴州河 변주의 하수

水自中注 물이 가운데로부터 내려오네

厥初距河為城 그 처음 하수를 걸쳐 성을 만드니

其不合者 그 합하지 않는 것을

誕寘聮鎖于河 크게 연결된 쇠고리를 하수에 두니

宵浮晝湛 밤에 띄우고 낮에 가라앉아

舟不潛通 배가 잠겨 통하지 않네

然其襟抱虧疏 그러나 그 옷깃의 끓어 안은 곳이 어그러지고 성글어

風氣宣洩 풍기가 펴 세어

邑居弗寧 읍의 거쳐 편안하지 않아

訛言屢騰 시끄러운 말이 자주 오르네

厯載已来 해를 지난 이래로

孰究孰思 누가 궁구하고 누가 생각하리오

皇帝御天下 황제가 천하를 다스린 지

十有八載 십팔 년

此邦之人 이 고을 사람이

遭逢疾威 전염벼을 만나

嚚童噭嘑 어리섞은 아동들 부르짖으니

刧衆阻兵 무리를 겁박하고 병사로 막아

懔懔栗栗 늠름하고 두려워하여

若墜若覆 마치 실추하고 전복하는 듯하네

時維隴西公 당시 농서공

受命作藩 명을 받고 수령이 되어

爰自洛京 이에 낙양으로부터

單車来臨 한 대의 수레를 몰로 와서 이르렀네

遂拯其危 마침내 그 위태로움을 구제하고

遂去其疵 마침내 그 병을 제거함에

弗肅弗厲 엄숙하고 삼엄하게 하지 않아

薰為太和 태화로 감화하니

神應祥福 신이 상서로움과 복으로 응하여

五榖穰熱 오곡이 익으니

既庶而豐 이미 많고 풍부하니

人力有餘 인력이 남음이 있네

監軍是諮 감군이 묻고

司馬是謀 사마가 도모하네

乃作水門 곧 수문을 만들어

為邦之郛 고을의 성곽을 만드니

以固風氣 풍기를 굳건하게 하고

以閈冦偷 도둑을 막네

黄流渾渾 누른 물 혼혼하고

飛閣渠渠 나르는 전각 거거하네

因而飾之 인하여 꾸미니

匪為觀遊 관람과 유람을 위함이 아닐세

天子之武 천자의 무치

維隴西公是布 농서공이 펴고

天子之文 천자의 문치

維隴西公是宣 농서공이 펼치네

河之沄沄 하수가 빙돌아 흐름이여

源于崑崙 곤륜산에서 발원하였네

天子萬祀 천자의 만 가지 제사

公多受祉 공이 많이 복을 받네

乃伐山石 곧 산의 돌을 깎아

刻之日月 일월을 새기니

尚俾來者 오히려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知作之所始 지은 처음을 알게 하네

 

鄆州谿堂詩記

 

憲宗之十四年 始定東平 三分其地 以華州刺史 禮部尚書 兼御史大夫扶風馬公 為鄆曹濮節度觀察等 使鎮其地 既一年裦其軍 號曰天平軍 上即位之二年 召公入 且將用之 以其人之安 公也復歸之鎮 上之三年 公為政於鄆曹濮也 適四年矣 治成制定 衆志大固 惡絶於心 仁形於色 竱心一力 以供國家之職 于時沂密 始分而殘其帥 其後幽鎮魏 不悦於政 相扇繼變 復歸於舊 徐亦乗勢逐帥自置 同於三方 惟鄆也 截然中居 四隣望之 若防之制水 恃以無恐 然而皆曰鄆為冦巢 且六十年 將彊卒武 曹濮 於鄆州 大而近軍所根柢 皆驕以易怨而公承死亡之後 掇拾之餘 剝膚椎髓 公私掃地 赤立新舊 不相保持 萬目睽睽 公於此時 能安以治之 其功為大 若幽鎮魏徐之亂 不扇而變 此功反小何也 公之始至 衆未熟化 以武則忿以憾 以恩則横而肆 一以為赤子 一以為龍蛇 憊心罷精 磨以嵗月然後 致之難也 及教之行 衆皆戴公為親父母 夫叛父母從仇讐 非人之情 故曰易 於是 天子以公為尚書右僕射 封扶風縣開國伯 以襃嘉之 公亦樂衆之和 知人之恱而侈上之賜也 於是為堂於其居之西北隅 號曰谿堂 以饗士大夫 通上下之志 既饗 其從事陳曾 謂其衆言 公之畜此邦 其勤不亦至乎 此邦之人 纍公之化 惟所令之 不亦順乎 上勤下順遂濟登兹 不亦休乎 昔者人謂斯何今者人謂斯何 雖然斯堂之作 意其有謂而喑無詩歌 是不考引公徳 而接邦人於道也 乃使来請其詩曰

 

헌종(憲宗) 14년에 비로소 동평을 안정시켜 그 땅을 삼등분하여 화주 자사 예부상서 겸 어사대부 부풍 마공으로 운주 조주 복주 절도사 관찰사 등으로 삼아 하여금 그 땅을 지키게 하였다. 이미 1년이 되어 그 군을 포장하여 ‘천평군’이라고 하였다. 상이 즉위한 지 2년에 공을 불러들이고 짐짓 장차 등용하려 함에 그 사람이 편안하고 공변되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 진무하였다. 상이 즉위한 지 3년에 공이 운주 조주 복주에 정사를 함에 4년이 지나니,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제도가 안정되어 무리의 뜻이 크게 굳건하여 악이 마음에서 끊기고 인이 얼굴빛에 드러나 마음을 다하고 힘을 합하여 국가의 직분에 이바지 하였다. 이때에 기주와 밀주가 처음 나누어져 그 장수를 죽였다. 그 뒤에 유주 진주 위주가 정사에 기뻐하지 않고 서로 선동하여 변란을 이어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서주도 또한 형세를 타고 장수를 쫓아내고 스스로 두어 세 지방과 함께 하였지만, 오직 운주는 우뚝히 중앙에 거하여 사방에서 바라봄이 마치 막아서 물을 제압하는 듯 하여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모두 운주는 도적의 소굴이 된 지 짐짓 60년에 장수가 강성하고 군졸이 씩씩하여 조주와 복주는 운주에 있어서 크고 가까워 군이 뿌리가 되는 바인데 모두 교만하고 원망을 쉽게 하니 공이 사망의 뒤를 이어 철습한 나머지에 피부를 벗기고 골수를 쳐 공사로 땅을 쓸어 赤立新舊 서로 보호하고 지탱하여 온갖 눈이 엿보았다. 공이 이때에 능히 편안하게 다스리니 그 공이 크게 된다. 유주 진주 위주 서주의 난리에 선동하여 변하지 않아 이 공이 도리어 작은 것은 어째서인가? 공이 처음 이름에 무리가 교화에 익숙하지 않아 무력으로 하면 성내어 한하고 은혜로 하면 횡행하고 방자하니 한 편으로 적자로 여기고 한 편으로 용사로 여겨 마음을 고달프게 하고 정신을 피곤하게 하여 세월로 연마한 뒤에 어지러움을 다스리네. 가르침이 행해짐에 미쳐서 무리가 모두 공을 받들기를 친 부모처럼 하니, 대저 어버이를 배반하고 원수를 따름은 인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쉽다고 말한다. 이에 천자가 공으로 상서우복야로 삼아 부풍현 개국백으로 삼아 기리고 아름답게 여기니, 공이 또한 무리의 화평함을 즐거워 사람들이 기뻐함을 알아 상의 하사를 드러내었다. 이에 그 거쳐의 서북 모퉁이에 당을 지어 계당이라고 하고 사대부를 먹여 상하의 뜻을 통하였다. 이미 누림에 그 종사관이 진승이 무리에게 일러 말하기를 공이 이 고을을 기름에 그 부지런함이 또한 지극하지 않는가? 이 고을 사람이 공의 교화를 쌓으니 오직 명령하는 또한 순하지 않는가? 위가 부지런하고 아래가 순종하여 마침내 건너 여기에 오르니 또한 아름답지 않는가? 옛적에 사람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엇인가? 하더니 지금 사람이 이것이 무엇인고 말하니, 비록 그렇지만 이 당의 지음은 생각건대, 그 말함이 있지만 입 다물고 시 짓고 노래하지 않으니 이것은 공의 덕을 상고하여 끌어당겨 도에 고을 사람을 접하게 하지 않는다. 이에 하여금 와서 그 시를 청하였다.

 

帝奠九壥 황제가 구전(구주)을 드리니

有葉有年 세대가 있고 해가 있네

有荒不條 황폐하여 조리가 없으니

河岱之間 해대의 사이일세

及我憲考 우리 헌종에 미쳐

一收正之 한 번 거두어 바로잡았네

視邦選侯 고을을 보고 제후를 선발하니

以公来尸 공으로 와서 다스리게 하네

公来尸之 공이 와서 다스리니

人始未信 사람이 처음 믿지 않터니

公不飲食 공이 음식을 먹지 않고

以訓以狥 훈계하고 호령하였네

孰饑無食 누가 굶주려서 먹음이 없는고

孰呻孰歎 누가 신음하며 누가 탄식하는고

孰寃不問 누가 원통함을 묻지 않아

不得分願 본심을 얻지 않는고

孰為邦蟊 누가 고을의 해충이 되어

節根之螟 마디와 뿌리를 죽게하는고

羊狠狼貪 양이 사납고 이리가 탐하여

以口覆城 입으로 성을 전복시키네

吹之喣之 불고 불어

摩手拊之 손으로 갈아 어루만지네

箴之石之 찌르고 새겨

膊而磔之 책살하네

凡公四封 무릇 공이 네 번 봉해지니

既富以彊 이미 부유하고 강성하네

謂公吾父 공을 일러 내 부모라하니

孰違公令 누가 공의 명령을 어기리오

可以師征 군사로 정벌할 수 있음은

不寧守邦 지키는 나라가 편안하지 않음일세

公作谿堂 공이 계당을 지으니

播播流水 출렁출렁 흐르는 물가일세

淺有蒲蓮 얕은 곳에는 부들이 있고

深有蒹葦 깊은 곳에는 갈대가 있네

公以賔燕 공이 빈객으로 잔치를 여니

其鼓駭駭 그 북소리 둥둥 울리네

公燕谿堂 공이 계당에서 잔치를 벌리니

賔挍醉飽 빈객과 장교가 취하고 배부르네

流有跳魚 흐르는 물에 뛰는 고기가 있고

㟁有集鳥 언덕에는 모인 새가 있네

既歌以舞 이미 노래하고 춤추니

其鼓考考 그 북소리 둥둥 울리네

公在谿堂 공이 계당에 있어

公御琴瑟 공이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네

公暨賔贊 공이 빈객과 찬송하니

稽經諏律 경을 상고하고 법을 묻네

施用不差 베풂이 어긋나지 않으니

人用不屈 사람이 굽히지 않네

谿有薲苽 개울에는 마름과 오이가 있어

有龜有魚 거북과 고기 있네

公在中流 공이 가운데 흐르는 곳에 있으니

右詩左書 오른 편은 시 왼 편은 서일세

無我斁遺 내 싫어하고 버리지 말지어다

此邦是庥 이 고을이 이에 아름답네

 

 

太學生何蕃傳

 

此篇總在兩不遇上 相感慨

이편은 모두 두 번 만나지 못하는 가에 서로 감개함에 있다.

 

太學生何蕃 入太學者廿餘年矣 嵗舉進士 學成行尊 自太學諸生推頌 不敢與蕃齒 相與言於助教博士 助教博士 以狀申於司業祭酒 司業祭酒 撰次蕃之羣行焯焯者數十餘事 以之升於禮部 而以聞於天子 京師諸生以薦蕃名文説者 不可選紀 公卿大夫 知蕃者比肩立 莫為禮部 為禮部者 率蕃所不合者 以是 無成功 蕃淮南人 父母具全 初入太學 嵗率一歸 父母止之 其後間一二嵗 乃一歸 又止之 不歸者五嵗矣 蕃純孝人也 閔親之老 不自克 一日揖諸生 歸養於和州 諸生不能止 乃閉蕃空舍中 於是 太學六舘之士百餘人 又以蕃之義行 言於司業陽先生城 請諭留蕃 於是 太學闕祭酒 㑹陽先生出道州 不敢留 歐陽詹生言曰蕃仁勇人也 或者曰蕃居太學 諸生不為非義 葬/死者之無歸 哀其孤而字焉 惠之大小 必以力復斯 其所謂仁歟 蕃之力 不任其體 其貌不任其心 吾不知其勇也 歐陽詹生曰朱泚之亂 太學諸生 舉將從之 来請起蕃 蕃正色叱之 六舘之士 不從亂 茲非其勇歟 惜乎 蕃之居下 其可以施於人者 不流也 譬之水 其為澤不為川乎 川者髙 澤者卑 髙者流 卑者止 是故蕃之仁義 充諸心 行諸太學 積者多 施者不遐也 天將雨 水氣上 無擇於川澤澗谿之髙下 然則澤之道 其亦有施乎 抑有待於彼者歟 故凡貧賤之士 必有待然後 能有所立 獨何蕃歟 吾是以言之 無亦使其無傳焉

 

태학의 생도 하번(何蕃)이 태학에 들어간 지 20여년이다. 해마다 진사 시험에 응시하니, 학문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높아 태학의 여러 생도로부터 추숭하고 칭송하되 감히 하번과 더불어 나란히 서지 못한다하여 서로 더불어 조교박사에서 말하니, 조교박사가 문서로 사업죄주에게 아뢰었다. 사업제주가 하번의 여러 행실 가운데 빛나는 수십 가지 일을 뽑아 예부에 올리고 천자에게 올렸다. 경사의 제생들이 번의 명문을 올리는 것으로 말하는 이 헤아릴 수 없었다. 공경대부 가운데 하번을 아는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되 예부가 되지 않으니 예부가 된 사람은 대체로 번이 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이룬 공이 없었다.

하번은 회남 사람으로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신다. 처음 태학에 입학하여 한 해에 대체로 한 번 귀향하니 부모가 저지하고, 그 뒤에 간간히 1-2년에 곧 한 번 귀향하니, 또 저지하여 귀행하지 않은 지가 5년이다. 하번은 순수하고 효성스러운 사람이어서 어버이의 연로함을 근심하기를 스스로 이기지 못하여 하루는 제생에게 인사하고 화주에 돌아가 봉양하려하니 제생이 능히 저지할 수 없어 곧 번의 빈집 가운데를 막았다. 이에 태학 육관의 선비 백여명이 또 번의 의로운 행실로 사업 양선생(陽先生) 성(城)에게 말하여 회유하여 하번을 머무르게 하기를 간청하였다. 이에 태학에 죄주가 없고 마침 양선생이 도주에 나가 있어 감히 머무르게 하지 못하였다. 구양첨(歐陽詹) 생(生)이 말하기를, “하번은 인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다.”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하번이 태학에 거처함에 제생이 불의를 하지 않고, 죽은 자가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을 장사 지내어 그 외로움을 슬퍼하고 사랑하였으니, 크고 작은 곳에 은혜로움은 반드시 회복하였으니, 이것은 그 이른 바 ‘인’이 아니겠는가? 하번의 힘은 그 체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 모습은 그 마음을 맡을 수 없으니, 내 그의 용기를 알지 못하겠다.”하였다. 구양첨 생도가 말하기를 주차(朱泚)의 난리에 태학의 여러 생도들이 모두 장차 따르려 하여 와서 청하여 번을 일으켰는데, 번이 정색하고 꾸짖어 육관의 선비들이 난리를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 용기가 아니겠는가? 애석하다. 번이 아래에 거처하여 그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유행하지 못함이여. 물에 비유하자면, 그 못이 되고 시내가 되지 못하는 것이구나. 내는 높고 못은 낮으며, 높은 것은 흐르며 낮은 것은 그친다. 이 때문에 번의 인과 의는 마음에 가득하여 태학에서 실행하니 쌓은 것이 많았지만 베푸는 것이 멀지 않았다. 하늘이 장차 비를 내리려함에 수기가 오름에 천택 간계의 높고 낮음에서 가림이 없다. 그렇다면 못의 도는 그 또한 베풂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저에게 기다림이 있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무릇 빈천한 선비는 반드시 기다림이 있은 연후에 능히 홀로 서는 바가 있어니 유독 하번에 있서랴? 이 이 때문에 말하여 또한 그 전함이 없게 함이 없게 하는도다.

 

圬者王承福傳

 

以議論行叙事 然非韓文之佳者

 

圬之為技賤且勞者也 有業之 其色 若自得者 聴其言 約而盡 問之 王其姓 承福其名 世為京兆長安農夫 天寳之亂 發人為兵 持弓矢十三年 有官勲 棄之来歸 䘮其土田 手鏝衣食餘三十年 舍于市之主人 而歸其屋食之當焉 視時屋食之貴賤 而上下其圬之傭以償之 有餘則以與道路之廢疾餓者焉 又曰粟稼而生者也 若布與帛 必蠶績而後成者也 其他所以養生之具 皆待人力而後完也 吾皆賴之 然人不可徧為 宜乎各致其能以相生也 故君者理我所以生者也 而百官者 承君之化者也 任有小大 惟其所能若器皿焉 食焉而怠其事 必有天殃 故吾不敢一日舍鏝以嬉 夫鏝易能可力焉 又誠有功 取其直 雖勞無愧 吾心安焉 夫力易强而有功也 心難强而有智也 用力者 使於人 用心者 使人 亦其宜也 吾特擇其易為而無愧者取焉 嘻吾操鏝以入富貴之家 有年矣 有一至者焉 又往過之 則為墟矣 有再至三至者焉 而往過之 則為墟矣 問之其隣 或曰噫刑戮也 或曰身既死 而其子孫不能有也 或曰死而歸之官也 吾以是觀之 非所謂食焉怠其事而得天殃者邪 非强心以智而不足 不擇其才之稱否而冐之者邪 非多行可愧 知其不可而强為之者邪 將富貴難守 薄功而厚饗之者邪 抑豐悴有時 一去一来而不可常者邪 吾之心憫焉 是故 擇其力之可能者行焉 樂富貴而悲貧賤 我豈異於人哉 又曰功大者 其所以自奉也博 妻與子 皆養於我者也 吾能薄而功小 不有之可也 又吾所謂勞力者 若立吾家而力不足 則心又勞也 一身而二任焉 雖聖者不可能也 愈始聞而惑之 又從而思之 盖賢者也 盖所謂獨善其身者也 然吾有譏焉 謂其自為也過多 其為人也過少 其學楊朱之道者邪 楊之道 不肯㧞我一毛 而利天下 而夫人以有家為勞心 不肯一動其心以畜其妻子 其肯勞其心 以為人乎哉 雖然其賢於世之患 不得之而患失之者 以濟其生之欲 貪邪而亡道 以䘮其身者 其亦逺矣 又其言有可以警余者 故余為之傳而自鑑焉

 

흙손질하는 재주는 비천하고 또 수고로운 것이다. 일함에 그 낮빛이 자득한 듯한 사람이 있어 그 말을 들어보니 요약되고 다하여 물어보니, 왕은 성이요, 승복은 그의 이름이다. 대대로 경조 장안의 농부가 되었더니, 천보연간의 병난에 사람에게 뽑혀서 군졸이 되어 병장기를 잡은 지 13년에 관훈이 있었고, 버리고 돌아와서는 그 토지를 잃어버리고 손에 흙손을 가지고 의식주를 해결한 지 30년이다. 저자의 주인에게 머물러 그 옥식의 합당함을 돌려주었다. 당시 옥식의 귀천을 헤아려 흙손의 품삯을 조정하여 갚고, 나머지는 그것으로 도로의 폐하여 병들고 굶주리는 사람에게 주었다. 또 말하기를, “곡식은 농사지어서 사는 것이요, 베와 비단 같은 것은 반드시 길삼한 이후에 이루는 것이요, 그 기타 살아가는 도구는 인력을 기다린 이후에 완비된다. 내 도움을 받지만 그러나 사람이 두루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각각 그 능함을 이루어 서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내가 사는 바를 다스리고, 백관은 군주의 교화를 받드는 사람이니, 임무는 크고 작음이 있어, 오직 능한 바 기명과 같은 것이다. 먹으면서 그 일을 태만하게 한다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다. 그러므로 내 감히 하루라도 흙손을 버리고 기뻐하지 않는다. 대저 흙손은 숙달하지 쉬워 힘쓸 수 있고, 또 진실로 성공이 있고, 그 곧음을 취하면 비록 수고롭지만 부끄러움이 없어 내 마음이 편안하다. 대저 힘은 강하여 공로가 있기 쉽고, 마음은 강하여 지혜가 있기 어렵다. 힘을 사용하는 사람은 남에게 부려지고 마음을 사용하는 사람은 남을 부림은 또한 그 마땅함이다. 내 하기 쉽고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가려서 취하고, 내 흙손을 가지고 부귀한 집에 들어감을 꺼린 지 몇 년 되었다. 한 번 이른 사람이 있었더니, 또 가서 방문하면 빈터가 되고, 두 번 이르고 세 번 이른 사람이 있어 가서 방문하면 빈터가 되었다. 그 이웃에 물어보면 혹은 형벌을 탄식하고, 혹은 몸은 이미 죽고 그 자손은 있지 않다하고, 혹은 죽어서 관직에 돌아갔다하니, 내 이것으로 관찰하건대, 이른 바 “먹음에 그 일을 나태하게 하여 하늘의 재앙을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 쓰기를 지혜로서 하되 부족하여 그 재주의 알맞음을 가리지 않고 무릅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행실이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 많고 그 할 수 없음을 알지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차 부귀는 지키기 어려움에 공로를 야박하게 하여 두터이 잔치하려는가? 또 풍성함과 초췌함은 시운이 있어 한 번 가고 한 번 와서 항상할 수 없는 것인가? 내 마음 근심스럽다. 이 때문에 그 힘이 가능한 것을 가려서 실행하니, 부귀를 즐거워하고 빈천을 슬퍼함이 내 어찌 남과 다르겠는가? 또 말하였다. 공로가 큰 것은 스스로 봉양하는 것이 넓다. 처자는 모두 나에게 봉양을 받는 사람이다. 내 능력이 야박하고 공로가 작으니 할 만한 것이 있지 않고, 또 내 이른 바 “노력한다.”것이니, 만약 내 집안을 일으켜 세움에 힘이 부족하다면 마음이 또 수고로울 것이니, 한 봄에 두 가지를 맡음은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능할 수 없다.

내 처음 듣고서는 의심하였고, 또 쫓아 생각하니, 대개 현자이요, 대개 이른 바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충고함이 있으니, 생각건대, 스스로 위함은 지나치게 많고 그 남을 위함은 지나치게 적으니, 그 양주의 도를 배운 사람인가? 양주의 도는 나의 한 터럭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함을 좋아하지 않으니, 대저 사람은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노심초사하는데, 한 번이라도 그 마음을 움직여 그의 처자를 보살핌을 즐거워하지 않는데, 그 마음을 수고롭혀 남을 위함을 즐거워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그 어짊은 세상이 얻지 못함을 근심하고 잃음을 걱정하는 사람이 그 삶의 욕구를 이루어 사악함을 탐하여 도를 잊고 그 자신을 상실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또한 멀 것이다. 또 그의 말이 나를 경계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전기를 지어 스스로 거울삼는다.

 

毛穎傳

 

設虚景摹寫工極古今其連翩跌宕刻畫司馬子長

 

毛穎者 中山人也 其先明眎 佐禹治東方土 養萬物有功 因封於夘地 死為十二神 嘗曰吾子孫神明之後 不可與物同 當吐而生 巳而果然 眀眎八世孫䨲 世傳當殷時 居中山 得神僊之術 能匿光使物 竊姮娥 騎蟾蜍 入月 其後代 遂隠不仕云 居東郭者曰㕙 狡而善走 與韓盧争能 盧不及 盧怒 與宋鵲謀而殺之 醢其家 秦始皇時 䝉將軍恬 南伐楚 次中山 將大獵以懼楚 召左右庶長與軍尉 以連山筮之 得天與人文之兆 筮者賀曰今日之獲 不角不牙 衣褐之徒 缺口而長鬚 八竅而跌居 獨取其髦 簡牘 是資天下其同書 秦其遂兼諸侯乎 遂獵 圍毛氏之族 㧞其豪 載穎而歸 獻俘于章臺宫 聚其族而加束縛焉 秦皇帝使恬 賜之湯沐而封諸管城 號曰管城子 日見親寵任事 穎為人 强記而便敏 自結繩之代 以及秦事 無不纂録 隂陽卜筮占相醫方族氏山經地志字書圖畫九流百家天人之書 及至浮圖老子外國之説 皆所詳悉 又通於當代之務 官府簿書市井貨錢注記 惟上所使 自秦皇帝及太子扶蘇 胡亥 丞相斯 中車府令髙 下及國人 無不愛重 又善隨人意 正直邪曲巧拙 一隨其人 雖見廢棄 終黙不洩 惟不喜武士 然見請 亦時徃 累拜中書令 與上益狎 上 嘗呼為中書君 上親决事 以衡石自程 雖宫人 不得立左右 獨穎 與執燭者常侍 上休方罷 穎與絳人陳玄 弘農陶泓 及㑹稽褚先生 友善 相推致 其出處必偕 上召穎 三人者不待詔 輒俱往 上未嘗怪焉 後因進見 上將有任使 拂拭之 因免冠謝 上見其髪秃 又所摹畫 不能稱上意 上嘻笑曰 中書君 老而秃 不任吾用 吾嘗謂君中書 君今不中書耶 對曰臣所謂盡心者 因不復召 歸封邑 終于管城 其子孫甚多 散處中國夷狄 皆冐管城 惟居中山者 能繼父祖業 太史公曰毛氏有兩族 其一姬姓 文王之子 封於毛 所謂魯衛毛聃者也 戰國時 有毛公毛遂 獨中山之族 不知其本所出 子孫 最為蕃昌 春秋之成 見絶于孔子 而非其罪 及蒙將軍 抜中山之豪 始皇封諸管城 世遂有名 而姬姓之毛 無聞 穎始以俘見 卒見任使 秦之滅諸侯 穎與有功 賞不酬勞 以老見疎 秦真少恩哉

 모영은 중산 사람이었다. 그의 조상은 명시란 토끼였는데, 우임금을 도아 동쪽 땅을 다스리고 만물을 양육하는데 공을 세워 묘 땅을 봉해 받았고, 죽어서는 십이신의 하나가 되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 자손들은 신명의 후예이어서 다른 동물과 같아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자식을 입으로 토하여 낳을 것이다.” 하였다. 그 뒤로 과연 그렇게 되었다. 명시의 팔대 손자가 누이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은나라 때에 중산에 살다가 신선술을 터득하여 빛을 숨기고 물건을 부릴줄 알게 되어, 항아를 훔쳐가지고 두거비를 타고 달로 들어가서, 그의 후손들은 끝내 거기에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게 되었다 한다. 동곽에 사는 자로 준이란 그이 후손이 있었다. 날래고 뜀박질을 잘하여 한로라는 개와 능력을 겨루었는데, 한로가 준을 따르지 못하였다. 한로는 화가 나서 송작이란 개와 모의하여 준을 죽이고, 그 집안사람도 모두 죽여 소금에 절였다 한다.

 진나라 시황 때에 장군 몽념이 남쪽으로 진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중산에 머물면서 장차 큰 사냥을 하여 초나라를 두렵게 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좌우의 서장과 군위를 불러 연산역으로 점을 치니, 하늘과 인문의 점괘를 얻었다. 점치는 자가 축하하기를 “오늘 잡을 것은 뿔이 달린 짐승도 아니요, 이빨이 있는 짐승도 아니요, 갈옷을 입는 족속이니, 입은 언챙이이고 수염이 길며 여덟 구멍에 가부좌를 하고 앉으니, 다만 그 털을 취하면 간독을 이용할 수 있으니, 천하가 그 문자를 통일할 것입니다. 진나라는 마침내 제후들을 겸병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사냥하여 모씨의 집안을 포위하여 그 호걸을 뽑아 모영을 수레에 싣고 돌아와서 포로를 장대궁에서 바치고 그 종족을 모아 속박하였다. 진나라 시황제는 몽념으로 하여금 그에게 탕목읍을 하사하고 관성에 봉하여 호를 관성자라 하고, 날마다 신임과 총애를 가하여 일을 맡겼다.

모영은 사람됨이 기억력이 뛰어나고 민첩하여 결승하던 시대로부터 진나라 일에 이르기까지 편찬하여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고, 음양학과 점무술, 점술과 상술, 의방과 씨족, 산경과 지리지, 자서와 도화, 구류와 백가, 천인의 글과 부도와 노자, 외국의 말에 미치기까지 모두 자세히 하였으며, 또 당대의 사무에 통달하여 관부의 부서와 시정의 재화와 돈에 대한 주기를 상이 부리는대로 따라 하니, 시황제로부터 태자 부소와 호해,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 조고로부터 아래로 국인에 이르기까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사람의 뜻을 잘 따라 정직함과 사곡함과 공교함과 졸함을 일체 그 사람에 따르고, 비록 폐기를 당하나 끝내 침묵을 지키고 일을 누설하지 않았으며, 다면 무사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요청을 받으면 또한 때로 가곤 하였다. 여러 번 중서령에 제수되어 상과 더욱 친하니, 상은 일찍이 중서군이라고 불렀다. 상은 친히 일을 결단하여 저울로 스스로 과정을 정하여 비록 궁인이라 하더라도 좌우에 서있지 못하였으나, 홀로 모영은 촛불을 잡는 자와 항상 모시고 있어서 상이 쉬어야 그만두었다.

모영은 강땅 사람 진현과 홍농의 도홍과 회계의 저선생과 더불어 매우 친하여 서로 추천하고 초치하여 나가고 머물기를 반드시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모영을 부르면 세 사람은 초명을 기다리지 않고 함께 가곤하였으나 상은 일찍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뒤에 진견함을 인하여 상이 장차 일을 맡기려고 하여 먼지를 털고 닦아내자, 인하여 갓을 벗고 사례하므로 상이 보니 그 털이 모지라졌고 또 모획하는 바가 상의 뜻에 걸맞지 못하였다. 상은 웃으며 말하기를, “중서군이 늙어 털이 모지라졌으니, 나의 씀을 맡을 수가 없구나. 내 일찍이 그대를 주서라고 일렀는데, 그대는 이제 글을 쓰기에 합당하지 못한가?” 하였다. 모영은 대답하기를 “신은 이른바 마음을 다하는 자입니다.” 하였다. 인하여 다시는 부름을 받지 못하였고, 봉읍으로 돌아와 관성에서 별세하였다. 그 자손이 매우 많아 중국과 이적에 흩어져 살아 모두 관성을 무릅썼는데, 오직 중산에 사는 자들이 부조의 가업을 계승하였다.

태사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씨는 두 집안이 있다. 하나는 희성이니, 문왕의 아들로 모나라에 봉해졌으니, 이른바 노 위 모 담이라는 것이요, 전국 때에 모공과 모수가 있었다. 다만 중산의 집안은 그 근본이 나온 바를 알 수 없는데, 자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춘추󰡕�가 완성됨에 공자에게 절필을 당하였으나 그 죄가 아니었다. 몽장군이 중산의 호걸을 뽑아 시황제가 관성에 봉하여 세상에 유명하였고, 희성의 모씨는 알려짐이 없게 되었다. 모영은 처음에 포로로 잡혀와 시황제를 뵙고 끝내 임사를 당하여 진나라가 제후들을 멸할 때에 모영이 참여하여 공이 있었으나 상이 공로에 보답하지 못하였고 늙음으로 소원함을 당하였으니, 진나라는 참으로 은혜가 적다 할 것이다.”

 

王遵岩曰通篇將無作有所謂以文滑稽者贊論尤髙古直逼馬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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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0) 2008.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