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문초/한문공문초 권4-2

4-2

황성 2008. 9. 24. 23:03

한문공문초4-2

한문공문초권지4-2.hwp

 


여악주류중승서(與鄂州柳中丞書)

 기미가 고아하여 서한의 문장에 들여도 조착(雕斲)을 기다리지 않는다.


회우(淮右)의 잔당들이 오히려 소굴을 지키니 도적을 포위한 군사가 거의 10만이 눈을 부릅뜨고 힐난하여 스스로 무인이라고 생각하고 법도를 따름을 즐거워하지 않고 오르내리며 기세를 만들어 작위를 훔쳐 스스로 높고 큰 사람이 어깨를 서로 닿으며 땅을 잇되, 한 사람이 북채를 가지고 무리에게 맹세하여 앞으로 나아간 사람을 듣지 못하였다. 다만 날마다 주마로 하여금 와서 상을 요구하고 적을 도와 성세(聲勢)로 삼을 따름이다.

 합하는 서생이니 시서예악을 익히고 인과 의를 닦고 법도를 단속하다가 하루아침에 문을 버리고 무를 취하여 삼군을 고무시켜 나아가게 하고 군려를 벌려놓고 고하여 직접 함께 고생을 겪으며 강개하고 감격하여 함께 아래 군졸과 먹고 2주의 목사를 거느려 사기를 떨치고 타는 말을 베어 죽은 군사를 제사지내니 비록 옛 명장이라도 무엇을 여기에 더할 수 있어리오? 이것은 하늘이 준 충효가 마음에 가득함으로 말미암아 크게 밖에서 일어나 움직임에 모두 기회에 맞아 당세에 승리를 취하여 융신(戎臣)의 스승이 되니 어찌 항상 위포(威暴)의 일을 익혀 그 전투의 위태로움을 즐거워하는 것이겠습니까?

 한유는 진실로 나약하여 쓰임에 알맞지 않아 하풍(下風)을 듣고 가만히 스스로 기운을 더하여 조정의 많은 사람이 많고 모인 가운데에서 자랑을 하니, 까닭에 무부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여 의논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국병을 거느리고 사람의 사명(司命)이 된 자는 저기에 있고 여기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함입니다. 적에 임하여 무겁고 신중하여 가벼이 출입함을 경계하여 진실로 스스로 사랑하여 보고 사모하는 무리의 마음에 부합하니 과연 국가를 위하여 큰공을 세움은 다행이겠습니다.


재여악주류중승서(再與鄂州柳中丞書)


병기를 논함이 마땅히 더욱 전편보다 낫다.


한유는 어리섞어 일의 형세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근자에 항상 생각하기를, 회우(淮右)는 미폐(靡弊)하고 세력을 떨치지 못함으로 삼주(三州)의 지역이 모기와 곤충이 모여 흉수(兇竪)가 후유(喣濡) 음식의 은혜에 감동하여 어린아이의 손을 끌고 당상에 앉아 받들어 장수로 삼아 죽을 힘을 내어 조서에 항거하여 천하의 병사와 싸워 기미를 타고 이로움을 좇아 사방으로 침략하고 포악함을 내고 현읍을 불사르고 죄없는 사람을 죽이니 그 땅을 포위함이 천리이니 그 해독을 입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낙여양형허영회강(洛汝襄荊許潁淮江)등의 고을이 소란스러우니 승상과 공경 사대부가 도모하고 의논함에 수고롭고 병사를 거느린 장수와 웅비 구호의 병사가 두려워하고 나약하며 위축되어 창을 가지고 사졸이 되어 앞으로 나감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없지만 유독 합하는 분연히 솔선수범하여 병사들 주위에서 떨쳐 두 고을의 수령을 거느리고 직접 대오의 사이에 출입하여 사졸과 고생을 같이하고 그 기세를 내어 장군의 봉예가 늠연함을 보고 적에게 향하는 뜻이 있고 유아 문자장구의 일을 사용하여 앞서서 천하의 무부를 취하여 그 입을 닫고 기세를 빼앗는다 라고 하니, 제가 처음 들은 때에 막 음식을 먹는지라 수저를 버리고 일어남을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합하가 진실로 능히 외로운 군대를 끌고 사구와 각축하여 하루아침 요행의 이로움을 다투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가령 이와 같다면 또한 족히 귀중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은 행사에 기미의 마땅함에 알맞아 풍채(風采)에 두려워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앞 편지에 문득 비루한 정성을 서술하였는데 돌아보시고 은혜롭게 손수 쓴 편지로 답장을 해주시니 더욱 두려움을 더합니다. 여러 사람의 마음과 이목을 통일하여 하여금 이르는 것이 시에 알맞은 비와 같게 하니 삼대에 군사를 사용함이 이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합하는 과연 그 말을 채워 게으럼이 없는 것으로 계승하여 형편의 땅을 얻어 갑병이 쓰임이 풍족하면 비록 국가의 옛 잃은 땅이라도 10년에 앉아서 얻을 수 있는데, 하물며 이 작은 도적을 어찌 족히 치아의 사이에 두어 힘써서 마쳐서 그 이름을 기다리면 다행이겠습니다.

 멀리 군사를 징병함에 행자는 기려 이별의 생각이 있고 거자는 원광 소동의 근심이 있고 본군은 음식을 보내고 경비를 번거롭게 하는 어려움이 있고 지주는 고식과 형적의 근심이 많아서 급하게 하면 원망하고 느리게 하면 명을 사용하지 못하여 유기하고 외롭게 매달려 형세가 약하고 또 적과 알지 못하여 적을 임하여 두려워하고 놀라서 공로가 있기 어려우니 만약 토착민을 모집할 것 같으면 반드시 호걸스럽고 용맹한 사람을 얻어 적과 앎이 익숙하여 그 기력이 다한 바를 알고 바라보고 놀람이 없고 향리를 사랑하고 보호하여 스스로 전쟁함에 용감하여 징병이 1만이라도 모집한 수 천만 못하니 합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상에게 들려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헤아리건대 이미 배중승상과 보니 행영의 일의 마땅함을 아끼지 말고 때때로 보여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여소실이습유서(與少室李拾遺書)


곡진하다.


복이 천자의 은혜가 하남의 수령에게 조서를 내려 습유공에게 돈독히 깨우침을 아니, 조정의 선비가 목을 끌어 동쪽으로 바라보기를 마치 상서로운 별과 봉화이 처음 나타는 듯 하여, 앞을 다투어 봄을 유쾌함으로 여긴다. 지금 천자가 인성(仁聖)하여 대소의 일이 모두 재상에게서 나오고 선언(善言)을 즐거워하여 마치 듣지 못하는 듯하였다. 대위에 나아간 이후로 지금 4년에 베푸는 바가 마땅하지 않음이 없고, 근검의 명성과 관대의 정사를 깊은 규방의 부녀와 초야의 소인이 모두 배부르게 듣고 실컫 말하였다.

 한유는 고전에 통하지 못하여 선생 장자에게 청하여 묻건대 세상은 태평의 운수가 아닙니까? 더욱 또 인력으로 이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해가 풍년이 들어 곡식이 남고 좋은 징조가 이르러 마치 기강을 어지럽히는 간사한 사람을 전쟁하지 않아도 잡히고 강량의 흉포한 이가 사라져 두려워하여 바람을 맞이하여 움추린다. 복은 한 가지 일이 이루지 못함이 있으면 정히 스스로 보기를 마치 사람을 이루지 못하는 듯이 하니, 사해가 두르는 바에 한 사람이라도 갑옷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이와 같은 때에 습유공이 빨리 일어나서 천하의 사군자와 이룸을 즐거워하여 향유하지 않으면 이에 시기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 공자가 할 수 없음을 알지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여 자취가 제후에 나라에 이어졌거늘 곧 할 만한 때에 스스로 깊은 산에 숨어 문을 닫고 굳이 거절하니 곧 인의자와는 지킴이 다릅니다. 습유공이 관대를 하고 수레에 나아가 혜연히 기꺼이 와서 쌓은 것을 펼쳐 성덕에 빠진 것을 보충하여 이로움은 시절에 더하고 이름은 장래에 드리움을 생각하리니, 발돋움하여 기다림을 잠시라도 바랍니다. 또 가만히 조정의 의논을 듣으니 반드시 습유공을 일으키려하니, 사자가 감에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곧 하남의 태수가 반드시 행차를 이을 것이니, 습유징군이 만약 이르지 않으면 반드시 높은 직위를 더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사양함은 적고 성취함은 많아 청렴함을 상하고 의를 해침은 습유공이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인이 이에 그 유를 나오게함에 모두 습유공에게 바람이 있으니, 습유공이 혹 일어나지 않아 여러 선인으로 이 사람과 베풀지 못하게 하면 습유공으로 인하여 천자에게 어진 신하를 모두 얻지 못하게 하고 군자에게 현위을 모두 얻지 못하게 하고, 인서(人庶)가 모두 은혜와 이로움을 입지 못하게 하니, 그 해로움이 작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살펴 먼 생각을 하여 힘써 공자의 도에 합하게 함이 매우 다행입니다.

여이비서론소공불태서(與李秘書論小功不稅書)


명변(明辯)이다.


증자가 “소공에 추복을 입지 않는다면 이것은 먼 형제는 끝내 상복이 없는 것이니 옳은가?”라고 말하였다. 정현의 주에 “정으로 정을 꾸짖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선비들이 마침내 이것으로 인하여 소공에 추복을 입지 않는다. 소공복은 가장 많으니 친(親)은 숙부의 하상(下殤)과 적손의 하상과 곤제의 하상이요, 존(尊)은 외조 부모요, 상복(常服)은 종조 조부모이다. 예는 인정에 따르니 상복을 입지 않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옛날 사람은 부역에 시절을 넘지 않아서 각각 서로 더불어 한 나라에 거처하니 그 추복을 입지 않음이 비록 불가하지만 오히려 드물었거늘 지금 사람은 남자는 출사하고 여자는 출가하여 혹 천리의 밖에 있는데 집이 가난하여 부고가 알맞은 시기에 이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소공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항상 많고 소공복을 입는 사람은 항상 드물 것이다. 군자가 군육의 친척에 있어서 죽으면 슬퍼하고 상복을 입는 것이 어찌 밖으로 끌려이겠는가? 그 죽은 소식을 들으면 슬퍼함이 어찌 신고의 죽음에 간여함이 있겠는가? 지금 다만 부고가 재때에 이르지 아니함으로 죽은 소식을 들음이 그 일수를 지났다면 상복을 입지 않는 것이 옳은가? 나는 항상 이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근자에 나가서 다른 사람을 조문함에 그의 안색을 보니 축축히 상이 있는 사람과 비슷하였는데 그 복식은 길복이었다. 그에게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공에 추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다.”고 하였다. 예문이 잔결되고 사도가 전해지지 아니하니 예에 이른 바 ‘추복을 입지 않는다.’라는 것이 과연 추복을 입지 않는 것인가? 별도로 가리키는 것이 있는데 전하여 주를 다는 사람이 그 종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알지 못하겠도다.

 업드려 생각하건대, 형은 도덕이 순수하고 밝아서 몸소 옛 도를 실천하니 이와 같은 유에 반드시 마음에 겪어서 결정하는 바가 있으니 아끼지 말고 보여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여풍숙론문서(與馮宿論文書)


가운데 문장을 논하는 뜻이 있으니 또한 명언에 가깝다.


 초서부(初筮賦)를 보여주시니 실제로 뜻이 있지만, 다만 힘써 문장을 짓는다면 고인도 또한 이를 수 있을 것이지만 곧바로 고인과 비슷하다면 또한 어찌 금인을 얻을 수 이겠습니까?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문장을 지은 지 오래니 매양 스스로 의중에 좋은 것이라고 여기면 사람들이 반드시 싫다고 하고, 조금 뜻에 알맞으면 사람들이 또한 조금 괴이하다하고, 크게 뜻에 알맞으면 곧 사람들이 반드시 크게 괴이하다하니, 때때로 일에 응하여 시속의 문자를 지어 붓을 내림에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였다. 남에게 보여주면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고, 조금 부끄러운 것은 또한 조금 좋다고 말함을 듣게 되고 크게 부끄러운 것은 곧 반드시 크게 좋다고 여기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고문이 곧 어찌 지금 세상에 쓰이겠는가? 그러나 아는 사람이 알아줌을 기다릴 따름이다.

 옛적 양자운이 태현경을 지으니 사람이 비웃거늘 자운이 말하기를,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방해될 것이 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있으면 반드시 좋아할 것이다.”고 하였더니, 자운이 죽은 지 근1000년인데 끝내 양자운이 없으니 탄식할 만 하도다. 그때에 환담이 또한 양웅의 책은 노자보다 낫다고 하니, 노자는 족히 말할 것이 못된다. 자운이 어찌 다만 노자와 더불어 능함을 다투겠는가? 이것은 양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제자 후파가 자못 알아서 그 스승의 책이 주역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러나 후파의 다른 문장은 세상에 보이지 아니하니 그 사람이 과연 어떠한 지를 알지 못할 따름이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작자는 다른 사람이 알아줌을 바라지 않음이 명백하다. 곧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 의혹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을 따름이다.

 족하는 어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근자에 이고가 나에게 문학을 배웠는데 자못 얻은 것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집이 가난하고 일이 많아서 능히 그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다. 장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는 이고보다 많은데 또한 나에게 배웠으니 그 문학은 이고와 서로 우열을 다투니 1,2년 공부를 할 것 같으면 거의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망하게도 그가 시속에서 숭상함을 버리고 적막한 도에 종사하여 당시에 이름을 다투다. 오래도록 말하지 못했다. 다만 족하가 능히 스스로 여기에 나아가기 때문에 다시 발분하여 한 번 말합니다.


답유정부서(答劉正夫書)


한문공이 남에게 글을 짓는 방법을 가르침에 큰 뜻은 모름지기 스스로 수립하여 평범하지 않아서 지금 세상의 사람들에게 기쁨을 취하지 않으니, 이른 바 “스스로 수립하여 평범함으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은 곧 한문공의 본래 면목이다.


한유는 진사 유군에게 아룁니다. 족하가 보내오신 편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가르쳐 주어 이미 두터운 은혜를 받았고, 짐짓 진실로 그러함을 부끄럽게 여기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무릇 모든 진사는 선배의 문하에 있어서 어떻게 가지 않겠으며, 선배가 후배에 대해서 진실로 그 이름을 본다면 어찌 그 뜻에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옴에 대접함은 온 고을의 사대부가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만 한유는 유독 후배를 대접하는 명성이 있다면 이름이 있는 곳에 비방이 돌아옵니다. 와서 묻는 사람이 있거든 감히 정성으로 대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혹자가 문장을 짓는 방법을 물음에 마땅히 무엇을 본받아야 합니까? 하니, 반드시 삼가 대답하기를, “마땅히 옛 성현을 본받아야 한다.”하니, 말하기를, “옛 성현이 지은 책은 모두 존재하지만 말은 모두 같지 않으니 마땅히 무엇을 본받아야 합니까?” 하니, 반드시 삼가 대답하기를, “그 뜻을 본받고 그 말을 본받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문장은 마땅히 쉽고도 어렵다.”고 하니, 반드시 삼가 대답하기를, “어렵고 쉬움은 없고 오직 옳을 따름이다.”라고 하니, 이와 같을 따름이요, 진실로 이것을 함을 열어주고 저것을 함을 금하는 것은 아니다.

 대저 백물이 아침저녁으로 보는 것은 사람이 모두 주목하지 않고, 다른 것을 봄에 미친다면 함께 보고 말을 하니, 문장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한나라 조정의 사람 가운데 능히 문장을 짓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유독 사마상여 태사공 유향 양웅이 최고였다. 그렇다면 공을 씀이 깊은 사람은 그 이름을 거둠이 머니 마치 모두 세상과 오르내리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수립하지 않으면 비록 당시에 괴이하지 여겨지지 않으나 또한 반드시 후세의 전함이 없을 것이다. 족하는 집안의 온갖 물건을 모두 의지하여 사용하지만 그 진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평상의 물건이 아닐 것입니다. 군자가 문장에 대해서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지금 후배가 문장을 지음에 능히 깊이 찾고 힘써 취하여 옛 성현으로 본받는 사람이 비록 반드시 옳지는 않으나, 모름지기 사마상여 태사공 유향 양웅의 무리가 배출됨이 있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부터하고 평상의 무리로부터 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의 도는 문장을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사용한다면 반드시 그 능한 것을 숭상하니, 능함은 다른 것이 아니라 능히 스스로 수립하여 답습하지 않는 것이 이것이다. 문자가 있은 이래로 누가 문장을 짓지 않으리오. 그러나 그 지금에 보존된 것은 반드시 그 능한 것이다. 도리어 항상 이것으로 말할 따름이다.

 한유는 족하에 대해서 외람되게 도를 같이하고 선배이다. 또 항상 그대 부친 급사에게 배워 이미 외람되게 두터운 하사를 받았다. 또 어찌 소유한 것을 진설하여 대답하지 않겠는가? 족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유는 말합니다.


답이익서(答李翊書)


6월 26일 한유는 이생 족하에게 말합니다. 생의 편지에 말이 매우 높지만 그 물음은 어찌 겸손하면서 공손한고. 능히 이와 같다면 누가 생에게 그 도로 말하고자 하지 않으리오. 도덕이 귀의함은 날이 있는데, 하물며 그 밖의 문장에 있으랴? 또한 한유는 이른 바 “공자의 담을 바라보고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니, 어찌 족히 옳고 그럼을 말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생을 위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이 이른 바 입언(立言)은 옳다. 생이 하는 것과 기약한 것은 매우 비슷하고 가까우니, 또한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의 뜻이 남을 이겨서 남에게 취하고자 하는가? 장차 옛날의 입언을 바라는 사람인가? 남에게 이겨서 남에게 취함을 바란다면 진실로 남을 이겨서 남에게 취할 수 있지만 장차 옛날의 입언에 이르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 빨리 이룸을 바라지 말고 형세와 이익에 꾀이지 말아서 그 근본을 함양하고 그 열매를 기다리고 그 기름짐을 더하여 그 빛남을 바래야 하니, 뿌리가 무성한 것은 그 열매가 열리고 기름이 윤택한 것은 그 빛이 빛나고 인의를 갖춘 사람은 그 말이 성대합니다. 또 어려운 것이 있으니 한유가 한 것을 스스로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록 그러나 학문함이 20여년이다. 시작에 3대와 양한의 책이 아니면 감히 보지 않았고, 성인의 뜻이 아니면 감히 보존하지 않아서 처함에 잊는 듯 행함에 빠트린 듯 하였고, 엄연히 생각하는 듯하고 아득히 미혹되는 듯 하였으니, 마음에서 취하여 손으로 씀에 미쳐서 진부한 말을 힘써 제거하여 어긋나서 어렵고, 그 사람을 관찰함에 비웃음이 비웃음이 됨을 알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또 몇 년에 오히려 고치지 않은 이후에 고서의 바름과 거짓과 비록 바르지만 지극하지 않는 것을 알아서 환하게 흑백이 분명하였다. 힘써 제거하여 곧 천친히 얻은 것이 있으니, 마음에 취하여 손으로 씀에 미쳐서 골골하게 오고, 그 사람을 관찰함에 웃으면 기쁨으로 여기고 칭찬하면 근심으로 여기니, 그 오히려 남이 말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또한 몇 년된 이후에 호탕하게 가득찼다. 내 또 그 섞임을 두려워하여 맞이하여 막고 마음을 평정하여 관찰하여 그 모두 순수한 이후에 방자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함양하지 않을 수 없다. 행하기를 인의의 길에서 하고 노닒에 시서의 근원에서 하여 그 길을 미혹시키지 않고 그 근원을 끊지 않아서 내 몸이 죽으면 그친다. 기는 물이요 말은 떠 있는 물건이다. 기가 성대하면 말의 장단과 소리의 높고 낮음이 모두 마땅하지만, 비록 이와 같지만 그 감히 스스로 거의 이루었다고 말하겠는가? 비록 이룸에 가깝지만 그 남에게 쓰임에 무엇을 취하리오. 비록 그렇지만 남에게 쓰이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그릇과 비슷하다. 사용하고 버림은 남에게 달려 있지만, 군자는 그렇지 않아서 마음을 둠에 도가 있고 자기를 행함에 방법이 있어서 등용되면 남에게 베풀고 버리면 그 무리에게 전하여 후세의 법이 되리니, 이와 같은 사람은 그 또한 족히 즐거운가? 그 족히 즐거울 것이 없다. 고인에 뜻을 둔 사람이 드물 것이다. 고인에 뜻을 두면 반드시 지금 세상에 버려지니, 내 진실로 즐겁고 슬퍼하여 자주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은 권면하는 것이요, 감히 칭찬할 만 것을 칭찬하고 내칠만 한 것을 내친 것은 아니다. 나에게 묻는 사람이 많지만, 생각건대 생의 말이 이익에 뜻을 두지 않아서 애오라지 말합니다.


   



答殷侍御書


某月日 愈頓首 辱賜書 周覽累日 ?然?敬 蹙然汗出以慙 愈於進士中 粗?知讀經書者 一來應? 事隨日生 雖欲加功 竟無其暇 遊從之類 相熟相同 不?不學 悶然不見己缺 日失月亡 以至於老 所謂無以自別於常人者 每逢學士?儒 歎息?? 愧生於中 ?變於外 不復自比於人 前者?示新注公羊春秋 又聞口授指略 私心喜幸 恨遭逢之? 願盡傳其學 職事羈? 未得繼請 怠惰因循 不能自彊 此宜在?而不?者 今反謂少知根本 其辭章近古 可令?所注書 ?出非望 承命反側 善誘不倦 斯?多方 敢不?所指 八月益凉 時得休假 ?矜其拘綴不得走請 務道之傳而賜辱臨 執經座下 獲卒所聞 是?大幸 況近世公羊學幾絶 何氏注外不見他書 聖經賢傳 ?而不省 要妙之義 無自而尋 非先生好之樂之 味於衆人之所不味 務張而明之 其孰能 勤勤?? 若此之至 固鄙心之所最急者 如遂?開釋 章分句斷 其心曉然 直使序所注 ?名經端 自託不腐 其又奚辭 將惟先生所以命 愈再拜

 모 월일(某月日)에 한유는 머리를 조아립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며칠 동안 두루 보고 놀라워하며 공경함을 더하고 싸늘하게 땀이 나며 부끄러워하였습니다. 한유는 진사 가운데 조금 경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인데 한 번 과거에 응시한 이후 일이 날마다 생겨서 비록 공부를 더하고자 하나 끝내 시간이 없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친하고 같은 처지인지라 가르치고 배우지 못하니 근심스럽게 스스로 어긋남을 알지 못하고 날로 달로 잃어버려 늙음에 이르니, 이른 바 󰡒����스스로 보통사람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매번 학사와 진유(眞儒)를 만나면 탄식하고 삼가하여 부끄러움이 마음에 생기고 얼굴이 밖에서 붉어져 다시 스스로 남에게 비교하지 못하였다.

 앞서 새로 주석한 <<공양춘추>>를 보여주시고 또 입으로 전해 가르쳐 주시는 지략(指略)을 들으니 저의 마음이 기쁘고 다행스러워서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러워 하고 그 학문을 모두 전수하기를 원했더니, 맡은 일에 매여 간청을 잇지 못하고 게으르고 무기력하여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니, 이것은(저는) 마땅히 물리치고 가르치지 말아야 할 사람이거늘 지금 도리어 조금 근본을 알고 그 문장이 고인에 가까워 주석한 책에 서문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시니, 은혜로움이 바라지 않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서(생각치도 못한 것에서 나옴) 명을 받고 잠을 못들었지만, 잘 가르쳐 주셔서 게으르지 않는 것이 이에 다방면으로 하시니 감히 그 뜻을 깨닫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洪子曰, 자꾸 서문을 쓰라고 다방면으로 권한다는 뜻)

 8월에 더욱 서늘해짐에 그때 (선생께서) 휴가를 얻으시거든, 혹시 (제가) 일에 매여 있어서 달려가 배움을 청하지 않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의 전함에 힘써서 (선생께서) 임해주심을 얻는다면 (저는) 선생의 자리에서 경전을 잡고 듣는 바를 마침을 얻는다면 이것은 큰 다행일 것입니다. 하물며 근세 공양의 학문은 거의 끊기고 하씨의 주 밖에는 다른 책에 보이지 않고 성현의 경전을 물리쳐서 살피지 못하여 요묘(要妙)한 뜻을 어디서부터 찾을 수 없었으니, 선생이 좋아하고 즐거워하여 여러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아서 베풀어 밝히는 데에 힘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부지런하고 정다움이 이와 같이 지극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저의 마음에 가장 시급하게 여기는 것은 경전을 개석(開釋)해 주심을 입어서 장과 구가 (저절로) 나누어 져서 【洪子曰, 동사 목적어의 구조가 아니라 주어 술어의 관계임에 주목! 저절로 나누어 진다는 뜻.】그 마음이 밝아 진다면 곧바로 주를 하신 책에 서문을 써서 이름을 경전의 끝에 걸어서 스스로 불후한 데에 의탁을 하게 될 것이니 그 또한 어찌 사양을 하겠습니까? 선생의 명하신 바 데로 하겠습니다. 【惟는 강조】유는 재배 합니다.

(서문을 안쓰겠다는 말이 아니라, 우선 경전 공부를 좀 시켜주시고, 그 후에 경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서문을 쓰겠다는 말.)


  

答張籍書


籍所遺昌黎書 甚當而昌黎答籍 特氣不相下耳

장적이 한유에게 보낸 편지는 매우 온당하고 한유가 장적에게 답한 것은 다만 기운이 그보다 못하지 않다  (의견분분 홍영샘 송선생님은 못하지 않다 / 회장님 기운을 내린다)


愈始者望見吾子於人人之中 固有異焉 及聆其音聲 接其辭氣 則有願交之志 因?幸? 遂得所圖 豈惟吾子之不遺 抑僕之所遇 有時焉耳 近者嘗有意吾子之闕焉無言意 僕所以交之之道 不至也 今乃大得所圖 脫然若沈?去體 灑然若執熱者之濯?風也

然吾子所論 排釋老不若著書 ??多言徒相?? 若僕之見則有異乎此也 夫所謂著書者 義止於辭耳 宣之於口 書之於簡 何擇焉 孟軻之書 非軻自著 軻?? 其徒萬章公孫丑相與記軻所言焉耳 僕自得聖人之道而誦之 排前二家 有年矣 不知者 以僕?好辯也 然從而化者 亦有矣 聞而疑者 又有倍焉 頑然不入者 親以言諭之 不入則其觀吾書也 固將無得矣 ?此而止 吾豈有愛於力乎哉 然有一說 化當世莫若口 傳來世莫若書 又懼吾力之未至也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吾於聖人?過之 猶懼不及 ?今未至 固有所未至耳 請待五六十然後 ?之 冀其少過也 吾子又譏吾與人人?無實?雜之說 此吾所以??耳 比之酒色不有間乎 吾子譏之似同浴而譏裸?也 若商論不能下氣 或似有之 當更思而悔之耳 博塞之譏 敢不承? 其他俟相見 薄?須到公府 言不能盡 愈再拜


 내가 처음 사람 가운데에서 그대를 바라보니 진실로 특별함이 있었다. (이건 왕호샘이 원래 본데로 보고 싶은데... 여쭤보진 못했어요)

그 음성을 듣고 그 사기를 접함에 미친 즉 교유하기를 원하는 뜻이 있었더니 인연으로(부사) 다행이 만나서 마침내 도모하던 것을 얻었으니 어쩌면 그대가 나를 버리지 않은 것일 뿐이겠는가? 또한 내가 만나는 것이 때가 있을 따름이다. (운이 좋았다)

 근자에 일찍이 그대가 궐연히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생각건대 내가 교유하는 바의 도리가 지극하지 못함이다. 지금 곧 크게 도모한 것을 얻으니(그대가 나를 비판해 줌) 脫然히 마치 오랜 병이 몸에서 사라지는 듯하고 灑然히 마치 뜨거운 것을 잡은 사람이 맑은 바람에 씻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대가 논한 바 󰡒����석씨와 노씨를 배척한 것은 책에 기록하는 것만 못하고 시끄럽게 말이 많은 것은 한갓 서로 비방만 할 것이라고󰡓���� 하니, 나의 견해인 즉 이것과 다른 것이 있다.

 이른 바 著書라는 것은 뜻이 말에 그칠 따름이다. 입에 말하는 것과 책에 쓰는 것을 어찌 가릴 수 있겠는가? (장적은 자꾸 저서로 남기라고 하고 한유는 저서를 안 한다고 함. 그래서 책으로 쓰나, 말로 하나 별 차이가 없다는 말임) 맹가의 책은 맹자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다. 맹가가 이미 죽음에 그 문도 만장 공순추가 서로 더불어 맹가가 말한 것을 기록하였을 따름이다. 내가 성인의 도를 얻어 암송한 때로 부터 앞의 두 석씨와 노씨를 배척함이 오래되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나를 변론을 좋아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배워서 교화된 사람도 또한 있고, 듣고서 의심하는 사람도 또 더욱 많이 있으니 완고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직접 말로 깨우치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의 책을 보더라도 진실로 장차 얻음이 없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치니 (책을 안 쓰니) 내 어찌 힘을 아낌이 있어서 이겠는가? 그러나 어떤 한 말이 있으니, 당세를 교화함은 말 만 한것이 없고 후세에 전함은 책만한 것이 없으니 또 나의 힘이 지극하지 못함을 두려워한다. 삼십에 뜻을 세우고 사십에 의혹되지 않음은 성인에게 내가 (나이가) 지나더라도 오히려 경지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울 것인데 하물며 지금 나이가 40에도 이르지 못하니 진실로 (경지에) 미치지 못하였을 따름이다.


(이부분을 강독시간에는 󰡒����내 성인에게 내가 (나이가) 지났지만 오히려 경지에 미치지 못하여 두려운데 하물며 지금 경지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경지에) 미치지 못하였을 따름이다.󰡓���� 로 하였는데, 참고서를 보니 이때 한유는 40이 안되었으므로 위의 해석처럼 해야함.

다음시간에 말씀드려야지..^^ )


청컨대 5,60이 되기를 기다린 이후에 하여 조금 경지가 지나기를 (나아지기를) 바란다. (이부분도 나는 왕호샘이 본데로 보고 싶은데 홍영샘이 아니래요 ㅜㅜ)


그대도 또 내가 사람과 더불어 실재가 없고 박잡한 논설을 한다고 기롱하나 이것은 내가 장난삼아 하는 것일 따름이다. 주색에 비유하면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그대의 기롱은 함께 목욕을 하면서 옷 벗은 것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 내가 토론을 할때 기운을 낮추지 않는다고 하는 말 같은 경우에는 혹 그러한 점이 있으니 마땅히 다시 생각하여 뉘우칠 따름이다. 도박의 기롱은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점은 서로 만나기를 기다립니다. 저녁에 모름지기 공부에 이르러야 하기에 다 말하지 못합니다. 한유는 재배합니다.

한문공문초권지4-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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