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문초/한문공문초 귄지4

귄지 4-1

황성 2008. 7. 29. 23:45

한문공문초 권지4

여진생서(與陳生書)

한공의 본색이다.

한유는 진생 족하에게 알립니다. 지금 명예를 믿고 현영(顯榮)을 누리는 사람이 지위에 있는 이가 몇 명입니까? 족하는 속히 벼슬을 구하는 방법을 구함에 그 사람에게 하지 않고 곧 나를 방문하니 이것은 이른 바 들음을 귀머거리에게 빌리고 길을 맹인에게 찾음이니, 비록 그 청이 부지런하고 가르침이 성대하나 얻은 사람은 있지 않다. 한유의 뜻이 고도에 있고 또 매우 그 말(고도)을 좋아합니다. 족하의 편지 및 14편의 시를 보니 또한 여기에 있다고 말하나 그 묻는 것은 명예요 사모하는 바는 과거이기 때문에 한유가 그것에 대한 대한을 의심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두터운 뜻을 헛되이 욕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애오라지 족하를 위하여 그 들은 바를 암송한다.
 대개 군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고 하늘에 순종하여 자기를 대우하기를 신(信)으로 하고 어버이를 섬기기를 성(誠)으로 하니, 이른 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병통으로 여긴다는 것은 인의가 내면에 보존되니 저 성현자는 능함을 미루어 넓히나 나는 어둔하여 뭇사람이 되고, 이른 바 하늘에 순종한다는 것은 귀천과 궁핍 영달이 옮에 나의 마음을 평정하여 따르게 하여 그 초심에 누가 되지 않게 함이요, 이른 바 자기를 대우하기를 신으로 한다는 것은 이미 과연 능하지만 사람이 능하지 못하다고 말하더라도 믿지 말며 이미 과연 능하지 못하나 사람이 능하다 하더라도 믿지 말것이니 누구를 믿으리오? 자기를 믿을 따름이다. 이른 바 어버이 섬김을 성으로 한다는 것은 그 마음을 다하여 밖으로 자랑하지 않고 그 질(質)을 먼저하고 그 문(文)을 뒤에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다하여 밖으로 자랑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밖에서 얻은 것으로 부모의 영화로 삼지 않는 것이니, 명(名)과 위(位)를 이르고, 그 바탕을 먼저 한다는 것은 행(行)이요, 그 문채를 뒤에 한다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심이니 그 외물로 공양하는 도리이다. 성(誠)이라는 것은 속이지 않는 이름이다. 밖에서 기다린 이후에 기름이 되어 질에 야박하고 문에 두터이 하니 이것이 그 속이는데 가깝지 않겠는가? 과연 이와 같을진댄 그대가 과명에 급급하여 나아가지 못함으로 어버이의 부끄러움을 삼는 것은 의혹됨이다. 속화(速化)의 방법은 이와 같을 따름이다. 옛날의 학자는 오직 의(義)를 물었으니 진실로 장차 태학에서 배우더라도 한유는 오히려 이 말을 지키면서 관찰할 것이다. 한유는 아뢴다.


여맹동야서(與孟東野書)

두 사람의 정이 처절하다.

족하와 더불어 이별함이 오래되었습니다. 내 마음이 족하를 생각하는 것으로 족하가 나에게 현현(懸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각각 사견(事牽)으로 합치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마다 족하를 보는 것과는 다르니 날마다 함께 처하니 족하는 내 마음의 즐거움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함에 듣는 사람은 누구이며, 내가 선창함에 화답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말이 들리지 않고 선창함에 화답이 없으며, 홀로 가서 무리가 없으니, 이것은 더불어 함께 할 바가 없는 것이 아니겠나? 족하는 내 마음의 즐거움을 아는지? 족하의 재주는 높고 기운은 맑으며 고도를 실행하고 금세에 처하여 밭이 없으면서 입고 먹으며 어버이를 섬기를 두루하여 어김이 없으니 족하의 마음 씀이 부지런합니다. 족하의 처신이 수고롭고 괴롭습니다. 혼혼히 세상과 더불어 서로 혼탁하되 홀로 그 마음이 고인을 쫓아 따르니 족하의 도는 그 나로 하여금 슬프게 합니다. 지난 해 봄에 변주의 난리를 벗어나서 다행히 죽지 않았으니 돌아갈 곳이 없어 마침내 이곳에 왔으니, 주인은 나와 더불어 예부터 아는 사이라 그 궁핍함을 불쌍하게 여겨 나를 부리의 수상에 거처하게 하였더니 가을에 미쳐서 장차 사례하고 떠나가려 할세 만류하여 일을 맡음으로 인하여 묵묵히 이곳에 있은 지가 1년입니다. 금년 가을에 이르러 애오라지 다시 사양하고 떠나가니 강호는 나의 즐거움입니다. 족하와 더불어 마침이 다행입니다. 이습지가 내 죽은 형의 딸에게 장가듦에 기일이 다음 달에 있어 아침저녁으로 마땅히 이곳에 옵니다. 장적이 화주에 있으면서 상에 거하였는데 집이 매우 가난하니 족하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갖추어 아뢰니 이를 수 있으면 속히 도모함이 나의 바람입니다. 


여이고서(與李 書)

번복(飜覆) 변론이 자가의 지위에 채모를 지켰다.

 심부름꾼이 이름에 족하의 편지를 욕되게 하니 기쁨과 부끄러움이 옴이 함께하여 마음에 용납하지 못합니다.
 아. 그대의 말과 뜻이 모두 옳습니다. 복이 비록 공교롭게 말하나 어찌 능히 그 책임을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두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많고 나를 무겁게 여김이 두터워 당시 사람들이 나를 대우하는 정을 헤아리지 않고 그대가 나를 대우하는 뜻으로 나로 하여금 시인(時人)에게 바라게 하였습니다. 복의 집이 본래 가난하고 거듭 공겁(攻劫)을 만나 의복을 얻는 것이 없고 생활을 봉양하는 기구가 없으며 집안 식솔이 겨우 30명이니 이들을 데리고 장차 어는 곳에 돌아가 의탁하겠습니까? 버리고 경사에 들어감이 불가하며 식솔을 데리고 감이 불가하거늘 족하가 장차 무엇으로 나를 위하여 도모하겠습니까? 이것은 한 가지 문제일 따름입니다. 족하는 내가 경사에 들어옴이 진실로 유익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복이 있음을 그대가 오히려 알지 못하는 것이 있거늘 시인이 능히 나를 알 수 있겠는가? 복이 지키는 바를 가지고 몰아서 가사 분주하여 공경 사이에서 엿보아 입을 열어 논의한들 그 어찌 능히 합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복이 경성에 있은 지 8,9년에 취하여 자뢰할 바가 없어서 날마다 남에게 구하여 세월을 보냈으니 당시에 행함에는 깨닫지 못하였더니 지금 생각하니 마치 아픔이 안정된 사람이 아픔이 날 때를 생각함에 어찌 능히 스스로 처리했는 지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지금 나이를 더 먹었는데, 다시 몰아서 하여금 옛 처지에 나아가게 함이 또한 어려울 것이다. 경사에서 귀하게 여기는 바는 명철한 천자가 윗 자리에 계시고 어진 공경이 아래에 있어서 포의(布衣)와 위대(韋帶)의 선비가 도의를 담론할 것이 많아서가 아니겠으며, 복이 그 가운데 황황하여 능히 위로 들리고 아래로 이를 수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 나를 아는 사람이 진실로 적고 알고 서로 아끼며 서로 꺼리지 않는 사람이 또 더욱 적어서 안으로 의지할 바가 없고 밖으로 쫓을 바가 없어 끝내 어찌 할 바 이겠습니까? 아. 그대가 나를 책망함이 진실로 옳으며 나를 사랑함이 진실로 많다. 지금 천하의 사람 가운데에 그대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 요순으로부터 선비가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없다. 그대가 유독 어찌 능히 나로 하여금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어서 그 즐길만 한 바에 거처하게 할 수 있는가? 그대가 말하는 바는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족하고 형세가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이 여기에서 어찌 크게 서로 안다고 여기겠는가? 누누이 항렬을 따르고 역역히 대오를 쫓아 굶주리면 먹고 배부르면 기뻐하는 사람이로대 그 그치고 떠나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이 진실로 복에게 사랑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은 적고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많으니 내 어찌 여기에서 즐거워하리오? 장차 또한 병든 바가 있어서 여기에서 휴식을 구하려 해서이다. 아. 그대는 진실로 나를 사랑하는도다.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이 진실로 옳지만 저어컨대 그대가 때때로 나를 책려할 겨를이 없이 나를 슬프게 여기고 나를 슬프게 여길 겨를이 없이 스스로 책려하고 또 스스로 슬프하는 것이 있다. 미친 이후에 알고 실천한 이후에 어려울 따름이다.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한 그릇의 밥고 한 표주박의 물을 사라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거늘 회야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저 사람은 성인이 있어서 의귀(依歸)하고 또 대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이 있어서 족히 죽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 근심하지 않고 즐거워함이 어찌 쉬운 것이 아니랴? 나와 같은 사람은 의귀할 바가 없고 대그릇의 밥이 없고 표주박의 물이 없어 취하여 의지할 바가 없으니 굶어서 죽음이 그 또한 형편이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나의 말을 들으면 또한 슬플 것이다. 아 그대 또한 그 가는 바를 삼갈 것인저.
 헤어짐이 오래됨에 잠깐 돌아와서 부모님을 좌우에서 모시니 당일 기뻐하였기 때문에 사신을 오로지 하여 그 안부를 달리니 족하는 뜻하건대 아울러 스스로 이해하길 바란다.
여최군서(與崔群書)

대체로 창려가 최군과 더불어 서로 앎이 깊이 때문에 편중에 정곤(情 )이 다른 편지와는 같지 않다.
족하가 동도로 떠남으로부터 무릇 두 차례 편지로 안부를 물었으니 이윽고 이미 선주(宣州)에 이르러 주인이 인현하고 같은 반열의 사람들은 모두 군자이니 비록 기려의 생각을 품으로 또한 짐짓 날을 보내어 들어감에 스스로 얻지 않음이 없음을 아니 낙천(樂天)과 지명(知命)은 진실로 전현이 외물을 막는 바인데, 하물며 족하는 이 무리보다 뛰어남이 백천의 무리이니 어찌 출처와 원근으로 그 영대에 누를 끼치겠는가? 선주는 비록 청량 고상이라 말하지만 모두 대강의 남쪽이니 풍토가 북쪽으로 아우를 수 없으니 장차 휴식하는 방법은 마땅히 먼저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니 마음이 한가로운 연후에 밖의 근심이 들어오지 않고, 풍기가 마땅한 바에 살펴 대비할 수 있다면 사소한 것은 또한 마땅히 절로 이르지 않을 것이다. 족하의 어짊은 비록 궁약(窮約)에 있더라도 오히려 능히 그 즐거움을 고칠 수 없는데, 하물며 땅이 매우 가깝고 관직의 영달과 봉록이 두텁고 친애함이 모두 좌우에 있는 사람에 있어으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족하는 현자인지라 마땅히 상위에 있어야 하거늘 막부에 의탁한다면 알맞은 곳을 얻게 되지 못한다고 여겨서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말을 하니 곧 서로 친중(親重)히 하는 도일 따름이요, 족하를 대우하는 바가 아니다. 복은 젊을 때부터 지금까지 붕우의 사이에서 왕래함에 종사함이 17년이다. 세월이 오래되었고, 더불어 사귀어 왕래하여 서로 아는 사람이 천백인이니 많지 않음이 아니다. 그 서로 더붊이 골육의 형제와 같은 사람이 또한 적지 않으니, 혹 일로서 함께 하고 혹은 재주로 취하며 혹은 한 가지의 선함을 사모하고 혹은 오래됨으로 하며 혹은 처음에는 심히 알지 못하다가 함께 함이 이미 친밀하고 그 뒤에 큰 잘못이 없음으로 인하여 다시 결코 버리지 아니하며, 혹은 그 사람이 모두 선함에는 들지 않지만 자기에 대해서 이미 후덕하니, 비록 뉘우치고자 하나 불가하다. 무릇 여러 미천한 사람은 족히 말할 것이 못되니 깊은 사람은 이와 같은데에 그치고, 마음이 우러러 탄복하는 바에 이르러서는 언행에서 상고하여 하자나 허물이 없고 곤오( 奧)를 엿봄에 두둑을 보지 못하여 명백하고 순수하며 광휘가 날마다 새로운 사람은 최군 한 사람이니, 복은 우매하고 누추하여 깨달은 것이 없으나 성인의 책을 읽지 않은 바가 없으니 그 정추와 거세 출입 명회를 비록 다 알지는 못하지만 또한 그 지류를 섭렵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고 이것으로 헤아려 진실로 족하가 무리들 가운데 빼어남을 아는지라 복이 무엇을 따라 얻는 지를 생각하지 말라. 족하와 더불어 정의를 어찌 모름지기 말한 뒤에 절로 밝겠는가? 말하는 바는 족하가 내 함께 함이 깊은 바의 사람은 대체로 흑백을 마음 속에 두지 않는다고 여길까 두려워서 일 따름이다. 이미 능히 대략 족하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족하가 나를 알지 못함이 또한 지나칠까 두렵다. 근자에 또한 사람이 말하기를 족하는 진실로 진선진미하다고 하지만 오히려 의심할 만한 것이 있다. 복이 이르기를 무엇을 의심하는가? 하니, 의심하는 사람이 군자는 마땅히 좋고 싫음이 있어야 하니, 좋고 싫음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청하(최군의 아버지)는 사람이 누구라도 그의 선함을 말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 사람됨을 탄복하니 이 때문에 의심할 따름이다.하니, 복이 대응하여 말하기를, "봉황과 지초는 누구라도 모두 아름다움의 단서라고 여기고, 청천과 백일은 노예도 또한 그 청명함을 안다. 식물에 비유하자면 먼 지방 별다른 맛에 이르러서는 즐기고 즐기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도(稻) 량(梁) 회(膾) 자( )에 이르러서는 어찌 즐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었는가?"하니, 의심하는 사람이 곧 이해하였다. 이해하고 하지 못함은 최군에 대해서 덜고 더함이 없다. 예부터 현자는 적고 불초한 사람은 많으니, 철든 때로부터 또 현자는 항상 불우하고 불현자는 관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며, 현자는 항상 스스로 보존함이 없고 불현자는 뜻이 가득차고 기운이 얻어졌으며, 현자는 비록 낮은 지위를 얻으면 문득 죽고 불현자는 혹 미수에 이름을 보았으니, 조물주의 뜻이 끝내 어떠한 지 알지 못하니, 좋고 싫음이 사람과 더불어 마음을 달리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또 곧 모두 살펴 기록하지 아니하여 그 사생(死生)과 수요(壽夭)에 맡김이 아니겠는가를 알지 못하니, 알 수 없다. 사람이 진실로 경상의 관직과 천승의 지위를 가벼이 여기고 누항과 채갱을 즐기는 사람이 있으니 함께 사람인데, 오히려 좋고 싫음이 이와 같이 다름이 있는데, 하물며 하늘이 사람과 더불어 마땅히 반드시 좋고 싫어하는 바를 달리함은 의심할 것이 없는데, 하늘과 합일하고 사람과 어긋남이 무슨 방해가 되랴? 더구나 또 때때로 겸하여 얻는 사람이 있음에랴?

 최군 최군 게으러지 말라 게으러지 말라 복은 스스로 온전히 생활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한 관직을 여기에서 종사하여 더욱 곤궁함이 심하여 스스로 이영(伊潁) 가에서 노닒을 생각하니 마땅히 또한 끝내 얻었다. 근자에 더욱 노쇠하고 괴롭고 왼쪽 잇몸 둘째 어금니가 까닭없이 흔들거려 빠지고 눈의 시선이 어둡고 흔들려 평상시에 문득 남의 안색을 분별하지 못하고 양쪽 귀밑머리는 반백이고 두발의 오분에 또한 그 하나가 희며 수염이 또한 한 줄기 두 줄기 흰 것이 있다. 나의 집안은 불행하여 제부와 제형이 모두 건강하나 일찍 돌아가셨으니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장구함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홀홀히 족하와 더불어 서로 보아 한 번 그 회포를 말할 것을 생각한다. 소아녀가 앞에 가득하니 능히 돌아보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족하는 무엇으로 북쪽으로 오리오 복은 강남을 좋아않아 관직이 만료됨에 문득 끝내 숭하(崇下)에서 늙으리니 족하는 서로 나올진댄 복은 떠날 수 없다. 진중히 스스로 사랑하여 음식을 삼가고 사려를 적게함이 오직 이것을 바란다.


 여위중행서(餘衛中行書)
공은 우뚝하게 자립한 곳이 진실로 있다.

 대수(大受) 족하아. 욕되게도 편지를 하사함이 심히 큼니다. 그러나 말한 바는 너무 성대하니 어쩌면 이른 바 "유인하여 여기에 이르고자 한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감당 불감당이라. 그 가운데 하나 둘 가까운 것을 가를 가만히 취한다면 벗과 사귐에 대해서 충성스럽지만 등뒤에서 배반하지 않는 것은 조금 가깝지만 또한 당신의 마음이 좋아하는 바일 따름입니다. 실천함에 게으르지 않음은 감히 스스로 능히 그렇다고 생각하지 못하니, 불감당 불감당입니다. 부귀에 급급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것으로 자임함에 이르러서는 모두 성현의 사업이니 그 지혜가 능히 도모하고 힘이 능히 감당할 있는 사람입을 알 것입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또 어찌 능하겠습니까? 처음 서로 대면한 때에 매우 가난하여 남에게서 입고 먹었더니 그 뒤에 변주( 州) 서주(徐州) 2주에서 봄에 복이 모두 일에 종사하여 날로 달로 들이는 바가 있었으니 전일에 견주면 풍족함이 백 배입니다. 족하가 나의 음식과 의복을 보고 또한 다른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복의 마음은 혹 이것 때문에 급급한 것이 아니다. 그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잊지 않는 바는 또한 장차 조금 뜻을 행하려고 할 따름이니, 이것은 쉽게 갑자기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릇 화복과 길흉이 옴은 나에게 있지 않는 듯하나, 오직 군자가 화를 얻으면 불행으로 여기고 소인은 화를 얻으면 항상함으로 여기며, 군자가 복은 얻으면 항상함으로 여기고 소인이 복을 얻음은 다행이라고 여기니 그 하는 바로 취함이 있는 듯합니다. 반드시 군자는 길하고 소인은 흉하다고 말함은 불가합니다. 현과 불초는 자기에게 달렸고 귀천 화복은 하늘에 달렸고 명성의 선악은 나에게 달렸으니 자기에게 달린 것은 내 장차 힘쓰거니와 하늘에 달렸고 사람에 달린 것은 내 장차 저에게 맡기고 내의 힘을 쓰지 아니할 것이니 그 지키는 바는 어찌 요약하여 쉽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족하가 말하기를 "명의 궁통(窮通)은 나로부터 한다."라 하니, 내 도에 합치하지 않음을 두려워 하니 족하가 앞 세대에서 징험하여 말한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도덕으로 자기의 임무로 삼아 궁통이 옴에 내 마음에 이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가능하다. 황량함에 궁핍하게 거처하여 초목이 무성하여 나감에 말이 없어서 인하여 사람과 끊고 한 집의 안에서 스스로 즐김이 있으니 족하는 내 다시 화란을 벗이남을 기뻐하니 편안하게 거처하며 더디게 옴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여소실이습유서(與少室李拾遺書)

곡진하다.

복이 천자의 은혜가 하남의 수령에게 조서를 내려 습유공에게 돈독히 깨우침을 아니, 조정의 선비가 목을 끌어 동쪽으로 바라보기를 마치 상서로운 별과 봉화이 처음 나타는 듯 하여, 앞을 다투어 봄을 유쾌함으로 여긴다. 지금 천자가 인성(仁聖)하여 대소의 일이 모두 재상에게서 나오고 선언(善言)을 즐거워하여 마치 듣지 못하는 듯하였다. 대위에 나아간 이후로 지금 4년에 베푸는 바가 마땅하지 않음이 없고, 근검의 명성과 관대의 정사를 깊은 규방의 부녀와 초야의 소인이 모두 배부르게 듣고 실컫 말하였다.
 한유는 고전에 통하지 못하여 선생 장자에게 청하여 묻건대 세상은 태평의 운수가 아닙니까? 더욱 또 인력으로 이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해가 풍년이 들어 곡식이 남고 좋은 징조가 이르러 마치 기강을 어지럽히는 간사한 사람을 전쟁하지 않아도 잡히고 강량의 흉포한 이가 사라져 두려워하여 바람을 맞이하여 움추린다. 복은 한 가지 일이 이루지 못함이 있으면 정히 스스로 보기를 마치 사람을 이루지 못하는 듯이 하니, 사해가 두르는 바에 한 사람이라도 갑옷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이와 같은 때에 습유공이 빨리 일어나서 천하의 사군자와 이룸을 즐거워하여 향유하지 않으면 이에 시기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 공자가 할 수 없음을 알지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여 자취가 제후에 나라에 이어졌거늘 곧 할 만한 때에 스스로 깊은 산에 숨어 문을 닫고 굳이 거절하니 곧 인의자와는 지킴이 다릅니다. 습유공이 관대를 하고 수레에 나아가 혜연히 기꺼이 와서 쌓은 것을 펼쳐 성덕에 빠진 것을 보충하여 이로움은 시절에 더하고 이름은 장래에 드리움을 생각하리니, 발돋움하여 기다림을 잠시라도 바랍니다. 또 가만히 조정의 의논을 듣으니 반드시 습유공을 일으키려하니, 사자가 감에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곧 하남의 태수가 반드시 행차를 이을 것이니, 습유징군이 만약 이르지 않으면 반드시 높은 직위를 더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사양함은 적고 성취함은 많아 청렴함을 상하고 의를 해침은 습유공이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인이 이에 그 유를 나오게함에 모두 습유공에게 바람이 있으니, 습유공이 혹 일어나지 않아 여러 선인으로 이 사람과 베풀지 못하게 하면 습유공으로 인하여 천자에게 어진 신하를 모두 얻지 못하게 하고 군자에게 현위을 모두 얻지 못하게 하고, 인서(人庶)가 모두 은혜와 이로움을 입지 못하게 하니, 그 해로움이 작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살펴 먼 생각을 하여 힘써 공자의 도에 합하게 함이 매우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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