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서발/화곡유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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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2008. 7. 17. 10:48

8. 통덕랑 창녕성공 하달(夏達) 묘갈명

 

공의 휘는 하달(夏達), 자는 상언(尙彦), 관직은 통덕랑이다. 성씨의 계보는 창녕에서 나왔는데 고려 중윤 호장 휘 인보(仁輔)를 비조(鼻祖)로 한다. 2세 휘 송국(松國)은 문하시중인데 백행의 근원인 효를 극진히 하여 『효행록』이 있다. 3세 휘 한필(漢弼)은 문하찬성사이다. 4세 휘 군백(君百)은 광정대부 문하평리(門下評理)이다. 5세 휘 리(履)는 문하시랑 우문관 태학사이다. 6세 휘 을신(乙臣)은 정의대부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다. 7세 휘 사홍(士弘)은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 집현전 태학사이다. 8세 휘 만용(萬庸)은 판도판서 보문각 태학사인데 고려 말기에 나라에 충성한 열사(烈士)로서 경덕사(景德祠)에 제향되었다. 9세 휘 경(踁)은 중직대부 의령 현감이다. 10세 휘 자보(自保)는 평시서령(平市署令)이다. 11세 휘 민손(敏孫)은 성균 생원이다. 12세 휘 익동(翼仝)은 훈도이다. 13세 휘 윤(胤)은 집경전 참봉이다. 14세 휘 순(純)은 봉직랑 안릉 참봉이니 증조이다. 15세 휘 안지(安智)는 자가 명보(明甫)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니 적공랑(迪功郞)이고 조부이다. 임진왜란에 백형과 함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佑)가 의병을 모집하는 데 나아가 가문과 국가의 치욕을 씻기를 다짐하여 힘을 합해 공을 세웠으니, 사적이 문행열전(文行列傳)에 실려 있다. 부친의 휘는 수도(壽道), 자는 경복(景福)이니 부사과(副司果)이다. 무신년에 태어나고, 기유년 8월 14일에 돌아가시니 창녕 성산면 정녕 뒷산 선영 아래 제단을 설치하였다. 배위는 순창 설씨 홍(弘)의 따님이니 합단(合壇)하였다. 하달(夏達)을 양자로 삼았다. 생가의 부친은 수창(壽昌), 자는 주성(周聖)이니 통정대부 첨지중추이다. 배위는 숙인 밀양 양씨 의동(義東)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을유년(1525)에 태어나고 정묘년(1567)에 돌아가셨다. 묘소는 청도 각남면 구곡리 골서산 인좌(寅坐)에 있다. 배위는 공인(恭人) 수원 백씨 수채(受綵)의 따님이니 합장하였다.

공은 천품이 우아하고 정직하였다. 배우기에 이르러서는 과정을 따라나아가니 서당의 스승이 칭찬하였다. 정미년에 22세로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관직은 통덕랑이다. 국가의 변란에 공로가 많았다. 생가와 양가에 섬기기를 오직 정성으로 하여 그 뜻을 조금도 거스름이 없었으며 심지(心志)와 구체(口體)를 두루 봉양하였다.

네 아들 가운데 첫째 둘째 셋째 아들은 후손이 없다. 넷째 아들의 휘 남경(南琼), 자는 광현(光顯)이니 갑신년에 태어나고, 정축년 1월 19일에 돌아가셨다. 묘소는 선고의 묘소 아래 인좌에 있다. 배위는 밀양 박씨 경(慶)의 따님이니 합장하였다.

행장을 살펴보고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다음에 명을 붙인다.

 

대대로 빛나는 작위가 있었으니

가문의 명성 고을에 가득하네

고가의 법도를

생각하여 잊지 않았네

실천함에 반드시 삼가고

말을 함에 조리가 있었네

오백 년 남짓 지나도

유풍이 없어지지 않았네

묘소의 모습 거듭 새롭고

문호가 다시 베풀어졌네

정령이 기뻐하니

음덕을 발함이 유장하리라

계미년 11월에 10대손 형(炯)은 삼가 찬술하다.

19. 화곡유고 서

 

옛날 신도자룡(申屠子龍)은 한나라 말기에 양탕(梁碭) 사이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채옹(蔡邕)이 일컫기를 “그 품성이 통민(通敏)하고 어버이 상을 당하여 상례를 극진히 하였으며 안빈낙도하였다.” 하고, 장덕(長德)으로 추중하였으니, 내가 화곡 처사 성공(成公)에 있어서 또한 그렇게 말한다.

공은 구곡의 옛 거처를 버리고 석통으로 옮겨서 노년을 마쳤다. 흉금이 충담(沖澹)하고 질실(質實)하며 행실이 드러나 알려졌다. 어버이가 돌아가심에 묘소에 여막을 짓고 지냈으며, 형님이 병듦에 그 변을 맛보았다. 어린 조카가 어머니를 잃음에 업고 안아서 키워 성립하게 하였다. 아우가 재산을 잃게 되니 뜻을 편안히 하여 정돈하였다. 스승의 가르침은 돈독히 믿고 삼가 지켰으며, 어린 사람 가운데 배우기를 원하는 이가 있으면 마음을 다하여 가르치고 이끌어주었다. 갓을 높이 쓰고 띠를 넓게 둘렀으며 걸음걸이가 법도에 맞았다. 입으로는 떳떳하지 않은 말을 냄이 없었고 일에는 지나친 행동이 없었으니, 보는 사람들이 공경을 일으키지 않음이 없었다. 비록 큰 도적이 나라에 들어와 머리를 깎게 하고 복식을 변하게 하는 변고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저들이 끝내 그 해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공의 시종 자취를 살펴보건대, 외모를 꾸며서 한갓 말만 일삼는 이와 더불어 같은 차원으로 말할 수 없으니, 어찌 오늘날의 참다운 군자가 아니겠는가? 오호라! 슬프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향리의 공정한 평가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여러 해에 문하생과 벗들이 공의 자취를 오래 전하기를 도모해서 서로 자금을 갹출하여 이미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 또 유고를 간행함에 나에게 그 서문을 쓰게 하니, 대개 내가 공과 가까이 살아서 공을 사모함이 깊고 공을 앎이 소상한 까닭이었다. 시와 문장은 비록 공이 평소에 아름답게 지으려고 뜻한 바가 아니지만, 잘 읽는 사람이 이로 인하여 얻음이 있다면 백세의 아래에 거의 비슷하게 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계묘년 4월 상완에 달성 서주현(徐周鉉)은 서문을 쓴다.

 

 

28. 사과공 단비(壇碑) 음기

 

공의 휘는 수도(壽道), 자는 경복(景福), 성은 성씨이다. 관향은 창녕이니, 고려 중윤 호장 휘 인보(仁輔)를 시조로 삼는다. 2세 휘 송국(松國)은 문하시중인데, 백행의 근원인 효가 극진하여 『효행록』이 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의 주벽에 제향되었다. 3세 휘 한필(漢弼)은 문하찬성사이다. 4세 휘 군백(君百)이니 문하평리(門下評理)이다. 5세 휘 리(履)는 문하시랑 우문관 태학사이고 경덕사(景德祠)에 제향되었는데, 공의 16대조이다. 6세 휘 을신(乙臣)은 정의대부 검교 문하시중이다. 7세 휘 사홍(士弘)은 도첨의찬성사 집현전 태학사이다. 8세 휘 만용(萬庸)은 봉익대부 판도판서 보문각 태학사이다. 고려 말기 나라에 충성한 절신(節臣)으로 경덕사에 제향되었고, 또 고려 통일대전 충훈각(忠勳閣)에 제향되었다. 공의 14대조이다. 9세 휘 경(踁)은 중직대부 의령 현감이다. 10세 휘 자보(自保)는 평시서령(平市署令)이다. 11세 휘 민손(敏孫)은 성균 생원이다. 12세 휘 익동(翼仝)은 훈도이다. 13세 휘 윤(胤)은 집경전 참봉이다. 14세 휘 순(純)은 봉직랑 안릉 참봉이다. 15세는 공의 선고이니 휘는 안지(安智), 자는 명보(明甫), 호는 매헌(梅軒)이다. 효자이고 적공랑(迪功郞)이다. 임진왜란에 공로를 세웠으니, 사적이 문행열전(文行列傳)에 실려 있다. 선비는 밀양 양문(楊汶)의 따님이고, 후비는 진주 하천수(河天水)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무신년(1608)에 태어났고, 을유년(1645) 8월 14일에 돌아가셨으니 창년 성산면 정녕리 뒷산 선영 아래에 설단(設壇)하였다.

배위는 순창 설홍(薛弘)의 따님이니 합단하였다.

하달(夏達)을 양자로 삼았는데 하달의 생가 부친의 휘는 수창(壽昌), 자 주성(周聖)이고 통정대부 첨지중추(僉知中樞)이다. 생가 모친은 숙인(淑人) 밀양 손의동(孫義東)의 따님이다.

손자 가운데 첫째는 남석(南碩), 둘째는 남보(南寶), 셋째는 남한(南漢)인데 후손이 없다. 넷째는 휘 남경(南琼), 자 광현(光顯)이니 갑신년에 태어났고 정축년 1월 19일에 세상을 마쳤다. 묘소는 청도 각남면 구곡리 골서곡 선영 아래 인좌(寅坐)에 있다. 남경의 배위는 밀양 박경(朴慶)의 따님이니 합장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설단 연유는 선고 매헌공의 설단 비문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므로 생략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붙인다.

 

전현의 기술이 있으니

아름다운 행적을 알 수 있네.

후손들이 제단을 설치하니

거의 밝게 이르시리라.

 

무자년(2008) 단오절에 11대손 형(炯)은 삼가 찬술한다.

창녕성씨(손왕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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