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문초/한문공문초 귄지3

권 3

황성 2008. 7. 9. 00:05

상고공최우부서

창려공이 만났으나 만나지 못함이 그 편지가 이와같다.

한유의 불초함은 행실이 능히 진실로 취할만 한 것이 없고 자기를 행함이 자못 편벽되어서 시속과 더불어 자태를 달리하여 어리섞음을 안고 미혹됨을 지켜 진실로 진사의 문을 알지 못하여 이에 여러 선비와 더불어 이름을 다투고 득실을 다투어 남이 심히 비루하게 여기는 바를 실행하고 남이 심히 이롭게 여기는 것을 구하여 그 실행함이 불가함을 비록 어리고 어두운 사람일지라도 진실로 압니다.
 만일 집사자는 이것으로 염려하지 않고 궁핍한 가운데에서 구원하여 높고 드러난 윗자리에 앉혔으니 이것은 그 문학이 혹 가능함을 알고 그 사람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지 못함이요. 그 사람이 혹 가능함을 알고 그 시기가 가능하지 않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미 스스로 허물하고 또 집사자가 지키는 것이 남와 달라서 사람이 귀를 닫고 눈에만 맡겨 꽃과 열매가 겸비하지 못한지라 짐짓 나오게 하는 것 있고 짐짓 물러나게 함이 있음을 탄식한다. 또 집사는 처음 문장을 상고한 다음날에 부효한 무리가 이미 서로 더불어 일컬어 말하기를, "아무개는 얻었고 아무개는 얻었다."라고 하니, 그 연유를 물으니 반드시 근원이 있음을 말하였다. 하루 동안에 아홉 번 그 말을 바꾸어서 무릇 진사가운데 이 선발에 응시한 사람은 32명 가운데에 그 말하지 않는 사람은 몇 사람일 따름이요, 한유가 그 무리에 포함되었다. 집사가 이미 명단을 올린 뒤에 3인 가운데 그 2사람은 진실로 전하여 들었으니 꽃과 열매가 겸비한 사람이니 과연 끝내 얻었어 또 오르게 하였고, 그 1인은 곧 들림이 없었습니다. 열매가 꽃과 더불어 어긋나고 행실이 시절과 더불어 어긋나서 과연 끝내 물러나니 이와 같다면 시절이 더불는 바와 시절이 더불지 않는 것이 서로 거리가 멂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가 지키는 것은 끝내 우연아 아니기 때문에 변화할 수 없다. 무릇 경사에 있은 지가 8,9년 되었으나 발은 공경의 대문을 밟지 않았고 이름은 사대부의 입에서 칭송되지 않았더니, 처음에 잘못 지금 상국이 급제시키는 바가 되었으니, 이 때에 오직 염려가 득실로 삼은 것은 진실로 천명에 있고 때를 따르는 것에 있지 않고 한 집에서 부앙하여 고인을 칭송하였더니 지금은 다시 의심할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하늘이 끝내 어떠하며 명이 끝내 어떠한가? 사람으로 말미암는가?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는가? 간알함을 일삼고자 한다면 소서(小書)에 능하지 못하여 투자(投刺)에 곤란함을 근심하고 아첨함을 배우고자 한다면 말이 어눌하고 말이 곧아서 끝내 일이 이루지 못함을 근심하여 다만 그 몸으로 하여금 진중하지 못하여 날을 마치지 못하게 한다. 이 때문에 생각을 수고롭히고 길게 생각하여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시절을 헤아리고 자신을 헤아려 폐연히 돌아가고자 하니, 비록 따르고자 하나 말미암지 못할 따름이다. 또 항상 생각하기를, 옛 사람들은 날마다 진보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은 날마다 퇴보하니, 대저 옛 사람들은 40에 벼슬하여 도를 실천하고 학문을 하여 이미 크게 이루었고, 또 죽음에 이르도록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업과 공덕이 늙을수록 더욱 명철해지며 죽더라도 더욱 빛이났다. 그러므로 시에 말하기를, "비록 노성한 사람이 없으나 오히려 본받을 것이 있다."라고 하니, 노성함을 숭상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즐거운 군자여 덕의 소문이 그치지 않는다."라고 하니, 그 죽더라도 덕음이 없어지지 않음을 이른다. 대저 지금 사람이 이익에 힘쓰고 도를 빠트려서 그 학문이 이름을 취하고 벼슬에 이르고자 할 따름이다. 한 이름을 얻고 한 지위를 얻는다면 그 사업을 버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의 문에 굽실거리기 때문에 그 사업과 공덕이 날마다 없어지고 달마다 사라져서 늙을수록 더욱 어둡고 죽더라도 마침내 망하니, 한유가 지금 26세니, 옛 사람이 처음 벼슬한 나이와는 오히려 14년이 차이가 나니, 어찌 늦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행동함에 쉬지 아니하고 요구함에 죽음에 이르러 지금에 얻지 못하면 반드시 고전에 얻음이 있고 자신에게서 얻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뒷날에 얻음이 있을 것이니, 이것을 사용하여 스스로 보내고 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알림으로 삼으니 집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진실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지금 병통으로 여기는 것은 궁약(窮約)에 있어서 집을 빌리고 종을 부리는 재물이 없고 따뜻한 옷과 넉넉한 음식의 공급이 없어서 말을 몰아 대문을 나섬에 가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사도(斯道)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천명이 속이지 않으니, 어찌 위태로움을 이루며 어찌 곤란함을 이루겠습니까? 저어기 생각건대, 집사는 한유에 대해서 사우의 교분이 없고 오래된 일이 없어 안색과 언어의 정이 없어 마침내 떨쳐서 드러내는 것은 반드시 알아줌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뜻하는 것을 모두 드러내어 감히 숨기지 아니하고, 또 집사가 관청에 있음이 많아서 공사가 아니면 감히 이르지 아니하니 이것은 절하고 봄을 기약하지 못하고 모실 수 있는 것이 때가 없다. 이 때문에 그 말을 펼침이 이와 같으니 집사께서는 살펴주소서.

여맹상서서

 번복(飜覆)하고 변환(變幻)하니 창려의 편지는 마땅히 이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한유는 아룁니다. 관직을 순행하여 남쪽으로부터 돌아와서 길주를 지나다가 오형(吾兄)의 24일 손수 쓴 편지 몇 통을 얻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이릅니다. 가을이 들어섬에 잠자고 먹는 것이 어떻습니까? 엎드려 만복을 바랍니다.
 보내주신 편지에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저에게 제가 근래에 불교를 신봉한다. 라고 하니 이것은 전하는 사람의 망녕됩입니다. 조주에 있을 적에 한 늙은 중이 있어 호를 태전이라 하였는데,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먼 객지에 더불어 얘기할만한 사람도 없었던 터이라서 산으로부터 조주 외성으로 오도록 초청하여 수십 일을 머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실로 육체는 도외시하고 이치를 스스로 내세움으로써 다른 일이나 물건의 침란을 받지 않았었고, 그와 더불어 얘기 할 적에 비록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요컨대 가슴 속에 걸리고 막히는 것이 없었으니 얻기 어려운 상대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서로 왕래를 하게 되었고, 바닷가로 가서 해신을 제사지낼 적에 마침내는 그의 움막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주로 오게 되자 의복을 남겨놓고 작별을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인정이었습니다. 불법을 존숭하고 믿으며 행복과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기기를 “내가 기도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군자들의 행동과 몸가짐에는  자연이 법도가 있게 마련이고, 성인과 현인들의 하신 업적이  모두 책에 적혀 있어서 본받을 수도 있고 배울 수도 있습니다. 우러러는 하늘에 부끄러워할 일이 없고, 굽히어는 사람들에게도 부끄러워할 일이 없으며, 안으로는 마음에 부끄러워할 일이 없습니다. 선을 쌓거나 악을 쌓으면 재앙이나 경사스런 일이 자연스럽게 각각 그 종류를 따라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어찌 성인의 도리를 떠나고 선왕의 법도를 버리고서 오랑캐들의 가르침을 좇아 행복과 이익을 추구할 리가 있겠습니까?  <시경>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의젓하신 군자께서  복을 구하심에 그릇됨이 없도다.”라고 말입니다.  <전>에 또 말하기를 “위협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이익 때문에 마음 고생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설사 부처님이 사람에게 재난이나 행복을 줄 수 있다손 치더라도 도를 지키는 군자로서는 두려워할 바가 아닌데, 하물며 전혀 그러할 리도 없는 데에야 어떻겠습니까? 또한 부처라는 분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그분이 한 일이 군자와 비슷합니까? 소인과 비슷합니까? 만약 군자와 비슷하다면 반드시 도를 지키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재난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소인과 비슷하다면 그의 몸은 이미 죽었고 그 귀신은 신령스럽지 않을 것이며,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밝게 빈 틈 없이 살피고 계시니 혹되었다 할 것입니다. 속일 수도 없을 것인데, 또 어찌 그 귀신으로 하여금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며 세상에 불행과 행복을 마련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의지할 곳이 없거늘 그를 믿고 받든다면 매우 미혹하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저는 불교를 돕지 아니하고 배척한 사람이며 그러한 나름대로의 이론이 있습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지금 천하는 양자에게로 기울지 않으면 묵자에게로 기울고 있다.”하였습니다. 양자와 묵자가 함께 어지럽히어 성현의 도가 분명치 않게 되었고, 성현의 도가 분명치 않으면 곧 윤리가 어지러워지고 법도가 무너지게 될 것이며, 예악이 무너지면 오랑캐들이 횡행하게 될 것이니 어떻게 새나 짐승처럼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르기를, 양자와 묵자를 막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성인의 무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웅이 말하기를, “옛날에 양자와 묵자가 길을 막았었는데, 맹자께서 물리치고 길을 열어 훤하게 하셨다.” 하였습니다. 양자와 묵자가 함께 행해지면서 왕도가 무너지고 수백 년이 지나 진나라에 이르러는 마침내 선왕들의 법도를 망치고 경서들을 태워 없애고 선비들을 땅에 묻어 죽이게 되었으니 천하가 마침내 크게 어지러워졌던 것입니다.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일어나서도 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선왕의 도를 닦고 밝힐 줄 모르다가, 그 뒤에야 비로소 책을 끼고 다니는 것을 금하던 법률을 해제하고 없어진 책들을 좀 구하고 학자들을 부러들임으로써, 경서들을 약간 구하지는 하였으나 모두가 없어지고 빠진 것들이 있어서 열 가운데 두 셋은 없어진 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대부분이 늙어 죽었고 새로운 사람들은 온전한 경서들을 보지 못하여 선왕들의 일을 완전히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각기 자기가 본 것만을 지키어 서로 학문이 떨어져 나가고 어긋나게 되어 합당하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게 되었으니, 요, 순과 삼대 임금들 같은 여러 성인들의 도가 이에 크게 무너져버리어 후세의 학자들로서는 다시 찾아볼 길이 없게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잘 알아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화는 양자와 묵자이 이론이 멋대로 행해지고 있어도 그것을 전혀 금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맹자가 비록 성현이라도 합당한 지위는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연히 말만하였지 실천은 못하는 처지라 비록 말은 절실하나 무슨 보탬이 되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분의 말씀 덕분에 지금의 학자들은 여전히 공자를 높이고 인의를 존중하며 왕도를 귀히 여기고 패도를 천히 여길 줄 알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그 위대한 강령과 위대한 법도는 모두 없어져서 찾아 볼 수 없게 되고 부서지고 썩어서 거둬들일 수 없게 되었으니, 이른바 남은 것이란 백분의 일 정도라 할 것이니 어찌 길을 원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만약에 맹자가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가 오랑캐들처럼 옷깃을 왼편으로 여미고 말도 오랑캐 말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맹자를 존숭하면서 그 분의 공로가 우임금 못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 나라 이래로 여러 유학자들이 조금씩 수정하고 보충함으로써 백 군데에 뚫린 구멍과 천 군데의 종기가 혼란 속에 없어지기도 하였으나, 그 위태로움은 한 가닥 머리카락으로 수 천근의 무게를 �고 있는 모양으로 연이어지면서 점점 소멸되어가고 있는 듯한 형편입니다. 이러한 시국에 거기에다 불교와 도교를 제창하면서 천하의 백성들을 충동하여 이에 따르도록 한다면, 아아, 그건 또한 너무나 어질지 않은 짓입니다. 불교와 도교의 해는 양자와 묵자보다도 더하나 이 한유의 현명함은 맹자에 미치지 못합니다. 맹자도 아직 완전히 망하기 전에 그 형세를 구하지 못하였거늘, 이 한유가 이미 무너진 뒤에 그런 형세를 온전히 돌려놓고자 한다면, 아아, 그것은 또 그 자신의 능력도 헤아리지 못한 위에 또한 그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어서 죽음으로서도 그런 형세를 구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올바른 도가 저로 말미암아 얼마간이라도 전하여지게 된다면 비록 죽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절대로 한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귀신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시고 곁에서 확인하고 계시거늘, 또 어찌 한 번의 실패로 말미암아 스스로 그 올바른 도를 무너뜨리고 사악함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장적, 황보식 같은 사람들이 비록 여러 번 가르침을 주었으나 과연 배반하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떨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욕되어도 인형께서 두터이 돌보아 주고 계시나 말씀대로 따르지 못하고 보니 오직 부끄러움과 두려움만이 더해질 따름이옵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한유는 두 번 절합니다.

  고래의 편지는 사마자장의 답임소경으로부터 이후로 유독 한창려가 공교로운데 이 편지는 더욱 창려의 아름다운 곳이다.

여봉상형부상서서
 봉상의 형부 상서에게 주는 편지
 우양양서와 더불어 같은 뜻이다.

 한유는 재배합니다. 포의의 선비는 몸소 가난에 거처하되 왕공과 대인에게 형세를 빌리지 않는다면 그 뜻을 이룰 수 없고, 왕공과 대인이 공업이 드러나더라도 포의의 선비에게 칭찬을 빌리지 않는다면 그 이름을 넓힐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포의의 선비는 비록 매우 비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왕공과 대인은 비록 매우 존귀하더라도 교만하지 아니하니 그 일의 형세가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 선후가 서로 바탕하는 것이다. 지금 합하께서는 왕의 조아(爪牙)가 되며 국가의 번원(藩垣)이 되어 위엄이 행해지면 가을 서리와 같고 인이 행해지면 봄바람과 같아서 오랑캐들이 병기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고 조정에서는 높이 베개를 베더라도 근심하지 아니 하니, 이것이 어찌 대장부의 평생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며, 어찌 밝은 천자의 이만저만하지 아니한 대우를 저버리는 것이겠는가? 빛나고 빛나며 굳세고 굳세어 공업이 날을 따라 새로워지고 명성이 바람을 따라 흐리니, 마땅하구나! 바다 모퉁이의 담론이 높은 선비를 환호하게 하고 천하에 의를 사모하는 사람을 분주하게 하니, 가람 혹 한 관문에서 치달리기를 원하며, 혹 한 창을 잡아 군주를 당우(唐虞)에 들이며 영토를 하황(河皇)에서 거두기를 원하니, 그런데도 여기에 이르지 아니하는 사람이 대개 또한 말을 두었으니 이르기를, 어찌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매우 두텁지 아니하며 선비를 대우하는 예가 매우 넉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청컨대, 대강 그 일을 말하니 합하께서는 자세히 들어주소서.
 대저 선비가 옮에는 반드시 합하에게 구함이 있으니, 대저 빈천으로 부귀를 구함은 정히 그 마땅합니다. 합하의 재물이 천하에 두루 베풀 수 없으니, 그 사람의 현우를 가려서 후박으로 등급짓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가령 현자가 이름에 합하가 곧 한 번 보고 우자가 이름에 보지 않는다면 현자가 모두 이를 것이고 우자가 날마다 멀어질 것입니다. 가령 우자가 이름에 합하가 천금으로 주고 현자가 이름에 또한 천금으로 주신다면 우자가 모두 이를 것이고, 현자가 날마다 멀어질 것입니다. 선비를 얻는 방도를 구하면 여기에서 다할 따름입니다. 선비의 현우를 구하고자 한다면 정밀하게 보고 넓리 모으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자기에서 정밀하게 관찰한다면 진실로 이미 열 가운데 7,8할을 얻을 것이요, 또 남에게 넓리 구한다면 백 가운데 한둘도 빠트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만약 과연 능히 이 도리로 할 것 같으면 한유는 천하의 종이가 합하의 공덕을 기록하지 못하며, 천하의 금석이 합하의 형용을 칭송하지 못함을 볼 것입니다.
 한유는 포의의 선비입니다. 태어난 지 8세에 글을 읽었고 13세에 문학을 잘하였고 25세에 춘관에서 급제하여 문학으로 사방에 이름이 났고, 전고(前古)의 존망을 일찍이 마음에 겪어 보지 않음이 없었고, 당세의 득실을 일찍이 뜻에 머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항상 생각하기를 천하의 안위는 변방에 있기 때문에 6월에 가서 와서 그 군사를 관찰하여 이 도읍에 이르러서 머뭇거리며 능히 떠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합하의 의를 기뻐하여 섬돌 가에 조금 서서 군자의 위의를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10일 거처하고 감히 나아가지 않는 것은 진실로 좌우에서 먼저 용납하지 아니하여 합하가 뭇 사람으로 본다면 몸을 죽인들 수치를 사라지게 하지 못하는지라 다만 무궁함에서 후회하고 한탄을 함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에 이 편지를 먼저 보내어 그 온 뜻을 서술하니, 합하는 그 미치광이라도 여기지 마시고 예를 대우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응과목시여인서

공중 누락으로 그 스스로 비긴 곳이 기발하고 문장도 또한 기이하다.

 모월 모일 한유는 재배합니다. 천지의 가와 큰강의 가에 괴물이 있으니 대개 범상한 껍질과 비늘의 품류가 짝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물을 얻게 된다면 비바람을 변화시켜 하늘에 오르내리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이 물에 미치지 못한다면 대개 심장척촌의 사이일 따름이니, 높은 산 큰 언덕 넓은 길 절벽이 관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완전히 말라 능히 스스로 물에 이르지 못하여 수달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대개 열 가운데 여덟아홉입니다. 만일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 궁핍함을 불쌍히 여겨 움직여 구르게 함은 대개 한거수일투족의 수로입니다. 그러나 이 물건은 그 무리와는 다른 포부를 지녀, 짐짓 말하기를 '진흙에서 문들어 죽을지언정 내 차라리 즐기거니와, 만약 머리를 숙이고 귀를 붙이며 꼬리를 흔들고 이웃에게 구걸함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 때문에 유력자가 대우함에 익숙히 보고서도 만약 보지 못한 듯하는지라 그가 죽고 삶을 진실로 알 수 없거늘 지금 또 유력자가 있어 그 앞에 서서 애오라지 시험삼아 머리를 들고 한 번 울부짖는다면 어찌 유력자가 그가 궁핍함을 불쌍히 여겨 일거수일투족의 수고를 잊고 맑은 파도로 움직이지 않음을 알겠는가? 그 불쌍히 여김도 명이요, 불쌍하게 여기지 않음도 명이요, 그 명이 있음을 알고서도 짐짓 울부짖는 것도 또한 명이다. 한유는 지금 진실로 이것과 비슷합니다. 이 때문에 그 어리석은 죄를 잊고 이 말을 두었으니 합하는 그 또한 가련하게 살펴주소서.

여진급사서(與陳給事書)

깨끗이 씻은 것이 공교롭고 구절을 고르게 함이 아름다우니 심히 처음 벼슬에 나온 사람에게 유익함이 있다.

 한유는 재배합니다. 한유가 합하(閤下)를 뵌 것이 몇 년 되었습니다. 처음에 또한 일찍이 한 마디 말의 기림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미천하여 의식에 분주하여 아침저녁으로 이어서 뵐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 합하께서는 지위가 더욱 높아져서 문과 담장에서 엿보아 기다리는 사람이 날로 더욱 나아왔습니다. 대저 지위가 더욱 높다면 미천한 사람이 더욱 멀이지고 문과 담장에서 엿보아 기다리는 사람이 날마다 더욱 나온다면 사랑이 넓으나 실정은 전일하지 못합니다. 한유는 도를 더욱 닦지를 못하나 문장은 날마다 더욱 명성이 있이니, 대저 도가 더욱 닦여지지 못한다면 현자가 더불지를 아니하니, 문장이 날마다 더욱 명성이 있다면 함께 나온 사람이 꺼리니 날마다 멀어지는 소원함으로 시작하여 전일하지 못한 바람으로 더하여 더불지 않는 사람의 마음으로 꺼리는 사람의 말을 들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합하의 뜰에는 한유의 자취가 없었습니다. 작년 봄에 또한 일찍이 한 번 좌우에 나아가 배알하니, 따뜻한 그 용모는 마치 그 새로움을 더하는 듯하였고, 신중한 그 말은 마치 그 궁벽함을 근심하는 듯하였습니다. 물러나와 기뻐하여 사람들에서 말해주었습니다. 그 뒤에 동경에 가서 처자식을 취하여 또 아침저녁으로 이어서 뵐 수 없었습니다. 제가 돌아옴에 미쳐서 또한 일찍이 한 좌우에 나아가 배알하니, 아득한 그 용모는 마치 그 근심을 살피지 못하는 듯하였고, 엄한 그 말씀은 마치 그 정을 잇지 못하는 듯 하였습니다. 물러나와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 나아가지 못하였거늘, 지금 석연하게 깨닫고 번연히 뉘우쳐 말하기를, 그 아득함은 곧 그 옴을 잇지 못함에 대한 노여워한 것이요, 그 삼엄함은 곧 그 뜻을 보여준 것입니다. 민첩하지 못한 죄는 도망할 곳이 없어나 감히 마침내 나아가지 못하고 문득 스스로 그 까닭을 소장으로 올리고, 아울러 근자에 지은 {복지부(復志賦)} 이하 10수편을 1권으로 만들드니 권은 표구를 하였고, 송맹교서(送孟郊序) 1수는 생지에 베껴 써서 장식을 더하지 못하였습니다. 모두 해자와 주석을 한 곳이 있어야 하되, 스스로 해명하고 사례함에 급하여 다시 베껴 쓰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였으니, 합하께서는 그 뜻만을 취하고 그 예를 생각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여우양양서(與于襄陽書)

전반부는 괴위함이 넘실넘실 거리고 후반부는 완만하고 처절하다.

7월 3일에 장사랑 수국자사문박사 한유는 삼가 상서합하에게 편지를 올립니다. 선비가 능히 큰 명성을 누리고 당시에 이름이 난 사람은 먼저 이룬 선비가 천하의 바램을 믿고 앞에서 이끌고 선비가 능히 아름다운 빛을 드리우고 후세에 비추는 사람은 또한 뒤에 나오는 선비가 천하의 바램을 믿은 사람이 뒤에서 밀어주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끌어주지 않는다면 비록 아름다우나 드러나지 못하고 뒤에서 밀어주지 않는다면 비록 성대하지만 전해지지 못하니,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 필요로 하지 않음이 없다. 그렇다면 천백년에 곧 한 번 서로 만나는 것이 어찌 윗사람이 끌어당길 만한 사람이 없고, 아랫사람이 밀어 줄만한 사람이 없었어이겠는가? 어찌 그 서로 필요로 함이 성대하나 서로 만남이 소원하다. 그러므로 아래에 있는 사람이 그 능력을 믿고 그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고, 윗사람은 그 지위를 믿고서 그 아랫사람을 돌아봄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높은 재주가 척척한 궁벽함이 많고 성대한 지위가 혁혁한 광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하는 것은 모두 지나침니다. 일찍이 구하지 할지언정 위로 그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고, 일찍이 찾지 않았을지언정 아래로 그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한유가 이 말을 한 것이 오래 되었으나 일찍이 감히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곁에서 듣자하니, 합하는 세상에 다시 없는 재주를 지니고 우뚝히 서서 홀로 실행하고, 도가 방정하며 일이 성실하여 말고 폄에 시대의 변화를 따르지 아니하고 문과 무는 오직 그 사용한 것이니, 어찌 한유가 이른 바 그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후진의 선비가 좌우에서 알아줌을 만남이 있고 문하에서 예우를 얻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찾았으나 얻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장차 뜻이 공로는 세우는 곳에 있고 사업이 군주에게 알리는 오로지 하여 비록 그 사람을 만났으나 예우할 겨를이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어찌 그 마땅히 들어야 하는데 오래도록 제가 듣지를 못했습니까? 한유가 비록 재주롭지는 못하나 그 자처함은 일반사람에게 뒤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하니 합하는 장차 찾았으나 얻지 못한 것입니까? 예사람이 말하기를 '괴로부터 시작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한유는 지금 오직 조석으로 나무하고 밥짓고 종의 노임을 자는 재물, 이것이 위급하나, 합하의 하루 아침의 누림을 위해서 쓰는 것에 불과함이 만족합니다. 만일 나의 뜻이 공로를 세우는 곳에 있고 사업이 군주에게 보답하는 것에 전일하여 비록 그 사람을 만났으나 예우할 겨를이 없다면 한유가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 세상의 착착한 사람은 이미 족히 말할 것이 못되거니와 뇌락(磊落)하고 기위(奇偉)한 당신께서 또 능히 등용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천명의 궁핍합입니다.
 삼가 지난 날 지은 문장 18수를 바치니 만일 한 번 봐주신다면 또한 족히 저의 뜻이 보존된 곳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사부육원외서
 
당나라 때 主司가 선비를 선발함에 시문의 밖에서 또 행의(行誼)를 가리고 문망(聞望)을 채록하였기 때문에 창려가 편지를 씀이 이와같다.

 집사께서 현자를 좋아하고 선을 즐겨서 부지런히 어진 선비를 천거하여 나아가게 하고 시비를 명백하게 함으로 자기의 일로 삼으니, 지금 천하에 한 사람일 따름입니다. 한유가 좌우에서 얻어 모시니 그 발자취가 문장(門墻)의 사이에 이어저서 실당에 오르고 집에서 바라보는 것이 또한 장차 지금에 1년이 되었습니다. 염려가 미침에 문득 스스로 의심하고 외면하지 않아서 그 어리석음을 다하여 그 뜻을 말하고자 하는데, 하물며 집사께서 부지런히 자기의 임무로 여기는 것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도와서 펼치지 못함에 있어서랴? 진실로 스스로 그 말을 채록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알지 못하지만 그 일은 소인이 군자를 섬기는 진심의 도리입니다. 천하의 일이 갑자기 헤아릴 수 없고, 또 집사의 뜻이 혹 기다려서 실천함이 있어, 감히 한 두 마디 말로 하지 못하되, 지금 다만 그 가장 가깝고 간절한 것으로 말할 따름입니다. 집사가 사공사(司貢士)와 더불어 서로 아는 것일 진실로 깊습니다. 저가 집사에게 바라는 것과 집사가 저 사람에게 대우하는 것이 ‘지극하고 간의(間疑)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의 직책이 사람을 얻는데에 있고 집사의 뜻이 어진이를 천거함에 있어서 만일 그 사람을 얻어서 관직을 준다면 이른 바 ‘둘 다 그 구함을 얻어서 그 반드시 따름에 순종한다.’라는 것이니, 집사가 사람을 알아봄이 그 또한 넓을 것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너가 아는 바를 등용하라.”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한유가 아는 것이 또한 말할 만 할 따름입니다. 문장이 뛰어난 사람은 후희와 후진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희의 집안은 개원 연간에 관복을 입고 조회한 사람이 형제 가운데 5,6명 이었습니다. 후희의 아버지에 미쳐서 벼슬하여 현달하지 못하여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습니다. 후희가 형제를 데리고 쟁기를 잡고 들에서 밭을 갈았는데, 땅은 척박하고 조세는 많아서 그 어버이를 봉양하지 못하니, 그가 밭가는 여가에 독서하여 문장 공부하여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벼슬을 구하여 만족함을 취하였으니, 후희의 문장은 서한의 문장을 배워서 지은 것입니다. 진사에 선발된 지 15,6년 되었습니다. 후운장의 문학은 집사께서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그의 사람됨은 순박하고 중후하며 방정하고 진실하여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의 문장은 후희와 더불어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습니다.
 류술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문학은 시를 짓는데에 능하여 문체는 아름답고 생각은 깊습니다. 당금에 예부의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 가운데에 그와 더불어 견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또 주사(主司)의 시험에 응시함을 잘하였고, 그의 사람됨은 온량하고 성신하며 사악하고 속이는 마음이 없고 뜻을 강직하게 하고 용모를 완순히 하며 화평하고 입지가 있어 그가 일을 따름이 고요하고 민첩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드러내고 손가락을 굽혀서 일컬는 것을 믿은 지가 시간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위군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조윤의 조카인데, 그의 문장은 취할만 한 것이 있으니, 그 나아감에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사람됨은 어질면서 재주가 있고 뜻이 강직하고 기운이 온화하여 어진이를 천거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을 즐거워하여 집에 있음에는 자제의 잘못이 없고 경조의 곁에 있어면서 어떤 일을 만남에 문득 간쟁을 하여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그 의리를 따랐으니, 자제 가운데 어진이를 구하여 능히 그 가업을 계승하는 사람은 군옥이 이 사람입니다. 무릇 이 4사람은 모두 마땅히 집사께서 먼저 천거하여 극진히 말하여야 할 사람입니다. 주사가 의심을 한다면 변론을 하고, 묻는다면 알려주고 알지 못한다면 은근하게 말해주어서 이룸이 있기를 기다린 뒤에 그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심기와 장홍과 위지분과 이신과 장후여라는 사람이 있으니, 혹은 문학으로 혹은 실행함이 모두 무리에서 벗어나는 재주입니다. 무릇 이 몇 사람과 함께한다면 사람들의 바램을 거두고 재주의 성실한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사가 의심한다면 더불어 해명하고 묻는다면 그것으로 대답하며, 넓게 찾는다면 그것으로 알려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난 번 육상공이 사공사가 됨에 문장을 헤아림이 매우 상세하였습니다. 한유가 당시에 또한 합격할 수 있었으나 육상공이 사람을 선발함을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뒤 1,2년에 함께 급제한 사람이 모두 빛나게 명성이 있어 그 까닭을 근원하니 또한 보궐인 양숙과 낭중인 왕초의 도움으로 말미암은 것었습니다. 양숙이 천거한 8사람 가운데 실수가 없었고 그 나머지는 왕이 모두 더불어 계획하였으니, 육상공이 문장을 상고함이 매우 자세하였되, 영숙과 왕초를 대우함이 이와같이 하여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양씨와 왕씨가 사람을 천거함이 이와같이 합당하였습니다. 지금 미담으로 여깁니다. 이후로 주사가 능히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람들도 또한 족히 믿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지리멸열하게 들림이 없었습니다. 지금 집사가 사공사와 더불어 서로 믿는 바탕과 계책을 실행하는 도리가 있으니, 애석합니다. 그 잃을 수 없음이여. 지금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오락을 즐거워함으로 일로 여기지만 집사는 묘연히 높이 들어서 깊이 생각하여 국가를 위하여 근본을 세우는 도리가 있어니 마땅히 제가 이 말을 가지고 좌우에 들립니다.  

위인구천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천거를 구하는 편지)

잘 비유함이 도리어 창려의 본색이다.

아무개가 듣건대 나무가 산에 잇고 말이 가계에 있어서 만나서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비록 날마다 천만 명이라도 불재(不材)와 하승(下乘)을 하지 아니할새, 장석(匠石)이 지나면서 흘겨보지 아니하고 백락이 지나면서 돌아보지 않은 연후에 동량의 재목과 뛰어난 발이 아님을 알 것이다. 아무개가 공의 집 아래에 있은 것이 하루가 아니고 또 욕되게 친척의 뒤에 머물렀으니 이것은 장석의 동산에서 태어나서 백락의 마굿간에서 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아줌을 얻지 못하니 가령 보고 아는 사람이 천만 명이나 또한 어찌 족히 말하겠습니까? 지금 다행히 천자가 매 해마다 공경과 대부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선비를 천거하라는 것에 힘입어 아무개와 비등한 사람도 모두 천거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무릅스고 그 말을 올려서 집사에게 누가되게 하니 또한 스스로 헤아리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집사는 그 아무개를 알는 것이 어떠합니까? 옛 사람 가운데 말을 팔았으나 시장에서 팔지 못한 사람이 백락이 말의 관상을 잘보는 것을 알고 따라가서 애원을 하니, 백락이 한 번 돌아봄에 가격이 3배를 뛰었으니 아무개는 그 일과 더불어 자못 비슷합니다. 이 때문에 시종을 말씀드립니다.

대장적여이절동서
(장적을 대신하여 이석동에서 주는 편지)

유독 목망 1절로 감개가 비분하다.

월일에 전 아무개 관직 아무개는 삼가 동쪽을 향하여 재배하여 절동관찰사 중승 이공 합하에게 편지를 붙입니다.
 장적은 듣건대 의논하는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바야흐로 지금에 고방백(古方伯)의 관찰사의 지위에 맡아서 한 방향에 앉아서 그 경계 안을 오로지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합하의 심사가 낙락하여 시속의 무리들과 더불어서는 같지 않다.라고 하니, 장적이 진실로 가슴속에 품고 있었더니, 근자에 합하께서 협률 이고에게 종사하여 경사에 이르렀으니, 적이 이군에 대해서 벗입니다. 보지 못한 지가 6,7년이었더니, 그가 이르렀음을 듣고 달려가서 문안을 살피고 무고함을 묻는 이외에는 한 마디 말을 낼 겨를이 없었고, 또 그가 어진 주인을 얻음을 하례하였는데, 이군이 말하기를, "그대가 어찌 다 알겠는가? 내 장차 다 말하리라."하였다. 몇 일 뒤에 장적이 듣지 못하는 바를 듣고, 장적이 사사로이 홀로 기뻐하여 항상 지금으로부터 이후로 다시 옛사람과 같은 사람은 잊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더니, 지금에 홀연히 그런 사람이 있되, 물러나서 스스로 불행하여 두 눈이 사물을 보지 못하니 천하에 무용지물임을 슬퍼하였다. 가슴속에 비록 지식이 있으나 집안은 재산이 없어 작은 걸음이라도 스스로 이를 수가 없으니 지금 이중승과의 거리가 5천리입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의 몸을 그 사람의 곁에 이르게 하여 입을 열어 한 번 가슴속의 특별함을 쏟아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음읍으로 인하여 능히 말하지 못하였더니, 이미 몇 일 뒤에 다시 스스로 분발하여 말하기를,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곧 마땅히 눈이 어두운 것으로 무시당하거니와 능력이 있는 사람은 비록 맹인이나 마땅히 시속의 무리에게는 무시당하고, 고인의 도를 실행하는 사람에게는 무시당하지 않는다."하였습니다. 절수의 동쪽 7주(州) 가운데에 집의 숫자가 수십만에서 내려가지 아니하니, 맹인이 아닌 사람을 어찌 한계가 있겠습니까? 이중승이 사람을 취함이 진실로 마땅히 그 현명함과 불현을 묻고 응당 그 맹과 불맹은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지금 마음으로 어두운 사람은 모두 이것이로되 장적과 같은 사람은 스스로 이르기를 홀로 눈에서 어두울 따름이요, 그의 마음은 능히 시비를 분별하니, 만약 앉는 것을 하사하여 물으신다면 그의 입은 진실로 능히 말합니다. 다행히 죽지 아니함에 진로 한 번 가슴속 평생의 식견을 토로하고자 하노니, 합하께서는 능히 믿고 문하에 이르게 하겠습니까? 장적이 또 고시에 능하니 그의 마음으로 하여금 의식의 어지러움을 근심하지 않게 하고, 합하께서 한가로운 때에 한 번 좌석곁에 이르게 하여 하여금 꿇어앉아 그가 소유한 것을 펼치게 하고, 합하께서는 책상에 기대어 듣는다면 반드시 악기를 연주함을 듣는 것만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맹인은 일이 한결 같으니 기예에 반드시 정밀합니다. 그러므로 악공은 모두 맹인입니다. 장적이 행여 이 무리와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 장적으로 하여금 진실로 처자를 기르고 굶주림과 추위를 근심하는 것으로 심란하게 하지 않고 재산을 두어 의학으로 치료하게 한다면 그 눈이 어두운 것은 심하지 않아서 거의 다시 천지와 일월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인하여 폐하지 않게 한다면 지금으로부터 죽는 날까지는 모두 합하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합하는 이미 끊어진 나이를 구제하고 이미 어두운 시각을 하사하면 그 은혜의 경중 대소을 장적이 마땅히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합하는 헤아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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